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가지고 여호와께 나아갈까?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6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7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6-8)

어느 날 윌 후톤 목사님은 설교 말씀에서 오직 정직한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고 믿음만이 우리 생의 원천이며, 믿음만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설교하였습니다. 그러자 어느 교인이 설교가 끝난 후 이렇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그건 너무 지나치신 것 같습니다. 어떻게 믿음만이 중요하겠습니까? 우리에게는 돈도 중요하고 건강도 중요하고 명예 등 그 외에도 중요한 것들이 많은데 믿음 하나만 중요하다는 그런 역설은 좀 지나치신 것 같습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목사님은 이렇게 반문하였습니다. “만일 당신의 집에 불이 나서 누가 ‘불이야’ 하고 소리를 질렀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물론 불을 끄려고 백방으로 손을 쓰겠지요.” 그런데 그것이 다 거짓말이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론 그 수고는 모두 헛된 것이 되겠지요.”
바로 그것입니다. 믿음이 없고, 믿을 수 없다면 우리가 하는 일은 다 의미 없는 일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으로 어떻게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란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에도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여호와께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 잘 믿기 위해서 고민해 보신 적 있으세요? 하나님께 어떻게 나아갈까 고민하신 적 있으세요? 제가 결혼하고 선교회 한다고 뛰어다닐 때, 이때가 결혼하고 신혼 초기인데요 돈을 하나도 안 벌어다 주었습니다. 이 때 한달 생활비가 3만원인가 되었습니다. 우리 집사람이 제일 부러워 한 것이 다른 집에 가보면 화장대에서 100원짜리 몇 개가 굴러다닌다는 거예요. 그것이 제일 부러웠답니다. 저희가 세사는 주인집 꼬마 여자아이가 있는데 아침저녁으로 우리 방에 오는 거예요. 우리 집사람이 100원 가지고 콩나물 사러가야 하는데 이 아이가 따라오는 거예요. 그러면 아이스크림 사줘야 되잖아요. 그거 사줄 돈이 없어서 연립주택 몇 바퀴를 돌아서 아이를 떼어놓고 콩나물을 사왔습니다. 그런데 이 시절 구역예배 드리러 가야하는데 헌금이 없다는 것입니다. 전도사 사모가 되어서 헌금 안하고 구역예배 참석하기 어렵잖아요. 그래서 구역예배 돌아오는 것이 걱정이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힘드시지요. 그래도 여러분! 이렇게 힘들게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소중히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본문 6절에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라고 합니다. 8절에도 이 단어가 반복적으로 나타납니다. (b/FAhm)마-토브 hm는 “어찌하여, 어떻게, 무엇으로” 이며 토브는 “좋은, 선한”입니다. 그리고 또 hm(마)가 나옵니다. (hw:hy]Ahm;W’) 마-여호와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8절의 시작도 “어떻게(무엇으로) 선한 것을 가지고, 어떻게(무엇으로) 여호와께 나아갈까?” 라는 뜻입니다.

본문 기자는 세 가지를 먼저 제시했었습니다.
첫째, 내가 번제물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일반적으로 제일 많이 사용하던 제물이었습니다(출 12:5, 레 9:2, 3).
둘째,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하나님의 관심을 얻고자 드리는 수많은 희생제사를 말합니다.
셋째, 내 맏아들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그랬습니다.
이는 가나안의 풍습이었으나 성경에도 간혹 이러한 기사가 나옵니다(왕하 3:27, 16:3, 사 57:5)
사실 이러한 제사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기 위하여 사람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정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의식적인 행위가 아니라 마음을 드리는 헌신이었기 때문입니다. 9월 14일이면 추석이 돌아오는데요 제사지내시는 분들이요 저는 죽으신 분들 상다리 휘어지게 차려드리지 말고 그것으로 살아 계신 부모님에게 잘 해 드렸으면 합니다. 제사 뭐 하러 드립니까? 살아 계신 분에게 잘 하세요?
그렇다고 미가가 율법에 기록된 희생제사를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마음 없이 행하는 형식적인 것은 소용이 없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마음 없는 위의 세 가지 제사의 방법으로 안되지만 하나님께서 진짜 요구하시는 세 가지를 제시합니다.
8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은 외형적 제사보다는 실천적 삶을 원하고 계십니다.
원문에 8절 맨 앞에 나오는 단어는 나가드(dyGIh)입니다. 나가드는 “정면에 두다. 입증하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가 한글 개역성경에서는 “오직”이라는 말로 번역되었습니다. 다음 세 가지를 내 인생의 맨 앞에다 두고 살아야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내가 입증해 보이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공의를 행하며

사람들은 흔히 종교적 삶과 일상의 삶을 별개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종교적 삶에는 거룩성을 유지하려고 하지만 삶은 대충 살아갑니다. 교회는 열심히 나오는데 집에서는 덕이 안 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세워야 합니다.
땅에 들어갈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합니다. “너는 마땅히 공의만 좇으라 그리하면 네가 살겠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을 얻으리라”(신 16:20) 공의가 무너진 나라 죄가 가득한 나라라고 보시면 됩니다. 신명기에서 하나님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는 반석이시니 그 공덕이 완전하고 그 모든 길이 공평하며 진실무망하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정직하시도다”(신 32:4)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방법으로 사는 것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것, 하나님처럼 사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분처럼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공평하신 분이니까 내가 공평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정직하신 분이니까 내가 정직해야 됩니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하시니라”(요 7:24)

둘째, 인자를 사랑하며

“사람을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마더 테레사 수녀의 말을 생각해 봅니다.
○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필요로 하는 사람도 없다고 느낄 때 오는 고독감은 가난 중의 가난이다.
○ 하나님께서 당신을 어느 곳에 데려다 놓든, 그곳이 바로 당신이 있어야 할 곳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그 일에 얼마나 많은 사랑을 쏟고 있느냐이다.
원문의 사랑(ds,j,:헤세드)는 하나님이 사람관계에 세우신 언약적 단어입니다. 즉 헤세드의 사랑을 보이지 못할 경우 하나님은 언약을 어긴 것으로 간주합니다. 모세에게 내려준 인간에게 관계된 모든 계명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다시 우리에게 정리해 주셨습니다.
마 22:37-40 “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셋째,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

어머니의 기도로 유명한 성 어거스틴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라고 대답하겠다.”
겸손이 하나님의 편이라면 교만은 사단의 편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찾으시고 그를 구원해 주십니다. “네가 낮춤을 받거든 높아지리라고 말하라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느니라”(욥 22:29)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으니 저희 마음을 예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시 10:17)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잠 3:34)
하나님과 동행하는 한가지 유일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겸손입니다.

창 5:24에는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라고 간단히 나옵니다. 그러나 에녹이 겸손 없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겸손하였다는 증거입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시 16:8)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공의를 행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요 대충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일년 된 송아지를 잡아드릴 마음으로, 천천의 수양과 강 같은 기름을 드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내 자식을 죽여 바치는 마음으로 힘써서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사도 대충 드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 말씀도 대충 생각하면 남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앞의 제사에 대해서 미가선지자가 그렇게 말한 것은 뒤의 것을 그만큼 잘 지켜야 된다는 뜻으로 말한 것입니다.

호주의 한 부인의 이야기입니다. 가끔 텔레비전에도 나왔습니다. 어려서 중병에 걸려 두 다리를 절단해야 했습니다. 극도의 좌절감에 빠져 있을 때 이번에는 균이 두 팔에도 감염되어 부득이 두 팔도 절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몸뚱이만 남아있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해 보였습니다. 무엇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이런 경우 “살 소망이 없는 것” 이 아니라 “살아야할 이유가 없어진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빛이 비추었습니다. 그는 자르고 남은 팔 끝에 연필을 붙들어 매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밤낮으로 글 쓰기 연습을 했습니다. 드디어 편지를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전에 앞면이 있었던 사람, 친구 소개받은 사람 가리지 않고 자신의 간증과 고백이 담긴 편지를 일년에 수백 통씩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그의 편지를 받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공을 요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단지 우리가 노력하기를 바라고 계신다.” – 마더 테레사

열 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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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2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3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5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6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7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8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9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10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2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마 25:1-13)

한중수교 전에 어느 대학교 총장님의 중국여행 경험담입니다. 어느 비행장에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제 또 다른 도시로 옮겨가려 하는데 갑자기 승객을 다 내리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함께 타고 있던 모든 승객이 이유도 모르고 내렸습니다. 대합실에 불러놓고는 간부께서 이 비행기를 써야 하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타고 갈 수 없다고 하면서 두 가지 제안을 하였습니다.
당 간부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 비행기를 타겠느냐, 아니면 여기서 제일 가까운 역으로 걸어서 거기서 열차를 타고 가겠느냐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는 것입니다. 당 간부가 언제 돌아오느냐고 물으니까 언제 올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까운 역에 어느 정도 걸어가야 되느냐고 하니까 열 시간을 걸어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열차를 타는 게 낫겠다 싶어서 열차를 타러 걸어가 보니 열 시간이 걸리는 그 곳에 기차가 있더랍니다.
그는 중국여행기에서 이런 소감을 우리 앞에 전합니다. 제일 가까운 기차역이 열 시간이다, 기차를 타고 한 달을 가야 대륙을 횡단한다는 나라 사람들과 작은 땅 대한민국에 사는 나하고 도저히 생각하는 폭이 안 맞다는 것입니다. 거리 개념도 중국의 대륙적 사고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두 부류의 사람들

본문은 열 처녀 이야기입니다. 열 처녀는 정확하게 반씩 나누어집니다. 지혜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가 있습니다. 이 두 부류의 다섯 처녀는 굉장한 거리가 있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국과 우리나라와의 크기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하늘과 땅 만큼의 큰 가치관이 이들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우선 열 처녀를 이해하려면 유대인의 결혼풍습을 알아야 됩니다. 유대인의 결혼식은 요즘은 많이 변했지만 주로 저녁에 많이 한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저녁에 결혼식을 많이 하는데 보통 한 주간 정도 잔치를 합니다. 본격적인 잔치는 신랑이 도착함으로서 시작되는데 그 앞에 예비 잔치가 많이 있고 신랑이 신부를 데리러 오는 그 날 밤이 잔치의 하이라이트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부를 데리러 오는 시간이 밤중인데 예고하지 않고 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부집에서는 신랑이 언제와도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하고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신랑은 한 사람입니다. 열 명의 처녀들은 모두가 신부가 아닙니다. 열 처녀가 열 명의 신부인 것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이 사람들은 신부의 친구들로 신부 들러리입니다. 유대인 결혼식의 특징은 혼가에서 예식을 주도하는 것이 아니고 신랑 신부의 친구들이 주도한다는 것입니다. 신랑이 신부집에 올 때도 신랑 친구들이 신랑을 데리고 옵니다.
그리고 신랑을 먼저 맞이하는 사람은 신부 친구들입니다. 신부의 친구들은 초저녁부터 신랑일행을 맞이하러 얼마쯤 길가로 나가서 기다립니다. 언제쯤 올까하고 기다립니다. 요즘이야 핸드폰으로 연락해서 어디쯤 오냐고 물어보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에는 그런 것 없었습니다. 그냥 기다려야 합니다. 이제 자정을 넘깁니다. 들고있던 불도 꺼져가고 한 두 명 피곤하여 지쳐서 길가에 앉아 좁니다.
본문의 신랑은 이날 밤에 신랑이 더디 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열 명의 처녀들이 신랑을 기다리다가 졸며 잤다는 것입니다. “드디어 신랑이로다.” 하는 소리를 듣고 깨어보니까 다섯 처녀가 들고 있는 등불이 꺼져 가고 있었습니다. 다섯 처녀는 기름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랑을 맞이해 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등불이 꺼져 가는 다섯 처녀들이 기름을 빌려달라 하니까 자기들의 기름도 떨어질 수 있기 때문에 빌려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름을 사러 간 그 사이에 신랑이 와서 다섯 처녀들은 신랑을 놓친 것입니다. 그리고 부랴부랴 신부집으로 뛰어갔지만 이미 문이 잠겨있어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준비되어 있는 인생

집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과 집밖에 있는 사람들의 운명이 갈립니다. 아주 비참해 지는 것입니다. 안에 들어간 처녀들은 그 날 잔치를 즐거워하겠지만 문밖에서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이 다섯 처녀들은 버림을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영적인 교훈을 새겨둘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 다섯 처녀와 또 다른 다섯 처녀를 보면 별로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모두 등을 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신랑을 기다리다가 같이 졸았습니다. 다만 기름이 있느냐 없느냐는 차이입니다. 기름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한번 던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이 인간을 가장 비참하게 만드느냐는 것입니다. 아마 전쟁일 것입니다. 전쟁을 만나면 인간은 비참해집니다.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비참합니다. 우리도 지난날 한국전쟁을 겪었지만 전쟁은 인간을 비참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질병도 인간을 비참하게 만듭니다. 그 외에 갖가지 실패들이 인간을 비참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인간에게 제일 비참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버림받았다는 것입니다. 붙잡고 있던 것이 복인 줄 알았는데 끝에 가 보니까 복이 아닌 것입니다. 초저녁까지는 당당히 신랑을 맞이할 줄로 자신하고 있었습니다. 똑같이 등을 들고 똑같이 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련한 다섯 처녀들은 신랑을 맞이할 수 없는 상황을 마지막에 가서야 깨달았던 것입니다. 마지막에 가서 보니 복이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이 한 평생 붙잡고 있다가 끝에 가보니 복이 아니더라는 것을 깨달을 때 그보다 비참한 인간이 없을 것입니다. 인간은 무언가를 붙잡고 살아야 당당합니다. 자신감이 있습니다. 그런데 끝에 가서 그것이 날 속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인간은 비참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정신차려야 합니다.
여러분! 졸더라도 준비를 하고 졸면 애교가 됩니다. 시험을 보는 날에 피곤하여 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깨어서 준비한 학생은 하나 하나 잘 써내려 갑니다. 그러나 준비하지 않은 학생은 비참해 지는 것입니다. 준비하지도 않은 채 겁도 없이 함부로 졸며 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지막에 가면 기름준비가 없는 다섯 처녀의 비참한 종말이 바로 이 땅위에 태반 이상이 겪어야 될 인간의 운명을 예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짐승은 배만 부르면 된다. 그런데 인간은 배부른 후부터 문제다 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배만 부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에 가서 이것이 아니구나 라는 것을 깨달을 때 인간은 비참해집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
인간이 가장 비참하게 될 상황을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교훈에서 기름은 빌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 기름은 내가 준비하지 않으면 아무도 준비해 줄 수도 없으며 빌릴 수도 없습니다. 이 기름이 무엇입니까? 성경 해석 가들은 성령, 말씀, 믿음 이 세 가지로 말합니다. 성령이든 말씀이든 믿음이든 이것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기름은 예수께로부터 받아야 되는 것이지 다른데 가서 사올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어리석은 다섯 처녀들은 기름이 예비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기회를 얻은 자와 잃은 자

뿐만 아니라 그것을 너무 늦게 깨닫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랑이 다 왔을 때 깨달은 것입니다. “보라 신랑이로다” 이제 등불을 켜서 맞이하려고 하니까 불이 안 붙습니다. 이제 기름은 사러가려고 하니 늦었습니다.
여러분!, 복권도 그릇이 예비 되어 있는 사람이 당첨되어야 복입니다. 큰 돈 만질 그릇이 안되어 있는데 갑자기 큰돈이 생기면 그 복권 때문에 인간이 망가지는 것입니다. 복은 복 자체가 복이 아닙니다. 어떤 자세로 복을 받아서 누리느냐에 따라서 복이 될 수도 악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똑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만 그 은혜를 받는 우리의 자세는 각각 다릅니다. 아무리 값진 은혜라도 그릇이 비뚤어져 있으면 그 은혜를 쏟아버립니다. 그릇이 문제입니다. 그릇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인격이고 살아가는 태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 하는 태도가 바로 되어 있어야 은혜가 은혜되고 복이, 복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이 될 줄로 믿습니다.
또한 어리석은 다섯 처녀는 신랑을 기다리는 태도가 잘못됐습니다. 이런 처녀들은 신랑을 맞이할 수가 없습니다. 신랑을 맞이하러 나갔으면 당연히 다음날 동이 터 올 때까지 기름이 준비되어 있어야 했습니다. 신랑이 늦게 올지 모른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그런데 자기 생각대로 신랑이 빨리올 것으로만 믿었습니다. 그것이 잘못입니다. 너무 늦게 이 사실을 알았지만 회복할 수가 없습니다.

늦게 깨닫는 분들은 무한한 은혜와 복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인간의 불행 중 또 하나는 내가 이미 받은 복을 복으로 모르고 사는 것입니다. 결과에만 얽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복을 못 받은 게 아니라 못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깨닫기만 하면 결코 내가 받은 복도 작은 복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또 하나의 메시지는 인생의 기회라는 것입니다. 기회는 내 소원대로 반복되지 않습니다. 신랑이 오는 것은 반복되지 않습니다. 기회는 한번 지나가면 오지 않습니다.

휴대전화 외판원에서 영국판 노래자랑인 ‘브리튼스 갓 탤런트’에서 우승하여 일약 주목받는 가수가 된 36살의 폴 포츠(Paul Potts)가 있습니다. 예선전에 출연한 그는 말투는 어눌하고, 치열은 고르지 못하며, 누구도 비 호감이라고 부를 만한 후줄그레한 옷차림, 짧은 팔에 배불뚝이, 쳐다보는 것이 미안한 심정이 들도록 얼굴엔 극히 부자연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습니다. 심사위원들은 “오페라를 부를 겁니다.”라고 말하는 그를 미덥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비웃듯이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나 진지한 눈빛으로 그가 오페라 아리아를 부르자 비웃음 섞인 시선을 보내던 심사위원들과 방청객의 표정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귀를 다시 씻게 만드는 음색과 풍성한 성량은 등을 젖히고 조롱하는 듯한 눈빛으로 앉아있던 방청객들의 자세를 바꾸게 했고, 볼펜을 입에 문 심사위원의 입가에 미소를 만들었으며, 한 여성 심사위원의 눈에 눈물이 맺히게 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폴 포츠 신드롬’이 일고 있는 것은 감미로운 노래 뒤에 숨어 있는 그의 감동적인 휴먼 스토리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오페라 가수를 꿈꿨으나 어눌한 말투와 자신감 없는 외모 때문에 항상 ‘왕따’를 당했다고 합니다. 더욱이 충수파열과 부신종양 등의 병으로 수술대에 올랐고, 2003년엔 오토바이사고로 쇄골이 부서져 큰 성량을 요구하는 오페라 곡을 부르기에는 몸이 따라주지 않았지만, 그는 꿈을 포기하지 않고 휴대전화 외판원을 하면서 노래를 부른 것입니다. 꾸준히 포기하지 않고 준비하고 있다가 결국 단 한 번 찾아온 기회(One Chance)를 놓치지 않고 그 꿈을 이뤘습니다. 그의 첫 앨범 타이틀도 ‘원 찬스’ 입니다. 그가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성공한 것입니다.

신앙은 나와 하나님 관계이다.

그리고 더 근원적으로 나아가서 신앙문제는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내 등의 기름은 내가 준비하여 신랑을 맞이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할 때 시선을 바로 가져야 됩니다. 시선이 무엇입니까? 오직 예수께(신랑)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러 가지를 보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한 평생을 주님 앞에 충성 되이 살려면 신랑만 보고 살아야 됩니다. 신랑보다 옆 사람이 크게 보이고 신랑보다 세상 것이 크게 보이면 그의 신앙생활에는 중대한 갈등이 옵니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마 17:8)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는 이 영의 시선이 확실할 때 세상으로부터 오는 시험, 사람으로부터 오는 실망을 이겨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를 믿어 갈수록 예수님을 바라보는 영의 시선이 더 좋아지고 강렬해 지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만일 허망히 행하며 거짓말로 이르기를 내가 포도주와 독주에 대하여 네게 예언하리라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이 이 백성의 선지자가 되리로다”(미 2:11)

제가 안경을 썼다 벗었다 하니까 어떤 분이 제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눈 수술을 한번 받아 보세요. 요즘 시력을 회복하는 기술이 아주 좋아져서 목사님이 수술 받으면 분명히 좋아질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수술하는데 돈을 대준다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겁이 많잖아요. 이빨 빼러 갈 때도 가서 기절하고 우리 집사람 손잡고 갔잖아요. 근데 제가 멀쩡한 눈 깍아 내겠습니까? 안경을 쓰고 말지요.
그런 이유도 있지만 또 한 가지는 시력이 좋아진다고 내가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력이 더 좋아 질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육신은 쇠해 가도 예수님을 바라보는 신령한 시력은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잃으면 세상의 엉뚱한 것들만 보이기 때문에 그것이 내 신앙생활에 장애가 됩니다. 어떤 사람의 말 한마디 때문에 속상해도 주님을 바라보는 시력이 확실하면 귀로 스치고 지나가면 됩니다. 기름준비하고 신랑을 정확하게 맞이했던 슬기로운 다섯 처녀의 모습으로 우리가 주님을 맞이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쁨의 교육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2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3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5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6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7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8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9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시 37:1-9)

금번 베이징 올림픽에서 우리나라 양궁이 남, 여 단체전은 모두 금메달을 땄는데 개인전에서 그만 한 점차로 은메달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절대 못한 것이 아닙니다. 항상 금메달을 따다가 한 점차로 따지 못했다는 것뿐입니다.
우리나라가 얼마나 양궁을 잘 하냐 하는 것은 세계가 다 압니다. 그래서 세계양궁협회가 한국이 메달을 독식하지 못하도록 규정을 매번 바꾸어 왔습니다. 아마 스포츠 사상 어떤 한 나라를 견제하기 위해서 이렇게 규정을 매번 바꾼 종목은 없습니다.
원래 양궁경기 규칙은 30, 50, 60, 70미터(여자부, 남자부는 30, 50, 70, 90미터) 경기로 각 거리별로 36발씩 발사하여 1,440점 만점으로 경기가 진행되었습니다. 한국이 다 따가니까 개인전과 단체전 메달만 올림픽에서 시상합니다. 그래도 다 따가니까 나온 방식이 국가대표 선수들 수를 3명으로 줄인 것입니다. 개인전은 그렇다 치더라도 단체전에서 만이라도 한국의 금을 한번 막아보자는 취지로 만든 방식입니다. 그래도 다 따갑니다. 그래도 안되니까 기록경기인데도 불구하고 두 명 씩 붙여서 토너먼트로 올라가도록 했습니다. 그것도 안되니까 빨리 쏘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한국이 다 따옵니다.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는 0-10점까지 있는 표지판을 가운데 점하나 찍어놓고 0점과 1점으로만 구성한 것입니다. 한국 선수들은 8점 이외는 거의 안 쏘니까 이제 도 아니면 모라는 식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지요. 이것도 안되니까 양궁경기장 자체를 바람이 아주 지저분하게 부는 장소에 배정하여 경기를 치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안됩니다. 바람과 비를 감안하여 쏘기 때문에 그래도 10점에 들어갑니다. 이래도 안되니까 아예 경기장의 바람 방향이 한 방향이 아니라 쏘는 곳과 표적지의 중간지점에서 바람이 수시로 바뀌는 아주 요상한 장소에서 양궁경기를 개최합니다. 그래도 한국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성경(신약 헬라어)에서 죄라는 의미의 단어 하말티아(aJmartiva)는 ‘과녁을 못 맞히는 것’ 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과녁을 잘 맞히는 대한민국의 양궁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깨닫고 따라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의 말은 경우에 맞는 말이 있고 맞지 않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말인데도 경우에 맞지 않는 말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대머리 신사를 보고 “참석해 주셔서 빛났습니다.” 라고 한다든가 출감하는 죄수를 보고 “꼭 다시 한번 들러 주세요.” 하는 것은 맞지 않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오늘 성경을 보면 “여호와를 기뻐하라” 는 말씀이 나오는데 우리가 쉽게 성경을 읽지만 이 말의 의미는 매우 깊습니다. 학자들이 인간 심리를 알기 위해서 시도한 ‘인식차단’ 이라는 실험이 있습니다. 구멍을 두 개 내어서 사람이 두 눈으로 안에 있는 그림을 보게 하는데 한 쪽은 아주 슬픈 그림을 한 쪽에는 아주 기쁜 그림을 동시에 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두 개를 동시에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인식에 따라서 슬픈 그림과 기쁜 그림이 잡힌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기쁨이 있는 사람은 기쁜 그림이 보이고 슬픔이 있는 사람은 슬픈 그림만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두 개가 같이 보이진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기쁨이라는 영역과 슬픔이라는 영역, 부정적인 영역과 긍정적인 영역 이 두 가지가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개가 습관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습관이 사람을 만든다” 는 것입니다.

네 명의 자녀를 둔 어머니가 유명한 현인을 찾아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자녀들을 잘 키울 수 있습니까?” 현인은 어머니를 정원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는 정원에 있는 네 그루의 나무를 한번 뽑아보라고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갓 심어놓은 첫 번째 나무를 아주 쉽게 뽑았습니다. 두 번째 나무는 심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약간의 힘으로 가능했습니다. 세 번째는 심은 지 꽤 지난 나무였습니다. 어머니는 땀을 뻘뻘 흘리며 겨우 그것을 뽑았습니다. 그러나 네 번째 나무는 이미 견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팔을 걷어붙이고 힘을 쏟았으나 나무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현인이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자녀교육도 이 나무와 같습니다. 오랜 습관은 깊은 뿌리를 내려서 그것을 바꾸기가 어렵지요. 어린 자녀에게 좋은 습관을 갖게 하십시오.” 부모가 자녀에게 물려줄 수 있는 최고의 유산은 건강한 심성과 좋은 습관인 것입니다. 이것은 시련을 만날 때 더욱 빛을 발합니다.

본문 1절에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8절에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하게 치우칠 뿐이라” 분을 그치라,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이런 말을 거듭거듭 말합니다. 불평하고 투기하는 것을 버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여호와를 기뻐하려면 우리 안에 있는 불평, 투기, 분, 노 이것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서양에서 고전음악을 하는 대가들은 다 신앙이 좋은 사람들입니다. 그 중에서도 프란츠 요셉 하이든 같은 사람은 우리에게 좋은 간증을 들려줍니다. 이 사람은 백곡 이상의 심포니를, 80곡 이상의 소나타를, 또 거대한 두 개의 오라토리오를 남겼는데 하이든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작곡할 때 늘 하나님을 생각한다. 그러면 내 마음에 기쁨이 솟아오른다. 그리고 마치 악보에 음이 춤추는 것 같고 내 마음도 기쁨으로 충만해진다.” 다시 말하면 곡이 좋아서 내가 기쁜 것이 아니고, 내 마음에 기쁨을 가지니까 좋은 곡이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이든의 음악이 기쁨을 표현한 것이 많습니다. 기쁨을 가지니까 악보가 춤을 추는 것 같이 보인다는 이 하이든의 고백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큽니다.

결과에 매인 기쁨이 아니다.

4절에 보면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라” 라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표현 안 합니다. 반대로 말합니다. ‘내 마음의 소원이 이루어지면 기뻐하겠다.’ 이게 세상논리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리하면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라” 고 말씀합니다. 소원이 이루어져야 기뻐하는 게 상식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릅니다. 먼저 여호와를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내 마음에 감사를 안고 기도해야 합니다. 감사함으로 기도해야 우리 기도가 감사의 기도로 묻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감사가 없을 때는 우리 기도에 감사와 반대되는 감정이 묻어 나오기 때문에 성령이 우리 기도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은 기쁨의 영입니다. 가끔 원망하면서 기도하는 분들을 봅니다. 여러분! 감사하세요. 아직 몰라서 그럽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는 것 하나만으로 그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라는 것을요.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믿음 좋은 한 성도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어느 날 길을 가는데 참새가 날아 가다가 그만 실례를 했는데 그 배설물이 이 사람 머리에 떨어져 버렸습니다. 난처합니다. 기분 나빠집니다. 불평할 일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 좋은 사나이가 무엇이라고 말한 줄 아세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황소를 날지 않도록 지으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랬습니다.

기쁨을 관리하라

그런데 우리에게 여호와를 기뻐하는데 방해되는 것들이 자꾸 우리 안에서 일어납니다. 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밤에 자는데 마귀가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고 했습니다. 농부가 곡식을 심었는데 그 곡식이 잘 되는 밭에다가 마귀가 가라지를 뿌리고 갔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비유는 아주 현실감이 있습니다. 마귀는 잡초밭에 가라지를 안 뿌립니다. 허허벌판에 가라지를 안 뿌립니다. 곡식을 심어 놓은 밭에 뿌립니다. 마귀는 은혜 받은 성도를 건드리지, 은혜 못 받은 성도는 마귀도 버린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시험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세 절을 확인합니다.
3절에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4절에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5절에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라고 했습니다.

맥스 루케이도의 ‘길을 버리고 길을 묻다’에서 고백한 말입니다.
필요한 건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뿐이었는데, 나는 말씨름을 벌였습니다.
필요한 건 그저 들어주는 일뿐이었는데, 입을 크게 벌리고 떠들었습니다.
필요한 건 참는 마음뿐이었는데, 주도권을 잡으려고 뛰어다녔습니다.
하나님께 드렸으면 좋았을 것을. 나는 어떻게든 내가 바꿔보려고 했습니다.
이사야는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사 53:6) 이라고 합니다.

기쁨을 보여주어라

좋은 습관을 가진 사람은 좋은 생각만 합니다. 그러나 나쁜 습관을 가진 사람은 나쁜 생각만 합니다. 작은 생각의 차이 하나가 인생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아동발달 분야의 권위자인 아널드 게젤 박사는 “어린이는 한 쌍의 눈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시각 세계를 가지고 태어나지는 않는다. 그 세계는 직접 만들어야 하고 그것은 자기만의 창조이다.” 고 말합니다. 눈은 가장 중요한 감각입니다. 분별력을 주는 기관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들어오는 정보의 80%는 눈을 통해 인지됩니다. 지금도 대부분 활자화된 언어에서 우리는 정보를 얻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가 삶을 좌우하게 됩니다. 세상에 추한 것이 많이 있지만 그 가운데서 좋은 것을 취사선택하여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것은 복입니다. 특히 어린이들에게 좋은 것을 보여줄 수 부모는 복된 사람입니다.
여러분! 교육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쁨으로 교회에 나오세요. 기쁨으로 성경을 보세요. 기뻐하며 사세요. 세상 행복의 조건을 따져서 살려고 하면 기쁨이 사라질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를 큰 교회로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기쁨으로 나올 수 있는 교회를 만들고 싶습니다.

그리고 자녀에게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어 주세요. 도스토예프스키의《카라마조프의 형제들》중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린 시절 가족 간의 아름다운 추억만큼 귀하고 강력하며 아이의 앞날에 유익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본문 7-9절 “7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8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9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진실한 회개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6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7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8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9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5-10)

펄벅은 ‘살아있는 갈대’ 머리말에서 “나는 이 소설에서 한국인들을 묘사할 때 항상 그들에게 진실되려고 노력하였다.” 고 했습니다. 펄벅의 말처럼 우리는 우리의 삶이 항상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도록 노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한국문화는 정의 문화이기 때문에 정이 진실보다 더 중요시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인맥 만들기’ 이런 것이 있습니다. 좋은 사람 만나서 교재하면서 좋은 영향을 받겠다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그런 뜻이 아니라 많은 사람 알아 두어서 출세를 해 보겠다는 것이지요. 교회도 인정에 끌려서 교회 다니고 교회 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정만 통하면 무엇이든지 다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큰 교회 목사님이야기 하면서 자기가 잘 안다는 것입니다. 큰 교회 목사님 알면 저절로 천국가게 됩니까? 교회를 하나로 묶어주고 우리 사회를 하나로 묶어주는 진정한 힘은 정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서로에 대해 참된 진실을 말하고 자기가 말한 것에 대하여 책임을 질 수 있는 삶에 있는 것입니다.
제 9계명에 보면 “이웃에 대해 거짓증거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 때 가장 필요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진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시편의 배경은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한 후 그의 남편 우리아를 음모로서 적에게 죽게 만든 다윗이 자신의 죄를 숨기려고 했으나 그 때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보내 그의 죄를 책망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때의 죄를 기억하면서 다윗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장면입니다. 누구든지 죄를 범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죄를 알고 회개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특히 왕이 되면 더 교만하여져서 그렇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실 왕을 인정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진정한 왕은 하나님이시며, 예수그리스도뿐이십니다. 그것이 신정 국가인 이스라엘의 입장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왕을 뽑았고 그 왕들은 대부분 타락했습니다. 정말 자신을 왕으로 착각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이 비록 왕이었지만 자신이 절대적인 존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하나님께 납작 엎드리는 마음과 습관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기뻐하신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했습니다.

5절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다윗은 자신이 저지른 죄를 부모에게 전가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자신이 죄인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실 다윗이 지은 죄는 간음과 의도적인 살인죄입니다. 만일 평민처럼 하나님의 법대로 한다면 그는 돌로 쳐죽임을 당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가 왕이기 때문에 그를 돌로 칠 수 없었습니다. 그가 만일 포악한 왕이었다면 당시의 왕권을 생각한다면 평민 한사람 죽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방인과 하나님의 백성과의 차이입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멸망하게 되는 원인을 “너희가 가난한 자를 밟고 저에게서 밀의 부당한 세를 취하였은즉…”(암 5:11)이라고 말합니다. 이 당시의 이방 왕들은 말 그대로 자신들이 왕입니다. 왕이라는 말은 인간에게는 신이라는 말로 지칭되었습니다. 이집트의 파라오가 그랬고 당시 앗수르, 페르시아 왕국 등이 모두 그랬습니다. 나중에 생겨난 로마 역시 황제라고 칭하면서 자신을 신으로 만들었습니다. 일본의 천황도 마찬가지입니다. 북한 김일성, 김정일 부자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은 다릅니다. 자기 위에 계신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진정한 의미에서 왕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그 하나님의 뜻을 잘 살펴서 전달하고 시행하는 종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 하나님이 바라시는 왕의 모습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출생을 말하면서 죄인의 몸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근본 된 죄인임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지은 죄가 부모에게 있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원래 죄인으로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동시에 하나님만이 진실하신 분이며 이 땅에 아무도 깨끗한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4절에서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라고 합니다. 사람에게는 죄를 범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의 범죄가 사람에게 대한 것이기에 앞서 하나님께 죄를 지은 것이라는 고백입니다(삼하 12:13). 자신들의 죄가 인간관계에서만 끝이 난다고 생각하는 것이 위험한 것입니다. 원래 우리 인간은 어떤 사람입니까?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라고 했습니다(엡 2:1). 우리는 다 죄악이 많고 허물이 많은 우리들입니다.
다윗은 말로만 죄를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 죄로 얼마나 아픈지를 고백합니다. 8절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라고 했습니다. “꺾으신 뼈”는 정신적 고통을 말합니다. 구약성경에서 뼈는 인간 신체의 가장 내면적인 부분을, 그리고 사람에게 제일 통점(痛點)이 있는 부분으로 묘사됩니다(6:2, 사 58:11, 렘 23:9). ‘꺾으신 뼈’(hj;fu:투하)는 콩팥, 가슴속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투하’는 ‘hj;f;:타하’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타하’는 궁수나 화살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제일 깊숙한 곳에 화살을 맡은 것 같은 아픔을 다윗이 느끼고 있습니다. 뼈속깊이 아픔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아픔 없이는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의 아버지는 폴란드 사람입니다. 고향인 폴란드의 슐레지엔으로 가기 위해서 말을 타고 산길을 갔습니다. 그때 우려했던 대로 강도들이 나타났습니다.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기고 말도 빼앗겼습니다. 강도가 물었습니다. “숨긴 것이 없느냐” “없습니다.” “그럼 가거라” 무사히 강도들 틈을 빠져나와 한숨을 쉴 때 바지춤에 비밀히 감추어둔 금덩어리가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 순간 그는 고민했습니다. 그러다 그는 강도들에게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회개합니다. 조금 전에는 너무나 무섭고 정신이 없어서 숨긴 것이 없느냐고 물을 때 없다고 대답했는데 가다보니까 이 금덩이를 숨긴 것을 발견했습니다. 받으십시오.” 강도에게 숨겼던 금덩어리를 내주었습니다. 그러자 강도는 빼앗은 물건과 말을 내주면서 엎드리더니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당신이 두렵습니다.”고 말했습니다.

다윗은 주께서 진실을 원하신 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본문 6절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하나님께 거짓은 통할 수 없습니다.
“너희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 일을 생각하여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삼상 12:24) 왕을 세워 달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사무엘이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실이 빠져버린 형식적으로 변한 절기나 성회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암 5:21-22 “21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22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시 51:16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라고 하셨습니다. ‘제사’를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진실이 없는 의식에 빠진 제사를 싫어하신다는 것입니다.
삼상 15:22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은 진실을 회복하는 일이었습니다. 형식으로 굳어진 신앙과 믿음을 진실로 만드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바리새인들하고 많이 격론을 벌이신 것입니다.
마 23:27-28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8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우리가 주님께 가지고 갈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진실입니다. 진실이 없어진 충성심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거짓입니다.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진실이 결여된 예배와 헌금은 무익한 것입니다. 무익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화를 불러오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구약과 달라서 하나님이 직접 심판하시는 장면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나니아는 아내 삽비라와 함께 하나님께 드리기로 한 땅 판 돈을 떼어먹었다가 죽었습니다(행 5:1-5). 하나님이 돈이 욕심이 나셔서 그러셨겠습니까? 진실하지 못한 것을 두고보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요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ejn pneuvmati kai; ajlhqeiva/ dei’ proskunei’n.:엔 푸뉴마틴 카이 알레데이아 데이 프로스퀴네온)는 원문의 단어를 나열하면 “안에서 영 그리고 진리 반드시 예배”입니다. ‘데이’(반드시)가 있습니다. 반드시 무엇을 가지고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진리, 진실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정결케 해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본문 7-9절 까지는 자신을 깨끗하게 해 달라는 다윗의 간청입니다.
“7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8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9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우슬초는 문둥병이 완쾌되어 부정한 상태에서 벗어난 자나, 시체나 무덤을 만진 자가 자신을 깨끗하게 하기 위하여 몸에 희생의 피나, 물을 뿌릴 때 사용하는 식물을 말합니다(레 14:4, 민 19:18). 다윗 시대(구약)에는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예수께서 모든 죄를 속하시고 우리의 죄를 이미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 사실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다윗과 같은 진심이 있어야 합니다.

보스톤 어느 교회에서 4년 간 부교역자로 계셨던 한인 1.5세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교회가 어려울 때 몇 사람이 제직회에서 하도 부당하게 굴어서 젊은 나이에 참을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혈기를 부렸더니 담임목사님이 ‘김 목사, 그들이 모두 성자라면 자네나 나를 왜 이 교회가 필요로 하겠는가?’ 하면서 충고해 주던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아 나는 그들 때문에 받은 상처가 너무 커서 솔직히 그들을 사랑하기가 어렵지만 자네마저도 그들을 미워하면 그들은 어느 목사에게 사랑을 받으라는 건가. 정말 나를 위한다면 자네는 그들을 선한 목자의 심정으로 사랑해 주게나.’ 이 말이 늘 잊혀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새 사람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본문 10절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자신이 완전히 달라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창조하시고”(바라)는 창세기에서 천지창조를 하실 때 하신 말씀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심령을 새 창조하듯이 완전히 변하게 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요한 웨슬레는 19남매가 있는 집에서 자랐어요. 한 어머니가 19남매를 낳은 겁니다. 그런데 그 자녀들이 모두 훌륭하게 됐어요. 아침마다 조회를 하는 거예요. 주-욱 세워놓고 “하나님이 너를 향하여 큰 계획을 갖고 계신다. 너희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룰 수 있는 위대한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거기에서 찰스 웨슬레가 나오고 요한 웨슬레가 나오고, 세계적인 인물이 그 가정에서 나왔습니다. 사람은 좋은 말을 들어야 돼요. 신앙의 말, 감사의 말, 믿음의 말을 들어야 하는 거예요. 사람은 맡아야 된다. 맡아야 정신을 차린다. 아닙니다. 잠깐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짐승이 아닙니다. 잘 가르치고 사랑과 용기를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손에 맡겨야 합니다. 주님의 손이 능력의 손입니다. 태어났다고 다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새 창조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요.

저도 진실을 하나 말할께요. 지금 제가 제일 걱정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따가 주일학교 5분 설교하라고 강수경 집사님이 부탁했습니다. 얼마나 고민했는지 일주일 동안 잠을 못 잤습니다. 기도해 주세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십자가를 알고 계세요.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22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저희가 다 가로되 십자가에 못박혀야 하겠나이다 23 빌라도가 가로되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저희가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24 빌라도가 아무 효험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가로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25 백성이 다 대답하여 가로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26 이에 바라바는 저희에게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넘겨주니라”(마 27:22-26)

한 미국인 부부가 독일의 오베라머가우에서 유명한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에 관한 연극을 관람했습니다. 공연이 끝난 후에 그들은 예수 역을 한 배우를 만나려고 부부는 무대 뒤로 달려갔습니다. 그 배우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남편은 배우가 극중에서 지고 갔던 십자가를 발견했습니다.
사업가인 그 남편은 부인에게 카메라를 건네주며 말했습니다. “여보! 십자가를 지고 가는 내 모습을 찍어줘요.” 그는 등을 구부리고는 커다란 십자가를 어깨에 짊어지려 했으나 할 수가 없었습니다.
얼굴에 땀을 흘리며 낙담하여 그는 배우를 돌아보며 말했습니다. “속이 빈 것인 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무겁죠?” 배우는 대답했습니다. “내가 만일 무거움을 느끼지 않았다면 나는 예수님의 역을 해내지 못했을 겁니다.”

우리 사회와 교회에서 자꾸만 사라지고 있는 십자가, 누가 이 십자가 속에 숨겨진 비밀을 확실하게 알고 있을까요? 여러분들은 십자가를 알고 계시는지요? 요즘 인기 있는 드라마에서 “그렇게 안 살아봐서요?” 라는 말이 유행입니다. 여러분! 만일 우리가 십자가를 진정으로 안다면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 라는 생각이 들어야 합니다. 좀더 최선을 다해야지. 좀더 교회 일에 힘을 써야지.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어야 합니다.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야고보와 요한처럼 나는 그리스도의 잔은 마시지 못하면서 주님 옆에 앉게 해 달라고 바라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열심히 헌신하는 사람들까지도 미국인 남편처럼 자기 자신이 지고 가는 십자가는 속이 빈 십자가이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는 배우가 신앙 고백했던 그 고백에 다시 한번 귀를 기우려 봅니다. “내가 만일 십자가의 무거움을 느끼지 못했다면 나는 예수님의 역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내가 지고 있는 내 십자가가 가벼운 십자가이기만을 원하십니까?
그리고 주님의 뒤를 따르겠는지요? “십자가의 잔을 마실 수 있는지요? 오늘 내가 지고 가야할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면서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는 시간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는 무엇일까요?
첫째는 십자가는 죽음입니다(22절).
십자가는 장식품이 아닙니다. 악세사리가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 십자가는 사람들을 죽이는 사형 틀입니다. 그 사형 틀에 주님이 매달리셨고 그 사형 틀인 십자가에서 주님은 운명하셨습니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는 죽음을 말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생에 애착을 가지고 삽니다. 그러나 사람이 얼마나 살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여러 가지로 표현하였습니다.
인생을 나그네, 마라톤, 낙엽, 연극, 도박, 전쟁, 바람 등에 표현을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 빌 1:2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이 말씀은 내가 죽어야 그리스도께서 산다는 것입니다. 내가 죽을 때에 새로운 삶이 찾아온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갈 2: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 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미 자신은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혀 죽었다고 선언했습니다. 이제 자신의 인생은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는 그리스도만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울 같지는 못할지라도 우리 자신도 예수님 앞에서 죽어야 합니다.

. 나의 혈기가 죽어야 합니다.
. 나의 욕심이 죽어야 합니다.
. 나의 시기, 질투, 남을 미워하는 마음이 죽어야 합니다.

십자가에 박히면 천하없는 장사라도 두 손목에 못 박고 두 발목에 못을 박아 매달면 꼼짝도 하지 못합니다. 움직이면 통증이 심해지고 못 박힌 곳이 찢어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면 꼼 짝을 못합니다. 입도, 손도 발도, 내 맘대로 못 움직입니다.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아버리면 내 맘대로 할말도 못 하고, 가고픈 곳도 못 가고, 먹고 싶은 것도 맘대로 먹지 못합니다. 그리고 십자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함께 가야 합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내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는 무엇일까요?
둘째는 십자가는 희생입니다(요 12:24).
요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한 알의 밀 알이 되어 죽으므로 인해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의 형벌로부터 우리들은 용서를 받았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희생함으로 우리가 놀라운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그냥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희생하신 것입니다. 누구를 위하여…

엘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르밧에 갑니다. 성문에 도착해서 나무를 줍고 있는 한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엘리야 선지자는 그 여인을 불러 물을 가져오게 한 후에 그 여인에게 먹을 떡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여인이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합니다. 사실 떡은 없고 가루 한 웅큼과 병에 기름 조금 박에 없습니다.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려고 합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그 여인에게 말합니다. 두려워 말고 가서 내 말대로 해라 먼저 나를 위하여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사르밧 과부가 생각할 때는 “참 염치도 없는 사람이다”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온 선지자이기 때문에 그에게 다 내어놓을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한끼 더 먹고 죽는 것이나 그것을 드리는 것이나 사실 다를 바 없습니다.

미국 남북전쟁 때의 일어난 일입니다. ‘프레데릭스버그 대전투’에서 남과 북은 많은 부상자를 낸 채 서로 치열하게 싸우다가 다시 싸우기 위해서 후퇴를 했습니다. 그때 남 군의 한 병사가 물통을 들고 부상자에게 달려갔습니다. 이것을 목격한 북 군들이 일제히 사격을 가하였으나 그는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려가 부상자들에게 물을 나누어주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북군의 장교가 사격중지 명령을 내리고 잠시 휴전을 제의, 부상자들을 치료하자고 했습니다. 휴전 때 장교는 남 군의 용감한 병사에게 이름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내 이름은 크리스천입니다.

내가 지고 가야할 십자가는 무엇일까요?
셋째는 십자가는 용서입니다(마 1:12).
예수라는 이름 자체가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하시므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십자가가 있었기 때문에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용서의 3대 원칙을 알고 계시는지요? 용서의 3대 원칙이 있습니다.
첫째, 이해하는 것입니다.
둘째,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셋째,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네덜란드의 유명한 화가 렘브란트는 많은 자화상을 남긴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자신의 여러 작품 속에 자기 얼굴을 그려 넣었습니다. ‘순교자 스데반’ 에서는 스데반을 향해 돌을 던지는 성난 군중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자신을 그렸고, ‘빌라도의 법정’에서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고함치던 유대인 패거리의 한 사람으로 그렸습니다. ‘돌아온 탕자’ 라는 작품에는 자신의 얼굴을 탕자의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렘브란트는 그림 속에서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나도 거기에 있었어요.” 그는 아버지를 등지고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의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의 심정으로, 그리고 복음을 부정하던 살인자의 부끄러움으로 주님께 다가서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 그런 죄인의 심정으로 서 있어야 합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던 우리 역시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의 용서로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은 흔적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갈 6:17절을 보면 바울은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했습니다.
흔적은 스티그마라고 합니다. 고대사회에서 주인이 노예가 자기 소유임을 확인하기 위해 노예의 몸에 낙인을 찍었는데 그것을 스티그마라고 했습니다. 흔적이 찍힌 노예는 그 소유권이 주인에게 있습니다.

미국 태생으로 1938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펄S.벅(1892-1973)은 1960년 한국을 방문하여 2년여 동안 한국을 체험하며, 한국을 소재로 한 ‘살아있는 갈대’라는 소설을 썼습니다.
이 작품은 미국에서 처음 출판되자마자 곧바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뉴욕타임스 등 미국과 영국의 유수한 언론에서 ‘대지’이후 최고의 걸작이라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펄벅은 이 작품의 첫머리에서 한국을 “한국은 고상한 사람들이 사는 보석같은 나라”라고 극찬하는 등 소설의 행간 곳곳에서 한국과 한민족에 대한 극진한 애정을 표현하면서 동시에 일제의 잔악성에 대해 강한 분노를 표시하고 있습니다.
한국 사람은 미국이나 일본인이나 중국인이 가지지 못한 고유한 심성과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 아무리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고, 일본인이나 중국인인척 해도 한국 사람의 특성을 숨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펄벅이 예찬했던 것처럼 보석 같은 자랑거리를 더욱 빛나게 해야 하고 한국인의 긍지를 전 세계에 알려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구원받은 사람들은 어느 곳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구원받은 사람다운 행실과 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바울은 예수의 스티그마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예수의 소유라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의 소유입니까? 내 소유권을 누가 가지고 있습니까?
예수가 나의 주인입니다.
예수가 나의 소유권자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뭔가 달라야 합니다. 생각도 말도 행동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나는 예수님의 스티그마를 가진 사람입니다. 내 맘대로 내 멋대로 살면 안됩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십자가 자랑하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