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의 완성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19. 개혁의 완성) / 본문 : 계 21:4-7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5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그 날에는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제일 걱정이 되는 것이 의사 선생님들입니다. 아픈 사람이 없으니 의사 선생님이 필요 없지 않습니까? 의사 선생님들, 아무래도 직업을 빨리 다른 것으로 알아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글쎄 모르겠습니다. 건축은 어떻게 될지. 아마 주님이 우리의 집을 짓고 계신다고(요 14:2) 했으니 건축하시는 분도 다시 알아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어릴 때부터 늙어 죽을 때까지 병이 따라다닙니다. 그 만큼 병을 앓았는데도 우리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 기적입니다. 과거에 있었던 질병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중세기 재앙으로 불렸던 페스트까지도 존재합니다.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는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호흡하던 공기가 아닙니다. 인간에게 질병과 사망을 가져다주는 수많은 유해한 박테리아로 공기는 오염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개혁이 완성되는 날에는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계 21:1) 과거와 다른 세상이 열립니다. 일단 오염된 땅과 하늘이 바뀝니다. 새것으로요.
한 어린이의 어머니인 여성도가 죽었습니다. 가까운 사람들이 모두 와서 “울지 마! 네 엄마는 하늘로 갔어!”라고 말하면서 어린 아이를 달랬습니다. 이튿날 장사를 지냈습니다. 어머니의 관은 무덤을 들어갔습니다. 이것을 본 아이는 “여기가 하늘이야!”라고 했습니다. 그는 파 놓은 무덤을 보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아직까지 눈물이 있습니다. 죽음이 있습니다. 아픔이 있습니다. 이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변함 없는 믿음이 요구됩니다. 본문 6절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예수입니다. 그것만이 유일한 진리입니다.

복음의 절대성

1517년 10월 31일 종교개혁의 시작은 마틴 루터가 갈라디아서를 읽으면서 갈라디아서 속에 있는 복음 진리를 깨닫게 되면서입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엄청난 진리를 깨달으면서 그 진리가 루터를 사로잡게 됩니다. 그리고 그 생명력이 폭발할 때 그가 수도원을 뛰쳐나올 수가 있었고 그의 인격이 변화될 때 그 감화를 받은 모든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성원하고 협력하고 해서 위대한 역사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갈 1:7-8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절대적 성격을 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세요. 내가 전하는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가 있으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당당하게 말합니다. 이 절대화, 진리의 절대화, 복음의 절대화,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요새 많은 사람들은 이 현대의 큰 병인 상대주의에 빠져 가지고 말이죠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이래 생각하고는 근데 요것이 조금 더 좋은 거 같기도 하고, 이러면서 허우적거리고 표류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전한 복음, 너희가 받은 복음, 이 복음 진리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그 누구라도, 천사라도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이 절대적 신앙, 이 절대적 확신, 이것이 그 마음속에 솟아오를 때 개혁의 용기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기독교는 상대적 진리가 아니라 절대적 진리입니다. 누구 눈치나 보는 그런 진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개혁에 용기를 내세요.

존 칼빈 이라고 하는 종교개혁자가 있습니다. 루터 다음으로 이어서 종교개혁을 완성하게 되는 훌륭한 개혁자인데요. 그분이 쓴 불후의 명작 기독교 강해(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라는 책이 있습니다. 굉장히 크고 방대한 책인데 기독교 교리를 잘 정리해 놓은 책입니다. 이 책을 볼 때마다 감탄사가 나옵니다. 어떻게 이런 방대한 책을 쓸 수 있을까! 이 책은 우리 개신교 교리의 바탕이요 근본입니다. 한마디로 교과서 같은 책입니다. 어떻게 500년 전에 이런 책을 썼을까?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책을 칼 빈이 27살 때 쓴 책이라는 겁니다. 27살에 이런 진리를 깨닫는 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이런 대단한 복음적 교리를 완성한 존 칼빈이 프랑스에서 종교개혁을 하려고 하니까 너무 핍박이 많아요.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역시 학자가 조금 약한 데가 있어요. 이 대 학자가 독일 스트라우스버그라고 하는 곳에 가서 조용하게 글이나 쓰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여생을 보내야겠다 생각을 하고 도피 행각을 합니다. 그러던 중에 제네바에 머물렀습니다. 제네바에 갔을 때에 거기서 종교개혁을 일으키고 있는 파렐이라고 하는 분이 이 칼빈을 딱 만나더니 우리를 도와주세요, 여기서 종교개혁을 이룹시다, 하고 붙드는 겁니다. 칼빈은 “아니요. 나는 조용하게 책이나 쓰면서 살렵니다.” 그럽니다. 영 설득이 안됩니다. 말로, 교리로 칼빈을 당하겠습니까? 그러나 파렐은 물러서지 않습니다. 도저히 설득이 안 되는 칼빈을 향해서 마지막 파렐이 직격탄을 날립니다.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하나님이 당신을 우리 가운데 보내주셨는데 만일에 당신이 우리의 요청을 듣지 않고 저 시골로 가 버린다면 당신은 저주를 받을 것이요” 그랬습니다. 이 말에 큰 충격을 받은 칼빈은 “하나님이 나를 이리로 보내셨다. 나를 제네바로 보내셨다. 이 날을 위해서 내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제네바 종교개혁을 완성하게 됩니다.
여러분! 내가 하고 있는 일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까? 거기에 얼마만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까?
마틴 루터는 스투트가르트라고 하는 곳에서 그가 재판정에 서게 됩니다. 거기 한 번 방문하게 되면은 루터가 섰던 자리에 표시를 해 놓았다고 합니다. 그곳에 가게되면 꼭 한번 그 자리에 서 보려고 합니다. 그가 거기서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Oh, God! Here I stand I have no choice (하나님 나 여기 서 있습니다. 나는 선택이 없습니다.)” 그렇게 담담하게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것이 종교개혁자의 용기입니다.

루터가 로마 카톨릭 교회의 부패를 지적하면서 95개조의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성당 대문에 붙임으로써 종교개혁이 시작이 됩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찰스 5세가 제국회의를 소집하고 루터를 소환했습니다. 루터는 그 자리에 가야합니다. 가면 돌아오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때 가면서 한 말이 너무 유명해서 이 말이 오래오래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 보름스 회의의 기왓장처럼, 집의 기왓장처럼 마귀가 많더라도 나는 가리라.” 그리고 모든 친구들의 권유와 만류를 뿌리치고 갑니다. 그 용기, 그게 어디서 온 것이겠습니까? 복음의 용기요 진리의 용기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하는 확실한 용기입니다. 본문 7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는 말씀을 믿고 간 것입니다.

내가 개혁되어야 합니다.

오늘도 정치인들은 개혁을 부르짖습니다. 새롭게 대통령이 되는 분마다 개혁을 말합니다. 많은 사람이 개혁을 외치는데 개혁되는 것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 개혁이 없기 때문입니다. 개혁에서 자신은 제외시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개혁을 해 보겠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가만있고 다른 사람 뜯어 고쳐서 사회 개혁을 완성시켜 보겠다는 것이지요.
어떤 사람이 암을 죽이는 죽지 않는 세포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암으로 죽지 않고 사는 길이 열리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죽지 않는 세포는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또 다른 암세포였습니다. 죽지 않는 세포 그것이 암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사회 개혁을 한 집단이 바로 공산당입니다. 자신이 변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개혁하겠다고 하는 것이 공산당입니다.

고리키라는 사람은 세계를 뒤흔든 사회주의 혁명가 레닌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누구나 고통을 참을 수밖에 없다고만 역설되는 나라 러시아에서, 아니 이 세상 전체에서 레닌만큼 심각하고 강하게 불행과 슬픔을 미워하고 경멸하고 저주한 사람을 나는 보지 못했다. 고통은 인생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니라 민중의 힘으로 물리쳐야 하고 또 물리칠 수 있는 악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가 특히 위대한 인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고리키가 평가한대로 레닌은 그가 주도한 사회주의 혁명으로 러시아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었습니까? 사회주의 혁명으로 공산주의가 지배했던 지난 80여 년의 구 소련은 엄청난 죽음과 고통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그의 사회주의 혁명으로 인한 고통은 오늘날 러시아에게까지도 말할 수 없는 혼란과 고통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 결과 발트 3국의 하나였던 에스토니아에서 시작된 레닌 동상 제거작업은 소련 각 국으로 퍼져 나가 이제 그의 동상은 형체를 찾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제가 에스토니아를 다녀온 일이 있습니다. 이 나라 사람은 지난 70여 년 간 끔찍한 공산주의에 편입되어 지배를 받으며 살았는데요 제가 갔을 때는 독립하여 자유롭게 살고 있었습니다. 이런 자유로운 나라에서 그렇게 살기 원했는데 마치 바벨론 포로 70년의 세월처럼 살았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레닌의 혁명은 역사에서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레닌은 자신이 죽기 2년 전 “레닌 사상의 가장 탁월한 계승자로” 판단하여 당 서기장으로 스탈린을 임명했습니다. 스탈린은 성직자가 되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뜻을 따라 들어갔던 츠빌리시 신학교를 5년 간 다녔는데 그만두었습니다. 그리고 츠빌리시 철도 노동자들로 구성된 한 학습 모임을 지도하는 것을 시작으로 직업혁명가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스탈린이 당 서기장에 올라서 1934년부터 시작된 대숙청은 당과 군의 최고위 지도자들이 다수 처형된 것을 비롯하여 수천만 명이 체포되고 피의 숙청을 당했습니다. 이 숙청의 피 냄새가 채 가시기 전에 터진 2차 대전을 통해서 소련 국민 2-3천만 명이 희생당했습니다. 인간적인 사상이나 정치, 경제의 혁명의 결과는 이처럼 엄청난 인류의 고통과 죽음을 초래했습니다.

자기 개혁 없는 사회 개혁은 무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면 내가 개혁의 대상이라는 것을 시인하게 되고 개혁되어집니다. 천하보다 내가 더 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보지 않고 세상을 볼 때 자기 개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 자기 개혁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신앙의 문제입니다 신앙 없이는 개혁이 되질 않습니다. 신앙 없이 개혁해 보아야 인공적인 암 덩어리를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죽고자 하는 진리에 설 때, 변하지 않는 진리 위에서만이 개혁이 완성될 수 있습니다. 신앙과 믿음이 들어가면 사람이 정직해 집니다. 사단은 거짓 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짓이 없습니다. 이것이 진실이요 진리요 참 인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5절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고 하십니다. 이 나라에 예수 그리스도로 개혁된 우리 모두가 들어갈 것입니다. “하노라”로 번역된 헬라어 포이오(poiw’)는 하나님께서 미래에 이루어주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것을 예언적으로 선언한 것입니다. 그런데 포이오는 현재 시상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이 부여되었는데 현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새롭게 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미래에 새 하늘과 땅에 들어갈 약속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남아공 양승록 선교사 편지에 있는 내용입니다. 오늘은 6.25처럼 슬픈 날이 아니지만 힘든 날이었습니다. 바로 우리교회 노총각 이삭의 결혼식 날이었답니다. 토요일 예식은 신부집에서 9시에. 축복의 비가 계속 내리는 가운데 도착한 결혼식장에는 하객도 없고, 천막도 말 그대로 걸레모양. 급기야 비가 너무 많이 오는 관계로 결혼식장을 교회로 옮겼고, 교회는 장식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이래저래 시간은 흘러가는데 기다리는 또 다른 문제1. 교회 담임목사의 주례거부. 이유인즉, 신랑이 먼저 찾아와서 인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함께 갔던 우리교회 목사는 주례할 수 있는 자격증이 없어서 못하고. 문제2. 신부가 교회에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유인즉, 신랑측에서 소를 잡아 반씩 나누기로 했는데 머리 절반과 다리가 오지 않았기에 신부를 보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결혼식은 우여곡절 끝에 오후 늦게 진행되었답니다.

제가 5년 전에 주례를 처음 했던 자매에게서 편지가 왔습니다.
“목사님이 축복해주셔서 제가 이렇게 살고 있는 것 같아요. 5년 전 이날을 생각할 때 오빠들은 전원 결혼 반대로 예식장도 안 들어오고 엄마는 아버지의 명령과 그늘 밑에서 평생 사셔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빈자리에 혼자 어쩔 줄 몰라하시며, 결국 오빠들의 비 협조로 손님차도 제대로 초청하지 못하고 치룬 막내딸 결혼식을 생각하며 마음 무너져 하셨습니다. 가끔 그때를 생각을 하시며 너무 가슴아파 우십니다.” 결혼 초기에는 어려움도 많았지만 남편이 하나님을 만나고 지금은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나옵니다. 그런데 남편도 가끔 눈물이 난다고 합니다. 남편은 교회에서 간증도 하게되었습니다.

여러분! 잘 사셔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개혁 하니까 너무 사회적이고 나와는 거리가 너무 먼 이야기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개혁되어야 우리 가정이 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정이 됩니다.

개혁의 완성은 그 날에 주님이 장식하십니다. 그 때에 주님이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십니다. 다시는 아픔과 죽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세상 개혁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신앙개혁을 이루어 내셔서 새로운 세상에서도 반드시 다시 만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소자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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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말씀(118. 소자를 위하여) / 본문 : 마 18:10-14

“10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11 (없음) 12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14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아프리카에는 산양의 일종인 ‘스프링 벅’이란 동물이 살고 있습니다. 이 짐승들은 초원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다가 갑자기 질주를 시작하는데 뒤에서 풀을 뜯던 양들이 앞쪽으로 나오면, 앞에 있던 양들은 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더 빨리 앞으로 내달린다고 합니다. 이 양들은 목적 없이 질주를 계속하다가 눈앞에 낭떠러지를 보고서도 가속 때문에 멈추지 못하고 그대로 떨어져 죽는다고 합니다. 목적지도 모른 채 덩달아 앞을 다투어 경주하는 과속 인생을 사는 현대인들이 흡사, 이 미련한 짐승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늘 소자를 위해 오신 예수님을 만나시면서 세상 속에서 무엇인지도 모르고 덩달아 달리지 마시고 주의 길을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은 축하를 하기 위해서 “..위하여!”라고 위칩니다. 정치하시는 분들이 “위하여!”는 여당 분들이 하니까 우리는 야당이니까 “…위하야!” 한답니다. 이 소리를 들은 어느 교회 모임에서 “위하주!” 그리고 축하한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좀더 엄밀히 말하면 사람들에게 경배만 받으려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까요? 하나님이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이 땅에 보내셨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결코 경배를 받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닙니다. 경배만 받기 위해서 오셨다면 이 땅에 오지 않는 편이 더 났습니다. 하나님의 우편에서 그저 편하게 계시면 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예수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니라 나를 위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 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마 6:19-20) 우리는 헌금을 하면서 “주를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한다고 생각하기 싶습니다. 아닙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본 받고 따라오라고는 하셨고 나의 명령을 지키라고는 하셨지만 나만을 위하라고는 하지 않으셨습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0-32)

안질로 고생하는 왕이 있었습니다. 눈이 찌르고 아팠지만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사람이 찾아와 왕의 눈병을 고치겠노라 나섰습니다. 왕은 그를 따라 궁궐 밖으로 나가 백성들이 사는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왕이 생각했던 것보다 백성들의 삶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 때 슬픈 통곡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곳을 찾아가 보니 쓰러져 가는 오막살이 단칸방에 누더기를 걸친 시체 옆에 어린 자식 셋이 통곡을 하고 있었습니다. 처참한 정경에 왕도 눈물이 터져 통곡을 했습니다. 얼마 후 자신을 진정 하고 난 왕은 깜짝 놀랐습니다. 눈의 통증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고 하셨습니다.

우리 한글에는 백성을 가리키는 단어 중에 ‘국민’과 ‘인민’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한글개역성경(1952년 이전)에 보면 역대하 17:9 “저희가 여호와의 율법 책을 가지고 유다에서 가르치되 그 모든 성읍으로 순행하며 인민을 가르쳤더라” 라고 나옵니다. 유다 4대왕이었던 여호사밧 때의 일입니다. 남북한이 말을 나누어 갖다보니 북한에서 자주 쓰는 용어를 남한에서 사용하지 않게 되는 현상이 일어나 남한에서는 인민이라는 말보다는 국민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국민은 한 개인이 나라를 위해 존재하는 개념이고 많고, 인민은 나라가 한 개인을 위해 존재하는 개념이 있습니다. 북한과 남한의 용어가 바뀌어 사용되고 있는 느낌입니다. 북한 공식명칭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며 중국에는 “인민일보”가 있습니다. 이 나라들이 정말 인민을 위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인민을 위해 오신 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소자(인민)를 위하여 오신 분입니다.

“소자(mikrw’n touvtwn:미크론 투톤)”는 “가장 작은 사람, 미미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헬라어에서 “작다(소자)”는 의미를 “키가 작은”, “범위가 작은”, “의미가 적은”, “시간 적으로 짧은(연령적으로 어린)”이라는 것을 구분하여 사용합니다. 누가복음 19:3 에 삭개오는 “키가 작았으며” 마가복음 15:40 에는 야고보도 “키가 작은” 또는 “나이가 어린”이라고 나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단어는 “의미 없는”이라는 뜻으로 보잘것없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오늘날 우리 식으로 말하면 “별 볼일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말에는 결코 경멸의 의미가 들어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숨겨진, 장래의 위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창세기 49장에서 예수님이 나신 유다지파에 대해 예언하기를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창 49:9)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하고 가난한 자들을 부르십니다(마 11:25, 29).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어린아이처럼 낮아지게 됩니다(마 18:4). 그러나 이 땅에서 가장 작은 자라도 장래에는 큰 자가 될 것입니다(마 18:1, cf 5:19). 천국에서는 가장 작은 자라도 세례요한 보다 크다고 하셨습니다(마 11:11).
본문 10절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마라톤을 완주한 선수에게 리포터가 뛰는 동안 가장 힘들게 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물었다.”호흡입니까? 아니면 갈증 때문입니까?” 그러자 마라토너는 “저를 힘들게 한 것은 호흡도 갈증도 아닙니다. 신발 속에 모래알 만한 작은 돌멩이 하나가 굴러다니며 저를 가장 힘들게 했습니다” 라고 말했답니다. 제일 작은 나 자신이 주님의 마음을 그렇게 아프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라를 VIP로 대접하십니다.

VIP로 대접하시는 하나님

VIP(very important person) 국어사전에 보면 “정부 요인이나 국빈 등과 같이 특별히 대우해야 할 아주 중요한 인물. ‘귀빈’, ‘요인’ “을 말합니다. 신어로 VVIP(Very Very Important Person)가 있는데 이 말은 VIP보다 더 중요한 사람을 이르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VVIP로 우리를 대접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정말 그런 단어가 성경에 있습니다. 시 13:6을 봅니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나를 후대하심이로다”, 또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시 116:7). “후대하심”이라는 단어는 원문에 두 단어가 나옵니다. “lm’G:가말(혜택, 관대하다, 섬기다)”과 “l[‘:알(넘어, 위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는데 넘치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 예수께서 처음 이적을 행하실 때의 물 항아리도 아구까지 가득 채웠습니다(요 2:7). 우리 하나님은 차고 넘치게 주십니다. 아이작 와츠의 찬송시(141장)처럼 1절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 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시 116:12) 5절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바울은 이 은혜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 9:15)

소자의 가치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마 18:6, 막 9:42) 연자 맷돌은 혼자의 힘으로 돌릴 수 있는 작은 맷돌이 아니라 나귀나 말의 힘으로 돌릴 수 있는 곡식을 빻는 멧돌을 말합니다. 연자 멧돌과 같이 큰돌을 목에 메게 하여 깊은 바다에 빠뜨리는 형벌은 부모를 죽이거나 반역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을 때 로마가 집행하던 당시 형벌이었습니다. 소자를 실족케 하는 죄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말해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비교로서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 19:24)고 하셨습니다.
본문 10절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성경에서 천사들은 국가(단 10:13, 12:1), 교회(계 1:20), 개인(행 12:15)을 위한 수호(守護) 천사가 있습니다. 페르시아 사람들은 천사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지금도 잘못된 신앙을 가지면 천사를 숭배하게 됩니다. 천사는 사람을 위해서 봉사하도록 명령을 받은 하나님이 일꾼이지(히 1:14) 우리가 섬겨야될 대상은 아닙니다. 하늘에서 항상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천사가 위대한 것이 아니라, 천사가 돌보는 소자가 얼마나 귀한지를 말한 것입니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 10:42)고 하셨습니다.

길을 잃었으면

12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14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만을 따라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리고 이미 얻은 이 구원의 은혜를 따라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는 여러분이 다시는 길을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저에게 맡겨진 책임 또한 여러분은 잘 인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길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길을 잃어버린 양은 찾아 나서야 합니다. 주님은 이러한 목자로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모세는 “그들을 인도하여 출입하게 하사 여호와의 회중으로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민 27:17)라고 했는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마 9:36) 하나님의 뜻은 잃어버린 것을 찾는 것입니다(딤전 2:4). “만일(eja;n:에안)”은 접속사이지만 이 단어는 “a[n:안” 소원을 말하는 기본 조건 불변사에서 유래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꼭 찾기를 원하신다는 애절한 소원이 들어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소원에 우리가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하는 것을 보고 그대로 따라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일을 따라하시기 바랍니다.

80대 중반이 되신 노(老)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그러나 얼굴에 주름을 찾아보기 정말 힘든 장로님이셨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 교인들이 장로님을 부르는 애칭이 “보톡스 장로님!” 성품은 밝고 친절하여 많은 교회 후배들이 본받고 싶은 분이라고 합니다. 그 장로님께서 부흥 사경회 중 목사님께 점심식사를 대접하며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목사님, 오늘 점심은 천국에 가신 저의 어머님께서 대접하는 것이라 생각해 주세요. 저는 모태신앙입니다.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부흥회가 개최되면 저의 어머님께서 정성을 다하여 강사 목사님의 식사를 대접하셨답니다. 그 때는 이렇게 식당에서 대접하는 것이 아니라 집에서 했죠. 그래서 제가 일 년 중 제일 맛있는 것들을 먹는 날이 바로 부흥회 하는 날이었답니다. 지금 어머님은 돌아 가셨으나 그 때 그것을 보고자란 대로 저도 늘 이렇게 부흥강사님을 대접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전 11:1). 예수님은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고 하셨습니다.
 

꽃이 아닌 꽃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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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말씀(117. 꽃이 아닌 꽃씨를) / 본문 : 행 1:6-8

“6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열두 명의 장정들이 부모를 버리고 하던 일도 모두 포기하고 예수를 따랐습니다. 이들 중에는 어부도 있었으며 세리도 있었습니다. 예수의 부름을 받고도 따르지 않은 사람도 있었는데, 자기의 신앙은 자랑했지만 자기의 재산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줄 수 없어 예수님을 쫓지 못한 사람도 있었고, 부모의 장래를 치러야 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쫓지 못한 이도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생각하면 예수를 따랐던 제자들은 일생을 건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생각은 씨는 생각하지 않고 꽃만을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킬 메시야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기대 속에 예수를 따라 다닌지 3년이 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민심은 잘 얻으시고도 대제사장들과 이스라엘의 산헤드린공의회의 모함과 고발로 로마인의 재판자리에 섰습니다. 빌라도는 나름대로 예수를 풀어주려고 애를 썼지만 자신이 어려움을 겪어가면서까지 예수를 풀어줄 마음은 없었습니다. 결국 목소리 큰 사람들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제자들은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제는 끝이 났구나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언대로 3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기대를 다시 가다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전처럼 함께 계시지도 않고 가끔 보여주시고(11번) 확인만 시켜준 상태입니다. 이렇게 시간은 어느덧 40일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이 승천하신다는 소식이 들린 것입니다. 이건 또 웬 일인가 싶어 제자들은 부랴부랴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다급한 제자들은 승천하시는 감람산 현장에서 예수님의 옷소매에 매달려 그냥 가실 수 없다고 애절하게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라고 합니다. “예수님 단 한번만 저 로마를 향해 입김 한번만 불면 불바다가 될 것 아닙니까? 이대로 그냥은 못 가십니다.” 이런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북쪽 이스라엘은 B.C. 721년에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하고 남쪽 유다는 B.C. 586년 바벨론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바벨론이 다스리다가 다음에 바사(페르시아제국), 헬라에 이어 지금은 로마의 지배하에 있으면서 시달림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일제 36년의 뼈아픈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무려 700년 간의 나라 잃은 슬픔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라면 자신의 나라를 찾아야 된다는 생각을 누구나 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잘못된 메시야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엉뚱합니다.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행 1:7) 제자들은 오늘 승천하시기 전에 결판을 내자고 하는데 예수님은 매정스럽게 느긋하신 태도입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고 하십니다. 유대인인 제자들은 자신의 나라를 찾고자 하는데 관심이 있는 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찾으시는데 관심이 있으십니다.

우선순위 첫 번째가 무엇인지 정해졌습니다. 예수님께 더 땡 깡을 부려 받자 소용없습니다. 워낙에 단호하신 모습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결단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전도하라고 보내시면서 전대도 두 벌 옷도 가지지 말라고 훈련시킨 적이 있습니다. 돈 한푼 없는 제자들이니 상식적으로 다음과 같은 말씀 정도는 하셔야 했습니다. “배 삯은 염려 말아라. 얼마 전 내가 병 고쳐 준 자에게 배 삯을 부탁해 보겠다.” 한다던가 “여전도 회장 막달라 마리아가 마련해 줄 것이다” 하든지 해야했습니다. 그런데 그에 대한 아무 조치도 없으시고 그냥 “가라!”고만 하십니다. 대책이 없으신 분입니다. 3년 간이나 12명, 70명, 5천 명, 수만 명 떼지어 다니면서도 교단 이름하나 지어 놓지 않으시고 가셨습니다.

오직 단 한가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된다는 것입니다. “오직”(ajlla;:알라) 유일한 방법이라는 말인데, 헬라어의 이 말은 “a[llo”:알로스”의 중성 복수형에서 왔습니다. 알로스는 ‘다른’이라는 말입니다. 무엇이 다른 것이겠습니까? 제자들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이 다른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방법이 다른 것입니다. 사람은 세상의 권력과 물질로 일을 이루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성령으로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 것입니다.

이동휘 목사님은 1983년 전주안디옥교회를 개척하여 교회 재정의 60%이상(실제로는 70%사용)을 선교비로 지출하며 2007년 현재 바울선교회를 통하여 전 세계 87개국에 372명의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2007년 9월 현재). 이렇게 많은 사역과 세계교회에 찾기 어려운 모범적으로 선교를 실천한 교회를 담임하셨던 이동휘 목사님은 “돌이켜 보면 나는 실패했다. 나는 내 교회를 믿었고 이 교회의 헌금을 의지했다. 하나님께 직접 구하기보다는 바쳐진 헌금에 울고 웃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과 그때 그때마다 필요한 하나님의 방법을 수없이 놓쳤다”고 고백하셨습니다. 그러나 전주안디옥교회 만큼 절약하며 선교하는 교회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접대비 명목으로 된 지출이 없다보니 찾아오시는 손님들에게 성도님들이 사온 음료수를 접대하게 되었는데 한번은 목사님께서 박카스를 오신 장로님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몇 달 뒤 그 장로님이 시무 하시는 교회에 목사님이 집회를 가시게 되었습니다. 장로님은 목사님을 소개하시면서 전주안디옥교회는 박카스도 반병씩 아껴서 먹습니다. 그러시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실수하신 것을 알고 얼굴이 벌개 지시면서 그만 하셨으면 하셨지만 장로님은 자랑스럽게 계속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손님들이 오시면 계속 물만 마실 수 없으시니까 박카스 반병을 마시고 옆에 놓아둔 것을 그만 실수로 장로님에게 드린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한 다발의 화환과 한 봉지의 꽃씨 중에서 어떤 것을 택하시겠습니까?
아브라함 링컨은 노예 주인들의 요구에 양보했더라면 그는 화환세례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돌아올 화환보다는 울부짖는 흑인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당장은 어렵고 힘든 싸움이 일어났지만 먼 훗날을 위해서 씨를 뿌렸습니다.

선교의 대책은 오직 성령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잘 살펴보면 답이 나옵니다. 어떻게 사람들과 다르게 사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첫째, 남을 정죄하는데 시간을 허비하지 마세요.
예수님은 남을 정죄하는 것은 막대한 에너지가 새어 나가는 일로 간주하셨습니다. 세상을 정죄하거나 심판하시기 오신 것이 아니라 도와주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수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단 한 시간도 허비하지 않고 그의 에너지를 창조와 복구에 사용했습니다. 남을 정죄하는 것은 예수님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정죄는 왜 하게 됩니까? 원한에 사로잡혀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나라 찾기에 원한에 싸여있습니다. 그래서 그 원한이 창조와 회복이 아닌 정죄와 파괴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대인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도 알고 보면 불쌍한 민족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구약의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이런 결과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났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예수님의 말씀을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정죄는 진전을 가로막습니다. 예수님은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을 알았느냐”(눅 19:22) 그러나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요 5:45)고 하셨습니다.
요한은 요한복음을 다 기록하고(20장까지) 21장을 마치 ‘추신’처럼 기록했습니다. 다 기록을 하고 나니까 베드로에 대한 중요한 부분을 누구도 증거하지 않은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정한 기록은 있는데 그가 예수께 돌아와 회복된 이야기가 다른 복음서 모두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다시 펜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21장을 써 내려갔습니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가 나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다면 “내 양을 치라” 세 번 같은 말이 이어지고(요 21:15-17) 베드로의 요한에 대한 엉뚱한 관심이 나옵니다. “주님 저 사람(요한)은 어떻게 되겠습니까?”하고 묻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요 21:22)고 하십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일에 대해서 엉뚱한 관심으로 에너지를 낭비할 때가 많습니다. 누구는 땅을 샀습니다. 누구는 50평 짜리 아파트를 샀습니다. 누구는 교회를 크게 지었습니다.
여러분!
북한에 이런 구호가 이더라구요. “우리는 우리식대로 산다” 우리는 예수식대로 산다. -아멘-

둘째, 프로의 삶을 사세요.
프로페셔널이란 말에는 하고 싶지 않을 때라도 해야 할 일을 수행하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프로는 일시적으로 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는 프로 정신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죽음의 길을 가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서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사야서는 예수님의 이 모습을 가리켜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차돌)같이 굳게 하였은즉 내가 수치를 당치 아니할 줄 아노라”(사 50:7) 예수님이 잡혀가시게 되자 베드로는 칼을 뽑았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잡혀가시면 끝장나는 것입니다. 이 때 예수께서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요 18:11) 이 말은 다시 번역하면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고난의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입니다. 우리가 프로정신이 없을 때 하기 좋은 일만 골라한다면 시골교회는 누가 담임하고, 장애우들은 누가 돌봅니까? 먼지 날리는 황무지 같은 땅에서 오늘도 죽을힘을 다해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이 있습니다. 꽃이 아닌 꽃씨를 위해 사는 사람들입니다.

셋째, 기도의 씨를 뿌리세요.
불교인들은 기도할 때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합니다. 가톨릭인들은 십자가 모양으로 성호를 긋고 합장합니다. 무슬림들은 모스크에 가거나 그곳을 바라보고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대고 몇 번씩 절을 합니다. 힌두교도들은 손을 들고 기도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서서 따로 기도했습니다(눅 18:11).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제멋 대로입니다. 정해진 형식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의 모양을 가르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요 11:41에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구약서부터 보면 기도의 보습이 다양하게 나옵니다. “꿇어 엎드려”, “두 손들고”, “가슴을 치며”, “머리를 숙이고”, “하늘을 쳐다보며” 등의 모습이 나오지만 모두가 간절한 마음을 담아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런 기도의 모습이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 골방에서 하라”(마 6:5-6)는 것입니다.
기도의 내용에 대해서 “원수와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마 5:44), “중언 부언 하지말고”(마 6:7), “무엇이든지”(마 18:18), “믿고 구하라”(마 21:22)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고 하셨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그런데 원문에 보면 중요한 단어 하나가 나옵니다. “te:테”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의 앞에 나타납니다. 이 단어의 어근은 연관이나 첨가의 기본 불변사입니다. 뜻은 “역시, 양쪽의, -까지도, 둘 다”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는 순서를 말한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이 다 되면 그 다음에 유대를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또한 10명의 성도만 있을 때는 하지말고 100명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테’의 강력한 불변사가 보여주는 것처럼 선교 명령은 최소 될 수도 없으며 그 곳이 어디든지, 언제든지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언제나 어느 곳에 있던지 한 영혼은 천하보다 귀한 것입니다. 내가 있는 곳이 나의 선교지 입니다. 주님의 간곡한 이 마지막 부탁을 성실히 이행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라진 교회들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16. 사라진 교회들) / 본문 : 마 4:21-23

“21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그 부친 세베대와 한가지로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22 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대한민국 개신교인수는 통계 조사이래 1995년이 8,760,066명(19.6%)으로 제일 많은 수였습니다. 그리고 이 때를 기점으로 감소세를 보였습니다. 10년이 지난 2005년에는 인구는 4천 4백만 명에서 4천 7백만 명으로 300만 명이 늘어난 반면 개신교인구는 8,616,438명(18.3%)으로 오히려 143,628명이 줄었습니다. 이것은 1,000명의 교회가 143개가 사라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이유는 명목상 기독교인이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프랑스는 카톨릭 국가이지만 대부분의 신자들은 명목상의 신자들입니다. 그런데 그 명목상의 신자들조차도 줄고 있답니다. 지난 1990년대 초 프랑스인들은 전 인구의 80%가 자신이 카톨릭 신자라고 자처했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51% 줄어들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프랑스만의 현상이 아니라 종교가 자신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라고 응답한 이탈리아의 경우 27%, 독일 21%, 프랑스, 체코 11%, 미국 60% 이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질문에 대해 이슬람 국가에서는 90% 이었습니다. 이슬람 국가들 보다 휠 씬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2004년 조사에서는 영국인들의 44%만이 신이 존재한다고 답하였으며, 35%는 신의 존재를 부인하였고, 21%는 모른다고 답했습니다.

미국인들의 40%, 영국인들의 15%, 독일인들의 12%, 스칸디나비아 반도 국가 국민들의 5%만이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간다고 했습니다. 유럽 국가 전체의 평균 수치는 20%가 채 되지 않으며, 2000년 조사에서 미국인들 중 16%, 프랑스인들의 60%, 영국인들의 55%, 스칸디나비아 반도 국가들의 40~50%가 거의 또는 한번도 교회에 가지 않았다고 답변했습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는 노르딕 국가(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핀란드, 아이슬란드)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들 나라들은 국기 모양이 노르딕 모양으로 모두 십자가 국기입니다. 국기는 십자가인데 교회는 5%만 다니는 것입니다. 교회가 사라진 나라들입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는 이제 경각심을 가져야할 때입니다. 우리는 기독교인 수가 80~100%까지 되었던 유럽 국가들하고는 다릅니다. 유럽 나라들은 힘들고 어려우면 옛날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이 말은 예전의 신앙을 회복하자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개신교인 20%을 넘어 보지 못했습니다. 이런 나라가 옛날로 돌아가면 불교나 유교 또는 무교, 샤머니즘으로 가자는 이야기는 이야기가 됩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사라진 교회를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 어원의 뜻

본문 21절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그 부친 세베대와 한가지로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라고 했습니다. “부르시니”는 원어의 “ejkavlesen”(에클레시안)으로 어근 부르다(kalevw:칼레오)에서 온 말입니다. 이것을 라틴어에서 에클레시아(Ecclesia)로 그대로 읽었습니다. 이 단어는 구약 히브리어 ‘카라’에서 왔는데 로마서 11장 29절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에는 하나님의 부름, 소명이 함께 들어있습니다. 이 단어가 영어로 부름(call), 소명(calling)으로 불러지게 됩니다.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자들의 공동체인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3장 15절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칼라가 칼라치아가 되고 영어에서 회중을 의미하는 church 라는 단어로 보편적인 측면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영어 발음에서는 칼라가 약해지고 치아의 발음이 살아나 church가 된 것입니다.

에클레시아(ejkklhsiva/)는 대부분의 단어들이 단수형으로 나옵니다(행 2:47, 5:11, 7:38, 8:1, 9:31). 이것은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마 23: 1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요 10:30)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엡 4:4)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요일 5:8)
교회는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진 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의 공동체인 것입니다. 교회는 둘이 될 수 없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그러나 복수형으로 사용된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행 9:31) 교회의 수적 증가를 말할 때 복수로 나옵니다. 또 한가지는 의미심장한 뜻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20:28절입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여기서 굳이 다른 곳과 같이 단수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교회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즉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고 노력해서 교회를 세우지만 그러나 그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

교회의 어원적 관점에서 볼 때 중요한 것은 오늘날 변화된 가톨릭이나, church가 아니라 원래 이 말의 뿌리가 가지고 있는 칼레오(부르다), call이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죄를 짓고 타락한 아담을 부르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창 22:1)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시내 산 곧 그 산꼭대기에 강림하시고 그리로 모세를 부르시니 모세가 올라 가매”(출 19:20)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삼상 3:4)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야고보와 요한을 무르신 것은 바로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실 때,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사용한 말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것이나 예수께서 부르신 것이나 똑 같은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불러 회개케 하시며(마 9:13),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 자신에게로 구원에로 부르십니다(롬 8:30).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씨를 부르실 뿐만 아니라(롬 9:7),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모두 부르셨습니다(롬 9:24)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것은 하나님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는 하나님이 부르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교회가 사라지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부르는 사람들

‘에클레시아, church, 가톨릭’의 단어는 모두 ‘칼레오’ 부르다와 동시에 엔칼라오, 엔클레마(ejpikalevoma 에피칼레오마이:고소하다)의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만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어린 자녀들이 친구들하고 놀다가 부모님께 와서 일러바칩니다. 사실은 유치한 것 같지만 하나님께 일러바치는 것이 교회입니다.
공산주의가 부패하는 것은 언론을 차단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민주주의가 이루어지려면 바른 언론 기능이 있어야 합니다. 모두에게 알리는 것입니다. 이 기능이 바르게 작동될 때 사회는 그만큼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일러바치는 사람이 없다면 이 세상은 어둠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출애굽기 3장 9절에 보면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출애굽을 시켜 주십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9장 40절에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부르짖지 않는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교회관

본문 마 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오늘날의 교회도 예수님이 불러서 행하신 세 가지 기능을 수행해야 참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가르치시며” 교육과
둘째는 “전파하시며” 전도, 선교와
셋째는 “약한 것을 고치시니” 능력 행함과 공동체적인 봉사의 삶을 말합니다. 이러한 역할을 하지 않을 때 교회는 사라지는 것입니다.

미국에 사는 감리교 목사님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미국 감리교회는 일년에 700개씩 교회가 사라져가고 있다고 합니다. 그 원인이 무엇인가 조사해 보니까, 첫째는 기도하지 않고, 둘째는 성경을 보지 않고, 셋째는 전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사라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했습니다. 일본 교회는 모이지 않기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동경의 모리야마 목사는 수요일 날 기도회도 많은 분들이 모입니다. 교회에서는 주일날 저녁에 모이지 못하는 부인들을 위해서 금요일 오전에 ‘감람회’라 해서 모이는 모임이 있다. 그리고 금요일 날 저녁에는 철야기도회를 한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철야기도회를 하니까 얼마나 피곤할까 해서 모이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이렇게 성장한 것은 새벽 기도회와 철야 기도회 때문이라고 말하고 그래서 일본에서도 이것을 배워야 하겠다 하는 데서 철야기도회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는 가운데 철야기도회의 인원도 점점 늘게 된 것입니다.

사라진 교회를 찾아야 합니다.

열왕기서에 보면 북왕국 20대왕 남왕국 19대 왕국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이 왕들에게서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이방인들이 조롱과 우롱거리가 되는 것을 감수하시면서 이스라엘 나라와 예루살렘 성전을 버리십니다. 역대하 마지막 36장 17-21절에서 하나님은 갈대아 왕을 통해서 이 성의 어린아이부터, 노인들까지 다 죽이게 하고 하나님의 전은 노략을 당하고 불에 타서 사라집니다. 그리고 바벨론 70년 포로 생활동안에 예루살렘 성은 더 이상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없었고 부르짖는 사람도 없고 제사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성은 갈대가 날리는 황무지로 변해 버렸습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바벨론에서 나와 예루살렘성을 건축하러 돌아옵니다. 이 성을 재건하고 찬송을 하고 제사를 드립니다. 노인들 중에는 예전 성전을 보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에스라 3:12절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족장들 중에 여러 노인은 첫 성전을 보았던 고로 이제 이 전 지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며 여러 사람은 기뻐하여 즐거이 부르니”라고 했습니다.

서양인들의 묘지는 저 멀리 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로 동네 가운데 혹은 교회당 뜰에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거기 가지런히 줄을 지어 서 있는 묘비에는 주로 앞서 간 이에 대한 추모의 글이나 아쉬움의 인사가 새겨져 있습니다.
한 사람이 묘지를 돌며 묘비들을 읽고 다니다 어떤 묘지 앞에 발길을 멈추게 되었습니다. 그 묘비의 글이 상당히 흥미로웠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묘비의 글을 알려줍니다.
글은 단 세 줄이었는데 ①나도 전에는 당신처럼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었소. 순간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②두 번째 줄이 이어졌습니다. 나도 전에는 당신처럼 그곳에 서서 그렇게 웃고 있었소. 이 글을 읽자 그는 이게 그냥 재미로 쓴 게 아니구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자세를 가다듬고 긴장된 마음으로 세 번째 줄을 읽었습니다. ③이제 당신도 나처럼 죽을 준비를 하시오.

느헤미야 10:39 “곧 이스라엘 자손과 레위 자손이 거제로 드린 바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가져다가 성소의 기명을 두는 골방 곧 섬기는 제사장들과 및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있는 골방에 둘 것이라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리지 아니하리라”

스펄전 목사님에게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목사님 어디를 가십니까? 어느 교회에 설교하려 갑니다.
아니 목사님 그런 작은 교회에 가서도 설교하십니까?
형제여! 작은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의 교회는 다 위대한 교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