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눈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대하 16:9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하매”
마 6:22-23 “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사람들은 대개 자신들이 살아온 세월을 기억 속에서 끌어내는 경우 미화시키는 것이 예사입니다. 자신은 누구보다도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고, 그 현장마다 지신은 용맹스러운 투사였거나 갈채에 싸인 주인공이었다는 식이 그것입니다. 그 반대로 술회한다고 하더라도 그 의도는 결국 마찬가지 목표에 조준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생애가 짭잘한 한 편의 드라마나 소설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각에서 역대의 인물사나 심지어는 종교적인 인물들도 예외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스승이나 자신에 대해서 미화시키게 되어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까? 자기가 중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만의 렌즈가 있습니다. 색깔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릅니다. 내가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중심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렌즈를 통해서만 세상의 진실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내 민족적, 지역적, 학문적 계파가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눈이 필요한 것입니다.
지아자기천호(知我者其天乎) “나를 알아줄 사람은 하늘밖에 없다.” 공자가 제자들 앞에서 독백을 했습니다. 나를 알아줄 사람이 없구나 지공이 물었다. 어째서 선생님을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하십니까?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사람을 허물하지 않으며 아래로부터 배워 위로 통하니 나를 아는 사람은 다만 하늘뿐이다.” 라고 했습니다.
“아이들을 스타로 만들고 당신은 무대 뒤를 청소하라. 그것이 정말 천직으로 받아들여지면 당신은 진짜 교사가 된 것이다.” 아이들을 스타로 만들고 무대 뒤를 청소할 때 전혀 쓸쓸함을 느끼지 않아야 진정한 교사가 된 것이라고 합니다.
삿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그 소견에”를 직역하면 “그 자신의 눈으로” 옳은 대로 행했다는 것입니다.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잠 12:15)고 했습니다. 렘 7:11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적의 굴혈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이 보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눈은 어디에 있습니까? 미국의 백악관이나 청와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눈은 당신의 자녀들이 모여있는 교회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눈은 당신의 아들이 죽은 그 십자가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는 말 가운데 제일 섬뜩한 말이 있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여 저주하고 싶은 사람에게 “내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볼거야, 얼마나 잘사나?” 그럽니다. 그러나 사실 얼마안가 잊어버리지요. 잊어 버리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사람은 잊어버립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주무시지도 않고 보십니다. 하나님은 잊지도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는 것이 더 무서운 것입니다.
욥은 자기 자식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혹시 자기가 모르는 죄를 지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매일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습니다(욥 1:5). 하늘에서 하나님과 사탄의 대화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사탄에게 내 종 욥을 보았느냐고 자랑하십니다. 그를 주의해서 보았느냐고 말합니다. 그처럼 온전하고 죄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다고 하셨습니다(욥 1:7-9).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이 세상을 보고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잠 15:3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
본문 대하 16:9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 하나님의 눈은 우리를 심판하시기 위함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도와 주시기 위해서 바라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창 6: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도울 자를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욥을 찾아 내셨습니다. 노아를 찾아 내셨습니다. 아브라함을 찾아 내셨습니다. 야곱과 이삭과 요셉을 찾았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하나님이 찾아내시는 존귀한 자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시 72:14 “저희 생명을 압박과 강포에서 구속하리니 저희 피가 그 목전에 귀하리로다” 그랬습니다. 제가 다시 번역해 보았습니다. “그들의 생명을 압박과 폭력에서 건져 주실 것입니다. 왕의 눈에는 그들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우리가 소중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으셨습니다. 우리를 찾으신 아버지 하나님은 집에 있는 가장 좋은 것을 잡아 잔치를 베풀어주십니다.

역사적으로 축구 황제라고 불리워지는 ‘펠레’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무려 1300골 가까운 득점을 올린 명실공히 축구왕이었습니다. 『펠레, 나의 인생과 아름다운 경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원작명은 그냥 『펠레』입니다. 이 책에 의하면 그는 열다섯 살에 프로 축구팀에 스카웃 되어서 축구와 함께 한평생을 삽니다. 양말로 둥글게 말아서 만든 공을 맨발로 차야 했던 가난한 시절을 보낸 사람입니다. 그런 어린 시절을 겪고 축구의 황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비밀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치료할 수 없는 근시였습니다. 눈이 좋지 않았습니다. “이 나쁜 눈을 가지고 축구선수가 어찌 통산 1,300골을 득점할 수 있는 축구 왕이 될 수 있었을까?” 라고 하는 질문에 대하여 그는 이렇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근시 때문에 지장 받은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내게는 말초적 감각, 즉 감각적 시력이 발달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감에 넘칠 때 공이 크게 보여졌다는 것입니다. 가끔 우리는 그런 얘기를 듣습니다. 골프 치는 사람들, 어느 날은 성적이 좋고 어느 날은 나쁘고 그럽니다. 그것은 간단합니다. 골프가 잘 되는 날은 골프공이 크게 보이고 안 되는 날은 작게 보인답니다. 활을 쏘는 사람들도 과녁이 크게 보이는 날이 있고 과녁이 작게 보이는 날이 있어요. 그것은 내 심리적 상태에서 오는 것입니다. 근시라고 하는 핸디캡을 그는 말 그대로 정신력으로 극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정신적 시각, 정신력이 말해주는 감각적 시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종종 잊을 때가 있습니다.

카메라 렌즈에 보면 넓게 보이는 광각렌즈라고 말합니다. 제일 다 보이게 만든 렌즈는 초광각렌즈로 180도까지 보입니다. 광각렌즈에 얼굴을 갖다대면 볼록이가 되어 크게 보입니다. 하나님의 눈은 당신의 자녀를 향하실 때는 크게 보이실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 크게 보여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할 때, 제자들이 배를 먼저 타고 게네사렛 호수를 건너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건너가는 도중에 풍랑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이 풍랑 때문에 시달리는 것을 아시고 물위로 걸어서 예수님께 가까이 옵니다. 저들이 풍랑 속에서 죽겠다고 아우성을 치면서 멀리 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유령이다” 그럽니다. 전 그 말이 너무너무 마음에 아파요. 사랑하는 예수님을 유령으로 보다니요. 물 위로 걸어온 사람을 본 일이 없으니까, 너무 너무 두려우니까, 지금 죽을 지경이니까, 또 혼비백산하고 있으니까 예수님을 유령이라고 부른 거예요. 자기들의 두려움에 빠지니까 그렇게 밖에는 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욕심에 눈이 어두운 사람, 질투에 눈이 어두운 사람, 잘못된 경험에 집착된 사람, 바른 시각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특별히 걱정과 근심에 메여있는 사람들, 바르게 보지를 못합니다. 밝은 세상을 바르게 보지 못합니다. 곧은 것을 곧게 보지 못합니다. 환하게 열린 길을 전혀 볼 수가 없는 그런 기막힌 처절한 형편에 살아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 6: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성하면’ 이라고 말합니다. ‘눈이 성하다.’ 아플로스 라고 하는 말은 싱글 홀드(Single hold)를 말합니다. 잘 조정된, 초점이 맞추어진 눈을 말하는 것입니다. 깨끗한 시력일 뿐만 아니라 순수해서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초점이 흐려지면 소용이 없습니다. 사진을 찍어보신 분들은 한번쯤 경험이 있을 겁니다.
그냥 오토매틱, 자동으로 찍는 걸 가지고 가서 열심히 찍습니다. 그런데 자동 카메라는 모든 것을 표준에 놓고 찍는 겁니다, 달리 표현하면 적당히 찍는 겁니다. 초점도 가운데에다가 하나 맞추게 되어있습니다. 초점이 하나예요. 한사람을 앞에 세워놓고 딱 맞추면은 그것은 틀림없이 깨끗하게 나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을 세워놓고 가운데다 찍으면 초점이 가운데로 지나가 버려서 사람은 흐리게 나오고 풍경만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카메라를 제대로 쓰는 사람은 자동카메라를 안 씁니다. 자 이제 보세요. 초점이 맞아야 되는 거예요. 초점이 맞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카메라도 소용없고 아무런 경치도 담을 수가 없어요. 초점이 중요한 겁니다.

자 이제 우리의 이 초점을 어디에 맞추어야 하겠습니까?
본문 대하 16:9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를 향하는 자입니다. 오늘 본문은 르호보암의 손자이며 유다 3대왕인 아사 왕에게 한 말씀입니다. 아사 왕은 처음에는 우상타파하고(대하 14:1-4), 여호와를 찾았습니다(대하 14:7). 그래서 구스의 100만 대군이 쳐들어 왔을 때도 여호와께 부르짖고 무찌릅니다(대하 14:11). 그러나 왕이 된지 36년이 지나 북왕국 이스라엘 왕(3대왕)이 쳐들어왔습니다. 그 때 아사 왕은 여호와의 전 곳간과 왕의 곳간을 털어서 벤하닷에게 주었습니다(대하 16:1-6). 이 일에 대해서 “때에 선견자 하나니가 유다 왕 아사에게 나아와서 이르되 왕이 아람 왕을 의지하고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지 아니한고로 아람 왕의 군대가 왕의 손에서 벗어났나이다” 하고 하나니가 말했습니다. 오늘 본문 다음에 이 말로 하나니는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사는 이 일 후에 죽었습니다. 아사 왕은 초기에는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고 열심히 우상타파하고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고 자존심 세우다 죽고 말았습니다.
본문에 전심으로 “!lev;:솰렘”는 ‘일관된, 신실한’이라는 말입니다. 꾸준한 것입니다. 저는 우리교회 성도님들의 장점이 이거라고 생각합니다. 어제 우리가 이전감사찬양예배로 드렸는데 우리가 립서비스나 인사를 잘 못하여 혹 상처가 되신 분은 없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앙교회 성도님들은 꾸준합니다. ‘비가 오나 눈이오나 바람이부나’ 한결 같으십니다. 이런 분들은 원래 사람 쉽게 못 사귑니다. 그러나 한번 사귀면 평생을 갑니다. 그래도 인사는 좀 잘 합시다.
선지자 하나니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아사 왕은 죽고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오늘날 저와 여러분에게 여전히 아사 왕에게 했던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의 ‘눈’(@yI[‘:아인)은 시력 적인 눈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좀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샘’을 말하기도 합니다. ‘샘’은 근본을 뜻하는 것입니다. 즉 ‘눈’(@yI[‘:아인)은 근본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말합니다. 그래서 눈을 보면 속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눈에서 표시가 되는 거예요. 어린아이들은 눈이 맑잖아요. 갓난아이들은 사물을 일정 시간 똑바로 쳐다보기 때문에 그 때 아기하고 눈 마주치면 상당히 찔립니다. 맑은 눈이 나를 한참 응시하면 마음에 찔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눈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본문 마 6: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어두워진 눈을 말합니다. 나쁜 눈. 그것은 편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균형을 잃고 한쪽만 보는 것이에요. 나무는 보고, 숲은 보지를 못해요. 새는 보는데, 새를 먹이시는 하나님은 못 봐요. 무지개 색깔은 몇 개인지 아는지 모르지만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따르지 못합니다.
넓은 세계를 보면서 하나님의 거룩한 창조의 솜씨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다를 보고 하늘을 보면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역사는 보는데,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보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편시가 마음과 눈을, 세상을 다 어둡게 만들고 마는 것입니다.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눈이 좋으면 온 몸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이런 편시를 없애고 눈이 성하려면, 초점을 잘 맞추어서 보려면 성경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보아야 합니다. 제일 좋은 렌즈는 사물을 왜곡시키지 않고 그대로 보여주는 표준렌즈가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진을 찍는 사람은 50mm가 있습니다. 예전 필름 카메라 시대에 표준이었습니다. 디지털로는 35mm쯤 됩니다. 그래서 사진에 관한 명언 중에 에는 50mm로 못 찍으면 다 못 찍는다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소비는 미덕이지만 낭비는 악덕입니다.’ 소비는 어쩔 수 없습니다. 필요하기 때문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낭비는 다릅니다. 불필요한 것을 소모하는 것입니다. 사용하지 않아도 될 물질과 시간을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이 잘못되면 소비하며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낭비하며 살아가는 인생이 됩니다.
인간은 무슨 일이든 하면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안 하면 사탄의 일을 합니다. 사탄의 일은 낭비입니다. 아무것에도 도움이 안됩니다. 남을 미워하는 것, 시기하는 것, 질투하는 것 모두가 낭비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소비하세요. 사랑에 소비하세요. 전도하고 선교하는데 소비하세요. 여호와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우리의 초점을 맞추어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산 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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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23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으나 24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행 2:22-24)

몇 일 전에 제가 치과를 다녀왔습니다. 저는 자존심에 상처받은 기억이 별로 없는데요 죄송합니다만 치과에 가서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아픈 이가 닫도록 입을 잘 다물어 보라는 거예요. 그런데 너무 치아가 아프니까 나도 모르게 그 치아가 닫지 않도록 입을 다무는 거예요. 그런데 그 아픈 이가 닫도록 여러 번 입을 다물어 보라는 거예요. 나는 잘 따라 한다고 했는데 의사 마음에는 잘 안 들었나봐요. 그 의사는 저에게 말하기를 “지금 옆에 환자 치료하다가 왔는데 마음이 급해서 그러는 데요 시키는 대로 잘 따라해 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또 했는데 잘 안 되었나봐요. 그랬더니 이번에는 누워있는 저에게 “눈 떠보세요. 자꾸만 제가 시키는 대로 잘 안 따라 하시면 안됩니다.” 저도 마음에 자존심이 상하고 의사는 자기가 시키는 대로 안 한다고 저에게 아주 비하하는 말투로 그것도 제대로 못하냐는 식의 질책을 했습니다. 여러분들도 한 두 번은 자존심에 상처 입은 경험이 있을 겁니다. 저는 치과에 갔다가 그런 경험을 지난번에도 했습니다. 그래서 치아가 아프면 두 번 아픕니다. 치아만 아픈 것이 아니라 마음이 아픕니다. 그리고 또 어떤 치과를 가야하나 고민에 빠집니다.
치아에 대해서 최 집사님하고 대화할 때 그러시는 거예요. 치과 의사 선생님들은 자기 자녀들에게는 보통 사람이 생각할 때 극성스러울 정도로 이빨을 닦게 하고 자기들도 특별한 칫솔을 사용해가며 관리한다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분들은 아는 거예요. 치아가 아프면 얼마나 고생하고 치아 때문에 받게될 고통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거예요. 준혁(4살 남)이가 지난번 밥통에서 나는 김에 손을 대서 약한 화상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지난번 케이크 사면 주는 아이스에 물을 부면 나오는 하얀 김을 보더니 “뜨거워, 뜨거워” 그러는 겁니다. 왜 그럽니까 경험을 한 것입니다. 준혁이는 그게 뜨거운 김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경험을 한 사람은 알기 때문에 산 증인이 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 예수님이 왜 이렇게 말씀하십니까? 예수님은 아시는 것입니다. 지옥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아시는 것입니다. 절대로 갈 곳이 못된다는 것을 아시는 것입니다. 저는 아픈 것 정말 못 참는 사람입니다. 세상에 지옥이 어떤 곳인데 그곳에 갑니까? 절대로 못 갑니다. 가면 안돼요. 여러분 절대로 가지 마세요. 그곳을 아시는 주님께서 증거하시잖아요. 오직(ma’llon:말론) “더욱” 이라고 합니다. 주님 가르쳐 주신 기도문에서는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다만 입니다. 다만(ajlla;:알라) 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절대로 그곳에 가면 안 된다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3: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천국과 지옥의 산 증인이십니다.
본문 행 2:22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예수님을 증거 했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증명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무지한 사람들이 못박아 죽였지만 하나님이 살려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전의 베드로가 아닙니다. 베드로는 변했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을 받고 난 이후에는 두려움도 사라졌습니다. 사도행전 4:13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천국이 얼마나 좋은 곳인지, 지옥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를 알려 주셨습니다. 그래서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된다는 것을, 지옥에 가지 않으려거든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실 어떤 면에서 성경은 심각한 책입니다. 그냥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소설이 아닙니다. 단순한 도덕이나 윤리서적이 아닙니다.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우리의 영혼과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가 교회생활 하는데 기쁘고 즐겁게 해야 합니다. 교양도 닦을 수 있으면 닦아야지요. 그런데 절대 잊지 마세요. 나의 육신의 안일함이나 즐거움 때문에만 절대 교회를 다니시면 안됩니다. 교회는이요 나의 영혼을 위한 곳이 되어야 합니다.

핀란드 사람들은 자신들에 대해서 스스로 이런 농담을 한답니다. 가령 독일 사람, 프랑스 사람, 미국 사람, 핀란드 사람에게 코끼리에 관한 책을 써 보라고 하면 어떤 책이 나올까? 빈틈없는 성격을 가진 독일 사람은 『코끼리에 대해 알려진 모든 것』이라는 책의 제목으로 주석이 빵빵하게 달린 학술서를 쓸 것이고, 철학과 존재론적 고민에 자주 빠지는 프랑스 사람은『코끼리의 인생과 철학』이라는 책을, 사업적인 감각이 뛰어난 미국 사람은 『꼬끼리로 돈 버는 법』이라는 책을 그리고 핀란드 사람들은『코끼리는 핀란드 사람을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책을 쓸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나라 사람은 어떤 책을 쓸 것 같습니까? 제가 생각하기에는 『코끼리를 잡아먹는 방법』또는 『코끼리의 맛있는 부위』등의 책을 쓰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이 이야기는 자신들이 지금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가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대해서도 이와 같이 나의 인생 철학이 개입되어서 바라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어떤 인생철학을 발견하는 책도 아니고 그런 것에 이용하는 책도 아닙니다. 성경은 얼마나 지금 우리의 영혼이 중요하고 다급한 문제인가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의 영혼보다 더 급한 문제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조금 섭섭하게 들리는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마 8:22) 라는 말씀이 이해가 되어야 합니다. 살아있는 영혼을 구하러 가는 일이 급하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지옥 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역사상 최고의 실물설교는 무디 목사가 사용했던 방법입니다. 무디 목사님은 교회근처에 나가서 살아있는 거미를 잡아왔습니다. 그리고 어린이들 앞에서 그 거미줄을 잡고는 거미에게 성냥불을 붙여서 가져다 댄 것입니다. 거미는 그 뜨거운 불을 피해서 살아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아이들에게 생생하게 보여준 것입니다. 무디 목사님은 이어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여러분들이 보는 것 보다 몇 십 배, 몇 백 배 더 지옥 불은 뜨겁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어야 삽니다. 그 날 그 설교를 들은 아이들은 지옥에 대해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간접적인 경험을 한 것입니다. 충격을 받았습니다.

인류가 소유한 기록 가운데 4복음서보다 성스럽고 진실 된 피 묻은 기록은 없을 것입니다. 특히 요한복음의 거의 절반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일주일간의 기록입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사도행전은 증인들의 책입니다. 사도들은 부활의 증인들이었습니다(행 4:1). 증인들은 죽음을 불사합니다. 더 이상 예수의 부활을 증거 하는데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증인’, ‘증거’라고 하는 말은 헬라어로 ‘마르투리아’입니다. 그런데 순교자를 영어로 뭐라고 하느냐 Martyr(마르첼)라고 합니다. 증거라는 말을 그대로 옮겨서 영어로 발음하게 될 때 순교자가 됩니다. 영어로 증인을 순교자로 옮긴 것입니다. 부활의 증인은 순교자였던 것입니다. 죽어도 부정하지 않은 겁니다. 증인이 순교자가 된 것입니다.

인류 증언사 가운데 일찍이 예수님의 부활 증인들보다 진실 되고 다수의 순교자를 낸 사건은 없습니다. 만일 어떤 공모 사기 사건이라면 무슨 대가를 바라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바란 것이 없습니다. 그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저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 하는 것이오니 주여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순교했습니다. 사람은 죽음 앞에서 제일 진실해 진다고 합니다. 내세가 없고, 영혼이 없다면, 아무 유익도 없다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거짓 순교를 해야 했던 심리적, 도덕적 동기가 도저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순교자들은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보고 알았습니다. 그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이요. 그리고 주님은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메시야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답게 공식적으로는 베드로가 제일 처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이전에 제판을 받으실 때 대제사장과 빌라도 총독은 자꾸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 사실이 진실이냐고 예수님께 물어봅니다. 마태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마태복음 26:63 “예수께서 침묵하시거늘 대제사장이 이르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그러면서 마태복음 27:40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럽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 그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해서 죽이는 것입니다. 이런 대제사장의 질문에 예수님은 마 26:64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65절에 보면 대제사장이 옷을 찢고 격분합니다. 그러면서 더 무슨 증인이 필요하냐고 합니다. 그러면서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마 27:43) 예수님이 대제사장 앞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우회적으로 말씀하셨는데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마 27:11) 라고 직접적으로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이 총독은 유대인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관심도 없습니다. 자기 자리에만 관심이 많은 그런 사람입니다. 그가 만일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적으로 받아들이고 믿었다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허락하지는 않았겠지요. 대제사장도, 빌라도 총독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지만 그것을 믿기는커녕 그 이유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러나 이를 지켜보던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마 27:54) 고 고백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셨지만 이 말을 진실로 믿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믿음을 강조합니다.

요 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6:3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요 20: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복음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은 믿음을 강조했습니다. 믿음뿐이 없다는 것예요.
왜 믿음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어야 그분이 우리에게 오셔서 증거 하신 모든 말씀이 진실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정하면 예수께서 하신 그 모든 것이 거짓이 됩니다. 예수님이 거짓말쟁이가 됩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행 2:32)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행 3:15) 그래서 순교할 수 있는 겁니다.
레위기 5:1 “누구든지 증인이 되어 맹세시키는 소리를 듣고도 그 본 일이나 아는 일을 진술치 아니하면 죄가 있나니 그 허물이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라고 합니다. 진실한 증인은 사람의 생명을 구합니다(잠 14:25).

사도행전을 마친 후 초대교회 시대 로마 황제 세베루스(Septimus Severus)의 치하인 202-3년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에서 두 여성이 기독교인이라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페르페투아(Vibia Perpetua)라는 20살이 약간 넘은 귀족 여성과 그녀를 돕는 여성 펠리키타스(Felicitas)가 함께 투옥되었습니다. 페르페투아는 결혼하여 아직 젖을 떼지 못한 아이의 엄마였습니다.
아직 경찰에서 심문을 받고 있을 때 귀족 아버지가 찾아와 기독교 신앙을 버리고 집안을 택할 것을 권하였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에게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을 버리도록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페르페투아는 아버지에게 꽃병을 가리키면서 저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꽃병”이라고 대답하자, 그녀는 아버지에게 “꽃병을 꽃병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것처럼, 기독교인을 기독교인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처형 날, 미친 소를 풀어 싸우게 하였고 소가 그녀의 옆구리를 들이박아 많은 피를 흘렸지만 죽지 않았습니다. 페르페투아는 다른 여인들을 돌보아 주려고 하였고 다시 표범을 풀어 물게 하였습니다. 표범의 공격에도 살아남게 되어 결국 군인들의 칼에 생명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갈비뼈를 심하게 다쳐 몸을 움직이기도 힘들어진 그녀는 손을 떨고 있는 검투사에게 목을 내밀어 최후를 마쳤습니다. 이것이 산 증인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본문 행 2:24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하신 말씀이 페르페투아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다 순교한 모든 분들에게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부활의 사다리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2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3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행 17:2-3)

오늘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입니다. 이 부활절에 우리의 잠자던 믿음이, 신앙이 깨어나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은 에스겔이 본 환상과 같이 해골 골짜기와 같아서 육신은 살았으나 그 영은 죽은 자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영은 다 죽은 영입니다. 우리의 영이 다시 살기 위해서는 영혼의 햇빛이 되시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부활은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의 영이 살아나시기를 바랍니다.

한 나라의 경제를 두고 부활을 말하자면 대한민국을 손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1960년대 아프리카의 나라들 보다 더 가난했던 그런 나라였습니다. 현재 세계에서 제일 가난한 아이티(카리브해) 같은 나라였습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땅에서 질병에 장애자에 가정의 궁핍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하도 먹기 살기 힘드니까 겨울이 지나고 보리 추수가 있기 전까지 ‘보리 고개’ 라는 기간이 있었습니다. 이 기간을 무사히 넘겨야 살아나는 것입니다. 봄나물이 나와야 그거라도 뜯어먹고 사는데 그 전에는 먹을 것이 바닥이 난 것입니다. 배춧잎 말렸다 먹는 것 씨레기라고 하나요? 좀 오래도록 버티기 위해서 먹고살 수 있는 방법을 만든 것입니다. 쑥이나 길거리 질갱이도요 다 뜯어다 먹었습니다. 한마디로 먹어보고 죽지 않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다 먹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 먹습니다. 아마 한국 사람에게 하와에게 왔던 뱀이 와서 꼬였다면 한국 사람은 그 말을 들어볼 필요도 없이 먼저 잡아먹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축구에서 골도 먹고, 심지어는 욕도 먹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가 1960년대 처음 수출한 품목이 뭐냐하면은이요 가발입니다. 가진 것이 없잖아요. 그래서 머리 길러서 다 잘라서 같다가 파는 겁니다. 우리나라는 처음부터 남자에 의해서 경제의 밑바탕이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여자입니다. 어머니들이었습니다. 그 머리카락이 나라에 도움이 된다고 하니까 다 자른 거예요. 처음에는 숙식만 제공해 주면 무조건 서울로 올라와 공장에 다녔습니다. 한 집에서 누군가는 희생을 하여 동생들을 책임져야 했습니다. 여러분! 많이 배웠다고 뽐내기 전에 나 때문에 배우지 못한 언니, 누나, 오빠를 생각해야 합니다. 사실 공부 못하여 사회에서 멸시받고 공순이, 공돌이라고 부르던 분들이 있었기에 한국의 경제가, 오늘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의 주요 수출 품목은 섬유와 의류였습니다. 어두컴컴한 지하공장 같은 곳에서 12시간 이상을 일해야 했습니다. 공장을 운영하는 일부 기업주들은 근무 시간에 용변 보러 가는 것이 횟수가 많아지면 이윤을 축낼 수 있다고 하여 노동자들에게 국을 주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한국은 이제 머리카락을 잘라 파는 나라가 아닙니다. 의류나 수출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이동전화, 평면TV, 자동차를 수출하는 하이테크 강국이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아이티 같은 나라가 스위스 같은 나라가 된 것입니다.
이런 경제성장에 대해서 대부분의 서양 경제학자들은 시장경제원칙을 따랐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흔히 말하는 신자유주의 경제학입니다. 그러나 실제는 완전히 다릅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재임하던 기간에 한국의 국가 원동력을 만들었는데요 그 대표적인 기업이 포항제철(포스코)입니다. 한국전력, 한국통신(KT)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가가 만든 기업입니다. 한국이 IMF을 경험한 것도 외환시장의 개입을 적절히 하지 못해 일어난 사건으로 봅니다. 사실 한국은 전혀 자유주의 시장체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비단 이것이 한국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계의 모든 선진국은 보호무역장벽을 두텁게 사용하며 성장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지금 신흥경제국가 들에게 신자유주의 무역을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1841년 독일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리스트는 영국이 자신들의 높은 관세와 광범위한 보조금을 통해 경제적인 패권을 장악해 놓고는 정작 다른 나라들에게는 자유 무역을 권장하고 있다고 질타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영국이 세계 최고의 경제적 지위에 도달하기 위해 스스로 타고 올라 사다리를 치워 버렸다” 고 질타했습니다. 정상에 올라간 사람이 다른 사람이 올라오지 못하도록 자기가 타고 올라간 사다리를 치워버린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세계의 경제 논리입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다릅니다. 예수님은 다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갈 수 있는 사다리를 놓아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 가는 사다리입니다. 우리를 위한 사다리입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가 세계에 들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심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십자군형태의 복음전달 때문입니다. 무력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점령한 것입니다.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이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역사적으로 이웃 국가와 좋은 관계에 있는 나라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전쟁을 한 것입니다. 아르메니아는 정교회 국가입니다. 아제르바이잔을 쳐들어가서 사람들을 죽이고 심지어는 배를 갈라 십자가로 표시하고 나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은 십자가를 민족의 원수로 알고 있습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신의 국가를 위한 다는 명목으로 전쟁한 것 회개해야 합니다.
로마 카톨릭이 전 세계에 비슷한 방법으로 들어갔습니다. 마치 사다리를 치워버리는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진실로 그 나라를 위하지 못했습니다. 그 일환으로 식민지화하면서 남자들을 교육시키지 않았습니다. 똑똑해져야 대모나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무식하게 만들었습니다. 교육이 없으면 사람이 안 만들어집니다. 그래도 우리나라가 잘 수 있었던 것은 교육을 시킨 것입니다. 부모는 찢어지게 가난해도 공부를 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전 세계에서 카톨릭 식민지화되었던 나라들이 아직까지도 회복이 안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은 비무장입니다. 힘으로 승리할 것 같으면 열두 영이나 더 되는 하나님의 힘을 빌어 자기를 십자가에 죽이려는 사람들을 모조리 불태워 죽이셨을 것입니다. 십자가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비무장입니다. 사다리를 치워버리는 복음이 아니라 사다리를 놓아주는 복음입니다.
명심보감에 나오는 말입니다. 筍子(순자)에 云 良農(운 양농)은 不爲水旱不耕(불위수한불경)하고 良賈(양고)는 不爲折閱不市(불위절열불시)하며 士君子(사군자)는 不爲貧窮怠乎道(불위빈궁태호도)니라
순자가 말하기를 “훌륭한 농부는 가뭄이 들었다 하여 농사를 그만두지 않으며, 훌륭한 상인은 손해를 본다 하여 장사를 그만두지 않으며, 사군자(士君子)는 가난하다 하여 도(道)에 게으르지 않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복음 전달하는 것을 우리의 성공의 틀, 기준 위에서 하면 안됩니다. 사람의 실패와 성공의 여부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판단하실 일입니다. 우리는 그저 명령대로만 하면 됩니다. 명령대로 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방법입니다. 바울은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고 말합니다(딤후 4:2).
주님의 음성을 들어 볼까요? 마태복음 24장 45절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라고 물으십니다.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비무장의 복음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승리를 준다는 것입니다. 부활은 승리입니다.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본질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정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나만을 위한 복음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우리나라만을 위한 복음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잘못되면 복음이 전혀 아닌 것을 복음이라고 설교합니다. 또 그것을 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복음의 사다리를 치워버리는 일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을 바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떠나서는, 성령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성경을 떠난 그 무엇도 진실이 될 수 없습니다. 복음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봅니다. 행 17:2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그랬습니다. “규례대로”는 에이오도스는 완료 부사로서 이미 익숙해진 행동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미 지나온 살라미(13:5), 비시디아 안디옥(13:14), 이고니온(14:1) 등에서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가 바울을 자꾸만 이야기 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가 신약성경 13세 권을 남겨 제일 많은 분량의 책을 쓴 것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언제나 성경대로 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유럽에 제2차 전도여행 때 들어가서 데살로니가에 3주 이상 머물면서 그곳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유대인이 회당에 모이는 시간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그 때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바울은 언제나 성경을 떠나서는 증거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전한 메시지의 초점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이 유럽지역에 최초로 전해진 복음입니다. 예수님이 복음입니다.

터어키에 선교하던 선교사 한 분이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설명하려했습니다. “나는 여행하고 있습니다. 길을 가는데 두 갈래의 길을 만났습니다. 어느 길이 내가 목적하는 곳으로 갈 수 있는 길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누군가에게 길을 물으려고 하다가 두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이요 또 한 사람은 죽어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누구에게 길을 물어야 하겠습니까? 산사람입니까? 죽은 사람입니까?” 그러자 그들은 말하기를 “그야 물론 산 사람에게 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무조건 믿으라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3절 “뜻을 풀어” 라고 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강해 설교를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무슨 뜻을 풀었습니까?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입니다. 초점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메시지의 중심은 병 낳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물질 축복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제대로 된 복음을 믿고 따르려면 우리 시대에 앞서 간 믿음의 선배들에게 배워야 합니다. 영국의 마지막 청교도 후예이며 복음 설교자였던 로이드 존스 목사는 바른 역사관을 가지고 초대교회로 신앙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위대한 신앙 인을 본받으라고 말합니다. 그는 미국의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에 대해서 철저하게 연구해 보라고 런던 신학교에서 강연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조나단 에드워드에게서 하나의 커다란 계시와도 같은 것을 받았다고 합니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지독한 근시라서 강대 상에 설 때에 설교할 내용을 한 마디도 빼놓지 않고 다 쓴 사람입니다. 한 손에 촛불을 들고 설교문을 읽어내려 갔다고 합니다, 그 설교를 듣는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령의 권능을 견디지 못해 나동그라지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왜 그런 능력이 일어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대로 전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살 수 있는 방법은 예수께 돌아가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께 갈 수 있는 사다리를 놓으신 분입니다. 이 사다리를 우리가 치워버리면 안됩니다. 복음이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형제와 이웃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느 8:10 “느헤미야가 또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예비치 못한 자에게는 너희가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이 우리의 힘입니다.

미국의 노부부가 성지순례차 고향 땅 이스라엘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내가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남편은 장의사를 찾아 시신 처리와 장례 절차를 물어보았습니다. 장의사는 두 가지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에 묻힐 경우 축복도 받고 비용도 150달러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시신을 방부처리해 미국으로 공수하는 방식인데, 절차도 번거롭고 비용도 5,000달러나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노인은 망설이다 결심했습니다. 비싸더라도 미국으로 시신을 옮겨 묘지에 묻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유대 땅에 묻히면 그 옛날 어느 분처럼 자기 아내가 부활할지도 모르는데, 그게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지난주간에 새중앙교회 대신교단의 선교훈련에 강의를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선교훈련 받는 분들 중에는 목회를 은퇴하고 선교지로 가기 위해서 훈련받는 목사님도 계셨습니다. 제 강의 중에 어떻게 해야 선교편지를 잘 쓸 수 있을까? 또 어떤 편지가 좋은 선교편지 일까 생각했습니다. 서로 논의하던 과정에서 우리는 하나의 결론을 이끌어 내었습니다. 선교지에서 한 영혼에 대한 깊은 관심이 결여된 상태에서 후방의 교회들에게서 후원만 받고자 하는 마음이 앞서면 좋은 편지를 쓸 수 없다는데 공감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교회만 부흥시켜 보려고 전도하려고 한다면 아마 우리는 쓴맛만 보아야 할지 모릅니다. 우리 주님이 하셨던 것처럼 한 영혼에 대한 관심을 가지십시오. 나의 모든 역량을 집중시켜서 한 영혼을 사랑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놓아주신 십자가의 사다리를 치우는 자가 아니라 세우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고전 2:4-5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십자가에 못 박자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 6:14)

지난 두 주일에도 십자가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십자가는 너무나도 엄청난 사건이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아무리 설명을 해도 부족합니다. 또 솔직히 다 설명드릴 수 도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안에서 감추어진 비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십자가를 알려고 부단히 노력해야 하고 십자가를 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한때 바울에게 있어서도 그 십자가가 거침이 되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구주께서 무능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것은 정말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구주께서는 위대하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어야 하고 군사력이 있으면서 행차할 때마다 화려함과 어느 왕 못지 않게 큰 의식이 뒤따라야 하는 왕 중의 왕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런 생각은 예수님 당시에 모든 제자들 사람들이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베들레헴 작은 마을의 알 수 없는 어느 집의 말 밥통에서 나셨고, 당시 비천한 직업으로 취급받던 목수로서 일했고, 바리새인으로도 아무 훈련도 받은 적이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메시야라니, 또한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그가 할 최종적인 일이라니, 그야 말로 우스운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러했던 그가 로마 총독 베스도와 아그립바 왕 앞에 나타났던 어느 날, 그 기세 등등한 무리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행 26:9) 라고 했습니다. 그가 멸시하고 이해하지 못한 것이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랬던 그가 지금은 자기의 모든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라고 말합니다. 이방인의 대 사도로서 바울의 인격과 신앙은 최고조에 달해있습니다.
그러나 바울도 처음부터 십자가를 이렇게 자랑하고 알았던 것은 아닙니다. 자기가 이스라엘 사람이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베냐민 지파에 속한 사람이요, 팔일 만에 할례 받았다는 사실을 자랑하곤 하였습니다(빌 3:5-6). 그 뿐만이 아니라 자기가 율법에 능한 사람이요 지극히 종교적인 사람이라는 등의 자랑을 하였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총 결론은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누구나 십자가를 바르고 깊게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신앙이 좋다는 것은 기도하여 목이 많이 쉰 것이나, 물질의 축복을 많이 받았다든가?, 위대한 간증거리가 있어서만이 아닙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십자가가 얼마나 내 중심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떠난 축복은 없습니다.
그토록 십자가를 바울이 자랑한 이유를 오늘 본문에서 설명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세상을 십자가에 못박기 위해서’ 라고 말합니다. 십자가에 못박는다는 것은 사형에 처하여 더 이상 그것이 살아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십자가가 세상을 제거시켰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서의 문제는 세상에서 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풀면 하늘 나라에서도 풀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의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해결시키는 일이 십자가를 따르는 것입니다. 이 점을 달리 표현해 보겠습니다.
한 타입의 사람들은 세상에 속해 있으며 세상을 자랑합니다. 예수님의 제작들도 당시에 로마가 지어주는 예루살렘 성전을 보고 예수님께 그 성전의 돌기둥들이 어떠하냐고 자랑했습니다. 또 다른 한 타입의 사람들은 이 세상 가운데 살아가고 있지만 이제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지난번 남북한이 월드컵 예선전이 있었습니다(2009.4.1). 북한에서 온 탈북자들에게 어느 팀을 응원할 것이냐 물어보았습니다. 대부분의 탈북자들은 남한 팀을 응원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진한 민족적 감정이 베어있어 “체육에는 국경이 없는 것 같이…” 라고 말합니다. 성경이 취하는 것은 어느 민족인가? 피부 색깔이 어떤가? 부자인가 아닌가? 어디서 배웠는가? 등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 속해 있는가 세상에 속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피부색이 검으면 어쩐지 우리와 다른 사람 같아서 가까이 가거나 호감을 가지는 것에 두려워하는 어떤 편견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마치 그들을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보지 않는 것이지요. 선교를 하면서도 차별 아닌 차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생각을 완전히 무너트린 계기가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신이 찾은 아이들”(GOD GREW TIRED OF US)이라는 책을 읽은 후부터였습니다. 이 책을 읽어 내려가면서 더 보고 싶은데, 더 책장을 넘기기 싫었습니다. 이해가 안가시죠? 이 책의 내용은 실화입니다. 우리가 수단에 대해서 그동안 알고 있는 상식은 오랜 내전이 있는 나라 정도입니다.
13살의 당카족 소년(존 불 다우)이 자신이 살고 있던 수단의 둑 빠유엘(Duk Payuell) 마을에 젤라바(북쪽 수단에 사는 이슬람인) 들이 한밤중(1987년 수단 내전)에 쳐들어오면서, 그 밤중에 가족의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탈출하여 1,600km가 넘는 길을 걷는 동안 수 없는 죽을 고비를 넘기는 이야기입니다. 19년 간이나 그런 생활을 했습니다. 하루 하루의 삶이 하나님께 받은 선물이라고 여기면서 모든 역경을 꿋꿋하게 이겨나가는 모습을 그린 책입니다. 바로 다음 책장에서 이 소년이 당하게될 고난을 생각하게 되면서 책장을 넘기기가 두려웠던 것입니다. 죽을 고비를 넘긴 체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났지만 뒤따라온 젤라바들에 의해 물 속에 숨어있어야 했던 일, 그들에게 발각되어 죽도록 얻어 맡은 일 등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책 중간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머리 위에 태양은 계속해서 우릴 구워대고 있었다. 소년들은 오줌이라도 마시려고 손에 컵을 들고 이 사람 저 사람 옮겨 다니며 오줌을 눠 달라고 애걸했다. 나는 비틀거리며 계속 걷고 있었지만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바로 그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이들은 우여곡절 속에 에티오피아에 있는 난민캠프를 찾아옵니다. 구호단체 활동가들은 1만 7,000명의 걸어다니는 해골이 들어왔다고 했습니다. 1988년 중반 에티오피아 남서부 지역에 설립된 난민 캠프에 26만 5,000명의 난민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소년들의 여정은 에티오피아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에티오피아 군이 이곳을 급습한 것입니다. 악어가 우글거리는 강과 물 속에 쳐 넣으려는 에티오피아 군 사이에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전투가 벌어집니다. 수영을 못하는 아이들은 물 속에 수장되었고 일부는 악어의 먹이 감이 되었고 일부가 가까스로 살아 남아 강 건너로 가게됩니다.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또 사막을 헤매며 어디론가 가야합니다. 현재 이렇게 떠도는 아이들이 선교사님의 보고에 의하면 아직도 100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이 아이들을 가리켜 바깥세상 사람들은 잃어버린 아이들(The lost boys) 이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더 걸어야 하는가? 얼마나 더 멀리가야 하는가?” 라고 사람들은 묻습니다. 존 불 다우는 말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도 우리가 싫어 졌거나, 우리의 존재조차 잊어버린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도 잊지도 않았다. 하나님은 결국 우리를 찾아냈다!”

저는 이 책을 보고 흑인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한 인간의 존엄성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존 불 다우는 흑인이면서 키가 2미터 넘는 장신입니다. 보통 미국 사람들도 존 불 다우 보다 작습니다. 저는 키가 큰 이 흑인을 통해서 민족이나 국가보다 하나님 안에서 한 형제, 친구임을 확인했습니다. 그는 미국 난민 정책에 의해서 나중에 미국으로 건너가 교회의 성도들의 도움을 받으며 공부를 하고 자기의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져 유명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살던 수단의 당카족 마을에 학교를 짓고 병원을 지으며 활동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기존의 우리의 모든 가치관을 다 바꿔놓습니다. 하나님은 도덕주의자, 윤리적인 사람, 시 적인 사람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사랑하는 사람을 원하십니다. 십자가는 국가도 민족도 아닙니다. 전도하다보면 어떤 분은 기독교를 서양종교라고 안 믿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민족종교를 믿겠다는 겁니다. 여러분! 민족이나 국가가 십자가보다 먼저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민족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보다 먼저가 아닙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5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 5:16) 바울도 한때는 유대인임을, 베냐민 지파임을 자랑했습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우리 인간은 자신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거울과 같은 것입니다. 나를 비추어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세상의 육 적인 사람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바꾸어 놓습니다.

우리에게 제일 골치 아픈 문제 거리가 있다면 그것은 모두가 자기 중심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타락한 이후에 변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내가 도를 닦고, 내가 무엇을 자꾸만 하려고 합니다. 개인뿐만 아니라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는 선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지구 모퉁이에 있는데 선교사는 자기가 있는 곳이 중심이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자기 중심적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인간에게 있어서 이것이 딜레마입니다. 이것이 제일 풀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인간은 본질상 자기를 의뢰하며 자기 신뢰 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자기 속에 성공케 하는 것이 있다고 믿습니다. 자신의 운명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자기의 운명을 내어 던지는 사람도 문제이지만 자기의 운명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믿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래서 딜레마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말하지만 인간처럼 성장이 더딘 동물도 없습니다. 거북이나 뱀은 알에서 깨어나자마자 부모의 도움 없이 독립적인 생활을 시작합니다. 제가 송아지 낳는 것을 직접 본 적이 있습니다. 엄마소가 새끼소를 낳는데 그만 다 나오지 못하고 먼저 머리만 나왔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보니까 소가 머리가 둘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 상태에서 눈을 뜨더라구요. 그리고 네 발이 다 나오자마자 땅에 뚝 떨어지면서 물기를 엄마소가 핥아 주니까 네 발로 바로 일어서더라구요.
세상의 모든 심리학은 “너 자신을 믿으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렇게 할 만반의 채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의인은 없다고 말합니다(롬 3:1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고 합니다. 그런 죄인인 우리가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있겠습니까? 내 중심대로 살아서 성공 할 수 있겠습니까? 안됩니다.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19)
그러면 우리는 버려진 자 입니까? 그 또한 아닙니다. 수단의 한 소년(존 불 다우)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없는 인간도 아닙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 주었습니다. 내 자신을 버리면 십자가가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지만 십자가는 부활의 시작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에게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라고 말합니다.

‘경청’이라는 책에 보면 ‘청(聽)’ 자라는 글자를 풀이한 것이 나옵니다. ‘청’ 자의 부수는 왼쪽에는 ‘귀 이(耳)’ 자와 밑에 ‘임금 왕(王)’ 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른 쪽에는 ‘열 십(十)’ 자 밑에 ‘눈 목(目)’ 자를 눕혀 놓은 글씨가 나오고 그 아래는 ‘한 일(一)’ 자와 ‘마음 심(心)’ 자가 있습니다. 여기서 나름대로 풀이한 것은, 듣는 다는 것은 왕 같은 귀를 가지고 들어야 하고, 다시 말하면 집중해서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어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열 개의 눈이라는 것은 마치 보는 것 같이 열 개의 눈을 가지고 들어야 함을 말합니다. 듣는 다는 것은 눈을 가진다는 의미도 됩니다. 그리고 한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임금님과 같은 귀를 가지고, 열 개의 눈을 가지고 십자가를 똑바로 보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다윗이 시 61:2 “내 마음이 약해질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라고 합니다. 땅 끝이 어디입니까? 더 이상 갈곳이 없는 곳입니다. 피할 곳도 없는 곳입니다. 십자가는 바로 땅 끝입니다. 인생의 마지막에 십자가를 만납니다. 아직도 피할 곳이 많이 남아있는 사람은 십자가로 나오지 않습니다. 자기의 학문 때문에, 자기의 재물 때문에, 자기의 배경 때문에 숨을 곳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땅 끝에 선 내가 될 때 십자가를 붙들게 되어있습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 주님이 박히신 십자가에 함께 박으시기를 바랍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