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 위에 계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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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말씀(123. 만물 위에 계신 예수님) / 본문 : 요 3:3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오늘날 천문학자들은 각 은하마다 1,000억 개가 넘는 무수한 별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태양계(太陽系) 은하수(銀河水) 성운(星雲)중에서 아주 작은 한 부분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참 놀라운 것은 이렇게 크고 기묘한 우주와 무수한 별들이 신비롭게도 질서정연하게 조화를 유지하며 운행된다는 것입니다.
진화론자들의 주장처럼 수소(水素) 가스와 헬륨 가스(He gas)를 발생시키는 “빅뱅(Big Bang)”으로 폭발하여 오늘날 현재의 우주로 진화했다는 가정은 마치 보석가게가 폭발하여 정확한 시간을 맞춰 주는 고급 시계를 만들어 냈다는 우스운 신화와 같은 것입니다.
생명이 우연히 생겨났고 발전했다는 것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전 세계적으로 대부분의 천문학자, 물리학자의 90%이상이 하나님의 존재를 믿습니다. 과학이 발전하게 되면 될 수록 천지와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천재 과학자인 뉴턴과 아인슈타인도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인체의 신비, 자연의 신비, 우주의 신비를 보고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미친 사람이거나 정직하지 못한 사람일 것이다.”

미국의 유명한 과학자가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 10가지 이유를 설명한 내용입니다.
1. 지구의 돌아가는 속도의 정상화입니다. 즉 지구는 시간당 1,600km로 돌고 있습니다. 이 지구가 만약에 한 시간당
160km로 돈다면 사람들은 낮에는 타 죽고 밤에는 얼어죽을 것입니다.
2. 지구와 태양이 떨어진 거리가 신비스럽게도 아주 알밪은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3. 지구가 23.5도(度)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4계절이 나타납니다. 만약에 지구가 수평이라면 하루에 두 번 물에 잠기게
되어 대양(大洋) 증발(蒸發) 수증기(水蒸氣)로 남북은 어름덩어리가 될 것입니다.
4. 지구와 달이 80,000km의 알맞은 거리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지구는 하루에 두 번씩 물에 잠기는 일이 없습니다.
5. 지구의 두께가 3m만 더 두꺼웠다면 산소(酸素)가 없어 모든 동식물은 살 수 없습니다.
6. 대기권의 두께가 지금보다 얇았더라면 지구는 별똥들에 의해서 날마다 불바다가 된다고 합니다.
7. 연어의 경로입니다. 연어는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바다에서 태어나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강물로 올라갑니다.
8. 장어의 행로입니다. 장어가 바닷가에서 알을 낳고 죽으면 새끼들은 다시 호수나 강으로 돌아옵니다.
9. 호주의 선인장이 빠른 속도로 번식되는 것을 억제시킬 수 있었던 것은 선인장만 갉아먹고 사는 곤충이 있기 때문입니다.
10. 사람은 폐를 가지고 있으며 곤충은 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관이 성장을 억제시킵니다. 만약 곤충이 폐를
가지고 있었다면 사람만큼 성장할텐데 다행스럽게 곤충은 더 성장할 수 없는 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자연의 사실은, 어떤 영적 사실의 상징이다.”(R.W. Emerson)라고 했습니다.
아마 과학자들을 모아놓고 이런 신비스런 아직까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을 말하라고 한다면 끝없이 이어질 것입니다. 이런 설교 계속하면 남자들은 계속 재미있어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여자 분들은 따분해 하십니다. 벌써 졸려고 하는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런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뇌수술을 받으러 가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수술에 성공해서 생존할 확률이라고 해야 고작 10퍼센트. 황량한 마음을 가눌 길 없이 차에 오르며, 그는 자신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차가 서서히 움직여 대문을 나섰을 때였습니다. 그때 거리 양쪽 모든 집의 현관문이 일제히 열리고 동네사람들이 나와 그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습니다. 이웃사람들이 그의 수술 성공과 건강을 기원하며 모두 함께 격려해주자고 약속한 일이었습니다. 절망했던 환자는 ‘나는 사랑 받고 있어.’ 하는 생각에 가슴 가득 새로운 희망과 용기가 솟아올랐습니다.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습니까? 이런 두 가지 상황을 우리는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우주적으로 준비하신 축복이요 하나는 나 자신을 위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여호와는 하늘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땅도 조성하시고 견고케하시되 헛되이 창조치 아니하시고 사람으로 거하게 지으신 자시니라 그 말씀에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 45:18)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시는 이분에 대해서 소개해 주시기를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골 1:15)라고 하시며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엡 3:9)고 하셨습니다.

또 하나의 창조와 신비

첫 번째 창조가 우주적 창조였다면 두 번째 창조는 사람입니다.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즐거움을 창조하며 그 백성으로 기쁨을 삼고”(사 65:18)
사람이 아무리 돈을 벌어도 만일 그것을 함께 누릴 사람이 없다면 그 가진 것이 무의미 한 것입니다. 선물은 크고 작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선물을 줄 사람이 있다는 것이 행복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행복합니다. 돌을 맞이한 준혁이와 하민이에게 선물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본문 “위로부터”(a[nwqen:아노덴)는 위로부터란 뜻도 있지만 동시에 “처음부터, 새로, 다시”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의 자손(유대인)을 지켜보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너는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돌들 위에 명백히 기록할지니라”(신 27:8) 왜 그렇게 하나님이 율법을 강조하시고 기록하라고 하셨겠습니까? 그것은 오직 말씀이었습니다. 말씀을 지켜야 살고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면 하나님께 버림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신 27:26) 이렇게 언약하시고 이 백성이 축복을 받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신 28:2)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으며 그들의 불순종으로 하나님은 떠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에게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삼상 16:14)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한때 다윗을 통해서 나라가 반석 위에 서는 듯 했으나 그의 아들 솔로몬의 우상숭배로 인해서 이스라엘은 분열국가가 됩니다. 하나님은 남 유다(B.C 931~586:19대 왕조:345년)와 북 이스라엘(B.C 931~721:20대 왕조:210년)로 나누시고 혹시나 하시는 마음에서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의 기대를 떠난 유다와 이스라엘

‘열왕기하’에는 이스라엘의 제일 악한 왕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나옵니다. 아하시야는 제위기간이 2년을 지냅니다. 그런데 자기 집 난간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습니다. 그리고 이 일로 신하들을 보내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파리의 신)에게 자기 병을 나을 것인지를 물어보라고 보냅니다. 도중에 엘리야가 나타나 “너는 누운 그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때 하나님이 엘리야를 통해서 하시는 말씀은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왕하 1:3하반절)고 하십니다. 오늘날에도 교회를 다니시면서 목사에게 물어보지 않고 점보는 집에 가서 물어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주님께 나아오십시오. 하나님께 오세요.
이사야 30: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화 있을진저 패역한 자식들이여 그들이 계교를 베푸나 나로 말미암아 하지 아니하며 맹약을 맺으나 나의 신으로 말미암아 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그들이 바로의 세력 안에서 스스로 강하려 하며 애굽의 그늘에 피하려 하여 애굽으로 내려 갔으되 나의 입에 묻지 아니하였으니 죄에 죄를 더하도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아버지는 많은 재산과 축복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에게 묻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가서 비는 모습니다. 하나님은 오라고 하시는데 이스라엘과 유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 바알세붑에게, 이집트에게 빌붙어서 살아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상 더 이상 치졸하게 돈을 바라고 세상의 권위를 세우려고 하나님을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결코 하나님은 치욕스럽게 만들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은 결국 바벨로 포로 70년을 지내게 되고 이후에 하나님은 여러 예언자를 보내시고 구약시대를 마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침묵이 이어집니다. 구약의 마지막성경 말라기가 기록되고 세례요한이 나타나기까지 약 400년이 흐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하신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사 65:17)하신 말씀처럼 “위로부터”(a[nwqen:아노덴)는 다시, 새롭게 역사를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동행하시는 하나님

본문 위로부터 그 다음에 나오는 단어 “오시는”(ejrcovmeno”:에르코멘스)는 어근 “e[rcomai:에르코마이”입니다. 이 단어는 나타나다 이전에 “동반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데 절대 혼자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인 하나님의 영과 같이 오시는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요 10:30)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신대”(요 10:38) 예수그리스도는 삼위일체의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오셨다는 사실은 이 땅의 사람과 다르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땅의 죄인의 모습이 아닌, 능력이 없는 인간의 모습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오시는 분을 말합니다.

만물 위에 계심

본문에서는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 위에 계시나니” 두 번 만물 위에 계심을 강조합니다. 누가복음 2:40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요 3:35)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표현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 28:18, 고전 15:27, 계 1:18)와 일치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창조주이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운행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주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고 우리에게 전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접근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선물의 내용물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 것이 아니라 선물을 받아야 할 사람에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성폭행 당한 여성에게 성폭행을 우발하는 행동을 했다고 하여 태형 90대가 내려졌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90대가 200대가 되고 징역 6개월이 늘어났습니다. 이유는 언론을 통해 공론화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담당했던 변호사는 면허를 박탈당하고 법정 출석을 금지시켰습니다. 이것이 이슬람의 법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세상을 만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은 언제나 여자와 노인과 약자의 편입니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불볕더위가 한창인 어느 여름날, 주인과 하인이 길을 가다가 상자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상자를 열어 보니 금이 가득한 것이 아닌가! 뜻밖의 횡재를 한 주인은 신이 나서 하인에게 당장 그 상자를 가져다 자기 집의 창고에 넣어 두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상자를 짊어지고 가야 할 하인에게 뜨거운 여름날에 상자의 무게는 어떻겠습니까? 정말 죽을 맛일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정반대의 상황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상자를 발견한 주인이 하인에게 ‘자네의 집으로 가져가 살림에 보태 쓰게’라고 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하인에게 그 상자는 무겁겠습니까? 실제 무게는 여전하겠지만, 하인의 어깨에 눌리는 무게 감은 가벼운 새털 같을 것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자신을 위해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사람의 마음입니다. 이와 같이 ‘신앙생활이 힘들게 느껴지는가? 신나고 가볍게 느껴지는가?’ 하는 것은 누구를 위해 금 상자를 짊어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말씀에 따라 행하는 모든 행동이 하나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한 것임을 알고 확신할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달라지고 신앙생활이 달라지며 인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 하는 말은 부모 자신을 위해서만 결코 하는 말이 아닙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당신을 위해서만 우리보고 존재하라고 하시겠습니까? 주님의 명령들은 곧 나 자신을 위한 것임을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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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말씀(122. 하나님께 영광을) / 본문 : 눅 17:11-19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14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미국 워싱턴 근교 버지니아에 오래 전에 이민가신 권사님이 계십니다. 그 분은 네 아들을 하나같이 미국에서 사회적으로나 신앙적으로 훌륭하게 키워 교회와 이웃의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권사님은 29살에 남편을 여의셨습니다. 당시 남편은 숨을 거두면서 권사님을 불렀습니다.”여보, 그동안 고생이 많았소. 미안하지만 이제 한 가지만 약속해 주오. 우리 네 아들을 꼭 책임지고 키워주오” 권사님은 남편의 손을 꼭 잡고 “약속할게요”라고 했습니다. 미국에 있는 전도사님이 그러는데 요즘은 LA 길거리에서 한국인 거지를 가끔 본답니다. “그분들도 한 때는 꿈을 안고 미국을 왔을 텐데…” 하면서 남의 일처럼 보이지 않는답니다. 미국 땅에 아들 넷을 남겨놓고 떠나는 남편의 약속에 대답은 했지만 외국에서 사는 것이 그렇게 녹녹한 것은 아닙니다. 권사님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믿음밖에 없었습니다. 이 믿음밖에 없는 젊은 과부는 갖은 고생을 하며 어린 네 아들을 키웠습니다. 공부를 특별나게 더 시킬 수도 없었습니다. 밥상에 먹을 것이 있을 때는 “주님, 먹을 것을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했고 먹을 것이 없을 때는 자식들을 앉혀놓고 “주님, 오늘은 금식하게 해주셔서 감사 드립니다”라고 하면서 아들 넷을 키웠습니다. 양식이 있건 없건 감사를 드리면서 아들을 키운 것입니다. 어찌 하나님이 이들을 돌봐 주시지 않겠습니까?
“고려 사람은 바위 올려놔도 살아난다”는 러시아에서 고려인에 대한 대표적인 속담입니다. 초기정착, 독립운동지원, 강제이주, 구 소련의 해체 후 다시 시작되는 방랑의 길, 험난했던 고려인 이주 140년을 잡초처럼 다시 일어났습니다. 대한민국이 좀 강해져야 합니다. 경제적인 부만 쌓여간다고 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감사입니다.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고 했습니다.
시 50:23에서는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나니…”라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좋게 되면 행복이고 나쁘게 되면 불행이라고 하는 단순한 논리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은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며(롬8:28), 부해도 가난해도 자족할 줄 아는(빌4:11)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한 번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갈릴리와 사마리아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어떤 한 촌에 들어 가셨습니다. 거기서 문둥병자 열 명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이 대부분이었지만 그 가운데는 사마리아 사람도 한 사람 끼어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는 감정이 좋지 않아서 서로 접촉하기를 꺼려했습니다. 그러나 문둥병 환자들은 다같이 불행한 병에 걸려있기 때문에 불행한 가운데 서로 동정하면서 한 집안이 되어서 여기저기 쫓겨다니며 유대 사람이나 사마리아이나 사람 할 것 없이 같이 지냈던 모양입니다. 문둥병자가 되었으니 따질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유대인이면 뭐하고 사마리인이면 뭐합니까? 아무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 당시 문둥병은 죽음과 같은 불치의 병이었습니다. 사실 이 사람들은 죽은목숨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이 병은 전염성이 있어서 이 병에 걸리면 격리시켰습니다. 사회에서 완전히 추방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병에 걸린 사람들끼리 모여 지냈습니다. 이 사람들은 가족을 만날 수도 없으며, 친구를 가질 수가 없었고 단순히 같은 병에 걸린 것 때문에 함께 지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 예수님이 이 사람들이 있는 곳 가까이로 지나가시게 되었습니다. 이때 이 사람들은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예수 선생님,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그들은 소문으로만 듣던 예수님을 직접 뵙게 되니 너무 감격해서 그냥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향하여 절실하게 소리 질렀습니다. 문둥병이 심하면 소리지르는 것도 어렵다고 합니다. 죽을힘을 다해 외친 것입니다.

예수님은 열 명의 문둥병 환자를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레 13:1-14)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문둥병환자들은 서로 쳐다보았을 것입니다. 저희는 예수님이 말씀을 들으면서 아무런 느낌도 변화도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병에서 깨끗해져라”고 하시면 온몸이 불덩어리 같이 뜨거워지든지, 감당할 수 없는 경련을 일으키든지, 온몸에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짜릿하든지, 어떤 체험이 있기를 기대했는데 그런 체험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이 사람들은 기대하는 바와는 달랐지만 실망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했습니다. 믿음에는 반드시 순종이 따릅니다. 순종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저희가 제사장에게로 가다가 다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많은 문제와 요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열심히 기도는 하는데 응답 받지 못하는 일이 많아 실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다음 단계를 위하여 충분한 힘을 허락해 주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언제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이 다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불평하지 마세요. 주님은 그 다음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저 오늘 내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열 사람의 문둥병 환자는 함께 고통을 받았습니다. 함께 울었습니다. 함께 한숨쉬었습니다. 함께 절망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함께 기도하고, 함께 말씀 듣고, 함께 순종했더니, 함께 병이 나았습니다. 그들은 함께 기쁨이 충만하여 제사장들에게 가서 그들의 몸이 깨끗이 나은 것을 보이고 다 나았다는 증명서를 받았습니다. 이제는 일반 사회 사람들과 같이 지낼 수 있었고 그립던 가족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뻐 뛰며 세상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오직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깨닫고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다시 예수님께로 돌아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 돌리는 감사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않았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는 물으십니다. 창세기 3:9에서 하나님이 아담을 찾으시던 말씀과 똑 같은 뜻으로, 사람이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 있지 못하고 이탈해 있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고침을 받은 문둥병자들은 당연히 예수님 앞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있어야 할 아담이 하나님을 떠나 있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아홉 사람은 왜 주님께 감사 드리지 못했습니까? 이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타락한 인간성의 일면입니다. 이 사람들처럼 우리도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께 구원해 달라고 간절히 간구 합니다. 그 후에 우리가 그 어려움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어려움에서 건짐 받고 나서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지키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영국의 트렌치 목사는 예수님의 행하신 이적에 대해서 주석을 써 내려가다가 자기가 믿는 바로는 “모든 은혜 가운데 감사할 줄 아는 은혜는 제일 드문 은혜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동양에 내려오는 말 중에도 “원수는 돌에 새기고 은혜는 물에 새긴다”라고 한 것이 의미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은혜를 구하는 이는 많지만 은혜를 받은 다음에 그것을 기억하는 이는 적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특별히 주의하지 않으면 우리도 그 아홉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에 다윗도 스스로 자기 영혼을 깨우면서 하는 말이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송하여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시 103:2)라고 스스로 말했습니다.

이 열 사람 가운데 아홉 사람이 은혜를 잊어 버렸는데 이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전부가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을 비교해 보면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이 유대인이요, 또 은혜를 깨달아 알 만한 사람이 어떤 면으로 보든지 유대인이 아닙니까?
이 유대인들은 말하자면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모세의 율법을 배운 사람들입니다. 여러 선지자의 교훈을 들은 사람들입니다. 매 안식일이면 회당에 나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유대인 아홉은 전부가 은혜를 잊어 버렸습니다.

은혜는 잊어버리기가 쉽습니다. 은혜를 받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 당연히 받을 것으로 생각해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은혜가 너무 크면 잊어버리기가 쉽습니다. 작은 은혜는 기억하지만 큰 은혜일수록 오히려 잊어버리기가 쉽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열심히 간절히 하는 사람도 은혜를 잊어버리기가 쉽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믿음의 결과로 은혜를 받았는데도 그 은혜를 잊어버립니다. 믿음 있는 사람도 은혜를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우리는 감사하는 삶을 살 것인가?, 불평하면서 살 것인가? 우리가 결정해야 됩니다. 불평은 불평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불순종을 낳게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축복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믿음이 좋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를 잘 하느냐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압니까? 얼굴을 보면 압니다.
우리는 당연히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당근이지요, 당근은 속어로 당연하다는 말입니다. 아기오이가 엄마오이에게 묻습니다. “엄마 나 오이 맞아?” 하니까 엄마 오이가 웃으면서 “당근이지” 그랬습니다. 이 말은 당연하지 하는 말인데, 아기오이가 오해를 하여 “어머나 나는 오이가 아니고 당근이구나” 하고 가출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거기에 인생의 행복이 있고 거기에 만족이 있습니다. 거기에 감사가 있습니다. 순종이 없는 곳에는 절대로 행복도 만족도 감사도 없습니다.
비싼 개와 싼 개의 차이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비싼 개는 주인의 말을 잘 알아듣습니다. 비싼 개는요, 아무리 굶어도요 아무나 던져주는 고깃덩어리를 먹지는 않습니다. 주인이 ‘먹어’ 해야 먹습니다. 그러나 똥개는 아무거나 먹습니다. 주인이 말하든지 말든지 제 맘대로 합니다. 개도 그렇지만 말도 그렇다고 합니다. 중동에 가면은 말을 많이 타는데, 비싼 말은 수십 억 원도 넘는다고 합니다. 비싼 말과 싼 말의 차이도 같습니다 비싼 말은 수십 킬로를 달려와도 주인이 ‘물먹어’ 해야 먹는다는 것입니다. 싼 말은 막 먹는 것이지요, 고깃덩어리 값밖에는 안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얼마짜리 인생입니까? 인생의 값은 하나님에게 얼마나 순종하는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할 때 그 안에 행복이 있고 만족이 있고 감사가 있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1)

바울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한 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 3:15)

1. 감사는 스스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명령은 14절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레 13:1-14)고 하신 것 외에는 없습니다. 즉 돌아와서 나에게 감사하라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감사는 명령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명령으로 되는 것은 감사가 아닙니다. 감사의 속성은 스스로 해야 되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하는 것이 강제로 됩니까? 스스로 해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이 없으면 못하는 것이 감사입니다.

2. 감사는 표현을 해야 합니다.
첫째, 15절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라고 했습니다. “큰 소리로” 했다는 것은 공개적으로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가 숨어서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불치의 병을 고쳐 주셨는데 말못할 일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하나님께 모든 것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13절에 보면 이들은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했습니다. 고쳐달라고 할 때는 문둥병이 들려있는 상태에서도 소리를 지르고 고침을 받은 후에는 침묵했습니다. 우리 속담에 “화장실 갈 때 마음하고 나올 때 마음이 다른 사람들입니다.” 소리 높여 주님을 찬양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16절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eujcaristw’n:유카리스테오, 깊은 환희와 기쁨속에서 나오는 감사)하니”라고 했습니다. 한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한 고드란트 생활비 전부를 연보궤에 넣은 것(막 12:42-43)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사마라아인인 이 사람이 문둥병자로서 병고침을 얻었지만 주님께 드릴 아무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그는 죄송하여 예수의 발아래 엎드렸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례였습니다.

3. 감사는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아는 것으로 말하면 유대인이 더 많이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은혜란 자신을 돌이켜 보고 그 축복들이 어디서 왔나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니라 나는 할 수 없되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4. 감사는 믿음이었고 구원입니다.
19절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사마리아인이 이 사람은 주님 앞에 나와 절하고 감사의 표현을 한 것 밖에 없습니다. 문둥병을 고침 받은 것만 해도 기쁜 일인데 유대인에게만 있을 줄 알았던 구원을 받게된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은 욥이 고백한 것과 같은 마음으로 주님께 찾아온 것입니다.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삶이 예술(藝術)이라면…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21. 삶이 예술(藝術)이라면…) / 본문 : 요 17:17-19

“1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19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십니까? 11월 11일입니다.
빼빼로데이는 발렌타인데이, 화이트데이 등과 함께 상업적 마케팅으로 만들어진 날입니다. 농림부에서는 이런 국적 없는 기념일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쌀 소비 촉진을 위해 ‘가래떡데이’로 하자고 합니다.
세계 교회는 해마다 11월 둘째 주일을 ‘박해받는 교회를 위한 세계 기도의 날’로 지키고 있습니다. 올해는 11월 11일인 바로 오늘입니다. 세계의 수백만의 기독교인과 수천 곳의 교회에서 일제히 박해 아래서 신음하는 형제자매를 기억하며 기도하는 날입니다. 빼빼로데이는 알면서 박해받는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날이라는 것을 모르는 우리가 안타깝습니다.

가장 심한 박해를 받는 곳은 이슬람권과 공산권일 것입니다.
압둘(가명)은 중동의 어느 나라에 사는 기독교인입니다. 그 역시 이슬람을 믿다가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입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열성 이슬람 신자였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내가 이슬람에서 배운 것은 증오였다. 알라신을 섬기지 않는 사람, 특히 기독교인과 유대인을 증오하라고 늘 배웠다. 그러나 내가 얼마 전 만난 두 가정은 나에게 전혀 다른 삶의 태도를 보여주었다. 그들은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 주었다. 나는 일찍이 이슬람 사회에서 이웃과 사람을 그토록 사랑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이후 나는 그들이 기독교인임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나를 기독교인으로 만들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다. 다만 성경책 한 권을 주기는 했다. 나는 그들이 믿는 예수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 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예수가 신의 아들이며, 평화와 기쁨을 주시는 분이라고 했다. 그분이 주는 평화와 기쁨은 사람이 일찍이 맛보지 못한 평화이며 기쁨이라고 말했다. 성경을 읽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예수께로 달려갔고, 그분을 구주로 영접했다.”
예수를 영접하는 순간 우리의 삶은 예술로 바뀌는 것입니다. 원망과 증오에서 용서와 사랑으로 바뀝니다. 이것이 예술(藝術)입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합니다. 그러면 예술이 그렇게 대단한 것일까요? 예술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이렇습니다. “예술은 경험과 상상력을 통해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한 인간의 활동, 작품을 말합니다. 순수 예술과 교양 예술로 나뉘고, 어떤 사물이 우수하거나 아름답게 생겼을 때도 사용하기도 합니다.” 또한 예술이라는 말은 아름답고 높은 경지에 이른 숙련된 기술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도 사용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 어머니 음식 솜씨는 예술이야”, “오늘 설교 제목 예술이야!”, “당신의 말은 예술이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시인’으로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몇 일 전에 우리 집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닮을 쌓을 때 큰돌을 쌓는데 큰돌로만은 닮을 쌓기가 어렵다는 겁니다. 큰 돌 틈으로 작은 돌을 넣어야 큰돌이 중심을 잡고 닮을 잘 쌓을 수 있다는 겁니다. 이 말이 예술 아닙니까?

예술 중에 행위 예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신체를 이용한다는 측면에서 신체예술,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한다는 측면에서 과정예술로 불리기도 합니다. 한 때는 해프닝, 이벤트 등으로 불렸으나 지금은 퍼포먼스라는 용어로 통용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이 포퍼먼스의 원조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나옵니다. 바로 이사야입니다. 하나님은 멸망을 당하게 될 애굽과 구스 백성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2 곧 그 때에 여호와께서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에게 일러 가라사대 갈지어다 네 허리에서 베를 끄르고 네 발에서 신을 벗을지니라 하시매 그가 그대로 하여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하니라 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종 이사야가 삼년동안 벗은 몸과 벗은발로 행하여 애굽과 구스에 대하여 예표와 기적이 되게 되었느니라”(사 20:2-3) 이사야의 벗은 몸과 발을 미리 보여 주심으로 애굽과 구스의 멸망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으로 마치시지 않았습니다. 우주 최대의 포퍼먼스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보내 주신 것입니다. 그분의 삶을 통해서 영원히 남을 복음을 주신 것입니다. 성경은 이 삶을 “예술”이라는 단어보다는 “거룩”이라는 단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술이 여러 가지 기술을 가지고 인간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인간의 제일 아름다움을 “거룩”이라는 것으로 표현하고 계신 것입니다. “거룩”(aJgiavzw:하기아조)은 성별(consecration)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분리된 삶을 말합니다. 세상 죄와 분리된 사람을 말합니다. 구약에서 하기아조는 선지자들을 불러 세상과 구별하여 세울 때 사용했습니다(렘 1:5). 아론과 그 아들들을 제사장으로 세울 때에 거룩하게 하여 제사장 직분을 맡겼습니다(출 28:41).
인간은 근본적으로 죄인입니다. 인간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찾아 나섭니다. 그러나 죄를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는 그 아름다움은 추한 것으로 변화됩니다. 진정한 예술이란 하나님 안에서 죄의 문제를 해결할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말씀 진리”(17절)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17절)라고 했는데 “진리”라는 단어가 두 번 나옵니다. 뒤에 나오는 진리는 헬라어 본문에서는 관사 없이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앞의 진리와 구별하기 위함인데요 즉 앞에 나온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뒤에 나오는 것은 “참되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자신의 삶을 가리킨 것이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시고 그 말씀을 이루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삶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려주신 것은 세상의 그 어떤 학문적 이론이나 기술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물려주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거룩입니다.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19절) 또한 이 거룩함을 전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고 또 아버지가 당신을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제자들을 세상에 보냈었다고 하십니다.

거룩한 삶은 마땅히 투자가 있어야 합니다. 거룩은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현대는 모든 것이 인스탄트 시대이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하나의 위기를 극복하고 나면 곧바로 거룩의 경지에 이르는 것으로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거룩은 순간 순간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으로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거룩한 삶보다 주님을 세상에 더 잘 드러낼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거룩은 사람들로 그리스도를 신뢰하게 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또 성도들에게는 유익을 가져다줍니다. 다른 한편으로 성도들이 거룩하지 않으면 범죄 하는 신자처럼 이는 주님의 이름에 불명예와 부끄러움을 가져다줍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지불한 값, 그리고 우리에게 부여하신 은혜가 거룩한 삶을 위한 우리의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거룩은 발전되어 가는 것이지 하루아침에 얻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할 때 성령님은 한 단계씩 우리를 변화시켜 주십니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좆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예수를 영접한 뒤 얼마 동안 한 산으로 기도를 많이 갔었습니다. 기도원에는 나보다 서너 살 위인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거기 있었는데 산기도 초보자들의 인도자였습니다. 그는 대단히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기도를 많이 해서 목이 쉬었는데 사람들 이발도 해주고 기도도 도와주었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돌아왔다가 몇 달 후 다시 가보면 여전히 그는 거기 있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물었습니다. 언제까지나 여기 있을 것인가? 나가서 일할 생각은 없는가? 그러면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다음에 나가겠다고 했습니다. 그 후에 그는 40일 금식을 세 번이나 했습니다. 기도원장은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크게 쓰실려고 그렇게 기도만 시키시는지…” 그 후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가 목회를 시작했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는 다시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하게 됩니다. 신앙 인들은 어느 정도 기도를 하고 어느 정도 세상의 일을 해야 하는가? 그저 기도만 하고 있으면 하나님이 필요한 때 일을 주시는가?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우리는 사역을 위해서 준비해야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앉아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삶이 예술이 되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일은 기도와 더불어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면서 언제나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한 삶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사명인 그리스도의 목소리가 되기 위해 광야에서 홀로 떨어져 지냈습니다. 요한의 모든 것은 단 하나의 목적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의 의복도, 음식도, 행동도, 요구도. 그의 삶은 그의 말과 일치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한 유대인 부부가 첫 아이에게 지어 줄 이름을 가지고 의견을 달랐습니다. 그들은 결국 랍비에게 가서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남편은 시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이의 이름을 지어 주기 원하지만, 저는 제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지어 주고 싶습니다.” “당신 아버지의 이름이 뭡니까?” “요셉입니다.” 랍비는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 아버지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요셉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란 말입니까?” 부인이 다시 말을 꺼냈습니다. “시아버지는 말 도둑이었고, 제 친정 아버지는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내 아들이 시아버지의 이름을 따른 것인지, 아니면 친정 아버지의 이름을 따른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랍비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윽고 대답했습니다. “그 아이를 그냥 요셉이라고 부르세요. 그러고 나서 그 아이가 말 도둑이 되는지, 정직한 사람이 되는지 지켜보세요. 그러면 어느 쪽 아버지의 이름을 따른 것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칭하는 것과, 우리의 삶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삶이란 어느 일 부분이 될 수 없습니다. 나의 전체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침례교인이 침례 받으러 물 속에 들어가다가 깜짝 놀라며 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끄집어 내더랍니다.
목사님이 묻기를 ‘그것이 무엇이오?’
성도 ‘돈지갑입니다.’
목사 ‘돈지갑을 넣은 채로 침례 받으십시오. 바로 그 돈지갑이 침례를 받아야만 합니다.’

우리의 삶이 예술이라면 걸작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이 걸작이 바로 거룩한 삶 아니겠습니까?
레위기 19장 2절에 보면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어떻게 거룩한 삶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자기를 복종시키는 거룩한 습관을 지니고 계셨습니다. 앤드류 모레이는 모든 크리스천은 ‘순종학교’에서 순종의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5:8-9절에서 예수님은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 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놓고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기도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고 이루려고 하기보다도 내 뜻을 추구하고 이루려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내 기도 들어주지 않으면 교회 안 나올래요! 하나님께 엄포를 놓고 공갈을 할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크리스천의 삶이란 한 마디로 자기를 항상 부인하는 자기와의 싸움인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에 쳐 복종시키는 삶인 것입니다(고전 9:27).

2차 대전 때 한 병사가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때 자신이 병원에 입원해서 큰 수술을 받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의사선생은 그를 위로하려고 애썼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곧 회복될 것입니다. 한 쪽 팔을 잃었다고 절망하지 마세요’ 하고 위로했습니다. 그때 그 병사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오히려 의사선생을 향해 ‘선생님! 그것이 아닙니다. 저는 팔을 잃은 것이 아니라 바친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 병사의 눈은 슬픔에 잠긴 것이 아니라 빛나고 있었습니다. 사실 없어진 한 팔에 대해 잃었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바쳤다고 생각하는 사람 사이에는 엄청난 삶의 차이가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드려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긴 것’ 아니겠습니까?

인생의 삶은 한번만 무대에 올려집니다. 다시 할 수 없습니다. 실수가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의 인도를 받아 이 거룩한 대열에 합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합심하여 구하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20. 합심하여 구하라) / 본문 : 마 18:19-20

“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성경에서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말합니다. 한 사람은 육신에 속한 사람이요 한 사람은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롬 8:5). 육신에 속한 사람은 육신을 위해서 일합니다. 그러나 영에 속한 사람은 영을 위해서 일합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이 제일 좋아하는 것이 돈일 것입니다. 돈도 어떻게 벌고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영의 사람에게 주어지면 영을 위하여 사용할 것입니다.
‘돈을 가진 사람이 그것을 남에게 주어버린다면 그 사람은 돈이 없어집니다. 하지만 사랑은 주고 나면 더 많이 남습니다. 이것이 바로 돈과 사랑의 차이입니다.’(템플턴) 사랑하며 세상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피조물 가운데 사람처럼 다양성을 가진 존재는 없는 것 같습니다. 생긴 모습도 다 다르고 신체구조도 다 다릅니다. 지문도 다르고, 목소리도 다르고, 취미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얼굴 모습도 다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한 하나님께 창조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다 보니 취미도 가지각색입니다. 그러나 제 아무리 취미 생활이나 여가 생활을 즐긴다 해도 그 도가 지나치면 영적으로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늘 유념해야 합니다.

바둑에 심취한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토요일 하루종일 새벽 1시까지 바둑을 두었습니다. 주일 예배 기도순서를 맡았기 때문에 졸리는 눈을 비비며 강단에 올라가 앉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바둑알이 눈앞에 아른거리기 시작합니다. 까만 머리는 까만 알, 흰머리는 흰 알, 의자는 바둑판의 까만 줄로 보이는 것입니다.
장로님은 머리를 흔들며 정신을 가다듬었습니다. “이러면 안되지!”라며 허벅지를 꼬집었습니다. 기도 시간이 되자 바둑 용어가 뛰쳐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으며 겨우 기도를 끝냈습니다. 그리고 마무리를 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잘 마치는가 싶었는데 그만 아멘을 해야 하는데 대신 “아다리”했다는 겁니다.

성경에는 영혼이 건강하다는 말과 기운이 쇠한다는 말이 나옵니다(욥 33:4, 요삼 1:2). 우리의 영혼이 건강할 때도 있고 쇠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강건할 때는 속에서부터 솟아나는 힘이 있어 어떤 일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힘이 쇠하면 간단하고 쉬운 일에도 두려움이 앞서게 됩니다. 일하는 것이 겁이 납니다. 이럴 때는 내 영혼에 새로운 힘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비밀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하기를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 4:16)고 했습니다. 육신이나 영혼이나 쉼이 필요합니다. 휴식을 통하여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안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쉬기만 한다고 힘이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자동차에 기름이 떨어지면 주유소에 가서 기름을 넣어야 하는 것처럼, 육체적 회복을 위하여 양식이 필요한 것처럼 영혼을 위해서도 새 힘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무엇으로 우리가 날로 새롭게 될 수 있겠습니까?

말씀과 기도 이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오늘은 기도 중에서도 합심기도에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교제하는 방법이요 새로운 능력을 받는 비결인데, 우리는 흔히 기도라고 할 때 개인기도만을 생각하기 싶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새로운 차원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합심하여 드리는 기도입니다. 앞에서 육신에 속한 사람과 영에 속한 사람이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기도 또한 육신에 속한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합심 기도는 이러한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합니다.

합심기도는 나 자신만을 위한 기도라기 보다는 공동의 관심사를 위한 기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무 교회주의를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만 잘 믿으면 되지 왜 모여 가지고 부담을 가지냐는 것입니다. 모이지 않는다면 합심하여 기도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남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오직 자신만을 위한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합심하여 기도한다고 할 때 공동의 관심사를 가지고 기도하지만 개인의 일도 얼마든지 합심기도의 내용이 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을 때 예루살렘 교회는 합심하여 기도했습니다. 베드로는 잠에서 깨어났을 때 옥문을 열렸고 자유롭게 됨을 알았습니다. 바울도 이러한 함심 기도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여러 서신에서 각처에 흩어진 성도들을 향하여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고후 1:11)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살기 좋아지면서 기도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약 먹지말고, 병원 가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전에 못살 때는 약 사먹고 병원가지 어려우니까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모든 일을 기도로 하려고 하는 마음이 식어져 가는 것 같습니다. 작은 일에도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아이들 배아프면 약 사러가기 전에, 병원 가지전에 배에 손을 얹고 기도주세요.

제가 알게된 한 집사님이 계신데 이분은 서울 강남의 모 교회에 다니십니다. 외국인 노동자를 7년여 동안 전도하여 50-70명을 그 교회에 인도한 분입니다. 그런데 이 집사님이 시험에 들어 저에게 상담을 했습니다. 올 초에 교회에서 결정하기를 집사님은 이제 그만 하셔도 됩니다. 그리고 손 떼세요? 그랬다는 겁니다. 알고 보니 필리핀에서 현지 목사를 데려오고 국내 책임자로는 모 신학교 여 교수님을 임명해서 이제 외국인 노동자는 그분들이 알아서 할 것이라는 겁니다. 이 집사님은 하도 기가 막혀서 눈물을 흘리며 저에게 하소연을 했습니다. 집사님 말씀으로는 자신은 내세울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교회에서 밀려났다는 겁니다. 다른 여러 말로 그래도 교회를 떠나지 말고 때가 되면 알게 될 것이니 꾸준히 봉사하라고 일러 드렸습니다.
그런데 몇 일전 전화를 했더니 간난아이 울음소리가 나더라구요. 어찌된 것이냐고 하니까 필리핀 여성이 아이를 낳는데 돌봐줄 사람도 없고 병원에서는 150만원이면 된다고 해서 갔는데 350만원이 나왔답니다. 누구한테 도움을 요청할 사람이 없어 집사님이 생각나서 연락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병원가서 아이를 데려와 돌봐주고 있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병원비는 보험이 있다고 생각하고 150만원 정도 불렀는데 보험이 없어 350만원이 나왔답니다. 이런 일을 기도하며 해결하고 다니셨는데 교회에서 이 일을 알아 가지고 집사님을 불러서 손떼시라고 했는데 왜 자꾸 관여 하냐고 해서 참다못해 한 말씀하셨답니다. 여러분! 훌륭한 시스템과 최상의 학력만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일 중요한 일은 기도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합심”이란 말의 헬라어는 “쉼프호네오”(sumfwnevw)라는 단어입니다. 이 뜻은 “조화되다. 규정하다, 일치하다, 합심하다”로 옮길 수 있습니다. 이 단어의 어근은 “쉽프호노스”(suvmfwno”)로 “함께 소리내는, 일치된, 조화된” 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쉽프호노스”는 “쉰”(suvn)이라는 “교재, 함께, 도움, 동참”이라는 단어와 “프호네”(fwnh)는 “말, 목소리”를 말하는 단어가 합성된 것입니다.

여러분! 오케스트라의 ‘심포니’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 말이 오늘 본문의 “합심” 바로 헬라어 ‘쉽프호네오’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오케스트라 연주를 들어 보세요. 서로 다른 악기들이 모여서, 서로 다른 소리를 내지만, 그 조화가 기가 막힙니다. 큰 악기, 작은 악기가 서로 하나가 되어서 훌륭한 음악을 연주해 내는 것입니다. 마치 오케스트라에 동원된 악기의 종류들이 다 다르지만, 훌륭한 하나의 음악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우리들 각자가 서로 다르지만, “쉼프호네오”의 합심기도를 통해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마음이 맞으면 삶은 도토리 한 알만으로도 허기를 면할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물며 주님이 약속하신 말씀이 얼마나 진실하시겠습니까.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교회의 역할 중에 교제가 있습니다. 이 교제 역시 단순히 사람 사귀어서 인맥을 만들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교제의 역할은 바로 기도에 있는 것입니다. 기도로서 하나되지 못한다면 교재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합심기도는 바로 서로를 엮어 주는 역할을 합니다.

1970년 4월 아폴로 13호가 발사됐는데, 그만 예상치 못한 고장이 났습니다. 우주선에 탄 우주 조종사들이 살아 돌아올 확률이 당시로서 0.001% 정도 밖에 안됐다고 합니다. 이런 뉴스가 나가게 되니까 미국인 뿐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이 안타까워했습니다. 이때 당시 대통령이던 닉슨이 텔레비전을 통해 담화문을 발표하면서, 전 국민들에게 호소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들의 무사귀환을 위해서 여러분 모두 기도해 주십시오” 그리고는 그 날을 기도의 날로 선포하고, 관공서마다 국기를 반기로 게양하고, 모든 교회는 종을 울리고 국민들은 그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국민이 하나로 엮어진 것입니다.
무사귀환의 확률 0.001%의 희박한 상황이었지만, 3일 후에 그들은 기적처럼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당시 닉슨 대통령은 너무너무 기뻐서 국민들에게, “이번 주에는 모두가 하나님께 나가 감사의 예배를 드리자”고 말했습니다. 그 후부터는 우주 기지의 과학자들은 우주선이 발사한 후에는, 항상 합심 기도하는 것이 관례처럼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조금만 뭘 하려고만 하면 돼지 머리에다 절하는 게 관례처럼 되어 있는데,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이다. 예전에 모 항공사에서 비행기를 사다놓고 돼지머리 상 차려 가지고 절을 했습니다. 비행기에서 내리던 외국인들이 이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한국에 아직도 이렇게 미개한 사람들이 남아 있습니까?”라고 했답니다.

이 나라에 우상이 사라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에 PC통신이 처음 생기고 얼마 안되었을 때입니다. 국가의 지원을 받아 운영하는 한 통신사가 초기화면에 ‘오늘의 운세’라는 메뉴를 만든 것입니다. 제가 그래서 “‘오늘의 기도’는 초기 화면에 올려주지 않으면서 ‘오늘의 운세’를 올리다니 이것이 한국의 정보화입니까? 실망했습니다.” 그랬더니 지운다고 하더니 몇 일 사라지더니 다시 슬그머니 올리더라구요.

올해는 특히 평양의 장대현교회에서 시작되었던 대부흥운동(1907.1.2) 100주년이 되는 해이자 한국최초의 목사 7인이 안수 받은지(1907.9.17)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북한을 위해서도 합심하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6.25사변 때의 일이었습니다. 어떤 미군 소대장이 병사에게 물었습니다. “괜찮다면 지금 정찰하러 나가지 않겠나?” 그 병사는 지금은 나갈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소대장은 그 병사가 겁이 많은 모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저녁 6시쯤 되어서 그 병사가 다가오더니 “소대장님, 지금 정찰하러 나가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의아해진 소대장은 아끼는 나가지 않겠다고 하고 지금은 나가겠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병사가 대답하기를 “소대장님, 바로 이 시간이 어머님이 나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 시간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기도로써 지원하는 형제, 자매들로 인해 위기 속에서도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빌리 그래함 목사님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였습니다. “목사님, 목사님의 그 위대한 사역의 비밀은 무엇입니까?” “저에게 그런 비밀은 없습니다. 있다면 일만 오천 명의 성도들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저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 것이라고나 할까요?”
성도들의 승리는 자기의 능력이나 지혜로 인한 것이라기보다는 기도해준 사람들로 인한 것이 많습니다. 특히 목회자의 승리는 교회 성도들의 기도로 이루어집니다. 모든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의 배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백성들의 연합된 기도의 지원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19절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이라고 하셨습니다. 합심의 최소 단위는 두 사람입니다. 사람만 많이 모였다고 합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 20절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은 부활 후에 마가의 다락방에 열 제자가 문을 단단히 잠그고 모였을 때에 홀연히 그들 가운데 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제자들이 함께 있을 때에도 나타나셨으며 500여명이 성도들이 모인 곳에도 나타나셨습니다. 그냥 사람 많은 길거리나 시장에 나타나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있는 곳에 나타나지도 않으셨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모인 제자들에게 성도들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처음 성령이 내렸던 것도 마가의 집 다락방에 120명의 성도들이 모여 합심하여 기도할 때 모두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오늘 합심하여 기도할 때 성령이 임하실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