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1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2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3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4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5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6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시며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며 7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 8 여호와께서 맹인들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들을 사랑하시며 9 여호와께서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 10 시온아 여호와는 영원히 다스리시고 네 하나님은 대대로 통치하시리로다 할렐루야” (시 146:1-10)

피아니스트 중에 서혜경 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이분이 암으로 투병하면서 연주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병원에서는 생명이 먼저지 피아노를 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피아니스트에게는 피아노를 칠 수 없다면 더 이상 살아도 의미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수술을 하고 나면 오른팔을 못쓸지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그 때를 대비해서 왼손 만으로라도 연주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라벨’의 <왼손을 위한 협주곡>을 치면서 눈물 흘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수술대에 누워서 내가 녹음한 CD 음악을 들으며 마취에 들어갔다. 마취가 깨는 순간 제일 먼저 오른쪽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다. 피아노를 치고 싶어서 수술 사흘만에 피 주머니를 찬 채 퇴원을 강행했다. 옷도 갈아입기 전에 <호프만의 뱃노래>를 쳐보았다. 오른쪽 손가락이 움직일 때 그 감사와 환희는 기쁨의 눈물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여러분! 피아니스트가 피아노를 치지 못하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을 찬양하지 못하면 죽어 있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내가 오늘 건강한 몸으로 하나님께 예배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오늘 우리의 예배가 살아 계신 하나님께 감격의 예배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만일 이 세상이 눈물의 골짜기라면, 예수님은 거기에 뜬 무지개이시다.”.

오늘 본문은 할렐루야로 시작해서 할렐루야로 마칩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다른 것은 다 잊어버려도 절대 잊어서는 안될 말이 있습니다.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에서 제일 귀중한 단어는 바로 “여호와, 예수 그리스도, 할렐루야, 아멘”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다른 것 다 잊어버려도 이 단어만 알고 믿고 있다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다른 것 다 알고 이 단어를 모르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어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앞의 두 단어 “여호와, 예수 그리스도”가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말한다면 다음 두 단어 “할렐루야, 아멘”은 그분들께 드리는 우리의 믿음의 고백이요, 감사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시는 ‘할렐 시편’(146-150편)의 첫 번째 것입니다. ‘할렐 시편’들은 유대인 회당에서 매일 아침 예배 때마다 낭송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모두 10절인데요 ‘여호와’라는 단어가 10번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4번나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계속 나오는 것은 하나님이 찬양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찬양의 대상이 세상 사람이 되는 것은 모두가 그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노래가 영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대상이 영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3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4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고 말합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이 우리를 영원히 도울 수 없습니다. 결국은 그도 죽고 나도 죽습니다. 인간의 모든 생각은 소멸됩니다. 어떤 철학을 가지고 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의 짐 존스 목사는 흑인, 마약중독자, 노숙자 등 도시 빈민 계층 구호 활동으로 좋은 평판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설교도 잘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존교회를 부정하고 새 교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남미 가이아나에 있는 존스타운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급기야 자신을 메시야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신도들을 폭행하고 성 문제 등 온갖 문제들이 가까스로 탈출한 사람들에 의해서 폭로되었습니다. 미국 의회는 급기야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1978년 미국 하원의원 리오 라이언(Ryan)과 NBC방송 기자 등 5명을 보냈습니다. 그들은 곧 바로 총에 맞아 숨졌습니다. 이어 존스 목사는 청산가리를 탄 주스를 마시도록 신도들에게 명령하여, 이른바 ‘영광스런 죽음’을 맞이하게 했습니다. 그 때(1978.11.18) 죽은 사람이 912명입니다. 이 중 어린아이만 276명이나 되었습니다.
인간을 의지하지 마세요. 그것은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를 잘해도, 구제사업을 잘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모두 죄인일 뿐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대개 세상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세상에 무엇 하러 왔는지 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흔히 기계론적인 인생관과 목적론적인 인생관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기계론에 의하면 사람이란 부정모혈(父精母血)로 출생해서 처음에 기고, 앉고, 걷고, 소년기가 되고, 청년기가 되고, 장년기가 되고, 노년기가 되고 그러다가 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저 시간이 지나는 대로 살다가 죽을 때가 되어서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목적론에 의하면 사람이란 누구나 목적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러면 무슨 목적을 가지고 태어났느냐 하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식이위대(食而僞大)’란 말이 있는 것처럼 우선 먹는 일이 큰일입니다. 그러나 그 먹는 것조차 성경은 “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33)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목적은, 첫째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찬양하는 생활입니다. 로마서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되시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우리는 주님의 제자요, 주님의 특별한 소유가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피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나 죽으나 이 몸을 드려 주님을 찬양 해야합니다.

본문 5절에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하나님을 자기의 소망으로” 두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 의지해야 실망과 낙담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그분은 영원하신 분입니다. 6-9절까지 그 이유가 설명됩니다. 왜 하나님만을 찬양하며 의지해야 하는가를 말씀해 주십니다.

첫째, 만물을 지으신 분이십니다. 본문 6절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시며…” 창조주 이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은 것들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찬양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찬양의 대상은 주 하나님 뿐입니다. 기독교는 찬양의 종교입니다. 교회는 찬양을 부르러 오는 겁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우리에게 찬양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둘째,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며” 하나님만이 믿을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약속을 지키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0절 “시온아 여호와는 영원히 다스리시고 네 하나님은 대대로 통치하시리로다 할렐루야”라고 하셨습니다. 군대에서 아무리 무서웠던 고참도 제대할 때가 다 되면 무서워할 사람이 없습니다. 얼마 안 있으면 그만두기 때문입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레임덕(lame duck)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성경을 구약(Old Testament), 신약(New Testament)라고 부르는 이유도 약속의 책이라는 뜻입니다.

셋째, 왜 하나님을 찬양해야 되는지 7-9절까지 9가지로 하나하나 설명해 주십니다.
7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
8 여호와께서 맹인들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며
‘비굴한’(!ypiWpK]:케푸핌, 꿇은 자)은 염려와 고통으로 인해 마음이 눌리고 구부러진 사람을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의인들을 사랑하시며
9 여호와께서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
여호와 하나님을 왜 찬양해야 되는지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여러분! 귀신 불러들이는 세계의 모든 무속신앙들을 보면 모두 다 노래를 불러서 끌어들입니다. 모두 다 뭔가 주술 외우고 이렇게 춤출 때 귀신이 옵니다. 나쁜 것도 그렇게 옵니다. 하나님은 언제 임하시느냐 하면 찬양할 때 임하십니다.

독일 출신의 위대한 작곡가 헨델은 초기에 왕을 위한 곡만을 썼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즐겨 듣는 수상곡이 그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가 최고의 음악가로 불리우게 된 것은 세상 왕을 노래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에게 최고의 영감을 준 곡은 이 세상을 초월한 가장 위대한 왕, 메시야 였습니다. 불후의 명곡 메시야 중 할렐루야는 그에게 있어 영감의 극치였습니다. 그는 할렐루야를 작곡했던 당시의 감격스러운 상황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임금 날 부러워 아니하여도 나도 역시 세상임금 부럽지 않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에 할렐루야 찬송이 저절로 나네.” 그랬다는거 아닙니까? 제가 여러분 마음 문 열라고 한 것이고요 그가 말하기를 “내 앞에 펼쳐져 있는 하늘나라와 위대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본 듯한 감격 속에서 이 곡이 만들어졌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어떻게 찬양해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본문을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 1절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찬양은 기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으로 해야 합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합니다. 젓 먹던 힘있잖아요. 아이가 젓 먹을 힘이 없으면 예전 같으면 죽습니다. 그 힘은 마지막 힘이 있는 한입니다.
찬송은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심령으로 하는 것입니다. 시편 147:1절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선함이여 찬송하는 일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 “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함이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의무인 것입니다.

둘째, 2절 “나의 생전에, 평생에 여호와를 찬송하겠다”고 합니다. 시인은 자신이 살아있는 한 찬양할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자신의 존재가 계속되는 한 찬양하겠다는 것입니다.
말로만 입으로만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지정의(知情意)를 포함하여 전인으로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시지 않고 각 사람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찬양은 전인적으로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삼상 16:7).
우리가 사는 곳에는 어디나 찬송이 있어야 합니다. 왜요? 사람이 창조된 목적이 하나님을 찬송하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찬송은 성도가 맺어야 할 열매입니다. 히브리서 13:15절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고 하였습니다.

셋째, 3절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두 번째 까지는 시인 자신의 고백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세 번째는 백성을 위해 함께 찬양해야 하는 당위성을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혼자만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억지 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복음은 자율적이며 정당하고 정확하게 전파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유대 8대왕 요아스가 성전을 보수하기 위해 일종의 세금(헌금)을 거두어들입니다. 처음에는 레위 사람들에게 성읍을 직접 다니면서 거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잘 거두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역대하 24:8 “한 궤를 만들어 여호와의 전 문 밖에 두게”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차고 넘쳤습니다. 자율적으로 해야 합니다. 강제적으로 헌금하고 찬양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시편 145 2-3에도 “2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3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 시인은 찬양에 자신이 있습니다. 단순히 노래를 잘 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기쁨으로 찬양하며 크게 찬양합니다. 숨어서 하지 않습니다. 만인이 보는데서 합니다. 여호와를 자랑합니다.
시편 148:1 “할렐루야 하늘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며 높은 데서 찬양할지어다”,
시편 149:1 “할렐루야 하늘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며 높은 데서 그를 찬양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왜 이렇게 크게 찬양하고, 높은 데서 찬양합니까? 만인이 들으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은 숨길 것이 없습니다. 등대는 높은 곳에 세워야 합니다. 모두가 잘 보여야 합니다. 함께 찬양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시키시는데 자신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변론이라도 하자고 하십니다.
시편 71:14-15에 “14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더욱 찬송하리이다 15 내가 측량할 수 없는 주의 공의와 구원을 내 입으로 종일 전하리이다”

시인이 노래하는 것은 자기혼자 좋자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 기쁨을 전하고 있습니다. 기쁨이 있는 사람, 찬양하는 사람은 반드시 복음을 전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를 죄의 세력에서 해방시켜 주십니다. 소경의 눈을 여시듯이 우리의 심령의 눈을 밝게 해주시며 비굴한 자를 일으켜 주십니다. 그러므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께 소망을 두고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