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제와 소금언약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막 9: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레2:13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바울은 에베소와 골로새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세월을 아끼라”(엡 5:16, 골 4:5)고 했습니다. 세월을 아낀다는 것에 어떤 뜻이 있겠습니까? 무엇을 하든지 최선을 다하라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드리는 예배 또한 최선을 다해서 드려야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더 아름다운 예배, 더 주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릴 수 있는지 배워야 합니다. 봉급을 의미하는 영어 샐러리(salary)라는 말은 소금(salt)에서 나온 말입니다. 샐러리는 소금이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주는 대표적인 말입니다. 샐러리맨에게는 샐러리가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 또한 생명력 있는 예배로 드려져야 합니다. 이런 생명력 있는 삶의 예배를 오늘 말씀을 통하여 바르게 깨달아, 우리의 삶 전체가 예배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번제
구약시대 제사의 방법 중에 번제와 소제가 있습니다. 번제는 생명이 있는 것을 바쳐 피를 흘리는 제사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자기의 생명을 드려, 보혈의 피로 말미암는 번제를 드린 것입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구약식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번제를 드릴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만 이 번제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제사는 영원한 제사가 되어서 다시 드릴 필요가 없도록 완벽한 제사를 드리셨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히 10:12) 라고 했습니다. 제사 중에 번제가 없다면 다른 모든 제사가 무의미 합니다. 먼저 번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는 번제를 드릴 수가 없는 것이고 번제에 해당하는 해결 방법이 바로 내가 드려야할 번제를 다시 드릴 필요가 없도록 단번에 드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소제
그러나 우리가 아직까지 드려야할 제사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소제입니다. 소제는 성도가 하나님께 약속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헌신의 표인 것입니다. 구약과 같은 방법으로 드릴 필요는 없지만 구약에서 이 소제를 드릴 때 어떻게 드렸는지를 알면 오늘 우리가 좀더 하나님이 원하시는 소제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번제가 드려짐으로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사람들이 지금도 여전히 드려야할 제사의 개념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소제인 것입니다.
소제의 히브리말 뜻은 선물입니다. 선물은 드린 자도 기쁘고 받는 자도 기쁜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기쁨과 평강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헌신하는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혹시 선물을 주고 후회해 본 적이 있습니까? 공연히 내가 주었구나 하는 것은 선물이 아닙니다. 선물은 언제 준 것이라도 기억할수록 기쁜 것입니다. 받은 선물도 괜히 받았다 하는 선물은 의미가 없습니다. 소제는 드리는 사람도 기쁘고 그 선물을 받으시는 여호와 하나님도 기뻐하는 제사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나는 이런 제사를 “15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히 13:15-16) 고 했습니다.
소제의 재료
첫째, 필요한 것은 세 가지 입니다. 레 2:1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 고운 가루, 기름, 유향이 필요합니다.
고운 가루는 제일 좋은 것을 의미합니다. 충실한 열매를 골라야 됩니다. 쭉정이나 상한 곡식이 아니고 충실한 열매를 골라서 이 열매를 볶아야 됩니다. 그리고는 이 열매를 빻아야 됩니다. 그리고 채로 쳐서 부드러운 가루를 만들어야 합니다. 곡식 그대로는 하나님께 바칠 수 없습니다. 충실한 곡식이 볶아지는 과정 그리고 빻아져서 고운 가루로 변하는 그 가루의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그 곡식 자체가 완전히 죽으려면 볶아져야 됩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입니다. 곡식이 볶아지는 과정입니다. 곡식의 모양이 그대로 있어서는 가루가 나오지 않습니다. 곡식이 빻아져야 됩니다. 우리의 육을 죽이고 주님 앞에 죄를 회개하는 육이 깨어지는 과정이 있어야 영적으로 가루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욕심의 덩어리가 빻아져야 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나쁜 습관의 덩어리들이 깨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온갖 죄악의 덩어리들이 깨어져서 가루가 되어야만 소제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처음 익은 것으로 여호와께 드릴 지니라.”(레 2:11) 고 했습니다.
가전제품 중 요즘 유행하는 모델은 아마도 고화질 TV(High Definition, HD TV)일 것입니다. 일반 아날로그 TV에 비해서 무엇이 차이가 있냐하면 바로 해상도입니다. 선이 가늘고 많이 선명한 것입니다. 하나님께도 고품격으로 드려지려면 고운 가루가 되어서 고화질이 되어야 합니다.
다음에 기름이 필요합니다. “기름을 붓고” 그랬습니다. 구약에서 기름을 사람에게 부을 때에는 제사장이나 왕이나 선지자에게만 기름을 붓습니다. 기름은 성령을 뜻합니다. 고운 가루만 가지고 안 됩니다. 우리의 희생이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성령과 항상 함께 하셨습니다.
또한 재료 중에서 유향이 반드시 필요한데 이 유향을 만들 때 출 30:35 “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 라고 하셨습니다. 소금을 쳐서 정결해야 해야합니다. 유황은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향으로 기도 생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기도 생활을 하셨습니다. 우리 또한 기도 생활을 쉬면 안 됩니다.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계 5:8)
둘째, 금지된 재료도 세 가지입니다. 첫째 누룩이 들어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둘째 꿀이 들어가서는 안됩니다(레 2:11). 셋째는 처음 익은 곡식으로 드리지만 “향기로운 냄새를 위하여는 단에 올리지 말지며”(레 2:12) 라고 했습니다.
누룩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마 16:6) 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마 16:12)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잘못된 교훈들이 누룩입니다. 순수하지 못한 것입니다. 깨끗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꿀도 안됩니다. 단 꿀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 사람들이 먹는 빵은 누룩을 넣어야 됩니다. 부풀게 해야 됩니다. 그리고 꿀을 넣어 단맛이 나야 빵이 맛이 있습니다. 육을 위해서 먹는 빵은 반드시 누룩과 꿀을 넣어야 됩니다. 과자나 빵이 달지 않으면 맛이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육신을 위해서 먹는 빵에는 반드시 들어가야 되는 누룩과 꿀을 넣지 말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누룩은 거짓교훈을 말합니다.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 입은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나중은 쑥같이 쓰니라”(잠5:3)
“꿀을 많이 먹는 것이 좋지 못하고 자기 멍에를 구하는 것이 헛되니라”(잠25:27)
꿀을 많이 먹는다는 것은 탐욕을 상징합니다. 꿀은 달기 때문에 자꾸 먹게 됩니다. 그래서 탐욕을 부리는 것을 꿀에다가 비유했습니다. 거짓 교훈과 악을 재물에 섞지 말라는 것입니다. 설교도 마찬가지 일 수 있습니다. 세상에 나가 강의하는 것은 온갖 것으로 재미있게 꾸미고 인기를 얻기 위하여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는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하나님은 향기로운 냄새로 받으십니다(레 1:9, 13, 17, 2:2). 그런데 왜 향기로운 냄새를 위하여 단에 올리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꿀처럼 달고, 향기로운 것은 하나님께 언약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으로 지금도 많이 하나님께 드리는지 모릅니다. 이것들은 순수하지 못한 불순한 것들입니다. 마치 선교하면서 내가 했다고 하는 일 중심, 업적 중심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소금이 무엇입니까?
본문 레2:13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고 했습니다. 소금 없이는 소제 자체가 불가능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토록 소금을 강조하셨겠습니까?
김장철에 입이 무성한 파란 배추를 가져다가 소금을 팍 쳐서 절궈 놓아보세요? 몇 시간이 지나면 그렇게 강했던 배춧잎이 기가 팍 죽어있습니다. 우리의 자랑들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이 있다면 소금을 쳐서 기를 퍅 죽여야합니다. 하나님께는 교만함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첫째, 소금은 맛을 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 눅 14:34)
“싱거운 것이 소금 없이 먹히겠느냐 닭의 알 흰자위가 맛이 있겠느냐”(욥 6:6)
생선을 먹기 힘들게 하는 것은 특유의 비린내인데 소금은 이 비린내를 줄여줍니다. 소금을 뿌리면 비린내를 내는 주성분인 ‘트리메탈아민’ 이 생선살 밖으로 빠져나온답니다. 이렇게 소금을 뿌려 비린내를 제거한 음식을 ‘자반’ 이라고 부릅니다. 해산물 중에는 끈끈한 점액을 내는 것들이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문어나 전복은 끈끈한 타액을 내어 먹는데 불쾌감을 줍니다. 점액이 묻은 부위에 소금을 뿌리고 긁어내면 쉽게 없어진답니다.
사람에게 맛을 느끼게 하는 성분은 나트륨이온(Na+) 입니다. 이 나트륨이온의 농도가 적당하면 입맛을 다시지만 과하면 불쾌감으로 바뀝니다. 소금은 골고루 쳐야합니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골 4:6) 지난번 결안 부침을 먹는데 소금을 잘못 쳐서 한쪽은 짜고 한쪽은 싱거운 것입니다. 소금은 골고루 쳐야 합니다. 소금으로 맛을 내되 잊지 마셔야 할 것은 골고루 하라는 것입니다.
소금(염분)이 없으면 지구의 많은 생물은 목숨을 이어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소금을 너무 많이 섭취하면 사람의 경우 고혈압, 신장병, 심장병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염분 과잉 섭취를 두려워하여 소금을 너무 섭취하지 않아서 병원에 실려 가거나 사망하는 사람도 나오고 있답니다.
둘째, 정결케 합니다.
출 30:35에 향을 만들 때도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예전에 마땅한 약이 없을 때는 소금이 제일이었습니다. 소금으로 소독을 하는 것입니다.
에스겔에 보면 이방민족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의 난 것을 말하건대 네가 날 때에 네 배꼽줄을 자르지 아니하였고 너를 물로 씻어 정결케 하지 아니하였고 네게 소금을 뿌리지 아니하였고 너를 강보에 싸지도 아니하였나니”(겔 16:4) 라고 했습니다. 소금은 깨끗하게 하는데 필수적입니다. 1리터의 소금(큰 숟가락으로 하나정도)을 물에 넣고 20분 정도 삶으면 때가 깨끗하게 빠집니다. 기름으로 더러워진 때도 말끔히 빠지면서 섬유는 상하지 않습니다. 프라이팬이의 생선기름도 프라이팬을 달구고 소금을 조금 넣어 닦아내면 깨끗해집니다.
우리나라에 이런 풍습이 있었습니다. 아주 꼴 보기 싫은 사람이 집에 왔다 가면 “소금 뿌려라.” 그럽니다. 죄 많은 사람이 왔다갔기 때문에 그 죄를 씻어야 한다는 표시입니다.
“아비멜렉이 그날 종일토록 그 성을 쳐서 필경은 취하고 거기 있는 백성을 죽이며 그 성을 헐고 소금을 뿌리니라”(삿 9:45) 고 했습니다.
어느 학교에서 학부모에게 이런 설문 조사를 했습니다. “지금 당신의 아이가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까?” 대답은 교수, 의사, 법조인 등 여러 가지가 많이 나왔는데 한 어머니가 답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내 아이가 미안합니다. 제 잘못이라는 말을 정직하게 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 변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영한 응식으로 너와 네 자손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변하지 않는 소금 언약이니라”(민 18:19)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 것이 아니냐”(대하 13:5)
어느 날 콜럼버스는 포르투갈 해변을 거닐다가 유럽에서는 볼 수 없는 열매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이 열매를 보며 틀림없이 바다 건너편에는 새로운 세계가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바다 끝까지 가 보기로 작정하고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긴 항해는 그 열매의 원산지인 아메리카 신대륙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는 한 작은 열매 속에서 거대한 세계를 보았습니다. 이런 일이 1492년에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나와 소금으로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인도할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소금을 치라고 했습니까? 소금은 맛의 왕입니다. 모든 맛을 지배하는 맛이 소금이라고 합니다. 소금의 맛을 이길 다른 맛이 없답니다. 단맛도 신맛도 소금을 이기지 못한답니다. 그러므로 소금은 모양을 부풀게 하고 맛을 변질시키는 게 아니라 기본적인 맛을 더 맛나게 하는 근본 맛이 소금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소금도 없이 간 내먹다.’ 는 말이 있습니다. 무언가를 마련하지도 않고, 또 밑천도 없이 큰 이득을 차지하려 하거나, 몹시 인색함을 뜻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소금도 없이 나아가려고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 이 소금이 있어야 합니다. 소금은 자신이 녹아 없어질 때 비로소 골고루 퍼지게되고 맛이 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완전히 녹아지고, 부서지고 빻아져서 고운 가루가 되어 하나님께 소제로 드려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