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요절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시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저는 말씀의 특별한 곳만을 가지고 설교하는 것이나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늘 모든 말씀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편협 되지 않게 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역시 황금요절은 있습니다. 저에게 구약에서 하나, 신약에서 하나의 성경구절을 뽑으라면 주저 없이 오늘 본문의 말씀을 뽑을 것입니다. 이 두 성경구절은 모든 성경을 대표한다고 할만합니다.
본문처럼 하나님의 뜻을 가장 위대하고 간결하고도 풍성하게 우리에게 전달시켜 주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고 표현하지만 결국은 본문의 말씀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늘 우리가 항상 설교하고 전해야할 말씀입니다.
금세기 최고의 신학자 칼 바르트는 “신학에서 가장 큰 주제”는 “예수님이 날 사랑하신 다는 사실이 성경에 써 있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찬송가 411장).
지구상에는 10초안에 45명이 태어나고 17명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일년이면 1억 4천만 명이 새롭게 태어나고 5천만 명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뇌혈관 질환 하나만으로도 440만 명이 죽는다고 합니다. 운전사고 하나만으로도 150만 명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인도에서는 독곤충에 물려죽는 사람만 2만 명이 넘습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기아로 죽어 가는 사람이 일년이면 3천만 명이 넘습니다. 어쩌면 한없이 무능력하고 볼 것 없는 인간을 하나님은 왜 그토록 사랑하신 것일까요?
오늘의 말씀이 우리를 왜 그토록 붙잡고 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함으로서 오늘도 주님의 은혜를 풍성히 얻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인간이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 중에 가장 위대한 사랑에 관하여 이야기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가장 위대한 사랑은 물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테일러 스미스(Taylor Smith) 목사는 기독교 메시지의 핵심은 다음 세 문장에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십니다(God is)’,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God is love)’,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God loves you)’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는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 라는 제목으로 책을 썼습니다. 그 제목만으로도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사랑받지 못한다는 느낌보다 더 큰 비극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받지 못한다는 느낌은 곧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는 불필요하다는 느낌과 같기 때문입니다.
선진국들은 해마다 자살율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살기 바쁜 나라에서는 자살할 생각을 할 시간적 여유조차 없습니다. 사람이 왜 자살을 하게 됩니까? 외로움을 ‘고독’을 견디지 못하여 자살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주고받고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은 ‘사랑받지 못함’과 ‘불필요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은 아무도 하나님께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 없으며, 따라서 아무도 하나님께 불필요한 사람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이 한 사람의 삶에 주는 중요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세요?
만일 어떤 사람이 사랑을 충분히 공급받았다면 그 사람은 누구에게든지 중요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말씀의 핵심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말씀은 ‘당신은 중요합니다’, ‘당신은 필요합니다’, ‘당신은 하나님께 매우 중요합니다.’ 평생을 직장에서 일만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일이 잘 될 때는 자기가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때로는 가족의 불만도 눌러가면서 직장 일만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회사에 출근해 보니 자기 자리가 치워져 있는 것입니다. 이제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나에게 가치를 두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다른 사람이 하나님께 소중하듯이 여러분의 자녀가 여러분에게 소중하듯이 하나님께는 여러분이 똑같이 소중합니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그려놓은 벽화를 보면 저울에다가 한쪽은 지구를 다른 한쪽은 사람을 올려놓고 무게 중심을 사람이 더 무거운 것으로 기울어지게 그려놓았습니다. 이것은 한 사람의 가치를 지구 전체 보다 더 큰 것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나라에 하루 평균 30명 이상 자살합니다. 자살하는 제일 큰 이유는 생활고와 가정불화입니다. 그러나 어렵다고 다 자살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자살 할 수 없습니다.
강남에서 생긴 이야기입니다. 고층 아파트에서 아들이 뛰어내리고, 어머니가, 아버지가 일가족 세 명이 뛰어내렸는데 놀랍게도 다 살았습니다. 이유는 아들은 비행청소년, 어머니는 날라리, 아버지는 제비족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의 가치를 미국의 생화학자인 돌프 빈더는 2달러 98센트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육체를 돈으로 가정했을 때 내린 결론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우리가 5천 원도 안 되는 가치일까요? 아닙니다. 살아있다면 그 가치는 달라집니다. 더욱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우리의 가치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예수님은 “천하보다 귀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엄청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감사하면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2. 인간이 지금까지 받았던 것 중의 가장 위대한 선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보다 더 좋은 선물이 또 달리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의 제일 큰 속성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려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주고싶어집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숨겨놓고 남겨놓는 것이 없습니다. 다 줍니다. 하나님의 속성 자체가 사랑이십니다.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7-8) 사랑한다고 하면서 주지 않으면 그것은 거짓입니다. 그래서 사단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지 않습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고 하십니다. 사단은 빼앗아 가려고 합니다. 물질, 건강, 생명을 빼앗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려고 하십니다. 자꾸만 뭘 받으라고 하십니다. ‘성령을 받으라.’, ‘축복을 받으라’, ‘깨끗함을 받으라’(마 11:5), ‘내 말을 받으라’, ‘구원을 받으라’,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마 21:22) 그러시더니 육체로 오셔서 육체가 죽임을 당하셔야 했던 마지막 밤을 제자들과 함께 지내시면서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마 26:26) 이제 당신의 몸까지 “받아 먹으라”고 하십니다.
성문 밖 멀리
푸른 언덕
귀하신 주님이 못박히셨어요,
우리 모두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보다 더 나은 사랑은 없어요,
우리 죄 값을 치루셨어요.
오직 그분이 하늘의 문을 열 수 있고,
우리를 그곳으로 인도할 수 있어요.
우리는 알지 못하며 말하지 못해요,
그분이 당하셔야만 했던 고통을.
그러나 그 분이 거기에 달리셨고 고통 당하신 것은,
우리를 위함이었음을 우리가 믿고 있어요.
베드로는 그 구원을 이렇게 고백했어요.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 1:18)
3. 인간이 지금까지 한 것 중의 가장 위대한 선택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제 하나님은 당신의 것을 우리에게 다 내어주신 것입니다. 이제 선택은 나에게 넘어왔습니다. 삶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아무 선택도 하지 않고 살아 갈 수는 없습니다. 선물이 주어졌습니다. 이것을 받을 것인지 받지 않을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선택할 때 영향을 끼치는 요소들은 많지만 결국은 내가 선택해야 하는 것이고, 내가 결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의 시간, 나의 돈, 나의 삶 내가 주님과 무엇을 해야할지 내가 선택해야 합니다.
보릿고개로 허덕이던 1960년대 초 어느 날. 교회에 점심을 먹으려는데 걸인이 교회로 들어왔습니다. 목사님은 함께 밥을 먹자며 그를 밥상 앞에 앉혔습니다. 그리고 식사 기도를 하려는데, 거지가 대뜸 소리를 지르는 거예요.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기도는 무슨 기도냐.” 그러는 겁니다. 성질 급한 목사는 홧김에 거지를 쫓아냈습니다. 그 날 밤, 목사는 기도를 하던 중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 거지가 얼마나 나를 욕하고 저주하는지 내가 너보다 잘 안단다. 나는 그 소리를 50년 넘게 들었다. 그래도 나는 매일 먹을 것을 주었다. 그런데 너는 어찌 밥 한끼 주지 않고 그를 내쫓느냐. 내가 그를 위해 십자가를 졌고, 지금도 그를 사랑하는 줄 모르느냐.”
본문 말씀을 보면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선택권을 우리에게 넘겨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격을 믿고 계십니다. 우리를 존중해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방관자적인 역할을 하시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적극적으로 바른 선택을 할 것을 촉구하고 계십니다. 성령을 통해서도 오늘 설교 말씀을 통해서도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적극성을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선택은 나의 몫입니다.
오래 전에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한 위대한 말을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수 24:15)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선택의 일입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유독 많이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누구든지”와 “만일” 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선택하지 않을 수 있음을 지적해 주는 말입니다.
다윗은 선택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라고 고백했습니다. 내 삶의 제일 위대한 선택이 있다면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을 선택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이 선물을 받아들이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당신을 위한 것이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에게는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