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을 보내며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호 6:1-3)

철 좀 듭시다.

“빛을 보기 위해서는 눈이 필요하고 소리를 들으려면 귀가 있어야 돼. 그런데 시간을 느끼려면 무엇이 있어야 하나? 그래, 그건 마음이야 마음이란 것이 없어 시간을 느끼지 못하게 되면 그 시간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란다.”
이것은 미카엘 엔데의 동화 《모모》라는 책에 나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긴 말을 한마디로 줄여 놓은 우리말이 있습니다. ‘철’ 이라는 말입니다. 제가 외국어를 몰라서 그런지 몰라도 우리말의 ‘철’이라는 말보다 더 사색적이거나 아름다운 말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철’을 굳이 영어로 번역한다면 계절(Season)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철’이 마음을 담은 언어로 사용되었을 때는 단순히 계절을 뜻하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상당한 오해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철’은 외국인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말 중의 하나입니다. ‘철’은 단순히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계절만을 뜻하는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렸을 때 어른들로부터 꾸중을 들을 때 ‘철 좀 들어라’ 라는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반대로 칭찬을 들을 때는 “철 들었구나” 하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일이 기억합니다. 겨울이 오고 봄이 와서 꽃이 피고 땀이 나는 여름을 지나 추수의 계절 가을이 돌아온다고 철이 오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머릿속에 모세혈관과도 같은 핏줄 속으로 철이 오고 철이 가는 것입니다.
우리말은 말마다 모두 사색적이거나 시적인 것 같습니다. 저는 그래서 우리말을 사랑합니다.

모든 사람이 해외 여행갈 때 비행기에서 지켜야할 에티켓으로 스튜어디스에게 주스 달라, 물 달라 할 때 이것을 외국어로 익히느라고 정신이 없을 때 저는 비행기 타고 천연덕스럽게 외국 항공사 비행기 타고 스튜어디스에게 “물 주세요.”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주위의 사람들이 그것도 한국 사람들이 저를 다 처다 보는 것입니다. 저는 다시 정확하게 이야기했습니다. “물 주세요” 일본 비행기라 그냥 ‘미즈’ 하면 됩니다. 일본말의 ‘미’ 도 한국에서 유래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우리말의 ‘미 나물’, ‘미 더덕’ 이 있는데 여기서 ‘미’ 는 물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에 비행기 띄우면 그것도 스튜어디스정도라면 그 정도 한국말은 배워서 서비스해야 되는 것 아닌가요? 우리가 한국말을 국제적으로 나가서 쓰지 않으니까 그분들도 배우려고 하지 않는 겁니다. 우리말을 배우고 전하려고 하지 않고 외국어만 배우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철없는 백성’ 일 것입니다. 저는 더 원치 않습니다. 외국어를 배우려는 열심만큼이나 한국어를 배우고 전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분위기가 갑자기 국어시간이 된 것 같습니다.

우리말 참 재미있습니다. 우리 집사람이 몇 일전 전화국에 전화를 하더니 “우리 집 전화 먹통이 되었어요.” 그러는 겁니다. 정확히 표현하면 “우리 집 전화선이 끊어 졌나 봐요 또는 우리 집 전화가 연결이 안되네요.” 그래야 합니다. 그런데 그냥 “먹통이 됐어요” 그래도 다 알아듣습니다. 미국에서 처음 선교사가 와서 우리말을 배우는데 어찌 표현이 다양하고 어려운지 한번은 길 가다가 죽은 척 했답니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그 말이 다 다르답니다. 발로 한번 차고는 “죽었네.” 어떤 사람은 “갔어!” 또 어떤 사람은 “소천 하셨네” 등 그 표현이 다 다르답니다.
한국 사람들은 시간을 밖에서 흐르는 강물처럼 그저 흘러가면 그만 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시간을 마치 향기로운 과일을 먹듯이 우리는 시간과 나이를 먹었습니다. 시간이 나의 마음속에 살과 피 속에 파고 들어가 영원히 기억되게 남는 것입니다. 이 시간을 느끼는 마음이 없으면 우리는 나이를 “헛 먹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몸무게가 두개입니다. 저울로 달 수 있는 몸무게와 마음을 다는 무게가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풍부하고 인격이 쌓여 가는 사람에게 “그 사람 무게가 있다” 고 말하는 것입니다.
철학자 제레미 콜리어는 “지식은 세월이 흐른 결과로 얻어진 산물이요, 많은 날들은 지혜를 가르치기에 적절하다.” 고 했습니다. 2008년도 우리는 먹었습니다. 먹었으면 그 만큼 무게가 있고 철이 들기 바랍니다.

노아의 홍수 이전에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창 6:5-6) 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마음을 더 이상 슬프게 만들어 드리지 맙시다. 호세아는 본문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주님께 두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세월이 간다고 철이 간다고 철들지 않습니다. 유명한 신학자 ‘폴 틸리히’ 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현대인에게는 숨길 수 없는 세 가지 회색 어두움이 있다. 첫째는 공허감이요, 둘째는 죄책감이요, 셋째는 불안, 공포감” 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사람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이런 갈등은 다른 그 무엇으로는 해결 될 길이 없는 겁니다. 죄의 문제를 무엇으로 해결하겠습니까?
심리학자 ‘칼 리밍거’ 박사는 자신의 일생을 통해서 경험한 바를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정신병원에 있는 수많은 환자들에게, 그들의 죄를 용서받았다는 확신만 줄 수 있다면
그 중에 75%가 그 다음날로 퇴원하게 될 것이라!” 라고 했습니다.

마음을 가는 교육

기독교의 정신 가운데 하나는 가르치는 것, 교육입니다. 사람에게 교육하지 않고 가르치지 않으면 사람은 무지하게 되어 선과 악도 구분할 수 없게 될 뿐만 아니라 나라도 엉망이 됩니다. 죄송하지만 지금 세계지도 펼쳐놓고 보면 이요 가톨릭 식민지화되었던 나라들이 못사는 것 알 수 있습니다. 서양 사람들이 식민지화 할 때 그들을 통치하기 쉽게 남자들 교육을 안 시킨 것입니다. 그런데 이 뿌리가 너무 깊어서 그 나라들이 잘 회복이 안됩니다. 중국 공산당은 사람이 감성이 풍부해 지면 낭만주의가 되어서 공산주의에 도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사람들에게 음악이나 미술, 예술 계통을 안 가르칩니다. 그리고 그것은 공산정권이 충성을 맹세하는 것으로 만듭니다.
하나님이 성경에서 강조하시는 것 가운데 하나가 “가르치라” 는 것입니다. 모세에게 “그들에게 율례와 법도를 가르쳐서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그들에게 보이고”(출 18:20) 라고 하셨습니다. 가르치고 보여주지 않으면 교육이 안됩니다.
러시아 000에서 선교하는 000선교사가 계십니다. 그 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요 교회 건물 공간이 이상하고 쓸모가 없어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유를 물어보았습니다.
교회건축을 하는데 러시아 사람에게 맡기고 급한 일이 있어서 한국에 다녀갔는데 교회를 정교회 같이 꾸며놓았다는 것입니다. 러시아 사람이 본 교회의 모습은 정교회만 본 것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교회는 정교회처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누구를 보고 무엇을 배우냐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인생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케 하소서 주의 신이 선하시니 나를 공평한 땅에 인도하소서”(시 143:10) 주님께 배우세요. 하나님을 보세요. 그리고 하나님을 따라 살았던 사람들을 보세요. 그 이야기가 모두 성경에 있습니다. 성경을 우리가 배우고 보는 목적이 거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마 5:2) 산상복음(8복)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고 마지막 당부를 하셨습니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John Calvin)은 “자기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고 또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자기에 대한 지식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곧 자기를 아는 것이요 자기를 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안다는 것, 이 두 가지 지식은 결코 따로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지식은 근심을 더해 갈 것이며 하나님 없이 얻은 물질은 자신을 멸망케 할 것이고 하나님 없이 가진 권력은 자기와 백성을 다 절망의 수렁으로 몰아넣는 요인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아야합니다. 여기에 내 문제의 해결도 있고, 다른 사람의 문제에 대한 해결도 있고, 세계문제에 대한 해결도 있습니다.

우리말의 머리가락(카락)은 머리에서 갈라진 것, 손가락은 손에서 잘라진 것, 발가락은 발에서 갈라진 것입니다. 영어의 헤드와 헤어, 핸드와 핑거는 아무리 보아도 서로 연관성이 없습니다. 우리는 몸을 하나의 구조체로 보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도 논밭을 가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것을 마음 밭(心田)이라고 합니다.
분문의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고 하셨습니다. 메마른 땅에 비를 주어 적셔야 합니다. 가르친다는 것은 세상에 굳어져 있는 마음을 갈아엎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정관념이나 타성에 젖은 마음에 새 공기가 들어가게 해서 새 생명, 세 소망을 찾게 하는 것입니다. 영국은 아주 오래된 나라이며 전 세계 여기 저기를 식민지화 시켰던 나라입니다. 이런 나라가 왜 미국에게 밀렸느냐, 19세기 영국이 기독교가 쇠퇴해간 이유는 제때 밭을 갈아주지 못한 교육 때문이라고 봅니다. 19세기에 영국이 세계 제일의 공업국이었지만 그 당시 영국 국민의 3분의 2가 문맹이었습니다. 지금도 보통 사람은 고등학교 이상의 교육을 받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처럼 대학을 많이 나온 나라도 드물 것입니다. 그에 비해 뒤쫓아오던 미국의 공업 중심지인 뉴잉글랜드 지방에서는 95퍼센트의 성인들이 글을 쓰고 읽을 줄 알았습니다.
서양의 교육은 젖 먹이기보다는 젖떼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독립심을 키워주고 믿음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단순히 젖떼기가 아니라 새 흙을 북돋우는 교육이 필요한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을 가르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북돋아 주느냐 하는 것입니다.
본문 2절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이틀이나 삼일은 영적인 개념입니다. 단순히 날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속이 우리를 살려 주시고 회복시켜 주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삼일은 주님이 부활하신 기간입니다. 우리를 예수와 함께 일으키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북돋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죽어 가는 심령을 소생시켜 주시고 부활시켜 주십니다.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를 직역하면 “그의 얼굴 앞에서” 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여호와께 돌아오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은 먼 산을 넘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냥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3절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를 ‘아는 것:다아트’ 는 하나님을 떠난 마음에서 돌아서라는 강한 열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다음에 나오는 ‘알자:라다프’ 는 ‘추적하다, 뒤따르다’ 는 말입니다. 한 마디로 열심히 쫓아가는 것입니다. 한눈 팔 수 없어요. 잘못하면 잊어버립니다. 눈을 부릅뜨고 마음과 뜻을 모아 쫓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은 나아 오십니다. 본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는 히브리어 ‘야차’ 라는 단어인데 ‘야차’ 는 창 19:23, 시 19:5에서 해가 떠오르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순간 하나님의 태양이 우리 위에 떠오르십니다. 이것은 생명입니다. 새로움입니다. 땅을 적시는 생명의 늦은 비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마틴 루터는 수도원에 들어가서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아 보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던 사람입니다. 남달리 금식을 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경건의 삶을 살고자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심지어 하루에 무려 일곱 번이나, 고해성사를 했다고 합니다. 어떤 기록에는 하루에 스무 번이나 되었다고도 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있었던 곳은 수도원입니다. 수도원에서 무슨 죄를 그토록 지었겠습니까? 무슨 죄를 짓겠습니까? 딱히 그렇게 죄지을만한 사건이 없는데도, 루터는 죄로 말미암아 고민을 합니다. 그러니까 사실 그가 짓는 죄란, 전부 마음으로 짓는 죄입니다. 의심하는 죄, 절망하는 죄, 시기 질투하는 죄, 마음의 일어나는 분노 등, 전부 이런 죄 때문에 루터는 고민을 한 것입니다. 얼마나 고해성사를 많이 했는지, 그 신부님이 이런 말까지 합니다. “루터야! 죄를 좀 모았다가 한꺼번에 가지고 오너라!”
그러던 그가 27세가 되던 1511년에 로마를 방문합니다. 로마를 방문하면 의래히 「라터라노(Lateran)」대성당을 찾아갑니다. 거기에는 28계의 ‘성 계단’ 이라는 게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재판 받으러 오르셨던 빌라도 법정에 있었던 계단입니다. 그것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가 왕의 권위를 빌려, 로마로 뜯어 옮기고, 거기에 성당을 지었던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르내려서 다 닳아버린 대리석 계단이 2천년이 지난 지금도 거기에 그대로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오르내리면서, 통회자복 하면, 하나님께서 죄를 사해주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루터도 계단 하나하나에 입을 맞추면서 무릎으로 기어 오르내렸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죄에 대한 고뇌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마음에 죄 사함의 평안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고행을 계속하고 있을 때 어느 날 그의 마음속에 성령으로 들려오는 강한 음성이 있었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렇게 많이 읽던 말씀이요, 묵상하던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그 순간 깨달아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렇다! 이 계단을 기어오르는 고행이 나를 여기서 자유케 하는 게 아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고,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나님만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우리는 2008년도 이러한 은혜를 하나님께 입었습니다. 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목자들의 성탄절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고하니 듣는 자가 다 목자의 말하는 일을 기이히 여기되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니라 목자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눅 2:15-20)

축복 받은 출생이 있는가 하면 저주받은 출생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하늘의 천사들과 동방박사와 목자들이 축하했습니다. 그러나 가롯 유다 같은 사람은 마태복음 26:24을 보면 “차라리 나지 아니했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그가 그런 평가를 받게 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 스승을 배신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방세계에서 통용되던 노예제도에 의하면 주인은 종을 팔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주인이신 스승을 팔았습니다. 그것은 배신 행위였습니다.
잘 알려진 우화가 생각납니다. 친한 친구 두 사람이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죽어도 함께 죽고, 살아도 함께 살기로 혈맹을 맺은 사이였습니다. 깊은 산길을 기다가 갑자기 큰곰을 만났습니다. 행동이 재빠른 친구는 쏜살같이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행동이 굼뜬 친구는 피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 순간 이 친구는 곰은 죽은 시체는 건드리지 않는다는 말이 떠올라 땅바닥에 엎드려 숨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곰이 다가와 코로 냄새를 맡아보고, 앞발로 건드려도 꼼짝하지 않은 채 엎드려 있자 곰은 슬금슬금 떠나버렸습니다.
나무에서 내려온 친구가 “여보게, 내가 나무 위에서 내려다보니 곰이 자네 귀에 대고 뭐라고 소곤거리는 것 같았는데 뭐라고 하던가?”라고 물었습니다. 그 친구는 “너 같은 놈하고는 상종도 하지 말라고 소곤거리고 떠났다”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유다는 자신을 선택하여 부르시고 가르쳐 주신 선생님을 배신했습니다.
작은 은혜를 받고도 크게 감사하는 사람이 있고, 큰 은혜를 받고도 그 은혜를 버리고 배신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배신은 정상적 인격을 가진 사람이 할 짓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 부모님의 은혜, 교회의 은혜, 이웃 형제 친구의 은혜를 배신하지 맙시다.

둘째, 스승을 팔았습니다.
사람은 인격적 존재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마치 물건처럼 팔았습니다. 이런 현상을 「비인간화」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물건 취급하던 노예는 돈을 받고 파는 제도가 있었습니다만 어떻게 제자가 스승을 팔 수 있단 말입니까?
문제는 신판 가롯 유다가 많다는 것입니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양심도, 신앙도, 가치도, 윤리도, 도덕도 팔아먹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도 팔아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유다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들이 있었기에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좋을뻔 했다”는 평을 받게 된 것입니다.
누가복음 2:1-20은 천사들과 목자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드린 기사입니다. 특히 목자들의 축하는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1. 그들은 자기 양떼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8절을 보면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라고 했습니다. 목자는 그 당시 천대받던 직업이었습니다. 미국은 노예제도로 노예를 천대했고, 우리나라는 반상(反常)제도로 양반이 상민을 천대했고, 인도는 카스트라는 신분제도로 사람을 계급화 했습니다.
브라만(Brahman)은 사제계급이고, 크샤트리아(Kshatrya)는 무사계급, 바이샤(Vaishya)는 농민, 상인, 그리고 수드라(Sudra)는 노예입니다. 중요한 것은 Sudra는 영원히 수드라일 뿐 절대로 무사나 사제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계급의 선을 넘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경우 목자라는 직업은 왕족, 귀족, 종교인 등으로 구성된 상류계층에는 얼씬거리지도 못하는 천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성탄소식이 전해진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직업과 예수님이 하시려는 일이 동질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0:11에서 주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했습니다. 시인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노래했습니다.
선한 목자 예수님이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 것처럼 베들레헴 목자들은 밤에, 밖에서 자기 양떼를 지켰습니다.
팔레스타인의 12월 밤은 춥습니다. 외롭고 추운 겨울밤, 잠들지 않고 양떼를 지키고 있던 그들에게 목자이신 아기 예수님의 탄생 소식이 전해진 것은 뜻 있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도 유대나라 벌판이나 계곡에 가면 베드윈 족들이 양을 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누더기를 걸치고, 천막을 치고, 땅바닥에 깔개를 깔고 살면서 양을 칩니다. 그들은 수저나 젓가락도 쓰지 않고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다. 그러면서 오로지 양을 지키고 키우는데 정성을 쏟고 있습니다.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 맡은 일에 정성을 다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성탄의 기쁜 소식을 전해준 것입니다.

이태리 시골마을에서 태어난 안토니오는 음악을 좋아하는 소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노래도, 악기도 연주하는 재주가 없었습니다. 어느날 그는 바이얼린을 만드는 아마티라는 노인을 찾아가 자기가 나무로 깎아 만든 조각품들을 보여주며 바이얼린 만드는 법을 배우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 소년은 아마티 노인 밑에서 최선을 다해 바이얼린 만드는 일을 배웠습니다. 그는 일평생 천 개가 넘는 바이얼린을 만들었는데 바로 그 바이얼린이 저 유명한 스트라디바리인 것입니다. 그는 손으로 깎고, 다듬고, 그리고 그 속에 자신의 장인 혼을 넣어 바이얼린을 만들었기 때문에 최고를 자랑하는 명기가 태어난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는 사람, 자기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됩시다. 너무 싶게 이루려고 하지 마세요. 그만한 노력이 있어야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2. 아기를 찾아갔습니다.
15절을 보면 “가서….보자”고 했고, 16절을 보면 “빨리 가서”라고 했습니다. 천사들이 전해준 소식을 듣자마자 그들은 곧바로 행동을 시작한 것입니다. 나쁜 일은 천천히, 좋은 일은 빨리 결단해야 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좋은 일은 천천히, 나쁜 일은 재빨리 행동에 옮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서두를 일이 있고, 서둘러서 안될 일이 있습니다. 좋은 일은 서두르고, 나쁜 일은 서둘지 않아야 합니다. 목자들은 서둘러 아기를 찾아가 경배했습니다. 좋은 일은 빨리 결단합시다.
목자들은 빨리 찾아가 아기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그 점을 배워야 합니다.

3. 일하러 돌아갔습니다.
20절을 보면 “듣고 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고 했습니다. 영광과 찬송을 드리고, 그리고 베들레헴 일터로 돌아가며 찬송을 불렀다는 것입니다. 은혜 받은 그 현장에 머문 것이 아니라 일터로 돌아가고 삶의 현장으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2:1-12을 보면 고침 받은 중풍병자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2:10)고 말씀하셨습니다.
목자는 양과 함께 있어야 행복하고, 직장인은 직장에, 사업가는 현장에, 예술가는 무대에 있어야 행복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와 함께, 예수 안에 있어야 행복한 것입니다.
성탄의 기쁜 소식이 목자들에게 전해진 것은 우리에게도 큰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한국교회사를 살펴보면 선교사들의 선교대상은 양반이나 귀족으로 구성된 상류사회가 아니었습니다. 보통사람들이 선교대상의 주체였습니다.
전라북도 금산에 가면 금산교회가 있습니다. 1904년 선교사 테이트(Tate) 목사가 금산리에 교회를 세우기로 마음을 정하고 1905년부터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금산교회에는 이자익 목사님에 얽힌 이야기가 있습니다.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섯 살 때 어머니를 잃은 이자익은 살길을 찾아 경상도 진주를 떠나 남원 땅까지 왔고, 다시 곡창지대인 김제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금산리까지 왔을 때 삼거리 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거기서 왼편으로 갈까, 오른편으로 갈까 망설이다가 오른편 길로 들어서 걸어갔습니다. 놀라운 것은 왼편으로 가면 15분 거리에 금산사가 있었고, 오른편으로 가면 10분 거리에 조덕삼이라는 사람네 부잣집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집에 머슴으로 들어갔습니다.
1905년 조덕삼 씨네 사랑채에서 예배가 시작됐을 때 머슴인 이자익도 함께 참석을 했습니다. 교인이 100명 정도로 성장하자 장로 한 사람을 뽑기로 하고 투표를 했는데 주인 조덕삼을 제치고, 머슴 이자익이 뽑혔습니다.
주인은 평교인, 머슴은 장로가 되었지만 조덕삼 씨는 흔연스레 장로를 받들며 교회를 섬겼고, 훗날 그도 장로가 되었습니다. 조덕삼 장로는 이자익 장로를 평양신학교에 유학 가도록 주선하여 보냈고, 졸업 후 다시 돌아와 금산교회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자익 목사님은 총회에서 세 차례나 총회장을 역임했습니다.
머슴이었던 이자익 소년의 성공기도 아름답지만 반상의 벽을 허물고 자기 집 머슴을 장로로 떠받들고, 담임목사로 모신 조덕삼 장로 이야기는 더욱 빛나는 보석과 같습니다. 바로 이러한 정신과 사랑이 예수님의 정신이고 사랑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념도, 국경도, 사상도 뛰어넘게 해주셨습니다. 사랑은 국경이 없다고 합니다만 예수님이야말로 모든 것을 초월하게 해주셨습니다.
20절을 보면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고 했습니다.
듣고 보았다는 것은 체험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천사를 보았고 천사들이 전해준 말을 들었습니다. 베들레헴으로 가서 아기 예수를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영광과 찬송을 드렸습니다. 우리도 들었습니다. 보았습니다. 그 사실을 전하고 말합시다. 그리고 영광돌리고 찬양합시다.

교육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가정교육이 있어야 합니다. 가정은 중요한 인간됨에 윤리적인, 도덕적인 교육을 잘 시켜야 합니다. 아니 모든 일에 사람됨을 끊임없이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교회교육입니다. 하나님을 알게 해야 합니다. 다 알아도 창조주를 모르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우주만물을 통치하는 지배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 집에 들어가면 그 집의 주인을 알아야 하듯이 이 만물의 주인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역사를 지배하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과 뜻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와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섬기고 낮아지고 봉사하는 것을 교회에서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이 세상에서 대접을 받고 존경을 받는 이런 권세 있는 사람으로만 나가는 게 아닙니다. 설령 권세를 잡든 부유한 재산을 얻든 간에 우리의 삶은 이웃을 항상 사랑하고 섬기고 나누어주고 낮아지고 남을 돕는 자세로 영적인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이건 교회에서 배워야 합니다.
유대인의 교육은 바로 이런 것이 살아 있습니다. 그 다음이 학교 교육입니다. 학교는 지식을 가르치는 곳입니다. 위대한 정신을 가르치는 곳입니다. 의지와 이성이 있는 합리적인, 과학적인 지성인으로 길러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참고 절제하고 세계를 보는 눈을 뜨게 하고 비전을 가지고 미래를 보게 하는 것이 교육입니다. 이 세 가지가 빠지면 안됩니다.

유대인이 세계적인 인물이 되는 것은 이 세 가지가 끊임없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이 권위가 살아 있습니다. 유대 나라 이스라엘에 가 보면 부모님이 항상 애들하고 같이 교회에 다니는 모습을, 성막 회당을 찾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안식일이 되면 주욱 이어집니다. 전부 애들하고 손잡고 교회에 가서, 성전에 가서 예배를 몇 시간을 드립니다.
 

은혜 위에 은혜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4-17)

우리에게 최고의 단어는 무엇인가? 과연 저에게 한번만 설교하라고 한다면 어떤 주제로 설교를 할 것인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마치 물 한 방울 속에 태양의 모습이 담겨 있듯이 복음의 진수가 들어 있어야 하는 주제의 단어이어야 합니다. 그 단어는 우리시대의 최고의 단어 “은혜(Grace)”입니다. 찬송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이 작곡된 지 200년이 지나서 미국에서는 꾸준히 각종 음악 순위 차트에 진입하고 있습니다. 제가 오래 전에 만들었던 개인홈페이지가 있습니다. 그곳에 들어오면 이 찬양 곡이 반주로만 흘러나옵니다. 그런데 끝까지 나오지 않고 한 소절만 나옵니다. 어떤 분이 미국에서 다 들을 수 없냐고 연락오신 적이 있습니다.
리처드 니버(N. Richard Niebuhr)는 “기독교의 위대한 개혁은 지금껏 몰랐던 것을 새로 찾아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있는 것을 전혀 다르게 보는 사람이 있을 때 발생한다.” 고 했습니다.
스티븐 브라운(Stephen Brown)은 “수의사는 개만 보고도 생면부지의 개 주인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고 했습니다. 세상은 “이 땅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무엇을 생각하고 배울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헬라어로 은혜라는 말은 ‘cavrin:카리스’ 라는 말입니다. 이 단어의 어원은 ‘cavria:카이로’ 로 ‘기쁘다, 행복하다’는 뜻의 동사에서 나온 말입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서,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처음 떠올리는 이미지가 ‘기쁨과 행복’ 이었으면 합니다. 그런데 교회란 거룩한 체하는 사람들의 모임으로만 생각한다면 교회는 은혜보다 도덕이 먼저인 것입니다.
고든 맥도널드(Gordon MacDonald)는 “웬만한 일에는 세상도 교회 못지 않거나 교회보다 낫다. 집을 지어 주고 가난한 자를 먹여 주고 아픈 사람을 고쳐 주는 일은 굳이 그리스도인이 아니어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이 못하는 일이 하나 있다. 세상은 은혜를 베풀 수 없다.” 이것은 교회만이 할 수 있는 절대적 사명을 지적한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교회 밖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은혜에 대한 갈망함 이것이 교회를 찾는 이유입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은혜에 대해서 설교하고 있습니다. 설교 준비를 하면서 이런 다짐을 했습니다. “은혜에 대해서 설교하면서 전혀 은혜스럽지 못하게 전달하면 안 된다. 나는 부족하지만 하나님이 은혜롭게 해 주실 것이다.”
어떤 분(화이트 E. B. White)이 “은혜도 개구리처럼 해부할 수 있으나 그렇게 하는 사이 생명을 잃고 만다.” 고 했습니다. 은혜는 설명하려고 하면 은혜가 떨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은혜는 설명하기보다는 전달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예수님을 하나님에 대해서 설명하시고자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시기 위해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는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전달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가 설명되기보다는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설명으로 될 것 같으면 모세를 통해서도 됩니다.

미국 출근길 버스 안에서 있었던 어떤 이들의 대화 내용입니다. ‘뉴욕 타임즈’ 최장기 베스트셀러였던 스코트 펙(Scott Peck)의 [아직도 가야할 길]을 읽고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무슨 책을 읽고 계십니까?”
“친구가 준 거예요. 이 책 때문에 인생이 바뀌었다나요.”
“그래요 어떤 책입니까?” “글쎄요 무슨 인생 지침서 같기도 하고. 아직 별로 못 읽었어요.” 여자는 책을 두르르 넘기더니 “장 제목이 이렇네요. ‘훈련, 사랑. 은혜…’ 남자가 말을 끊고 “은혜가 뭡니까?” “저도 몰라요. 아직 은혜까진 못 나갔어요.”
우리는 이 세상의 상황에 빠져서 은혜까지 못 나간 것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인간에게서 은혜를 빼면 그야말로 초라하기 그지없는 신세가 됩니다. 본문 17절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합니다. 이 은혜는 기독교가 세상에 줄 수 있는 최상의 선물입니다.
어떤 이혼한 여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15살 난 딸과 함께 교회 본당 입구에 서 있는데 사모가 다가오더니 “이혼하신다구요. 이해가 안 가는군요. 자매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남편도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무엇 때문에 그러는 거죠.” 라고 했습니다. 평소에 말을 건네지 않던 사모가 그것도 15살이나 된 딸이 있는 앞에서 면박을 주었습니다. 그녀는 기가 죽어서 한 마디 말도 못했습니다. 그러잖아도 남편과 손써볼 수 없을 만큼 파국으로 치달아 마음이 무척 아픈 상태였는데… 그녀는 그 때의 일을 나중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냥 사모님이 나를 안아 주셨더라면…”
은혜란 도덕적으로 완벽한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크 트웨인은 개와 고양이를 한 방에 집어넣고 잘 지내는지 실험해 보았습니다. 개와 고양이가 잘 지내자 이번에는 새와 돼지와 염소를 넣어 보았습니다. 약간의 적응 기간을 거치자 이들도 잘 지냈습니다. 이번에는 침례교인과 장로교인과 감리교인을 넣어 보았습니다. 방안에는 살아남은 자가 없었습니다.
은혜는 자격 없는 자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나도 그 중의 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얼마나 기쁨이 되는지 실감이 안나시죠? “6개월 전에 유괴된 딸의 소재지가 파악되었고 딸이 무사히 구출되었습니다.” 하는 소식이나 군인 남편의 헬기가 추락했다는 소식을 들은 아내의 심정, 그러나 잠시 후 “남편은 그 헬기에 타지 않았습니다.” 하는 소식이 우리를 놀라게 하며 기뻐하게 하는 소리에서 주님의 심정을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눅 15:10)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서울 대학에 합격해서가 아닙니다. 사업에 성공해서도 아닙니다. 금메달을 땄기 때문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잃었던 자녀를 찾으신 것으로 기뻐하십니다. 그저 우리가 하나님의 이러한 은혜를 받는데는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시옵소서.”(눅 18:13) 이라고만 하면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한 사람은 성경 공부를 한적도 없고 교회를 다닌 적도, 더군다나 착하게 살았다고 보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십자가에 매달렸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예수여…나를 생각하소서”(눅 23:42-43) 라고 한 것뿐인데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지금도 이렇게 외치시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누가복음 15:3-7절에 보면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아나선 목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마리의 양이 나라면 좋겠지만 나머지 양속에 내가 끼어 있다면 어떤 반응을 할 것인가? 나머지 99마리의 양은 어떡하고 한 마리에 관심을 두시는가?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2:3-8절에 나오는 예수님께 향유를 쏟은 여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당시 1년치 사람 월급에 해당하는 돈이었다고 합니다. 유다가 보기에는 이것은 말이 안 되는 행동이었습니다. 향품을 팔아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있다면…
마가복음 12:41-44절에 나오는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한 과부의 동전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시더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라고 하십니다. 이 여자의 두 동전이 지금까지 넣은 모든 고액 헌금자보다도 많이 넣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0:1-16절에 나오는 이야기는 포도원 품꾼의 비유입니다. 품꾼 중에는 해뜰 무렵부터 일한 사람도 있고 오전에 들어온 사람, 점심때쯤 온 사람도 있습니다. 오후 늦게 온 사람도 있고 마지막으로 일을 마치기 전 1시간 전에 들어온 사람도 있습니다. 아침부터 꼬박 일한 사람도 한 시간 전에 들어온 사람에게도 똑같은 대우를 해 주셨습니다. 주인의 처사는 공정하고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를 잔혹한 경제학이라고도 합니다.

지금까지의 예수님의 비유들을 경제학으로 보면 전혀 말이 안됩니다. 이 비유들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은혜입니다. 은혜란 산수가 아닙니다. 경제학처럼 따져서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은혜란 하나님의 선물로 받는 것이지 노력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계산으로 주어진다면 모세를 통해서도 가능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계산을 제일 잘한다고 볼 수 있는 세 사람이 있습니다. 첫 번째 인물은 모두가 공감하고 공식적인 세리였던 마태입니다. 두 번 째 인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뽑아 회개를 맡긴 가룟 유다입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를 단순무지한 사람으로 오해하기 쉬운데 성경을 잘 보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요 21: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 쉰 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고 했습니다. 하도 기쁨에 넘쳐서 세어볼 수 있겠구나 생각하지만 퍼뜩 거리는 고기를 센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또 마 18:21에 보면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 라고 합니다. 랍비들은 인간이 베풀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는 3번이라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즉각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 18:22-35절의 배은망덕한 한 종의 비유를 하십니다. 자신은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았지만 마 18:28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고 합니다. 복음의 계산법은 경제학적인 계산법이 아닙니다. 만일 그렇게 하여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모세로서 마쳤을 것입니다. 복음의 계산법은 비 경제적입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베드로는 나중에 예수님의 은혜에 대해서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이가 잠깐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벧전 5:10) 복음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우리는 은혜라는 말로 대답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은혜입니다. 은혜 없는 복음은 없습니다.

제가 예전에 오사카에 몇 번 갔던 적이 있습니다. 교회 강사로 가서 식사를 일본 식당에 좋은 식당에 대접을 받으러 가보면 그렇게 손님을 즐겁게 하는 민족은 일본사람밖에 없어요. 참 즐겁게 해줘요. 웃으면서 손 요렇게 하나 말아서 주고, 말도 ‘아리가또 고자이마쓰’ 얼마나 친절하고 즐거워요. 오사카 공항에서 비행기 출발할 때 제가 한번 끝까지 쳐다 보았습니다. 그런데요 비행기 안보일 때까지 어리를 굽히고 있더라구요. 공항버스 타고 아마가사끼 역에 갔는데요 거기서도 공항버스 짐 내려주는 분이요 버스 도착하니까 고개를 90도 각도로 굽혀 절하더라구요.
손님을 즐겁게 해주는 거예요. 그러나 그 사람이 즐거우냐? 즐거운 건 아니 것 같아요. 직업의식으로 그렇게 하는 거 같아요. 자기는 안 좋으면서 돈벌기 위해서 손님에게 그렇게 해주는 거예요. 성도는 직업교인이 되면 안돼요. 찬양을 잘 부를 수는 있어요. 그러나 그 마음에 즐거움이 없는 찬양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는 거예요. 즐거워서 불러야 돼요. 즐거워서. 좋아서 불러야 돼요. 우리는 어떤 독재정권 아래서도 찬양하고 잘할 수 있죠. 우리는 그런 찬양이 아니예요. 내가 즐거워서 부르는 거예요. 즐거워서 기도하고 즐거워서 섬기고 즐거워서 찬양하고 즐거워서 예배드리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기뻐서 교회를 섬기는 거예요. 며느리가 밥상 하나 가득 가지고 와도 괴로운 마음으로 가지고 오고 얼굴이 무거워 가지고 속으로 ‘오래도 산다’ 그러고 가져오는 거 하고 손자손녀가 그냥 대접은 안 해도 그저 할아버지 그러고 웃으며 즐거워하는 거 하고 다른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무엇을 모르겠습니까? 우리의 마음을 받으시기를 좋아하십니다.

바울은 고백합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이제 내가 사는 것은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예전에 뉴질랜드 섬에 30마리의 고래가 와서 자살을 했습니다. 오늘날까지 이것을 연구를 많이 했습니다. ‘고래가 왜 죽었는가?’ 왜 이렇게 큰, 수 십 톤 되는 고래가 자살을 하느냐? 그런데 밝혀진 연구 중 하나는요, 고래의 리더가 살기 싫어서, 정신이 옳지 않아서 육지로 올라와서 죽으면 다 따라서 그렇게 한다는 겁니다. 여러분, 한 사람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우상숭배 하는 사람이 있으면 다 나쁜 길로 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누구를 벤치마킹하느냐가 참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방법에 있어서 유대교와 이슬람은 우리와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방법에 있어서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그 예수님을 제일 모범적으로 따라 살았던 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바울입니다. 제가 유대인이 쓴 책을 읽어본 일이 있습니다. 거기서 유대인들은 바울에게 아까운 사람이라는 표현을 합니다. 유대교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제일 모범적으로 따랐던 사람입니다. 오늘도 그가 전해주는 말씀을 통해서 은혜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바울은 자기 자신의 삶이 그리스도와 함께 할 때만이 의미가 있음을 말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가 되어야 합니다.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지 그리스도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먼저 영광을 생각하기보다는 고난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말합니다.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우리가 말한다면 예수의 십자가와 함께 하는 사람들 만에게만 불려질 수 있는 이름입니다. 십자가 버린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할 수 없습니다.
갈라디아서는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바울이 증거 하는 것은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갈 1:4)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라는 말에서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를 건지셨는데 예수는 십자가에 죽으셨는데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라고 말합니다. 십자가를 져야 하지만 그리스도와 함께이기 때문에 걱정이 없습니다. 왜냐 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하면 그분이 나를 도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하시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 사신 것이라.

오늘 본문 원문에 보면 세 단어가 함께 사용되고 있습니다. 살다(zw:자오)라는 말이 ‘산 것이라(zh)’를 포함하여 4번나옵니다. 그런데 ‘자오’(살다)가 나오고 나서 반드시 따라붙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 말은 접속사인데요 그냥 단순한 접속사가 아닙니다. ‘기본 불변사’ 입니다. 그 단어는 “de;:데”입니다. 우리 한글성경이 재미있게 번역했습니다. ‘데’는 “그리고, 그런즉, 또한” 등으로 번역할 수 있는데요 이 단어가 계속 나오니까 “오직” 이라는 말로 번역했습니다. 그냥 단순히 “그런즉, 또” 이렇게만 번역하려고 하니까요 너무 밋밋한 것입니다. 그래서 원래는 “오직” 이라는 말은 ‘알라’ 에 사용되는데 여기서는 문법과 연속적으로 나타나는 기본 불변사인 ‘데’를 “오직”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따라다니는데요 그 단어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ejn:엔” 이 뜻은 “…안에” 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세 단어를 합해봅시다. “조이:살다, 데:그러므로(반드시), 엔:…안에서”
본문은 우리가 어디서 살 수 있는지 세 가지를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십자가 안에서입니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 10:38) 여기에 사용된 “a[xio”:악시오스”는 “칭찬을 받을 만한. …비길 수 없는” 이라는 뜻입니다. 십자가를 버린 사람들이 칭찬을 받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버리고는 우리가 살 수 없습니다.

둘째는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여기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난주간에 부산에 내려가 부산대학병원 응급실에 24시간 있었습니다. 한 의사가 얼마나 피곤한지 야간 조에 들어왔는데 환자에게 한마디하고 가서 책상 앞에 엎드려 자고, 또 한마디하고 가서 자고 그러더라구요. 아마 투 잡을 뛰는 지 모르겠습니다. 경미하게 다친 교통 환자가 들어와서 링거루 주사 놓고 여러 조치를 했는데 자꾸만 환자가 벌떡 벌떡 일어나는 겁니다. 의사가 가서 “안됩니더, 이러시면 안됩니더” 그러더니 가서 또 자더라구요. 또 환자가 실려왔습니다. “복어를 잘못 먹어서 위독하여 실려왔습니다.” 처음에 의사들이 쫓아가서 산소호흡기 달고 난리를 떨었습니다. 나중에 깨어났는데 그 졸던 의사가 가서 “왜 먹었습니꺼? 복은 자격증 있는 사람이 요리해야 되는거 모릅니꺼?” 그러더니 또 가서 자더라구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하라고 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왜 우리가 공부하고 알아야 됩니까? 무엇을 하지 말라고 하셨는지 무엇을 하려고 하셨는지를 알고 순종하려고 배우는 것입니다.

셋째는 믿음 안에서입니다.
믿음은 모든 기초를 놓습니다. 믿음 위에서 세워지지 않는 모든 것은 비바람이 불면 허물어지고 맙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 것은 좋을 때만을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렵고 힘들 때를 위하여 더욱 주님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주님을 믿는 마음을 가지고 우리 서를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목사인 저를 믿어주셔야 합니다. 우리가 돕고 있는 선교사를 믿어야 합니다. 나와 함께 사는 남편, 아내를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예수님이 오셔서 알려주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떠나도 부모는 자식을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저희 누님이 시골교회를 다니는데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그 시골교회 목사님이 저를 보시더니 “제가 부족해서 이런 일이 생겼습니다. 제가 기도하지 못해서 이런 일이 생겼습니다.” 그러시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이요 여러분들의 영적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믿어야 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만 우리의 슬픔이 기쁨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미국에 유명한 기업에 회장 잭 웰치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오늘날 세계적인 기업의 회장이 된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자기를 믿어 주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믿어주지 않을 때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나는 너를 믿는다, 네가 하는 일이 잘 될 거다.”라고 했습니다. 이런 그의 어머니의 말에 용기를 얻어서 오늘의 세계적인 기업가가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어머니들은 어떻게 자녀들을 대할까요? 혹시 여러분 가운데 자녀들을 이와는 반대로 양육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야 이놈아 내가 속을 줄 아냐? 턱도 없어, 내가 너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있어 …”
사랑하는 여러분, 보모가 아이를 믿어주기만 해도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바울은 남은 자신의 삶의 존재에 대해서 말합니다. 이것은 세 가지 변화가 자신에게 나타났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나’ 대신에 ‘그리스도’입니다. 나는 이런 일을 하면 기쁘지만 그리스도는 기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런 일을 하고 싶지만 그리스도는 기뻐하실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을 그리스도와 함께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미국 사람들 보십시오. 돈, 달러에다가 삼백년 전에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 라고 찍었습니다. 그 때에 미국은 아직 존재하지도 않을 때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나라이었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도장을 찍었습니다. 1센트에서 100불까지 모든 돈에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믿음의 돈을 가지고 살겠다. 믿음의 돈이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둘째는 ‘율법’ 대신에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야고보서에 나온 행위하고 율법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율법주의’라는 것은 율법으로 의롭게 될 수 있다,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로 의로워지고 구원을 받기 때문이 아닙니다. 구약에서도 믿음으로 행동하는 것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믿고 여리고 성을 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출애굽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요단강에 발을 디디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나타나는 행위입니다. 믿음에는 반드시 행위가 동반하게 되어 있습니다.

셋째는 ‘과거의 옛 사람’ 대신에 ‘새 사람’으로 변화한 것입니다. 예수 믿고 변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옛날 육체 가운데서 나의 이익을 위하여 살던 사람이 아닙니다. 내 육체의 이익을 위해서 주님을 이용하려고 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나는 부족하여도 영접하실 터이니 영광나라 계신 임금 우리 구주 예수라”(545장) 우리가 옛 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은 세상 죄 가운데 있던, 내 방법대로 살아가던 것을 주님의 인도함에 완전히 순종하여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소중한 것일수록 함부로 하지 않잖아요. 꼭꼭 숨기던지 잘 보관하지요. 제일 소중한 것은 나의 영혼이 아닙니까? 주님께 맡깁시다. 십자가 앞에서 평안함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미국의 대통령 가운데 아이젠하워라는 대통령이 있습니다. 그분은 어려서 너무 가난했습니다. 아이젠하워 어머니는 너무너무 가난하고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외할아버지 댁에서 살았습니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얼마나 믿음이 좋은지, 자기 외손녀를 데려다가 학교는 보내지 않고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에 보냈습니다. 주일학교를 다니게 해서 성경을 늘 가르쳐주고 외우게 했습니다. 여러분! 지내놓고 보면 교회에서 배운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내 것이고, 학교에서 배운 것은 잠깐은 유익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 생명과 내 진리와 내 능력은 될 수 없습니다. 학교 공부도 열심히 해야 되지만 우리는 교회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어려서부터 그것을 축복으로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 어머니는 처녀 때에 외할아버지 댁에서 성경을 많이 외웠습니다. 외운 성경만 600절 이상입니다. 단어도 600개를 외우려면 쉽지 않은데 그렇게 성경을 많이 외워서 하나님 말씀으로 훈련을 받고, 결혼해서 아이젠하워를 낳았는데 이 아들에게 또 신앙교육을 잘 시켰습니다.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 말씀을 잘 지켰습니다. 아이젠하워는 어려서 가난하니까 사관학교를 들어가서 등록금을 내지 않고 공부를 했습니다. 1차 대전이 일어났을 때 소위가 됐습니다. 군에 가서 소위가 되어도 얼마나 믿음이 좋은지 전차 안에, 탱크 안에 아이들을 주일이면 꼭 데려다가 성경을 가르치고 하나님을 말씀을 지킨 겁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항상 하나님이 동행해 주십니다. 이분은 2차 대전 때에는 이미 세계의 모든 연합군의 책임자가 되어서 전 세계 연합군 사령관이 되었습니다. 늘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여러분! 믿을 것이 없는 사람은 믿음이 빨리 자라납니다. 이 사람은 믿을 거리가 없으니까, 하나님만 믿으니까 그의 믿음은 하루가 다르게 자라납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한 분도 아이젠하워입니다. 2차 대전을 이끌어 승리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이것은 누구나 할 것이 없이 아이젠하워이고 그때 대통령은 루즈벨트입니다. 이분은 한국전쟁도 휴전을 이끈, 이 전쟁이 오래 갈 터인데 이것을 끝낸 분도 아이젠하워입니다. 신앙의 사람, 믿음의 사람입니다. 아이젠하워는 성경 한 구절을 늘 품고 있었습니다. 날마다 외우는 성경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스가랴 4장 6절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 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힘으로도, 능으로도, 권력으로도 못살고, 이 세상의 어떤 군사적인 힘으로도 승리할 수 없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 있으면 이 세상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스가랴 4장 6절이 여러분의 요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1959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소련의 흐르시초프를 초청했습니다. 9월 27일, 그 날은 주일이었습니다. 흐르시초프에게 교회에 가자고 간절히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교회가, 하나님이 원수이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것 이것이 첫째인데, 하나님을 믿는 것 이것을 물리쳐야 되니, 교회에 가자 그러니까 갈 리가 있겠습니다. 안 갔습니다. “오늘은 주일이니까 나와 함께 교회에 갑시다.” 한마디로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아이젠하워는 말했습니다. “제가 교회에 다녀올 때 까지, 예배드릴 때까지 한 시간 반만 기다려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흐르시초프를 만났습니다. “한 시간 반 동안 무엇을 했습니까?”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때 흐르시초프가 대답했습니다. “내가 한 시간 반 동안 생각을 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나를 이렇게 먼 길에 초청을 해 놓고 나를 떠나서 아이젠하워가 교회에 갔다 와서 내게 무슨 핑계를 댈까?” 이것을 생각했다는 겁니다. “나를 데려다 놓고 교회에 간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때에 아이젠하워가 말했습니다. “예배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흐르시초프를 제가 초청해서 귀하지만 예배보다 귀할 수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 사람,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예배가 정말 제일 귀한 줄로 믿습니다.
 

헛되이 살지 말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7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구원을 입어 영원한 구원을 얻으리니 영세에 부끄러움을 당하거나 욕을 받지 아니하리로다 18 여호와는 하늘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땅도 조성하시고 견고케하시되 헛되이 창조치 아니하시고 사람으로 거하게 지으신 자시니라 그 말씀에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19 나는 흑암한 곳에서 은밀히 말하지 아니하였으며 야곱 자손에게 너희가 나를 헛되이 찾으라 이르지 아니하였노라 나 여호와는 의를 말하고 정직을 고하느니라”(사 45:17-19)

꽃을 보면 아름다움을 배우고, 돌을 보면 무거움을 배우고, 아이를 보면 사랑을 배우고,
어른을 보면 존경을 배워야 합니다. 그것이 참다운 배움의 방법입니다. 높은 산을 보고 한 사람은 기상을 배웁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산이 가로 막혀 있다고 불평하며 살아갑니다. 같은 조건이지만 자기의 사고방식에 따라서 인생은 달라집니다.
눈을 크게 뜨고, 또 마음을 열면 모든 것이 다 경이로운 배움의 대상입니다. 풀 한 포기, 물 한 방울, 한 마디 말에도 크고 귀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은 인생을 헛되이 살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많이 배우고도 인생을 헛되게 산다면 그것은 분명 헛배운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솔로몬 시대 보다 평안을 누렸던 시대는 없는 것 같습니다. 솔로몬의 전성기는 아테네보다도 더 훌륭하게 ‘세계의 눈’ 이라는 칭호를 받을 수 있을 정도로 부족한 것이 없었고 예루살렘에서 왕좌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 입에서 나오는 판결은 하나님의 판결과 같다고 인정을 하였습니다. 그의 재산과 존귀는 그의 조정을 학문의 중심지와 박학다식한 석학들의 집합처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마음대로 서적을 구입하여 지식의 보고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니 솔로몬은 더욱 성장하고 발전해서 추종을 불허하는 높은 경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전 1:13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핀즉” 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왕의 신분에 있으면서도 계속 연구하고 공부해서 인간으로써 필요한 모든 지식과 기술, 지혜를 습득하려고 노력한 것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만을 위해 힘쓴 것이 아니라 사회와 민족을 위해 기여해 보려는 안타까운 마음에서 힘을 썼고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16절에는 그 자신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큰 지혜를 많이 얻었으므로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자보다 낫다” 고 하였습니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명예와 지위에서뿐만 아니라 지혜와 유용한 지식에 있어서도 타인들을 능가하려는 탐구와 노력은 그 나라 국민에게 얼마나 유익한 일인지 말로 다할 수가 없습니다.
솔로몬의 마음은 지혜와 지식을 크게 경험하였습니다. 그는 지혜의 법칙과 지령을 알고자 해서 그의 마음을 기울여 어떻게 하면 지혜를 획득할 수 있을까 하여 마음을 썼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떤 경우에도 배우는 열린 마음의 소유자였습니다. 부지런하여 좋은 소출을 내는 밭에서만 배운 것이 아니라, 게을러서 열매맺지 못하고 잡초가 우거지 밭에서도 배웠습니다. 힘쓰면, 마음만 가지면 어디서나 무슨 일에나 배울 것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저는 배움의 기회를 잃어버린 사람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저는 박사 학위 같은 것 없습니다. 그러나 저의 책이 뉴욕 도서관에도 가 있고 우리나라 국회 도서관에도 있습니다. 제가 인터넷에 글을 쓰면 여기 저기서 퍼다가 사용합니다. 아마 인터넷에서 목사가 만든 정보로는 제것이 제일 많지 않나 생각합니다. 제가 많은 지식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한번 해 보는 것입니다. 선교를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족한 저도 하려고 하는데 여러분 책 좀 보시고, 글 좀 쓰세요.

요즘 새벽기도 때에 욥기 서를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욥을 아는 상식은 그는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인이었고 하나님이 사탄 앞에서 욥을 자랑했다가 사탄이 말하기를 “그가 축복을 받아 평안하게 사니까 하나님을 따르는 것 아니겠냐” 고 해서 하나님은 사탄에게 욥을 시험할 것을 허락합니다. 그래서 욥은 목숨이 끊어지지 않을 정도로 괴로움을 당합니다. 그리고 욥의 친구들의 조롱에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믿어 나중에 더 큰 축복을 받습니다. 모두가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욥의 전부가 아닙니다. 욥은 당시에 대단한 지혜 자요 선생이었습니다. 욥의 시기는 아브라함의 이전 시대 인물이거나 족장시대 인물입니다. 아주 오래 전의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가 깨달은 것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아마 우주에 대해서 아인슈타인 보다 스티븐 호킹 박사보다 더 많이 알고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전 사람들은 우주를 평평하다고 생각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욥기 서를 보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욥 26:7 “그는 북편 하늘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공간에 다시며” 라고 했습니다. 우주가 이미 허공에 떠 있다는 고대의 사람 욥이 이 사실을 안 것입니다. 욥은 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욥 23:12) 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욥의 말을 들었을 때 그의 말에 할 말을 잊었습니다. 그의 지혜와 지식에 감복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의 말을 들을 때 아침이슬처럼 가뭄에 비 내리는 듯이 그의 말을 기다렸습니다(욥 29:22-23) 한마디로 설교의 대가입니다. 또한 욥은 자신의 지식을 가난한 자를 위하여 억울하게 된 자를 위하여 사용했습니다(욥 29:15-17).
욥은 아는 지식을 자신의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 사용한 것이 아닙니다. 욥기서를 잘 보면 오늘날 NGO선교나 비즈니스 선교의 아버지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창 17:9)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출 19:5)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무관하게 된 지식과 지혜는 헛될 뿐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전 1:2-2 “2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3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라고 했습니다. 솔로몬의 이 말은 자기 자신의 상태를 말해 줍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를 위하여 사용될 때는 그것이 비록 하찮게 보여도 모두가 값지고 소중한 것입니다. 저 컴퓨터 조금 하는 것 가지고 일하잖아요. 목사님들 중에는 제가 컴퓨터 제일 잘하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는 분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드려질 때는 과부의 두 동전이 제일 값진 것이 됩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덩이가 소중한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으로만 되는 것 아니지만 열심히 노력해야 되요. 열심히 살아야 되요. 모든 배우려고 하세요. 그리고 뭐든 주를 위해 사용해 보려고 해 보세요.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헛되이 창조하시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소중하게 생각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창조하셨습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헛되지 않은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주소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주안에서 수고하는 것은 헛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앞날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모르지만 헛되게 살지 맙시다. 주안에서 살아 보람 있게 삽시다.

하나님을 모르고 살면 헛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 권력 다 소용없습니다. 물질도 마찬가지입니다. 건강이요. 언제까지 건강합니다. 사는 날 까지 건강하기를 바라지만 결국 육신은 무너집니다. 그래서 세상 것은 모두가 헛된 것입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 5:16)

사람은 평생 일을 합니다. 그러나 그 많은 일들이 사람에게는 칭찬을 받아도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일이라면 그 일은 헛된 일입니다. 바울도 처음에는 하나님을 위한다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 일은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가고 죽게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무지한 일인가를 나중에야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는 정반대로 전혀 헛되지 않고 오히려 칭찬 받는 일을 했습니다. 다시 예수를 위하여 죽도록 일한 것입니다.

여러분!
사업에 실패 할 수 있습니다.
건강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인간관계 실패 할 수 있습니다.
학교 낙방 할 수 있습니다.
취업시험 실패 할 수 있습니다.
이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두, 세 가지가 겹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인생이 실패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생은 실패할 수도 없고 실패하게 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사업의 실패를 통해서만 배우는 인생이 있습니다. 건강을 잃어버렸을 때만 만나는 삶이 있습니다. 인간관계의 실패, 학교의 낙방, 이혼을 통해서만 배우고 만나는 삶과 인생이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 히브리어의 지혜나 지식이라는 단어는 ‘아다’을 사용합니다. ‘아다’는 경험으로 알게된 지식을 말합니다.

미국의 아이오아주의 수 카운티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프랑크 반다마틴이라는 소년 바이올리니스트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18세 때 불행한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아버지의 대장간에서 시뻘겋게 단 쇠가 손위에 떨어져 오른손가락이 잘려나가고 엄지손가락 하나만 남았습니다.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꿈이 완전히 깨어진 것입니다. 오른손이 없으니 어떻게 합니까? 그러나 그에게는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손을 바꾸어 바이올린을 켜리라는 결심을 하고 모험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는 손을 바꾸어 바이올린을 남보다 몇 배를 연습하였습니다. 매우 어려웠으나 마침내 성공하여 수 카운티의 교향악단의 탁월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었습니다. 결국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는 것을 믿고 하면 됩니다.

주를 믿는 인생은 실패하는 법은 없습니다. 욥은 말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

본문 19절 “나는 흑암한 곳에서 은밀히 말하지 아니하였으며 야곱 자손에게 너희가 나를 헛되이 찾으라 이르지 아니하였노라” 하나님의 말씀은 무슨 흉계를 꾸미는 사람처럼 어두 캄캄한데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광명한 데서 부족함이 없도록 모든 사람이 듣도록 공개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 20:7) “망령되이” 라는 말은 하나님의 이름을 훼손한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헛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교만한 자기 기만 속에 빠질 때 헛것이 됩니다(약 1:26)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고전 3:20) 하셨는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 인간의 지혜를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질 때는 그것이 이 세상에서 제일 가치 있는 것으로 바뀌지만 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것이라도 하나님께 바쳐지지 않으면 헛된 것에 불과한 것이 됩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얼마나 똑똑하냐 얼마나 가졌느냐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하나님께 드려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눈이 귀하다는 것을 알고 두 눈 중에 한쪽 눈을 잘 간직했다가 한쪽 눈이 나빠지면 나중에 쓰리라고 생각하고 눈이 다칠세라 한쪽 눈을 늘 싸매 두었습니다. 여러 해 지나 한쪽 눈이 병이 나서 나머지 눈을 쓸려고 싸매 두었던 눈을 풀어보니 불행하게도 실명하고 난 뒤였습니다. 결국 사용하지 않는 것은 없어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의 신앙을 묻어두지 말고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가진 것을 잘 사용하는 방법 그 비결을 배워서 산을 옮기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히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라고 했습니다. 믿음으로입니다. 내가 믿음으로 하나님께 드려질 때 우리는 “귀하고 귀하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축복의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