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으로 심으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갈 6:7-8)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납니다. 지난 한 주간은 국가적으로 참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15대 대통령을 지내신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 서거하시고 오늘이 영결식 입니다. 격동의 시대에 태어나셔서 이 나라 민주화를 위하여 숱한 고생을 하셨습니다. 또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사하려던 나로호가 발사되지 못하고 연기되었습니다. 북한의 여러 가지 변화에도 신경이 쓰입니다. 전 세계에서 특파원들이 제일 주제하고 싶은 나라가 한국이랍니다. 한국은 수시로 세계 토픽이 터져 나오는 나라입니다. 유럽의 어떤 나라에서는 10년 가야 하나 나올까 말까 하는 기사거리가 한국에서는 수시로 나온다는 겁니다. 벌써 올해 들어서만 북한의 핵폭탄시험, 유엔제재, 전 노무현 대통령 죽음, 북한의 미국기자, 개성공단 근로자 억류사건, 최진실 씨 자살(유골함 도난),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서거 등 우리나라의 일이라 그런 것이 아니라 정말 세계적인 뉴스가 줄지어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이 미국과 한국을 비교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국은 재미없는 천국이고, 한국은 재미있는 지옥’ 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재미있는 지옥이 아니라 재미있는 천국을 만들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구약은 법입니다. 하라는 것과 하지 말라는 것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신약은 마음입니다. 성령입니다. 마음을 지키면 법을 지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된다는 것입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는 것을 모르는 농부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는 것을 믿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고 김대중 대통령은 고생도 많이 하셨지만 또 거두기도 하셨습니다.
본문의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라고 했습니다. 원문의 “스스로 속이지 말라”는 ‘플라나오’는 “잘못 되게 유인하다, 미혹하다”는 뜻입니다.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는 개역성경은 “만홀히 여김” 이라고 번역했었습니다. 헬라어 ‘뮈크테리제타이’는 “바보취급 당하다” 는 뜻입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는 것을 우리가 믿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바보 취급하는 것이며 우리의 영혼을 잘 못 인도하는 것입니다. 에스겔을 통해서 하나님은 “… 너희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내가 다 아노라”(겔 11:5)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증거 합니다. 씨앗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과 행동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고 했습니다. 이렇게 번역한 성경도 있습니다. “생각을 조심하라. 생각이 인생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아마 마음이 돈이라면 그것을 지키기 위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할 것입니다. 금고를 사고 자물쇠로 잠그고 CCTV달아 감시할 것입니다. 그것이 더 많은 돈이거나 보물일수록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잠언에서는 제일 지켜야 할 것이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마음을 지키기 위하여 무엇을 했나요? 내 버려 두는 것 아닌지요? 큰일납니다. 마음은 잡아야 합니다. 흘러가는 데로 놔두면 안됩니다. 예배시간에 졸음이 오는 것도 좇아야 합니다. 정신 바짝 차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지난번에 환경스페셜을 보니까 우리나라 해안 가에 쓰레기가 밀려왔는데 얼마나 먼 곳에서부터 왔는지 아람어로 된 봉투, 중국쓰레기, 일본 것 얼마나 많은 지요. 어떤 섬에서는 치워도 치워도 끝이 안보일 지경입니다. 그런데 또 우리나라의 쓰레기는 일본에 가 있습니다. 일본 쓰레기는 남태평양의 섬들에 쌓여가고 있습니다. 이 쓰레기를 보면서 우리 마음의 일부가 이렇게 쓰레기로 가득 찬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산업화되기 이전의 시대에는 쓰레기가 별로 없었습니다. 오늘날 공업화된 쓰레기는 자연에 들어가 자연화 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파괴시키고 있습니다. 우리의 배움, 우리의 선진화가 이런 쓰레기와 같이 버려질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어르신 앞을 지나갈 때는 고개를 숙이고 지나갔습니다. 지금은 익지 않은 벼처럼, 저리지 않은 배추처럼 제멋대로 입니다. 역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민족은 망하지 않습니다. 영국에 갔을 때 버밍엄의 선교사님 집에서 지냈었습니다. 그런데 저녁에 오토바이가 웅 소리를 내면서 지나가더라구요. 그래서 여기서는 저 오토바이 괜찮냐고 그랬더니 선교사님이 하는 말, 저들도 넘어야 할 선이 아디인지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상은 절대 안 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끈 떨어진 연처럼 행동해서는 안됩니다. 제멋대로 날아가서는 안됩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하시자 “나라의 큰 거목이 쓰러졌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그만큼 힘이 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 와중에 검찰총장이 내정되었습니다. 먼저 번 내정되었다 낙마하신 분도 위장전입이 있었습니다. 이분도 위장전입이 있었습니다. 뭐 그리 큰 세금 포탈이나 물건 훔친 것이 아니니 별것 아니라는 생각은 잘못입니다. 죄가 제일 안 좋은 것은 알고도 저지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미약한 범죄의 형태라고 해도 그것을 쉽게 용납해서는 안됩니다. 자식을 위해서 그렇게 했다고요. 죄지은 분들 모아 놓고 사정 이야기 들으면 다 용서해 줄 수 있나요. 이유 없이 범죄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도 이분은 그 죄에 대해서 잘못한 것을 시인했습니다. 먼저 분은 안 했다가 거짓말로 탈로나 수습이 안되었습니다.
사람이 죄를 짓게되는 것은 자신의(여기에 자식을 위한다는 핑계도 포함) 영예와 출세 때문입니다. 이 마음을 비우면 죄가 보입니다. 그러나 욕심이 큰 만큼 죄가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용납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요 6:15) 누구나 왕위를 생각하면 입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피하셨습니다. 아마도 주님이 십자가를 생각지 않으시고 세상 왕을 꿈꾸셨다면 그들을 따라갔을 것이다. 그러나 혼자 떠나셨습니다. 산으로 가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러 가셨습니다.
여러분은 비웃음 당해 보신 적 있으십니까? 방 얻으러 다닐 때 복덕방에 가면 얼마짜리 얻으러 왔냐고 할 때 복덕방 주인은 3,000만 원 짜리 이야기하는데 나는 “300만 원 짜리 없어요?” 그 때 복덕방 주인이 픽 웃으면서 “다른데 가보세요?” 할 때 그 마음 아시지요? 한번의 비웃음을 당하게 되면 그 상처가 평생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비웃음을 당하신 적이 있습니다. 병든 소녀를 고쳐 달라고 부탁을 받고 그 집에 가보니 사람들이 예수께 그 소녀가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셨습니다. 집에 와 있던 사람들의 반응을 성경은 “저희가 비웃더라.”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모욕의 순간에 부딪혀야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누구에게도 모욕 받기를 거부하셨습니다. 모욕은 모욕으로 되 값을 수가 있습니다. 보란듯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이 소녀를 살리시면(깨우면) 그만입니다. 그러면 그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말로 싸워서 이겨 가지고 전도하지 못한다구요. 이기면 전도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지면 승복하고 교회 나오는 것이 아니라 기분 나빠서 교회 안나옵니다. 주님은 이런 우리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39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40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막 5:39-41) 예수님은 마음을 지키셨습니다.
방송사의 한 기자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일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세상에는 왜 따뜻한 뉴스가 없죠?” 잠시 생각하던 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은 조용하기 때문이지요. 뉴스에 오르내리는 사람은 대부분 목소리가 크지만 마음이 따뜻한 사람은 대체로 조용해서 뉴스에 잘 나오지 않아요.”
캄보디아에 가면 앙코르와트라는 건물이 있습니다. 12세기 초에 수르야바르만 2세를 위해 창건된 캄보디아 앙코르에 있는 사원으로서 크메르 제국 때 30년 동안 지은 건축물입니다. 이 건물은 오랫동안 정글에 가려 몰랐습니다. 이 앙코르와트가 지배하였을 때는 얼마나 힘이 있었는지 인도에서 중국까지 버어마, 태국, 라오스, 베트남 모두다 다스렸다고 합니다. 그런 권력이 무너진 것입니다. 그 건물들이 정글에 가려 있다가 역사에 숨어 있다가 드러난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정글 속에 돌로 만든 엄청난 도시가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왜 망했는지 그 이유는 아무도 모릅니다. 오늘날 과학자들은 어떤 전염병에 걸려 다 죽었지 않나 추측할 뿐입니다. 기독교는 앙코르와트와 같은 그런 건물을 짓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힘은 마음의 거울입니다. 심령에 집을 짓습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짓습니다. 인간의 길은 어렵습니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할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의 집을, 성령의 집을 짓는다면 우리가 앙코르와트와 같은 건물을 짓지 못한다고 해도, 아니 초가집 하나 짓지 못했다고 해도 우리 주님은 나를 비웃지 아니하십니다.
여러분! 내 자녀가 실수를 하면 비웃습니까? 절대 그렇게 못합니다. 내 자식의 일은 나의 일입니다. 자기 자식을 비웃는 부모는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못해도, 우리가 아무리 미련해도, 우리가 아무리 약해도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나를 비웃지 아니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이 비옥하게 되어 많은 열매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처럼 되시기를 원하십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고후 10:5)
우리의 모든 생각을 그대로 가지고 있거나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그리스도께 집어넣었다가 꺼내는 것입니다. 필터입니다. 내 마음, 내 생각을 그리스도의 필터에 넣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심는 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그리스도께 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성령이 없습니다. 성령은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신 영입니다. 그러므로 내 생각, 내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올 때 성령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혹시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서 아무 말씀도 안 하시는데 목사님이 우리의 사기를 부축이냐고 저렇게 설교하시나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혹 우리가 착각하여 예수님을 짝사랑하는 것은 아닌가? 그럼 다시 확인해 보시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또 있습니다.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내가 나를 생각하는 것보다 나는 훨씬 하나님께 귀한 존재입니다. 그런 하나님은 한번도 나를 비웃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내가 죄 가운데로 가는 것을 보실 때는 가슴을 쓸어내리 시며 안타까워하시고, 내가 주님의 일에 힘쓸 때에는 나보다 더 기뻐하시고 내가 눈물을 흘릴 때에는 나를 안아주십니다.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여름이면 식구들하고 보트 타기를 즐겼습니다. 그런데 여름이 다 지나 보트를 창고에 넣어두려고 보니 한쪽 널빤지의 못이 허술하게 빠져 나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지금 고칠까?” 하다가 다음에 고치지 하고 창고에 그냥 넣어 두었습니다. 그리고 여름이 다시 왔습니다. 부인이 먼저 집에 돌아와 보니 아이들이 보트를 타고 바닷가로 나갔는데 저녁 늦게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부인은 안절부절 하면서 남편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남편은 그제 서야 지난 여름에 못질하지 못한 널빤지가 생각났습니다. 점점 불안해 졌습니다. 그 때 아이들은 기적 같이 돌아와 왔습니다. 그 배의 널빤지를 보았는데 페인트칠이 잘 되어있고 새 널빤지로 잘 못질되어 있었습니다. 부인에게 물었습니다. 그것을 고친 적이 있냐고? 부인은 페인트 칠 한 것 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페인트칠한 사람을 찾아가 물었습니다. 그분은 “페인트 칠하다보니 널판이 부서졌길래 새 것으로 박아놓은 것뿐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스파르타인들은 그들(적)이 얼마나 있는지를 묻지 않는다. 어디에 있느냐고 물을 뿐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우리의 문제가 얼마나 큰지를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이 함께 하시는 지만 확인하면 됩니다. 성령을 위하여 심는 다는 것은 지금 해야 합니다. 미룰 일이 아닙니다. 나의 모든 생각을 예수님께 집어넣었다 나오는 것만 취하는 겁니다. 그것이 어떤 결론이든 어떤 것이든 그것만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온갖 쓰레기 같은 세상 생각 다 버리시기고 성령을 위하여 심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