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제와 소금언약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막 9: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레2:13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바울은 에베소와 골로새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세월을 아끼라”(엡 5:16, 골 4:5)고 했습니다. 세월을 아낀다는 것에 어떤 뜻이 있겠습니까? 무엇을 하든지 최선을 다하라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드리는 예배 또한 최선을 다해서 드려야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더 아름다운 예배, 더 주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릴 수 있는지 배워야 합니다. 봉급을 의미하는 영어 샐러리(salary)라는 말은 소금(salt)에서 나온 말입니다. 샐러리는 소금이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주는 대표적인 말입니다. 샐러리맨에게는 샐러리가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 또한 생명력 있는 예배로 드려져야 합니다. 이런 생명력 있는 삶의 예배를 오늘 말씀을 통하여 바르게 깨달아, 우리의 삶 전체가 예배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번제
구약시대 제사의 방법 중에 번제와 소제가 있습니다. 번제는 생명이 있는 것을 바쳐 피를 흘리는 제사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자기의 생명을 드려, 보혈의 피로 말미암는 번제를 드린 것입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구약식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번제를 드릴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만 이 번제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제사는 영원한 제사가 되어서 다시 드릴 필요가 없도록 완벽한 제사를 드리셨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히 10:12) 라고 했습니다. 제사 중에 번제가 없다면 다른 모든 제사가 무의미 합니다. 먼저 번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는 번제를 드릴 수가 없는 것이고 번제에 해당하는 해결 방법이 바로 내가 드려야할 번제를 다시 드릴 필요가 없도록 단번에 드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소제
그러나 우리가 아직까지 드려야할 제사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소제입니다. 소제는 성도가 하나님께 약속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헌신의 표인 것입니다. 구약과 같은 방법으로 드릴 필요는 없지만 구약에서 이 소제를 드릴 때 어떻게 드렸는지를 알면 오늘 우리가 좀더 하나님이 원하시는 소제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번제가 드려짐으로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사람들이 지금도 여전히 드려야할 제사의 개념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소제인 것입니다.
소제의 히브리말 뜻은 선물입니다. 선물은 드린 자도 기쁘고 받는 자도 기쁜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기쁨과 평강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헌신하는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혹시 선물을 주고 후회해 본 적이 있습니까? 공연히 내가 주었구나 하는 것은 선물이 아닙니다. 선물은 언제 준 것이라도 기억할수록 기쁜 것입니다. 받은 선물도 괜히 받았다 하는 선물은 의미가 없습니다. 소제는 드리는 사람도 기쁘고 그 선물을 받으시는 여호와 하나님도 기뻐하는 제사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나는 이런 제사를 “15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히 13:15-16) 고 했습니다.

소제의 재료
첫째, 필요한 것은 세 가지 입니다. 레 2:1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 고운 가루, 기름, 유향이 필요합니다.
고운 가루는 제일 좋은 것을 의미합니다. 충실한 열매를 골라야 됩니다. 쭉정이나 상한 곡식이 아니고 충실한 열매를 골라서 이 열매를 볶아야 됩니다. 그리고는 이 열매를 빻아야 됩니다. 그리고 채로 쳐서 부드러운 가루를 만들어야 합니다. 곡식 그대로는 하나님께 바칠 수 없습니다. 충실한 곡식이 볶아지는 과정 그리고 빻아져서 고운 가루로 변하는 그 가루의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그 곡식 자체가 완전히 죽으려면 볶아져야 됩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입니다. 곡식이 볶아지는 과정입니다. 곡식의 모양이 그대로 있어서는 가루가 나오지 않습니다. 곡식이 빻아져야 됩니다. 우리의 육을 죽이고 주님 앞에 죄를 회개하는 육이 깨어지는 과정이 있어야 영적으로 가루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욕심의 덩어리가 빻아져야 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나쁜 습관의 덩어리들이 깨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온갖 죄악의 덩어리들이 깨어져서 가루가 되어야만 소제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처음 익은 것으로 여호와께 드릴 지니라.”(레 2:11) 고 했습니다.
가전제품 중 요즘 유행하는 모델은 아마도 고화질 TV(High Definition, HD TV)일 것입니다. 일반 아날로그 TV에 비해서 무엇이 차이가 있냐하면 바로 해상도입니다. 선이 가늘고 많이 선명한 것입니다. 하나님께도 고품격으로 드려지려면 고운 가루가 되어서 고화질이 되어야 합니다.

다음에 기름이 필요합니다. “기름을 붓고” 그랬습니다. 구약에서 기름을 사람에게 부을 때에는 제사장이나 왕이나 선지자에게만 기름을 붓습니다. 기름은 성령을 뜻합니다. 고운 가루만 가지고 안 됩니다. 우리의 희생이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성령과 항상 함께 하셨습니다.
또한 재료 중에서 유향이 반드시 필요한데 이 유향을 만들 때 출 30:35 “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 라고 하셨습니다. 소금을 쳐서 정결해야 해야합니다. 유황은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향으로 기도 생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기도 생활을 하셨습니다. 우리 또한 기도 생활을 쉬면 안 됩니다.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계 5:8)

둘째, 금지된 재료도 세 가지입니다. 첫째 누룩이 들어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둘째 꿀이 들어가서는 안됩니다(레 2:11). 셋째는 처음 익은 곡식으로 드리지만 “향기로운 냄새를 위하여는 단에 올리지 말지며”(레 2:12) 라고 했습니다.
누룩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마 16:6) 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마 16:12)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잘못된 교훈들이 누룩입니다. 순수하지 못한 것입니다. 깨끗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꿀도 안됩니다. 단 꿀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 사람들이 먹는 빵은 누룩을 넣어야 됩니다. 부풀게 해야 됩니다. 그리고 꿀을 넣어 단맛이 나야 빵이 맛이 있습니다. 육을 위해서 먹는 빵은 반드시 누룩과 꿀을 넣어야 됩니다. 과자나 빵이 달지 않으면 맛이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육신을 위해서 먹는 빵에는 반드시 들어가야 되는 누룩과 꿀을 넣지 말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누룩은 거짓교훈을 말합니다.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 입은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나중은 쑥같이 쓰니라”(잠5:3)
“꿀을 많이 먹는 것이 좋지 못하고 자기 멍에를 구하는 것이 헛되니라”(잠25:27)
꿀을 많이 먹는다는 것은 탐욕을 상징합니다. 꿀은 달기 때문에 자꾸 먹게 됩니다. 그래서 탐욕을 부리는 것을 꿀에다가 비유했습니다. 거짓 교훈과 악을 재물에 섞지 말라는 것입니다. 설교도 마찬가지 일 수 있습니다. 세상에 나가 강의하는 것은 온갖 것으로 재미있게 꾸미고 인기를 얻기 위하여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는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하나님은 향기로운 냄새로 받으십니다(레 1:9, 13, 17, 2:2). 그런데 왜 향기로운 냄새를 위하여 단에 올리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꿀처럼 달고, 향기로운 것은 하나님께 언약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으로 지금도 많이 하나님께 드리는지 모릅니다. 이것들은 순수하지 못한 불순한 것들입니다. 마치 선교하면서 내가 했다고 하는 일 중심, 업적 중심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소금이 무엇입니까?
본문 레2:13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고 했습니다. 소금 없이는 소제 자체가 불가능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토록 소금을 강조하셨겠습니까?
김장철에 입이 무성한 파란 배추를 가져다가 소금을 팍 쳐서 절궈 놓아보세요? 몇 시간이 지나면 그렇게 강했던 배춧잎이 기가 팍 죽어있습니다. 우리의 자랑들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이 있다면 소금을 쳐서 기를 퍅 죽여야합니다. 하나님께는 교만함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첫째, 소금은 맛을 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 눅 14:34)
“싱거운 것이 소금 없이 먹히겠느냐 닭의 알 흰자위가 맛이 있겠느냐”(욥 6:6)
생선을 먹기 힘들게 하는 것은 특유의 비린내인데 소금은 이 비린내를 줄여줍니다. 소금을 뿌리면 비린내를 내는 주성분인 ‘트리메탈아민’ 이 생선살 밖으로 빠져나온답니다. 이렇게 소금을 뿌려 비린내를 제거한 음식을 ‘자반’ 이라고 부릅니다. 해산물 중에는 끈끈한 점액을 내는 것들이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문어나 전복은 끈끈한 타액을 내어 먹는데 불쾌감을 줍니다. 점액이 묻은 부위에 소금을 뿌리고 긁어내면 쉽게 없어진답니다.
사람에게 맛을 느끼게 하는 성분은 나트륨이온(Na+) 입니다. 이 나트륨이온의 농도가 적당하면 입맛을 다시지만 과하면 불쾌감으로 바뀝니다. 소금은 골고루 쳐야합니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골 4:6) 지난번 결안 부침을 먹는데 소금을 잘못 쳐서 한쪽은 짜고 한쪽은 싱거운 것입니다. 소금은 골고루 쳐야 합니다. 소금으로 맛을 내되 잊지 마셔야 할 것은 골고루 하라는 것입니다.
소금(염분)이 없으면 지구의 많은 생물은 목숨을 이어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소금을 너무 많이 섭취하면 사람의 경우 고혈압, 신장병, 심장병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염분 과잉 섭취를 두려워하여 소금을 너무 섭취하지 않아서 병원에 실려 가거나 사망하는 사람도 나오고 있답니다.

둘째, 정결케 합니다.
출 30:35에 향을 만들 때도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예전에 마땅한 약이 없을 때는 소금이 제일이었습니다. 소금으로 소독을 하는 것입니다.
에스겔에 보면 이방민족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의 난 것을 말하건대 네가 날 때에 네 배꼽줄을 자르지 아니하였고 너를 물로 씻어 정결케 하지 아니하였고 네게 소금을 뿌리지 아니하였고 너를 강보에 싸지도 아니하였나니”(겔 16:4) 라고 했습니다. 소금은 깨끗하게 하는데 필수적입니다. 1리터의 소금(큰 숟가락으로 하나정도)을 물에 넣고 20분 정도 삶으면 때가 깨끗하게 빠집니다. 기름으로 더러워진 때도 말끔히 빠지면서 섬유는 상하지 않습니다. 프라이팬이의 생선기름도 프라이팬을 달구고 소금을 조금 넣어 닦아내면 깨끗해집니다.
우리나라에 이런 풍습이 있었습니다. 아주 꼴 보기 싫은 사람이 집에 왔다 가면 “소금 뿌려라.” 그럽니다. 죄 많은 사람이 왔다갔기 때문에 그 죄를 씻어야 한다는 표시입니다.
“아비멜렉이 그날 종일토록 그 성을 쳐서 필경은 취하고 거기 있는 백성을 죽이며 그 성을 헐고 소금을 뿌리니라”(삿 9:45) 고 했습니다.
어느 학교에서 학부모에게 이런 설문 조사를 했습니다. “지금 당신의 아이가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까?” 대답은 교수, 의사, 법조인 등 여러 가지가 많이 나왔는데 한 어머니가 답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내 아이가 미안합니다. 제 잘못이라는 말을 정직하게 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 변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영한 응식으로 너와 네 자손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변하지 않는 소금 언약이니라”(민 18:19)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 것이 아니냐”(대하 13:5)
어느 날 콜럼버스는 포르투갈 해변을 거닐다가 유럽에서는 볼 수 없는 열매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이 열매를 보며 틀림없이 바다 건너편에는 새로운 세계가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바다 끝까지 가 보기로 작정하고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긴 항해는 그 열매의 원산지인 아메리카 신대륙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는 한 작은 열매 속에서 거대한 세계를 보았습니다. 이런 일이 1492년에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나와 소금으로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인도할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소금을 치라고 했습니까? 소금은 맛의 왕입니다. 모든 맛을 지배하는 맛이 소금이라고 합니다. 소금의 맛을 이길 다른 맛이 없답니다. 단맛도 신맛도 소금을 이기지 못한답니다. 그러므로 소금은 모양을 부풀게 하고 맛을 변질시키는 게 아니라 기본적인 맛을 더 맛나게 하는 근본 맛이 소금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소금도 없이 간 내먹다.’ 는 말이 있습니다. 무언가를 마련하지도 않고, 또 밑천도 없이 큰 이득을 차지하려 하거나, 몹시 인색함을 뜻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소금도 없이 나아가려고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 이 소금이 있어야 합니다. 소금은 자신이 녹아 없어질 때 비로소 골고루 퍼지게되고 맛이 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완전히 녹아지고, 부서지고 빻아져서 고운 가루가 되어 하나님께 소제로 드려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유와 스팸(SPAM)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33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 8:32-36)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가혹한 차별 대우를 받은 사람이 조선시대의 백정입니다. 백정은 기와집에서 살지 못하게 하였고 비단 옷도 입지 못하게 하였으며, 공부도 못하게 하였고 항상 허리를 구부리고 다니게 했습니다.
이런 일을 안타깝게 여긴 사무엘 무어 선교사는 양반과 상놈의 구분 없는 세상을 위해 기도하면서 고종의 주치의인 의사 에비슨과 함께 백정들에게 전도했습니다. 첫 번째 예수를 믿은 사람이 박성춘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종의 신분에서 자유인이 되었고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왕에게 탄원하여 마침내 1895년 6월 6일 백정 신분을 철폐하게 하였습니다. 그의 아들 박서양은 1908년 6월 세브란스 의과대학 제1회 졸업생 일곱 명 중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32). 사람을 자유케 하는 일을 실천하는 자가 주님의 제자입니다. 주님의 제자는 주님의 하신 일을 이어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반대로 내 명예와 학식, 물질 등으로 다른 사람을 자꾸만 노예로 삼으려고 하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야 합니다.

자유는 대단히 귀한 것입니다. 참다운 자유는 아무리 높이 평가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한마디로 말해 투쟁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그 투쟁은 대부분 자유를 위한 투쟁이라 볼 수 있습니다. 영국의 청교도혁명이나 명예혁명, 불란서의 대혁명, 미국의 독립전쟁이나 노예해방을 위한 남북전쟁 우리나라의 3.1. 만세운동 등이 모두 자유를 위한 투쟁의 역사입니다.
어느 역사학자는 『세계사의 의의와 가치는 자유와 해방을 위한 투쟁에 있다』고 했습니다. 페트릭 헨리는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쳤습니다. 스탈린의 딸도 철의 장막인 소련 공산체제에서 망명해 나왔습니다.

종이 왜 됩니까?
정신 못 차리고, 가난하니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가난은 왜 옵니까? 하나님이 택한 백성에게 오는 가난은 하나님에 의해서 오는 것입니다. 축복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고 처음 하신 말씀이 복입니다.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고 했습니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온 후에도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9:1)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도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 12:2)고 하셨습니다.
모세에게도 신 4:40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받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한 없이 오래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복을 주시기 원하시며 복을 주시기 위해서 창조하시고 복을 주시기 위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부르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복을 주시려고 불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더 발전된 상태로 말씀해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자유입니다. 32절에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본문에서 유대인들이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유대인들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것을 불러주신 것은 구약성경에도 명백히 기록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바벨론 70년 종살이했다는 것 역시 지울 수 없는 사실입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지 예수님께 자기들이 종살이 한 적이 없다고 한 것은 거짓일 뿐만 아니라 교만입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민족은 로마의 속국으로 있습니다. 종살이하는 것입니다.

자유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육체적 자유와 또 하나는 영혼의(정신적) 자유입니다. 에덴 동산의 선악과를 하나님은 만드시고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그것을 먹을 수도 있고, 먹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자유입니다. 그런데 사단의 꾀임과 인간의 교만으로 그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하여 죄가 인간에게 들어왔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신학적인 용어로 ‘원죄’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원죄’와 내가 지은 ‘자범죄’가 있습니다.
본문 34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때린 사람은 오그리고 자도 맞은 사람은 다리 뻗고 잔다.”고 했습니다. 육체적 자유보다 더 중요한 것이 정신적 자유입니다. 그런데 이 정신적 자유가 죄인에게는 없다는 것입니다.
2호선 전철을 타고 당산역을 지나 한강을 건너가면 바로 오른쪽으로 보이는 곳이 절두산입니다. 대원군이 쇄국정책을 쓰면서 여기서 천주교인들을 무참히 학살했는데 정확한 수는 알 수 없고 약 1만 여명을 죽였다고 합니다. 선참후계(先斬後啓), 즉 “먼저 자르고 본다.”는 식으로 무명의 순교자들이 아무런 재판의 형식이나 절차도 없이 광기 어린 칼 아래 머리를 떨구었고 그래서 30여 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때 목을 베던 자가 칼로 한 사람씩 목을 베면 그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자기가 다른 사람에게 칼을 주면서 내 목도 치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예수님에게는 자유가 있습니다(고후 3:17). 그러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사람들은 자유를 잃은 것입니다.
러시아의 문호 토스트예프스키의 대표작 『죄와 벌』에 보면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사회의 암적 요소인 고리대금업자 노파만 없어지면 그 사회의 여러 사람들이 경제적인 압박에서부터 자유 하리라고 생각하고 쥐도 새도 모르게 그 노파를 살해합니다. 그러나 라스콜리니코프는 정당한 일을 했다고 생각하고, 정의와 자유가 실현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그 자신이 노파를 살해한 것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견딜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리다 결국에는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형벌을 받게 될 때에 그는 비로소 자유를 느끼게 됩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자유
갈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종의 멍에가 무엇입니까? 본문의 말씀처럼 바로 죄를 범하는 자입니다. 죄를 범하면 종이 됩니다. 누구에게 종이 됩니까? 죄에게 종이 됩니다. 사단에게 종이 되는 것입니다.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천하만국을 다 보여주면서 그것을 주겠다고 제안합니다. 원래 하나님의 것인데 사단이 뭘 주겠다는 겁니까? 그것은 유혹이었습니다. 목이 마르다고 해서 사단에게 빵을 받아먹으면 사단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 32절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것은 선언입니다. 불변의 진리인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인간의 원죄와 나의 자범죄를 모두 해결하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유케 하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
신 15:18 “그가 육년 동안에 품군의 삯의 배나 받을 만큼 너를 섬겼은즉 너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하기를 어렵게 여기지 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종이 안식년이 되어서 나가겠다고 하면 자유롭게 해 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에게는 하나님이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남을 속박하려고 합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 일 수 있습니다. 공산당은 사람을 속박하였습니다. 자유를 빼앗았습니다. 그 결과 망했습니다. 사람을 자유롭게 해 주세요. 스스로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스팸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창의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산업시대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도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손으로 만든 것은 싸고, 기계에서 나온 것은 다 비싸다.” 는 것입니다. 그만큼 사람이 많아서 인권비가 싸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사실 사람이 하는 일은 아무리 정교해도 100% 똑같기는 어렵습니다. 조금씩은 다릅니다. 그러나 기계가 찍어낸 것은 다 똑같습니다. 창의적이지 못합니다. 이런 대표적인 것이 음식 문화에까지 파고들어 1920년대부터 미국인들의 식탁에 올라오게 된 호멜(Homel Foods)사의 돼지고기 햄 통조림 상표인 스팸인 것입니다. 요즘 우리 김치를 지나치게 획일화(표준화) 시키려고 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김치에 표준이 어디 있습니까? 만드는 사람마다 집집마다 맛이 다른 것이지요. 획일적인 것은 다양성을 헤치기 때문에 창의성을 훼손시키는 것입니다. 스팸이 한국에는 미군부대를 통해서 의정부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은 여기에다 김치를 넣어서 끓여 먹었습니다. 이것이 ‘부대찌개’의 원조가 된 것입니다. 한국에 오면 스팸도 변화됩니다.

둘째는 강제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스팸이 지금처럼 보통 명사가 된 것은 영국에서였습니다. 광고로 이루어진 드라마에서 손님이 좋아하든 아니하든지 간에 끊임없이 강제로 제공되는 것입니다. 광고 제작자는 마치 정보의 홍수시대를 예견이나 한 것처럼 마구 밀어 부쳤습니다. 결국 “무차별적으로, 쓰레기 같은” 이미지가 붙여지게 되었습니다. 인터넷에 이러한 스팸메일이 전체의 80%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요즘 선교로 사용하는 영어단어 Mission에 대해서 굳이 고집할 필요가 있느냐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성경에도 없는 용어일 뿐 아니라 너무 남에게 밀어붙이는 성향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특히 선교를 제한하는 나라들에 갈 때는 굳이 Mission을 사용하지 말자는 의견입니다. 대신에 ‘서비스’를 강조하자는 것입니다. 섬기는 사람 또는 도와주는 사람으로 하자는 이야기입니다. 강제로 밀어 붙여서 되는 일이 아니라 섬기며 봉사할 때 자연스럽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입니다. 고전 8:9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자유함의 절제
벧전 2:16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우리가 자유하게 되어서 약한 자를 핍박하고 내 악을 가리기 위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속된 말로 남을 등쳐먹는 인간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출 22:22),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신 10:18) 라고 말합니다.
고전 9:19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자유는 스스로 다스려질 수 있을 때 빛을 발하게 됩니다. 자유가 내게 주어진 것은 나 혼자 잘먹고 잘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갈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그의 저서 『기독교인의 자유』에서 『기독교인은 모든 것 위에 서 있는 자유로운 군주로서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기독교인은 동시에 모든 사람에게 봉사하고 종으로서 누구에게도 예속한다』고 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자유자인 동시에 종인 것입니다.

본문 35절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고 했습니다. 진정한 자유란 종이 아닌 아들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종은 자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다릅니다. 아들은 영원합니다. 아들만이 자유를 줄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주인이 종을 풀어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자유자 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자유를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시 사용하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칠전팔기 신앙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6 대저 의인은 일곱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17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18 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 아니하사 그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까 두려우니라 19 너는 행악자의 득의함을 인하여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 20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 21 내 아들아 여호와와 왕을 경외하고 반역자로 더불어 사귀지 말라 22 대저 그들의 재앙은 속히 임하리니 이 두 자의 멸망을 누가 알랴”(잠언 24:16-22)

대한민국 최초로 우주에 간(2008.4.8) 이소연씨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주인’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미국 NASA의 인터넷 홈페이지는 물론 국제우주정거장 관련 일일소식을 다루는 NASA의 ISS 데일리 리포트에서는 이소연씨를 ‘우주비행 참가자(SFP-spaceflight participant)’로 명기돼 있습니다. “South Korean ‘Spaceflight Participant’ So-yeon Yi,will launch April 8 on a Soyuz spacecraft from Kazakhstan”. 공식적으로는 우주 관광 패키지에 300억 내고 탑승한 대한민국 손님정도로 보는 것입니다. 이유는 ‘우주인’이라는 용어를, 러시아와 미국에서는 자신이 로켓을 조정하고 직접 가지고 간 우주비행 조종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나라, 다른 사람의 해 놓은 것의 단순한 탑승자가 되기보다는 주인이 되고자 해야합니다. 그래서 내 십자가가 있는 것입니다.

인류역사상 가장 탁월한 과학자를 뽑으라면 에디슨, 아인슈타인, 뉴튼, 갈릴레이, 퀴리 부인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다섯 사람이 한국에 이민을 와서 살았는데 세월이 지나 모두 백수건달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에디슨은 취직을 못했다고 합니다. 가는 곳마다 이력서 심사에서 떨어집니다. 초등학교 졸업밖에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면접만 보면 떨어집니다. 발명품도 많지만 특허 심사할 때 학력 때문에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백수가 되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수학은 잘 하는데 수능시험점수가 안나옵니다. 한 가지만 잘해서 안됩니다. 그래서 대학을 못 가서 백수가 되었습니다. 뉴튼은 아주 조직적인 두뇌를 가진 과학자인데 이 사람이 쓴 논문을 써 줄 대학교수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도 백수가 되었습니다. 갈릴레이는 아주 말을 날카롭게 잘하는 사람입니다. 하도 바른 말을 잘 하니까 아무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도 백수가 되었습니다. 퀴리 부인도 대단한 두뇌를 가진 여성과학자인데 아무리 취직을 하려고 해도 얼굴이 받쳐주지 못해서 안 된답니다. 성형수술을 해도 원판이 안되니까 다듬어봐도 안 되더랍니다. 그래서 이 다섯 사람이 모두 한국 땅에서는 백수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유머는 현재 대한민국을 빗대어 하는 말입니다.

의인은 다시 일어납니다.

칠전팔기란 말은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칠전팔기란 한자 고사성어가 성경의 잠언에 있습니다.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그냥 격언으로 들으면 단순한 말입니다. 의인은 일곱 번 넘어져도 일어난다는 좋은 말입니다. 여기 ‘의인’은 ‘하나님의 백성’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믿음으로 살지라도 넘어집니다. 넘어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일어나는 것이 문제입니다. 누구나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어나야 합니다. 일곱이라는 수는 성경에서 완전한 수를 말합니다. 그래서 일곱 번 넘어지는 것은 완전한 멸망을 말합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 완전히 멸망한 줄 알았지만 의인은 다시 일어납니다.
잠언 3장에서 “모든 만물이 때가 있고 기한이 있는데 넘어질 때가 있고 일어날 때가 있고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고 말을 합니다. 의인이냐, 악인이냐가 아니라 다 넘어진다고 했습니다. 공산당은 “결과가 방법을 정당화한다.”라고 주장합니다. 동기와 과정과 본질을 묻지 않습니다. 결과를 가지고 방법을 정당화해 버립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넘어지든 일어나든 넘어졌으니까 문제가 되고 일어났으니까 문제가 안 된다 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왜 일어나는가를 따지십니다. 다시 일어날 때에는 예전처럼 살지 않고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단순히 일어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일어난다는 것은 좀더 좋은 사람으로 변화되어 간다는 뜻입니다.

덕을 세워야 합니다.

여러분! 덕이 안 되는 사람이 일어났다고 생각합시다. 그러면 그 사람이 일어나도 별것 없습니다. 우리는 넘어지든 일어나든 덕이 있어야 됩니다. 도덕성이 따라야 됩니다. 넘어져도 덕이 없고 일어나도 덕이 없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새로 자신을 가다듬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넘어졌다는 것을 문제시하거나, 일어났다는 것을 문제시하는 분이 아닙니다. 넘어지든 일어나든 하나님이 보시는 기준은 덕입니다. 근본적으로 덕을 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교회론을 이야기하면서 결론이 “모든 일을 행하되 덕을 세우기를 힘쓰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과가 좋다고 해서 과정의 덕을 무시해 버리면 안됩니다. 부덕했던 그것을 정리해야 합니다.
우리 집사람이 예전에 간호사 생활을 했는데 그 때 소아과에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모시고 있었던 의사 선생님이 있었는데 이번 국회의원 선거에 나와서 당선되었습니다. 그런데 저 사람은 떨어져야 하는데 그러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왜? 그랬더니 돈만 벌기 위해서 어린 아이들에게 많이 처방하면 좋지 않은 약을 마구 처방하면서 돈만 아는 의사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회개했겠지 그랬습니다.
여러분, 죄수들을 교도소에 가둔다고 다 좋은 사람이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문제는 자신의 잘못을 알고 회개하고 자신이 고쳐야 한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가지 자세

본문에 아주 재미있는 표현이 나옵니다. 17절에 “네 원수가 넘어질 때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일반적인 감정은 원수가 넘어지면 얼마나 통쾌합니까? 네게 감정이 안 좋은 사람이 넘어지면 얼마나 기분이 좋습니까? 그러나 오늘 말씀은 굉장히 교훈적인 메시지가 있습니다. 원수가 넘어질 때 기뻐하지 말아야 될 이유가 있습니다. 원수가 넘어질 때 기뻐하는 기쁨은 내 마음을 점점 굳어지게 만듭니다. 우리는 순수한 즐거움을 가져야 합니다. 성경은 원수가 넘어지거든 불쌍히 여기고 기도해주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신 7:7) 하나님의 기쁨과 선택의 기준이 많은 곳에 있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가장 적은 민족이기 때문에 선택하셨습니다. 이 민족을 통하여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증거 하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 기뻐할 것은 원수의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전파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또 19절을 보면 정 반대입니다. “너는 행악자의 득의함을 인하여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예수야 믿든 말든 성공한 사람을 보면 얼마나 부러운지요? 솔직하게 로또 복권에 당첨된 사람을 부러워 안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주식투자해서 돈 번 사람, 우리 집 값은 그대로 있는데, 나는 집도 없는데 다른 사람 집은 왜 그렇게 올라가는지요. 그렇다고 이 분들이 다 악인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악인인데 잘 나가는 것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신앙을 떠나서 남이 잘 되는 게 얼마나 부럽습니까? 그런데 왜 하나님이 이렇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까? 그 안에 메시지가 있습니다.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 하게되다 보면 나도 그렇게 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깁니다. 그리고 때가 되고 기회가 되면 나도 모르게 그것을 따라하게 됩니다. 우리는 악인에게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께 배워야 합니다.

실패는 극복되어야 합니다.

미국의 전설적인 홈런타자 베이브 루스는 그의 선수생활 가운데 홈런을 714개를 쳤습니다. 그런데 그가 스트라익 아웃을 1,330회나 당했습니다. 714개의 홈런을 때리기 위해서 1,330번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스트라익 아웃만 당한 것입니다. 그 외의 것은 수도 없이 많을 것입니다. 스트라익 아웃을 당하면 선수가 비참해집니다. 스트라익 아웃을 당하고 걸어 들어가는 선수는 얼마나 처량한지 모릅니다. 그 처량한 수치스러운 모습을 1,330번 겪으면서 714개의 홈런을 쳐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살이가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긴장하고 몸부림치지 마십시오. 의인도 일곱 번 넘어진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넘어져도 일어나면 됩니다. 십자가를 졌다고 절망이 아닙니다. 부활의 아침이 우리 앞에 있으면 십자가의 절망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우리 주변에 넘어진 사람이 많습니다. 저도 내 자신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벌써 안수 받은 지 20년이 다 되어갑니다. 제가 예전에 비해 선교지 방문하는 횟수가 줄었습니다. 예전에는 선교지 방문하면 아무 거리낌이 없이 다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눈치가 보입니다. 음식점에 가도 좀더 젊었을 때는 얻어먹어도 부담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제가 내야합니다. 예전에는 말에 실수가 있어도 젊다는 것으로 그냥 넘어가는 수도 많았습니다. 이제는 일반적인 것이나 선교에 관해서 더군다나 성경에 관해서는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실수라는 말이 잘 용납이 안 되는 위치가 되는 것입니다. 저도 한 때 너무나 어려워서 전도사 그만하고 세상에 나가 돈이나 벌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제 친구들도 돈벌어서 신학공부하고 교회 하겠다고 한 친구들이 많습니다. 그들 중에 그들의 말대로 돌아온 친구는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 다 고비가 있습니다. 그 고비를 잘 넘겨야 합니다. 이것이 싫어서 저쪽으로만 가면 될 것 같지만 이런 도피성은 역시 그곳에 가서도 얼마 못 견뎌냅니다. 여러분 삼진 아웃 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그리고 정면 승부를 하세요. 자꾸만 뒷걸음치면 끝이 없습니다. 우리는 넘어져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방법입니다. 주님은 자기 백성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 철부지 제자들을 주님은 참아주셨습니다.

성공과 실패에는 분명한 분기점이 있습니다. 긍정적인 마음과 가능성을 찾아내는 눈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성공과 실패는 갈라집니다. 특히 가능성을 찾아내는 눈은 성공하는 데에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가능성을 찾아야 합니다. 가능성은 꿈을 갖는 것입니다. 꿈은 마음으로 강력하게 원해야만 현실이 됩니다. 즉, 자신감을 갖고 앞으로 이루어질 일을 기대하며 끈기 있게 실천해나갈 때 가능성은 현실이 됩니다. 우리는 유행이나 상황에 따라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의 부속품처럼 살아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엔진이 되어서 주체적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그래야 살맛 나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제일 비참한 가운데 빠졌던 바벨론 포로 생활 가운데서 한 선지자를 부르십니다. 그의 이름은 에스겔입니다. 그가 바벨론의 그발 강가를 거닐고 있는데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인자야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겔 2:1) 원문을 직역하면 “사람의 아들아 일어나라. 내가 너에게 할 말이 있다.”입니다. 일어서야 합니다. 비록 바벨론의 포로 생활이지만 자포자기하고 살 때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예루살렘 성을 생각해야 합니다. 일어서야 합니다. 2절 “말씀하실 때에 그 신이 내게 임하사 나를 일으켜 세우시기를…” 라고 합니다.
예수가 짊어진 십자가는 7번 넘어진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조롱하면서 일어나지 못할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칠전팔기입니다. 이 부활의 신앙으로 칠전팔기의 인생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십자가와 속죄제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히 9:11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레 5:8 제사장에게로 가져 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속죄제물을 먼저 드리되 그 머리를 목에서 비틀어 끊고 몸은 아주 쪼개지 말며 9 그 속죄제물의 피를 단 곁에 뿌리고 그 남은 피는 단 밑에 흘릴지니 이는 속죄제요 10 그 다음 것은 규례대로 번제를 드릴지니 제사장이 그의 범과를 위하여 속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

몇 일전 서은이하고 동화책을 보았습니다. 동화책에 푸른 언덕 위에 교회처럼 생긴 아름다운 집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교회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교회다”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서은이가 “교회 아니야!” 그러는 겁니다. “왜?” 그랬더니 “십자가가 없잖아!” 하는 것입니다. 서은이의 말은 정답입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교회가 아닙니다. 요즘 십자가 없는데 교회라고 하는 곳이 있습니다. 여러분! 십자가가 없으면 교회가 아닙니다. 5살 어린이 서은이보다 모른단 말입니까?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인간하고 직접 만나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옵니다. 그러나 그 중에 한 사람을 뽑으라면 당연히 모세입니다. 모세만큼 하나님하고 가까이에서 많은 만남과 대화를 나눈 사람은 없습니다. 출 24:18 “모세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산 위에 올랐으며 사십일 사십야를 산에 있으니라” 그리고 모세는 십계명 돌 판을 가지고 내려왔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다는 증거입니다. 아마 우리가 직접 보지 않아서 모르지 당시 사람들은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40일을 있었으니까 석공처럼 십계명을 파왔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마치 도마 같은 의심 많은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직접 새기신 것은 누가 보아도 사람이 쪼아서 새긴 것하고는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증거판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성전을 짓기 이전에 제일먼저 만든 것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이것을 둘 증거궤를 만드는 일이었습니다(출 25:10-16). 그리고 이 증거궤를 둘 공간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곳을 속죄소라고 합니다(출 25:17-22). 성전의 핵심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성전은 우리에게 왜 필요한 것이냐 하면 속죄소를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의 장막 가운데 거하시려고 했던 이유는 바로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한 곳을 만드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여기까지가 출애굽기입니다. 성경 다음 권은 레위기 입니다. 레위기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방법에 대해서 다룬 책입니다. 성전을 만드셨으니 이제 어떻게 하라고 그 방법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속죄제는 먼저 드려져야 합니다.

레위기의 핵심은 무엇이겠습니까? 성전의 목적이 속죄소를 만드는 것이었다면 제사도 마찬가지가 되어야합니다. 제사 역시 속죄제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본문 레 5:8 “…제사장은 그 속죄제물을 먼저 드리되…”라고 합니다. 여러 가지 제사가 있지만 사람이 자기 죄를 속하려고 제사장에게 와서 속죄제를 부탁하면 다른 모든 제사를 미루고 속죄제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속죄제는 제일 먼저 드려져야할 제사임과 동시에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시는 제사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마 23:26)

혹시 제 설교를 너무 잘 들으셔서 기억하실 분이 있을 것입니다. 구약 제사에 관해 대략 몇 번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제사의 종류와 순서를 말씀드렸습니다. 기억하시나요? 처음 제사가 무엇이라고요? 속건제 -> 속죄제 -> 화목제 -> 소제 -> 번제입니다. 그런데 속건제와 속죄제에 대해서 이해를 잘 하셔야 합니다. 레 5:6 “그 범과를 인하여 여호와께 속건제를 드리되 양떼의 암컷 어린 양이나 염소를 끌어다가 속죄제를 드릴 것이요 제사장은 그의 허물을 위하여 속죄할지니라” 속건제를 드리되 속죄제를 드릴 것이요 그랬습니다. 다른 사람과 문제로 속건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나 자신의 일로 이 또한 속죄제가 되는 것입니다. 어렵습니까? 다른 사람의 문제로 죄 사함을 위하여 제사를 드리는 것은 곧 내게는 속죄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건제는 속죄의 방법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께서 마태복음 5장 23절로 24절에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구약식으로 보면 속건제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조용기 목사님 간증입니다.] 서대문에서 목회 할 때 대게 성도들이 극빈자이고 교회 재정이 매우 어려운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신학교 학생 한 사람이 도움을 청하여서 우리 교회에서 밤에 교회를 지키고 교회를 돌보면 등록금을 우리가 대어 주고 그의 생활을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런데 주일 예배를 필하고 난 다음에 월요일 날 오니까 이 사람이 달아나고 없는데 보니까 교회 그 날 주일날 헌금 거두어서 넣어 놓은 금고를 깨어 가지고서 돈을 다 훔쳐서 도망쳐 버렸습니다. 저는 아주 그냥 절망에 처했습니다. 그때 우리 교회가 얼마나 가난했는지 매주일마다 받는 헌금을 가지고 겨우겨우 교회를 운영해 나갔는데 그만 돈이 송두리째 없어졌으니 그 충격은 말로다 할 수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께 부르짖고 기도한 결과에 하나님이 도와 주셔서 교회는 그대로 그 충격을 이겨냈는데 한 3년이 지난 후에 제가 어느 곳에 가서 부흥회를 하는데 아주 이발도 하지 않고 수염을 기르고 행색이 굉장히 초라한 한 젊은이가 내게 와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목사님! 저를 알지요.” “알고 말고.. 너 고학생으로써 우리 교회에서 도와줬는데 금고를 깨고 돈 훔쳐간 놈 아니냐?” 그러니까 그 놈이 하는 말이 “그것다 옛날 일입니다. 나는 그때 이후로 기도원에 가서 죽도록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다 받았습니다. 목사님도 용서해 주십시오.”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속죄제와 속건제를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범죄 한 것은 속죄제물만 드리면 되지만 하나님과 사람에게 범죄 한 것은 속죄만 해서는 안 됩니다. 속건제물을 드려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보상을 해야 합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이야기했더니 머리 좋으신 분이 그럼 하나님께 잘못한 것 용서받는 것이 더 쉽네요? 그러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가벼운 용서가 아니라 지독한 희생을 치러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값없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잘못한 것 갚기도 힘든데 하나님께 죄를 지은 것은 어떻게 갚습니까? 사실 갚을 길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속죄제물을 먹어야 합니다.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고하여 이르라 속죄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속죄제 희생은 지극히(가장, 제일) 거룩하니 여호와 앞 번제 희생을 잡는 곳에서 그 속죄제 희생을 잡을 것이요”(레 6:25) 번제는 하나님께 완전한 헌신의 의미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바로 이 번제를 드리는 장소에서 속죄제의 희생제물도 함께 바칩니다. 우리의 속죄는 곧 하나님께 나아가는 번제의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백성이 드린 속죄제물 중 불살라 바친 내장부위를 제외한 나머지 고기를 거룩한 곳에서 먹어야 했습니다. 속죄제의 고기는 거룩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고기를 만진 사람도 거룩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레6:27). 우리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마지막 밤을 제자들과 지내면서 만찬을 한 사실을 기억합니다.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마 26:26) 예수의 몸은 속죄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속죄제물은 거룩한 것이고 이것을 만지는 모든 자가 다 거룩해 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속죄제물이 되셨습니다.

속건을 위한 속죄제는 누구나 드려야합니다.

속죄는 지극히 개인적이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나 드려야 하는 제사입니다. 아무도 이 속죄제를 드리지 않고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제사를 지내려면 반드시 제물이 필요합니다. 제사를 지내는데 제물 없이 갈 수 없습니다. 이것이 부담이 되어 가난한 자는 제물이 없어서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속죄제 만큼은 각자의 수준에 맞추어 드릴 수 있도록 만드셨습니다.
첫째, “…양떼의 암컷 어린양이나 염소를 끌어다가 속죄제를 드릴 것이요”(레 5:6)
둘째, “만일 힘이 어린양에 미치지 못하거든 그 범과를 속하기 위하여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둘기 새끼 둘을 여호와께로 가져 가되”(레 5:7)
셋째, “만일 힘이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둘기 둘에도 미치지 못하거든 그 범과를 인하여 고운 가루 에바 십분 일을 예물로 가져다가”(레 5:11) 드릴 수 있도록 했습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속죄제를 못 드린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에바 십분 일은 약 2.2리터입니다. 한끼 먹을 수 있는 양식만 있다면 그것을 하나님께 드려 속죄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이 규례는 가난한 자를 위한 규정이지 충분히 양이나 염소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이 비둘기나 고운 가루를 드리라고 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눅 21:2-4 “2 또 어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3 가라사대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고 칭찬하셨습니다. 이것은 감사하기 위한 것이지 속죄하기 위한 제물은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을 주셨습니다. 고운 가루 에바 십분의 일도 필요 없습니다. 본문 히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구약시대 제물을 바칠 때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리하면 열납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레 1:4)고 했습니다. 제물의 머리 위에 안수하는 것은 나를 대신하여 이 양이, 염소가 또는 비둘기가 아니면 고운 가루가 내 대신 드려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내 대신 죽는 동물에게 얼마나 미안하겠습니까?
제가 5-6살 때 아버님이 장터에서 옷 장사를 하셨는데 내가 장에 나가면 옷에서 뒹굴고 장사를 방해하니까 어머님에게 연락해서 항상 나를 데리고 가라고 하셨답니다. 그런데 어떻게 장날을 알고 내가 나가는지 모른다고 부모님이 그러셨습니다. 어떻게 장날을 알았느냐? 그 비밀을 공개합니다. 시골 장날이 되면 소장이 먼저 열립니다. 우리 집 고개 너머의 마을에서 소가 줄을 이어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그 날이 바로 장날입니다. 그런데 소 눈을 보면 눈물이 한 방울 맺혀있습니다. 그리고 ‘엄마~’ 하며 웁니다. 도살장으로 끌려갈 것을 소가 아는 모양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속죄를 위하여 희생제물이 되신 예수그리스도만 믿으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아픔이 있습니다. 쓰라림이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라고 말했습니다.

미국의 선교사였던 보먼 박사가 인도 켈거타의 나환자 수용소 안에 교회를 건축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준공식이 있던 날 82세의 한 인도 노인이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을 하고 앞으로 나왔습니다. 박사가 그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왜? 이 나이에 예수를 믿기로 작정을 했습니까?” 그러자 그 노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지금까지 나는 많은 신들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나를 위해서 죽어준 신은 한 분도 만나보지 못했는데 예수님만이 나를 위해서 죽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분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 속죄제물이 되셔서 우리 모든 죄를 지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자는 그의 십자가 공로를 통하여 값없이 죄 사함을 받고 용서받은 의인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회당장의 딸이 죽었을 때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눅 8:50)고 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만 믿으면 됩니다. 십자가가 없다는 것은 속죄제물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길은 오직 우리의 죄를 속해야 가능합니다. 우리의 죄가 속해지느냐 아니냐는 이제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내 죄를 대속 하신 것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것으로 결정이 나는 것입니다.
롬 8:1-2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속죄제가 마쳐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죄가 속해 졌으니 정죄함이 없고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선교

사도행전 1:6-8

“6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우리말에 ‘동문서답’(東問西答)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동쪽을 묻는데 서쪽을 대답한다는 뜻입니다. “묻는 말에 대하여 아주 딴판인 엉뚱한 대답”을 일컬어 하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들리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엉뚱한 대답을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각은 사람들의 생각과는 다른 것입니다.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예수님이 이제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마지막 순간입니다. 환송식이라고나 할까요? 오늘 본문은 이 땅에서 예수님께 사람들이 질문한 마지막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께서도 이 땅에서 남기신 마지막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말이 마지막 질문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의 승천은 아주 갑자기 이루어진 것입니다.
모인 사람들의 질문은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입니다. 모인 사람들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제자들 역시 유대인입니다. 이들은 아직도 구약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 국가의 회복을 예수께 질문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부활도 하셨고 다시 모여서 계획을 잘 짜서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겠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 이후 예수님께서 승천하신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 있는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때가 지금이냐는 것입니다. 지금 해방이 이루어지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7-8절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해방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으십니다. 이 땅의 이스라엘 나라에 대한 말씀을 해주시지 않습니다. 답답합니다. 이스라엘의 해방에 대한 기한은 하나님께 권한이 있는 것이니 그것에 대해서 “너희의 알바 아니요”라고 짤막하게 대답하셨습니다. 그리고는 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이 사람들과 같을 수 있습니다. 자기 나라의 회복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것은 유대 민족적으로 소원이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 지금 이 땅의 나라들 가운데 같은 민족이 분단되어 있는 민족이 없습니다. 예멘이 있었는데 1990년 통일되었습니다. 이제 이 지구에 유일하게 한 민족이 분단된 나라는 남북한입니다. 하나님 남북한이 언제 통일되겠습니까?”라고 주님께 질문하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라고 하실 것입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이 땅의 자신의 나라였습니다. 그래도 나라를 말하는 사람은 큰 사람이지요. 우리는 지금 예수님을 영접하고 자신의 축복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얼마나 어떻게 축복을 받아야 “이제 되었다”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도의 목사(K.P. Yohannan)가 미국교회를 방문하고 ‘멍에를 메고 잠든 나라’라는 제목으로 쓴말입니다.

나는 미국 교회를 보며 재벌 기업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카펫트와 멋진 의자들과 에어콘과 휘황찬란한 내부장식을 보며 놀랐다. 많은 교회가 그리스도와는 거의 상관이 없거나 아예 관계없는 활동에 쓰는 체육관이나 친교실을 갖고 있었다.
성가대와 오케스트라, 특별 찬양 같은 것들이, 때로는 설교마저도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기보다는 즐기기 위한 것 같았다. 미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바다건너 가난한 사람들이 필요는 고사하고 자기 도시의 빈민의 문제도 외면하고 있었다. 그 모든 풍족함 중에서도 그곳에는 말할 수 없이 가난에 찌든 몇 백만의 빈민이 살고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은 교외로 이사했으며, 빈민들은 시내에 거주하고 있었다. 나는 그곳의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이라고 생각되는 활동에는 즐겨 참여하지만 복음에 대한 책임은 회피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에는 5,000개 가량의 기독교 서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지구상에는 7,010 민족 중 모국어로 된 성경을 갖지 못한 종족이 5,100민족이 됩니다. 또한 오늘날 인쇄되고 있는 성경의 85%가 영어를 읽을 수 있는 9%의 사람들을 위해 영자로 인쇄되고 있습니다. 미국인들은 평균 한 가정에 4권의 성경을 가지고 있는데 반해, 이 지구상의 80%의 사람들은 성경을 한번도 가져보지 못했습니다. 미국은 백만 명이 넘는 전임사역자가 있는 축복 받은 나라입니다. 성도 230명당 1명의 전임사역자가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는 약 7만 명의 전임사역자가 있습니다. 전체 국민 642명당 한 명의 전임 사역자 이며 성도 수로는 176명당 한 명이 전임 사역자입니다. 이것은 미국을 능가하는 수치입니다. 여러분 축복 받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지구상에는 27억의 사람이 단 한 번도 복음을 듣지 못했습니다. 선교지에는 50만 명당 한 사람의 전임사역자가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선교지로 가야하는 이유입니다.

선교는 누가 할 수 있습니까?

본문 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입니다. 성령이 임해야 합니다. 성령과 함께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힘으로 물질로 노력으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교단체에서 훈련받는 것은 세상 적인 조건이 됩니다.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 안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을 받아야 됩니다. 성령 받으면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을 받지 않고 하면 힘듭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지칩니다. 시험이 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 하시면서 하신 말씀을 보면 마 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하셨습니다. 선교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성령 받으면 하나님의 지혜가, 순결이 되는 것입니다. 지혜(frovnimoi:프흐로니몬)라는 말의 어근의 뜻은 고삐를 매다, 자갈을 먹이다 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단어는 마태복음 25장의 슬기로운 처녀 비유에서 나옵니다. 열 처녀 중에 다섯 처녀는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기름을 준비했습니다. 이 처녀들은 깨어 있었던 것입니다.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막 13:37)고 하셨습니다. 깨어있는 사람이, 깨어있는 교회가 선교할 수 있습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엡 6:18),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 4:2)

선교의 부정적 요소

폭발적인 세계인구의 증가입니다.
2000년 전 예수님이 오셨을 때의 전세계 인구를 선교학자들은 1억 6천만 명으로 봅니다. 이 인구의 수가 배로 늘어나는데 1,200년이 걸렸습니다. 또 배로 늘어나는데 550년이 걸렸습니다. 또 배가되는데 140년 걸렸습니다. 또 배가되는데 70년, 또 배가되는데 39년이 걸렸습니다.
60억이 넘는 세계인구의 33%가 기독교인입니다. 그런데 이중에 개신교는 14.74%, 천주교 14.87%, 러시아정교회 3.35%를 합친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천주교 국가였던 필리핀, 브라질도 우리가 선교하러 갑니다. 이들의 신앙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천주교는 일단 그 나라에 들어가면 정착하기 위해서 지나친 현지 상황화(토착화)를 서둘러 그 지역의 문화와 혼합이 되었습니다. 심한 경우는 원주민들이 섬기는 우상이 마리아로 바뀌었을 뿐 예전에 우상을 따르던 습관대로 다 합니다. 기독교의 예수 정신은 없습니다. 성경도 잘 알지 못합니다. 또한 전 세계인구의 이슬람인이 20%가 넘습니다. 이들은 예수가 아니라 마호멧을 따릅니다. 이슬람을 믿는 분들은 자녀를 많이 납니다. 현재 증가율대로 25년이 지나면 이슬람이 세계 최대의 종교가 됩니다.
문제는 단순한 숫자적 증가에만 있지 않습니다. 말하기 싫지만 기독교의 서구인들은 대부분은 껍데기 종교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흔합니다. 명목상 그리스도 인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도 있습니다. 일생에 교회를 세 번 가는데 태어나서 한번 가고, 결혼식 때 가고, 그리고 죽어서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슬람 믿으시는 분들의 신앙심이 우리보다 더 열심인 것 같습니다. 하루에 여섯 번 예정된 시간에 기도하는데 담요 같은 것을 가지고 다니는 분들이 많습니다. 기도할 때 어디를 가나 깔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한번은 홍콩에서 비행기 갈아타기 위해서 기다리는데 이슬람 믿으시는 분인지 공항 귀퉁이로 가시더니 담요 같은 것을 깔고 자신들의 성지 메카가 있는 방향을 향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비행기 안에서도 뒤에 가서 기도하는 분도 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식사 기도한번 하는 것도 눈치보며 할 때가 있습니다. 한국에 와있는 이슬람 분들이 아무 고기나 먹지 않으니까 미리 예식을 치룬 고기를 배달하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심이 이슬람을 믿으시는 분들보다 철저하지 못하다는 것은 우리가 선교하는 정신에서 이미 밀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선교

1945년 전에는 국가들은 민족에 대해서 배타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2차 대전을 겪으면서 각 나라들은 민족주의 의식이 강하게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전쟁 끝에 생각한 것이 민족 중심의 종교였습니다. 전 세계 286개의 나라가운데 90개 나라만 선교사 비자를 주지 않았는데 지금은 120개 나라가 선교사 비자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비자로 들어가 스파이처럼 몰래 활동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나라가 중국, 베트남입니다.
중국은 1945년 모택동이 ‘종교는 아편이다’라는 말을 하고 1951년 공산혁명 이후 모든 선교사를 추방하고 교회 지도자들을 감금하고, 교회를 폐쇄했습니다. 이 때 기독교인이 150만 명 남아있었습니다. 그 이후 1966-67년의 문화혁명이 한번 더 일어나 더 강력한 정책을 펴서 30-40년 후 공식적으로 70-80만 명의 기독교인만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중국의 크기는 남북한 합한 면적의 44배, 남한의 96배 큰 나라입니다. 인구는 10억6천413만5천명(1987년)으로 보나 현재 약 12억으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세계 인구의 21.8%차지합니다.
이런 중국이 개혁 개방정책이후 서방의 압력으로 제한적이지만(삼자교회) 교회를 허락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약 40년이 지난 후에 교회 문을 연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다. 다 없어졌어야 되는 성도들이 교회에 나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현재 공식적으로 1억 명이 넘는 기독교인이 나온 것입니다. 선교사들이 쫓겨날 때보다 100배가 많아진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설명이 안됩니다.
성경공부, 주일예배, 기도회 같은 공식적인 모임을 단 한번도 가지지 못했는데 말입니다. 1950년대 선교사를 다 추방하고 교회를 문 닫을 때 다 죽었는지 알았습니다. 공산당이 막으면 복음이 끝나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셨습니다. 100배나 많게 증가시켜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열면 열립니다. 성령님이 하시면 됩니다. 중동도 북한도 하나님이 여시면 열립니다.

우리는 북한이 열리면 또 한번 놀랄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다 죽고 성도가 없는 줄 알았는데 무수히 나오는 성도를 보며 우리는 놀랄 것입니다. 김일성이 김정일이 기독교를 다 죽인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지금 엄청난 변화가 북한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복음이 전혀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북한이 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북한의 성도들은 예배처가 특별히 없습니다. 강가에 배를 띄어놓고 배에서 예배를 드리기도 합니다. 주일이 되면 나물 캐러 들판으로 나가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들판을 거닐며 조용히 그리고 은밀히 찬양을 부릅니다. 찬양을 부르며 줄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해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수백 곡의 찬송가 가사를 다 암송한 성도님도 있습니다. 어떤 성도님은 김일성 생일날 받은 수첩 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해 사용하기도 합니다. 일종의 위장용입니다. 북한의 성도는 교회 건물은 없어도, 예배의 순서는 없어도 성령님과 함께 생명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어떤 할머님은 중국 쪽에 교회가 세워져 빨간 십자가 불빛이 반짝거린다는 소식을 듣고 며칠을 걸어서 압록강 근처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밤 시간을 이용해 압록강 건너에 있는 교회로 향했습니다. 처음에 교회 목사님은 탈북자인줄 알고 무엇을 얻으러 온 줄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할머님은 목사님 앞에 작은 보따리를 풀어놓았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내가 50년 동안 모은 십일조입네다.”라고 하셨습니다. 할머니는 십일조를 드릴 교회가 없어 50년 동안 모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그 십일조를 교회를 찾아와 드린 것입니다. 그 할머님은 다시 북한으로 가셨습니다. 북한에는 성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성령이 함께 하십니다. 이제 우리도 하나님의 이 역사에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유럽의 교회처럼 큰 교회만 만들어 놓고 예수를 외면하는 그런 교회가 아니라 살아 숨쉬는, 하나님의 선교의 명령을 따르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