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타격(흔들리지 않는 믿음)

“22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23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골 1:22-23)

한국시리즈가 어제로 끝났는데요 3차 전 지난 19일(월) 인천 문학구장에서 기아와 SK의 경기가 있었습니다. 기아가 먼저 2승을 하고 SK의 반격이 시작된 날입니다. 결과는 SK가 16:6으로 이겼습니다. 이날 3년 만에 다시 방송 해설 마이크를 잡은 하일성씨(전 한국야구위원회:KBO 사무총장)는 선수보다 더 떨린다고 말했습니다. 오랜만에 자기의 본업으로 돌아왔다는 감격 때문에 1,000번이 넘는 야구 해설을 했는데도 떨린다고 했습니다. 이날 기아가 6회까지인가요 안타 하나도 계속 치지 못하니까 하일성씨가 계속 하는 말이 귀에 들어왔습니다. “자기 타격을 해야 돼요. 공을 치려고 하면 안됩니다.” 그러는 거예요. 저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처음에는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계속 하는 거예요. “자기 타격을 해야 돼요. 공을 치려고 하면 안됩니다.” 아니 타자가 당연히 공을 쳐야 하는데 ‘공을 치려고 하면 안되고 자기 타격을 해야 되다니요.’ 정말 1,000회를 넘게 중개한 하일성씨만이 할 수 있는 해설인 것 같았습니다. 이 사람은 야구에 도가 튼 사람입니다. ‘자기 타격’이 뭡니까? 자기가 평소에 연습해온 대로 투수에 끌려 다니지 말고 타격을 하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욕심을 내면 자기 타격의 폼을 잊어버리고 공을 보고 치기 때문에 마음이 앞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투수의 공에 끌려 다닌 것입니다.
여기에 진리가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그렇습니다. 자꾸만 남의 말만 듣고 자기의 주체성이 없으면 안됩니다. 남의 말을 듣되 자기의 정체성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프리카 사자가 사냥을 할 때 먹이 감이 정해지면 좌우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정해진 먹이감만을 행해서 질주합니다. 그것이 자기 타격입니다.

남아프리카에 가면 ‘골곤다’라고 하는 세계 제일의 유명한 다이아몬드 광산이 있습니다. 이 광산이 개발된 기막힌 사연이 있습니다. 본래는 이 지역이 목장 지대였습니다. 목장의 주인은 큰 부자는 아니었지만 비교적 넉넉한 삶을 영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에 영국 사람이 들어와서 갑자기 다이아몬드 붐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곳곳에서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되면서 벼락부자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목장 주인의 마음속에 급한 생각이 들기 시작을 했습니다. 꾸물거리다가는 자기만 손해를 볼 것 같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자기가 자꾸 가난해지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목장 주인도 다이아몬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여러 가지를 알아보았습니다. 먼저 그는 다이아몬드가 어떠한 곳에서 나오는지를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해답이 간단하게 나왔습니다.
지형적으로 주변이 산으로 빙 둘러 있고, 그 가운데는 시내가 흐르고, 그리고 시내에 의해서 모래사장이 형성되어 있는 곳이 확률적으로 다이아몬드가 나올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즉시 자기 목장을 팔았습니다. 그리고 전국을 누비면서 그런 곳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비슷한 지형이 나오면 무조건 닥치는 대로 다 사들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때마다 번번이 실패를 했습니다. 다이아몬드를 찾기 시작한 지 어언 10년이 흘렀습니다. 이제는 수중에 있던 돈도 다 떨어지고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는 깊은 절망감을 이기지 못하고 바다에 자기 몸을 던지고 말았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기막힌 일은 바로 그 사람에게서 목장을 산 사람이 어느 날 자기 목장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검은 색이 나는 이상한 돌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그것을 집어 들고 호기심을 가지고 깨뜨려 보았습니다. 그러자 그 안에서 번쩍번쩍 빛나는 광채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틀림없는 다이아몬드 원석 이었습니다. 얼른 그 주변을 파 보았습니다. 손으로 파기만 해도 그 속에서 다이아몬드 원석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개발된 곳이 바로 세계 제일의 다이아몬드 광산인 ‘골곤다’입니다. 자기 땅에 다이아몬드가 있는 줄 몰랐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 타격을 잊어버린 사람입니다.

자기 타격 자세를 왜 잊어버립니까?

자기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의 능력을 모른 체 덤벼들기 때문입니다. 덤벼드는 이유는 마음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욱’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너무 기분에 따라 움직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차분해야 합니다. 어디서부터 문제가 있었는지를 따져보고 반성하고 철저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마음만 급하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준비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됩니다.
이런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도덕경을 쓴 노자라고 하는 학자가 있죠. 그런데 그는 성창이라고 하는 스승으로부터 배워서 이런 도덕가가 되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성창 스승께서 임종이 가까웠다고 하는 말을 듣고 나이 많아서 세상을 떠나는 데 스승을 찾아가서 보니 정말 임종이 다 된 줄 알고 “스승님 아무래도 세상을 하직하게 될 거 같구만요. 그런데 마지막 가르침을 제게 주십시오.” 성창은 이 노자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하는 말이 자네 내 얼굴 좀 보게. “내가 지금 이빨이 있나?” 하고 물었습니다. “없구만요” 이빨이 다 빠져서 없어요. “그래 혀는 있나?” “혀는 있구만요.” “됐어 그거야.” 제자는 “잘 알았습니다” 하고 받아들였습니다. 날카로운 이빨은 없어져요. 부드러운 혀는 남는다 이 말입니다. 강한 자는 부러져요. 그러나 온유한 자는 남는겁니다. 이것이 스승의 마지막 교훈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교훈을 총 정리해 보면 네 가지로 요약된다고 합니다. “어려서는 겸손하라. 젊어서는 온화하라. 장년에는 공정하라. 늙어서는 신중하라.”입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 23절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우리는 마치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나야만 그것만을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진짜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허망한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연습도 하지 않고 힘도 기르지 않고 그냥 치면 혹시 홈런이 될까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요행입니다. 믿음이란 행한 대로 값으시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다보면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구약성경에서 모세가 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 세상에 태어난 사람 같습니다. 그리고 그의 생의 전부가 훈련이요,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를 위한 모든 과정이었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다른 사람 다 못 들어가도 모세는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인도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수고를 했고, 얼마나 많은 고생과 핍박을 받았습니까? 그 모세가 가나안 땅에 못 들어 가구요 비스가산 언덕에서 요단강 건너편으로 멀리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 느보산에서 죽었습니다. 어찌 이런 일이 있다는 말입니까? 그 뿐 아니라 그가 나이 많아서 120세나 됐으니까요 나이 많아서 힘이 다해서 조상에게로 돌아갔다, 이렇게 기록 되었다면은 그런 대로 납득을 하겠습니다만 그게 아닙니다. 민수기 20:12에 보면은요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이렇게 나옵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숱한 고생을 하면서 하나님과 함께 해 왔는데 비록 이스라엘 사람이 다 못 믿었고 가나안 땅의 정탐꾼의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불 신앙 때문에 가나안 땅에 가지 못하지만 모세에게는 아직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모세가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간 것은 ‘므리바(다툼) 물’ 때문입니다. 여러분 끝까지 믿어야 합니다. 모세 주위에 이스라엘 사람 다 떠나도 모세는 하나님을 믿었어야 됩니다. 모세가 흔들렸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군중 심리에 의해 휩싸이면 안됩니다. 나 자신을 지켜야 됩니다. 군중이 나의 믿음을 붙들어주는 경우는 없습니다. 성경 어디를 봐도 그런 것은 없습니다. 믿음은 언제 생기느냐? 내가 주를 바랄 볼 때입니다. 내가 주만 바랄 때입니다. 그러므로 결국은 사람을 보면서 예수 믿는 사람은 언제든 떨어져 나갈 수 있습니다. 주를 부르세요. 주를 믿으세요.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 23절 중반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링컨은(1809.2.12) 켄터키 주의 일반적인 통나무집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톰 링컨은 나이가 50세가 넘을 때까지도 소작인으로 산 목수였습니다. 링컨은 어렸을 때부터 너무 말라 맡는 옷이 없었답니다. 그런 허약한 링컨을 위해 어머니 낸시는 늘 기도하고 성경을 읽어주었습니다. 평화는 가치 있는 싸움보다 더 중요하다는 걸 늘 가르쳤습니다. 기도와 성경으로 가르친 것입니다. 어머니 낸시는 링컨이 10살이 되기 전에(1818년) 독이 든 풀을 먹은 소에서 짠 우유를 먹고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기도로 살았습니다. 청년시기에는 뱃사공, 가게점원, 토지측량, 우체부, 변호사 등 다양한 일을 하면서, 온갖 고생을 하면서 어머니의 기도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사랑한 것은 어머니가 기도하며 잃어주던 성경이었습니다.
링컨이 자기를 잊어버리지 않은 것은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어머니의 기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 말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타격을 유지하며 흔들리지 않으려면…

여호와를 항상 의지하는 것입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시편 16:8) 오른쪽은 좋은 쪽을 말하는 것입니다. 조용기 목사님이 강대 상 가운데 의자는 하나님의 보좌이다 라고 생각하고 비워두고 평생 목회 하셨다고 하잖아요. 설교하면 바로 뒤에서 하나님이 보고 계시는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함부로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교만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바로 옆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자리를 비워 두세요. 예수님의 자리를 비워 두세요. 우리는 가정에서 일터에서 내 마음속에서 하나님이 계실 곳을 마련해 두시기를 바랍니다.

높은 자리에 있을 때, 형통할 때도 의지해야 합니다.
“왕이 여호와를 의지하오니 지존하신 이의 인자함으로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시 21:7)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시 30:6)
진짜 믿음이 좋은 사람은 자기가 잘 될 때도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이것이 어렵습니다. 이것이 되면 다 된 사람입니다. 다윗은 왕이 되었을 때도 여호와를 의지했습니다. 인간의 왕도 별것 아닙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시 46:5) 하나님이 계셔야 흔들리지 않습니다. 여러분! 인간이나 세상에 어떤 진리라고 하는 것이나 철학이 절대적인 것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흔들립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시 62:2, 6)
우리가 흔들리 않을 수 있는 것은 흔들리지 않으시는 반석의 하나님, 요새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을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와주고 싶어하십니다. 그래서 일찍 새벽에 도와 주십니다. 여러분! 선물은 빨리 주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히 12:28)

본문 23절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육해공군 참모 차장 3스타가 된 분의 고백입니다. 이분은 원래 예수를 안 믿고 사병으로 군에 입대를 했는데 부대에 사병가운데 장교가 되게 하는 그 공고가 붙었더래요. 그래서 자기가 지원을 하여 군단까지 가게 되었대요. 지금부터 40년 전 이예요. 옛날 이야기지요. 강원도에 차를 타고 트럭을 타고 내렸는데 시험 치기 전날 밤에 도착을 했대요. 내려보니 민가도 없고 날은 춥고, 길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 외딴집이 하나 있어서 주인을 불렀더니 아저씨 한 분이 나오시더래요. 그래서 그에게 배도 고프고 하룻밤을 자고 갈 수 없느냐고 물었대요. 그러니까 들어오라고 하더래요. 조금 있으니 밥을 하고 반찬도 두 가지 정도 차려 가지고 들어왔더래요. 그래서 자기의 이야기를 했대요. 나는 졸병인데 장교가 되려고 시험을 치려고 이 부대에 왔습니다. 그러니 하룻밤만 자게 해 달라고 부탁을 했대요. 방을 둘러보니 아무것도 없고 이불 한 채에 베개가 두 개 있더래요.
식사를 하고 난 다음 주인의 말이 사실은 내가 오늘 결혼한 첫날밤이라고 하더래요. 그리고 그 주인이 사병을 위해 기도를 해 주며 우리는 아랫마을에 가서 자고 올 테니 자고 가시라고. 그러면서 간절히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 아버지 이 청년이 하나님께 복을 받아 앞으로 장군이 되게 해주세요. 군에서 장군은 대단하거든요. 장군이 민가를 지나게 되면 민간인들도 다 경례하고 멀리 물러서는 그때였어요. 그분들이 잠자리를 주고, 그 다음날 시험을 쳤어요. 몇 명밖엔 안 뽑는데 거기에 합격이 되어서 장교가 된 거예요. 장교가 될 뿐 아니라 3스타, 별이 세 개예요. 여자 분들은 잘 모르지만 군에 참모차장님은 대단합니다. 그가 중령이 되어서 그 사람을 잊을 수가 없어서 자기를 위해 장군이 되게 기도해 주고, 첫날밤에 방을 빌려준 그 기도해 준 교인을 잊을 수가 없어서 이 분이 교회에 나오는 거예요. 그가 중령 때 마침 그 지역을 가게 되어서 그 집을 찾았대요. 그런데 그 집이 없어져 버렸고 늘 마음에 그때의 일을 간직하고 있는 거예요.
“복음의 일꾼” 생각만 해도 마음이 설렙니다. 나라를 위한 공무원도, 군인도 귀합니다. 그런데 세상에 제일 귀한 일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때

“1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3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5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6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7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8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9 일하는 자가 그의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10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전 3:1-11)

여러분 앞에 몇 종류의 과일이 있다고 합시다. 딸기, 포도, 배, 멜론 등. 이때 무엇을 먼저 먹을 것인가? 사람들은 약간의 고심을 하기 마련입니다. 좋아하는 것을 먼저 먹을 것인가? 아니면 좋아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중에 미뤄둔 채 아껴가며 먹을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프리카 사바나에서도 이와 비슷한 고심을 안은 채 살아가는 동물이 있습니다. 세계 최고의 단거리 주자인 ‘치타(cheetah)’입니다. 이 녀석은 시속 125km의 속도로 달릴 수 있지만 1분 이상 그 속도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비참한 것은 비슷하게 생긴 표범과 달리 사냥감을 물고 나무에 오를 수 없어서 종종 애써 잡은 먹이를 사자나 표범, 하이에나에게 빼앗기고 마는 것입니다. 치타가 이런 혹독한 생존 경쟁에서 만들어낸 식사 습관은 사냥한 먹이를 그 자리에서 먹을 수 있을 만큼 먹어치우고, 나머지는 땅 속에 묻어두는 것입니다.
이런 ‘사바나의 법칙’은 형제가 많은 집에서도 고스란히 반영되는데, 그런 집에서 자란 사람일수록 냉장고를 열고, 먼저 먹을 걸 발견하면 다 먹어치워 버리는 것이 장땡이란 사실을 피부깊이 체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성향에 속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미뤄두는 스타일입니다. 아껴먹는 스타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너무 아끼다 자기도 못 먹고, 남도 먹지 못하게 썩혀 버리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디까지 아끼고 준비해야 하는 것인지, 언제 쏟아야 하는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쏟을 때는 아낌이 없어야 합니다. 향유는 주인을 위해서 준비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다 쏟았습니다.

단 4:35 “땅의 모든 사람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에게든지 땅의 사람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고 할 자가 아무도 없도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를 알고 기회를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최고의 지혜일 것입니다. 엡 2: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시하시는 것이 아니며 다만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의 계획이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14가지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한과 때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지 생각해 봅시다.

1. 생명을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2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가 사람의 생명을 말한다면,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는 식물의 생명을 말합니다. 사람이나 동물, 식물의 생명 모두를 하나님이 주관하신 다는 겁니다.

2. 흥망성쇠도 사람이 주관할 수 없습니다.

3절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사람이 주관할 수 있다면 누가 죽는 것을 택하겠어요? 병들고 망하는 것을 택하겠어요? 다 흥하고, 다 성공하는 쪽을 택하겠지요. 우리는 인간의 생명을 지키지 못할 때 인간의 허무함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은 죽고, 망하게 되는 겁니다.

3. 희노애락을 사람이 주관하지 못합니다.
4절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우리에게 항상 좋은 일만 있지는 않습니다. 어려운 때가 있습니다. 슬픈 때도 있습니다. 이걸 마음대로 주관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 인생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늘 두 가지를 다 준비해야 합니다. 슬픈 일이 아주 있을 수 없으나 하나님께 맡기면 됩니다. 내가 다 고민하니까 해결이 안 되는 것입니다. 왜 예수를 믿습니까? 예수님께 맡기기 위함입니다. 슬픈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주님께 맡기세요. 욥과 같은 고백을 하세요. 하나님께서 주셨으니 하나님께서 거두시는 것이니 순종하면 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을 보세요. 단 3:17-18 “17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18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건져 낼 수도 있고, 안 건져줄 수도 있는 겁니다. 얼마나 훌륭한 믿음이에요? 어떤 결과가 오더라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겠다는 믿음이죠.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는 겁니다. 내 고집으로 못삽니다. 내 고집으로 행복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맡기세요.

4. 용도를 사람이 마음대로 주장할 수 없습니다.

5절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집을 짓는 건축자의 마음입니다. 어떤 돌을 쓸 것인가는 건축자에게 달려 있습니다. 사람이 보기에 아름다운 것, 사람이 보기에 좋은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버림받았지만 하나님께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보기에 못난 것을 더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래서 살맛 납니다. 우리 집사람이 가끔 저에게 “뭐하나 제대로 하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십니다.

5. 잃어버리고 찾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6절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새것을 찾아서 기쁠 때가 있고요. 소중한 것을 잃어서 슬플 때가 있습니다.
지금도 한국전쟁 때 헤어져 생사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 아버님은 할아버지 집에 가셨다 38선이 나뉘어져 북쪽에 갇히셨었습니다. 그런데 강원도 높은 눈 덮인 산을 7일을 걸어 남쪽으로 넘어 오셨습니다. 그러나 북쪽에 가족들이 있는 겁니다.

6. 사랑과 미움, 전쟁과 평화도 마음대로 안 됩니다.

사람들은 마음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합니다. 만약에 완전히 통제를 할 수 있다면 이 땅에는 사랑만, 평화만 가득할 것입니다. 지난 9월 22일 울산남부경찰서는 야산에서 떨어진 밤을 주인의 허락 없이 주웠다가 절도 혐의로 입건된 사람이 있습니다. 그냥 야산인줄 알고 밤을 주웠다가 농장주인이 고발당하는 바람에 절도가 된 것입니다.
아무리 도를 닦아도 안됩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으면 안됩니다. 결국 때가 말하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생이 허무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1. 현재에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때’라는 단어가 29번 나온다고 했는데요. 그 중에 긍정적인 때가 14번, 부정적인 때가 14번입니다. 1번은 1절에서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라고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좋은 때와 어려운 때가 교차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어떤 일을 만나든, 현실에 충실하게 살아야 하는 겁니다. 여름에는 “더워죽겠다. 빨리 겨울이 왔으면 좋겠다.” 그러고 겨울이 오면 “추워죽겠다. 언제 여름이 오지!” 그러고 살면 불행합니다. 오는 겨울을 즐기세요. 오는 봄, 여름, 가을을 기다리며 즐기면서 감사하세요. 감사하면서 산다는 것은 자연에, 하나님이 주신 세상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주어진 시간에 감사하며 사세요.
“시간을 낭비하기는 너무도 쉽다.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으려고 할 때, 사람들은 비로소 엄청난 금리에 놀란다.”(미야베 미유키)고 했습니다.

2. 정직하게 살아야 합니다.

17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 이는 모든 소망하는 일과 모든 행사에 때가 있음이라”
정직하게 살아야 합니다. 왜요,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시고 때를 주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정직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다윗이 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겠어요? 우리보다 죄를 덜 지은 사람이어서 그렇습니까? 그는 간음죄에다가 살인죄까지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회개하였습니다. 시 51편을 보면 다윗의 회개를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솔직히 고백을 하면서 10절에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정직하기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열왕기서에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유다 열왕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다윗과 같이 정직 하라는 것”(왕상 11:33, 14:8)입니다. 왕하 18:3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라고 합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것은 골리앗을 넘어뜨렸기 때문이 아닙니다. 정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 욕심 때문에 집을 어떻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사업을 어떻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정직하기를 위해서는 얼마나 기도했나요?

3. 영원을 사모하며 살아야 합니다.

11절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이 땅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래서 땅만 바라보며 사는 삶은 허무할 뿐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천국을 바라보고, 영원을 바라보고 살면 허무하지 않습니다. 우리교회 이름이 주앙교회 잖아요. 주를 바라보고 살라는 거예요. 결국은 영원한 것만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땅의 일이 허무하다는 것은 영원한 것이 못 된다는 뜻입니다.
‘경험을 소중하게 사용한다면 그 어떤 잘못도 시간 낭비는 아니다.’(오귀스트 로댕)고 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세상에서 엉망으로 산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가 더 중요합니다. 그동안의 우리의 삶을 헛되이 만들지 않는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안에 사는 것입니다. 요일 2:25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제가 좋아하는 지휘자 한 명이 있습니다. 이름이 좀 깁니다. ‘브루노 발터 슐레징어(Bruno Walter Schlesinger)’입니다. 솔직히 제가 음악을 잘 알아서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사람은 독일에서 태어난 유태인 지휘자이며 작곡가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 히틀러 시대에 음악을 하다보니 자기 국적을 가지고 음악을 계속할 수 없어서 나중에 국적을 오스트리아(1911년)로 바꿉니다. 그러나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까지 장악하니까 또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인이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뉴욕필하모닉(1947-1949. 음악 고문) 지휘자가 됩니다. 여러분! 뉴욕필하모닉 지휘자는 세계적인 음악가만 되는 겁니다.
제가 이 사람을 좋아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가 죽을 때 한 말입니다. 그는 자기 생애를 뒤돌아보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평생 동안 음악이 나의 고마운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내 인생을 돌이켜 볼 때 나는 오직 하나님께 감사하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또 하나는 그의 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구스타프 말러(1909-1911)’를 자기가 독립해도 되는 때에도 그를 끝까지 따랐다는 것입니다. 말러도 뉴욕필하모닉의 지휘자였습니다.

말러는 보헤미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근대 독일의 최대, 최후의 낭만파 교향곡의 작곡가이며 지휘자입니다. 그의 부모는 곧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 모라비아의 이글라우로 이주했고, 말러는 거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가 태어난 보헤미아는 현재 체코 공화국를 구성하고 있는 세 지방 중의 하나입니다. 체코를 동서로 나누어 동부를 체코 명으로 모라바(모라비아)라 부릅니다. 모라비안(Moravian)은 18세기에 이 지역에 살던 개신교인을 말합니다. 모라비안은 1725년에 로마 카톨릭의 탄압을 피해, 독일의 진젠도르프 백작의 영지로 이주한 사람들입니다.

저에게 마틴 루터 이후에 개신교에 역사적으로 제일 큰 업적을 남긴 단 한 사람을 뽑으라면 저는 진젠도르프를 뽑을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에 의해 개신교인이 멸망을 당하는 그 때에 진젠도르프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체코의 한 지역의 땅을 사서 그리로 카톨릭의 핍박을 피하여 개신교인을 이주시킵니다. 이것이 모라비안을 태동시킨 것입니다.
그런데 진젠도르프가 이러한 결심을 하게된 동기가 있습니다.
그가 1719년 네덜란드와 프랑스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는데 도중에 독일의 뒤셀도르프에서 ‘도메니코 페티’가 그린 가시관을 쓴 그리스도의 수난에 관한 그림을 보고, 그 앞에서 동상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습니다.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그림의 이름은 ‘이 사람을 보라’(Ecco Homo)였습니다. 그 그림 밑에는 이런 내용이 쓰여 있었습니다.
‘나는 너 위해 이것을 했건만 너는 날 위해 무엇을 했느냐?’ 진젠도르프는 그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여 오랫동안 당신을 사랑했지만 당신을 위해 어떤 것도 행하지 못했습니다. 지금부터 저는 당신이 이끄시는 어떤 것이라도 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결단하게 됩니다. 이런 그의 결단이 모라비안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1735년 10월 14일 요한 웨슬리는 동생인 찰스 웨슬리와 함께 식민지 주민들과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미국을 향해 떠났습니다. 그들은 2년 동안 조지아에서 사역했으나 별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1738년 2월 1일 그는 잉글랜드로 다시 돌아옵니다. 돌아오는 배 안에서 웨슬리는 모라비안(Moravian) 교도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그들이 갖고 있던 구원에 대한 확신과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에 도전을 받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모라비아 친구인 피터 뵐러(Peeter Bohler)의 간증을 통해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감리교의 뿌리입니다.

최고의 낭만파 작곡가 지휘자 말러는 모라비안 이었습니다. 신앙가운데 자라났습니다. 그의 제자 ‘브루노’도 모라비안 후예입니다. 둘 다 뉴욕필하모닉의 지휘자였습니다. 나중에 천재 음악가로 알려진 한 사람이 또 있습니다. 뉴욕필하모닉 상임 지휘자 였던 ‘레너드 번스타인(1958-1969)’입니다. 이 사람도 유대인입니다. 진젠도르프가 얼마나 큰 일을 했는지 모릅니다. 개신교를 카톨릭으로부터 살려냈습니다. 오늘날 현대 선교의 기초를 놓은 것도 이들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사용할 때를 알았습니다.
우리의 옥합은 그리스도께 쏟아 붇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고전 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현재에 감사하며, 늘 정직하게 살고, 영원을 바라보고, 주를 바라보고 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8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19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20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21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여 이르되 이 신성 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22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 마음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 23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24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25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26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니라”(눅 5:18-26)

오늘 본문에 중풍병자가 나옵니다. 중풍 병에 걸린 이 사람을 사람들이 침상 그대로 메고 나왔습니다. 스스로 일어나거나 걸을 수 없는 중증환자입니다. 이런 병에 걸려보지 않은 사람은 이런 환자의 심정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병에 걸렸다는 사실과 함께 병들면 사람들이 모두 싫어하고 떠나는 것이 더 슬프고 외로운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이 사람은 비록 중풍 병이 걸리기는 했지만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잘 나갈 때야 주위에 사람이 많겠지요. 그러나 병들어 보세요. 사람이 떠납니다. 싫어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면, 병자나 친구들은 서로를 아끼고, 신뢰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 친구들이 하는 행동을 보세요. 보통 사람이 생각하지도 못할 일을 합니다. 친구를 살리기 위해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장애를 극복해야 합니다.
병든 친구를 데리고 왔는데 장애물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쉽게 만날만한 환경이 되지를 못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떤 일이든 장애가 있습니다. 어려움이 있기 마련입니다. 아무 어려움 없이 뜻을 이루게 된다면 그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못합니다.
강원도 경제를 살린다고 카지노를 만들어 놓았는데요, 다른 사람 노름해서 사람 버려놓고 그 돈으로 잘살면 뭐하겠습니까? 생각의 틀을 바꿔야 합니다. 노름 자체가 나쁜 것은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거져 얻으려는 것입니다. 결국은 노름을 해서 망합니다. 혹 돈을 딴다고 해도 이 사람의 인생에 아무런 도움도 안됩니다. 돈의 가치를 모릅니다. 땀흘림의 수고를 모릅니다. 잘해보려고 노력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여러분! 오늘 병자의 친구들이 주변 환경을 탓하고 집으로 돌아갔다면, 내일 오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면 이 사건이 성경에 기록되지 못했을 겁니다. 아무 역사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희생을 감수해야 합니다.
남의 집을 헐었을 때, 책임은 누가 질 것이며, 변상은 누가 할 것입니까? 먼지가 날 것을 염려해서 지붕을 뜯지 않았다면 병을 고칠 수 있었을까요? 집수리 비용을 누가 낼 건가? 이러면서 토론하고 싸우고 있다면 지붕을 뜯지 못했을 겁니다. 희생이 없이는 결과가 없습니다. 누군가가 먼지를 뒤집어 써야했고, 누군가가 수리비용을 지불해야 역사는 이루어집니다. 친구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희생을 감수해야 합니다. 친구들은 모두 하나만을 생각했습니다. 이 친구를 살려야 한다.

예수 앞에 가야 합니다.
18절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어디로 갑니까? 목적지가 어디입니까? 예수님입니다. 너무 당연한 것 같지만 예수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예수께 오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를 만나지 못하면 아무 기적도 능력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를 믿고 따라가는데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중풍병자를 주님께 데려가듯이 나도 가야하고 우리 민족도 주님께 메고 가고 세계를 주님께 메고 나아가는 성도들 되기를 바랍니다. 자녀들도 주님께, 친구도 주님께로 우리의 이웃도 주님께로 우리의 집안 모두를 안고, 이고, 메고 중풍병자와 같이 예수 안에 들어갑시다. 그러면 마음에 중풍병, 가정에 중풍병, 사람과 사람 사이에 중풍병. 못쓰고 버림받은 인생도 살아나고 희망을 찾고, 쓸모 없는 사람이 필요한 사람이 되고 능력 있는 사람되어서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무엇으로 가능합니까?

그것은 믿음이었습니다.
본문 20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의 믿음”입니다. 친구들의 믿음입니다. 예수님께 가면 고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믿음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행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에 결혼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에 행동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병자를 대신하여 예수님께 나왔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방인이었던 백부장이 자기 하인을 위해 예수님을 찾아 왔었습니다. 나사로는 누이들이 예수님께 소식을 알렸습니다. 이러한 경우에 오늘 본문처럼 예수님이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라고 하셨습니다. 환자 본인의 믿음이 강조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를 더 생각해야 합니다. 친구입니다. 친구는 누구입니까? 이런 어려움이 있을 때 함께 할 사람이 있다는 것은 이미 이 친구의 믿음이기도 한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상관이 없는데 이런 수고를 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이러한 사정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쳐주실 때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20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우리의 병은 죄로 인한 결과입니다. 근본은 죄입니다. 이것을 용서받는다면 죄의 결과로 인한 육체의 질병은 고침을 받는 것입니다. 솔직히 오늘날 우리가 이러한 병 고침을 할 수 있느냐 할 때 저는 불가능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목사님 참 믿음이 없으십니다. 그렇게 말씀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할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주님께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예수님처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는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죄를 사해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입니다. 그 누구도 이것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모든 종교는 다 거짓된 것이며 그들의 교주 또한 거짓입니다.

옛날 한국에 김익두 목사님이 그랬다고 하잖아요. 교회 바로 앞집에 앉은뱅이 한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베드로, 요한도 고쳤는데 나도 한번 고쳐 봐야지!” 그리고는 열심히 기도를 하고 하루는 새벽기도 마치고 사람들 없는 틈을 타서 나가서 “일어나 걸으라!”고 하면서 머리채를 잡아 당겼는데 그만 머리카락만 한 줌 빠지고 못 일어났데요. 병자가 아프다고 고함을 지르는 바람에 창피해서 도망을 갔다고 합니다.

죄가 사해지니까 중풍병자가 낳았습니다. 이 기적이 일어날 때 예수님 바로 앞에 앉은 사람들이었는데요. 이들은 색안경을 끼고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바로 서기관들입니다. 서기관들이 어떤 사람입니까? 성경학자들입니다. 성경을 많이 안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열심은 또한 어느 정도였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그곳에서 예수님과 마주 앉을 정도였으면 아마도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부지런을 떨고 왔어야 합니다. 앞자리를 차지할 정도였으니 얼마나 부지런했고 열심을 냈을까요? 그런데 이들의 열심은 잘못된 열심이었지요. 동기가 잘못되었습니다. 마음을 열고 진리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온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예수를 책잡을까? 이런 비판적인 태도로 와 앉아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의 생각과 다를 때 즉각적으로 비판을 하였습니다.
본문 21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여 이르되 이 신성 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라고 합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지식 때문에 예수를 못 믿었습니다. 조금만 겸손했더라면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21절 “신성 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옛 개정성경에서는 “참람하다”는 말로 번역했었습니다. 이 말은 “블라스페미아”로 하나님의 권능과 위엄에 대한 도전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모독입니다(계 13:6). 예수께서 죄를 사하실 때(막 2:7), 메시야 임을 주장하실 때(막 14:64), 하나님과 동등하고 주장하실 때(요 10:30)에 신성모독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처형 역시 이 죄목으로 고소당하신 것입니다(막 14:64). 결국 이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교만이 문제입니다.

옛 성현은 마흔을 가리켜 ‘불혹(不惑)’이라 했습니다. 마흔이 되면 세상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삶과 일상을 단단히 간수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요즘은 마흔이 되어도 흔들리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세상 유혹에 흔들리고 시대가 빨리지나가서 그런지 40대가 불안합니다. 그런데 이 말을 뒤집어 보면 다른 것에 유혹을 받지 않는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지만 마흔이 되면 그만큼 자기 철학이 완성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자기 고집이 있는 겁니다. 이것이 불혹이 세상에 유혹되지 말라는 것이지 예수께 문을 닫아놓으라는 말은 아닙니다. 예수께 마음을 여세요. 마음을 열고 아이들을 보세요. 마음을 열고 이웃을 보세요. 마음을 열고 세계를 보세요.

제가 여러 번 러시아에 갔었습니다. 2005년도 갈 때는 공항심사대에서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별 이유가 없는 것 같은데 여권 가지고 가더니 인터폴에 검사해 본다고 하더니 나타나질 안는 겁니다. 이렇다 저렇다 말도 안 해주고 1시간을 세워두는 것입니다. 함께 비행기 타고 온 사람들은 다 나갔고 또 다른 비행기가 왔습니다. 밖에 짐도 걱정입니다. 그러나 러시아 사람들은 아무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너 어디한번 골탕을 먹어봐라 하는 심정입니다.
처음에 이 사람들이 공산국가 만들려고 불만 세력이 일어났습니다. 자기들이 사회주의 건설을 하여 잘사는 나라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자기들의 철학 때문에 하나님도 버렸습니다. 이 나라들이 어떤 나라였습니까? 소련이 100% 기독교국가였고, 폴란드, 헝가리, 체코, 루마니아, 동독 다 100% 기독교국가였어요.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한 동독이 본산지인데, 공산주의가 들어갔습니다. 왜 들어갔습니까? 세계적인 교회가 있고, 세계적인 오르간이 있고, 세계적인 예배가 있는데 왜 공산주의가 들어갔습니까? 교인들이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지 않고 불평불만만 했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는 불평불만만 하면 문을 열어놓는 거예요. 이 사람들 다 모아서 공산주의 만들었습니다. 교회생활이, 신앙이 무너지게 되고 감사가 떠나가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식어져 버릴 때 그 자리에는 어둠의 세력이 들어올 수밖에 없는 거예요.

예수님은 23절에서 서기관들에게 뭐라고 질문을 하셨습니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여러분! 어느 것이 쉬워요? 분명히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는 말이 쉬울 것입니다. 왜냐 하면이요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은 그 결과가 일어났는지, 안 났는지 표시가 안 나지만, 일어나 걸어가라고 했는데 안 일어나면, 김익두 목사님처럼 금방 들통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사실은 죄 사함이 더 어려운 것입니다. 어려운 것이 아니라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 외에는 죄를 사할 수 있는 분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24절을 보면, “24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마가복음에 “인자”라는 말이 14번 나오는데요. 막 8:29절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이후부터 더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14번 중에 12번이 막 8:29절 이후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본문 24절 인자(호 휘오스 안드로푸)는 누가복음의 핵심사상으로 34회 사용되었습니다. 이 말은 요 12:34를 제외하고는 모두 예수 자신을 사용하여 사용하였습니다. 원문상의 의미로는 人子(사람의 아들)아들을 의미하지만 이 말은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해 보세요.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 3:13)고 했습니다.
이 말은 문자 적으로는 ‘인자’이지만 의미상으로는 다니엘이 이상 중에 본 ‘인자’가 장차 올 메시야였던 것입니다(단 7:13). 인자로 오신 목적은 예수님의 고난을 우리의 죄를 대신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오셔서 다 주시는 것입니다.

무력으로 세계를 지배하려고 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히틀러가 그랬고 나폴레옹이 그랬습니다. 이 두 사람의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가 최고의 권력자가 된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35세의 나이에 스스로 황제가 되었습니다. 대관식 때 교황 비오 7세에게서 왕관을 뺏어 스스로 쓰고 황후인 조세핀에게도 씌워 줄 정도로 자신만만했습니다. 그리고 ‘나의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고 하면서 정신력으로 한때 전 유럽을 지배했습니다. 그는 전쟁에서 승패를 결정하는 것은 정신력이며 물질의 기여도는 10대 1이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 얼마나 유럽을 평정했으면 1808년에 나폴레옹에게 쫓겨 도망간 포르투갈의 돈 페드로 황태자가 브라질로 도망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1888년에 독립 선언을 하고 노예제도를 폐지하고 그곳 세력가들을 쫓아내고 1969년에 브라질을 세웁니다. 그러니까 나폴레옹에게 패하고 도망간 사람들이 세운 나라가 세계에서 5번째로 큰 브라질입니다. 나폴레옹의 불똥이 브라질까지 틴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당시에 유럽의 천하무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골칫거리는 영국이었습니다. 가장 강력한 해군력을 가지고 있는 데다 지중해 건너편에 있어 나폴레옹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말을 잘 듣지를 않았습니다. 이런 영국을 길들이기 위해서 1806년 ‘대륙봉쇄령’을 내립니다. 유럽 국가로 하여금 영국과의 모든 교역을 일제히 금지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영국과의 무역에 의해 경제를 유지하던 러시아는 이 명령 때문에 자신들이 죽게된 것입니다. 결국 러시아는 ‘대륙봉쇄령’을 어기고 맙니다. 이로 인하여 1812년 나폴레옹이 6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공격하게 됩니다. 그러나 러시아군은 도시와 곡식에 불을 질러, 프랑스군이 손대지 못하게 하고 시베리아로 깊숙이 달아났습니다. 모스크바를 점령하기만 하면 러시아가 항복할 것이라고 예상하였으나 러시아는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러시아에서 겨울을 지낼 준비를 하지 않았던 프랑스군은 결국 퇴각하게 됩니다. 이 순간을 기다렸던 러시아군은 철수하는 프랑스군의 뒤를 쫓아가 공격하여 멸망시켰습니다.
미국 워싱턴 포스트 지는 인류 역사상 최대의 실수는 나폴레옹과 히틀러가 러시아를 침공이라고 했습니다. 이 당시 러시아는 정교회(기독교) 국가입니다. 하나님 믿는 나라를 쳐들어갔다가 나폴레옹도 히틀러도 망했습니다. 인간의 욕심은 결국은 멸망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

본문 25절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6절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병자를 데리고 주님께 나아가는 일이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희생을 감수하며 어려움이 이겨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부족함이 하나님을 모르고 살 때는 그 뿐입니다. 그냥 가난한 것입니다. 그냥 불쌍한 것입니다. 그냥 장애자일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으면 달라집니다. 우리의 부족함, 우리의 가난함, 우리의 장애를 통하여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이러한 축복이 오늘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하고 나오신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버지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

뉴질랜드는 지구상에서 가장 오염이 안된 아름다운 나라중의 하나입니다. 인구가 적기도 하지만 처음 사람이 이 섬에 들어가 산 것이 얼마 안됩니다. 겨우 천년 전에 남태평양의 마오리족이 이주하여 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이 섬에 들어가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고사리입니다. 고사리를 우리는 산나물로 알았는데 뉴질랜드의 고사리는 나물이 아니라 나무로 자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사리 나무입니다. 고사리 나무는 뉴질랜드에 널려 있는 광대한 숲을 이루는 주종입니다. 이 나무는 뉴질랜드의 국수입니다. 이 고사리 나무는 목재로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 고사리 나무에 얽힌 아름다운 이야기가 마오리족에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고사리 나무는 정 많은 아버지의 눈물처럼 이슬로 단 하루도 빠짐없이 밤마다 찾아와 이슬 눈물을 흘립니다. 자식이 그리워서 울고 자식을 보호해 주기 위해서 밤마다 우시는 아버지의 눈물이라는 것입니다. 그 눈물을 먹고 자란 고사리 나무는 특수한 독성이 있어 주변에 독충도 해충도 뱀 한 마리도 살지 못합니다. 아버지는 살아 계셔서 고사리 나무를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나오는 아버지의 모습은 절대적인 분입니다. 아버지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라고 하십니다. 동시에 아버지는 자녀에게 축복을 주시는 분입니다.
“에서가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가 빌 복이 이 하나 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하고 소리를 높여 우니”(창 27:38) 에서는 야곱에게 아버지(이삭)의 축복을 빼앗기고 울고 또 울었습니다. 아버지가 줄 수 있는 축복을 야곱에게 다 해 주었기 때문에 상속 적인 의미의 축복은 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이런 한계성을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다. 무한한 축복을 주실 수 있습니다.

모세의 둘째 아들 “엘리에셀은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 나를 도우사 바로의 칼에서 구원하셨다 함이더라”(출 18:4)고 합니다. “아버지의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아버지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이 자신의 아버지도 되는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시 68:5)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는 잃어버렸던 고아와 같은 존재입니다.

세상에 불쌍한 사람들이 많지만 그 중에 제일 불행한 사람들은 어려서 아버지를 잃은 어린이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미국에는 아버지가 없는 자녀를 위해 주말에 아버지 노릇을 해 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몇 시간 동안 함께 놀아주기도 하고 시간을 함께 보내주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잘 해 주고, 잘 놀아 줘도 아버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아는 친구 목사님 중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어려서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얼굴조차 기억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어려서 세상에서 제일 부러운 것은 자기도 남들처럼 ‘아버지’라고 마음껏 불러보고 싶은 것이었답니다. 특별히 친구 아이들이 아버지 자랑을 하고 아버지가 무엇을 사줬다던가 어디에 데리고 갔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그 자리에 더 이상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서 핑 도는 눈물을 닦고 들어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을 때 얼마나 감사하고 감격했는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고 하십니다. 우리가 육신의 아버지와 함께 영으로는 하나님 아버지를 모시고 산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시 89:26)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말하는 것은 무한히 주시는 분이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모로부터 받은 아름다운 추억이 있어야 그 삶이 창의적이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치유 목회 하시는 목사님으로부터 어떤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시골 어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 시골에서 골목대장처럼 신명나게 동리 아이들과 놀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잣집 아이가 오징어를 물고 먹으며 나타났는데 그것이 하도 먹고 싶어서 빼앗아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집에 돌아가 부모를 데리고 이 목사님 집에 찾아와 야단을 친 것입니다. 그 부모는 목사님에게 “어떻게 아이를 교육 시켰기에 남의 아이의 것을 빼앗아 먹느냐”고 꾸중한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목사님이 자기 아이를 야단치면서 “너는 공부나 하지 왜 항상 사고만 저질이고 다니느냐 너 같은 놈을 어디다 쓰겠느냐”고 책망한 것입니다. 조금만 잘못해도 네가 무엇을 하겠느냐? 너를 어디에 쓰겠느냐? 책망하니까 그 목사님은 아버지로부터 아름다운 추억은 하나도 남지 않고 책망 받은 나쁜 상처만 남게 된 것입니다. 긍정적인 자아상이 완전히 부서지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신명나게 놀고 기가 살아있던 아이가 힘이 없고 아무 것에도 자신이 없는 아이로 자라게 된 것입니다. 그는 결혼을 했지만 행복하지 못했고, 나이 50이 넘도록 목회도 잘 안되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치유 목회 클리닉에 참석하여 자신의 어린 시절의 받은 상처를 깨닫고 발견하고 치유를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한 번은 주일에 설교하다가 팔순이 넘은 아버지에게 ‘자기를 사랑한다’는 말을 한 번 해달라고 부탁하고 사랑하고 용서를 구하는 아버지의 품에 안겨서 엉엉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온 교인이 다 함께 울어 버렸다. 그 날 별다른 설교를 하지 않았지만 온 성도가 가장 큰 은혜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목사가 되었어도 어렸을 때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고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무거운 짐을 그대로 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에게 교육상 칭찬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잘못한 것을 책망하기보다는 잘한 것을 칭찬해 주면서 교육하면 됩니다. 칭찬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어린아이가 아닌 어른도 똑같습니다. 제가 인터넷에 사진 올려놓고 누가 좋은 사진 잘 보았다고 댓글 달아놓으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혹시 또 댓글 달렸을까 궁금해서 또 가봅니다. 50먹은 목사가 그러는데 어린아이들은 어떻겠습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인자로 오셨겠습니까? 우리를 칭찬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케 해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제자가 될 수 없는 바닷가의 어부들이 예수님을 쫓아가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할 수 있다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찾고, 두드리면 열린다는 것입니다. 해 보라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하늘에서 하나님 아버지가 듣고 응답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어부이기 때문에, 못 배웠기 때문에 응답이 안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제자가 예수님께 “주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이 아들이시니이다.”라는 고백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고 칭찬을 해 주셨습니다. 그 위에 교회가 세워진다고 하셨습니다. 천국 열쇠도 주셨습니다.
백부장이 하인의 병 고침을 위해 예수님을 찾아와 간구할 때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 8:10, 눅 7:9)고 이방인에게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사실 세상의 아버지는 감동을 줄 때도 있지만 실망을 줄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는 변함이 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돌봐 주시고 우리의 부족을 채워 주시며 잔잔한 시냇가와 푸른 초원으로 인도해 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크리스천처럼 큰 축복과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의 전설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히브리인 한 사람이 자기 아들을 등에 업고 광야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길가는 도중에 친구를 만났습니다. 친구가 그 등에 업힌 아이를 가르치면서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아버지는 “내 아들일세”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그 등에 업힌 아들이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버지는 기가 막혀서 “왜 내가 네 아버지가 아니냐? 그래서 이렇게 업어 주지 않느냐?” 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아이는 다시 “업어준다고 아버지가 되느냐?”고 아버지란 것을 증명하라고 대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기가 막힌 일입니다. 제가 95년도에 러시아에 갔습니다. 컴퓨터 교육하기 위해서 집에서 선교사님들이 컴퓨터를 자동차에 싣고 왔습니다. 그런데 돌아갈 때 경찰에게 걸렸습니다. 차를 조사하더니 컴퓨터를 보고 이게 당신 거냐고 물어봅니다. 그렇다고 하니까 그럼 그것을 증명하라고 합니다. 증명서가 있냐는 겁니다. 기가 막혀서 말이 안나옵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자녀)되기를 거부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많은 현대인들도 하나님 아버지 없이 살아 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결국은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인정하든, 안 하든 이미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에서 사는 물고기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냐고 묻는 것은 마치 물고기가 물이 어디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갔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세 가지만 말씀드립니다.

첫째,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가 잘못한다고 즉각 벌하시고 채찍질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아니라 오래 참고 기다리는 아버지이십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기를 때에도 인내가 필요합니다. 사람 구실 못할 것 같다고 너무 성급하게 서둘 것이 없습니다. 눅 15장에 보면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는 오랫동안 인내를 가지고 기다립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사랑은 오래 참는다고 했습니다. 인내한다고 했습니다. 견딘다고 했습니다.
제가 육신의 아버지께 책망 받은 적이 딱 한번 있습니다. 평생동안 아버지께 한번 야단 맞았습니다. 우리 아버님이 대단한 분이지요. 그런데 그 한번이 마음속에서 지워질 수 없을 만큼 제 가슴이 남았습니다. 제가 시골 집 네모 귀퉁이에 앉아 있는데 밖에 나가시더니 낮을 들고 오시더니 귀퉁이에 있는 제 목에 낮을 들이대시는 것입니다. 저는 어찌 놀랐든지 무조건 아버님께 항복했습니다. 제가 부모님 말 안 듣고 살살 거짓 말 시키고 하니까 아버님이 저를 확실히 교육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이지요. 저는 아버님의 그 때 그 일을 지금도 잊지 않고 기억합니다. 그러나 그 일 후에 단 한번도 저를 책망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둘째, 하나님 아버지는 항상 우리를 이해하시고 용서하십니다.

우리는 항상 부모의 입장에서 어른의 입장에서 자녀들을 대하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녀들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또 용서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을 이해하시기 위해 성육신하셔서 인간 편에서 인간을 보시고 이해하셨습니다. 이러한 관점의 변화가 참 중요합니다. 자녀의 입장을 이해하는 부모는 책망을 하기 이전에 이해합니다.

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풋볼을 무척 좋아해서 중학교, 고등학교 모두 풋볼 팀에 들어갔는데 늘 후보선수였기 때문에 한 번도 경기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소년의 팀이 경기가 있는 날이면 소년의 아버지는 어김없이 경기장의 관중석에서 소리를 지르며 응원을 했습니다. 아들이 대학에서도 풋볼 팀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앞으로 4년 동안의 대학 풋볼 경기 입장권을 한꺼번에 사버렸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여전히 단 한 번도 시합에 나가질 못했고 아버지는 여전히 관중석에 앉아 있었습니다. 졸업을 얼마 앞둔 어느 날, 그 아들은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가 속해 있던 팀이 경기에서 지고 있었는데, 늘 후보 자리를 묵묵히 지키던 그가 감독에게 제발 자신을 한 번만 출전시켜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경기에 출전하게 되었는데 기적처럼 활약해서 팀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경기가 끝난 후 그가 울먹이며 감독에게 말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맹인이셨습니다. 아버지는 모든 경기를 보러 오셨지만 내가 뛰지 못한 것을 모르셨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처음으로 제가 경기하는 모습을 하늘에서 보실 수 있었을 겁니다.”

셋째, 하나님 아버지는 구하는 것을 주십니다.

본문에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아버지에 성경이 제일 많이 연결된 부분은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을 말하고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의 시작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입니다.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신 장입니다. 전체 26절인데요 ‘아버지’란 단어는 무려 39번나옵니다. 히브리인들은 같은 단어를 잘 반복하여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단 한번만 나오는 단어도 많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이렇게 많이 나오는 것은 아버지께 구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만이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포도나무의 비유가 나옵니다. 아버지와 예수께서는 뿌리와 나무처럼 하나이시고 우리는 거기에 가지입니다. 그리고 붙어만 있으면 절로 과실이 열린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우리의 사정을 제일 잘 알고 계신 분입니다. 아버지는 기도를 들으시는 분입니다. 아버지는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제 이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를 받은 우리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요 14:31)는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프랑스의 유명한 철학자 에밀 구에는 “나는 날마다 새로워지며 나를 만들어 가는 법을 배웠다”라고 말했습니다. 얼마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생각입니까? 그러나 이 사람은 결국 자살해 죽었습니다. 적극적인 생각과 긍정적인 생각을 우리는 신앙과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애국과 구제와 봉사를 신앙과 혼동해서 안됩니다. 예수 안 믿어도 우리보다 더 애국하고, 예수 안 믿어도 우리보다 이웃 사랑 더 잘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그 어떤 것도 주님의 말씀대로, 하나님과 함께 하시지 않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직전에 “6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행 1:6-7)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섭섭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라면 이스라엘이 독립하는 것을 아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여쭤보았는데… 지금 로마 속국에서 나라의 독립만 간절히 기다리는데 “너희의 알 바 아니요”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의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주 안에서 자녀도, 주 안에서 사업도, 주 안에서 출세도 이루어져야 합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니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주안에서 행해야 합니다. 우리 삶의 모든 동기는 교회 안에서, 말씀 안에서, 은혜 안에서, 아버지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없는 이 세상은 다 헛된 것입니다. 세상의 것을 얻으려다, 세상의 여인을 사랑하다가 삼손은 죽고 말았습니다. 롯은 세상의 물질을 따라가다가 그의 가족들까지 다 죽여버렸습니다. 삼손은 자기만 죽었지요. 롯은 온 집안이 다 망했어요. 어디에서? 세상에서. 세상에서 잘 살고 행복하게 세상에서 멋대로 살려고 하다가 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저주를 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집에서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최고의 축복인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