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1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2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3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4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5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6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시며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며 7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 8 여호와께서 맹인들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들을 사랑하시며 9 여호와께서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 10 시온아 여호와는 영원히 다스리시고 네 하나님은 대대로 통치하시리로다 할렐루야” (시 146:1-10)

피아니스트 중에 서혜경 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이분이 암으로 투병하면서 연주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병원에서는 생명이 먼저지 피아노를 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피아니스트에게는 피아노를 칠 수 없다면 더 이상 살아도 의미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수술을 하고 나면 오른팔을 못쓸지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그 때를 대비해서 왼손 만으로라도 연주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라벨’의 <왼손을 위한 협주곡>을 치면서 눈물 흘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수술대에 누워서 내가 녹음한 CD 음악을 들으며 마취에 들어갔다. 마취가 깨는 순간 제일 먼저 오른쪽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다. 피아노를 치고 싶어서 수술 사흘만에 피 주머니를 찬 채 퇴원을 강행했다. 옷도 갈아입기 전에 <호프만의 뱃노래>를 쳐보았다. 오른쪽 손가락이 움직일 때 그 감사와 환희는 기쁨의 눈물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여러분! 피아니스트가 피아노를 치지 못하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을 찬양하지 못하면 죽어 있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내가 오늘 건강한 몸으로 하나님께 예배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오늘 우리의 예배가 살아 계신 하나님께 감격의 예배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만일 이 세상이 눈물의 골짜기라면, 예수님은 거기에 뜬 무지개이시다.”.

오늘 본문은 할렐루야로 시작해서 할렐루야로 마칩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다른 것은 다 잊어버려도 절대 잊어서는 안될 말이 있습니다.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에서 제일 귀중한 단어는 바로 “여호와, 예수 그리스도, 할렐루야, 아멘”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다른 것 다 잊어버려도 이 단어만 알고 믿고 있다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다른 것 다 알고 이 단어를 모르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어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앞의 두 단어 “여호와, 예수 그리스도”가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말한다면 다음 두 단어 “할렐루야, 아멘”은 그분들께 드리는 우리의 믿음의 고백이요, 감사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시는 ‘할렐 시편’(146-150편)의 첫 번째 것입니다. ‘할렐 시편’들은 유대인 회당에서 매일 아침 예배 때마다 낭송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모두 10절인데요 ‘여호와’라는 단어가 10번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4번나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계속 나오는 것은 하나님이 찬양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찬양의 대상이 세상 사람이 되는 것은 모두가 그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노래가 영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대상이 영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3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4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고 말합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이 우리를 영원히 도울 수 없습니다. 결국은 그도 죽고 나도 죽습니다. 인간의 모든 생각은 소멸됩니다. 어떤 철학을 가지고 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의 짐 존스 목사는 흑인, 마약중독자, 노숙자 등 도시 빈민 계층 구호 활동으로 좋은 평판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설교도 잘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존교회를 부정하고 새 교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남미 가이아나에 있는 존스타운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급기야 자신을 메시야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신도들을 폭행하고 성 문제 등 온갖 문제들이 가까스로 탈출한 사람들에 의해서 폭로되었습니다. 미국 의회는 급기야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1978년 미국 하원의원 리오 라이언(Ryan)과 NBC방송 기자 등 5명을 보냈습니다. 그들은 곧 바로 총에 맞아 숨졌습니다. 이어 존스 목사는 청산가리를 탄 주스를 마시도록 신도들에게 명령하여, 이른바 ‘영광스런 죽음’을 맞이하게 했습니다. 그 때(1978.11.18) 죽은 사람이 912명입니다. 이 중 어린아이만 276명이나 되었습니다.
인간을 의지하지 마세요. 그것은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를 잘해도, 구제사업을 잘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모두 죄인일 뿐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대개 세상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세상에 무엇 하러 왔는지 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흔히 기계론적인 인생관과 목적론적인 인생관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기계론에 의하면 사람이란 부정모혈(父精母血)로 출생해서 처음에 기고, 앉고, 걷고, 소년기가 되고, 청년기가 되고, 장년기가 되고, 노년기가 되고 그러다가 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저 시간이 지나는 대로 살다가 죽을 때가 되어서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목적론에 의하면 사람이란 누구나 목적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러면 무슨 목적을 가지고 태어났느냐 하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식이위대(食而僞大)’란 말이 있는 것처럼 우선 먹는 일이 큰일입니다. 그러나 그 먹는 것조차 성경은 “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33)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목적은, 첫째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찬양하는 생활입니다. 로마서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되시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우리는 주님의 제자요, 주님의 특별한 소유가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피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나 죽으나 이 몸을 드려 주님을 찬양 해야합니다.

본문 5절에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하나님을 자기의 소망으로” 두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 의지해야 실망과 낙담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그분은 영원하신 분입니다. 6-9절까지 그 이유가 설명됩니다. 왜 하나님만을 찬양하며 의지해야 하는가를 말씀해 주십니다.

첫째, 만물을 지으신 분이십니다. 본문 6절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시며…” 창조주 이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은 것들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찬양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찬양의 대상은 주 하나님 뿐입니다. 기독교는 찬양의 종교입니다. 교회는 찬양을 부르러 오는 겁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우리에게 찬양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둘째,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며” 하나님만이 믿을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약속을 지키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0절 “시온아 여호와는 영원히 다스리시고 네 하나님은 대대로 통치하시리로다 할렐루야”라고 하셨습니다. 군대에서 아무리 무서웠던 고참도 제대할 때가 다 되면 무서워할 사람이 없습니다. 얼마 안 있으면 그만두기 때문입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레임덕(lame duck)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성경을 구약(Old Testament), 신약(New Testament)라고 부르는 이유도 약속의 책이라는 뜻입니다.

셋째, 왜 하나님을 찬양해야 되는지 7-9절까지 9가지로 하나하나 설명해 주십니다.
7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
8 여호와께서 맹인들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며
‘비굴한’(!ypiWpK]:케푸핌, 꿇은 자)은 염려와 고통으로 인해 마음이 눌리고 구부러진 사람을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의인들을 사랑하시며
9 여호와께서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
여호와 하나님을 왜 찬양해야 되는지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여러분! 귀신 불러들이는 세계의 모든 무속신앙들을 보면 모두 다 노래를 불러서 끌어들입니다. 모두 다 뭔가 주술 외우고 이렇게 춤출 때 귀신이 옵니다. 나쁜 것도 그렇게 옵니다. 하나님은 언제 임하시느냐 하면 찬양할 때 임하십니다.

독일 출신의 위대한 작곡가 헨델은 초기에 왕을 위한 곡만을 썼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즐겨 듣는 수상곡이 그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가 최고의 음악가로 불리우게 된 것은 세상 왕을 노래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에게 최고의 영감을 준 곡은 이 세상을 초월한 가장 위대한 왕, 메시야 였습니다. 불후의 명곡 메시야 중 할렐루야는 그에게 있어 영감의 극치였습니다. 그는 할렐루야를 작곡했던 당시의 감격스러운 상황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임금 날 부러워 아니하여도 나도 역시 세상임금 부럽지 않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에 할렐루야 찬송이 저절로 나네.” 그랬다는거 아닙니까? 제가 여러분 마음 문 열라고 한 것이고요 그가 말하기를 “내 앞에 펼쳐져 있는 하늘나라와 위대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본 듯한 감격 속에서 이 곡이 만들어졌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어떻게 찬양해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본문을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 1절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찬양은 기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으로 해야 합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합니다. 젓 먹던 힘있잖아요. 아이가 젓 먹을 힘이 없으면 예전 같으면 죽습니다. 그 힘은 마지막 힘이 있는 한입니다.
찬송은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심령으로 하는 것입니다. 시편 147:1절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선함이여 찬송하는 일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 “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함이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의무인 것입니다.

둘째, 2절 “나의 생전에, 평생에 여호와를 찬송하겠다”고 합니다. 시인은 자신이 살아있는 한 찬양할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자신의 존재가 계속되는 한 찬양하겠다는 것입니다.
말로만 입으로만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지정의(知情意)를 포함하여 전인으로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시지 않고 각 사람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찬양은 전인적으로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삼상 16:7).
우리가 사는 곳에는 어디나 찬송이 있어야 합니다. 왜요? 사람이 창조된 목적이 하나님을 찬송하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찬송은 성도가 맺어야 할 열매입니다. 히브리서 13:15절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고 하였습니다.

셋째, 3절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두 번째 까지는 시인 자신의 고백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세 번째는 백성을 위해 함께 찬양해야 하는 당위성을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혼자만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억지 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복음은 자율적이며 정당하고 정확하게 전파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유대 8대왕 요아스가 성전을 보수하기 위해 일종의 세금(헌금)을 거두어들입니다. 처음에는 레위 사람들에게 성읍을 직접 다니면서 거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잘 거두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역대하 24:8 “한 궤를 만들어 여호와의 전 문 밖에 두게”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차고 넘쳤습니다. 자율적으로 해야 합니다. 강제적으로 헌금하고 찬양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시편 145 2-3에도 “2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3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 시인은 찬양에 자신이 있습니다. 단순히 노래를 잘 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기쁨으로 찬양하며 크게 찬양합니다. 숨어서 하지 않습니다. 만인이 보는데서 합니다. 여호와를 자랑합니다.
시편 148:1 “할렐루야 하늘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며 높은 데서 찬양할지어다”,
시편 149:1 “할렐루야 하늘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며 높은 데서 그를 찬양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왜 이렇게 크게 찬양하고, 높은 데서 찬양합니까? 만인이 들으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은 숨길 것이 없습니다. 등대는 높은 곳에 세워야 합니다. 모두가 잘 보여야 합니다. 함께 찬양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시키시는데 자신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변론이라도 하자고 하십니다.
시편 71:14-15에 “14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더욱 찬송하리이다 15 내가 측량할 수 없는 주의 공의와 구원을 내 입으로 종일 전하리이다”

시인이 노래하는 것은 자기혼자 좋자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 기쁨을 전하고 있습니다. 기쁨이 있는 사람, 찬양하는 사람은 반드시 복음을 전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를 죄의 세력에서 해방시켜 주십니다. 소경의 눈을 여시듯이 우리의 심령의 눈을 밝게 해주시며 비굴한 자를 일으켜 주십니다. 그러므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께 소망을 두고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르심을 입은 자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3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6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7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한노라”(롬 1:1-7)

이탈리아의 격언에 “천 개의 거짓으로 한 개의 진실을 만들 수 없다.” 는 말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잘못된 것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또 많아 진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라지가 많아진들 가라지 일 뿐입니다. 사람이 사람의 것으로 아무리 심어도, 갈고 닦아도 사람의 것일 뿐입니다. 달라지지 않습니다. 세상의 어떤 일을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공이라는 기준이 그저 돈 많이 벌고 명성을 얻으면 그것을 성공이라고 합니다. 또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 갖은 방법과 노력을 다합니다. 우리는 그런 세상 적인 관점에 벗어나야 합니다. 달라져야 합니다.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관점, 시각이 예수그리스도의 눈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크리스찬입니다. 내 눈이 아닙니다. 내 생각이 아닙니다. 교회에 와서도, 주님 앞에서도 여전히 내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나의 고집을 부린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일수 없습니다. 자! 오늘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주님께 열어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는 고백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부르심에 응답하는 자만이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아담이 범죄 한 이후에 하나님은 곧바로 “아담아 부르시며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고 부르시면서 아담을 찾으셨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여러분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이 찾으십니다. 지금까지도 하나님은 아담을 찾으실 때와 동일한 마음으로 찾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직접 오셨습니까?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우리를 찾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나 예수님 입장에서 보면 우리를 찾고 계신 것이고,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를 찾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요 10:3),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25)고 하셨습니다. 이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두 가지의 부르심에 대해서 나옵니다. 하나는 일반적인 부르심이요, 다른 하나는 특별한 부르심입니다.

첫 번째, 일반적 부르심이란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구원하기 위해서 불러 주시는 부름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사 1:18) 고 하셨습니다. 죄를 용서해 주시겠다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하셨습니다. 구원를 주시려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 부르심에 응답하고 나아온 사람을 성도라고 합니다. 성도라는 말은 구별된 자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교회란 무엇입니까? 헬라어로는 에클레시아입니다. 부름을 받은 자들의 무리입니다. 교회는 부름을 받은 자가 모여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곳입니다.
본문 7절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구원의 초청을 받은 모든 사람입니다. 사실상 두 번째 부름을 받은 사람들 역시 여기에 들어갑니다. 첫 번째 부름 없이 두 번째 부름이 없습니다.

두 번째 부르심은 하나님께서 일을 시키시려고 특별하게 부르시는 부름을 말합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사 6:8)라는 부름입니다.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사도로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단순히 구원만을 위한 부르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 모두를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소유입니다. 이 세상에 살고 있으나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닙니다. 세상과는 완전히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이요 천국시민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에도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것이라”(사 43:1)고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사명자입니다. 바울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준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직접 주신 것입니다. 교회에서 준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 두 번째 부르심을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누구를 부르시는가?
하나님은 아무나 부르시지 않습니다. 준비된 사람을 쓰시는 분입니다. 준비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첫째, 겸손한 사람입니다.
스스로 된 줄로 생각하는 자만심이 가득한 사람을 쓰시지 않습니다. 바로의 왕궁에서 40년 간 교육받아 문무를 겸비한 모세를 그대로 쓰시지 않았습니다. 나이 40에 애굽의 문화를 통달하여 말과 지식이 능숙했지만 그는 교만했습니다. 권력이나 지식이 있어도 교만한 자를 주님은 쓰시지 않습니다.
교만한 모세는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애굽 사람만 죽이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가서 곤욕스런 40년을 이방의 객으로 외롭게 지냅니다. 애굽의 바로 궁에서 살아온 날만큼 미디안 광야에서 살아갑니다. 이 기간은 혹독한 훈련의 기간이었습니다. 애굽에서 편안하게 지내며 먹던 그런 호화스런 생활이 아닙니다. 모세가 달라지려면 그 기간만큼이나 필요했습니다. 모세는 어느새 80이 되었습니다. 나이 80에 기력도 쇠진하였고 미디안 광야의 목자의 생활에 이젠 인간적인 자신감을 몽땅 사라졌습니다. 몸도 늙고 기력도 쇠진하니 이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때 주님이 부르셨습니다. 겸손하니 부르신 것입니다.
기스의 아들 사울도 온유 겸손할 때 주님이 그를 높이어 이스라엘의 왕을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교만할 때 그는 버림을 받았습니다. 겸손한 자를 들어 쓰시고 교만한 자를 물리치십니다. 겸손한 사람은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릎을 꿇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합니다.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보다는 오직 주님만 의지합니다. 겸손함으로 주님께 귀히 쓰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부족한 상태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순종했습니다. “저 같은 사람은 안됩니다. 못합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만 하면 정말 안되고 못합니다. 네 힘과 지혜와 지식과 학벌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제자는 주님이 만들어 주십니다. 주님이 할 말까지 가르쳐 주십니다. 입에 넣어 주십니다. 죄는 사해 주시며 부족한 것을 채워 주십니다. ‘베드로’의 이름은 원래 ‘시몬’인데 아람어로 ‘게바’(바위)라고 예수님이 부르셨습니다. 유대식으로 시몬은 좋은 이름입니다. 그러나 겸손해서 바위처럼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민이 사용하는 아람어의 이름을 더하셨습니다. 고산 윤선도(1587.6.21)은 “꽃은 무슨 일로 피면서 쉬이 지고 풀은 어이하여 푸르는 듯 누르나니 아마도 변치 아닐 손 바위뿐인가 하노라.”고 했습니다.
마태는 세관에 앉아서 세금을 받고 있었습니다. 비록 유대인에게는 배신자 같았지만 그 자리는 아무나 오를 수 있는 자리는 아닙니다. 공무원입니다. 예수님은 그 마태를 부르셨습니다. 마태도 ‘레위’(막 2:14, 눅 5:27)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레위는 ‘연합’인데 마태는 세상과 연합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는 ‘마태’가 되어 살았습니다. 마태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선물로 마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부와 세속에 살면서 이기주의적인 생각에 빠져있던 레위를 불러 마태로 만드셨습니다.
믿음이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었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죽었던 우리를 하나님께서 살리셨습니다. 죽은 자는 스스로 다시 새 생명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자신을 살릴 수가 없습니다. 죽은 사람은 어떤 활동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마치 예수님의 부름을 받기 이전에는 시몬과 레위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사람이었습니다. 죽어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이름이 바뀝니다. 인생이 바뀝니다. 순종함으로 제자가 됩니다.

셋째, 분명한 사명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이 자신이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택정함을 입었다는 말은 사명의식이 분명했다는 말입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부르심을 받았는지도 모르는 자들은 기드온의 삼백용사가 될 수 없었습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어느 날 노나라의 왕 애공이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듣자하니 건망증이 심한 사람은 이사를 한 뒤에 자기 아내조차 잊는다던데, 정말 그런 일이 있습니까?” 그러자 공자가 “그정도면 건망증이 심한 것은 아니지요. 정말 건망증이 심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잊어버립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는 분명한 사명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누가 불렀는지 내가 왜 왔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벧후 1:10) “부르심과 택하심”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나를 부르신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택하심을 굳게 하라”는 뜻이 무엇입니까? 다른 말로 한다면 “사명감을 새롭게 하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나를 왜 불렀는지, 왜 선택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를 부르십니까?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보면 “내가 너에게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손에게 복을 주시겠다 하셨습니다. 네 이름을 창대케 하겠다고 하셨습니다(창 12장).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은 그 이름은 생명 책에 기록이 되고 새벽 별같이 빛나게 되는 줄 믿습니다.

구약에 선지자중에 아모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특별한 훈련을 받았다거나 가문에 속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아마샤에게 한 말에서 잘 나타납니다.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서”(암 7:14)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는 말은 그는 선지자가 될 수 있는 집안이 아니며 선지학교를 다닌 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아모스는 평신도 였다는 말이 됩니다. 그는 뽕나무를 재배하고 양을 기르던 사람이었습니다. “양 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나니”(암 7:14) 그래서 아모스는 신학적이거나 다듬어진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자기 식으로 예언하며 꾸짖습니다. 사마리아의 궁에 가서 “사마리아의 산에 있는 바산의 암소들아 이 말을 들으라”(암 4:1)고 말합니다. ‘암소’는 고집센 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드고아를 출발하면서 주변 나라들(다메섹, 두로, 에돔, 암몬, 모압)을 책망하기 시작합니다. 그 때 까지는 공격을 받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 이방인에 대해서 멸망할 것을 예언할 때 이스라엘인들은 유유히 즐겼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유다에 대해서 예언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더 심하게 예언합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 잘 살던 사람이 망하면 더 비참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던 이스라엘이 망하면 더 비참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언도 더 혹독하게 하는 것입니다. 아모스는 평신도 선지자 였지만 자기방식으로 훌륭히 예언자의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이 교회에 나오셨습니까?
“그야 내 발이 이곳으로 나왔지요” 하신다면 그것은 마치 “전등이 어떻게 켜졌습니까?” 하는 질문에 “스위치 올리니까 불이 들어 왔지요”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발전소나 변전소의 존재는 아예 생각하지 않은 대답입니다.
아프리카 사람이 미국의 어느 호텔에 투숙하게 되었습니다. 수도꼭지를 트니까 물이 콸콸 나옵니다. 너무도 신기하고 귀해서 그 수도꼭지를 뜯어 가지고 아프리카 자기 집으로 가지고 갔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틀어도 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이 험악한 세상에 살면서 이만큼이라도 좀 다르게 살 수 있다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셨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끊임없이 주시기 때문이라는 것 외에 또 다른 대답이 있습니까? 다른 대답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천 개의 거짓으로 한 개의 진실을 만들 수 없다.”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의 것으로 안됩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통해서만 우리를 성도로, 사도로 부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까지 자랄지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13-16)

버스 정류장에 버스가 한 대 서있었습니다. 시간이 좀 흘렀는데도 기사는 여전히 손님을 기다리느라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버스에 타고 있던 성질 급한 한 남자가 소리쳤습니다.
“기사님, 이 똥차 언제 출발해요?” 버스 기사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습니다.
“네 손님, 똥이 다 차면 출발합니다.”
우리 속담에 “내가 똥 눈 우물물을 내가 다시 먹는다”고 했습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고 했습니다.
가끔 사람들이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물어봅니다. 마치 고기가 “물이 어디 있냐”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너무나 가까이에 있어서 모르는 겁니다. 내가 지금 호흡하는 것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지금 이곳에 예수님이 계신다면 그분이 하실 일을 대신 하는 그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인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복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내가 복을 주는 사람으로 살아가기는 별로 원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제 우리는 변화되어야 합니다. 회개하여야 합니다. 회개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살던 방법이 아니라, 내 뜻대로 살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겠노라고 그 방향을 변경하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입으로만 회개한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입으로 한 회개를 행함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입으로만 주님의 제자가 아니라 주님의 제자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기독교 교육의 최종적인 목적은 예수의 제자를 양성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르치는 사람이 먼저 예수의 제자가 되지 못하면 다른 제자를 만들 수 없습니다. 종교개혁 이후에 성경이 모든 사람에게 공개되면서 기독교 교육의 핵심은 성경교육이 되었습니다. 성경을 보기 위하여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은 목숨을 마쳤던 것입니다. 그렇게 어렵게 성경을 보기 위하여 노력했기 때문에 당연히 기독교 교육은 성경을 가르치는 일이었고 주일학교 운동이 전 세계에 보급되면서 그 목적은 어린이를 위한 성경 학습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제가 조금씩 나이를 먹어가면서 배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배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한가지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바지가 자꾸만 흘러내리는 것입니다. 흘러내리는 것은 자연적으로 흘러내리지만 흘러내린 바지를 끌어올리는 것은 반드시 손이 가야합니다. 잡아 당겨야 합니다. 가만히 있는 바지가 흘러내리기는 하지만 절대로 저절로 혼자 올라오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교육을 통해서 흘러 내려갔던 바지를 올리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멀어져 간 것을 다시 찾아 끌어 올려야 합니다. 인간에게 죄 성이 있어서 마치 바지가 저절로 흘러 내려가듯이 내려가기는 하지만, 저절로 올라오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기독교 교육이 필요한 것입니다. 바른 기독교교육을 통해서만 흘러 내려갔던 우리의 마음과 뜻을 끌어올릴 수 있습니다.

중국 병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적은 물에 큰 고기 없고, 마음 적은 사람 큰 성공 없다” 큰 고기를 잡으려면 큰 물가로 가야합니다. 크게 키우려면 큰물로 보내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큰 교육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제일 크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마 12:41 “…요나 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42절 “…솔로몬 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가 제일 크신 분입니다. 오늘 우리는 크신 예수를 작게 만들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야 합니다. 무엇이 큰 것인지, 오늘날 우리 교육은 제대로 가고 있는지 다시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바른 방향을 잡고 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근대에 기독교 교육에 있어서 제일 고민하여 내린 결론이 있습니다. 1952년 미국교회협의회 안에 기독교교육부 특별위원회에서 5년 동안 연구를 거듭한 끝에 1958년 다음과 같은 기독교 교육목적을 발표하였습니다.
“기독교 교육의 지상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안에 나타나셨던 하나님의 찾으시는 사랑을 깨달을 수 있게 하여,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성장하며,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여 살고, 기독교적 공동체와의 생동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 줄 여러 방법으로 이 사랑에 믿음으로 응답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기독교교육은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 다음과 같은 것들에 힘써야 할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각 발달 단계에서, 신적 창조물인 자신의 높은 잠재력을 깨닫고, 자신들을 그리스도에게 위임하여 그리스도인들로서 성숙을 향해 성장해 가도록 도와 줄 것.
사람들로 하여금 사회에서 책임적인 역할을 취하여,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랑의 한 대상으로 보면서 저들의 가족, 교회, 그리고 다른 개인과 단체들과 더불어 기독교적 관계를 설정하고 유지하도록 도와 줄 것.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계를 하나님의 창조로 보는 보다 나은 이해와 각성을 얻도록 하여 그 가치들을 보존하고 하나님과 인류에게 봉사하기 위해 활용하는 책임을 수락하도록 도와 줄 것.
사람들로 하여금 성서에 대한 이해와 인식을 증진시켜서, 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복종할 수 있도록 하며, 역사적 기독교의 유산들 속에 있는 다른 요소들을 인식하고 효과적으로 이를 활용하도록 도와 줄 것.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의 국내외 선교에 성실히 참여함을 통하여 기독교적 친교 속에서 책임적인 역할들을 발견하고 수행 할 수 있게 할 것.

여기에 보면 각 항목의 끝나는 말에 모두 “도와 줄 것”을 강조합니다. 이것이 기독교교육의 핵심입니다. 기독교 교육은 도와 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도와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이르도록 도와 주는 것입니다. 남의 것을 빼앗고 나만 잘되려고 하는 것은 교육이 아닙니다.
본문 14절에 보면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라고 말합니다. 자기만 도와 달라는 기도, 자기만을 위한 축복 언제까지 이런 교육적 틀에 갇혀 있어야 합니까? 어른이 되면 어린이를, 노약자를 도와주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 2:18) 고 했습니다. 도와 주라고 만든 거예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나들이를 가게 되었습니다. 한참 걷다가 피곤함을 느낀 할머니가 “영감, 나 좀 업어줄 수 없어?”라고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업어주기 싫었지만 나중에 들을 잔소리가 겁이 나 할머니를 업어주었습니다. 업혀 가던 할머니는 조금 미안했던지 “나, 무겁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그럼, 무겁지!”하고 퉁명스럽게 쏘아붙였습니다.
할머니가 “왜?”하고 되묻자 할아버지는 “머리는 돌덩이지, 얼굴은 철판이지, 간은 부었으니까 그렇지”라고 대답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는 할아버지가 다리를 다쳤습니다.
“할멈, 다리가 아파. 나 좀 업어 주라.” 할머니가 갈 때의 일도 있고 해서 할아버지를 업어주었습니다. 이에 미안한 할아버지가 “나, 무겁지?”하면 자기를 따라할 것 같아서
“나, 가볍지?”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그럼 가볍지!”라며 “머리는 비었지, 입은 싸지, 허파엔 바람만 잔뜩 들었으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여러분! 도우며 사세요.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미국의 한 여론조사기구(Life Way Research)에서 “미국 교회 외형 확장을 통한 부흥 실패”라는 결론을 내 놓았습니다. 한 교회가 대형화되는 과정에서 주변의 많은 중소규모의 교회들이 위축이 된다면 전체적인 성장은 실패한 것으로 확인되었다.”는 것입니다. 각각의 그리스도인이 교회생활을 잘 하도록 도와 주어야 하는데 빼앗아 온 것입니다. 교회는 자신의 교회 성장에만 관심을 갖지만 선교회는 여러 교회를 어떻게 도울 것인가를 고민하는 단체입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를 하기 이전에 먼저 선교회를 시작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앙교회 또한 늘 개인과 교회, 선교를 어떻게 도울 것인가를 생각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나만 살면 된다는 식의 교회는 안됩니다. 우리 집만 잘 살면 된다는 식의 축복은 안 됩니다. 혼자서 선교 다 한다는 생각도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선교 용어 중에는 모달리티와 소달리티가 있습니다. 모달리티가 교회라면 소달리티는 선교회입니다. 전방과 후방, 보수와 진보가 역할을 분담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한국의 교회는 성장과 축복이라는 단어에 파묻혀 협력을 잊어버렸습니다. 성장과 축복은 협력 가운데서 이루어져 가야 합니다. 본문 16절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모두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북 유럽에 간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여유가 있었습니다. 러시아 빼째르부르크에서 육로로 핀란드로 넘어갔습니다. 러시아 사람들은 얼굴이 굳어 있었고 사진 찍기가 겁납니다. 그리고 사진 찍히는 것도 싫어합니다. 그런데 핀란드, 스웨덴 사람은 다른 거예요. 사진 찍으라고 웃어주고 여유가 있었습니다. 어느 호텔에 갔는데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앞으로 뛰어나왔습니다. 아니 튀어나왔다고 표현하는 게 더 맞을지 모릅니다. 유럽 사람들은 절대 필요 없이 빨리 움직이지 않습니다. 어린아이, 여자들이 먼저 나가고 차근차근 남자들이 나옵니다. 나도 모르게 엘리베이터에서 뛰어나온 나는 뭐 급한 일이 있어서 뛰어 나온 게 아니잖아요. 뛰어나와 로비에서 두리번거리기 미안해서 그 사람들의 시아에서 사라지기 위해 어디론가 계속 뛰어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저 자신을 기억합니다.

본문 14절 하반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속도를 뜻하는 speed는 본래 성공과 부를 나타내는 말이었습니다. 남보다 빨리 뛰어야 산다는 서양 철학입니다. 우리말에도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는 속담이 있는 것을 보면 속도의 중요성을 몰랐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한국인의 심성이 원래 빨리빨리는 아닙니다. 불과 반세기 전만 해도 외국인들의 눈에 비친 한국인은 비가와도 그 비를 맞을 지언정 경고망동하고 촐삭 맞게 뛰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일제시대 때 “지배자인 일본 사람들은 종종걸음으로 조급하게 걸어 다니는데 오히려 한국인들은 대로 한 복판을 유유히 걸어다니고 있어 과연 누가 식민지인인지 모르겠다”는 술회도 있습니다. 빨리빨 리 문화가 오늘날 한국을 이끌고 있다고 부정할 사람은 없습니다. 빠른 것을 좋아하는 한국사람들은 인터넷 속도, 컴퓨터 속도, 핸드폰을 6개월만 바꾸는 나라라고 미국 교과서에 기록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회 심리학자에 따르면 속도를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물리적 속도, 사회적 속도, 개인적 속도입니다. 개인적인 속도가 아무리 빠르다고만 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 조상들도 이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급할수록 돌라가라”, “아는 길도 물어가라”, “급히 먹는 밥이 체한다” 아무리 급해도 바늘귀에 실을 넣어야 바느질을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가 얼마나 급해졌는지는 애국가를 들을 때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대부분 대개는 “길이 보전하세”의 끝 소절이 끝나기 전에 다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애국가가 길이 보전되지 못한 채 사라지는 겁니다.
개인적으로 국가마다 성격이 얼마나 급한지를 측정하는 방법이 하나가 있습니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이 신호가 바뀌었는데 앞차가 움직이지 않을 때 뒤에 있는 차가 얼마의 시간을 기다려 주는지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동경의 경우 4.5초 기다려 준답니다. 서울의 경우 1초 기다려 줄까요? 어떤 사람은 신호등이 지금 막 바뀌었는데 크락션을 누르더라구요.
우리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려고 하는 이유는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지 않으려고 것입니다. “요동치”로 번역된 ‘클뤼도니조메노’는 조타 장치가 없는 배처럼 바람 부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자꾸만 흔들립니까? 반석(바위)이 아니어서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장하지 못해서 그래요.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사람이라 그래요. 성경은 교회를 여자로 말합니다. 돕는 배필입니다. 그리스도가 지금 이곳에 계신다면 도울 일, 하실 일, 그것을 우리가 하는 것이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복권에 당첨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끈질기게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는 복권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제발 복권을 사라!’ 복권을 사는 것 까지는 우리가 해야 하나님이 당첨되게 해 주실 수 있는 겁니다. 혹시 다 복권을 사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우리가 행동을 해야 됩니다. 하다 못해 사과나무 밑에 가서 입이라도 벌리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떨어지는 것이라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입을 여세요. 움직이세요. 일을 하세요. 하나님이 함께 하실 줄로 믿습니다.
 

지혜를 배우세요.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 2 이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3 지혜롭게, 공의롭게, 정의롭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며 4 어리석은 자를 슬기롭게 하며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주기 위한 것이니 5 지혜 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요 명철한 자는 지략을 얻을 것이라 6 잠언과 비유와 지혜 있는 자의 말과 그 오묘한 말을 깨달으리라 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8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9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 사슬이니라” (잠 1:1-9)

어떤 젊은이가 기세 등등한 표정으로 한 회사의 출입문 앞에 서 있습니다. 이 젊은이는 이제 막 실전에 배치된 자동차 세일즈맨이었습니다. 젊은이는 으리으리한 회사 건물의 압도적인 위세에 주눅 들지 않으려고, 세로 뽑아 입은 양복 바짓단의 빳빳한 주름을 다시 한번 매만집니다. 그러고는 눈앞에 두꺼운 유리문을 있는 힘을 다해 밀었습니다. ‘무엇이든지 돌파할 수 있다! 내 앞을 가로막지 마라!’ 하는 기세였습니다.
하지만 육중한 문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젊은이는 다시 한번 힘차게 문을 밀어댔습니다. 세 번, 네 번… , 문은 여전히 열릴 기미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젊은이의 사전에 포기란 없었습니다. 마침내 너무 오랫동안 문에 부딪힌 탓에 젊은이는 서서히 지쳐가기 시작했습니다. 말쑥했던 복장과 말끔히 빗어 넘겼던 머리칼은 어느 새 구겨지고 엉클어졌습니다. 최선의 노력을 다했지만, 역시 모든 문은 미는 자에게 열리는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결국 젊은이는 어깨가 축 늘어져 돌아갔습니다. 그가 그렇게도 들어가려고 애쓰던 출입문에는 이렇게 씌어있었습니다. ‘당기시오!’

“위급한 때일수록 힘보다는 지혜가 필요하다.”(생 텍쥐페리)고 했습니다.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석기시대에 살면 아마 힘이 더 필요하겠지요. 그러나 지금은 정보화 시대라고 합니다. 지혜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그래서 점점 남자보다는 여자가 사회생활 더 잘합니다.
“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 7:7)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꾸준히 계속적으로 열심히 해야된다는 뜻이지만 동시에 지혜롭게 해야된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계속 찾고, 계속해서 두드리는 것은, 사람이 반복하는 가운데 지혜를 얻게 됩니다. 계속해서 반복하지 않으면 지혜도 나오지 않습니다. 찾는 자가 찾게 되어 있는 것은 찾는 사람은 찾았던 한 장소에서 계속 찾지 않습니다. 찾아보지 않았던 다른 장소에서 찾아볼 것입니다. 찾는 방법 또한 발전되는 것입니다.

돈 많은 부잣집 자식이 있었습니다. 놀고 먹는데 익숙해져서 일을 안 하려고 합니다. 아버지는 죽을 때가 다 되었는데 자식생각만 하면 걱정입니다. 아버지는 고심 끝에 죽기 전에 자식에게 유언을 남겼습니다. 과수원 땅 어느 곳에 금궤를 묻어두었다. 자식이 말합니다. 어느 곳인데요… 아버지는 말씀을 안 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하는 수 없이 이 게으른 자식은 금궤를 얻으려고 과수원 밭을 파보기 시작합니다. 여기를 파도 안 나오고 저기를 파도 안 나옵니다. 결국 밭을 다 팠습니다. 그랬더니 그 해 금궤는 찾지 못했지만 과수원에 밭을 잘 매서 풍년이 들었다는 이솝이야기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열심히 하니까 됩니다. 열심히 있다는 것은 동시에 지혜가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게으른 자는 지혜도 잃게 됩니다. 그러므로 부지런한 자는 지혜를 얻을 것이며 게으른 자는 미련하게 되는 것이 이치입니다. 현 사회를 가리켜 정보화 사회라고 말합니다. 예전에는 천재를 원하던 사회였다면 정보화 사회는 천재가 아니라 ‘전문가’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전문가’란 자기 분야에서 10,000시간 이상을 보낸 사람을 말합니다.

여러분! 길을 잃었을 땐 일단 방향을 잡아야 합니다.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되는지를 생각해야 됩니다. 나사는 왼쪽으로 돌려야 풀어지는데 오른쪽으로 계속 돌리면 일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악화시키는 것입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잠시 쉬면서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성경전체에서 ‘지혜’라는 단어는 약 340개정도 나옵니다. 이 중에서 잠언서에만 41개(호크마)가 나옵니다. 그만큼 잠언서는 ‘지혜의 책’이라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책의 이름을 히브리 원전의 첫 구절을 따서 ‘솔로몬의 잠언’(히, 미쉘레 셀로모)라고 불렀습니다. 짧게는 그냥 ‘미쉘레’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말 ‘잠언’이라는 이름도 여기서 나왔습니다. ‘미쉘레’는 ‘마솰’의 복수형으로 ‘속담들, 격언들’을 의미합니다. 미 ‘마솰’이라는 단어는 ‘…같다, 유사하다, 묘사하다’ 등을 나타내는 어근에서 유래된 것으로 넓은 의미에서 인생의 경험을 압축하여 간결하게 표현한 경구나 속담들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예언이나 교훈 등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잠언서의 대부분은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리며 지혜를 구하였던 솔로몬이 쓴 것이 대부분입니다. 열왕기상 4:32절에 의하면 솔로몬은 잠언 3,000개와 노래 1,005편을 남겼습니다. 모든 사람 중에서 솔로몬만큼 하나님께 지혜를 얻었던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솔로몬에게서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송 하시면서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 10:16)고 하셨습니다. 양은 분명 비무장입니다. 그런 이 양에게 지혜마저 없다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지혜로워야 삽니다. 지혜로워야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므로 이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뱀에게서조차 배울 것이 있다면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하 9:22 “솔로몬 왕의 재산과 지혜가 천하의 모든 왕들보다 큰지라 23 천하의 열왕이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마음에 주신 지혜를 들으며 그의 얼굴을 보기 원하여” 라고 합니다. 솔로몬 왕 때는 천하의 모든 왕들이 솔로몬 만나기를 원했습니다. 그에게 지혜를 배우기 원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배우기 원해야 합니다. 배워야 당겨야 할 문을 계속 밀어대지 않습니다.

교육학자들은 동물들은 본능이 거의 좌우하지만 사람의 경우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정보를 섭취하지 못할 경우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에 심각한 손상을 입거나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킨다고 합니다. 그 예로
“1920년 12월 인도에서 신그라는 사람이 가축을 잡아먹던 호랑이를 사냥하러 갔다가 동굴 속에서 늑대 새끼 무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 늑대 새끼 가운데 끼여있던 여자 아이 둘을 발견하고 그 아이들을 자신이 운영하던 고아원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7, 8살로 보인 여자아이들은 원숭이 소리 같은 것을 내며 네발로 기어다녔고 마치 늑대 새끼인양 신그씨 등을 물려고 했습니다. 그 후 아말라와 카말라라는 이름으로 지어진 아이들은 인간과 같이 생활하기 위한 훈련을 받았으나 급격한 환경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아말라라는 소녀는 곧 사망하였고 카말라는 그 후 두발로 걷는 연습을 하며 인간의 옷을 입는 등 꽤 적응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1929년 17살 정도의 나이에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몇 일 전 러시아에서도 늑대소년이 발견되었습니다. 아파트에 방치된 아이를 고양이와 개가 기른 것입니다. 동물 소리를 내며 네발로 다니는 것입니다. 사람도 역시 교육받지 못하면 짐승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교육만 받으면 돈만 아는 사람이 될지 모릅니다.

본문 2절 “이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라고 했습니다.
지혜(hm;k]j;:호크마)는 ‘!k’j;:하캄’은 ‘판단력, 굳셈’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원어상 호크마(지혜)는 삶 전반에 걸쳐 적용되는 기능적, 도덕적, 종교적 지혜를 포괄적으로 일컫는 말입니다. 시편에서 제일 많이 하나님을 묘사한 단어 중에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니, 요새시니”(시 18:2, 31:3, 94:22)라는 말이 나옵니다. 굳센 반석입니다. 큰 바위 이십니다. 흔들리지 않습니다. 지혜란 다름 아닌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본명이 히브리어로 시몬인 베드로에게 아람어로 게바라고 이름을 바꾸어 주었습니다. 게바를 헬라어로 번역해서 베드로입니다. 즉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바다의 어부 출신인 이 베드로(바위)가 이름과 같이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셨습니다. 지혜로운 것은 진리인 예수님의 말씀 위에 서서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시몬의 뜻은 ‘응답’ 입니다. 당시 이러한 이름을 사용하는 많은 유대인이 있었습니다. 이 이름의 뜻과 또 부르기에 나쁘지 않았던 이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그 이름도 유대식이 아닌 아람어로 게바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식 히브리어로 된 시몬이 있는데 굳이 아람어식 게바라고 이름을 변경했어야 하는 이유가 있었을 까요?
이들은 아마도 유대주의에 빠져있는 대표적인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제일 뛰어난 사람 두 사람을 뽑았습니다. 그 사람은 베드로와 바울 이라고 해야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특징을 보면 모두 열심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 중에 베드로와 제일 문제가 될 소지가 있던 제자가 있습니다. 바로 ‘마태’입니다.
마태와 베드로는 서로 협력하기 어려운 집단에 속했던 사람입니다. 마태는 세리로서 로마제국에 팔렸던 사람이고 베드로는 로마를 증오한 사람이었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열렬한 애국자였으나 마태는 매국노였습니다. 이들은 서로 다른 여건에서 만났기 대문에 분명히 마태는 시몬이 속해 있는 셀롯인들의 암살대상자 명단 위쪽에 자리잡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렇게 다른 환경의 두 사람 사이의 깊은 바다에 다리를 놓으셨다. 개인적인 증오심은 예수님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에 의하여 극복되었습니다. 이들이 조그마한 단체 속에서 화평하게 살 수 있다면 복음은 사람들 사이의 모든 불화를 치유할 능력을 가진 것입니다. 시몬 베드로와 마태의 화해는 복음의 화해능력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께서는 사람과 화해하시고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환경을 극복하고 화목케 하셨습니다. 가끔 보면 우리 교회들도 무슨 정당이나 단체에 소속되어서 누구를 좋아하고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잘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지금 우리 민족에게 원하시는 것은 분열과 대립이 아닙니다. 베드로와 마태는 전혀 다른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지혜로 그들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본문 4절 “어리석은 자를 슬기롭게 하며”라고 했습니다. 어리석은 자(!yIat;p]l:페타임)는 ‘열려진, 공개된’이란 뜻의 ‘파타흐’에서 유래된 말로서 마음을 지킬 수 없는 상태로 무방비로 열려있는 것을 말합니다. ‘지혜(호크마)’가 지키는 것이라면 ‘어리석은 자(페타임)’은 반대로 지키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그것이 영적이든 육적이든 미혹 당하여 빠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약 성경에 보면 우상을 가리켜 ‘미련한 것’, ‘가증한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가증한 것’이라는 표현은 어리석은 자를 꾀어 내었다는 우상에 대한 표현이고, ‘미련한 것’이라는 표현은 그 우상에 넘어간 ‘어리석은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어리석은 자를 “슬기롭게 하며” ‘슬기:오르마’ 재빠르게 피할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피할 나의 반석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그에게 피할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폭력에서 구원하셨도다”(삼하 22:3)고 합니다.

직장세계에서 오래 전부터 농담 삼아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일종의 회사 괴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회사에나 네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는 겁니다. ‘똑부족’, ‘똑게족’, ‘멍부족’, ‘멍게족’입니다. 무슨 포장마차 안주 이름 같지만 아닙니다. ‘똑부족’은 똑똑하지만 일도 부지런히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똑게족’은 예상 하셨겠지만 똑똑하지만 게으른 사람입니다. 그러면 ‘멍게족’은 멍청하고 게으른 사람입니다. 그런데 제일 문제가 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멍부족’입니다. 멍청한데 부지런 한 겁니다. 그래서 매일 일을 만듭니다. 자기 딴엔 열심히 일하지만 일을 하면 할수록 문제를 일으킵니다. 어리석은 자는 바로 이런 ‘멍부족’을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똑부족’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영(신)은 지혜롭습니다.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신이 충만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였더라”(신 34:9)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성령은 지혜가 충만하십니다.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눅 2:40) 하나님은 지혜이십니다. 예수님은 지혜이십니다. 성령님도 지혜이십니다. 미련하지 않습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행 6:3) 초대교회 일곱 집사를 선택할 때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을 뽑았습니다. 성령과 지혜는 늘 함께 다니는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은 지혜롭다는 뜻입니다.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행 6:10) 라고 말합니다.

본문 7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고 합니다. ‘경외(ta’r]yI:이르아)’는 ‘두려움, 무서움’을 말합니다. 단순한 공포심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무서워해야 합니다.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설교도 내가 좋은 대로 하게됩니다. 결국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전혀 없으면 내 마음대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십일조를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근본(tyviar:레쉬트)’은 ‘첫째, 시간, 장소’ 등을 의미합니다. ‘근원’이라고 번역해도 됩니다. 우리에게 지혜와 지식이 있다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바보는 방황하고 현명한 사람은 여행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인생을 여행하면서 감사하면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분에게는 본문 9절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 사슬이니라” 라고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