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으로 맞이하는 하나님의 말씀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41. 겸손으로 맞이하는 하나님의 말씀) / 본문 : 마 11: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감리교의 창시자는 존 웨슬리와 조지 휫필드입니다. 두 사람은 목회의 방법이 같았고 구령의 열정도 똑같았습니다. 그러나 신학에 대한 이해는 달랐습니다. 하루는 이 두 사람의 신학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던 한 사람이 휫필드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웨슬리 목사님과 신학과 진리에 대한 이해가 다른데, 목사님께서 천국에 가시면 웨슬리 목사님을 만나실 수 있을까요?” 그러자 휫필드 목사님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마도 우리는 천국에서 웨슬리를 보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웨슬리는 하나님의 보좌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아 있을 것이고,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휫필드의 대답이었습니다.
만유인력을 발견한 아이작 뉴튼은 자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우주에 관해 아는 지식은 바닷가에서 노는 아이들이 바다의 신비에 대해 아는 지식보다 적거나 아니면 그와 비슷할 것이다.” 그들은 모두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일찍이 교만한 자가 세상의 큰 인물이 되었거나 존경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지혜롭고(sofw’n:솝혼)는 ‘현명한, 깨끗한’ 이라는 뜻인데 이 단어는 본문과 평행 구절인 눅 10:21에 나오고 두 번 더 나오는데 바울이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고전 1:19)와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고전 3:20)로 사용함으로 예수께서 사용하신 마 7: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와 마 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에 사용한 ‘frovnimo”:프흐로니모스’와는 다른 단어입니다.

슬기 있는 자들(sunetw’n:쉬네톤)은 ‘집중하다, 현명한’ 인데 어근은 ‘sunivhmi:쉬니에미’에서 나왔습니다. 이 뜻은 ‘모으다, 이해하다, 경건하게 행동하다, 고려하다’입니다. 이 단어 역시 바울이 고전 1:19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라고 사용했습니다.
이 두 단어의 결론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구원에 이르기 위한 지혜와 슬기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자신들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지금도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신이 예수님 보다 하나님 보다 더 똑똑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에 반하여 예수님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말하신 무리는 놀랍게도 어린 아이들입니다.
어린 아이들(nhvpio”:네피오스)은 ‘말 못하는 갓난아이’를 말합니다. 이 단어의 어근은 ‘e[po”:에포스’(말)이라는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이 단어는 아이를 강조하기보다는 ‘말’을 강조한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본문과 평행 구절인 눅 10:21에 나오고 성경에서 한번 더 나오는데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전 3:1)고 했습니다.

말 못하는 이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겸손한 사람입니다.
겸손이란 마음이 닫혀 있는 것도, 무비판적인 것도 아닙니다. 겸손이란 자신의 한계점을 인정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시 131:1) 또한 하나님의 전지하심에 대해서는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시 139:6)라고 고백합니다. 본문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라고 했습니다. 왜 이 고백을 먼저 하셨겠습니까? 예수님 자신이 먼저 하나님 아버지를 ‘천지의 주재’ 천지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임을 고백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반(反)계몽주의도, 반(反)지식주의도 아닙니다. 이것은 다만 하나남의 무한하신 존재가 우리의 인식의 범위를 초월하시며, 그의 생각과 길이 마치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그렇게 우리의 생각보다 높다는 것을(사 55:8, 9), 고백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보여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절대로 그를 알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다”(고전 1:25)는 것을 겸손하고도 진지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고후 10:5에서 바울은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라고 했습니다. 이 고백은 무엇을 말합니까? 오늘 본문 말씀대로 바울은 자신의 지혜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우리가 성경도 공부해야 하고, 구원에 이르는 방법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것이지 내가 만들어 가지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적인 소프라노 가수가 오랜 해외 순회공연을 마치고 귀국하여 독창회를 열기로 했습니다. 팬들은 소문으로만 듣던 그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몰려들었습니다. 공연 시간이 다 되었는데 가수는 나타나질 않습니다. 사회자가 사색이 되어 지금 비행기가 늦게 도착하여 좀 늦을 것 같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다리는 동안 촉망받는 신인가수 한 분의 노래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신인 가수가 무대로 올라와 정중하게 인사를 하지만 청중들은 본체도 하지 않습니다. 열심히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누구 한사람 박수를 치지 않습니다. 그 때 갑자기 2층 출입구에서 한 아이가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아빠 정말 최고였어요.” 신인 가수의 눈에선 눈물이 반짝였습니다. 그리고 청중들 사이에 따스한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박수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 신인 가수는 바로 루치아노 파바로티였습니다. 훗날 그는 오페라 공연 때 한시간 동안 박수가 그치지 않아 165번이나 커튼콜을 받는 기록을 남기며 세계 최고의 테너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선입관이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는 말 못하는 아이처럼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호랑이요? 곳감이요? 아닙니다. 교만이 제일 무서운 것입니다. 교만 때문에 죄가 하와와 아담에게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교만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자는 살아나리라”(요 5:25) 그런데 교만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못 들어요.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용감한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이 교만의 죄에 노출되어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바로 목사입니다. 목사의 책임 중에 하나가 무엇입니까? 용기 없는 자에게 용기를 주고, 힘이 없는 자에게 힘을 내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목사 자신은 힘들고 어려워도 말하지 못합니다. 목사가 힘이 없어 축 늘어져서 설교해 보세요. “목사님께 은혜 받으려고 왔는데 내가 은혜를 주고 가야 되겠네” 그러실 겁니다. 그렇다 보니 저처럼 목소리를 높이는 설교를 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늘 거짓으로 설교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강단에서 용기를 가지고 단호하게 메시지를 전달하면 자칫 거만하게 될 소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사의 딜레마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강단이란 “높이 들린 곳” 이어서 오직 여호와의 보좌만이 누려야 할 그런 높고 고귀한 장소입니다(사 6:1). 감히 그곳에 홀로 서 있는 목사의 심정을 아십니까? 여러분이 목사를 위해서 왜 기도해 주셔야 하는지 아셔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이것이 두려워서 교회 목회를 안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 목사님을 뭐라 할 것이 못됩니다. 목사 자신도 자신의 영혼이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선생이 되지 말라”(약 3:1)고 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용감한 목사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교만하지 않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윌리엄 캐리는 위대한 선교사이며 우수한 언어학자였습니다. 그는 성경을 인도의 34가지 방언으로 번역하였습니다. 그가 선교사로 인도에 왔을 때 어떤 이들은 혐오와 경멸의 눈으로 그를 보았습니다. 어느 만찬회 석상에서 거드름을 피우는 한 사람이 캐리를 망신시키려고 여러 사람이 듣도록 큰 소리로 “캐리씨, 당신은 옛날에 구두 짓는 사람이었다면서요?”라고 비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러자 캐리는 오히려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닙니다. 선생님, 저는 구두 짓는 사람이 아니라 구두 수선공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더하거나 빼지 말아야 합니다. 바로 겸손한 설교자는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사색에 따라서 성경에 다른 것을 덧붙이거나, 자기 자신의 편견에 따라서 성경의 내용을 제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설교자가 빠질 수 있는 함정이 바로 여기 또 있습니다. 성경이 밋밋하다고 생각하여 자기들의 끓어오르는 거품으로 그것을 신선하게 만들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성경에다 자기 자신의 독창성을 부여한다고 번쩍이는 아이디어로 그것을 개선시키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 때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더하는 과오를 저질렀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말씀을 빼는 과오를 저질렀습니다. 오늘날에도 신학을 계속하여 발전시킨다는 명목아래 행해지는 신학적 자유주의(theological liberalism)가 있습니다. 이것은 그 자체가 교만한 것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것을 창안해 내는 사색가가 아닙니다. 현재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고 해서 그것을 잘라내는 편집가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복음주의적 설교가로 유명한 존 스토트(John R.W. Stott)목사 같은 분도 이런 고백을 하셨습니다. 산상수훈을 한 절씩 설교해 나가는데 이혼 문제에 대해서 주께서 말씀하신 마태복음 5:31, 32절을 다룰 차례가 되었습니다. 목회사역 25년째 되는데 그동안 한번도 이혼 문제에 대해서 설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 문제를 덮고 지나가고 싶었습니다. 이혼 문제는 아주 복잡하고 수많은 문제가 있기 때문에 목사로서 전문가가 아니야 하고 지나갈 수 있는 문제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설교를 하게 되면 반드시 문제가 생길 수 있는 교인이 나온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로 얼마나 고민하고 그냥 넘어가려고도 몇 번을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목사는 청지기어야 합니다. 누구의 청지기입니까? 하나님의 청지기이어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존경할만한 청지기 역할을 한 분들이 있습니다.
잉글랜드의 종교개혁 선구자인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는 당시 제도권의 교회에 홀로 잘못된 것을 지적한 사람입니다. 이 당시에 다른 성직자의 잘못을 비판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교황주의의 부패와 화채설의 오류들을 담대하게 공박했습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롤라드(the Lollards)라고 부릅니다. 이중에 많은 사람들이 이단 죄목으로 화형을 당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자 존 녹스(John Knox)의 용기도 대단했습니다. 1559년 제네바의 유배 생활에서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는데 이 때 잉글랜드에서 란돌프(Randolph)를 특사로 임명하고 엘리자베스에게 긴급 보고서를 보냈습니다. 여기에는 이렇게 적혀있었습니다. “500개의 나팔을 귀에다 계속해서 울리는 것보다 한 시간 동안의 한 사람의 목소리가 더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Queen Mary)이 스페인의 왕 펠리페(Philip)의 왕자 돈 카를로스(Don Carlos)와 결혼을 추진하자(이 일을 통해서 교황의 권세와 스페인의 종교재판(Inquisition)을 스코틀랜드로 끌어들이는 일) 녹스는 공개적으로 그것을 반대하고 설교했습니다. 메리 여왕은 그를 몹시 싫어하게 되었고 눈물을 흘리면서 원수를 갚을 것을 다짐했습니다. 녹스는 1572년 사망하여 에든버러(Edinburgh) 센자일스(St. Giles’) 교회당 뒤뜰에 묻혔는데 그 당시 섭정을 했던 모튼백작(the Earl of Morton)은 그의 무덤에서 말하기를 “절대로 사람의 얼굴을 두려워하지 않은 한 사람이 여기에 누워있다” 하였습니다.

우리 개신교는 목숨을 걸고 말씀을 지키려고 노력해 왔으며 이를 위하여 수많은 이들이 피를 흘렸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스스로 말씀을 피하거나 더하는(꾸미는) 일을 우리 자신들도 모르게 하고 있습니다. 전달하는 목사는 골라 전할 수 있지만 말씀을 받는 여러분 또한 골라서 먹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왜 성경을 많이 읽어야 합니까? 내 마음대로 할 것 같으면 성경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소용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함입니다. 그 출발선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가져서는 안됩니다. 내 것은 완전히 버려야 합니다. 그것만이 말씀을 받는 비결입니다. 말 못하는 어린아이와 같이 될 때 하나님이 내게로 들어오십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을 통해서 마지막 때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단 12:4) 바로 여기서 말하는 이 지식의 의미가 오늘 본문이 말하는 지식입니다. 사람들은 지식을 교환합니다. 지식이 빨리 교환된다는 것은 이 지식이 세상에 가득 차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교만입니다. 오늘날 교만한 자들도 힘을 합합니다. 사단은 겸손을 막고 있습니다. 바로 지식으로 막고 있는 것입니다.

선교사이자 의사였던 위대한 슈바이처 박사가 아프리카 선교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올 때 있었던 일화입니다. 소식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슈바이처가 도착할 기차역 앞에서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기차가 도착하고 사람들은 1등 칸 앞에서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손님이 다 내릴 때까지 슈바이처 박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혹시 2등 칸을 타고 왔나 생각해서 사람들은 다시 2등 칸 쪽으로 몰려갔습니다. 역시 거기에도 슈바이처 박사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설마 하는 마음으로 3등 칸 쪽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3등 칸의 맨 끝에서 슈바이처 박사가 내리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박사님처럼 위대하신 분이 왜 3등 칸을 타고 오셨습니까. 1등 칸을 타고 오실 수 있었을텐데요.” 그러자 슈바이처 박사가 말하였습니다. “4등 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부활의 믿음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40. 부활의 믿음) / 본문 : 고전 15:12-20

“12 (eij:만일-원문에 있음-앞절 전파하는 것이 헛됨을 말함)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17 (eij:만일-원문에 있음)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 또한(a[ra:아라-의문의 여지없이, 진실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오늘은 2008년 부활절입니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날은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인천 재물포항에 예수 복음을 들고 첫발을 디딘 날입니다. 불과 123년 전입니다. 123년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에는 약 5만여 교회와 1천만 명이 넘는 사람이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 세계에 약 18,000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여 미국 다음으로 선교사를 많이 파송한 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123년 전 이 땅에 처음 발을 내 디딘 아펜젤러 선교사는 “사망의 권세를 이긴 주께서 이 백성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사 하나님의 자녀로 자유와 빛을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이런 기도를 하고 1902년 6월 11일 성서번역위원회 참석 차 목포로 가던 중 군산 앞 바다에서 선박충돌사고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한국에 온지 17년만입니다. 그는 비록 17년의 짧은 기간동안에 이 땅에서 복음을 전했지만 그의 이 기도는 응답되었습니다.
어느 날 헬렌켈러는 “가장 불쌍한 것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시련은 있으되 비전이 없는 것입니다.” 옛 성인의 말에 “산이 높으면 골짜기가 깊다.” 는 말이 있습니다. 이 땅에 아무 문제없이 아무 어려움이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늘 나에게 무거운 짐이 있습니까? 견디기 힘든 고통이 있습니까?
기독교는 비전의 종교입니다. 소망의 종교입니다. 그것은 부활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인간에게 부활이 없다면 모든 것을 다 말하고도 결국은 다 같은 것입니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이사야 53:5-6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날 주님을 믿지 못하면 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됩니다. 예수의 부활은 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굳이 이 땅에 오셔서 부활하시고 또 하나님의 나라에 가실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처음부터 안 오시면 그만이지요. 그런데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고 부활 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바로 나를 위해서 나보고 똑똑히 보고 믿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부활은 믿음의 기초입니다(고전 15:12-19).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 신앙의 중심이 되십니다. ‘만일’ 이라는 단어가 짧은 글 속에 다섯 번이나 등장합니다(13, 14, 15, 16, 19절). ‘만일(eij:에이)는 조건문으로 앞 절에서 제시한 ‘죽은 자의 부활을 부인하는 것’ 이 곧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 임을 말합니다. 원문에 이 단어는 7번이 나타나며 17절에도 들어있습니다. 또한 12-19절까지 모든 절에 나오는데 18절만 안나옵니다. 그러나 18절은 ‘또한’ 이라는 단어가 대신 나옵니다. 이 단어는 ‘a[ra:아라’ 인데 “의문의 여지없이, 진실로” 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만일’이라는 말을 더 강조한 단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본문의 ‘다시 살아나셨다’는 에게게르타이(ejghvgertai)는 완료 시제로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적 사건으로 이미 성취된 것을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단어는 수동형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이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만일(에이)’ 이라는 가정법을 사용해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지닌 절대성을 강조했습니다. 만일 주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것이 되고, 우리는 모두 거짓말쟁이가 되고 말 것입니다. 만일 주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에 빠져 사망한 자들로 존재하고 있을 것입니다. 만일 그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삶이 인생의 전부라면, 세상에서 부활 신앙을 갖고 영생의 소망을 따라 살았던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부활이 없다면 자신의 존재는 없는 것이라고 증거 했습니다.

주님의 부활, 나의 부활(고전 15:20-28).
부활은 모든 믿는 자에게 소망입니다. 앞서 ‘만일’ 이라는 단어로 있을 수 없는 일을 가정하던 사도 바울은 이제(20절) ‘그러나’ 라는 단어로 앞서 거론한 모든 가정을 완전히 부정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들 중에 맨 처음 살아나셔서 죽은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신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앞서 가정한 모든 것은 한꺼번에 힘을 잃고 맙니다.
본문 20절 ‘그러나 이제(Nuni; de;:뉘니 데)’ 로 ‘뉘니’는 ‘지금 당장’ 데는 ‘그리고’입니다. ‘Nuni;:뉘니’는 nu’n(뉜)은 ‘현재’인데 뉘니는 바로 현재를 강조하기 연장형입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우리를 다시 살리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뉘니’를 사용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이 오늘 그 사실을 믿는 성도 여러분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앙간증>
부활은 믿는 것 외에 방법이 없습니다. 부활을 부정하는 분들이 말하는 것은

1) 가사설(假死說)
진짜로 죽은 것이 아니라 실신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6시간이나 십자가 위에 계셨고 운명 후 로마 군인이 옆구리에 창을 절러 물과 피를 나오게 하여 죽음을 확인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주님의 제자이지만 죽은 것이 확인되었기 때문에 무덤에 장사한 것입니다. 로마 병정도 죽은 것이 확인되었기 때문에 예수의 시체를 내어 준 것이고, 제자들 역시 예수의 죽음이 확인되어 흩어진 것이 분명합니다.

(2) 도거설(盜去說)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체를 도적해 가고는 돈을 주고 예수가 살아났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훔쳐 갔으면 무엇 때문에 여자들과 베드로가 무덤에까지 찾아갔겠습니까? 로마 병정들이 인봉을 하고 지키는데 어떻게 접근했겠습니까? 나아가 제자들은 무엇 때문에 순교하기까지 부활의 주님을 증거 했겠습니까? 도리어 대제사장들이 로마 군인들에게 돈을 주면서 훔쳐 갔다고 거짓 증거 하라고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그 외에 환상설과 유령설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5장에서는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자가 베드로, 야고보 외에도 500명이나 된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기독교회가 세상에 끼친 영향으로도 증거하고도 남으며, 교회확장과 박해국가들이 기독교 국가로 변하며, 현재의 역사를 통해서도 주님의 부활을 증거 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의 볼테르는 50년 후에는 교회가 다 없어진다고 하면서 무신론과 성경을 반박하는 책을 많이 출판했습니다. 그러나 50년 후에 교회는 없어지기는커녕, 신기하게도 그 무신론의 책을 출판하던 출판소가 성경을 찍어내는 인쇄소가 되었고, 마루에서 천장까지 성경책으로 꽉 찼다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1) 역사적 사실임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부활을 믿지 못하는 분들의 말은 대개가 확인이 안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모든 일을 내가 다 확인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내가 역사적으로 그 시대에 살고있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이미 확인한 사람들의 말을 믿는 것 외에 방법이 없습니다. 6.25를 체험한 분의 말을 믿어야 합니다. 성경을 보세요. 마리아가 무덤을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 여인들이 무슨 할 일이 없어서 거짓말을 시키겠습니까? 성경은 예수님이 부활 후에 10번 이상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우리가 부활을 부정하려면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모든 말씀을 부정해야 되고, 부활을 목격한 마리아들의 이야기를 부정해야 되고, 제자들의 경험을 부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과 같이 바울 사도의 부활의 증거를 부정해야 합니다. 결국 모든 성경을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2) 증거들을 믿어야 합니다.
부활의 이야기들은 네 개의 복음서에 모두 들어있습니다(마28장, 막16장, 눅24장, 요20장). 복음서 기자마다 특징 있게 기록합니다. 예수님의 빈 무덤과 천사가 증거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직접적인 증거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10여 차례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3) 오감에 의지하여 믿으려고 하지 마세요.
여러분! 오감이란 육체적 한계를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저도 이제 시력이 나빠져서 안경을 안 끼면 여러분들이 다 안보입니다. 지금 안경을 꼈지만 다 안보입니다. 멀리 보이는 안경을 끼면 가까이에 있는 글씨가 안보입니다. 그래서 적당히 보이는 안경을 낀 것입니다. 눈은 너무 멀리 있어도 안보이고, 너무 가까이에 있어도 안 보이고, 너무 캄캄해도 안보이고, 너무 밝아도 안보입니다. 이런 눈을 가지고 하나님을 보려고 하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다른 감각기관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청년이 결혼을 하루 앞두고 약혼자가 수영을 하다가 익사를 합니다. 이 사람은 정신이 돌게 됩니다. 강팍해지고. 하늘을 원망하고. 욕하고 인생을 비관하고. 되는 대로 파괴하고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아무도 이 사람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캐나다로 가게 됐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전도를 받아서 교회에 나가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구주고. 왕으로 영접한 이 사람은 마음에 평화가 찾아 왔습니다. 절망하고 서럽던 것들이 다 떠나갔습니다. 새로운 용기가 넘치는 새로운 능력이 있는 삶이 되었습니다. 그 분이 지은 찬송가가. 우리가 많이 부르는 487장 “죄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걱정 근심 모든 괴롬 우리 주님께 맡기세…” 맡길 곳이 없어서. 맡을 자가 없어서. 몸부림을 치다가. 주님께 맡기면서.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을 새롭게 할 사람은. 사람이 아닙니다. 인간의 모든 짐을 져주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베토벤도 몸은 병들고 정신도 왔다 갔다 했습니다. 여러 가지로 겉잡을 수 없는 우울증에 걸렸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성경을 읽고 기도원에 가서, 기도도 많이 하고. 새 사람이 되어 변화 받았습니다. 이 때 지은 노래가 바로 베토벤의 교향곡 9번 D단조 작품125 ‘합창’ 입니다. ‘환희’ 놀라운 변화를 경험해서 만든 노래입니다. 교향곡 최초로 합창을 도입한 곡입니다. 4악장에는 합창이 들어가는데 가사는 프리드리히 쉴러의 환희의 송가에서 따왔습니다. 우리 찬송가의 13장에 일 부분이 들어있습니다. 찾아보세요. 작곡자 1824년 베토벤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 곡을 작곡할 당시의 베토벤은 완전히 귀머거리였으며, 하나님의 은혜와 단지 음악적인 감각으로만 작곡한 곡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정도로 베토벤의 최대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는 곡입니다. 인류 역사에 이런 장엄하고 멋있는 곡이 없습니다. 이 곡은 2003년 세계 국제기관인 유네스코에서 음악유산으로 공식 지정되어, 전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은 최대의 명 걸작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
 

성경의 중심, 인생의 중심 십자가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39. 성경의 중심, 인생의 중심 십자가) / 본문 : 요 19:23-30

“23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24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병들은 이런 일을 하고 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26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28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29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사복음서들에는, 제일 중요한 사건은 네 개의 복음서에 모두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기사는 두 개의 복음서에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한 주간과 십자가의 사건은 모든 복음서 기자가 기록했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복음서 전체에서 엄청난 양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경의 배경과 달리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은 떠들썩하게 지내면서 정작 예수님의 죽음에 우리는 함구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전도서 7:1-2에서는 출생하는 집이나 잔치 집에 가는 것 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났다고 했습니다.

대개 전기의 종류들은 주인공의 죽음에 대한 부분들이 아무리 많아도 전체의 10%가 넘지 못합니다. 간디나 마틴 루터킹 목사 같이 암살 당하고 정치적으로 상당히 의미를 가지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복음서의 약 삼분의 일 가량이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부분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부활에 관한 기사는 사복음서 모두가 기록하고 있지만 양으로 볼 때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대개 전기를 기록할 때 인물의 업적이나 공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그의 학문적 지식이나 업적들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죽음은 그저 슬그머니 넘어가는 것이 상식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들(통일교)의 주장처럼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메시야로서 실패를 했다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그가 메시야가 아니었다면 굳이 그의 참혹한 십자가의 사건을 이렇게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기록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이나 기적을 베푸신 사건이 적어서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님의 죽음 이야기를 많이 기록하였겠습니까? 요한사도는 그의 복음서 맨 마지막에서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줄 아노라”(요 21:25)고 했습니다. 엄청나게 몰려드는 사람들의 이야기, 병 고침을 받고 환호하는 사람들, 오병이어 때, 칠병이어 때 예수님께 물고기와 떡을 얻어먹은 사람들의 간증들, 베드로와 제자들이 목격한 물 위로 걸으신 사건과 하늘에서의 소리들 그 외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기적이야기, 예수님이 어떻게 숙식을 해결하고 다니셨는지, 경제적인 문제는 어떻게 해결을 했는지 등 수 많은 이야기 거리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 듯 보면 재미도 없고 비슷한 이야기를 네 명의 성경 기자들은 예수님의 마지막 주간의 일을,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중심이 십자가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십자가 없는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말하지 않는 사람은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바울사도는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 6:14)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당시에 누구나 인정하는 최고의 학자입니다. 그런 그가 십자가를 만나고 세상 모든 학문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다 버렸습니다. 십자가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원래 십자가 형벌은 고대 군주 국가인 페르시아나 페니키아에서 유래된 것으로 로마 제국의 확장으로 인해 일종의 사형 제도로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이 십자가형은 당시의 사형 제도 중에서 가장 참혹하고 잔인한 제도였기 때문에 자국민인 로마인에 대해서는 이 형벌을 적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중국에 포청천이라는 판관이 나오는데 이 때 사형을 집행하는 방법이 목을 자르는 작두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작두형을 받을 때 두 가지 작두가 나옵니다. 하나는 서민을 처형시키는 개 작두이고 하나는 고위층을 사형시키는 용 작두입니다. 한번은 드라마를 보는데 자기는 양반이니 죽여도 꼭 용 작두에 죽겠다고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십자가로 말하면 용 작두가 아닌 개 작두인 샘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달려야할 그 참혹한 십자가에 대신 달리신 것입니다.

왜 하필 섭리는 가장 결정적인 때 얼굴을 감추고 마는 걸까?
마치 맹목적이고 멍청하며 무자비한 자연의 법에
스스로 굴복해 버리는 것처럼…(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구약성경을 속독하여 내려오다 보면 유대인들을 택하신 하나님은 애굽을 탈출하여 엄청난 기적을 베푸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만 잘 듣고 순종하면 늘 축복이 쏟아집니다. 하나님의 아들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들도 언제든지 구원을 받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불타는 가마솥에서도 죽지 않았습니다. 출애굽의 여파와 온갖 기적으로 가득 찬 구약의 여운이 아직 귀에 쟁쟁하고 눈에 어리는 가운데 신약의 첫 성경인 마태복음에 이르게 되고 어느덧 오늘 본문의 말씀에 도달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최후의 마지막 한 마디가 귓가에 남습니다. 본문 30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도대체 무엇을 다 이루셨는다는 것인지?

예수님이 마지막 주간을 보내신 기간은 유월절 기간이었습니다. 유월절은 유대인들이 출애굽 할 때 맨 마지막 재앙에서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까지도 모든 첫 것, 장자를 죽이셨는데 양의 피를 발라 유대인임을 표시한 집안은 심판하지 않고 넘어가셨습니다. 바로 이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모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유대인의 유월절을 기억하고 모인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기적이 마지막으로 이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예수님이 보여주신 갖가지 기적들로 볼 때 충분히 예수님이라면 그렇게 하실 분이라는 것을 의심 없이 믿었습니다. 그래서 ‘호산나’를 외친 것입니다. 우리는 이야기의 끝이 어떻게 되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이 느꼈을 ‘아 끝장이다!’ 하는 심정을 우리가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의 심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다 이루었다’ 였습니다. 사람들은 한동안 망치로 머리를 맡은 것처럼 멍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둘 실망에 차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뒤돌아보며 발길을 돌렸습니다.

누구보다도 제일 실망한 것은 바로 제자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26절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한 그 사랑의 제자,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서 마지막까지 있었던 요한이 영적 통찰력이 제일 뛰어난 복음서를 우리에게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마지막 주간 부분에 최후의 만찬 사건을 제일 길게 다룹니다. 요한복음 13-17장에 걸쳐 나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역시 유대인이기 때문에 유월절 떡과 포도주를 먹고 기념하기 위해서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 최후의 만찬이지 제자들은 당시 그것이 최후의 만찬이라고 생각한 제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출애굽 기념으로 모였을 때 제자들이야말로 그 날의 영광을 재현할 분임이 예수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애굽’이라는 단어 대신에 이제는 ‘로마’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꿈이 성취되는 듯한 흥분에 사로잡혔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눅 22:29)야겠다고 하셨고,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고 하셨으니 착각할 만도 합니다. 그리고 계속 요한복음을 읽어가노라면 그 날 밤 만찬의 흐름을 단절시켰던 사건이 소개됩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요 13:3)이라고 하시고선 난데없이 앞뒤가 맞지 않는 행동을 하십니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요 13:4) 일어나 마치 종의 모습을 하신 체 허리를 굽혀 제자들의 발에 묻은 흙먼지를 닦아주십니다. 베드로는 발을 예수님께 내 놓기가 민망했던지 안 닦겠다고 고집을 피웁니다. 아마 발이 더러웠던지 아니면 지금 예수님이 발이나 닦고 있을 그런 한가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일 것입니다. 이해가 안 가기는 다른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당시엔 발을 씻기는 일은 하도 천해서 종이 유대인인 경우엔 아무리 주인이라 해도 그런 행위를 요구할 수 없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 발을 씻기는 장면이 워낙 인상적이어서 스캇 펙(M. Scott Peck) 같은 작가는 이 일을 예수 생애의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꼽습니다. 갑자기 수건을 두르신 예수님이 맨발로 내려와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을 보고 제자들은 아마도 어떤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행동은 상식적으로 당시의 사회 질서를 완전히 뒤집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이제 신경이 날카로워 졌습니다. ‘서로 누가 높으냐’ 이런 토론 할 기분이 아닙니다. 괜히 갈릴리에서 고기나 잡고 있을걸 3년의 세월이 그 고생이 헛것이 되는 순간입니다. 이런 실망감을 가지고 있는 제자들에게 “다 이루었다” 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은 이제 그를 따라 다녔던 제자들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십자가를 성경의 중심에 두셨습니다. 십자가 그 모든 것이 없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십자가를 하나님은 오페라로 말하면 클라이막스로 만들었습니다. 십자가에 모두 맞춘 것입니다. 무엇이 포인트냐?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알면 모두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믿으면 우리 모두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모두 담겨 있는 것, 하나님 은혜의 모든 것, 우리를 위해 대답하시는 것은 십자가를 통하여 대답하십니다. 이 한 분이 지신, 이 하나의 사건이 온 인류의 억 만가지 문제를 풀어주고 짐을 벗겨주며 길을 열어줍니다.

세계 3대 박물관을 꼽으라면 영국 박물관,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 그리고 사람들이 머뭇거립니다. 미국에 있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을 거론할지 아니면 중국의 보물을 다 가져다 놓은 장개석의 타이완 박물관일지, 그러나 영국의 초등학교에서 가르치기는 세계최고의 박물관은 러시아에 있다고 가르칩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쥐 박물관을 말하는 것입니다.
에르미타쥐 박물관에는 레오나르드다빈치, 라파엘로, 고흐, 피카소 등 엄청난 진품들이 있습니다. 제가 1995년 처음 방문했는데 사실인지 모르지만 그 당시에 이 박물관을 팔면 러시아가 3백년동안 먹고 살 수 있는 돈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루브르 박물관에는 모나리자, 비너스도 있습니다. 이태리 바티칸 박물관에는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가 있습니다. 엄청난 보물들입니다.
박물관마다 최고가 있습니다. 그럼 전 세계 최고가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영국 박물관에 로제타스톤(Rosetta Stone)입니다. 로제타스톤은 프랑스군이 이집트에 가서 작전을 하는 1779년에 군인들이 가서 로제타라고 하는 마을에서 작전을 하다가 그곳에서 많은 유물, 문화재를 발굴해냅니다. 그 당시는 점령한 군인들이 가져가는 것이니까 프랑스 군대가 그 모든 것을 가져갑니다. 가져가다가 영국군하고 싸움이 붙어서 영국군한테로 넘어갑니다. 영국 박물관이 갖고 있는 가장 값진 보화입니다. 그건 비석입니다. 길이가 114cm 폭이 72cm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작은 돌로 된 비석이 어떻게 세계에서 최고로 유명한가 하면 그것은 바로 이 비문 제일 위에는 이집트 상형문자가 있고, 중간에 이집트 Demotic가 있고, 맨 아래 그리스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비석이 상형문자을 해석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 것입니다. 알파벳은 모두 아니까 이 알파벳을 통하여 애굽의 상형문자의 해석의 길이 열렸습니다. 애굽은 세계를 가장 오랫동안 지배했던 최강대국입니다. 4천년을 강대국으로 내려왔습니다. 세계를 지배했지만 그 많고 많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의 문헌은 비석이든 책이든 하나도 못 읽습니다. 알 수가 없습니다. 상형문자라 모릅니다. 어떤 고고학자도 어떤 학자도 상형문자를 알 수가 없습니다. 자기들도 모릅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이 상형문자를 알 수 있는 길이 제 각각 어떤 짐작을 할 뿐이지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길이 없는데, 로제타스톤이 나오면서 그리스어가 있으니까 그리스어로 이걸 풀다 보니까 전 애굽의 수많은 그 비문, 말할 수 없는 역사적인 자료가 한 순간에 풀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로제타스톤이라고 하는 것은 교과서에 나오는 것처럼 세계에서 가장 귀한 보화 중에도 보화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류의 역사를 푸는 키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문제를 풀 수 있는 로제타스톤입니다. 로제타스톤은 애굽에 있는 그 글만 알려줄 뿐이지 세계 인류의 문제를 대답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많고 많은 문제, 국가의 문제, 가정의 문제가, 오늘 날 이렇게 과학이 발달해도 못살아 가지고 야단인데 이 문제가 어디 있습니까? 인류의 죄의 문제를 누가 해결해 줍니까? 해결을 고사하고 알 수도 없습니다. 공자도 물론 모릅니다. 공자는 ‘내가 아침에 알면, 나는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또한 獲罪於天(획죄어천), 無所禱也(무소도야)니라 ‘하늘을 향해 진 죄는 빌 곳도 없느니라’. 고 했습니다.
석가모니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고민 고민 하다가 고행을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나도 죄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고 業報衆生 濟度不能(업보중생 제도불능)이라 ‘자기가 진 죄는 자기가 다 당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문제가 어디 있습니까? 어떻게 풀어야 합니까? 인간은 어느 길로 가야합니까?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인생의 문제는 어떻게 풀어야 합니까? 우리의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짐은 어떻게 벗어야 합니까? 누가 우리를 자유케,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미암아 십자가는 우리의 모든 것을 밝혀줍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그래서 성경을 보화이며 비밀의 책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은 인생의 모든 문제를 푸는 키입니다.

예수님이 이 십자가를 처음으로 언급한 것은 마 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막 8:34, 눅 9:23)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한참 전에 십자가를 이야기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별도로 마 16:24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늘 십자가를 바라보시며 오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십자가를 지셨고 다 이루신 것입니다.
우리 삶의 중심에 십자가가 있어야 합니다.
마귀가 제일 무서워하는 게 십자가입니다. 천하를 모두 넘어뜨려도 십자가 앞에는 맥을 못 춥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나와서도 십자가로 무장하지 않아서 어정쩡한 군인이 되어 그렇지, 진짜 십자가 바로 믿고 바로 서면 여러분을 당할 자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패배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죽음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굴복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우리 사람의 중심이 되는 십자가입니다. 승리의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는 하나님의 마침표입니다. -아멘-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38.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 본문 : 마 21:1-11

“1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4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6 제자들이 가서 예수의 명하신대로 하여 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8 무리의 대부분은 그 겉옷을 길에 펴며 다른이는 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0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가로되 이는 누구뇨 하거늘 11 무리가 가로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출생지 : 베들레헴, 성장한 곳 : 나사렛, 나이 : 33세, 혈통 : 유다 지파이며 아버지는 요셉 그러나 성령으로 잉태했다고 함, 학력 : 없음, 직업 : 목수의 아들로 자랐으나 목수 일은 하지 않고 제자들을 모아 갈릴리 지방을 중심으로 떠돌아다니고 있음 결론은 무직, 주요활동사항 :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그가 감당치 못할 분임을 소개함, 산과 들, 회당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고 있음, 많은 불치병을 고쳤음, 오병이, 칠병이어의 역사를 일으킴, 그의 제자들에 따르면 바다를 걸으신 적이 있고, 하늘에서 광채와 소리가 들린 적도 있다고 함.
대략 이런 내용으로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공의회에 보고되었을 것입니다. 산헤드린 공의회는 대중을 선동하고 신성을 모독하는 등 위험인물이기 때문에 좀더 면밀히 관찰하고 그와 직접 대화를 시도하여 그의 진정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여기고 성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율법에 관한 한 당시 능가할 사람이 없는 서기관과 율법사를 예수께 은밀하게 접근시킵니다. 이런 활동을 3년이 넘게 하고 다녔습니다. 지난 3년 동안 이들과 수많은 질문과 답변을 했습니다. 중요한 답변과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 약 40번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 하셨습니다. 이제 이들의 결론은 문제를 만들어서라도 책을 잡고자 하는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역사를 일으키고 사람들을 피해 다니시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가난한 자와 함께 하고 병든 자를 고치는 것을 귀찮아 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계속하여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이기보다는 계속하여 오병이어와 같이 기적을 일으켜 주기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좀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때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아담 때부터 내려오는 인간의 죄의 문제이며 영혼의 문제였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모든 것이 한계가 있음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 보냄을 받으신 것은 궁극적으로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자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3번에 걸쳐 자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언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예언의 말씀을 이루실 때가 지금이라는 것을 결정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길을 떠나십니다. 이 때는 유대인의 3대 절기 중의 하나인 유월절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또한 이러한 대열에 포함되어 계셨던 것입니다. 오시는 중에 두 소경을 고쳐주셨습니다(마20:29-34). 이곳 여리고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약 24km입니다. 당시 성인 남자가 하루동안 걸어갈 수 있는 길이었으나 예수님은 해발 900m의 군사 도로를 통해 예루살렘에서 약 3km 정도 떨어진 베다니에 도착하십니다. 여기서 하룻밤을 지내신 후에 다음날 즉 일요일에 다시 감람산 남동쪽 기슭에 위치한 벳바게에 도착하셨습니다. 감람산은 해발 약 800m에(수리산 489m) 위치한 네 개의 봉우리로 되어있는 산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위치하고 있는 언덕보다 약 90m정도, 시온 억덕 보다는 약 30m 정도가 높아서 동쪽으로는 요단 계곡과 사해의 웅장한 모습 그리고 남쪽으로는 유다 광야와 서쪽으로는 예루살렘의 아름다움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여기 서서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바라보시며 성전을 바라보셨습니다. 이것은 이미 오래 전에 스가랴를 통하여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편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 …”(슥 14:4) 하신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이곳 감람산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기 위하여 준비하십니다. 먼저 제자 두 사람을 시켜서 마을로 내려가면 그곳에 매여있는 나귀 새끼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 나귀를 끌고 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만일 누가 물어보면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 그러면 즉시 보내 줄 것이라고 말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에 대하여 여러 가지 추측을 합니다. “두 제자들 중의 하나가 나귀 임자였을 것이다. 아니면 예수님과 나귀 주인 사이에 이미 그렇게 하자고 동의하고 짰을 것이다. 아니면 예수님을 잘 아는 이를테면 병을 고쳐주어서 거절할 수 없는 사람 중에 하나일 것이다.” 등의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본문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네 가지를 분명하게 우리에게 전달하려고 합니다.
첫째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따랐을 때 그 말씀대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것을 알고 계시고 예언자적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인시켜 주신 것입니다.
둘째는 여기서 예루살렘까지는 3km가 채 안됩니다. 이 길을 걸어서 가지 않으시고 나귀를 타시고 가시는 것은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슥 9:9) 하신 말씀을 본문 4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셋째는 지금까지 메시야이심을 제자들에게만 말씀하셨지만 이제는 세상에 공개하심으로 3차에 걸쳐 제자들에게 예언하셨던(마 16:13-20) “예수께서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져 죽임을 당한 후에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인류 구속의 역사가 임박했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한때는 예수님이 원활한 사역을 위해서 당신이 메시야 구세주임을 함구하도록 제자들에게 지시했었습니다(마 16:20, 17:1-9). 그러나 이제 당신이 만물의 주관자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과 ‘모퉁이의 머릿돌’(42-44)임을 드러내셨습니다.
넷째는 본문 5절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마가와 누가는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모든 복음서 기자가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탔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왕이 될 사람은 튼튼한 군마를 타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예수께서 나귀 새끼를 타셨다는 것은 세상을 통치하는 그런 왕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나귀는 군마에 비해서 초라하기 짝이 없는 동물이어서 왕이 될 사람이 아니라 동네 언른 들도 잘 안타고 다니는 동물입니다. 아이들이나 타고 놀기에 딱 좋은 동물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유대의 건장한 33세의 남자가 타기에는 우스꽝스러울 수밖에 없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예수님의 겸손과 순수함을 잘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무력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군왕이 아니라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을 계속 따라다니며 주시하던 서기관들과 바리세인들은 예수님이 스스로 예루살렘에 오게 됨으로 절호의 기회를 맞이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여기서 끝장을 내자, 그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작정을 하고 들어오셨기 때문에 한치의 양보도 없습니다. 이제 더 물러설 곳도 물러설 이유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사람들의 환호를 받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다음날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의 상을 엎으십니다(12-17). 성전 정화를 시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로 생명력 없는 형식적인 신앙을 공박하셨습니다(18-22). 그리고 그리스도의 권위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역공을 하신 후(23-27) 두 개의 비유(28-32, 33-46)로써 책망을 가하셨습니다. 이로써 이들은 이제 예수를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로 여기게 되고 본 장 이후에 예수를 살해할 음모를 노골적이고도 급속도로 진행합니다.

그러나 이들과 반대로 천군만마대신 나귀를 타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호산나’를 외치며 환호하는 군중들이 있었습니다.
본문 10절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가로되 이는 누구뇨 하거늘 11 무리가 가로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온 성이 소동하여’ 너무 점잖은 번역 같습니다. 한마디로 예루살렘성이 뒤집어 졌다는 것입니다. 대단합니다. 예루살렘성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모여든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고있었습니다. 그 때 사람들이 예수를 향해 외친 한마디는 ‘호산나’ 이었습니다.
‘호산나 : 구원하소서. 구원해 주세요.’ 라는 소리를 들으시는 예수님의 마음에는 뜨거운 피가 올라왔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이토록 구원자를 부르짖고 환호하는 어린아이들과 사람들의 소리는, 그 어떤 군악대의 요란한 나팔소리보다 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과 공의로서 당신의 나라를 다스리시되 무력이나 권모술수로서 하지 않으시고 죽기까지 낮추시고 겸손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신 영원하신 평강의 왕이셨던 것입니다(사 9:6).

사람들은 수군거렸습니다.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구란 말인가? 이미 예수님을 만났거나 알고 있던 사람도 있을 것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유월절에는 유대인 성인 남자들이라면 누구든지 가야하는 명절입니다. 전국에서 모여든 모든 사람에게 예수가 나타난 것입니다. 누군가 “이는 누구뇨?” 하였고 모여든 무리 스스로가 대답을 했습니다.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나사렛은 당시에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던 지역이었습니다(요 7:41, 52). 예루살렘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가까운 지역인 갈릴리 사람들에게조차 멸시를 당했습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전도할 때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 1:46)고 했습니다.
그리고 빌라도는 예수를 조롱하려고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요 19:19)고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 3:6)고 했습니다. 철없던 초등학교 시절에 어머니가 밭에서 일하시다가 도시락을 가져가지 않았다고 몸빼 바지를 입고 학교에 나타나셨을 때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싶었습니다. 그러나 철이 들고나니 그 어머니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자랑스런 어머니였습니다. 나사렛은 이제 자랑스러운 곳이 되었습니다.

유대인에게 이런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성전 돌을 다듬는 석공들이 하루는 돌을 다듬는데 모든 고른 크기의 돌들 중에 크기와 모양이 다른 돌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 돌을 본 공사장 감독은 “이건 잘못된 쓸모 없는 돌이군. 왜 이런 돌을 보냈지? 이 쓸모 없는 돌을 언덕 아래로 굴려 버려라.”하고 거침없이 말했습니다. 감독의 명령에 따라 이 돌은 기드론 골짜기 아래로 버려졌습니다. 그 후 7년이 지나서 이제 기둥을 세워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감독은 사람을 보내 석공에게 “이제 기둥을 세워야 하는데 주춧돌이 필요하니 보내주게” 하였습니다. 석공은 “그게 무슨 소리인가? 난 벌써 오래 전에 주춧돌을 보냈다네.” 가만히 생각해 보니 7년 전에 기드론 골짜기로 필요 없다고 굴려 버린 돌이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프랑스의 샤르니가 나폴레옹 황제에게 밉게 보여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그의 친구들은 물론 가족들에게도 잊혀져갔습니다. 처음에는 자주 오던 가족들의 면회도 점점 멀어졌습니다. 그는 벽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아무도 나를 돌보지 않는다.” 소망을 잃어버리는 순간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감옥 바닥에 있던 돌 틈에서 푸른 싹 하나가 돋아났습니다. 샤르니는 간수가 매일 주는 물을 조금씩 남겨서 잎사귀에 부어주었습니다. 마침내 꽃봉오리가 생기더니 아름다운 꽃을 피웠습니다. 그는 먼저 썼던 글을 지우고 다시 이렇게 썼습니다. “하나님이 돌보신다.”
감옥에 아름다운 꽃이 피었다는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어 조세핀 왕비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꽃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돌보는 이는 결코 나쁜 사람이 될 수가 없다.”고 하면서 황제에게 재고를 건의했고, 샤르니는 석방되었습니다. 예수가 우리를 돌보십니다.

나사렛 예수그리스도가 우리들의 자랑이요 기쁨입니다. 이제 그분이 부끄러운 분이 아닙니다.
여러분! 십자가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우리의 중심이요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선한 목자와 양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37. 선한 목자와 양) / 본문 : 요 10:11-18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13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17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한 양치기가 매일 아침 연한 풀을 들고 양의 우리로 들어갑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매우 궁금하게 여겼습니다. 하루는 마을의 한 사람이 양치기를 따라갔습니다. 양치기는 다리가 부러진 양에게 풀을 먹이고 있었습니다.
“어쩌다가 양의 다리가 부러졌습니까? 사나운 짐승에게 물린 것입니까?” 양치기는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내가 부러뜨렸습니다.” 마을 사람이 깜짝 놀라서 다시 물었습니다. “당신처럼 양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직 보지 못했소. 그런데 양의 다리를 부러뜨리다니요…”
양치기는 양을 쓰다듬으며 말했습니다. “이 양은 자꾸만 길을 잃어버립니다. 내가 가까이 가면 슬슬 도망을 가지요. 그런데 목장 주변에는 사나운 짐승들이 많아요. 그래서 다리를 부러뜨린 것입니다. 매일 음식을 먹이면서 정을 쌓기 위해서지요. 제 목자를 알아볼 때까지 꼴을 먹일 것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또한 양이 길을 잃으면 주인은 개를 보냅니다. 그러나 그 개는 양을 잡아먹으라고 보낸 것이 아니라 양을 몰고 오게 하기 위합니다. 하나님은 가끔 사랑하는 사람에게 시련을 주십니다. 그것은 우리를 못살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아 복을 얻게 하심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kalov”:칼로스)”이란 말은 “아름다운, 정직한”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막 10:17-18 “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 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고 했습니다. 여기서는 질문자가 구원에 대한 질문과 같이 선한 주체를 말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선한이는 하나님뿐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최종적인 구원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밝히신 것입니다.
하나님 속에는 선이 있습니다.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정직함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반대로 거짓은 사단이 주는 것입니다.

인류 최초의 거짓말은 아담과 하와에게 사단이 들어갔을 때 한 것입니다. 십계명에서 9계명으로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출 20:16)입니다.
시 5:6 “거짓말하는 자를 멸하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고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
시 101:7 “거짓 행하는 자가 내 집안에 거하지 못하며 거짓말하는 자가 내 목전에 서지 못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수박밭을 가꾸는 농부가 있었습니다. 그는 별다른 문제없이 농사를 지었지만 한 가지 신경에 거슬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밤마다 누가 수박을 따 가는 것입니다. 농부는 생각 끝에 꾀를 내어 수박밭에 팻말을 세웠습니다. “이 중 한 개의 수박에는 청산가리를 주사했음” 다음날 농부가 수박을 세어보니 그대로였습니다. 농부는 기쁜 마음에 돌아가려다가 팻말 밑에 적혀 있는 글을 보았습니다. 그곳에는 작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이제 두개가 됐음”

거짓의 대장은 사단입니다.
합 2:18 “새긴 우상은 그 새겨 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 만든 자가 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복음을 대항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요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 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선한 목자가 좋습니까? 악한 목자가 좋습니까? 질문을 하는 제가 바보이겠지요. 여러분! 어쩌면 우리는 악한 것을 잘 모르기 때문에 선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잘 모르는지 모릅니다. 이승복 어린이가 1968년 11월 2일 삼척시의 바닷가를 통해서 대한민국으로 무단 침입한 북조선의 무장간첩에 의해서 12월 9일 밤 어머니, 남동생, 여동생과 함께 살해당했고 그의 형과 아버지는 크게 다쳤습니다. 공산당은 이승복에게 “북조선이 좋으냐?, 남조선이 좋으냐?”는 질문에 이승복 어린이는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하고 죽었습니다. 악한 것에게 당해보지 않은 분은 악이 얼마나 나쁜 것인지 잘 모릅니다.

일반적으로 보면 삯군 목자는 나쁜 목자는 아닙니다. 직업적인 목자라는 것입니다. 자기 임무에 충실한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목자입니다. 보수를 받고 거기에 해당하는 만큼 일하는 목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소개할 때 선한 목자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미쉬나(Mishnah)에 보면 삯군 목자의 책임의 한계는 이리 한 마리의 공격으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안전을 위해 양을 보호하지 않더라도 책임을 추궁 받지 않습니다. 자신의 안위가 먼저이기 때문입니다. 삯군의 한계는 자신보다 먼저가 아닙니다. 솔직히 말해 봅시다. 양이 중요합니까? 자신의 생명이 중요합니까? 우리는 다 양 같은 존재입니다. 사실 하잘 것 없습니다. 버려도 그만입니다. 그런데 선한 목자는 이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립니다. 삯군 목자는 고용된 사람이기 때문에 양의 실태를 잘 모릅니다. 그러나 선한 목자는 양의 상태에 대해서 완전히 꿰뚫어 보듯이 압니다.
14, 15절에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 같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하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적인 정보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직업적인 관계가 아니라 사랑과 인격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목자는 양을 알고 양은 목자를 압니다.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14 하반) 그리고 15절에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말합니다.
본문 14, 15절에는 각각 안다는 단어가 두 번씩 들어가 있습니다. 여러분 알아준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가끔 눈치 없는 남편들이 뭘 자꾸 아내에게 사서 바칩니다. 그런데도 아내는 마음을 풀지 않습니다. 아내가 원하는 것은 알아주는 것입니다. 힘들다는 것을 알아주어야 합니다. 사람은 나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양이 목자를 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양은 참 무지합니다. 어느 정도 무지한가? 어리석을 정도로 무지합니다. 양은 길을 잃으면 돌아오지 못합니다. 개는 길을 찾아옵니다. 연어도 고향을 찾아옵니다. 그런데 양은 못 찾아옵니다. 양은 자기 앞에 가는 양을 따라갑니다. 요령을 피울 줄 모릅니다. 앞의 양이 낭떨어지에 떨어지면 함께 떨어집니다. 그 정도로 무지합니다. 그리고 양은 재주가 없습니다. 호랑이도, 사자도, 코끼리도 다 서커스단에서 재주를 넘지만 양이 재주넘는 일은 역사 이래로 없습니다. 여러분, 재주 부리는 양이 되지 마십시오. 우리의 신앙생활에 인간의 요령과 재주를 거둬내야 합니다. 그래야 양이 됩니다. 양은 재주를 부릴 지혜가 없습니다. 뒤집어져도 일어나지 못합니다.
그리고 양은 매우 더러운 동물입니다. 제가 영국에 가서 양 구경을 하면서 제일 실망을 했습니다. 저는 양에 대한 환상이 깨어진 것입니다. 그림 속의 양은 얼마나 깨끗하고 뽀얗고 탐스럽습니까? 옆에서 보니 그렇게 더러운 짐승이 없습니다. 씻을 줄 모릅니다. 악취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 더럽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그런 더러운 면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기 바랍니다. 항상 깨끗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한없이 더럽습니다. 그리고 양은 공격형 무기가 없습니다. 뿔 가지고 받을 줄도 모르고, 발톱가지고 할퀼 줄도 모르고, 이빨 가지고 물 줄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양에게 주신 은사가 있습니다. 자기 목자 음성은 알아듣습니다. 자기 목자 음성 외에는 어떤 짐승의 아름다운 소리도, 어떤 사람의 낯선 소리도 다 구별합니다. 자기 목자 음성의 휘파람 소리, 말소리를 그대로 알아듣고 따라옵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부족해도 하나님의 말씀의 음성을 듣는 귀가 있는 줄 압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하나님의 양입니다.

야고 부부는 오랜 세월 동안 팔레스타인에서 선교사로 일했습니다. 야고씨는 북 아일랜드 출신이었기 때문에 팔레스타인 양치기의 복장을 하고 나서면 쉽사리 아라비아 양치기로 통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브엘세바 지역을 방문하고 있던 야고 선교사는 길옆에 앉아있는 한 무리의 목동들과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양들은 돌 투성이인 언덕에서 풀을 뜯어먹고 있었습니다.
선교사가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당신 양떼를 부르죠?” 그러자 한 양치기가 아주 낮은 목소리로 양떼들에게 보내는 신호를 들려 주었습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선교사도 그 양치기의 소리를 아주 정확하게 흉내냈습니다. 그렇게 한 두 번 연습한 후 야고 선교사는 양치기의 외투와 지팡이를 빌려 가지고, 풀을 뜯고 있는 양떼 사이를 지나다니면서 양들에게 신호를 되풀이해서 보냈습니다. 그렇지만 이 가짜 양치기의 신호에는 머리를 쳐들고 반응하는 양은 단 한 마리도 없었습니다. 이번에는 진짜 양치기가 외투나 지팡이를 전혀 갖지 않고서, 선교사가 했던 것과 똑같은 신호를 양들에게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 진짜 양치기의 신호를 들은 양들이 그 즉시 풀 속에 파묻었던 고개를 쳐들고 재빨리 자기 주인에게로 몰려드는 것입니다. 이 양치기들의 말에 의하면, 자기 주인의 신호를 듣지 못하고, 가짜 양치기의 신호를 쫓아가는 것은 병든 양뿐이라고 합니다(레이몬드 에드몬).

그리고 양은 제물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양입니다. 우리 성도가 왜 귀한지 아십니까? 우리 숨을 거두는 우리 생애를 마지막으로 이 땅에서 끝낼 때 내 인생의 삶이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로서 끝내기 때문입니다. 양은 제물 중에 가장 제물답습니다. 양의 가치는 제물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제물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이상의 가치는 없습니다. 양은 제물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께 가치가 없습니다. 본문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10)를 기억하십시오.
양은 홀로 있을 때는 그렇게 무지하고 어리석고 더럽고 싸울 줄도 모르는, 조그만 쥐 앞에서도 어쩔 줄 모르는 존재이지만 목자가 있을 때는 그렇게 당당하고 영광스러운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사람이란 목자의 도움을 받으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목자의 음성을 들으면서 따라가는 양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좋은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양은 겁이 많고 성격이 급한 동물입니다. 어떤 때 목자가 양을 나무에다 묶어 놓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양이 왔다 갔다 하다보면 묶어놓은 끈이 꼬이게 됩니다. 이 때 양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끈이 꼬여 있을 때는 주인이 오기만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양의 못된 성격 때문에 그 끈을 자기가 풀어보겠다고 하다가 끈이 더 꼬여 나중에는 목에 메여 죽는 경우도 발생합니다.

시 23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로 시작합니다. 다윗은 어려서 목동이었기 때문에 잘 압니다. 목자가 얼마나 양을 위하여 신경을 쓰고 수고하는지 말입니다. 그리고 양에게 참된 목자만 있다면 그분께서 알아서 양을 인도한다는 것 또한 잘 압니다.

선한 목자이신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찾으십니다.
마음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고집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유혹을 따라간 영혼들을 찾으십니다
알지 못하여서 아직 우리에 들지 않은 자를 찾으십니다

예전에 설교제목을 길게 정하시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토요일 오후에 주보를 맡겼던 인쇄소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주신 내용 중에 설교 제목이 좀 짧습니다. 설교제목을 다시 좀 알려주십시오?”
“제목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니’ 입니다.”
그랬더니 인쇄소 직원은 이상하다는 듯이 한번 더 물어 보았습니다.
“그것 외에 더 있습니까?”
“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그랬습니다.
그리고는 다음날 아침 목사님은 약간 늦게 도착하셔서 어제 준비한 설교를 하기 위해 강단에 올라서서 시작하려는데 설교제목이 이렇게 쓰여져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목사님은 어딘가에 크게 충격을 받으신 것처럼, 계속 이 제목을 몇 번씩 되 세기고 계셨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히말라야 고산족들은 양을 매매할 때 그 크기에 따라 값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양의 성질에 따라 값을 정한다고 합니다. 양의 성질을 테스트하는 방법이 매우 재미있습니다. 가파른 산비탈에 양을 놓아두고 살 사람과 팔 사람이 함께 지켜봅니다. 이때 양이 비탈 위로 풀을 뜯으러 올라가면 몸이 마른 양이라도 값이 오르고, 비탈 아래로 내려가면 살이 쪘더라도 값이 내려갑니다.
위로 올라가려는 양은 현재는 힘이 들더라도 넓은 산허리의 미래를 갖게 되지만, 아래로 내려가는 양은 현재는 수월하나 협곡 바닥에 이르러서는 굶주려 죽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선은 보다 쉬운 것들에 집중하라는 유혹을 받고 있습니다. 교회생활도 믿음도 그렇습니다. 사단은 지속적으로 우리의 정신과 마음이 해이해 지도록 유혹합니다. 편안하다고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위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