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으로 심으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갈 6:7-8)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납니다. 지난 한 주간은 국가적으로 참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15대 대통령을 지내신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 서거하시고 오늘이 영결식 입니다. 격동의 시대에 태어나셔서 이 나라 민주화를 위하여 숱한 고생을 하셨습니다. 또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사하려던 나로호가 발사되지 못하고 연기되었습니다. 북한의 여러 가지 변화에도 신경이 쓰입니다. 전 세계에서 특파원들이 제일 주제하고 싶은 나라가 한국이랍니다. 한국은 수시로 세계 토픽이 터져 나오는 나라입니다. 유럽의 어떤 나라에서는 10년 가야 하나 나올까 말까 하는 기사거리가 한국에서는 수시로 나온다는 겁니다. 벌써 올해 들어서만 북한의 핵폭탄시험, 유엔제재, 전 노무현 대통령 죽음, 북한의 미국기자, 개성공단 근로자 억류사건, 최진실 씨 자살(유골함 도난),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서거 등 우리나라의 일이라 그런 것이 아니라 정말 세계적인 뉴스가 줄지어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이 미국과 한국을 비교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국은 재미없는 천국이고, 한국은 재미있는 지옥’ 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재미있는 지옥이 아니라 재미있는 천국을 만들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구약은 법입니다. 하라는 것과 하지 말라는 것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신약은 마음입니다. 성령입니다. 마음을 지키면 법을 지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된다는 것입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는 것을 모르는 농부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는 것을 믿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고 김대중 대통령은 고생도 많이 하셨지만 또 거두기도 하셨습니다.
본문의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라고 했습니다. 원문의 “스스로 속이지 말라”는 ‘플라나오’는 “잘못 되게 유인하다, 미혹하다”는 뜻입니다.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는 개역성경은 “만홀히 여김” 이라고 번역했었습니다. 헬라어 ‘뮈크테리제타이’는 “바보취급 당하다” 는 뜻입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는 것을 우리가 믿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바보 취급하는 것이며 우리의 영혼을 잘 못 인도하는 것입니다. 에스겔을 통해서 하나님은 “… 너희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내가 다 아노라”(겔 11:5)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증거 합니다. 씨앗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과 행동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고 했습니다. 이렇게 번역한 성경도 있습니다. “생각을 조심하라. 생각이 인생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아마 마음이 돈이라면 그것을 지키기 위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할 것입니다. 금고를 사고 자물쇠로 잠그고 CCTV달아 감시할 것입니다. 그것이 더 많은 돈이거나 보물일수록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잠언에서는 제일 지켜야 할 것이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마음을 지키기 위하여 무엇을 했나요? 내 버려 두는 것 아닌지요? 큰일납니다. 마음은 잡아야 합니다. 흘러가는 데로 놔두면 안됩니다. 예배시간에 졸음이 오는 것도 좇아야 합니다. 정신 바짝 차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지난번에 환경스페셜을 보니까 우리나라 해안 가에 쓰레기가 밀려왔는데 얼마나 먼 곳에서부터 왔는지 아람어로 된 봉투, 중국쓰레기, 일본 것 얼마나 많은 지요. 어떤 섬에서는 치워도 치워도 끝이 안보일 지경입니다. 그런데 또 우리나라의 쓰레기는 일본에 가 있습니다. 일본 쓰레기는 남태평양의 섬들에 쌓여가고 있습니다. 이 쓰레기를 보면서 우리 마음의 일부가 이렇게 쓰레기로 가득 찬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산업화되기 이전의 시대에는 쓰레기가 별로 없었습니다. 오늘날 공업화된 쓰레기는 자연에 들어가 자연화 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파괴시키고 있습니다. 우리의 배움, 우리의 선진화가 이런 쓰레기와 같이 버려질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어르신 앞을 지나갈 때는 고개를 숙이고 지나갔습니다. 지금은 익지 않은 벼처럼, 저리지 않은 배추처럼 제멋대로 입니다. 역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민족은 망하지 않습니다. 영국에 갔을 때 버밍엄의 선교사님 집에서 지냈었습니다. 그런데 저녁에 오토바이가 웅 소리를 내면서 지나가더라구요. 그래서 여기서는 저 오토바이 괜찮냐고 그랬더니 선교사님이 하는 말, 저들도 넘어야 할 선이 아디인지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상은 절대 안 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끈 떨어진 연처럼 행동해서는 안됩니다. 제멋대로 날아가서는 안됩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하시자 “나라의 큰 거목이 쓰러졌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그만큼 힘이 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 와중에 검찰총장이 내정되었습니다. 먼저 번 내정되었다 낙마하신 분도 위장전입이 있었습니다. 이분도 위장전입이 있었습니다. 뭐 그리 큰 세금 포탈이나 물건 훔친 것이 아니니 별것 아니라는 생각은 잘못입니다. 죄가 제일 안 좋은 것은 알고도 저지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미약한 범죄의 형태라고 해도 그것을 쉽게 용납해서는 안됩니다. 자식을 위해서 그렇게 했다고요. 죄지은 분들 모아 놓고 사정 이야기 들으면 다 용서해 줄 수 있나요. 이유 없이 범죄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도 이분은 그 죄에 대해서 잘못한 것을 시인했습니다. 먼저 분은 안 했다가 거짓말로 탈로나 수습이 안되었습니다.

사람이 죄를 짓게되는 것은 자신의(여기에 자식을 위한다는 핑계도 포함) 영예와 출세 때문입니다. 이 마음을 비우면 죄가 보입니다. 그러나 욕심이 큰 만큼 죄가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용납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요 6:15) 누구나 왕위를 생각하면 입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피하셨습니다. 아마도 주님이 십자가를 생각지 않으시고 세상 왕을 꿈꾸셨다면 그들을 따라갔을 것이다. 그러나 혼자 떠나셨습니다. 산으로 가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러 가셨습니다.

여러분은 비웃음 당해 보신 적 있으십니까? 방 얻으러 다닐 때 복덕방에 가면 얼마짜리 얻으러 왔냐고 할 때 복덕방 주인은 3,000만 원 짜리 이야기하는데 나는 “300만 원 짜리 없어요?” 그 때 복덕방 주인이 픽 웃으면서 “다른데 가보세요?” 할 때 그 마음 아시지요? 한번의 비웃음을 당하게 되면 그 상처가 평생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비웃음을 당하신 적이 있습니다. 병든 소녀를 고쳐 달라고 부탁을 받고 그 집에 가보니 사람들이 예수께 그 소녀가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셨습니다. 집에 와 있던 사람들의 반응을 성경은 “저희가 비웃더라.”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모욕의 순간에 부딪혀야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누구에게도 모욕 받기를 거부하셨습니다. 모욕은 모욕으로 되 값을 수가 있습니다. 보란듯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이 소녀를 살리시면(깨우면) 그만입니다. 그러면 그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말로 싸워서 이겨 가지고 전도하지 못한다구요. 이기면 전도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지면 승복하고 교회 나오는 것이 아니라 기분 나빠서 교회 안나옵니다. 주님은 이런 우리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39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40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막 5:39-41) 예수님은 마음을 지키셨습니다.

방송사의 한 기자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일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세상에는 왜 따뜻한 뉴스가 없죠?” 잠시 생각하던 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은 조용하기 때문이지요. 뉴스에 오르내리는 사람은 대부분 목소리가 크지만 마음이 따뜻한 사람은 대체로 조용해서 뉴스에 잘 나오지 않아요.”

캄보디아에 가면 앙코르와트라는 건물이 있습니다. 12세기 초에 수르야바르만 2세를 위해 창건된 캄보디아 앙코르에 있는 사원으로서 크메르 제국 때 30년 동안 지은 건축물입니다. 이 건물은 오랫동안 정글에 가려 몰랐습니다. 이 앙코르와트가 지배하였을 때는 얼마나 힘이 있었는지 인도에서 중국까지 버어마, 태국, 라오스, 베트남 모두다 다스렸다고 합니다. 그런 권력이 무너진 것입니다. 그 건물들이 정글에 가려 있다가 역사에 숨어 있다가 드러난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정글 속에 돌로 만든 엄청난 도시가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왜 망했는지 그 이유는 아무도 모릅니다. 오늘날 과학자들은 어떤 전염병에 걸려 다 죽었지 않나 추측할 뿐입니다. 기독교는 앙코르와트와 같은 그런 건물을 짓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힘은 마음의 거울입니다. 심령에 집을 짓습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짓습니다. 인간의 길은 어렵습니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할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의 집을, 성령의 집을 짓는다면 우리가 앙코르와트와 같은 건물을 짓지 못한다고 해도, 아니 초가집 하나 짓지 못했다고 해도 우리 주님은 나를 비웃지 아니하십니다.

여러분! 내 자녀가 실수를 하면 비웃습니까? 절대 그렇게 못합니다. 내 자식의 일은 나의 일입니다. 자기 자식을 비웃는 부모는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못해도, 우리가 아무리 미련해도, 우리가 아무리 약해도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나를 비웃지 아니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이 비옥하게 되어 많은 열매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처럼 되시기를 원하십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고후 10:5)
우리의 모든 생각을 그대로 가지고 있거나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그리스도께 집어넣었다가 꺼내는 것입니다. 필터입니다. 내 마음, 내 생각을 그리스도의 필터에 넣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심는 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그리스도께 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성령이 없습니다. 성령은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신 영입니다. 그러므로 내 생각, 내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올 때 성령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혹시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서 아무 말씀도 안 하시는데 목사님이 우리의 사기를 부축이냐고 저렇게 설교하시나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혹 우리가 착각하여 예수님을 짝사랑하는 것은 아닌가? 그럼 다시 확인해 보시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또 있습니다.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내가 나를 생각하는 것보다 나는 훨씬 하나님께 귀한 존재입니다. 그런 하나님은 한번도 나를 비웃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내가 죄 가운데로 가는 것을 보실 때는 가슴을 쓸어내리 시며 안타까워하시고, 내가 주님의 일에 힘쓸 때에는 나보다 더 기뻐하시고 내가 눈물을 흘릴 때에는 나를 안아주십니다.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여름이면 식구들하고 보트 타기를 즐겼습니다. 그런데 여름이 다 지나 보트를 창고에 넣어두려고 보니 한쪽 널빤지의 못이 허술하게 빠져 나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지금 고칠까?” 하다가 다음에 고치지 하고 창고에 그냥 넣어 두었습니다. 그리고 여름이 다시 왔습니다. 부인이 먼저 집에 돌아와 보니 아이들이 보트를 타고 바닷가로 나갔는데 저녁 늦게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부인은 안절부절 하면서 남편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남편은 그제 서야 지난 여름에 못질하지 못한 널빤지가 생각났습니다. 점점 불안해 졌습니다. 그 때 아이들은 기적 같이 돌아와 왔습니다. 그 배의 널빤지를 보았는데 페인트칠이 잘 되어있고 새 널빤지로 잘 못질되어 있었습니다. 부인에게 물었습니다. 그것을 고친 적이 있냐고? 부인은 페인트 칠 한 것 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페인트칠한 사람을 찾아가 물었습니다. 그분은 “페인트 칠하다보니 널판이 부서졌길래 새 것으로 박아놓은 것뿐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스파르타인들은 그들(적)이 얼마나 있는지를 묻지 않는다. 어디에 있느냐고 물을 뿐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우리의 문제가 얼마나 큰지를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이 함께 하시는 지만 확인하면 됩니다. 성령을 위하여 심는 다는 것은 지금 해야 합니다. 미룰 일이 아닙니다. 나의 모든 생각을 예수님께 집어넣었다 나오는 것만 취하는 겁니다. 그것이 어떤 결론이든 어떤 것이든 그것만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온갖 쓰레기 같은 세상 생각 다 버리시기고 성령을 위하여 심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제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20 무릇 흠 있는 것을 너희는 드리지 말 것은 그것이 열납되지 못할 것임이니라 21 무릇 서원한 것을 갚으려든지 자의로 예물을 드리려든지 하여 소나 양으로 화목제 희생을 여호와께 드리는 자는 열납되도록 아무 흠이 없는 온전한 것으로 할지니”(레 22:20-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 제물을 드리는데 있어서 되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세심한 주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온전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정신을 차리고 경외 심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는 제사를 드린다면 그것은 헛수고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의미합니다.
구약의 제사에서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반드시 그것이 어떤 종류의 제사이든지 제물이 있어야 했습니다. 제물 없이는 제사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수리산에 올라가서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사진을 찍으면서 이런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작품에 나는 단지 쎠터를 눌렀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제사에 우리는 다만 믿고 참여할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예배드릴 때 좀더 바른 자세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이 예배는 사람끼리 모여서 가지는 순서가 아니라, 온전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산 제물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찬송 부르는 마음의 자세가 어떠합니까? 엉뚱한 마음으로 기도를 반복한 일은 없습니까? 우리의 드리는 기도가 지극히 형식적인 방법으로 드리는 마치 중언부언하는 의미 없는 기도는 아닙니까? 틀에 박힌 생명 없는 전통적인 예배는 아닙니까? 우리스스로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께 열납되야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별 짓 다해도 예배가 하나님께 열납되지 못하면 우리의 모든 문제는 여전히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소 안에 들어서면 곳곳마다 피의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피’ 라는 말이 그렇게 듣기에 기분 좋은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소에는 마루나 휘장이나 모든 기물에 이르기까지 피가 묻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속죄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피 흘림이 없으면 속죄함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했었습니다.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제물은 아무거나 드릴 수가 없습니다. 제물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가 기르던 것으로 드려야 합니다. 자기 소유물 중에서 드리는 것입니다. 돈주고 사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제일 소중한 것을 지금 만일 하나님이 내어놓으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바로 그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내가 제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그것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이러한 명령이 믿음이 좋기로 소문난 아브라함에게 떨어졌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는 것입니다. 오래 전 남의 이야기이니까 그냥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만일 오늘날, 내게 일어났다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저는 그래서 저는 선교 열심히 하려고 합니다. 물론 저는 아들이 없습니다만 여러분! 감사할 줄 아셔야 합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에게 자식 바치라고 하시지 않잖아요. 전도하고 선교하라는 것입니다. 좀 모이기에 힘쓰라는 것입니다.
창 22:3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고민도 안 하는 것 같습니다.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길떠날 준비를 합니다. 가기 싫었으면 저녁때까지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삭은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한마디도 안 합니다. 물론 본문이 이삭에 대해서 함구하는 것은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사이를 이야기하다보니 정작 중요한 당사자인 이삭의 인권이 마치 유린된 것처럼 보입니다.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 볼 수 있는 이삭은 그저 순종할 뿐입니다. 제사들 드리러 가는데 양도 없습니다. 제물을 바치려고 나무를 벌려놓는데도 제물이 없습니다. 순간 아브라함은 칼을 빼들고 이삭을 겨냥합니다. 내리치려고 하는 그 순간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손을 잡았습니다. 하나님의 심부름을 받은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데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창 22:12)고 하셨습니다. 14절에 보면 하나님이 번제물 어린양을 준비하셨다고 하여 “여호와 이레”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산이 훗날 예루살렘 성전의 터가 됩니다. 역대하 3장 1절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입다와 외 딸
이스라엘에 ‘입다’라는 사사가 있었습니다. 지도자입니다. 우두머리였습니다. 18년 동안이나 이스라엘을 지배했던 암몬과의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둔 용맹스런 사사입니다. 그러나 그의 어린 시절은 매우 불행했습니다. 그는 길르앗에서 기생이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가 기생하고 관계하고 난 아들이 입다입니다(삿 11:1). 그래서 그는 이복형제들로부터 구박을 많이 받았습니다. 결국 그는 핍박을 견디다 못해 돕이라는 곳으로 쫓겨나게 됩니다. 돕이라는 곳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시골 변방입니다.
변두리입니다. 입다가 그곳에서 어울렸던 사람들을 가르쳐서 삿 11:3절 말씀에 잡류라고 말하는데, 잡류는 무가치한 사람들, 부랑배 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입다는 그러한 깡패들과 어울리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암몬이 대대적으로 이스라엘을 공격하려고 하고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입다를 지도자로 세우고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한가지의 특이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입다의 서원입니다. 그는 전쟁에 앞서서 하나님께 이렇게 서원합니다. “하나님, 만약에 전쟁에 이기게 하시면 가장 먼저 저를 환영하고 영접하는 사람을 제물로 드리겠습니다.” 서원하고 전쟁에 나가서 승리합니다. 개선가를 울리면서 입성하는데, 자신을 가장 먼저 맞이한 사람은 다름 아닌 무남독녀 외동딸이었습니다.
얼마나 기가 막힌 노릇입니까? 하나밖에 없는 외동딸을 제물로 바쳐야 한다니, 기가 찰 노릇입니다. 입다는 옷을 찢으면서 괴로워했습니다. 여기에서 생각할 점은 왜 입다가 처음부터 사람을 제물로 드릴 생각을 했을까 하는 점입니다. 아마도 개나 소가 마중 나올 것을 염두 해 두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사람을 제물로 드리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제물로 드리는 생각은 이방종교에 널리 퍼져 있는 생각입니다.

이방종교에서는 사람을 드리는 제사가 가장 큰 제사이고 가장 큰 제물입니다. 제주도에 이기풍 목사님이 첫선교사로 갔는데, 그 선교영화에 보면은 이러한 장면이 나옵니다. 이기풍 목사님이 어느 마을에 이르렀습니다.
밤이 늦었는데 어느 허름한 집에 불이 꺼지지 않고 여인네의 흐느끼는 울음이 밖으로 새어
나옵니다. 연유를 물으니 내일 날이 밝으면 1년에 한차례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데, 때묻지 않은 처녀를 제물로 바쳐야 하는데, 그 차례가 바로 자기 딸이라는 것입니다. 날이 밝으면 제물로 바쳐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밤새 울고 있습니다. 이기풍 목사님이 걱정 말라고 위로합니다.
드디어 날이 밝고 이 처녀를 꽁꽁 묶어서 들것에 실어서 커다란 동굴로 들어갑니다. 그 동굴 가운데, 제단 위에다 처녀를 눕혀 놓고는 재빠르게 다른 사람들은 다 빠져나갔습니다.
이기풍 목사님은 아무도 모르게 숨어 들어왔습니다, 바위 뒤에 숨어서 지켜보는데 커다란 구렁이가 나타나는 겁니다. 그 구렁이가 마을의 수호신이었던 것이죠, 혀를 낼름 거리면서 처녀에게 접근하여 한 입에 삼키려는 순간, 이기풍 목사님이 “멈춰라” 하시면서 구렁이와 한판 싸움을 붙었습니다. 구렁이가 목사님의 몸을 칭칭 감았습니다. 목사님은 뱀의 주둥이를 양손으로 잡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힘을 주옵소서 이 귀신을 물리치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힘을 주셨습니다. 뱀을 갈기갈기 찢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처녀를 구해서 내려옵니다. 그 어머니가 제주도에서 첫 교인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이방종교에서는 사람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최상의 제사였습니다.

이방종교에서는 사람을 제물로 드렸으나 하나님은 사람을 재물로 드리는 것을 절대로 허락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런데 입다는 자신의 실수로 말미암아 무남독녀 외동딸을 제물로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이 딸의 죽음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무런 죄도 없이 아버지의 실수로 죽임을 당한 딸, 그의 죽음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또 하나님은 왜 그 죽음을 막지 아니하셨을까요? “입다야, 중지해라”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것처럼 말씀하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여기에는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희생제물”입니다. 입다는 남의 생명을 하찮게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자기 딸이 아니었으면 좋았겠지만 그 누구도 함부로 다룰 수 있는 생명은 없습니다. 생명은 다 소중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사람이 제물이 되는 것을 원치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나 입다의 딸의 희생제물을 통하여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제물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입다의 딸의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 죄가 없는 입다의 딸이 죽은 것처럼, 아무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도 죽으셨습니다. 순전히 다른 사람 때문에 죽임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희생제물은 예수님 한 분만으로 족합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씨랜드 사건을 아실 것입니다. 23명의 어린이들이 새카만 숯으로 변했습니다. 기가막혀서 말이 안 나옵니다. 당시 어느 분이 PC통신에 이러한 글을 올려 놓았습니다 “사우나를 하다가 문득 죽은 어린이들이 떠올랐다. 땀 좀내는 것도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얼마나 뜨거운 고통을 당해야 죽을까? 그것도 어린 아가들이… 아이들이 얼마나 뜨거웠을까를 생각하니 사우나탕에서도 소름이 끼쳤다”는 것입니다.
사고현장에서 어느 부모는 한웅큼 뽑혀 있는 머리카락을 발견했습니다. 뜨거운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서 6살, 7살 먹은 아이들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뽑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났습니까? 원인이 무엇입니까? 모기향불이 원인입니까? 술 먹고 있었던 직원들이 원인입니까? 원인은 우리들의 탐욕, 부정과 부패 돈만 되면 무엇이든지 하려고 하는 우리들의 탐욕이 원인입니다. 천사 같은 아이들은 어른들의 탐욕 때문에 부정 때문에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해도 된다고 생각했던 어른들 때문에 순진한 23명의 어린아이들이 목숨을 잃었던 것입니다.
PC통신에 이러한 짤막한 글이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씨랜드에서 운명을 달리한 아기 천사님. 다음에 태어나실 때는 한국에 태어나지 마시구요 진실이 통하는 나라. 불법이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꼭 태어나세요.” 그들은 우리의 죄, 탐욕에 대한 희생제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상에서 부르짖는 예수님의 소리에 아브라함에게 “멈추어라!” 하는 지시를 천사들에게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냥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누구를 위해서요. 하나님을 위해서요?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들을 위해서 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들의 희생제물이셨습니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희생제물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충분합니다. 더 이상 우리에게는 희생 제물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희생제물이 되는 것을 원치 아니하십니다.

우리는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빚진 자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기 위해서 죽어간 선열들에게 빚졌습니다. 우리들의 탐욕과 죄 때문에 왜 죽어야 하는지 모르고 죽은 어린아이들에게 빚 졌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께 갚을 수 없는 빚을 졌습니다. 이 빚을 갚을 길 없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기를 원해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예배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 중에서 소와 양, 비둘기는 있는데 물고기가 없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나름대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물고기를 제물로 바치라고 하지 않으셨을까? 좀 엉뚱한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노아의 홍수 때 물고기는 죽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희생당하지 않았습니다. 제물은 흠이 없어야 합니다. 다른 동물들은 암수 두 쌍씩 들어가서 살아 나와서 다시 시작한 것입니다. 또 한가지는 물고기는 산채로 성소까지 가져오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있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바울이 표현한 ‘산 제사’ 너무 멋있는 말입니다. 죽어서 드릴 생각을 하기 이전에 지금 살아서 주님의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거룩한 길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며”(사 35:8)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하고”(계 4:8)

성경에서 하나님에 대해서 구별된 단어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는 그런 말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 사용된 말입니다. 예를 들면 “여호와, 아멘, 할렐루야”같은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한가지 더 배웁니다. ‘거룩’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말도 하나님에 의해서 사용된 말입니다. 우리말의 ‘거룩’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는 이 단어를 원문의 코데쉬(vd,qo)를 번역하여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코데쉬는 성소입니다. ‘거룩’이라는 말과 ‘성소’는 서로 다른 말이 아니라 하나의 의미이며 같은 뜻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시내산에 올라갔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 고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서 있던 시내산의 땅이 금잔디를 깔아놓은 땅이 아닙니다. 그곳 역시 다른 땅과 다르지 않습니다. 돌이 있고, 바람에 날리는 먼지 같은 흙이 덮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곳이 거룩한 곳입니다. 돌과 흙이 있는 땅 때문이 아닙니다. 그곳이 시내산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내가 선 곳”, 하나님이 이 땅을 밟고 서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곳에서 사람을 만난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곳, 그곳이 거룩한 곳입니다. 그곳이 성소입니다.

사무엘상 5-6장에 보면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아 블레셋 에벤에셀 이라는 곳으로 가져갑니다. 그리고 어찌해야 모르니까 자기들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서 별 짓을 다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이 별 짓 다해야 안됩니다. 하나님의 것을 빼앗아가서 될 일이 없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까닭에 그들을 치사 (오만) 칠십 명을 죽이신지라”(삼상 6:19) 그리고 그들이 스스로 말하기를 “벧세메스 사람들이 이르되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를 우리에게서 누구에게로 올라가시게 할까 하고” 한탄합니다. 무식한 블레셋 사람들도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무서움을 안 것입니다.
구약도 잘 보면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 법궤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법궤 없는 예루살렘은 하나님 없는 예루살렘입니다.

거룩한 길이란 성전으로 가는 길이요,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이 세상의 그 모든 길이 아무리 좋아도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길보다 좋을 순 없습니다. 그 길이 대로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길에 융단을 깔아 놓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길만이 거룩한 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 길은 좁은 길이라고 했습니다. “주의 인자하심으로 주께서 구속하신 백성을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거룩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출 15:13) 여기에 보면 우리의 힘이 아닙니다. 인간의 힘이 아닙니다. 주의 힘이 아니면 우리가 거룩한 성소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런데 본문의 “거기에 대로가 있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대로(마슬룰)에 있어서 다음 두 가지를 염두 해 두어야 합니다.

첫째는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시기적인 문제입니다. 이 대로가 언제 있게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본분 다음에 나오는 9-10절에 보면 “9 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10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
본문의 장은 택한 백성이 누릴 구원의 축복에 대해서, 또 장차 임할 메시야의 구원에 대한 예언적 성격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오라 하실 때, 우리의 수고가 끝날 때, 이러한 길을 예비하신 다는 것입니다.

둘째, ‘대로(마슬룰)은 일종의 공공도로를 말합니다. 나라에서 닦아놓은 도로를 국도라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닦아 놓으신 길입니다. 7절에 보면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 뜨거운 사막이었습니다. 메마른 땅이었습니다. 여우나 늑대가 다니던 길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길이 될 수 없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곳에 길을 내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길을 가리켜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히 10:20) 라고 합니다.

역사상 미국 교계에서 이적과 기적을 제일 많이 체험하고 주님과 함께 사역한 유명한 분이 있습니다. 캐드린 쿨만(Kathryn Kuhlman)입니다. 복음이 한 나라에 들어가면 반드시 이런 기적을 하나님은 보여주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부흥과 기적의 시대가 있었습니다.
캐드린 쿨만은 여자입니다. 평신도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를 그냥 여사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캐나다 벤쿠버 집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4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 경기장에서 열렸는데 캐나다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경기장에는 휠체어를 타고온 환자, 들것에 실려온 환자, 목발을 집고 온 사람들로 가득 찼고 기적적으로 신유의 은사를 체험하고 병 나은 사람들이 단 위로 올라와 쿨만 여사에게 안수 받고 간증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쿨만 여사에게 허리를 굽실거리며 “쿨만 여사님 감사합니다. 나의 이 병을 고쳐주시니 어찌 감사해야할지… 당신은 나의 은인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그러자 쿨만 여사는 펄쩍 뛰다 못해 화까지 버럭 내면서, “뭐라구요? 내가 당신 병을 고쳐 주었다고요?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계집종에 불과합니다. 당신의 병은 내가 고쳐준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의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그리스도의 중보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고쳐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에게 감사한다고 합니까? 큰일 날 소리입니다. 모든 영광을 주 하나님께 돌리십시오.” 라고 말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과 대화하는 장면에서 예배할 장소에 대해서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요 4:21)라고 하셨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과 오랜 갈등으로 예루살렘에 가서 예배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심산에 따로 제단을 만들어 놓고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예배의 장소가 그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곳이 거룩한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곳이 성전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 2장에 성전정화사건이 나옵니다. 공관복음서에는 성전정화사건이 예수님이 마지막 유월절을 제자들과 마치고 예루살렘성전에 들어가셨을 때 나타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2장에 이 사건이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공관복음과 달리 사역초기에 성전정화사건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놓고 학자들간에 의견이 많습니다. 하나의 사건인데 요한이 사역초기에 기록해 놓았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성전 정화사건이 두 번 있었다고 보는 겁니다. 반대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사역 초기부터 이렇게 부담스러운 일을 행하시지 않았을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저는 두 번 있었던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어떤 것이든 더 중요한 것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요 2:15),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행패부리는 것쯤으로 보았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럼 너는 무엇을, 무슨 표적을 보여줄 수 있느냐?(요 2:18)고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예수님이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그러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20),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21) 예수 그리스도가 성전이 되셨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거룩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은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이십니다.
둘째는 예배의 대상이 됩니다. 이제 예배의 장소는 사라졌습니다. 이 땅위에 거룩한 장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심산도 예루살렘도 메카도 아닙니다. 이 땅에 거룩한 장소란 없습니다.

이 땅에 성전이 있었던 시대에는 그 성전에 가서 하나님을 예배하러 가는 길이 거룩한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땅에 거룩한 성전이 없으니 ‘거룩한 길이’ 어떤 길이겠습니까? 하나는 찾았습니다. 예배의 장소가 아니라 예배의 대상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정리합시다. ‘거룩한 길’이란 무엇입니까? 다름 아닌 예수님을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그러면 다시 질문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어디 가서 만납니까?

대통령을 만나려면 청와대로 가야합니다. 그래서 청와대 주변을 어슬렁거립니다.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대통령을 만나려는 것입니다. 청와대 담 너머로 고개를 쳐든 채 뛰어봅니다. 어쩌다 대통령이 나오면 손이라도 흔들어 줄까 기대해 보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급기야 나를 수상하게 여긴 경비가 쫓아옵니다. 나는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릅니다. 그냥 무서워서 도망을 갑니다. 청와대 경비에게 잡혔습니다. 내 사정을 이야기하고 대통을 만나려 했지만 그분은 너무 바빠서 나 같은 자를 만날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대통령을 어떻게 만납니까? 비서실에 대통령면담신청을 하세요?” 그러면서 경비는 어깨를 으쓱해 보입니다. “그리고요?”, “기다리세요?”, “언제까지요?”, “연락이 갈 때까지요?”, “연락이 안 오면이요?” “그럼 만날 수 없습니다.” 초청장이 없으면 대통령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루를 소비했지만 대통령을 만날 수 없다는 말만 듣고 돌아옵니다. 대통령 쪽에서 나를 먼저 불러주지 않는 한 대통령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만 확인했습니다. 청와대 담이 가로막혀 대통령을 만날 수 없습니다. 우리 죄인과 하나님 사이에는 그보다 더 높은 더 두꺼운 담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도저히 부수고 들어갈 수도 넘어갈 수도 없는 장벽입니다.
아담은 죄를 짓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서 땅을 갈면서, 추위와 더위에 떨면서 고통스러울 때마다 에덴동산이 그리웠을 것입니다. 그 때마다 그곳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아니 어떤 때는 그 주위를 서성거리며 들어갈 수 없나 엿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동산을 천사들로 하여금 불과 화염으로 지키게 하셨습니다. 잘못하면 타죽게 생겼습니다.
왜 못 들어갑니까? “깨끗하지 못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배신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사탄의 말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계신 거룩한 동산에 못 들어갑니다. 그러나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담이 무너졌습니다. 사막이 강이 될 수 없을 것 같았지만 변했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엡 2:14) 라고 하셨습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히 2:11) 대통령의 식구들은 청와대 들어가는데 초청장도 필요 없습니다.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곳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십자가 위에서만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아는 한 다른 길은 없습니다. 우리가 가야할 거룩한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힘이 듭니다. 땀이 납니다. 때로는 피도 납니다. 그래도 갑시다. 그 길은 하나님이 닦아 놓으신 공의의 도로입니다. 내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길, 이 거룩한 길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오직 진실만을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행 3:15)

이번 주는 서은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이 방학하여 서은이하고 지낼 시간이 있어서 참 기뻤습니다. 화요일인가요 옥수수를 쪄서 먹고 “집에 가져갈래, 몇 개 줄까?”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언니 캠프에서 돌아오면 하나 주고 싶다.” 그리고 또 “아빠는 많이 먹는데…”그러는 거예요. 서은이가 한 이 말에는 한 점 거짓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진실을 원하십니다. 심지어는 생각나지도 않는 죄를 억지로 짜내서 회개하는 것도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런 회개자체가 거짓일 수 있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죄인인줄 아세요.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늘 자신을 위해서라만 책임지기보다는 거짓말할 준비가 되어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몇 일 전에 CGNTV에서 인터넷에 관한 녹화를 했습니다. 저에게 질문하기를 “컴퓨터의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을 말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컴퓨터도 하나의 도구인데 예전 도구에 비해서 그 도구의 힘이 엄청나게 좋아진 것입니다. 칼도 보통 칼이 아닌 겁니다. 예전의 칼로는 많은 사람을 죽이거나 다치게 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컴퓨터는 잘 못 사용하면 엄청난 피해를 입히고 사람을 죽이기까지 합니다.” 그랬더니 사회자가 “사람을 죽여요?” 그러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을 죽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쓰는 악성 댓 글 하나 때문에 자살한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살리지만 악한 죄인들의 말은 사람을 죽입니다. 사실을 모른 채 남이 하니까 따라서 하는 것은 증인이 할 일이 아닙니다. 그것도 죄입니다.”
김포공항에 전화해서 비행기 폭파하겠다고 거짓말한 미성년자에게 그 피해액을 부담하라고 법원은 판결했습니다. 그 거짓말로 비행기가 제 시간에 이륙하지 못하고 검사하고 불안하게 하고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히는지 모릅니다. 거짓에 속아본 사람들은 정말 기분이 나쁠 뿐만 아니라 배신감을 가지게 됩니다. 최근에 중국 다녀온 분이 장뇌삼이라고 해서 보기 좋은 놈으로 사왔는데 집에 와서 보니까 본드로 붙인 것이 물러서 다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증인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이 처음에 하는 일이 있습니다. 선서입니다. “진실만을 말할 것을 재판관과 여러 증인들 앞에서 선서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도 증인입니다. 우리도 서약합니다. 법정의 증인처럼 우리도 진실만을 말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판사석은 비어있고 판사는 보이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를 지켜보는 배심원단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아닌 예수님의 명령으로 증인으로 소환되었습니다(행 1:8).
우리는 모두 증인입니다. 법정의 증인처럼 우리도 증언해야 합니다. 우리가 보고들은 바를 말해야 합니다. 진실하게 말해야 합니다. 우리의 본분은 진실을 오도하거나 부풀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본분은 진실을 말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법정인 증인과 그리스도인의 증인이 한가지 다른 것이 있습니다. 법정의 증인은 결국은 증인 석에서 내려오지만 그리스도인의 증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주장이 언제나 심리 중이기 때문에 법정은 영원히 개회 상태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거짓이란 선택 가능한 대안이 아닙니다.

거짓이 없으신 예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놀라운 평가중의 하나는 그분에게는 거짓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다고 말합니다.(사 53:9)
그러나 우리는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오히려 제일 큰 거짓말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진실만을 말씀하셨고 거짓 이야기를 만들어 내거나 부풀린 일이 한번도 없으십니다. 진실을 외면한 일도 없으시며, 그분의 입술에 속이는 말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을 시작하실 때 “아멘(진실)”으로 시작하셨습니다.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계 1:5) 라고 요한은 증언합니다. 예수님이 충성된 증인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우리가 예수님처럼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를 아들의 형상대로 빚으시는 것입니다(롬 8:28).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정직을 줄이거나 최소화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깨끗이 없애버리시기를 원하십니다.
“거짓을 행하는 자는 내 집 안에 거주하지 못하며 거짓말하는 자는 내 목전에 서지 못하리로다”(시 101:7) 거짓을 말하고 행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보다 심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집에서 살수도 없고 결국 하나님도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윤리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간단합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주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진실을 사랑하시고 거짓을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고전 6:9에서 “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진실이 얼마나 중요한지 명백해 졌습니다. 불의로는 도저히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진실하게 행하는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잠 12:22)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히 6:18) 하나님이 거짓말을 안하시겠다거나 안하기로 작정하셨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디도서 1:2에도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라고 똑같이 증언합니다.
그러나 사탄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요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고 대적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담 이후에 죄와 곧 거짓 가운데 얼마나 노출되어 있고 거짓말속에서 살아가는지 하나님에 대해서도 이렇게 질문하기 일수입니다.
“왜 하나님은 정직을 요구하시는가?” 이렇게 질문하는 인간이 얼마나 거짓에 익숙해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질문을 이렇게 바꿔야 합니다. “왜 우리는 거짓을 용인하는가?” 예례미야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 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부정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굳이 연구 조사 없어도 우리는 그 답을 알고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하얀 거짓말”이 우리를 또 속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진실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실을 말했다가 오히려 바보가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어떤 남자가 여행 중에 있는 아내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우리나라 남자는 아닙니다). “내 고양이는 어때요?” 아내가 물었습니다. “죽었소.” 그랬더니 아내가 “여보. 그렇게까지 솔직할 것 없잖아요. 왜 좀더 시간을 두고 조금씩 알려주지 않았어요? 여행 잡쳤잖아요.”그럽니다. 남편이 “무슨 말이오.” 그랬더니 아내가 하는 말이 “처음에 고양이가 지붕에만 있었다고 말했어도 되잖아요. 그러다 내가 파리에서 전화했을 때 고양이 몸놀림이 둔해졌다고 하고, 런던에서 전화했을 때 고양이가 아프다고 말하고, 뉴욕에 도착했을 때 고양이가 병원 갔다고 하고, 그러다 내가 집에 도착하면 죽었다고 말하면 되잖아요.”
남편은 이런 원칙은 금시초문이었기도 하지만 아내의 말을 늘 귀담아 듣고 배울 생각이었습니다. “알았소. 다음 번에 잘 해보겠소.” 그리고 나서는 아내는 “그건 그렇고 우리 엄마는 어때요?” 아내가 물었습니다. 남편은 한참 생각한 후에 “음… 장모님은 지금 지붕에 계시다오.”그랬다는 겁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는 거짓에 익숙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진실이 어색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 있고 사탄에게 더 가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끔찍합니다. 성도도 교회도 거짓일색이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신약시대는 구약시대와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즉결심판이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가라지 뽑다가 알곡 다칠까봐 이제는 추수 때까지 놔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없는 것이 아니라 유예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유예기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이 기간이 축복인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즉각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빨리 거짓에서 진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신약시대에 하나님의 즉결 심판이 유일하게 나오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사도행전 5:1-10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 땅 판 돈을 모두 드리겠다고 약속하고 돈을 보자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반을 감추고 반만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거짓에 노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사람들이 보는 자리에서 죽이셨습니다. 이 일에 대해서 베드로는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행 5:11)고 증언합니다.

오래 전 음악과는 전혀 무관한 남자가 속임수를 써서 중국 황제의 악단에 들어갔습니다. 연습이나 연주가 있을 때마다 그는 피리를 입술에 대고 부는 시늉을 냈습니다. 물론 소리는 전혀 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랏돈을 먹으며 잘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황제가 연주가마다 돌아가며 독주를 청했습니다. 피리 부는 남자는 눈앞에 캄캄했습니다. 이제 와서 피리를 배울 시간은 없고, 꾀병도 내어 보았지만 궁중의사는 속지 않았습니다. 독주가 있던 날 이 거짓말쟁이는 독약을 먹고 자살했습니다. 이후에 이 사람의 자살을 설명하는 말이 “그 사람은 책임을 거부했다”로 굳어졌습니다. 거짓의 치료 책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책임에 직면하는 것입니다.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책임을 회피하지 마세요.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처분을 조용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혔느니라” 하십니다. 주님께 진실을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증인이 참 무섭습니다. 증인에 죽고, 증인에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증죄 또한 큰 것입니다. “너는 거짓된 풍설을 퍼뜨리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위증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출 23:1) 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 증인이 타인에 대해서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적용됩니다. 사사기 11장에 보면 입다 사사가 나옵니다. 암몬하고 이스라엘하고 치열한 전쟁이 있을 때입니다. “30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 주시면 31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삿 11:30-31) 서원 했습니다. 하나님은 입다에게 승리를 안겨 주셨습니다. 그런데 전쟁에서이기고 돌아올 때 그의 무남독녀인 딸이 제일 처음에 마중을 나왔습니다(34). 입다는 옷을 찢으며 통곡했지만 그 일을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었습니다(35). ‘입다’는 입을 다물었어야 하는데 함부로 입을 연 것이 잘못입니다.
욥이 증거 합니다.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중보자가 높은 데 계시니라” 욥16:19)
바울도 증거 합니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롬 1:9) 우리가 예수님의 증인이 될 때 하나님은 나의 증인이 되어 주십니다.
“보이는 것이 진실만은 아니다 사진은 진실만을 전달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동시에 사진이 보여주는 것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곽윤섭)
음수에 대해서, 실제 보이지 않아 서양에서 17세기까지 불합리한 수로 여겼습니다. 데카르트(1595-1650) 이전의 서양 수학자들은 음수를 가공의 수, 불합리한 수, 가짜의 수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음수가 존재할 수 없는 이유는 자연수는 보이는데 음수는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연수는 예를 들어 양이 세 마리, 사과가 3개 그러면 다 보입니다. 이것을 자연수라 합니다. 그러나 음수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우리 육안의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안 계신 것이 아닙니다.

어떤 할머님이 젊어서 남편이 먼저 돌아가셔서 혼자 되셨는데 결혼을 안하고 혼자 사셨습니다. 할머님에게 “왜 재혼하지 않고 혼자 사셨어요?” 묻는 말에 할머님은 “언젠가 기차를 타고 오는데 시골에서 서울 올 때까지 남편이 두 손을 꼭 잡아서 불편하고 창피해서 손놓으라고 했는데 그 말에도 남편은 잡은 손을 놓아주지 않았어”하시는 겁니다. “예 그리고요.” 그랬더니 “그것 뿐이야!, 두 손을 꼭 잡았던 할아버지의 그 손이 지금도 나를 잡고있는 것 같아서 다른 사람에게 줄 수가 없었지?” 그러시는 겁니다. 주님은 무릎은 꿇은 자세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주님이 잡아주시고 씻어주신 발을 더럽히지 않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