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에서 교만한 자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 화 있을진저 시온에서 교만한 자와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이 든든한 자 곧 백성들의 머리인 지도자들이여 이스라엘 집이 그들을 따르는도다 2 너희는 갈레로 건너가 보고 거기에서 큰 하맛으로 가고 또 블레셋 사람의 가드로 내려가라 너희가 이 나라들보다 나으냐 그 영토가 너희 영토보다 넓으냐 3 너희는 흉한 날이 멀다 하여 포악한 자리로 가까워지게 하고 4 상아 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 켜며 양 떼에서 어린 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잡아서 먹고 5 비파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 6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요셉의 환난에 대하여는 근심하지 아니하는 자로다”(암 6:1-6)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노아의 아들들은 홍수 이후에 또 다시 홍수로 집이 물에 잠기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높은 곳에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흘러도 홍수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자 서서히 평야지대로 내려오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홍수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지고 하나님을 대항하는 바벨탑을 쌓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얼마동안 우리를 긴장하게 만들고 모든 일에 조심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긴장은 풀어지고 점점 나태해져 안일한 상황에 이르고 맙니다. 이것은 우리 안에 있는 뿌리깊은 죄 성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하나님은 우리를 쉬게 해 주기 위해서 안식일과 안식년 제도를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짐은 무겁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짐은 가볍습니다. 내 방법으로 살아가려면 힘이 듭니다. 그러나 주님께 맡기고 살면 편안합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안일함은 하나님이 주시는 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일한 다음에 편히 쉬는 그런 안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베짱이 같은 나태함을 말합니다.

두 종류의 사람들
본문 1절에 보면 화를 당하게 두 종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첫째는 “시온에서 교만한 자”입니다. 둘째는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이 든든한 자”입니다.

“시온에서 교만한 자”는 남쪽 유대 왕국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시온의 사람들, 남쪽 유대인은 성전이 자기들 쪽에 있고, 자기들은 하나님의 선민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항상 지켜 주신다고 믿고 있는 겁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무조건 성전이 자기들 쪽에 있으니 그 성전이 지켜준다는 교만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시온에서 교만한 자”란 오늘날 우리 식으로 말하면 “교회에서 교만한 자”입니다. 나는 모태신앙이고 그래도 교회에 빠지지 않고 출석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구원에 확신을 가지는 믿음은 좋습니다. 그러나 교만은 안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넘어질까 조심해야 합니다.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이 든든한 자”는 이스라엘의 수도는 사마리아입니다. 남 유다 보다는 4배 이상은 땅이 큽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이 없기 때문에 따로 사마리아 산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예루살렘은 아니지만 마찬가지로 교만합니다. 제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마음이 든든한 겁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을 이런 식으로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마치 이방 신에게 절하는 것과 같이 교회에 나오는 겁니다. 내가 교회에 나왔기 때문에 나와 우리 가족이 무사할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입니다. 이것이 타락한 백성들의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이웃 나라를 통해 배워야 합니다.
본문 2절 “너희는 갈레로 건너가 보고 거기에서 큰 하맛으로 가고 또 블레셋 사람의 가드로 내려가라 너희가 이 나라들보다 나으냐 그 영토가 너희 영토보다 넓으냐”라고 하십니다. 여기에 나오는 지명들은 이스라엘의 변방입니다. 이 지역들은 공통적으로 변방일 뿐만 아니라 보잘것없었습니다. 이 성읍들에 가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지금 얼마나 하나님의 축복 속에 살고 있는지를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아마 저와 여러분 뒤로 우리보다 가난한 자를 세계인 중에서 줄 세운다면 끝이 없을 겁니다.

대한민국은 한국전쟁이(1950.6.25-1953.7.27) 끝난 당시 GNP 50$이었던 나라입니다. 현재 아프리카 최 극빈 나라가 100$-200$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당시 세계에서 제일 못사는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GDP규모(2005)는 세계 12이며 1인당 국민총소득은 16,291$로 세계 29위입니다. 3면이 바다인 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조선사업은 세계 1위를 몇 년째 유지하고 있습니다. 미국하고 FTA(자유무역협정)을 맺을 만큼 성장한 나라입니다. 대한민국이 2010년 11월 5차 G20 정상회의 개최지로 확정됐었습니다. 한때 G8이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80%를 차지했으나 중국, 브라질, 인도, 한국 등 신흥 경제국가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지금은 50%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G20은 전 세계 GDP의 85%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깜짝 놀랄 비약적인 발전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저희 집에 전기 불이 들어오지 않아 등잔을 키고 자랐습니다. 불과 40-50년 전 이야기입니다.

이 당시의 인도차이나 국가들은 아시아에서 일본과 더불어 제일 잘 사는 나라들이었습니다. 태국인들은 스스로 말하기를 70년대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꾸준히 성장은 했지만 우리처럼 성장한 것은 아닙니다. 대한민국 식 성장은 어떻게 보면 비상식적인 성장을 한 것입니다. 우리가 한국전쟁을 치르는 동안 제1회 아시안 게임을 인도에서 개최하였습니다. 1954년에 필리핀 마닐라에서 개최되었고, 1962년에 인도네시아, 태국은 무려 세 번에 걸쳐(1966. 1970, 1978) 아시안 게임을 개최했습니다. 이 당시 우리나라는 먹고살기도 바빠서 이런 국제대회를 치르는 것은 꿈도 못 꾸었습니다. 국제연합(UN) 반기문 사무총장을 제8대(현재)로 배출했지만 미얀마는 아시아 최초로 제3대 우 탄트 유엔사무총장을 1961년에 배출한 나라입니다. 당시 싱가포르 이광요 총리는 1965년 말레이시아로부터 독립할 때 자국민들에게 ‘버마 만큼 잘 살게 해 주겠다’고 역설할 정도였습니다. 축구 경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미얀마는 1966년 제5회 방콕 아시안 게임에서 우승을 했고 준우승은 이란이며 한국은 조 예선에서 탈락했습니다. 1966년부터 1973년 사이에 한국과 미얀마가 치른 13번의 A매치에서 한국 대표팀은 고작 2번 승리했고 무승부가 5번이며 6번 패배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축구에서도 우리는 미얀마는 경계대상이 아닙니다. 축구에서는 브라질하고 하려고 합니다. IT와 경제에서는 최강국들과 겨루고 있습니다.
열심히 나라를 위해 기도한 덕분입니다. 하나님이 마치 이스라엘을 축복해 주셔서 잘 살게 만들어 주셨던 것처럼 우리 대한민국을 잘 살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 나라 5000년 역사이래 지금처럼 잘 살던 시대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있을 때 지켜야 합니다.
본문 4절에 “상아 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 켜며 양 떼에서 어린 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잡아서 먹고”라고 말합니다. 아직 소가 우리 안에 있을 때 지켜야 합니다. 한 때 못살았다가 갑자기 잘 살게되니 우리 자신도 놀랐지만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우리 자신들이 혼란을 겪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가난에 한이 맺힌 분들이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탈북한 분이 말하는데 북한에서는 당 간부 집에나 소파가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그렇게 부러웠답니다. 남한에 내려와 정착하고 작은 아파트를 나라에서 공급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아파트에 이사가는 분들이 버리고 가는 소파가 수시로 나오는 겁니다. 북한에 있을 때 제일 하고 싶은 것 중의 하나가 소파 있는 집에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버린 소파마다 집에 가져다 놓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온 집안이 소파로 가득 찼습니다. 그 때부터 소파를 도로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생각을 정리할 시점이 되었습니다. 군부가 정치를 할 때 우리는 자유를 찾기 위해서 거리로 나갔습니다. 때로는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나라를 위해 함께 생각할 때입니다. 무슨 어린아이들처럼 자기 마음에만 안 들면 나 놀기 싫다고 장난감 팽개치고 나가는 어린아이처럼 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내 돈으로 좋은 침대를 사고, 내가 키우는 양떼와 소떼에서 살찐 것을 잡아먹는데 왜 그것이 왜 나쁩니까?”라고 하실 지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그것을 옳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사치와 방종을 일삼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내 것 가지고 내 멋대로 하는데 무슨 상관이냐?”고 말하면 안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생각이 없지 않습니까? 부자로 사는 것이 나쁘지 않죠. 여러분들이 정말로 다 부자로 사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늘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재물을 사용할 줄 아는 진정한 부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말에 ‘허벌’이란 말이 있습니다. ‘몹시 굶주려 있거나 궁해 체면 없이 함부로 먹거나 덤비는 것’을 말합니다. 권력에 허벌하면 안됩니다. 돈에 허벌하면 안됩니다. 허벌나게 사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몇 일전 제가 태어난 동네에서 병원(마석기독병원)을 하시는 원장님을 만났습니다. 아주 큰 병원은 아니지만 그래도 몇 십 명의 직원이 있는 병원입니다. 이 원장님은 병원도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주 이름도 기독이라는 말을 넣었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가진 것을 나누기 위해 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병원 자체보다는 선교에 관심이 있으신 것 같았습니다. 이번에는 저를 통해서 알게된 선교지로 봉사를 나가는데 이 지역이 이슬람권입니다. 자신이 이슬람을 아시는 것이 없으니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슬람에서 하는 라마단(금식)을 하시기로 작정하고 그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낮에는 물 한 모금도 안 마시고 금식을 하고 계셨습니다. 저도 갔다가 밥도 못 얻어 먹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슬람이 강력한 이유를 알겠다고 하셨습니다. 실제로 이슬람은 이 라마단 기간을 통해서 단합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편안한 상아 침대에서 안일한 시간을 보낼 때 우리의 적은 칼을 갈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일어나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허리띠를 다시 매야 합니다. 예수를 붙들어야 합니다. 깨어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자기 향락에 빠져 다가올 심판에 무관심한 사람들입니다.
본문 5절 “비파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라고 하십니다.
“지절거리며”에 해당하는 원어는 ‘하포르팀’입니다. 부숴져 떨어져 나간 것을 말합니다. 의미가 전혀 없는, 자신도 모르는 노래를 말합니다. 다윗은 사실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지는 않았습니다. 다윗은 악기를 통해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삼하 23:1, 대상 23:5, 대하 29:26). 그러나 본문은 자기들의 잘못된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위한 악기를 만듭니다. 자기를 즐겁게 하기 위한 악기를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신앙에 빠지면 안됩니다. 복음을 나만을 기쁘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6절은 “요셉의 환란을 인하여는 근심치 아니하는 자로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일이 관심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사치와 방종에 빠져 있으면서 다가올 재앙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결국 자신들의 죄 때문에 얼마 안 있으면 나라를 빼앗기고 망하는데도 지금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또 한 선교사님을 만났습니다. 소록도 교회에서 10년 목회 하시고 지금은 필리핀 나환자촌에서 선교하시는 김명환 선교사님입니다. 소록도에 들어갈 때 1,200여명의 성도들과 함께 목회를 했는데 10년 동안 800명의 장례를 치루었답니다. 4-5일 마다 한번씩 장례를 치룬 것이 됩니다. 늘 죽음 곁에 있는 겁니다.
부흥 강사님을 모셔서 설교하는데 여름에는 냄새가 너무 나서 그분들이 설교를 못하시고 잠깐 나갔다 올 깨하고 나가서 못 들어 오셨답니다.
김 목사님은 7년째 되는 어느 날 새벽 기도회시간에 “하나님! 저도 나환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라는 기도가 터져 나오는데 소록도 성도들이 그 기도 소리를 듣고서 “목사님! 목사님도 이제 우리와 한 식구가 되었습니다.” 라고 하면서 진짜 자유자가 되었고 그 때부터 목사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알아듣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받아들이는 것이다”(박완서)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일본에서 소록도 주민에게 피해 보상하여 돈이 들어오면서 교회를 떠났습니다. 10년의 소록도 경험으로 중국으로 가 나환자를 돌보다 필리핀으로 갔습니다. 무더위 속에서 썩어 가는 나환자들과 함께 하는 것이 쉽지 않고 외로웠습니다. 그래서 동생을 불러들였습니다. 동생은 성결교 목사입니다. 그러다 보니 부모님을 책임질 사람이 없어 부모님을 또 필리핀 나환자촌으로 모셔갔습니다.
아버님은 서울에서 평생 경찰생활만 하셔서 80평생 남에게 얻어만 먹었지 주면서 살지를 않았습니다. 서울에서 아무 술집에나 들어가서 뭐든지 먹고 나오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런 아버님이 한국에 있는 5천만원짜리 집 팔아서 필리핀 나환자촌에 교회를 세우고 유치원을 세운 것입니다.
작년에 어머님이 돌아가셨는데 어머님의 유언대로 필리핀 나환자촌에 묻어드렸답니다. 그리고 유언하시기를 두 아들에게 “너희들이 천국에서 만날 때, 마지막까지도 나병환자를 위해 선교하다 왔다고 하면 좋겠다”하고 돌아가셨답니다.

“게으른 자는 말하기를 사자가 밖에 있은즉 내가 나가면 거리에서 찢기겠다 하느니라”(잠 22:13)고 합니다. 겁나면 못나갑니다. 어느 시인은 “하나님은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장영희)고 했습니다.

말은 태어나자마자 본능적으로 뛰려고 하고, 또 실제로 달릴 수 있는 아프리카 얼룩말은 초원을 뛸 때만큼은 표정이 환해진답니다. 심장이 터질 듯 ‘헉헉’대면서도 표정은 늘 밝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산다는 것은 얼룩말의 본능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때로는 힘이 들지만 영혼의 기쁨이 넘치는 것입니다.
집안에서 나무를 키우는 분들은 잘 압니다. 나무는 언제나 빛을 따라 가지를 뻗습니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마 4:16)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빛이십니다(요 1:5).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요 3:21)라고 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겁내지 마세요. 주님이 계시잖아요. 빛으로 나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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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행 1:11)

기네스북에 올랐던 프랑스의 한 할머니는 122세에 돌아가셨습니다. 이 할머니가 90세가 되었을 때, 이웃에 사는 47세 된 한 분이 할머니와 계약을 하나 맺었는데요. 매달 2,500프랑을 드릴 테니 돌아가시면 할머니 집을 자신에게 넘겨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한국 돈으로 매달 40만원인데, 할머니가 1년 안에 돌아가시면 400만원에 집을 얻는 것이고, 2년을 더 사신다고 해도 얼마 안되니까 집 한 채를 그저 줍는다고 생각을 한 겁니다. 그런데 할머니가 100세가 되어도 안 돌아가시고, 110세가 되어도 돌아가실 기미가 없는 겁니다. 120세가 되어도 안 돌아가시고, 그러다가 이웃집 양반이 먼저 죽었습니다. 30년을 기다리다가 돈만 들이고, 77세에 먼저 죽었습니다. 물론 할머니도 이웃 양반이 죽은 2년 후에 돌아가셨습니다.

한 사람의 생명이 언제까지 살게될지도 우리는 모릅니다. 하물며 주님도 모르신다고 한 세상 심판 날을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겁도 없이 자신이 안다고 한 사람들이 줄줄이 나왔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도 뒤질 소냐 한몫 했습니다.
재림의 시기를 예언했다 실패한 사람들 때문에 재림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 부담스럽습니다. 마치 통일이라는 말을 해야 하는데 통일교 때문에 이 말을 기피하는 것과 같습니다. 좋은 말을 이단이 장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의미를 훼손하고 왜곡시켜버렸습니다. 사탄의 전략인지 모릅니다.
저는 그런 이단의 재림을 논하려는 것이 아니고 오늘 본문을 통해서 다시 오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을 생각하고 오늘 우리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마 24:37, 눅 17:26) 또한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눅 17: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재림을 말씀하시면서 구약성경의 커다란 두 개의 심판 사건과 연결시키셨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두 개의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을 재림하실 때 심판을 가지고 오신다는 것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그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계 14:7) 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심판’을 동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결정되었습니다.

우리는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확실한 시대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미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서 심판하실 것을 확실히 하고 계십니다. 노아의 홍수 때 하나님께서 왜 이 세상을 심판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6:5-7에 보면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실망이 얼마나 크셨으면 다 죽여버리기로 작정하셨겠습니까? 롯의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창 18:20)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의 모습은 어떠하겠습니까?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눅 17:30)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계속해서 코웃음을 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우습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겁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8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9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 1:8-9)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단들처럼 재림의 날짜는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역사가 점차적으로 심판의 정점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오실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왜 다시 오십니까? 심판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이미 결정된 사항입니다.

이제 우리의 믿음은 진실 되어야 합니다. 허세를 부릴만한 여우가 없습니다. 한국말에는 미묘한 느낌을 담고 있는 말들이 많습니다. 당장 쓸 작은 자잘한 물건을 살 때는 그냥 ‘산다’고 하는데 그것이 좀 크거나 여축성을 띤 것이면 ‘들여놓는다’고 합니다. 같은 쌀이라도 한 됫박의 쌀은 산다고 하고 한 가마는 들여놓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오래 사용할 물건을 살 때는 ‘장만한다’고 합니다. 장만이라고 하면 그 집안의 재산목록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런데 물건과 달리 자가용을 사게 되면 ‘굴린다’고 합니다. 바퀴가 달렸으니 당연히 굴리는 것이겠지만 단순히 그런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벤츠를 굴리고 케딜락을 굴립니다. 단순히 비싼 차를 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필요에 의해 타는 것이 아니라, 허세를 위해 굴리는 겁니다. 우리의 믿음도 허세를 위해 굴리는 믿음이 되면 안됩니다. “복음은 허세를 위해 굴리지 않는, 복음을 위해 굴리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주님 앞에 허세도 허풍도 가식도 모두 내려놓아야 합니다. “…자기 문을 높이는 자는 파괴를 구하는 자니라”(잠 17:19) 우리나라 조선시대 집들은 대문을 크게 만들었습니다. 유럽의 집들이 굴뚝을 크게 만든 것하고 대조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선포되었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심판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긍휼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노아의 시대에도 하나님의 긍흉은 선포되었습니다. “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벧후 2:5)라고 하셨습니다. 노아는 방주만 지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전파했습니다. 롯의 때에도 천사가 하나님의 천사가 구출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한국전쟁 때 제1한강교 폭파할 때에 전단지를 뿌렸습니다. 폭파할 것이니 건너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무시하고 건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될 때도 경고하는 전단지가 뿌려졌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믿지 않고 있다가 죽은 사람이 많습니다.
세상 전쟁에도 최소한의 율이 있는 것입니다. 한국은 오랜 기간 권위주위에 눌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권위주의를 깨버려야 한다는 단순한 생각에 모든 권위를 깨버렸습니다. 그 결과 우리사회는 엉뚱한 결과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윗사람에 대한 존경심은 사라지고 청소년들은 대화 자체가 거의 욕으로 소통되고 있습니다. 사고 싶은 것은 많지만 땀흘려 돈을 벌려 고는 하지 않습니다. 요행만 바랍니다. 자기 뜻대로 안 되는 것이 많으니까 자연스럽게 사회에 대한 불만만 싸여갑니다. 한번은 청소년들이 대화를 나누는 것을 들었습니다. 계속해서 “담탱이” 어쩌고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담을 타고 자라는 식물인지 알았습니다. 한참을 들으니 자기 담임 선생님을 두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선생님이 존경할 만한 것이 있어야지요?”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할 때 그 이유를 말하지 않습니다. 가끔 훌륭한 부모님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아도 부모에게는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엡 6:1) 이것이 당위성이며 최소한의 율입니다. 옛날 삼국지에 보면 장군들이 싸움을 하다 잡혀갑니다. 장수를 잡으면 전쟁중이지만 경례를 하고 잘 죽이지 않습니다. 관우나 장비도 잡힌 적이 있지만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왔습니다. 르완다 내전에서 투치족과 후투족이 상대 종족을 다 죽여버리는 학살 소식을 들을 때, 야만인임을 느낍니다. 캄보디아의 킬링필드에서 폴포트가 대량학살을 하는 사건을 보면 어떤 존경심도 관용도 없으며 오직 무지함과 잔인함, 천박성이 있을 뿐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이 이 세상의 마지막 심판을 하실 때에 그런 야만성을 보이시겠습니까?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창 7:1) 하나님은 당신의 말을 듣는 자에게는 언제나 피할 길을 주십니다.
유다가 멸망하기 앞서 하나님은 마지막으로 “15 그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과 그 거하시는 곳을 아끼사 부지런히 그의 사신들을 그 백성에게 보내어 이르셨으나 16 그의 백성이 하나님의 사신들을 비웃고 그의 말씀을 멸시하며 그의 선지자를 욕하여 여호와의 진노를 그의 백성에게 미치게 하여 회복할 수 없게 하였으므로”(대하 36:15-16)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지가 2000년이 넘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에 수 없는 순교자가 나왔습니다. 목숨을 바쳐서 증거 했습니다. 하나님은 억울한 사람이나 민족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고 했습니다.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요 15:22)고 했습니다. 이제는 그 죄를 알았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20)고 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복음을 못 들었다고 억울한 자를 만들지 않습니다.

심판의 날은 다가오고 있습니다.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오직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들만 남았더라”(창 7:23)도 했습니다.
“24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께로부터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리사 25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창 19:24-25)고 했습니다. 이제 마지막 심판인 그리스도께서 재람하실 때는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계 1:7)
어떤 분들은 천국이나 가려고 예수 믿냐고 그럽니다. “천국이나가 뭡니까?” 그 말은 무서운 것입니다. 여러분! 이유야 어떻든 천국 가려고 예수 믿어야 합니다. 욕심이라도 어쩔 수 없습니다. 지옥은 가면 안됩니다.
외국여행하면 비행기 몇 번 갈아타면서 갈 때가 있습니다. 그 때 꼭 물어보는 말이 있습니다. “최종 목적지가 어디냐?”고 물어봅니다. 돌아 올 때는 ‘인천이나 서울’이라고 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한국말로 ‘천국’이라는 말이 자꾸만 나오려고 합니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천국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첫 번째 오셨을 때는 겸손의 어린양으로 오셨지만 두 번 째 재림은 영광과 권능을 가지고 오십니다. 그리스도께서 한번 오셨던 것처럼 또한 재림하실 것입니다.
“29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30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눅 17:29-30)고 하십니다.
이제 우리의 해야할 일은 분명합니다. 본문에서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하늘은 텅 비어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마냥 서서 하늘을 쳐다봅니다. 이제 무얼 해야 할지, 다음에 해야할 일이 막막했기 때문입니다.

옛날 북한의 어느 시골 마을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교회당을 짓는데 돈이 부족하였습니다. 시골이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돈이 나올 곳이 없습니다. 교회를 맡은 선교사도 더 이상 돈을 얻어올 때도 없었습니다. 예배당을 짓다가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 어느 집사님이 기도하시다가 자신의 전답을 다 팔아 교회에 들고 왔습니다. 그래서 그 돈으로 완공을 하였는데요. 교회는 다 지어졌지만 문제는 그 집사님 가정입니다. 전답을 다 바쳤으니 어떻게 먹고삽니까? 그래서 선교사님이 그 집사님을 교회 사찰로 삼으시고 교회 안에 들어와 살게 하고, 작은 돈을 주며 생활을 하도록 했습니다. 애들 교육이 또 문제였는데요. 마침 선교사님이 그 집 아들을 미국에 아는 분에게 소개하여 유학을 하게 하였습니다. 그 아들이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에 들어와 아주 큰일을 하게 됩니다. 그 분이 누구인줄 아십니까? 바로 백낙준(1895-1985) 박사입니다. 아버지의 헌신에 대한 보답으로 하나님께서 아들을 축복하신 겁니다.
백낙준 박사님의 아버지(백사경:시각장애인)는 무당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어떤 사람이 지나가다가 “당신, 그런 짓만 하다가 나중에 지옥가면 어떻게 하겠소? 당신 자녀들 멸망 받을 짓 하지말고 예수 믿고 천당 가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니 이 양반아, 당신이나 잘 믿지. 별것 다 간섭하네. 재수 없게.” 그러고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잠만 자면 그 말이 들리는 겁니다. “당신 자녀들 멸망 받을 짓 하지말고 예수 믿고 천당 가시오.” 그래서 자기를 돌아보니 순 거짓말만 하고 있었습니다. 이래서는 안되겠다 생각하고 그 생활을 청산하고 예수를 믿게된 것입니다.
우리나라 교회사를 보면 전부다 그렇습니다. 지나가다 한마디하면 그 한마디가 그 마을을 복음화 시켰습니다.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토마스 선교사가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우리나라가 당시 철벽같이 방어하고 있었으니 미국의 제너럴 셔먼호가 우리나라의 경고를 무시하고 들어왔다가 그 때 통역관으로 동승한 토마스 선교사 잡혀서 죽게됩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그 사람에게 한마디합니다. “예수 믿으시오.” 그 때 그 사람은 예수가 무엇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결국 얼마 안가 예수 믿었습니다. 예수라는 말 한마디를 우습게 여기면 안됩니다. 예수의 이름에 생명이 있습니다. 축복이 있습니다.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의 이름을 말해 보세요. 예수의 이름을 증거 해 보세요. 예수의 이름 자체가 살아있기 때문에, 그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역사 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우리를 구원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감사함으로 기도하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빌 4:6)

어느 날 농부가 호박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런 연약한 줄기에 큰 호박을 달아 줬을까? 그리고 왜 두꺼운 상수리나무에는 보잘것없는 도토리를 줬을까?” 며칠 뒤 농부가 상수리 나무아래에서 낮잠을 자는데 무언가 이마에 떨어져 잠을 깼습니다. 그 때 농부는 “호박이면 어쩔 뻔했을까?” 생각했습니다.

지난 화요일에 전화가 왔습니다. 한국컴퓨터선교회(KCM)에 인터넷으로 회원으로 가입하기 위해서 적는 사항들이 있는데 너무 많다는 겁니다. 경찰서 조사하는 것도 아니고 뭐 그렇게 많으냐고 계속 따져 물으시는 겁니다. 저는 컴퓨터선교회에 23년 이상 사역을 하다보니까 목소리만 들어도 누구인지 다 알 수 있을 정도입니다. 누가 불만이 제일 많으냐하면 집사님이요? 아닙니다. 예수님 제자들이 순교하기 이전에 제일 먼저 순교하신 분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스데반 집사님 이십니다. 장로님도 아닙니다. 누구이겠습니까? 불만이 많습니다. 순종 제일 안 합니다. 자기 생각만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떤 사항이 그런데요?” 물었습니다. “홈페이지 주소, 집 전화번호, 핸드폰 번호, 주소, 교회직분, 심지어는 구좌번호, 이게 다 뭡니까?” 그래서 제가 “이것이 다 나름대로 필요합니다. 홈페이지를 알리기 위한 분은 홈페이지 주소를 요구하시고 선교사들은 선교헌금 후원 받기 위해서 구좌번호가 필요합니다.” 그랬더니 계속 당신 이야기만 하십니다. 뭐 경찰서 조사 받는 것이냐 구요. 그래서 필요한 것만 적으세요. 그랬습니다만 가입만 하면 제가 밤낮으로 20여 년 간 모아온 자료를 공짜로 쓰는 것입니다. 감사는 없습니다. 몇 가지 적는 것만 불만입니다.
『위대한 개츠비』의 시작 부분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아버지가 말합니다. “남을 비판하고 싶을 때면 언제나 이점을 명심해라. 이 세상 사람이 다 너처럼 유리한 입장에 놓여 있지 않다는 걸 말이다.” 다른 사람의 입장이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입장도 있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기도했다고 만일 하나님이 아무 때나 물 막고, 또 물을 흘려보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신은 이로울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피해가 가는 겁니다.

감사하지 못하는 것은 불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일관되게 말씀하시는 것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은 의로우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의는 공평입니다. 억울해 하지 마세요. 나만 왜 이렇게 못났을까 생각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공평하십니다.

복음성가 작사도 하고 시를 쓰는 송명희 시인이 있습니다. 이분은 태어날 때부터 소뇌를 다쳐 뇌성마비 장애를 얻었습니다. 몸의 성장발육이 느리고 연약하여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초등학교도 못 다녔습니다. 거기에 찢어지게 가난하여 계속 이사를 다녀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불평을 늘어놓는 송명희씨에게 ‘말하는 대로 써라’하는 음성을 들었고 쓰기 시작했습니다. ‘나 가진 제물 없으나, 나 가진 지식 없으나’ 왼손에 토막연필을 쥐고서 울먹이며 받아 적었습니다. 여기 까지는 자신의 입장과 같았습니다. 정말 제물 없고, 지식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갑자기 ‘공평하신 하나님이-’ 너무나 엉뚱한 말씀이 떨어졌습니다. 울면서 하나님께 ‘못쓰겠어요!, 하나님 공평하지가 않아요. 내겐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물러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시키는 대로 써라 하셨고 결국은 공방속에 하나님이 승리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나’라는 시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 시로 그녀는 세상에 알려졌고 노래로 만들어져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하나님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데 까지만 이라면 불공평한지 모릅니다. 우리가 보는데 까지면 불공평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지 못하고,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다음 세상이 있습니다. 절대로 불공평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우기시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겁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기도는 전적인 믿음으로 출발합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도와 주신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순종입니다. 순종 없는 기도 또한 무의미합니다. 기도하고 나니까 하나님이 놀고 먹으라는 명령을 하실 리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맡겨진 일에 충실하라고 하십니다. 네 달란트를 활용하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볼 때 기도는 믿음으로 출발해서 우리의 행함으로 끝을 맺게됩니다. 기도는 우리가 선을 행하도록 힘을 줍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열매를 주십니다.(창은교회 목사님, 강아지에게 세탁기 타와라 그랬더니 재롱으로 TV에 나가서 컴퓨터 탔습니다.)
믿음 없이 보세요? 바보 중의 바보들이 교회 다니는 사람들 같습니다. 시간 들여야 되지요. 물질 드리지요. 봉사하지요.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은 자기의 힘으로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살려고 합니다. 사람의 힘과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과 능력에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역사적으로 기도에 대한 교과서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세계 2차 대전 때에 영국군이 프랑스군을 도우려고 35만 명이 도버해협을 건너갔습니다. 그런데 독일이 2주만에 프랑스를 완전히 점령해 버렸습니다. 프랑스가 독일군대에게 패해 버리자, 영국에서 도와 주려고 건너갔던 35만 대군이 갇혀버렸습니다. 자기들만의 힘으론 독일군과 싸우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영국으로 되돌아가기 위해서 도버해협으로 도망하기에 이릅니다. 히틀러는 베를린에서 도망하는 영국 군인들을 아주 전멸시켜 버릴 것을 명령하고는 태연히 있었습니다.
그 때에 영국왕 조지 6세는 온 영국에 “어떻게 하든지 영국 군대를 건져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자”고 “기도의 날”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영국의 젊은 군인들을 구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전 국민이 기도했습니다. 기도 후 이상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 날 독일군 쪽에는 큰 폭풍우가 일어서 비행기 한 대도 뜰 수가 없었고 너무 비가 많이 와서 탱크 한 대도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영국군이 있는 도버해협은 어찌나 잔잔하고 고요한지 수많은 배가 35만의 영국 군대를 무사히 날랐습니다. 독일은 전쟁을 통해서 얻은 것이 없지만 영국은 달랐습니다. 전쟁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배운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을 배운 것입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시 50:15).

이런 영국에서 세월이 지났습니다. 템플 목사가 켐브리지 대학에서 설교 부탁을 받아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석학들이 모인 그 곳에서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해야 하나 하고 고민하다가 ‘기도를 응답하시는 하나님’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 준비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담담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한 청년이 와서 따져 물었습니다. “목사님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기도가 응답된다고 말씀하십니까? 기도가 응답되는 것은 우연입니다. 어쩌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연의 일치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기도는 응답되는 게 아니고 우연히 그저 그렇게 요행으로 된 것입니다.” 템플 목사님은 그 청년의 말을 듣고 다음과 같이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래, 청년의 말도 일리가 있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기도하면 우연이 생기고 기도를 안 하면 우연이 안 생긴다는 거야. 그래서 나는 기도하는 거라네. 기도가 응답되는 것이 우연이든 아니든, 기도하면 응답이 오기 때문에 기도가 중요하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돈은 하나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영의 세계에서는 돈은 휴지조작보다 못합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건강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건강은 아무도 자신할 수 없으며 또 한 순간에 무너지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지혜나 지식도 사탄은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사탄이란 원래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하고는 게임이 안됩니다. 우리가 사탄을 이길 수 방법은 기도뿐입니다. 사탄이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너무 바빠졌습니다. 행사가 너무 많습니다. 쓸데없는 모임들이 너무 많습니다. 가장 힘있는 교회는 기도하는 교회입니다. 간절히 기도하는 교회입니다. 능력 있는 교회는 기도하는 교회입니다.

기도와 간구로 … 아뢰라
기도(proseuch’/:프로슈케)는 “기도함, 교회당, 예배당”을 뜻하는 ‘proseuvcomai:프로슈코마이’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프로슈코마이’는 “기도하다, 간청하다, 예배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단어는 기도와 예배를 포함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곧 예배가 기도가 되는 것이며 기도가 예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 없는 예배는 없습니다. 기도가 예배의 핵심임을 말해줍니다. 두 번 째 단어 간구(devhsi”:데시스)는 “청원, 기도, 간청”을 말합니다. “이 단어는 ‘devomai:데오마이’로 “원하다, 바라다”의 동사에서 온 말입니다. 그리고 기도에 대한 한가지 단어가 더 나옵니다. “하나님께 아뢰라”입니다. 아뢰라(ai[thma:아이테마)로 "요청, 요구"입니다. 이 단어는 "aijtevw:아이테오"로 "구하다, 묻다, 청구하다"에서 온 단어입니다. 기도는 이 세 가지 형태가 갖추어져야 합니다. 세 단어가 모두 기도를 뜻하지만 약간씩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기도'는 예배의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든 구하되 함부로 구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을 우롱하거나 시험하는 기도는 안됩니다.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멸시하는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예배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둘째, '간구'는 탄원입니다. 간청입니다. 간절해야 합니다. 셋째, 아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요청하는 것입니다. 청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 시작할 때 몇 년 전에 계셨던 장은숙 전도사님 간증이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청구아파트를 청구합니다." 그래서 아파트 당첨돼서 샀습니다.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기도는 감사함으로 해야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일은 감사함으로 해야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 없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던 가인 제사는 반려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다시 마음을 모아 제사를 드렸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것에만 불만을 드러냈습니다.

화요일에 영화 한편을 보았습니다. [블랙]입니다. 영화의 주인공이 ‘헬런 켈러’ 인 것 같았습니다. 실화하고는 약간 다른 것 중의 하나가 ‘앤 설리번’(영화에서 T라고 말하는) 선생님입니다. 앤 설리번은 실제로는 여자 선생님입니다. 그런데 블랙에서는 남자로 나옵니다. 그리고 인도에서 만들어져서 그런지 배경이 미국이 아니라 인도였습니다.
앤 설리번은 헬렌 켈러에게 손바닥 위에 알파벳을 쓰는 방법으로 영어를 가르쳤으며, 1888년 앤 설리번과 헬렌 켈러는 퍼킨스 시각장애학교에 함께 등교하였으며, 래드클리프 대학에 함께 진학하였습니다. 영화에서는 대학 총장을 만나서 헬런 켈러를 입학시킬 것을 권유하면서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자주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면서 입학을 결정하게 만듭니다. 헬렌 켈러는 1904년 래드클리프 대학(대학은 하버드 대학교 부속)을 졸업하였습니다. 헬렌 켈러도 위대하지만 앤 설리번이 없었다면 헬렌 켈러가 존재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한 사람을 위하여 강한 집념으로 교육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앤 설리번’ 선생은 불행한 환경 가운데서 자란 사람입니다.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였으며 학대하며 자주 때렸습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결핵을 앓고 있었으며 그녀가 여덟 살 때 죽었습니다. 그 후 앤 설리번은 친척에게 맡겨졌는데, 나중에 그녀의 친척들은 그녀와 남동생을 매사추세츠 주립 병원에 내다 버렸습니다. 앤 설리번은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결핵에 걸린 남동생을 간호하였으나, 남동생 지미는 죽고 말았습니다. 시설에 맡겨진 아이의 아픔을 알기 때문에 헬렌 켈러를 시설로 보내지 않기 위해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지옥의 아픔을 알기 때문에 우리를 그곳에 보내시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나를 믿으라고 하시는 겁니다.
헬렌 켈러가 졸업하던 날에 기자가 물었습니다. “시각 장애인으로 태어나는 것보다 더 불행한 일이 무엇이 있을까요?”이 물음에 “시력은 있되 비전이 없다면, 시각 장애인으로 태어나는 것 보다 더 불행한 일이죠.” 라고 대답했습니다.

비슷한 대사가 나오는 영화가 하나 더 있습니다. 빠삐용(스티븐 멕퀸)입니다. 빠삐용이 감옥의 섬에서 탈출할 때에 드가(더스틴 호프만)가 옆에서 혼잣말로 중얼거립니다. “네가 아무리 이 섬에서 탈출한다고 해도 네 마음의 감옥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너는 여전히 감옥 속에 갇혀 사는 거야.”라고 합니다. 이 영화는 프랑스의 앙리 샤르에르의 실제 인물의 자서전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그 책에 보면 ‘방코(Banco): 빠삐용’이 탈출한 이유가 나옵니다. 1930년 20살 나이에 파리 근처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데 근처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납니다. 그 때 실적이 눈이 어두웠던 검사가 앙리 샤르에르를 범인으로 지목하여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때부터 샤르에르는 자기 인생을 망친 그 검사를 죽이기 위해 악마의 섬을 탈출합니다. 영화는 여기서 끝납니다. 그러나 실화는 계속됩니다.
그는 남미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돈을 번 후 파리로 갑니다. 그는 먼저 젊었을 때 자기가 다니던 거리, 어린 시절에 부모님과 함께 다니던 고향의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거기서 지난날의 추억을 더듬으며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때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그 말씀이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복수를 포기합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주여, 제가 복수를 포기하겠사오니 이 땅에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소서.” 기도를 마친 그는 스스로 속삭입니다. “샤로에르야, 네가 바로 진짜 승자다. 그는 과거의 인물일 뿐이다.” 이렇게 다짐하고 자기를 30년 동안 가두고 있던 감옥으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진리가 승리한 것입니다. 주님이 승리하신 것입니다.

기도는 감사를 동반하고 감사는 기도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우리는 이미 받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개미의 배 속에는 ‘사회 위(社會 胃)’라는 제2의 위장이 있는데 그 속에는 먹이를 소화시키지 않고 보관만 합니다. 그랬다가 굶주린 동료 개미가 와서 입을 벌리면, 요구를 받은 개미는 망설임 없이 그 개미에게 입을 맞추고 자신의 사회 위에 보관한 먹이를 올려 먹여줍니다. 개미의 입맞춤은 생명을 살리는 행위입니다.
“모든 형제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전 16:20, 고후 13:11)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입맞춤으로 우리가 살아났습니다. 그 입맞춤은 기도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개미의 ‘사회 위’와 같습니다. 기도로 살리는 것입니다.

 

기도에 힘쓰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행 1:14)

“그대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어간 이들이
그토록 살고 싶어하던 내일이다”(에머슨-오늘의 하루)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 고령이신 김순이 할머님이 계십니다. 지금 연세가 111세이십니다. 기자가 찾아가 걸어나오시는 할머님을 보고 “걸어나오시네요?” 그러니까 “그럼 걸어나오지 기어 나오냐?”그러시면서 “기사 쓰려면 젊었을 때 하나님 믿으라고 써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06세 때 신앙고백하고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고백하기를 “이제 한 살 됐네”라고 하셨습니다. 100년이 넘는 세월을 우상에게 절하며 사셨습니다. 우상에게 절하며 산 세월은 100살을 넘게 살았지만 다 헛것이라는 겁니다. 예수 믿고 산 것이 진짜 사는 것입니다.

사진을 찍다보면 좋은 습관이 자연스럽게 몸에 뱁니다. 두 가지만 말씀드리면 하나는 순간 순간을 무심코 보지 않습니다. 그 순간은 다시 찍을 수 없는 장면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순간을 소중히 여깁니다.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또 하나는 아름다운 장면을 잡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저는 꽃을 찍습니다. 그런데 인물 사진도 찍는데 제일 아름다운 장면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자 누드요? 그거 별로 입니다. 자연스런 선을 통해 사람의 아름다움을 보지만 진짜 아름다운 장면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땀 흘리며 열심히 사는 모습입니다. 힘이 느껴지는 역동적인 사진, 그 사진을 보면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이런 사진 찍기가 쉽지 않습니다. 가끔 아마추어들이 시장에서 고생하시는 주름이 많은 분들을 찍어 가지고 흑백으로 만들어 예술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고생한 것만 가지고 안됩니다. 고생은 하지만, 땀을 흘리지만 힘이 느껴지는 소망이 보이는 그런 사진이래야 됩니다.

이런 사진을 찍는 세계적인 사진작가가 있습니다. 김희중(에드워드 김)씨입니다. 그가 잘 찍는 사진은 땀흘리며 열심히 사는 사람입니다. 이분은 한국농촌의 모습을 많이 찍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농부와 코스모스’(1974, 남해), ‘저녁 노을이 붉게 든 노을과 지게진 노인’(1975, 삼천포) 등이 있습니다. 그는 <내셔널 지오그라픽 18년> 기획위원, 편집팀장(4년 8개월)과 <타임> 사진기자를 지낸 분입니다. 타임지와 내셔널 지오그라픽 에서는 사진을 위해서라면 없는 렌즈도 새로 깍아 만들어 주고 비행기도 전세 내어 주고 모든 다 지원해 주는데 입니다. 그가 편집 팀장을 맡을 때 900만 부이던 것이 나중에 1,200만 부로 늘었습니다. 1,200만 부는 한 권의 두께가 1cm라고 할 때 일렬로 세워 놓으면 120km에 해당하는 양입니다. 서울에서 대전까지의 거리입니다.
우리나라에서 한국화보(영문, SEOUL)의 편집을 맡았던 적이 있습니다. 18년 간 <내셔널 지오그라픽>에서 일하고 편집장까지 했으니 세계적인 한국화보가 나오는 것이지요. 7개 국어로 98개국에 86아세안 게임,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제작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내셔널 지오그라픽 수준으로 만들어지는 겁니다. 세계인이 감탄했습니다. 한국이 이렇게 아름다운 나라인지 처음 알게 된 것입니다. 그 시절에는 휴대전화 LCD TV이런 것이 없었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것이 없었던 때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나중에 그만두게 된 배경이 있습니다. 김희중씨는 열심히 일하는, 땀흘리는 사람을 찍어서 예술로 만드는데 정부에서는 굳이 돈 들여서 우리나라의 어두운 면을 보여줄 필요가 있냐는 겁니다. 그래서 잘렸습니다. 이분이 내셔널 지오그라픽에서 편집장까지 오르게 된 것은 1973년 최초로 북한을 취재한 공이 컷기 때문입니다. 북한에 갈 때 유서를 써 놓고 미국을 출발했습니다. 미국에서는 생명을 보장 할 수 없으니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취재 허락을 받고 북한에 들어갔습니다. 처음 이틀동안 바깥구경도 못하고 김일성 초상이 붙어 있는 방에서만 지냈습니다. 그 때 그가 북한 안내원에게 말하기를 “세계에서 제일 살기 좋은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한다면서 몇 시간씩 낮잠만 자면 어떻게 합니까?” 이 말에 그들이 충격을 받았는지 그를 데리고 나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면서 “김 선생 혁명정신이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와 같이 혁명과업을 완수합시다.” 하는 통에 이제 못 나오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도 들었습니다. 이 때의 북한 취재로 <내셔널지오그래픽> 1974년 8월호에 북한 기사가 실렸고, 미국 해외 기자단 최우수상 취재상을 받았습니다. 이 상은 퓰리처상에 버금가는 권위 있는 상입니다.
그런데 그 때 북한의 아이들이 신발을 벗고 자유롭게 뛰어 노는 모습을 찍으려고 했는데 북한 안내인이 찍지 못하게 했습니다. 우리나라가 사회의 어두운 면이라고 보여주지 않으려는 것이나 북한이 숨기려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꾸미지 않는 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못사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작은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노력하지 않는 것은 부끄러운 것입니다. 땀흘리지 않는 것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사회보장 제도가 잘 되어 있는 미국과 같은 나라를 보면 그냥 도와주는 것이 아닙니다. 일자리를 마련해 주려고 노력합니다. 온 사회가 일을 주려고 노력합니다.

어떤 사람이 산길을 가다가 네 다리를 모두 다친 여우를 보았습니다. 야생 동물이라 다리를 다치면 사냥을 못하기 때문에 죽습니다. 며칠 후 같은 장소에 갔는데 여전히 여우가 살아있었습니다. 궁금해서 숨어서 기다렸습니다. 그 때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났습니다. 이제는 죽었구나라고 생각했는데 호랑이가 먹을 것을 가져다 주는 것이었습니다. ‘와 신기하다 하나님이 다리 다친 여우도 저렇게 먹이시는 구나’하고는 굳은 확신이 생긴 이 사람은 누워서만 지냈습니다. 그런데 먹을 것을 가져다 주는 호랑이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냥 굶어 죽었습니다. 죽고 난 후에 하나님께 갔습니다. 하나님께 항의했습니다. ‘왜? 내게는 호랑이를 보내주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왜 호랑이를 본 받을 생각은 안하고 여우를 본 받으려고 하니’하셨다고 합니다. 같은 이슬을 먹고살지만 뱀은 독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꿀벌은 꿀을 만들어 냅니다. 우리가 누구를 본 받아야 합니까? 우리의 모델은 누구입니까? 놀고 먹는 사람이 아닙니다. 땀을 흘리는 사람입니다. 열심히 사는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본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을 다른 말로 성령행전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또 다른 말로 부를 수 있습니다. 기도행전입니다. 땀의행전입니다. 성령이 나타날 때는 반드시 기도가 있었습니다. 기도할 때 성령이 나타납니다. 이것을 사도행전을 통해서 생생하게 증거하십니다.
예수님은 부활 후에 잠시 이 땅에 머물러 계셨습니다. 사도들이 모였을 때 “…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 1:4)고 하셨습니다. 약속하신 것은 성령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제자들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형제들이 다락방에 올라가 “…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제자들과 함께 오순절 날 다시 모였습니다. 기도 중에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홀연히 성령이 임했습니다. 마치 불의 혀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였습니다. 방언이 터졌습니다(행 2:1-4). 약속의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예수를 기다리면서 할 수 있는 일은 기도하는 일입니다. 기도하면서 예수를 기다려야 합니다.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잠 8:34)라고 했습니다. 기도해서 무슨 큰 응답을 받아야만 복된 것이 아닙니다. 주께 기도할 때, 주님을 기다릴 때 이미 복을 받은 것입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우리는 사실 혼자 하는 기도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내 마음대로 말하고 내 뜻대로만 구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마음을 합하여 기도하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두 부부가 살면서 마음을 합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만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마음을 합할 때는 나의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만을 생각해야 합니다. 제자들과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먼저 나섰습니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누구보다도 예수를 잘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천주교처럼 예수의 어머니를 신성시 할 필요는 없지만, 인간으로서 그 누구보다도 예수를 잘 아는 분이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었지만 육신으로는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태어나셨습니다. 그 태어날 때의 성령의 잉태함은 우리가 잘 아는 바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도 인간이기 때문에 예수의 신성을 때로는 잘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12살 때 예루살렘성에 가셨습니다. 그 때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유월절을 다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친족의 어느 무리에 예수님이 있겠다고 생각하고 집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없는 것입니다.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와 사흘을 찾은 후 성전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 2:49)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이적을 보이도록 간청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몰라도 마리아는 예수님은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성령으로 잉태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갈릴리 가나에서 혼례가 있었습니다. 예식기간동안에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안타까워하던 마리아는 예수님께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요 4:4)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부탁해 놓기를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5)고 당부합니다. 예수님께만 떼를 쓴 것이 아니라 다른 하인을 통해서 예수님의 명령을 받을 준비를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배워야 합니다. 기도하지만 받을 준비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준비된 자에게 주십니다.

어머니 마리아의 이러한 간청함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시작하도록 한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요 19:25) 예수의 십자가 밑에 어머니 마리아가 있었습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의 당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 땅에 예수님은 더 이상 계시지 않습니다. 성령도 임하기 이전입니다. 제자들은 당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기다리라고는 했지만 고민이 많았을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 제자들 틈에서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한다는 것은 큰 힘이었을 것입니다. 어머니가 나선 것입니다. 예수님을 잘 아는 어머니가 먼저 나선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예수님의 동생들도 함께 했습니다. 마리아가 교육을 잘 시킨 것입니다. 어머니 말 잘 듣는 자식들 중에 나쁜 자식 없습니다. 잘못된 자식 없습니다. 어머니는 예수의 명령을 지켰습니다. 순종했습니다. 어머니의 역할이 중요한 것입니다. 한 사람에게 있어서 어머니만큼 큰 영향을 미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래서 어머님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자식을 키우실 겁니까? 남편 달달 볶아서 돈 벌어오게 하고, 아이들 밤새도록 학원 보내서요? 기러기가 되어서라도 유학 보내서요? 기도로 키우시기를 바랍니다.

“똥돌바우야, 어머니가 너를 위해 기도하시던 걸 기억하니? 눈감으시기 전에 너한테 반드시 목사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잖니?” 42년 만에 러시아에서 극적으로 만난 누나는 똥돌바우가 미국이나 서울로 탈출해서 반드시 어머니의 유언대로 목사가 되어야 한다고 끈질기게 설득했습니다.
똥돌바우는 지난 40년 간 평양사범대학에서 노어노문학과 교수로 있다가 1992년 한국으로 망명한 김형직 교수의 어릴 때 별명입니다. 얼굴도 둥글둥글하고 몸도 둥글둥글하다고 붙여진 별명이라고 합니다. 1991년 김 교수는 러시아 대학생들에게 조선어를 가르치는 교환교수로 파견되었습니다. 그곳에서 한국에서 파송된 선교사에게 다시 성경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똥돌바우의 어머니와 형제들은 6.25 이전 함흥 함주군에 있던 오로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는 주일학교를 열심히 다니고 성경 구절도 잘 외워 귀여움을 독차지했다고 합니다.
그의 어머니는 주일날 새벽이 되면 똥돌바우를 일찍 깨워 가마에 데운 물로 깨끗이 목욕을 시키고, 손발톱을 깎아주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낼 연봇돈(헌금)을 부엌 아궁이의 재로 반짝반짝 윤이 나도록 닦아 주머니에 넣어 주었습니다. 그러면 똥돌바우는 똑바로 서서 유년주일학교 교가를 불렀고, 어머니는 흐뭇한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셨다.
주일아침 아들을 목욕재개 시키고, 헌금을 윤이 나도록 닦아 주일을 맞이하던 어머니의 신실한 신앙과 40년 동안 헤어졌던 동생 똥돌바우를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기도를 하던 누나의 기도는 잃어버렸던 김형직에게 새로운 신앙의 불을 지폈습니다. 그리고 1998년 어린 시절 유년주일학교 선생님이었던 최순직 목사(천안대총장)를 50년 만에 재회하고 주님을 새로 영접하였습니다.
최순직 목사는 임종의 순간 가족을 통해 똥돌바우(김형직)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최순직 목사는 가쁜 숨을 몰아 쉬며 주일학교 제자인 김형직 교수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남북이 통일된 다음, 고향 땅에 돌아가 우리가 처음으로 주님을 알게 되고 따르게 되었던 잊지 못할 우리 오로교회를 저를 대신해서 다시 일으켜 세우게 하여 주시…” 그는 제자에게 이 마지막 기도를 끝내 마치지 못하고 눈을 감았습니다. 하나님은 똥돌바우를 위해 기도한 어머니의 기도를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잊지 않으셨습니다. 어머니의 기도는 위대합니다.
기도보다 더 소중하고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이 기도가 나를 살렸습니다. 우리 교회를 살렸습니다. 세계를 살렸습니다. 이제 우리 교회에도 살아있는 기도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자들과 여자들과 마리아와 동생들의 기도는 대단한 것입니다. 이 합심기도를 통해서 성령이 최초로 임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이 임하니까 무식한 줄로만 알았던 베드로가 설교합니다. 이사야서를 인용하면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행 2:21),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음이라”(24), 다윗의 시편도 인용하면서 “그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혀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도 희망에 거하리니”(26) 하고 외칩니다. “진짜 베드로 맞아?” 할 만큼 놀라운 설교를 합니다. 성령의 감동 없이는 하지 못할 설교를 합니다.
이제 기도의 능력을 안 것입니다. 기도로 성령 받음을 안 것입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재하며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42)고 했습니다. 그리고 일곱 집사를 택하면서 사도들은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행 6:4)고 합니다. 왜 이런 말을 합니까? 기도의 능력을 안 것입니다.

바둑에서는 ‘묘수를 세 번 두면 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묘수를 세 번씩이나 두어야 할 정도로 형세가 어려우면 결국 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지 않는데 우리가 아무리 묘수를 두어도 그것은 망합니다. 하나님이 인도해 주셔야 합니다.
바울이 마게도냐 지역의 빌립보(최초의 유럽전도)에 이르렀을 때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행 16:13) 기도할 곳을 찾아다녔습니다. 여기서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를 만나게 되고 그는 유럽 최초의 세례교인이 되고 그의 집이 유럽 최초의 빌립보 교회가 세워지게 됩니다.
그곳 빌립보에서 복음전하다 옥에 갇히게 됩니다. 하지만 그들을 곧바로 기도했습니다. 무엇을 할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도하는 것입니다. “25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26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기도는 역사를 동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