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눈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대하 16:9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하매”
마 6:22-23 “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사람들은 대개 자신들이 살아온 세월을 기억 속에서 끌어내는 경우 미화시키는 것이 예사입니다. 자신은 누구보다도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고, 그 현장마다 지신은 용맹스러운 투사였거나 갈채에 싸인 주인공이었다는 식이 그것입니다. 그 반대로 술회한다고 하더라도 그 의도는 결국 마찬가지 목표에 조준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생애가 짭잘한 한 편의 드라마나 소설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각에서 역대의 인물사나 심지어는 종교적인 인물들도 예외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스승이나 자신에 대해서 미화시키게 되어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까? 자기가 중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만의 렌즈가 있습니다. 색깔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릅니다. 내가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중심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렌즈를 통해서만 세상의 진실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내 민족적, 지역적, 학문적 계파가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눈이 필요한 것입니다.
지아자기천호(知我者其天乎) “나를 알아줄 사람은 하늘밖에 없다.” 공자가 제자들 앞에서 독백을 했습니다. 나를 알아줄 사람이 없구나 지공이 물었다. 어째서 선생님을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하십니까?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사람을 허물하지 않으며 아래로부터 배워 위로 통하니 나를 아는 사람은 다만 하늘뿐이다.” 라고 했습니다.
“아이들을 스타로 만들고 당신은 무대 뒤를 청소하라. 그것이 정말 천직으로 받아들여지면 당신은 진짜 교사가 된 것이다.” 아이들을 스타로 만들고 무대 뒤를 청소할 때 전혀 쓸쓸함을 느끼지 않아야 진정한 교사가 된 것이라고 합니다.
삿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그 소견에”를 직역하면 “그 자신의 눈으로” 옳은 대로 행했다는 것입니다.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잠 12:15)고 했습니다. 렘 7:11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적의 굴혈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이 보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눈은 어디에 있습니까? 미국의 백악관이나 청와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눈은 당신의 자녀들이 모여있는 교회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눈은 당신의 아들이 죽은 그 십자가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는 말 가운데 제일 섬뜩한 말이 있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여 저주하고 싶은 사람에게 “내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볼거야, 얼마나 잘사나?” 그럽니다. 그러나 사실 얼마안가 잊어버리지요. 잊어 버리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사람은 잊어버립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주무시지도 않고 보십니다. 하나님은 잊지도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는 것이 더 무서운 것입니다.
욥은 자기 자식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혹시 자기가 모르는 죄를 지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매일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습니다(욥 1:5). 하늘에서 하나님과 사탄의 대화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사탄에게 내 종 욥을 보았느냐고 자랑하십니다. 그를 주의해서 보았느냐고 말합니다. 그처럼 온전하고 죄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다고 하셨습니다(욥 1:7-9).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이 세상을 보고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잠 15:3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
본문 대하 16:9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 하나님의 눈은 우리를 심판하시기 위함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도와 주시기 위해서 바라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창 6: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도울 자를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욥을 찾아 내셨습니다. 노아를 찾아 내셨습니다. 아브라함을 찾아 내셨습니다. 야곱과 이삭과 요셉을 찾았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하나님이 찾아내시는 존귀한 자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시 72:14 “저희 생명을 압박과 강포에서 구속하리니 저희 피가 그 목전에 귀하리로다” 그랬습니다. 제가 다시 번역해 보았습니다. “그들의 생명을 압박과 폭력에서 건져 주실 것입니다. 왕의 눈에는 그들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우리가 소중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으셨습니다. 우리를 찾으신 아버지 하나님은 집에 있는 가장 좋은 것을 잡아 잔치를 베풀어주십니다.
역사적으로 축구 황제라고 불리워지는 ‘펠레’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무려 1300골 가까운 득점을 올린 명실공히 축구왕이었습니다. 『펠레, 나의 인생과 아름다운 경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원작명은 그냥 『펠레』입니다. 이 책에 의하면 그는 열다섯 살에 프로 축구팀에 스카웃 되어서 축구와 함께 한평생을 삽니다. 양말로 둥글게 말아서 만든 공을 맨발로 차야 했던 가난한 시절을 보낸 사람입니다. 그런 어린 시절을 겪고 축구의 황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비밀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치료할 수 없는 근시였습니다. 눈이 좋지 않았습니다. “이 나쁜 눈을 가지고 축구선수가 어찌 통산 1,300골을 득점할 수 있는 축구 왕이 될 수 있었을까?” 라고 하는 질문에 대하여 그는 이렇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근시 때문에 지장 받은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내게는 말초적 감각, 즉 감각적 시력이 발달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감에 넘칠 때 공이 크게 보여졌다는 것입니다. 가끔 우리는 그런 얘기를 듣습니다. 골프 치는 사람들, 어느 날은 성적이 좋고 어느 날은 나쁘고 그럽니다. 그것은 간단합니다. 골프가 잘 되는 날은 골프공이 크게 보이고 안 되는 날은 작게 보인답니다. 활을 쏘는 사람들도 과녁이 크게 보이는 날이 있고 과녁이 작게 보이는 날이 있어요. 그것은 내 심리적 상태에서 오는 것입니다. 근시라고 하는 핸디캡을 그는 말 그대로 정신력으로 극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정신적 시각, 정신력이 말해주는 감각적 시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종종 잊을 때가 있습니다.
카메라 렌즈에 보면 넓게 보이는 광각렌즈라고 말합니다. 제일 다 보이게 만든 렌즈는 초광각렌즈로 180도까지 보입니다. 광각렌즈에 얼굴을 갖다대면 볼록이가 되어 크게 보입니다. 하나님의 눈은 당신의 자녀를 향하실 때는 크게 보이실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 크게 보여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할 때, 제자들이 배를 먼저 타고 게네사렛 호수를 건너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건너가는 도중에 풍랑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이 풍랑 때문에 시달리는 것을 아시고 물위로 걸어서 예수님께 가까이 옵니다. 저들이 풍랑 속에서 죽겠다고 아우성을 치면서 멀리 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유령이다” 그럽니다. 전 그 말이 너무너무 마음에 아파요. 사랑하는 예수님을 유령으로 보다니요. 물 위로 걸어온 사람을 본 일이 없으니까, 너무 너무 두려우니까, 지금 죽을 지경이니까, 또 혼비백산하고 있으니까 예수님을 유령이라고 부른 거예요. 자기들의 두려움에 빠지니까 그렇게 밖에는 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욕심에 눈이 어두운 사람, 질투에 눈이 어두운 사람, 잘못된 경험에 집착된 사람, 바른 시각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특별히 걱정과 근심에 메여있는 사람들, 바르게 보지를 못합니다. 밝은 세상을 바르게 보지 못합니다. 곧은 것을 곧게 보지 못합니다. 환하게 열린 길을 전혀 볼 수가 없는 그런 기막힌 처절한 형편에 살아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 6: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성하면’ 이라고 말합니다. ‘눈이 성하다.’ 아플로스 라고 하는 말은 싱글 홀드(Single hold)를 말합니다. 잘 조정된, 초점이 맞추어진 눈을 말하는 것입니다. 깨끗한 시력일 뿐만 아니라 순수해서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초점이 흐려지면 소용이 없습니다. 사진을 찍어보신 분들은 한번쯤 경험이 있을 겁니다.
그냥 오토매틱, 자동으로 찍는 걸 가지고 가서 열심히 찍습니다. 그런데 자동 카메라는 모든 것을 표준에 놓고 찍는 겁니다, 달리 표현하면 적당히 찍는 겁니다. 초점도 가운데에다가 하나 맞추게 되어있습니다. 초점이 하나예요. 한사람을 앞에 세워놓고 딱 맞추면은 그것은 틀림없이 깨끗하게 나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을 세워놓고 가운데다 찍으면 초점이 가운데로 지나가 버려서 사람은 흐리게 나오고 풍경만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카메라를 제대로 쓰는 사람은 자동카메라를 안 씁니다. 자 이제 보세요. 초점이 맞아야 되는 거예요. 초점이 맞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카메라도 소용없고 아무런 경치도 담을 수가 없어요. 초점이 중요한 겁니다.
자 이제 우리의 이 초점을 어디에 맞추어야 하겠습니까?
본문 대하 16:9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를 향하는 자입니다. 오늘 본문은 르호보암의 손자이며 유다 3대왕인 아사 왕에게 한 말씀입니다. 아사 왕은 처음에는 우상타파하고(대하 14:1-4), 여호와를 찾았습니다(대하 14:7). 그래서 구스의 100만 대군이 쳐들어 왔을 때도 여호와께 부르짖고 무찌릅니다(대하 14:11). 그러나 왕이 된지 36년이 지나 북왕국 이스라엘 왕(3대왕)이 쳐들어왔습니다. 그 때 아사 왕은 여호와의 전 곳간과 왕의 곳간을 털어서 벤하닷에게 주었습니다(대하 16:1-6). 이 일에 대해서 “때에 선견자 하나니가 유다 왕 아사에게 나아와서 이르되 왕이 아람 왕을 의지하고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지 아니한고로 아람 왕의 군대가 왕의 손에서 벗어났나이다” 하고 하나니가 말했습니다. 오늘 본문 다음에 이 말로 하나니는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사는 이 일 후에 죽었습니다. 아사 왕은 초기에는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고 열심히 우상타파하고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고 자존심 세우다 죽고 말았습니다.
본문에 전심으로 “!lev;:솰렘”는 ‘일관된, 신실한’이라는 말입니다. 꾸준한 것입니다. 저는 우리교회 성도님들의 장점이 이거라고 생각합니다. 어제 우리가 이전감사찬양예배로 드렸는데 우리가 립서비스나 인사를 잘 못하여 혹 상처가 되신 분은 없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앙교회 성도님들은 꾸준합니다. ‘비가 오나 눈이오나 바람이부나’ 한결 같으십니다. 이런 분들은 원래 사람 쉽게 못 사귑니다. 그러나 한번 사귀면 평생을 갑니다. 그래도 인사는 좀 잘 합시다.
선지자 하나니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아사 왕은 죽고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오늘날 저와 여러분에게 여전히 아사 왕에게 했던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의 ‘눈’(@yI[‘:아인)은 시력 적인 눈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좀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샘’을 말하기도 합니다. ‘샘’은 근본을 뜻하는 것입니다. 즉 ‘눈’(@yI[‘:아인)은 근본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말합니다. 그래서 눈을 보면 속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눈에서 표시가 되는 거예요. 어린아이들은 눈이 맑잖아요. 갓난아이들은 사물을 일정 시간 똑바로 쳐다보기 때문에 그 때 아기하고 눈 마주치면 상당히 찔립니다. 맑은 눈이 나를 한참 응시하면 마음에 찔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눈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본문 마 6: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어두워진 눈을 말합니다. 나쁜 눈. 그것은 편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균형을 잃고 한쪽만 보는 것이에요. 나무는 보고, 숲은 보지를 못해요. 새는 보는데, 새를 먹이시는 하나님은 못 봐요. 무지개 색깔은 몇 개인지 아는지 모르지만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따르지 못합니다.
넓은 세계를 보면서 하나님의 거룩한 창조의 솜씨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다를 보고 하늘을 보면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역사는 보는데,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보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편시가 마음과 눈을, 세상을 다 어둡게 만들고 마는 것입니다.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눈이 좋으면 온 몸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이런 편시를 없애고 눈이 성하려면, 초점을 잘 맞추어서 보려면 성경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보아야 합니다. 제일 좋은 렌즈는 사물을 왜곡시키지 않고 그대로 보여주는 표준렌즈가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진을 찍는 사람은 50mm가 있습니다. 예전 필름 카메라 시대에 표준이었습니다. 디지털로는 35mm쯤 됩니다. 그래서 사진에 관한 명언 중에 에는 50mm로 못 찍으면 다 못 찍는다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소비는 미덕이지만 낭비는 악덕입니다.’ 소비는 어쩔 수 없습니다. 필요하기 때문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낭비는 다릅니다. 불필요한 것을 소모하는 것입니다. 사용하지 않아도 될 물질과 시간을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이 잘못되면 소비하며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낭비하며 살아가는 인생이 됩니다.
인간은 무슨 일이든 하면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안 하면 사탄의 일을 합니다. 사탄의 일은 낭비입니다. 아무것에도 도움이 안됩니다. 남을 미워하는 것, 시기하는 것, 질투하는 것 모두가 낭비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소비하세요. 사랑에 소비하세요. 전도하고 선교하는데 소비하세요. 여호와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우리의 초점을 맞추어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