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의 믿음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9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 하였으며”(창 6:8-9)

17세기의 일입니다. 런던 대화재가 있은 뒤, 저 유명한 세인트 폴 대성당을 재건하고자 그 설계를 맡았던 크리스토퍼 렌이 하루는 채석장을 찾아 돌을 다듬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토닥토닥 돌을 쪼고 있는 한 사람에게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짜증난다는 듯이 몹시도 퉁명스럽게 대답합니다. “보면 모르오? 돌을 다듬고 있지 않소.” 또 한 사람에게 같은 질문을 합니다. “보면 모릅니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서 벌어먹고 사느라고 이 고생을 합니다.” 다시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봅니다.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소?” “저요?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 있습니다. 저는 사실 죄를 짓고 감옥에 있을 때, 거기서 돌 다듬는 기술을 배웠습니다. 전과자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감옥에서 나와 자유로운 몸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짓기 위하여 돌을 다듬고 있습니다.” 똑같은 일을 하고 있는데도 이렇듯 대답은 천양지차입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서 건조한 방주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규모이었습니다. 노아가 건조한 배의 규격을 지금 세계가 공용하는 미터법으로 환산해 보면 그 규모가 얼마나 컸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배의 길이는 135m로 현재 사용되는 국제 규격의 축구장의 108m 길이보다 약 30m가 더 길었습니다. 배의 넓이는 약 23m 이었고, 배의 높이는 14m나 되었습니다. 이것은 현재 보통 건물 5층 높이 정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배의 무게는 15.000t 정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엄청난 규모의 배는 현대 기술로도 쉽게 만들기가 힘든 정도라고 하니까 노아가 해낸 그 당시 방주 건조 역사는 불가사의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놀라운 일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노아의 믿음은 순수하고 크고 흔들림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노아의 믿음을 배우고 노아처럼 방주를 지으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노아는 은혜를 입은 믿음이 있었습니다.

본문 8절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여호와)hw:hy] (베아인네)ynEy[eB] (헤)@je (마짜)ax;m; (노아)j’nOw])
“ax;m;(마짜)-입었더라”는 ‘발견하다, 도달하다, 얻다. 찾다’ 어근의 뜻이 있습니다.
“@j(헤)e”-은혜”는 ‘호의를 베풀다, 긍휼히 여기다’ 영어의 Grace입니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여기에 처음으로 나옵니다.
“ynEy[eB(베아인네)-~의 두 눈 안에, or ~의 두 샘 안에"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가 대부분의 한글번역성경에서는 빠져있습니다. 그러나 영어성경들은 모두 "은혜아래서 여호와의 눈에 들었다" 고 번역했습니다. 가톨릭의 새성경만 "노아만은 주님의 눈에 들었다." 고 번역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번역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노아만은 여호와의 두 눈에 들어 은혜를 입었다."
하나님의 눈에 노아가 들어왔습니다. 가만히 있는 노아에게 하나님의 눈에 띠였겠습니까? 노아는 하나님의 눈에 띠일 만큼 살았습니다. 욥도 하나님의 눈에 띠였습니다. 하나님은 눈에 띠인 노아를 찾아오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것 이것이 은혜입니다. 처음에는 내가 똑똑해서 교회에 온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셨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2. 노아의 믿음은 환경을 초월한 것이었습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을 외면 한 채 죄악 속에서 인본주의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기에 지금 우리들 주변 환경 역시도 순수한 믿음을 지키며 사는 데는 결코 좋은 환경이 못 된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나쁜 주변 환경만 탓만 하면서 순수한 믿음 지켜 가는 것을 포기하고 환경에 동화되고 휩싸여서 적당히 살아가려고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결코 용납 될 수 없는 부끄럽고 죄악 된 일입니다.
'믿음이 왜 필요하고, 믿음을 지키는 것이 무엇이냐' 고 말한다면 그것은 바로 환경을 극복해 가는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바로 노아는 이런 점에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한테 순수한 믿음을 지켜 가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노아가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도리어 그처럼 나쁜 환경들을 초월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말씀이 본문에 나옵니다. 다시 한번 그 감동적인 내용을 봅니다.

본문 9절입니다. "노아의 사적은 이러 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창 6:9) 본문은 노아에 대해서 세 가지로 말해줍니다.
'의인'에 두 단어가 사용됩니다. "qyDix'(짜다크)-합법적인, 공정한"과 "!ymiT;(타밈)-진실, 흠 없는, 완전한" 이라는 단어입니다. 의인이란 진실한 사람으로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동행은 "!yhila>h;Ata,(에트-엘로힘)"입니다. 엘로힘은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고 여기에 에트를 붙였습니다. 에트는 "가까이, 안에서, 함께"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 하나님이 가까이 하시는 것 그것이 동행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그 당시 땅의 사람들 모두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죄를 많이 짓고 강퍅했으면 그렇게도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더 이상 묵과하시질 못하시고 모두 멸해 버릴 계획을 세우셨겠습니까. 그처럼 노아 시대는 주변 환경이 순수한 믿음을 지키기에 최악의 여건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런 최악의 환경을 극복하고 살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혹시 주변 환경이나 생활환경을 탓하고 있지는 안습니까? 말씀대로 잘 믿으려고 하는데 '환경이 따라주질 않는다.' 라는 식의 생각 말입니다. 믿음은 환경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3. 노아의 믿음은 최선을 다해 헌신하는 것이었습니다.

앞에서 노아가 하나님의 명을 받고서 건조한 방주의 규모가 상상을 초월할 만큼의 엄청난 것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노아가 그 방주를 건조하면서 얼만큼의 헌신을 했을 것이라고 짐작이 됩니까? 제가 생각하기로는 그야말로 조금의 남김도 없이 모든 것을 다 투자한 최선의 헌신이었다고 믿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명대로 그 배를 짓기 위해서 전 시간을 헌신했습니다. 모든 힘을 쏟아 부었습니다. 있는 재산을 남김없이 방주를 짓는데 투자했습니다.
그처럼 최선을 다한 헌신을 통해서 만이 하나님께서 명하신 그 엄청난 배가 지어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헌신이 없이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질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최선을 다한 헌신의 표시입니다. 요19:33-34 "33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34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신 후에도 마지막 몸 속에 남아있던 몇 방울의 피와 물까지도 모두 남기지 않으시고 쏟아 부어 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명을 받들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최선의 헌신을 했던 노아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헌신과 희생을 예표하여 보여준 것입니다.

4. 노아의 믿음은 끝까지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본문의 내용을 근거로 해서 노아 당시의 주변 환경이나 외롭게 믿음을 지키며 긴 세월 동안 배를 지어야 했던 노아 개인의 형편을 고려해 본다면 끝까지 배를 지은 것 하나 만을 가지고도 기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큰 일 이었던 것이 분명 합니다.
정말이지 노아가 아니고 보통 믿음을 가진 사람이 그 일을 했다면 120년이라는 세월은 고사하고 12년도 못 가서 중단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배를 지었다 하드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설계도면 그대로 가 아니라 마음대로 축소하고 줄여서 모양만 비슷하게 짓고서 다 지었다고 우겼을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하지만 노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바보 스러울 만큼 고집스럽게도 보였지만 120년의 세월을 꾹꾹 참으면서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설계도면 그대로의 크기와 모양의 배를 짓는데 성공을 했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 감동적인 사실을 기록한 말씀 다시 한번 봅니다.
창 6:22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 하였더라." "lkoK](콜)-다, 모두, 어느 것”을 뜻하는 것으로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준행 하였더라.” “hc;[; @Ke(켄-옳게, 정당하게 : 아싸-만들다, 행하다)” 고 했습니다. 신앙생활 잘 하려면 하나님이 하라고 한 대로만 하면 됩니다. 이유를 달지 마세요. 미련할 정도로 순진한 것이 좋은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간에 용두사미(龍頭蛇尾)꼴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시편의 한 기자는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서 끝까지 행하는 일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주의 율례를 길이 끝까지 행하려고 내 마음을 기울였나이다.”(시 119:112)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히 3:14) 믿음은 끝까지입니다. 하다말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예전에 한번 터널 공사하는 곳에서 ‘공사 중이니 돌아가시오.’란 표지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차들이 계속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어디 옆으로 나가는 길이 있겠지 하고 계속 가보았습니다. 그러나 길을 끊어지고 계속 갈 수 없었습니다. 제 앞에 갔던 관광버스는 차를 돌리느라 애를 먹었습니다. 결국은 다시 되돌아 와야했습니다. 사람들을 따라간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아십니까? 우리가 믿고 따라갈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환경을 초월하고, 최선을 다해서 헌신하고, 끝까지 하나님의 명대로 순종했던 믿음을 가진 노아에게 주어진 것이 무엇이었겠습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 하였으며” 라고 합니다. 사람이 완전해 지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헌신하여 인간이 가지고 있는 환경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본문 조금 지나서 창7:23절을 같이 봅니다.
창 7:23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홀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만 남았더라.”
믿음을 지켜 순종한 노아한테 주어진 것은 구원의 축복이었습니다. 우리도 노아와 같이 그런 순수한 믿음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고 사는 복된 하나님 백성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의 새 옷을 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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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1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마 9:16-17)

캘리포니아 주의 새크라멘토 도시를 지나는 99번 고속도로상에서 벌을 운반하던 트럭이 뒤집혀서 1,600만 마리의 왕벌들이 탈출해 도시 일대를 뒤덮고 주민들을 공포에 떨게 했습니다. 그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 벌들이 뚫을 수 없는 방충복을 입고 수많은 경찰관들과 소방관들 그리고 양봉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7시간 동안 투입되어 겨우 수습할 수 있었습니다. 그 사태를 진압하는 동안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방충복을 입지 않고 아무 대책 없이 그곳을 지나가야 했던 오토바이 족들이었다고 합니다.
왕벌들이 새까맣게 우글거리는 가운데로 늠름하게 걸어 들어가서 벌들을 잡아넣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무엇이 저 사람들을 저렇게 침착하고 용감하게 행동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옷이었습니다. 얇고 투명하지만 벌들이 뚫을 수 없는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갈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옷을 입어야 사단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 옷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믿음의 새 옷을 입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낡은 옷을 벗고 그리스도의 새 옷으로 갈아입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유대인들은 극도의 슬픔이나 억울한 일을 만나면 옷을 찢는 행동을 했습니다. 이러한 행동으로 자기의 의사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죽임을 당할 뻔하고 애굽으로 가는 상인에게 팔려갑니다. 그리고 형제들은 아버지에게 사나운 짐승이 찢어 죽였다고 말하자 야곱은 창 37:34″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 아들을 위하여 애통” 합니다. 이러한 분함을 못이기는 그들의 표현에 대해서 하나님은 제사장이 될 사람들에 대해서 “자기 형제 중 관유로 부음을 받고 위임되어 예복을 입은 대제사장은 그 머리를 풀지 말며 그 옷을 찢지 말며”(레 21:10) 라고 하셨습니다. 요엘 예언자는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욜 2:13) 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때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참람한 말을 들었도다”(마 26:65) 고 하였습니다. 자기들의 마음대로 옷을 찢는 행동은 올바른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넣으면 저절로 그것이 터지는 것을 보게됩니다. 생베는 당기는 속성이 있어 낡은 가죽부대를 헤칩니다. 낡은 가죽부대에 새 포도주를 넣으면 가죽부대가 터져 버립니다. 낡은 부대는 새 것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낡은 가죽부대는 전통적인 유대지도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들은 형식에 빠진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 낡아빠진 그들의 정신과 생각으로는 예수님의 새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늘 새로운 것입니다. 이것을 충만히 받으려면 낡은 가죽부대를 버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찢어야 될 것은 자기들의 옷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주시는 새 포도를 그들은 담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낡은 부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낡은 옷을 벗어버려야 새로운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낡은 옷을 입고있습니까? 우리가 벗어야 할 옷은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가 진짜 찢어 버려야할 옷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첫째, 계산적인 신앙의 낡은 옷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신앙생활 몇 년이 되어도 낡은 옷을, 즉 계산적인 신앙의 옷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예배와 헌금, 신앙생활을 계산적으로 하여서는 안 됩니다. 보상심리와 같은 것들은 계산적인 신앙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벳세다 광야에서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예수님이 무리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자 곧 빌립이 말합니다. “어림잡아 200 데나리온의 돈이 있어야 합니다.” 그랬습니다.
수 천명의 사람들을 먹이려면 큰돈이 들어야 하는데, 그 돈은 우리에게 없다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다른 제자 안드레는 곧 먹을 것을 찾아 나섰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고작이었지만 그는 주님 앞에 그것들을 가져왔습니다. 다른 이들은 이같이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안드레가 못마땅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런 안드레의 믿음으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던 것입니다.
내가 최선을 다하면 다음에는 주님께서 해 주시는 것입니다. 모든 일을 내가 다 할 수 있으면 믿음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오천 명을 다 먹이고 나서 남은 광주리에 담기 떡이 12광주리나 되었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계산적인 것을 버려야 올바른 것으로 소유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실 수 있도록 문을 열어 놓아야 합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둘째, 편견의 낡은 옷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대 학자 나다나엘이 있었습니다. 빌립이 그에게 “내가 예수를 만났다.” 고 말했습니다. 그는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고 반발했습니다. 이것은 율법학자들이 “온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 이스라엘의 왕은 예루살렘과 같은 수도에서 태어날 것이라는 생각과 편견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역이 작으니까 사람도 나오기 힘들겠다는 편견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편견이 있습니다.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마 23:5) 자신들은 꾸미면서 다른 사람은 무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지방의 어부 출신들을 제자로 삼았습니다. 유명한 랍비들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편견을 가지고 계시지 않았습니다. 방금 예수님을 믿었다고 해서 그 믿음이 약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눅 13:30).
편견은 오히려 배운 사람에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유대지도자들은 배운 사람들입니다. 율법주의자들, 서기관들도 배운 사람입니다. 사회 지식층입니다. 자기가 아는 것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아는 것이 모두 정답처럼 생각합니다. 무지개 색깔이 몇 개인지 배우지 않은 사람은 무지개 색깔을 다시 세어볼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7개라고 배운 사람은 다시 세어볼 생각은 하지 않고 7개라고 우기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편견입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여자에 대한 편견이 있었습니다. 어린아이에 대한 편견이 있었습니다. 사마리아에 대한 편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편견도 가지고 계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나아오려는 모든 이들에게 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 누구도 막지 않았습니다.

스가랴가 본 환상 가운데 슥 3:3-5 “3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4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5 내가 말하되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사자는 곁에 섰더라” 여호수아가 비록 하나님께 순종한 사람이지만 그에게 죄가 있어 더러운 옷을 입고 하나님께 갈 수는 없었습니다. 더러운 옷을 벗고 아름다운 옷으로 갈아입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새 옷을 입으라.

예수님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산에 올라가 기도하실 때 예수님의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습니다(마 17:1-2). 이것은 예수님이 죄가 있어서 옷이 희어진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깨끗한 분인 것을, 죄가 없는 분임을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옷을 입기 위해서는

첫째, 먼저 벗어야 합니다.
지금 입고 있는 옷을 벗어야 다른 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가 입을 옷도 마찬가지입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 13:12)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가 입은 우리가 만든 옷을 벗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옷들은 다 낡을 옷들입니다(히 1:11). 어두움의 옷입니다. 악한 행실과 더러운 행위로 너절하게 그럴 듯하게 치장된 옷입니다. 그것은 벗어야 합니다. 회개가 바로 옷을 벗는 행위입니다. 이것이 마음으로 찢어버리는 옷입니다.

둘째, 맞추어야 합니다.
대부분의 옷은 몸에 옷을 맞춥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지어주는 옷은 옷에 몸을 맞추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옷이 바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계 19: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하나님의 말씀에 나를 맞추는 것이지, 나에게 주님 말씀을 맞추는 게 아닙니다. 군대가면 군화를 지급하고 고참들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신발에 발을 맞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들끼리 알아서 바꾸어 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시는 옷은 우리 몸에 딱 맞는 옷을 주십니다.

요한계시록 17:4 “그 여자는 자주빛과 붉은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것 들이 가득하더라” 고 했습니다. 디모데도 이미 딤전 2:9에서 이미 지적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께 심판을 받을 음녀입니다. 세상의 것으로 꾸며진 사람입니다. 자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한 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옷을 입고는 저주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하나님은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말씀하시기를 계속 이런 식이면 토해 버리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살 수 있는 방법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계 3: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깨끗한 흰옷을 입어야 합니다. 이것을 어찌 살 수 있습니다. 구원을 돈주고 살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로마서 13:14에서 바울이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옷을 갈아입는다는 것은 완전한 거듭남을 의미합니다. 이전 것은 지나간 것입니다. 그것은 죄악의 세상에서 입고 있었던 것입니다.

삼성전자 이윤우 부회장은 1996년 미국을 방문했을 때 어떤 회사의 CEO로부터 “삼성전자가 살찐 고양이 즉 덩치만 크고 비효율적인 그런 회사가 될까 두렵다.” 는 얘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당시만 해도 삼성내부에서는 조만간 세계적인 기업이 될 것이라고 믿는 분위기가 강했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1996년 삼성전자는 반도체 부분에서 막대한 수익을 올렸기 때문입니다.
그 뒤 이 부회장은 살찐 고양이 그림을 직접 그린 뒤 이렇게 살이 찐 고양이가 어떻게 쥐를 잡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살찐 고양이는 쥐를 잡지 못한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쥐도 잘 잡고 덩치도 큰, ‘큰 고양이(Big Cat)’이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고 합니다. 살찐 고양이가 낡은 옷입니다. 쥐도 못 잡는 고양이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사단도 못이기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영적 싸움에서 늘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정과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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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 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24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 29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30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31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 32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33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엡 5:21-33)

영국의 정치가 처칠이 왜 위대한 줄 아십니까? 효자 중에 효자입니다. 처칠 수상이 전성기에 있을 때 신문사에서 몰래 취재를 했습니다. 처칠의 유치원 선생님부터 대학 스승까지 처칠과 관계된 스승들을 전부 기획취재를 해서 이런 처칠을 키워낸 스승들을 찬양하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그때 처칠이 그 기사를 보고는 신문사에 당장 편지를 썼습니다. “귀 신문사의 보도에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한 가지가 빠졌습니다. 내게 있어서 가장 위대한 스승은 나의 어머니입니다. 내 어머니가 빠졌습니다.”
여러분, 처칠은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더 위대합니다. 그리고 그 어머니를 향하여 깊은 효행으로 우리 앞에 또 다른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그의 정치적인 영향이 너무 위대하니까 그의 효심은 감춰져 있지만 그분의 글 속에는 놀라운 효도의 흔적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부관계의 회복
가정은 모든 질서의 기초가 됩니다. 그래서 가정이 무너지면 다 무너지는 것이고, 가정교육이 잘못되면 사회교육을 아무리 잘해도 채워질 수 없는 것입니다. 가정은 남녀가 만나 시작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때 필요한 부부 관계의 원칙을 제시합니다.

아내에게는 복종
본문 21-24절까지 아내들에게 복종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복종은 휘포탓소메노이(uJpotassovmenoi)로 고대 군사용어로 “…아래 정렬하라.” 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이 말이 군대의 명령식으로만 사용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여자가 남자보다 열등해서나 종속관계에 놓여있기 때문에 이런 명령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께 하듯 하라.” 고 했습니다. 따지면 복종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으로 미리 계산하면 복종이 잘 안됩니다. 아마 아내 분들이 “이런 억울한 일이 어디 있나?” 생각하시는 분은 복종을 못하실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기적을 행하는 사제가 아니라 하나님께 복종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조지 워싱턴의 어머니는 기자들에게 많은 질문을 받았습니다. “어머니, 어떻게 아들을 대통령으로 키울 수 있었습니까?” 그때마다 그 어머니의 입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저는 내 아들을 하나님께 복종하는 아들로 키운 것뿐입니다.” 아내만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은 하나님께 복종해야 합니다. 그래야 아내가 자녀가 아버지에게 복종할 수 있습니다.

남편에게는 사랑
본문 25-28절에 남편의 의무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아내의 의무가 “복종” 이라면 남편의 의무는 사랑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사랑의 단어는 아가파테(ajgapa’te)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남녀간의 사랑을 말하는 에로스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감정적이고 성적인 사랑을 뛰어 넘어 완전한 희생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또한 현재 명령형으로서 어떤 상황에서든지 언제나 아내를 사랑하라는 명령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것처럼 남편들도 아내에게 그와 같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희생의 사랑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희생해야 된다면 그 첫 번째가 아내를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서 이지만 우리는 아내를 위해서입니다.
예전에 태국에서 미국 선교사님을 만났습니다. 이분들을 만나러 가면 갈 때마다 집에 없습니다. 어디 갔냐고 물으면 아내 생일이라 어디 놀러갔다는 것입니다. 제가 젊었을 때라 잘 몰랐습니다. “선교는 안하고 매일 놀러만 다니나?” 혼자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 와서 보니까 그분들이 아주 잘한 것입니다.
본문 28절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라고 나옵니다. 자기 몸이 아프면 아내의 몸도 아프겠지 생각해야 합니다. 저도 조금씩은 철이 들어가나 봅니다. 아내가 안 되 보일 때가 점점 늘어납니다. 저는 그래도 설교하고 교회에서도 목사라고 많은 존경은 못 받지만 조금은 받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내는 그저 소리 없이 해야하고 굳은 일은 다해야 합니다. 분명히 상이 있으면 저는 없고 아내에게 있을 것임을 믿습니다. 저는 00자매 하는 것을 보면 참 상급이 많겠다 생각합니다. 많이 베풀면서 사는 모습이 귀합니다.
노아는 지금 쓸 배가 아닌 120년 후에 쓸 배를 지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했습니다. 바다도 아니고 산에서 지으라는 말씀을 복종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7절에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고 했습니다.

영적 119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과 복종의 원리로 가정을 세우고 교회를 세워가라고 하십니다. 사랑과 복종은 ‘영적 119′ 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것과 복종하는 것은 영적 119라는 것입니다. 119차가 지나가면 다 비켜주어야 됩니다. 사랑하는 것과 복종하는 것은 미룰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계산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선 119는 가서 긴급상황을 수습해야 되지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고 따지고 분석하고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고 받는 사람이 “어쩌다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라고 묻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따지는 일은 뒤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출동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여러분! 사랑을 먼저 계산해보고 하지 마십시오. 무조건 사랑해 봅시다. 계산은 다음에 합시다. 복종도 이해하고 복종하려 하지말고 복종해 놓고 한번 계산 해 보십시오. 오늘 우리들에게 사랑은 너무 조건이 많아지고 복종은 너무 이권적으로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그대로 고착화되어 버린 것이 하나의 위기입니다. 가정의 부부사랑, 부부관계, 식구들끼리는 사랑과 복종의 원리가 살아나야만 하나님이 의도한 가정이 건설되고 주님이 의도하는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자기에게는
“29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앞서 본문에서 남편에게 아내에게 할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더 중요한 사실을 제시합니다. 자기에 대한 것입니다. 사실 나 자신이 병들어 있으면 남편도 아내도 다 귀찮습니다. 심지어는 자식도 귀찮을 수 있습니다. 내가 아내로서 남편으로서 부모로서 자식으로서 역할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 중요합니다. “양육하여 보호하기를”(ejktrevfei kai; qavlpei:에크트레페이 카이 달페이) 는 문자 적으로 “성숙하기까지 따뜻하게 감싼다” 는 말로서 자기 몸을 정성을 다하여 가꾸며 돌보는 것을 말합니다. 분문의 “제”(eJautou’:헤아우루)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 스스로”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가 만들어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실패로 인한 상처를 안고 교회를 떠난 한 성도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사업을 하다가 실패를 하고 그 후유증으로 많은 성도들 앞에 피해를 끼쳤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영적으로 시험이 들어서 교회를 등지고 예수님과 담을 쌓게 되었습니다. 그럴수록 주님께 매달리고 하나님의 교회에 품에 안겨야 되는데 그만 이 사람은 교인들을 볼 면목이 없기 때문에 교회를 등지고 산촌 변두리에 묻혀서 살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야인처럼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어느 날 산나물을 삶으려고 아궁이에 불을 땠습니다. 장작을 가지고 불을 지피는데 산나물은 적당하게 데쳐야 되니까 장작을 몇 개 꺼냈습니다. 요즘 가스 불이야 줄이면 되지만 옛날에는 이렇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장작개비는 저절로 불이 꺼져 버렸습니다. 이 사람이 일을 한참 하다가 불이 꺼진 장작개비를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이 사람이 성령의 음성을 듣게 된 것입니다. “아궁이의 장작개비가 활활 불이 탔지만 바깥에 끄집어내어 놓으니까 그대로 꺼져버린 이 장작개비가 내 모습이구나, 교회를 등진 내 모습이 타다가 꺼져버린 장작개비와 같은 모습이구나” 그 장작개비를 보고 교회로 나아갔다고 합니다. 본문 30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요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붙어만 있으면 됩니다.

어느 유명한 인사의 간증을 말씀드립니다. 이 분은 한국 교회의 지도자 중 한 분입니다. 그 분이 칠십 평생을 살면서 부모님께 너무나 귀한 유산을 받은 것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집에 돌아와 보면 어머니가 자주 집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물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는 어디 가셨습니까?” “교회에 갔는가 보더라.” “왜요?” “뭐 먹을 게 생겼는지 챙겨서 목사에게 가지고 가더라.” 그러면서 이 아버지가 이 아들에게 꼭 토를 달아주는 것이 “얘, 네 어미가 목사에게 하는 거 나한테 반만 하면 열녀문을 세워줄 거다.” 그러면서도 그 아이에게 어머니를 한번도 비방하지 않았습니다. 이 분이 그 부모 밑에 살면서 교회가 첫째고 목사님이 첫째라는 것을 배운 것입니다. 이 사람도 칠십 평생동안 그 부모님이 물려준 그대로 신앙생활을 하니까 놀라운 축복을 받고 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혼자는 무슨 소리든 하십시오. 부부는 안방에서 무슨 소리를 해도 괜찮습니다. 동경대학 총장을 지내신 이분이 사랑과 행복의 미학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부부관계는 천사의 말과 악마의 말을 동시에 듣는다.’ 는 것입니다. 악마가 부르짖는 소리를 부부끼리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식들이 듣는 앞에서 해서는 안됩니다. 못난 부모들은 서로를 비방합니다. 이놈아, 네 아비처럼 살지 말아라, 이놈아 네 어미처럼 살지 말아라, 그런 소리를 자식들 듣는 자리에서 일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집이 요즘 인기가 좋습니다. 00 자매가 새들어 살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난 목요일에는 00이가 밤에 찾아왔습니다. 집이 활용이 잘되니까 아주 기쁩니다. 제가 컴퓨터선교회를 운영하면서 물품구입이나 프로그램 구입에 신중을 구합니다. 자칫 제값을 못하는 것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 가운데 하나가 몇 년 전에 1천만 원이 넘는 서버 컴퓨터를 하나 구입했는데 이것이 그만 운영상의 문제로 지금까지 놀고 있습니다. 이 컴퓨터만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그런데 반대로 충분히 제값을 다한 컴퓨터들을 보면 이런 물건은 잘 샀다 생각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마찬가지 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물건은 아니지만 하나님 앞에서 값지게 인생을 살다가 가야하지 않겠습니까?

바울은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딤후 4:7-8).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정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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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3:16-17 “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히 11:23-25 “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사람은 태어난다고 인격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만들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교육이 필요한 것입니다. 어떤 교육을 받느냐가 곧 그 사람이 된다는 사실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자녀의 교육에 힘을 씁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교육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의 차이를 산 자와 죽은 자로 비유했습니다. 사람은 가르치는 대로 됩니다. 그렇다고 기능을 가르치는 것만이 교육은 아닙니다. 사람의 됨됨이를 가르치는 것이 참된 교육입니다. 아들 둘만 있으면 부모가 어디서 죽을지 모르고, 아들 하나만 있으면 부모는 골방에서 죽고, 딸 하나만 있으면 설거지를 하다 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잘못 가르친 자녀 때문에 부모가 당할 일에 대한 일종의 경고입니다. “마귀가 가르치기 전에 먼저 가르치라” 고 한 캐서린 부스의 권면 속에서 우리시대에 필요한 교육의 종소리를 들어야합니다.

“절벽 아래 구급차가 되기보다 절벽 위의 울타리가 되겠다.” 가정사역을 하는 송길원 목사님 부부의 (사) 하이패밀리 평생교육원 모토입니다. 우리 속담에도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정의 문제는 생각보다 심각합니다. 아마 소 잃고 외양간 고칠 마음도 없을 것입니다.

돕는 배필

창세기 1,2장을 자세히 읽어보면 가정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죄를 짓게된 것은 교만이었습니다. 이 교만은 감히 하나님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교만으로 죄를 지은 인간의 모습은 교만 그 자체라고 해야할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예수님을 믿고 ‘회개했다’, ‘돌이켰다’, ‘회복했다’ 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는데 이 모든 말은 인간이 하나님께 죄 짓기 전으로 돌아가야만 참된 회개요, 회복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했던 이 교만이 그대로 존재하니까 여자가 남편을 가정의 리더로 인정을 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남편을 다스리려고 합니다. 이렇게 대항하는 여자들을 보면서 남자들은 짓누르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여자들은 여성 해방운동을 펼치게 됩니다. 여성 해방운동은 평등을 주장합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바로 이 평등을 주장합니다. “난 빨래했으니까 넌 청소해.” 이런 식입니다. 평등만으로는 가정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90을 주고 10일 받을 때도 있고 그 반대가 될 때도 있는 것입니다.
“돕는 배필” 이란 단어는 ‘에젤’이라는 말입니다. ‘에젤’은 시편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도울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돕는 자는 능력이 없는 자가 아니라 능력이 많은 자입니다. 아내가 능력이 없어서 남편을 돕는 것이 아닙니다. 남편을 존경하는 마음이 아내에게 없다면 그 가정의 행복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아내를 통해서 남편을 도와 줄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정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본문 두 가지로 말씀해 주십니다.
첫째, “남편을 사모하라” 고 했습니다. “hq;WvT]”(테슈카)인데 ‘손을 뻗치다’ 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사모하는 것은 손을 잡아주는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도와 주는 것은 손을 잡아주는 것입니다. 남편이 힘들고 지칠 때 손을 잡아주세요. 남편에게 달려드는 손이 아니라 남편을 감싸 주는 손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아내의 손은 하나님이 보내주신 돕는 배필의 손입니다.
둘째,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고 했습니다. 신약성경도 다르지 않습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엡 5:22) 고 하십니다. 가정목회자로 활동하시는 송길원 목사님과 김향숙 사모님이 계십니다. 남편은 정리 정돈을 잘하는 성격이고 완벽주의자입니다. 사모님은 그렇지 않으셨답니다. 싸울 때는 남편에게 ‘송성질’ 이라고 부르고 남편은 ‘김고집’ 이라고 불렀습니다. 남편이 너무 자상해서 결혼했는데 결혼하고 보니 너무 쫀쫀하더라는 것입니다. 아내는 고집을 꺽지 못했고 남편은 성질을 콘트롤하지 못했습니다. 가정법원에서 이혼서류를 가져왔는데, 남편이 그러자고 해서 충격을 받고 남편은 그 길로 집을 나갔답니다. 사나 이혼을 하나 고통이었습니다. 그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 “네 고집을 꺽어라.” “네가 변해라” 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가정사역자의 길을 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남편이 나를 다스리도록 맡기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나의 남편 뒤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고 맡기시는 것입니다. 남편은 잘못을 저지를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나의 남편을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가정에서의 남편

아버지는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는 모델이 되어야 합니다. 아버지의 권위가 가정에서 무너져 내릴 때 하나님의 질서가 깨어집니다.
본문 17절에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라고 하셨습니다. 아내들이야 남편이 자기 말만 들으면 좋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아내의 말만 듣는 것을 원치 아니하십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듣지 않고 아내의 말을 먼저 들을 때 사단이 인간에게 들어왔습니다. “내가 너더러 먹지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죄가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남편들은 마치 자기의 고집이 하나님의 뜻인 양 밀어붙이는 것은 잘못입니다.
이제 아버지의 권위는 아버지가 세우는 것보다 세워주시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1978년에 미국의 한 대학 연구원이 2년에 걸쳐 5-7살의 아이들에게 “텔레비전과 아빠 중에서 뭐가 더 좋은지?”를 물어보았습니다. 이중에 44%의 어린이가 아빠 대신 텔레비전을 뽑았습니다. 미국에서 이 정도이면 요즘 한국에서 “컴퓨터와 아빠를 선택하라.” 면 어떻게 될지 걱정입니다. 가정에서 잃어버린 남편의 자리를 찾아줄 수 있는 건 바로 아내입니다. 가정에서 아버지의 축복을 받게 하느냐 마느냐는 아내의 말 한마디가 결정할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 맨 마지막 구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말 4:6)

가정에서의 아버지는 아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4 아버지가 내게 가르쳐 이르기를 내 말을 네 마음에 두라 내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살리라 5 지혜를 얻으며 명철을 얻으라 내 입의 말을 잊지 말며 어기지 말라 6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잠 4:4-6)
한때 강남에서 유행한 말이 있습니다. “치맛바람이 아무리 거세도, 바짓바람을 이길 수 없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버지들의 착각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사회적 지위만이 자녀를 잘 양육한다는 착각입니다. 저는 기러기 아빠들 참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까지 자녀를 생각하고 결정했으니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러나 아버지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나는 반드시 하나님을 가르치겠다.” 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하나님을 아는 믿음만은 전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의 모세 가족

히 11:23-25 “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시대가 어려워서 가정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지나친 물질문화가 가정을 등한시하는 것 같습니다. 어렵고 힘들다고 다 가정을 버린다면 이 세상에 몇 가정이 남겠습니까? 우리는 성경에서 가장 어려웠던 한 가정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바로 모세 가족입니다.
모세가 출생 할 때 이집트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왕이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누구였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멘호렙 2세라는 설도 있고, 람세스 2세라는 설도 있습니다. 이 파라오(바로)는 유대인의 인구를 억제하기 위해서 압박정책을 사용합니다. 그것은 강제 노동(출 1:11)과 히브리 산파들을 이용한 남아 살해 명령입니다(출 1:16). 그런데 여기서 일개 산파가 감히 파라오의 명령을 어길 것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파라오는 “태양신 라(Ra)가 지상의 보물로 아끼는 이집트를 수호하도록 특별히 점지한 아들이라는 것” 입니다. 말하자만 인간의 몸을 입고 있지만 그 또한 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파라오의 명령을 거역하는 일은 신의 명령에 도전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을 어기고 남자를 살린지라”(출 1:17) 고 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는 파라오가 안 통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더 먼저, 더 높은 곳에 계셨습니다.
모세 또한 이런 산파의 도움으로 살아남은 아이입니다. 여기에는 어머니 요게벳이 있습니다. 요게벳의 ‘요’(Jo)자는 여호와를 뜻하는 말입니다. 모세의 어머니 또한 믿음 빼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감히 파라오의 명령을 어기고 아들을 석달이나 키울 만큼 담대한 여인입니다. 어머니말고 또 누이가 나옵니다. 이름은 ‘미리암(뜻:높이운 자)’ 입니다. 남자아이를 집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고, 울음소리도 나지 않게 하면서 방안에서만 석달을 키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머니와 누이는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어서(출 2:3) 마침내 갈대 상자를 구해다가 역청과 송진을 바르고 그 속에 동생을 담아 나일 강으로 향할 때, 누이의 가슴은 미어지고 애달파, 극도의 불안과 긴장 상태에 있어야 맞을 것입니다. 하지만 누이의 태도는 신중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멀찍이 서서 아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지켜”(출 2:4) 라고 나옵니다. 어딘가 믿는 구석이 없이는 이렇게 행동을 못하지요. 요게벳은 당시 이집트 풍습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매월 초가 되면 귀족들이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기 위하여 나일강으로 목욕 마실을 나간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들 모녀의 행동은 주도면밀한 계획으로 이루어진 계획아래 타이밍을 노린 것입니다. 이리하여 바로의 딸에게 모세가 발견됩니다(출 2:5).
이후 성경은 40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장성한 모세의 이야기를 숨 가쁘게 진행시킵니다.
그리고 미리암이 나타난 곳은 출 15:20-21 “20 아론의 누이 선지자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잡으매 모든 여인도 그를 따라 나오며 소고를 잡고 춤추니 21 미리암이 그들에게 화답하여 가로되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하였더라”입니다. 그들은 보이지 않았지만 늘 모세의 주위에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모세를 지켜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냥 보고만 있었겠습니다. 그들이 40년의 세월 동안 무엇을 했겠습니까?

거북이네 식구가 10년 만에 온가족 소풍을 떠났습니다. 워낙 걸음이 느린 터라 거북이 가족은 7년 먹을 양식을 준비해서 떠났습니다. 2년 정도 지났을까 가다가 시장해서 점심을 먹기로 했는데, 아뿔싸! 양념 통을 하나도 안 가져왔던 것입니다. 양념 없이 먹으면 너무 맛없다며 누군가 집에 가서 가져오기로 했지만 아무도 2년 동안 온 길을 다시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왕복 4년이 걸릴 테니까. 결국은 임무는 막내 거북이한테까지 미뤄졌고 막내 거북이는 투덜투덜하며 당부합니다. “나 돌아올 때까지 절대 먹지 마, 약속해!” 모두들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막내 거북은 길을 떠났고 가족들은 계속 그 자리에 남아 있었습니다. 1년이 가고, 2년, 3년이 가고 4년, 5년이 되도록 막내 거북이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배고픔을 참다 못한 할아버지 거북이가 더는 못 참겠다며 먼저 먹고 살짝 뒤집어 놓겠다며 도시락을 꺼냈습니다. 바로 그 순간, 나무 뒤에서 막내 거북이 뛰쳐나오며 하는 말,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날 기다리지 않을 줄 알았다고. 약속을 안 지켰으니 나도 양념 가지러 안 갈 거야.” 순간 포착을 위해 계속 참고 기다린 것입니다. 그것도 5년씩이나 ….”

가정은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실천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가정은 믿음을 지키고 전달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누군가 그랬습니다. 세상에 완벽한 가정은 업다구요. 그러나 행복한 가정은 있답니다.
여러분 행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