주님과의 대화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10. 주님과의 대화) / 본문 : 마 22:16, 요 1:14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어린 아들이 “엄마, 나 선생님 말씀을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이 다 빨아들이고 올께요.”하고 학교를 들어갔습니다. [이 아들이 어떻게 성장했는지는 뒤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이 다 빨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이란에서 무슬림 출신 개종자가 초등학교 때 경험한 일이라고 합니다. 그는 수업시간에 선생님에게 “알라(Allah)께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전능한 분이라는 것이 정말인가요?”라는 질문을 했답니다. 그 때 선생님은 눈을 휘둥그렇게 치켜 뜨고는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너 어쩌자고 감히 알라를 의심하는 거냐 큰일을 당하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냐”하고 윽박지르면서 모두들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며칠 전에도 이웃 마을의 어느 초등학교에서 알라를 의심한 학생이 있었는데 그는 며칠 있다가 교통사고로 죽었으며 옆 동네에 사는 어떤 여학생이 알라를 의심하다가 즉시 암에 걸려서 병원에 실려 가서 수술 받다가 죽었다. 그러므로 내일 아침에 성한 몸으로 일어나고 싶으면 절대로 알라를 의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알겠나” 하더랍니다. 그 이후에는 아무도 묻는 아이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슬람이라는 말은 복종이라는 말입니다. 묻지 말고 계시가 내려왔다고 하면 그냥 믿으라는 것입니다. 질문이나 의심을 하면 이미 무슬림(복종하는 자)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집트의 독실한 무슬림 집안에서 태어나서 12살 때 이미 코란을 모두 암송했던 마크 가브리엘(가명)이라는 신동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슬람의 하버드 대학이라고 하는 카이로의 알 아즈하르 대학에서 이슬람의 역사와 문화를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그 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하면서 중동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이슬람을 강연하던 사람입니다.
그가 어느 날 “이슬람의 알라가 과연 기독교의 하나님과 같은 신인가?”하는 의문을 품게 되었는데 이를 눈치 챈 대학에서는 그의 교직을 박탈하고 그 날 즉시 비밀경찰에 체포되어 일주일간을 고문당하면서 취조 받았다고 합니다. 이것이 의심을 가진 대가였고 그는 그 때부터 이슬람을 떠나 성경을 읽고 기독교인이 되었는데 여러 차례 죽음의 위협을 받았고 결국은 외국으로 도망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이슬람에서는 의심이 이렇게 무서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코란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여, 여러 가지의 일을 물어서는 안 된다. 너무 분명히 알고 보면 오히려 해가 될 것도 있다. …(중략)… 너희들 이전에도 어떤 백성이 이런 종류의 문제에 대해 물었다. 그러나 그들은 곧 믿음을 잃고 말았다.” “믿는 자들이여 분명한 것은 묻지 말라 했으니 그것이 오히려 해롭게 하느니라. 또한 꾸란이 계시되는 것을 묻는다면 이는 더욱 너희들에게 해악이라. 그러나 알라는 지나간 것을 용서하시니 알라는 관용과 자비로 충만하심이라. 너희 이전의 한 무리가 그러한 질문을 하였으니 그들은 그로 인하여 불신자들이 되었노라.”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이슬람의 무슬림들과 같이 믿음을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마치 무슨 일이 잘 안되면 “오늘 새벽기도 안나가서 이렇게 되었나” 라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그래도 이런 생각을 할 즈음이 되면 믿음이 싹트는 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예 믿음이 없는 사람은 이런 생각도 안 하지요. 하나님이 우리의 눈과 귀를 다 막아 놓으시고 아무 질문도 못하시게 하고 무조건 믿으라고 하실 까요? 기도는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일방적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하나님께 묻기도 하고 심지어는 토론도 하는 것입니다. 만일 부모가 자녀에게 아무것도 묻지 말고 내 말만 따르라고 한다면 처음에는 복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스스로 생각할 즈음에는 부모님의 말에 복종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지만 오늘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와 대화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아멘.
마가복음 11:22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아침에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고 가셨는데 저녁때 보니 무화가 나무가 말라 죽어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본 베드로가 예수님께 무화과나무가 말라죽었다고 할 때 예수님이 대답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실 때 원문으로 보면 “하나님의 믿음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믿음이 아닙니다. 왜 성령께서 도와 주시지 않으면 믿음이 안 생긴다고 합니까? 우리의 방법으로, 생각으로는 믿음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믿음”만이 우리를 살려내십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과 대화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처음에 들었지만 나중에 사단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 어려워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타락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떠났지만 하나님은 노아의 음성을 듣고, 노아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한 노아는 인류의 새로운 시조가 된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아담은 폐하시고 노아를 세우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 사람을 찾으시고 또 그를 통해서 인류의 역사를 만들어 가십니다.
아브라함이 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십계명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따라간 모든 사람이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에서 마치신 것이 아니라 더 큰 축복을 주시기 원하셨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만민 중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여 뽑으셨습니다(신 10:15).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으로 더불어 만민중에 하나님을 알리기를 원하셨습니다(대상 16:8, 24).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의 말씀을 떠났고 만민중에 흩어졌습니다(신 28:64). 흩어지는 일이 두 가지인데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흩어지게 되었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흩어진 민족입니다.
“그 영광을 열방 중에, 그 기이한 행적을 만민 중에 선포할지어다”(대상 16:24, 시 96:3)하신 말씀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예수님을 예언하기를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거로 세웠고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를 삼았었나니”(사 55:4)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두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관점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바로 이스라엘 민족이 그동안 감당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이 역할을 예수님에게 위임하여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줄곧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가 있고 자신은 그 아버지의 명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요 6:44, 요 10:18, 요 11:42).
둘째는 우리의 관점입니다. 본문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동안 구약에서는 음성으로만 그들과 대화 하셨습니다. 그것도 잠깐씩 대화한 것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축복을 받았고 하나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거하시게 된 예수님은 그것으로만은 불충분했으며 우리와 대면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친히 내려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한 질문은 모두 225번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예수님께 한 질문은 모두 103번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배나 더 많은 질문을 하셨습니다. 이 질문들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무 생각 없이 무조건 복종하라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렇게 많은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생각을 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많은 질문을 하신 것은 우리와 대화를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질문을 통해서 대화의 접촉점을 찾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주님께 간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신 것입니다. “방귀뀐 놈이 성낸다”고 죄를 짓고 꽁하고 있는 우리에게 주님이 먼저 화해의 손을 내미신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고백처럼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마 3:14)
진지한 대화를 원하시는 예수님
대화를 위한 질문
전에 요한을 따랐던 두 명의 제자들에게 “무엇을 구하느냐?”(요 1:38)고 물으셨으며, “물 좀 달라”(요 4:7)고 청하셔서 사마리아 여인과 멋진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낙심하여 엠마오로 향하던 두 제자에게 “너희가 길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눅 24:17)고 질문하심으로 대화를 시작하셨고, 부활 후에 고기를 잡고 있던 열한 제자에게 “애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요 21:5)고 물으셨습니다.
동의를 구하는 질문
예수님은 질문을 통해서 듣는 자들이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이런 동의를 얻음으로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믿을 수 있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시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마 10:29). “너희 중에 어느 한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마 12:11).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눅 6:39).
[앞에서 이어짐]
그 뒤 아들은 어엿이 자라 의과대학생이 된 아들이 다음날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아들의 무슨 행동이 그리 못마땅했는지 훈계를 하고 있었고, 아들은 그저 열심히 경청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멀리서 부자의 모습을 보며 초조해졌습니다. ‘내일이 시험인 아들을 붙들고 웬 말이 저리도 많으실까, 이제 그만 하시지… ‘
나는 이제나저제나 하며 남편의 얘기가 끝나기만 기다렸습니다. 5분, 15분, 20분 이제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슬며시 남편 옆으로 다가갔습니다. “사람이 사회생활을 하려면 역시 성적이 좋아야 인정받는다구, 학교성적은 어디나 따라다니거든, 그러니까…” 남편의 말이 영 끝날 것 같지 않았습니다. 나는 톡 쏘아 주고 싶었습니다.
“여보, 그 얘기 백 번도 더 들었어요. 그만 좀 하세요. 내일 시험 볼 아들 붙잡고 겨우 그런 말씀을 해야겠어요?” 하고.
그러나 섣불리 끼여들기가 뭐해서 할말을 궁리했습니다. ‘여보, 당신 그 말 열 번째 하고 있네요, 아니야, 두 번? 다섯 번? 나는 생각하고 생각해서 드디어 말문을 열었습니다.
“여보, 얘기 중에 죄송한데요. 당신 지금 하는 말 얘기 여섯 번째 듣는 것 같아요” 그때 아들이 말했습니다.
“어머님, 중요한 얘기는 반복해 들어도 됩니다” 나는 웃음이 나왔습니다. 통쾌했습니다. 남편도 통쾌한 듯 크게 웃었습니다.
아들도 시원한 듯 함박꽃처럼 웃었습니다. “그래, 그만 들어가 봐라” 남편이 아들을 놓아주었습니다.
나는 내 아들이지만 존경스러웠습니다. 그 일이 있은지 얼마 안되어 기회를 보아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내 아들이지만 이 엄마는 너를 한없이 존경한단다. 어쩌면 그 순간에 그렇게 적절한 말을 할 수 있었니?”
아들은 나를 꼬옥 껴안으며 말했다. “어머님, 저는 어머님의 아들입니다.” ‘아, 아들의 말 한마디가 이렇게 나를 행복하게 하다니… ‘ 마크 트웨인은 ‘멋진 칭찬을 들으면 그것만 먹고도 두 달은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믿음의 표현을 하도록
주님은 다섯 차례에 걸려 믿음의 표현을 하도록 질문을 사용하셨습니다.
두 명의 소경에게 “내가 능히 이 일을 할 줄 믿느냐?”(마 9:28).
열 두 제자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5, 막8:29, 눅9:20).
고쳐 주신 두 명의 소경에게 “네가 인자를 믿느냐?”(요 9:35)
마르다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빌립에게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요 14:10)
사람들의 질문
예수님은 사람들의 질문에 대해 다양한 반응을 보이셨는데 가야바로부터 질문을 받았을 때(마 26:62), 유대인 인들로부터 질문을 받았을 때(마 26:68), 빌라도의 질문들 중에(마 27:13, 요 18:38, 19:9) 대답하지 않은 것이 있을 뿐이었습니다(눅 23:9). 이 질문들은 예수님의 굳이 필요치 않은 질문을 한 사람들의 진실성이 없고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를 작정하신 터라 굳이 대답이 필요치 않은 것입니다. 이 경우를 제외하고는 항상 진지하고 거리낌없이 응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을 찾아주시기 위해서 질문을 하신 반면 사람들은 예수님께 곱지 않은 질문들을 했습니다.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요 4:12). “너는 우리의 조상 아브라함보다 더 크냐?”(요 8:53). “왜 제자들이 안식일을 범하고 손을 씻지 않고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느냐”(눅 6:2, 막 2:24, 마 15:2).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요 8:19). “네가 무슨 권세로 이 일을 하느냐?”(마 21:23, 막 11:28, 눅 20:2). “안식일에 병 고치는 일이 옳으니이까?”(마 12:10)라는 식의 많은 질문들이 쏟아졌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시지 않았다면 상상도 못할 일들이 벌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사람들 사이를 파고들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와 진지한 대화를 나누시기를 원하십니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요 18:37) 영생에 관하여, 사랑에 관하여, 아버지 하나님에 관하여 오늘도 주님은 우리와 대화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아름다운 대화를 나누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마 1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