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전도(선교)방법2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마 9:38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마 10:5-16 “5 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어 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6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7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왔다 하고 8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9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10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 11 아무 성이나 촌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12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13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14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대학병원 영안실에 한 번에 세 구의 시신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그 세 시신이 다 웃고 있는 모습이 아닙니까? 담당 직원이 너무 궁금하여 구급대원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이 시신들은 왜 한결같이 웃고 있는 겁니까?” “예, 첫 번 째 분은 20억 로또 1등에 당첨된 것을 확인하는 순간 심장마비로 죽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저기 계신 분도 역시 사인이 심장마비인데 아들이 사법고시에 합격한 것을 통보 받은 즉시 죽은 사람입니다.”
영안실 직원은 그 두 시신이 웃으며 죽은 이유가 그런 대로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시신은 더욱 환한 미소를 띠고 죽은 것이 아닙니까? 그 사연을 물어보자 구급대원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 분은 벼락을 맞아 죽었습니다.” “번개와 벼락을 맞았을 때 어찌 웃고 있었단 말입니까?” “주위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사진 찍는 줄 알고 평소 습관대로 웃다가 그만…”

“항상 기뻐하라”(살전 5:16) 복음을(기쁨을) 슬픈 얼굴로 전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항상 기뻐하시면서 복음을 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지난주 설교에서 5가지전도(선교)방법을 말씀드렸습니다.
마 9:38
(1)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의 주체
(2) “추수할 일꾼을 보내어 주소서” 기도와 협력사역
마 10:5-16
(3) 5-6절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전도나 선교의 대상
(4) 7절 “가면서 전파하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복음을 전할 때
(5) 7절 “천국이 가까웠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전할 내용 즉, 복음의 핵심

오늘은 이어서 6번째부터입니다.

(6) 8절 “병든 자를 고쳐주며…” 전도의 방법입니다. 상대방의 필요의 욕구를 채워주며 하라는 것입니다. 병든 자를 고칠 수 있는 능력을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주신 것으로 하면 됩니다. 병든 자를 고쳐줄 능력이 없다 구요? 걱정하지 마세요.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했습니다. 내게 있는 것으로 주면서 하면 됩니다. 베드로가 가진 것은 무엇입니까? 나사렛 예수의 이름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소망이요 기적을 일으킵니다. 성도는이요 예수를 가졌다면 다 가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잃었다면 다 잃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방법은이요 없는 것을 도적질 하다가 하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내게 있는 것으로 하면 됩니다.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벗어주면서 하는 겁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무엇을 못합니까? 예수님 때의 종교 지도자들은 입으로만 했습니다. 이미 네게 주신 은혜가 있습니다. 그것을 활용하십시오. 주를 위해서 사용하세요.

(7) 8절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대가를 바라고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욥 1:21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했습니다. 다윗도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시 116:12) 이미 받은 은혜가 많습니다.

(8) 9-10절 “전대나 금이나… 두벌 옷이나… 저 먹을 것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주님의 일을 하면서 염려하지 말고 믿음으로 하라고 하셨습니다. 염려하면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을 못합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하지 못합니다. 여자나 남자가 없어서 결혼을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지나치게 염려를 많이 하여 결혼을 못합니다. 살면서 해결이 됩니다. 저 아시지요. 결혼할 때 토큰 하나 있었습니다. 그래도 결혼해서 잘 살잖아요.
마 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마 13:22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염려는 믿음을 병들게 합니다. 염려는 사단이 뿌리고 간 것입니다. “사람이 너희를 회당과 정사 잡은 이와 권세 있는 이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 것을 염려치 말라”(눅 12:11) 우리의 의식주 뿐만 아니라 우리가 권세 가진 자들에게 끌려가도 우리가 말할 것에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9) 11-13절 “영접하는 자의 집에 평안을 빌고 그곳에서 머물라.” 영접하는 자의 집은 교회가 됩니다. 영접하는 자의 집에서 교회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마게도냐에 갔을 때 “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행 16:14) 이 여인을 만남으로 유럽 최초의 교회인 빌립보 교회를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한국 최초의 교회를 세운 사람은 서상륜입니다. 이 사람은 만주와 조선을 오가며 인삼장수를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만주에서 인삼을 팔던 그는 어느 날(1878년 30세) 갑작스럽게 열병에 걸려 죽을 위기에 처합니다. 이 소식을 듣고 고향친구 몇 명이 달려와 그를 현지 선교사가 운영하는 병원에 입원시켰는데, 그곳에서 만나게 된 사람이 바로 로스 선교사(John Ross)입니다. 또 그곳에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매킨타이어 선교사(John MacIntyre)의 끈질긴 전도를 받게 됩니다.
당시 서상륜의 병세는 매우 위독했습니다. 그를 가까이서 지켜보던 로스 선교사는 ‘서상륜이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자살을 생각할 정도’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죽음의 문턱까지 이른 그는 결국 병이 완치되면 예수를 믿기로 약속합니다. 여러 달 동안의 정성어린 치료와 간호로 완쾌되자, 그는 약속대로 예수님을 믿고 매킨타이어 선교사에게서 세례를 받습니다. 그리고 당장 로스 선교사를 도와 성경번역에 착수했습니다. 1883년 그는 이렇게 완성된 성경 100권을 지니고 압록강을 넘어 국내 잠입을 시도합니다. 밀입국을 시도하던 서상륜은 입국 도중 관헌에 발각되고 맙니다. 구사일생으로 성경 10여권만을 지닌 채 탈출하여 숨어있던 곳이 가족의 고향인 황해도 소래입니다. 바로 그곳에서 그는 교회를 시작한 것입니다. 주님을 영접한 자의 집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한국최초의 종합대학이 어느 대학인지 아십니까? 이화여자 대학교입니다. 메리 스크랜톤 여사가 1886년 선교사로 한국에 와서 단 한 명의 학생으로 자기가 살던 집에서 이화학당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이 여인은 1855년 윌리암 T. 스크랜톤(William T. Scranton)과 결혼하여 외아들을 낳았는데, 1872년에 남편과 사별했습니다. 그리고 1884년 52세의 늦은 나이에 미국 감리교회에서 한국에 파송하는 첫 여성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스크랜톤 부인은 아들 윌리암 B. 스크랜톤과 함께 의료선교사로 한국에 왔습니다. 아들을 윌리암은 예일대학(1878)과 뉴욕 의과대학(1882)을 졸업했습니다. 아마 한국에 늦게 들어온 것은 아들 공부시키느라고 그런 것 같습니다. 아들 윌리암은 제중벙원에 일했고 후에 최초의 민간병원인 정동병원을 운영하다가 1890년에는 상동병원(현 남대문시장 상동교회 자리)을 설립했습니다. 그는 성서번역위원으로도 활동하며 로마서 에베소서를 주로 번역했습니다. 예수를 영접하는 사람이 있는 곳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중국인 셋이 모이면 중국집이 생기고 한국인 셋이 모이면 교회가 세워진다는 말은 참 좋은 말입니다.

(10) 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mevsw/:메손-중앙에)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뱀(o[fei”:옵히스)는 뱀을 뜻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해독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쳐다보다(ojptavnomai:옵타노마이)의 동사에 왔습니다.
시 58:3-4 “3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4 저희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저희는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같으니” 거짓을 말하며 남을 속이는 사람의 말은 악한 것입니다. 독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을 죽입니다.
모세가 구리 뱀을 달아놓고 쳐다보게 한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연습시켰습니다. 쳐다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자는 살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독에서, 죄에서 해방시켜 주십니다. 마가복음 16:17-18에 보면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바로 전에 하신 말씀이 나옵니다.
“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지혜(frovnimoi:프흐로모이) “슬기로운, 사려 깊은, 신중한” 는 어근 단어 frhvn 프흐렌(감정, 정신, 지혜)에서 왔습니다. 이 뜻은 “고삐를 매다, 자갈을 먹이다.” 에서 유래되었는데 fravssw 프흐랏소 “에워싸다, 포위 당하다”의 동사에서 옮. 우리 속담에 “호랑이 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라는 의미와 같습니다. 지혜란 다름 아닌 깨어있는 것입니다.
마 25:2, 4, 8, 9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고 했습니다. 이 여인들이 깨어있는 것입니다.
롬 12:16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고 했습니다. 높은 곳에 마음을 두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구약성경부터 일관되게 낮은 곳을 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높은 곳이 무엇입니까? 사람의 생각입니다. 사람의 뜻입니다. 낮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 지혜입니다. 높은 곳을 보면 여러분 행복이 없습니다. 항상 불만입니다. 그러나 낮은 곳을 보는 사람은 항상 감사합니다. 지혜로운, 깨어있는 다섯 처녀와 같아야 복음을 전합니다.

순결(ajkevraio”:아케라이오스) “순수한, 썩지 않은” 부정 불변사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 단 한차례 더 나옵니다.
빌 2: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라고 합니다. “순전하여”라는 단어가 바로 “순결”입니다. 이 절의 말씀을 잘 보십시오. 공부 잘하는 학생은 문제에서 답을 찾아냅니다. “순전하여”라는 단어의 양쪽에 눈에 띄는 단어가 하나 나옵니다. 무엇입니까? “흠”이라는 단어입니다. 순결을 잃어버리면 흠이 생기는 것입니다. 순결은 흠이 없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동물은 흠이 없어야 했습니다. 흠이 없는 것은 절대로 하나님께 바칠 수 없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레 21:17 “아론에게 고하여 이르라 무릇 너의 대대 자손 중 육체에 흠이 있는 자는 그 하나님의 식물을 드리려고 가까이 오지 못할 것이라” 힘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순결하지 못하면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합니다. 순결한 마음, 썩지 않는 마음, 변하지 않는 마음이 순결입니다.
히스기야 왕 때에 “20 히스기야가 온 유다에 이같이 행하되 그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와 진실함으로 행하였으니 21 무릇 그 행하는 모든 일 곧 하나님의 전에 수종드는 일에나 율법에나 계명에나 그 하나님을 구하고 일심으로 행하여 형통하였더라”(대하 31:20-21)고 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자들이 순결한 것입니다. 내가 빛이면 자동적으로 빛이 납니다. 그러나 내가 어둠이라면 아무리 애를 써도 복음은 전달되지 않습니다.

“코이”라는 잉어가 있습니다. 이 잉어가 사는 모습을 보면 참 신기합니다. 사는 공간에 따라 크기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작은 어항에 넣어두면 5-8센티미터 밖에 자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수족관이나 연못에서 키우면 15-25센티미터까지 자랍니다.
그러나 “코이”를 강물에 방류하면 90-120센티미터까지도 성장합니다. 우리들의 꿈도 똑같습니다.

주님은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함께가자!” 주님과 동행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기점으로 주전(B.C.), 주후(A.D.)이 구분됩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과, 후는 분명 다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새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고후 5:17). 이제 우리는 새롭게 된 사람답게 그리스도인 답게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체할 수 없는 선교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8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 놓고자 하였으나 19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채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20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눅 5:18-20)

미국의 카터 대통령은 경건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는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나는 대통령이 되기 전, 매년 300명 이상을 전도했습니다. 하루에 한 명씩 거의 전도한 셈입니다.
그러다가 대통령에 출마하면서 석 달 동안의 유세기간에 무려 30만 명을 만났고, 30만 명과 악수를 한 카터입니다 하고 자기를 피알하며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날 교회 가서 예배를 드릴 때 양심에 가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일년에 300명 정도 밖에는 전도를 안 했는데 내 이름을 피알 하는데는 내가 석 달 동안에 30만 명과 악수를 하고 다녔으니 내가 과연 대통령을 하나님보다 더 좋게 여기는가? 하나님보다 대통령이 더 좋은가? 스스로 묻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그는 깨끗한 양심의 믿음의 비밀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대통령 임기동안에 단 한번도 주일을 범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는 간증하기를 나는 백악관 집무실에서 지내는 시간보다는 선데이스쿨에 나가서 어린 영혼들을 하나님 말씀으로 가리키는 시간이 가장 행복했습니다. 교회학교 교사할 때 가장 행복하고 보람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는 대통령을 그만 두고 난 후에 더 아름다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 이유가 다름 아닌 복음 선교를 위하여 살았기 때문 일 것입니다.

인생은 어떻게 사느냐? 에 달렸습니다. 값지고 멋지게 살다가 주님 앞에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길은 바로 선교사명을 잘 감당하는 길이라 믿습니다.
본문에 한 중풍병자를 살리기 위하여 네 명의 친구들이 애쓰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전도이며 선교인 것입니다. 선교는 생명을 구원하는 가장 가치 있는 일입니다.

선교는 지체할 수 없습니다.

R. A. 토리 목사가 영국의 브라이튼이라는 곳에서 전도 집회를 가졌을 때의 일입니다. 집회를 돕던 한 사람과 저녁을 먹게 되었는데 자기에게 음식을 주문 받고 봉사해 주는 웨이터에게 전도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나 같은 게 무얼….”하는 생각과 장소가 마땅치 않다는 생각이 들어 그 일을 미루어 두고 식사를 하였다. 저녁을 먹고 나오다가 그래도 한마디 말이라도 해야 되겠다는 생각에 발걸음을 돌려 웨이터를 기다렸습니다.
이 모습을 본 주인이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자기에게 봉사해 준 웨이터를 기다린다고 하자 주인이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손님, 이미 늦었습니다. 그 웨이터는 손님에게 봉사한 후 이층으로 올라가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중풍병자를 살리기 위하여 네 명의 친구들이 의논을 하였을 것입니다.
어떻게 할까? 지금하자, 내일하자… 의견이 분분했을 것입니다. 사람이 많은데 조금 기다렸다가 하지 등등… 그러나 지금이 기회입니다. 주님이 이곳에 계실 때가 기회입니다.
우리는 한치 앞도 모르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내일로 미루어도 안됩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이 일을 미루지 말아야 합니다. 이 귀한 선교사역을 우리는 계속해야 합니다.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선교는 서로 함께 해야 하는 사역입니다.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막 2:3)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침상에 메고 왔습니다.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여러 명의 수고가 있었습니다.

한 시인은 이런 시 한 구절을 남겼습니다.
“한 사람이 떠났는데, 서울이 텅 비었다.” 대단한 통찰력입니다. 한 사람이 없을 뿐인데도 도시가 텅 비어버린 것입니다.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아무리 바람을 일으키며 도시를 헤집고 다녀도 그 한 사람만 떠나고 나면 도시는 텅 빈 도시일 뿐입니다.
아니 한 사람이 없으면 서울이 아니라 온 우주가 텅텅 비는 것이지요?
막 8:36-37에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하셨습니다. 자기 생명이 귀한 것처럼 남의 영혼도 그만큼 귀합니다. 한 번 가면 다시 올 수 없는 절망으로 떨어지는데 그 영혼을 구하는 일만큼 귀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느 목사님이 지옥 체험을 간증하는데 온 세상 죄인들이 지옥의 자력선에 의해서 끌려가는데 어느 누구도 그 힘에 항거할 수 없이 강하더랍니다. 마치 진공청소기에 먼지가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죄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빨려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도 지옥으로 빨려들어 가는데 주님이 지혜를 주시더랍니다. “보혈을 믿으라.” 그래서 “주님의 보혈을 믿습니다. 보혈을 믿습니다.” 했더니 그 강력한 지옥의 흡인력이 자기에게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하더니 천국으로 자기를 옮겨놓더랍니다. 복음이 이렇게 위대한 것입니다. 복음은 죄인을 죄 없게 만들어주며 죄에서 끌어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선교는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함께 하는 사명입니다.
고전 3: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전 4:12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선교는 장애물이 있습니다.

본문에 중풍병자를 메고 왔지만 사람들이 많아 감히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만 포기하고 돌아가려고 생각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지붕위로 올라가자! 지붕을 뚫고 병자를 침상에 달아 아래로 예수님 앞에 내려놓은 것입니다. 정말 기가 막힌 아이디어였습니다. 주님도 이 사실을 보시고 감탄을 하셨습니다.

선교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선교는 지속적인 기도와 헌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때로는 엄청난 헌신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어려움도 닥쳐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망설이거나 주저한다면 선교는 결실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과감한 결단과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지혜가 어디서 나옵니까? 포기하지 않을 때 나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본문 25절 “그 사람이 저희 앞에서 곧 일어나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오사카’에서 ‘나카사키’로 향하는 배를 타고 가는 미국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선교 훈련을 마치고 일본으로 부임해 가는 선교사였습니다. 그의 가슴에는 선교의 꿈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미래에 선교 현장에서 영혼을 구원하며 벌어질 일들을 생각하며 조금은 두려움과 그리고 부푼 마음으로 뛰는 가슴을 억누르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 날 밤에 바람이 몹시 불었고 비가 쏟아졌는데 무엇인가 좋지 않은 느낌이 있었습니다. 드디어 배가 파선을 당하였습니다. 그는 잽싸게 구명대를 메고 갑판으로 올라갔는데 곧 이어 배는 침몰하였고 그는 폭풍 속에서 물 속에 잠겼습니다. 여기저기에서 살려 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자기 앞에서 허우적거리며 살려 달라고 외치는 한 여자가 있었는데 구명조끼도 없는 웬 할머니였습니다. 구명조끼가 부족하여 3등 칸 손님들 모두에게 돌아가지 못한 것입니다.
이 선교사는 갈등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른 체 할까? 아니면 살려야 할까? 나는 이제 많은 사람들을 구하려고 가야 하는 사람이야! 그리고 이 여인은 거의 다 산 할머니가 아닌가? 그러니 내가 먼저 사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영혼을 살리려 가는 사람으로 그 할머니를 보고도 모른 체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구명대를 벗어 할머니에게 입혀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선교사로 최초요 마지막인 설교를 그 할머니에게 한 것입니다. “할머니! 나중에 구출이 되면 다른 사람에게 이 말을 전해 주세요! 내가 할머니 대신으로 죽고 내 생명을 할머니에게 드리는 것처럼 하나님은 사람이 되어 오셔서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해서 대신 죽었고 자기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의 이름이 예수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면 영원히 살게 됩니다.” 이 말을 마친 뒤에 청년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습니다. 할머니에게 대신 생명을 주고 말입니다. 그런데 구출된 그 할머니는 그의 남은 생애 동안에 가는 곳곳마다 사람들을 만나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예수가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나 대신 죽은 그 청년이 말하기를 그분이 내 죄를 위해서 그 청년처럼 죽었다고 합니다.” 그 말을 할 때마다 할머니는 늘 울면서 말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그의 남은 생애에 그 선교사를 대신하여 일평생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며 살아 많은 사람을 구원했다고 합니다.

무엇이 사람을 움직입니까?

본문 20절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입니다. 할 수 있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이라면 하실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내가 다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우리에게 믿음은 필요 없을 것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까지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정상적인 육체를 가지지 않은 중풍병자와 같은 자들입니다. 예수께 데려간 이 중풍병자에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저희 믿음을 보시고” 였습니다. 그리고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라고 하셨습니다. 병 고쳐 주셨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러나 죄 사함 받았다고 합니다. 예, 중요한 것은 중풍 병이 아닙니다. 죄 사함입니다. 그들은 중풍 병을 고치려고 갔지만 결과는 죄 사함이었습니다.

누가 선교할 수 있습니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여러분은 성령을 받으셨습니까?
언제 받으셨습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를 주라 시인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사도행전 13:9절에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랬습니다. 사도행전 13장에서부터 사울의 이름이 바울로 변합니다. 7절에 사울이라고 했는데 9절부터 바울로 소개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대개 두 가지 이름을 가졌다고 합니다. 이처럼 사울이 히브리식 이름이라면 바울은 로마식 이름입니다. 그런데 사울이 이방선교를 시작하면서부터 바울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은 시사해 주는 바가 큽니다. 선교에 합당한 사람으로 변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에 타드 벤트리라는 전도자가 있습니다. 온 몸에 문신을 하여 온갖 오해를 한 몸에 받고 여기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들리는 소문에 단지 부랑자들에게 다가가 전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문신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 모습으로 문신을 한 부량자들에게 다가갔더니 그들이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를 받아들이더라는 것입니다. 모로카이 섬의 다미엔 신부도 나병 환자들에게 전도하려고 스스로 나병에 걸렸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선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 변신을 해야 합니다. 선교를 위해서 무엇이든 해야합니다. 선교를 우리는 주님의 명령이라고 말합니다. 명령은이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전도와 선교의 문제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명령입니다. 우리 주앙교회도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더 높은 곳을 향하여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21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2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23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종용히 이르시되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눅 10:20-23)

“… 때문에 기뻐하지 말고, … 때문에 기뻐하라” 전형적인 히브리어 격언구 형식으로 기록된 본문 말씀은 귀신들을 제어하는 권세를 기뻐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내 이름이 생명 책에 기록된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사역의 목적이나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라나야 합니다. 늘 어린아이처럼 우유만 먹고살면 안됩니다. 목사님이 비위맞추어 줄 것만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요즘 인기 있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베토벤의 바이러스’ 인가요. 거기 나오는 주인공 지휘자는 말이 거칩니다. 그것이 옳은 것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 아래 있는 단원들은 그가 곰살맞은 곳이 있어서 붙어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물며 우리가 주님 앞에 나와서 매일 어린아이처럼 나만 바라보아 달라고 떼쓰는 그런 성도가 되면 안됩니다. 살아있는 것은 자랍니다. 우리신앙이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마십시오.

25절에 보면 율법사는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합니다. 율법사는 자기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의 행실로서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여야”라고 질문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죄인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허물 많고 무능력한 존재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이제 내가 산 것도 주의 은혜요, 일할 수 있는 것도 주의 은혜이어야 합니다.
구약의 마지막 책 말라기 2장 7-8절에서 “8 대저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이 그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니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어늘 8 너희는 정도에서 떠나 많은 사람으로 율법에 거치게 하도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니 너희가 레위의 언약을 파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제사장들 율법사들은 진심으로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종교적 메너리즘(mannerism)에 완전히 빠져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보시고 나의 중심을 아시는 하나님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사탄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외식입니다. 반대로 예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것 역시 외식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외식(外飾)이란 ‘겉치레. 바깥쪽을 장식함’ 이며 또한 외식과 비슷한 말은 ‘위선, 가식, 표리부동’ 입니다.
위선(僞善)은 겉으로만 착한 체 하는 것입니다. 가식(假飾)은 말이나 행동을 거짓으로 꾸미는 것입니다. 외식하는 자가 되는 이유는, 눈치나 체면 때문이며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외식하는 종교지도자들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무려 7번씩이나 반복적으로 “화 있을찐저”를 선포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토록 심하게 저주하시는 장면을 저는 성경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습니다.
마 23: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사단은 거짓과 외선의 영이며 하나님은 예수님은 성령님은 신령과 진정, 진심의 영입니다.

토인비는 “은퇴와 복귀”를 잘하는 사람이 영웅이 된다고 했습니다. 부루스는 “우리가 감추고 싶을 때 나타나야 하고 나타내고 싶을 때 감추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참된 경건은 인간들의 칭찬이나 영광 앞에서는 숨어야 합니다. 그리고 고난의 십자가 앞에는 주님처럼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하고 골고다까지 지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요 12:24)것입니다. 목사는 인기나 사람들에게 얻은 영광에 현혹되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성도들도 물론 안됩니다. 어떤 목사님은 자기 집 벽에 이런 글귀를 써 붙여놓고 자기를 감추는 삶을 살았습니다.
“아사(我死)면 교회생(敎會生)하고 아생(我生)이면 교회사(敎會死)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목사의 무대도 장로의 무대도 아니고 우리 주님의 출연 무대입니다.
신약교회는 주인이 성령님이십니다. 사도행전 13장 1-3절에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누가 가라사대가 아닙니다. “성령이 가라사대” 입니다. 인간 지도자들은 숨고 주의 성령님이 나타나 역사하는 교회가 참되고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우리의 가계부에는 이웃을 돕는 구제가 얼마나 적혀있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자기 이름 내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습니다. 교회를 건축하면 강대상을 해 놓겠다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지붕을 덮겠다든지 벽돌장을 사겠다든지 보이지 않는 부분을 헌납하는 이가 적습니다.
마태복음 6: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주의하라” 상당히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점검하고 또 점검해야 합니다. 내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인지? 예수님은 마 6:4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희 아버지가 갚으시리라”(마 6:6, 6:18) 약속해 주셨습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용하다는 점쟁이 집에 옷을 곱게 입은 귀부인 한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귀부인 – “선생님. 제 딸이 하라는 공부는 않고 맨 날 놀러만 다니고, 남자친구랑 못된 짓을 해서 엊그제는 산부인과도 갔다 왔습니다. “선생님, 도대체 제 딸이 왜 그러는 걸까요? 누굴 닮아 그런 걸까요?”
점쟁이 – “…… (눈을 지긋이 감고) 한번 봅시다. 딸랑딸랑… 누굴닮아 누굴닮아 누굴닮아…”
- “혹시 집안에 외국인이 있습니까?”, 귀부인 “… 아뇨. 왜요?”, 점쟁이 “이상하다… 따님이 외국인을 닮았다는 점괘가 나오는데…” 귀부인 “그럴리가요. 사돈에 8촌까지 아무리 생각해도 외국인은 없습니다.” 점쟁이 “다시 한번 보죠 뭐.” 딸랑딸랑… 아무리 해도 외국인을 닮았다는 점괘밖에 안나오는군요.” 귀부인 “제 딸이 닮았다는 그 외국인 이름이 도대체 뭡니까?”
점쟁이 – “지에미(Jiemy)”입니다. “댁의 따님이 공부하지 않고 그렇게 속썩이는 것은 “지에미” 를 닮아서 그런 겁니다. 여러분! 정말 쪽 집게 점쟁이 아닙니까? 하라는 공부하지 않고 속썩이는 딸이 누구를 닮아서 그렇겠습니까? “지에미(Jiemy)”를 닮아서 그런 것입니다. 점쟁이에게 가기 전에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16:16에 보면 점을 치는 귀신들린 여종이 나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하는 귀신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사도 바울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마게도냐의 첫 성 빌립보에 도착하였습니다. 빌립보에 도착한 바울은 두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한 여인은 세례를 받고 자기 집을 내어 유럽 최초의 빌립보 교회를 세운 자주 장사 루디아요, 한 여인은 바울의 선교사역을 방해하는 귀신들린 여종이었습니다.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포기하고, 유럽에 도착한 바울은 성령의 강력한 역사와 함께 사단의 강력한 도전을 받고 있었습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합니다. 그 귀신을 물리치는 것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러나 귀신을 쫓아낸다고 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보증 수표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마 7:22, 23). 또한 이 말씀은 당장에 눈앞에 보이는 일 때문에만 흥분하고 좋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금이 다가 아닙니다.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9)고 했습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십시오.

막 8:36-37 “37 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37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우리는 세상에서 명성과 재물을 얼마간은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얻을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온 천하에서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얻은 사람은 역사상 없습니다. 올해에도 노벨 상 받는 분들이 발표되었는데요 그분들 다 얻었습니까?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는 더 많은 것을 잃은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연구하다 집에 제대로 들어갔겠습니까? 아이들하고 많은 시간을 보냈겠습니까? 세상은 하나를 얻기 위해서 많은 것을 버려야 하는 곳입니다. 다 얻지 못한다면 목표 설정을 잘 해야 합니다. 필요한 것 먼저 얻고요, 그 다음에 다음의 것을 얻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요한1서 4:7)
평생 사랑을 느껴보지 못하거나 사랑을 갈구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비록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지 알지 못하거나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이라도 그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며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이야말로 인간이 사랑의 존재에 의하여 창조되었음을 증명해주는 단적인 예가 아닐까요?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요한1서 4;12) 진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생명을 남을 위해 사용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하늘에 이름이 기록됨을 기뻐하십시오.

모든 사람이 매일 기쁠 수 있다는 논리는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고난이 있습니다. 연단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도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왜 기뻐할 수 있습니까? 하늘에 이름이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생각하면 매일 웃고 다닐 수 있습니다. 고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울증의 증상으로 2주 이상 계속 우울하고 하고 싶은 것도 없고 아무 의욕도 없으면 우울증의 시작일 수 있다는 겁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 때, 잠시 우울할 수 있다는 겁니다. 기분이 조금 안 좋다고 우울증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울증의 진단기간으로 2주로 보잖아요. 2주면 장기간에 들어간다고 보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2주면 이요 교회 다시시는 분들에게는 절대 나타나면 안됩니다. 2주 동안 교회에 한번도 안나옵니까? 교회에 나와서 기쁨을 찾아야 됩니다. 천국을 찾듯이 말입니다. 잃어버린 나에게 준 하나님의 선물을 찾아가야 됩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찾은 사람처럼 말입니다. 기쁘지 않습니까? 잃었던 보화를 찾았으니 말입니다.
전시(戰時)때에 행방불명되고 또 어떤 사람은 사망 것으로 보고되었으나 나중에 살아있는 사람으로 판명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 책에는 이런 실수가 없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이름이 생명 책에 기록된 것을 알았습니다(출 32:32). 이사야 선지자는 회개하여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 회복된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켜 “예루살렘에 있어 생존 한 자 중 녹명(錄名)된 모든 사람”(사 4:3)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바울도 자신이 이름이 생명 책에 기록되어 있다고 했습니다(빌 4:3). 여러분의 이름은 생명 책에 기록되어 있습니까?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신의 뜻대로 산 사람에게는 생명 책에서 이름이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시 69:28, 렘 17:13, 계22:19). 또한 생명 책에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증언합니다(계 20:12, 1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계 3:5)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12세기 영국의 귀족들이 국왕으로부터 대헌장을 지키겠다는 계약을 체결한 후, 왕자를 인질로 잡아두었습니다. 국왕이 자기 권세를 이용하여 무력으로 계약을 파기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태평양 군도에 거하였던 원시 부족들 간에 평화의 언약을 맺을 때 부족의 추장들이 서로 아들들을 교환하였습니다. 상대편 추장의 아들을 담보로 잡고 있는 한 상대편 부족이 임의로 침략 행위를 하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화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줍니까? 인간은 그 어떠한 부귀영광과도 아들의 생명을 바꾸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아무리 미개하고 야만적인 식인종 부족일지라도, 부모 자식 사이에 문명인 못지 않게 숭고한 사랑이 있다는 것입니다. 언뜻 보면 육체적으로 연약하고 아무 힘이 없는 어머니라도 어떤 괴한이 무기를 들고 아기를 헤치려한다면 그녀는 필사적으로 달려들어 아기를 보호하려 할 것입니다. 그 순간 그녀에게는 칼이나 총에 대한 두려움이라고는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쫓나니…”(요한1서 4:18) 그 어머니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해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우리의 초자연적인 사랑의 능력은 다름 아니라 죽임을 당할 것을 빤히 아시고도 그의 사랑하는 외아들이 기꺼이 인류의 손에 넘겨주신 하나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요한1서 4:10)
 

침노하여 천국을 소유하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12)

전쟁은 그것이 침노하는 것이든 침노를 당하는 것이든 전 국력을 다 동원한 투쟁입니다. 전 국력을 총 집결하지 않고는 전쟁에 이길 수 없습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저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천국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천국을 침노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이유는 천국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사력을 다하여 막고 있는 마귀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마귀는 하나님의 밭에 몰래 가리지를 뿌리고 간 사단입니다.
세례 요한 이후 예수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천국을 전파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전해 주시고 간 말씀을 ‘천국복음’ 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천국을 소유하고 누리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13세기 이탈리아의 유명한 탐험가였던 마르코 폴로는 그 당시 미지의 세계였던 중국으로 건너와서 17년 동안 살았습니다. 그 뒤 조국으로 돌아가서 유명한 ‘동방견문록’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가 임종하게 되었을 때 그의 친구들이 찾아와서는 이렇게 다그쳤습니다. “자네는 그 책에서 도무지 우리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만 잔뜩 기록해놓지 않았나? 이제라도 진실을 밝혀주면 좋겠네. 그 책의 모든 내용이 상상에 의해서 꾸며졌다는 사실을 말일세”. 그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닐세. 내가 책에 쓴 것은 모두 진실일세. 사실 나는 내가 보고 겪었던 것의 절반도 채 기록하지 못했다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천국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 얼마나 되겠습니까? 천국은 상상으로 꾸며진 곳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그 천국은 그냥 굴러 들어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 천국을 마귀의 손에서 빼앗아야 합니다. 빼앗기지 않으려는 마귀와 빼앗으려는 우리 사이에는 투쟁이 벌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오직 강한 자만이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마 12:28-29).
강한 자 원수 마귀를 묶어 놓고야 천국을 우리 소유로 빼앗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천국을 빼앗아야만 합니까? 무엇 때문에 침노해 들어가서 빼앗지 아니하면 천국은 우리의 것이 되지 않는 것일까요?

죄를 부른 인간. 빼앗긴 낙원

원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낙원을 주셨는데 우리는 그것을 빼앗겨 버리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보는 이 죄, 얼마나 흉악한 죄가 많습니까! 살인, 간음, 도둑질, 서로 속이고 자기 이익을 위하여 다른 사람의 억울하게 됨은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온 세상은 죄악으로 범람하고 있습니다. 이 죄, 이것은 결코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또 많은 질병들, 병원마다 가득 찬 환자들, 모든 질병과 그로 인한 고통과 슬픔과 절망, 이런 것들은 하나님이 지으신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짓지 않은 것이, 원하시지 않는 것이 우리의 현실을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은 결코 이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천지와 만물을 사랑으로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능력과 힘으로 천지만물을 지으셨기 때문에 온 세계는 사랑과 화해와 기쁨으로 즐거움으로 가득 찬 영광의 세계였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깊은 사랑과 대화와 교제가 있었습니다. 또한 아담과 하와간의 깊은 사랑은 부부간의 완전한 일체감을 이루었습니다. 그들간의 분쟁이란 있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은 아름다웠습니다. 추함이란 하나도 없었습니다. 먹는 것이 풍성했습니다. 무한한 평화와 기쁨과 사랑과 행복이 있었습니다. 죄와 죽음이란 그 단어조차 없었습니다. 온 세상은 하나님과 영광으로 충만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어떻게 하나님의 세상을 회복할 수 있습니까? 종교입니까? 철학입니까? 제도입니까? 그것은 사람들이 다 해 보았지만 그것을 통해서 해방과 자유를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 아들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분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치셨습니다. 이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주님의 이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진정한 세상의 왕은 마귀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주 예수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회개하면 천국이 보입니다.
본문은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라고 했습니다. 왜 세례요한의 때부터입니까? 그는 구약의 제일 마지막 인물입니다. 동시에 신약시대의 최초인물이기도 합니다. 그가 처음으로 “회개하라” 외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 천국은 침노를 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천국을 전파하시고 그의 생애를 통해 천국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천국엔 죄가 없습니다. 마귀가 지배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죄를 사하고 멸했습니다. 마귀를 내쫓고 귀신을 내쫓았습니다. 천국엔 질병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질병을 고쳤습니다. 굶주린 자는 먹이셨습니다.
천국에는 죽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슬픈 자에게는 기쁨을, 상처 입은 심령에는 위로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시는 곳곳마다 천국의 영광과 그 복된 소식을 사람들에게 전해 주셨습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습니다. 혼자 힘이 모자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려고 해 보세요. 돕는 자가 생깁니다. 저는 영숙이를 돕고자 합니다. 얼마나 하려고 합니까? 저만 돕습니까? 아닙니다. 하늘의 천사도 돕고 예수님도 돕습니다. 여러분! 축구경기 보시지요. 아무리 잘해도 수비만 하는 팀은 절대 이길 수 없습니다. 탁구도 마찬가지입니다. 방어만 하는 것으로이길 수 없습니다. 공격을 해야합니다. 사단이 우리를 공격하게 놔두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먼저 사단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먼저 공격합니까? 그것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빼앗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천국을 침노해서 빼앗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낙원을 마귀에게 빼앗겼으나 예수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다 회복하셨다는 진리를 깨달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즉 천국은 합법적으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것이요 우리의 소유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후서 5장 11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자기의 신분을 모르고 자기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어떠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알면 우리는 강하게 자기 신분을 주장해야 됩니다. 우리는 거룩한 성도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분은 선생도, 의사도, 회사원도 아닙니다. 그것은 이요 나의 인생에 1%도 비중이 안되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 성도라는 것이 내 인생의 99%를 차지할 때 우리는 세상의 조건들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아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귀와 밀고 땡기며 싸웁니다. 그러나 전쟁은 이미 이겨놓은 전쟁인 것입니다. 진리를 모르고 마귀가 부인하고 협박할 때 겁을 내고 그만 움추려들어서 뒤로 물러가면 안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를 깨달아서 내가 어떠한 사람이 되었는가를 알고 이 세상을 바라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보통사람이 아닙니다.
육신의 세계에 살지 않고 영의 세계 속에서 삽니다. 하나님과 새로운 삶의 약속을 가진 사람이요 하나님이 눈동자 같이 지키시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내 자녀들 건드리기만 해 보아라! 하고 벼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세상에 질질 끌려 다니면서 삽니까? 사단에게서 이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우리가 천국을 침노하는 방법은 기도의 돌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8장에서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 3명하고 산에 올라가 기도하고 계신 사이에 마을에서는 다른 제자들이 귀신들린 아이하고 씨름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로 다 해보았지만 귀신은 떠나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오셔서 기도 위에는 이 귀신이 떠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목표를 가지고 질풍노도와 같이 하나님의 보좌를 향하여 부르짖어 기도하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공중권세 잡은 마귀의 진은 무너지고 천국은 우리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빼앗는다는 말의 의미를 확실히 알아야만 됩니다. 빼앗는다는 것은 “좀 살려주시오, 도와주시오” 라고 빌고 사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행을 바라는 것도 빼앗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의 빼앗는다는 것은 빼앗겼던 나의 것을 회복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힘을 다해 빼앗아 내야 합니다. 지면 빼앗지 못합니다. 이기고 빼앗기 위해서는 강하고 단호한 투지와 결의가 필요합니다. 진리를 입으로 강하게 주장하고 물러나지 않는 끈질긴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원문에 보면 마지막 부분에 두 단어가 나옵니다. 하나는 “biastai;:비아스타이” 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단어는 ‘난폭한 사람, 원기 왕성한 사람’을 말하는 비하스테스에서 나온 말입니다. 지난번에 대한민국 월드컵 예선전하는 것 보았는데 해설자가 그러더라 구요. 너무 한국축구 너무 얌전하게 한다는 거예요. 좀 거칠게 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이쁘게 축구해서 뭐하냐는 거예요. 이쁘게 축구해서 지면 뭐합니까? 입을 악물고 죽자 사자 뛰어야 하는 것입니다. 퇴장만 안 당할 정도로 허용된 테클과 몸싸움에서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압박을 해야 되요. 얌전한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공격은 이요 거칠게 하는 것입니다. 마귀를 뭐 봐줍니까? 공격을 해야 됩니다. 기도의 공격을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 다른 단어는 “빼앗느니라, aJrpavzousin:하르파주신”입니다. 이 단어는 이요 할파조(aJrpavzw)에서 나왔습니다. 이 단어는 동사인데요 “잡다, 취하다, 잡아채다, 끌어당기다, 빼앗다, 꽉 움켜잡다”입니다. 한마디로요 한번 잡으면이요 놓지 않는 것입니다. 꽉 움켜잡는 것입니다. 천국은이요 이렇게 잡아야 해요.

셋째, 전신갑주를 입고 싸워야 합니다(엡 6:11-13).

“11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여러분! 아무 준비도 하지 않고 불 속으로 뛰어들어가면 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가는 것입니다. 이 전신갑주란 다름 아닌 예수그리스도가 주신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면 마귀는 도망갑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벗고가면 마귀가 다가옵니다.
그런데요 싸움은 방향을 잘 잡아야 합니다. 어디가 원수의 골문인지 알아야 합니다. 제일 바보 같은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자기 골대에 골을 넣는, 자살골 넣는 사람입니다. 마귀가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살골 넣는 것입니다. 누구하고 싸우는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싸움은 마귀하고 해야 되는 것이지 사람하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단하고 싸울 때요, 쉽게 나약하게 뒤로 물러서면 안돼요. 억센 투지를 가지고 강하게 담대하게 싸우고 주장하며 입술로 시인하고 하나님께 감사드리면 천국은 여러분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 이후로 천국은 침노를 당하노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고 하신 주의 말씀대로 여러분 모두는 영적으로 단호한 결의를 가지고 천국을 침노해서 소유하는 자기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