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데기 종교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15. 껍데기 종교) / 본문 : 마 20:29-34

“29 저희가 여리고에서 떠나 갈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좇더라 30 소경 둘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31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32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희를 불러 33 가라사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우리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34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저희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저희가 예수를 좇으니라”

홈런을 쳐 본 선수는 배트에 와 닿는 공의 느낌으로 담장을 넘길 만큼의 비(飛) 거리를 알아챌 수 있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의 정미함과 완전함은 그것을 경험해 본 사람이 아니라면 실존적으로 깨닫기 어렵습니다. 저는 여러분께 늘 설교를 하지만 마음속으로 기도하면서 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느낄 수 있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귀가에 메아리치는 소리가 아니라 가슴을 파고드는 생명의 소리가 되게 달라고 말입니다.
사실, 삶에 관한 한 우리는 모두 소경입니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미래는 가리워 져 있고 내일은 우리의 손안에 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치 우리 삶의 방향타를 우리가 어찌할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을 하며 살아갑니다. 우리의 믿음은 껍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존적이라야 합니다.

누에나 애벌레를 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자기가 살던 집을 쏙 빠져나와 집은 버리고 자신은 나비가 될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빠져나온 집은 이제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껍데기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모습도 껍데기를 버리고 나온 나비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라고 합니다. 우리가 과거에 매여 있고 형식에 빠져있다면 우리는 새것이 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껍데기 종교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껍데기 신앙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 그리고 두 소경과 무리가 나옵니다. 같은 본문이 마가복음 10:46-52절에도 나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한 소경의 이름은 바디매오라고 일러줍니다. 그리고 소경에만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소경뿐만 아니라 주변의 상황도 우리에게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31절에 무리라고 소개된 사람들 속에는 제자들이 중심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막 10:46)라고 나옵니다.
마태는 왜 소경들이 예수께 나아오는 것을 무리(제자)가 금했는지는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짐작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호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사명을 수행 중에 있습니다. 본문이 마치는 시점에서 바로 예루살렘에 입성하게 됩니다(마 21장, 막 11장). 이것이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직전에 있었던 예수님의 마지막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수많은 병자와 환자들이 예수님을 쫓았습니다. 그리고 예외 없이 예수님은 그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나아오는 것도 금하는 제자들을 호통치신 적이 있습니다(마 19:14). 지금 예루살렘성에 입성하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마지막 주간을 보내시게 되지만 지금 제자들은 그렇게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동안은 예수님이 한마디로 충분히 민심을 얻으신 것이고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왕이 되실 예수님께서 이제 미천한 소경 따위에 신경 쓰실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예전처럼 예수님께 아무나 나아오는 것을 금지해야 된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냄새나고 역겹고 성가신 자들일 뿐 예수가 왕이 되실 분인데 예의범절도 모르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따라오는 그들을 이제 더 이상 그대로 놓아둘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의 의도가 아무리 순수했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행동은 명백히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비천하고 무능한 자에게 관심을 두실 틈이 없다면, 품위 없는 자들에 대해서 박대하신다고 생각한다면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 또한 그러한 자들이 아니었습니까. 그 누구라도 예수님의 주변에서 예수께 나아가는 것을 막는다면 그것은 텅빈 공허한 종교, 껍데기 종교에 불과할 것입니다.

이런 비슷한 일이 교회에서도 생겼습니다. 제1년 후배가 아시아 00나라에서 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 지역에서 제일 큰 초, 중, 고 사립학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후원교회에서 문제가 일어난 것입니다. 지금까지 잘 후원해 주던 교회인데 목사님과 장로님들 사이에 오해가 생겨서 그만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교회안에서 두 그룹으로 갈라져서 서로 주일 오전 예배 때 강대상을 차지하려고 몸싸움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유야 어떻든 이런 모습은 절대 교회에서 일어나면 안 됩니다. 결국 교회가 자체적으로 해결하지 못해 세상 법정으로 가지고 갔습니다. 재판을 담당한 분은 또 다른 교회 집사님 이었습니다. 그 앞에 장로님 목사님이 선 것입니다.

그 교단은 보수적으로 유명한 교단입니다. 예전에 미국의 선교사님 한 분이 비행기 타고 공항에 도착했는데 마침 주일이었습니다. 잠시 공항에 마중을 나간 목사님이 계셨는데 그 교단으로부터 탈퇴를 당했습니다. 좀더 지혜로웠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있습니다. 다른 분을 대신 나가게 했더라면 하는 생각입니다. 그러면 또 문제가 생기겠지요. 목사님은 안되고 집사님은 나가도 되는지… 이런 일을 가지고 토론을 하면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하고 한 사람은 저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런 일들을 통해서 우리는 교회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야 합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자신들은 필요한 조치를 하는 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예수님을 꼭 만나할 소경의 길을 막은 것입니다. 우리는 바른 일을 한다고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께 가려는 소경의 길을 막고있지는 않나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예전에 남왕국(유다) 13대왕인 종교개혁을 실시한 히스기야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짓 신 우상을 버리고 참되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촉구한 왕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유월절을 지키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백성들이 유월절을 너무나 오랫동안 지키지 않았기에 어느 누구도 유월절을 지킬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제사장들조차 우상 숭배를 했었기 때문에 유월절 의식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문제는 하나님께서는 첫 달 14일에 유월절을 지키라고 명령하셨는데 히스기야기 백성을 소집한 달은 둘째 달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유월절은 부정한 자들에 의해서 한달 늦게 지켜져야 했습니다. 그때 히스기야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18 에브라임과 므낫세와 잇사갈과 스불론의 많은 무리는 자기를 깨끗케 하지 아니하고 유월절 양을 먹어 기록한 규례에 어긴지라 히스기야가 위하여 기도하여 가로되 선하신 여호와여 사하옵소서 19 결심하고 하나님 곧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는 아무 사람이든지 비록 성소의 결례대로 스스로 깨끗케 못하였을지라도 사하옵소서”(대하 30:18-19)
비록 방법은 빈약했지만 동기가 순수한 경우 “여호와께서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백성을 고치셨더라”(대하 30:20)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쉽고도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기도입니다. 기도가 제일 쉬운 것 같지만 제일 어려운 것이기도 합니다. 사단이 제일 방해하는 것 중의 하나가 기도입니다.
기도를 왜 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다면 기도는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부족한 것뿐이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껍데기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아빠를 위해서 배운 노래를 들려줍니다. 음악적인 관점에서 볼 때 박자와 음정은 모두 엉망입니다. 그러나 아빠를 위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부릅니다. 아빠는 이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모든 절차와 형식을 무시하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바른 동기와 방법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유월절을 위해서는 충분히 준비하고 정결케하여 정해진 일정에 맞추어 지내야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렇게 하지 못할 상황과 때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소경의 입장이 그렇습니다. 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제자들은 시끄럽다고 했지만 예수님은 조용히 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에게 그 엉터리 같은 의식을 중단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빠는 최선을 다하는 아이에게 “그만 됐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소경과 히스기야 어린아이는 모두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 29:13)

제가 중학생 때 있었던 일입니다. 우리 집 뒤에 일본으로 시집가서 살고있는 여자 분이 계셨습니다. 일본에서 친정 집에 오는데 동네 사람들 선물까지 사 가지고 온 것입니다. 우리 집도 가깝게 지냈으니 당연히 선물이 왔습니다. 큰 박스가 하나 도착했는데 밥통이 왔습니다. 예전에 시골에서 전기밥통은 꽤 인기가 많았습니다. 너무 귀한 것이고 어머님은 꼭 같고 싶어하시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잘못 왔다면서 라면 두세 개와 바꿔 갔습니다. 전달한 사람이 잘못 전달한 것입니다. 우리 집 식구들은 몹시 민망하고 황당했습니다. 그 후부터는 선물이라고 하면 겁이 납니다. 저는 그 때 빨리 돈 벌어서 어머님 밥통을 먼저 사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물과 부르심에는 후회함이 없습니다(롬 11:29). 하나님은 배달사고가 없으신 참으로 신실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나쁜 것을 놀라운 축복으로 바꿔주십니다. 우리의 수치스러운 것을 자랑으로 바꿔 주십니다. 소경의 부르짖는 소리를 아름다운 노래 소리로 만들어 주십니다. 그들은 눈을 뜨고 깡총 깡총 뛰면서 호산나를 부르며 예루살렘으로 예수님의 무리와 함께 향했을 것입니다.

본문 34절에서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라고 합니다. 3년이 넘게 함께 지낸 제자들이 이제 일주일이면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가르칠 시간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런 제자들이 앞서서 예수님께 나오는 소경의 앞을 막았다는 것이 예수님을 민망하게 만들었습니다.

출퇴근하는 목사님께서 늘 다니시던 지하철역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 장애인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너무 측은한 생각과 마음의 영적 충동이 생겨 그의 주위를 서성거렸습니다. 마침 오고 가는 행인들이 뜸하여 그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하셨다고 합니다. “형제님, 저는 목사입니다. 제가 형제님의 영육을 위해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어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기를 기도하겠으니 눈을 감으세요!”
그랬더니 그가 이렇게 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걸하면서 먹고살도록 저를 그냥 이대로 놔두세요. 그리고 은과 금이 없다고 하시는데 혹시 사모님 몰래 숨겨둔 것이 있으시면 다음에라도 좀 주시겠어요?” 이분은 목사님을 참 민망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의 기회를 잃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얼마나 민망하게 만들어 드렸습니까? 주님의 사랑을 전한다고 하면서 주님 앞으로 가는 사람들을 막고 있지는 않은 지요? 기독교가 이슬람에 비해서 왜 전파가 느린지 한가지 단서는 기독교는 너무 어렵다는 것입니다. 신학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진정 알맹이를 잃어버리는 껍데기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소경을 무시해 버려야 하는 세상 왕은 하나님께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자기 성찰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14. 자기 성찰) / 본문 : 막 7:15-16

“15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16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

오늘 제목을 보고 벌써 듣기(보기)싫어하는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남의 이야기하면 재미있는데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 싫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성찰에서 멀어집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오늘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자신을 너무 믿지 말아야 합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렘 17:5)고 했습니다. 우리는 원래가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는 깨끗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자신은 아무 흠이 없다거나 깨끗하다고 하면 그것이 곧 거짓말입니다. 우리나라 3대 거짓말은 나이 드신 분들이 ‘빨리 죽어야지’ 두 번째 처녀가 ‘시집 안 간다’ 세 번째는 ‘물건 밑지고 파는 거야’랍니다. 3대 거짓말 다음으로는 중국집에 전화하면 ‘방금 출발했어요~ ‘, 정치가들이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교장선생님이 ‘마지막으로…’, 옷가게 주인이 ‘어머! 언니한테 딱이야~ ‘, 간호사가 ‘이 주사는 하나도 안 아파요’인데 제가 맞아봤는데 엄청 아픕니다. 그런데 진짜 거짓말은 자신은 거짓말 안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기억력이나 이해력이 부족해서 총명하다고 하는 분들도 조금만 방심하면 곧 잃어버리고 맙니다. 우리는 너무 무지해서 자아 성찰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그로 인해 악행을 저지르기 쉽고, 자신을 변명하다가 더 나쁜 죄악으로 빠져들곤 합니다. 우리는 간혹 격정(激情)에서 비롯된 행동을, 열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잘못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남을 비난하면서도 자신의 큰 결함은 보지 못합니다(마 7;3). 몇 해전에 가톨릭에서 “네 탓입니다”라는 구호를 만들고 이것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자동차에다 붙이고 다니는 분들이 자동차 뒤편 유리에 붙이고 다니는 겁니다. 그러면 누가 봅니까? 뒤에 따라오는 차가 보지요. 그럼 누구 탓입니까?
우리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모욕을 당하면 쉽게 알아차리고 깊게 생각하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행하는 모욕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자기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공정하고 냉정하게 평가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에게 아무렇게나 말하고 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1.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처음 세상을 창조했을 때는 모는 것이 평화로웠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짓고 불평만 해대고 서로 미워하기 때문에 세상은 혼란스러워 졌습니다. 세상을 다시 아름답고 평화롭게 만들기 위해 하나님은 인간을 파멸시키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하지만 천사들은 이에 반대했습니다.
“구태여 인간을 파멸시키려고 노력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우리가 그들을 떠나 버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천사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면 어디로 가는 것이 좋겠는가?”
“최고로 높은 산으로 가면 어떨까요?” 신은 고개를 가로 저었습니다.
“그대는 아직도 모르고 있군. 아무리 높은 산이라도 인간들은 정복하고 말 것이네.”
그러자 다른 천사가 말했습니다. “달로 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인간들은 좋은 머리를 이용해 달까지 쫓아올 것이네”
그때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한 천사가 입을 열었습니다.
“우리들은 사람들 안에 숨어야 합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밖에서 찾아 헤매지, 자신의 내면세계에는 무관심하여 결코 자신의 내면을 고요히 바라보는 일 따위는 없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를 찾아내는 일은 아마 없을 겁니다.”
하나님은 그저 머리만 끄덕였습니다. 하나님은 돌멩이에도 풀잎에도 작은 세 속에도 깃들여 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 속에도 계십니다.

스가랴는 이렇게 증거 합니다. “이스라엘에 관한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라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자가 가라사대”(슥 12:1)라고 합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가 우리 안에 계십니다.

2. 율법으로 자신을 찾지 못한 종교지도자들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자신을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행위의 정당성만을 예수께 강조했습니다. 구약성경 레위기 11장과 신명기 14:3-21절에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이 구별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구약성경에서 정한 것 외에도 더 강화시켜서 지키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먹는 음식을 통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거룩하게 구별된 민족으로 삼으시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단순히 음식을 구별하여 먹게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구별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참된 뜻을 찾지 못하고 그 율법에 얽매이게 되어 원래 하나님의 취지대로 사용되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옷을 빨도록 한 규정을 통해서 사람의 내면이 얼마나 깨끗하게 되는가에 더 관심을 두어야 하는데 옷만 빠는 것으로 다 된 것으로 생각하게 되어 율법의 취지를 벗어난 것입니다.
이런 자들을 가리켜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마 23:25)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더 이상 이렇게 오용되는 음식 율법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본문 15-16절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3. 이스라엘 민족 이동으로 본 자기성찰

이스라엘 민족은 두 번에 걸친 민족의 대 이동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애굽에서 종살이하다 탈출해 나온 것입니다. 이 때의 인도자는 모세였고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제정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대가 망하고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게 잡혀가 70년 간 종살이하다가 고레스가 B.C. 539년 10월에 바벨론을 정복하고 이듬해인 B.C. 538년에 유대인의 귀환을 허락하는 조서를 내립니다. 그리고 모두 세 차례에 걸쳐 귀환이 이루어집니다.

첫 번째 출애굽과정에서는 하나님의 역사가 많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하나님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불평을 계속해서 쏟아냅니다. 물이 없다고 해서 물을 주십니다(민 20:13, 24). 출애굽 내내 만나를 주셨습니다(출 16:33). 만나만 먹다가 고기가 먹고싶다고 해서 메추라기를 주십니다(출 16:13). 낮에는 뜨거운 태양 빛을 가리기 위해서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민 14:14) 인도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국 하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민수기 14:1에 보면 가나안 땅을 탐지하고 돌아온 정탐군들이 보고했을 때 백성들은 밤새도록 울었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을 완전히 실망시켜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나를 믿지 않겠느냐(민 14:10)고 하십니다.

두 번째 민족적 대 이동은 바벨론에서 귀환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사왕 고레스는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로 유대인의 귀환을 공포했을 뿐만 아니라 조서도 내리면서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스 1:2)라고 하면서 빨리가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2차로 에스라와 함께 귀환하는 사람들은 “우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스 7:27)하며 하나님을 찬양했으며 에스라 8:21에는 “때에 내가 아하와 강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것과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출애굽 때 불평만 하던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입니다. 오히려 바벨론에서 귀환하는 이들에게는 출애굽 때처럼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찬양을 돌렸을 뿐만 아니라 금식을 하면서 갔습니다. 출애굽때의 사람들은 먹을 것에 대한 많은 불만을 내었지만 에스라와 함께한 이들은 오히려 금식하며 갔습니다. 스 8:21에 “스스로 겸비하여”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히브리어 ‘t/N['t]hil]:레히트아노트’인데 ‘괴로움을 당하다, 낮추다, 고통’의 뜻이 있는 ‘hn:[:아나’ 동사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 말은 자신을 스스로 쳐서 복종시킴같이 완전한 순종적 자세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같은 길을 떠나는 사람들인데 처음 출애굽 때와 바벨론에서 귀환하는 모습이 다릅니다.

이동하면 빠질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기러기입니다. 그래서 이런 노랫말도 있습니다. “아침바람 찬바람에 울고 가는 저 기러기 우리 선생 계신 곳에 엽서 한 장 써 주세요” 겨울이 되면 기러기는 V자 대형으로 남쪽으로 날아가는데 V자 대형으로 날아가면 앞에서 나는 새들이 날개를 저으면 뒤에서 따라오는 새를 위한 상승기류가 만들어지기 때문에 전체 기러기 때는 혼자 날아가는 것보다 71퍼센트를 너 멀리 날수 있답니다. 또한 맨 앞에서 날아가는 기러기가 지치면 뒤쪽으로 물러나고 금방 뒤에 따르던 기러기가 앞장을 섭니다. 그러므로 기러기 떼는 대열의 앞장에 서려고 싸우는 법도 없고 꼴찌라고 하여 열등감을 갖는 일도 없습니다. 또한 기러기가 병에 걸리거나 다쳐서 대열에서 낙오되면 두 마리의 다른 기러기들이 그 기러기와 함께 대열에서 떨어져 그 기러기가 지상에 내려갈 때까지 도와주고 보호해 줍니다. 같이 간 기러기들은 다시 날 수 있을 때까지, 아니면 죽을 때까지 함께 머문답니다. 또한 서로의 힘을 돕기 위해서 울음소리를 크게 냅니다. 자기 자신을 모르고서는 협력이 불가능합니다. 자신만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은 이 땅에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7:21절에서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축복을 해 주시기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

중앙아메리카 서쪽으로 카리브 제도가 있습니다. 그런데 카리브 제도는 서인도 제도(West Indies)로 부르기도 합니다. ‘서인도 제도’라는 이름은 크리스토퍼 콜롬부스가 아메리카에 도착했을 때 인도에 도착했다고 오해한데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인도는 알고 있었는데 새 대륙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본 것만을 생각하게 되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내 안에서 하나님을 찾는 노력이 계속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주에 어느 곳에나 계시지만 동시에 내 안에 계신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손에 들고 무엇을 찾는 사람보다 더 한심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자기 안에 계신 성령의 존재를 모르는 것입니다.
좀더 영적인 사람이 되려면 “오로지 하나님 한 분과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 이외에는 어떠한 것도 위대하거나 고귀하거나 즐겁거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도록 하라.”고 토마스 아켐피스는 말합니다.

두 친구가 여행을 하던 도중에 커다란 곰을 만났습니다. 한 친구는 재빨리 옆에 있는 나무 위로 기어올라가 버렸습니다. 나머지 한 사람은 곰은 죽은 동물은 손을 안 댄다는 말이 생각나 얼은 엎드려 죽은 척 하였습니다. 곰이 다가와 엎으려 있는 사람의 귀를 핥으며 무슨 말인가 하고 가버렸습니다.
나무에서 내려온 사람이 아까 곰이 무슨 말을 하더냐고 물었습니다.
“위기에 처한 친구를 혼자 두고 도망치는 친구하고는 같이 다니지 말라 하더군”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라고 했습니다. 또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라고 합니다. 자기 자신을 믿지 안 되 자신 안에서 역사 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비유(24) 끝자리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13. 예수님의 비유(24) 끝자리) / 본문 : 눅 14:7-14

“7 청함을 받은 사람들의 상좌 택함을 보시고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가라사대 8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상좌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9 너와 저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말석으로 가게 되리라 10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 11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12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13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14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

기독교의 가치관과 본질은 영성에 있습니다. 영성 그러니까 마치 환상이나 꿈을 꾸고 거품을 토하면서 방언기도를 해야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진정한 영성이란 그런 것이 아니라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이 기준이 되는 것. 이것이 기독교의 영성입니다. 세상 적인 기준은 물질, 성공, 출세, 명예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가톨릭 신부는 개신교 목회자와 비교해 볼 때 독신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이 세상의 가치에 덜 얽매어 있습니다. 한 사회학자 연구에 따르면 직업인의 정직 윤리 수준 평가에서 신부가 1위, 승려가 3위, 목사는 5위로 나타났습니다. 목사가 도덕성에 있어서 신부나 승려보다 못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목사에 대한 평가는 교회에 대한 평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 전국 감리교 목회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영성, 도덕성이라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말로는 영성을 위치지만 실상은 영성을 잃어가고 세상 적인 가치에 물들어 있는 것입니다.

2005년 8월 25일에 인천 국제 공항에서 미국 로스엔젤레스로 향하던 항공기가 이륙 한 지 10분만에 5살 난 ‘제시카’라는 여자 어린아이가 구토 증세를 보이다가 의식을 잃었습니다. 엄마는 다급한 목소리로 아이를 살려달라고 외쳤고 승무원들이 달려왔습니다. 승무원들은 아이에게 산소 마스크를 씌우고 해열 좌약을 투여했습니다. 그리고 의사가 있는지 확인을 했더니 의사 단체가 탑승 중이었습니다.
그렇게 10여분간의 소생술 끝에 아이가 깨어났습니다. 그동안 딸 옆에서 지켜보던 엄마는 인천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한 재미교포 의사는 “기압 차이로 인해서 아이의 감기 증상이 갑자기 악화돼 고열과 경련이 발생했다”며 “아이가 LA까지 12시간의 비행을 견디기는 무리”라고 소견을 밝혔습니다. 이런 상황을 전해들은 기장은 곧 바로 회항을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항공기는 승용차가 아니기 때문에 회항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항공기가 착륙할 때는 랜딩기어가 활주로에 닿으면서 100t에 가까운 충격이 더해진다고 합니다. 항공기 안전을 위해 중량을 최대한 줄여야 하고, 이에 따라 모든 항공기는 공항에 이착륙할 수 있는 무게 제한이 있습니다. 인천~로스앤젤레스 노선에 투입되는 기종인 보잉 747의 최대 이륙 중량은 388.7t이지만 최대 착륙 중량은 285.7t이어서, 착륙을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항공유를 처리해야 했습니다. 기장은 고심 끝에 항공유를 버리기로 하고 인천 앞 바다 부근에 있는 항공유 방출구역에 약 16만 8000파운드(약 72.6t)의 기름을 쏟아 부었습니다. 착륙무게를 맞춘 항공기는 인천 국제 공항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 아이는 대기 중이던 구급차로 병원으로 이송되어 회복된 후 귀가했습니다. 그리고 항공기는 재급유 후에, 처음 출발 시간보다 3시간 늦게 다시 로스엔젤레스로 향했습니다. 이 날 항공회사는 기름 값으로 4,000만원, 이착륙료, 연결 승객 관련 경비로 1,000만원 등 모두 5,000만원의 손해를 보았습니다. 한 생명은 5,000만원과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치 가던 비행기가 되돌아 온 것처럼 세상을 향하던 우리의 방향을 예수께로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마땅히 손실이 있어도 감수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를 살리는 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이 일러 주시는 참된 기독교의 가치관과 영성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이 시작하기 전에 누가복음 14장 1절에서부터 보면 안식일에 예수님이 병을 고치는지 바리새인들이 따라다니며 엿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시선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고창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아주 민감하게 생각하는 안식일 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사시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세상 사람들(바리새인)과는 달라야 된 다는 것을 비유로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높은 자리

예수님을 식탁에 초대한 이 사람은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서 초대했습니다. 무언중에 이들은 자기가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예수님은 저 아래 어느 한쪽에 앉아 계시게 되면 그것은 바로 예수를 모욕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본문 7절 “청함을 받은 사람들의 상좌 택함을 보시고”라고 시작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 까지는 실제로 일어난 일입니다. 유대인들의 잔치자리는 디귿 자 형태로 되어있데 초청을 받은 사람들은 가운데 자리에 앉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바리새인들의 교만을 특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막 12:38, 39).
1950년대 미국의 지성을 대표하던 라인흘드 니버 교수는 인간의 타락은 교만 때문이라고 지적한 일이 있습니다. 인간의 교만은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첫째는 권력의 교만이요, 그 다음은 지식의 교만이요, 그리고 덕망의 교만이라는 것입니다. 권력을 잡은 사람은 권력을 잡기까지는 가장 약한 위치에서 자신의 당선을 호소하며 매달리다가도 일단 권력의 정상을 정복하고 나면 자신을 절대화하는 경향이 농후합니다. 마침내 그것은 살아 있는 우상이 되어 자신을 그 자리에 치켜세운 사람 앞에 군림하는 것입니다. 세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에는 “사다리 꼭대기에 다 올라간 사람은 아래만 내려다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사람은 모든 사람을 내려다본다는 말입니다.
윗자리에서 보면 내려다 보게됩니다. 전체를 다 보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저는 뉴스를 보다가 처음에 이해하지 못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깜도 안 된다.” 자꾸만 그런 말을 하는데 대통령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저의 국어 지식이 깊지는 못하지만 국어를 공부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중의 한 사람인데 이 말이 어려웠습니다. 저는 대통령 때문에 이 말을 그렇게도 사용하는구나 알았습니다. 높은데 계시니까 “깜도 안되겠지요.” 높은 자리에 앉아 있으면 멀리 주변에 있는 것들은 보일랑 말랑해서 자연스럽게 작은 것들을 무시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높은 자리는 영적인 사람에게는 결코 좋은 자리가 아닙니다.

낮은 자리

예수님이 우리에게 ‘맨 끝자리’에 앉으라고 하신 것은 그 자리가 겸손과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게 해 주며 다른 사람에게 이래라, 저래라 명령과 지시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낮은 자리, 끝자리에 앉으면 가난한 사람, 절름발이, 소경 같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윗자리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을 보게됩니다. 윗자리에 앉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오만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본을 보여 주신 것은 낮은 자리입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성육신 하신 모습입니다.
집회서 10:12 “오만은 주님을 저버리는데서 시작되고 사람의 마음이 창조주에게서 멀어질 때 생긴다”고 했습니다. 15절에서는 “주님께서는 오만한 민족을 뿌리째 뽑아내시고 그 자리에 겸손한 자들을 심으신다”고 하셨으며 18절에서는 “오만은 인간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요…”라고 했습니다.

링컨의 일화 한 토막입니다. 옛날 백악관 곁에는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있었다고 합니다. 링컨 대통령은 가끔 울타리까지 나와서 아이들의 노는 모습을 구경하였습니다. 어느 날 그는 몇 명의 아이들이 한 소년을 놀리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소년은 몹시 허름한 차림이었는데 아빠는 전쟁에서 전사하고, 엄마는 청소부였습니다. 구두를 닦아 반질반질하게 해서 신고 오라는 선생님의 말씀이 있었으나 구두가 너무나 낡아 닦을 수도 없어 놀림감이 된 것이었습니다. 그 소년은 겨우 아홉 살 난 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튿날 존의 집에서는 큰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존의 새 옷과 새 구두, 여동생의 새 옷과 새 구두, 그리고 많은 식료품과 석탄을 링컨 대통령이 보냈던 것입니다. 존은 새 구두를 신고 자랑스럽게 등교했습니다. 그리고 그 날 학생들을 더 놀라게 한 것은 대통령이 존의 교실에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링컨은 성경 구절 하나를 소개하겠다면서 칠판에 다음의 글을 적어 놓았다.

마 25: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진정한 높고 낮음

본문 11절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눅 18:14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와 마 23: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가 나옵니다. “낮아지고”(will be humbled, NIV)와 “높아지리라”(will be exalted, NIV)의 문장은 ‘수동태’로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높고 낮아짐이 인간의 편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높은 자리에 앉아 있다고 높아진 것이 아니며 낮은 자리에 앉아 있다고 낮은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녔는데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두 번이나 있었습니다. 그 때 다윗은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자락을 가만히 베니라”(삼상 24:4) 그리고 사울은 이 일 후에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삼상 24:17)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교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여인들의 말을 듣고 우상숭배를 하였습니다. 이후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로 이스라엘은 나누어 집니다. 그리고 유다와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까지 유다에는 20명의 왕이 있었고 이스라엘은 19명의 왕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선한 왕이 하나도 없었고, 유다에만 8명의 선한 왕이 있었습니다. 선한 왕으로 보는 유다 8대왕 요아스는 말년에 우상을 섬겼으며(대하 24:1-27), 10대왕 웃시야는 자기가 제단에 분향하려다 문둥병이 걸렸습니다(대하 26:16-23). 왕의 타락의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교만입니다.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믿고 따르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전도하고 선교하는 것은 우리의 신분을 과시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러하다면 우리는 스스로 상좌에 앉아있는 자들입니다.

통전적 선교

통전적 선교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이에 응답하는 선교입니다. 통전적 선교는 예수님이 이 땅에 성육신 하신 것처럼 복음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통전적 선교가 무엇인지 PMI(무슬림이 사는 지역에서 사회 봉사하는 미국의 선교단체. www.pmi-usa.org)의 사이트에 잘 명시되어 있습니다. 거기에는 통전적 선교란 “복음의 말씀과 행위로 선언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함께 나누는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왕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 아니라 종이 되려고 하는 사람만이 선교적 명령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미가서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이러한 모습을 예수께서 보여주셨습니다. 사랑과 겸손으로 공의를 행하며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에 아멘이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선교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복음의 축복과, 경제적 축복, 민주 자유국가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은 책임이 있습니다. 이 지구촌에는 지금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믿기 위해서 고통 당하는 크리스천이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현재 에리트리아에는 목사와 성도들 포함하여 약 2천명이 불법 구금되어 있습니다. 이중에서 작년에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만 4명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2007년(올해) 9월 5일 미그치 하일레(33, 여) 자매가 웨아 군사훈련기지에 수감되어 가혹행위를 장기간 당한 끝에 사망했습니다. 하일레는 예수를 부정하고 이슬람으로 개종하라는 서약서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하여 장기간의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죽었습니다.

우리가 끝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마치 모든 사람들을 다 구출하고 난 후에 마지막으로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남에게 다 양보하는 것입니다. 나의 하나뿐인 생명도 양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끝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믿음이 주제입니다.

예수님의 말씀(111. 믿음이 주제입니다.) / 본문 : 막 1: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저의 어머니는 학교 교육을 전혀 받아보지 못하신 분입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저희 집에 오셔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가셨습니다만 예수를 믿기 전에는 보통의 한국 여인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이 분에게 놀라운 기억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당에게 가서 들은 이야기는 하나도 안 잊어버리고 전부 기억하고 전달하는 것입니다. 무당의 이야기를 전하는 어머님이나 듣는 저의 아버지의 모습은 진지함 그 자체입니다. 점술가가 점괘를 말할 때 허튼 짓하고 한 눈을 파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집중을 해서 무슨 말일까 하고 듣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지만 무당을 찾아가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으고 무당이 하는 말을 듣는 그 이상의 진지한 예배태도가 아니면 하나님께 예배드린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미신을 믿는 사람들도 아주 진지합니다. 어떻게 하면 굿을 잘할까? 그 굿을 하기 위한 각종 절차, 준비물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듣고 준비를 합니다. 또 부적을 얼마나 소중하게 간직하는지 모릅니다. 성경보다 훨씬 더 부적을 더 잘 간수하는 것 같습니다. 그 부적은 간수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끄집어내어 쓰다듬으면서 위로 받고 만지면서 위로 받습니다. 잘 때는 배게 밑에 넣고 잡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는 것보다 그 사람들이 더 마음을 쏟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들을 보고 신앙인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미신을 좇는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미신과 신앙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미신은 학문적으로 정의하면 이렇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능력이나 재주나 돈으로 신의 마음을 달래고 얼러서 자기 목적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는 변하지 않고 신을 달래고 얼러서 내게 좋도록 하는 게 미신이라는 것입니다. 미신을 섬기는 사람들은 미신이 좋아서 섬기는 게 아닙니다. 귀신이 좋아서 섬기는 게 아닙니다. 귀신을 달래서 내게 좋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런 미신적인 믿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한국인의 무속적 믿음에서 벗어나시기를 바랍니다.

때가 찼습니다.

물은 차면 넘치게 마련입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갈 4:4)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타락이후 구원의 계획을 마련하고 계셨습니다. 성경의 첫 권인 창세기가 마치기 전에 야곱을 통해서 예언하십니다. 창 49:8-10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9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10 홀이 유다를 떠나를 아니하며…” 그리고 아브라함을 통해서 믿음의 조상을 삼으시고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탈출시키십니다. 그리고 십계명과 말씀들을 주셨습니다. 이제 길은 보여진 것입니다.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출 24:7)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모세와 이스라엘 민족에게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신 6:6-7),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복종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과 규례를 행할지니라”(신 27:10)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여호수아 이후에 더욱 타락의 길로 빠집니다. 하나님은 여러 제사장들과 사사들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제사장들과 사사들이 먼저 죄에 빠지는 참담한 모습을 보게됩니다. 사무엘을 통해서 다윗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초대왕인 사울의 손을 피해 10년을 도피생활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유다지역에서 먼저 왕이 되어 7년 6개월을 지내다가 이스라엘과 통일되어 왕위에 오릅니다. 그리고 사무엘하 11장에서 밧세바를 범합니다. 그리고 그의 남편 우리아도 죽입니다. 간통죄에 살인죄까지 지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급기야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회개를 촉구합니다(삼하 12). 다윗은 회개했지만 이 죄의 대가로 그의 아들들의 죽음과 반역이 일어나서 모두 죽고 솔로몬만 살아남았습니다.
왕위는 솔로몬에게 넘어갔고 솔로몬은 1천 번제로 하나님의 마음을 얻는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지혜를 구하여 그 어느 왕국보다 더 강력한 나라를 세웁니다. 그러나 그는 1000명의 이방 여인들 때문에 우상숭배로 죄에 빠집니다. 이후 이스라엘은 남왕국(유다)과 북왕국(이스라엘)으로 나뉘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의 죄로 10지파를 이스라엘로(왕상 11:31, 35) 한 지파만을 유다로 남겨두십니다. 그 이유는 다윗의 등불을 끄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한 등불이 항상 내 앞에 있게 하리라”(왕상 11:36). 그리고 이후 이스라엘의 12왕과 20명의 유다왕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들도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이루는 왕은 없었습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다윗을 표준으로 제시하셨습니다.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왕상 11:4, 33, 15:3, 왕하 14:3)라는 말씀을 많이 하십니다. 드디어 하나님은 오랫동안 품으셨던 속내를 드러내십니다. 이사야를 통해서 보내실 메시야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십니다.

사 42:1-3 “1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2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3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이로서 오랜 바램이었던 유다지파의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고 다윗의 자손을 통해서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마 1:1).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예수님이 오셔서 믿음이 강조되기 시작했습니다. 세례요한의 세례가 당시 기존의 제사 입장을 뒤집는 일대 개혁이었다고 지난주 말씀에서 설명 드렸습니다. 그 이유는 구약시대 하나님을 믿는 방법은 제사를 지내는 것이었습니다. 제사는 제물이 있어야 했는데 가난한 자들은 비둘기조차도 살 수 없어 제사를 드리기 곤란해 졌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그런 제물이 필요 없는 세례를 주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물세례(침례:벱티스트)보다 더 강력한 세례를 주실 분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세례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직접 베푸시는 것인데 아무나 받을 수가 있습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계 22:17) 단 한가지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회개입니다.

믿음이 강조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구약 시대는 자신들이 제물을 바쳐서 제사를 드리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어린 양으로 직접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전 5:7) 우리는 구약과 같은 방법으로 제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히 7:18)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히 10:9)
하나님께 가는 방법이 구약은 제사였다면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믿음을 보시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 지역에 가셨을 때의 일입니다(마 8:5-13). 로마 군인 한 사람이 예수님 앞에 뛰어나왔습니다. 순간 아마 제자들은 적지아니 놀랐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예루살렘에서는 서기관과 율법사들을 통해서 감시하고 있는데 이제 로마군까지? 군장과 계급이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바로 로마군인으로 수하 100명을 거느리고 있는 백부장 이었습니다. 백부장은 자기 하인이 중풍병으로 고생하고 있으니 고쳐달라고 왔습니다. 예수께서는 가서 고쳐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자신의 수하도 오라고 하면 오고 가라고 하면 가는데 직접 가시는 것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말씀으로만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이와는 비교되는 장면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나사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한 여인이 예수께 나아왔는데 이 여인은 예수님께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기던 마리아입니다. 병이 들어 있는 오빠를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사랑하고 있었으며 당연히 가셔서 고쳐주려고 하십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현재 있는 곳 요한이 처음 세례 주던 곳인 요단강 저편(요 10:40)에서 이틀이나 더 계셨습니다. 아마도 강을 건너 유대(베다니)로 가시면 다시 이곳에 오시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그곳의 병자들과 하실 일들을 정리하시는데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 입장에서는 답답합니다. 길도 먼데 시간은 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도착했을 때는 나사로는 이미 죽은지 나흘이 되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 11:21, 32)라고 했습니다.

이에 비해서 백부장은 “말씀으로만 하옵소서”라는 말을 했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마 8:10) “기이히 여겨”의 원문 qaumavzw(다우마조)는 ‘놀라다, 감탄하다, 이상히 여기다’로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믿음에 깜짝 놀라셨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이 마 8:12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서 쫓겨나 거기서 이를 갊이 있으리라”하신 것으로 보아 유대인이 아닌 로마인이나 헬라 이방인이었을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예수님을 만나는 것도 미안하며 예수님께 수고를 끼쳐 드리는 것도 죄송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한 사건이 있습니다.
마 15:21-27절에 소개됩니다. 예수님이 두로와 시돈 지방에 가셨을 때 일입니다. 두로는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건축자제를 나르던 곳입니다(삼하 5:11, 왕상 5:7). 시돈은 여기서 북쭉으로 40Km위치에 있는 두 곳 모두 유명한 항구도시입니다.
가나안 여자 하나가 소리를 지르며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마 15:22)라고 소리치는 것입니다. 가나안 여자는 막 7:26에서 ‘수로보니게’(Syrian Phoenicia)라고 하여 이 여인의 혈통이 시리아에 거주하는 페니키아인 이었음을 말합니다. 당시 여자가 자기 딸이 미쳤다고 말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보통은 창피해서 숨겨놓고 지내는 것이 정상입니다.
예수님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것인지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시끄러워서 제자들이 듣다못해 예수님께 와서 말합니다.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그리고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마 15:24) 여자는 오자마자 예수께 넙죽절을 하며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하셨는데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마 15:27-28)
이 여자도 이방여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큰 믿음을 가졌다고 칭찬을 들었습니다. 원문에는 ‘여자야’ 앞에 ‘오(!’W)’라는 호격의 감탄사가 있습니다. 그냥 ‘여자’라고 부른 것하고는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의 놀라움과 감탄이 그대로 표현된 것입니다.

부모의 따뜻한 사랑만 받으며 자라나는 자녀는 부모님의 고마움을 잘 모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당연하다고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우리가 결손 가정이라고 말하는 가정의 아이들이 더 잘 자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모님의 고마움을 잘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유대인이라도 무조건 구원받을 자로 여긴 것이 아니라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고 했습니다. 기독교 윤리에 대해서 언급하는 로마서 12장에서 제일 먼저 주신 말씀이 이 말씀입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겸손한 생각을 품으라는 말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에서도 첫 부분은 교리편이고 다음 부분이 윤리편인데, 거기서도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라는 것입니다.

존 플레처(John Fletcher)란 사람은 그의 제자가 묻기를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기도 응답으로 꼭 한가지만 주신다면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솔로몬은 지혜를 구하였는데 당신은 어찌하렵니까 하니 “겸손을 구하지.” 한가지 더 주시다면? “또 겸손이지.” 한가지를 더 주신다면? “또 겸손을 구할 것이라”고 하였다.
믿음은 겸손으로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최대의 적은 교만입니다. 교만은 믿음을 무너뜨립니다. 제가 설교할 때 우리집 이야기를 많이 하니까 저희 집사람이 뭐 좋은 이야기도 아닌데 많이 하냐고 그럽니다. 그런데 성경의 저자들은 그보다 더한 것도 솔직히 말했습니다. 저는 모든 것이 당연히 될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된 사람입니다.

당연히 예수 믿어야 될 집안에서 믿은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목사가 될 자가 목사가 된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구원받아야 할 자가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도 주님께 고개 숙여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