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하지 않는 기도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36. 포기하지 않는 기도 ) / 본문 : 눅 18:1-8

“1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2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6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세상의 모든 것들은 양면성이 있습니다. 좋은 면도 있고 나쁜 면도 있습니다. 긍정적인 면도 있고 부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휴대폰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저는 휴대폰을 잘 안 가지고 다닙니다. 금요일에 나갈 일이 있어서 어쩌다 한번 가지고 갔는데 “오빠, 지금 전화 줘.”라는 문자 메시지가 들어왔습니다. 기가 막히고 놀라웠습니다. 저는 누나는 있어도 여동생은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가운데 저더러 오빠라고 할 사람도 없을 것 같습니다. 혹시 00자매가 나한테 오빠려고 할려나? 스팸으로 들어온 메시지입니다. 전화했다가는 아마 돈이 몇 만원 그냥 빠져나가든지 아니면 분명 좋지 못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런 스팸에 걸리면 80넘은 할아버지도 오빠가 되는 것입니다. 컴퓨터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도라는 선물은 단 한가지도 부정적 요소나 역기능이 없습니다. 100번 기도하면 100번 다 손해볼 것이 없습니다. “길을 가다가 돌이 나타나면 약자는 그것을 걸림돌이라고 말하고, 강자는 그것을 디딤돌이라고 말합니다(토마스 카라일).” 세상 모든 사람에게는 다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을 그대로 남겨놓아 걸림돌이 되게 하는 사람과, 하나님께 기도하여 디딤돌로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여 걸림돌도 디딤돌로 만드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이야기에는 두 사람이 나옵니다. 한 사람은 재판장입니다.
이 재판관은 그냥 재판관이 아니고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관” 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사람을 얼마나 무시하겠습니까? 동정심도 없고 백성의 억울한 사정에도 관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아마도 빈정거리며 골치 아프지 않은 사건을 중심으로, 그리고 돈이 된다면 무엇이든 할 그런 위인인 것 같습니다.
또한 사람은 억울한 일을 당하고 근심에 찬 한 과부가 등장합니다. 이 과부는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탄원하기 위해서 재판관을 계속 찾아갑니다. 우리는 이 과부의 억울한 사정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 당시의 과부들은 아무 권리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아무 권리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대한민국 국민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권리를 가집니다. 그런데 선교사님들이 다른 나라에 가 계십니다. 가끔 자동차 사고를 당하는 경우가 있는데 내가 들이 받히고도 나중에 경찰서에 가보면 반대로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답니다.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외국인으로서 권리가 없기 때문에 무시당하는 것입니다.
원문의 과부라는 말은 “버림받다. 빈곳에 남겨지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누가 봐도 재판관과 과부는 상대가 안 됩니다. 그러나 이 과부는 가벼운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무감각한 재판관은 과부의 탄원하는 소리를 듣지 않았습니다. 시간은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부는 가만히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4절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라고 나옵니다. 그리고 재판관과 과부의 의지가 격돌하는 것을 봅니다. 한참동안 과부의 탄원을 무시했지만 재판관은 스스로 생각합니다. 이 과부가 얼마나 더 괴롭게 할까? 과부는 아무 권한이 없습니다. 무기도 없습니다. 그녀의 무기란 끈질긴 것입니다. 끝까지 해 보겠다는 의지입니다. 원문의 “괴롭게 하다”는 말은 “눈언저리에 멍이 들게 하고 타박상을 주기 위한”이란 뜻입니다. 그녀는 결국 지칠 줄 모르는 간구로 재판관을 굴복시킵니다. 여기서 한가지 기억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굴복하신 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늘 비유의 대조는 비교입니다. 무엇을 대조한 것인지 그 답은 7절 말씀에 나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이 불의한 재판관과 같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불의한 재판관과 다르시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고 계시고 속히 좋은 것으로 주시기 위해서 늘 준비하고 계시고 속히 응답하시기를 원하십니다. 7절 하반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그러나 우리는 속히 응답이 오지 않을 때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왜? 계속해서 기도해야 하는가?” 네 가지로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포기하지 않는 기도는 항상 하나님을 찾게 합니다.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이 기도하는 것을 지금 다 응답 받으셨다고 하면 하나님께 간절히 나오실 것 같습니까? 아니면 집에서 또는 어디 경치 좋은데 놀러 가셨을 것 갔습니까? 어쩌면 오늘 교회에 안나오시는 분들은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처음부터 모르거나 아니면 하나님께 다 응답 받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1절에 “항상 기도하고”라고 합니다.
“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시 105:4)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훈련시키시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이렇게 기도해야 되겠습니까?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제방에 구멍이 뚫어져 있어도 물이 없을 때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물이 차면 제방에 물이 세어 들어오니까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물보고 저기 제방이 뚫어져 있으니까 들어가라고 그 때 그때 지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루 다니다가 어느 곳에든지 틈이 있으면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단도 우리에게 그렇게 다가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2. 포기하지 않는 기도는 나의 요구를 분명하게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과부는 그 요구가 무엇인지 우리가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그 요구가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아마도 그의 인생을 걸만큼 중요한 것이었을 겁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응답하신 것이 값없이 버려지기를 원치 아니하십니다. 요즘 학교에 가면 학생들이 물건을 잊어버리고도 찾아가지 않는답니다. 우리 어렸을 때는 물자가 귀해서 몽당연필에 볼펜 껍데기를 끼워서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가방을 잊어버리고도 찾아가지 않는답니다. 부모님이 쉽게 다시 사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응답하시면 우리는 그것이 귀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자녀가 작은 것에도 감사를 느끼고 행복감을 느끼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든 주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땀을 흘려서 노력해서 얻어진 것이 값진 것이라는 것을 알게됩니다.
기도의 응답이 지연되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테스트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이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지 확인하시는 것입니다.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 하시느니라”(잠 17:3)

3. 포기하지 않는 기도는 우리를 더 성장시킵니다.

때로는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크고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하여 우리를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엡 3:20)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좋은 것을 가지시기를 원하십니다.
영국에 갔을 때 WEC선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아프리카 한 지역의 선교사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 부족에게 20년 동안 선교를 한 선교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는 20년 동안 선교본부에 아직도 한 사람도 구원시키지 못했다고 선교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아들이 다시 그 부족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또 20년을 선교했습니다. 그 아들 역시 아직까지 한 사람도 구원시키지 못했다고 편지했습니다. 그러다가 근래에 그 부족마을의 사람들이 추장부터 예수 믿겠다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약 1만 명이 넘는 사람이 헌신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아들 선교사가 물었습니다. 왜 진작 나의 아버지가 계실 때 믿었다면 좋았을 것을 이제야 믿느냐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부족의 사람들이 사실은 우리가 당신을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아버지를 보고 믿는 것이라고 헸답니다.
제가 여러분 부모님들 전도하시고 구원시키기 위해서 말씀드립니다. 그분들이 지금 다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시고 또 듣지 않으시는 것 같지만 늘 복음을 증거 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언제 어떤 일을 당할지 아무도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증거 해 놓는 일입니다. 어린아이가 10가지 셀 때 1,2,3,4하고 5,6,7을 다 순서대로 이해했기 때문에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1부터 10까지 자꾸 말하면 어느 날 그것이 순서대로 다 연결되어 알게됩니다.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을 현재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더 좋은 것을 예비하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4. 포기하지 않는 기도는 우리의 믿음을 보시기 위함입니다.

젊은 사람일수록 기다릴 줄 모릅니다. 죽도록 사랑한다고 하고선 군대 가고 나면 2년 6개월을 기다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고무신 거꾸로 신고 많은 남자들이 눈물을 흘립니다.
8절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셨습니다. 끈기 있게 포기하지 않는 기도는 믿음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모태신앙이신 분들을 보면 “못해, 못해” 그래도 중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신앙이 때로는 형식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래도 꾸준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을 보면 언제는 참 믿음이 좋은 것 같고 열심인 것 같은데 금방 시험에 들고 왔다 갔다 합니다.

아프리카는 조용할 날이 없을 정도로 반군의 활동이 활발합니다. 지금 케냐, 소말리아, 챠드 등은 심각한 상황입니다. 지난달 말 차드 반군과 정부군간의 전투가 수도 은자메나에서 치열하게 벌어져 몇 백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습니다. 챠드에 모두 38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는데 수도인 은자메나에 17명, 수도에서 18km 떨어진 외곽의 센터에 18명의 선교팀이 구성되어 활동 중이었고 김영섭 선교사 가족(3명)이 카메룬 국경의 남쪽지방에 머물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수도에 있던 17명은 프랑스군 기지로 먼저 대피했고, 김영섭 선교사 가족은 국경을 통해 카메룬으로 무사히 빠져나간 상황. 센터에 남아 있던 18명만 최후까지 고립되었던 절박한 상황이었습니다. 양승훈 선교사님은 저희 선교회를 방문하셨고 저도 잘 알고 있는 분입니다. 챠드에는 지난해부터 반군과의 간헐적인 교전으로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지난 주 초에 북쪽지방이 반군에게 점령당했다는 소식이 들렸고, 목요일(1월31일)에는 전화가, 금요일에는 모든 통신과 라디오 등도 끊겨버리면서 긴박한 상황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금요일 오전에 인편으로 편지가 도착했는데, 주불 대사관을 통해 전해진 소식은 빨리 대피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그 시간에는 시가전이 벌어지고 있는 양상이었습니다. 시내에 체류하고 있던 박근성 선교사님과 이시우 한인회장님 가족이 대피소로 우선 피신했고, 두 분은 끝까지 현지에 남아 한국대사관 프랑스 대사관 외무부 등과 계속 연락을 취하면서 고립된 저희 18명을 피할 수 있도록 진두지휘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는 반군이 대통령궁을 제외한 시내 전역을 완전 장악한 상태였습니다.
수도에서 서남쪽 카메룬 국경까지 20킬로 되는 그곳까지 이미 피난민들로 꽉 차 있어서 움직이기도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센터에 남아 있던 저희 18명은 고립된 상태에서 국경쪽으로 빠져나갈 상황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12킬로 지점의 미군기지로 이동하면 안전할 것 같아 상황을 알아보았는데, 이미 미군기지는 민간인들이 장악했다고 전해들었습니다.
그때는 모든 통신이 두절돼 현지인들을 통해서만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는데, 이미 피난민들의 행렬로 꽉 차 있어 국경을 넘을 수는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할 지 아무런 판단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일단 저희는 시내로 들어가 프랑스 군 기지로 가야 살 수 있다는 판단이 들어 현지인을 통해 계속 상황을 파악해 본 결과 후퇴하는 반군을 쫓아 정부군이 뒤쫓고 있어, 시내 쪽에는 군인들이 대부분 빠져나갔다는 것을 파악하고 다리를 건너 시내진입을 시도하기로 결정하고 3대의 차량에 18명이 타고 출발했습니다. 가는 길은 말 그대로 전쟁의 처참한 상황이었습니다. 사체들이 이곳저곳 나뒹굴고 있었고 폭격으로 폐허가 된 건물들… 약탈과 방화로 무법천지로 변한 아비규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때 이동하는 저희 차량을 누군가 세워 빼앗았다면 뺏길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습니다.
7km를 이동해 시내로 통하는 다리에 도착했는데, 그곳 역시 말 그대로 인산인해를 이뤄 꼼짝을 못하는 상황, 그런데 시내 쪽으로 가는 사람이나 차량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모두들 그곳에서 빠져 나오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저희는 오히려 그곳을 향해야 했으니…
적막이 흐르는 그곳으로 가던 도중에 우리는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기도하고 나서 고개를 드는 순간 차드 적십자 차량을 만났습니다. 저희는 상황을 설명하고 도와달라고 도움을 요청하자, 그 사람들이 본부와 연락하더니 저희 차에 깜박이를 켜게 하고 저희를 에스코트해 주었습니다. 얼마 안 가서 코너를 도는 순간, 시내를 지키고 있던 정부군의 대포가 저희 쪽을 향해 겨누고 있었습니다. 만약 당시에 적십자 차량을 만나지 못하고 그곳을 지나게 되었다면 정부군에 의해 폭격을 맞을 뻔한 아찔한 상황이었습니다.

어떤 분이 포기는 배추 셀 때나 하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최고의 기도는 일방적으로 내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기도입니다. 여러분! 대화할 때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듣는 것, 이것이 최고 아닙니까?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톨스토이는 “모든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겠다고 생각하지만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을 바꿀 생각은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변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고, 사회가 아니고, 아내가 아니고 나 자신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모든 종 선지자를 너희에게 보내시되 부지런히 보내셨으나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으며 귀를 기울여 들으려고도 아니하였도다”(렘 25:4)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을 때, 하나님도 우리의 기도를 기쁘게 들어주십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일방적인 과부의 기도를 말하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불의한 재판관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모든 사정을 아시고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께 포기하지 않는 기도를 드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목숨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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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말씀(135. 목숨을 위하여 ) / 본문 : 마 6:25-34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무디는 “성경은 우리의 지식을 증가시키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R. C. Savage) “하나님 앞에서 차가운 지식보다 뜨거운 무지가 훨씬 낫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실제적이라는 것입니다. 머리로만 알고 있는 지식은 의미가 없습니다. 알고 있는 것은 실천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고 믿음이란 지켜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믿음은 목숨을 구하는 일입니다. “모든 산 자 중에 참여한 자가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 보다 나음이니라.”(전 9:4)고 했습니다. 생명은 고귀한 것입니다. 생명을 경시하기 시작하면 그 사회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우리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하나님 입장에서는 너무나 많은 희생을 치루셨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나의 것이 아니라 이제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내 마음대로 하면 안됩니다. 아직도 내 생명이 나의 것으로만 이해하고 있다면 그것은 아직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안되었다는 증거입니다. 나 자신의 목숨을 위하여 어떻게 해야하는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질문하나 하지요.
여러분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목숨’입니다. 운동은 왜 합니까? 건강은 왜 지키려고 합니까? 모두가 목숨을 위한 것입니다. 밥을 왜 먹습니까? 살기 위해서, 목숨 때문에 먹는 것입니다.

목숨을 위하여

오늘 본문의 “목숨을 위하여”(th’/ yuch’/ uJmw’n:테 퓌스케 휘몬)의 ‘퓌스케’는 육체적 부분만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비물질적인 부분으로 육체적 죽음 이후에도 멸절되지 않는 영혼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퓌스케’는 죽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 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제일 소중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퓌스케(목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무엇보다도 최우선적으로 염려해야 하는 것이 ‘퓌시케(목숨)’이라는 말입니다.
본문 25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는 목숨이 음식보다 중요한 것이고, 몸이 의복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음식은 목숨을 위하여 있는 것이고 의복은 몸을 위하여 필요한 것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귀한 존재입니다.

본문 26절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귀하다(diafevrw:디아페로)”는 “다르다, 구분된다, 지탱해 나가다”의 뜻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귀합니까?
1) 26절 “공중의 새”가 유사한 본문인 누가복음 12:24에서는 ‘까마귀’로 나옵니다. 크게 중요하지 않은 일반적인 생명체인 하늘의 새를 말합니다.
2) 28절 “들의 백합화”(30절 들풀도)는 갈릴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야생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다니던 마석초등학교 교가 가사 중에 “천마산 푸른 정기 몸에 지니고 북한강 맑은 물에 덕을 닦아서 튼튼하게 자라는 마석 어린이…” 그런데 제가 다닐 때는 “북한강 맑은 물에”가 아니라 “배롱내 맑은 물에” 였습니다. 그곳에서 목욕도 하고 물장구치고 놀았습니다. 그런데 그 물이 제가 중학교 갔을 때쯤 주변에 목장이 많이 들어와 똥물이 되다 시피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배롱내 맑은 물이 아니라 배롱내 똥물이 되었다고 했는데 언제 “북한강 맑은 물로” 바뀌었네요. 그런데 그렇게 오염되던 그 때 천마산과 배롱내 주변에 돼지, 닭, 오리를 많이 키우던 농장들이 있었습니다. 이 돼지와 오리들이 더러운 물을 먹는 것을 보고 “만약 사람이 저렇게 돼지나 오리들처럼 더러운 물을 먹고산다면 벌써 죽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해 본 일이 있습니다. 저는 아직 돼지나 오리가 폐결핵에 걸렸다는 소식은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돼지와 오리를 기르십니다. 들의 백합화 들풀도 하나님이 기르십니다. 사무실에 있는 난과 화초 몇 개는 제가 벌써 죽였습니다. 겨울이 되면 온도 조절이 안돼서 죽입니다. 그런데 들의 풀은 아무리 겨울이 되어도 얼어죽지 않습니다. 다시 봄이 되면 생명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기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 우리가 대충 생각하고 넘어가는 원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본문 26절 “공중의 새를 보라”의 “보라(ejmblevyate:엠브렙사테)”는 “눈을 뜨고 살펴 보라”는 뜻입니다.
본문 27절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의 “생각하여 보라(katamanqavnw:카타만다노)”는 ‘카나’라는 말은 철저하게, ‘만다노’라는 말은 ‘배운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공중의 새에게도, 들의 백합화를 보면서 배우고 깨달아야 합니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사업하고 실패하고, 아무 생각 없이 도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인생의 삶을 대자연 속에 비쳐보며 하나님의 뜻을 깊이 생각하여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옛날 칼타고의 한니발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애꾸눈이었습니다. 어느 날 화가를 불러 초상화를 그리라고 하였습니다. 그 화가는 열심히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그러나 한니발은 자신을 한눈 없는 병신으로 그려 놓은 것을 보고 그를 죽여버렸습니다. 며칠 후 다른 화가를 불러 다시 초상화를 그리라고 하였습니다. 며칠 전의 죽은 화가 얘기를 들은 이 화가는 아주 온전한 두 눈을 가진 한니발을 그렸습니다. 그러나 한니발은 “내가 눈이 하나인데 어찌 두 눈을 그렸느냐”며 그도 죽여버렸습니다. 이 사실을 안 다른 화가는 걱정이 많았습니다. 어떻게 그리면 살아날 수 있을까 이 생각 저 생각 하다가 화가는 한니발의 옆모습을 그렸습니다. 그러자 한니발은 애꾸눈이 가려진 자신의 옆모습을 그린 초상화를 보고 아주 기뻐하였다고 합니다.
우리의 인생도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지금은 사업이 안되고, 가정적으로 불행하고, 실패와 시련으로 인생의 앞길이 모두 막혀 있는 것만 같아도 바로 그 다음에, 또 아주 가까운 곳에 행복이 놓여 있는 것입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어느 관점에서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염려하지 않는 것을’ 입니다.
“염려(merimnavw:메림나오)”의 어근은 “분열되다, 나뉘다”의 ‘메리조’라는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음식을 위하여, 의복을 위하여 지나친 근심 걱정으로 인하여 정말 고민해야할 ‘퓌스케(목숨)’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 31절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 염려하지 않게 됩니까?
본문 30절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면서 믿음을 가지기를 촉구하십니다. 믿음이 있는 자는 염려하지 않습니다. 믿음이란 다 보았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내가 보지 못할 때 믿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했습니다. 다 볼 수 있어서 믿는 것은 하나님이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내가 이해하지 못할 때 순종하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히11:8)라고 했습니다.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마 10:19) 라고 하셨습니다.
1943년 봄 김세홍 목사는 교회인가를 얻기 위해 중국 금주성 반산형공서를 방문하였는데, 경무과 특무고장 구로다(흑전)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여호와의 신이 높습니까? ‘아마데라쓰오오미가미’가 높습니까? 속에 있는 대로 안심하고 대답하시오.” 그러나 답변을 잘못하다가는 불경죄로 구속당할 판이었습니다. 이 때 김 목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 문제 자체가 잘못되었습니다. 마치 국민학생에게 묻기를 아버지가 더 높으냐? 학교 선생이 더 높으냐고 물으면 무어라 대답하겠습니까? 집에서는 아버지가 높고 학교에서는 선생이 높지요. 그와 같이 ‘아마데라쓰오오미가미’는 일본의 신이고 여호와하나님은 기독교인의 하나님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26절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30절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이라고 하십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본문 30절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본문 32절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본문 33절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가 ‘퓌스케(목숨)’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은 믿음뿐입니다. 기둥이 약하면 집이 흔들리듯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약하면 우리의 삶이 초라해 집니다. 믿음을 가지십시오.

마지막으로 기억합시다. 그러면 우리가 해야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공중의 새도 들의 백합화도 들풀도 하나님이 다 기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 염려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아무 일도 안하고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됩니까?

오늘 본문에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딱 한가지가 있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목숨을 위하여, 또한 목숨이 살아있는 한 해야할 일입니다.
본문 33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먼저라는 단어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선 순위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바쳐야하는 것은 구약 성경에 보면 모두가 첫 것입니다. 두 번째 것은 안 받으십니다. 자식도 첫 자식을 바쳐야 하고, 양도 처음에 태어난 것을 바쳐야 하고, 곡식도 첫 것을 드려야 합니다(출23:19, 레2:14, 4:21). 첫 월급타면 어떻게 해야 합니다. 부모님 속옷을 먼저 사드려야 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 드릴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창 4: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음에 나오는 가인은 그 제물이 첫 것이라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저 유명한 ‘앤드류 보나’라는 사람은 세 가지 중요한 인생의 철학을 갖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먼저 말씀드리기 전엔 누구와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둘째는 무릎을 꿇기 전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셋째는 성경을 읽기 전에는 어떠한 책도 읽지 않는다.

여러분! 이제 우리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먼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약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기도하시어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축복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좋은 사람(4) – 예배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34. 좋은 사람(4) – 예배 ) / 본문 : 요 4:23-24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우리가 음악을 들을 때마다 소중히 여기는 바하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라이프찌히의 조그마한 토마스 교회라는 예배당에서 오르가니스트로 일했습니다. 오랫동안 일하면서, 남이야 알아주든 말든 매일같이 새로운 곡을 작곡해서 연주했습니다. 그 곡이 출판된 일도 없고, 발표회 한 일도 없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나 매일같이 성실하게 새로운 곡을 작곡해서 연주해 나갑니다.
결과로 265개의 오르간 곡과 263개 합창곡, 162개 피아노 곡을 작곡하게 됩니다.
그 후에 그는 유명해 졌어요. 그가 인정받게 될 때 그 옛날에 작곡해 놓은 것들이 전부 높은 값에 팔리게 되었습니다. 유명해 져서 작곡한 게 아니에요. 오로지 성실했던 것입니다. 무명의 오르가니스트로 그저 성실, 성실, 진실, 이것이 마침내 바하를 만든 것이에요.
우리가 존경하는 안창호 선생님은 학벌이 중학교 2학년 중퇴입니다. 그의 이력서에는 이렇게 써 있다고 합니다. 이력서에 거침없이 ‘중학 중퇴’, 그리고 특기는 ‘배 노 젓는 일과 청소하는 것’ 이것입니다. 특기를 ‘청소하는 것’이라고 써 놓고 담대하게, 정직하게 산 안창호 선생님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그 중요성으로 말하면 비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지막에 할 일도 예배입니다.

좋은 사람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예배를 잘 드리는 사람입니다.

예배라는 말은 원문의 proskunevw(프로스퀴네오) “고개를 숙이다 예배하다.”
이며 proskunou’nta”(프로스퀴네테스)는 예배자를 말합니다. 오늘 본문의 “예배하는 자들은” 바로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가 옛날 독일어에서 Kuss(입맞추다)와 연결되어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가 이교도에서 땅의 신들을 숭배하는 의미로 땅에 입을 맞추기 위해 엎드리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헬라인들은 외부적인 몸짓을 거부했지만 내적 태도를 나타내기 위해서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예배는 겸손한 마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무릎을 꿇지 않는 예배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고 또 추수하는 장면들을 보면 꼿꼿이 서서 하지 않습니다. 늘 반쯤 고개를 숙인 자세이거나 반쯤 무릎을 꿇은 모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의 자세는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자세를 영적 거장이신 예수께 배워야 합니다. 예배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배는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제일 영광된 일입니다.

예배의 대상
proskunou’nta”(프로스퀴네테스) 예배자는 대상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이 단어는 예배하는 자를 나타낼 뿐이지 그 대상을 말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엄격한 의미에서 이교도들도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요한계시록 16:2, 19:20절에 보면 짐승의 표를 받은 우상에게 예배(경배)하던 자들이 나옵니다. 중국사람들도 자신들의 신에게 절하면서도 “빠이빠이” 예배한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래서 먼저 이 예배의 대상을 분명히 말해줍니다.
첫째는 아버지께 하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라는 자들은…”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라고 말합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은 영이시니…”라고 말합니다.
이 두 단어를 연결하면 “영이신 아버지 하나님께”가 됩니다. 우리나라에도 전통적으로 하늘 사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늘님, 하느님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자식 표현으로 천주로도 사용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하나님’ 은 마포삼열(마펫)선교사와 캐나다 선교사 게일 선교사가 만들어낸 용어입니다. 마포삼열은 105년 전 평양장로회신학교 설립했는데 1936년 일제에 의해서 쫓겨나 3년 뒤 별세한 선교사입니다.

“나는 조선에 와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기 전에 황주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결심한 바 있었다. 나는 이 나라에서 십자가의 도(道) 외에는 전하지 않기로, 오직 하나님의 그 뜻대로 죽든지 살든지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로 굳세게 결심했다.”
그는 미국 땅에서 죽으면서도 “나를 조선 땅에 묻어 주오.” 하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정말 한국을 사랑한 목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선교사들에게 “조선 사람보다 조선을 더 사랑한 사람”이란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성경은 말해줍니다.
우리 예배의 대상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이분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예배의 초점입니다. 누구를 섬기느냐 하는 것은 예배의 성격이 규정되는 일입니다. 창조자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성경에서 요구하는 예배이며 참된 예배입니다. 사도신경은 하나님을 고백하는 아름다운 신앙고백입니다. 우리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이고 그 하나님께 경배하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대상은 결코 타협할 수 없고 양보될 수 없는 예배의 최고가치입니다.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희생을 드리는 자는 멸할지니라”(출 22:20)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창 2:4) 이 구절이 처음 나오는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2장에서만 11번이 나옵니다. 3장(아담이 쫓겨나는 장면)에서 8번나옵니다. 유대인들은 이 단어를 직접 부르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감히 부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영향으로 표준새번역성경과 2000년도에 번역된 가톨릭 성경인 새성경에서는 “여호와”라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이 단어를 모두 “주” 라는 말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이 여호와라는 단어는 아브라함 때에 가서 다시 나타납니다.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창 13:18)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만일 소돔 성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창 18:26)
그리고 다시 이 단어가 많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은 출애굽 때입니다. 출애굽기 4장(바로와의 싸움)에서는 무려 14번이 나옵니다.

제가 여러분께 질문하나 드리지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킬 때 그 목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들이 네 말을 들으리니 너는 그들의 장로들과 함께 애굽 왕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임하셨은즉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 하오니 사흘길쯤 광야로 가기를 허락하소서 하라”(출 3:18)

“그들이 가로되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사흘길쯤 광야에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하오니 가기를 허락하소서 여호와께서 온역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하나이다”(출 5:3) 이런 표현이 출 8:8, 27 등에 계속 나옵니다.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하오니”를 [개역개정]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다시 말하면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하러 가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가 이것을 막고 나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제일 큰 방해는 예배를 방해하는 행위입니다. 예배를 드리지 못하도록 막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용서할 수 없는 죄가 됩니다.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즘 교회 예배는 기획된 한 편의 인기 드라마처럼 진행되어야 즐거움과 감동을 받습니다. 편안함과 안락한 시설 속에서 분위기 있고 고급스러운 한 편의 예배가 연출될 때 흡족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배에 참여한 관객이 아니라 예배자입니다. 목사는 여러분을 위하여 연기하는 배우가 아니라 저 또한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좋은 연극을 보러 찾아온 관객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현재형입니다. 하나님은 지속적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이 예배하는 자들을 지속적으로 찾으시는 것처럼 예배하는 자들은 예배를 계속해야 되는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시 29:1)라고 표현했습니다. “돌리고 돌릴지어다.” 일회성이 아닙니다. 반복되고 지속적인 것을 말합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11:1에서는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라고 하십니다. “척량하되” metrevw(메트레오)는 재보시겠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들어와서 여러분은 여러 무리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는 큰 교회에서 아름다운 목소리로 거룩하게 찬양하고 훌륭하신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나오면 그런 곳에서 적당히 예배를 드리고도 마치 내 자신이 예배를 잘 드린 것으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 예배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재어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철저하게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들을 “만일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할찌니 누구든지 해하려하면 반드시 이와같이 죽임을 당하리라”(계 11:5)고 말씀하십니다. 예배가 얼마나 소중하며 예배하는 자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확인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개역개정]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는 “ejn pneuvmati kai; ajlhqeiva/ dei’ proskunei’n.”(엔 퓨뉴마티 카이 알레데이아 데이 프로스퀴네온)입니다. 두 개의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엔’입니다. 이것은 …안에서입니다. 앞의 문장을 다 연결하면 “하나님의 영 안에서” 라는 뜻이 됩니다. 예배는 인간의 생각과 방법으로만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 안에서 드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 dei’(데이)라는 동사인데 진리(알레데이아)와 예배 사이에 들어가 있습니다. 이 뜻은 “반드시…해야 한다, 마주치다, 틀림없다.”입니다. 데이는 ‘묶다, 동이다’의 동사 devw(데오)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래서 본문을 다시 번역하다면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 안에서(엔) 반드시(데이) 예배할지니라”가 됩니다.

찬송가에 보면 “제목, 목차”보다도 먼저 나오는 부분이 있습니다. “제목 분류”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보면 예배, 성부, 성자, 성령, 구원, 천국 등으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즉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배자로 부름 받은 자가 예배를 등한히 하고 있다면 그것은 직무유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이유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었습니다.
영국의 청교도들이 배를 타고 신대륙으로 건너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배의 자유를 위해서 그들은 생명을 걸고 배에 몸을 실었습니다. 4개월의 항해 끝에 혹독한 겨울인 1620년 12월 11일 플리머스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인디언의 화살이 날아오는 가운데 추운 벌판에서 도착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추위와 역병으로 고생하는 가운데, 이듬해 가을까지 46명이 괴혈병과 폐렴으로 죽었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1621년 가을 추수를 하고 나서 제일 먼저 한 일이 무엇입니까? 예배였습니다. 눈물의 예배, 감격의 예배였습니다. 이것이 미국 추수감사절의 시작입니다.

「광야를 정복한 영적 거인」이라는 책을 쓰신 마크 애터베리 목사님의 고백입니다.
“몇 년 전에 우리 교회에 암으로 죽어 가던 여성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처음 암 진단을 받았을 때 자신이 걸을 수 있는 한 교회에 나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말을 지켰습니다.
나는 그녀의 삶이 거의 다해 가던 어느 날에 그녀가 여위고 허약해진 몸으로 천천히 예배당 안으로 걸어 들어오던 모습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머리카락이 거의 다 빠진 상태였고 얼굴빛은 매우 창백해 보였습니다. 남편이 산소 마스크를 들고 그녀 옆에서 함께 걷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녀를 맨 뒷자리에 조심스럽게 앉혔고, 그녀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손을 들라는 가사의 찬양을 부르는 동안 그녀는 야윈 양손을 위로 들어 올렸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그녀는 힘없이 떨리는 손이었지만 계속해 들고 있었고, 눈을 감고 약간의 미소를 띤 채 나지막하게 찬양을 불렀습니다.
그 날 예배에는 두 개의 설교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내가 단상에서 전한 설교였고, 다른 하나는 맨 뒷자리에 앉았던 그녀가 한 마디 말도 없이 행한 설교였습니다. 그리고 두 설교 중에 그녀의 것이 훨씬 더 강력했습니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관객은 자기가 보기 좋은 공연만 찾아다니지만 예배자는 자신이 섬기는 공동체인 교회에 출석하여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말씀을 들으며 자신을 쳐 변화시켜 가는 예배하는 성도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좋은 사람(3) – 환경과 가르침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33. 좋은 사람(3) – 환경과 가르침 ) / 본문 : 눅 19:47-48

“47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두목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48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침을 찾지 못하였더라.”

미얀마의 전설에 어떤 토기장이가 한 세탁소가 번창하는 것을 시기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토기장이는 세탁소 주인이 사업을 못하게 하려고 황제를 설득하여 왕실의 검은 코끼리를 희게 만들라는 명령을 내리게 했습니다. 세탁소 주인은 황제에게 코끼리를 담을 수 있는 큰그릇이 필요하다고 아뢰었습니다. 그러자 황제는 토기장이에게 그 그릇을 만들라고 명령했습니다. 토기장이는 황급히 커다란 그릇을 만들어 세탁소 주인에게 배달했습니다. 그러나 코끼리가 그 안으로 들어서자 그릇은 곧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계속 다른 그릇을 만들었지만 코끼리의 무게를 감당할 수는 없었습니다. 남을 망치려고 한 그 계략 때문에 결국 망하게 된 것은 토기장이 자신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시기심이 별로 해롭지 않다고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재에 덮여 보이지 않는 불씨 같아서 끝내 큰불을 일으키고 자신을 파괴합니다. 당신은 요즘 누군가를 향한 시기심의 노예가 되어 있지는 않는지요?

좋은 사람이란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오늘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스스로 올라가셔서 7일간의 일정을 보내십니다. 그 때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주간을 보내신 곳은 예루살렘성전이었습니다. 45-46절에 보면 성전을 청결케 하신 사건이 나옵니다. 성전에 들어가기 위해서 돈 바꿔주는 사람, 제사에 필요한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본문에 언급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두목들”이 직접 운영했거나 적어도 그들의 협조와 묵인 하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데 너희가 강도의 굴혈을 만들어 놓았다.”고 책망 하셨습니다. 책망만 하시고 마치신 것이 아니라 본문에 보면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라고 했습니다. 사실 지금 일반적인 상황으로 보면 예수님이 지금 한가하게 사람들 가르치실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됩니다. 왜냐하면 당신을 죽이려는 음모가 한참 진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려는 자들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두목들”입니다. 대제사장은 성전의 제사를 주관하는 최고의 사람입니다. 서기관은 성전의 서기로서 뿐만 아니라 학문적으로는 따를 사람이 없는 율법에 관한 한 최고의 지식층들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언급된 백성의 두목들은 산헤드린의 70인 장로회의로 당시 이스라엘의 임시정부와 같은 기관이며 최고의 입법기관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예수와 함께 하는 군중을 빼 놓고는 당시의 모든 권력층과 지식층이 예수를 잡아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르치시는 일에 몰두하신다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지막 일주일의 기간을 가르치시는 사역에 몰두하셨습니다.

여러분!
살아있는 물고기는 물결에 따라 떠내려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은 물고기는 시냇물을 따라 떠내려갑니다. 반대로 살아있는 물고기는 거친 물결을 헤치며 위로 올라갑니다. 우리가 살아있다면 세상의 조류에 따라 떠내려가는 자들이 아니라 거친 물결을 헤치며 위로 올라가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자신의 환경을 극복하고 살아가는 인물이 많이 나옵니다. 그 중에서도 요셉의 이야기는 창세기 37장부터 50장까지 무려 14장에 걸쳐 길게 소개되었습니다. 요셉은 자신이 꾼 꿈의 이야기를 형들에게 하여 형들의 미움 받아, 형들은 구덩이에 넣어 죽이려고 했지만 르우벤의 도움으로 죽지 않고 애굽으로 내려가는 이스마엘 족속의 장사꾼들에게 팔려갑니다. 그리고 아버지 야곱에게 집승 들이 찢어 죽였다고 거짓말을 하고 아버지에게 그가 입고 있던 옷을 가져다 줍니다. 아버지 야곱은 옷을 찢으며 통곡을 하고 울었습니다(창37:34). 요셉은 아버지에게 인사도 못하고 자기의 생각과 관계없이 종으로 팔려갑니다. 종의 인생이란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르겠지요. 종은 자신의 인생이 없는 사람입니다. 오직 주인을 위해서 사는 사람입니다. 아마 속된 말로 표현하면 이런 개 같은 인생이 어디 있습니까? 지금 자기의 입장을 비관하고 죽음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유가 박탈된 상태입니다. 그리고 형들에게 배신 당했습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한 것은 다름 아닌 형제들인 것입니다. 상단에 끼어 애굽으로 내려가는 요셉의 처지를 생각해 보세요. 기막힌 것 아닙니까? 자기가 원하던 일도, 가고싶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냥 팔려 가는 종일 뿐입니다.
애굽으로 팔려간 요셉은 바로의 시위대장인 보디발이라는 사람의 집에 팔려갑니다. 그리고 열심히 일합니다. 그는 주인의 인정을 받아 가정총무가 됩니다. 그런데 보디발의 아내가 자꾸만 요셉에게 눈길을 보냅니다. 그리고 같이 자자고 보챕니다. 얼마니 끈질기게 요셉을 유혹하는지 창 39:10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여기에 중요한 것이 나옵니다.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굴뚝에서 연기날 일은 하지도 않았다는 뜻이 됩니다. 불의한 환경을 만들지 않는 겁니다. 악에게 기회를 제공할 빌미를 주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요셉에게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씌웁니다. 강제로 겁간코자 했다고 하며 요셉의 옷을 강제로 찢고 소리를 지릅니다(창39:14). 이 일로 요셉은 감옥에 갇힙니다. 그에게 또 자신의 생각과 관계없이 누명을 쓴 것입니다. 그리고 감옥에서 바로의 신하 두 사람이 갇혀있을 때 그들의 꿈을 해석하여 그가 바로에게 돌아갔을 때 바로가 꿈을 꾼 것을 해몽하기 위해서 감옥에서 풀려납니다. 그리고 그 일로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요셉의 그의 형들에게 자신을 소개하고 난 뒤에 하는 말입니다. 창 45: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고 했습니다. 요셉에게는 꽁 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늘 자신이 처한 환경가운데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형들이 팔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가룟유다에 의해서 요셉이 팔렸던 것처럼 은 30에 팔리지만 지금 예루살렘에서 가르치실 때에는 예수님이 팔리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환경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바로 예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자신을 잡아죽이려는 음모가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시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가르치셨습니다. 가르치는 일에 목숨을 걸은 것입니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 “48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유월절이 다가오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들었습니다. 원문은 “ejxekrevmato(에크레마토) aujtou’(아우투) ajkouvwn(아쿠온)”입니다.
“ejxekrevmato(에크레마토)”는 말하는 자의 입술에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단어의 어근은 “kremavnnumi(크레만뉘미)” 매달리다의 동사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를 놓치지 않고 듣는 것입니다. “ajkouvwn(아쿠온) 들으므로”는 성경에서 13번 나오는데 복음서에만 9번나옵니다.
먼저 마태복음에서 4번은 나오는데 마 7: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와 나머지는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 나옵니다.
(마 13:20, 22, 23) “20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2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23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그리고 눅 10:16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
요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ajkouvwn(아쿠온)”은 그냥 ‘말씀’ 하고는 다릅니다. 이 것은 이미 들었다 하는 것입니다. 즉 말씀을 들은 상태를 말합니다. 못 들었다고 할 수 없는, 부정이 불가능한 단어입니다.

예수님께 말씀을 직접 들은 이 때의 사람들은 이렇게 말씀을 받았습니다. 이 말씀의 씨가 분명히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 말씀을 키우는 일은 우리의 몫입니다.

창세기 1:2절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그 천지가 창조되기 전의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빛이 지어지고 천지가 지어지기 전의 그 모습이 땅이 혼돈하고 공허했다,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주석 가들은 이 문제를 한 마디로 ‘카오스의 세계’ 즉, 무질서의 세계라는 것입니다. ‘코스모스’라는 말은 우주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카오스, 즉 무질서에서 우주가 지어졌는데 이 무질서를 수습하는 첫 번째는 빛이라는 것입니다. “빛이 있으라.” 하나님이 빛을 지었습니다. 이 빛이 드러나자 무질서가 물러갔습니다. 그래서 첫째 날의 이 빛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보아야 됩니다. 첫째, 생명입니다. 빛이 있음으로 생명의 존재가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밝음입니다. 우주에 흑암이 물러가고 밝음이 왔다는 것입니다. 이 장면을 잘 연상해 보면 마치 연극의 막이 열리는 한 장면과도 같은데 여기에 교육의 의미가 나타나 있습니다.

후진국인 나라들에 가서 선교사님들하고 이런 말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만일 이 땅에 미국 사람들이 들어와서 살면 어떻게 될까요?” 분명히 달라진다는 것에 공감합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바로 사람의 문제요, 교육입니다.
태국에 가면 방콕 신공항이 1년 전에 새로 지어졌습니다. 규모로 보면 인천공항보다 두 배 이상이 크답니다. 그리고 모든 시설을 새롭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인천공항에 와서 공항 직원들이 연수도 받았답니다. 그런데 돌아가서 새로 만든 공항에서 일을 처리하는데 옛날이나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겁니다. 세계에서 제일 빠르다는 인천공항의 시스템도 배워갔습니다. 그리고 공항도 최신 시설로 만들어졌습니다. 다시 전문가들이 분석을 했습니다. 결과는 사람이 문제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만큼 처리를 못하는 겁니다. 환경에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교육은 바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거두는 일입니다. 가르침의 사역이 없으면 혼돈이 물러가지 않습니다. 가르침이 없으면 무질서가 물러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세상 물질을 모으는 증권 잘 사는 방법과 잘 파는 방법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혼의 문제입니다. 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입니까?

예수님은 하늘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 앞에 세 가지 당부를 했습니다. 첫 번째가 “모든 족속으로 가서 제자를 삼으라.” 입니다. 두 번째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 예배입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성례를 행하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내가 네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교육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존재목적은 세 가지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전도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르치고 훈련하는 교육입니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부패하고 악랄한 북한의 공산정권이 왜 무너지지 않고 있느냐? 그 중에 하나가 강력한 교육입니다. 소위 말하는 당원교육입니다, 아주 철저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5호 담당 비서관을 둡니다. 다섯 가구씩 묶어서 가르치는 비서가 있습니다. 이 다섯 가구를 한 주간에 세 번씩 모아서 공산당원 교육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살아가면서 어떤 수상한 행동을 하는지를 다 점검합니다. 이런 점 조직 교육과 철저한 수직적 당원교육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공산체제가 무너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김일성이 죽은 지가 14년이 되었지만 김일성 어록이나 주체사상이 그대로 학습되고 있습니다. 김정일이 그대로 국민들 앞에 신으로 등장합니다. 그를 위해 죽는 것이 최고의 영웅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강력한 교육이 북한 땅에서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공산체제가 무섭다는 것입니다.

지금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제일 오락가락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교육문제입니다. 어쩌면 교육제도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여기에 들어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영어를 잘하는 교육을 해도 역시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교육을 많이 시켰는데 자기 도그마에 도취되는 사람들을 많이 키웠다는 것입니다. ‘도그마’ 라는 말을 정확하게 말하기는 쉽지 않은데 현 정부(노무현)가 들어서고 많이 들었던 말이 ‘코드’ 라는 말입니다. 코드가 도그마와 비슷한 개념입니다. 공산체제도 하나의 도그마입니다. 그러니까 공부도 많이 했는데 사람을 키워놓고 보니까 도저히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코드가 안 맞으면 안 됩니다. 코드는 영어로 보면 전기코드가 아닙니다. 이념, 체제, 체계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요즘 많이 배운 사람들이 아주 쓸모 없는 사람으로 형성되어버린 모습이 우리 사회에 많습니다. 이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자기 도그마에 취해 버린 사람, 제 잘났다는 것입니다. 교회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모두가 자기 교회식 도취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가 살 길은 오직 “ejxekrevmato(에크레마토)” 예수님의 입의 말씀에 의지하는 것인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교육은 성장과정에서 영향력을 절대적으로 끼쳐 좋은 인생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자녀가 집을 나설 때 한국의 부모들은 “얘야, 누구한테도 지면 안 돼, 또는 때리고는 와도 매맞고 들어오지 마라”라고 말합니다. 반면 일본의 부모들은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고 하고, 미국의 부모들은 “남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돼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나 없는 하나님은 있어도 하나님 없는 나는 없다. 나는 하나님의 도구다”라고 배운답니다. 우리는 어떻게 가르칠 것인지 결정하고 그것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나 자신부터 예수님의 말씀으로 변화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