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요절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시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저는 말씀의 특별한 곳만을 가지고 설교하는 것이나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늘 모든 말씀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편협 되지 않게 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역시 황금요절은 있습니다. 저에게 구약에서 하나, 신약에서 하나의 성경구절을 뽑으라면 주저 없이 오늘 본문의 말씀을 뽑을 것입니다. 이 두 성경구절은 모든 성경을 대표한다고 할만합니다.
본문처럼 하나님의 뜻을 가장 위대하고 간결하고도 풍성하게 우리에게 전달시켜 주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고 표현하지만 결국은 본문의 말씀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늘 우리가 항상 설교하고 전해야할 말씀입니다.
금세기 최고의 신학자 칼 바르트는 “신학에서 가장 큰 주제”는 “예수님이 날 사랑하신 다는 사실이 성경에 써 있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찬송가 411장).

지구상에는 10초안에 45명이 태어나고 17명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일년이면 1억 4천만 명이 새롭게 태어나고 5천만 명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뇌혈관 질환 하나만으로도 440만 명이 죽는다고 합니다. 운전사고 하나만으로도 150만 명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인도에서는 독곤충에 물려죽는 사람만 2만 명이 넘습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기아로 죽어 가는 사람이 일년이면 3천만 명이 넘습니다. 어쩌면 한없이 무능력하고 볼 것 없는 인간을 하나님은 왜 그토록 사랑하신 것일까요?
오늘의 말씀이 우리를 왜 그토록 붙잡고 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함으로서 오늘도 주님의 은혜를 풍성히 얻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인간이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 중에 가장 위대한 사랑에 관하여 이야기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가장 위대한 사랑은 물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테일러 스미스(Taylor Smith) 목사는 기독교 메시지의 핵심은 다음 세 문장에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십니다(God is)’,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God is love)’,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God loves you)’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는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 라는 제목으로 책을 썼습니다. 그 제목만으로도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사랑받지 못한다는 느낌보다 더 큰 비극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받지 못한다는 느낌은 곧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는 불필요하다는 느낌과 같기 때문입니다.
선진국들은 해마다 자살율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살기 바쁜 나라에서는 자살할 생각을 할 시간적 여유조차 없습니다. 사람이 왜 자살을 하게 됩니까? 외로움을 ‘고독’을 견디지 못하여 자살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주고받고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은 ‘사랑받지 못함’과 ‘불필요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은 아무도 하나님께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 없으며, 따라서 아무도 하나님께 불필요한 사람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이 한 사람의 삶에 주는 중요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세요?
만일 어떤 사람이 사랑을 충분히 공급받았다면 그 사람은 누구에게든지 중요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말씀의 핵심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말씀은 ‘당신은 중요합니다’, ‘당신은 필요합니다’, ‘당신은 하나님께 매우 중요합니다.’ 평생을 직장에서 일만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일이 잘 될 때는 자기가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때로는 가족의 불만도 눌러가면서 직장 일만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회사에 출근해 보니 자기 자리가 치워져 있는 것입니다. 이제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나에게 가치를 두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다른 사람이 하나님께 소중하듯이 여러분의 자녀가 여러분에게 소중하듯이 하나님께는 여러분이 똑같이 소중합니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그려놓은 벽화를 보면 저울에다가 한쪽은 지구를 다른 한쪽은 사람을 올려놓고 무게 중심을 사람이 더 무거운 것으로 기울어지게 그려놓았습니다. 이것은 한 사람의 가치를 지구 전체 보다 더 큰 것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나라에 하루 평균 30명 이상 자살합니다. 자살하는 제일 큰 이유는 생활고와 가정불화입니다. 그러나 어렵다고 다 자살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자살 할 수 없습니다.
강남에서 생긴 이야기입니다. 고층 아파트에서 아들이 뛰어내리고, 어머니가, 아버지가 일가족 세 명이 뛰어내렸는데 놀랍게도 다 살았습니다. 이유는 아들은 비행청소년, 어머니는 날라리, 아버지는 제비족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의 가치를 미국의 생화학자인 돌프 빈더는 2달러 98센트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육체를 돈으로 가정했을 때 내린 결론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우리가 5천 원도 안 되는 가치일까요? 아닙니다. 살아있다면 그 가치는 달라집니다. 더욱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우리의 가치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예수님은 “천하보다 귀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엄청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감사하면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2. 인간이 지금까지 받았던 것 중의 가장 위대한 선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보다 더 좋은 선물이 또 달리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의 제일 큰 속성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려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주고싶어집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숨겨놓고 남겨놓는 것이 없습니다. 다 줍니다. 하나님의 속성 자체가 사랑이십니다.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7-8) 사랑한다고 하면서 주지 않으면 그것은 거짓입니다. 그래서 사단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지 않습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고 하십니다. 사단은 빼앗아 가려고 합니다. 물질, 건강, 생명을 빼앗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려고 하십니다. 자꾸만 뭘 받으라고 하십니다. ‘성령을 받으라.’, ‘축복을 받으라’, ‘깨끗함을 받으라’(마 11:5), ‘내 말을 받으라’, ‘구원을 받으라’,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마 21:22) 그러시더니 육체로 오셔서 육체가 죽임을 당하셔야 했던 마지막 밤을 제자들과 함께 지내시면서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마 26:26) 이제 당신의 몸까지 “받아 먹으라”고 하십니다.

성문 밖 멀리
푸른 언덕
귀하신 주님이 못박히셨어요,
우리 모두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보다 더 나은 사랑은 없어요,
우리 죄 값을 치루셨어요.
오직 그분이 하늘의 문을 열 수 있고,
우리를 그곳으로 인도할 수 있어요.

우리는 알지 못하며 말하지 못해요,
그분이 당하셔야만 했던 고통을.
그러나 그 분이 거기에 달리셨고 고통 당하신 것은,
우리를 위함이었음을 우리가 믿고 있어요.

베드로는 그 구원을 이렇게 고백했어요.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 1:18)

3. 인간이 지금까지 한 것 중의 가장 위대한 선택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제 하나님은 당신의 것을 우리에게 다 내어주신 것입니다. 이제 선택은 나에게 넘어왔습니다. 삶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아무 선택도 하지 않고 살아 갈 수는 없습니다. 선물이 주어졌습니다. 이것을 받을 것인지 받지 않을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선택할 때 영향을 끼치는 요소들은 많지만 결국은 내가 선택해야 하는 것이고, 내가 결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의 시간, 나의 돈, 나의 삶 내가 주님과 무엇을 해야할지 내가 선택해야 합니다.

보릿고개로 허덕이던 1960년대 초 어느 날. 교회에 점심을 먹으려는데 걸인이 교회로 들어왔습니다. 목사님은 함께 밥을 먹자며 그를 밥상 앞에 앉혔습니다. 그리고 식사 기도를 하려는데, 거지가 대뜸 소리를 지르는 거예요.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기도는 무슨 기도냐.” 그러는 겁니다. 성질 급한 목사는 홧김에 거지를 쫓아냈습니다. 그 날 밤, 목사는 기도를 하던 중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 거지가 얼마나 나를 욕하고 저주하는지 내가 너보다 잘 안단다. 나는 그 소리를 50년 넘게 들었다. 그래도 나는 매일 먹을 것을 주었다. 그런데 너는 어찌 밥 한끼 주지 않고 그를 내쫓느냐. 내가 그를 위해 십자가를 졌고, 지금도 그를 사랑하는 줄 모르느냐.”

본문 말씀을 보면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선택권을 우리에게 넘겨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격을 믿고 계십니다. 우리를 존중해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방관자적인 역할을 하시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적극적으로 바른 선택을 할 것을 촉구하고 계십니다. 성령을 통해서도 오늘 설교 말씀을 통해서도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적극성을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선택은 나의 몫입니다.
오래 전에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한 위대한 말을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수 24:15)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선택의 일입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유독 많이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누구든지”와 “만일” 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선택하지 않을 수 있음을 지적해 주는 말입니다.
다윗은 선택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라고 고백했습니다. 내 삶의 제일 위대한 선택이 있다면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을 선택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이 선물을 받아들이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당신을 위한 것이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에게는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아멘.

 

우선 순위 정하기

“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36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37 만나서 가로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38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39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저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어 쫓으시더라”(막 1:35-39)

시골에 살던 청년이 대구에 와서 직장을 얻게 되었습니다.
쓰는 돈보다 저축하는 돈이 더 많았습니다. 그래서 사글세에서 전세로, 전세에서 드디어 작은 빌라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대출을 얻었기에 갚아야 할 일이 태산이지만 너무 기뻐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아버지, 드디어 방 두 개 있는 작은 빌라를 구입하였어요. 어머님과 함께 한 번 다녀가시죠? 위치는 대구 봉덕동 파출소 근처에 맨션 빌라 301동입니다!” “그래, 수고했다. 내일 점심때쯤에 도착하마!” 그런데 약속한 시간이 훨씬 지났건만 부모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궁금하던 차에 아버님께서 전화를 주셨습니다. “아버님, 왜 아직 못 오시고 계세요?”
“아! 여기가 봉덕동은 맞긴 맞는데 빈손 빌라는 없다 한다 아닌가?” “아버지, 빈손이 아니라 맨션이에요, 맨션…!” 그 때 아버지 왈, “이놈의 자식아, 빈손이나 맨손이나 같은 말 아닌가?”
일설에 아파트나 빌라 이름을 어렵게 작명한 이유는 어르신들이 쉽게 그리고 자주 찾아오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특히 아버지와 시어머니가 그 대상이라 하는데, 그저 우스갯소리일 것입니다.
어쨌든 맨션과 빈손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맨션으로 찾으면 아들집에 오실 수 있고, 빈손으로 찾으면 망신만 당하다가 결국 사랑하는 아들집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단어 하나의 차이는 엄청난 차이와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어느 여 집사님이 사랑하는 남편에게 핸드폰 문자를 보냈습니다. “여보, 사랑해!” 그러자 그 남편도 고마움에 문자를 보냈는데 그 날 밤 그 집 난리도 아니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여보, 사망해!”로 보냈기 때문입니다. 교인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말 한마디 혹은 행동 하나에 아름다운 동행이냐 아니면 지겨운 동행이냐가 판가름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희생은 자신의 생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누구를 위한 언행의 희생과 봉사를 감히 희생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최소한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면 말입니다. 그 정도의 희생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런 고백을 하였습니다.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삼하 24:24).

초대교회 사도인 성 크리스톰은 기도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기도는 파선 당한 자에게 항구이며, 물에 빠져 죽어 가는 자에게 생명의 새끼줄이며, 넘어지는 자에게 지팡이가 되고 가난한 자에게 값진 보석이며, 병든 자에게 의사이고, 성도들에게 축복이며 환란의 구름을 헤치는 자에게는 그 불행을 정복하는 일이며, 인간 행복의 기초이며 계속된 기쁨의 원천이고 철학의 어머니이다.” 이 정의대로 보자면 이 세상에 기도보다 좋은 것은 없습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새벽을 활용하셨다.
예수님은 오늘도 새벽에 외진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이 장소는 이제 제자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새벽(prwiprwi:프로이)이라는 단어는 “pro:프로” 라는 기본전치사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프로는 “앞에, 전에, 정면에”라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루 일과를 시작하시기 전에 먼저 기도하신 것입니다. 또 중요한 일들을 앞두고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과 늘 하루를 함께 다니기 때문에 예수님은 조용히 기도하실 수 있는 시간으로 새벽 시간을 활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기도하고 계실 때에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흥분하여 예수님을 찾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예수님을 발견하자 소리를 지르며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전날 밤에 예수님이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자 사람들은 크게 놀랐고 그 소문은 순식간에 마을 전체에 퍼져 나갔습니다. 그래서 다른 날보다 더 많은 사람이 예수님이 거처하시는 집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놀려들었는데 병자를 고쳐할 예수님이 안 계시니 제자들 입장에서는 난처한 것입니다. 당연히 예수님을 찾아나서야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뜻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이제 병자를 고치시려는 예수님의 열정이 사라지셨단 말인가?
예수님께 나아온 이 많은 병자들은 어떻게 하고 떠나시려는 것일까?
이미 이곳 가버나움에서 얻으신 명성을 하루아침에 물거품으로 만드시려는 것일까?
그러나 예수님은 매사에 우선 순위를 이미 정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진정한 임무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고 하나님의 가족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천국복음입니다. 그리고 병 고치는 일은 부수적인 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10:38-42]
예수님은 어느 날 마리아와 마르다가 사는 집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 대접할 식사준비로 아주 바빴습니다. 그러나 동생인 마리아는 예수님 옆에 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참다못한 마르다가 예수님께 가서 마리아에게 명하여 자기를 돕게 해 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만 우선권을 부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는 구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일만 생각하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마르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염려하다”라는 헬라어는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는 사람들에게만 나타나는 단어입니다. 마르다는 최소한의 예수님께 대접할 음식만 만들면 되는 것인데 잡다한 부엌일에 매달려 있는 것입니다. 부지런히 하는 척함으로 알뜰 살림꾼이라는 인정을 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르다는 예수님보다도 자기 일에 집중되어 있는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언제 또 이 집에 오시게 될지 모릅니다. 이것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라도 더 듣는 것이 집안을 말끔히 치우는 것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일 찾아와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했지만 그들은 모두 자기들의 일로 예수님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해야 되는 예수님과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목사가 제일 화날 때가 언제이겠습니까?
심방 갔는데 집안은 깨끗하게 하고 삽니다. 그런데 “지난주에 왜 교회 못 나오셨어요?” 라고 물으면 “내 집안 청소하느라고 못 갔어요.” 그러는 겁니다.
여러분!
집안 청소하는 것 보다 교회 나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가게 문 열고 밭에 가는 것 보다 교회 나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주일날 산에 가는 것이 더 먼저인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성격이 급해서 자동차 운전할 때 빨리 가려고만 합니다. 그래서 조금 늦게 앞차가 가면 빵빵거리고 난리도 아닙니다. 그런데 막상 그 사람들 쫓아가 보면 별달리 급한 일도 없답니다.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정작 하나님의 입장에서 우선 할 일인지를 늘 생각해야 합니다. 하루 일과 중에서도 정해야 합니다. 새벽에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이 순서를 정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거기서 기도하시더니”(kajkei’:카케이) 는 “그곳에서도 역시”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정해진 곳에서도 하셨지만 동시에 늘 어느 곳에서나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늘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님이 없어지시면 기도하러 가신 줄 알았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기도는 힘을 생산해 냅니다. 기도는 없는 것을 있게 합니다. 기도는 초자연적인 기적을 가져오게 합니다. 기도는 사물을 변화시킵니다. 자기 마음을 변화시킵니다. 창조력이 있습니다. 부활의 능력이 있습니다. 길 없는 곳에 길이 생겨나고, 터널이 뚫리고, 돌같이 굳은 마음이 살같이 부드러워집니다.

저는 컴퓨터를 일찍 시작한 사람입니다. 86년도에 안양에서 IBM 16비트 컴퓨터를 소유하고 있던 사람이 저 혼자였습니다. 그리고 컴퓨터선교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보면 컴퓨터는 나홀로 컴퓨터는 없습니다, 모두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정보 홍수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포탈 사이트에 가도 정말 선정적인 홍보물들만 넘쳐납니다. 사용자들의 글들을 보면 가관도 아닙니다. 어디 하나 절제된 글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옛 말에 “내뱉는 다고 다 말이 아니다” 고 했습니다. 사진을 찍다보니까 인터넷에도 눈에 보기 좋은 사진을 많지만 마음이 닫는 사진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래서 어떤 사진 찍는 크리스천 분이 마음을 담은 사진 한 장 찍어보았으면 그럽니다.
제가 왜 컴퓨터 이야기를 하는지 아십니까? 몸으로 무엇을 하던 시대는 그래도 조금 더 생각해보고 했습니다. 편지 써 보셨지요. 얼마나 여러 번 섰습니까? 또 찢어 버리고, 또 찢어 버리고… 그러면서 옥석을 가리듯 좋은 작품이 나오는 것이지요. 컴퓨터 앞에 앉을 때 반드시 기도해야 됩니다. 컴퓨터를 통해서 무슨 일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으면 무수한 시간을 잡아먹을 뿐 아니라 생각지도 않은 엉뚱한 일을 하다가 시간을 다 허비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서기관, 율법사)은 자기 나름대로 율법에 우선 순위를 정해 놓았었습니다. 만약에 급박한 상황이 동시에 일어났을 때 어떤 일을 먼저 해야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도 어떤 것을 먼저 지켜야 하는가 하는 일로 중요성을 따졌습니다. 그래서 탈무드에는 “선생님과 부모님이 동시에 물에 빠졌는데 한 사람만 구할 수 있다면 누구를 구하겠는가?” 하는 질문이 나옵니다. 이와 같이 율법도 더 먼저 지켜야 되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정한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장사지내는 일이었습니다. 구약성경에도 시체는 오래 두지 말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장래가 나면 얼른 방을 붙이고 친인척이 다 도착을 안 해도 직계 가족만 있으면 얼른 시체를 장사지냅니다. 그래서 그들이 만든 미쉬나에보면 부모님 장래가 나면 얼마나 중요하냐 하면 제사장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도 부모님이 상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즉시 달려 가야합니다. 즉 제일 우선이 부모님이 장래 치루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 중에 하나가 마태복음 8:21-22절
“21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부모님의 장사를 굳이 지내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나를 따라오는 것이 더 우선순위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2:3-4절 “3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4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고 말합니다.
예수님 따라가는 일이 모든 우선 순위에서 반드시 제일 번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웨슬리의 제자가 웨슬리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주일날 교회에 나오다가 소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소를 꺼내주고 교회에 가면 교회 예배시간이 늦거나 이미 예배가 끝날지도 모릅니다.
소를 꺼내주고 교회에 가야합니까? 아니면 그냥 교회에 가야합니까?
웨슬리의 대답이 “소를 꺼내주고 교회에 오세요?, 그러나 그 소가 매주일 물에 빠진다면 그냥 버려 두고 오세요.” 그랬습니다.

우리 KCM MIR훈련을 받은 자매가 있습니다. 미국에 갔다는 소식도 있었고 저희하고 간혹 연락을 했었습니다. 시집도 안간 자매입니다. 그런데 지난 수요일인가 하나님께 먼저 갔다는 소식을 받았습니다. 암으로 고생하고 있었는데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중에 숨을 거두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러나 마지막의 임종을 하나님께 예배드렸습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할 일이 있다면 찬양하고 말씀보고 기도하며 예배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눅 10:42)
바로 이와 같은 경우가 바로 몇 주일 전에 예수님께 일어났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머무시면서 계속 병자를 돌보시는 일도 훌륭한 일입니다. 그러나 다른 동네로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늘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도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22:42) 기도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갑자기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늘 해오던 습관대로 그리고 배운 대로, 평소에 생각한대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늘 기도하고 전도할 것을 생각하는 사람에게 기회가 오고 보이는 것입니다. 죽음을 맞이할 때도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소에 생각해 놓았던 것이 마지막 순간에도 작용하는 것입니다. 순교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순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 예수 그리스도의 뜻이 나의 뜻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성육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세계적인 미국의 미래학자 레너드 스윗 박사는 “교회와 성도가 세상을 전도하고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세상을 알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뉴질랜드의 복음주의자 브라이언 메드웨이는 “교회에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대상은 사랑하지 않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들어가서 애쓰시는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애쓰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흔히 현시대를 일컬어 포스트모던 시대라고 합니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본질과 핵심은 결코 변할 수 없지만, 세상을 보고 대하는 방법은 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혹자는 오늘날 교회의 가장 커다란 죄는 실상 Commission(죄를 범함)도, Omission(태만)도 아니라 세상 속에 들어가 No Mission(선교하지 않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세상을 품에 안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 행하는 진정한 사랑과 선교가 없으면, 교회도 없다는 것이다.
아직도 예수님이 인생을 입고 오신 사랑과 은총의 사건(성육신)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오늘도 교회와 크리스천들을 통해서 세상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신 세상을 이해하고 품어, 변화와 구원을 이끌어 가는 사명과 역할을 다하는 우리 교회와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예언의 성취자 예수 그리스도

구약성경에는 약 300여 가지의 예언이 나옵니다. 이 모든 것은 구세주에 관한 예언으로 예수님이 모두 성취하셨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모두 이룬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이미 예언이 구약 성경에 나와 있으니까 그대로 따라하면 되지 않겠냐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첫 번째 예언의 성취 부분을 생각해 봅시다. 사람이 태어날 장소를 내가 결정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오래 전에 출판된 책으로 저자 죠쉬 맥도웰(Josh McDowell)이 쓴 “판정을 요하는 증거” 라는 베스트셀러였던 책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구세주에 대한 8가지 예언만이라도 특정한 한 사람이 성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것입니다. 스토우너 교수가 뽑은 8가지 예언은,
구세주가 나실 장소(미 5:2)
구세주의 태어나심을 예비할 사자(使者)의 등장(사 40:3)
나귀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슥 9:9)
친구에게 배신당하는 것(시 41:9)
은화 30에 팔리고(슥 11:12)
그 돈이 성전에 던져지고 연고자 없는 사람들의 묘지를 구입하는데 사용한 것(슥 11:13)
구세주가 대적자들에게 곤욕을 당해도 입을 열지 않은 것(사 53:7)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 못 박히는 것(시 22:16, 사 53:12) 등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 8가지 예언을 한꺼번에 성취할 확률은 10만조대 1쯤 될 것이라고, 스토우너 교수는 결론 지었습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 모든 예언이 사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들이 아닙니다. 위의 예언 중에서 혹 구약의 예언을 보고 따라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나귀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 ‘곤욕 당할 때 입을 열지 않는 것’은 혹 따라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다른 것은 따라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천사가 나타난다거나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가 그 돈으로 밭을 샀다던가 하는 것은 예수님이 직접 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섭리하시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2.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 3:14) 모세에게 나타나셨을 하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구역에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나타나셨을 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이와 같이 자신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요 8:58)
뿐만이 아닙니다. 세상 창조에 대해서도 증거 합니다. 적어도 그가 하나님과 함께 계셨거나 그것을 만드신 분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5-17)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3)

3. 예수님은, 모습을 드러내시지 않은 하나님의 육체적 형상이십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골 1:15)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을 입고 계셨습니다. 그가 육신을 입고 오셨기 때문에 우리가 볼 수 있었고 만질 수 있었고 우리와 동거함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인성이 되셨다는 것은 그도 피곤(요 4:6)을 느끼셨고, 갈증(요 4:7)을 느끼셨고 하나님을 의존하셨으며(요 5:19), 슬퍼 눈물을 흘리셨습니다(요 11:35).

본문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ejskhvnwsen ejn hJmi’n:에스케노센 엔 헤민)
(ejskhvnwsen:에스케노센)의 어근은 ‘skhnovw:스케노오’입니다. 에스케노센은 스케노오의 부정과거 능동태입니다. 스케오는 “야영하다, 천막을 치다”입니다. 구약시대 하나님은 모세가 친 장막에 처음으로 이 땅에 임재하셨습니다. 그 전에 잠깐씩 사람에게 말씀하시고 명령을 주신 적이 있지만 이제는 하나님이 직접 내려오셔서 이 땅에 거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이 모세가 광야에서 친 장막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얼굴은 모지 못했습니다. 출 33:20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출 33:23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요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으되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했습니다.

4.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하나님과 한 몸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요 10:30)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가르치신 것은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 28:19)입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성부, 성자, 성령)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삼위는 엄연히 구분되지만 동시에 하나이십니다. 이것을 아무리 인간의 지식으로 유추하여도 만족할 만한 해명을 할 수 없는 것, 그것이 신비입니다. 우리 인간이 다 이해하고 다 설명할 수 있다면 어쩌면 그분은 하나님이 아닌지 모릅니다. 태양과 태양광선 태양열로 우리는 삼위일체이심을 조금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하나님이시며,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고, 모습을 드러내시지 않은 하나님의 현신(現身)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을 통하는 길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예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행동방식과 행동의 동기를 이해하면 하나님의 방법을 이해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주장하신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요 10:30) 말씀 때문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사실 이 주장이야말로 대경실색(大驚失色)할 만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주장은 단순히 말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확인하셨으며 예언의 말씀들이 성취한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이심이 드러나게 되신 것입니다.

본문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헬라어에는 일반적으로 본다는 단어는 ‘이두’라는 단어가 사용됩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단어는 ‘이두’가 아니라 “ejqeasavmeqa:에데아오마이”입니다. 이 뜻은 ‘놀라운 광경을 보다’입니다. 어근단어는 ‘jqeasavmeqa:데아오마이’의 부정 과거 중간태로 ‘놀라운 상태에서 직접 목격했다’는 뜻입니다.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마 17:2, 막 9:2-8, 눅 9:28-36) 이 장면을 본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광경이었습니다.

우리는 적어도 구약시대의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증거를 가지고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구원 길을 하나님은 당신이 스스로 오셔서 다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오랜 구약시대의 기간을 통하여 하나님은 당신이 처음 선택한 민족이 당신의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한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이 직접 인도하신 땅에서 그들을 끌어내시고 벌을 주셨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바리지 않으셨습니다. 율법도 패하지 하니 하셨습니다. 당신이 다 만들어 놓으시고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그 모든 율법이 하나가 된 것입니다.

한국 전쟁 취재로 풀리쳐 상을 받은 히긴스(Marguerite Higgins)가 중공군과의 대전으로 몹시 지친 해병중대를 찾아 얼어붙은 콩을 씹고 있는 어느 병사와 대담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이라면 어떤 소원을 말하고 싶으냐” 하는 질문에 병사는 “내일을 달라”(Give me tomorrow-궵~ 미 투머로우)고 대답했습니다. 미래가 약속된다면 오늘의 고통은 문제가 아니라는 답변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미래에 대하여 우리들에게 약속을 하십니다. 소망을 주십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사느니라.”(롬 1:17)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요 6:28-29)
“네 믿음이 네 죄를 사했느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요 13:7)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율법에서 명한 흠 없는 거룩한 어린 양으로 하나님께 바쳐졌다는 그 사실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에서 믿음으로 변화한 것입니다. 구약시대가 율법을 지키는 것이었다면 신약 시대는 그것을 이루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20 그들의 이른바 그 열국에서 내 거룩한 이름이 그들로 인하여 더러워졌나니 곧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이르기를 이들은 여호와의 백성이라도 여호와의 땅에서 떠난 자라 하였음이니라 21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내 거룩한 이름을 내가 아꼈노라 22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23 열국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은 이름 곧 너희가 그들 중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내가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로 인하여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열국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겔 36:20-23)

에스겔 선지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이스라엘에 대해서 예언하였습니다. 처음 전반부는 하나님을 떠난 백성이 당하게 될 심판의 예언이었습니다. 그리고 중반이후에는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시켜 주실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그 중간에 있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 다음에 37장이 나오는데 그 유명한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의 환상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미 죽은 지 오래되어 뼈만 앙상하지만 하나님이 하시면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바로 이렇게 하시는 이유를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만 백성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부르심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을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시고 그들을 열국 중에서 모아 가지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네 열조를 사랑 하신고로 그 후손 너를 택하시고 큰 권능으로 친히 인도하여 애굽에서 나오게 하시며”(신 4:37)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신다면 그 길은 완전한 길이고 축복의 길이 아니겠습니까?
다윗은 이 진리를 알고 경험했기에 시편 23편에서 하나님을 이렇게 찬양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시 23:1-2)
우리도 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그 인도하심을 따라 축복과 은혜의 자리로 들어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좋은 길로 갈 때에는 이것을 깨달을 수 있는데 때때로 오는 환란의 자리에는 이 하나님의 손길을 깨닫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도 하신다면서 왜 이런 환란과 어려움의 길로 인도하시는가 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낙심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영국에서 북해도로 많은 어선들이 청어를 잡으러 갑니다. 그래서 청어를 잡아 가지고 수조에 넣고 돌아오다 보면 한 3-4일이 걸리는데 그 동안에 수조의 청어들이 모두 죽어 버립니다. 옛날에는 과학이 발달하지 못한 때여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어부는 놀랍게도 청어를 살려 가지고 돌아와서 남들의 두 세배의 값을 받고 청어를 파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어부들이 그 비법을 묻자 처음에는 가르쳐 주지 않더니 나중에는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는 청어를 넣은 수조에 바다메기를 한 두 마리 넣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다른 어부들이 일제히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격이지 메기는 청어 잡아먹고 사는 고기인데 메기를 넣어 청어가 다 잡아 먹히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어부는 메기의 배도 한계가 있는 것이지 끝없이 잡아먹는 것이 아니고 배가 부르면 못 먹기 때문에 하루에 서너 마리밖에는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하면서 3일 동안 10마리의 청어를 잃어버리고 다른 모든 청어가 살면 이익이지 않는가 하였습니다.
그래서 청어 수조에 메기를 넣고 바라보았습니다. 청어들에게 비상이 걸렸습니다. 안 잡아 먹히려고 청어들이 메기가 움직이면 정신 없이 쫓겨다니는 것입니다. 메기가 배가 불러서 청어를 잡아먹으려는 게 아니고 그냥 움직여도 청어들은 두려워서 정신 없이 도망 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도망 다니느라고 너무 바뻐서 죽을 새가 없는 것입니다. 게다가 온 수조에 고기들이 퍼드득 거리고 움직이니 자동으로 물 속에 산소들이 공급되어서 건강하게 되고 그로 인하여 영국 항구에 올 때까지 청어들이 살아있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내가 메기 같은 사람, 메기 같은 사건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로 깨어있음으로 인하여 성도답게 살아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게 하시려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이 진리를 안다면 우리는 환란 중에서도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2.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지 말라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 우리는 예수 이름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거짓말하고 다니면 세상 사람들이 당장 예수 믿는 사람이 거짓을 말을 한다고 욕합니다. 본문에서 더럽힌 이란 말이 각 절에 모두 나옵니다. 23절에는 두 번 나옵니다. 이 단어는 “ll’j;:하랄” 더럽히다의 어근이 입니다. 이 뜻은 “상처를 입히다, 모독하다”입니다. 심지어는 “살해하다” 라고도 사용됩니다. 하나님을 모독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죽일 수는 없지요. 그만큼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혔다는 뜻입니다.
본문 20절 “그들의 이른바 그 열국에서 내 거룩한 이름이 그들로 인하여 더러워졌나니…” 이 얼마나 당혹스런 일입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열국중에 알리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였는데 이 백성 때문에 이름이 더렵혀진 것입니다. 한마디로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격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
본문 21절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내 거룩한 이름을 내가 아꼈노라” 고 하십니다.

3.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

예수님이 가버나움 회당에 들어가셨을 “23 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질러 가로되 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막 1:23-24) 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사단은 더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우상에게 절하고 섬기는 것은 더러운 짓입니다.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제일 앞에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라고 기도해 놓고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행동을 한다면 이는 그 기도가 헛될 뿐 아니라 가증스럽다고 해야할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더럽히다” 라는 말과 똑같이 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거룩”입니다. 하나님은 “내 거룩한 이름”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거룩하다’의 “yvid]q;:코데쉬” 는 신성함을 뜻하는 말로 “봉헌된 것, 성소, 성도” 의 뜻으로도 사용됩니다. 하나님께 드려진 것, 그것이 거룩한 것입니다. 우리가 성도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 드려졌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vd’q:카다쉬;”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 뜻은 “성결하다. 선포하다”의 뜻이 있습니다. 문둥병 환자가 병이 고쳐졌으면 제사장에게 가서 판단을 받아야 합니다. 만일 이 병이 나았으면 제사장은 “카다쉬” 라고 선포해야됩니다. 이제 깨끗하다라는 것입니다. “카다쉬” 성결하게 되지 않으면 “코데쉬” 하나님께 드려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거룩하게 선포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과거에 우리가 탕자 같은 자였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돌아온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이 은혜로 인하여 날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평화를 누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유명한 시인 롱펠러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시상을 적은 메모쪽지가 6천불(7백 만원)에 팔렸다고 합니다. 미국의 대 실업가인 록펠러가 사인하면 그 메모지는 은행에서 백만 불까지 지불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피카소라는 화가는 종이 쪽지에 한 10분간 데생한 것이 집 한 채의 가치를 지녔다고 합니다.
우리는 휴지 조각 같고 넝마 같은 죄 속의 인간이지만 거룩함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려고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를 믿으면 우리는 죄 사함을 얻고 정결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엄청난 가치가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본문 23절 “열국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은 이름 곧 너희가 그들 중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가장 큰 이름입니다. 가장 거룩한 이름입니다. 이것을 무엇을 뜻합니까? 당연히 제일 크고 제일 거룩한 이름이 드러나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깨닫고 자기는 완전히 십자가 뒤에 숨어버렸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제일 중요한 가치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변경된 것입니다.

4. 결코 버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본문 말씀을 보면 사람에 의해서는 소망이 없음을 철저하게 깨닫게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그렇게 먹칠을 해 놓고 어찌 인간이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하나님이 아니면 이 땅에 소망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시면서 저들의 삶의 변화를 요청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두 큰 계명으로 요약되는 율법은 대단히 이상적인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그의 선민인 이스라엘도 거룩해야 한다는 명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
하나님처럼 거룩한 백성이 된다는 것은 실제로는 불가능한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 율법을 폐기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아들을 보내셔서 그것을 완성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율법의 높은 이상은 여전히 유효하며 오늘날에도 우리가 마땅히 지켜야 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에서 보듯이 저들은 그 율법을 제대로 지켜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 차례 책망을 받고 고난을 당하기도 하였고, 마침내는 그들이 세운 나라조차 망하는 수난을 겪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포기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그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하셨지만, 결코 저들을 포기하시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그의 구원 안에 끌어 안으셨습니다.

마하트마 간디의 자서전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간디가 어렸을 때, 하루는 친구들과 함께 놀다가 가게에서 구워 파는 양고기가 어찌나 먹고 싶었던지 궁리 끝에 집에 돌아와서 아버지의 침실을 뒤져서 동전 몇 푼을 꺼내들고 상점으로 달려갔습니다. 양고기가 너무 맛이 있어서 단번에 먹어 치우기는 했지만 저녁이 되어 집에 돌아온 그는 잠자리에 누웠어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이불 속에서 이리 구르고 저리 굴렀지만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한 일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한 참 고민하던 간디는 고통스럽게 밤을 지새우기 보다 벌을 받을 지언정 정직하게 고백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늦은 밤이라 아버지는 이미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작은 종이에 자신의 잘못을 몇 줄 적고 그것을 말아 아버지의 침실 문 열쇠구멍에 끼워 놓고 돌아왔습니다. 그랬더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다음날 새벽, 그는 편지를 본 아버지가 노한 모습으로 달려오실 것 같은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침실로 향했습니다. 열쇠구멍에 꽂아 놓았던 종이는 없었습니다.
두려운 마음으로 열쇠구멍으로 방안을 보니 아버지가 편지를 읽으시며 눈물을 닦고 계셨습니다. 어린 간디는 방문을 열고 들어가 자신의 잘못을 정직하게 고백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간디의 잘못을 용서하고 뜨겁게 포옹을 해 주셨습니다. 죄인인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저지른 죄를 겸손하게 고백하고,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는 것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이 그가 제시한 율법을 제대로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그 명령을 철회하시지 않은 것은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하여야 할 삶의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기간은 미완성된 단계로 완성을 향해 자라나는 시기입니다. 우리가 이 땅의 삶을 마칠 때, 우리는 비로소 영원한 생명을 가진 존재로 완성이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여기서 그 계명을 철저하게 지키지 못하였다고 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셨던 구원을 취소하시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우리로 계속 그 목표를 포기하지 않고 달려가도록 이끌고 계십니다. 오늘날 성령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낙심하여 주안에 거하는 삶을 포기하고 나가지 않도록 붙들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포기하지 않고 항상 우리의 삶의 궁극적인 목표로 붙잡고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

 

편견의 위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28 베드로가 여짜와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31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막 10:28-31)

중국고사에 고대 중국인들은 심장이 오른쪽에 있고, 간장은 왼쪽에 있는 것으로 전승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과학자요 신부였던 이탈리아의 쟈크롱호가 ‘인체해부학’ 이라는 책을 중국어로 번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는 심장은 왼쪽에, 간장은 오른쪽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해부를 해서 과학적으로 공인된 의학이론입니다. 그런데 그 책을 읽은 중국인들은 ‘아, 서양인과 동양인은 얼굴이 다르듯이 속 내부도 다르구나! 우리는 심장이 오른쪽에 있고, 간장이 왼쪽에 있는데 그들은 심장이 왼쪽에 있고 간장이 오른쪽에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참 심각한 무지요 편견입니다. 내가 믿고 있는 것이 성경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인간에게 무능보다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무지는 더 무섭습니다. 나아가 무지보다 더 무서운 것은 편견입니다. 편견보다 더 무서운 것은 편견을 정당화하고 보편화하는 것입니다. 무능한 것은 불행합니다. 알기는 아는데 잘못 아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입니다.
결혼에 실패한 한 여성이 “모든 남자는 다 늑대와 같다.” 라고 하는 것은 편견입니다. 한 남자에게 상처를 받은 그 자신의 편견이 모든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모든 여성은 여우와 같다.” 한 여성에게 상처받은 남자가 모든 여성을 그렇게 평가하는 것도 편견입니다. 그런데 더 무서운 것은 자기 편견을 남에게 보편화하는 강요입니다. 친구를 보고 “너 결혼하지 마라. 남자들은 다 늑대야.” 자기가 경험한 그 불행을 가지고 그것이 기준인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 보편화하는 것은 매우 무서운 일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편견이라는 병을 앓고 있습니다. 심각한 지경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 뿐 아니라 인간이 모인 공동체 안에 있는 인간관계의 가장 두꺼운 장애물은 편견입니다. 부부간에도 편견이 있습니다. 친구간에도 편견이 있습니다. 사회 정치에도 편견이 있습니다. 내가하고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면 모든 것이 잘못된다는 시각, 이것이 편견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있는 편견을 씻어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특권 의식이 문제입니다.

주님의 제자 베드로가 예수님께 이런 말을 했습니다. 본문 28절 “베드로가 여짜와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베드로의 이 말은 아주 무서운 편견의 말입니다. 베드로가 주님 앞에 이 말을 한 것은 그는 당당한 제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정당한 예수님 앞에 합격자로 자처하지만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는 우등생으로 자처합니다. 예수님은 이 베드로를 볼 때 아직 더 성숙해져야 하는데 그는 우등생 의식만을 가지고 주님 앞에 큰 소리를 칩니다. “보소서(!Idou;:이두)” 는 주님께서 제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키시기 위하여 자주 사용하시는 단어입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말하면서 다른 제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서 말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만 겸손히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제자들도 들으라고 하는 소리입니다.

베드로의 이 편견은 오늘 우리 안에도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베드로가 가지고 있는 이 특권 의식, 주님 앞에는 미달하고 있는데도 나는 우등생인 것처럼 편견을 가지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이 베드로를 향하여 염려스러운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당당한 줄 알고 내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좇았다고 큰소리를 쳤지만 예수님이 요구하는 제자도의 기준은 너무 높습니다.

진정한 제자가 되려면

본문 29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이 높은 수준에 미달하는데도 베드로는 당당한 줄 알고 큰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제자가 되기 위해서 포기해야 하는 세 가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첫째는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 혈육과 인간관계입니다. 이것은 가족과 인간관계의 파괴적 의미가 아니라 가정과 인간관계에 우선하는 믿음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둘째는 “집이나 전토”를 버려야 하는 문제입니다(마 19:29 “집이나 형제나”, 눅 18:29 “집이나 아내나”). 집이나 전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소유한 모든 재산을 의미합니다.
셋째는 “자기를 부인하고” 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쫓았다고 말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버리지 않았습니다. 자기 자신을 버리지 않은 것은 앞의 두 가지를 버렸던들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딱 베드로처럼 되니까 그렇습니다. 자기 자신의 자랑거리가 됩니다.
어떤 율법사가 주님께 와서 “선생님, 사람이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그럽니다. 예수님이 “율법을 아느냐?” , “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그러나 제가 다 지켰습니다.” 그 때 주님이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네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 그러면 영생이 있으리라.” 이 율법사는 부자였습니다. 그는 재물 때문에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인생은 나와 하나님 사이에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가지 못하게 하는 한 가지가 모든 인생에게 다 있습니다. 이 율법사는 재물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재물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합니다. 재물만이 문제입니까?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이념, 자신의 예술관, 자기의 쾌락을 추구하는 탐욕, 욕심 때문에 나아가지 못합니다. 인간은 무엇인가 사람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깨뜨리지 않고는 주님께 갈 수 없습니다. 이 율법사가 그 한 가지, 본인에게 있었던 그 재물관이 예수님께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깨뜨리지 못했습니다.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돌아갔습니다. 베드로는 버리고 왔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아직 깨뜨리지 못했습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리시기를 축원합니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본문 31절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들이 많으니라.” 는 이 말씀에 는 두 가지를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첫째는 믿음의 현재성을 강조합니다. 이 본문은 과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현재성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을 때 제자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사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잠시 틈을 내서 기도하러 가시든지 제자들과 함께 없는 그 시간에 제자들끼리 무슨 놀이를 했습니까? ‘누가 크냐’ 는 것으로 시비했습니다. 예수님 제자 중에 8명이 갈릴리 어부 출신입니다. 비 어부출신 중에 가룟 유다는 그 당시에 독립운동 단체의 멤버입니다. 상당히 수준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열심당 시몬도 상당히 수준 있는 사람입니다. 그 당시 열심당은 율법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위에 있는 사람입니다. 마태도 세리입니다. 그가 로마의 식민지하에서 그래도 공직자입니다. 그러므로 어부들과 비 어부들, 이 사람들이 누가 크냐 라고 다툴 여지가 있고 어부들끼리도 누가 크냐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 중에 누가 크냐? 그 모습을 보고 예수님께서 오셔서 탄식을 하셨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왜 서로 의논하느냐? 왜 다투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누가 크냐는 내 관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예배드리는 교회에 와서 누가 크냐는 것이 하나님의 관심일까요? 네가 앞자리에 앉았는가? 뒷자리에 앉았는가? 그것이 성령의 관심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런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내가 해야되고 우리교회가 해야되는 편견입니다. 선교지에서도 이런 편견이 있습니다. 나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되 다른 사람에 대한 편견에 사로잡히면 안됩니다.
여러분! 경기장에서 게임하는 선수들이 선배냐 후배냐 그것이 문제입니까? 축구경기 하는 선수들은 누가 넣든 골을 넣어 팀을 이기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야, 선배가 골을 넣기 전에 너는 넣지 마.” 하면 이런 팀은 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주안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먼저 받은 은혜입니다. 잘 누리시기 바랍니다. 먼저 받은 기회를 잘 살리시기 바랍니다. 먼저 받은 충성에 사명을 감당하기 바랍니다.

둘째는 삶의 평가와 심판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 먼저 된 자들은 바리새인들과 제사장, 서기관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들은 먼저 된 자들입니다. 그들은 특권층입니다. 바리새인과 제사장과 서기관으로 태어나는 자체가 놀라운 기득권입니다. 이 사람들과 항상 함께 대치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세리와 창기들과 병자들과 죄인들입니다. 여기서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자가 누구입니까? 바리새인입니까? 세리와 창기들입니까?
예수님은 성경을 가르치실 때 이 두 부류를 항상 염두에 두고 가르칩니다. 마 21:31 “세리와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언제나 두 부류를 염두에 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는 것을 싫어합니다. 좌냐 우냐가 아닙니다. 좌도 치우쳤고 우도 치우쳤습니다.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기준에 돌아온 세리와 창기들은 구원을 받았지만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 세상의 특권의식이 마치 결국은 자기들의 심판을 자기가 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심판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엡 2:8).

오늘 우리는 실력을 높여야 합니다. 막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몸을 화목제물로 주려 하심이라” 영적 실력의 최고봉은 섬김입니다. 알고 잘난 척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섬기는 분량을 높이는 것입니다. 때로는 알고 있지만 상대방이 스스로 알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주는 미덕이 필요합니다. 그것도 모르느냐는 식으로 몰아세워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진정 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기다려 줄줄 아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을 기다려 주셨습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해야 하는 그 자리에서까지 정신을 못 차리고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행 1:6) 지금 예수님보고 “왕이 되실 때가 지금입니까?” 라고 묻는 것입니다.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에이트 빌로우(Eight Below)란 영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남극에서 활동하는 한 탐험대원들이 사고를 만나 거의 죽을 뻔했지만 8마리의 썰매 개들 때문에 간신히 살아남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기상악화와 부상치료로 탐험대원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살려준 8마리의 개를 남극에 남기고 급히 철수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개를 사랑했던 주인공은 곧 돌아온다는 약속을 하고 남극을 떠났지만 여러 사정으로 그 약속을 이행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개들은 남극에서 175일 동안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투쟁하고, 주인공은 자기들을 살려준 개를 배반할 수 없다고 개를 찾아 나서 결국 찾는 이야기입니다. 은혜를 입은 개에게도 이같이 해야하는데 우리는 하나님께 얼마나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까?

몇 일전 컴퓨터를 고치고 있던 정 집사님이 계속해서 하드디스크 하나가 인식이 안 된다고 시모스(SMOS)에서 확인하고 마스터와 슬라이브를 조정하면서 땀을 흘렸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고생하더니 나중에 하는 말이 전원을 연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다 해 놓고 전기를 공급하지 않으면 제아무리 컴퓨터라고 해도 아무것도 되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것 다 해 놓고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전원을 연결하지 않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시 29:11)
우리는 그리스도와 십자가 외에 다른 자랑이 너무 많이 튀어나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앞에 계셔야 합니다. 예수님을 나의 등뒤로 돌려놓고 우리가 아무리 나서도 해답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힘이 우리의 원동력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