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하게 하옵소서

“14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15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17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4-17)

하나님 당신의 제단에 꽃 한 송이 바친 적이 없으니 절 기억하지 못하실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 모든 사람이 잠든 깊은 밤에는 당신의 낮은 숨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너무 적적할 때 아주 가끔 당신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어떻게 저 많은 별들을 만드셨습니까? 그리고 처음 바다에 물고기들을 놓아 헤엄치게 하였을 때 저 은빛 날개를 만들어 새들이 일제히 하늘로 날아 오르게 하였을 때 하나님도 손뼉을 치셨습니까?
아! 정말로 하나님 빛이 있어라 하시니 거기 빛이 있더이까?…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대단한지 잘 모릅니다. 예수님 때의 사람들도 그랬습니다. 사람들은 말씀보다는 표적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천지창조도 말씀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예수님의 수많은 기적도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로마의 백부장은 자기 하인을 고쳐주기 위해서 예수님께 “말씀으로만 하옵소서”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4:1-11 보면 사탄이 예수님을 세 번 시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첫 번째 시험은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하라”(3절)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시험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6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시험은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내게 주리라”(9절)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시험 중에 마지막 시험은 이해가 됩니다. 자기에게 절하라는 것이기 때문에 굴복을 의미합니다. 또 자신의 신분과 세상의 것과 바꾼다는 의미에서 확실히 시험이 맞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시험과 두 번째 시험이, 왜? 이것이 시험이 되는지를 잘 몰랐습니다. 그냥 사탄이 말한 대로 다 보여주면 그것은 시험에 지는 것이고 안 하면 이기는 것인지 이해가 되질 않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보면 세 번째 시험에서는 나오지 않는 것이 첫 번째와 두 번째 시험에서는 나옵니다. 바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3, 6절)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정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예수께서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시험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기 말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사탄의 말을 듣는 그 자체가 시험이며 잘못입니다. 예수께 실제로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것은 예수님도 알고 사탄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능력은 사탄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사람을 살리는데 사용해야 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시험에서 사탄을 물리치실 때에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4절)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육신을 위해서는 떡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하나는 영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육신을 위해서만 사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영을 위해서 살아간다면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육신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한정된 것입니다. 반드시 죽음이 있습니다. 육신만을 위해서 산 사람은 영원한 것을 위해서 전혀 준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직접 오신 목적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주라
14절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으며 말씀을 따라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다. 우리 또한 말씀을 전하는 일입니다.
저는 가보지 않았지만 여러분들이 가보면 확인해 보세요. 중국에 공자의 묘에 가면 그 앞에 묘비가 하나 있답니다. 그런데 그 묘비에는 글자가 하나도 없답니다. “공자 앞에서 문자 쓰지 말라”고 그래서 그렇게 세웠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문자 쓰지 말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
“너희는 나라들 가운데에 전파하라 공포하라 깃발을 세우라 숨김이 없이 공포하여 이르라 바벨론이 함락되고 벨이 수치를 당하며 므로닥이 부스러지며 그 신상들은 수치를 당하며 우상들은 부스러진다 하라”(렘 50:2) 하나님의 말씀은 자신이 있습니다.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확실합니다. 거짓이 아닙니다. 신실하신 분입니다.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 4:2)
한국사람이 얼마다 재능이 많고 부지런합니까?
“대한민국에서는 안 되는 것이 없다.”, “안되면 되게 하라” 그래서 우리가 존재한다는 긍정적인 사고가 사회 전반에 걸쳐 있습니다. 자신이 있습니다. 하면 된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미국 헐리우드에서 한국 사람이 어떻게 영화와 드라마를 만드는지 탐방을 왔답니다. 대본에는 날씨가 비가 안 오는데 촬영하는 날 비가 오는 거예요. 감독은 즉석에서 대본을 바꿨습니다. 비가 오는 장면으로요. 그리고 배우는 금방 비가 오는 장면에 맡게 연기를 합니다. 얼마나 변화에 잘 적용하는지 모릅니다. 헐리우드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혀를 내두르고 갔답니다. 이 재능 가지고, 순발력 가지고 복음 전해야 합니다.

세상에 속하지 말라.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14절)
사탄은 이 세상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는 이루어졌습니다. 사탄의 전략은 세상 것을 가지고 유혹하는 일입니다. 사탄이 영원한 것을 가지고 유혹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사탄은 우리에게 영원한 행복을 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면 세상에 속하고 싶어도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 같도다”고 하셨습니다. 이리 가운데서 살아남는 방법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지혜이고 하나는 순결입니다. 순결이 있어야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신학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성경신학과 조직신학입니다. 실천신학분야는 성경신학과 조직신학을 어떻게 현장에서 적용할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나중에 생긴 것입니다.
성경신학은 “무엇이 다른가?”에 관심이 있는 분야입니다. 주로 합동교단입니다.
조직신학은 “무엇이 같은가?”에 관심이 있는 분야입니다. 주로 통합교단입니다.
합동은 너무 나누어서 문제가 있지만 그래도 이 학문이 필요한 겁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속하지 않기 위해서 무엇이 다른지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왜? 신학, 신학 하는지 아십니까? 신학의 배경이 없이 열심만 있으면 신비주의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신비주의자는 하나님의 능력을 개인적인 유익을 위해서 사용합니다. 세상과 합하게 됩니다. 세상이 우리는 싫어한다면 정상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좋아한다면 비정상입니다. 세상에 속하지 말고 예수께 속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이 우리를 싫어하면 할수록 예수님은 우리를 좋아하십니다.
34대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1959년 9월 27일 후르시초프를 초청해 놓고도 만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러 갔습니다. 우리나라에 미국 대통령이 여러 번 왔지만 예배 드렸습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처음부터 큰 나라가 된 것은 아닙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시작된 것은, 더구나 대통령 선출이 시작된 것은 불과 200여 년 전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 짧은 역사 속에 200년 전 미국 인구는 700만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고 주일을 잘 지키는 민족이었기에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의 날을 거룩하게 지키는 성도되시기를 바랍니다.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기도하라
15절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주님 가르쳐 주신 마 6:13에서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우리 부모님들이 처음에는 아이 낮고 하는 말이 “다만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해 놓고는 키우면서 욕심이 늘어납니다. 다시 마음을 비웁시다.
요즘 수능을 본 아이들 집집마다 난리입니다. 솔직히 서울에 있는 몇 개 대학에 들어간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입니까? 저는 그 학교에 들어가는 학생이 이상한 학생 같습니다. 수능시험을 망치고 실실 웃고 다니는 딸을 보고 엄마가 한마디합니다.
“너는 시험 망쳐놓고 웃음이 나오냐?” 그랬더니 엄마 기분이 좋지 않을 것 같아 자기라고 웃어야 할 것 같아 웃었더니 엄마가 되어 가지고 딸의 기분도 모른다고 또 난리가 났습니다.
현, 산정현교회 김관선 목사님이 서초동에 살고 계시는데 딸을 유학시키겠다고 장로님들에게 말하니까 얼굴색이 달라지시더랍니다. 그래서 광주에 작은 학교가 있는데 그리로 보내겠다고 하니까 장로님들의 얼굴이 펴지시더랍니다. 서울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중간이 안되던 아이가 광주의 시골학교로 가서 공부를 하니까 반에서 1, 2등 한답니다. 서울 강남에서 유일하게 전학 온 학생이랍니다. 처음에는 무슨 사고 치고 온 아이가 아닌가 생각했답니다.
현재 미국 풀러선교대학원 한국학부 부원장으로 계신 이광길 교수님이 있습니다. 이분은 대학에 왜 가야하는지를 몰라서 공부를 안 해서 재수를 5번했답니다. 그렇게 재수를 많이 하니까 공부 못하는 사람이 이해가 잘 된답니다. 어려워 보지 않은 사람은 어려움을 모릅니다.
우리 아이가 지금 건강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를 요구하셨지만 그것은 성령이 함께 하실 때 가능한 것입니다. 성령 없이, 감당할 능력 없이 하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의 최종적인 기도는 악에서 구해 달라는 것입니다.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17절)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시 25:5) 다윗의 주의 진리로 지도 받기를 원했습니다. 우리의 최종적인 목표는 주님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인도하시기를 바라야 합니다. 주의 진리는 주의 말씀가운데서 나옵니다.
“진리의 말씀이 내 입에서 조금도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주의 규례를 바랐음이니이다”(시 119:43)
“그의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의 입술에는 불의함이 없었으며 그가 화평함과 정직함으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말 2:6)라고 예수님에 대해서 예언했습니다.

여러분은 ‘거룩’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여러 가지로 이해할 수 있으나 저는 이 거룩을 “사람이 말할 수 있는 제일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고 하셨습니다.
미얀마에 가면 ‘쉐다곤 불탑(파고다)’이 있습니다. 미얀마를 세운 1453년 페구왕조 때에 세운 것인데 둘레가 426m, 높이가 98m입니다. 이 탑 꼭대기에는 73캐럿의 다이아몬드가 박혀있고 총 5,448개의 다이아몬드 2,317개의 루비, 사파이어, 대형에메랄드가 박혀있다고 합니다. 이번에 미얀마 갔을 때 이곳에 갔는데 저는 안 들어갔습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먼저 입장료가 50불입니다. 저는 돈 들어가는 일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것도 결국 절에 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두 번 째는 그곳에 들어가려면 신발을 벗어야합니다. 신발을 벗는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자신들은 그곳을 거룩한 성지로 여기는 것입니다. 저는 신발 벗고 그곳에 들어가기 싫었습니다. 예전에 인도에 갔을 때도 소 우상 있는 곳을 모르고 신발 벗고 들어갔는데 난리를 떨어 가지고 그냥 나왔습니다. 제가 약간 고 지식 한데가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만이 거룩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분 앞에서만 신을 벗기를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우리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말이 ‘거룩’입니다. 구약에서 이 단어는 하나님께만 해당되는 말입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어 주시다니요. 예수님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거룩한 지경까지 데리고 가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기도가 이루어 진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거룩한 사람들입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 1:15)고 베드로가 권면합니다.

마지막 날 천사들은 이렇게 노래부르면서 예수님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요 4:8)
 

전부를 넣었느니라

“41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4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막 12:41-44)

오늘은 제가 돈 얘기를 좀 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이 돈 이야기를 하니까요. 교회 가니까 돈 얘기만 하더라. 돈 소리만 나오면 신경이 날카로워지시는 분이 있는데 마음놓고 들으십시오. 오래 전에 종교개혁자인 칼빈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교회의 문제는 돈에 대해서 너무 많은 얘기를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돈에 대하여 바른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 문제다.” 요한 웨슬리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나는 주머니가 회개하지 않는 사람의 회개를 믿을 수 없다.” 한 사람이 복음을 듣고 자기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속에 받아들이고 구원을 체험했다고 하십시다. 그가 정말 새 사람이 되었다면 저는 먼저 현저한 변화를 가져와야 할 삶의 영역 중에 하나가 돈 씀씀이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헌금에 반영되지 못한다면 우리의 회심과 구원, 우리의 신앙, 우리의 변화를 믿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헌금은 헌신의 상징이며 감사의 열매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우리가 잘 아는 지극히 평범한 한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결코 평범하지 않은 헌신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42절에 보시면 본문에 나타난 주인공의 정체를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가난했습니다. 경제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성경은 그녀가 과부였다고 말합니다. 이 여인은 경제적인 어려움뿐만 아니라 외로운 여자였습니다. 정서적 고통을 안고 있었던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을 향한 헌신의 귀감이 되었던 여인의 모습을 우리는 본문에서 만나게 됩니다.
예루살렘성전에는 들어갈 수 있는 여러 단계가 있습니다. 아무나 다 들어갈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제일 바깥에 이방인의 뜰이 있습니다. 이방인은 여기까지입니다. 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방인의 뜰이 있고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면 여인들의 뜰이 있습니다. 여인들은 여기까지 올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여인들의 뜰 바로 맞은편에 보면 거기 미문 이라고 하는 문이 하나 있습니다. 아름다운 문입니다. 그런데 미문 곁에 아마 예수님은 그 어느 곳에 걸터앉아서 성전 입구에 있는 헌금함에 헌금을 드리고 그 안에까지 들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본문 41절에 보시면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하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교회처럼 예루살렘 성전도 헌금함에다가 헌금을 넣었어요. 예수께서 ‘보실새’ 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보실 새라는 단어가 헬라어에서는 미완료시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헬라어에서 미완료시제라는 것은 계속적인 의미가 있어요. 주님이 그냥 헌금함에 헌금 내고 들어가는 사람들을 어쩌다 한번 슬쩍 보신 것이 아니라 어떤 의도를 가지고 계속 예수님이 보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헌금함에 헌금을 넣고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예수님이 보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특별히 예수님의 시선이 한 여인에게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가슴은 아마 뛰고 계셨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바로 이 여인에게서 예수님은 그 시대의 참된 헌신,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헌신의 모습을 발견하셨습니다. 이 여인이 보여준 그 헌신의 본질, 거기서 우리는 참된 헌신이 무엇인가를 배울 수가 있습니다.

참된 헌금은 우리의 삶의 주인 되신 하나님만을 의식한 결과 이여야 한다라는 사실입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누가 보는 것, 알아주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우리가 헌금을 드리는 것뿐만 아니라 기도하는 것, 선한 행실 모두가 살아 계신 하나님, 오직 하나님만을 의식한 결과가 되어야 한다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말 성경으로 보면 그냥 헌금함이 하나만 있었던 것처럼 생각되지만 사실 그 당시 예루살렘 성전 입구에는 헌금함이 13개가 있었습니다. 13개가 주~욱 나란히 놓여 있었어요. 그리고 이 헌금함은 놋쇠로 만들어졌습니다. 놋쇠로 만들어 진 헌금함을, 흔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당시에 나팔궤라고 불렀습니다. 나팔궤라고 왜 불렸느냐 하면 헌금함의 입구가 나팔처럼 생겼어요. 아마 헌금함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이 13개의 헌금함이 다양한 헌금의 용도들을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제사용으로 대부분 많이 쓰여졌고 한 9개 정도는 여러 가지 다양한 제사에 따라서 그때그때 드려지는 제물헌금 들이었고 한 4개 정도는 특수한 용도였습니다. 성전유지용, 성전보수 용, 혹은 구제를 위해서 쓰여지기도 했고, 어떤 것은 제목을 지정하지 않은 자유 헌금함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헌금이라는 것은 지폐가 아니라 동전이었기 때문에 더군다나 헌금함은 놋쇠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헌금을 집어넣으면 떨어지는 소리가 납니다. 그런 데 아마도 그 당시에 자세히는 몰라도 성전을 관리하던 관리자 측에서는 이 헌금을 증가시키려던 어떤 순수하지 못한 의도를 가지고 아마 놋쇠로 제작했을 가능성도 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좀 많이 넣는 것, 적게 넣는 것을, 돈이 떨어지는 소리를 가지고 사람들을 구별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좀 많이 가치가 있는 돈을 넣으면 쟁그렁 하고서 둔탁한 소리를 내면서 떨어집니다. 그러나 좀 시원찮게 내시면 그것이 떨어지는 소리가 쨍하고 조금밖에 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41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아마 부자들이 먼저 앞서서 헌금 넣고 들어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부자들이 다 그랬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진 않아요. 어떤 부자는, 아마도 아주 가치가 높은 그러한 양의 화폐를 뚝 떨어트리면 소리를 냅니다. 쟁그렁 그러면 어깨에 힘을 주고 아마 이렇게 하면서 내가 돈 많이 냈다는 것을 과시하는 형식이었을 것입니다.
42절에 보시면 본문에 “한 가난한 과부는” 과부 차례가 됐어요. 이 과부가 얼마를 넣었 다구요?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 로마 사람들의 화폐 단위 가운데에서 최소 단위가 고트란트입니다. 최소 단위. 유대 사람들의 화폐단위가치 중에서 제일 작은 것이 렙돈이였어요. 렙돈이 얼마나 되느냐. 한 렙돈 이 달러로 환산하면 8분의 1센트예요. 8분의 1센트. 그러니까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10원도 안돼요.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렙돈 이라는 말의 뜻 자체가 ‘얇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얇은 동전. 그래서 렙돈을 집어넣으면 퉁 소리도 별로 안나요. 소리도 안나요. 사람들이 어느 정도 내는지를 알 수 있었던 그 놋쇠 헌금함의 성격으로 미루어보아서 아마 이 여인은 이 장면에 와서 굉장히 주눅이 들고 또 자기 열등감을 가질 가능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더군다나 자기 보다 앞서서 그리고 상당한 양들의 돈을 집어넣고 당당하게 행진해 들어가던 부자들의 모습, 쟁~그렁. 그 다음에 이 여자 차례가 되었을 거란 말이죠. 두 개의 렙돈 중 하나를 집어넣었습니다. 쟁 소리가 안나요. 누가 나를 보지 않을까? 이 순간 자기를 의식하면서 상당히 부끄러워질 수도 있었고 상당히 무안해질 수 있는 순간입니다.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 나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나 같으면 아예 헌금을 안 했을 겁니다. 창피 당하려고 뭐 하러 헌금을 하겠어요. 그러나 저는 이 순간 이 장면 속에서, 이 여인이 하나님만을 의식했다는 것을 보게됩니다. 주님이 그것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양이 얼마나 많으냐 적으냐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그녀의 최선이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하나님만을 의식한 이 여인의 태도가 이 헌금을 넣을 수 있게 했습니다. 여러분! 많은 것을 드리기가 쉽습니까? 적은 것을 드리기가 쉽습니까?

영국의 캠브리지대학의 찰스 스터드라는 학생이 하나 있었습니다. 공부도 잘 했어요. 학교에서도 일등을 달리는 학생이었고 크리캣이라는 운동선수였어요. 영국 전체에서 금메달을 따기도 했습니다. 보장된 출세의 길이 그 앞에 열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캠퍼스집회에 참석했다가 복음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는 선교사로 가기로 선포했습니다. 학교 선생님들이 아깝다고 생각했습니다. 보장된 출세 길. 돈과 그리고 명예와 권력과 그 앞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선교의 길에 나서자 누군가가 와서 그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보게 이것은 자네에게 지나 친 희생이 아닌가? 이때 찰스 스터드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예수그리스도가 나의 하나님이시고 나를 위해 죽으셨다면, 그분을 위한 나의 어떤 희생도 결코 크다고 할 수 없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캠브리지 7인의 한 사람으로 중국으로 건너가, 후에 허드슨 테일러와 함께 중국 복음화를 위해 일했습니다. 53세가 되던 1913년,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아프리카 심장부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벨기에령 콩고(옛 자이레공화국)에 ‘아프리카 심장 선교회(The Heart of Africa Mission)’을 설립하였고, 이것이 ‘WEC 국제선교회(1918)’의 전신이 되었습니다. 평범한 한 사람의 비전으로부터 시작한 WEC 국제선교회는 복음주의적 국제 선교 단체가 되어 현재 50개국에서 모인 1,700여명의 선교사가 75개국에서 사역하고 있습니다. WEC은 개인적인 헌금 모금을 하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기도하면서 자비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선교사님들의 생활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래서 영국의 WEC선교사들은 기도합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살아있습니다. 이 정신과 믿음이 WEC을 이끌어 나가는 것입니다.
창립자 찰스 스터드에 관한 일화가 있습니다. 중국으로 선교하기 위하여 영국을 떠날 때 빈손으로 갔었습니다. 부자 집 아들인데 돈을 가지고 떠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때부터 내려오던 집이 있었는데 그 집을 유산으로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은 선교하러 가니까 그 집은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아버지가 영국에서 모은 것이니 영국정부의 것이라고 하면서 정부에 기증했습니다. 그리고 중국으로 떠났습니다. 중국에서 20여 년 선교하다가 영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영국 정부는 개인재산을 모두 국고로 돌릴 수는 없다고 하면서 재산의 일부를 찰스 스터드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주었습니다. 그 재산은 부동산으로 주었는데 정원이 있는 큰집을 두 채를 주었습니다. 당시에 그 한 채를 팔아 아프리카 선교를 위해서 사용하고 현재 그 한 채를 WEC의 본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제가 2003년 8월 14일(목)에 그곳을 방문했습니다. WEC에서 3일 체류하였습니다. 숙소를 배정 받아 찾아가는 길은 디귿 자 모양의 건물이라 상당히 복잡했습니다. 처음 찾아가는 사람은 1주일정도 있어야 파악이 된다고 합니다. 이런 구조의 건물에는 약 200여 개의 방이 있고 로비와 세미나와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공간이 있습니다. 1층의 작은 방들은 각 팀별로 사역을 관리하는 방들이 제각기 있었습니다. 그리고 건물 옆의 부속건물 같은 곳에는 각종 기계들이 즐비했는데 각종 농기계들 그리고 지프차가 몇 대 있었습니다. 이 차들은 아프리카의 각 국가의 승인 형식이 다르기 때문에 필요할 경우 그곳에 맡도록 수리하여 보내진다고 합니다. 본부는 입구서부터 건물까지 1km는 족히 넘어 보였으며 사방으로 잘 다듬어진 드넓은 정원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식당에서 주방장으로 봉사하는 분도 영국의 시골에서 목회하고 은퇴하신 목사님 부부가 주방을 맡아 봉사하며 섬기고 있다고 했습니다.(예’ 한국선교사 훈련받을 때 일화)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한다면 하나님의 것을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아껴야 합니다. 절약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그 누구라도 “하나님께 드릴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아끼지 않기 때문에 없는 것입니다.” 물질이 남아서 드리는 것, 시간이 남아서 드리는 것은 하나님은 별로 기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사무엘하 23장 13-17절에 보면 다윗이 사울에게서 도망 다닐 때 아둘람 굴에 숨어서 꼼짝도 할 수 없었습니다. 다윗은 자신과 함께 했던 용사들을 기록하면서 그들의 아름다운 일화 하나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무더운 추수 때 다윗이 베들레헴 성문 곁의 시원한 물을 마셨으면 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립니다. 이 소리를 들은 삼십 두목 중 세 용사가 목숨을 걸고 블레셋 사람의 진영에 들어가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옵니다. 목숨을 건 다윗에 대한 사랑과 충성의 모습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17절에서 “이는 목숨을 걸고 갔던 사람들의 피가 아니니이까” 하면서 “피 같은 물”을 마시지를 못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여호와께 부어드렸습니다.

하나님께 드린 헌금은 ‘피 같은 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헌금을 잘 사용해야 합니다. 그래서 헌금은 하나님의 나라 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사용해야 합니다. 선교를 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값지게 사용해야 합니다. 영혼을 구하는데 사용해야 합니다.
빌 하이블 목사님 이야기입니다. 빌 목사님이 교회 사무실에서 개인 용도의 편지를 비서를 통하여 발송하였습니다. 그런데 비서가 교회의 우표를 사용한 것입니다. 이 사실을 늦게 알고 빌 하이블 목사님은 이 일을 두고 하나님께 깊은 회개를 합니다. 하나님의 것은 작은 것이 없습니다. 액수가 문제가 아닙니다. 개념이 문제입니다.

베트남에 갔을 때 선교사님 집에서 지낼 때가 있었습니다. 이분은 생활이 그렇게 좋지 못할 때였습니다. 그런데 통장에 70만원이 있었는데 이 돈을 사용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왜 이 돈을 사용하지 않으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선교사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70만원의 돈은 한국의 어느 시골교회를 갔을 때 어느 권사님이 헌금한 것인데 쓸 수가 없습니다.”, “왜요?” 권사님은 교회에 나오시는 길이 버스정거장으로 두 정거장 되는데 이 길을 10년을 걸어서 다니시면서 150원 하던 교통비를 아껴서 모아둔 돈을 가장 중요한 일에 쓸 거라고 모아 두셨답니다. 그런데 선교사님이 그 교회를 방문했을 때 헌금을 한 것입니다. 돈이라고 같은 돈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피 같은 돈입니다. 이것이 헌금입니다.

우리가 십일조에 대해서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십일조를 드렸으니까 나머지는 내 것이다라는 생각이예요. 아닙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십의 구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십일조 정신에 근거하여 드렸다면 어떻게 되냐하면 십분의 일을 드린 후에 십분의 구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해요. 십분의 일 드렸으니까 다했다. 끝이 아니라 나머지 십분의 구도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십분의 구를 어떻게 사용할까?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 기도하고 쇼핑하십니까? 기도하고 쇼핑하세요? 내가 십분의 구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주님의 인도하심 따라 내가 이렇게 쓸 때 하나님이 기뻐 하실까? 십분의 구도 마땅히 그 분의 것이라면 나에게 맡겨 주신 것에 불과하고 그 분이 주님이시라면 그 분의 뜻에 맞도록 내가 십분의 구도 관리하는가? 이것이 온전한 십일조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인 마르틴 로이드 존스라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이 목사님이 쓴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영국의 어떤 농부가 소를 기르는데 그 소가 새끼를 낳았어요. 송아지를 낳았어요. 두 마리를 낳았어요. 농부가 너무너무 기뻐 가지고 자기도 모르게 할렐루야 송아지 새끼 두 마리 낳고서 너무 감사해 가지고 자기 부인보고 이 농부가 말하기를 여보 송아지 새끼 두 마리야 우리 하나는 주님의 것으로 하고 주께 드리십시다. 아내도 아멘 하고 동의했습니다. 얼마 후에 송아지 새끼 한 마리가 비실비실 앓더니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농부가 울상 이 돼 가지고 방안에 있는 자기 부인에게 하는 말이 “여보! 큰일났어 주님의 송아지가 죽었어. 주께 드린 송아지가 죽었어.” 왜 하필 주님의 것이 죽지요. 자기 것이 아니 구요. 이건 주님의 것, 이것은 내 것이 아니예요. 내 전체가 주님의 것입니다 100% 주님의 것입니다. 이게 헌신의 정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돈의 십의 일조를 바치라는 것이 아닙니다. 전부를 바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 믿음의 행위를 주님께 보여야 합니다. 그 때만이 하나님도 우리를 향해서 하늘 문을 여실 것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을 보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2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3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4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네 아들들은 먼 곳에서 오겠고 네 딸들은 안기어 올 것이라”(사 60:1-4)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변화하게 되는가?, 어떤 계기가 주어졌기에 변화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봅니다. 끊임없는 교육을 통해서 사람은 만들어지고 다듬어 진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그 많은 교육과 가르침을 주었는데도 도무지 변화되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느 설문조사에 보니까 목사님들이 제일 무력감을 느낄 때가 어느 때냐고 물었습니다. 첫 번째가 “수많은 설교를 통해서도 꿈쩍도 안 하는 사람들을 볼 때”라고 대답했습니다.
설교를 통해서, 교육을 통해서 알기는 아는 것 같은데 그것 가지고는 변화가 안됩니다. 사람이 움직여지지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면 그렇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 사람은 180도 달라집니다. 새로운 감동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사무엘상 4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싸우다가 하나님의 궤를 빼앗기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때 며느리 비느하스가 임신하여 아기를 낳게 되는데 그 때 시아버지와 남ㅍ편이 죽었다는(19) 소식을 듣고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게서 떠났다고 한탄하면서 아기의 이름을 ‘아가봇’이라고 지었습니다. “또 이르기를 하나님의 꿰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게서 떠났다 하였더라”(삼상 5:22)고 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궤와 하나님이 함께 했습니다. 성전 제일 안쪽에 바로 이 하나님의 궤가 놓여 있었습니다(대하 6:11). 여기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대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엘리 제사장의 며느리 비느하스는 믿음이 좋은 여자입니다. 자기가 지금 아들을 낳았지만 하나님의 궤를 생각하면서 자기가 아들을 낳은 것에 대해서는 20절에 관념하지도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 아이(아가봇)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죽었으니까 대제사장이 될 아들입니다. 그러나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니 자기 아들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궤 없는 제사장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전 총신대 총장을 지내신 김의환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일제 시대 때 초등학교를 다니셨습니다. 4학년 때 일본 선생님이 교실마다 걸려있는 일본 신사의 검이라고 하면서 신사의 실제 검이 있는데 그것은 2300년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김의환 4학년 학생은 그 검이 2300년 되었다면 녹슬어서 칼이 부러져 지금까지 있을 수 있겠느냐고 선생님께 물었습니다. 순전히 과학적 호기심으로 질문한 것인데 담임 선생님은 자기 집으로 끌고 가더니 칼을 뽑아들고 흥분을 해서 목에 겨누었다 떼었다 하더랍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내가 신사의 검이 부러졌다”고 말한 것은 일본이 전쟁에서 패한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나는 너를 지금 죽일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분을 못 참고 한참을 칼을 가지고 목을 겨누었다고 합니다. 한참을 그러더니 분이 누그러졌는지 그만두고 다음날 선생님들을 다 소집하고 이 학생을 당장 퇴학시켜야 된다고 했답니다. 그 때 부 교장이 한국선생님이었는데 이 학생을 퇴학시키려면 먼저 나를 해고하고 이 학생을 퇴학시키라고 하면서 만일 퇴학시킨다면 나는 일본 고등법원에 이 사건을 상고하겠다고 하여 그냥 없던 일로 마쳤답니다. 일본 신사도는 상징이지요. 무슨 그 검이 일본을 지켜주겠습니까.

그러나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궤가 없으면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의 궤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에게 예수가 있으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예수 없는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이 없습니다.

김의환 목사님은 그 때부터 반일감정에 사로잡혀 꼭 일본을 원수로 갑아 주리라는 생각 속에 공부했답니다. 그런데 나중에 예수 믿고 보니 일본사람이 그렇게 불쌍해 보이기 시작했답니다. 그래 일본에 선교사로 가기로 생각하고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OMF 국제 선교단체에서 싱가포르에서 훈련을 받고 일본에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이 비자를 주지 않고 입국을 거부하여 한국으로 돌아와 교수를 하실 수밖에 없었답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을 모를 때는 ‘이브람’(큰 아버지) 였지만 하나님을 믿고 그의 이름은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이 너는 더 이상 ‘아브람’ 큰 아버지가 아닌 ‘아브라함’ 열국의 아버지라고 고쳐 주셨습니다. 큰 아버지는 유대인만의 아버지입니다. 그러나 열국의 아버지는 온 나라의 아버지입니다(창 17:5).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두면 안됩니다. 물은 가두면 썩습니다.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움직여야 됩니다. 움직이지 않으면 일단은 편안한 같지요. 그러나 실상은 죽어 가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것은 움직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이 우리가 복된 것 8가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8가지 복이지만 제일 중요한 한가지가 있습니다. 9절 “화평케 하는 자”입니다. 화평케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잖아요. 하나님의 아들이 되면 다 되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부분적인 복으로 볼 수 있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다릅니다. 화평이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용서의 종교요 화평의 종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영광입니다. 이 세상에 더 이상의 영광은 없습니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는 영광입니다. 하나님은 용서와 회개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베풀기 위해서 주십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출 33:18)라고 합니다. 이 때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이 19절에 나옵니다.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거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혼자 잘먹고 잘살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은혜를 베풀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것은 베풀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람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위해 일하려고 합니다. 가만히 있지를 않습니다.

에스겔 37장에 보면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환상을 보여주면서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라고 질문하십니다. 이에 대해서 에스겔이 과학적 증거들을 들이대면서 “절대 안됩니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라고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겔 37:3)라고 대답했습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한국의 축복은 하나님이 선교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2007년 여름 사태 이후 한국인들은 모두 철수하라는 정부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5년 간 사역한 C선교사 부부는 철수하지 않았습니다. 그분들은 문화사역을 하는데 그들의 언어 문화를 사랑하였습니다. 그리고 아프가니스탄 TV방송국의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었는데 그곳 방송국과 우리나라 모두에게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정부는 그곳에 계속 있을 수 있도록 허락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이미지를 새롭게 하고자 대장금을 방영하고자 지원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대장금이 방영된 후에 한국을 예의 바른 나라, 음식이 발전한 나라로 다시 보는 것입니다. 한류 열풍은 한국선교의 길을 열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메시야에 대한 예언입니다. 동시에 그 메시야를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본문 4절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고 하십니다. 사방을 보세요. 넓게 보세요.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세요. 사람들이 빛 가운데로 나아옵니다.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로 나아옵니다.

선교할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열심히 돈 벌어서 헌금하는 것도 선교하는 일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선교학적 용어로 멤버케어, 토탈케어 라는 말이 요즘 등장했습니다. 한마디로 선교사를 잘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선교지에서 스트레스를 받으면 쉽게 풀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보니 항상 마음의 무거움이 그분들에게 존재합니다. 어떤 선교사는 필리핀에서 빠찡꼬에 빠져서 패인이 되다 시피한 분도 있습니다.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전쟁을 하다보면 사상자가 나오게 됩니다. 그분들을 도와 주어야 합니다.
캐나다에서 오신 분이 이야기하는데 “수다 선교회”가 있답니다. 참 좋은 선교회입니다. 우리는 정신과 상담 받으라고 하면 꼭 무슨 병자처럼 취급되고 또 그것도 부담이 됩니다. 그런데 수다 선교회는 너무 좋습니다. 부담 없이 수다만 떨면 됩니다. 수다 떨다보면 스트레스 다 날아가고 회복이 됩니다.
지난번에 한 선교사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오전에 오셨는데 그분하고 저녁까지 함께 지냈습니다. 처음에 그 선교사님은 힘이 하나도 없이 축 처져서 들어오셨고 저는 쌩쌩한 체 오전에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선교사님은 살아나고 저는 축 쳐져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있다면 선교를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나누어야 합니다. 함께 해야 합니다.

북한에서 태어나 미국 가서 사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어차피 고향을 떠난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미국까지 가게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분들 중에 한00라는 분이 계십니다. 미국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살면서 집도 있고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지진이 일어나 집이 부서지고 보험도 들지 못해 한푼도 건지지 못했습니다. 하루아침에 망한 것은 물론이지만 정신적 충격이 더 컸습니다. 그 때 북한의 굶어죽는 어린이들이 생각났습니다. 두만 강변을 다녀온 추억을 떠올렸습니다. 그들이 눈에 밟히기 시작했습니다. 부인에게 더 이상은 못 견디겠다고 하면서 나 북한 사람들 위해서 살아야 할 것 같다고 하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짐 싸주면서 가라고 해서 현재 12년째 사역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북한에 들어가서 김일성 초상 앞에 데리고 가더랍니다. 그 앞에서 고개 안 쑥이면 큰일입니다. 그런데 절 안 하니까 남자 몇 명이 오더니 끌고 가더랍니다. 그러더니 당신이 진짜 예수쟁이라고 하면서 북한에 빵공장 만드는 것을 허락해서 현재 매일 3만 명에게 빵을 무료로 급식해 주고 있습니다.

내년 2010년이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에서 선교대회가 열린지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1910년 6월 14일(화)에 열렸습니다. 한국에서도 15명이 참석했습니다. 이중에는 게일 선교사, 마펫 선교사, 언더우드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한국인으로 유일하게 윤치호 선생이 포함되었습니다. 그 때 보고한 내용에 보면 당시 한국은 960만 명의 인구 가운데 20만 명의 성도로 급성장했다고 했습니다. 또 예배당을 짓기 위해 자신의 소를 파는 이들이 있었다고 보고합니다.

지금 한국처럼 축복 받은 나라가 없습니다. 제사장의 나라가 된 것입니다. 종엽이가 어제 총신대학원 시험 치렀는데 경쟁률이 5대 1입니다. 장신대원도 다른 신대원도 비슷합니다. 4명은 그냥 집에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일본에 가면 기가 막히게 잘 지어진 캠퍼스 학교가 있습니다. 고베신학교입니다. 미국의 어떤 대학교와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습니다. 역사도 100년이 넘습니다. 그런데 학생이 5년 전에 12명이었는데, 그 중에 한국 학생이 3명입니다. 그리고 5년이 지난 현재 한국학생이 6명, 일본 학생이 1명 있답니다. 유럽 신학교의 고민도 다르지 않습니다. 신학생이 오질 않는 답니다. 독일은 목사만 되면 국가에서 목사에게 필요한 것은 다 지원해 줍니다. 1년 4차례 양복과 안경 등은 다 해 줍니다.
그런데 독일 교회를 빌려서 한인교회하던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꽤 큰 교회라 그 교회는 독일 목사가 3명 있는데 돌아가면서 일한답니다. 주일에 한국 목사님이 필요한 일이 있어 담임 목사님을 만나야 되는데 그 목사가 없어서 다른 목사님에게 물어 보았더니 교회에 안 나왔답니다. 주일날 목사가 교회에 안 나온 겁니다. 그것도 담임 목사가 말입니다. 그래서 물어 보았답니다. 왜 교회에 안 나왔냐고요? 그랬더니 하는 말이 이웃교회는 이혼해서 목사가 그 교회에서 쫓겨났답니다. 이혼 당하는 것보다, 집에서 아이들하고 놀아주는 것이 낫지 않겠냐고 하더랍니다.
짐 싸서 북한에 보내준 집사님이 잘하시는 것입니다. 주기철 목사님도 경찰서에서 나온 아들을 다시 어머니가 돌려보냈습니다. 너 혼자 나와서 잘 살아서 뭐하냐고 다시 가라고 해서 가서 순교하셨습니다. 한국 여자들 좀 독한데 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위해서 잘하는 것입니다.

한국인에게는 뜨거움이 있습니다. 정이 있습니다. “가슴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하면 안됩니다. 머리에 열 받으면 안됩니다. 머리는 서양 사람들이 발전했습니다. 시스템을 잘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가슴이 없습니다. 뜨거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인에게는 뜨거움이 있습니다. 정이 있습니다. 밥 먹다가 한사람이 더 오면 국에다 물 좀 더 붓고 숟가락만 올려놓으면 몇 명이 더 와서 먹어도 문제없습니다. 침대도 그렇습니다. 이부자리 하나 더 피면 됩니다. 좀 끼어서 자면 다 잡니다. 한국인은 융통성이 있습니다. 긍휼이 있습니다.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습니다. 따뜻한 가슴이 있습니다. 정이 있습니다. 눈물이 있습니다.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만 모시면 됩니다. 바탕이 좋습니다. 옥토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외국 선교사님들도 한국사람처럼 하는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기도할 때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어 보았습니다. “오늘은 코리안 스타일로 합시다” 통성으로 기도하자는 이야기입니다. 울고불고 뜨겁게 기도하자는 이야기입니다. 코리안 스타일은 열정입니다.
우리에게 힘이 있다면, 우리에게 물질이 있다면, 우리에게 지혜가 있다면 모두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소망합니다. 이러한 축복이 우리 주앙교회에서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2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3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4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시나니 5 너는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6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7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 (시 91:1-7)

한국 속담에 ‘업친데 덥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을 더 사실적으로 표현한 속담이 있습니다. “염병에 까마귀 소리”라는 말입니다. 고치지 못할 병에 재수 없이 까마귀소리까지 들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인간의 모습은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 없는 사람에게는 마치 하나님의 말씀이 이와 같이 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소망을 두면 다릅니다. 기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 기쁜 소리가 성경에 있습니다. 복음입니다. 오늘도 이 복음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9년 6월 11일, 세계보건기구가 H1N1 인플루엔자의 전염병 경보 수준을 대유행으로 격상했습니다. 이러한 전염병의 대유행 선언은 1968년 이후 41년 만에 처음 있는 일입니다.
1918년 인플루엔자는 스페인 독감으로 알려진 유행성 독감의 일종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8년부터 1919년까지 유행하는 동안 5,000만 명에서 약 1억 명의 감염자가 발생하여 사망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1914년부터 1918년 11월 11일 독일의 항복으로 끝났으니까, 4년 4개월 동안의 전쟁은 1918년에 발생한 전염병 때문에 마쳤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더 이상 싸울 수가 없습니다. 싸울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죽으니까요.
인류 역사상 단기간에 이렇게 많은 사망자를 발생시킨 사건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제1차 세계대전 때 4년 4개월 동안 약 900만 명이 전쟁으로 죽었는데 인플루엔자에 걸려 1년 동안 죽은 사람이 5,000만 명 – 1억만 명이니까 전쟁으로 사망 한 것 보다 전염병에 결려 죽은 사람이 약 10배 이상 많은 겁니다.
하나님은 보다 못해 전염병을 보내셨는지 모릅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 등의 주요 연합국과,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 헝가리의 주요 동맹국이 양 진영의 중심이 되어 싸웠습니다. 따지고 보면 모두가 기독교 국가였습니다.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는 모두 기독교 국가입니다. 마찬가지로 독일에서 루터가 나왔고 개신교가 발전했습니다. 그런데 민족적인 감정 때문에 싸웠어요.

히스기야 왕이 하나님께 기도하여 생명을 15년 동안 연장 받았습니다(왕하 20:1-11). 그가 회복된 후에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이 외견상으로는 히스기야를 축하하기 위해 사절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를 설득하여 앗수르 세력에 대항할 비밀동행을 맺으려는 것이었습니다. 주의가 산만한 히스기야는 바벨론 사절에게 그의 창고를 모두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자 이사야는 그런 그의 행동을 크게 책망했습니다(왕하 20:12-19). 앗수르는 유다에게 강제로 과중한 조공을 요구하였고 예루살렘을 파괴하기로 결정하였으나 하나님께서 전염병을 보내어 하룻밤에 18만 5천 명의 앗수르 군을 죽게 함으로써 그 성을 구원하셨습니다.

성경에서는 전염병이 발생하는 이유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재앙으로 나옵니다. 물론 그러한 관점에서만 기록된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을 심판하시는 방법은 세 가지입니다. 전쟁(칼)과 기근과 전염병입니다. 우리는 혹 하나님이 직접 심판하시는 구약의 상황과는 다를 지라도 이러한 일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있는지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또 우리가 회개할 것이 있는지 우리 자신들을 뒤돌아보아야 합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사명을 받고 애굽의 바로를 만나서 하는 말입니다.
“그들이 이르되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가도록 허락하소서 여호와께서 전염병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하나이다”(출 5:3)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애굽을 떠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전염병으로 죽이실 것에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애굽의 바로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이 더 두려운 것입니다. 모세는 이런 경험을 했습니다. 그래서 바로와 맞설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의 정탐을 두고 크게 실망했습니다. 그곳에 있는 아름다운 땅과 과실은 탐나지만 그곳에 자신들이 이길 수 없는 민족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그들의 실망감은 곧 하나님이 이 백성에게 실망한 이유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인도한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더 이상 이 민족에게 더 무엇을 보여 주어야 한단 말인가?”하는 하나님의 실망이 어찌나 크셨던지 민수기 14:11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 하겠느냐 …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하시면서 “내가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고 네게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민 14:12)고 모세에게 제안합니다. 이제 그들은 전염병으로 다 죽여버리고 다른 크고 강한 나라를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간청으로 이 일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죄에 대한 벌로 전염병을 보내십니다.

사무엘하 24장에 보면 다윗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무리하게 인구조사를 하여 하나님께 범죄 합니다. 다윗은 이 일을 후회하면서 말하기를 “다윗이 백성을 조사한 후에 그의 마음에 자책하고 다윗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삼하 24:10) 고 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통계조사를 잘 했는데 왜 이것이 하나님께 범죄가 되었는지 언 듯 이해가 안됩니다. 우리는 24절에 요압장군의 보고를 통해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칼을 빼는 담대한 자가 팔십만 명이요” 전쟁을 위해서 인구조사를 했다는 겁니다.
성경의 민수기는 말 그대로 인구를 조사한 책입니다.
민 1:1-2 “1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둘째 해 둘째 달 첫째 날에 여호와께서 시내 광야 회막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회중 각 남자의 수를 그들의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라 그 명수대로 계수할지니”라고 말합니다. 2차 인구조사 때도 마찬가지입니다(26:1-2).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했습니다. 자기의 생각에 의지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잘 한다고 일을 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일이라도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은 일은 안됩니다.

다윗의 이 불신앙으로 하나님은 갓 선지자를 보내 세 가지 재앙의 벌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십니다.
“갓이 다윗에게 이르러 아뢰어 이르되 왕의 땅에 칠 년 기근이 있을 것이니이까 혹은 왕이 왕의 원수에게 쫓겨 석 달 동안 그들 앞에서 도망하실 것이니이까 혹은 왕의 땅에 사흘 동안 전염병이 있을 것이니이까 왕은 생각하여 보고 나를 보내신 이에게 무엇을 대답하게 하소서 하는지라”(삼하 24:13) 다윗은 고민 끝에 사흘 동안 전염병을 선택했습니다. 그 때 죽은 사람이 15절 “칠만 명이라” 고 했습니다. 다윗은 이 처참한 광경을 목격하면서 차라리 “다윗이 백성을 치는 천사를 보고 곧 여호와께 아뢰어 이르되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거니와 이 양 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하건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치소서 하니라”(삼하 24:17) 자신의 집을 벌해달라고 통곡합니다. 이 양 무리가 무엇을 알기에, 또 무슨 죄를 지었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이유를 알 수 없는 징벌에 놓일 수가 있습니다. 어쩌면 다 이해가 안되실 것입니다. 왕의 범죄로 인하여 백성이 이유 없이 죽게된다는 사실을, 그러나 구약 시대에는 적어도 그랬습니다.

오늘 시편 91편은 이런 경험을 똑똑히 한 다윗이 기록한 것입니다. 그는 전염병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전염병이 왜 백성에게 일어났는지를 알았습니다. 3절 “심한 전염병”(데베르 후오트)은 치명적인 전염병입니다. 무서운 전염병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자신의 죄 때문입니다. 자신의 불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전염병에서 벗어나려면
첫째, 본문 1절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하나님의 그늘 아래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벗어나면 안돼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그늘에서 사는 것을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그늘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어느 CF에 “집 나가면 개 고생이다”라는 카피가 있었습니다. 집 나가면 개 고생으로 끝나지만,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면 멸망입니다. 하나님의 품이 얼마나 좋습니까. 어머니의 품 같은 곳 아닙니까.

둘째, 본문 2절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나님을 믿는 겁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입니다,
7절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

셋째, 여호사밧 왕이 기도하기를 “만일 재앙이나 난리나 견책이나 전염병이나 기근이 우리에게 임하면 주의 이름이 이 성전에 있으니 우리가 이 성전 앞과 주 앞에 서서 이 환난 가운데에서 주께 부르짖은즉 들으시고 구원하시리라 하였나이다”(대하 20:9) 했습니다. 교회에서 부르짖어야 합니다. 요즘은 백신에만 의지하는 것 같습니다.

옛날에는 전염병이 한번 돌면 백신이 없고 치료제가 없었으니까 그냥 속수 무책으로 죽는 겁니다.
청일전쟁 후 심한 전염병이 서울에서 번져 나갔습니다. 이 때 두 분의 의사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닥터 윌리암 제임스 홀(미국 감리교 해외 선교회 소속)입니다. 제임스 홀은 30세에 조선에 온 선교사입니다. 그가 조선에 올 수 있었던 것은 17살 때(1877년 1월) 목수 견습공으로 일할 때 심한 기침과 열이 계속되어 거의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죽음에서 살아난 홀은 “이제 나에게 주어진 이 짧은 인생을 어떻게 살까?” 고민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공부를 하기로 결심을 하고 당시 교실이 하나밖에 없던 그렌 뷰엘 학교에서 공부하고 교사자격증을 따서 2년 간 교사 생활을 합니다. 그는 그밖에 생명보험회사 세일즈맨으로 일해서 번 돈을 가지고 1885년에 온타리오주에 있는 퀸즈 대학교 의과 대학을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대학에서 선교회를 접하고 조선까지 오게됩니다. 처음 부산항에 도착하여 인천항으로 들어와 서울까지 오게됩니다. 그리고 그들의 선교지인 평양에 이르게 됩니다.
당시 영국 영사관에서 철수를 권고했으나(당시 미국 영사관은 없었음) 의사로서 죽어나가는 환자들을 버리고 갈 수 없어 환자를 치료하다 과로와 전염병에 걸려 자신이 죽었습니다. 당시 평양은 외국인 금지 구역이었습니다. 자신은 죽었지만 1897년 2월 평양에서 개원한 감리교병원. 일명 기흘병원(홀 기념병원)이 세워졌습니다. 남편을 잃은 아내 닥터 로제타 홀은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혼자서 나중에 서울로 와서 ‘동대문 부인 병원’(현 이대 부속병원)을 세우고 현재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인 ‘경성여자의학 전문학교’를 열었습니다. 이들의 희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들을 파송한 미국 못지 않은 의료시스템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덕분입니다. 복음 때문입니다. 주님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 버리면 안됩니다.

요즘 유행하는 신종 인플레인자만 위험한 전염병이 아닙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세계적으로 약 20억 명이 비만이라고 추정합니다. 지구 인구의 3분의 1이 비만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미국은 알코올, 마약, 먹기 중독 등 3대 중독자의 나라라는 말을 듣습니다. 미국 성인의 65%중에 6∼19세 청소년의 비만이 15%입니다. 비만은 고혈압, 심장병, 동맥경화증, 당뇨병의 원인이 되고 지방을 제외한 다른 영양소의 부족으로 각종 질병에 취약합니다. WHO는 비만을 악성 전염병으로 취급합니다.
그런데 국제연합 산하 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에 따르면 8억 명이 기아에 시달리고 있으며, 매일 25,000명 이상의 사람이 기아로 사망하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1초에 다섯 명 꼴의 어린이가 기아로 굶어 죽는다고 합니다.

우리 속담에 “남의 염병이 내 고뿔만 못하다.”, 아무리 남의 큰 걱정이라도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에게 관계없는 일은 대단하지 않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남의 염장(염통) 썩는 것 보다 내 손톱 썩는 것이 아프다.”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남의 아픔을 다 알고 함께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노력해야 합니다. 힘써야 합니다. 멀리만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첫째요, 또 다음이요 오직 이 한 법만을 말씀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낭비하지 맙시다. 주님은 그런 우리를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시 91:14)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십자가에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박으면서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분은 나의 이름을 아십니다. 나를 부르십니다.

저는 상이라는 것을 타본 적이 없어 제 이름을 부르는 경험을 별로 해 보지 못했습니다. 강수경 집사님은 어머님 말씀을 들으니까 어려서 공부를 너무 잘해서 학교에서 항상 맨 앞줄에 서 있었데요. 상타러 빨리 뛰어 나가야 하니까요.
저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한번 있었습니다. 군대 훈련소에서 훈련을 다 받고 퇴소식 하는데 제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상을 준 것은 아니구요, 퇴소식을 마치기도 전에 저를 장성이 타는 지프차에 태워서 데리고 나왔습니다. 이건 상보다 더 대단한 영광입니다. 많은 동료들이 바라보는 앞에서 그렇게 나왔습니다. 아마 동료들은 분명히 대단한 집 아들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지만 기분은 좋았습니다. 하나님이 내 이름을 부르는 순간 우리는 감동 그 자체일 것입니다.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나를 높여 주기 위해서 부르시는 것입니다. 구원의 초대입니다. 다른 어떤 곳에서 이름이 불려지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반드시 마지막 날에 하나님이 부르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