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서 함께 가자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0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11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12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13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을 피워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아가 10:10-13)

닭고기는 유대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육류입니다. ‘어머니’ 하면 닭고기 스프를 연상할 정도로 유대인에게 있어서 닭고기는 중요합니다. 갈렙은 양계장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번창일로 였습니다. 사업가로 상당히 성공한 그는 행실이 좋지 않았으나 금요일마다 교회에 나와 버젓이 경건한 유대교인으로 행세를 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랍비가 물었습니다. “갈렙씨, 요즘 당신에 대한 불미스러운 소문이 나돌고 있어서 몹시 걱정입니다. 그러나 갈렙은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습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랍비 선생님도 아시다 시피 전 금요일엔 반드시 교회에 나오고. 하루도 빠짐없이 성경을 읽고 있는데요.” 그러자 랍비는 “갈렙씨, 당신은 매일같이 당신의 양계장에 나가죠? 하지만 매일 닭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탈무드) 그랬습니다. 교회에 나오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일입니다.

한국교회 목회자 252명에게 “교회 내부의 가장 큰 문제점” 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질문에 대한 대답은 ‘삶의 변화 없는 은혜만 추구함’ 이 11.6% 가장 많았으며 그 다음이 ‘믿음과 실천의 불균형’ 을 11.0%로 뽑았습니다. 두 가지는 같은 의미입니다. 그리고 10.8%가 ‘목회자 윤리 부재’, 10%가 ‘개교회 주의’ 순위로 나타났습니다.

“孟子曰 順天者(맹자왈 순천자)는 存(존)하고 逆天者(역천자)는 亡(망)하니라.”
맹자가 말하기를 “하늘의 명(命)에 따르는 자는 살고, 하늘의 명을 거역하는 자는 망하게 된다.” 는 뜻입니다.
맹자는 성경에서 말하는 여호와 하나님을 정확하게 알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적어도 우상에게 절하거나 조상신에게 빌어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맹자가 말했던 “하늘의 뜻” 이란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뜻임을 확신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면 살고,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면 죽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성경이 증거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버리면 죽습니다.
시 37:20 “악인들은 멸망하고 여호와의 원수들은 어린 양의 기름 같이 타서 연기가 되어 없어지리로다”, 사 1:28 “그러나 패역한 자와 죄인은 함께 패망하고 여호와를 버린 자도 멸망할 것이라” 고 했습니다. 악인이 한 때 좋아보이고 잘 나가는 것 같아도 결국은 패망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이 거두시기 때문입니다.
롬 2:12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율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법입니다. 율법을 잘못 이해하고 지킨 사람이 문제가 되는 것이지 율법 자체를 무시하면 안됩니다. “율법 없이” 란 말은 하나님의 법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자는 다 망하게 됩니다.
야고보 장로님은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약 2:12) 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면 삽니다.
신 8:1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고 하셨습니다.
에스겔 18:28 “그가 스스로 헤아리고 그 행한 모든 죄악에서 돌이켜 떠났으니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아가서의 표현들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엄중한 말씀으로만 우리를 “살고, 망한다” 는 식의 표현으로만 고 우리를 이끄시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은 구약성경인데요 그 말씀이 시편을 능가하는 아름다움과 부드러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저는 이 아름다운 말씀을 대하면서 저의 딱딱한 면 때문에 하나님의 온유하신 말씀이, 하나님의 부드러운 음성을 제가 가로막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가서는 남녀간의 사랑의 표현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전달해준 책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신랑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신부인 여자는 우리들입니다.

신랑의 모습
신랑, 하나님의 모습이 아가서 1장에 나옵니다. 5절에 “예루살렘의 딸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라고 하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우리를 데려가시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의 모습니다. 그의 모습은 이사야의 예언대로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 53:2)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아 1:6 “햇볕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흩겨보지 말 것은” 이라고 합니다. 그분은 열심히 일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얼굴을 햇볕에 쬐여 거무스름합니다. 그러나 이상하게 보면 안됩니다. 그분의 그런 얼굴 모습은 나를 위해 그렇게 되신 것입니다. 우리 부모님의 주름살은 나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그것을 부끄러워하는 자식은 자식이 아닙니다. 저희 아버님은 다리를 저셨습니다. 절뚝거리며 강원도를 오가며 보따리 장사를 하셔서 저를 키우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모님 부끄럽지 않게 잘 살아야 됩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세상 사람에게는 그 십자가는 부끄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닙니다.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전 1:23) 라고 했으며 고전 1:18에서는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검게탄 주님의 얼굴을 사랑합니다. 그의 육체적 모습은 흠모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합니다.

우리를 부르심
이분이 우리를 부르시는 음성을 들어보세요. 아가서 1장에는
7절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야”, 9절 “내 사랑아” 13, 14, 15절에 “나의 사랑하는” 이라고 부르십니다.
오늘 본문 10절, 13절에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라고 불러 주십니다. 십자가를 지시면서 사랑해 주셨던 분의 음성이 분명합니다. 주님의 이 음성을 듣는 사람은 살아납니다. 요 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예수 믿던 사람들을 핍박하고 잡아 예루살렘에 넘겼습니다. 그러나 그도 다메섹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회개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야,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얼굴이 검게 타시고, 제대로 쉴 곳이 없어 나그네처럼 다니시고, 머리 둘 것이 없이 이 땅에 잠시 오셨던 주님, 그분이 왜 그런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셨을까요?
네. 우리를 당신이 계신 곳으로 데려가시기 위함입니다.
요 14: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간곡히 요청하십니다. “일어나서 함께 가자” 일어나십시오. 주님과 함께 갑시다. 성전을 지을 때 하나님이 야킨(우:그가 세우신다), 보아즈(좌:그가 지키신다) 두 기둥 꼭대기에 쇠사슬에 석류 100개를 매달아 달았습니다(대하 3:16). 우리를 세우시고 지켜주시는 주님께서 쇠사슬로 주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지 않게 온전히 붙들어 메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은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버리시고 오셨습니다. 라오스에서 선교하는 선교사님이 그곳 장관들을 모시고 경비를 들여서 한국에 오셨습니다. 한국에 처음 온 그분들은 라오스에서 선교하는 것을 방해하고 한국 선교사님들을 오해하다가 한국에 와서 보고는 이런 잘 사는 나라에서 라오스에 와서 고생한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고 했습니다.

“11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12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13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을 피워 향기를 토하는구나”

태양의 위치를 기준으로 한 해를 스물넷으로 나눈 것으로 24절기(二十四節氣)가 있습니다. 한 달에 두 개의 절기가 들어있습니다. 그 중에서 제일 처음에 시작하는 절기가 입춘(立春 2월 4일나 5일)입니다. 입춘 다음에 우수, 경칩, 춘분 … 동지, 소한, 대한입니다. 그런데 이 절기 중에서 제가 중학교 때 새벽에 신문 돌렸는데요 한자로 입춘대길(立春大吉)을 써 놓은 대문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절기는 별로 신경 안 씁니다. 계절 중에 봄이 오는 것은 어둡던 죽음의 땅속에서 기지개 펴듯이 생명이 싹트는 계절이 오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하나님의 집에는 겨울이 가고, 십자가의 사건은 끝이 나고,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나라에는 꽃과 각종 열매가 가득합니다. 꽃은 아름답게 피어 있습니다. 다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가기만 하면 됩니다.

“함께 가자”는 주님의 부름에 기뻐 뛰어 나오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희 누님이 어려운 일을 당해서 병원에 누워 있습니다. 아직 약간 기억이 안 나는 것이 있나봅니다. 사람마다 저에게 누님 정신나라고, 기억을 뒤 찾으라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제 생각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기억하지 않아도 될 것은 기억나게 하지 말게 하여주시고 기억해도 좋은 것만 기억나게 해 주세요. 그리고 하나님께 맡깁니다. 그렇게 기도합니다.
우리의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 보다 더 큰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최고의 영광, 축복, 기쁨, 행복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것,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셔서 그 안에 살아가는 것 보다 더 영광스러움은 없습니다.
그 이상은 없습니다. 모두 다 그 아래 입니다. 예수 믿는 거 이상의 성공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성공을 해서 축복을 받았다고 할 찌라도 하나님을 믿는 축복 같은 이 복을 이 세상에서는 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 안에서 보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시시합니다. 사도 바울은 배설물 같다고 했습니다. 대단한 거 아무것도 없습니다. 누가 나에게 잘해줘도 좋고, 못해줘도 좋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오늘도 “나의 사랑하는 자야” 라고 불러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너희 일까보냐?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마 6:30)

남귤북지(南橘北枳)란 말이 있습니다. 강남에 심은 귤을, 강복에 심으면 탱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춘추시대 말기, 초나라 영왕이 제나라의 유명한 재상 안영을 초청한 자리에서, 제나라에는 그렇게도 사람이 없소? 당신같이 키가 작은 사람을 사신으로 보냈으니 말이오. 라고 비웃자, 안영이 말하기를 저희 나라에선 사신을 보낼 때 그 나라에 맞게 사람을 골라 보내는 관례가 있지요. 작은 나라에는 작은 사람을, 큰 나라에는 큰 사람을 보내는데 신은 그 중에서 가장 작은 키에 속하므로 초나라에 오게 된 것입니다. 안영의 능수능란한 말솜씨에 기세가 꺽인 영왕은 은근히 부화가 끌어올랐는데, 마침 그 앞으로 포리가 제나라 사람인 죄인을 끌고 가자 영왕은 안영에게 들으라고 큰소리로 죄인의 죄명을 밝힌 다음, 제나라 사람은 원래 도둑질을 잘하는 모양이지요. 하며 모욕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안영은 강남에 심은 귤을 강북에 심으면 탱자가 되듯이 제나라 사람이 제나라에 있었을 때는 본래 도둑질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라다가 초나라에 와서 도둑질을 한 것을 보면 초나라의 풍토는 엉망인 모양이죠?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주앙교회에 나오면 새 사람이 될 줄 믿습니다. 세상 밖에 모르고 살 땐 엉망으로 살던 사람이 예수 안에 살면 참된 사람이 될 줄 믿습니다. 미국 교회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교회는 12시부터 깨어난다” 이 말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여러분! 저는 여러분의 잠을 잠시 깨워 드려야겠습니다. 우리는 11시부터 깨어납시다.
어제 영국에 사는 선교사님의 편지를 미션매거진에 소개했습니다. 그 내용에 보면 전도를 해 보면 가장 전도하기 어려운 사람들은 유대인도 아니고 무슬림도 아니고 영국 사람들인 것 같다고 합니다. 들으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아는 척하고 오히려 가르치려 하는 이들은, 마치 기독교를 더 이상 호소력을 가지지 못하는 유행이 지난 종교로만 생각하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종교적 교만이 제일 무서운 것입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 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명심보감 경행록에 나오는 말입니다.
“景行錄 曰(경행록 왈:경행록에 말하기를) 恩義 廣施(은의 광시:은의를 널리 베풀라) 人生河處不相逢(인생하처불상봉:사람이 살다보면 어느 곳에서 만날지 모른다) 讐怨 莫結 路逢狹處면 難回避(수원 막결 노봉협처 난회피:원수를 맺지 말라 좁은 길에서 만나면 회피하기 어렵다)”
‘은혜와 의(義)를 널리 많이 베풀면 언제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해서 그 사람의 도움을 받게 될지 모른다. 반면 한번 원수가 되면 언젠가 피할 수 없는 곳에서 만나게 된다.’ 는 뜻입니다.

조선 선조(宣祖) 때 홍순언(洪純彦)이란 중국어를 잘하는 통역관이 있었습니다. 그가 사신 일행을 따라 북경(北京)에 갔을 때 일입니다.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먹으려고 주막을 찾아 나섰는데 어느 술집 앞을 지나려다 이상한 글이 문에 씌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룻밤 술값이 일천냥임.” 이 값은 굉장히 비싼 금액입니다. 호기심이 일어 그 집으로 들어가 까닭을 물었더니, 그 집에서 술을 따르는 아가씨의 아버지 장례를 모시기 위해서 일천냥이 꼭 필요하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저의 아버님은 꽤 알려진 분이예요. 그런 아버님이 얼마 전 남의 모함을 받아서 그만 처형을 당하셨어요. 그런데 시신(屍身)을 고향으로 모실 비용이 없어서…” 홍순언은 그 아가씨의 사정이 너무 딱하여 차고 있던 돈 전대를 풀어주고 그 집을 나왔습니다. 아가씨가 뒤쫓아 나와 성함이라도 가르쳐 달라고 애원을 해 조선에서 온 홍역관이라고만 일러주었습니다. 귀국하여 공금을 축낸 죄로 홍순언은 옥살이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또 얼마의 세월이 흘러 임진왜란이 일어났습니다. 홍순언은 명(明)나라에 응원군을 청하러 가는 사신 일행을 따라 다시 북경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사신 일행이 북경 근처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성안에서 어떤 사람이 달려오더니 “조선 사신 일행 가운데 홍역관이 계시거든 저를 따라 오십시오.” 홍순언은 영문을 모른 채 그 사람을 따라갔습니다. 어느 으리으리한 집 대문으로 들어서니, 한 귀부인이 방으로 안내해 들어가 사뿐히 절을 올리는 것이 아닙니까? “저를 몰라보시겠습니까? 십여 년 전 한 주막집에서 생긴 일을 잊으셨는지요?” 홍순언도 그제 서야 문득 그 일이 떠올랐습니다. “그때 대인께서 주신 돈으로 아버님을 고향 땅에 장사하였고, 그 후 아버님의 죄도 모함임이 밝혀졌사옵니다. 지금은 석상서(石尙書)의 아내입지요.” 홍순언은 자신이 온 목적을 말했습니다. 석상서는 당시 명나라의 병부상서(兵部尙書)인 석숭(石崇)이었다. “염려하지 마셔요. 제가 힘은 없으나 대감께서도 항상 홍대인의 의리를 감탄하고 계셨으니, 잘 되리라고 생각되어요.” 이렇게 되어 석숭의 도움으로 명나라에서는 즉시 이여송(李如松) 등 많은 장수와 군사를 보내 우리나라를 구원하게 되었습니다. 홍순언이 북경을 떠나는 날, 그 부인은 손수 수놓아 짠 비단 몇 상자를 실려 보내왔는데, 거기에는 한 필 한 필마다 “보은(報恩)”이라는 무늬가 수 놓여 있었습니다. 홍순언은 명나라와의 외교(外交)를 잘한 공로로 통역관의 신분으로는 될 수 없는 광국공신(光國功臣)이 되고 당릉부원군(唐綾府院君)에 봉해 졌는데, 당릉이란 ‘중국의 비단’ 이란 뜻입니다.

세상 사람도 이와 같이 베풀 줄도 알고 은혜를 값을 줄을 압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보시겠습니까? 홍순언도 단순히 은혜를 바라고 한 일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선 우리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억하십니다. “하물며 너희 일까보냐?”
마 10: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우리의 한없는 가치를 인정해 주십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과 우리를 비교하십니다. 하루를 살아도, 보잘것없어 보이는 들풀도 하나님이 돌보고 계십니다. “하물며 너희 일까보냐?” 하십니다. 사탄은 우리를 멸하려 오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러 오셨습니다. 우리가 이 주앙교회에서 믿음 생활하려고 하면은요 모든 것이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시험에 들고 마음이 떠나기 시작하면은요 모든 것이 이상해 보이고 싫어집니다. 저에 대해서 자꾸만 좋아보입니다. 멋있어 보입니다. 그러면 정상입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싫어지게 하는 미움의 씨를 뿌리고 도망갑니다. 그래서 자꾸만 보기 싫어지고 미워집니다. 처음에는 시어머니만 싫다가 나중에는 ‘시’자 들어가는 것이 다 싫어집니다.

대한민국인
우리가 태어난 대한민국이요 좋은 나라입니다. 제가 그래도 여러 나라를 다녀 보았지만은이요 우리 대한민국만큼 좋은 나라도 없습니다. 우리 한국사람은 아니면 아니고, 기면 기입니다. 한마디로 차든지 뜨겁든지 한 민족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드는 민족입니다. 여러분! 보세요. 데모 도 한번 했다하면 실감나게 하잖아요? 국회에서 다른 당이 회의 못하도록 몇 일 밤을 세우면서 단 점거하고 농성하다가도 그건 그거고 다음날 태국에 골프 치러 가잖아요. 평소에는 FIFA 순위 40위권에(현 42위, 일본 35위) 머물던 나라가 발에 땀났다하면 월드컵 4강에도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대~한민국입니다.
평소에는 개고기든 뱀이든 다 먹어치우다가 미국 소 광우병 의심스러워 못 먹겠다고 700만이 뛰어나와 촛불 집회하는 나라 우리나라 대~한민국입니다.

독일 교회는 기독교인중 5%만 교회에 다니고 있습니다. 영국은 10년 전의 통계에서 기독교인 중에 10%만 교회에 다닙니다. 지금은 더 줄어들고 있는 추세입니다. 이러한 추세라면 최근의 한 연구 보고서(영국성서공회)를 통해 영국의 교회 출석자 수는 2050년 경에는 전국 통 털어 8만 8천 명 수준으로 급감할 것이라는 예상을 내 놓았습니다. 이는 사실상 영국 교회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발표가 나오자 영국 교회는 물론 영국 사회 전체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고든 총리는 “아직도 영국인들의 믿음은 살아 있다.”며 이러한 예상보고서를 애써 불신하려는 듯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한국에 처음 복음을 전달해 준 토마스 선교사를 파송한 영국 웨일즈에 있는 교회를 방문 했었습니니다. 그런데 이 교회가 어렵게 되어 내 놓았다는 소식을 들었었는데 얼마 전 팔렸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미국도 다르지 않습니다. 기독교인들 가운데 20%만 교회에 출석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복음을 전달해준 장로교회가 매년 4만 명씩 감소하고 있답니다. 한국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를 파송 했던 교회가 거의 문을 닫을 지경에 이르자 지금 새문안 교회에서 재정적인 지원을 하여 버티고 있습니다.
일본은 기독교가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도 못했던 나라인데(일본의 기독교인은 전체인구 0.3%입니다.) 그래도 세계적인 신학자를 배출했었습니다. 이것은 학교가 있어서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일본의 대표적인 신학교인 동경신학대학교가 문부성으로부터 이번 2학기(2008년)에 학생이 한 명이라도 등록하지 않으면 학위를 주는 학교 명단에서 제외된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합니다.
대한민국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부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 세계선교를 하는 나라들은 미국과 영국, 대한민국입니다. 영국은 이미 오래 전에 많은 나라를 식민지화 한 경험이 있습니다. 미국은 세계도처에 너무 많은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도 빚진 것이 있어서 미국의 요청에 다 거절할 수 없어서 사회 복지 라든가 의료봉사 등으로 돕고 있습니다. 처음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인 이스라엘은 지금도 전쟁 중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대한민국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른 나라를 먼저 침략한 적이 없는 민족입니다. 하나님은 무고한 피 흘림이 없었던 이 민족을 사용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1913년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타고르는 일본 방문 중 조선을 위해 동방의 등불이라는 시를 지었습니다. 그 내용에는 “조선의 역사는 동방의 등불이 되어 주는구나!” 라고 했습니다. 일제 시대에 지은 시이지만 대한민국인이 깨어날 때 동방을 넘어 세계의 등불이 될 줄 믿습니다.
북아일랜드 얼스터 대학의 리처드 린 교수와 핀란드 헬싱키 대학의 타투 반하넨 교수의 공동 논문발표에 의하면 전 세계인의 평균 IQ가 제일 높은 나라는 1위 홍콩 107, 2위 대한민국 106, 3위 북한, 일본 105, 4위 104로 타이완입니다. 네덜란드, 독일, 이탈리아가 102로 다음입니다. 미국 98로 9위입니다. 물론 한 국가가 성장하는데는 국민의 IQ만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정보력이라든가 얼마나 합심하느냐 등 정치적인 이유 등도 작용합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이 뛰어나다는 데는 부정할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세계경제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자원하나 변변한 것 하나 없는 나라에서 지난해 12월 7일 무역수지가 4,000억(약 529조원) 달러를 돌파했습니다. 1964년 1억(1년) 달러로 시작했는데(1977년 100억 달러) 44년 만에 4,000억 달러를 돌파한 것입니다. 이는 한국보다 먼저 수출액 4000억 달러를 넘어선 미국 독일 일본 중국 등 10개국이 1000억 달러에서 4000억 달러에 이르는 데 걸린 기간(평균 17.2년)보다 4년 이상 단축된 것입니다. 이것은 전 남미 국가들을 합친 것보다 200만 달러가 많은 것이구요 전 아프리카 32개국가 보다 높은 것입니다. 자원하나 안나오는데 어떻게 가능하냐 포스코(포철)이라는 기업이 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사용하지 못하는 고철을 사다가 잘 제련해서 강철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팝니다. 당시 박태준 사장은 겨울바람이 몰아치는 모래 벌판에 전 사원을 집합시켜놓고 식민지배에 대한 일본의 배상금(대일청구권자금)을 포철 1기 건설에 투입하는 그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 조상의 혈세로 짓는 제철소입니다. 실패하면 조상에게 죄를 짓는 것입니다. 우리 목숨 걸고 일합시다. 실패하면 우향우해서 모두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읍시다.” 이런 포철이 세계 2위의 제철소가 되었습니다. 일본 자동차 도요다가 자존심을 내세우며 값싸고 품질 좋은 포철의 철을 사용하지 않다가 지금 어렵게 되자 앞으로 포철의 강재을 사용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세계 최대 자동차사 제너럴 모터스(GM)는 한국의 LG화학을 전기자동차 시보레 볼트의 리튬-이온 전지 공급자로 선정했습니다. 세계의 차에 한국의 자재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얼마나 대단합니까? 여러분! 힘을 내세요.

우리 주님이 우리를 평가하는 것은 이 정도의 가치가 아닙니다.
여러분! 내가 예수를 영접하기 전에는 그저 한 인간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시 9:19 “여호와여 일어나사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주 앞에서 심판을 받게 하소서 20 여호와여 그들을 두렵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자기는 인생일 뿐인 줄 알게 하소서(셀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그저 인생일 따름입니다. 육신으로 나서 육신으로 있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다릅니다. 가치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혼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왕이신 예수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컵에 물이 담기기 전에는 그냥 컵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컵 안에 물질이 담기게 되면 그 컵은 컵의 가치, 플러스 그 안에 담긴 물질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별것 없지만 내 안에 계신 분이 소중한 분이시니 나 또한 소중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창 1:16 “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라고 나옵니다. 하나님은 만드시는 분입니다. 출애굽기 30장에 보면 하나님은 성전에서 사용할 물품들을 만들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것은 만들 때는 정해진 사람, 정해진 방법에 의해서 만들어야 합니다.
출 31:11 “관유와 성소의 향기로운 향이라 무릇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그들이 만들지니라”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면 됩니다. 그것은 이제 통합되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라는 질문에는 한없는 우리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심과 또 하나는 무한히 돌보심으로 완전한 책임을 지시겠다는 굳건한 약속입니다.
마 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무한한 능력을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자녀들임을 믿고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 것이 되었도다.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3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3-17)

예수께 미치세요.

노아가 미쳤습니다. 그 식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도 오지 않는데 배를 산에다 만들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미쳤습니다. 아들하고 3일 길을 가더니 갑자기 아들을 장작더미 위에 놓고 태워 제사를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미쳤습니다. 죽을 줄 알면서도 불타는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미친 사람들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저는 모든 성경을 좋아하지만 그 중에서도 오늘 본문이 기록된 고린도후서 5장을 무척 좋아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다가 아마도 미쳤다는 소리를 들은 것 같습니다. 저는 예수 믿다가 미쳤다는 소리 듣고 정신병원에 입원했던 적이 있습니다. 저 뿐만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 중에 가끔씩 미쳤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사실 목사님들 중에는 부모님들께 미쳤다는 소리 한번 들어보지 않은 분들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무엇인가에 미쳐 사는 것입니다. 사람이 주님께 미치지 않으면 뭔가 다른 것에는 미쳐 있습니다. 어떤 분은 학문에 미쳐 지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연애하는데 미칩니다. 어떤 사람은 돈버는데 미쳐 있습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에 미쳐있는 것 같습니다. 한 때 사행성 오락으로 유명했던 바다이야기에 미쳐있던 사람도 많습니다. 그게 아마 고래가 나오면 큰 것이 터진 것인가 본데 고래가 나오기 전에 상어가 왔다 갔다 한답니다. 그래서 조금만 더하면 고래가 나올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자꾸만 땡긴 답니다.
고이주에타 전(前) 코카콜라 회장은 자기 몸에는 피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콜라가 흐른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콜라에 미쳐서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태국에 벧엘타이교회가 있습니다. 선교사님이 개척한 교회인데요 태국여자 어린아이인데 한 7살 되었나요. 교회에 하도 열심히 나오니까 부모님이 집에다 가두어 놓고 못 가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아이가 가위를 가져다 자기 머리를 다 잘라버렸습니다. 할 수 없이 이 어린아이의 부모님이 손들고 교회에 보냈습니다. 아침 9시에 나와서 어린이 주일학교 예배드리고요 어른예배 11시 참석하고 오후 3시 성경공부시간까지 하고 저녁에 어두캄캄할 때 돌아가는 것입니다. 누가 보아도 예수에 미친 아이 같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어딘가 미쳐있어야 된다면 예수께 미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얻은 구원이 얼마나 값지고 영광스러우며 확실한 것인지 분명히 알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구원받은 감격과 기쁨이 차고 넘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강권하시는 사랑 때문에 삽니다(13-15)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사람들을 만나기만 하면 항상 ‘예수님, 예수님’ 소리만 했습니다. 입만 열면 예수님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이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까? 궁리하고 연구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참으로 재미없고 따분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한번은 바울이 자기를 심문하는 왕 앞에서 담대히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총독이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고 말했습니다(행 26:24). 그러자 바울이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 차린 말을 하나이다”고 반박했습니다(행 26:25). 그는 미쳤다는 비난을 받을 만큼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든 오직 하나님과 양떼들을 위해 헌신을 다했습니다(13).
나의 마음은 하나이기 때문에 내 마음을 주님께 드리지 않는다면, 다른 것에 빼앗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어디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는데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이 이렇게 미쳤다는 소리를 들으면서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그를 강권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의무감이라든가, 동역자 들의 눈치 때문이라든가, 영향력을 생각해서라든가, 양에게 본을 보여야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랑이 그를 강권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벌레만도 못한 자기를 위해 죽으셨다고 생각하니 그는 조금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이는 한마디로 예수님이 push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push를 받으면 힘들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를 push하시면 우리는 자발적으로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누가 시켜서 하거나 의무감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자원해서 하게 됩니다.

아내가 추운 겨울밤에 갑자기 호떡을 먹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밥통을 들고 나갔습니다. 그러더니 한참을 있다가 밥통을 다시 들고 들어왔습니다. 아내는 이유를 몰랐습니다. 남편은 호떡이 추운 겨울에 식지는 않을까 해서 밥통을 들고 나갔던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에 대한 사랑을 강하게 확인했습니다. 마음속으로 다짐합니다. 내 남편을 죽도록 사랑해야지. 그 사랑이 아내를 강권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스스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새로운 피조물(16-21)

솔로몬은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전 1:9) 라고 했습니다. 죄 아래 머물러 사는 인생은 새것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새로운 삶을 살수도 없습니다.
만일 도적질과 강도를 일 삼았던 한 죄수가 옥살이를 마치고 새로운 출발을 위하여 세상으로 나왔다 하더라도 도적질과 강도 짓 하고자 하는 마음을 그대로 갖고 있으면 그 사람은 새로운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고후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새로워집니다. 그 이유는 죄 아래 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죄의 결박을 끊어 우리를 자유케 해 줍니다.

새로운 삶을 살려면 영에 속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한 이래 땅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은 낡아지고 쇠하여 지고 부패하거나 부식되거나 죽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 중에 새것이 있습니까? 아무리 좋은 것 새것을 사거나 만들었다 하더라도 얼마가지 않아서 낡아지고 맙니다.
낡아지고 썩어지고 죽게되는 것은 인간이 죄를 저지른 결과입니다. 이 세상에는 새로운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얻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거듭남으로 영적 존재가 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죄로 인하여 부패한 인생을 새롭게 하기 위한 몇 단계의 계획을 준비하셨습니다.

영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요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영은 생명의 원천입니다. 모든 것을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영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에 영이 깨어나면 하나님을 찾게되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됩니다. 사탄은 세상의 것으로 육신의 것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당장은 그것이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잠시 있다가 안개와 같이 사라질 뿐입니다. 물질도 건강도 명예도 다 그렇습니다. 이 땅에 영원한 것이 없습니다.
범죄한 인간의 영은 죽어있었습니다. 허물과 죄로 인하여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께서 살려주셨습니다(엡 2:1). 다시 죽지 마세요. 다시 죄의 구덩이에 들어가지 마세요.

우리가 예수를 믿어 새로운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이라 하더라도 여전히 죄 아래 있고 죄의 습성을 버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분명한 것은 죄는 영적 능력을 상실하게 만들고 새로운 삶을 살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죄의 포로가 되어 새롭게 살지 못하게 하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죄를 참회하며 회개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시 51: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라고 하였습니다. 죄를 회개하면 마음을 정하게 하며 정직한 영으로 우리를 새롭게 해 줍니다.

세계적인 물리 학자요, 수학자요 사상가였던 파스칼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새로 태어나는 날이 있었습니다. 1654년 그는 팡세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은총의 해 1654년 11월 24일, 화요일,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철학자나 지식인의 하나님이 아닌 나의 하나님. 확신을 주시고, 환희의 감정을 주시고, 평화를 주시는 나의 하나님, 하나님 이외에 이 세상 일체의 것이 망각되었습니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은 당신을 모르나 나는 당신을 아옵나이다. 환희, 환희, 환희, 눈물, 눈물, 눈물.” 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파스칼은 이날 말씀에 의해 주님을 영접한 후 매일 아침 5시면 기도하고, 많은 날을 금식하면서 성자처럼 살았다고 합니다. 탁월한 지식을 가지고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던 파스칼은 그 모든 책은 다 집어치우고 성경과 어거스틴의 참회록만 읽었다고 합니다.
기독교는 사람을 완전히 바꾸는 가르침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성형수술 하듯이 보이는 얼굴 몇 군데만 뜯어고쳐 놓는 정도가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속 사람까지 완전히 새롭게 고치는 과정입니다. 그럴싸하게 치장하고 잠시잠깐 위장하고 살다가 정해진 시간만 지나면 감춰두었던 옛사람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 유유자적(悠悠自適)하게 생활하는 그런 삶을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본문 16절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육체만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사람들을 대할 때도 겉 사람인 육체의 조건만을 생각하고 대해 왔습니다. 이제부터는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문제도 영적인 시각으로 보아야 합니다. 육체의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영적인 부분을 볼 줄 알아야 한 영혼을 귀히 여기며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리모델링(remodeling)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래된 건물이나 상가를 보수하고 개축하여 새로운 건물로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교회도 리모델링 했습니다. 우리는 건물만 리모델링 한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을 리모델링 해야 합니다. 죄를 지닌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 작업입니다.
어떻게 새로워질 수 있습니까? 본문 17절에 새로워지는 비결을 소개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됩니다. 인생을 새롭게 단장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새것은 여러모로 쓸모가 많습니다. 예수 안에서 새로워지면 쓸모 있는 인생이 됩니다. 예수 안에서 새로워진 인생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사용하시기를 원하십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하시던 일을 우리에게 맡긴 것입니다. 그 일은 화목하게 하는 직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몸을 화목 제물로 삼으사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화목한 삶을 살아가려면 먼저 하나님과 화목해야 합니다. 바울은 20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인간과의 관계에서 화목하기 위하여 하나님과의 화목하는 관계를 깨뜨립니다. 우선해야 할 것은 먼저 하나님과 화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체코의 극작가 카를 차펙은 “만일 개가 지껄일 수 있게 된다면 아마도 우리 인간은 인간끼리 사귀기 어려운 것만큼 개와 사귀기도 힘들어질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차펙은 로봇이라는 말을 만든 사람입니다.) 우리는 소리만 요란한 꽹과리와 같은 신앙이 아니라 진실하신, 아멘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1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2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3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5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6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7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8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시 121:1-8)

1951년 1월 4일, 꼭 58년 전 오늘 한국전쟁 중에 국군이 서울을 철수하고 수도를 부산으로 이전한 1.4 후퇴가 있었던 날입니다. 그 때의 겨울은 얼마나 추웠는지요. 꽁꽁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 피난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그렇게 피난했습니다. 당시 노량진 역에서 기차를 타기 위해 매달린 사람들을 보면 은이요 기가 막힙니다. 어린아이 하나는 부모를 잃고 깡통하나 손에 쥔체 한없이 울고있지만 누구하나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여자 사진을 보면은 이요 그 추운 겨울에 옷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젖가슴이 다 보였습니다. 영락교회 김응락 장로님은 더 이상 나는 공산당에게 쫓겨 도망가지 않겠다고 하여 영락교회당 안에서 공산당에게 총알 일곱 발을 맡고 순교하셨습니다.
우리나라의 청와대를 보면 바로 뒤에 삼각산이 가로막혀 있습니다. 정부 계획도시로 과천을 선택한 것도 정부 종합청사를 짓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곳도 바로 뒤에 관악산이 있습니다. 이 산들은 모두 북쪽에 두었습니다. 바로 북한의 남침을 염두 해 둔 것입니다. 비행기나 로켓포로 공격할 때 바로 뒤에 산이 방어막 역할을 해 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지금도 전쟁중이지만 시편이 기록될 다윗 당시에도 수많은 전쟁을 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제일 안전한 요새로 예루살렘을 선택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해발 800미터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주위 아래에 동쪽으로는 기드론 골짜기가 있고 서남쪽으로는 힌놈의 골짜기와 혈 로겔 골짜기가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노래는 성전에 올라가면서 부르는 노래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백성들에게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이렇게 세 번의 절기를 지키게 하셨는데 이 때에는 전국의 모든 남자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그런데 성전으로 올라가는 길은 항상 즐거운 길만은 아니었습니다. 우선 여자들과 어린아이들만 남겨두고 모든 남자들이 1-2주 동안 집을 비워야 했습니다. 만일 이럴 때 이웃나라가 쳐들어오면 어떻게 합니까? 집을 떠나면서 얼마나 마음이 불안했을 것입니다. 또 제물을 끌고 예물을 등에 지고 걸어서 먼길을 걸어서 가야하는데 산을 넘고 강과 계곡을 건너고 뜨거운 사막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또 곳곳에 여행객들을 노리는 강도들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성전에 올라가는 길은 모험과 고난의 길입니다. 우리가 설날에 고향 가기 어렵다고 하지만 기차표 구하는 것이나 차가 좀 밀린다는 것이지 위험을 무릎 쓰고 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어렵고 힘든 길을 통과하여 예루살렘이 보입니다. 주변에 오면 모두가 볼 수 있는 곳에 예루살렘이 있습니다. 산이 보이고, 언덕이 보이고, 건물도 보입니다. 그러나 산이나 언덕이나 건물이 자신들을 도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1절 본문은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라는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어떤 분이 하도 외로워서 강아지를 키웠습니다. 그런데 강아지가 다 살고 먼저 죽었습니다. 너무 정이 들어서 오동나무 관에 백 만원을 들여서 장사를 치러 줬습니다. 그러다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짐승하고 친하게 지내서 얻은 것이 없다.” 는 결론을 내리고 교회에 왔습니다. 교회에서 성도를 만납니다. 하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을 만납니다. 나를 구원하실 구원을 베푸시는 분을 만납니다.
1642년 1월 4일 오늘은 영국의 물리학자 뉴턴(1642-1727)이 태어난 날입니다. 그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비롯해 수많은 업적을 남긴 근대 과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사람입니다. 그가 쓴 책 중의 하나인 <프린키피아>가 있습니다. 그곳에 보면 “오! 다이아몬드, 다이아몬드, 네가 한 짓을 너는 모르리라! 오 물리학이여! 형이상학에서 나를 구해다오!” 그랬습니다. 여기서 다이아몬드는 무엇이냐 하면 뉴턴이 기르던 개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는 다이아몬드를 개처럼 생각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서로 화답하는 형식으로 되어있습니다. 시인은 망설일 필요도 없이 2절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라고 고백합니다. 산이 아닙니다. 건물이 아닙니다. 강아지가 아닙니다. 하늘과 땅과 나를 지으신 하나님만이 나를 도우실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시 127:1) 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지켜주시는지 본문에서 봅니다.

3절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실족이라는 말은 “모트”에서 나왔습니다. 미끄러지다, 흔들리다는 뜻입니다. 실패나 실수를 일부러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살다보면 나는 원하지 않지만 미끄러지는 것과 같이 수렁에 빠질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실족하지 않도록 미끄러지지 않도록 도와주신 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왜 주님께 늘 간구하며 살아야 됩니까? 우리는 언제나 실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도 시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서까지 끝까지 따라다닙니다. 아주 질깁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에게도 틈탔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누가복음 22:31-32 “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왜 그토록 교만하지 말 것을 강조하셨는지 아십니까? 우리의 성품이 고상해 져서 하나님이 좋아하시게요? 예 틀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사탄에게 빠져 시험에 들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문에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라고 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이유도 사탄의 방해에서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빌 1:19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라고 하셨습니다.

4절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고대에 이방 신을 섬기는 사람들은, 신은 평상시에 항상 주무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신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자고 있는 신을 깨워야 되니까 그렇게 요란하게 광적으로 신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왜 무당이 딸랑딸랑하면서 시끄럽게 하는지 아십니까? 자고 있는 신을, 듣지도 않는 신을 불러내야 하니까 그러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하나님은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 열왕기상 19:11-12 보면 하나님은 강한 바람과 땅이 무너지는 소리 가운데도 계시지 않았으며 오히려 세미한 음성 가운데 계셨습니다. 항상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고 항상 우리에게 귀기울이고 계십니다. 그분은 당신을 찾는 소리를 즐거워하십니다. 기뻐하십니다.
물론 우리가운데 하나님이 주무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이 우리가 교회에서 예배드릴 때는 우리를 살피시지만 우리가 집에서 설거지하고 빨래할 때, 직장에서 일할 때는 하나님이 무관심하신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은 잠시도 눈을 떼지 않고 우리를 보살피고 계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 때가 있지만 우리 하나님은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십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신 32:10)

5절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하나님은 모든 일에서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우리는 그들의 고마움을 잘 모릅니다. 제가 중동 건설현장에서 일하셨던 분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한번은 건설현장이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서 자동차를 몰고 가는데 그만 자동차가 어떤 이유에서 모르지만 고장이 났습니다. 사막 한가운데서 마냥 있을 수가 없어 자동차에서 내려서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모래 바람이 한번 불어오더니 길 자국이 다 없어져 도무지 어디가 길인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막을 방황하는데 이제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갈증이 나기 시작합니다. 태양은 비쳐옵니다. 피할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저 언덕 쪽을 바라보니까 나무하나가 있더랍니다. 그래서 죽을힘을 다하여 그 나무 밑까지 갔습니다. 그런데 햇빛을 피하기 위해서 나무 그늘아래에 누워있는데 자기만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온갖 벌래, 곤충들이 그곳에 다 모여들어서 있을 수가 없었답니다. 사막의 태양은 그렇게 뜨겁고 무서운 겁니다.
하나님을 만나러 오는 길에 만나게 될 모든 위험에서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랜 시간 여행을 하다보면 열사병에 걸리게되기 쉽습니다. 밤에는 차가운 냉기에 시달립니다. 옛날 중동지방에서는 이 차가운 냉기가 달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꼭 낮의 해와 밤의 달뿐이겠습니까? 시인은 확신에 찬 믿음을 고백하고있습니다. 6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7-8절 “7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8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출입’ 은 들어오고 나가는 것인데 우리가 아침에 나갔다가 돌아올 때까지 행하는 모든 일을 의미합니다. 특히 여기서는 순례자들이 집을 떠나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을 가리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산을 넘어가고 있습니다. 아들은 다시 불안해져서 아버지에게 또다시 묻습니다.
“아버지, 두고 온 엄마랑 동생들이 잘 있을까요? 들판에 두고 온 양들이 무사할까요? 그동안 이웃나라가 침략해오면 어떻게 하지요? 산 속에는 강도들이 있다는데 강도를 만나면 어떻게 하죠?”
이때 아버지가 다시 대답을 합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가는 길이니까 하나님이 끝까지 지켜주실 거야, 우리가 집에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도와 주실 거야!”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나아가는 길을 하나님께서 지켜주십니다.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예배하러 가는 겁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분명한 약속이 있습니다.
출 34:24 “…네가 매년 세 번씩 여호와 네 하나님을 뵈려고 올 때에 아무도 네 땅을 탐내지 못하리라” 하나님이 모이라고 해놓고 안 지켜주시면 말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책임져 주시는 분입니다. 그만한 능력이 있으신 분입니다. 그분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입니다.

한 소년이 예수님의 모습을 정성껏 그렸습니다.
어머니가 “야! 우리 아들, 정말 잘 그렸는데! 그런데 왜 예수님 손을 그렇게 길게 그렸니?” 하자 “엄마는 그것도 모르세요? 그것은요, 예수님의 손은 세상의 구석구석 까지 미칠 만큼 길고요, 또 제가 풍선을 잡아끌 듯이 우리를 이끌기에 충분할 만큼 강하거든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만나러 온 시간에 다른 사람은 돈을 법니다. 다른 학생은 공부를 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 만나러온 우리가 손해 봅니까? 우리가 망합니까? 우리가 공부 못합니까? 영국의 웨스트민트 교회는 1천년이 다된 교회입니다. 1, 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예배는 중단된 적이 없었습니다. 전쟁 중에도 예배를 드렸습니다. 외부의 요소가 우리가 하나님 만나는 것에 장애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실 줄 믿고, 그것도 육체적 안전만 지켜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도 책임져 주십니다. 언제까지요?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