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으로 시작하세요.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23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료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리니 24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 25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26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27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28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29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 4:23-31)

자동차에서 제일 중요한 기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자동차는 물론 가기 위해서 만들어졌습니다. 엔진이 제일 중요할 것 같지만 아닙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브레이크입니다. 멈출 때 멈춰야 합니다. 멈추지 못하면 사고가 일어납니다. 처음 자전거를 만들고, 비행기를 만들었을 때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이 멈추는 브레이크 장치였습니다. 멈출 수 있다면 다 완성된 것입니다.
완벽함이란 덜하거나 더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 그대로가 완벽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대로가 완벽한 것입니다. 자 옆 사람 보세요. 완벽하지요.
조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어디서 멈추느냐 하는 것입니다. 깍아 내지만 멈출 것을 생각하고 깍아야 합니다. 멈출 생각하지 않고 깍다 보면 다 깍아 버립니다. 그러면 망치는 거예요. 조각에서는 더 이상 깍아낼 것이 없을 때, 그리고 소조에서는 더 이상 더할 것이 없을 때 완벽함에 이를 수 있다고 봅니다. 완벽이란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자연스러움입니다. 투박한 돌이 조각가를 만나 하나의 예술품으로 만들어지듯이 우리가 예수님을 만남으로 성령을 만남으로 만들어지며 완벽해 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공이나 성장보다 더 마음에 두어할 단어가 있습니다. ‘성숙’입니다. 성공했고 성장했지만 ‘성숙’하지 못하면 인간은 더 허무하고 더 보잘것없어집니다. 성공했냐. 성장했냐가 아니라 무엇이 성공했고 무엇이 성장했냐는 것입니다. 콩 심은 데는 콩 납니다. 우리 속담에 “개꼬리 삼 년 묻어 놓았다가 꺼내보니 개 꼬리였다.”는 말도 있습니다. 근본이 바뀌지 않고는 안됩니다. 아무리 성장해도 성공해도 무엇을 가지고 했냐는 겁니다.
“알맹이가 없는 사람은 아무리 겉을 꾸며도 그 속이 언젠가 드러난다.”(노자)고 했습니다. ‘원단론’이 있습니다. 원단이 상해있는데 아무리 재봉틀로 박아도 찢어진다는 겁니다. 원단이 바뀌어야 합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영화에서 본 한 대사가 생각납니다. “못 하나가 없어서 말의 편자를 달 수 없지. 편자가 없어서 말을 잃었고, 말이 없어서 연락할 수 없었지. 연락할 수 없어서 전쟁에 졌고.” 비록 그것이 작을지라도 무엇을 가지고 시작했느냐하는 것입니다. 못 하나가 없어서 전쟁에서 실패한 자와 같이 성령이 없으면 우리는 실패자입니다. 성령으로 시작하세요. 이제부터 심는 것은 다릅니다. 예전에는 나를 위해 심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주님을 위해 심습니다. 교만했던 내가 겸손해 집니다. 나를 위해 살던 내가 주님을 위해 삽니다. 나를 위해 심는 것은 이 땅에서 다 받을 것이고, 주님을 위하여 심는 것은 영원한 저 세상에서도 유효합니다. 하늘 곳간에 쌓아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마 1:18),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마 1:20)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성령으로 시작된 분입니다.
우리도 성령으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성령도 나의 육신의 정욕을 위해서 사용했다면 지금 바꾸어야 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의 욕심을 채우라고 보내주신 것이 아닙니다.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심어야 합니다. 근본이 바뀌지 아니하면 안됩니다.

세례요한은 증거 합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마 3:11) 성령으로 오신 분이 성령을 주십니다. 우리 기독교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성례가 있습니다. 그것은 세례입니다. 세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세례만 받고 성령세례를 받지 않으면 안됩니다. 물세례가 상징적인 것을 의한다면 성령세례는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우리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원단이 바뀌는 것입니다. 새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성령의 반대는 악령입니다. 사탄의 영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자기가 악령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선을 가장하여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처음에는 좋은 것을 주는 것처럼 위장합니다. 마치 노름판에서 처음에 잃어주는 노름꾼과 같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판을 키워 가지고 다 쓸어 가지고 갑니다. 결국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성령이라는 말은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의 영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예수님부터 시작하느냐 하면 바로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하시고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성령이 없습니다. 성령을 받을 자격도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오신 예수님이 우리를 성령으로 초대해 주셨습니다. 바로 성령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요 3:34),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요 20:22)

성령이 얼마나 우리에게 소중하냐 하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하나님의 나라가 성령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없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못 갑니다.

성령으로 시작하려면 먼저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성령을 받을 수 있는지 말씀을 통해서 봅니다.
첫째, 모여야 합니다. 성경에서 성령이 예수님 승천이후에 제일 처음 임한 것은 사도행전 2장에 나옵니다. 사도행전 2: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라고 합니다. 제자들이 모여서 고스톱 쳤겠습니까? 기도했을 것입니다. 모여야 합니다. 마음을 합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이후에도 사도행전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라고 합니다.
어떤 학생이 자기 친구하고 1시간을 통화하고 난 후에 “벌써 1시간 지났어?” 그럽니다. 그리고 또 만나서 이야기하자 그럽니다. 1시간 통화하고 만나서 할 이야기가 있나 그렇게 생각하시겠지만 사랑하는 사이는 다릅니다. 또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냥 기쁩니다. 자꾸만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냥 기쁩니다. 주님과 만나는 시간이, 기도하는 시간이 기쁩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5) 모이기를 폐하면서 기독교는 힘을 잃어 가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도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 마음을 합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마음을 같이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 4:24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한마음으로 해야합니다. 모여서 싸우려면 안 모이는 것이 좋습니다. 선교대회 때도 모처럼 모이니까 회의를 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간혹 서로 다투게 되는 것을 봅니다. 어떤 지역에서는 하도 싸우니까 예배를 먼저 드리던 것을 나중에 드립니다. 나중에 회의하다가 다 시험에 들어서 가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회의를 별로 안 좋아합니다. 회의하는 것에 회의가 듭니다. 솔직히 회의 많이 하고 잘해서 교회성장 했다는 말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기 위해서 모여야 합니다.
어느 날 조조는 외지에서 보내온 우유를 맛본 뒤 그 항아리 뚜껑에 ‘합(合)’ 자를 써서 부하에게 돌렸습니다. 부하들은 항아리를 두고 어리둥절했습니다. 그 때 조조의 뜻을 알아챈 한 부하가 있었습니다. 사람(人) 마다 한(一) 모금(口) 씩 마시라는 뜻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음을 합하는 것은 자기가 혼자 다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나누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음을 합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성령하면 그저 뜨거움만 생각하게 되는데 그리고 마치 밀어붙이는 것만이 능사인 것처럼 성령을 오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22-23절에 성령의 9가지 열매가 나옵니다. “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이중에 적어도 3개 이상(오래 참음, 온유, 절제)이 조용한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나 가정에서 말만 많은 사람들 때문에 좋아지는 것입니다. 참아야 합니다. 그 참을 수 있도록 만드는 힘이 성령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마치 브레이크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화를 돋굽니다. 사탄은 예수님께도 그랬습니다. 마지막 십자가에까지 가서 예수님께 놀립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지금이라도 뛰어내려 보라”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탄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이겼습니다. 참았습니다. 온유하신 것입니다. 절제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를 브레이크 없이 달려가도록 만듭니다. 결국은 파멸로 이끕니다. 성령이 없으면 브레이크가 없어요. 안전장치가 없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인도하시는 안전장치입니다.

셋째, 말씀 전하기 위하여 받아야 합니다, 본문 29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제자들이 오순절 날 성령을 처음으로 받고 베드로와 요한이 예루살렘에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 자리는 예수를 핍박하던 자리입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기 위하여 재판하던 바로 그 자리입니다. 성령이 임하기 전에 그 때에는 요한은 예수님을 두고 모른 채 하였고, 베드로는 그 자리에 한 여종의 고발로 그 자리를 피하여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도망가지 않습니다. 피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보고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 4:20)고 하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전합니다. 이 때 제사장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들을 잡아 가둡니다(행 4:1-3). 그리고 다음날 이들을 따르던 사람들은 남자들만 5,000명이 되는데 이들도 이제 도망가지 않습니다.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행 4:5),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6) 예수님께 하였던 똑 같은 질문을 합니다.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냐는 겁니다. 아마도 예수를 죽이도록 재판한 이들이 무슨 재판인들 못하겠습니까?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합니다. 행 4: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고 합니다. 이제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갇히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당당히 예수를 전합니다. 산헤드린공의회에서는 베드로와 요한의 답변에 마땅한 혐의점이나 문제를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말이 옳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로 요한과 베드로가 예루살렘 옥에서 풀려났다는 소식을 듣고 한마음으로 기도한 것입니다.

정주영씨의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분이 인천에서 막일을 하며 밤을 노동자 숙소에서 지내는데 빈대가 얼마나 많은지 달려들어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빈대를 피해서 밥상을 올려놓고 그 위에서 잠을 자는데 밥상 다리를 타고 빈대가 올라오더랍니다. 그래서 빈대에게 질소냐 하면서 물통을 밭쳐놓고 그 위에서 잠을 자는데 이번에는 빈대가 벽을 타고 올라가 천장에서 다이빙을 하더랍니다. 그 후로 그는 일평생에 동안 빈대 철학으로 살았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것 같은 빈대도 자기에게 닥친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데 하물며 영장인 사람이 좌절하고 낙심하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본문 29절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31절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오늘날 성령을 오해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성령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역사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병이 나은 것으로 마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들어가야 합니다. 복음을 위하여 병이 나았습니다. 복음을 위하여 우리에게 부어 주십니다. 여러분! 예수 전할 마음만 가져보세요.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마음만 가져보세요. 반드시 세상 끝날 까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

예수의 흔적을 가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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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18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갈 6:17-18)

오래 전 있었던 어느 선교사 자녀의 고백입니다.
“나의 아버지와 엘리오트 등 다섯 명의 선교사들은 석기 시대를 살고 있는 아우카 족에게 접근했습니다. 맨 처음 정글로부터 나온 아우카 족의 한 남자와 두 여자에게 우정의 표시로 아우카산 레몬에이드와 햄버거를 주었습니다. 그때, 다른 아우카인들이 분노하며 강가로 나와 창을 들고 아버지를 비롯한 선교사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그 당시에 나는 다섯 살이었고,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습니다. 아버지가 안 계심으로 쓸쓸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나는 믿음에 회의를 가졌으나, 성장하면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게 되었고, 아버지의 순교가 의미하는 바를 깨달아 갔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0년이 흐른 뒤, 아버지가 묻힌 팜 비치 강가를 찾았습니다. 그때 아버지를 비롯한 선교사들을 죽인 아우카 족 사람 중에서 두 명을 만났습니다. 선교사들이 죽은 후에 라헬 아주머니와 엘리오트 선교사의 부인이 그 부족에게 끝까지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했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 자신의 생명을 드리겠다고 헌신했습니다. 나의 누나는 아버지를 죽인 그 아우카인들이 이제 크리스천 지도자가 되었으니 그들에게 내가 세례를 받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 중요한 사건에 응하는 것이 주님께 순종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아버지가 죽은 그 강물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는, 나의 옛 사람이 다 죽어 버림을 뜻하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것도 아버지를 죽인 아우카인들의 손을 통해…. 강물에서 올라왔을 때, 나는 아우카인에 대한 사랑으로 함께 울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 선교사 자녀에게는 아버지의 죽음은, 그리고 아우카인들에 의한 세례는 하나의 증표가 된 것입니다. 아버지를 선교지에서 잃고 혼자 어린 시절을 보내야만 했던 그에게는 상처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상처라고 하지 않고 우리는 그것을 하나의 증거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아이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아우카인들에게 세례를 받지 않았다면 말 그대로 아버지의 죽음은 상처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 예수께 돌아온 사람들은 과거의 상처가 오히려 하나님의 증표가 됩니다. 하나님의 표증이 됩니다. 세상 사람은 그 상처를 그대로 안고 살아가지만 하나님께 돌아온 하나님의 자녀는 그 상처들이 오히려 믿음의 원동력이 됩니다.

저희 어머님이 저를 어렸을 때 무당에게 팔아먹었습니다. 순진하신 우리 어머님이 아마 어떤 분의 말을 곧이듣고 자식 잘 되게 하려고 팔아먹은 것입니다. 제가 무당에게 가서 우상 밑에서 지냈어요. 우상이 앞에 놓여있고 향을 피우고 옆에는 북이 하나 놓여 있었습니다. 얼마나 무섭고 두렵고 집이 그리웠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제가 자꾸만 병이 나고 아팠습니다. 그리고 제 팔이 양쪽 모두 이렇게 구부러져 있잖아요. 다쳐서 그럽니다. 얼마나 팔이 많아 빠졌던지 너무 많이 빠져서 이렇게 구부러진 거예요. 그래서 우리 어머님이 나를 다시 무당에게서 빼내왔습니다. 자식 잘 되라고 맡겼더니 팔만 빠지고 집안 일이 되는 일이 없다는 거예요. 그리고 저는 어려서 팔이 이렇게 다쳐서 짧은 팔 옷을 잘 안 입습니다. 아이들이 팔 병신이라고 얼마나 놀렸는지 모릅니다. 우리 아버님은 또 다리를 저셨습니다. 우리 어머님은 병신 집안이라고 사람들이 놀린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단순히 가난한 것이 아니라 우리 집은 마치 이웃과 사회로부터 소외된 느낌을 받으며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우리 아버님과 우리 집과 제일 친하게 지내며 산 집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뒷집에 맹인아저씨가 사셨는데 침을 놓으시면서 사셨습니다. 그분이 우리 집의 이웃이며 친구였습니다. 제 구부러진 팔만 보면 그 어린 시절이 생각납니다. 지울 수가 없어요. 왜 그렇습니까? 제 팔이 증거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흔적(stivgma:스티그마)은 “표시, 일하다 얻은 상처, 흔적”을 말합니다. 본문과 같은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여기 하나만 나옵니다. 그러나 비슷한 단어들은 많이 나옵니다. ‘표징, 표시’를 말하는 세메이온과 세마이노 ‘의미하다. 나타내다’와 쉿메온 ‘신호, 표준’도 모두 비슷한 말입니다. 이 단어들이 헬라어인데 구약용어에서는 이렇게 다양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단어들이(약 5분의 4) 구약적 용어(히브리어) “t/a:오트”에서 나왔습니다. 단순하게는 “표시”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오늘 본문의 헬라어 스티그마는 “찌르다, 찌른 자국”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양이나 소들의 주인이 자기 소유의 표시로 인두로 넓적다리에 표시를 찍었습니다. 이것이 낙인입니다.
낙인은 짐승에게만 찍은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찍었습니다. 예를 들면 죄수들, 전쟁 포로들, 노예들입니다. 군대에서는 탈영자들에게도 찍었습니다. 그리고 로마의 포악한 황제 갈리굴라(Caligula)는 선량한 시민에게 낙인을 찍고 감옥에 가두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낙인이 찍힌 사람들은 수치스러운 자들로 간주되었고 조롱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낙인을 지우고자 여러 가지 방법을 강구하였으나 대부분 성공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고대 바빌로니아에서도 반항적인 첩들이나 자식들에게 노예의 낙인을 찍었습니다. 유대인들도 포로로 잡혀갔을 때는 이 낙인이 찍혔습니다. 사람들이 찍은 낙인은 모두 사람을 보호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기의 소유로서 표시하고 종으로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의미하였습니다.

창 4: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t/a:오트)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표시는 문신으로 봅니다. 그런데 이 표시는 살인자라는 의미에서 준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 있다는 것을 알리는 표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살려주시고자 하는 표시였습니다. 출애굽 때의 유월절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발라 하나님의 넘어간다(유월)하신다는 약속의 표시였던 것입니다(출 12:13). 하나님은 우리에게 죄인의 표시를 하시지 않았습니다.
쟈넨(Saanen), 힌 염소로 불리는 동물이 어린이 대공원에 있습니다. 이 동물이 하도 탈출을 잘해서 인근 주민들이 자주 놀라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어린이 대공원에서 손을 들었습니다. 동물원 울타리 밖으로 나가 살 수 있는 자유를 최초로 부여한 것입니다. 그리고 ‘빠삐용’ 이름표와 딸랑이 ‘종’을 목에 걸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인근 주민에게 알리고 텔레비전에도 나왔습니다. ‘빠삐용’ 표시와 ‘종’은 쟈넨을 살리기 위한 표시로 붙여준 것입니다.

출애굽기 21:6에 보면 자유인이 되기를 거부하는 종이 스스로 표시하는 방법이 나옵니다. 그 표시로 귀를 뚫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대제사장에게도 일종의 표시인 기호와 표지를 주셨습니다(출 13:9). 그리나 하나님은 우리가 스스로 하는 문신을 금지하셨습니다. “죽은 자 때문에 너희의 살에 문신을 하지 말며 무늬를 놓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9:28) 유대인 남자면 다 행하는 할례도 일종의 표시입니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에게 있는 흔적은 이런 율법적인 할례나 표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받았던 흔적이 있다고 증언합니다. 고후 11:23-27보면 “23 …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고 합니다.

저에게 팔이 구부러진 것 만 아니라 손목 등에 작은 상처하나가 나 있습니다. 이것은 C국 선교여행 때 받은 상처입니다. 그런데 이 흔적을 보면 그 때 일이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흔적이 없는 사람은 기억이 없습니다. 흔적이 없는 사람은 증언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지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이 있어야 예수를 증거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께서 표적 보여주시기만을 원하고 있습니다. 마 12:38-39 “38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3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이 땅에 사람들의 눈요기를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사실 사탄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예수께 표적만 보여달라고 하면 예수님을 시험하는 것이 됩니다. 왜 예수께 표적은 원했습니까? 예수를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실히 증명할 수 있는 표적을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이미 이전에 요한복음에 나오는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을 뿐 아니라 나병환자(마 8:2), 백부장의 하인의 중풍병을 위한 요청에 의하여 말씀으로만(마 8:8) 고치신 적이 있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왔을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보면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 11:5)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믿지 못할 사람은 어떤 표적을 또 보여주어도 믿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과 설교제목을 혼동하면 안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이 예수님께 또 해보라는 식의 표적을 구하는 것은 예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지기 위해서 기도하고 노력해야 되는 것입니다. 내게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그 증거가 바로 흔적입니다. 시 86:17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라고 노래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구약 시대의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실 이제 하나님께 더 이상의 표적을 원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표적 보여주실 것을 원하기보다는 내가 그리스도의 표적을 가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은 다 하셨습니다. 죄송하지만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이 위에 더 이상 보여주실 것이 없습니다. 다 이루신 것입니다. 다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적과 표적은 주님께서 보여주실 차례가 아니라 우리가 주님께 보여드려야 할 차례입니다.

미국에서 활동적인 목회를 하시는 노스포인트 미니스트리(North Point Ministry) 설립자인 앤디 스탠리(Andy Stanley)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이분의 아버님도 목사이십니다. 어느 날 오후 아버지와 함께 차를 타고 가면 의례 생기는 긴 침묵을 깨고 아버지께 물었습니다. “아버지 사역을 하려면 반드시 소명을 받아야 하나요? 아니면 자원해서 해도 되나요?” 아버지는 잠시 생각하시더니 “글쎄다. 내 생각에는 자원하는 것도 좋겠구나.” 하셨습니다. 그리고 앤디도 “나도 자원하고 싶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지금은 매주일 15,000명 이상의 성도들에게 설교하고 계십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성령의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아직 내가 은혜를 받은 것 같지 않고 성령을 받은 것 같지 않다면 내가 모르고 있거나 느끼지 못할 따름입니다.

창 46:2 “밤에 하나님이 이상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시고 불러 가라사대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삼상 3:3-4 “3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4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성경이 무슨 책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찾고 계신다는 증거의 책입니다. 이것을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야곱을 부르셨던 하나님이, 사무엘을 부르셨던 그 하나님이 오늘 저와 여러분들을 부르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응답할 차례입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억지로 흔적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할례로 표시했다고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께 응답하여 살아갈 때 주님을 믿고 따를 때 흔적을 같게됩니다. 때로는 아픔이 있습니다. 상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광의 상처입니다. 은혜의 흔적입니다.
피아니스트 중에 김지미라는 분이 있습니다. 하루에 8시간, 10간씩 연습하니까 어떤 때는 집어던지고 싶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연주회가 끝났을 때 한 분이 오셔서 “좋은 문화를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했을 때 자신이 하는 일이 문화라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진정 그 문화라는 것을 즐기지 못했다는 겁니다. 교회에 나오면서, 하나님을 전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세상을 경험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는 것은 불행입니다. 여러분 기뻐하세요. 즐겁게 행복하게 사세요. 이제 우리의 흔적은 주님과 함께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잘 지낸 하루가 행복한 잠을 들게 하듯 잘 보낸 인생은 행복한 죽음을 맞게 한다.”(레오나르도 다 빈치)고 했습니다. 이제 세상에서 받은 아픈 상처가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은혜의 흔적만을 남기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어찌 할꼬

“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행 2:36-39)

스위스는 명품 시계를 잘 만드는 나라로 유명합니다. 그만큼 그에 따른 일화도 많습니다. 옛날에는 시계가 귀하고 시계에 태엽을 감아 주어야 했습니다. 이런 시절에 어떤 사람이 화장실에 가서 시계를 풀어놓고 나왔답니다. 그리고 한참을 지나서 그 시계를 잊어버린 화장실을 찾아갔는데 그곳에 시계가 있더랍니다. 시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놀라운 것은 그 시계가 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주인이 올 때까지 태엽을 주고 나가고 다른 사람도 와서 태엽을 감아주고 나갔던 것입니다.
시계가 가고 있었던 것은, 시계를 다시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자기 욕심으로 가져가지 않은 결과입니다. 많은 사람이 기꺼이 자기를 지킨 결과입니다. 욕심을 가지지 않은 결과입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요즘 현대인들은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도 않고 호랑이를 잡으려고 합니다. 그것은 아무리 방법이 좋고 수단이 좋아도 과학도 아니고 경영도 아닙니다. 요행입니다. 요행을 기다리는 것은 성경 적인 것이 아닙니다. 거두려면 반드시 심어야 합니다, 심어야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많이 거두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간단합니다. 많이 심으세요.

어느 여 목사님이 ‘축복, 기적, 치유전도집회’ 라는 제목으로 모 신문에 광고를 낸 것을 보았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고민하고 계십니까? 와 보라!! 여기 성령님의 강권적인 역사의 현장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이곳에선 주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박스로 아래에 이런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비만, 체형관리, 영적문제, 불치의 질병, 모든 뼈 문제, 신경계통, 사시교정, 내적치유, 얼굴모양, 가계 저주의 치유, 말씀, 방언, 통변, 예언, 투시, 악성 아토피질환, 영 분별, 근이양증, 각종 암병, 기타 질병 등... 가정 문제, 직장 문제, 사업문제]”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마 우리 모두가 가 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내과, 외과, 소아과, 성형외과, 안과, 정신과 등이 다 있는 것 같습니다. 이중에 한 두 가지만 한다면 모르겠는데 너무 많아요? 다 한다니까 믿을 수가 없어요. 요즘 음식점도요 한 두 가지만 맛깔스럽게 해야지 너무 여러 가지 메뉴를 만들어 팔면 전문적이지 못해서 안 갑니다. 우리 또한 이 광고 내용처럼, 다는 아닐지라도 부분적으로도 그러한 마음으로 교회를 다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야 합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고 했습니다. 많이 심는 것은 욕심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진짜 욕심은 심지 않는데서 거두려고 하는 것입니다.

영적 위조품과 상표가 없는 상품, 거짓 처방전을 가려내는 비결은 ‘진짜를 확실하게 아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이 속는 이유는 영적인 안목을 키우지 못해서입니다. 이러한 영적 감각을 ‘보는 눈, 듣는 귀’(신 29:4)라고 말합니다.

본문 36절에 베드로는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이스라엘 온 집’ 은 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온 집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과 관계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역사와 함께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확실히 알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야할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밖은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뜻을 전해야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멀리 있는 사람이 속썩이는 것이 아닙니다. 부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가 남편이 못을 박는 것입니다. 선교사가 선교사를 핍박합니다. 예수님을 못 박은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의 가슴에 못 박는 것은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예수 믿는 다고 말하는, 교회 다닌다고 하는 우리 자신들입니다.
범죄 피해자의 80%가 아는 사람으로부터 피해를 당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신문의 제목이 ‘아는 사람이 더 무섭다’이렇게 나왔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 잘 아는 이스라엘 민족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저는 구두에 광을 잘 안냅니다 만은 오히려 너무 번쩍이면 창피해서 다시 문질러 광을 좀 죽입니다. 광을 내기 좋아하는 분들이 만든 말이겠지만 ‘삐까번쩍’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본어에 ‘피카피카’란 말이 있는데 번쩍인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도 ‘모찌떡’과 같은 말이라고 보면 됩니다. 삐까는 일본어고 번쩍인다는 말은 한국말입니다. 광택 내는 것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외제 구두약을 수입하려던 한 회사가 구두닦이를 통해서 시장조사를 했습니다. 놀랍게도 광내는데는 국산 구두약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입니다. 그런데 국산 구두약은 광을 내기 위해서만 만들어졌고 외제 구두약은 광보다는 가죽을 보호하는데 신경을 쓴 약이라는 것입니다. 이 회사는 광택내기만을 좋아하는 한국 사람들의 선호에 밀려 결국 수입을 포기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도 예수님도 삐까번쩍 내 인생에 광내기 위해서 믿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 때 유대인들은 이런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본문 36절 “…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찮게 생각했습니다. 주님을 몰라보았습니다. 주님을 외모로만 본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을 광내는데 예수님을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을 인정하지 못했고, 버렸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끌어 안아주셨습니다. 사람들이 쓸모 없다고 버린 돌을 하나님은 모퉁이 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십자가의 못 자국을 보시며 뼈저린 아픔을 느끼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리시던 그 때 하늘은 어두워지고 땅을 흔들렸습니다. 하나님이 우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파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베드로의 설교를 14절부터 36절까지를 읽어보십시오. 거기에는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예수”가 나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 있는 “부활의 주님”이 나옵니다. 너희는 예수를 죽였지만, 하나님은 살리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죽음이 있지만, 하나님께는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원리는 요한 일서 2:16절에도 마찬가지이고, 로마서 5-6장에서도 마찬가지로 진술되고 있습니다.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6-17)
하나님 안에는 영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영원히 살도록, 영원한 생명으로 이미 창조하였습니다.

베드로의 이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가슴을 쳤습니다. 그들은 이 말씀을 인정했습니다. 마음에 찔렸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찔려야 합니다. 찔려야 회개합니다. 나는 아무 잘못도 범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찔릴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회개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내가 우리 부모님을 속상하게 했습니다. 가슴아프게 했습니다. 내가 남편을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아내에게 못을 박았습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됩니까? 베드로와 사도들에게 질문합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기도하여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쌍둥이를 가진 것입니다. 리브가는 배속의 두 아이들 때문에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배가 아팠던 모양입니다. 이것을 이삭이 알았습니다. 창 25:22 “아이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가로되 이같으면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아이들 둘이 리브가 뱃속에서 싸우는데 남편인 이삭이 뭘 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발만 동동 구를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이삭이 이 일로 하나님을 찾아가 물은 것입니다.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찌해야 모를 때 첫째 기도하세요. 그리고 둘째 본문에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그랬습니다. 사도들에게 물은 것입니다. 지금 이런 찔림이 누구로 인하여 생겼습니까? 베드로의 설교 때문입니다. 당연히 사도들과 베드로에게 물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실컷 설교했는데 듣기는 여기서 듣고 상담은 어디 다른데 가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답답한 노릇입니다. 작은 교회가 좋다는 게 뭡니까? 언제든지 목사 만날 수 있다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활용하세요? 이 좋은 장점을 이용하세요. 큰 교회 다니면 쉽지 않잖아요?
“어찌할꼬”(Tiv:티)인데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하는 말입니다.
본문 38절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그랬습니다. 그런데 ‘Tiv:티’

“어떻게 하면” 되느냐, 예수님이 알려주신 말씀들입니다. 본문과 직접 관계가 없을지 모르지만 예수님의 이렇게 하면 된다는 뜻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내용들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하면 믿음이 좋아집니다.

마 5: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마 5: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마 6: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마 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마 7: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마 7: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이 말씀에도 티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Tiv:티’가 있는 마태복음 서두에 몇 가지만 살펴보았습니다. 신약성경 전제에서 445개의 이 단어가 나옵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은 이 예수님의 명령들을 종합하여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첫 번째가 회개입니다. 진정한 회개를 통해서 만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진정한 회개, 자기를 버리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만이 살길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세례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는 것이 세례입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입니다.
본문을 잘 보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세례만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 사함은 딸려 오는 것입니다. 성령은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몇 일 전에 TV 시트콤에서 본 것인데요 빵집을 하는데 이벤트 행사를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그 날짜에 맞추어 빵을 많이 주문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종업원이 골탕을 먹이려고 날짜를 다르게 알려주었습니다. 행사당일이 되었는데 빵이 오지 않는 거예요. 빵집 어머니인가요 이런 말을 합니다. “빵집에 빵이 없다는 것이 말이 되냐?” 빵집에 빵이 없으면 빵집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크리스천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으면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교회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야 됩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혹 내가 용서 못하면 주님을 기억하세요.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생각하면 용서해야 합니다. “너희가 너희 죄를 용서하여 준 것 같이”라고 기도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까이 보세요.

“37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38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그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눅 11:37-38)

지난 주 설교제목이 “멀리 보세요.” 였는데요 오늘 설교제목이 “가까이 보세요.”입니다. 목사님! 이런 제목을 사용하시려면 “멀리 보세요.” 설교제목을 잊어버릴 때쯤 되어서 하셔야지 바로 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실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지난주에 ‘평행선의 공리’를 배우셨잖아요. 가까이 보면 만나지 못하는 것이 멀리 보면 만난다고요. “멀리 보세요.” 영원히 만나지 못할 것 같은 두 이론은 만납니다.
멀리 보면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다음 세대에게 복음을 전달하기 위해서 멀리 보아야 합니다. 또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저 멀리 천국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멀리 보는 것은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가까이 보아야 하는 것은 그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가까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두 개의 제목이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어울리는 것입니다. 신학에는 두 개의 큰 축이 있습니다. 하나는 조직신학이고 하나는 실천신학입니다. 마치 하늘과 땅과 같은 것입니다. 멀리 보는 것은 조직신학(신론, 하늘)에 해당하는 것이고요, 가까이 보는 것은 실천신학(땅)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먼저 복음이 들어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보다 기독교가 성장을 못했습니다. 사실 일본인의 습성으로 보아서 우리나라보다 복음이 더 빨리 전파되었을 것 같은데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어느 정도 남의 문화에 쉽게 적응하느냐 하면, 일본 역사 최초의 외국인 집정관이 된 맥아더는 히로시마 원폭 투하이후 일본에 들어갔습니다. 멕아더 일행이 들어갈 때 일본인들의 반발을 상당히 우려했습니다. 그러나 예상 밖의 환대를 받으며 들어갔습니다. 오히려 미국인들이 어리둥절했습니다. 마치 버드나무 같은 습성입니다. 쉽게 적응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소나무형이라면 일본은 버드나무형입니다. 우리는 “남산 위에 저 소나무”를 쳐다보며 살았습니다. 소나무에는 황새가 앉지만 버드나무에는 촉새나 종달새가 앉습니다. 중국 연변 용정에 가면 일송정이 있습니다. 그 산에는 소나무가 있었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이 겨울에도 낙엽이지지 않고 푸르게 굳굳하게 서 있는 소나무를 바라보며 나라를 구할 생각을 했습니다. 일본군이 그걸 알고 그 소나무를 죽이기 위해 구덩이를 파소 소금물을 뿌려 넣었습니다. 멕아더는 일본 천황에게 “덴노는 인간” 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일본에 들어간 복음은 자라지를 못했습니다. 일본의 복음이 자라지 못한 이유를 신학자들은 일본의 신학이 인본주의에 있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한국사람들은 무조건 믿었습니다. 거기에는 뭐 깊은 연구 같은 것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우리나라를 살려주셔야 합니다. 하나님. 하나님 하면서 부르짖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부흥이 일어나게 된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연구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신학을 무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신학의 뿌리, 그곳에는 하나님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있고, 뿌리가 있고 그 다음에 다른 것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없이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먼저 하나님보고, 하늘을 보고 오늘 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가까이 보아야 합니다. 땅을 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늘을 보지 못하면 땅도 보지 못합니다. 멀리보지 못하는 사람은 가까이도 보지 못합니다.

사실 가까이 가면 복음은 다 된 것입니다. 복음이 전달되지 못하는 이유는 가까이 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중국 분들은 쉽게 사귀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한번 믿음을 주고 사귀어두면 끝까지 의리를 지키고 신뢰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중국사람 한국사람 일본사람이 돼지우리에 같이 들어갔답니다. 누가 제일 빨리 뛰어 나올까? 하는 내기를 했답니다. 제일먼저 깨끗하기로 소문난 일본 사람이 더러워서 못 있겠다고 5분을 견디지 못하고 뛰어 나왔답니다. 그 다음에 한국사람이 참다못해 10분을 견디지 못하고 나왔답니다. 그 다음에 돼지가 뛰어 나왔답니다. 중국사람하고 더러워서 같이 못 있겠다고 나왔답니다. 어찌 보면 중국사람 비하하는 것 같지만 달리 생각하면 그만큼 중국사람은 끈기와 인내가 있다는 이야기이도 됩니다.
언어문화를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도 우리와 같이 밥을 먹고사는 민족인데 식당 메뉴에 ‘라이스’ 라고 적는 나라입니다. 여행사마다 기본 모음 다섯 개를 가지고 트래블(travel:여행)이라는 영어를 도라베루라고 적을 수밖에 없으면서도 여행사마다 이 수상한 외국어를 걸어놓고 국제화를 위치고 있는 것이 일본입니다. 그래서 어느 나라 국기나 위아래, 좌우가 있는데 일장기는 아무렇게나 걸어도 됩니다.
그런데 중국에 가면 정 반대입니다. 에스컬레이터가 ‘전기사다리’로 바꿉니다. 전 세계가 텔레비전(TV)라고 하는데 자기네만 ‘전기로 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고유명사도 바꿉니다. 코카콜라가 ‘가구가락’, 펩시콜라가 ‘백사가락’이 됩니다.
우리는 중간에서 중간쯤은 선택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로스엔젤레스 올림픽” 때 ‘나성 올림픽’이라고 했습니다. 일본은 앞에 두 자를 따서 자기 멋대로 “로스올림픽”이라고 했지만 우리나라는 LA올림픽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말은 외래어에 장악 당한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한자를 천년이 넘게 써 왔지만 한자만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인 ‘족발’입니다. 족이 이미 발이라는 말인데 우리는 발을 반드시 넣어 사용합니다. 일본말이 이 나라를 휩쓸 때도 ‘모치’라는 말이 떡이지만 우리는 ‘모치 떡’이라고 썼습니다. 깡통이라는 말은 영어의 켄(can)에서 나온 말인데 켄(깡)이라는 말에 우리말 통을 붙여서 깡통이라고 했습니다. 가끔 야구 중계를 들어보면 ‘파울 라인 선상’으로 라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는 외래서가 들어와도 함께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본은 자기 것 없이 다 바꿉니다. 중국은 가기 것으로 바꿉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 가지를 다 가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어느 정도의 소금은 인간의 생존에 꼭 필요합니다. 소금 섭취 량을 약간 늘리면 건강에는 좀 해로울 수 있지만 음식을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소금 섭취 량이 어느 수준 이상으로 늘리면 건강에 미치는 폐해가 맛있는 음식으로부터 얻는 이익을 넘어서게 됩니다. 우리는 마치 소금과 같은 나라 사람입니다. 고르게 합니다. 그러나 이 때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소금은 맛입니다. 그 맛을 잃으면 안됩니다. 그 맛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십니다. 성령님이십니다. 우리의 것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의 성품을 버리지 못했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좋아합니다. 이 모습 이대로 우리민족을, 나를 사랑해 주신 예수님께 감사하십시다.

그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가까이 보아야 합니다. 제일 가까이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결혼하는 것입니다.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뽑았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 가까이하기 위해서 제자들을 뽑은 것입니다. 그리고 3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 사셨습니다. 말 그대로 동고동락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3년이 넘는 생활을 하시고 나서 “너는 발 냄새가 너무 나서 나의 제자가 되기 어렵겠다.” 고 하신 적이 있습니까? “야! 정말 살아보니까 너는 정말 아니다.” 하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서로 마음에 다 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명심하세요. 영적인 문제들을 우선 순위에 둠으로써 다른 문제들을 이해하고 용납해 가야합니다.

마 15:2에서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그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늘 제자들 편에 있었습니다. 레위기의 이야기로 볼 때 손을 씻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마 15:20)고 하셨습니다.
본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그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눅 11:38)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상히 여겼지만 저는 이 말씀에서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제자들이 손 씻지 않은 것처럼 예수님도 손을 씻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 행동은 아주 의도적인 행동이었습니다. 무의식중에 한 행동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지난번 손 씻지 않고 떡을 먹었다가 바리세인들로부터 꾸중을 들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그 때의 일을 기억하면서 손을 씻지 않으신 것입니다. 마 15:1 “그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그랬습니다. ‘그때에’ 는 앞에 마 14:34 “게네사렛 땅에 이르니” 병자들이 수없이 밀려왔습니다. 그리고 잘 아시는 예수님의 옷에 손을 덴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5장으로 넘어가서 ‘그때에’ 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마태복음에서 제자들이 손을 씻지 못하고 음식을 먹을 때는 상황이 손 씻을 여건이 안 되었다는 뜻입니다. 제자들도 유대인입니다. 음식 먹기 전에 손 씻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 때부터 지켜온 것입니다. 아무리 베드로와 그 제자들이 무식하다고는 하나 이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관습이든 장로들의 유전이든 잘못된 문화는 아닙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사정이 손 씻을 만큼 여의치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다릅니다.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눅 11:37) 그랬습니다. 한 바리새인이 청해서 예수님이 그 접대에 응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집은 아마도 유대인의 전통적인 집으로 지난번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았던 상황과는 분명히 달랐습니다. 유대인의 전통가옥으로 식사를 하기 전에 손을 씻을 수 있도록 물 항아리가 준비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나 손을 씻는 것이 그들의 습관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38절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그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라고 했습니다. 이상한 겁니다. 다 손을 씻는데 예수님이 손을 안 씻은 것입니다. 왜? 이런 행동을 하셨을 까요? 오늘 본문 다음에 이어지는 눅 11:39-42절의 바리새인들에게 교훈하기 위해서 이런 행동을 하신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이뿐이 아닙니다. 진짜 예수님이 이러한 행동을 왜 하셨을까요?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 어디 주석에도 나와 있지 않는 며느리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것은 바로 지난번 제자들이 바빠서(핑계일지 모르지만) 손을 씻지 못했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상황이 아닌데도 손을 씻지 않았습니다. 왜요? 제자들과 함께 하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너희들은 더러운데 나만 깨끗하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너희들은 무식한데 나만 옳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무식하니까 예수님도 보조를 맞추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더러우니까 예수님도 더러워지신 것입니다. 왜요? 제자들과 함께 하시려고요. 결혼했는데 계속 자기만 깨끗한척하고 마누라 쥐잡듯 잡는 사람 문제 있습니다. 예수님은 섬김으로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총명하고 사랑 받을 만한 제자들만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더럽고 추하고 당신의 말씀을 잘 이해 못하거나 심지어는 비난한 제자들도 사랑하셨습니다(한 여인의 비싼 향유 사건, 마26:6-13, 막 14:3-9).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제자에게 네 양을 치라고 했습니다(요 21:15-19). 도마가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했지만 그에게 다가가 그 상처를 만져보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을 격려했습니다. 위로했습니다. 염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신 사건이 있는데 그 동기가 본인이나 죽은 가족의 애통하는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눅 7:13에는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요 11:33 나사로의 죽음으로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요 11:38).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본 유대인들은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였는가!”(요 11:36)라고 말했습니다.

인도를 다 주어도 섹스피어와 바꾸지 않겠다고 영국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타이완 사람들은 미국을 다 주어도 바꾸지 않는다는 것이 있습니다. 장제스(蔣介石:장개석)가 중국에서 쫓겨나올 때 작고 귀한 보물들을 가지고 나왔는데요, 이런 것이 타이완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저도 가서 본적이 있습니다. 그 중에 제일 갚진 것으로 여기는 것이 주먹만한 크기의 차돌로 깍은 공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공 속에 7개의 공이 들어있습니다. 그 차돌로 깍은 공 7개가 그 곳에서 모두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아주 정교하게 매끄럽게 다듬어져 있습니다. 그곳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그 신비함에 발을 못 띤 경험이 있습니다. 이것을 미국 사람들이 현재의 컴퓨터와 기술을 이용해서 이런 공을 만들 수 있나 실험했는데 불가능하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7단계에 걸쳐 들어가며 깍아야 하는데 나중에는 거의 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도무지 깍을 수가 없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날 중국 사람들이 대를 물려가며 깍아 놓은 것입니다.
언 듯 볼 때 사람이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해 냅니다. 누군가 거친돌을 다듬기 시작했겠지요. 그리고 깍다가 죽고 그 자식에게 물려주고 그 자식은 또 깍았겠지요. 아마 중간에서 하다 말았으면 그런 작품이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7개의 공 속을 깍을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포기하지 않는 장인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번도 우리를 포기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 증거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보면 우리 주님의 사랑을 봅니다. 사랑의 흔적을 봅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이 세상을 다 준다고 해도 안 바꾸십니다. 나를 천하보다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가까이 보세요. 예수님처럼 우리를 사랑하신 방법으로 사랑할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처럼 사랑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멀리보세요.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내가 말하리라 땅은 내 입의 말을 들을지어다 2 내 교훈은 비처럼 내리고 내 말은 이슬처럼 맺히나니 연한 풀 위의 가는 비 같고 채소 위의 단비 같도다 3 내가 여호와의 이름을 전파하리니 너희는 우리 하나님께 위엄을 돌릴지어다 4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 5 그들이 여호와를 향하여 악을 행하니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흠이 있고 삐뚤어진 세대로다 6 어리석고 지혜 없는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네 아버지시요 너를 지으신 이가 아니시냐 그가 너를 만드시고 너를 세우셨도다” (신 32:1-6)

처음 수학에서 사람들은 “평행한 두 직선은 영원히 만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어떤 사람들은 그것은 영원히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연을 유심히 살펴보면, 평행이란 관계 속에 있는 것이 수없이 많습니다. 하늘과 땅이 영원히 만나지 않고, 두 기차의 레일이, 평행한 길가의 가로수가 영원히 만나지 않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멀리 바라보면 기찻길의 레일이, 가로수의 양쪽이 저 먼 곳에서 한 점에서 만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과연 이것이 착각일까, 아니면 실제로 만나는 것일까 사람들은 궁금해하였습니다. 이러한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 처음으로 도전한 사람이 은 B.C. 300년경의 유클리드(Euclid:330?∼275?B.C.)라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평행선의 정리를 증명하지 못하고 공리로 인정함으로써 학문적으로 발생하였습니다. 그 후에 수많은 학자들이 이 ‘평행선의 공리’를 증명하기 위해 많은 시도를 하였으나 유한하고, 평면·공간적인 인간의 눈으로는 착각과 환상으로만 보이는 평행선의 신비를 증명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평행선의 신비 근처에는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180°보다 작거나 큰 새로운 공간이 있다.’는 상대성 이론에 의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은 평면 공간이 아닌 곡면 즉 타원적인 구면 공간임을 찾아내었습니다. 길가의 가로수가 먼 곳에서 만나는 것은 착각이 아닌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것임이 밝혀진 것입니다.
눈앞에 있는 것만 보면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것이, 멀리 보면 만나는 것입니다. 지금의 나만 보면 우리의 모습만 보면 하나님을 영원히 만나지 못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멀리 보세요. 멀리 보면 주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을 만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모세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지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엄중한 말씀을 받기 위해 모세에게 “여호수아를 불러서 함께 회막으로 나아오라”(신 31:14) 고 하십니다. 왜? 여호수아를 함께 부릅니까? 그가 바로 모세 다음에 이스라엘을 이끌 지도자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세대를 위하여 준비해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은 먼 훗날을 보고 계신 것입니다. 모세의 세대가 아닙니다. 여호수아의 세대만도 아닙니다. 그 다음, 그 다음, 영원하신 세대를 보고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기업’이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9). 이 기업이라는 말은 그 영원하신 후손이 이어받을 몫을 말합니다. 그것이 기업입니다. 우리의 기업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영원히 전달해 주어야할 기업이 있어야합니다. 어떤 부모들은 돈을 물려주려고 합니다. 그래도 제일 확실한 것이 고기를 잡아주는 것이 아니라 고기 잡는 방법을 알려 주는 것이니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죽자하고 기러기아빠까지 되어 가지고 공부시키는 부모들도 있습니다.
교육을 시킬 때 제일 중요한 것 한가지가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개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어떤 일관된 틀에 가두면 안됩니다. 그리고 마치 그 틀에 들어가지 못하면 저능아나 바보 취급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작품이고 존귀한 자입니다.

인류의 3대 사과를 아시나요?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3개의 사과를 꼽은 것입니다. 바로 뱀의 꼬임에 빠져 아담과 하와가 먹었다는 원죄의 사과가 최초의 사과이고, 빌헬름 텔이 아들의 머리 위에 올려놓고 활을 쏘았다는 이야기 속 정의의 사과가 두 번째입니다. 마지막은 아이작 뉴턴이 만유인력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던 과학의 사과(뉴턴의 사과)입니다. 이 이야기들에 나오는 사과는 모두 인류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사과를 꼽은 것입니다. 뉴턴은 사과가 땅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지구가 물체를 끌어당기고 있다고 생각한 것을 바탕으로(중력), 이런 끌어당기는 힘은 모든 물체 사이에 존재하며 우주로까지 확장시킬 수 있다고 한 ‘만유인력의 법칙’을 확립하게 되었습니다. 뉴턴은 영국의 물리학자이자, 수학자, 천문학자입니다. 이 사람은 청교도혁명이 일어난 해이며 갈릴레오가 죽은 해인 1642년 1월 4일에 태어났습니다. 그는 철저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외삼촌하고 함께 자랐는데 외삼촌 중에는 목사가 있었습니다. 독실한 성공회 성도인 뉴턴은 어느 제자가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자, “하나님에 대해서 불경하게 말하지 말게. 나는 하나님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다네.”하면서 무신론을 주장하지 못하게 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뉴턴이 워낙 과학적 재능이 뛰어나니까 영국의회에 들어가 국가를 위해서 일하라고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추천하여 국회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성격이 조용해서 국회의원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1년 간의 국회의원생활을 하면서 유일하게 한 말이라고는 수위에게 “문 좀 닫아주시오.”였다고 합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은 그 후손들을 위해서 모세에게 마지막 일을 시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르쳐 그들의 입으로 부르게 하여 이 노래로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신 31:19) 바로 이 노래가 오늘 본문 신명기 32:1-43 나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마지막으로 시키신 것이 노래를 만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노래를 불러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노래에는 무서운 힘이 있습니다. 한번 흥얼거리기 시작하면 잊혀지지 않고 평생을 가게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세대에게 또 그 노래를 이어줍니다. 제가 서은이에게 저도 모르는 사이에 알려준 노래가 있습니다. 바로 “원숭이 똥구멍은 빨게”입니다. 제가 언제, 누구에게서 이 노래를 배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노래를 알고 있었고 서은에게 전해준 것입니다. 목사가 되어 가지고 서은이에게 “원숭이 똥구멍은 빨게”만 알려주면 되겠습니까?
그래도 “원숭이 똥구멍”에도 뜻이 있습니다. 어디 알려주는 데가 없어 제가 이 노랫말을 가지고 밤새도록 고민하다가 나름대로 해석을 해 보았습니다. 이 노래는 일제 시대에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여기 나오는 ‘원숭이 똥구멍’은 아이들이 일본 순사나 사람들을 놀리려고 비하한 말인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자연산 원숭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일본에는 원숭이가 있습니다. 이 노래는 원숭이 똥구멍으로 시작해서 백두산으로 끝이 납니다. 결국 일본인이 이 나라를 먹은 것 같지만 이 나라의 강산은 우리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일본 사람 앞에서 비유적으로 부른 노래입니다. 그리고 우리끼리는 숫자에 맞춰 이런 노래를 부릅니다. “1하면 일본 놈이, 2하면 이등박문이가, 3하면 삼천리강산먹으려고 …”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민요는 당연 ‘아리랑’입니다. 아리랑은 정선아리랑, 강원도아리랑, 밀양아리랑, 진도아리랑 등 변종이 수백 개가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본조(本調) 아리랑은 ‘신 아리랑’으로 알려진 ‘경기 아리랑’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본조라고만 하지 원조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2002년 월드컵에서 아리랑이 불려졌는데 이 아리랑을 ‘상암아리랑’으로 부릅니다. 그래서 어떤 외국인은 대한민국의 애국가가 ‘아리랑’ 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모든 아리랑 노래 첫 부분에 ‘아리랑’이 나옵니다. ‘아리랑’은 고개의 이름이자 고개를 넘어갈 때의 고단함, 아기를 낳을 때의 산고(産苦)의 표현이고 한(恨)의 표출이라고 합니다. ‘아리랑’은 ‘아라리’에서 유래했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는 최초의 아리랑으로 알려진 정선아리랑이 본래 ‘아라리’라는 이름으로 불렸기 때문입니다. ‘아라리’는 ‘누가 내 마음을 알리’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또 아리랑에서 아리랑고개는 조선시대 서울과 경상도를 오갈 때의 주요 길목이었던 문경새재를 뜻한다고도 합니다. 전국적으로 여러 아리랑 고개가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아리랑과 함께 한을 달랬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 한을 아리랑이라는 노래로만 해결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 1절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내가 말하리라 땅은 내 입의 말을 들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하늘 아래 있는 모든 사람이 이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 말을 들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노래의 후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 외에는 신이 없도다 나는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빼앗을 자가 없도다”(신 32:39) 하나님이 우리를 살려주십니다. 우리의 상처를 낫게 하십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제일 멀리 보는 것은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제일 멀리 보는 것은 우리의 기업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앙교회가 기업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기업은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본문 6절 “…그는 네 아버지시요 너를 지으신 이가 아니시냐 그가 너를 만드시고 너를 세우셨도다” 우리 다음세대에게 전해줄 것은 ‘원숭이 똥구멍’ 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너를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그가 아버지라는 사실입니다. 육신의 아버지에게 맡겨진 사명이 무엇입니다. 육신의 아버지를 통해서 영의 아버지인 하나님을 보고 만나게 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육신의 아버지가 영의 아버지를 만나는데 방해가 되면 안됩니다. 7절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말하리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본 사람들입니다. 육신의 아버지가 할 일은 영의 하나님을 알려주는 일입니다. 이것이 육신의 아버지에게 맡겨진 사명입니다.
영의 아버지는 육신의 아버지가 다할 수 없는 것을 해 주십니다. 10절 보면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고 하십니다. 황무지 같은, 광야 같은 세상에서 만나 주십니다. 호위하십니다. 보호해 주십니다. 자기 눈동자 같이 지켜주십니다. 눈동자에 먼지하나 들어가 보세요. 얼마나 따갑고 거추장스럽습니까? 얼마나 하나님이 철저하게 지켜주십니까. 그 하나님이 네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이 나를 만드셨고 세워 주십니다.

모세가 하나님과 동행한 기간은 광야 생활이었습니다. 그곳은 모래바람이 붑니다. 쉽게 흩날리는 모래는 쉽게 쌓였다가 쉽게 날아가 버립니다. 그러나 바위산은 모래 산과는 달리 없어지지 않습니다. 언제나 제자리에 우뚝 서 있습니다. 사막의 온갖 위험으로부터 나그네들을 보호해 줍니다. 피난처가 되어줍니다. 그래서 본문 4절 “그는 반석이시니” 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히브리어에 쭈르(반석)인데 70인역(LXX)에는 반석을 모두 데오스(하나님)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반석(쭈르)을 하나님으로 동일하게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반석이십니다. 모든 위협으로부터 지켜주시는 분입니다.
본문 4절의 원문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습니다. 처음에 나오는 단어가 쭈르(rWXh:반석)이고 그 다음에 나오는 단어가 타밈(!ymiT;)입니다. 타밈은 “진실, 흠이 없다, 완전하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타맘(!m’T)이라는 단어에서 나온 것입니다. 타맘은 “완성하다, 마치다”입니다. 하나님만이 모든 행위의 타밈, 마침표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완성시키는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최종적인 심판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고 명령하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말 안장에 짐을 싫고 길 떠날 준비를 합니다. 그리고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창 22:4)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멀리 바라보았습니다. 멀리 있는 길 떠날 곳을 또는 산을 바라보았다는 이야기도 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멀리 바라본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하면 순종하지 못합니다. 멀리 보지 못하면 순종하지 못합니다.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의 그 말씀을 믿고 따라가는 사람들은 모두 멀리 보는 사람들입니다. 눈앞에 이익만을 보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을 수 없어요. 눈앞에서 보면 영원히 만날 수 없을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멀리 보면 만납니다.

본문 6절 “… 그가 너를 만드시고 너를 세우셨도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완전하게 세워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타밈이 되셨습니다. 온전합니다. 마침표입니다. 우리에게 더 이상은 없습니다. 그 마침표는 십자가입니다. 우리에게 마치 아리랑고개를 넘어서 오신 것처럼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십자가를 넘어서 오셨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멀리바라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주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분의 눈물어린 사랑을 만납니다. 부활이시며, 영원하신 주, 성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만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