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십자가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 6:14)

베토벤의 소나타 형식의 알레그로 1장은 종달새가 지저귀듯 상쾌한 바이올린 선율로 시작됩니다. 이어 계곡에서 물이 흐르듯 피아노가 바이올린과 어울리면서 희망에 찬 봄을 그려냅니다. ‘바이올린 소나타 5번’은 베토벤이 청각장애가 심했던 시기에 만든 작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두운 정조나 불안함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의 예상을 반발하듯 바이올린은 긴장감이 느껴지는 경쾌한 울림과 감미롭고 깊은 소리로 청중의 마음을 어루만집니다. 피아노가 앞으로 나가면서 바이올린이 뒤따르는 2악장은 느린 템포로 이어지며 청중을 포근함에 빠져들게 합니다. 마치 물소리와 종달새가 노래하듯 선율이 상승했다가 하강하며 역동적으로 미끄러져 나가며 소리 하나 하나를 서두르지 않고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마지막 4장은 베토벤 특유의 열정적 멜로디가 힘차게 울립니다. 하나님의 세계를 위대한 찬양하는 위대한 노래입니다.

한국이 제2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숙적’ 일본과 처절한 ‘야구전쟁’ 끝에 아쉬운 준우승에 머물고 말았지만 전 세계 야구팬들에게 강인한 인상을 남긴 ‘위대한 도전’ 이었습니다.
전국 야구 고교팀이 55개에 불과한 한국은 고교팀 수가 4천100개가 넘는 일본과 5번이나 붙어 모두 대등한 경기를 펼쳤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사령탑의 중책을 맡았던 김인식 한화 감독은 ‘위대한 도전’ 이라는 말로 우리에게 더 감동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진짜 위대한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위대한 것이 무엇입니까? 아마도 우리에게 있는 그 모든 것을 통 털어 한가지만 말하라면 그것은 ‘십자가’입니다. 여러분도 동의하십니까? 우리는 지난주에 이어 이 위대한 주제로 다시 넘어왔습니다.

본문을 볼 때, 사도 바울이 말할 때 한 문맥을 염두에 두는 것이 중요합니다. 11절에 ” 내 손으로…”, 14절에 “그러나 내게는…” 이라고 합니다. 사도는 자신과 다른 어떤 사람들, 곧 바울이 떠난 후 갈라디아에 있는 여러 교회를 돌아다니며 말하며 설교했던 거짓된 유대교 선생들과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우리를 구원하여 준다고 가르치고 그곳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 구원의 길이 단순한 성도들을 매우 혼란한 지경에 빠뜨렸습니다. 13절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그러나 사도는 말합니다. 내게 있어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그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거짓 교사들은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확실히 해야 합니다. 우리가 의지해야할 권위가 어떤 것인가를 명백하게 해야 합니다. 그것보다 더 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궁극적으로 두 가지 권위 밖에 없습니다. 성경이냐 아니면 사람들이 좋아하는 다른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밖에 다른 대안은 없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펼칠 수 있는 다른 것이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떠난 모든 것에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을 떠나서는 얼마든지 많은 가능성들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심” 그것만이 진리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말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 것만이 우리의 신앙을 측정하는 기준이 됩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중립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설령 그것이 양분된다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거치는 것이 되든지, 아니면 우리의 제일 위대한 것이 되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바울은 전도자이자 설교자입니다. 그는 “나를 구원하는 것이 십자가이다.” 라고 말합니다. 고전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강의(講義)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언제나 설교를 했습니다. 기독교의 임무는 강의하는 것이 아니라 전도(설교)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정치문제나 사회 문제에 대해서 조심해야 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다루지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는 고백 속에는 당시의 복잡한 나라 사이에서 정치문제 속에서 이 재능 있는 대 학자인 바울의 고백은 그의 모든 철학과 심오한 이해력, 헬라의 철학과 시들, 그밖에 다른 수많은 문제에 대해서 미련한 자가 되기로 작정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정치운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당을 만든 것도 없습니다. 하나의 학파를 만들어 계승시키지도 않았습니다. 자원 봉사자도 아니며 박애 주의자도 아닙니다.

그렇게 하니까 일부 사람들은 바울을 비판했습니다. “그 사람은 언제나 십자가만을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피에 대해서만 말한다. 그것은 너무나 단순하고 유치하다. 그는 자기 말을 듣는 청중의 생각은 조금도 안 한다.” 하며 불평을 늘어 놓았습니다.
사도는 그러나 그렇게 한 것이 모두 의도적인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그는 고린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자신도 지혜에 대해서 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고전 2:6) 라고 합니다. 이것이 감추어진 지혜입니다. 그것은 신비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현실적으로 유대나 헬라나 로마인 모두 당시 상황이 매우 복잡합니다. 정치적으로 국가의 운명과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생각은 다릅니다. 아무리 현실 정치의 문제가 복잡하고 중요하다고 해도 우리의 구원 문제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거듭나야 합니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으면 십자가는 꺼리는 것이 됩니다.

십자가를 유대인들이 꺼리는 것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메시야 생각과 예수 그리스도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의 왕으로 군사로 왕 노릇 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자들도 한 때 예수를 왕으로 추대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메시야라고 주장하던 자가 힘없이 무능하게 십자가에 죽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깊은 상처와 마음속에 분함을 느꼈습니다. 대단히 속은 것입니다. 구세주, 구원자가 죽다니…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분이 말하고 실천한 것은 그동안 유대인이 가지고 있었던 메시야 사상을 다 무너뜨렸습니다. 헬라인들도 똑 같았습니다. 그들은 대단한 철학을 발전시키고 있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 무너지고 아무 쓸모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는 세상을 다 지배하고 있는데 로마 황제 이외에 주가 따로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십자가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다 무너뜨렸습니다. 기존의 생각을 사상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십자가 앞에 무릎 꿇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가 사람을 하나로 만드는 방법을 아시겠습니까? 십자가에 앞에 모인 사람들은 자신의 철학이 자신의 사상이 모두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사상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고 선포합니다. 우리의 생각이나 이해로 구원받지 못합니다. 여러분! 철학을 좋아할지 몰라도 그것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선한 사람, 가장 철학적인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비 크리스천들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믿지 않겠다, 내가 이해하기 까지는 그 어떤 것에도 나를 맡기지 않겠다.” 사람은 스스로 모든 진리를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못 믿는 것은 자신이 다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언제 하나님을 다 이해하고 믿겠습니까? 아마 100살을 살면서 평생을 공부하고 연구해도 답은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찰스 웨슬리는 그의 찬송시에서 “신비요, 죽을 수 없는 자가 죽다니.” 그랬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하나님 속에 감추어진 비밀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능력 밖에 있습니다. 이것은 초자연적인 것이며 우리가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믿음이 왜 필요합니까? 이해하고 믿는 것은 믿을 수도 없지만 믿음이 아닙니다. 자식이 부모님을 다 이해하고 따라갑니까? 믿기 때문에 따라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따라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을 다 이해하고는 예수님 못 믿습니다.

왜 사람이 타락했습니까? ‘교만’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교만하기 때문에 십자가를 따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너 자신이 제일 위대하다고 말합니다. 너 말고는 믿을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예수님 당시 제일 모욕적인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입니다. 이 말씀을 그들이 싫어했다는 것이 쉽게 이해되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들이 구원받는 쪽에 있다는 것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타락하여 구원이 필요하다는 의미에서 “잃어버린 자”가 암시하는 것을 싫어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주장은 여기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 다음에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결국 우리가 구원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라는 것은 달리 표현하면 우리 인생들은 모두가 실패자라는 것입니다. “의인은 없다. 하나도 없다” 는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 때처럼 똑같이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인간이 어느 정도 타락했고 죄가 있다는 것도 인정하지만, 또한 100%센트 아무 흠이 없고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적어도 완전히 타락한 창녀와 술주정뱅이와 사마리아인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 주셔야지요?” 그런데 이 논리는 도덕적이냐? 비도덕이냐?, 윤리적이냐 비윤리적이냐? 또는 사람의 규범을 얼마나 잘 지켰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마저 다 파괴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포도원에 가서 아침 일찍부터 일한 사람이나 저녁에 온 사람이나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선과 의, 도덕적인 모든 규범이 주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태양 빛이 강하게 비추면 작은 등불은 있으나 마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이 차이를 완전히 없애버렸습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을 격노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로마서 3장에서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1-23) 라고 말합니다. 이 말이 바로 그들을 미치게 만들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차별이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기존의 유대인의 율법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자기들이 가지고 있었던 율법, 철학을 다 버리지 않으면 십자가의 위대함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미워합니다. 지금도 선을 행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배웠다는 사람들, 도를 닦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십자가를 쫓지 아니합니다. 십자가는 다 같다고 말합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그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인정해야 합니다. 고백해야 합니다. 십자가만을 말해야 합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그동안 우리가 좋게 여기던 것, 사실 그것들이 다 똥 같았다고 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보니까 더럽다는 거예요. 십자가는 철저하게 우리의 것으로는 소망이 없다고 말합니다. 능력이 없다고 말합니다. 오직 십자가만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영광의 왕이 죽으신 그 위대한 십자가 앞에서
내가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내게 있는 가장 크고 좋은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 모든 교만 헛된 줄 알고 버리게 하소서.

영화인들이 제일 좋아하는 지하철역은 ‘개봉역’ 이랍니다. 제일 싼 것을 좋아하는 아줌마는 ‘일원역’ 입니다. 학교 가기 싫은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역은 ‘방학역’이며, 마라톤 선수가 가장 좋아하는 역은 ‘월계역’ 이랍니다. 그런데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어떤 역 이름이 제일 좋을까요? ‘보라매역’ 입니다.
내가 위대한 십자가를 곰곰이 생각할 때 나는 거기서 무엇을 봅니까? 이 세상 이전에도 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보지 못할 광경을 봅니다. 나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그 위대한 십자가를 봅니다.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의 책에 보면 저자이기도 한 포리스터 카터(Forrest Carter)인 주인공 체로키 인디언 소년이 나옵니다. 이 소년이 할아버지와 함께 살다가 할아버지가 늙어 더 이상 돌보기 어렵게 되자 이 아이를 고아원에 맡깁니다. 그런데 고아원에는 가끔 양자를 삼으려고 아이를 데리러 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아이는 자기가 다리가 불편하고 얼굴에 주근깨가 많아 늘 자기는 아닐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일 또 양 부모님들이 오니까 아침에 운동장에 깨끗하게 하고 모이라는 선생님의 말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아침 일찍 일어나 이 아이도 얼굴을 깨끗이 닦고 머리를 빗고 나갑니다. 그리고 한 줄로 쭉 서 있는데 다리를 절지 않는 것처럼 보이려고 똑바로 서 있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역시 그 날도 이 아이는 선택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체로키 인디언 보다 더 못한 죄인인 바울의 고백대로 벌래보다 못한 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나를 자녀 삼아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우리 주님을 반드시 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는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는 순간 다 해결됩니다. 아버지 되시는 주 하나님께서 우리를 책임져 주실 것을 믿습니다.
 

기독교의 핵심 십자가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13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갈 6:11-15)

여러분은 9.11 테러가 일어날 당시 어떤 일을 하고 계셨는지 기억하십니까? 그 사건의 충격이 너무 커서 사람들은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자기들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정확하게 기억해 낸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성수대교가 무너진 참사와 삼풍백화점이 무너져 내린 사건이 있습니다. 광염교회 조현삼 목사님(감자탕교회 이야기)은 삼풍 백화점이 무너질 당시 버스를 타고 가다가 그 소식을 듣고 그 즉시에 내려서 백화점을 향해 뛰어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생명 구출에 대한 귀중한 경험을 했다고 합니다. 성수대교가 무너졌을 때 다리가 끊긴 바로 앞에서 앞차가 강물에 빠지는 것을 목격하고 자신은 브레이크를 잡아 겨우 차가 멈춰 섰을 때 한참을 하늘만 쳐다보고 눈물이 나왔다는 분의 이야기를 라디오를 통해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불행한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충격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충격적인 죽음이 있었습니다. 그 죽음은 싸움으로 찢겨지고 상처투성이인 우리에게 훨씬 더 중요하고 더욱 필요한 죽음이었습니다. 그 죽음을 우리의 눈으로 지켜보지는 못했지만 그 날 그 때의 현장이 너무나도 생생하기에 바로 전에 있었던 죽음과 같이 다가옵니다. 바로 갈보리 언덕에서 일어났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입니다. 그 때의 그 군중소리, 십자가에 못박는 소리, 나를 위해 기도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야 합니다. 그래야 그 죽음이 나와 상관이 있습니다. 아무리 전쟁의 소식이 들려와도 자기와 상관없는 사건은 충격을 받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생생한 그 현장의 소리를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십자가 사건이 나와 상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산을 옮길 수 있고, 산을 평지로 만들 수 있는, 믿음을 제게 주소서
…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으로 내 마음 넓게 해주신, 그것으로 불꽃이 일어 가득 차게 하소서. 내 있는 힘 다 기울여 당신의 열심으로 그들을 사랑하며 당신의 문으로 인도하겠나이다. 목자 되신 주님이 위하여 죽으신 양들을 위해 -웨슬리(C Wesley)

여러분은 이 시가 말하는 식으로 살 수 있겠습니까? 이 시가 말하는 주님을 찬양하면서 나의 시간을 사용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있습니까?
자, 이 질문에 답하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바울이 쓴 오늘 본문말씀을 봅니다.
본문을 시작할 때 바울은 갈 6:1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고 합니다. 우리는 글자의 크기가 모두 같게 만들어서 성경을 봅니다만 바울이 오늘 본문을 기록할 때는 큰 글자로 썼다고 말합니다. 여기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큰 글씨로 쓴 오늘 본문의 중요성을 알기 위해서는 본문의 배경을 이해해야 합니다. 바울은 지금 갈라디아서를 끝마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바울의 전도(선교)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에게 거짓교사가 가만히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좋지만 확실한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면 할례를 받아야 되고 율법 아래로 들어가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 문제를 대처하기 위해서 편지를 쓴 것입니다. 여러분이 전도한 사람에게 다른 사람이 가만히 들어와 이상한 소리를 하면 여러분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전도를 해 보셨어야 알지? 제가 예전에 서소문 공원에서 전도하는데 제 앞에 여호와의 증인들, 안식교인들도 전도하며 다니는 겁니다. 그 사람들이 나누어준 전도지를 다시 회수하면서 이거 잘못된 겁니다. 하고 다시 다 걷고 다녔습니다. 바울이 애써 전도해 놓은 갈라디아 성도들이 흔들리게 생긴 겁니다.

바울의 첫 번째 요점은 이 세상에서의 삶의 문제는 매우 심각하고 엄숙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그저 히히낭락하며 지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엄청나게 진지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앞 절에 보면 “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고 합니다. 사람은 심고 거두는 도덕적 이치 속에 살아갑니다. 우리 모두는 자기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일로 하나님 앞에서 평가를 받습니다. 그 심판대를 피해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육체를 위하여 심느냐, 영혼을 위하여 심느냐 하는 것입니다. 영혼을 위하여 성령을 위하여 심어야 되는데, 어떻게 살아야 성령을 위하여 심느냐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문제입니다. 사도는 그것을 심어오던 중인데 거짓 교사들 때문에 그 문제가 뒤죽박죽 되어버렸습니다. 초대교회에만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도 일어납니다. 요즘은 너무 태평시대에 살아서 그런지 온통 설교가 웃기는데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웃기지 못하는 목사는 인기도 없습니다. 한번이라도 더 웃겨보려고 목사도 매우 노력합니다. 이런 현상을 나쁘다고만 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복음을 가려내지 못하고 히히낭락할 때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웃고 즐기는 동안 사탄은 슬며시 고개를 들고 우리에게 틈탑니다. 우리의 진정한 웃음은 죽음 앞에서 미소짓게 하며, 하나님의 심판대에 이를 때에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고 확신 시켜 주며, 말로 다 할 수 없는 영광 중에 있는 영생과 영원한 복락을 보증할 것을 위하여 이 세상에 무엇을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대 사도인 바울이 그 해답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자랑하는 일은 도저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가 자랑해야 할 그 어떤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이는 그가 자랑하는 것입니다. 저도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할 특권을 얻었습니다. 어떤 분이 그러더라구요. 목사가 설교를 하지 못하는 것은 마치 벤치에 앉아있는 운동선수와 같은 것이라구요. 그만큼 설교하는 것은 목사에게 특권이자 중요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 특권을 가지고 여러분에게 증거 할 유일한 메시지는 바로 바울과 같습니다. 다른 것은 없습니다. 이상한 것 기대하지 마세요? 저는 연예인도 아니고 마술사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바르게 증거 해야 할 사명만이 있는 목사입니다. 그 대답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복음이며 기독교의 메시지요, 핵심이자 중심입니다.
바울은 언제나 십자가를 보여주고 싶었고 전달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다른 사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확실히 말해서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봐야 합니다. 기독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초대 교회의 메시지는 무엇이었습니까? 사도들은 한결같이 자기들의 생각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께 받은 메시지를 전하노라’ 고 했습니다. 초대교회의 메시지가 십자가였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 시대에도 십자가의 이야기는 유쾌한 이야기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전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기 얻으려고 전하는 것 아닙니다. 십자가가 인기가 있었던 시대는 없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십자가는 인기가 없습니다. 십자가를 전하는 것은 유대인에게는 꺼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이방 나라인 헬라인에게 인기가 있었느냐? 그것도 아닙니다.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본문 12절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시작하면서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거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를 전하면 언제나 그것이 사람들에게 거침이 되었습니다. 1세기에 살던 사람들은 십자가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로마인도 모두 싫어했습니다. 기독교의 메시지의 핵심이 왜 십자가입니까? 예수님도 산상에서 가르치신 적이 있고 제자들과 3년이 넘는 세월을 가르치시며 다녔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누가 능가할 수 있겠습니까? 공자, 맹자, 석가 이 세상 성인이 다 와도 안됩니다. 예수님이 그러한 가르침으로 사람이 만들어 질 것 같으면 그렇게 일찍 십자가에 달리실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장수를 누리시면서 죽으실 때까지 가르쳐야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서두르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 마지막 승천이 있을 때까지도 제자들은 십자가를 몰랐습니다.
예수님의 교훈적인 말씀으로만 제자들이 변화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보세요? 십자가 죽음 없이도 교훈으로만 될 수 있었다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이유가 없어집니다. 바울이 “산상 설교 외에는 자랑할 것이 결코 없나니…” 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윤리적 교훈 이외는 자랑하지 않겠노라” 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십자가이며 제자들은 핍박을 받아가면서 십자가를 전했던 것입니다. 아마도 십자가를 전하지 않고 윤리적인 이야기나 전하고 유머나 하면서 다녔다면 제자들이 순교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좀더 하기를 원합니다. 아마도 저와 생각을 달리 하실 분들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것이 혹 주님과 관계없는 바울의 주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안 보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결정적인 증거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것을 기억하지 못하지요. 가이샤랴 빌립보 지망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 사건 바로 전에 일어난 일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고 묻자, 베드로가 선뜻 나서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대답합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이 일을 알게 한 것은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하시고 베드로에게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3-18)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까지 기억하고 다음을 읽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마태복음 16:21-23입니다. “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베드로가 예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후 우리 주님은 즉각적으로 죽으실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그것을 쉽게 인정하지 못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베드로만 실수한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 모두가 그랬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말하지 않으면, 십자가를 전하지 않으면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일이 있은 후에 최후의 만찬이 열렸습니다. 거창하게 말해서 만찬이지 그저 빵 몇 개와 쉽게 구할 수 있는 포도주 한 두 병이 전부였을 겁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앞으로 어떻게 하실 것인지 정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 십자가 사건 후에 성찬식을 하지만 최초의 성찬식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지시기 전에 직접 집례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거기서 떡을 먹고 있을 때 떡을 취하여 떼어 주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그리고 잔에 포도주를 따르며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 22:19-20) 쉽게 말하면 “이 빵은 찢겨질 내 몸이요, 너희를 위해서 흘릴 내 피라” 고 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대한 주님의 증거는 이 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변화산에 올라가 기도하시고 내려오신 후 예루살렘을 향하여 얼굴을 돌리시고 나아가시는 모습을 봅니다. 통계적으로 말하자면 4개의 복음서가 이적과 예수님의 교훈은 교차적으로 증거하지고 있지만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는 모든 복음서가 기록하고 7주일 동안의 사건을 집중적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꺼리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그뿐만이 아닙니다. 2장에서도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그는 오직 십자가를 알리고 전도한 사람입니다. 바울이 십자가를 전한 까닭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오랜 계획에 의해서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생각하지 않고 잊으려고도 하지 마십시오. 십자가를 이상화(理想化) 시키려 한다든가 철학적으로 말하려고도 하지 마십시오. 또 그것을 아름답고 기이한 것으로 만들려고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나는 십자가를 사랑합니다” 하시기만 하면 됩니다. 이 사랑스런 십자가를 전하시다가 주님 앞에 서시는 날 진짜 웃으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교회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 6:9-10)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요한복음 3:16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은 ‘세상을 사랑’ 하고 ‘사람을 사랑’ 하시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서 독생자를 사람들 손에 내어 주는 방법을 택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를 부끄럽게 하지 말아야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서 각자에게 주신 능력을 활용하고 날마다 기도하고 스스로 훈련하는 방법을 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서 열심히 공부하고, 기도하고, 땀흘리고 애쓰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기도에 대해서 착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교회를 오해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거져 받으려고만 하는 곳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앉아서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하늘에서 공짜로 떨어지는 것을 구하는 곳이 아닙니다. 열심히 일하며 기도하는 곳입니다. 이미 주신 달란트를 잘 활용하기 위해서 지혜를 구하고 건강을 구하는 곳입니다. 그것은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함이어야 합니다.

요즘 우리가 힘들다고 하는데 지구촌에는 이런 아이들도 있습니다. 제가 인도와 네팔을 다니면서 본 것인데요, 차를 타고 가다보면 카다란 돌산아래에 앉아서 돌을 깨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까이 가보면 어린아이들도 있습니다. 이곳에 루빠라는 어린 소녀가 있습니다. 4살 때부터 어머니와 이곳에 와서 돌을 깬지가 4년이 되었습니다. 돌 깨는 일이 어린애 장난이 아닙니다. 손에는 온통 피멍이 들어있었습니다. 오른손 가운뎃손가락은 한쪽에 깊숙한 흉터가 나 있었습니다. 망치 머리는 아이의 주먹보다 훨씬 컸습니다. 1센티만 어긋나도 손가락은 박살날 듯 보였습니다.
루빠는 카투만두에서 50킬로미터 떨어진 아그레콜라 강변 럽세 바거드 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시계는 오전 10시 30분을 가리켰습니다. 아이는 아침밥을 먹지 못했습니다. 늘 그렇듯 오늘도 새벽 5시에 일어나 물로 배를 채우고 물안개가 걷히는 때부터 지금까지 돌을 깨는 중입니다. 이렇게 깬 돌을 100미터 떨어진 강까지 매일 15킬로그램이 넘는 광주리를 이마에 끈을 맨 채 하루에 한 두 번씩 왕복합니다. 온 가족 4명이 깬 돌을 건축자재상에게 팔면 100루피를 받습니다. 우리 돈 1,500이 채 안됩니다. 학교는 두 달 전 입학만 해 놓았지 지금까지 못 가고 있습니다. 아이는 무표정하게 돌만 바라보고 깨고 있었습니다. 이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돌 깨는 게 지겹니 않니?” 통역을 기다리는 순간 질문이 너무도 어리석었다는 것을 깨닫고 후회했습니다. “이게 제 운명이에요.” 라고 대답합니다. 어려서부터 보고 배운 것이 돌 깨는 일밖에 없습니다. 8살 아이에게서 운명이라는 말이 나올 때 왠지 화가 났습니다. 이제 이 아이의 운명을 바꾸어 주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일이며 ‘가난은 나라님도 못 구한다’ 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픈 사람이 또 있고 사람이 또 병난다고 지금 치료해주지 않고 가만히 있습니까? 아니잖아요? 마찬가지입니다. 힌두교의 운명을 말하던 아이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게 될 날을 생각해 보세요?
저는 솔직히 큰 교회가 되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열심히 돈 버세요. 그리고 기도하세요. 전도하세요. 우리가 할 일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영혼을 살리는 일입니다. 사탄에게 빼앗긴 하나님의 자녀를 구하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은 누구라 할 것 없이 사람이라면 당연히 해야할 일을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이것은 특정한 사람들(기독교인)만 해야하는 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모두 이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본성이 타락한 이후에 당연한 일을 당연하다고 생각지 않게 되었습니다. 귀한 것을 귀하게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영의 눈이 멀어지고 육신의 눈만 보이는 것입니다(롬 8:5-8).
베드로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셔야 할 것을 말씀하셨을 때 “그리 마옵소서” 하였다가 예수님께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
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
16:23) 라는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제자로서 당연히 예수님의 안위를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늘 깨어있어야 합니다. 늘 기도해야 합니다.

한 때 ‘말 되네’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누가 옳은 말을 하거나 공감이 가는 말을 하면 “그거 말되네”라고 합니다. 그러나 말(언어)에는 ‘말이 안 된다’는 말은 있어도 ‘말이 된다’는 말은 없습니다. 한자로 말하면 語不成說(어불성설)이란 숙어는 있지만 語成說(어성설) 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당연한 것이나 정상적인 것에는 유난스럽게 표를 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말의 법칙입니다. 그래서 남자일 경우는 그냥 교수요 작가요 선교사라고 부르지만 여자일 경우 ‘여교수’, ‘여류 작가’, ‘여 선교사’ 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언어학에서는 이런 것을 有標化(유표화)라고 부릅니다. 친족 호칭도 모계 쪽은 모두 ‘외’ 라는 표가 따라 붙습니다. ‘말 되네’라는 말이 그렇습니다. 말이 제대로 통하는 사회에서는 말 안 되는 것이 유표화 되지만, 말 안 되는 소리가 난무하는 사회에서는 ‘말 되네’ 라는 소리가 유표화 되는 것입니다. ‘외할아버지’ 라고 부르지만 ‘친할아버지’라고는 안 하는 것입니다. 그냥 ‘할아버지’ 라고 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그저 ‘아버지’ 그렇게만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그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분이기 때문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라고만 하면 됩니다. 육신의 아버지는 땅에 계신 분입니다.
“우리 아버지여” 라고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주 하나님을 우리는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 성령님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성령님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우리를 위해 보내주신 하나님의 ‘영’ 입니다. 삼위일체란 우리가 포함되어서 하나님, 예수님, 그리고 ‘나’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앞에 두고 참 씁쓸한 마음이 듭니다. 마치 당연히 받아들여할 말씀을 이 사회가, 우리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나왔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제 우리는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다시 하나님께 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기도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기도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축복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 기쁨이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에 올 때에 의무감으로 나오면 힘듭니다. 그러나 은혜로 나오면 기쁩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해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기도의 시작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내 생각을 무조건 관철시키는 것이 기도이고 응답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하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자식은 자기 생각만 하고 부모님께 떼를 씁니다. 그런 자식에게 부모는 한 두 번은 해 줍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지속적으로 기도하고 계속 하나님 아버지께 구한 것을 받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뜻대로 구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에 먼저 구해야 하는 것은
‘거룩한 그 이름’,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두고서, ‘매일 매일’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아서도 아니며, 이루지는 데 힘들기 때문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힘드시겠습니까?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쳐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 일이 늘 귀한 것임을 생각하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호와의 일을 선포하는 교회
예레미야 51:10 “여호와께서 우리 의를 드러내셨으니 오라 시온에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일을 선포하자” 고 했습니다. 한 번은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는 네 백성에게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주는 말을 그대로 선포하라. 듣든지 아니 듣든지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하시다” 하라 하셨습니다. 선포하는 일은 네가 할 일이요 듣고 안 듣는 것은 네 백성이 할 일이라는 뜻입니다.

요즘 닭은 새벽에 울지를 않는답니다. 그래서 개가 물었습니다. “너 왜 아침이 되었는데도 울지 않니?” 그러니까 닭이 말하기를 “요즘 다 시계를 차고 다니는데 내가 울 필요가 있겠니?” 라고 합니다. 그리면서 닭이 개에게 “그러는 너는 왜 짖지 않니?” 그럽니다. 개가 말하기를 “우리집 주인이 큰 도둑인데 내가 짖을 필요가 있겠니?” 하더랍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너무나 타락했다고 사람들이 듣지 않을 것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울지도 않고 짖지는 않는 닭과 개처럼 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래도 누군가는 들을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주인을 쫓아다니면서라도 짖어야 합니다. 그것이 닭의 사명이요 개의 사명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이 사실을 체험하고 믿고 나가 선포하자는 말입니다. 우리는 사람에게 버림받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예를 들면 야곱에게 아내 넷이 있었는데 아내 넷 중에 라헬이라고 하는 여인을 끔찍이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라헬에게서 낳은 아들을 다른 열 아들과 비교가 안 될 만큼 사랑했습니다. 그러니 다른 형제들이 요셉을 너무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멀리 도단에 가서 양떼를 치고 있을 때 어린 요셉이 땀을 흘리면서 떡을 한 짐 지고 찾아왔지만 형들은 반갑지가 않았습니다. 미운 생각뿐입니다. 그래서 옷을 완전히 벗겨 갈기갈기 찢어 양의 피를 발라 아버지에게 보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옷이 아닙니까? 우리가 다니다가 발견했는데 악한 짐승이 찢어 먹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동생을 애굽으로 내려가는 이스마엘 사람 장사꾼에게 팔아 버렸습니다.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 갈 때 옷 한 벌을 못 입고 팔려갔습니다.
요셉은 어린 나이에 보호받고 사랑 받아야할 나이에 알몸으로 팔려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렸지만 원망으로 세월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가는 곳마다 정직과 성실을 다해 일했습니다. 하나님께도 사람에게도 사랑 받는 것입니다. 제가 어린 나이에 집에서 나와 서울로 올라와 혼자 살아왔습니다. 그래도 참 감사한 것이 저는 여러 사람에게 칭찬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저를 좋아했습니다. 어디를 가나 나에게 주어진 일은 열심히 한 것입니다.

선교부 돈을 유용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선교사님이 참고 용서해 주다가 이래 가지고는 안되겠다 싶어서 한 번은 불러서 따끔하게 혼을 내 주었습니다. 거기에 앙심을 품고 얼마나 욕을 해대고 싸우고 나가는데 기가 막히더랍니다. 그러나 선교사님이 미워서 그렇게 했겠습니까? 사람이 되라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선교사님은 그 분이 떠난 날부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기를 벌써 10년, 15년 지나고 20년이 가까워 올 때까지 찾아오는 일이 없어서 만날 재간이 없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만났습니다. 인사도 안하고 가는 것을 좇아가서 먼저 인사하니 마지못해 인사를 받더랍니다. 그리고 다른 이야기를 한 두 마디 하다가 자기 수첩을 꺼내 보여주었습니다. 수첩이라는 것을 1년 쓰고 또 옮겨 쓰는 것이 아닙니까? 20년 가까이 되었는데 자기 가족 이름이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해마다 수첩에 옮겨 쓴 것이고 자기를 위해서 기도해 주었다는 뜻입니다. 1년도 아니고, 2년도 아니고 20년 가까운 세월이었습니다. 거기서 무릎을 꿇고 회개하고 다시 예수를 믿고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네팔선교사 편지에 보니까 네팔 선생님이 집에 무슨 일이 있다고 거짓 말을 하고 월급 몇 달치 월급을 미리 받고 학교에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알아보았더니 중동 두바이에 갔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 때에 미국 선교사는 이들을 돕겠다고 네팔로 나라왔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온 예수님은 우리를 버리고 도망 안가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을 절대로 버리지 않는 하나님을 믿으시고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은 결코 택한 자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열심히 선포합시다.

믿음을 잃어버릴 때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게 되었고 믿음을 회복하니 잃어버렸던 것을 다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것을 다 잃어버려도 믿음을 잃지 않으면 잃은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제일 좋다는 것을 다 가지고도 믿음을 잃어버렸다면 그것은 다 잃은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믿음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그렇게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래서 믿음이 회복되므로 모든 것이 다 회복되더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내가 믿음을 회복할 때 나 하나만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 주위가 변화됩니다. 요셉이 원망과 불평 속에서 세월을 보냈다면 요셉만 망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집의 식구들도 심지어는 애굽도 도움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오늘도 저와 여러분들에게 할 수 있다 하십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여호와의 일을 생각하고 선포하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정직함으로 받는 은혜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솔로몬이 가로되 주의 종 내 아비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의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저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저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예비하시고 오늘날과 같이 저의 위에 앉을 아들을 저에게 주셨나이다” (왕상 3:6)

우리나라 장로교가 1907년에 독노회가 조직되고 목사 7명을 안수하여 세웠습니다. 그 중의 한 분인 이기풍 목사를 예수 믿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는 제주도에 선교사로 보냈습니다. 외국에 보낸 것이 아닙니다. 제주도에 보내면서 선교사라고 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북해도에 예수 믿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을 때 처음에 목사 안수 받은 한 분을 선교사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 선교사는 현지로 부임하기 전에 결혼을 하고 신혼 살림을 거기서 시작을 합니다. 그러다 보니 그 선교사님은 오늘도 전도, 내일도 전도하며 열심이었습니다. 그때 그 사모는 신혼살림을 시작하면서 남편의 짐을 전부 정리합니다. 그 중에서 책이 제일 많았습니다. 책을 정리하는 중에 이상한 책이 하나 나왔습니다. 그 책은 성경이었습니다. 목사의 책을 정리하다가 성경이 나왔는데 왜 이상합니까? 하고 물으실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 성경은 아무리 봐도 자신이 처녀 적에 보던 성경이었습니다. 내가 처녀 적에 도둑맞은 성경이 어떻게 남편 목사의 책들 속에 있나! 참 이상했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들어온 다음에 물었습니다. “여보 당신, 이 책, 어디서 났습니까?” 그러자 그 목사님이 솔직하게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사실은 도둑놈이었소. 친구들과 어울려 한번 두 번 도둑질 하다보니 도둑놈이 되었고 한번은 어느 큰집에 들어가서 도둑질을 했는데 전부가 여자들뿐이었소. 사실 그곳이 신학교 여자 기숙사였습니다. 여자들이 정신 없이 자고 있는지라 모두 집어 들고 와서 보니 그 중에는 쓸 것도 있고 못 쓸 것도 있었지요. 쓸 것은 팔아서 먹고 살고 지냈는데 그러다 보니 그 속에서 성경책이 하나 나오지 않았겠소. ‘재수 없네’ 라고 생각하고 집어 던졌는데 방구석에 굴러다녔소. 낮에 잠만 잘 수 없어서 어느 날 성경을 한번 펴보자 하고 성경을 펼쳐 보았는데 에베소서 4장 28절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라는 구절을 펼치게 되었오. 도둑놈은 도둑질하지 아니 할 뿐 아니라 돈을 벌어서 구제를 하라는 뜻이더군요. 이것이 나에게 하는 소리라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나 다시 재수 없다 생각하고 집어 던져버렸지만 ‘도둑놈은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돈을 벌어 구제를 하라’는 말이 계속 머리 속을 맴돌아 견딜 수가 없었소. 그래서 동네에 있는 교회의 목사님을 찾아가서 어쩌면 좋습니까? 하고 상의를 했더니 “당신이 고민하는 것을 보니까 죄 때문에 몹시 괴로워하는데 벌써 2000년 전에 당신 같은 사람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즉 당신의 죄를 뒤집어쓰시고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예수를 내가 믿습니다’ 하게 되면 당신의 죄는 2000년 전에 벌써 다 끝난 것입니다. 예수를 영접하십시오.” 라고 하였지요. 그래서 그 날 예수님을 영접하였소. “당신이 되돌아가면 도둑놈들과 또 어울려 도둑질을 하게 되니 여기에 내가 방을 하나 마련해 주겠소. 여기서 살면서 교회에서 일하는 사찰을 하시오” 라고 목사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에서 교인들과 어울리고 온갖 시중을 들고 봉사를 다 했소. 교인들이 모이는 자리에는 빠짐이 없었고 그러다 보니 진짜 교인이 되었소. 목사님이 신학교를 보내줘서 목사가 되었고 지금은 당신과 결혼하여 북해도에 선교사로 오게 된 것이오. 이 이야기를 아내에게 쭉 설명을 한 끝에 “당신이 도둑 맞은 성경이 나로 하여금 목사가 되게 했오” 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들도 성경을 도둑 맞았으면 절대로 후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도둑놈들과 어울리니까 도둑놈이 되는 것입니다. 교인들과 어울리니까 교인이 되고 목사와 어울리니까 목사, 전도사, 선교사가 되는 것입니다. 어울림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기도하는 자리에 어울리고 전도하는 사람들과 어울리시기 바랍니다.

은혜(恩惠 Grace)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자발적이고도, 제한 받는 일 없는 사랑의 은사(선물). 하나님께서 인간에 대해, 그 죄와 무가치함에도 불구하고, 그 크신 사랑으로 인해, 사죄와 생명을 주심을 말합니다. 은혜는 죄 사함 받은 자를 새로운 사명 위해 분발케 합니다(롬 1:5,고전 3:10,15:9-10,갈 2:9,엡 3:7-8).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결과로 우리들도 다른 사람에 대하여 은혜를 베풀며 봉사해야 합니다(엡 4:29)

본문에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의 앞에서 행하므로” 그랬습니다. 정직하지 못하면 은혜 못 받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정직입니다. 우리는 때로는 은혜라는 말 가운데 마치 정직하지 못한 것을 덮어 주기만 하는 것이 은혜인줄 압니다. 그래서 때로는 정직하지 않은 마음으로도 하나님께 은혜를 입기를 바랍니다.

태국에 처음 선교사로 가신 신홍식 선교사님이 계십니다. 이분은 통역장교 출신입니다. 그런데 주일날 미국에서 사령관이 우리나라 장성을 만나러 왔는데 통역을 할 사람이 없는 겁니다. 저도 이번에 태국 카렌족 선교를 다녀왔습니다. 설교하는데 통역이 둘이 섰습니다. 통역이 없으면 전달이 안됩니다. 그래서 미국 사령관 일행은 그냥 발길을 돌렸습니다. 이 일로 난리가 났습니다. 통역장교 어디 있냐고 헌병대가 나서서 잡아오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헌병이 잡으러 갔는데 그곳은 교회였습니다. 주일날 예배드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장성이 권총을 뽑아들고 이새끼 죽인다고 머리에 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할 말 있으면 해 봐.” 그랬습니다. 이때 신홍식 선교사님이 “장군님은 각하를 만나고 있는데 나오라면 나오시겠습니까?” 그랬습니다. “저는 각하보다 더 높은 분을 만나고 있는데 어떻게 나옵니까?” 그랬습니다. 그 다음은 군종 목사님이 교회에 부임해 왔는데 그러더랍니다. “목사님도 여기 신홍식 만큼 믿음이 좋습니까?” 그리고 제대할 때 군복하고 여러 가지를 챙겨 주더랍니다. 그 때 신홍식 선교사님이 “받지 못하겠습니다. 이것은 장군님의 것이 아니라 나라의 것입니다.” 그랬다고 합니다.

이방교회 문제로 예루살렘 총회가 열린 것이 사도행전 15:1절에 나옵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고 합니다. 사실 바울과 바나바가 심하게 다투고 헤어진 것은 이 문제였습니다. 바나바는 할례 받은 자만이 구원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1:11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그랬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할례 받지 않았어도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방인도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창 6: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우리는 살수가 없습니다.
고후 9:14-15 “14 또 저희가 너희를 위하여 간구하며 하나님의 너희에게 주신 지극한 은혜를 인하여 너희를 사모하느니라 15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봉사의 책임이 더 큰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눅 12:48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고 합니다.
욘 2:8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 하며 기도하며 은혜를 버렸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맛본 자들 중에 하나님이 그에게 베푸신 은혜를 곧바로 잊어버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열 명의 문둥병자를 고쳐 주신 사건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한 번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실 쌔 열 명의 문둥병자를 만나 그들을 모두 고쳐 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예수께 돌아와 사례 드린 사람은 딱 한 명이었습니다(눅 17:11-19).

은혜를 방탕한 것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유 1:4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유다서는 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자들이 경건치 않아서 하나님의 은혜를 오히려 방탕한 것(색욕 거리-개역)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현상들은 이단들의 일반적인 특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교리를 악용하여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되므로 마음대로 행하여 방종한 생활을 해도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저를 이번에 초청한 것이 카렌족 족장입니다. 민족 지도자입니다. 이분의 어머니가 자신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저에게 해 주었습니다. 카렌족은 팔찌를 찹니다. 그런데 그것을 고기만 하고 만지지 말라고 하였답니다. 만지면 자꾸만 더 만지고 싶다는 거예요.

은혜를 보답지 아니한다고 합니다.
대하 32:25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하지 아니하므로 진노가 그와 유다와 예루살렘에 내리게 되었더니
히스기야는 보기 드문 선한 왕으로서 많은 업적을 남긴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유감스럽게도 한 가지 오점을 남겼는데 그것이 바로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하지 않은 것입니다.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합니다.
고후 6:1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받은 은혜를 가볍게 여기지 말라고 합니다.
딤전 4:14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을 통하여 받은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

은혜를 받고 봉사하지 아니하면 은혜를 빼앗길 수 있습니다.
한 달란트 맡은 종의 모습에 나타납니다
마 25:24-25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사도 바울은 더 많이 수고 하였다고 합니다
(고전 15:10)…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사도 바울은 이러한 봉사를 하게 됨을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 하면서 자신이 사도 중에서 지극히 작은 자라고 소개합니다.
(고전 15:9)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겸손의 은혜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요 1:16)
 

찬송가 197장의 가사 내용은 “은혜가 풍성한 하나님은…” 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은혜가 풍성하신 분이라는 것은 모두가 다 알고 있지만 정말 그 은혜를 체험한 사람은 드물어요. 적은 소수의 인원이 하나님은 은혜가 풍성하다는 것을 경험하여 알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은혜가 풍성하다는 것을 늘 알고 체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모르면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요. 은혜를 알면 하나님을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를 주시는 분이 겸손한 분이신 데 받으려고 하는 사람이 교만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또 낮아지고 낮아져서 주님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벤허>를 읽어보면 동방 박사 세 사람을 재미있게 묘사를 했어요. 하나는 철학을 대표하는 사람이요, 또 하나는 윤리를 대표하는 사람이요, 다른 하나는 종교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나옵니다. 참을 찾고, 선을 찾고, 미를 찾고, 즉 인간의 진선미를 찾아 땅 끝까지 가보았습니다. 인간의 철학과 종교, 윤리가 추구하는 꼭대기까지 가 보니까 거기에서 구세주를 만나야 할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구세주는 사랑인데, 그 사랑은 재능이 아니라 인격이었습니다. 그래서 별의 안내를 받아서 예수님을 만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은 재능이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인격이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좋아지는 것입니다. 경제(돈)는 우리를 조금 편안하게 만들어 줄지는 몰라도 우리를 좋게 만들어 주지는 못합니다.
썬다싱도 이런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죽어버리겠다고 하며 죽음이냐 하나님이냐의 양자택일을 놓고 기도하다가 십자가를 짊어지신 예수님이 나타나심을 보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경험은 물 한 컵 정도로 조금만 얻는 것이 아니라 오아시스 같은 생수를, 폭포수 같은 생명의 강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른다면 우리는 그 은혜를 알게 해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부족함이 없게 되는 것은 10억을 벌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100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를 만났기 때문이예요.

- 여호와의 인도가 은혜입니다.
출 15:13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출 15:17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신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오늘날 우리를 택하신 목적이 있습니다. ‘인도’입니다. 인도하시기 위해서 택하신 것입니다. 한 때 여자를 택하고 나중에 책임을 안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무책임 한 것입니다. 책임을 지지 않으려면 택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주신 것은 무한 책임을 지시기 위함입니다.

-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이 은혜입니다.
바울은 갈 1: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알고있는 바와 같이 바울은 초대교회 스데반 순교 후에 흩어진 성도들을 잡겠다고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를 택하신 하나님은 어머니 태에서부터 자신을 택한 것이라고 고백해요. 하나님이 처음부터 자신을 택한 것이라고 믿는 믿음입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이 처음부터 나를 택하신 것입니다. 왜 택했냐고 물으신다면 바로 그것이 은혜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수많은 민족 중에 이스라엘 부르신 것이 은혜입니다. 수많은 사람 중에 나를 불러주신 것이 은혜입니다.

- 선물로 거저 받은 것이 은혜입니다.
엡 2:8-9 “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은혜란 자격이 없는 자에게 공짜로 내려지는 하나님의 호의다.”(벤자민 워필드)라고 했습니다.
19세기의 유명한 전도자 무디가 탄광촌을 방문하였습니다. 책임자에게 구원에 관하여 설명하자 그가 말하기를 “그거 구원이 너무 싸군요. 사실이라고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저 믿기만 하면 된다니 값이 너무 싸단 말입니다. 뭔가 값이 좀 들어가야 할 것 같군요.” 라고 했습니다. 무디는 “당신 오늘 갱에 들어 갔었나요?” “네” “얼마나 깊이 내려 갔었지요?” “수백 피트나 되지요.” “어떻게 내려갔습니까?” “네 그것은 간단하지요. 승강기를 타고 버튼만 누르면 됩니다.” “그것밖에 하신 일이 없습니까?” “그럼요, 석탄회사에서 이미 많은 돈을 들여 승강기를 설치했으니 저는 그저 그 승강기를 타기만 하면 됩니다.” “바로 그겁니다. 선생이 승강기를 타듯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대신 죽게 하셨으니 우리는 그저 그 공로를 믿기만 하면 됩니다. 이미 십자가의 승강기를 놓으셨으니 믿음의 버튼만 누르시면 됩니다”

- 구원받은 것이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
벧전 3:20-21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 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노아 때 구원받은 사람은 노아의 가족 8명뿐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물에서 구원하는 표인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증거요 표가 되는 것입니다. 믿고 세례를 받은 사람에게는 구원의 증거가 됩니다.

세례에 대해서 필립 헨리(Henry)의 고백이 있습니다.
“나는 세례를 통하여 성부 하나님을 나의 가장 중요하고, 가장 최고의 진리의 선포자로 받아들입니다. 나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왕 나의 구세주로 받아들입니다. 나는 성령 하나님을 나를 거룩케 하시는 분, 나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시고, 위로하시는 분으로 받아들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내 모든 삶의 행동의 규칙으로 받아들이며, 하나님의 백성을 나의 백성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모든 것, 내가 가진 것,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주님께 헌신하고 드립니다. 나는 이 시간 의지적으로, 의식적으로, 또 자유함 가운데서 그리고 영원히 이 언약을 지키겠습니다.”

본문의 “충만한” 으로 번역된 “plhrwvma”(플레로마)는 ‘완성시키는 것’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는 불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완성된 완전한 은혜입니다.
“은혜 위에 은혜러라”라고 번역된 “kai; cavrin ajnti; cavrito”"(카이 카리스 안티 카리토스) 카이(그러니까? 접속사입니다) 카리스(은혜는) 안티(반대하여 뜻말고도 …때문에, …그래서 라는 전치사입니다) 은혜가 주어진 것 자체가 은혜라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은혜인 것입니다.

은혜에 굳게 서라
벤전 5:12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거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이 은혜에 굳게 서라”라는 말씀을 직역을 하면 은혜 안에 너의 자리를 잡으라는 뜻입니다. 즉 은혜라고 하는 테두리 안에 너 자신을 고착시키라 말씀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움직이지 않고 흔들리지 않도록 그 자리에 못을 박아 놓으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가정에서 남자는 남편이라는 자리, 아버지라는 자리가 있어요. 그 자리는 확실히 지켜야 하는 자리입니다. 여자에게는 아내라는 자리, 어머니라는 자리가 있어요. 그 자리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가정이라는 테두리를 마련해 놓고도 다른 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면 그 가정은 문제가 심각한 가정이예요.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성도들은 은혜라고 하는 그 안에 우리의 자리를 확실히 잡아 놓아야 해요. 예수 믿으면서 교회가 자기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은혜의 자리는 교회 안에 있어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어요.

기독교의 생명은 겸손이에요. 출발이 겸손이에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 무엇이에요? 보여주신 삶이 무엇이에요? 기독교의 출발은 겸손에서 출발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실 때에 마굿간에 태어나시고 옷도 한 벌로 입었어요. 나라이면서 군인도 없고 나라이면서 돈도 없고 세금 낼 돈도 없으셨어요. 아주 막강한 내각을 구성해야 될 텐데 어부들을 가져다가 구성하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도 나귀를 타고 가셨어요. 겸손하세요. 하나님의 나라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가 모두가 다 겸손이에요. 이 세상에 겸손을 귀히 여기고, 겸손 위에 나라를 건설하고 겸손해야만 된다라고 가르치는 것은 기독교 밖에 없어요. 어떤 철학에도 겸손을 예찬하지 않아요. 아리스토텔레스도 “겸손은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다” 라고 했어요. 유명한 프레데릭 니체도 말하기를 “사도바울의 이 겸손을 주장하는 것은 노예근성에서 나왔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겸손을 가르치고 겸손을 주장하는 사상이나 종교나 지식이나 철학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 모든 종교는 한마디로 교만입니다.

우리나라의 유교가 얼마나 교만했는지 아세요? 여자를 사람 취급을 안하고 상놈을 사람 취급을 안 했습니다. 옛날에요 아주머니들이 물을 이고 오다가 학교 갔다고 오는 양반집 아이들과 마주치면 옆으로 비켜서서 지나갈 때까지 그 무거운 것을 이고 옆에 이렇게 섰다고요. 여러분!, 여자를 귀히 여기는 종교가 이 프로테스탄트밖에 없습니다. 기독교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 기독교 이외에는 여자를 귀히 여기는 곳이 한 곳도 없습니다. 이걸 잘 알아야 합니다. 아멘도 안 하시네. 보십시오. 오늘 유교가 500년 동안 여자들을 얼마나 어렵게 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지금 힌두교도나 지금 중동에 있는 종교나, 아니 어떤 종교도 다 마찬가지예요. 사람 차별합니다.

프로테스탄트, 우리 기독교만 차별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습니다. 뽐내지 않습니다. 내가 제일이라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종교 가운데 표시하지 않고 다니는 종교는 기독교밖에 없습니다. 힌두교도도 머리에 표시를 하고 어디를 가도 다 자기가 최고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이슬람도 다 두르고 다닙니다. 여러분, 태국이나 버어마, 이런 데 가보십시오. 비행기 탈 때 스님을 제일먼저 타게 합니다. 우리 기독교는 목사가 먼저 타지 않습니다. 어린아이가 먼저 타고, 장애자가 먼저 타고, 노인이 먼저 타고, 여자가 먼저 탑니다. 먼저 되고자하면 나중이 됩니다. 그러나 나중이 되고자 하면 먼저가 됩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는 것은 먼저 자신을 드러내고 대접받으라는 것아 아니지 않습니까? 어쩌면 기독교에는 성인이 없어야 되는지 모릅니다. 모두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니 알 수가 있나요.
기독교도인 걸 드러내지 않고, 교회 다니면서 드러내지 않는 종교는 이 세상에 기독교 밖에 없습니다. 조그마한 우상 종교도 다 드러냅니다. 여러분, 미국이나 이스라엘을 가보십시오. 한여름인데도 유대인들은 다 정장하고 검은 옷 다 입고 다닙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여기에 수염을 기르고 다 머리를 닦아 가지고 내리고 다닙니다. 어느 종교든지 내가 최고라는 거예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도 그들의 교만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예수님 십자가에 못박고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 더 사랑해야 되요. ‘윈수’도 사랑해야 합니다. 남편이 ‘윈수’ 입니다. 같이 사는 사람은 ‘원수’가 아니라 ‘윈수’ 입니다. 아직까지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내게 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은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생명은 겸손입니다. 겸손해야 은혜를 받습니다. 은혜와 겸손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따로 갈 수 없어요. 겸손하여져서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을 만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장로교가 1907년에 독노회가 조직되고 목사 7명을 안수하여 세웠습니다. 그 중의 한 분인 이기풍 목사를 예수 믿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는 제주도에 선교사로 보냈습니다. 외국에 보낸 것이 아닙니다. 제주도에 보내면서 선교사라고 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북해도에 예수 믿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을 때 처음에 목사 안수 받은 한 분을 선교사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 선교사는 현지로 부임하기 전에 결혼을 하고 신혼 살림을 거기서 시작을 합니다. 그러다 보니 그 선교사님은 오늘도 전도, 내일도 전도하며 열심이었습니다. 그때 그 사모는 신혼살림을 시작하면서 남편의 짐을 전부 정리합니다. 그 중에서 책이 제일 많았습니다. 책을 정리하는 중에 이상한 책이 하나 나왔습니다. 그 책은 성경이었습니다. 목사의 책을 정리하다가 성경이 나왔는데 왜 이상합니까? 하고 물으실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 성경은 아무리 봐도 자신이 처녀 적에 보던 성경이었습니다. 내가 처녀 적에 도둑맞은 성경이 어떻게 남편 목사의 책들 속에 있나! 참 이상했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들어온 다음에 물었습니다. “여보 당신, 이 책, 어디서 났습니까?” 그러자 그 목사님이 솔직하게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사실은 도둑놈이었소. 친구들과 어울려 한번 두 번 도둑질 하다보니 도둑놈이 되었고 한번은 어느 큰집에 들어가서 도둑질을 했는데 전부가 여자들뿐이었소. 사실 그곳이 신학교 여자 기숙사였습니다. 여자들이 정신 없이 자고 있는지라 모두 집어 들고 와서 보니 그 중에는 쓸 것도 있고 못 쓸 것도 있었지요. 쓸 것은 팔아서 먹고 살고 지냈는데 그러다 보니 그 속에서 성경책이 하나 나오지 않았겠소. ‘재수 없네’ 라고 생각하고 집어 던졌는데 방구석에 굴러다녔소. 낮에 잠만 잘 수 없어서 어느 날 성경을 한번 펴보자 하고 성경을 펼쳐 보았는데 에베소서 4장 28절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라는 구절을 펼치게 되었오. 도둑놈은 도둑질하지 아니 할 뿐 아니라 돈을 벌어서 구제를 하라는 뜻이더군요. 이것이 나에게 하는 소리라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나 다시 재수 없다 생각하고 집어 던져버렸지만 ‘도둑놈은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돈을 벌어 구제를 하라’는 말이 계속 머리 속을 맴돌아 견딜 수가 없었소. 그래서 동네에 있는 교회의 목사님을 찾아가서 어쩌면 좋습니까? 하고 상의를 했더니 “당신이 고민하는 것을 보니까 죄 때문에 몹시 괴로워하는데 벌써 2000년 전에 당신 같은 사람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즉 당신의 죄를 뒤집어쓰시고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예수를 내가 믿습니다’ 하게 되면 당신의 죄는 2000년 전에 벌써 다 끝난 것입니다. 예수를 영접하십시오.” 라고 하였지요. 그래서 그 날 예수님을 영접하였소. “당신이 되돌아가면 도둑놈들과 또 어울려 도둑질을 하게 되니 여기에 내가 방을 하나 마련해 주겠소. 여기서 살면서 교회에서 일하는 사찰을 하시오” 라고 목사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에서 교인들과 어울리고 온갖 시중을 들고 봉사를 다 했소. 교인들이 모이는 자리에는 빠짐이 없었고 그러다 보니 진짜 교인이 되었소. 목사님이 신학교를 보내줘서 목사가 되었고 지금은 당신과 결혼하여 북해도에 선교사로 오게 된 것이오. 이 이야기를 아내에게 쭉 설명을 한 끝에 “당신이 도둑 맞은 성경이 나로 하여금 목사가 되게 했오”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들도 성경을 도둑 맞았으면 절대로 후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도둑놈들과 어울리니까 도둑놈이 되는 것입니다. 교인들과 어울리니까 교인이 되고 목사와 어울리니까 선교사가 되는 것입니다. 어울림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기도하는 자리에 어울리고 전도하는 사람들과 어울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