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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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9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20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5:17-21)

한국컴퓨터선교회(KCM)에서 인터넷 서버를 몇 대 운영하는데 그 중에 윈도우 서버가 2대 있습니다. 지난 금요일 NHN(네이버) 보안관제팀에서 우리 서버가 자기네 서버를 공격한다고 연락이 왔어요. 나는 공격한 적이 없는데 공격을 한다는 겁니다. 윈도우는 바이러스와 해킹에 취약합니다. 그런데 그 약한 이유가 있어요. 최신 버전으로 계속 업데이트 해야 되는데 하지 않은 겁니다. 가만있으면 되는 게 아닙니다. 항상 관리를 해야합니다. 조금만 방심하면 바이러스가 틈타고 해커가 쳐들어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늘 엎드려야 되요. 나는 가만히 있었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탄의 종이 되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공격합니다. 기도하고 찬송하고 예배 드려야 합니다. 조금만 느슨해지면 바로 사탄이 틈탑니다.

톨스토이의 작품 가운데 『화재의 근본』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아주 의리 좋게 살아가는 이웃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평화롭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만 문제가 생겼습니다. 암탉이 문제였습니다. 한쪽 집의 닭이 다른 집에 가서 알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이 아주머니가 알을 찾으러 갑니다. “집에 있어? 우리 닭이 여기서 알을 낳았어. 알 가지러 왔어.” 그랬더니 그 집 아줌마가 “아니야. 조금 전에 운 것은 우리 닭이야.” 그럽니다. “무슨 소리야, 우리 닭이 여기에 왔는데.” “얘가 왜 이래?” 이러면서 문제가 되는 거예요. “얘, 너 왜 그래. 우리 닭이라니까?”, “아니야, 우리 꺼야” “얘 미쳤어?”, “뭐 미쳤다구?” 이러면서 발전하는 거예요. 말이 격해지기 시작하고 욕이 나옵니다. 과거에 의리가 다 무너집니다. 그리고는 다음날은 남편끼리 싸웁니다. 남편들이 싸우고 있을 때 여자가 막 말하니까 이웃의 남편이 손을 들어 쳤어요. 왜? 말이 안 되니까 손이 나가는 거예요. 그래서 가정에도 절대로 부인들이 말 많이 하지 마세요. 잘못하면 주먹 올라갑니다. 가만히 있어요. 그래서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빗자루를 던집니다. 물건이 날아갑니다. 그랬더니 옆집 아줌마가 확 불을 질러버렸어요. 한 시간만에 두 집이 모두 불타버렸습니다.

오늘 본문 18-20절 사이에서 무려 다섯 차례나 화목이라는 말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화목” 이라는 말에 해당되는 헬라어는 카탈랏소라는 말입니다. 카타(아래로)라는 말과 알랏소(이전에 잘못된 것을 새롭게 바꾸다)라는 말이 합성된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화목이라는 말의 뜻은 하나님과 잘못된 관계를 바꾸고 회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화목하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정립하고 고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화목하는 방법에는 “하나님 저 하나님과 화목하겠습니다.” 라는 말로 하나님과 화목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마 5: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고 하셨습니다. 예물 드리는 것 보다 형제와 화목하는 것이 더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모습은
사도행전 2:42-47 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그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교제하고 떡고 기도했습니다. 서로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심지어는) 45절에 보면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 라고 했습니다.

이 때에 로마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밖은 것으로 끝마친 것이 아니라 기독교를 심하게 박해합니다. 로마 황제인 네로는 64년경에 베드로와 바울을 로마 광장에서 처형시켰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와 최고의 학자로서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바울을 죽임으로 기독교를 멸망시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불씨는 바위를 뚫게 만들었고 카타콤이라는 동굴을 만들어 지하로 숨게 했습니다. 카타콤은 공동묘지에 만들어진 지하 땅굴입니다. 무덤도 무섭지 않았던 것입니다. 신앙을 지키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다 했습니다.

이 때 그 박해의 앞장에 서 있던 디도(Titus)의 뒤를 이어 도미티안(Domitian, A.D. 81-)이 황제에 올랐습니다. 도미티안은 처음에는 선악에 대해 어느 정도 균형을 잡는 듯한 통치를 하다가 나중에는 악행을 일관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도 결국 자신을 신이라고 호칭할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그리고 로마에 있는 신전들에 무수한 자신의 신상을 만들도록 했습니다.
물론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일반 백성들도 그를 미워하고 또 두려워하였습니다. 도미티안은 무자비하게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였는데, 그의 사촌의 아내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그녀의 주위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그를 죽였습니다. 200여 년 후의 유세비우스는 도미티안을 기독교를 핍박하는 일에 둘째가는 자라고 평하였습니다. 그는 A. D. 96년 9월 18일에 그의 아내를 포함한 일단의 반역자들에 의해 살해당하였습니다.

A .D. 107년에 순교한 익나티우스는 시리아에 있는 안디옥 교회의 감독으로서 40년을 섬기다가 트라얀(Trajan) 황제의 로마 신들을 경배하라는 명령을 따르지 않고 로마로 후송되어 콜로세움에서 수많은 관중들이 흥미 거리로 지켜보는 가운데 쇠사슬에 매여 사나운 두 마리의 사자들에 의해서 물려 찢기며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그의 나이 70세가 넘었을 때였습니다. 그는 “순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하고 기뻐하였습니다.

3세기의 신학자 터툴리안은(Tertullian, A.D. 160-225)은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러한 박해는 기독교를 멸망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한 사람이 순교를 당할 때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떠난 것이 아니라 이를 본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사람들은 “시저와 그리스도가 투우장에서 만나 그리스도가 승리를 거두었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후 ‘갈레리우스(Galerius)의 칙령 선포’ 가 내려졌습니다. 무려 초대교회로부터 300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311년 4월 갈레리우스는 어떤 이유인지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박해의 손길을 접고, “국가 기강에 어긋나는 일을 저지르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으로 기독교인들에게 관용을 베푼다”는 교서를 발표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공적으로 모여서 예배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선언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콘스탄틴 황제가(Constantine, A.D. 274-337) 로마 북부의 티베르 강을 가로지르는 밀비안 다리를 사이에 두고 그의 적인 막센티우스와 전쟁을 하게 됩니다. 그의 군대는 상대의 군사력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전쟁 전날 밤 그는 꿈속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부터 따온 머리글자(크스, 십자가)를 보면서 “이 상징을 사용하면 이기리라.”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이를 신탁으로 생각한 그는 병사들의 헬멧과 방패에 그 기호를 그려 넣고 마침내 312년 10월 28일 운명의 전투에 나아가서 승리하게 됩니다.
콘스탄틴은 이것이 기독교의 하나님이 자신에게 가져다 준 승리라고 믿었습니다. 그 후에 313년에 밀라노에 돌아와 “밀라노 칙령”을 발표합니다. 이 칙령은 모든 종교를 자유롭게 택하고 예배할 수 있다는 선언이었으며, 기독교회의 재산을 회복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로 교회는 몰수된 모든 재산을 돌려 받게 되었습니다.

이 때에 기독교는 다섯 개의 교구(로마,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예루살렘)가 형성됩니다. 그리고 언제 핍박이 있었는지 평화의 시대가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570년에 이슬람의 창시자 마호메트가 메카에서 출생합니다. 그가 성장하면서 보니까 기독교가 싸워도 너무 싸우는 거예요. 이 싸움에 신물을 느낀 마호메트는 이슬람을 만듭니다. 그리고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은 다른 나라말로 번역도 할 수 없지만 절대 토론하는 것을 금지시켰습니다. 오직 절대적 순종만을 강요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여자들은 사람취급을 안 합니다. 그냥 남자들의 소유물로 만들었습니다. 일종의 재산입니다. 기독교가 싸움을 하는 동안 이슬람이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러시아는 954년에 올가(Princess Olga) 공주가 세례를 받고, 988년에는 키예프(지금의 우크라이나 수도)의 왕 블라디미르(Prince Vladimir)가 콘스탄티노플 교구에서 나온 선교사에게 자진해서 세례를 받습니다. 그리고 자기 신하들과 귀족들에게도 세례를 받게 합니다. 북서쪽을 향해 많은 귀족을 포함시키면서 성장합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의 이슬람에 의해 무참하게 정복당한 후에도 러시아 정교회는 계속해서 성장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1589년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의 허락으로 러시아 정교회가 독립교구로 허락을 받습니다.
그러나 러시아도 약 400여 년이 지나 정교회 사제와 일부 계급층이 부를 독차지하자 1917년 2월 세계 여성의 날을 계기로 당시 러시아의 수도 빼째르부르그(레닌 그라드)에 여성들이 빵을 달라고 시위를 벌였습니다. 러시아의 군대는 시민을 향하여 발포하였는데, 발포를 거부한 일부 사병들이 혁명에 참여했습니다. 이들은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로 단결시켰습니다. 결국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가 폐위되었고 이 때부터 레닌주의(공산주의)가 부상합니다. 러시아 정교회가 부패하자 공산주의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기독교도 처음부터(선교초기) 나누어져 들어오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한국장로교 안에서 싸움이 붙었습니다. 얼마나 싸웠는지요 누가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지도 모릅니다. 자기 마음에 안 들면 다 이단입니다. 어떤 때는 신학적인 논쟁도 아닙니다. 이권 다툼에 이단사상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사이에 가라지가 또 나옵니다. 싸우는 거 보기 싫으니까 이 사람은 아주 모든 종교를 통일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통일교 안에 다 집어넣습니다. 한국교회가 싸우는 틈을 노리고 통일교가 생겨났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되지 못하는 틈을 타고 모든 가라지가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싸우면 사탄이 좋아합니다.

사도행전 13장을 보면 그 당시 안디옥 교회가 바나바와 바울을 선교사로 파송한 기사가 나옵니다. 두 사람은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 구브로, 살라미 등을 방문하며 복음으로 전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15:36 이하를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견해 차이로 다투고 갈라서게 됩니다. 그 후로 바울은 바울대로 전도여행을 다녔고, 바나바는 바나바 나름대로 전도 여행을 계속했습니다. 그 이후 그들은 다시 만나지도 않았고 만날 기회도 없었습니다.
바울은 이 때를 회상하면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에는 인내와 오래참음, 예의가 있어야 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2:1을 보면 “14년 후에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바나바와 화해를 했다는 증거입니다.

캐나다에 사는 어떤 남자는 26년 전에 결혼해 26세 된 딸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중매한 사람을 욕하고 다닌다고 합니다. 이유는 중매를 잘못해 지금 함께 사는 아내를 만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26년 동안을 원망하고 불평하며 살아온 그 남자는 교회 집사라고 합니다. 한 평생을 불화로 산 사람입니다.
미국에 있는 카네기 공과대학에서 인생에 실패한 사람 1만 명을 대상으로 그 원인을 조사한 결과 85%가 원만치 못한 인간관계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편가르고 싸우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서로 용서하고 이해하고 화목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싸우고 다투고 시기하고 미워하면 되는 일이 없습니다. 인생도 실패합니다.
또한 교회는 평화시대일수록 안주하면 안됩니다. 일을 해야 되요. 힘이 남아도니까 싸우는 겁니다. 교회가 일을 해야 합니다. 선교해야 합니다. 일을 안 하니까 싸우는 겁니다. 무슨 자리가 뭐 그렇게 중요합니까? 그게 무슨 벼슬입니까? 교회에 왜 물질이 남습니까? 그거 남겨놓으니까 싸우는 겁니다.

우리가 새롭게 되는 것,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바로 화목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화목할 수 있는 방법 하나만 말씀드립니다. 내가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앞에 세우면 됩니다. 십자가 안에서만 화목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방법으로만 화목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화목하는 것을 간청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싸우면 서로 다 망합니다. 화목해야 됩니다. 화목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상의 빛(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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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13)

혼자 농구 연습한 사람은 실제 경기에서 중앙선까지는 공을 잘 몰고 간답니다. 그러다가 중앙선이 나오고 상대방이 막기 시작하면 갑자기 방향을 돌려 자기 골대로 가서 공을 집어넣는답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이 그와 같은 것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교회 안에서는 참 성도가 많습니다. 그런데 정작 세상 밖으로 나가면 힘 한번 못써보고 돌아서는 혼자 농구 연습한 사람처럼 되어있지 않은지 생각해야합니다. 1970년대에 미국의 빌리그레함 목사님이 한국에 오셔서 집회할 때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국 사람들의 신앙을 꼬집어 말하기를 ‘바구니 신앙’ 이라고 했습니다. 바구니가 물 속에 있을 때는 물이 가득한 것 같은데 바구니를 건져내면 물이 다 빠지고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물안 개구리처럼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모인 것은 주님께 은혜를, 성령을 받기 위함이지만 우리가 나가는 것은 그 은혜를 나누기 위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을 알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포기하고 도망가야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뛰어 들어가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성전이 사라진 것은 이제 이 온 세상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사탄이 망가트려 놓은 이 세상을 하나님께 뒤돌려야하는 사명을 우리가 받은 것입니다.

출 8:22 “그 날에 나는 내 백성이 거주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 그 곳에는 파리가 없게 하리니 이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개역:나는 세상 중의)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네가 알게 될 것이라”
왕상 2:2 다윗은 솔로몬에게 유언하기를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남자답게 떳떳하게 세상을 헤쳐 나가라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왕상 8:60에서 기도하기를 “이에 세상 만민에게 여호와께서만 하나님이시고 그 외에는 없는 줄을 알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단 한번도 세상을 포기하신 적이 없습니다. 세상을 포기 하셨다면 세상을 구원하러 주님이 이 땅에 오실 리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세상을 구하려 하심입니다.
요 1:9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라고 증언합니다. 세상 속으로 오시고 그 가운데 계신 것입니다.

병 고침으로 권능을 보여주셨습니다.
마 4:24-25 “24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25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셨습니다. 병을 낫게 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고쳐 주실 때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마 9:6) 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죄를 사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옵니다. 바로 이러한 능력이 주님께 있다는 것을 중풍병자를 고쳐 주심으로 알리신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고백한 것처럼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벧전 3:6)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있습니다. 그 이름 자체가 능력입니다. 다른 거 다 없어도 예수님만 있으면 되는 겁니다.

심리학 용어 중에 ‘윤형본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알프스에서 조난 당하고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는 그곳에 홀로 남았답니다. 그는 13일 동안 넓고 험준한 얼음산을 방황하다가 구조대로부터 구조를 받았답니다. 13일 동안을 이런 데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느냐고 물으니 그는 얼어죽지 않으려고 계속 걸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걷고 잠깐 쉬고 또 걷고, 졸면 죽는다 하면서 조금씩 먹어가면서 13일 동안을 줄곧 걸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조대가 그가 걸어온 과정을 살펴보았더니 반경 6킬로미터 내를 뺑뺑 돌고 있었더랍니다. 자기는 직선으로 간다고 갔는데 결국은 같은 길을 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현상을 가리켜 윤형본능(바뀌 윤, 모양 형)이라고 합니다.
사람에게 눈을 가리고 실험을 해 보면 자신은 똑바로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결국은 20미터나 100미터 반경 안에서 빙빙 돈다고 합니다. 우리 자신도 살펴보면 이런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해는 바뀌어도 늘 그 모습 그대로 빙글빙글 도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변화를 좋아하는 것 같지만 참 잘 변하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정신 의학자 해리스 박사에 의하면 인간은 세 가지 경우에 천성이 변한다고 합니다. 첫째, 현재 상황이 너무 괴로울 때 사람은 변할 수 있고, 둘째는 소망이 안보일 때 인간은 변할 수 있으며, 셋째는 유레카 상황(Eureka Stage)에서 인간은 변할 수 있고 합니다. 어느 날 자신도 모르게 큰 깨달음이 있을 때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그래도 인간이 변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진짜 우리가 변하려면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
그리고 바로 오늘 본문이 이 사람들에게 증언하신 것입니다. 이제 병을 고쳤으니 소금의 역할을 하라는 것입니다. 비추라는 것입니다.
본문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는 말씀을 가지고 많은 묵상을 했습니다. 소금이 맛 때문에 있는 것이지요. 짠 맛 없는 소금이 무슨 소금이겠습니까? 예지네 김치가 소금에 절인 김치를 어디서 사다가 김장을 했나봅니다. 그런데 좀 김치 맛이 영 그렇다는 거예요. 그래서 지난번 윤미영 집사님에게 여쭤보았더니 그건 소금 때문이라고 그러시는 겁니다. 소금이 잘못되면 모든 맛이 흐트러집니다. 짠 맛 하나만 잘 다룰 줄 알아도 대단한 요리사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그 맛을 잃으면” 그러셨습니다. 그것은 소금의 맛을 잃어버리지 말라는 뜻인 것은 우리가 다 압니다. 죽을 때까지 소금의 맛을 잃어버리면 안됩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소금이 맛이 있을 때 일해야 한다. 혹 언젠가 맛을 잃어버리게 될 때가 오면 쓸모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원문으로 본문 13, 14절을 확인하다가 매우 중요한 단어들이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먼저 13절에 “ijscuvei e[ti eij”(이스퀴이 에티 에이) 라는 단어 3개입니다. 그 중에서도 제일 처음에 나오는 “ijscuvei”(이스퀴이)는 “할 수 있다, 선하다, 힘이 강하다, 우세하다, 완전하다, 많은 일을 하다.” 는 뜻입니다. 이 단어의 어원은 “ijscuv”"(이스퀴스)입니다. 이 뜻은 “강력한, 능력, 권세” 입니다.
이 단어가 신약성경에 본문 위에 3번 더 나옵니다.
갈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역사하는(이스퀴이)가 번역된 것입니다.
히 9:17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유효한즉 유언한 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효력이 없느니라” 효력(이스퀴이) 입니다.
약 5:16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역사하는 힘(이스퀴이) 입니다.

본문에서는 이 단어가 “그 맛” 이라는 단어로 번역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두 개의 단어가 “e[ti”(에티) “아직, 이후에” 라는 부사 단어와 “eij”(에이) “…이라면” 이라는 접속사입니다. 이 뜻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너희에게 그것이 있다면 아직(이후에) 역사하는 일을 할 수 있다”입니다. ‘맛’이 능력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맛’ 이 무엇입니까?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또한 그분이 보내주신 성령입니다. 이것만 있으면 우리는 아직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힘이 있습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말의 ‘맛’ 이라는 단어 또한 ‘멋’있지 않습니까? ‘맛’과 ‘멋’은 같은 것입니다. 맛이 있어야 멋있는 것이고 멋이 있어야 맛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 맛없는 사람에게 “별 싱거운 사람 다 봤네.” 그럽니다. 그리고 멋없는 사람에게 “그 사람 참 멋대가리 없네.” 그럽니다. 여러분! ‘멋’이나 ‘맛’ 있으면 뭐해요? 예. 자랑합니다.

짐승의 이름에 스승 사(師) 자가 붙은 것은 사자(獅子)밖에 없습니다. 사자의 獅자는 개사슴 록변에 스승 사(師) 자를 붙여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자(子)는 공자, 맹자 할 때 사용하는 자로 스승에게 붙이는 존칭어입니다. 어떻게 짐승의 이름에 스승과 같은 말을 사용하게 되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사자하면 생각나는 것은 폭력과 같은 힘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스승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우선 그 생김새가 점잖잖아요. 늑대처럼 흉포하지도 않고, 여우처럼 교활해 보이지도 않습니다. 초식동물들은 발아래 풀만 보고 다니는데 사자는 멀리 지평선까지 바라봅니다. 사자가 호랑이와 다른 점은 호랑이는 밀림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멀리 보는 시력에서 사자에게 뒤진다는 겁니다. 사자의 눈은 무엇인가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통찰력과 사물을 조망하는 사색의 깊이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스승이란 바로 발아래 풀만 보는 것이 아니라 멀리 있는 것을 보고 가르칠 수 있는 사림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힘 이것이 ‘맛’입니다.

14절 보겠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duvnatai … keimevnh:”(뒤나타이 … 케이마엔) “duvnatai”는 “능력”(뒤나미스)에서 온 말로 “할 수 있다. 가능하다. 능력 있다”는 뜻입니다. 맨 뒤에 나오는 “keimevnh”(케이마엔)은 “만들어지다. 세워지다. 지명되다”입니다. “세상의 빛”은 능력입니다. “뒤나타이”, 이 능력은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keimevnh”(케이마엔)은 하나님께서 지명해서 세우신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도록 하나님께서 지명해서 세워주셨습니다.

본문 15절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도 마찬가지입니다. 비출 수 있을 때 비추세요? 등경위에 두세요. 언젠가 우리의 생명의 빛은 꺼지게 마련 아닙니까?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때가 있습니다. 할 때 해야 합니다. 어느 때는 도와 주려고 해도 이미 도울 수 없는 상황이 되어있을 때가 있습니다. (종엽이 이야기) 그래서 바울도 경주하는 자처럼 살아있을 때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지난번 우리 집사람이 동창 모임 다녀와서 하는 말이 나중에 보니까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꽤 많다는 거예요. 그런데 서로 교회 다닌다고 말을 안 한답니다. 우리 집사람이 사모인줄을 아니까 한사람씩 와서 사실 나도 교회 다녀, 집사야 그런 다는 겁니다. 그냥 밝히면 그 사람들 속에 끼어서 불편한 거예요. 술도 먹고 해야 되는데 영 빛이 안될 것 같으니까 그냥 말 안 하는 거예요. 우리가 빛이라면 어두운데 감춰 놓을 수 없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는 것이 됩니다. 비추세요. 빛이 흘러 나가도록 감추지 마세요. 예수 믿는 것이 얼마나 영광된 것인데 감춥니까? 세상 자랑은 다 헛된 것입니다(약 4:16) 히 3:6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우리가 자랑할 것은 오직 예수입니다. “그의 집”은 성전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집이 되는 겁니다.

스코틀랜드 주일학교에서 한 선생님이 장난꾸러기 소년만 모인 반의 담임을 자청하고 나섰습니다. 그 중에 보비라는 소년은 다룰 수 없는 골칫거리 아이였습니다. 여선생님이 보비의 집을 방문했을 때 보비는 씻지 않아 땟물이 흐르는 얼굴에 머리는 빗질을 하지 않아 헝클어져 있었고, 그가 입고 있는 옷은 진흙에 뒹굴어 거의 걸레가 되어 있었습니다. 여선생님은 보비에게 새 옷을 갈아 입히고 교회에 잘 나오도록 부드럽게 얘기했습니다. 그러나 보비는 또 더러워졌고 교회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여선생님은 다시 보비를 방문했습니다. 이미 새 옷은 다 망쳐지고 걸레가 되어 있었습니다. 또 한 벌의 새 옷을 선물하고 잘 타일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보비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여선생님은 힘이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용기를 잃지 말고 계속해 보십시오.” 하고 격려했습니다. 그 여선생님의 계속적인 노력으로 고삐 풀어진 망아지 같은 이 소년은 나중에 훌륭하게 성장하여 중국에 선교사로 갔습니다. 그가 바로 로버트 스미슨 선교사입니다. 그는 성경을 중국어로 번역하여 수백만의 영혼을 주께로 인도한 사람입니다.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비록 험할지라도 포기하지 맙시다. 이제 주님은 육체로 이 땅에 계시지는 않습니다. 주님께서 하시던 일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최선을 다합시다. 충성을 다합시다. 기도하며 합시다. 주님이 함께 하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순례자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 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시 84:6)

종교마다 순례라는 것이 있습니다.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은 매년 예루살렘에 올라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슬람의 경우 반드시 지켜야 할 실천규범 중의 하나가 그들이 성지라고 여기는 메카의 순례입니다. 힌두교는 그들이 신성하다고 여기는 갠지스 강변에 오랫동안 고통스럽게 순례해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티벳의 불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운남, 사천에서 티벳 라싸까지 이어지는 차마고도는 1,000년전 티벳불교가 라싸에서 운남, 사천 장족 지역으로 전래되던 길이라고 하여 이 길을 총 7개월 정도 걸려서 약 2,100km에 달하는 길을 절을 하면서 고행의 길을 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이제 우리에게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순례의 길을 명령하신 적이 없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완성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보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향해서 기도하면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대하 6:34-35). 그러나 이제 구약의 성전은 사라졌습니다. 그러니까 굳이 다 가지 않아도 하나님의 성전을 바라만 보고 기도해도 그 기도가 이루어지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회당들은 모두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을 내었습니다. 그곳을 바라보고 기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보이는 성전이 아니라 부활하셔서 영원한 성전이 되어주신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순례를 하려면 특정한 장소를 신성시하고 그곳을 정해야 하는데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 만남에서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고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다”는 말씀은 장소를 굳이 선택하지 않아도 되게 합니다. 우리는 무소부재(無所不在)란 말을 사용합니다. 하나님은 안 계신 곳이 없고 모든 섭리가 어디에나 누구에게나 미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순례는 여전히 기독교의 중요한 사상중의 하나입니다. 모든 기독교인은 모두가 순례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안식은 이 땅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야할 곳은 이 땅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육신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성전을 향해 여행합니다. 언제나 그리스도인들은 온전히, 그리고 참음으로 가는 순례자입니다. 어린양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피로 얼룩진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순례의 기쁨입니다.
우리가 가는 순례의 길은 외롭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가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바카(눈물) 골짜기를 둘러보고 그곳에서 우물을 파는 순례자들의 고생스러운 수고를 주목하며, 이 눈물의 골짜기를 힘들게 통과하는 동안에 자기 백성들에게 주시는 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카(Baca) 골짜기

어느 곳이나 골짜기는 있습니다. 능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높은 곳이 있으면 낮은 곳이 있는 것입니다. 바카 골짜기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으로 올라갈 때 반드시 통과해야만 했던 좁은 골짜기입니다. 그곳은 메마르기로 유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순례자들은 그곳을 통과할 때마다 빗물을 받아 마시려고 그 가는 길에 구덩이를 파 놓았습니다. 그 장소를 칠십인역은 “애통의 골짜기”, 라틴 불가타 역은 “눈물의 골짜기”로 번역을 했습니다. 이 뜻은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가는 자는 그곳을 우물로 만들어 놓는다” 말입니다.

그러나 바카 골짜기는 호화스러운 왕궁이나 집에서만 지내는 것보다 유익합니다. 따뜻한 공기만 계속 쬐면 근육을 풀어주고 뼈를 부드럽게 만듭니다. 그러나 고난의 차가운 바람은 우리를 단련하며 바짝 긴장하게 만듭니다. 지금 세계 경제가 어렵지만 이런 때가 있어야 합니다. 마치 겨울이 있는 것처럼 불황 속에서 새로운 것이 나타납니다. 좋지 않은 경우로 말하면 세계대전을 통해서 새로운 것이 많이 만들어지고 개발되었습니다. 지금 불황을 타개하려고 전기자동차가 급속하게 연구되고 있고 이것이 상당히 앞당겨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기름이 안 들어가 오염을 줄일 수 있고 이슬람 지역의 중동 국가들에게 달러를 계속 가져다 바칠 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때를 통해서 더 소중한 가치를 배우게 됩니다. 실패 없는 성공은 그 가치를 소중하게 알지 못합니다. 성공을 주신 자를 잊게 만듭니다. 그러나 햇빛이 오랫동안 비춰지지 않으면 해를 찾도록 이끌어 줍니다.
새는 태어날 때부터 알 껍질이라는 고난에 부딪힙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조그맣고 힘없는 아기 새를 위해 대신 껍질을 깨준다면, 새는 한결 쉽게 세상에 나올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 새는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잃게 된 것입니다. 그 사람의 행동이 새를 도와줬다기보다 망친 셈입니다. 언젠가 그 새는 분명 고난을 마주하게 될 것이고, 그것을 극복할 능력이 없어서 더 큰 고난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작은 고난으로 수 차례 단련된 사람만이 더욱 큰 고난을 극복하고 이겨낼 수 있는 법입니다.
환난과 고통은 그 사람의 인격과 신앙을 시험하는 시금석입니다. 알곡인지 쭉정이인지는 까불어 봐야 아는 것입니다. 알곡은 까불면 까불수록 바싹바싹 까부는 사람에게로 들어가고, 쭉정이는 바람에 다 날아가고 맙니다. 모래 위의 집인지 반석 위의 집인지는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장마 물이 쓸고 지나가 보아야 아는 것입니다. 평안할 때에야 누구인들 잘 못 믿겠습니까? 환난 풍파가 참 성도에게는 더욱 더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시 119:71)하였습니다. 여자들 중에 내 짝은 가시밭의 백합화라고 하였습니다. 가시밭의 백합화는 동남풍이 불고 서북풍이 불 때마다, 연약한 꽃송이가 세찬 가시에 찔리면 찔릴수록 향기를 더욱 날리는 것입니다. 즉 환난 중에도 감사와 기쁨의 향기를 잘 드러내는 예수의 신부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위험해 보이고 힘들게 보이는 바카 골짜기는 사실 안전한 곳입니다. 이러한 곳이 있기 때문에 순례객들은 긴장을 하고 기도하며 지나갑니다.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가면서 우물을 파야하는 수고를 통해서 우리는 값진 교훈을 얻습니다. 우리가 골짜기를 지날 때에는 기쁨이 없는 것 같습니다. 힘이 듭니다. 목이 마릅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것이 축복입니다. 그것이 기쁨입니다. 하나님 잊어버리면 다 끝나는 것입니다. 축복이 없어요. 무엇이 축복입니까? 하나님을 찾는 것이 축복입니다. 눈물의 골짜기에서는 하나님을 찾습니다.
별들은 가장 어두운 밤에 가장 밝게 빛납니다. 향품은 빻아질 때 가장 많은 향기를 풍깁니다. 어린 나무들은 흔들릴 때 더 빨리 뿌리를 내립니다. 금은 문지를 때 더 빛이 납니다. 하나님의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처자식도 없습니다. 방 한 칸도 자기 이름으로 등기된 것이 없습니다. 거기다 심장병, 안질, 신경통 등 그의 몸은 완전히 종합병원입니다. 주변 사람들은 그런 바울을 동정하는 마음으로 측은히 여겼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본인의 태도입니다. 그는 단 한번도 “나는 불행하다. 나는 비참하다” 라고 한 일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나는 기쁘다. 너희도 기뻐하라.” 고 외치고 다녔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곳

순례객의 목적은 하나님(신)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야할 곳은 이 땅에 없습니다. 예루살렘이 아닙니다. 그곳에 가서 하나님을 만난다면 우리는 모든 힘을 들여서 가야합니다. 그러나 그곳에 안 계십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일정한 장소에 계시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 만나는 곳이 사라진 것입니다. 어디에 가서 하나님을 만나겠습니까?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만날 수 있는 장소가 없다는 것은 우리의 뜻대로 하나님을 만날 수 없음을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그분이 나를 찾아오셔야 합니다. 우리는 어디 가서 하나님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분이 찾아오셔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예루살렘 성전을 없애는 대신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우리가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눅 3:16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라고 했습니다.
눅 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요 3:34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
우리는 하나님을 특정한 장소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장소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 땅의 특정한 장소가 아닙니다.
요 20: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사도행전 2: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오늘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이 성령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부어 주시면 그곳이 어디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요한복음 21:3절에 보면 예수님 십자가 지시고 분명히 부활하신 것을 확인한 제자들이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로 가노라” 하니까 다른 제자들도 다 따라갔습니다. 베드로는 할 일이 없다고 판단하고 3년 전 자기 직업으로 돌아가겠다고 배를 타겠다고 하니까 다른 제자들도 우르르 따라간 것입니다. 제자들은 체념했습니다. 더 이상 보이지 않으시는, 만날 수 없는 주님을 위해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실패의 현장에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사실 고기 잡는 방법이 틀렸다든가 그물이 나빠서가 아닙니다. 솔직히 그들이 배 왼편에다 그물을 쳤기 때문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거기 계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와 함께 할 때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40년 간 미국 남가주대학 심리학 교수로 있던 골드 박사는 제자들 가운데 성공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원인을 조사했습니다.
첫째, 걸음걸이가 빠르다. 둘째, 언제나 강의실에 오면 앞자리에 앉는다(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자세). 셋째, 시선을 집중시킨다. 넷째, 항상 웃음을 띤다. 다섯째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실패와 좌절에 빠진 곳에 예수님을 모셔야 합니다. 예수님과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전엔 혼자 했으면 이제는 예수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방법은 순종뿐입니다.

우리가 가는 순례의 길에 하나님 없이 가면 순례하나마나 입니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하나님을 못 만나면 순례의 의미가 없습니다. 갈릴리 바다로 다시 가 볼까요. 고기 못 잡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 고 하셨을 때 제자들이 순종했습니다. 그 때 그물이 찢어지지 않을 만큼 153마리의 고기를 잡았습니다.
마태복음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하고 함께 살아본 사람은 압니다. 함께 하는 것이 사실 얼마나 귀찮고 힘든 일인지 모릅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가 가는 길이 바카 골짜기라고 해도 우리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항상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셰익스피어에 비견되기도 한 찰스 디킨스라는 영국 소설가가 있습니다. 부모님이 많은 빚을 지고 감옥에 가게되자 그는 12살 때 런던의 한 구두약 공장과 상표를 붙이는 공장에서 일하게 됩니다. 그는 그 때에 “No advice, no counsel, no encouragement, no consolation, no support from anyone that I can call to mind, so help me God!(충고도, 조언도, 격려도, 위로도, 도움도 나에게 줄 사람은 떠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구하소서!)” 라고 기도 했습니다. 다윗은 시 20:7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며 순례의 길을 갈 때 바카 골짜기가 기쁨의 골짜기로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바카 골짜기가 죽음의 골짜기가 아니라 생명의 골짜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께 피하세요.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2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3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시 16:1-11)

우리 인사합니다. “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보험개발원에 따르면 올 설 명절에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이 30명이고 설 당일 날 교통사고 부상자는 5,176명이나 됩니다. 대물사고 발생은 4,692건입니다. 이것은 연 평균보다 8-9% 감소한 것이라고 합니다. 군대로 말하면 대대 약 500명, 연대 2천~3천명(대령:***)이고, 사단 1만~2만 명(소장:☆☆)이면 10개 대대 또는 2개 이상의 연대가 전투 능력을 상실한 부대가 된 것이고, 1개 사단의 절반이 중상 병이 생기고 자동차는 쓸모 없이 된 것입니다. 죄송하지만 고인이 된 30명은 아마 자기 자신이 죽을지 몰랐을 것입니다. 한 사람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도 이런 불행은 나에게는 영원히 다가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저도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앞에 고인이 된 30명 중 한 사람도 자기 자신의 죽음을 알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 또한 모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가 사는 군포가 유명해 지고 있습니다. 군포 여대생 납치하여 살인한 사람 때문입니다. 이 사람이 이 일대에서 실종된 부녀자 7명을 모두 살해했다고 자백했습니다. 매스컴이나 다른 사람들은 ‘군포’ 라는 말을 쉽게 하지만 정작 여기에 사는 우리들은 말도 못하고 숨을 죽이고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피하세요.
오늘 본문은 다윗이 쓴 것입니다. 다윗은 전 국력을 사용해가며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 왕의 칼을 피해 10년을 도망 다녔습니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전쟁의 역사 속에 늘 군인으로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는 언제나 죽음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신과 함께 있던 병사들이 죽는 것을 수없이 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시지 않으면 도저히 살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이스라엘의 국토는 작습니다. 면적이 강원도와 비슷합니다. 다윗 시대 때의 면적은 유대 주변이기 때문에 더 적습니다. 피할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1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적들과 사울만이 다윗을, 우리를 죽이려는 것이 아닙니다. 사단은 우리를 우는 사자와 같이 찾는다고 했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이미 믿는 우리에게도 사단은 손을 내밉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지시기까지 사단은 쫓아 다녔습니다. 이 세상에 안전한 곳은 아무 곳도 없습니다. 그 어느 곳에 피해 숨어 있어도 사탄 마귀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사실은 21세기가 성령 시대가 아니고 21세기는 무신론의 재도전 시대이고, 적 그리스도의 시대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든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켜 줄 수 있는 안전지대(safety zone)가 필요합니다. 이 세상 어느 곳을 찾아가도 안전한 땅(Safety Island)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힘없고 연약한 자들을 위하여 가장 안전한 곳을 마련해 두셨습니다. 다윗은 이 안전지대를 종종 피난처라고 말했습니다. 시12:5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제 일어나 그를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
다윗은 어려서 형들과 목장에 나갔다가 골리앗이라는 거인의 적장이 이스라엘을 희롱하는 것을 보고 겁없이 골리앗에게 도전장을 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본 사람입니다. 다윗의 진정한 피난처는 도피성이 아닙니다. 다윗의 도피성이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 피하면 하나님이 지켜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어 십자가에 자신의 몸을 던져 영원한 안전 지대인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미국의 서부의 평원지대 중에 끝없이 펼쳐지는 대초원 지대가 있는데 사람들은 때때로 그곳에 사냥을 하러 가기도 하며 또 그밖에 다른 목적으로 그곳에 가는 일이 있다고 합니다. 건조기에는 그 대초원 지대에 불이 붙어서 타오르는데 그때는 불길이 60미터 내지 90미터나 높게 타오르게 되고, 불길이 번지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벌판을 달리는 말보다도 더 빨리 번져 나간다고 합니다. 이때, 그곳에 머물러 있던 사람들은 어떻게든 빨리 도피하지 안으면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신속히 안전지대를 만들어야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안전 지대를 어떻게 만드냐 하면 맞불을 놓아서 자신들이 머물러 있는 초원 지대를 태워 버리면 더 이상 불길에 휩쓸릴 염려가 없게 된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피로 죄를 소멸시켜서 안전 지대를 만들어 놓으셨는데 그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되며 안전 지대가 됩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에 오시는 것만으로 사단은 우리를 헤하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려 세우신 교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 이름만 들어도 마귀는 벌벌 떱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찬양하는 성도들이 모여 있습니다. 이 세상에 교회를 떠나서는 그 어느 곳에서도 자신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안전 지대는 없습니다.

어거스틴이 쓴 명저 중에 『하나님의 도시』(City of God)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는 두 개의 큰 도시가 나옵니다. 하나는 성공과 부와 영화로 가득 찬 도시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도시에는 영생이 없습니다. 다른 도시는 세속화된 도시처럼 화려하거나 영화롭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도시에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신앙 위에 서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세속 도시를 로마로 보았고 하나님의 도시는 기독교로 보았습니다. 로마는 망했고 기독교는 세계로 뻗어 나갔습니다. 하나님께 피하면 삽니다.

고백하세요.
본문 2절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그랬습니다. 하나님께 피한 사람, 하나님만 붙들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요청하세요. 제가 일산에 있을 때 함께 있었던 여 전도사님이 계십니다. 이분이 아파트를 구입할 때 구 아파트 이름이 “청구” 아파트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하나님 청구아파트를 청구합니다.” 하셔서 아파트 입주하셨습니다.
몸은 교회에 나오는데 몸 속에는 부적 넣고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집에 가면 대들보에 부적 붙여놓은 사람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 아십니다. 그런데요 몸에 지닌 것 보다, 집 대들보에 붙여 놓은 것 보다 더 심한 것이 있습니다. 마음에 의심하고 주를 믿지 못하고 다른 것에 기대어 보려는 마음의 부적입니다.
다윗은 4절에서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그들이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 그랬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요, 이것저것 많이 구합니다. 예수께서 믿고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하셨으니까 무엇이든 구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분명히 합시다. 다윗의 시(기도)를 보면은이요 사실 많은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입니다.
본문 3절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성도라는 단어만큼 좋은 말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말은 성도입니다. 목사도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장로도 집사도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목사는 되고 장로 집사는 되었지만 성도가 안된 사람이 있습니다. 성도를 우습게 압니다. 여러분! 목사, 장로, 집사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구원받습니다. 총신대학교 교훈은 “신자가 되라, 학자가 되라, 성자가 되라, 전도자가 되라, 목자가 되라”(1948년 6월 9일 신설장로회신학교 특별 기도회 때 박형룡 박사가 열왕기상 6장 1-7절의 본문으로 “선지 학교의 중건”이란 제목의 설교에서 나온 것이다)입니다. 믿는 신자가 되어야 하고 거룩한 성자(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먼저인 것입니다. 그리고 전도자가 되고 목사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가 되면 무엇이든 해도 됩니다. 그러나 성도가 되지 않고 일을 하니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사단은 목사, 장로, 집사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성도가 무서운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만 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와 함께 한 성도들을 존귀한 자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항상 장수였습니다. 마치 군대 문화와 같은 곳에서 산 사람입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도가 존귀한 것을 알았습니다. 성도는 다윗에게 늘 기쁨이었습니다.

훈계와 교훈을 받아들이세요.
본문 7절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 그랬습니다. 잠언 15:32 “훈계 받기를 싫어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경히 여김이라” 고 합니다. 하나님의 훈계를 받아들여야 생명의 길로 가게됩니다(잠 4:13, 10:17).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훈계를 무시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왜 밤마다 다윗은 양심이 교훈을 했을까요? 예 밤마다 그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밤하늘을 보면서, 잠자리에 들어서도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시 121:3-4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어떻게 이런 표현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자기가 밤에 하나님을 생각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자기는 졸립니다. 육신의 피곤이 밀려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앞서 모시세요.
본문 8절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마치 맛있는 것이 있으면 자기가 먼저 먹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을 먼저 드리는 것처럼 다윗은 하나님을 자기 앞에 모십니다. 하나님을 믿기는 하는데 뒤에 모시는 분이 참 많습니다. 자기의 우선 순위에서 하나님은 뒷전입니다. 다른 모임이 먼저입니다. 다른 것에 돈 쓰는 것이 먼저입니다. 다른 생각에 마음 쓰는 것이 먼저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모든 먼저입니다. 첫 것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다윗은 지금 곤경에 빠져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항상’ 이라는 말은 더 중요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거 아세요? 사실은 주님이 우리를 앞에 두셨습니다. 나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시 17:15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제가 다시 번역해 보았습니다. “…내가 일어날 때에 주를 닮는 것으로 만족할 것입니다.”

최근까지도 북한에서는 지하 그리스도인들이 발견되어 공개처형을 당하고 있다합니다. 한 목사님이 북한의 지하교회 교인 한 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북한이 공산화 된지 벌써 60년이 넘어가는데 아직도 북한에 기독교인이 남아있을 수가 있습니까?” 이 질문에 그분은 뜨거운 눈물을 주루룩 흘리며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자신이 8살 때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마을에 공산군이 들어왔습니다. 강가에서 놀고 있다가 마을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 친구들과 함께 달려가 보니 공산군들이 마을 공터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 묶어 놓고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데 그 가운데 자신의 엄마 아버지도 끼어 있었습니다.
“예수를 안 믿는다고 하면 살려주고, 믿는다고 하면 죽이겠다. 빨리 대답해라” 엄마 아빠가 예수를 안 믿는다고 하고 그 자리에서 풀려나기를 바랐지만 입을 꾹 다물고 말이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엄마아빠에게 빨리 ‘예수를 안 믿는다’고 하라고 울부짖으며 소리를 쳤지만, 어른들은 괴로워 두 눈을 꼭 감아버렸습니다. 화가 난 공산군 장교는 사람들을 모두 목만 남겨놓고 땅 속에 묻어버렸습니다. “지금이라도 예수를 부인해라”
그러나 하룻밤이 지났지만 아무도 부인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누군가가 나직한 목소리로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찬송을 부르기 시작하자 다른 사람들도 함께 찬송을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공산군 장교는 더 볼 것이 없다며 장갑차를 몰고 와서 그 위로 지나가 버렸습니다.
“어머니 아버지의 머리가 깨지면서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는 모습을 생생히 보았습니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그 부모님들을 위해서 먼저 예수님이 그렇게 죽어주셨더군요. 그 사실을 알고 난 후부터 저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은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시면서 십자가에 죽으셨지만(빌 2:8) 정작 자신은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밖은 로마 군인도, 무지하여 침을 뱉으며 따라오던 사람들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던 사람들도 모두 용서하시고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셔서 처음 하신 말씀이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죄를 고백해야 성도가 됩니다. 회개해야 새 사람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제사장은 그 속죄 제물을 먼저 드리되”(레 5:8) 라고 했습니다. 급한 것은 나의 속죄입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