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를 바랄지어다

“7 여호와여 내가 소리로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
8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9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말고 떠나지 마옵소서 10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11 여호와여 주의 길로 나를 가르치시고 내 원수를 인하여 평탄한 길로 인도하소서 12 내 생명을 내 대적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위증자와 악을 토하는 자가 일어나 나를 치려 함이니이다 13 내가 산 자의 땅에 있음이여 여호와의 은혜 볼 것을 믿었도다 14 너는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바랄지어다”(시편 27:7-14)

사람은 바라고 기다리면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닌가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누구를 기다리고 계십니까? 황금마차를 탄 왕자님을 기다리십니까? 아니면 로또 복권에 당첨 될 것을 기다리십니까?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너는 여호와를 바랄찌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바랄찌어다.” 말씀하십니다. 여기 ‘바란다’는 말을 ‘기다린다’는 말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시편은 이런 기다림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나 곧 내 영혼이 여호와를 기다리며 내가 그 말씀을 바라는 도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의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구속이 있음이라”(시 130:5-7)
“내 영혼이 여호와를 기다리며”라는 말은 구약 성경 전체에서 널리 울려 퍼지는 주제입니다.

하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린다”는 말은 마치 거지가 부자의 문턱에서 구걸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영어에는 웨이트(wait)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 뜻은 주로 “기다린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에는 또 다른 중요한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섬긴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식당에서 손님을 섬기는 사람을 웨이터(waiter)라고 부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심령이 가난하고 궁핍해야 합니다. 마 5:3 산상복음의 첫 번째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입니다. 심령이 가난한자가 주를 찾습니다. 세상에서 굶주림과 목마름을 해결하고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노아의 방주 때 까마귀는 내어놓았는데 날아가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시체 썩은 것이 많아서 먹을 것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둘기는 내어놓았더니 다시 돌아왔습니다.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우리의 심령이 까마귀와 같으면 돌아오지 않습니다. 세상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령은 비둘기 같이 임하시는 것입니다. 깨끗한 것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심령이 비둘기 같이 주를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이사야는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사 55:2)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면서 문을 두드립시다. 간절히 구하고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은혜를 주신다는 하나님을 확신하고 기다립시다. 하나님의 문 밖에서 기다린 사람 치고 빈손 들고 돌아간 경우는 없습니다. 믿음으로 주님을 기다리세요. 모든 것을 주님의 이름으로 간구하세요. 하나님께서 기다리는 사람에게 꼭 이루어 주실 줄 믿습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것은 배우려는 학생같이 기다려야 합니다. 학생들은 선생님이 가르치는 방향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선생님의 영향이 얼마나 큰 지 모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가르침을 기다리는 자세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것은 주님을 배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좋은 제자가 되려면 인내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있어도 인내로 말씀하실 때까지 기다리셔야 합니다. 욥의 세 친구들은 집요하게 욥을 추궁합니다. 그러나 욥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떤 것이든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합니다.

어떤 선교단체에서 선교사를 뽑기 위하여 새벽 3시에 시험을 보았습니다. 시험을 보기 위해 선교사 지망생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시험관은 아침8시가 되서야 나타났습니다. 그러면서 “자 지금부터 시험을 시작합니다”라고 했습니다.
1번 문제, 빵집이라는 단어의 뜻을 말하시오.
2번 문제 2더하기 2는 얼마입니까? 그리고는 답안지를 제출하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어떤 응시자는 그것도 문제냐? 새벽 3시에 치르겠다고 하더니 8시에 나타나서 문제 같지도 않은 문제를 시험이라고 치르느냐? 면서 항의를 하고 나가버렸습니다.
시험을 다 치르고 시험관이 문제를 거두고 그런 문제를 낸 이유를 응시자들에게 설명했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5가지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첫째는 극기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이른 시간 새벽3시에 나온 것은 자기와의 싸움에서이긴 것입니다.
둘째는 시간약속의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새벽 3시에 시험을 치른다 할 때 그 시간을 의심치 않고 지켰습니다.
셋째는 인내심에 대한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5시간을 인내하며 기다릴 줄 아는 능력을 시험했는데 여기에 합격입니다.
넷째는 성격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여러분은 그토록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도 화를 내지 않았으므로 합격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인간성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그토록 유치한 질문에도 성실하게 답을 하는 것을 볼 때 인간성이 좋다는 것입니다. 위의 여러 가지는 선교사가 필히 갖추어야 할 자질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는데 그 어떠한 시험도 유치한 일도 감수해야 합니다. 그런 것은 문제가 안됩니다,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라면 감추인 보화의 밭을 자기 재산을 다 주고 사는 것처럼 해야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바라나이다.”(시 25:5) 이런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롬 12:2)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기다리는 것은 여행자가 안내자의 인도를 기다리는 것 같습니다. 여행자는 가는 길이 초행이기 때문에 안내자의 인도를 받습니다. 그렇지 아니할 때에 길을 잘못들 우려가 있습니다.
제가 베트남에 구찌 땅굴에 다녀온 일이 있습니다. 미군을 끝까지 괴롭혔던 곳입니다. 이 굴에 들어갔는데요 땅 속에 가다가 갈래가 나옵니다. 이 때 안내자의 인도를 받지 않고 가다가는 나오지도 못합니다. 땅 속의 굴이 얼마나 복잡하게 파지고 길고 깊은지 끝까지 보지도 못했습니다만 안내자가 없으면 길을 잃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광야 길을 걸을 때도 그랬습니다.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인도하는 대로만 따라 갔습니다. 모세가 인도하는 대로 따라 갔습니다. 언제나 이스라엘은 하늘의 인도를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기다렸습니다. 그들 자신이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가는 길이 꼭 그렇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 하나 살아보고 사는 사람, 한 분도 안 계십니다. 하루 하루가 인생의 초행길입니다. 그러므로 안내자가 필요합니다. 인생의 길이 되신 주님을 기다리며 따라갈 때 잘못될 염려는 아주 없습니다.

“기다리라” 는 말씀에는 참으로 심오한 뜻이 있습니다. 주님을 기다리라는 말씀은 아이가 부모님을 기다리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아이들은 아무 부담감이 없이 부모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부모가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갖다 주리라 하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부모를 기다리는 것으로 행복합니다.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에 염려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기저귀 안 사왔나, 우유 안 사왔나 걱정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도 우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우리의 필요에 따라 준비하고 계십니다.
로마서 8장 32절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않겠느뇨?”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호는 “여호와 이레”가 되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준비해 주시는 분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필요를 아는 것보다 더 잘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를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기다리는 데는 회개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했습니다. 주님을 따르며 기다리는데는 담대해야 합니다. 비겁해서는 절대로 주님의 뒤를 따를 수가 없습니다. 주님을 기다리는데 담대하시기를 바랍니다.
분문 8절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하였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하나님 얼굴 보는 것이 무서웠습니다. 죄 지은 사람은 피해 다닙니다. 경찰 얼굴을 쳐다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예수님의 은혜로 하나님 뵙기를 청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 피하거나 숨을 수도 없거니와 그래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두려워할 필요가 무엇입니까? 진리를 믿는다는 것은 두려움을 없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은 죄가 있어서 그럽니다. 그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회개할 마음만 있으면 주님 앞에 나올 수 있습니다.
교회 안 나오시는 분들이 교회는 헌금을 강조하네… 무슨 문제가 있네 그럽니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회개하지 못하도록 사단이 막고 있는 것입니다. 회개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가증한 모습을 벗어버리고 주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기다립시다. 담대하게 기다립시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을 담대하게 사람들 앞에 드러냅시다. 야고보 장로님은 “믿음으로 구하는 담대한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 5:16)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의심으로 구하지 마시고 담대한 마음, 확신을 가지고 꼭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윌로우 크릭-빌 하이벌스 목사님은 “우리가 일하면 우리가 일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일하신다”고 했습니다.
독일 속담에 “당신이 기도하기 위해 손을 모으면, 하나님께서 복 주시기 위해 손을 펴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므로 영원한 성령이 우리 마음에 오시게 되고 신비한 힘을 얻습니다. 우리는 성령이 어떻게 역사 하시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기도하면 새로운 용기가 솟아납니다.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게 될 때 새로운 영적인 힘이 솟아나게 되고 하나님의 인도를 경험하게 됩니다.

여러분, 어려움을 당할 때일수록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욥은 절망적인 가운데서도 주님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당한 일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주님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어려움이 심할 때일수록 주님 품에 더 가까이 나아갑시다. 부모가 자식을 때릴 때, 자식이 가슴에 안겨 들면 더 이상 때릴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을 계속 기다립시다. 원수가 아무리 공격을 가해도 겁내지 맙시다.

헬렌 켈러가 정상인들을 향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일이면 장님이 될 사람처럼 당신의 눈을 사용하세요.
내일이면 귀머거리가 될 사람처럼 당신의 귀를 사용하세요.
내일이면 아무 것도 못 만지게 될 사람처럼 당신의 촉각을 사용하세요
내일이면 아무 냄새도 맡지 못하게 될 사람처럼 꽃의 향기를 맡아보세요
우리에게 주신 기능들 아끼지 말고 사용합시다. 주를 위해 사용하세요.

“너는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생명을 살리세요.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37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막 8:36-37)

미국 자동차업계가 경영난으로 요즘 비상입니다. 의회는 자구책을 마련하라고 압박하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의회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러 간 미국 자동차 업계 대표들이 보통 사람이 타는 비행기 값의 무려 30배 이상을 주고 전용기나 전세기를 타고 의회에 도착하여 미 의원들은 돈 빌리러 오는 사람의 태도가 이게 뭐냐고 질타했고 결국 돈도 주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구원을 간청하기 위하여 또 감사하기 위하여 나온 사람들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임재를 기다려야 합니다. “얼마나 목사가 설교 잘하나 보자” 라는 마음은 도움이 안됩니다. 간절히 주님을 사모할 때 주님이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
‘알리바바와 사십인의 도적’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뒷산에 큰 바위굴이 있고, 그 속에는 엄청난 보화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 굴에 들어가려면, 바위로 된 문을 열어야 합니다. 그 문을 열자면 암호대로 해야만 합니다. 그 암호는 무엇인가하면? ‘열려라 들깨’ 비슷하지만 아닙니다. ‘열려라 콩깨’ 이것 역시 비슷하지만 아닙니다. ‘열려라 참깨’ 라고 해야만 열립니다. 어떤 재주꾼이 와도 열 수 없습니다. 어떤 군대가 와도 열 수 없습니다. 그 문을 열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절대 없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의 보화를 가져다 주는 암호는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다른 어떤 방법도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암호입니다.
“다른 이름으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고 하셨습니다.

생명은 선한 것입니다.

생명(!yYIj’h':하이임)은 단순히 목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 이외의 모든 전제조건으로서 선한 것이며 더 나아가 최고의 선인 것입니다. 생명 자체가 선한 것입니다. 최고의 아름다운 것은 살아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죽은 것은 이요 그것이 무엇이든지 관계없이 함께 지낼 수 없습니다. 오직 살아 있는 것만이 함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예수를 믿습니까? 솔직히 말씀해 보세요. 살기 위해서 믿는 것입니다. 살 수 없다면 믿음이 헛된 것입니다.
잠 3:16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그랬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믿고 잘 살아야 됩니다. 이 땅에서의 축복을 간단하게 말하면 딱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장수이고 하나는 부귀입니다. 여러분 오래 살려고 하는 것, 부귀를 누리려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왜 부귀와 영화가 문제가 있다고 말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떠나가고 그것에만 관심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저녁때 아빠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빠 자체가 아니라 선물만을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잊어버린 채 나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잊어버린 채 장수와 부귀만을 원하는 것이 문제이지 그 은혜아래서 장수와 부귀의 축복을 구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도 장수는 특별한 은총이며(창 25:8), 계명을 지킨 것에 대한 보상입니다(신 5:16). 생명 자체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창 2:7).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선한 것입니다.

생명은 붕괴되어 왔습니다.

인간의 범죄로 생명은 짧아졌으며 동시에 괴로운 것이 되었습니다. 아담이 범죄하기 이전에는 생명나무가 있는 에덴 동산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범죄 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에덴동산하면 살기 좋은 곳만 생각하면 안됩니다. 중요한 것은 그곳에 생명나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이것을 마음대로 먹지 못하도록 화염검으로 지키셨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다는 것 자체는 생명에 대한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음을 의미합니다.
생명의 기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생명과 하나님과의 현재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과 사망을 주장하시는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관하고 계십니다(출 32:32). 하나님은 언약을 세우시고 말씀에 순종하느냐 불순종하느냐에 따라 생명을 보존하실 것인지 끊으실 것인지를 결정하십니다. 생명은 마술적인 의식을 행함으로서가 아니라, 많이 배워 지식과 지혜가 있느냐가 아니라, 도를 닦아 무에 이르렀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결단했느냐에 따라서 보장받습니다(신 30:15). 하나님의 말씀에 그 생사가 달려있는 것입니다.
신 8:3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생명은 바로 구원의 기초이며 믿음으로써만 주어질 수 있습니다. 합 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고 했습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만 굳게 붙듦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왜 선교하십니까? 왜 봉사하십니까? 왜 믿음으로 사십니까?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약속 믿고 삽니다. 믿음 생활을 잘하는 사람은 예배시간마다 하나님의 약속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래서 성도들 마음속에는 약속어음이 무한히 쌓여있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이 약속 믿고 우리는 굳게 섭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하십니다. 철저하십니다. 절대로 변치 않습니다. ♬내 주와 맺은 언약은 영 불변하시니 그 나라 가기까지는 늘 보호하시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찬송가 455장 주안에 있는 나에게 4절)

범죄한 인간이 하나님과의 죄의 문제를 그대로 놓아둔 채 죽으면 그저 흙으로 돌아갈 뿐입니다. 우리가 다시 사는 길은 죄의 문제로 붕괴된 생명을 다시 회복하는 길입니다.

생명은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사는 것은 이 생명을 하나님께 빌려왔기 때문에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생명의 수여자이시기 때문에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십니다(시 36:9, 신 32:39).
시 104:29-30 “29 주께서 낯을 숨기신 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 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 30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현재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생명으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이미 하나님께 꺾여져 나간 가지는 더 이상 생명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생명이 잠시 더 유지될 뿐입니다. 말 그대로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육체를 가진 우리는 음식물에 의해서 생명이 유지되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요 5:26)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께 있으며 신약시대 이후에는 예수님께 주어졌습니다. 따라서 생명은 하나님께 의존하지만 예수님께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신 후 에 그들에게 “내 죄가 사해여 졌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병 고침을 하나님께 받았다는 것은 병 고침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의 생명을 보호하고 계신다는 증거이기 때문에 병 고침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생명을 지키고 계심에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을 주관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죽음은 모든 사람 앞에 평등한 것이지만, 생명은 개별적인 것입니다. 개별성은 생명 자체와 함께 존재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선택은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있습니다. 꺾여진 가지의 생명을 유지시키다가 죽는 것하고 그 생명을 영원히 살릴 수 있는 물가로 가지고 가는 것에 대한 선택의 나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이 물가가 어디입니까?

생명은 살릴 수 있습니다.

눅 12:47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약 4:17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고 했습니다.
살릴 수 있는 생명을 죽게 버려 두는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알고도 죽게 내버려두면 그것이 죄인 것입니다.
1970년대 청개천에서 활빈교회(현 두레교회)를 개척하여 목회한 김진홍 목사님이 계십니다. 청개천에 당시에 피난민이 그대로 판자집에서 살았습니다. 너무 너무 어렵게 사시는 분들입니다. 그 당시는 우리 사회가 빈민층을 돌볼 여유가 없었습니다. 목사님께 밤에 한 분이 찾아와 저 옆에 사시는 권사님이 많이 아프다고 했습니다. 그 집에 뛰어가보니 열병을 앓는지 땀이 범벅이 되어있었습니다. 목사님은 그 권사님을 등에 엎고 병원을 찾아 뛰었습니다. 가까운 동대문에 있는 병원에 갔습니다. 그런데 입원비인지 수술비인지 없다고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병원에 뛰어갔습니다. 그곳에서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목사님께서 내가 목사이니까 믿고 받아달라고 했으나 병원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한참을 엎고 뛰어 다녔다니 땀이 범벅이 되었는데 등뒤의 권사님이 느낌이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놈이 축 늘어지신채 있는 것입니다. 벌써 돌아가신 것입니다. 목사님은 그 권사님을 엎고 청개천을 한참을 거닐면서 하나님께 원망도 하고 울기도 참 많이 울었다고 하셨습니다.
요즘에도 일본에서 임신부가 아기 나려고 하다가 일요일에 병원 문을 잘 안 열어서 죽은 산모가 있었습니다. 저는 다른 분이 주일날 교회 안나오는 것은 이해 못합니다. 그러나 최상석 집사님(의사)이 안나오시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그 길은 예수께 있습니다.
요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골 3:3-4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고후 6:8에서 “죽은 자 같으나 우리가 살고” 라고 표현합니다.
이 생명은 죄로부터 해방되면서 시작됩니다(롬 6:18). 이 생명은 현재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능력입니다(롬 1:16). 이 말씀이 곧 생명입니다(빌 2:16). 그러므로 복음은 사망을 패하고 생명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고(고후 4:20-21)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롬 6:11).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롬 8:2).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쌍둥이 중 한 아이가 심장에 큰 결함을 안고 태어났는데, 의사들은 하나같이 그 아이가 곧 죽게 될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며칠 동안 그 아기는 병세가 계속 악화되어 죽기 직전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때 한 간호사가 쌍둥이를 하나의 인큐베이터에 함께 넣자는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이는 병원의 방침에 어긋나는 일이었기에 담당 의사는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엄마 자궁에서처럼 두 아이를 한 인큐베이터 안에 나란히 눕히기로 했습니다. 그리하여 쌍둥이는 한 인큐베이터 안에 눕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건강한 아이가 팔을 뻗어 아픈 동생을 감싸 안았습니다. 갑자기 아무런 이유도 없이 동생의 심장이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고 혈압이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다음에는 체온이 제자리로 돌아왔습니다. 동생은 조금씩 나아졌고, 현재 두 아이는 완전히 정상으로 무럭무럭 자라고 있답니다.
지금 누군가 우리의 포옹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우리의 사랑과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손과 목소리에는 치유의 능력이 숨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구로 사용해 많은 사람에게 소망과 치료, 사랑, 승리를 주고자 하십니다. 나 자신의 곤경과 필요에서 눈을 돌려, 남에게 복을 전달하는 도구로서의 역할에 더 관심을 쏟아보세요.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거나 요구한 것보다 훨씬 많은 복으로 우리에게 갚아 주십니다. -조엘 오스틴-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

 

감사하세요.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 11:25, 눅10:21)

월남 이상재 선생이 일제시대 때 YMCA에서 강연할 때의 일입니다. 일본 순사들이 감시하려고 여기저기 끼어 앉아 있는 것입니다. 일본 순사를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이 두 가지로 불렀습니다. 그들 앞에서는 “나리” 그랬습니다. 그러나 우리끼리는 “개(犬)”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이상재 선생이 “개나리가 활짝 피었네.” 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장내가 웃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일본 순사는 이 뜻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우리끼리는 알았던 것입니다. 천국백성끼리는 압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구원하여 주시는지. 어떻게 나타내시는지. 그러나 천국 백성이 아니면 모릅니다. 예수님 당시 일부 지도자나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배워서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는 정도가 아니라 자기들만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이 알려주셔야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비밀이라고도 합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이 그렇게 똑똑한 것 같은데요 하나님을 모릅니다. 믿지 않습니다. 일본을 보세요. 세계제일의 나라중의 하나지 않습니까? 과학이 발전한 나라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을 잘 모릅니다. 우상에게 가서 절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있습니다. 과거에 행한 자신들의 행위를 아직도 인정하지 않고 그 부끄러운 역사를 후손에게 전해주려고 합니다. 정신을 못 차리고 반성할 줄 모릅니다.

신약성경에 ‘감사하다’는 단어는 여러 가지로 나타납니다. 어떻게 보면 ‘감사합니다’ 라는 말이 별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카이로’(기뻐하다), ‘카라’(기쁨), ‘카리스마’(은혜), ‘유카리스테오’(호의, 감사) 등을 ‘감사’ 라는 뜻으로 번역하여 사용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단어는 이 단어들에도 없습니다. 같은 본문이 눅 10:21에도 나타나는데 역시 같은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유일하게 본문에 한번만 사용된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어근은 ejxomologevw(엑소몰로게오)로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을 뜻합니다. ejk(에크) ‘-로 부터’와 oJmologevw(호몰로게오) ‘동의하다, 약속하다’의 뜻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래서 ‘약속이 이루어진 상태’를 말하는 동사로 사용되었습니다. 어디에서 온 약속입니까? 앞에서 예수님이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뜻을 풀어서 이해한다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약속해 주신 것을 이루어 주셨다”는 뜻입니다.

감사할 때

그래서 기쁨(감사)은 예수님과 함께 다가오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세례의 목적이신 예수님이 나타나심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기다리시던 분이 오셨기 때문에 기쁨이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2:36-38절에 보면 안나 선지가 나옵니다. 시집가서 8년을 살고 과부가 되어서 84년을 살았습니다. 시집갈 때가 10살이라고 해도 102살입니다. 그래서 나이 매우 늙었다고 말합니다. 안나 선지자는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눅 2:38)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 고 했습니다. 안나 선지자 입장에서 100살이 넘어서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보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감사란 바로 ‘때’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안나와 하나님이 때를 이루어주시는 때가 맞아떨어진 것입니다.

먼저 감사

요 11:장 보면 예수님이 나사로를 늦게 찾아가는 바람에 그가 죽었습니다. 그래서 누나인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이 늦게 도착하심에 대해서 안타까워하면서 예수님을 원망하면서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 11:21) 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미 나사로는 죽어 무덤에 들어갔고 예수님이 도착했을 때는 그 무덤의 돌을 옮겨 놓으라(39)고 하셨습니다.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요 11:41) 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43절에 “나사로야 나오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살아 나와서 감사한 것이 아니라 미리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감사한 것입니다. 감사한 때에 따라 감사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꼭 무엇을 받고 난 후에나 감사합니다. 그러나 이미 주시기 이전에도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원문 성경에서는 아멘이라는 단어가 모두 앞에 나옵니다. 아멘하고 예수님의 말씀이 시작됩니다. 우리가 들어보고 아멘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아멘 해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를 결국은 좋은 곳으로 인도해 주실 줄 믿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부모님이 어디를 가시든 부모님을 믿고 가는 것입니다.

볼노브(O.F. Bolluow)라는 독일의 세계적인 교육학자는 1991년 91세의 나이로 죽었는데 그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쓴 논문의 제목이 ‘감사에 대하여’(Ueber die Denken)라는 논문이었습니다. 그는 이 논문에서 “우리가 가르치는 교육의 최고의 목표가 있다면
첫째는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아는 인간을 만드는 일이요,
둘째는 자기를 낳은 부모에게 감사할 줄 아는 인간을 만드는 일이요,
셋째는 나와 관계된 모든 인간들에게 감사할 줄 아는 인간을 만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성경에서 더욱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우리가 감사해야 이유를 골 2:6-7절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서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고 했습니다.

오래 전에 월간지에 실렸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 생각납니다. 한강 남쪽에 성실한 농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배추 농사를 지으며 그런 대로 평화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강 이남이 서울로 편입되고 정부에서 강남을 새로운 개발지로 발표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자신의 넓은 땅을 팔아 거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갑자기 들어온 많은 돈을 주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술집에 드나들기 시작했고, 얼마 후에 그곳에서 일하는 여자를 만나 딴 살림을 차렸습니다. 아내도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고 자식들은 제멋대로 살면서 부모의 속을 썩였습니다. 가정은 점점 무너져 갔다. 물질적으로는 풍족했지만 육체적, 정신적으로는 지옥과 같은 생활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이렇습니다. 어느 날 밤에 그는 호화로운 자신의 집 지하실로 내려갑니다. 그곳에 자신이 배추 농사를 짓던 시절에 사용한 낡은 리어카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 리어카를 어루만지다가 이렇게 절규합니다. ‘배추 사려~, 배추 사려~.’ 깊은 밤에 눈물과 회한에 섞인 그의 절규가 지하실 안에 울려 퍼집니다. ‘배추 사려~.’
그렇습니다. 좋은 환경이 기쁨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기쁨의 요소가 될 수 있지만 기쁨 그 자체는 아닙니다. 인간의 기쁨은 환경에 있지 않습니다. 참된 기쁨은 주님 안에 있습니다.

잘못된 감사

눅 18:11-13에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했습니다.

바리새인의 감사는 확실히 문제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여 감사합니다. 다른 사람은 범죄하였는데 자신은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했습니다. 또한 자신의 금식과 십일조 드림을 감사했습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듯 보입니다. 우리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저는 선교지 여행 다니면서 못사는 나라사람들을 보면서 ‘내가 여기서 태어나지 않은 것에 감사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또한 목사로서 교회에 늘 있게됨을 감사했습니다. 이 감사에 자체에 큰 문제가 있기보다는 은연중에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고 다른 사람을 죄인 취급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못사는 나라에 태어난 것이 죄가 아닙니다. 못사는 집안에 태어난 것이 죄가 아닙니다. 못 배운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못 배운 것이 자랑이 될 수는 없겠지만 죄는 아닙니다. 진실된 감사는 자신의 의로움을 뽐내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엎드려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 못하는 자, 가슴을 치는 자, 불쌍히 여기옵소서 라며 자신을 간절히 주님께 부탁하는 자가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기뻐(감사)할 때

한 마리의 양을 찾았을 때,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눅 15:5), 하늘 나라에 이름이 기록되었을 때,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눅 10:20)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일을 인하여, “그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눅 13:17) 기뻐해야 합니다. 이 모두가 이 세상에 관계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관계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 기쁨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 것 너무 좋아하지 마세요. 뿐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 1:2)고 합니다.

우리는 영적으로도 가을이 되어야 합니다. 가을이 깊어져 단풍이 다 떨어졌습니다. 아참 아름다웠던 꽃들은 사라졌습니다. 식물이 맨 마지막으로 무엇을 남기는지 아십니까? 씨앗입니다. 씨를 남기고 죽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씨를 남겨야 합니다.

영화 가운데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1999년에 세계적인 영화상 아카데미 7개 부문을 모두 휩쓴 유명한 영화입니다. 이 쉰들러라고 하는 사람은 나치당원입니다. 폴란드에서 이 사람이 그릇 공장을 했습니다. 나중에는 이곳에서 대포도 만들어 냅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유대인을 고용해 가지고 막 썼지만은 유대인들이 너무너무 비참하게 죽는걸 보고 마음을 돌이켰습니다. 우리는 마음 돌이키는 게 중요합니다.
그가 마음을 돌이켜 가지고 어떤 작전을 하느냐 하면 유명한 친위대 장교 괴트라고 하는 장교가 있는데 이 사람을 매수합니다. 그래서 이 공장 돌리려면 싼 임금 노동자를 써야 하니까 유대인들을 이리 좀 넣어 달라 이렇게 해 빼돌리고, 자기 공장이 체코에도 있기 때문에 유대인들을 모두 체코로 빼냅니다. 자주 빼내 가지고 살립니다. 가면 바로 죽는데 군수공장 돌리는데 일시키면 그래도 살기 때문에 계속 유대인을 빼돌립니다. 나중에 2차 대전이 끝나고 그가 이렇게 살린 사람만 1,100명입니다. 겉으로는 나치당원이니까 큰 비즈니스를 하니까 가능합니다. 사는데 돈 버는데 맞추지를 않았습니다. 처음에 가다가 바꾸는 것입니다. 대포를 만들어도 이 대포를 유대인들이 만드니까 전부 불발탄으로 만듭니다. 그러나 나치당원이니까 전쟁이 끝나고 이 사람도 수배되고 구속됩니다. 그러나 이 분들 1,100명이 전부 서명해 가지고 살려내고 얼마나 그 분을 좋아하는지 전부 금이빨을 유대인들이 빼 가지고 이 사람을 위해 이걸 팔찌를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이 뭔지 아십니까? 실제로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좀 더 유대인을 살릴 텐데, 600만이 죽어가는 유대인을 내가 한 사람이라도 더 살려야 할 텐데 그걸 못한 것이 너무 원망스럽다.’ 그러면서 엉엉 울었습니다. 아름답지 않습니까?
이 사람의 무덤은 지금 어디 있느냐 유대인들이 폴란드에 두지 않고 지금 감람산 위에 가져다 놓고 유대인들이 계속 꽃을 꽂고 참배를 하고 있습니다. 쉰들러입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갔을 때 더 올라가면 나중에 떨어져 병신 됩니다. 이만하면 감사하다고 생각하며 내가 받은 은혜 이만하면 됐지 그러면서 쉰들러같이 사는 것입니다. 좋은 일 하는 것입니다. 그게 가을의 삶이기 때문에 풍성해집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cara(카라)’기쁨’은 “성도들의 믿음의 성장”(빌 1:25)이었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갈 5:22),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그리고 간절히 그들을 보기 원했습니다(롬 15:32). 기쁨은 하나님 안에(살전 3:9), 주님 안에(빌 3:1)있는 것입니다.
“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20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살전 2:19-20)
제자들은 아직 넉달은 지나야 추수할 수 있다고 했지만 주님은 밭이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요 4:35). 저와 여러분들의 기쁨은 무엇입니까? 영적인 추수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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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21 저희가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22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짜온대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요 12:20-26)

원래부터 마귀는 우리가 하나 되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했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이간질하고 나누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직접 오셨습니까? 우리를 하나님과 하나되게 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하나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요 나누이게 하는 것은 사탄의 역사입니다.
성 프란시스는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심게 하소서” 이런 기도를 했던 사람입니다. 그를 따르는 제자들과 함께 프란시스 종단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공동체가 분열의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시기함으로서 불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프란시스가 잠시 전도 여행을 떠났을 때 발생했습니다. 프란시스가 돌아왔을 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형제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이때 많은 형제들이 종규(宗規)의 수정을 요구했습니다. 프란시스는 결론처럼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없다면 종규를 바꾸든 규율을 바꾸든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제자가 물었습니다. “그 방법은 우리가 형제임을 철저하게 인식하는 것뿐이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한 몸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엡 1:9-10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20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21 저희가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22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짜온대”
본문 20-22절에 보면 헬라인이 예수님을 만나려고 합니다. 만나러 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러 가야 합니다. 당시에 헬라인이 유대인인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헬라인들이 명절에 예루살렘에 왔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날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왔기 때문에 은혜 받을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도 신앙도 한꺼번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 걸음씩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일단 예수님이 계신곳으로 가야합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하시는 곳으로 가야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려고 먼저 빌립에게 청했습니다. 빌립은 아마 많은 고민을 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 직접 말씀을 못 드리고 안드레에게 먼저 이야기 했습니다. 그리고 두 제자는 고민 끝에 예수님에게 말씀드립니다.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2:2)

룻기 1장 16절에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라고 이방 여린 룻은 시모인 나오미를 따라오겠다는 신앙적인 고백을 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하나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룻은 유대인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고 유대인의 백성이 곧 나의 백성이 된다고 하나됨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죄인은 하나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 분은 완전 성결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믿으면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와 나는 하나가 됩니다.

예수를 따르라

본문 26절에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통해서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신앙은 바로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부터 16장까지를 보면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실 날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실 때 계속 나오는 강조점이 하나 있습니다. ‘나(예수)’입니다. “나를 따르라”, “너희들은 염려하지 말고 나를 따르라”, “너희들이 나를 섬기고자 하느냐 나를 따르라”, “나를 사랑하느냐 나를 따르라”, “너희들이 천국에 이르기를 원하느냐 나를 따르라 내가 곧 길이니라” 예수께서 자기에게 주목하라고 제자들에게 말씀마다 나를 따르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하는 시간입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다른 것을 주목하지 마십시오.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주목하십시오. 예수 있는 곳에 무엇이 있길래 주께서 그렇게 강조하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계시는 거기에 우리도 있어야 됩니다. 예수님이 사셨던 환경을 보면 우리가 관광을 갈만한 매력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한번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나는 머리 둘 곳이 없느니라”(마 8:20) 여러분이 예수님이 사시는 곳이 얼마나 신기한 지 가 보고 싶습니까? 볼 것 없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을 보십시오. 그 분이 나실 때 마굿간의 구유에서 나셨습니다. 거기에는 화려함과 찬란함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목수 집에서 목수 일을 배우면서 자랐습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고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도 화려한 집에서 하신 것이 아니라 들로 산으로 회당으로 그리고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찾아 가셨는데 예수님이 찾아간 곳은 고관이나 부자들을 찾아가신 것이 아니라 병든 자, 귀신들린 자, 창기와 세리와 버림받은 사람들, 고난에 처한 사람들, 유대인들이 멸시한 그 사람들을 찾아가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계신 곳에 우리도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설악산에 단풍놀이를 가신 분들이 귀신들린 자, 병든 자, 가난한 자, 세리와 창기들이 기다리고 있는 설악산으로 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보고 따라오라고 하시는데 예수가 계신 그 장소는 환경적으로 우리가 기대하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있으라고 하십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생명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대접받는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필요로 하는 곳에 가시는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꼭 있어야 될 그 자리에 주님은 가십니다. 거기에 우리도 함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필요로 하는 그 자리에 가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의도하시는 그 은혜를 맛볼 수 있습니다.

예수와의 충돌을 일으키는 사람들

이기적인 믿음은 예수님과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자신만 잘되고자 하는 사람은 예수 믿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생각과 예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행위와 대치되기 때문입니다. 요즘 시험보는 때가 되어서 그런지 텔레비전에 보면 유난히 갓바위 부처가 자꾸만 나옵니다. 그것이 부산 쪽을 바라보고 있어 그쪽 사람들에게 더 효험이 있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식 잘되게 해 달라고 비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시험 철에 입시 생을 위한 특별 기도회 같은 것 안 합니다. 노력한 만큼 되는 것입니다. 또 그렇게 되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예수님이 유대인들과 충돌을 하고 있습니다. 더 좁게 말하면 예수님과 제자들과도 충돌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유대인들이 도저히 이해를 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유대인들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제자들마저도 주님의 말씀을 못 알아듣는 대목이 많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복음을 전하러 길을 가는데 날 때부터 소경된 불쌍한 소경을 만납니다. 제자들은 말하기를 “주여, 이것이 본인이 죄가 많아 소경이 된 것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그 소경이 눈을 떴습니다. 이와 같은 결과를 두고 유대인들이 반응하기를 그 소경을 보고는 믿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부모와 소경 되었던 자에게 가서 따집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요한복음 9장 25절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그 사람이 죄인인지 아닌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것입니다.” 내가 눈을 떴다는 것은 부정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는 기적을 일으켜도 믿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문제로 예수를 잡고자 합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독선입니다. 지독한 민족주의적 독선에 빠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세계인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교회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중병중의 하나는 지나치게 자기교회적이라는 것입니다. 연합하는 것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성도 한 명을 놓고 빼앗아 가듯이 잡아채 갑니다. 세상 사업하는 사람들과 같이 경쟁자적 입장입니다. 이웃 교회와 하나되지 못하면서 어떻게 세계 속에서 교회가 하나될 수 있겠습니까? 교단보다 신학교출신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입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되어야 합니다.

예수와 하나가 되려면

본문 24-25절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의 개념이 제일 처음에 나오는 것은 부부입니다. 부부가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몇 십 년을 살고도 하나가 안된 부부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이 죽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여러분! 죽는다는 것은 목숨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죽어야 합니다. 바울은 고전 15:31에서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습니다.
본문의 “미워하는”(misw’n:미세온)은 동사 현재형입니다. 따라하십시다. “내가 살면 예수가 죽고, 내가 죽으면 예수가 산다”

한국 땅에는 성령의 역사도 강하지만 또한 마귀의 역사도 강합니다. 전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에서 살고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너무 많은 곳에서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서로 다를 수는 있지만 싸움을 하기 이전에 하나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났습니다. 독일인들은 전쟁에 졌다는 생각 때문에 깊은 절망감에 빠져버렸습니다. 그들은 죄책감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전쟁에 대한 책임을 서로에게 떠맡기면서 서로가 서로를 정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계속해서 분열되어 나갔습니다. 이러한 때에 스위스에 머물고 있던 한 독일신학자가 스위스를 떠나서 자기 조국 독일로 돌아왔습니다.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라는 유명한 신학자였습니다. 그는 분열의 아픔을 겪고 있는 독일인들을 향해서 가는 곳마다 이렇게 외쳤습니다.
“여러분, 저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습니다! 역사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여러분도 그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 분 안에서 한 형제요, 한 자매된 자들입니다. 서로를 정죄하지 마십시오. 좀 더 따뜻하게 서로가 서로의 손을 꼭 쥐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함께 일어나십시다. 우리는 새로운 조국을 건설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반드시 새로운 조국을 건설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됨을 외쳤습니다. 모두가 그 말에 동감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정죄하는 것을 그만 두었습니다. 그들은 함께 손에 손을 쥔 힘을 더 쥐었습니다. 따뜻하게 손을 잡고서 함께 일어났습니다. 쓰러진 조국을 건설했습니다. 결국은 라인강의 기적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88년 올림픽에서 불렀던 노래가 ‘손에 손잡고’였습니다. 가족이 손을 잡아봅시다. 성도가 손을 잡아봅시다. 교회가 손을 잡아봅시다. 하나님과 손을 잡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전도(선교)방법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마 9:38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마 10:5-16 “5 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어 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6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7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왔다 하고 8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9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10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 11 아무 성이나 촌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12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13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14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사람들은 큰돈을 벌고자 하는 꿈을 갖습니다. 이런 꿈들은 우리 인간에게 무리하게 하고 욕심을 가져다주고, 정신적으로 도덕적으로 이런 꿈들은 잘못된 인격과 또 삶을 파괴하는 일들이 만듭니다. 권력에 대한 꿈을 갖습니다. 지금 워싱턴에는 이삿짐 센타가 바쁘게 움직인다고 합니다. 부시 대통령과 함께 워싱턴을 떠나는 분들이 많습니다. 수많은 사람들 – 보좌관들, 백악관 직원들, 비서들, 장관들, 차관들 – 다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권력은 잠깐 왔다가 날아가는 새와 같습니다. 내게 올 때는 좋지만 날아가 버립니다. 잠깐입니다.
어떤 분의 이야기입니다. 과거에 장관으로 있었는데 장관으로 있는 동안 동창회에 나가지 않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청탁도 많고 부탁이 많으면 중요한 자리를 감당할 수 없으니까 친구들하고 자연히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일년 지나고 다시 동창회에 나가니까 모두 욕을 했다고 합니다. ‘전에 한 자리 할 때는 오지 않더니 뭐 하러 왔느냐?’고 하며 동창들이 ‘왕따’를 만든다고 합니다. 그래서 집에만 있으니까 의욕이 없어지고, 노이로제에 걸리고, 정신적으로 약해져서 병원의 치료를 받고 있다는 겁니다. 세상의 영광은 잠깐인 것입니다. 작년에는 대박이 터질 줄 알고 꿈을 가지고 주식에 투자했다가, 우리 국민 500만 정도가 주식으로 인해 거지가 되다시피 했습니다. 10억을 가지고 들어갔는데 2000만원이 남았는가 하면, 50억을 투자했는데 2억이 남은 분도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남편 모르게 돈을 빌려서 하다가 아주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중 고등학교 이사장이시던 분이 있습니다. 아버지 때부터 물려받은 재산도 많습니다. 그런데 작년에 주식 투자했다가 다 잃어버리고, 오히려 학교 공금까지 다 집어넣어서 지금 구속당해 있습니다. 주식에 손댔다가 가정 날려보내고, 행복도 날아가고, 학교도 날아가고, 명예도 날아가고, 다 날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지금 한 이야기는 딱 7년 전에(2001.1.28)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님이 하신 설교입니다. 제가 바꾼 것은 클린턴 대통령을 부시 대통령으로만 바꾸었습니다. 어때요 그대로지요? 조금 잘 나가는가 했더니 제자리로 왔습니다. 우리 인생이 딱 그렇습니다. 돈 좀 버는 것 같지만 늘 제자리입니다. 권력이 좀 있었는가 하면 도로 제자리입니다. 그러나 전도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후회가 없습니다. 하면 할수록 힘이 나고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12제자를 파송하시면서 가르쳐 주신 전도(선교)의 방법을 10가지로 구분하여 알아보고자 합니다. 오늘날에도 전도와 선교는 이 방법대로 따라하면 됩니다. 더 좋은 전도 방법이 선교전략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방법입니다. 이제 따라하기만 하면 됩니다. 영어에서는 선교를 Mission이라고 했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실행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해야 홍해가 갈라지는 것입니다. 요단강에 발을 담가야 갈라지는 것입니다. 하지 않는데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방법을 따라할 때 오늘도 주님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마 9:38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1)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그랬습니다. 추수의 주체는 주인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보면 주인이 너무 더디 오므로 종이 자기가 주인인줄 착각하고 주인행세를 합니다(막 12:1, 11, 마 21:33-43, 눅 20:9-17). 우리는 주인이 아닙니다. 잠시 하나님이 주신 것을 누리고 사용하는 것뿐입니다. 교회가 선교지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시작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예수님의 것입니다. 우리의 주인은 성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이십니다.

(2) “추수할 일꾼을 보내어 주소서” 추수의 주체이신 하나님께 간구 하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협력 사역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추수하는데 부족한 것이 있다면 주인에게 말하면 됩니다. 주인이신 하나님이 방관자 적으로 보고만 계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적극적으로 도우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말 3:10절에 보면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하나님의 이러한 약속이 오늘 우리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께서 구원하십니다!” 기쁜 소리입니다. 즐거움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에게 있는 것입니다. 소망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에게 있습니다. 평안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에게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다 외롭습니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아이는 아이대로, 노인은 노인대로 모두 외롭습니다. 도시는 도시대로, 농촌은 농촌대로 외롭습니다. 제일 외롭지 않은 분은 인기 있는 연예인 같습니까? 연예인도 알고 보면 그렇게 외롭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약을 복용하는 거랍니다. 외롭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여자들은 외로워서 옛날 애인 생각한다고 합니다. 외로움을 없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복음입니다. 예수입니다. 예수님만이 내 마음을 가득 채워 주는 줄 믿습니다.

평안도 예수입니다. 자유도 예수입니다. 능력도 예수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밀어 주십니다. 우리는 복음 전파의 꿈만 가지면 됩니다. 물질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건강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성공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좋은 조건은 하나님이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열심히만 하면 하나님이 기름을 채워주십니다. 자동차에게 주인이 기름을 채우듯이 우리는 열심히만 가면, 복음전파의 꿈만 가지면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사업을 할 때도 복음 전파의 꿈을 가져야 됩니다. 우리 무슨 일을 해도 복음전파의 뜻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형통합니다.

마 10:5-16
(3) 5-6절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전도나 선교의 대상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을 먼저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없는 양을 만들어 내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먼저 잃어버린 것을 찾아야 합니다. 천국비유에서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의 비유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눅 15:3-7, 마 18:12-14). 잃어버렸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원래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우리를 다시 찾으러 오신 분입니다. 우리는 제멋대로 돌아다니는 부모 없는 아이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였는데 다시 찾으러 오신 분이 있다는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받아들이는 쪽으로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찾는 사람들, 복음을 믿는 사람들에게로 이동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믿고 받아들일 수 있는 분들에게 먼저 가는 것입니다. 일본선교사 7년 하다가 라오스 선교사로 갔던 김정인 선교사님이 계십니다. 지금은 돌아가시고 남겨진 사모님과 아들이 선교를 대신하고 있습니다만 일본 선교하시다 고생하시고 라오스에 가셔서 복음을 받아들이는 이들을 보면서 기뻐하셨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4) 7절 “가면서 전파하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복음을 전할 때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생각하기를 하던 일만 마치고 나면… 이라는 생각을 하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과정 중에 하라는 것입니다. 공부 다 마치고 전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하라는 것입니다. 선교훈련 하면서 답답한 것이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전도하나도 안 하다가 해외로 선교 간다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전도 안 하던 분이 선교지에만 간다고 선교가 됩니까? 도착해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있는 자리에서 하라는 것입니다.

(5) 7절 “천국이 가까웠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전할 내용 즉 복음의 핵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 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예수님은 우리에게 천국을 소개하로 오신 분입니다. 그곳으로 우리를 초청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산상복음이라는 말하는 8복에서 처음 나오는 것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입니다. 천국을 주시고 싶으신 것입니다.
우리나라 일제시대 때 ‘예수 천당’ 전도로 유명한 최권능(최봉석)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분이 신사참배 반대로 투옥되면서 “하늘에서 전보가 왔구나 나를 오라고.” 하고 1944년 4월 15일 돌아가셨습니다. 복음의 메시지는 단순한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찾으러 오셨고 이제 그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주음주에 계속…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