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의 믿음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9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 하였으며”(창 6:8-9)
17세기의 일입니다. 런던 대화재가 있은 뒤, 저 유명한 세인트 폴 대성당을 재건하고자 그 설계를 맡았던 크리스토퍼 렌이 하루는 채석장을 찾아 돌을 다듬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토닥토닥 돌을 쪼고 있는 한 사람에게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짜증난다는 듯이 몹시도 퉁명스럽게 대답합니다. “보면 모르오? 돌을 다듬고 있지 않소.” 또 한 사람에게 같은 질문을 합니다. “보면 모릅니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서 벌어먹고 사느라고 이 고생을 합니다.” 다시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봅니다.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소?” “저요?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 있습니다. 저는 사실 죄를 짓고 감옥에 있을 때, 거기서 돌 다듬는 기술을 배웠습니다. 전과자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감옥에서 나와 자유로운 몸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짓기 위하여 돌을 다듬고 있습니다.” 똑같은 일을 하고 있는데도 이렇듯 대답은 천양지차입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서 건조한 방주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규모이었습니다. 노아가 건조한 배의 규격을 지금 세계가 공용하는 미터법으로 환산해 보면 그 규모가 얼마나 컸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배의 길이는 135m로 현재 사용되는 국제 규격의 축구장의 108m 길이보다 약 30m가 더 길었습니다. 배의 넓이는 약 23m 이었고, 배의 높이는 14m나 되었습니다. 이것은 현재 보통 건물 5층 높이 정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배의 무게는 15.000t 정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엄청난 규모의 배는 현대 기술로도 쉽게 만들기가 힘든 정도라고 하니까 노아가 해낸 그 당시 방주 건조 역사는 불가사의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놀라운 일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노아의 믿음은 순수하고 크고 흔들림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노아의 믿음을 배우고 노아처럼 방주를 지으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노아는 은혜를 입은 믿음이 있었습니다.
본문 8절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여호와)hw:hy] (베아인네)ynEy[eB] (헤)@je (마짜)ax;m; (노아)j’nOw])
“ax;m;(마짜)-입었더라”는 ‘발견하다, 도달하다, 얻다. 찾다’ 어근의 뜻이 있습니다.
“@j(헤)e”-은혜”는 ‘호의를 베풀다, 긍휼히 여기다’ 영어의 Grace입니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여기에 처음으로 나옵니다.
“ynEy[eB(베아인네)-~의 두 눈 안에, or ~의 두 샘 안에"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가 대부분의 한글번역성경에서는 빠져있습니다. 그러나 영어성경들은 모두 "은혜아래서 여호와의 눈에 들었다" 고 번역했습니다. 가톨릭의 새성경만 "노아만은 주님의 눈에 들었다." 고 번역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번역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노아만은 여호와의 두 눈에 들어 은혜를 입었다."
하나님의 눈에 노아가 들어왔습니다. 가만히 있는 노아에게 하나님의 눈에 띠였겠습니까? 노아는 하나님의 눈에 띠일 만큼 살았습니다. 욥도 하나님의 눈에 띠였습니다. 하나님은 눈에 띠인 노아를 찾아오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것 이것이 은혜입니다. 처음에는 내가 똑똑해서 교회에 온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셨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2. 노아의 믿음은 환경을 초월한 것이었습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을 외면 한 채 죄악 속에서 인본주의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기에 지금 우리들 주변 환경 역시도 순수한 믿음을 지키며 사는 데는 결코 좋은 환경이 못 된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나쁜 주변 환경만 탓만 하면서 순수한 믿음 지켜 가는 것을 포기하고 환경에 동화되고 휩싸여서 적당히 살아가려고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결코 용납 될 수 없는 부끄럽고 죄악 된 일입니다.
'믿음이 왜 필요하고, 믿음을 지키는 것이 무엇이냐' 고 말한다면 그것은 바로 환경을 극복해 가는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바로 노아는 이런 점에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한테 순수한 믿음을 지켜 가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노아가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도리어 그처럼 나쁜 환경들을 초월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말씀이 본문에 나옵니다. 다시 한번 그 감동적인 내용을 봅니다.
본문 9절입니다. "노아의 사적은 이러 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창 6:9) 본문은 노아에 대해서 세 가지로 말해줍니다.
'의인'에 두 단어가 사용됩니다. "qyDix'(짜다크)-합법적인, 공정한"과 "!ymiT;(타밈)-진실, 흠 없는, 완전한" 이라는 단어입니다. 의인이란 진실한 사람으로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동행은 "!yhila>h;Ata,(에트-엘로힘)"입니다. 엘로힘은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고 여기에 에트를 붙였습니다. 에트는 "가까이, 안에서, 함께"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 하나님이 가까이 하시는 것 그것이 동행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그 당시 땅의 사람들 모두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죄를 많이 짓고 강퍅했으면 그렇게도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더 이상 묵과하시질 못하시고 모두 멸해 버릴 계획을 세우셨겠습니까. 그처럼 노아 시대는 주변 환경이 순수한 믿음을 지키기에 최악의 여건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런 최악의 환경을 극복하고 살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혹시 주변 환경이나 생활환경을 탓하고 있지는 안습니까? 말씀대로 잘 믿으려고 하는데 '환경이 따라주질 않는다.' 라는 식의 생각 말입니다. 믿음은 환경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3. 노아의 믿음은 최선을 다해 헌신하는 것이었습니다.
앞에서 노아가 하나님의 명을 받고서 건조한 방주의 규모가 상상을 초월할 만큼의 엄청난 것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노아가 그 방주를 건조하면서 얼만큼의 헌신을 했을 것이라고 짐작이 됩니까? 제가 생각하기로는 그야말로 조금의 남김도 없이 모든 것을 다 투자한 최선의 헌신이었다고 믿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명대로 그 배를 짓기 위해서 전 시간을 헌신했습니다. 모든 힘을 쏟아 부었습니다. 있는 재산을 남김없이 방주를 짓는데 투자했습니다.
그처럼 최선을 다한 헌신을 통해서 만이 하나님께서 명하신 그 엄청난 배가 지어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헌신이 없이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질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최선을 다한 헌신의 표시입니다. 요19:33-34 "33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34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신 후에도 마지막 몸 속에 남아있던 몇 방울의 피와 물까지도 모두 남기지 않으시고 쏟아 부어 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명을 받들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최선의 헌신을 했던 노아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헌신과 희생을 예표하여 보여준 것입니다.
4. 노아의 믿음은 끝까지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본문의 내용을 근거로 해서 노아 당시의 주변 환경이나 외롭게 믿음을 지키며 긴 세월 동안 배를 지어야 했던 노아 개인의 형편을 고려해 본다면 끝까지 배를 지은 것 하나 만을 가지고도 기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큰 일 이었던 것이 분명 합니다.
정말이지 노아가 아니고 보통 믿음을 가진 사람이 그 일을 했다면 120년이라는 세월은 고사하고 12년도 못 가서 중단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배를 지었다 하드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설계도면 그대로 가 아니라 마음대로 축소하고 줄여서 모양만 비슷하게 짓고서 다 지었다고 우겼을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하지만 노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바보 스러울 만큼 고집스럽게도 보였지만 120년의 세월을 꾹꾹 참으면서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설계도면 그대로의 크기와 모양의 배를 짓는데 성공을 했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 감동적인 사실을 기록한 말씀 다시 한번 봅니다.
창 6:22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 하였더라." "lkoK](콜)-다, 모두, 어느 것”을 뜻하는 것으로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준행 하였더라.” “hc;[; @Ke(켄-옳게, 정당하게 : 아싸-만들다, 행하다)” 고 했습니다. 신앙생활 잘 하려면 하나님이 하라고 한 대로만 하면 됩니다. 이유를 달지 마세요. 미련할 정도로 순진한 것이 좋은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간에 용두사미(龍頭蛇尾)꼴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시편의 한 기자는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서 끝까지 행하는 일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주의 율례를 길이 끝까지 행하려고 내 마음을 기울였나이다.”(시 119:112)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히 3:14) 믿음은 끝까지입니다. 하다말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예전에 한번 터널 공사하는 곳에서 ‘공사 중이니 돌아가시오.’란 표지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차들이 계속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어디 옆으로 나가는 길이 있겠지 하고 계속 가보았습니다. 그러나 길을 끊어지고 계속 갈 수 없었습니다. 제 앞에 갔던 관광버스는 차를 돌리느라 애를 먹었습니다. 결국은 다시 되돌아 와야했습니다. 사람들을 따라간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아십니까? 우리가 믿고 따라갈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환경을 초월하고, 최선을 다해서 헌신하고, 끝까지 하나님의 명대로 순종했던 믿음을 가진 노아에게 주어진 것이 무엇이었겠습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 하였으며” 라고 합니다. 사람이 완전해 지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헌신하여 인간이 가지고 있는 환경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본문 조금 지나서 창7:23절을 같이 봅니다.
창 7:23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홀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만 남았더라.”
믿음을 지켜 순종한 노아한테 주어진 것은 구원의 축복이었습니다. 우리도 노아와 같이 그런 순수한 믿음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고 사는 복된 하나님 백성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