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여자의 이야기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6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룻 1:16-17)
룻기는 사사시대에 있었던 일입니다. 사사기는 여호수아 이후에 왕정 국가가 세워지기까지의 시대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사사시대의 마지막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룻기 다음에 나오는 책이 사무엘 상하입니다. 이스라엘의 사사는 13명이 있었고 마지막 13번째 사사사가 삼손입니다. 삼손 사사이후에 사사는 끊어졌고 한마디로 무정부 상태나 마찬가지 시대가 잠시 이어집니다. 바로 이 때에 미가라는 거짓 제사장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면서 이스라엘의 지도자 역할을 해야할 레위인들이 극도로 타락합니다. 그 일로 인해 베냐민 지파와 이스라엘에 싸움이 일어납니다. 한마디로 집안 싸움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땅은 극도의 불안과 편안하게 살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 땅에 흉년이 들었습니다(룻 1:1). 더 이상 버티고 살아가기가 힘든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런 극심한 불안과 흉년으로 더 이상 살기 힘들어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을 버리고 떠나야만 하는 평범한 한 가족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자꾸만 이민 가고 싶은 나라는 좋은 나라가 아닙니다.
이들이 살던 곳은 베들레헴이었습니다. 엘리멜렉과 그의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 말론과 길룐은 이곳을 떠나 타향살이를 하기로 작정하고 떠납니다. 유대인들은 가능하면 이사를 갈 때 서쪽으로 가지 동쪽으로는 가지 않았습니다. 동쪽의 모압 땅은 그 때에 여호와를 모르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결과는 최악이었습니다. 잘 살아보겠다고 요단강은 건너간 이들의 삶은 더 이상 망가질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가장인 엘리멜렉이 먼저 병에 들어 세상을 떠났습니다. 남편은 세상을 떠났지만 두 아들이 있었기 때문에 나오미는 견디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10년이 지나 두 아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이렇게 되어 나오미는 이방 여자인 두 며느리인 오르바와 룻과 함께 남게되었습니다. 잘 살겠다고 건너온 이방 땅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슬픔을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겠습니까?
나오미는 더 이상 모압의 이방인의 땅에 머물러 있어야할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슬픔을 당한 나오미가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돌아갈 생각을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젊었을 때의 좋은 추억이 있는 고향으로 가고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씨 좋은 두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가겠다고 따라나섰습니다. 만류도 했지만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그저 보고 있다가 유대와 모압의 경계인 요단강에 이르렀습니다.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 모압 땅으로 모두 돌아가라고 간곡히 타일렀습니다.
며느리들은 시어머니인 뜻을 잘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낯선 타국에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말해주었습니다. 아마도 자신의 경험에 우러나오는 이야기를 했을 것입니다. 아프리카에 있는 선교사님 사모님은 고향의 이 향수에 걸려 대한민국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면서 눈물 흘린 것이 얼마인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또한 베들레헴에 가서는 남편 구하기도 어렵고 한마디로 여자 셋이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힘들 것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오르바는 시어머니와 입을 맞추고 모압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룻은 돌아가지 않고 성경 전서를 통해서 가장 아름답다고 할 만한, 우리가 영원히 기억할 만한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16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룻은 나오미와 떨어지게 될 수 유일한 일은 죽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죽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다른 말로 하면 사람이 할 수 있는 한 시어머니 나오미를 결코 떨어지지 않겠다는 서약입니다. 사실 결혼식에서 “죽기까지 갈라지지 않겠다.”는 말은 여기서 유래되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돌아온 나오미
나오미가 모압 땅에서 살고 있는 동안 베들레헴은 변했습니다. 10여 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으니 말입니다. 그리운 고국, 정든 고향으로 돌아오니 감개도 무량하거니와 희망이 넘쳤을 것입니다. 아마도 공기가 다르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10년 전의 가족과 고향을 떠나 앞날의 희망을 바라보며 고향을 떠났을 때의 일도 회상했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그렇게 많은 사람이 베들레헴에 살고 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골의 단조로운 생활에서 나오미가 돌아온다는 소식에 마을이 술렁였을 것입니다. 나오미가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에 마을 사람들이 다 그를 맞으러 나갔습니다. 그들은 마을에서 가장 얌전했던 부인, 전날의 젊고 아름다웠던 새색시 엘리멜렉의 아내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날에 당한 갖가지 슬픔과 고생으로 주름살이 잡히고, 또한 긴 여행으로 지쳐서 들어오는 여인을 바라볼 때 그가 나오미라고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그를 둘러서서 나오미의 여윈 얼굴을 바라보며서 “이가 나오미냐?”(1:19) 고 하였습니다. 나오미는 “기쁨, 즐거움”이라는 뜻입니다. 그때에 나오미가 사람들에게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21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뇨 하니라”(룻 1:20-21)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를 건넌 후 수르 광야에서 3일을 여행하여 지치고 힘들어 있을 때 물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물은 소금기가 있어서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마라(쓴 맛)’이라고 붙였습니다. 바로 그 ‘쓴 맛’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삭을 줍는 여자
나오미와 룻이 베들레헴에 돌아왔을 때는 마침 보리를 거두어 드릴 때였습니다. 유대인은 예나 지금이나 빵을 주식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보리추수는 중대한 사회적인 경제적인 행사였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전날에 아름다웠던 나오미를 측은하게 생각하면서도 뭔지 알 수 없는 서먹함을 느끼는 그런 때였습니다. 그리고 함께 따라온 며느리 룻은 모압 여자이고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나라 사람이었지만 동네 사람들은 예전의 나오미를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을 것입니다. 고향이긴 하지만 이제 막 들어온 처지라 보리 이삭이라도 줍지 않으면 먹고 살길이 막막한 두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룻은 시어머니에게 밭에 나가서 보리 이삭을 주워 오겠으니 허락해 달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때나 되어서야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는 추수하는 사람이 이삭을 주를 수 있도록 한번 거둔 밭에 가서 다시 거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뿐입니까. 아예 밭의 한 모퉁이는 다 거두지 말고 남겨 두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은 이방인이나 나그네를 위하여 그렇게 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바로 지금 나오미와 룻과 같은 형편의 사람을 위해서 마련해 놓은 법입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하기를 “이웃집에 가서 낫을 좀 빌려오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이 아들이 이웃집에 갔다 와서 하는 말이 “낫을 빌려줄 수 없다고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며칠 후에 바로 그 이웃에서 이 집에 낫을 빌리러 왔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하기를 “낫을 빌려 주라.”고 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항의를 했습니다. “며칠 전에 저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는데요.” 그 때에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저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도 빌려줄 수 없다, 이것은 복수다. 저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려준다라고 말하면서 그런 마음으로 빌려주면 이건 증오다. 거절당했다고 하는 것을 다 잊어버리고 아무 상관없이 깨끗한 마음으로 그저 낫이 필요하다니까 빌려준다 하는 마음으로 빌려주면 이것이 긍휼이다.”라고 했습니다.
긍휼이란 남을 불쌍히 여겨서 돕는 마음입니다. 히브리어로 ‘헤세드’ 헬라어로는 ‘엘레에모네스’로서 “인자, 자비, 사랑, 불쌍히 여긴다, 민망히 여긴다.” 등으로 번역이 되고 있습니다. 왓슨(Thomas Watson)은 사랑과 은혜와 긍휼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세 가지는 하나님 품속에서 나란히 살아가는 의좋은 세 자매”라고 말합니다. “사랑이 애인을 방문하는 친구와 같은 것이라면, 긍휼은 병자를 방문하는 의사와 같은 것이다. 은혜가 죄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애정이라면, 긍휼은 죄의 결과로 비참한 상태 속에 있는 사람을 향한 애정이다.”라고 말합니다. 긍휼은 저주받아 마땅한 죄인에게 저주하지 않는 것입니다. 무시해도 될 사람을 무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버림받아야 할 사람을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며 도와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18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 19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음이니라”(신 10:18-19)고 하셨습니다.
이날 룻이 나오미의 남편과 혈연 관계가 있는 보아스의 밭으로 이삭을 주우러 간 것은 우연이었을까요? 참 잘된 일이었습니다. 룻은 보아스의 밭으로 가서 추수하는 사람의 뒤를 따르며 이삭을 주웠습니다. 이런 모습과 광경은 팔레스틴 지방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입니다. 이 때 여자들은 노랑, 푸른색, 붉은 색의 옷을 가장 많이 입고 자기에게 어울리는 머리에 쓰는 수건이 있습니다. 룻도 자기에게 어울리는 옷과 수건을 쓰고 나갔을 것입니다. 밭의 주인인 보아스가 추수의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알아보려고 나왔습니다. 보아스는 이 때 운명처럼 다가오는 한 여인을 보았습니다. 감독하는 사람들을 불러 “이는 뉘 소년이냐?” 고 물었습니다. 일꾼들은 그 여자가 바로 나오미와 함께 온 여자라고 소개했습니다. 보아스는 다른 곳에 가지 말고 자기 밭에서만 이삭을 주으라고 하여 이 말을 룻이 듣고 감사하게 생각했습니다. 보아스는 일군들에게 줌에서 조금씩 뽑아버려 룻이 줍게하라고 했습니다. 그레서 룻은 보리를 한 에바나 거두어 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보리만 얻은 것이 아니라 보아스의 마음까지 얻은 것입니다. 이 사랑스런 스토리는 계속 이어집니다. 나오미의 허락과 작전으로 이들의 만남은 혼인하기에 이릅니다.
결단과 하나님의 섭리
남편 엘리멜렉을 따라 모압 지방으로 간 것은 아주 큰 실수였는지 모릅니다. 그곳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었으니 말입니다. 그 때 남편이 가자고 할 때 “목숨걸고 말렸어야 하는데…” 하는 후회를 했을지도 모릅니다. 왜 안 그랬겠습니까? 그러나 나오미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모든 삶의 주인인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실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룻이 나오미를 따라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인격, 그의 성품, 그의 믿음을 본 것입니다. 이방인인 모압 여자들에게 시어머니로서 그런 신앙심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흔들리지 않는 그의 믿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보아스가 룻을 만들었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좋은 부모가 좋은 자녀를 만들고, 좋은 선생님이 좋은 제자를, 좋은 아내가 좋은 남편을, 좋은 남편이 좋은 아내를 만드는 것입니다. 나오미의 인격과 신앙심은 룻을 결단하게 만들었습니다. 룻은 단순히 나오미를 따라간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영원히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결심했습니다. 나오미가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고 할 때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라고 하면서 따라갔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두 며느리(오르바, 룻)가 다 따라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두 나라의 경계선인 요단강에 이르자 나오미의 권면을 듣고 오르바는 모압으로 돌아갔습니다. 오르바를 나쁜 여자라고 할만한 근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오르바는 룻과 같지는 않았습니다. 룻은 시어머에게서 인간의 면만을 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고 한번 결심한 것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결단이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오르바와 같은 신앙은 많이 있습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따라갑니다. 아마도 결정적으로 베들레헴에는 남자가 별로 없어 시집가지 힘들다는 말에 뒤돌아 섰는지 모릅니다. 룻은 그런 것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15 나오미가 또 가로되 보라 네 동서는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16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룻 1:15-16)
룻은 보아스와 결혼하게 되었고 다윗의 증조모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방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통해서 다윗이 나게 하시고 그 후손에서 예수그리스도가 탄생하시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룻의 이 고백처럼 우리가 “주여! 주님을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고 강권하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할 때 하늘의 모는 천사들도 우리 주님도 하나님도 기뻐하실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