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데기 종교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15. 껍데기 종교) / 본문 : 마 20:29-34
“29 저희가 여리고에서 떠나 갈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좇더라 30 소경 둘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31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32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희를 불러 33 가라사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우리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34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저희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저희가 예수를 좇으니라”
홈런을 쳐 본 선수는 배트에 와 닿는 공의 느낌으로 담장을 넘길 만큼의 비(飛) 거리를 알아챌 수 있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의 정미함과 완전함은 그것을 경험해 본 사람이 아니라면 실존적으로 깨닫기 어렵습니다. 저는 여러분께 늘 설교를 하지만 마음속으로 기도하면서 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느낄 수 있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귀가에 메아리치는 소리가 아니라 가슴을 파고드는 생명의 소리가 되게 달라고 말입니다.
사실, 삶에 관한 한 우리는 모두 소경입니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미래는 가리워 져 있고 내일은 우리의 손안에 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치 우리 삶의 방향타를 우리가 어찌할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을 하며 살아갑니다. 우리의 믿음은 껍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존적이라야 합니다.
누에나 애벌레를 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자기가 살던 집을 쏙 빠져나와 집은 버리고 자신은 나비가 될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빠져나온 집은 이제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껍데기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모습도 껍데기를 버리고 나온 나비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라고 합니다. 우리가 과거에 매여 있고 형식에 빠져있다면 우리는 새것이 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껍데기 종교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껍데기 신앙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 그리고 두 소경과 무리가 나옵니다. 같은 본문이 마가복음 10:46-52절에도 나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한 소경의 이름은 바디매오라고 일러줍니다. 그리고 소경에만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소경뿐만 아니라 주변의 상황도 우리에게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31절에 무리라고 소개된 사람들 속에는 제자들이 중심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막 10:46)라고 나옵니다.
마태는 왜 소경들이 예수께 나아오는 것을 무리(제자)가 금했는지는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짐작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호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사명을 수행 중에 있습니다. 본문이 마치는 시점에서 바로 예루살렘에 입성하게 됩니다(마 21장, 막 11장). 이것이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직전에 있었던 예수님의 마지막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수많은 병자와 환자들이 예수님을 쫓았습니다. 그리고 예외 없이 예수님은 그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나아오는 것도 금하는 제자들을 호통치신 적이 있습니다(마 19:14). 지금 예루살렘성에 입성하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마지막 주간을 보내시게 되지만 지금 제자들은 그렇게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동안은 예수님이 한마디로 충분히 민심을 얻으신 것이고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왕이 되실 예수님께서 이제 미천한 소경 따위에 신경 쓰실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예전처럼 예수님께 아무나 나아오는 것을 금지해야 된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냄새나고 역겹고 성가신 자들일 뿐 예수가 왕이 되실 분인데 예의범절도 모르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따라오는 그들을 이제 더 이상 그대로 놓아둘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의 의도가 아무리 순수했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행동은 명백히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비천하고 무능한 자에게 관심을 두실 틈이 없다면, 품위 없는 자들에 대해서 박대하신다고 생각한다면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 또한 그러한 자들이 아니었습니까. 그 누구라도 예수님의 주변에서 예수께 나아가는 것을 막는다면 그것은 텅빈 공허한 종교, 껍데기 종교에 불과할 것입니다.
이런 비슷한 일이 교회에서도 생겼습니다. 제1년 후배가 아시아 00나라에서 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 지역에서 제일 큰 초, 중, 고 사립학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후원교회에서 문제가 일어난 것입니다. 지금까지 잘 후원해 주던 교회인데 목사님과 장로님들 사이에 오해가 생겨서 그만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교회안에서 두 그룹으로 갈라져서 서로 주일 오전 예배 때 강대상을 차지하려고 몸싸움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유야 어떻든 이런 모습은 절대 교회에서 일어나면 안 됩니다. 결국 교회가 자체적으로 해결하지 못해 세상 법정으로 가지고 갔습니다. 재판을 담당한 분은 또 다른 교회 집사님 이었습니다. 그 앞에 장로님 목사님이 선 것입니다.
그 교단은 보수적으로 유명한 교단입니다. 예전에 미국의 선교사님 한 분이 비행기 타고 공항에 도착했는데 마침 주일이었습니다. 잠시 공항에 마중을 나간 목사님이 계셨는데 그 교단으로부터 탈퇴를 당했습니다. 좀더 지혜로웠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있습니다. 다른 분을 대신 나가게 했더라면 하는 생각입니다. 그러면 또 문제가 생기겠지요. 목사님은 안되고 집사님은 나가도 되는지… 이런 일을 가지고 토론을 하면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하고 한 사람은 저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런 일들을 통해서 우리는 교회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야 합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자신들은 필요한 조치를 하는 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예수님을 꼭 만나할 소경의 길을 막은 것입니다. 우리는 바른 일을 한다고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께 가려는 소경의 길을 막고있지는 않나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예전에 남왕국(유다) 13대왕인 종교개혁을 실시한 히스기야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짓 신 우상을 버리고 참되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촉구한 왕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유월절을 지키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백성들이 유월절을 너무나 오랫동안 지키지 않았기에 어느 누구도 유월절을 지킬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제사장들조차 우상 숭배를 했었기 때문에 유월절 의식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문제는 하나님께서는 첫 달 14일에 유월절을 지키라고 명령하셨는데 히스기야기 백성을 소집한 달은 둘째 달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유월절은 부정한 자들에 의해서 한달 늦게 지켜져야 했습니다. 그때 히스기야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18 에브라임과 므낫세와 잇사갈과 스불론의 많은 무리는 자기를 깨끗케 하지 아니하고 유월절 양을 먹어 기록한 규례에 어긴지라 히스기야가 위하여 기도하여 가로되 선하신 여호와여 사하옵소서 19 결심하고 하나님 곧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는 아무 사람이든지 비록 성소의 결례대로 스스로 깨끗케 못하였을지라도 사하옵소서”(대하 30:18-19)
비록 방법은 빈약했지만 동기가 순수한 경우 “여호와께서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백성을 고치셨더라”(대하 30:20)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쉽고도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기도입니다. 기도가 제일 쉬운 것 같지만 제일 어려운 것이기도 합니다. 사단이 제일 방해하는 것 중의 하나가 기도입니다.
기도를 왜 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다면 기도는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부족한 것뿐이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껍데기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아빠를 위해서 배운 노래를 들려줍니다. 음악적인 관점에서 볼 때 박자와 음정은 모두 엉망입니다. 그러나 아빠를 위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부릅니다. 아빠는 이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모든 절차와 형식을 무시하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바른 동기와 방법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유월절을 위해서는 충분히 준비하고 정결케하여 정해진 일정에 맞추어 지내야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렇게 하지 못할 상황과 때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소경의 입장이 그렇습니다. 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제자들은 시끄럽다고 했지만 예수님은 조용히 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에게 그 엉터리 같은 의식을 중단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빠는 최선을 다하는 아이에게 “그만 됐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소경과 히스기야 어린아이는 모두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 29:13)
제가 중학생 때 있었던 일입니다. 우리 집 뒤에 일본으로 시집가서 살고있는 여자 분이 계셨습니다. 일본에서 친정 집에 오는데 동네 사람들 선물까지 사 가지고 온 것입니다. 우리 집도 가깝게 지냈으니 당연히 선물이 왔습니다. 큰 박스가 하나 도착했는데 밥통이 왔습니다. 예전에 시골에서 전기밥통은 꽤 인기가 많았습니다. 너무 귀한 것이고 어머님은 꼭 같고 싶어하시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잘못 왔다면서 라면 두세 개와 바꿔 갔습니다. 전달한 사람이 잘못 전달한 것입니다. 우리 집 식구들은 몹시 민망하고 황당했습니다. 그 후부터는 선물이라고 하면 겁이 납니다. 저는 그 때 빨리 돈 벌어서 어머님 밥통을 먼저 사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물과 부르심에는 후회함이 없습니다(롬 11:29). 하나님은 배달사고가 없으신 참으로 신실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나쁜 것을 놀라운 축복으로 바꿔주십니다. 우리의 수치스러운 것을 자랑으로 바꿔 주십니다. 소경의 부르짖는 소리를 아름다운 노래 소리로 만들어 주십니다. 그들은 눈을 뜨고 깡총 깡총 뛰면서 호산나를 부르며 예루살렘으로 예수님의 무리와 함께 향했을 것입니다.
본문 34절에서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라고 합니다. 3년이 넘게 함께 지낸 제자들이 이제 일주일이면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가르칠 시간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런 제자들이 앞서서 예수님께 나오는 소경의 앞을 막았다는 것이 예수님을 민망하게 만들었습니다.
출퇴근하는 목사님께서 늘 다니시던 지하철역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 장애인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너무 측은한 생각과 마음의 영적 충동이 생겨 그의 주위를 서성거렸습니다. 마침 오고 가는 행인들이 뜸하여 그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하셨다고 합니다. “형제님, 저는 목사입니다. 제가 형제님의 영육을 위해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어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기를 기도하겠으니 눈을 감으세요!”
그랬더니 그가 이렇게 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걸하면서 먹고살도록 저를 그냥 이대로 놔두세요. 그리고 은과 금이 없다고 하시는데 혹시 사모님 몰래 숨겨둔 것이 있으시면 다음에라도 좀 주시겠어요?” 이분은 목사님을 참 민망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의 기회를 잃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얼마나 민망하게 만들어 드렸습니까? 주님의 사랑을 전한다고 하면서 주님 앞으로 가는 사람들을 막고 있지는 않은 지요? 기독교가 이슬람에 비해서 왜 전파가 느린지 한가지 단서는 기독교는 너무 어렵다는 것입니다. 신학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진정 알맹이를 잃어버리는 껍데기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소경을 무시해 버려야 하는 세상 왕은 하나님께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