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과의 대화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10. 주님과의 대화) / 본문 : 마 22:16, 요 1:14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어린 아들이 “엄마, 나 선생님 말씀을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이 다 빨아들이고 올께요.”하고 학교를 들어갔습니다. [이 아들이 어떻게 성장했는지는 뒤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이 다 빨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이란에서 무슬림 출신 개종자가 초등학교 때 경험한 일이라고 합니다. 그는 수업시간에 선생님에게 “알라(Allah)께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전능한 분이라는 것이 정말인가요?”라는 질문을 했답니다. 그 때 선생님은 눈을 휘둥그렇게 치켜 뜨고는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너 어쩌자고 감히 알라를 의심하는 거냐 큰일을 당하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냐”하고 윽박지르면서 모두들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며칠 전에도 이웃 마을의 어느 초등학교에서 알라를 의심한 학생이 있었는데 그는 며칠 있다가 교통사고로 죽었으며 옆 동네에 사는 어떤 여학생이 알라를 의심하다가 즉시 암에 걸려서 병원에 실려 가서 수술 받다가 죽었다. 그러므로 내일 아침에 성한 몸으로 일어나고 싶으면 절대로 알라를 의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알겠나” 하더랍니다. 그 이후에는 아무도 묻는 아이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슬람이라는 말은 복종이라는 말입니다. 묻지 말고 계시가 내려왔다고 하면 그냥 믿으라는 것입니다. 질문이나 의심을 하면 이미 무슬림(복종하는 자)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집트의 독실한 무슬림 집안에서 태어나서 12살 때 이미 코란을 모두 암송했던 마크 가브리엘(가명)이라는 신동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슬람의 하버드 대학이라고 하는 카이로의 알 아즈하르 대학에서 이슬람의 역사와 문화를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그 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하면서 중동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이슬람을 강연하던 사람입니다.
그가 어느 날 “이슬람의 알라가 과연 기독교의 하나님과 같은 신인가?”하는 의문을 품게 되었는데 이를 눈치 챈 대학에서는 그의 교직을 박탈하고 그 날 즉시 비밀경찰에 체포되어 일주일간을 고문당하면서 취조 받았다고 합니다. 이것이 의심을 가진 대가였고 그는 그 때부터 이슬람을 떠나 성경을 읽고 기독교인이 되었는데 여러 차례 죽음의 위협을 받았고 결국은 외국으로 도망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이슬람에서는 의심이 이렇게 무서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코란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여, 여러 가지의 일을 물어서는 안 된다. 너무 분명히 알고 보면 오히려 해가 될 것도 있다. …(중략)… 너희들 이전에도 어떤 백성이 이런 종류의 문제에 대해 물었다. 그러나 그들은 곧 믿음을 잃고 말았다.” “믿는 자들이여 분명한 것은 묻지 말라 했으니 그것이 오히려 해롭게 하느니라. 또한 꾸란이 계시되는 것을 묻는다면 이는 더욱 너희들에게 해악이라. 그러나 알라는 지나간 것을 용서하시니 알라는 관용과 자비로 충만하심이라. 너희 이전의 한 무리가 그러한 질문을 하였으니 그들은 그로 인하여 불신자들이 되었노라.”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이슬람의 무슬림들과 같이 믿음을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마치 무슨 일이 잘 안되면 “오늘 새벽기도 안나가서 이렇게 되었나” 라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그래도 이런 생각을 할 즈음이 되면 믿음이 싹트는 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예 믿음이 없는 사람은 이런 생각도 안 하지요. 하나님이 우리의 눈과 귀를 다 막아 놓으시고 아무 질문도 못하시게 하고 무조건 믿으라고 하실 까요? 기도는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일방적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하나님께 묻기도 하고 심지어는 토론도 하는 것입니다. 만일 부모가 자녀에게 아무것도 묻지 말고 내 말만 따르라고 한다면 처음에는 복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스스로 생각할 즈음에는 부모님의 말에 복종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지만 오늘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와 대화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아멘.

마가복음 11:22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아침에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고 가셨는데 저녁때 보니 무화가 나무가 말라 죽어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본 베드로가 예수님께 무화과나무가 말라죽었다고 할 때 예수님이 대답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실 때 원문으로 보면 “하나님의 믿음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믿음이 아닙니다. 왜 성령께서 도와 주시지 않으면 믿음이 안 생긴다고 합니까? 우리의 방법으로, 생각으로는 믿음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믿음”만이 우리를 살려내십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과 대화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처음에 들었지만 나중에 사단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 어려워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타락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떠났지만 하나님은 노아의 음성을 듣고, 노아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한 노아는 인류의 새로운 시조가 된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아담은 폐하시고 노아를 세우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 사람을 찾으시고 또 그를 통해서 인류의 역사를 만들어 가십니다.
아브라함이 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십계명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따라간 모든 사람이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에서 마치신 것이 아니라 더 큰 축복을 주시기 원하셨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만민 중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여 뽑으셨습니다(신 10:15).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으로 더불어 만민중에 하나님을 알리기를 원하셨습니다(대상 16:8, 24).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의 말씀을 떠났고 만민중에 흩어졌습니다(신 28:64). 흩어지는 일이 두 가지인데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흩어지게 되었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흩어진 민족입니다.
“그 영광을 열방 중에, 그 기이한 행적을 만민 중에 선포할지어다”(대상 16:24, 시 96:3)하신 말씀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예수님을 예언하기를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거로 세웠고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를 삼았었나니”(사 55:4)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두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관점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바로 이스라엘 민족이 그동안 감당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이 역할을 예수님에게 위임하여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줄곧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가 있고 자신은 그 아버지의 명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요 6:44, 요 10:18, 요 11:42).
둘째는 우리의 관점입니다. 본문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동안 구약에서는 음성으로만 그들과 대화 하셨습니다. 그것도 잠깐씩 대화한 것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축복을 받았고 하나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거하시게 된 예수님은 그것으로만은 불충분했으며 우리와 대면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친히 내려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한 질문은 모두 225번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예수님께 한 질문은 모두 103번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배나 더 많은 질문을 하셨습니다. 이 질문들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무 생각 없이 무조건 복종하라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렇게 많은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생각을 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많은 질문을 하신 것은 우리와 대화를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질문을 통해서 대화의 접촉점을 찾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주님께 간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신 것입니다. “방귀뀐 놈이 성낸다”고 죄를 짓고 꽁하고 있는 우리에게 주님이 먼저 화해의 손을 내미신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고백처럼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마 3:14)

진지한 대화를 원하시는 예수님

대화를 위한 질문
전에 요한을 따랐던 두 명의 제자들에게 “무엇을 구하느냐?”(요 1:38)고 물으셨으며, “물 좀 달라”(요 4:7)고 청하셔서 사마리아 여인과 멋진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낙심하여 엠마오로 향하던 두 제자에게 “너희가 길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눅 24:17)고 질문하심으로 대화를 시작하셨고, 부활 후에 고기를 잡고 있던 열한 제자에게 “애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요 21:5)고 물으셨습니다.

동의를 구하는 질문
예수님은 질문을 통해서 듣는 자들이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이런 동의를 얻음으로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믿을 수 있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시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마 10:29). “너희 중에 어느 한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마 12:11).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눅 6:39).
[앞에서 이어짐]
그 뒤 아들은 어엿이 자라 의과대학생이 된 아들이 다음날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아들의 무슨 행동이 그리 못마땅했는지 훈계를 하고 있었고, 아들은 그저 열심히 경청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멀리서 부자의 모습을 보며 초조해졌습니다. ‘내일이 시험인 아들을 붙들고 웬 말이 저리도 많으실까, 이제 그만 하시지… ‘
나는 이제나저제나 하며 남편의 얘기가 끝나기만 기다렸습니다. 5분, 15분, 20분 이제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슬며시 남편 옆으로 다가갔습니다. “사람이 사회생활을 하려면 역시 성적이 좋아야 인정받는다구, 학교성적은 어디나 따라다니거든, 그러니까…” 남편의 말이 영 끝날 것 같지 않았습니다. 나는 톡 쏘아 주고 싶었습니다.
“여보, 그 얘기 백 번도 더 들었어요. 그만 좀 하세요. 내일 시험 볼 아들 붙잡고 겨우 그런 말씀을 해야겠어요?” 하고.
그러나 섣불리 끼여들기가 뭐해서 할말을 궁리했습니다. ‘여보, 당신 그 말 열 번째 하고 있네요, 아니야, 두 번? 다섯 번? 나는 생각하고 생각해서 드디어 말문을 열었습니다.
“여보, 얘기 중에 죄송한데요. 당신 지금 하는 말 얘기 여섯 번째 듣는 것 같아요” 그때 아들이 말했습니다.
“어머님, 중요한 얘기는 반복해 들어도 됩니다” 나는 웃음이 나왔습니다. 통쾌했습니다. 남편도 통쾌한 듯 크게 웃었습니다.
아들도 시원한 듯 함박꽃처럼 웃었습니다. “그래, 그만 들어가 봐라” 남편이 아들을 놓아주었습니다.
나는 내 아들이지만 존경스러웠습니다. 그 일이 있은지 얼마 안되어 기회를 보아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내 아들이지만 이 엄마는 너를 한없이 존경한단다. 어쩌면 그 순간에 그렇게 적절한 말을 할 수 있었니?”
아들은 나를 꼬옥 껴안으며 말했다. “어머님, 저는 어머님의 아들입니다.” ‘아, 아들의 말 한마디가 이렇게 나를 행복하게 하다니… ‘ 마크 트웨인은 ‘멋진 칭찬을 들으면 그것만 먹고도 두 달은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믿음의 표현을 하도록
주님은 다섯 차례에 걸려 믿음의 표현을 하도록 질문을 사용하셨습니다.
두 명의 소경에게 “내가 능히 이 일을 할 줄 믿느냐?”(마 9:28).
열 두 제자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5, 막8:29, 눅9:20).
고쳐 주신 두 명의 소경에게 “네가 인자를 믿느냐?”(요 9:35)
마르다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빌립에게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요 14:10)

사람들의 질문
예수님은 사람들의 질문에 대해 다양한 반응을 보이셨는데 가야바로부터 질문을 받았을 때(마 26:62), 유대인 인들로부터 질문을 받았을 때(마 26:68), 빌라도의 질문들 중에(마 27:13, 요 18:38, 19:9) 대답하지 않은 것이 있을 뿐이었습니다(눅 23:9). 이 질문들은 예수님의 굳이 필요치 않은 질문을 한 사람들의 진실성이 없고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를 작정하신 터라 굳이 대답이 필요치 않은 것입니다. 이 경우를 제외하고는 항상 진지하고 거리낌없이 응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을 찾아주시기 위해서 질문을 하신 반면 사람들은 예수님께 곱지 않은 질문들을 했습니다.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요 4:12). “너는 우리의 조상 아브라함보다 더 크냐?”(요 8:53). “왜 제자들이 안식일을 범하고 손을 씻지 않고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느냐”(눅 6:2, 막 2:24, 마 15:2).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요 8:19). “네가 무슨 권세로 이 일을 하느냐?”(마 21:23, 막 11:28, 눅 20:2). “안식일에 병 고치는 일이 옳으니이까?”(마 12:10)라는 식의 많은 질문들이 쏟아졌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시지 않았다면 상상도 못할 일들이 벌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사람들 사이를 파고들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와 진지한 대화를 나누시기를 원하십니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요 18:37) 영생에 관하여, 사랑에 관하여, 아버지 하나님에 관하여 오늘도 주님은 우리와 대화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아름다운 대화를 나누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마 15:16)
 

경계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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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말씀(109. 경계선에서) / 본문 : 눅 22:46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오늘은 본문 읽어놓고 다른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저는 이런 제목설교 잘 안 하는데 오늘은 해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잊지 마세요. 말씀 내내 오늘 본문이 그 어디에도 따라다닌다는 것을!
오늘 설교의 제목 ‘경계선에서(On the boundary)’는 폴 틸리히(Paul Tillich:1886-1965)의 자서전의 제목과 일치합니다. 폴 틸리히는 20세기 개신교의 대표적인 신학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 독일에서 태어나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교수자리까지 얻었지만 1차 세계대전에 군목으로 참전하여 사병들이 죽어 가는 참호 속에서 니체의 책들을 읽으면서 전통적 유럽 기독교 문명의 붕괴를 몸으로 느낍니다. 그리고 공산주의와 민족주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게 됩니다.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은 그는 히틀러에 의해서 자국인 독일에서 추방됩니다. 여행금지국가로 정해진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해야 하는 에스라, 에스더 부부가 아쉬움을 진하게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나라에서 자신이 추방당하는 틸리히는 어떻겠습니까?
제가 95년도에 인도를 갔을 때 우리나라에서 6.25가 끝나고 어디로 갈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유엔군 포로중의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일제시대 때 일제에 의해 일본군이 됩니다. 그리고 중국으로 가 전쟁에 참여하게 됩니다. 후에 중국 군에 잡혀서 중국 군이 되어 6.25때 북한을 지원하러 내려오는 병사들 틈에 끼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북한군에 잡혀서 북한군인이 됩니다. 그리고 또다시 유엔군에 포로가 됩니다. 그리고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고향은 남쪽이지만 남한도 북한도 그렇다고 중국을 일본을 택할 수도 없는 이 사람은 제 3국인 인도를 택하여 그곳에서 살고있었습니다. 이 민족의 아픔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폴 틸리히도 이러한 아픔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의 자서전 ‘경계선에서’ 그는 두 기질 사이에서 자신을 보여줍니다. 도시와 시골 사이에서, 사회계급들 사이에서, 현실과 상상 사이에서, 이론과 실제 사이에서, 타율과 자율 사이에서, 신학과 철학 사이에서, 교회와 사회 사이에서, 종교와 문화 사이에서, 루터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서, 관념론과 마르크스주의 사이에서, 고국과 타국 사이에서 그는 갈등하며 자신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종교의 실현(Religiose Verwirklichung)”이라는 책의 서문에서 “경계선은 앎을 얻기에는 가장 좋은 곳이다.”라고 말합니다.

아이들은 친구를 삼는 데 자격기준이 없습니다. 나이 성별 피부색 사람인지 동물인지 식물인지 생물인지 무생물인지 조차도 구분하지 않습니다. 이것들을 구분하는 것은 어른들의 기준일 뿐입니다. 작은 나무토막으로 우주선을 꿈꾸고 조그만 인형들을 친구로 사귀어 멋진 우정을 나누는 어린 아이들의 세계가 부럽지 않습니까?

세례 요한과 예수

유대교 율법에 따르면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흠 없는’ 양이나 염소 등을 바쳐 제사를 지내야 했습니다. 양이나 염소가 없는 사람들은 산비둘기나 집비둘기로 대신했습니다. 그러나 일반 농민의 집에서 사육한 짐승이나 집 주변 혹은 산에서 잡은 비둘기는 ‘흠 없는’ 제물로는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제사용 짐승을 전문적으로 키우는 업체들이 있었고, 이 업체들은 성전 관료들인 제사장의 공인 하에 한정된 일부 가문에 의해 독점되었습니다. 이 독점업체들은 성전귀족에게 많은 뇌물을 바칠 수 있는 가진 가문 중에서 선별되었습니다. 가난한 탓에 죄 사함의 제사를 드릴 수 없었던 대중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에 부족한 자, 심지어는 민족적 불행을 초래한, 저주받아 마땅한 자로 여겨졌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이런 종교적 체제로 인해 사회의 모순에 저항할 수도 없는 경계선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때 이들을 죄의식에서 해방시켜 준 것이 요한의 세례였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에게 보다 유리한 죄 사함의 매체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대중들은 결국 요한을 좋아하게 되었고, 예루살렘과 유대 지방 전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왔습니다. 예수도 갈릴리에서 요한에 대한 소문을 들고 세례자 요한을 찾기 위해 요단강가로 갔습니다. 예수님도 그곳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요한이 활동했던 베레아 지방은 아바태아라는 유목족속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곳입니다. 때문에 베레아 지방에는 많은 군사요새들이 있는 곳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과 함께 반정부적 선동을 하고 있었던 요한의 행동은 지극히 위험한 것입니다. 추종자의 일부는 요한과 함께 붙잡혔고 또 다른 일부 사람들은 삼엄한 경비망을 뚫고 보다 안전한 곳으로 피신했습니다. 이런 정황 속에서 예수는 다시 갈릴리로 돌아와 요한의 세례운동에 참여했던 옛 동지들을 포함하여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의 명성은 널리 퍼졌고, 많은 사람들은 예수 주변에 몰려들었습니다.

요한은 대중을 불러냈으나 예수는 대중에게로 들어갔습니다. 예수는 이스라엘의 대중을 모든 정치적, 사회적 압박에서 해방하시기 위해 병고침과 말씀선포로 영적 활동을 펼쳤나갔습니다.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나사렛에서 자라시고, 정치적, 사회적 압박에서 대중들을 해방케 하시고자 적극적으로 활동하셨습니다.

예수님도 경계선에 계셨습니다. 당시 정치적인 로마와 유대와 헬라의 경계에 계셨습니다. 또한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에 계셨으며, 율법과 복음의 경계선에 서게 되셨습니다. 제자들로부터는 세상 권력의 자리(왕)와 섬김의 자리사이에 계셨습니다.
컴퓨터의 내부적인 회로는 2진법으로 이루어집니다. 즉 0과 1사이에서만 선택이 가능하고 중간은 없습니다. 흑과 백 사이에 어떤 것이든 선택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틸리히는 이 선택을 미루다가 추방을 당한 것이고, 세례요한은 이 덫에 걸려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선택에서 빠져 나오셨습니다. 몇 번에 걸쳐서 이러한 선택을 강요 받으셨지만 예수님은 그 덫에 걸리지 않으셨습니다. 그 중의 한가지 사건이 세금문제였습니다. 막 12:16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화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우리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설교자에게도 이러한 경계선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믿음을 강조하였고 요한은 사랑을 강조했으며 베드로는 소망을 특히 강조하여 설교했습니다. 믿음을 강조한 바울의 경우에는 데살로니가서에서는 예수의 재림을, 로마서에서는 믿음을, 고린도서에서는 사랑을 말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일제시대 때의 설교는 일본 침략자에 의해 고통 당하는 백성을 위로하고 삶의 의미를 북돋아 주는 설교가 많았습니다. 당시에 가장 많이 불렀던 찬송은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라는 찬송이었습니다.

괴롬과 죄만 있는 곳
내 어이 여기 살리까
빛나고 높은 저 곳을
날마다 바라봅니다.

전도의 내용도 예수천당이면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도 경계선에 서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그 때와 같이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국가는 독립하고 세계무역의 10대국에 들어있습니다. 그만큼 국가의 위상과 위치가 달라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유엔사무총장을 배출했고 올림픽과 월드컵도 치러냈습니다. IT분야는 세계3위에 올랐고 통신 속도는 세계1위입니다. 눈부신 발전으로 세계가 놀랐습니다. 이런 국력을 바탕으로 우리가 선교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아프가니스탄 피랍으로 안티 크리스찬뿐만 아니라 기독교 내에서도 분당샘물교회와 박은조 목사님을 비방하는 일이 난무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제가 알기로는 그 어떤 목사님보다도 본받을 만한 분입니다. 어떤 분은 교인이 3,000명이라니까 목사가 얼마나 많은 돈을 받겠냐고 합니다. 박 목사님은 서울 영동교회에서 오래 동안 목회 한 분입니다. 이 교회는 손봉호 장로님이 계신 곳이기도 합니다. 강남에 있는 교회가 철 대문입니다. 이 대문을 보고 사람들은 서대문 교도소냐고 그럽니다. 그만큼 절약하는 교회입니다. 그곳에 계시다 분당샘물교회를 개척했는데 분당샘물교회는 성도가 3,000명 정도 된답니다. 다른 교회 같으면 벌써 교회를 건축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상가를 임대하여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뿐만 아니라 담임목사를 비롯한 전 교역자 사례비를 100만원으로 정하고 가족 1인당 19만원만 추가하여 받고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 한 가정을 파송하고 있는 우리교회 역시 남의 일로 만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이제 국가 권유로 철수 준비를 하고 있지만 현지의 같은 팀 내에서 건축한 병원은 경기도 만한 크기의 땅에 이 병원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다 버리고 와야합니다. 단순히 병원을 그동안 애써 세운 건물을 두고 온다는 것만 마음이 아픈 것이 아니라 그곳에 여전히 남아있게 되는 그 땅의 백성입니다. 누가 치료해 줍니까? 누가 아픈 곳을 감싸줍니까? 우리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은 아닙니다만 현실적으로 너무나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탈레반이 두 여성을 풀어주면서 한 여성이 양보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탈레반은 그 여성은 정말 위대하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분은 아프간에 간 것이 ‘선교냐 봉사냐’ 하면서 따집니다. 여러분! 봉사면 어떻고 선교면 어떻습니까? 또 여행이면 어떻습니까?

박은조 목사님은 지난 8일(수) 무겁게 가라앉은 교단에 올라섰습니다. 이날 제시한 성경구절은 열왕기 39장. 동료들을 모두 잃은 ‘엘리야’가 로뎀나무 밑에서 하나님에게 “자기의 생명을 거둬달라”고 애원하며 기도하는 대목입니다. 박은조 목사님은 말하기를 “이제 3주가 지나 4주 째 접어들고 있습니다. 그들은 영웅적 죽음을 위해 아프간 땅을 밟은 게 아니었습니다. 현지 사역자를 뒷바라지하고 격려하기 위해 간 사람들인데, 왜 이런 시련을 주시는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저희를 용서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아프간 피랍사태로 또 하나의 경계선에 섰습니다. 폴 틸리히가 말했던 것처럼 경계선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을 돌아보고 교회를 돌아보고 선교를 점검해야합니다. 이번 일로 아프간이 아주 문이 닫히는 것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또한 우리가 더욱 열심히 기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1889년 10월에는 호주 장로회(The Presbyterian Church of VictoriaAustualia) 소속의 선교사 데이비스(J.Henry Davis)가 조선에 입국하게됩니다. 그를 파송한 호주 장로회는 당시 교세가 3만 5천명 밖에 안 되는 작은 교파였습니다. 1885년과 1887년에 한국을 두 차례 방문한 바 있는 중국 주재 영국국교회 선교사인 월프(J.R.Wolf)부주교가 한국 선교의 꿈이 영국국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지지 않게 되자 호주에 있는 친구들에게 한국을 위하여 선교사를 보내 달라는 호소문을 보냅니다. 이것을 받은 매카트니(H.B.Maca-rtuey) 목사가 빅토리아 선교신문에 이 내용을 싫고, 이 글을 데이비스가 읽고 한국에 가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나 당시 호주 장로교회에서는 한국선교에 대한 관심조차 갖지 않고 있었습니다. 교단에서 파송하지 않자 청년들의 모임인 성서연구 연합 친우회(The Presbyterian Fellowship Union for Bible Study)에서 선교사를 한국에 보내야 한다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데이비스 목사의 본 교회인 멜보른 투락(Too-rack) 교회와 협력하여 초대 선교사로 데이비스 목사를 선정하여 한국에 파송 하게 됩니다.

서울에 도착한 데이비스는 부산 지역을 선교하기 위해서 1890년 2월 28일 구한국 정부로부터 전라, 경상 지방 여행허가를 받아 서울-부산 간 장거리 여행을 도보로 가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당시에도 부자 선교사는 말을 타고 다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는 과천을 지나 수원(3월 15일), 천안(3월 18일), 공주(3월 20일), 경천(3월 21일) 등을 지나며 복음을 전하며 갔습니다. 공주를 지나 논산(3월 22일)을 지나 만경강을 건너 전주(3월 24일), 오수(3월 25일)를 지나 남원(3월 27일)과 하동(3월 29일)사이의 지리산 기슭 산악 지역을 통과했습니다. 전주를 향해 걸어 갈 때에는 많은 비로 인하여 길이 물에 잠겨 장화를 벗고 걸어야 했습니다. 지리산 지역에서는 호랑이 울음소리도 전해 들었습니다. 1890년 3월 27일 드디어 서울에서 부산을 향하여 670리를 걸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힘든 여행 중에도 그는 매일 5-6시간 씩 공부하면서 사람들을 만나 많은 이야기를 듣고 조금씩 말을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마지막 부산 행로는 진주(3월 31일) 부근을 경유한 것으로 추정되나 그 후의 경로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습니다.
약 20일간의 무리한 도보 여행을 하는 가운데 추운 날씨와 불편한 잠자리, 맞지 않는 음식으로 허약해진 체질에 폐렴과 천연두에 감염되어 마지막 5일간은 아무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게일(Gale, J. S.)의 도움으로 4월 4일 비 오는 금요일 부산으로 이동하였으나 병세가 악화되어 일본인 병원(北村)에 입원하여 하룻밤을 병상에서 지내다가 치료도 제대로 받기 전에 1890년 4월 5일 순직하였습니다. 임종을 지켜본 게일은 “그는 병원에서 죽어가면서 내게 뭔가를 말하려 했다. 오후 1시 평온한 모습으로 숨을 거두었다”고 메리(Mary)에게 편지했습니다.
호주장로교회도 경계선에 섰습니다. 교단이 파송한 것은 아니었지만 호주 장로교회에 이 소식이 알려지자 기도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데이비스의 헌신적인 활동과 순직은 호주장로교회의 한국선교를 가능하게 만든 값진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호주 장로교회는 후속 사업으로 멕케이(Mackay)선교사 등이 내한합니다. 또한 호주에서는 여전도회연합회(Presbyterian Women’s Missionary Union)가 만들어져 선교를 헌신적으로 돕도록 했습니다.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 한 남자가 남과 북의 경계선상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남군, 북군 모두를 지지했습니다. 그래서 아래에는 남부 연합군의 회색 바지를 입고 위에는 북군의 푸른색 윗도리를 입고 다녔습니다. 얼마 후 그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남군과 북군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마을 사람들은 전쟁 소식을 듣고 모두들 피했습니다. 그러나 그 남자는 의기양양했습니다. 그는 남군의 회색 바지와 북군의 푸른 윗도리만 입고 있으면 어딜 가든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남군 바지와 북군 윗도리를 입고 자기 밭에서 일을 했습니다. 드디어 근처에서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북군과 남군이 대치하고 곧 총 소리가 오가기 시작했습니다. 북군의 병사들은 회색만 보이면 무조건 총을 쏘았습니다. 남군은 푸른색만 보이면 무조건 총을 쏘았습니다. 그 남자는 온몸에 총을 맞고 비참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성도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젖어 사는 사람이 아니라 구별된 존재입니다. 성도는 세상과 하나님의 사에서의 입장이 분명해야 합니다. 우리 주앙교회 성도는 경계선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시기를 바랍니다.
 

웬 떡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12. 웬 떡) / 본문 : 요 6:53-58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58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여기는 롯데월드입니다. 갑자기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지더니 아이들이 벌떼처럼 몰려갑니다. 신데렐라가 등장한 것입니다. 아이들은 신데렐라의 옷자락이라도 만져 보려고 그 주변에 둘러섰습니다. 그러나 6-7세쯤 되어 보이는 그 소년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몸이 심하게 뒤틀리는 장애를 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년은 형의 손을 잡고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는 눈빛으로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가 원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신데렐라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뻗치는 아이들 틈에 끼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감히 다가서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한 걸음, 한 걸음을 사뿐히 내딛으며 신데렐라가 소년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러고는 어리둥절해 있는 소년의 얼굴에 살며시 입을 맞췄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어떤 분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롯데월드의 신데렐라 공주가 아닌, 평강의 왕을 기억해 보십시오. 장애 소년이 아닌 당신과 내 이야기입니다. 두 경우 다 선물이 주어졌습니다. 두 경우 다 사랑이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신데렐라는 단지 뽀뽀만 했을 뿐입니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떠났습니다. 뒤에 남겨진 소년의 몸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신데렐라였다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뒤틀린 소년의 몸뚱이는 예수님이 가지시고, 자신의 아름다움은 장애 소년에게 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짧은 감동보다 위대한 것을 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사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하신 일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탈출하여 엘림을 떠나 시내산이 보이는 광야에 도착했습니다. 앞뒤를 살펴보고 좌우를 보아도 먼지 날리는 모래뿐입니다. 애굽에서 싸들고 온 양식도 바닥이 들어 나고 가축들도 더 이상 잡아먹을 것이 없어졌습니다. 큰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꼼짝없이 굶어죽게 생긴 것입니다. 사람들은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출 16:3)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바로 응답하십니다.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출 16:4)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양식을 주시는 대신 백성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보신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사람들은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m)를 광야생활 40년 동안이나 먹었습니다(출 16:45). ‘만나’라는 말은 ‘마’(hm) ‘무엇? 웬?’이라는 뜻입니다. 만나는 ‘웬 떡’ 우리 식으로 말하면 ‘웬 밥’이라는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에게 빵은 주식이며 우리가 먹는 밥과 같은 것입니다. 빵이라고만 말씀드리면 주식이라는 개념이 약하게 다가오기 때문에 저는 밥으로 고쳐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시작하는 요한복음 6장 1-4절에는 오병이어(五餠二魚)의 사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이 많이 있지만, 대체적으로 개인적인 기적일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병을 고치시는 기적을 많이 행하셨지만, 그것은 집단적인 치유가 아닌 개인적 치유였습니다. 그런데 반해 오병이어 기적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인 오천 명 이상의 많은 사람들이 모두 함께 체험한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그것이 특히 일상적으로 늘 필요한 빵을 나누어 받았다는 데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밥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희망이 그들을 더욱 들뜨게 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려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이튿날 예수님이 가신 곳에 좇아갔습니다. 다른 기적과 달리 오병이어 기적은 사람들을 대단히 흥분케 한 기적이었음을 말해 줍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찾아온 저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썩을 밥을 얻으려고 일하지 말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밥을 위해 일하여라. 그 밥은 인자가 너희에게 줄 것이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하여 의도하신 뜻이 여기에 분명하게 들어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썩을 밥을 얻으려고 노력하지만,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밥은 그보다 더 우선적이고 중요함을 일깨우시기 위하여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저자는 그런 의도로 해석하여 오병이어의 기적과 더불어 영생하는 밥에 관한 예수님의 이야기를 함께 묶어 놓았습니다.

그러면서 곧 이어진 대화가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먼저 그들의 조상이 하늘에서 내려온 밥인 만나를 먹었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그 밥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의 밥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그 밥을 달라고 하자 예수님께서 “내가 곧 생명의 밥이요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어서 51절에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밥이니 사람이 이 밥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밥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오면 좀 더 구체적으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는 유대인들은 많이 헷갈렸습니다. 떡과 만나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내가 곧 생명의 밥’이라고 하시면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고 하시니 유대인들이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밥과 만나라는 실제적인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영적인 차원으로 이야기가 비약되므로 유대인들은 얼른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들 뿐 아니라 오늘 우리도 얼른 이 말씀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니 그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먹는다’는 비유적인 표현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이야기가 나오는데 33절에 “하나님의 밥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단순하게 만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저들이 시내산에 받은 율법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진정한 양식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드리는 것을 양식(糧食)을 먹는 것으로 표현한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시편 19편에 보면 여호와의 율법은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다”고 하였습니다. 또 신명기 8장 3절에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는데, 만나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55장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을 포도주와 젖으로 비유하면서 값없이 와서 사먹으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에스겔서에 보면 예언자가 두루마리 책을 받아서 먹었는데 입에서 달기가 꿀 같다고 하였습니다(겔 3:1-3).

이런 전제를 가지고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무슨 뜻인지 이해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내가 곧 생명의 밥”이라는 말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로고스(Logos) 즉 말씀이라고 하였으며, 이 말씀이 육신을 입어 우리 가운데 오셨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것은 바로 그의 삶과 교훈을 듣고 그대로 따른다는 것을 말합니다.

생명의 밥
‘나는 생명의 밥이다’ 세 끼 밥 같은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밥은 필수음식입니다. 밥 먹는 것을 보고 누가 사치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당연히 먹어야 되는 것입니다. 살기 위해서는 밥을 먹어야 됩니다. 그런가 하면 밥은 모든 사람이 먹는 음식입니다. 어떤 사람은 고기를 잘 못 먹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매운 것을 잘 못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렇게 입맛과 식성이 다 다르지만 밥은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의 입맛에 맞고 식성에 장애가 없이 다 먹는 양식이 밥입니다.

누구나 먹을 수 있는 밥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밥입니다. 예수님은 밥을 먹는 사람을 가려서 ‘너는 내 밥을 못 먹는다’ 그렇게 하신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누구든지’라는 말씀을 주님은 자주 사용하십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마 10:32),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마 12:50),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 10:9)고 하셨습니다.

살아있는 밥
지난번 캄보디아에 갔을 때 배가 아파서 고생하고 돌아왔습니다. 아마 상한 음식이나 물을 잘 못 먹은 것 같습니다. 우리는 상한 밥을 먹을 수 없게 되어있습니다. 즉시 탈이 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단순히 살아 있는 밥이 아닙니다. 인간의 질병을 치료까지 하는 약입니다. 인간의 고통과 인간의 역경과 좌절을 극복하게 하는 능력의 밥입니다.

우리가 밥을 먹어야 되는 것은 살기 위해서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어야 하는 것도 살기 위해서입니다. 본문 58절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이것이 웬 밥입니까?

우리 어머니들은 우리가 밥 먹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자식새끼들 입에 따끈따끈한 밥 들어가는 게 제일 행복이야!”하십니다. 우리 주님의 기쁨은 우리가 주님이 주시는 밥을 먹을 때 일 것입니다.

요 6:51절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의 두 단어의 문법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먹으면”(favgh/:화게)은 ‘과거형 능통태 가정법 단수’로 일회적인 행동을 말합니다. ‘먹으면’을 문법을 포함하여 번역한다면 “만일 단 한번이라도 먹는다면”이 됩니다. 우리가 세례를 한번만 받지 않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성령 세례를 받았을 때 주님의 살과 피를 먹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가지는 성찬 예식은 이것을 기억하기 위한 예식입니다.
그리고 또 한 단어가 있습니다. “나의 줄 떡”(ejgw; dwvsw hJ savrx)의 “나”(ejgw:에고)는 ‘미래 능동태 직설법 1인칭 단수’입니다. 이것을 문법을 포함하여 번역한다면 “나는 앞으로 단 한번에”가 됩니다. 미래형을 사용하셨고 또 ‘혼자서 단 한번에’ 라는 말씀은 무엇을 뜻합니까? 바로 십자가의 죽음을 염두 해 두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어머니들은 너무 많이 밥을 퍼 주셔서 어떤 때는 먹기 싫어서 “내가 풀게!” 하면서 밥통으로 가면 어머니는 쏜살같이 오셔서 “엄마가 풀게 기다려라!” 하며 주걱을 빼앗아 가십니다. “또 많이 줄 거면서”하고 투덜대곤 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우연히 밥솥을 열었다가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밥솥 한쪽에 어머니가 드실 찬밥 덩어리가 동그마니 들어 있었습니다. 그것을 혹시 우리가 보거나 먹을까 염려하셨던 어머님입니다.

우리말에 속썩이는 자식에게 부모가 하는 말이 “날 잡아 먹어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먹어야만 하는 죄인입니다. 주님은 기꺼이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요한은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 -아멘-

잃은 양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08. 잃은 양) / 본문 : 눅 15:1-7

“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3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4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5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가까이 나아 오니”(엥기존테스) 접근하다는 뜻의 분사형입니다. 이는 이들이 계속해서 모여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원망하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비유 또한 이러한 상황가운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입니다. “원망하여”(디아공귀조)는 와글와글 시끄럽게 떠드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 나아오는 이들을 보고 그들은 스스로 죄인이라고 말했습니다. 세리는 로마의 명령에 의해서 세금을 징수해야하고 거두어 들여야 하기 때문에 유대인들로부터는 반민족적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인물입니다. 또한 죄인이라고 한 사람들이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인지 정확히 본문에서는 말하지 않았지만 아마도 하층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을 통칭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즉 바리새인도 아니고 서기관들도 아닌 하층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시에 비유로 하신 말씀은 당시 적대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 하신 것입니다.

1. 잃은 것을 찾지 아니하느냐?

제가 서울에 올라와 잠시 옷 만드는 공장에 다닌 적이 있습니다. 열심히 밤낮으로 일해서 번 월급을 당시 기숙사 생활을 했기 때문에 마땅히 둘 곳이 없어서 가방 맨 밑바닥의 종이를 들추고 그곳에 숨겼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날 없어졌습니다. 잃어버린 것입니다. 얼마나 속이 상하는지 몇 칠을 잠을 못 잘 정도였습니다. 무엇을 잃어버려본 사람만이 잃어버린 자의 마음을 압니다. 베트남에서 디카 날치기 당하고 몇 칠을 중고 카메라 상점에 나가 찾아보았습니다.

본문 4절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고 반문하십니다. 예수님의 질문이니까 대답해 보세요. 여러분에게 양이 100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1마리가 길을 잃어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99마리는 나와 함께 목장에 있습니다. 그러면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겠습니까? 아니면 그냥 99마리와 함께 있겠습니까? 그래도 목자라면 찾아 나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한 마리의 길 잃은 양은 누구입니까?
99마리의 양은 길 잃은 이 양에게 엄청난 비난을 쏟아 붇고있습니다. 한마디로 말썽 장이 양입니다. 고집이 쎈 양입니다. 99마리가 생각하기를 “그놈은 이 참에 아예 죽어야 돼? 우리 목자만 고생시키고 우리를 편안히 쉬지 못하게 하고 있어?”라고 생각한다면 99마리는 목자와 마음을 같이하지 않는 양입니다. 그리고 만일 목자가 지금 한 마리 양이 없어졌는데 99마리와 함께 편안히 먹고 쉬면서 세미나를 하면서 역시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것은 효율적인 측면에서 할 일이 못된다고 하면서 있으면 여러분은 어느 목자를 따라가겠습니까? 그래 역시 우리 목자가 효율적이고 경비를 낭비하지 않고 우리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목자야 하고 즐거워 할 수 있겠습니까?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 될 수 있으며 또한 하나님 앞에서 내가 곧 잃은 양입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매달려 죽게 하는 엄청난 값을 치러야 했습니다. 이사야는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고 했습니다.

무엇을 잃어 버렸나?
잃어버린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잃어버린다는 것은 마음을 찢어내는 고통을 가져다 줍니다. 우리 민족은 잃어버린 아픔이 큰 민족 중에 하나입니다. 나라를 잃어버린 역사를 가졌고, 자기의 이름을 잃어버린 수치도 당하였었으며, 교회도 잃어버리는 아픔도 당하였습니다.
저는 여기서 여러분에게 한가지 질문을 더 던져보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잃어 버리셨나요?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도 무엇인가 잃어버린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7년 동안 공들여 완성하고 봉헌식 때 하나님께 하는 말입니다. 왕상 8:27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사람이 아무리 공들여 지은 건축물이라고 하여도 하나님은 그곳에 계시기에 적합하지 않으신 분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께 헌금하고 봉사하고 헌신했다해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계시기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은 온전히 주님의 은혜입니다. 이 겸손함이 있어야 합니다.

기억에 남는 책 가운데 “안네의 일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16살 난 유대인 소녀 안네 프랑크가 쓴 일기입니다. 유태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학대받고 핍박받던 나치 정권 아래서 히틀러 군대에 의해 모진 시련과 고난을 받고 있던 때의 일기입니다. 친구들, 친척들, 부모 형제 모두 알 수 없는 곳으로 끌려가고 결국은 가스실에서 하나씩 죽어갑니다. 두려움과 공포의 나날이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모든 가족들이 다 죽고 그의 아버지만이 살아 세상에 빛을 보게 된 안네의 일기 마지막에는 이런 말이 쓰여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세상이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믿어…”

16살 난 어린 소녀의 가슴에는 펼쳐보지 못한 무지개 빛 꿈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나날이 공포와 두려움이고 절망과 좌절일지라도 삶에 대한 강한 애착을 갖고 세상을 보고 내일을 보았던 것입니다. 유태인의 역사는 고난으로 얼룩진 역사이며 핍박과 눈물의 세월로 쓰여진 역사입니다. 그들이 즐겨 쓰는 말이 있습니다.
“Say yes to life, in spite of everything(삶에 대하여 어떤 경우라도 “네”라고 말씀하십시오)”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고난의 폭풍이 밀려오고 환난의 바람이 불고 절망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되었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하여 어떤 경우라도 “네”하며 어둠의 터널을 통과했던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 2장 4절로 5절에서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게 되었을 때 우리에게 주셨던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뜨거운 열정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2.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우리가 만일 잃어버린 것을 찾지 아니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결핍이요, 열정이 식었거나 아니면 이기적인 마음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23:4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만나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지며”라고 하셨습니다. 잃어버린 사람에게는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모르며 그것을 찾기 때문입니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스타일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무슨 일이든 쉽게 포기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그런 점에서 서은이를 좋아합니다. 한번 붙인 것은 절대 안뗘냅니다. 서은이에게 쉽게 마음을 얻는 것도 쉽지 않지만, 또한 쉽게 버리는 그런 스타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좋아하는 스타일입니다.
오늘의 본문 이후에 두 개의 비유가 더 소개되어 있습니다. ‘잃은 은전’, ‘잃은 아들’에 관한 비유입니다. 이 비유들의 특징은 모두 잃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것을 강조하는 것은 반드시 찾아야 될 것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 역시 잃어버린 당신의 백성을 찾기 위해서 입니다(눅 19:10).

무엇을 찾았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 사람들과의 전쟁 중에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습니다. 하지만 블레셋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재앙을 내리심으로 말미암아 견디다 못한 블레셋 사람들이 이를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가져다 놓았습니다. 그때 사무엘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가 하나님의 궤를 다시 찾은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찾아야 할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에게서 “네”라는 말, “아멘”이라는 말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항상 “네”하고 “아멘”해야 한다고 하는데 과연 우리가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모든 것을 긍정적인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까?

3. 찾은 자의 즐거움

본문 5절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의 “즐거워”(카이로)는 단순한 만족의 기쁨을 넘어 넘쳐나는 기쁨을 말하는 것입니다. 잃은 양을 찾은 목자는 덩실덩실 춤을 추며 기뻐하는 모습입니다. 아무리 많은 고생과 비용이 들어갔다고 해도 잃은 양의 가치는 그런 것으로 계산할 수 없습니다. 찾은 자의 기쁨을 통해서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7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경제적 손익을 계산한다면 벗과 이웃을 초청하여 잔치를 여는 것 보다 아예 잃은 양을 찾지 않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가치를, 사람의 생명의 가치를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셨습니다(마 16:26).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제가 설교한다는 생각보다는 여러분 스스로가 찾고 생각하고 성령께서 여러분의 잃은 것, 잊은 것을 찾을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아프간 피납 사태를 통해서 많은 것을 잃었고 또 찾았습니다. 그분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는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유럽의 선교는 1000년을 넘게 한 것입니다. 미국도 1885년에 우리나라에 언더우드 아펜셀러 선교사가 들어오고 적어도 미국 선교의 역사도 200여 년은 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근대선교는 20여 년 정도 되었습니다. 아직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명 또한 예수님과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잃은 양을 찾으러 오셨다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잃은 양은 남이 아닙니다. 우리 식구요 나 자신입니다. 목자가 잃은 양을 찾아 나섰다고 불평하는 양이 아니라 목자를 돕고 기도하는 양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07. 길) / 본문 : 눅 1:79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길’이라는 말은 ‘길다’에 나온 말입니다. 그래서 길은 긴 것입니다. 싸움에 지친 모든 하나님의 군사들에게는 격려의 사역이 필요합니다. 때때로 우리 모두는 긴 여행길에 지쳐서 5분마다 한 번씩 “아빠, 아직 멀었어요?”라고 물어보는 어린 자녀들과 같습니다. 인생은 여행과 같습니다. 우리는 그 기나긴 여행을 막 시작한 것 같은 때에도 삶을 힘들게 만드는 어려움에 봉착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인내가 필요한 싸움입니다.
중용은 “길은 잠깐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니 떠날 수 있다면 길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인생을 길로 표현합니다. 예수께서 “내가 길이요.”(요 14:6)라고 말씀하심으로 인생의 주인 되심을 선포하셨습니다.
찬송가 중에도 ‘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가사들이 많이 나옵니다. ‘갈길을 밝히 보이시니’(313장), ‘나의 갈길 다가도록’(434장), ‘내 갈길 멀고 밤은 깊은데’(429장), ‘내 본향 가는 길’(292장), ‘나는 갈길 모르니’(421장), ‘주와 같이 길가는 것’(456장) 등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살펴보면 갈릴리로 가신 길은 책임(Responsibility)의 길이요, 여리고로 가신 길은 생명의 길이요, 갈보리로 가신 길은 희생(Sacrifice)의 길이요, 엠마오로 가신 길은 확신(certainly)의 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바다 위를 이동하는 거대한 화물선들은 그렇게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목표를 향해 꾸준히 진행합니다. 그렇게 천천히 움직이는 화물선들이 거대한 태평양도 건너고 대서양도 건너는 것입니다. 배가 가장 위험할 때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방향을 잃고 제자리에서 맴도는 것입니다. 배가 바다에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엔진이 고장났다든지 아니면 배 안에 있는 구성원들 사이에 큰 난리가 일어났다든지,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배가 바다 한가운데서 이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표류하면 결국 큰 파도를 만나 침몰하거나 아니면 암초에 부딪쳐서 침몰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프리카 맨 남단에 희망 봉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곳은 대서양과 인도양이 만나는 곳이기 때문에 언제나 파도가 심해서 배가 많이 침몰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곳 이름을 희망 봉이라고 하는 이유는 이곳만 통과하면 파도가 잠잠해져 다시 안전한 항해를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이 세상의 혼란과 어려움의 파도가 강하고 크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능히 이길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할 때는 하나님의 말씀이 바다를 갈라서 세웠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지금 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신앙의 엔진을 꺼 버리면 안 됩니다. 여기서 신앙의 엔진을 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열정을 잃어버리고 세상을 따라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바른 신앙을 가지고 끝까지 꺼지지 않는 열정으로 나아갈 때 이 세상의 어떤 시험도 이기고 영광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1. 길을 찾으라
우리가 성경을 보는 이유와 역사를 기억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의 길을 찾기 위함입니다. 인생은 길을 찾아야 행복합니다. 길이 보이지 않으면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열심히 산 것은 같은데 마냥 그 자리입니다. 서 있는 차와 같고 고인 물과 같은 것입니다. 인생은 길이기 때문에 목적이 있어야 하고 그 길을 가야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렘 6:16)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스스로 거역했습니다. “대저 내 백성은 나를 잊고 허무한 것에게 분향하거니와 이러한 것들은 그들로 그 길 곧 그 옛길에서 넘어지게 하며 곁길 곧 닦지 아니한 길로 행케 하여”(렘 18:15)
“도와 주고 싶어도 도울 길이 없지 않니?” 이 말은 부모가 아이들에게 하는 말일 수 있습니다. 부모는 예전부터 길을 걸어왔기 때문에 어디에 함정이 있는지 알아서 자녀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자녀는 자기 고집만 부릴 때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러한 탄식은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의사들이 환자에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자유의지(Free-will)를 주셨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강요나 강제로 하지 않으십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 23:37) 우리가 길을 찾는 것은 오직 예수께 순종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길이 찾아집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 7:7-8)

2. 우리가 가야할 길
예수님은 우리가 가야할 길을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 7:13-14)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1) 허리를 동이는 길
“파괴하는 자가 너를 치러 올라왔나니 너는 산성을 지키며 길을 파수하며 네 허리를 견고히 묶고 네 힘을 크게 굳게 할지어다”(나 2:1)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엡 6:14)

2) 정직한 길
“네 형제의 우양의 길 잃은 것을 보거든 못본체 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끌어다가 네 형제에게 돌릴 것이요”(신 22:1, 4)
“19 내 열매는 금이나 정금보다 나으며 내 소득은 천은보다 나으니라 20 나는 의로운 길로 행하며 공평한 길 가운데로 다니나니 21 이는 나를 사랑하는 자로 재물을 얻어서 그 곳간에 채우게 하려 함이니라”(잠 8:19-21)

3) 용서의 길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마 5:25)

4) 전도의 길
“9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 대 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마 22:9-10)
“12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마 18:12-13)

3.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
미가서 2장 13절을 보십니다. “길을 여는 자가 그들의 앞서 올라가고 그들은 달려서 성문에 이르러서는 그리로 좇아 나갈 것이며 그들의 왕이 앞서 행하며 여호와께서 선두로 행하시리라”

그러나 이 길로 갈 때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이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평안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과 같은 본문을 시편 121편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1.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2.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3.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5.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6.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7.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8.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2절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산이 아니라 하나님(Not mountain’s but God)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힘과 능력은 마지막 때에 만국을 살리기 위함입니다.
“1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 두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계 22:1-2)

이 이야기는 실화입니다.
잘 생기고 똑똑한 아들을 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기대대로 초등학교 때부터 줄곧 우등생이었고 명문대학에 진학했습니다. 그러다 군에 입대하게 되었는데 뜻밖의 불행이 그 가족에게 찾아왔습니다. 첫 휴가를 나온 아들이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되고 만 것입니다. 앞날이 창창하던 아들이 허망하게 쓰러져 병상에 누워있는 모습을 보노라니 아버지도 그만 삶의 의욕을 잃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이 그 아버지에게 요한복음의 말씀을 전해주었습니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25). 아버지는 아들의 귓전에 매일매일 이 말씀을 큰 소리로 들려주었습니다. 그 날도 아들의 귀에다 대고 말씀을 외쳤는데 말씀이 끝났을 때 아들이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습니다. “아-멘”이라고 아들이 누운 지 87일 만에 깨어나는 순간이었습니다. – 김상길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습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아프간 인질 피납사태가 발생한지 오늘로 벌써 9일째가 됩니다. 현재까지의 상황은 1명이 사망하고 22명이 생존해 있는 상황입니다. 네티즌들의 반응을 보면 “위험하니 가지 말라고 그렇게 말렸는데 왜 갔냐”, “너희들 맘대로 갔으니 너희들이 스스로 책임져라”는 등의 정서가 분명히 존재합니다. 특히 다른 종교를 믿거나 기독교에 대하여 반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런 생각을 더 많이 합니다. 외국의 일부 언론들도 한국의 지나친 선교경쟁이 낳은 결과라는 비판의 소리도 있습니다. 우리는 물론 위험한 지역과 무모한 시도를 하는 것은 잘못일 것입니다. 제가 왜 컴퓨터선교회를 하고있습니까? 바로 바른 선교를 하기 위해서 정보를 제공하고 갈길을 가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건의 진실을 말해야합니다. 그들은 의료 봉사단원들이었고 무고하게 붙잡혀있는 것입니다. 탈레반은 하루속히 풀어주어야 합니다. 조건과 이유가 있을 수 없습니다. 물론 앞으로는 더 신중하게 여행을 해야합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길이란 우리만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나라에 들어오려다 최초로 순교한 토마스 목사를 보십시오. 그는 백령도 근처의 작은 섬에 도착해 주민들에게 성경책 200여권을 전하며 전도했습니다. 베이징으로 되돌아간 그는 런던으로부터 정식으로 조선 선교를 허락 받았고 다시 조선에 갈 배편을 찾던 그 앞에 제너럴셔먼호가 나타났습니다. 중국을 떠난 셔먼호는 일주 일 후 평양근처 대동강변에 도착했고 역시 우려하던 대로 조선군과 무력 충돌이 발생했습니다. 대동강변에 좌초하게된 셔먼호는 최대의 위기를 맞게되는데. 한편 불바다가 된 셔먼호 위에서는 백기를 들고 화염 속을 헤치며 사력을 다해 강가로 책을 던지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토마스 선교사였습니다. 그리고 붙잡혀 나와 곧바로 참수형에 처해졌습니다. 아마 당시의 영국 사람들이 “무엇 하러 그 위험한 곳에 갔냐?”라는 식으로 말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위험을 무릎 쓰고 항해를 계속하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영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울러 복음도 전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지혜롭게 선교 해야합니다. 그리고 선교의 항해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육체를 죽이는 자들을 무서워하지 말고 우리의 영을 심판하시는 이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주님이 원하시는 길을 가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