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여자의 이야기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6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룻 1:16-17)

룻기는 사사시대에 있었던 일입니다. 사사기는 여호수아 이후에 왕정 국가가 세워지기까지의 시대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사사시대의 마지막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룻기 다음에 나오는 책이 사무엘 상하입니다. 이스라엘의 사사는 13명이 있었고 마지막 13번째 사사사가 삼손입니다. 삼손 사사이후에 사사는 끊어졌고 한마디로 무정부 상태나 마찬가지 시대가 잠시 이어집니다. 바로 이 때에 미가라는 거짓 제사장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면서 이스라엘의 지도자 역할을 해야할 레위인들이 극도로 타락합니다. 그 일로 인해 베냐민 지파와 이스라엘에 싸움이 일어납니다. 한마디로 집안 싸움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땅은 극도의 불안과 편안하게 살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 땅에 흉년이 들었습니다(룻 1:1). 더 이상 버티고 살아가기가 힘든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런 극심한 불안과 흉년으로 더 이상 살기 힘들어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을 버리고 떠나야만 하는 평범한 한 가족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자꾸만 이민 가고 싶은 나라는 좋은 나라가 아닙니다.
이들이 살던 곳은 베들레헴이었습니다. 엘리멜렉과 그의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 말론과 길룐은 이곳을 떠나 타향살이를 하기로 작정하고 떠납니다. 유대인들은 가능하면 이사를 갈 때 서쪽으로 가지 동쪽으로는 가지 않았습니다. 동쪽의 모압 땅은 그 때에 여호와를 모르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결과는 최악이었습니다. 잘 살아보겠다고 요단강은 건너간 이들의 삶은 더 이상 망가질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가장인 엘리멜렉이 먼저 병에 들어 세상을 떠났습니다. 남편은 세상을 떠났지만 두 아들이 있었기 때문에 나오미는 견디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10년이 지나 두 아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이렇게 되어 나오미는 이방 여자인 두 며느리인 오르바와 룻과 함께 남게되었습니다. 잘 살겠다고 건너온 이방 땅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슬픔을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겠습니까?
나오미는 더 이상 모압의 이방인의 땅에 머물러 있어야할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슬픔을 당한 나오미가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돌아갈 생각을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젊었을 때의 좋은 추억이 있는 고향으로 가고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씨 좋은 두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가겠다고 따라나섰습니다. 만류도 했지만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그저 보고 있다가 유대와 모압의 경계인 요단강에 이르렀습니다.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 모압 땅으로 모두 돌아가라고 간곡히 타일렀습니다.
며느리들은 시어머니인 뜻을 잘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낯선 타국에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말해주었습니다. 아마도 자신의 경험에 우러나오는 이야기를 했을 것입니다. 아프리카에 있는 선교사님 사모님은 고향의 이 향수에 걸려 대한민국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면서 눈물 흘린 것이 얼마인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또한 베들레헴에 가서는 남편 구하기도 어렵고 한마디로 여자 셋이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힘들 것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오르바는 시어머니와 입을 맞추고 모압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룻은 돌아가지 않고 성경 전서를 통해서 가장 아름답다고 할 만한, 우리가 영원히 기억할 만한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16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룻은 나오미와 떨어지게 될 수 유일한 일은 죽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죽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다른 말로 하면 사람이 할 수 있는 한 시어머니 나오미를 결코 떨어지지 않겠다는 서약입니다. 사실 결혼식에서 “죽기까지 갈라지지 않겠다.”는 말은 여기서 유래되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돌아온 나오미

나오미가 모압 땅에서 살고 있는 동안 베들레헴은 변했습니다. 10여 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으니 말입니다. 그리운 고국, 정든 고향으로 돌아오니 감개도 무량하거니와 희망이 넘쳤을 것입니다. 아마도 공기가 다르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10년 전의 가족과 고향을 떠나 앞날의 희망을 바라보며 고향을 떠났을 때의 일도 회상했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그렇게 많은 사람이 베들레헴에 살고 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골의 단조로운 생활에서 나오미가 돌아온다는 소식에 마을이 술렁였을 것입니다. 나오미가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에 마을 사람들이 다 그를 맞으러 나갔습니다. 그들은 마을에서 가장 얌전했던 부인, 전날의 젊고 아름다웠던 새색시 엘리멜렉의 아내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날에 당한 갖가지 슬픔과 고생으로 주름살이 잡히고, 또한 긴 여행으로 지쳐서 들어오는 여인을 바라볼 때 그가 나오미라고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그를 둘러서서 나오미의 여윈 얼굴을 바라보며서 “이가 나오미냐?”(1:19) 고 하였습니다. 나오미는 “기쁨, 즐거움”이라는 뜻입니다. 그때에 나오미가 사람들에게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21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뇨 하니라”(룻 1:20-21)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를 건넌 후 수르 광야에서 3일을 여행하여 지치고 힘들어 있을 때 물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물은 소금기가 있어서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마라(쓴 맛)’이라고 붙였습니다. 바로 그 ‘쓴 맛’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삭을 줍는 여자

나오미와 룻이 베들레헴에 돌아왔을 때는 마침 보리를 거두어 드릴 때였습니다. 유대인은 예나 지금이나 빵을 주식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보리추수는 중대한 사회적인 경제적인 행사였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전날에 아름다웠던 나오미를 측은하게 생각하면서도 뭔지 알 수 없는 서먹함을 느끼는 그런 때였습니다. 그리고 함께 따라온 며느리 룻은 모압 여자이고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나라 사람이었지만 동네 사람들은 예전의 나오미를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을 것입니다. 고향이긴 하지만 이제 막 들어온 처지라 보리 이삭이라도 줍지 않으면 먹고 살길이 막막한 두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룻은 시어머니에게 밭에 나가서 보리 이삭을 주워 오겠으니 허락해 달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때나 되어서야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는 추수하는 사람이 이삭을 주를 수 있도록 한번 거둔 밭에 가서 다시 거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뿐입니까. 아예 밭의 한 모퉁이는 다 거두지 말고 남겨 두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은 이방인이나 나그네를 위하여 그렇게 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바로 지금 나오미와 룻과 같은 형편의 사람을 위해서 마련해 놓은 법입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하기를 “이웃집에 가서 낫을 좀 빌려오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이 아들이 이웃집에 갔다 와서 하는 말이 “낫을 빌려줄 수 없다고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며칠 후에 바로 그 이웃에서 이 집에 낫을 빌리러 왔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하기를 “낫을 빌려 주라.”고 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항의를 했습니다. “며칠 전에 저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는데요.” 그 때에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저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도 빌려줄 수 없다, 이것은 복수다. 저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려준다라고 말하면서 그런 마음으로 빌려주면 이건 증오다. 거절당했다고 하는 것을 다 잊어버리고 아무 상관없이 깨끗한 마음으로 그저 낫이 필요하다니까 빌려준다 하는 마음으로 빌려주면 이것이 긍휼이다.”라고 했습니다.
긍휼이란 남을 불쌍히 여겨서 돕는 마음입니다. 히브리어로 ‘헤세드’ 헬라어로는 ‘엘레에모네스’로서 “인자, 자비, 사랑, 불쌍히 여긴다, 민망히 여긴다.” 등으로 번역이 되고 있습니다. 왓슨(Thomas Watson)은 사랑과 은혜와 긍휼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세 가지는 하나님 품속에서 나란히 살아가는 의좋은 세 자매”라고 말합니다. “사랑이 애인을 방문하는 친구와 같은 것이라면, 긍휼은 병자를 방문하는 의사와 같은 것이다. 은혜가 죄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애정이라면, 긍휼은 죄의 결과로 비참한 상태 속에 있는 사람을 향한 애정이다.”라고 말합니다. 긍휼은 저주받아 마땅한 죄인에게 저주하지 않는 것입니다. 무시해도 될 사람을 무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버림받아야 할 사람을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며 도와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18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 19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음이니라”(신 10:18-19)고 하셨습니다.
이날 룻이 나오미의 남편과 혈연 관계가 있는 보아스의 밭으로 이삭을 주우러 간 것은 우연이었을까요? 참 잘된 일이었습니다. 룻은 보아스의 밭으로 가서 추수하는 사람의 뒤를 따르며 이삭을 주웠습니다. 이런 모습과 광경은 팔레스틴 지방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입니다. 이 때 여자들은 노랑, 푸른색, 붉은 색의 옷을 가장 많이 입고 자기에게 어울리는 머리에 쓰는 수건이 있습니다. 룻도 자기에게 어울리는 옷과 수건을 쓰고 나갔을 것입니다. 밭의 주인인 보아스가 추수의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알아보려고 나왔습니다. 보아스는 이 때 운명처럼 다가오는 한 여인을 보았습니다. 감독하는 사람들을 불러 “이는 뉘 소년이냐?” 고 물었습니다. 일꾼들은 그 여자가 바로 나오미와 함께 온 여자라고 소개했습니다. 보아스는 다른 곳에 가지 말고 자기 밭에서만 이삭을 주으라고 하여 이 말을 룻이 듣고 감사하게 생각했습니다. 보아스는 일군들에게 줌에서 조금씩 뽑아버려 룻이 줍게하라고 했습니다. 그레서 룻은 보리를 한 에바나 거두어 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보리만 얻은 것이 아니라 보아스의 마음까지 얻은 것입니다. 이 사랑스런 스토리는 계속 이어집니다. 나오미의 허락과 작전으로 이들의 만남은 혼인하기에 이릅니다.

결단과 하나님의 섭리

남편 엘리멜렉을 따라 모압 지방으로 간 것은 아주 큰 실수였는지 모릅니다. 그곳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었으니 말입니다. 그 때 남편이 가자고 할 때 “목숨걸고 말렸어야 하는데…” 하는 후회를 했을지도 모릅니다. 왜 안 그랬겠습니까? 그러나 나오미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모든 삶의 주인인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실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룻이 나오미를 따라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인격, 그의 성품, 그의 믿음을 본 것입니다. 이방인인 모압 여자들에게 시어머니로서 그런 신앙심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흔들리지 않는 그의 믿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보아스가 룻을 만들었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좋은 부모가 좋은 자녀를 만들고, 좋은 선생님이 좋은 제자를, 좋은 아내가 좋은 남편을, 좋은 남편이 좋은 아내를 만드는 것입니다. 나오미의 인격과 신앙심은 룻을 결단하게 만들었습니다. 룻은 단순히 나오미를 따라간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영원히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결심했습니다. 나오미가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고 할 때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라고 하면서 따라갔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두 며느리(오르바, 룻)가 다 따라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두 나라의 경계선인 요단강에 이르자 나오미의 권면을 듣고 오르바는 모압으로 돌아갔습니다. 오르바를 나쁜 여자라고 할만한 근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오르바는 룻과 같지는 않았습니다. 룻은 시어머에게서 인간의 면만을 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고 한번 결심한 것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결단이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오르바와 같은 신앙은 많이 있습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따라갑니다. 아마도 결정적으로 베들레헴에는 남자가 별로 없어 시집가지 힘들다는 말에 뒤돌아 섰는지 모릅니다. 룻은 그런 것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15 나오미가 또 가로되 보라 네 동서는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16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룻 1:15-16)
룻은 보아스와 결혼하게 되었고 다윗의 증조모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방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통해서 다윗이 나게 하시고 그 후손에서 예수그리스도가 탄생하시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룻의 이 고백처럼 우리가 “주여! 주님을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고 강권하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할 때 하늘의 모는 천사들도 우리 주님도 하나님도 기뻐하실 줄 믿습니다.

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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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19-20)

‘칼 힐티’가 쓴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라는 책에 보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발견하는 날이다.” 라고 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22세 때 자기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온 세계가 무너진다 해도 내가 꽉 붙들고 놓을 수 없는 이념, 내가 그것을 위해서 살고 그것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사명을 나는 찾아야 한다.” 고 했습니다.
자본주의의 문제점 중의 하나가 물질 중심에 있다는 것입니다. 서양에서는 이런 폐단을 기독교 정신으로 극복해 왔습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는 그것이 없거나 부족한 상태입니다. 그래도 제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개똥 철학이라도 있었는데 지금은 대학가에서 신학교에서 조차 그런 것을 이야기하는 학생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저 다른 사람처럼 크고 화려하게 돈 많이 버는 것이 마치 사명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시사 잡지 타임지가 미국을 움직이는 가장 영향력 있는 100명을 선정했는데(2006년) 그 중에 1위는 여성 토크진행자인 오프라 윈프리였습니다. 그녀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의 시청자가 어림잡아서 천만 명이 넘습니다. 그녀의 말 한마디, 행동 한가지는 대단한 영향력이 있습니다.
그가 가난한 보육원을 방문하여서 그곳에 도움이 필요하다고 10초만 이야기하면 다음날 수십 억의 기부금이 들어옵니다. 그녀가 어느 책을 읽었다고 하는 말 한마디만 하면 다음날 그 책은 미국의 베스트셀러가 됩니다. 그의 이런 영향력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을까요. 그녀는 혼혈아로 태어나서 가난과 아픔 속에 자랐지만 혼자 공부하면서 성경의 모세를 통해서 오늘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자서전 “이것이 사명이다.” 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보면 윈프리의 네 가지 인생철학이 나옵니다.
첫째, 남보다 더 가졌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사명이다.
둘째, 남보다 아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사명이다(아파 본 사람만이 아픔을 겪는 사람에게 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남보다 설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망상이 아니라 사명이다.
넷째, 남보다 부담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강요가 아니라 사명이다.

여러분, 사명이 무엇일까요? 사명은 생명보다 더 귀중한 것입니다.
사실, 이 세상에 생명 보다 더 소중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사람의 생명 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명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20:24절에서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기의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사도행전 14:19에 보면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페이산테스:충동, 설득)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을 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치니라.” 고 했습니다. 죽을 뻔한 것입니다. 여기서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당시 바울을 돌로 친 사람들은 이제 이만하면 죽겠구나 생각하고 갔다가 버린 것입니다.

훗날 바울은 자신의 삶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후 11:23-28에서 “23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뻔 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 25 세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28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여러분, 보통 사람 같으면 아마 이런 경우에 좌절에 빠져 아예 포기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다시 일어납니다. 그 정도로 쓰러질 바울이 아닙니다. 다시 툭툭 털고 일어서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다음 목적지 더베로 향했습니다.

사명은 삶에 열정을 일으킵니다.

사명이 없는 사람은 한가합니다. 사명이 없는 사람은 할 일이 없습니다. 사명이 없는 사람은 지금 내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를 모릅니다. 사명은 우리의 사람을 다할 때까지 열정을 일으킵니다. 사명이 절실해 질수록 마음이 열정으로 타오릅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딛 2:14)
하나님도 열정의 하나님이십니다. 온 천하와 우주는 하나님의 열정의 산물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뜨거운 구원의 열정입니다. 성령도 불처럼 역사 합니다. 성령은 비전의 영이요 열정의 영이십니다. 평생 사명은 열정과 희망의 원천입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가운데 위대한 일을 계획하셨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은 누구나 열정의 사명자가 될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선교를 하던 리빙스턴이 한번은 아주 무서운 짐승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졸도를 하고 말았습니다. 죽은 줄 알았는데 깨어나 보니까 몸에 발톱자국만 몇 개 나있고 아무 이상이 없었습니다. 그때 그가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사명을 다 할 때까지는 결코 죽지 않는다.”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왜 살고 있습니까?
나이가 젊어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해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사명이 있기 때문에 이 사명 감당하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연장시켜 주신 것입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요 9:4). 일할 수 있을 때 충성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먼저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명자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내가 사명을 받지 않고는 이 말씀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본문 19절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최후에 주어졌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받으려면 예수님의 제자가 먼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 무슨 시험 봐서 되는 일이라면 저 같은 사람은 참 큰일입니다. 기억력은 바닥을 치지요, 몸으로 하는 운동 못하지요 뭐 하나 자신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제자 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제자를 뽑을 때 하시는 말씀은 그냥 나를 따라오라는 것입니다. 그냥 따라가면 됩니다. 순종이예요. 순종보다 귀한 것은 없습니다. 뭐 그렇게 이유가 많고 핑계가 많으면 안됩니다. 왜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을까요? 믿음입니다. 믿으니까 따라가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내 삶을 내가 인도하는 것보다 그분이 인도하시도록 맡겨 드리는 것입니다.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 이것이 우리의 최종적인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제자가 제자를 만든다.” 내가 제자를 삼으려고 하지 않아도 제자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제자가 되지 못했다면 제자는 만들 수 없습니다. 본문 20절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내가 지켜야 제자가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제자 삼지 못하는 것은 찬송가(256장:눈을 들어 하늘보라) “외치는 자 많건마는 생명수는 말랐어라.”라고 탄식하는 가사가 있습니다. 생명수가 무엇이겠습니까?

가르쳐 지키게 하라.

20절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명령입니다. 누구의 명령입니까?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입니다. 여러분! 거절할 수 있는 명령이 있고, 거절할 수 없는 명령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한 거역할 수 없는 명령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은 아마도 예수님이 제자들과 늘 함께 하면서 3년 반 동안 삶으로 보여준 모든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19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19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여기에 구체적으로 세 가지 명령형 동사가 나옵니다.
첫째는 “가라”는 것입니다. 원문에 ‘가서’는 “poreuqevnte”:포류덴테스”로 “가라”입니다. 문법적으로는 제일과거 분사형인데 “지속적으로 나아감을 뜻합니다.” 이 단어는 “poreuvomai:포류오마이” ‘나아가다, 횡단하다’에서 온 말입니다. 또 이 말은 “parapikrasmov”:파라피그라스모스”에서 나왔는데 이 뜻은 “격분, 성남, 도전”을 뜻하는 말입니다.
두째는 “oumaqhteuvsate:마데튜사테” 제자를 만들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baptivzonte”:벺티스트” 세례를 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회개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새 사람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원문에 첫 번째와 두 번째 단어 사이에 “ou+’n:운” 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 단어의 뜻은 “이제, 때”를 말합니다. 원문의 단어 순서대로 연결하면 “가라 이제 제자를 만들러”가 됩니다. 가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제자를 만들기 위해서 가는 것입니다. 사명 받은 사람의 가는 모습은 힘이 있습니다. 정열이 있습니다. 눈이 살아 있습니다. 가는 이유는 제자를 만들기 위해서 입니다.

미국의 어떤 목사님(유명한 설교가인 Caryle Marney)이 경찰 훈련을 받은 개를 사서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동네아이들의 야구공이 날아와 유리창을 깼습니다. 화가난 목사님은 “Go toschool : 학교 운동장에 가서 놀아라”고 소리쳤습니다. 그 순간 옆에 있던 개가 서너 번 문에 뛰어 오르더니, 안 열어주니까 넓은 유리창으로 돌격하여 나아가 공을 물고 왔다는 것입니다. “Go to:가라” 라는 말을 알아듣고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달려나간 이 개는 자신의 사명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오래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울산에 살던 분이 서울로 이사를 왔습니다. 이 개는 영리해서 입에다 돈을 물려주면 푸줏간에 가서 고기를 사왔습니다. 주인은 여느 때와 같이 개 잎에다 돈을 물려주었습니다. 이 개는 고기를 사오라는 것으로 알고 고기를 사러갔습니다. 오디로 갔겠습니까? 주인은 그만 서울로 이사왔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개에게 심부름을 시킨 것입니다. 이 개는 경부 고속도로에서 거품을 물고 쓰러져 죽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개보다 못한 사람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은 언제나 일할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많은 사람이 그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쭈그리고 앉아서 “나는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와서 이렇게 의미 없이 지내고 있나?”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의미 없이 태어나고 목적 없이 온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세상에 필요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미쳐 발견하지 못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야를 넓혀 주시므로 우리 자신이 하나님에게 얼마나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십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자신의 사명을 우선으로 선택합니다. 이스라엘 국회는 세계적인 석학 아인슈타인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임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아인슈타인은 정중하게 사양하였습니다. 이유는 “대통령을 할만한 인물은 많이 있으나 물리학을 가르칠 학자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수장 벤그리온도 어느 날 갑자기 수상직을 사임했습니다. 기자들이 몰려와서 사유를 묻습니다. 그는 “키브츠 농장에서 일할 일꾼이 부족합니다. 수상은 내가 아닌 누구라도 할 수 있으나 땅콩 농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닙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이사야는 자신의 사명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 하였습니다. 이 이사야의 고백이 저와 여러분들의 고백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힘써 행하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출 20:9, 신 5:13)

솔맨이라고 하는 화가가 있었습니다. 결혼하고 얼마 안된 젊은 나이에 그는 중병에 걸렸습니다. 의사가 말해줍니다. “당신은 임파선 결핵을 앓고 있소. 앞으로 3개월밖에 살지 못할 것입니다.” 그의 부인은 유명한 가수로, 그녀는 지금 임신중입니다. 아내에게도 미안하거니와 앞으로 태어날 아이를 생각할 때에도 죄스럽습니다. 몹시 괴로워하고 있을 때, 사랑하는 아내가 그를 위로합니다. “3개월밖에 못산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3개월을 허락해주셨다고 생각하며 감사하십시다. 아무도 원망하지 맙시다. 3개월이 얼맙니까? 천금같은 그 기간을 가장 아름답게 만드십시다. 그러면서 오로지 3개월이나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다.” 둘을 기뻐하며 감사하며 열심히 일합니다. 그는 열심히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았습니다. 그가 그린 그림에 유명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입니다. 보통 사람은 예수님의 얼굴을 그릴 때에 대개 자비하신 분으로, 고난 당하시는 얼굴로 그리는데, 이분은 지도력이 있고 강인한 인간성을 지닌 인물로 표현했습니다. 이 그림이 유명해서 수백만 장이나 인쇄되었고 오늘도 많은 가정에 걸려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3개월이 어딥니까? 하루가 어딥니까? 한 달란트가 어디냐 그 말씀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힘쓸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나오고 난 다음에 나오는 내용이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안식일만 지키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안식일을 지키기에 앞서 엿새 동안은 힘써 일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일만 고집하지 않으십니다. 이미 우리에게는 6일 이라는 날을 주셨습니다. 허락하셨습니다. 힘써서 일한 사람이 안식일을 잘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매일 노는 사람은 어쩌면 안식일이 별도로 필요 없을지 모릅니다. 엿새를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안식일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바로 십계명중에 다섯 개의 인간생활과 관계된 계명이 나옵니다.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엿새 동안 바로 이 계명들을 잘 지키라는 것입니다.
“출 20:12(5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13(6계명) 살인하지 말지니라 14(7계명) 간음하지 말지니라 15(8계명)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16(9계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17(10계명)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무슨 일을 해도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 무슨 일을 해도 성공할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열심입니다. 힘써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하세요?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했습니다. 어떤 직업을 가졌느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얼마나 힘써서 일하느냐 입니다. 아무리 좋은 직업을 가졌어도 힘써서 하지 않으면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나라가 제일 자신 있게 세계 제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조선입니다. 배 만드는 것 하나만큼은 미국도 일본도 우리나라를 따라오지 못합니다. 세계 10대 조선회사 중에서 무료 7개회사가 대한민국에 있습니다. 배 만드는 일에 제일 많은 공정이 들어가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용접입니다. 중요한 용접은 모두 사람이 직접 해야 합니다. 그 큰배를 어떻게 만들었냐하면 한마디로 철판들을 붙여서 만든 것입니다. 이 무더운 여름에도 불꽃을 튀기면서 저 배 밑바닥에 한 평도 안 되는 공간에서 철모 뒤집어 쓰고 용접을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배를 제일 많이 그리고 잘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열심히 일하시는 그분들 위해서 박수한번 보내드립시다.

저는 원적이 강원도입니다. 제가 태어난 곳은 경기도 마석입니다. 아버님의 고향이 강원도 양구입니다. 큰집이 거기 있어서 명절 때면 방문하곤 했습니다. 저의 큰집이 있는 곳은 양구에서 도사리라는 곳으로 더 가야합니다. 약 8키로 됩니다. 그곳을 가다보면 중간에 한전리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강원도 아시잖아요? 정말 집이 없습니다. 그 앞에 몇 가구가 살뿐입니다. 그리고 집들이 여기 저기 흩어져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곳에 교회를 해도 모두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순복음 교회가 있는데 1, 2년마다 한번씩 가는데 바로 길옆에 있는 교회가 멋있게 건축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마당에 교회 대형버스가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멀리 살다보니 그곳이야말로 버스가 필요한 것입니다. 저는 그곳 교회 목사님도 모르고 그 교회 사정도 잘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강원도에서 이런 비슷한 환경에서 이렇게 성장하는 교회를 본 적이 없습니다. 마을이라고는 고작 몇 집만 있고 그것도 사방에 흩어진 몇 가구들뿐인데 열심히 하니까 강원도 시골 교회도 성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대충대충 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의로 호심경을 삼으시며 구원을 그 머리에 써서 투구를 삼으시고 보수로 옷을 삼으시며 열심을 입어 겉옷을 삼으시고”(사 59:17, 사 9:7, 겔 39:25) 하나님 자신이 열심이십니다. 하나님의 열심히 없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겠습니까? 하나님의 열심히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아와 병고침을 받은 사람들을 보면 모두 열심이었습니다. 한 문둥병자도 수 많은 사람들 사이들 뚫고 용기를 내어 나왔습니다(마8:1-4, 막1:40-45, 눅5:12-16). 중풍병자는 지붕을 뚫고 내려왔습니다(마9:2-8, 막2:2-12, 눅5:18-26). 베데스다 연못가에 있는 병자들은 물이 동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요 5:2). 로마의 백부장은 자기 하인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마8:5-13, 눅7:2-10). 혈루증으로 12년 고생한 여인은 사람들 틈을 뚫고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마9:20-22). 소경 둘은 예수님을 따라오며 있는 힘을 다해 소리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마9:27-34) 간질병 아이를 고치기 위해서 부모는 예수님께 나아와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보아 주옵소서 이는 내 외아들이니이다.”(마17:14-21, 막9:17-29, 눅9:37-43)
이들은 예수님께 나아와 병고침을 받았습니다. 하나같이 열심이었습니다.

몇 일 전에 텔레비전을 보는데 연애 인들이 나와서 이야기하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남자가 있었는데 예전에 운동하던 아주 좋은 체격의 남자입니다. 집안 일을 돕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분의 고향이 경북이었나 봅니다. 세탁기에 빨래를 하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자기는 고향이 그쪽이라 그분은 정색을 하면서 아니 남자들이 그런 것도 하냐고 다른 사람에게 핀잔을 주는 겁니다. 저는 속에서 왠지 모르게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시대착오적인 생각을 떠나서 아내를 위하는 마음이 없는 것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 자신을 뒤돌아보니까 그 사람이나 나나 다를 것 없더라구요. 나도 빨래 해본 적이 없으니까요. 그러나 여러분! 해야 합니다. 얼마나 아내들이 고생합니까? 옛날 말이 있지 않습니까? “애 볼래? 바깥에 나가 김멜레?” 그러면 밭에 나가 김멘다는 것 아닙니까? 그만큼 애 보는 것이 힘들다는 말입니다.
아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 전에 저에게 어떤 분이 밥을 사겠다고 해서 굳이 괜 찬다고 하는데 조금 비싼 음식점으로 한낮에 데리고 가는 겁니다. 그곳에 가 보니까 남자들은 없고 여자들만 가득 차 있었습니다. 남편은 지금 아까 배 만드는 사람처럼 고생하고 있을지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백화점이나 쇼핑센터 건물들은 창문을 안 만든답니다. 바깥 쳐보다가 집 생각나고 건물들이 보이면서 사무실을 생각하면 남편 생각나서 구매욕이 떨어진다는 겁니다.

회사에서 동료지간에 화날 때, 아내가 화날 때, 남편이 화날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나는 열심히 하는데 같이 도와야할 사람이 도와주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예수님도 선한 자를 도우시려고 열심이신 데 정작 도움을 받아야할 우리가 열심히 없을 때 우리 주님은 화가 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 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계 3:15)

모세는 출애굽을 하고 나서 광야에서 고생고생 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 불순종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때의 사건에 대하여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두렵건대 네가 그 목도한 일을 잊어버릴까 하노라 두렵건대 네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 속에서 떠날까 하노라 너는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신 4:9) 고 했습니다.
여호수아는 모세 다음으로 사명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한 지도자 입니다. 이제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일이나 그 땅에서 사는 일도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그러므로 너희는 크게 힘써 모세의 율법 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 그것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수 23:6) “크게 힘써”로 번역된 단어는 메오드(daom])입니다. 이 뜻은 “열렬히, 전적으로, 대단히”입니다.

한 양봉업자가 꿀벌을 열대지방에 옮겨놓았습니다. 사계절 꽃이 피는 곳에 꿀벌을 풀어놓으면 수확량이 늘어나 큰돈을 벌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첫해, 양봉업자의 예상은 적중했습니다. 그런데 이듬해부터 꿀벌들이 꿀을 모으지 않아 벌통이 텅 비어버렸다. 꿀벌들은 그곳에는 겨울이 없다는 것을 알고 꿀을 저장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입니다. 결국 양봉업자의 아이디어는 실패로 끝났습니다.
오늘날 열대지방의 꿀벌 같은 신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어려울 때는 믿음생활을 하다가 살 만해지면 교회를 떠납니다. 삶이 편안한 사람들은 게으른 생활을 할 수밖에 없지요. 지나친 편리함과 안락함이 인간의 삶을 붕괴시킵니다. 하나님께서는 땀 흘리며 땅에서 일하여 소출을 거두라고 명령하십니다. 내일을 바라보며 힘써 일하는 자만이 풍요한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 3:10)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호 6:3)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게 한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엡 4:2-3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어느 날, 무디선생이 삼천 명 앞에서 설교를 하는데 그날따라 더욱 은혜로웠다고 합니다. 마이크가 없던 때에 삼천 명이니까 그것만도 굉장한 숫자이지요. 무디 선생은 열변을 토하듯 힘써 설교를 하였습니다. 설교가 끝난 후, 어느 저명한 대학교수 한 분이 무디 선생에게 다가와서 이렇게 말을 건네었습니다. “선생님, 오늘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좋은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몰라서 그러셨겠지만 영문 법적으로 틀린 말을 열여섯 번씩이나 하셨습니다.” 무디 선생은 껄껄 웃으면서 “잘못 세었을 것입니다. 그보다 더 많이 했을 텐 데요. 저는 이렇게 무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느라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 많은 지식을 가지고 한 일이 무엇입니까?” 라고 대답하였답니다.

우리도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열심히 교회에 나와야 합니다. 열심히 주를 쫓아야 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 11:2)

기억

말 4:4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요 2: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말 4:4, 요 2:22)

셰익스피어가 말한 것처럼 삶은 무대에서 잠시 거들먹거리다가 퇴장하는 시시한 배우입니다. 어떤 분이 인생을 계산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삶을 마칠 때까지 정지 신호등 앞에서 기다리는데 6개월, 광고 우편물을 열어보는데 8개월, 잃어버린 물건을 찾느라 이것저것을 뒤적이는데 1년 반, 그리고 갖가지 이유로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5년을 허비한답니다.
창세기 5장에는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 산, 900세 이상 산 사람 10명의 기록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 장의 내용을 요약하면 “낳고 낳았으며 죽었더라” 입니다. 900년을 살아도 이게 인생인 것입니다. 옛날 중국의 한 현인은 우리의 삶을 다음의 세 가지 낱말로 요약했습니다. 서두름(hurry), 걱정(worry), 묻힘(bury)이라고 했습니다. 시간은 쉬 지나고 인생에는 황혼이 닥칩니다.
중세 시대에 수사들은 성도들을 일컬어 라틴어로 ‘비아토르(viator)’라고 했습니다. 비아토르는 여행자나 나그네, 곧 ‘세상을 지나가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의 인생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길어야 100년 정도입니다. 우리에게는 아무 소망이 없다고 하기 전에 하나님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기억의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나와 너희와 및 혈기 있는 모든 생물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혈기 있는 자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창 9:15)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땅의 무릇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된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창 9:16) 만일 하나님이 이 일을 기억하지 못하신다면 큰일나는 것 아닙니까?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에게는 관대하면서 남에게는 엄격한 것입니다. 좋은 사람, 좋은 나라가 되려면 이것을 반대로 적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나에게는 엄격하고 남에게는 관대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출 2:24) 애굽에서 나는 신음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이제 애굽 사람이 종을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을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출 6:5) 그래서 애굽에 있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출애굽 시킨 백성이 타락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으로 율법을 받고 내려와 보니 그새를 못 참고 아론과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신으로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다 죽이시려고 하셨습니다. 이 때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주를 가리켜 그들에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나의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영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출 32:13)
그리고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그들은 목놓아 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죽이시려고 이곳까지 인도했다고 원망합니다. 하나님은 너무너무 이 백성에게 실망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대의 사람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지 않으시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신 8:2) 광야를 배회하게 하십니다. 애굽에서 가나안 땅까지 바로 가면 기껏해야 1달이면 충분합니다. 가축과 노약자가 많아 시간이 걸린다고 해도 2-3달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곳입니다. 그것을 못 참고 불평하다 결국은 광야에서 죽게됩니다. 하나님은 이 때의 일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우리 민족의 역사를 기억해야 합니다.

[일제의 만행]
남태평양 군도 “트럭섬” 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조선에서 뱃길로 한 달 남짓 걸리는 머나 먼 남태평양의 한 군도입니다. 이 섬은 천혜의 산호섬으로 일본 핵심 군수기지였습니다. 1930년부터 1945년 일본이 패망하기까지 징용 당한 조선 사람들은 대략 700여만 명 정도였습니다. 이중 1만여 명이 트럭섬에 징용되어 트럭섬 에덴비행장 건설과 군수물자 보급에 노예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일본이 패망하던 그 때 이 섬에서 다 죽었습니다.
조선 총독부 총독 미나미, 그 후임자 고이소, 아베 모두가 일제 당시 조선 교회를 완전히 해체하여 일본 교단 산하에 두고 신사참배를 거부한 자들을 모조리 투옥했지만 오히려 불안을 감추지 못했던 것을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 보여 주고 있습니다. 패전 직전 “미군이 필리핀을 함락시켰을 때 일본군 지도자는 미·소가 조선에 진격해 올 것을 예상하고 조선인 기독교인이 거기에 협력할 것을 두려워하여 1945년 8월 중순경 조선인 기독교인을 모두 살해하도록 본격적으로 계획하고 있었다.”고 블레어(W.N.Blair)는 기록했으며 마펫은 그 처형이 8월 18일로 예정되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총독부는 “조선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40만의 군대가 있는데 그것은 예수 교도들입니다.”는 보고를 받고 이들을 살해할 계획을 수립하여 진행하려고 했습니다.

[6.25 한국전쟁]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북한의 공산당이 소련제 T-34/85형 탱크 242대를 앞세우고 38선을 넘어왔습니다. 남한군의 병력으로는 도저히 막아낼 방법이 없었습니다. 당시에 남한이 보유한 최고의 무기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 정찰용으로 쓰였던 37mm 대전차포를 탑재한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 1개 대대가 전부였습니다. 단 한 대의 전차도 없는 무방비 상태에서 공격을 당한 한국군은 240여 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공격해 오는 인민군에게 밀려 후퇴하였습니다. 6월 28일 새벽에 이 인민군의 탱크가 서울 중심부에서 목격되었습니다. 남침한지 3일만의 일입니다.
6.25전쟁은 북조선의 김일성이 대규모의 남한 침입을 계획하고 스탈린의 재가를 얻어 개시되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브루스 커밍스에 의하면 당초 예상했던 것 보다 스탈린이 훨씬 더 깊이 개입해 있었다고 합니다. 영국 정보기관에서 나온 문건에 따르면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미국은 한국을 지켜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고 합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다면 남한이 공산화되는 것은 시간문제였습니다.
한편 대한민국 정부는 전쟁이 일어나자 주미 대사에게 긴급 훈령을 내려 미국 국무성에 사태의 긴급성을 알렸고, 미국은 유엔 안보리를 열어 한국 문제를 건의했습니다. 이에 따라 UN 안전보장이사회는 6월 26일 오전 4시에 소집되어 “북조선군의 즉각적인 전투 행위 중지와 38도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요청하는 미국의 제안을 9대 0으로 가결하였습니다(유고슬라비아는 기권). 이러한 결의를 북조선 측에 통고했으나, 이에 응하지 않아 6월 27일 다시 안전 보장 이사회를 열어 “회원국들에게 군사 공격을 격퇴하고, 그 지역의 국제평화와 안전을 회복하는데 필요한 원조를 대한민국에 제공할 것”을 7대 1(기권2)로 결의했으며, 이 날 해리 S. 트루먼은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대한민국에 대한 해, 공군의 지원을 즉각 개시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결국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프랑스, 콜롬비아, 터키 등 16개국의 회원국이 유엔군을 조직하여 한국전에 참전하게 됩니다. 미국군의 사상자만 36,576 명이나 되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참전한 나라가 있는데 에티오피아입니다. 1,271명을 파견해 주었습니다. 현재 참전했던 이분들 중에 거의 모두 죽고 몇 분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만나보니 선진국들은 그래도 연금과 여러 가지 혜택으로 살아가지만 에티오피아에서 참전했던 분들은 그렇지를 못한 겁니다. 아직도 다리에 상처가 있어 절뚝거리며 한평생을 사시는 분이 있고 총알 자국을 몸에 지니고 아픔을 이기며 사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민족과 하나가 되시려고 유엔이 창설되고 첫 번째로 다른 나라에 연합군을 만들어 파견한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유엔을 우리 대한민국을 위하여 준비하신 것 같습니다.
“내가 그들의 하나님이 되기 위하여 열방의 목전에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그들의 열조와 맺은 언약을 그들을 위하여 기억하리라 나는 여호와니라”(레 26:45)

개인의 아픔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난밤에 꿈을 꾸었습니다. 제가 컴퓨터선교회를 시작한 장소가 영등포에 있는 한 노후한 빌딩이었는데 그곳에서 사무실을 시작했었습니다. 가진 것이 없다보니 집을 얻지 못하고 사무실을 얻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무실에서 부부가 그냥 살면서 선교회(KCM)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 사무실의 뒤쪽 끝에 칸을 막아 7년을 살았습니다. 그곳은 베란다와 마찬가지인데 아파트 베란다쯤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창문이 있는데 한 겹으로 바람이 불면 그냥 들어옵니다. 겨울에는 그곳을 비닐로 막아 바람을 막았지만 물이 그냥 얼 정도로 추웠습니다. 그 정도의 어려움을 겪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밤이 되면 각 층에 철문이 있는데 그것을 닫습니다. 숨어사는 처지라 가슴을 조이면서 철문이 쾅 닫힐 때도 말도 못합니다. 마치 서대문 교도소를 연상케 합니다. 그래도 교도소는 그 안에 화장실이 있어 급할 때는 자다말고 화장실을 갈 수 있는데 저희는 화장실도 못 갑니다. 상하수도가 사무실에 없으니 밥을 해먹고 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공중화장실에 가서 남모르게 물을 퍼다가 몰래 밥을 해먹고 공중화장실에 가서 그릇을 몰래 닦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 누가 했겠습니다. 저희 집사람이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집사람의 내 평생 소원은 ‘아파트’가 되었습니다. 아파트에서 사는 사람이 그렇게 부럽고 그곳에서 한번 사는 것이 소원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냥 선교한다고 때마다 해외 돌아다니고 또 그 당시는 언론에도 많이 소개되었습니다. 웬만한 잡지와 신문에 한번씩은 다 나왔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제 꿈에 우리 부부가 옛날 그곳에 누워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집사람을 깨웠습니다. 우리가 왜 여기서 자고 있지. 그러면서 꿈에서 깨었습니다.
저는 그 때의 일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잊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시작한 선교회가 성장하고 발전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아이들 중에 누군가가 이 일을 잘 받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어려웠던 시절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야 제가 오늘 다시 정신을 차리고 일합니다. 그렇게 까지 하면서 선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몇 일 전에도 이런 편지를 받았습니다. “컴퓨터선교회 감사합니다. 수고 많이 하십니다. 선교지에서 외롭거나 외톨이가 되기 쉬운데, 선교소식과 선교동향 등을 보내 주시어서 감사합니다.”

우리 속담에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 는 말이 있습니다. 옛 일을 기억 못하는 사람을 가리켜 하는 말입니다. 사자성어에도 비슷한 말이 있습니다. 得魚忘筌(득어망전) “어부가 고기를 잡고 나서 통발은 필요 없다.”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배은망덕한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저만 이런 경험을 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제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개척교회 목사님들에게 배운 것입니다. 한국의 60, 70년대 개척교회는 다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저는 조금 늦게 시작했을 뿐입니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신 5:15)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사 46:9)

과거의 불행했던 시절이 오늘 우리에게 쓴 약이 되어야 합니다.
“과거의 기억에 지배 당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기억을 지배해야합니다.” 아픈 경험을 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잊지 마세요? 잊으려고 하면 더 생각납니다. 남자들이 군대에서 어렵게 훈련을 받을 때는 이런 말을 합니다. 이 정신을 가지고 사회생활하면 성공하지 못할 것이 없다 구요. 그러나 고참이 되면서 다 잊어버립니다. 점점 더 편해집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곳보다 더 편한 곳이 없겠지요. 그래서 말년에는 아주 다 망가져서 나옵니다. 처음 생각을 잊어버린 것이지요.

에베소 교회는 하나님의 처음 사랑을 잊어버렸다가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계 2:4)고 하나님께 책망을 받았습니다.
본문 말씀을 읽습니다.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말 4:4)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요 2:22) 이제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다른 것은 다 잊어버려도 하나님의 법과 성경과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