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사람(2) – 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32. 좋은 사람(2) – 의 ) / 본문 : 마 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기독교는 신비적인 면과 실천적인 면이 있습니다. 신비적인 면은 매우 만족스럽고 기쁘고 소망이 넘치는 반면 실천적인 것은 힘들고 어렵고 희생적이야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실천적인 것입니다. 기독교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이며 실천적입니다. “의를 행하는 자는 의롭다”라는
기독교의 핵심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신비적인 면만 추구하는 신앙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기독교는 교리를 많이 아는 자들에 의해서 유지된 것이 아니고 적은 진리이지만 그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에 의해서 유지되어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로만 사랑을 외치고, 말로만 구원을 가르치시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구원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도 이 세상을 만드실 때 말로만 하신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세상을 창조하여 우리에게 주셨고 우리에게 생명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1780년 5월 뉴잉글랜드에서 이유를 알 수 없이 하늘이 어두워지는 돌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시내는 온통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든 세상사를 다 버리고 오로지 기도와 선한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틀림없이 최후의 심판의 날이 온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마침 커네티컷 주의 의회가 개회 중이었습니다. 의회가 한참 중반전에 들어왔을 때 하늘이 어두워졌기 때문에 회의를 연기하자는 동의가 있었습니다. 의원 중 한 사람이 동의하지 않고 일어나 발언했습니다. “의장, 오늘이 최후의 심판의 날이든지 아니든지 상관할게 아닙니다. 만일 심
판의 날이 아니라면 연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 만일 심판의 날이라고 해도 우리의 의무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촛불을 켜고 회의를 진행할 것을 제의합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닥쳐도 등불을 준비하고 켜놓은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어렵고 힘든 일이 있으면 돌아가신 아버님을 생각합니다. 저희 아버님은 저에게 많은 공부를 시키거나 뭘 많이 해 준 분은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아버님의 삶의 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버님은 다리를 절으시는 분인데 절뚝거리면서 강원도로 옷 장사를 다니시면서 저를 키워 주셨습니다. 저는 1주일에 한번 정도 아버님 얼굴을 봅니다. 마지막 돌아가시기 직전 까지 강원도 어느 장터에서 옷을 파셨습니다. 그런데 이미 그 때는 저희 아버님이 암 말기 환자 이셨습니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편히 쉬셔야 할 그 때에도 자신이 하시던 일을 계속 하셨습니다.

좋은 사람이란 하나님 앞에 돌아와 열심히 사는 사람입니다. 처음과 끝이 같은 사람입니다. 구약성경에는 많은 왕들이 처음과 나중이 다른 것을 봅니다. 솔로몬도 처음에는 1천 번제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지혜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년은 우상 숭배와 세상 향락으로 타락했습니다. 열왕기하 9, 10장에 보면 북이스라엘의 10대왕 예후가 나옵니다. 예후는 아합왕과 이세벨이 만들어 놓은 바알 우상들을 타파했습니다. 그 때 그의 열심은 친구인 여호나답에게 “나와 함께 가서 여호와를 위한 나의 열심을 보라”(왕하10:16) 한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결론은 왕하 10:31 에서 “그러나 예후가 전심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며 여로보암이 이스라엘로 범하게 한 그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라고 합니다. 좋은 사람이란 초심을 잃지 않는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 좋은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끝까지 지키지 못해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수많은 고백을 하고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기도한 대로 사는 사람이 얼마 안 되는 것입니다.

올림픽에서 금매달을 딴 이원희 유도 선수가 있습니다. 그의 별명은 “한판 승의 사나이입니다.” 종료 9초를 남겨놓고 이기고 있었습니다. 그냥 시간만 끌면 이기는 것인데 9초를 남겨놓고 한판 승으로 이겼습니다. 순식간에 넘어뜨리기 때문에 상대편이 왜 졌는지 모른답니다. 이원희 선수에게 기자가 물어보았습니다. 왜 9초를 남겨놓고 위험하게 한판 승을 걸었냐고 했습니다. 그 때 그가 말하기를 “심판이 종료를 선언할 때까지는 이겨도 이긴 것이 아닙니다.”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끝났다고 선언할 때까지는 우리의 싸움은 계속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는 역사가들에 의하면 3천 동안 3,300건의 전쟁이 있었답니다. 이 땅에서는 항상 전쟁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좋은 사람이란 선한 사람입니다. 사람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느냐 선하게 산 사람이 구원을 받느냐하면서 격론을 벌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먼저 좋은 사람, 선한 사람의 기준이 우리들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에게 잘 해 주면 좋고 선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입장에서 어떻겠습니까? 마찬가지이십니다. 하나님께 잘하는 사람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사람입니다. 구원의 주체가 하나님이라고 믿는다면 하나님 앞에서 선해야 합니다. “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7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마 19:16-17) 하신 것은 구원의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제일 싫어하십니까?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지만 한 마디로 한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사람입니다. 나에게 조금 잘해주는 사람이 좋고, 선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 중에 하나가 우상 숭배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배신한 행위로 제일 악한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 교만입니다.
이사야서와 예레미야서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 문제를 꾸준히 지적하십니다.

“19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패역이 너를 책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20 네가 옛적부터 네 멍에를 꺾고 네 결박을 끊으며 말하기를 나는 순복지 아니하리라 하고 모든 높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서 몸을 굽혀 행음하도다”(렘 2:19-20)
그러면서 하나님은 돌아오기를 촉구하는 말씀을 계속 하시는데 이런 표현이 제일 마음에 와 닿습니다. 사람은 엎드러지면 일어나고, 길을 떠나갔으면 돌아오는데 이스라엘 백성을 돌아오지 않는다(렘8:4)는 것입니다. 그리고 렘4:7에서는 철새들로 말씀하시는데 새들도 자기들이 이동할 시기를 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백성은 돌아올 때를 알지 못한다고 하나님은 안타까워하십니다.
바울은 자신이 회개하고 돌아오게 된 것을 가리켜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 1:12)고 했습니다. 그리고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고 했습니다.

아프리카 어느 마을에 텔레비전이 설치되었습니다. 몇 주일 동안 마을의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까지 밤낮으로 텔레비전 앞에 앉아 프로그램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두 달만에 텔레비전 불이 꺼졌고, 두 번 다시 켜지지 않았습니다. 나그네가 그 마을에 들렀다가 추장에게 물었습니다. “왜, 텔레비전을 보지 않는 거요?”
추장이 대답했습니다. “이제부터 마을 이야기꾼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소.”
“하지만 텔레비전이 더 많은 이야기를 알지 않던가요?”
“그건 그렇소.” 추장이 대꾸했습니다. “그런데, 마을 이야기꾼은 우리를 알고 있거든요.”

다윗은 사무엘하 8:15에서 “내가 모든 백성에게 공과 의를 행하였다”고 고백하고 있고 그래서 사무엘상 24:11에서도 다윗은 사울에게 “나의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은혜를 사모하는 자는 정직해야 합니다. 공의를 행해야 합니다. 떳떳해야 하는 것입니다. 악을 행하지 말아야 합니다.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은혜 받았다고 하면서도 악을 행하고 죄를 지으며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위선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은혜 받은 자는 결코 악을 행할 수 없습니다. 선을 행해야 합니다.

은혜 받고 의를 행하는 자는 환란과 핍박이 닥쳐와도 믿음으로 이겨 나갑니다. 시 119:121절에 보면 “나를 압박하는 자에게 붙이지 마옵소서”하였고 또 122절에서도 “교만한 자가 나를 압박하지 못하게 하옵소서”하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환란이 닥쳐오면 넘어지고 좌절하여 쓰러지고 말았지만 은혜를 받으니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온다 할찌라도 절망하지 아니하고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내가 공의를 행하였으니, 내가 하나님 앞에 떳떳하오니” 이 시련을 물리쳐 줄 것을 믿고 기도로 이겨내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많은 시련이 있습니다. 물질로 인한 고통, 건강으로 인한 고통, 사업으로 인한 시련,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로 인한 시련 그리고 자녀들의 문제로 인한 고통 거기에 우리 신앙인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겪어야 하는 또 다른 시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믿는 자가 더 많은 고통을 당하게 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에서도 은혜 받고 의를 행하는 성도는 낙심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핍박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승리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여! 주님은 이 시간에도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또한 시119:123 “주의 의로운 말씀을 사모하기에 피곤하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피곤할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피곤할 정도로 성경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127절에도 보면 “내가 주의 계명을 금 곧 정금보다도 더 사랑한다”고 하였습니다. 은혜 받은 자는 그래서 의를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금덩어리보다 더 소중하게 여긴다고 하였습니다.

병원에 입원한 한 여인이 정원에서 열심히 일하는 한 사람을 보고 정원사려니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 병원의 원장이었습니다. 바로 슈바이쳐 박사였습니다. 그는 “왜 의사가 되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을 때 “나는 말로써 사람을 감동시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답니다.
유대의 한 동네에 무조건 큰 소리를 지르는 빵 가게 주인이 있었습니다. 물론 기도도 큰 소리로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구워내는 빵의 크기는 아주 작아 사람들의 불만을 샀습니다. 그러던 어 날 랍비를 찾아가 상담을 했습니다. “나는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는데 사람들은 날 피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였습니다. 랍비는 “당신의 목소리는 줄이고 빵의 크기를 늘리십시오.” 하였습니다.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믿지 않고 따르지 않는 일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이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을리 없습니다. 다윗이 고백하는 시 119:136 “저희가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 라고 말합니다. 나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는데 다른 사람까지 생각할 일이 없겠지요.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정직해야, 그리고 말씀을 따라 살아야 다른 사람의 구원에 관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말 중에 “네 코가 석자인데…”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나 자신의 일이 크고 중대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의 일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겠느냐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 자신의 일이 없어서 남의 일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마지막으로 기억합시다. 그러나 우리의 의는 우리 자신에게서 나온 의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낙타는 하루를 시작하고 마칠 때마다 주인 앞에 무릎을 꿇는다고 합니다.
즉, 하루를 보내고 일을 끝마칠 시간이 되면 낙타는 주인 앞에
무릎을 꿇고 등에 있는 짐이 내려지길 기다리며
또 새날이 시작되면 또다시 주인 앞에 무릎을 꿇고 주인이
얹어 주는 짐을 짊어지는 것입니다.
주인은 낙타의 사정을 잘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낙타가 짊어질 수 있을 만큼만 짐을 얹어 줍니다.
낙타는 주인이 얹어 주는 짐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낙타는 당신입니다.
그리고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형편을 누구보다도 잘 아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짊어질 수 있을 만큼 당신에게 짐을 얹어 주십니다.
이 때 당신은 어떤 모습으로 짐을 받으십니까?
낙타와 같은 겸손한 모습입니까?
새에게 날개는 무거우나 그것 때문에 날 수 있고
배는 그 돛이 무거우나 그것 때문에 항해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십자가는 짐이 되나 그것이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천국으로 향하게 만듭니다.

갈라디아서 2장 16절에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을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했습니다. 에베소서 2장 8-9절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 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했으며, 로마서 3장 21절에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선물로 주어진 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다면 이것이 축복입니다. 또한 천국을 약속 받는 것입니다.

좋은 사람(1) -용서하는 사람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31. 좋은 사람(1) -용서하는 사람) / 본문 : 마 6:14-15, 참고 창27장

“14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우리 옆에 있는 사람 한번 쳐다봅시다. 어때요. 좋은 사람 같습니까?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우리의 소망이고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또한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도 복중의 복입니다. 우리는 나 자신이 복을 받아 건강하고, 부자가 되어서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은 늘 기도하고 있지만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사람 앞에서 얼마나 좋은 사람이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을 수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나 성장하고 교인이 많이 모이고 교회당을 건축하고 하는 일에는 관심이 집중될 수 있으나 우리교회가 얼마나 좋은 교회가 되느냐 에는 별 관심이 없을 수 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혼자 행복한 것이 아니라, 교회가 그냥 커지는 것이 아니라 좋은 사람, 좋은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전도주일을 지켰습니다. 어느 성도가 전도했다고 자랑합니다. “목사님, 이번 전도운동 때 대어를 한 마리 낚았습니다.” 그럽니다. 목사님이 “무슨 말입니까?” 했더니 “에쿠스 타는 사람을 전도했습니다.” 그러면 소형차 타는 사람은 피라미입니까? 사람은 보이는 것이 가치기준이 아닙니다.

인도의 힌두교 같은 종교는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팔자가 정해져 있어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은 정해진 운명대로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도 비슷한 경우처럼 보이는 장면을 만나게 됩니다. 창세기 27장에 보면 이삭이 장남 에서에게 축복을 하려고 하지만 그가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는 것을 이용하여 부인인 리브가가 동생 야곱에게 축복을 받도록 아버지 이삭을 속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에서는 사냥터에서 사냥한 고기를 가지고 별미를 만들어 드렸지만 상황은 이미 끝나있었습니다. 이미 야곱에게 축복한 것입니다. 에서는 “아버지여 나도 축복해 주세요. 나도 축복해 주세요.” 하면서 방성대곡을 합니다. 어느 어머니가 이렇게 같은 자식을 차별할 수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에서가 잘못되었다면 이것은 어머니인 리브가에게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야곱이 만일 아버지를 속이다가 들통이 나면 축복은커녕 저주를 받을까 두렵다고 했습니다(창27:12). 그랬더니 리브가는 말하기를 “어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좇고 가서 가져 오라”(창27:13)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성경본문을 대할 때 우리는 모두 나 자신이 야곱과 같다고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치 드라마에서 자기가 늘 주인공인줄 착각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에서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신약의 최악의 인물로 꼽을 수 있는 가룟유다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그를 가리켜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뻔 하였느니라”(마 26:24)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너무나 어려운 문제를 만나게 됩니다. 그렇다면 에서와 가룟유다와 같은 인물은 팔자가 정해져 있었단 말인가? 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고 인정한다고 하면 기독교 역시 정해진 운명론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는 이들이 비록 악역을 맡기는 했지만 분명히 에서를 통해서 야곱이 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선 선의의 피해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희생시켜서 다른 사람들에게 복을 주셨다는 것이 됩니다. 이런 식으로 본다면 이들 또한 우리에게 복을 주기 위한 희생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먼저 야곱의 이야기를 다시 해봅시다. 자신의 축복을 위해서 어머니 리브가의 말을 따라서 형 에서의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여러분은 리브가와 야곱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마도 축복만을 바라면 부러운 사람일 것입니다. 물론 에서의 단점과 부족함이 많았다고 인정합시다. 저는 한 어머니의 편견적인 사랑이 낳은 불행한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리브가와 야곱은 먼저 축복을 가로채기 위해서 앞을 보지 못하는 이삭을 속였습니다. 이삭이 리브가와 야곱에게 속을 것을 알고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습니다(창27:33). 여러분! 이삭의 생각이 틀리고 리브가의 생각만 옳았다고 볼 수 없지 않습니까? 야곱의 좋은 점은 본받을만한 하지만 거짓말을 해서라도 언제나 형님의 것을 빼앗으라고 가르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토록 정의를 외쳐온 하나님의 말씀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4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 행사는 다 진실하시도다 5 저는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시 33:4-5)

이제 축복을 빼앗긴 에서를 생각해 봅시다.
에서는 아버지 장례식만 마치게되면 아우 야곱을 죽여버리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창27:41). 리브가는 이 소식을 듣고 하란에 있는 자기 오빠의 집으로 야곱을 피신시킵니다.

성경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그냥 넘기게 되었던 문제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바로 창세기 27장 40절입니다.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하였더라”(창 27:40 -한글개역)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제가 다시 원문으로 번역을 해 보았습니다.
“너는 칼을 의지하여 살고 네 동생을 섬기리라. 그러나 네가 끊임없이 몸부림치면 그의 멍에에서 벗어나게 될 수 있을 것이다.”(창 27:40 -이영제목사 역) 에서에게는 큰 시련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복을 받아 쉽게 살 수 있는 방법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여전히 에서에게도 소망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에서가 야곱과 같은 축복을 받지는 못했지만 저주를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성경에 에서와 같이 “억울하게 되었는데 정말 몸부림 쳐서 그 멍에를 벗었던 사람이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저는 자신 있게 “있습니다.”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예! 욥입니다. 욥은 창세기 때의 인물입니다. 욥기서는 시대적으로 아브라함 세대의 내용입니다. 그렇게 보는 이유로는 아브라함이 175세를 살았고 그의 아버지 데라는 205세를 살았습니다. 그런데 욥은 고난 이전의 나이는 알 수 없으나 고난을 을 겪은 후 140년을 더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최소한 200년은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인간의 나이는 노아의 홍수 이후에 점차적으로 줄어드는데 바로 아브라함 시대와 같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이야기를 에서도 알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욥기의 목적은 진정 하나님은 공의로우신가? 하는 답을 주기 위해서 기록된 것입니다. 욥은 좋은 사람(의인)임에도 고통을 당했고, 극심한 고통 때문에 하나님께 불평하기도 했지만 그는 자기 아내와 그의 친구들(엘리바스, 빌닷, 소발)에게 원한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치 에서에게 내린 말씀처럼 그 멍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몸부림치며 열심히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이 이야기를 에서도 듣기를 바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욥과 같이 살기를 원하셨을 것입니다.
에서의 이야기는 창세기 33장에 고향으로 돌아오는 야곱을 용서하고 따스하게 맞아들이는 것으로,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에서에게도 하나님은 많은 축북을 주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을 만나러온 에서는 먼저 400명이나 되는 사람을 앞서서 보냈습니다(창 33:1). 이 사람들을 마을에서 사 왔겠습니까? 아닙니다. 에서의 종들일 것입니다. 야곱이 에서에게 양과 가축들 많은 선물을 주려고 할 때 에서는 받지 않아도 된다고 말합니다. 내게도 쓰고 남을 만큼 많은 물질이 있다고 합니다(창 33:9) 그리고 에서에게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창 27:40) 했는데 야곱은 에서를 만날 때 7번 절하고 부를 때 늘 “내 주”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약속하신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에서 또한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나폴레옹은 온유한 면을 지녔던 군인이었습니다. 그의 한 일화가 있습니다.
그는 프랑스의 유명한 장군으로, 유럽을 점령하고는 곳곳에 보초병을 세웠습니다. 하루는 나폴레옹이 한밤중에 보초막을 살펴보려고 나갔습니다. 한 보초막에 갔더니 사병이 너무나 지치고 피곤해서 총을 보초막 옆에 세워 놓은 채 쭈그리고 앉아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때 나폴레옹은 조용히 그 사병이 놓아 둔 총을 들고 보초를 섰습니다. 한참 후에 깨어난 보초병은 자기 대신 보초를 서고 있는 사람이 나폴레옹 장군임을 알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래, 얼마나 피곤한가? 잠깐 쉬지. 내가 대신 보초를 서 줄께.”라고 위로했다는 것입니다. 이때 그 사병은 너무나 감격스러워서 일생동안 나폴레옹을 위해서 충성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좋은 사람은 남에게 명령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궂은일을 대신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제 신약의 가룟유다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먼저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 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9)고 하셨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3년 이상 따라다닌 제자입니다. 그리고 전도를 나갔을 때도 유다도 갔습니다. 그런 유다를 끝까지 지켜야되는 것 또한 예수님의 바램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잡기 위해서 온 유다에게 “예수께서 가라사대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마 26:50)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그를 끝까지 친구로 부르고 계십니다.

제자들 사이에서는 예수님을 팔 자로 의심을 받은 것은 가룟유다가 아니라 베드로였습니다. 예수께서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마16:23)는 꾸중을 들었던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마 26:34)고 하셨습니다. 세 번씩이나 부인하는 것은 완벽한 부인입니다. 그러나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마 26:75) 사실 운 것으로 보면 가룟유다도 후회하고 울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목메어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룟유다 또한 에서에게 내렸던 말씀처럼 몸부림을 치면서 그 멍에를 벗기 위해 살았어야 하지 않을까요? 사울이었던 바울 또한 예수믿던 사람들을 잡아가던 사람입니다. 첫 순교자 스데반이 죽을 때 함께 있던 자입니다. 초대교회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았던 사람들이 사울 같은 사람들 때문에 스데반이 죽었고 흩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것도 모자라 끝까지 추적하여 잡겠다고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이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완전히 버린 사람은 없습니다.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돌아오라 내가 너희의 배역함을 고치리라 보소서 우리가 주께 왔사오니 주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이심이나이다.”(렘3:22)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 “14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 과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지니라”(마 18:21-22)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유대인의 율법에는 모든 것이 세 번 입니다. 그러니까 용서에 있어서도 세 번 하면 많이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아무리 많이 용서해 주어도 한 4-5번이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답변은 한마디로 끝까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좋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남을 끝까지 용서해 주는 사람 이 사람이 진짜 좋은 사람입니다.
가룟유다는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자기 자신을 먼저 용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면 자살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 자신에게도 마음을 넓게 써야 합니다. 나 자신을 용서해 주는 일이야말로 중요한 것입니다. 나 자신을 용서하는 것은 곧 다른 사람을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지금이 최악의 상태라고 말할 수 있는 동안은 아직 최악은 아니다.”(셰익스피어)

신문에 실렸던 이야기입니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공부는 하지 않고 가짜 대학생 행세를 하며 좋지 않은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는 것을 안 아버지가 그냥 묵과할 수 없어서 아들을 불러 훈계를 하였습니다. 아버지의 훈계가 사랑의 훈계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은 그만 가출을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버지는 집을 나간 방탕한 자식을 찾기 위해 사방으로 수소문을 하며 정신 없이 돌아다녔지만 아들의 행방을 알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다행히도 아들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그 뉘우침의 표시로 삭발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러한 아들의 모습을 본 아버지는 참으로 그 아들의 마음을 깊이 이해해주면서 아들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는 자신도 이발소에 가서 삭발을 하고 아들 앞에 나타났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이러한 행동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나쁜 짓을 하지 않겠다며 아버지 품에 안겨 통곡을 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아버지와 같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갈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품에 안아 주시고 우리를 위로하시며 그의 품안에 거하도록 해주실 것입니다.

“14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 나 자신이 용서했을 때 용서가 된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내게 대해서 용서가 되지 않으면 하나님께도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만 용서해 달라고 하는데 먼저는 나 자신이 용서해야 합니다. 본문은 또 한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도 용서란 한정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같은 것입니다. 성경의 전체 중심 주제가 무엇입니까? “용서”입니다.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 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사 55:7)
 

내가 왜 예수를 좋아하는가?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30. 내가 왜 예수를 좋아하는가?) / 본문 :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혹 제 머리에 이상이 있나해서 월요일에 MRI을 찍어보았습니다. 오전에 의사선생님을 만나서 상담을 하고 오후에 MRI을 찍고 다시 검사결과를 보러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의사 선생님이 “그동안 약 먹어보시니까 어떠세요?” 그러는 겁니다. 저는 오늘 의사 선생님을 처음 보았습니다. 환자를 착각한 겁니다. 오전에 본 저를 기억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속으로 MRI 찍어볼 사람은 내가 아니구 의사 선생님이구나 생각했습니다. 내가 잘못온 것 아닌가 하면서 제 뇌 사진을 가지고 설명을 들었습니다. 저는 특별한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의사 선생님이 계속 설명을 합니다. 침에는 나이가 들면서 뇌가 작아지게 되는데 뇌 주의가 전체적으로 작아지면서 오게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줄어든 뇌 주의의 모양은 MRI로 하얏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 뇌 사진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뇌가 크고 작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곳에 무엇을 담느냐가 중요하구나 말입니다. 여러분! 머리 좋아서 뇌가 크다고 합시다. 그러나 그곳에 쓰레기 같은 정보만 잔득 모아 놓으면 무엇하겠습니까? 작지만 알차게 그리고 꼭 필요한 정보를 담아 둔다면 IQ, 머리가 좀 나쁘지만 그래도 얼마든지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고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1. 나를 불러주셨습니다.

충남 태안군 소원면 의항리에서 굴 양식장을 경영한 이영권(67)씨는 서해안(허베이 스피리트호) 원유 유출사고 피해로 생계 터전을 잃은 것을 비관해 자살했습니다(2008.1.17). 사람에게 아무런 소망이 없으면 자살을 하게 됩니다. 저는 자살 충동을 강하게 두 번 느꼈습니다. 한번은 예수 믿기 전의 중학교 때이고, 또 한번은 예수님의 부활이 믿어지지 않아 크게 신앙적으로 갈등을 겪을 때 였습니다.
저의 어린 시절에 저의 집은 못살았고 저는 장난꾸러기이기 때문에 늘 팔이 빠져있는 상태로 지냈습니다. 심지어 학교보다 병원을 더 많이 갔을 정도입니다. 그러다 보니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고 공부 또한 뒤에서 맴돌았습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마음에 맞지 않는 선생님들 때문에 늘 싸우고 지냈습니다. 그러나 저의 성품은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수즙음을 잘 타기 때문에 누구 앞에 그렇게 나서는 성격이 못됩니다. 그 중에서도 영어선생님하고 제일 마음에 안 맞았습니다. 시골에서 영어를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저에게 어떤 단어를 따라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저 나름대로 그 발음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영어 선생님은 까르르 웃더니 출석부로 제 머리를 때리는 것입니다. 저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출석부를 손으로 탁 쳤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제 머리를 잡고 흔드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제 머리에 이상이 있다면 그 때부터 문제가 생기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여러분! 교육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인격을 존중해 주는 것입니다. 시골의 머리 나쁜 가난한 학생이라고 그렇게 마구 취급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자존심 강한 저희 어머님께 학교에서 정학이라는 통지서를 보낸 것입니다. 어머님의 꾸중은 말할 것도 없고 한번도 저에게 꾸중을 치시지 않았던 아버님께서 밖에서 낮을 가지고 들어오셔서 방구석에 있는 제 목에 갖다 대시는 것입니다. 저는 무서워서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었습니다. 보통 때 같으면 도망다니고 했는데 이제 그럴 마음도 없어졌다 봅니다.
억지로 간 학교에서는 정학이라고 저를 그 추운 겨울에 큰 체육관에 혼자 가두어 놓았습니다. 어디서부터 잘 못 되었는지 모르지만 저는 학교생활을 이런 식으로 했습니다.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그런 예쁘고 착한 선생님을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이제 세상을 그만 살아야 되겠다 그런 생각까지 했습니다. 우리교회에도 선생님이 계십니다만 모범생과 공부 잘하는 학생을 잘 해주는 것은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아라고 생각된 아이들을 돌보는 것은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그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저와는 반대로 선생님을 잘 만난 사람도 많습니다.
루스티 베르쿠스는 어린 시절 학습 지진아로서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난독증’ 이라고 불리는 시신경 장애가 있었습니다. 난독증에 걸린 아이들은 종종 단어들을 빨리 습득하지만,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단어를 배운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한마디로 단어는 잘 기억하지만 문장을 만들고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나 부모님은 아이의 학습 능력에 대해 매우 낙관적이셨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도 초등학교 1학년 때 단어들이 글자의 조합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글자가 단어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난독증 환자는 단어를 하나의 형태로 파악할 뿐, 낱개의 글자들이 합쳐진 것임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난독증 환자는 글자를 뒤집어서 쓰거나 거꾸로 쓰곤 합니다.
이렇게 적응을 못하자 1학년 담임 선생은 학습 지진아라는 딱지를 붙였습니다. 여교사였던 그 담임 선생은 자신의 판단을 생활기록부에 적어 2학년 담임에게 넘겼습니다. 그래서 내가 일 교시 수업에 들어가기도 전에 이미 2학년 담임 선생은 나에 대한 결정적인 편견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수학문제와 부딪혔고 그 결과 차츰 말을 더듬기 시작했습니다. 자신 있게 말을 하지도 못하고, 쉬운 숫자 계산도 하지 못할 뿐더러, 글자까지도 엉터리로 나열하니까 한 마디로 나는 완전히 구제 불능인 아이였습니다. 수업 시간마다 담임 선생의 눈에 띄지 않는 맨 뒷자리에 앉기 시작했습니다. 혹시 라도 지목을 받으면 우물거리면서 “저 –잘 모르겠어요.” 라고 말했습니다. 5학년에 올라갈 무렵 나는 이미 지능적인 면에서 거의 죽은 아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때 신께서 내게 위대한 여교사 하디 선생님을 보내 주셨다.
하디 선생님은 걸어서 로키산맥을 횡단한 경력이 있는, 가장 뛰어난 초등학교 교사로 미국 서부 지역에선 유명한 인물이었습니다. 키가 180센티미터에 이르는 이 불가사의한 여성이 내 앞에 큰 탑처럼 우뚝 서더니 양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아인 학습 지진아가 아녜요. 이 아인 다만 보통 아이들과 좀 다를 뿐이죠.”
학습 지진아라는 말에 비하면 보통 아이들과 좀 다를 뿐이라는 말은 얼마나 희망적으로 들리는가! 하디 선생님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난 네가 생각을 표현하는 걸 주저하고 겁 먹는다는 걸 안다. 하지만 한 인간이 갖고 있는 생각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의미가 있다고 난 믿는다. 난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했고, 이 방법이 성공할지는 아직 확신이 없지만, 데모스테네스(그리스의 유명한 웅변가)라는 사람에게 큰 효과를 가져다 준 방법이 있다. ‘데모스테네스’ 라고 발음해 볼 수 있겠니?.”
선생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도 할 수 있을 거다. 데모스테네스는 혀가 자기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 병에 걸렸었지. 그래서 그는 혀를 뜻대로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입안에 돌멩이를 물고 다녔다. 마침내 그는 최고의 웅변가가 될 수 있었어. 내가 여기 구슬 몇 개를 가져왔다. 이 구슬은 커서 네가 목구멍 너머로 삼킬 수도 없을 것이다. 내가 깨끗이 씻어 왔다. 이제부터 내가 네 이름을 부르면 넌 먼저 구슬을 입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나 내가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을 하거라.”
하디 선생님이 내게 보여 준 나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이해심에 자극을 받은 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마침내 내 혀를 다스릴 수 있게 되었으며, 머지않아 자유롭게 내 생각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듬해 나는 6학년에 올라갔다. 너무도 기쁘게, 하디 선생님이 또다시 6학년 담임이 되셨다. 그래서 나는 그분의 지도 아래 만 2년을 보내는 벅찬 기회를 가졌다.
지난 이삼십 년 동안 나는 하디 선생님과 계속 소식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몇 해 전 선생님이 말기 암에 걸리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 명밖에 없는 당신의 특별한 제자와 1천 마일이나 떨어져서 병상에 누워 계시니 얼마나 외로우실까 하는 생각이 들어 나는 당장에 비행기표를 사 들고 그 먼 거리를 달려갔다. 그런 내 생각이 얼마나 순진한 것이었나를 나는 곧 깨달아야 했다.
대충 세어 봐도 7백 명 정도가 넘는 선생님의 특별한 제자들이 병실 앞에 줄을 서 있었다. 그 동안 계속해서 선생님과 소식을 주고받고, 선생님의 마지막 가시는 길에 말동무가 되어 주려고 먼길을 마다 않고 달려온 사람들이 그 정도로 많았던 것이다. 이들 7백 여명은 흥미로울 만치 다양한 사람들로 이뤄져 있었다.
미국 상원 의원 3명, 주 의회 의원 12명, 그리고 기업체와 회사 간부 및 대표들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더욱 흥미 있는 사실은 우리들 중 4분의 3이 5학년 때까지 수업 진도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해 학습 지진아나 저능아, 무의미한 인간, 운명에 맡겨진 아이로 스스로를 믿고 있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하디 선생님을 만남으로써 우리가 능력이 있고, 중요한 인간이며, 만일 우리 자신이 노력한다면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 뛰어난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믿게 되었던 것이다.(H. 스티븐 글렌)

저에게는 이런 선생님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리아가 우두커니 서 있는 성당 앞을 왔다 갔다 했습니다. 어느 마음씨 좋은 수녀님이 나를 좀 데려가 주질 바래서 일겁니다. 그러나 더럽고 지저분하고 멍청하게 생긴 나를 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저에게 주일날 저 쪽 산 능선에서 땡그렁 땡그렁, 교회 종소리가 들려오는 것입니다. 그 종소리가 제 마음을 파고들었습니다.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났습니다. 저는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당장에 교회로 뛰어갔습니다. 교회 뒷자리에 앉아서 예배가 마칠 때까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울기만 하다가 나왔습니다. 저는 솔직히 고백합니다. 제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완전한 도피입니다. 학교에서 도피입니다. 집에서 도피입니다. 세상에서의 도피입니다. 예수님이 아니었으면 저는 갈곳이 없었습니다. 저를 불러주신 주님께 감사 드립니다.

2. 나를 알아 주셨습니다.

그 날 생전 처음으로 교회학교에서 성경 교육을 받았습니다. 선생님은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이 세상이, 세상이 아닌 나 자신으로 받아들여 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제를 이처럼 사랑하사” 세상에나 세상에나, 내가 알지도 못한 분이 나를 사랑했다니… 처음에는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그 말씀에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제가 영재는 영제인가 봅니다. 이 사실을 중학교 2학년 학생이 깨달은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람이 유명하게 되니까 반기분 유엔총장과 이명박 대통령의 초, 중고등학교 때 학적부를 떼어보는 것을 보았습니다. 모두가 모범생에 아주 공부를 잘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제것은 떼어 보나마나 입니다. 아마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가지고 또 평가하려고 들 겁니다. 그러나 저는 아무 걱정 없습니다. 그럴 리는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것은 유엔사무총장은 반기문씨가 하고 대통령은 이명박씨가 하고 저는 목사 일에만 열중하면 되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또한 주님이 그런 것을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코흘리개에 공부 못하는 것을 이미 알고 계신 상태에서 불러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를 부르실 때 하나님은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렘 1:5)고 하셨습니다.

3. 성경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저희 집에 언제부터 있었던 것인지 모르지만 기드온에서 나온 신약성경 작은 책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책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고 관심도 없었습니다. 이 성경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잃는데 왜 그렇게 아기는 많이 나않는지 끝이 안 나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탄생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너무 어렵고 모르는 게 많은데 물어볼 사람도 마땅치 않고 해서 그 때 공부할 때 전과같이 좀 쉽게 설명이 되는 책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주석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그래서 주석 책을 사러 제가 살던 경기도 마석에서 청량리로 나왔습니다. 서점에 가서 알아보았더니 당시 플핏 주석이 씨리즈로 나오기 시작했는데 아직 다 나오지 않고 구약 일부만 나와있다는 것입니다. 이걸 사면 성경을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가격이 30만원이 넘게드는 겁니다. 이 책을 사고 싶었습니다. 저는 사고 싶은 것은 사고야 마는 성격입니다. 그래서 돈을 모으려고 돈을 벌 수 있는 방법들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새벽에는 신문을 돌리고 공휴일에는 812m의 천마산에 아이스케이크 통을 메고 올라가 얼음 과자를 팔았습니다. 이것도 모자라서 학교를 마친 후에는 경춘선 기차를 타고 빵을 떼어다 팔았습니다. 그 철없고 순진한 학생이, 죽기나 생각하던 그 아이가 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1년 가까이 돈을 모아 플핏 주석을 샀습니다. 70권이 넘는 엄청난 량의 책입니다. 이 책을 사 가지고 집에 가니까 제일먼저 놀란 분은 어머님입니다. 공부하고는 담쌓고 지내는 아이가 무슨 책인지 모르시지만 엄청난 책을 사 가지고 오니까 놀라신 것입니다. 이해가 되건 안되건 잃기 시작했습니다. 요즘 “성경의 맥을 잡아라”란 책이 있습니다. 성경에도 정말 맥이 있을까? 물론 있습니다. 그러나 책 한 권 읽는다고 맥을 찾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금광을 캐는 사람들이 길 가다가 우연히 맥을 캐는 것이 아닙니다. 평생을 매달려 맥을 찾을 때, 찾아지는 것입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 7:7) 여러분들이 이영제 목사을 믿을 때 “학교 공부는 꽝 이지만 성경에 관한 열정만큼은 누구 못지 않다” 하는 것만은 믿어주시길 바랍니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증언)을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의 아들에 대하여 증거(증언)하신 것이니라”(요일 5:9)

4. 이제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을 것인가? 여러분! 이 고민이 일어나야 합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이 고민이 없다면 진정한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 후회 없는 구원에 이르는 고민을 하시기 바랍니다. 알란 레드파스 목사는 하나님이 쓸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절규를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절규는 기쁨의 절규의 축복의 절규입니다.
우리는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여호수아에게 주어졌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 1:9) 하나님이 “강하게” 하라고 하셨던 것은 인간은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담대히 하라” 일을 시작할 때 자신감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두려워 말라”고 하신 것은 겁을 먹은 사람에게 한 것입니다. 겁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놀라지 말라”하신 것은 일을 쉽게 포기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고작 여러분들에게 다시 할 수 있는 말이 있다면 성경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사는 일”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하나님이 쓰시기에 너무 잘난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우리들은 자기 나름대로 계획을 세우고 그 방법에 얽매여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낮추시고, 꺽으시고 빈 그릇이 되게 하셔야만 쓰임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낮고 낮아져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격려의 말씀을 듣지 않고는 도저히 한 발자국도 내 딛을 수 없고, 주님 뜻 안에서 일할 수도 없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세상은 적자생존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힘없는 자에게 힘을 주시고 무능한 자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능력은 우리의 힘 가운데서 피어난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무기력 속에서 피어나는 것입니다. 그분은 쓸모 없는 것들을 쓸모 있게 만드십니다. 우리는 일상의 좁은 틈바구니에서 불평하면서 사는 자들이 아니라, 우리가 하는 일이 하찮게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의 봉사가 보잘것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는 작은 일에서부터 하나님의 뜻을 배워야 합니다. 나사렛 예수는 오늘도 살아 계십니다.
 

새해에는…(복음서를 중심으로)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29. 새해에는…(복음서를 중심으로)) / 본문 : 막 9:8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ajlla;(알라)” 예수와 자기들 뿐이었더라”

새해에는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오직, 반드시, 꼭”으로 번역할 수 있는 “ajlla;(알라)” 에 대해서 지난주에 설교했는데 벌써 작년이 되었습니다. 지난주에는 마태복음서에 나온 것을 가지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나머지 복음서에 나오는 것을 좀더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 단어가 “알라”입니다. “알라”에 대해서 들으시면서 “알지”못하면 안됩니다. 먼저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의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함께 높은 산에 올라가서 기도하는데 예수님의 얼굴에서 광채가 나며 변화하신 것입니다. 이 광경이 너무 황홀해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나는 예수님을 위해서 짓겠다고 했을 때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막 9:7)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예수 외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물론 구약의 선진들도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비교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의 온갖 것하고 비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2008년도에는 오직 예수만 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만 보셨습니다.

“알라”가 나타나는 특징이 있는데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거의 이 단어를 포함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마다 자주 쓰는 말이나 어법이 있는데 예수님은 이 단어를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포함하셨습니다.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ajlla;(알라)”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막 14:3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ajlla;(알라)”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요 7:16)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ajlla;(알라)” 내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요 6:38)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ajlla;(알라)” 원대로 하려는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요 5:30)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에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절대적 순종이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강조점이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예수님의 뜻이 된 것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조지 뮬러 목사는 독일 사람으로, 아프리카 선교사가 되기 위해 영국에 공부하러 갔던 사람이었습니다. 뮬러 목사는 평소 많은 고아들이 거리에서 방황하는 것을 보며 공부했는데 하루는 성경을 읽다가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시편 68:5)는 말씀을 발견했습니다.
그때 그 말씀이 뮬러 목사의 영혼을 뒤흔들었습니다. 그 말씀을 바로 뮬러 목사에게 주어진 말씀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뮬러목사는 “하나님께서 고아의 아버지시라면 나는 고아들을 돌보는 총무가 되어야지.”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 고아를 돌보는 사명을 주셨으니 길도 열어 주옵소서.”라고 기도하게 되었고 결국 고아원을 세우는 길을 얻어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고아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2. 반드시 주님의 이름으로 하십시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ajlla;(알라)”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7)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으로 한 것처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도 반드시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 없이는 그 무엇도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군인에게 아들이 있었는데, 아들의 행동이 망나니 같았습니다. 하루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합니다. “내가 그 동안 너의 행동을 참고 보아왔지만 이제 더 이상은 안되겠다. 내가 너를 산 에 데려가 크게 혼내겠다” 아버지는 아들의 손을 잡고 산 속 깊은 곳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산 길이 하도 험하니까 아들이 말합니다. “아빠. 좀 쉬었다 가요.” “이 놈아 쉬기는 뭘 쉬어.” 아들은 계속 쉬어가자고 사정합니다. 그래서 잠시 쉬는데 아들이 말합니다. “아빠하고 등산하니까 참 좋 네요.” “이 녀석아. 조금 더 가면 크게 혼날 건데 좋긴 뭐가 좋아.” “아빠랑 등산하는 것이 처음이 예요. 혼나러 가는 길이지만 이렇게 좋을 수 없네요.” 곰곰 생각해보니 아들과 등산 한번 간 적 이 없었습니다. 그는 그만 마음이 풀려서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고 아들과 산을 내려 왔습니다. 아버지와 손잡고 가는 길은 항상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오늘은 전 가족이 찬송가 456장을 불러보세요.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우리 주님 걸어가신 발자취를 밟겠네 한 걸음 한 걸음 주 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는 걷겠네”

제가 오늘 주일이 되어서 설교만 준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 또 무엇을 준비했겠습니까? 어린이들을 위해서 무엇인가 준비해야 합니다. 그래서 서은이를 위해서 “목사님은 복어다!” “목사님은 갈치다”하는 것을 준비했습니다. 저는 말이 안통해도 아이들과 노는 방법을 터득했습니다. 그래서 선교지에 가도 자신 있습니다.

3. 주님은 우리를 꼭 지켜주십니다.

” “ajlla;(알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
” “ajlla;(알라)”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눅 12:7)

초인종 소리를 듣고 문을 열었더니 낯선 사람 둘이 서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60대쯤 돼 보이는 할머니, 또 한 사람은 40대쯤으로 보이는 사람이었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나누러 왔습니다.” 그럽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는데요.” “교회에 다니시는군요. 그러면 하나님의 이름을 아시나요?” 그럽니다. 그냥 ” ‘하나님 아버지’ 라고 하면 되지요.”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그분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름이 아닙니다. 당신이 ‘하나님’ 하면 어떤 신이 대답할지 모릅니다. 꼭 ‘여호와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럽니다.
그래서 “당신들은 아버지를 어떻게 부르나요?” 그랬더니 “아버지라고 부르지요.” “아버지의 이름을 안 불렀는데도 알아들으시잖아요.” 그러자 그들의 그냥 가버렸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요 10:14-15)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아버지’ 하는 우리의 음성을 듣고 알며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만일 “ajlla;(알라)” 주께서 그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더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어늘 자기의 택하신 백성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셨느니라”(막 13:20)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ajlla;(알라)” 하나도 잃어 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9)

미국 어느 지방의 산 속에 한 가족이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힘이 세고 용감한 사람이었으나 어린 아들은 몸도 약하고 겁도 많았습니다. 아들이 7살이 되어 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런데 학교를 가려면 깊은 숲을 지나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매일 아들과 함께 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오늘까지만 너와 함께 갔다 오겠다. 내일부터는 혼자 다니거라” 아들은 울며 아빠, 무서워서 싫어요.” “아무리 울어도 안 돼”
아들은 할 수 없이 혼자 다녔습니다. 그러기를 이틀, 아이가 학교에서 오다가 숲에서 커다란 곰을 만났습니다. 아이는 도망도 못 가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습니다. 순간 총성이 울렸습니다. 아이가 눈을 떠보니 자기를 덮치려던 곰이 쓰러져 있고 총을 든 아버지가 웃고 있었습니다. 아들을 일으키며 아버지가 한 말입니다.
“아들아, 아버지는 항상 네 곁에 있었단다.”
“미국은 지금 국방의 힘, 경제의 힘, 과학의 힘이 사상 최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호와 은총이 없으면 모두 헛것일 뿐입니다”
닉슨 대통령 당시 레너드 국방장관이 조찬기도회 때 한 말입니다.

4. 반드시 믿음을 가지십시오.

” “ajlla;(알라)” 그러나(카이)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마르다의 고백)”(요 11:22)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ajlla;(알라)”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 16:33)

모든 사람들은 자기 앞에 버티고 있는 여러 종류의 산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것은 고독과 낙심일 수도 있고 육체적인 고통이나 정신적인 스트레스, 슬픔 또는 경제적인 궁핍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산들은 대부분 높고 험준하여 산들을 가로지르기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산들을 옮기는 것입니다. 겨자씨 한 알만큼 작은 믿음을 가지고 우리는 산들을 바다에 던질 수 있습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ajlla;(알라)” 믿는 자가 되라”(요 20:27)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ajlla;(알라)” 옮겼느니라”(요 5:24)

대학 다니다가 군에 들어간 육군 신병이, 내가 이 3년 동안 군인생활을 하면서 일생 추억에 남을 만큼 좋은 군인생활을 하고 싶다는 마음에 선배되는 병장에게 물었습니다. “군인 생활을 좀 깨끗하게, 명예롭게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좀 자세하게 가르쳐주십시오.” 선배 되는 병장은 껄껄 웃으면서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군인 생활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아. 오직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면 되느니라. 명령 떨어지는 대로만 복종하면 돼. 네 앞에 할 것까지 미리 걱정할 것은 하나도 없어.” “아, 간단하군요.” 가만있다가 이 머리 좋은 청년이 다시 질문합니다. “그런데 여러 사람이 동시에, 이 사람은 이렇게 하라, 저 사람은 저렇게 하라 하고 여러 상관이 명령을 각자 다르게 내리면 그때는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이 사람아, 별걸 다 걱정하는군. 그럴 때는 말이야, 최고 계급 자에게 순종하면 돼.” 대단히 중요한 예화입니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ajlla;(알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요 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