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합 3:17-19)

오늘 설교를 특별히 안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만 계속 100번 읽어볼까요? 무슨 말씀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너무 너무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그런데요 이것이 하박국의 이야기이니까 은혜롭지요 내 이야기면 달라질 것 같아요? 아니라구요? 내 그분은 참 믿음이 참 좋은 분입니다. 제가 시골에서 자라서 알아요. 우리교회에도 과수원집 아들이 두 분이 있는데요 배를 따야할 철에 배가 열린 것이 없으면 얼마나 가슴이 아픕니까. 옛날에는 이요 소 키워서 딸 시집밑천 했습니다. 딸 시집보낼 때 팔라고요 부모님은 이요 힘드신 줄도 모르고 열심히 꼴 뜯어다 먹이십니다. 옛날에는 밥해먹는 것 보다 소여물 써서 주는 것이 더 힘들었던 것 같아요. 새벽에 아직 날이 밝지도 않았는데요 그 추운 겨울철에 일어나셔서 불때서 소여물 써서 주었습니다. 이렇게 정성스럽게 기르는데요 그만 집안에 병고가 생겨서 소를 팔 수밖에 없습니다. 소를 판 부모님은 텅 빈 외양간에 가서요 한참을 쳐다보십니다. 옛날에 소는 이요 단순히 돈이 아니라 가족의 일부였습니다.

세상의 조건 때문에만 하나님을 사랑하지 마세요.

하박국은 노래합니다. 17절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세상의 모든 축복이 사라진다해도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진짜 믿음은이요 평상시에 잘 모릅니다. 고난이 닥치면 그 사람 진짜 믿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고난이 올 때 내가 평소에 가지고 있던 생각 믿음에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한테 따집니다. 목사님 성경을 잘 보세요. 소가 없다고 했습니까? “없을지라도” 했지요. 하나님은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에게 축복을 주십니다.
아브라함에게 도 축복해 주었습니다. 그 아들 야곱에게도 축복해 주었습니다. 그 아들 요셉에게도 축복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부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양이 없어도, 그 소가 없어도 하박국의 말대로 하나님을 찬양할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은이요 부자가 되기 이전에 하나님의 명령대로 고향을 떠났습니다. 야곱은이요 무슨 일에든 열심이었습니다. 뜨거웠습니다. 정열이 있었습니다.
스가랴 8:2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그를 위하여 크게 분노함으로 질투하노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질투는이요 너무 너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시는 것입니다.

어근이 카나(an:q)인 “열심, 질투, 매우”라는 단어가 세 번나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 너무 사랑한다는 표현입니다. 다시 번역해 보면 이요 “만군의 여호와가 말한다. 나는 시온을 뜨겁게 사랑한다. 시온을 공격하는 자에게 불로서 심판할 만큼 열렬히 사랑한다.” 라는 말입니다. 우리도 뜨거운 가슴이 있어야 합니다. 요셉은이요 형들이 시기하여 애굽으로 팔려가서 여러 번 모함을 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렇게 보면 은이요 아브라함과 야곱과 요셉은 모두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였던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철학자 드골이 한 말입니다. “칼은 부러졌다. 그러나 나는 부러진 칼끝을 잡고 끝까지 싸울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라.

18절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원문의 단어들은 생각보다 간결합니다. 여섯 단어만 나옵니다.
“즐거워하며”(hz:/l[]a:에엘로자)는 아라즈(zl’[;:펄쩍뛰다, 승리를 거두다)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 단어를 반영하여 번역하면 "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 뛰며 기뻐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해 주셨습니다." 라고 됩니다. 19절에 나오는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가 더 진행된 형태의 말씀입니다. 얼마나 기쁜지요, 아무것도 없어요 기뻐요, 하나님을 인하여, 하나님 때문에 기쁜거예요?

바이오스피어II(Biosphere 2)을 아시는지요?
미국 애리조나 주에 있는 1989년 완공된 외부와 격리된 밀폐된 인공 생태계 실험장으로 약 4,000평 정도의 엄청난 규모로 지어졌습니다. 인공 지구(또는 인공 생태계)를 만들어 보려는 뜻에서 바이오스피어 2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바이오스피어 2의 모든 시설은 최대한 현재의 지구 상태와 비슷한 환경을 갖추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열대 우림 지역과 바다, 사막까지 조성되어 있었으며, 이 안에 8명의 사람이 들어가 외부와의 물질 교환 없이 자급자족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만든 것입니다. 내부에는 약 3,000종의 생물을 집어넣었으며, 우림에는 아마존에서 직접 가져온 300종의 식물을 심고, 바다에 넣을 산호초를 카리브해에서 직접 가져왔으며, 다양한 종류의 척추동물도 함께 넣었습니다.
1차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은 1991년 9월부터 2년 간 외부와 완전 고립된 채 농사를 지으며 생활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18개월만에 바이오스피어 2는 치명적인 불균형 상태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농사용 토양에 함유된 다량의 유기물은 박테리아 서식에 호조건을 제공하였고 이로 인해 산소 농도가 줄어들게 되었다. 게다라 건물의 콘크리트 벽도 산소를 흡수 한 채 방출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이산화탄소가 충만하여 잡초만이 주체 할 수 없을 정도로 자라고 개미와 바퀴와 같은 일부 곤충만이 번식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먹거리도 문제였습니다. 자연의 넓은 지역에서 번식하는 동물과는 다르게 좁은 실험실 공간 안에서는 가축 외에는 사냥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축만을 도살했지만 멸종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제일 먼저 멸종된 것은 돼지였습니다.
식물의 꽃가루받이를 대신해 주던 곤충들이 죽자 식물들도 번식할 수 없게 됐으며 25종의 작은 동물들 가운데 19종이 멸절하였습니다. 결국 바이오스피어 2 실험이 실패로 막을 내린 것입니다. 실패의 직접적인 원인은 콘크리트 벽이 산소를 잡아먹는 바람 때문에 사람이 숨을 쉴 수 없게 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이유는 자연의 복잡하고도 미묘한 이치와 원리를 사람들이 모두 파악하지 못하는데 있다는 것이 실험을 주조한 과학자들의 결론이었습니다.

잠언 8:27-31절을 함께 봅니다.
"27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으로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28 그가 위로 구름 하늘을 견고하게 하시며 바다의 샘들을 힘있게 하시며 29 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로 명령을 거스리지 못하게 하시며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 30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31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었느니라"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 매일 기뻐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이 지구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입니다.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라.

18절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너희와 함께 행하시며 너희를 위하여 너희 대적을 치고 너희를 구원하시는 자니라 할 것이며"(신 20:4) 라고 하셨습니다. 무려 이 한 절에 "너희"라는 단어가 5번나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며 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러 구원하시고자 하십니다. 그냥 돌아 오라!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계 22:17) 원하십니까? 원하세요. 고집부리지 마세요. 하나님 앞에서 고집 부려서 남는 것 없습니다.

1945년 일본이 패전한 후 일본 군국주의가 몰락되던 때 일본 동경대학 야나이 바라다다오 신임 총장 취임식이 있었습니다. 기독교인인 그는 총장으로 취임하면서 취임연설에서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창조 하셨습니다. 오늘도 그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인류의 역사를 섭리하시고 주관하십니다..." 하는 말씀을 하자 당시 고분학자의 권위 있는 교수였던 운천 교수가 반발을 일으켰습니다. "도대체 총장 취임연설이 마치 기독교 설교 같은데 저래서 되겠는가? 하고 불평을 토로했습니다. 이런 불평을 들은 야나이 바라다다오 총장이 운천 교수를 만나 "성경을 읽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물어 보았습니다. 운천 교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총장은 "한번이라도 성경을 읽어보시고 비판하십시오." 라고 했습니다. 운천 교수는 비판하기 위하여 성경을 사서 창세기부터 읽어 내려가다가 여러 번 중단하였으나 시편, 잠언을 읽어 가는 동안 기독교의 깊은 진리를 깨닫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언서를 거쳐 누가복음에 이르자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기도와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한 내용을 읽고 기독교인이 되어 교수직을 사임하고 미국으로 유학가서 신학을 한 후 목사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지혜가 담겨있는 책입니다.

미국의 전 대통령이었던 아이젠하워 대통령 임종 순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월터리드 육군 병원에서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그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빌리 그레함 목사님께서 그 분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의사는 그 면회 시간을 30분으로 제한했습니다. 면회시간이 되어서 그는 찾아가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로 위로의 말씀을 드리다가 시간이 되어서 이제 나가려고 일어서니까 아이젠하워께서 말하기를 "좀 더 있다 가시지요?" 이제 빌 목사님은 "무슨 특별히 하실 말씀이 계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는 신중하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만나야 할는지 확신이 없습니다.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이 아이젠하워의 마지막 부탁입니다." 그 때에 빌리 그레함 목사님은 기도교의 근본 교리를 간략하게 설명하게 됩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설 때 자기 의로 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잘한 일, 못한 일이 있겠지만 하나님 앞에 우리가 무슨 의를 잘했다고 내 놓을 수 있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오직 십자가의 은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그 은혜를 감사한 마음으로 믿음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리하게 될 때 하나님의 자녀 됨을 하나님께서 확증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영접해 주실 것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한참 기도하는 마음으로 묵상하다가 아이젠하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빌리, 감사하오. 나는 이제 준비가 되었소" 하고 눈을 감았습니다.
여러분, 구원이란 게 무엇입니까? 너무 추상적으로 생각할 것 없습니다. 참 구원이란 바로 이 마지막 순간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최종구원 Final Salvation, Final Triumph, 마지막 승리, 마지막 구원이라고 합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주 여호와만이 나의 힘입니다.

19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아직도 다른 것이 힘입니까? 시편기자는 노래합니다. 시 46:1-3 "1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2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3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셀라]“

 

주를 앙망하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21 너희는 고하며 진술하고 또 피차 상의하여 보라 이 일을 이전부터 보인 자가 누구냐 예로부터 고한 자가 누구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22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사 45:21-22)

제가 새벽기도를 4:30분에 나오는데요 같은 시간에 요즘 길에서 보이는 분이 있습니다. 연세가 좀 들어 보이는 여자 분은 옆에 성경을 끼고 남자 어린아이가 초등학생 2-3학년쯤 되어 보이는데요 이 아이의 손을 꼭 잡고 가시는 거예요. 언 듯 보아 엄마 같지는 않고요 할머님이지 모르겠습니다. 아직 잠에서 덜 깨어난 것 같은 아이가 할머니의 손을 꼭 잡고 교회로 가는 모습이 너무나 인상적이었습니다. 사람인 제가 보기에도 그렇게 이쁜 데요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얼마가 이쁘 겠어요?

찰스 스펄전이 17세기 침례교 전도자인 존 번연에 대해서 말한 적인 있는데 “그의 몸 어디든지 찔러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그의 피가 곧 성경을 전달하는 라인(Bible line)인 것을 알 것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말한 스펄전 역시 성경의 본문을 인용하지 않고는 설교하지 않았던, 그의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차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블랙우드(Blackwood)교수는 스펄전에 대해서 “사도시대 이후의 가장 영향력 있고, 가장 유능한 설교자 였다.”고 했습니다. 그를 이처럼 영향력 있는 목회자로 만든 것은 그가 바른 신앙, 바른 신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19세기말의 위대한 청교도 신학자였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할아버지의 서재에서 존 폭스(John Foxe)의 “순교사기”(The Book of Martyrs), 존 번연의 “천로역정”(Pilgrim’s Progress)과 같은 17세기의 청교도 경건 서적을 통하여 로마 천주교회의 오류를 인식하였고, 철저한 성경주의, 철저한 예수 중심주의자가 되었습니다. 특히 존 번연이 그에게 미친 영향은 대단히 커서, 그는 평생 “천로역정”을 100번 이상 읽었습니다. 그리고 토마스 맨튼(Thomas Manton), 리차드 십스(Richard Sibbes), 존 오웬(John Owen), 리차드 백스터(Richard Baxter)와 같은 청교도의 경건과 신학, 특히 설교는 그에게 엄청난 영감을 주었습니다. 한국최초의 7명의 목사 중에 한 분인 주기철 목사님도 천로역정 때문에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스펄전은 신장질환에 걸려 고생하다 죽었는데요 그가 죽은 날 영국에서는 상가들이 문을 닫고 끝없이 이어지는 장례행렬이 그를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그의 관 위에는 성경이 펼쳐 있었는데 그를 회개 시켰던 바로 그 성경 본문이 펼쳐있었습니다. 그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 22절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입니다. 5만여 명의 사람들이 스펄전의 관위에 놓인 이 구절을 보았습니다. 그는 죽어서도 자신을 변화시켰던 이 말씀을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알고 믿으세요.

본문 21절에 “21 너희는 고하며 진술하고 또 피차 상의하여 보라”고 하십니다. 기독교는 덮어놓고 믿는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지하여 무조건 믿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여러분! 알아야 효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상대방이야 어떻든 관계없이 나만 좋자고 하는 것은 효도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믿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아는 것이 힘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시 9:10)
“주를 아는 자에게 주의 인자하심을 계속하시며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주의 의를 베푸소서”(시 36:10)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로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렘 24:7)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벧후 1:8)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빛은 감추어져 있지 않습니다. 빛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두움은 숨깁니다. 죄는 감춥니다. 하나님은 드러내시기를 좋아하십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마 5:15)

구원을 주시는 다른 이가 없습니다.

21절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22절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
다른 신을 믿는 사람들이요. 그곳에도 길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은 없다”고요, 그리고 다른 길도 없습니다. 다른 구원도 없습니다.
“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6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 4:5-6)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25) 이제 길을 잃지 마세요.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님이 설교한 것입니다(2006.7.2).
“어제 연동교회 이성희 목사님이 신문에 이런 글을 실었습니다. ‘핵심인물’ 이라는 이런 기사로 국민일보에 실었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자세히 읽어보니까 내용이 이렇습니다. 새만금에 구경을 갔는데 마침 교인이 거기 있는 핵심 키인 수문을 여는 키를 가진 분의 안내를 받으며 구경을 잘했다는 겁니다. 거기는 아무도 갈 수 없는 자리에 자기가 깊이 들어가 보았다는 거예요. 이 세상에 핵심인물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주님을 따라갈 때 가장 귀한 데로 안내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나에게 너무 감동이 되었어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핵심인물입니다. 이 온 우주의 주인이십니다. 그가 이 온 우주의 리더예요. 온 우주의 감독이시고 그가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목자예요. 이 분에 의해서 모든 우주가 다 만들어지는 거예요. 앞으로 되어 질 미래도 이 분이 다 계획하는 거예요.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에요. 하늘과 땅과 열방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생명을 다 다스리시는, 잡고 계시는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이냐 말입니다. 핵심인물이에요.

제가 이스라엘에 가서 사해사본을 보았어요. 어떻게 보았느냐? 그 안에 있는 사람도 안 보여 줍니다. 그 안에 있는 누구도 볼 수 없다는 겁니다. 어느 나라 국가 원수가 와도 사해사본은 보여 줄 수 없다라는 거예요. 큰 쇠로 된 집채만 한 문을 몇 개나 열고 지하로 들어가서 그 안에서 보관되어 있는 사본을 보여 주는 거예요. 어떻게 제가 보았느냐? 그 관장이 우리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렸어요. 핵심인물이 와서 예배를 드릴 때 은혜 받은 거예요. 그랬더니 곧 보여주겠다는 거예요. 저는 미국에 가서 아폴로 우주선도 올라 타 보았어요. 거기서 사진도 찍었어요. 물론 하늘은 안 갔어요. 아폴로 연구소에 근무하는 과학자들은 옆에 있는 사무실에 갈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거기 있는 핵심인물이 안내하고 그 분이 우리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은혜를 받은 다음에 저에게 약속해 주었어요. 내가 아폴로에 태워드리겠습니다. 아폴로를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정말 아폴로를 보고 올라탔다라는 거예요. 핵심인물입니다.”

저는 김삼환 목사님과 같이 핵심인물을 아는 분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사해사본도 보지 못했구요, 아폴로 우주선도 타보지 못했어요. 그런데요 하나님의 나라에는 갈 거예요. 근데 아마 그것도 그분보다는 늦게 갈 것 같아요. 그래도 섭섭하지 않아요. 열심히 하는 것이 예요. 김삼환 목사님도 그분의 자리에서 열심히 하시는 것 같이 우리도 열심히 하는 거예요. 여러분! 사람 많은 데서 떠밀려 가듯이 하는 것은 그래도 조금 더 쉽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없는 것 같은 곳에서 열심히 하는 것은 어려워요. 그래도 가는 것입니다. 그래도 하는 거예요. 어떤 분이 말한 것처럼 ” ‘포기’는 배추 셀 때나 하는 말이다.” 명심하세요.

주를 앙망하라

22절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땅 끝의 모든 백성들을 초대하십니다. 이제 민족과 국가를 구분하시지 않으십니다. 이사야도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 11:9)고 하였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앙망하다’로 번역된 원문은 yl’aeAWnP](페누-엘)인데 이 뜻은 “향하다, 돌아가다”는 말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영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 우리의 구원자 되시는 하나님을,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눈을 말합니다.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열방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경배하리니”(시 22:27) 라고 했습니다.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22절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여기서 그리하면은 매우 중요합니다. 구원을 얻는 결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바로 주를 앙망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말을 우리에게 다시 풀어줍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 2:38)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행 16:31)

엄상익 변호사가 쓴 ‘임종 연습’이라는 책에는,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천국에 들어가는 모습을 잘 그려놓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평소에 교회를 나가지 않았습니다. 누가 와서 전도하면 “당신이나 혼자 가슈”할 정도로 거부했습니다. 그런데, 돌아가시기 한 달 전쯤, 갑자기 세례 받기를 원했습니다. 세례 받은 후엔, 식사 때마다 열심히 기도를 했습니다. 그 때까지, 아버지는 정정했습니다.
그런데, 세례 받은 지 한 달 후, 아버지는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병원에서 임종을 했습니다. 임종하시던 날 아침, 아들이 아버지를 뵈었을 때, 아버지가 불쑥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얘야, 내가 조금 전에 아주 좋은 곳으로 가려다가 도로 왔단다. 내가 빨리 가고 싶은데도, 의사와 간호사가 아서 주사바늘을 찌르는 바람에, 내가 가지를 못했구나.”
임종을, 한 시간 가량 앞둔 때였습니다. 아버지 표정은 진지했고 정신도 아주 맑았습니다. 먼 길 여행을 떠나는 사람처럼, 기대 섞인 표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은 묘한 생각이 들어서,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며 은근히 물었습니다. “아버지, 정말 가시려는 곳을 보았어요? 그곳이 있어요?”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 때, 의사가 말하기를, “심장이 서서히 정지되고 있습니다. 지금 살아날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마지막으로 전기 충격을 가하면 어떨까요?” 하고, 보호자인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께 뜻을 물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얘야, 어젯밤에도 여러 번 전기 충격을 했단다. 겪어보니, 그것이 죽는 것만 못하구나. 천국이 있는 걸 알았는데, 이제는 편안히 가게 해다오.” 그리고, 아버지는 십자가를 찾았습니다. 아버지는, 하품을 크게 한 번 하시고는, 잠자듯이 이 세상을 떠나갔습니다.
저자인 엄상익 변호사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아버님의 죽음은 내게 강도가 높은 지진이었다. 보이지 않는 세계가 실재함을 느끼게 된 것이다. 성경에, 한 부자가 지옥에 떨어져 형제에게 그 사실을 전하려 해도 전하지 못했던 저 세상을, 아버지는 생전에 나에게 알려주었다.’ 그 후, 그는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2년 동안, 신약을 서른 번이나 읽었습니다. 성경을 읽기 전에는, 일을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말씀이, 성경 갈피에서 살아있는 생물체처럼 튀어 오르는 듯했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도 이제 열심히 하나님을 아는 거예요. 하나님 외에 다른 이가 없다는 것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보내 주신 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 없다는 것을 아는 거예요. 주를 앙망하는 거예요.

그리하면, 그리하면,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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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2:6-7)

옛날에 어느 성문 곁에 지혜로운 노인이 앉아 있었습니다.
한 청년이 와서 묻습니다.
“할아버지! 이곳 살기 좋습니까? 한번 정착해 볼까 해서 와 봤습니다.”
그러자 노인이 묻습니다. “자네! 전에 살던 곳은 살기 괜찮았는가?”
“네. 괜찮았습니다.”
그 말을 듣고 노인이 말합니다. “이곳도 살기 괜찮은 곳이네.”

얼마 후에 다른 청년이 와서 묻습니다. “할아버지! 이곳 살기 좋습니까?”
노인이 역시 묻습니다. “자네가 전에 살던 곳은 어땠는가? 살기가 괜찮았는가?”
“아주 지옥 같은 곳이었죠.”
그 말을 듣고 노인이 말합니다. “이곳도 아주 지옥 같은 곳이네.”

같은 환경에서 어떤 사람은 행복하지만 어떤 사람은 불행을 느낍니다. 행복은 환경이 결정하지 않고 감사하는 태도가 결정합니다.
죤밀러는 “사람이 얼마나 행복한 가는 그의 감사의 깊이에 달려 있다.”고 했습니다.

남아메리카 멕시코 어떤 마을에 온천과 냉천이 옆에서 가지런히 솟아나는 신기한 곳이 있습니다. 한쪽에는 부글부글 끊는 온천이 땅에서 솟아오르고 그 옆에는 얼음물과 같이 차가운 냉천이 솟아오릅니다. 그러니까 그 동네 아낙네들은 빨래 광주리를 가지고 와서 온천에서 빨래를 삶고 냉천에서 헹구어 가지고 깨끗한 옷을 집으로 가져갑니다. 그 모습을 본 외국 관광객이 멕시코 안내원에게 물었습니다. “이곳 부인들은 참 좋겠습니다.” “왜요?” “찬물과 더운물을 마음대로 거저 쓸 수 있으니까요. 이곳 사람들에게는 온천과 냉천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많겠군요?” 그랬습니다. 멕시코 안내원의 대답이 “천만에요.” 그럽니다. “왜요?” “이곳 아낙네들은 감사하기보다는 불평이 많습니다.” “왜 그렇지요” “비누가 나오지 않으니까요” 그랬습니다. 우리속담에 “물에 빠진 사람 건져주니까 보따리 내놓아라”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감사하지 못하는 것은 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받은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랑의 힘보다 더 큰 것은 없습니다.”
충북 음성의 ‘꽃동네’ 입구, 커다란 바위에 새겨진 글귀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받은 것이 너무 많습니다. 오늘날 내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을 받은 것입니다. 6절에 “받았으니” 라고 말합니다. 건강을 받기도 하고 물질을 받기도 하였으며 부모도 자녀도 귀한 달란트도 모두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은혜를 입은 사람들에게 성경은 여러 가지로 감사에 대한 교훈을 주십니다. 골 3:15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감사가 없는 사람은 만사가 불만입니다. 부모님에게 불만이 많습니다. 자녀에게 불만이 많습니다. 직장 동료에게 불만이 많습니다. 정치에 불만이 많습니다. 사람에게만 불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도 불만이 많습니다. 여러분 내가 원하는 세상 만들어 놓고 감사하려고 하면 죽을 때까지 감사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감사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본문 6절을 봅니다.
“호스(@W”) 어떤 방법으로 / 운(ou+’n) 따라서, 그러면 / 파랄람비티(parelavbete) 받아들이다, 교재하다” 이어서 “그 그리스도 예수 그 주”라고 나옵니다. “그(투)”(관사)가 두 번 나오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그(투) 그분이 곧 메시야이고 그분이 곧 우리를 구원해 주신 분이며 그분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을 알면 됩니다.

누구에게 감사해야 합니까? 골 3:17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그분을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여러분! 다른 신에게 비는 분들이요 감사하려고 가는 것 아닙니다. 복 달라고 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분들이요. 복만 달라고 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복 달라고 하기 이전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왜 감사해야 됩니까? 고후 9:15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은사가 없다 구요. 무엇을 원하십니까? 박태환 같이 수영을 잘하기 원하십니까? 제 이름이 이영제(李泳濟)입니다. 한자로 보면 길 영 자에 삼수변이 있는 영자이고 제자는 건늘 제 또는 이룰 제 입니다. 이 글자에도 삼수변이 있습니다. 저는 이름대로 하면 물에서 놀아야 합니다. 수영선수가 되어서 이루어야 하는데 저는 물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물 속에서 뜨지도 못합니다. 이발소에 가서 머리 감겨주는 것 어려서부터 싫어했습니다. 코에 물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람이요 다른 한쪽이 부족하거나 못하면 다른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제주가 많은 사람이요 목회를 잘 못합니다. 그냥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것이 없어서 목회만 해야 됩니다. 제가요 학벌이 좋으면 교수하라고 해서 컴퓨터선교회 잘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러줘도 가지 못하니까 컴퓨터 앞에 매달려서 선교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따라합시다. “부족한 것이 장점이다.” 부족한 것이 있기 때문에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은사(달란트)는 무엇입니까? 롬 6:18 “죄에게서 해방”을 받은 은사라고 말합니다. 이 은사를 받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본문 7절을 봅니다.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 뿌리를 박으세요. 요한계시록 5:5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가 승리자입니다. 이제 마음을 확정하세요. 이러 저리 보아도 우리가 진정 따를 것은 예수뿐입니다. 이제 방황 그만하실 때 되었잖아요. 사춘기도 아니잖아요. 예수께 뿌리를 박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6절 “그 안에서 행하되”라고 했습니다. 어려서 사방치기 놀이 한 것 생각나시지요? 밖에 나가거나 금을 밟으면 죽는 것이고 금 안에 들어가면 사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 잘 믿는 것인가? 주 안에서 행하면 됩니다. 일을 하는 것도, 결혼 생활도,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도, 먹는 것도, 운동을 하는 것도 주 안에서 해야합니다. 운동 열심히 하구요 주 밖에서 살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분은 주 안에서 입니다.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찬송가 316장과 같이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가 예수 안에서만 보장되고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나무가 뿌리를 박지 않으면 죽습니다. 말씀에도 뿌리가 있어야 합니다. 믿음도 뿌리가 있어야 합니다. 기도도 깊이가 있어야 합니다. 뿌리가 깊이 박혀 있을 때 폭풍우가 와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신앙생활은 주 안에서 세워져 가는 역사입니다. 마치 건축물이 하나 하나 세워져 가듯이 세워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배우지 못하면 세워지지 않습니다.
골 1:7 “에바브로에게 너희가 배웠나니”라고 나옵니다. 골로새 성도들은 에바브로를 통해 주님의 말씀을 배웠습니다. 우리도 누군가를 통하여 복음을 받았습니다. 나다나엘은 빌립을 통해서 받았고 시몬은 형제 안드레를 통해서 받았습니다. 저에게 복음을 전한 분은 자매입니다. 성만 말씀드리면 “강”입니다. 이 자매가 세 남자를 전도했습니다. 저보다 일년 선배인 이영표를 그리고 저 이영제를 그리고 1년 후배인 이영도를 전도했습니다. 모두가 “이영..”으로 시작합니다. 경기도 남양주군 화도면 마석의 화도교회 출신입니다. 그런데 3명 모두 신학을 했습니다. 1년 후배인 이영도는 화곡동에서 목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처음에 전도한 “이..”는 본인이 데리고 삽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가 있어야 됩니다.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4)라고 합니다. 이 전하는 교훈은 “예수 그리스도가 주”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나의 친구요 구주이신 것을 전해야 합니다.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주 안에 뿌리를 박고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골 3:16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찬양하라.”고 했습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감사했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으면서 감사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사자굴속에 던져지면서도 감사했습니다. 일제시대 때는 신사참배 거절로 순교하면서 감사했습니다. 6.25 때는 총에 맞아 죽으면서 감사했습니다. 재산을 많이 물려받은 자식이 부모님께 감사하는 것 아닙니다. 건강하다고만 감사하는 것 아닙니다.

일본에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이질이라는 질병으로 뇌성마비를 얻어 듣는 것과 보는 것과 눈꺼풀 움직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된 사람, 우찌무라 간조가 있었습니다. 그의 몸은 머리만 크게 발달하고 나머지는 어린아이의 것 그대로인 채 흐느적거리는 그야말로 볼품 없는 몰골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어머니 한 분밖에는 없었는데 어머니가 밖에 나가실 때 성경책을 머리맡에 펴두고 머리를 받혀놓고 나면 돌아오실 때 까지 그 장만을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고린도후서 12장을 펴놓고 나가셨습니다. 그러니까 아침부터 저녁까지 고린도후서 12장만 읽는 것이지요. 고린도후서 12장을 읽어 내려가던 중이었습니다.

고후 12:9-10 “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주님이 바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하신 말씀을 자기에 대한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바울은 자기처럼 눈에 박힌 가시를 제하여 주시기를 구했으나 하나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진다”고 한 것입니다. 그 이후로 그는 어떤 사람을 찾아가도 천사와 같은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그는 뒤늦게 책과 방송을 통하여 완악한 일본인을 회개시키는 사도로 쓰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선택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렇게 변모되기까지 어머니의 극진한 사랑과 먼 길을 마다치 않고 자신을 회개시키려 찾아온 목사님 덕분이었다고 했습니다. 그가 지은 시 “괴롭지 않았더라면” 입니다.

만일 내가 외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을

만일 모든 형제 자매들도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은 전해지지 않았을 것을

만일 우리 주님이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을

 

네 부모를 기쁘게 하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22 너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 23 진리를 사고서 팔지 말며 지혜와 훈계와 명철도 그리할지니라 24 의인의 아비는 크게 즐거울 것이요 지혜로운 자식을 낳은 자는 그를 인하여 즐거울 것이니라 25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 26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잠 23:22-26)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전래되었을 때 제일 핍박을 받은 이유 중의 하나가 기독교는 조상에게 불효하는 종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독교는 효도의 종교입니다.
십계명 중에 1-4계명은 대신관계의 계명이고, 5-10계명은 대인관계에 대한 계명인데, 이 대인관계 계명 중에 첫 번째가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출애굽기 21:15 “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했습니다. 17절에는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라”고 했습니다. 출 23:22절에는 오늘 본문 말씀과 같이 “너 낳은 아비에게 청종 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라”고 합니다. 잠 30:17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는 엄중한 말씀이 있습니다.

효가 무엇입니까?

여러분! 효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 따르면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부모공경은 가정의 위상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정이 흔들리면 첫 번째 희생자는 아이들입니다. 두 번째 희생자는 노인들입니다. 그래서 아이들과 노인들 문제는 우리 사회의 가정문제와 직결되고 있습니다. 여기 노인들이 우리 앞에 들려주는 마음 아픈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단체에서 여러 노인들에게 설문조사 한 결과입니다. 부모가 자식 앞에 하고 싶지 않은 말, 하기에 부담스러운 말이 여러 가지가 있는 중에 대표적인 것이 이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몸이 아프다’는 말을 하기가 그렇게 어렵다고 합니다. “얘들아, 내가 지금 몸이 아프다 약을 좀 지어 달라. 병원에 가서 치료를 좀 받자”라고 하는 말을 하기가 너무 부담스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가 아파도 한참동안 참는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외롭다’는 말을 하기가 그렇게 힘들답니다. 노인들이 정신적으로 외로움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식들 앞에 “얘들아, 내가 외롭다. 어디 바람 좀 쐬러 가자. 내가 기분전환을 할 필요가 있다. 여행을 한번 가자” 차마 이 말을 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배고프다’ 는 말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 배고프다는 말은 실제로 끼니를 거르는 노인들도 더러 계시지만 여기에는 용돈이 궁한 것도 포함시켜서 통계를 내었습니다. “얘들아, 내가 지금 용돈이 궁하다. 용돈을 좀 달라” 이 말을 하기가 어렵답니다.

효가 무엇이겠습니까? 앞에서 지적한 것들을 먼저 돌보아 드리는 것입니다. 몸이 아프신 곳은 없는지, 병원은 다녀왔는지, 약은 있으신지, 얼마나 외로우신지, 혹 배가 고프신 것 아닌지, 용돈은 있으신지 챙겨 드리는 것입니다.
십계명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 있습니다. 십계명에 주어진 이 계명은 매우 무게가 있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했습니다. 약속 있는 첫 계명입니다. 부모공경 하라는 계명 다음에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순서로 나옵니다. 이것은 부모 공경이 제일 우선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불효는 살인보다, 간음보다 더 중죄라는 개념입니다.

부모를 모시고 사는 자식들은 부모에 대한 불효의 가책이 많습니다. 부모를 모시는 자녀는 그래도 부족하다 이런 마음이 있는데 부모를 모시지 않고 사는 자식들은 불효에 대한 가책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오히려 부모를 모시는 분들이 그런 부담을 느끼면서 더 효도를 합니다. 여러분이 혹 부모님을 모시지 못하고 있고 다른 분들이 모시고 있다면 가끔 용돈이나 주면서 생색내지 말고 부모님 모시는 형님, 동생, 올케, 시누이에게 두 손 꼭 잡고 수고하십니다. 저 대신 부모님 잘 모셔주신 것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인사하세요. 여러분! 부모님들이요 오랜만에 자식 오면 불평 늘어놓으실 수 있습니다. 그러면 모처럼 부모님 보고서는 지금까지 모신 것은 생각지 않고 그러실 수 있냐고 따지지 마세요.

어느 마을에 효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모님은 막 나가는 소문난 분들입니다. 5일마다 장이 열리는데 장날마다 그 아버지는 사고를 한 건씩 칩니다. 그 부모들은 지탄을 받는 부모들이고 평소에도 이웃들과 불화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많이 주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집에서 효자가 났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의 입에서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저는 부모님에 대해서는 내세울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이 자꾸 불쌍히 여겨지고 내가 이 부모를 더 잘 모시지 않으면 얼마나 비참하겠는가?”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극진히 모시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마지막에 아주 중요한 말을 했습니다. “제가 부모님을 측은히 여기고 부모님을 내가 안 모시면 안 된다는 그 마음이,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마음입니다.” 그렇게 답을 했습니다.
여러분! 오늘본문 25절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 고 했습니다. “부(아브:아버지) 모(엠:어머니) 즐겁게 하며” 라고 하고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고 다시 말합니다. 특별히 어머니에게 더 잘해 드려야 합니다. 중국에 지진이 나고 자식을 껴안고 죽은 어머니의 시신이 발견되어 주위를 안타깝게 했습니다. 자식 안고 죽은 아버지는 안 나왔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탈진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런 처참한 지경에서도 육신의 어머니를 사랑하는 제자에게 부탁하셨습니다.

효자와 불효자

문화적으로 보면 동양이 효도하기가 더 쉽고 효자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만 보시면 안됩니다. 똑같이 동양에 불효자도 많습니다. 우리나라에 부모님을 잘 모시는 효자가 많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을 학대하는 불효자도 많습니다. 서양에는 효자가 별로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처럼 부모님을 모시는 가정이 별로 없습니다. 그것만 보고 효자도 없는 동네, 효자도 없는 사회가 무슨 선진국인가? 그렇게 평가하시면 안됩니다. 반면에 선진국에는 불효자가 적습니다. 우리처럼 이렇게 노인을 학대하고 부모를 학대하는 경우가 없습니다. 사회와 국가가 자식들이 할 효에 한 몫을 책임져 주기 때문에 노인들이 그렇게 처량하지가 않습니다. 그러니까 동양에는 효자도 많고 불효자도 많은 것입니다. 반대로 서양에는 효자도 적고 불효자도 적습니다.

통계청에서 자식들에게 학대받고 집을 나온 노인들 1,815명을 조사를 했습니다. 그 중에 아들로부터 학대받은 노인이 41%, 745명이 학대를 받았습니다. 다음 순위가 며느리한테 학대받은 노인이 29%입니다. 다음에 딸한테 받은 사람이 9%입니다. 어느 딸을 둔 어머니의 이야기입니다. 지방에서 사시는 어머니에게 딸이 와서 우리가 엄마를 평생 잘 모실 테니까 여기 있는 논밭을 정리하고 합치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위와 굳게 약속을 했습니다. 그래서 수천 평이 되는 논밭을 팔아서 딸한테 주고 평생 모시는 약조를 하고 그렇게 딸집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조금 흐른 후에 그만 딸의 마음이 변하였습니다. 이 딸이 내뱉는 말이 폭력보다 더 심합니다. 결국에는 같이 살 수 없어 시설로 가셨습니다.

진정한 효는

효는 물질로 하는 게 아닙니다. 오늘 성경에 중요한 성구가 하나 있습니다. 26절에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두 가지가 나옵니다.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달라” 또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효는 마음으로 하고 눈으로 합니다. 이 두 가지가 안 되면 다른 것도 성립이 안됩니다. 형편이 안돼서, 돈이 없어서, 여유가 없어서 효를 못한다는 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부모가 우리 자식에게 요구하는 것은 자식의 마음입니다. 본문 26절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네게 달라.” 오늘 우리 자식들이 부모님께 밥을 한 끼니 드리면서도 그저 귀찮은 마음이 든다면 그것은 효가 아닙니다. 부모님을 섬겨드리면서 뭔가 빼앗기는 것처럼 그저 아까운 마음이 듭니까? 혹시 여러분, 교회 헌금을 드리면서도 그 마음이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까? 헌금할 때마다 아까운 마음, 빼앗기는 마음, 손해보는 마음으로 하는 것은 믿음의 헌금이 아닙니다. 부모님이 원하시는 것은 마음입니다. 더 무엇이 있겠습니까?

옛날 어떤 마을에 효자와 불효자가 살았습니다. 효자에 대한칭송이 자자한 만큼 불효자에 대한 비난도 높았습니다. 어느 날, 꾸지람만 듣던 불효자가 ‘나도 그 효자처럼 해서칭찬을 들으리라’ 생각하고 효자네 집에 가서 효자가 하는 행실을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건 뜻밖에도 아주 쉬웠다. 아침에 일어나면 아버지의 옷을 입고 있다가(따뜻이 녹여) 내어드리고, 밥상이 들어오면 먼저 자기가 먹어보고(맛이 어떤지, 상하지는 않았는지), 밤에는 아버지의 잠자리에 먼저 들어가 누웠다가(자리를 녹이려)내어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본 불효자는 자신을 가지고 집에 돌아와 당장 그대로 실행했습니다. 그랬더니 왠걸, 전보다 더욱 심한 호통을 들었습니다. 어른의 옷을 함부로 입었다고, 어른보다 먼저 수저를 들었다고, 어른의 자리에 무엄하게 들었다고 결국 그는 효자가 되어보려다가 그 전보다 더욱 불효 막심한 놈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 그랬습니다. 여기 “내 길”이란 말은 내가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말합니다. 여러분, 요즘 자식의 눈길을 피하는 부모가 많습니다. 자식들의 눈길이 너무 무섭다는 겁니다. 부모를 보는 눈길이 순수하지가 않습니다. ‘무슨 부모노릇 했다고. 내가 당신 같은 부모를 만나서 이 팔자가 된 줄 알기냐 하느냐’ 하는 눈길로 봅니다. 여러분, 그렇게 보는 눈길을 누구보다 부모가 먼저 알아차립니다. 오늘 성경에 뭐라고 했습니까? “네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부모를 멸시하는 눈길부터 고치시기 바랍니다. 시선부터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는 효를 눈길에서부터 먼저 시작해야 됩니다. 마음을 드리고 눈길을 바로 해야 됩니다. 우리 부모님이 자식의 눈길을 보고 또 봐도 부담 없는 효심의 눈길로 부모를 대하기 바랍니다. 우리는 부모의 약점을 볼 때마다 오히려 측은히 여기고 저 약점을 내가 담당해야 된다는 효심의 마음으로 부모의 약점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게 바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니라” 즉 내가 지금 부모답지 못하다. 그러나 부모답지 못한 이걸 즐겁게 보아 달라는 말입니다. 자식의 눈길부터 부담스러우면 그 부모는 자식이 아무리 좋은 침대에 재워드리고 아무리 맛난 것으로 먹여드려도 그 부모의 마음은 즐겁지가 않는 것입니다.

충북 제천 출신으로 판사가 된 분이 있는데 그는 허리가 굽은 장애인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는 술과 도박에 빠져 있었습니다. 손가락까지 잘라봤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다시 노름을 했습니다. 손가락이 다 잘려나가 손으로 화투를 잡을 수 없게 되었을 땐 대리자를 세워 노름을 했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가산을 탕진하고, 온 가족은 어머니의 삯바느질 품을 팔아 겨우 연명하였습니다. 아버지는 한밤중에 집에 들어와서 노름 밑천을 내놓으라고 어머니를 닦달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홧김에 마루에 있던 어린 아들을 마당으로 던져 버렸습니다. 이 일로 그는 곱사등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그에게 함께 놀아줄 친구들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공부만 열심히 하였고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판사가 되었습니다. 판사가 된 그는 자신을 이렇게 만든 아버지를 언제나 잘 모셨습니다. 그에게 복음이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었는데도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전도는 선교는 왜 합니까? 하나님의 예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 또한 성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부모가 가장 기쁜 것은 자식이 잘 되었을 때요, 가장 고통스러울 때는 자식이 잘못 되었을 때입니다. 이런 부모님의 마음을 아신다면 여러분! 따뜻한 눈으로 부모님을 바라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