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하게 하옵소서
“14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15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17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4-17)
하나님 당신의 제단에 꽃 한 송이 바친 적이 없으니 절 기억하지 못하실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 모든 사람이 잠든 깊은 밤에는 당신의 낮은 숨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너무 적적할 때 아주 가끔 당신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어떻게 저 많은 별들을 만드셨습니까? 그리고 처음 바다에 물고기들을 놓아 헤엄치게 하였을 때 저 은빛 날개를 만들어 새들이 일제히 하늘로 날아 오르게 하였을 때 하나님도 손뼉을 치셨습니까?
아! 정말로 하나님 빛이 있어라 하시니 거기 빛이 있더이까?…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대단한지 잘 모릅니다. 예수님 때의 사람들도 그랬습니다. 사람들은 말씀보다는 표적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천지창조도 말씀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예수님의 수많은 기적도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로마의 백부장은 자기 하인을 고쳐주기 위해서 예수님께 “말씀으로만 하옵소서”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4:1-11 보면 사탄이 예수님을 세 번 시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첫 번째 시험은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하라”(3절)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시험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6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시험은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내게 주리라”(9절)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시험 중에 마지막 시험은 이해가 됩니다. 자기에게 절하라는 것이기 때문에 굴복을 의미합니다. 또 자신의 신분과 세상의 것과 바꾼다는 의미에서 확실히 시험이 맞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시험과 두 번째 시험이, 왜? 이것이 시험이 되는지를 잘 몰랐습니다. 그냥 사탄이 말한 대로 다 보여주면 그것은 시험에 지는 것이고 안 하면 이기는 것인지 이해가 되질 않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보면 세 번째 시험에서는 나오지 않는 것이 첫 번째와 두 번째 시험에서는 나옵니다. 바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3, 6절)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정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예수께서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시험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기 말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사탄의 말을 듣는 그 자체가 시험이며 잘못입니다. 예수께 실제로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것은 예수님도 알고 사탄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능력은 사탄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사람을 살리는데 사용해야 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시험에서 사탄을 물리치실 때에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4절)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육신을 위해서는 떡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하나는 영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육신을 위해서만 사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영을 위해서 살아간다면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육신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한정된 것입니다. 반드시 죽음이 있습니다. 육신만을 위해서 산 사람은 영원한 것을 위해서 전혀 준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직접 오신 목적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주라
14절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으며 말씀을 따라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다. 우리 또한 말씀을 전하는 일입니다.
저는 가보지 않았지만 여러분들이 가보면 확인해 보세요. 중국에 공자의 묘에 가면 그 앞에 묘비가 하나 있답니다. 그런데 그 묘비에는 글자가 하나도 없답니다. “공자 앞에서 문자 쓰지 말라”고 그래서 그렇게 세웠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문자 쓰지 말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
“너희는 나라들 가운데에 전파하라 공포하라 깃발을 세우라 숨김이 없이 공포하여 이르라 바벨론이 함락되고 벨이 수치를 당하며 므로닥이 부스러지며 그 신상들은 수치를 당하며 우상들은 부스러진다 하라”(렘 50:2) 하나님의 말씀은 자신이 있습니다.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확실합니다. 거짓이 아닙니다. 신실하신 분입니다.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 4:2)
한국사람이 얼마다 재능이 많고 부지런합니까?
“대한민국에서는 안 되는 것이 없다.”, “안되면 되게 하라” 그래서 우리가 존재한다는 긍정적인 사고가 사회 전반에 걸쳐 있습니다. 자신이 있습니다. 하면 된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미국 헐리우드에서 한국 사람이 어떻게 영화와 드라마를 만드는지 탐방을 왔답니다. 대본에는 날씨가 비가 안 오는데 촬영하는 날 비가 오는 거예요. 감독은 즉석에서 대본을 바꿨습니다. 비가 오는 장면으로요. 그리고 배우는 금방 비가 오는 장면에 맡게 연기를 합니다. 얼마나 변화에 잘 적용하는지 모릅니다. 헐리우드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혀를 내두르고 갔답니다. 이 재능 가지고, 순발력 가지고 복음 전해야 합니다.
세상에 속하지 말라.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14절)
사탄은 이 세상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는 이루어졌습니다. 사탄의 전략은 세상 것을 가지고 유혹하는 일입니다. 사탄이 영원한 것을 가지고 유혹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사탄은 우리에게 영원한 행복을 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면 세상에 속하고 싶어도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 같도다”고 하셨습니다. 이리 가운데서 살아남는 방법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지혜이고 하나는 순결입니다. 순결이 있어야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신학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성경신학과 조직신학입니다. 실천신학분야는 성경신학과 조직신학을 어떻게 현장에서 적용할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나중에 생긴 것입니다.
성경신학은 “무엇이 다른가?”에 관심이 있는 분야입니다. 주로 합동교단입니다.
조직신학은 “무엇이 같은가?”에 관심이 있는 분야입니다. 주로 통합교단입니다.
합동은 너무 나누어서 문제가 있지만 그래도 이 학문이 필요한 겁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속하지 않기 위해서 무엇이 다른지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왜? 신학, 신학 하는지 아십니까? 신학의 배경이 없이 열심만 있으면 신비주의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신비주의자는 하나님의 능력을 개인적인 유익을 위해서 사용합니다. 세상과 합하게 됩니다. 세상이 우리는 싫어한다면 정상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좋아한다면 비정상입니다. 세상에 속하지 말고 예수께 속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이 우리를 싫어하면 할수록 예수님은 우리를 좋아하십니다.
34대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1959년 9월 27일 후르시초프를 초청해 놓고도 만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러 갔습니다. 우리나라에 미국 대통령이 여러 번 왔지만 예배 드렸습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처음부터 큰 나라가 된 것은 아닙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시작된 것은, 더구나 대통령 선출이 시작된 것은 불과 200여 년 전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 짧은 역사 속에 200년 전 미국 인구는 700만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고 주일을 잘 지키는 민족이었기에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의 날을 거룩하게 지키는 성도되시기를 바랍니다.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기도하라
15절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주님 가르쳐 주신 마 6:13에서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우리 부모님들이 처음에는 아이 낮고 하는 말이 “다만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해 놓고는 키우면서 욕심이 늘어납니다. 다시 마음을 비웁시다.
요즘 수능을 본 아이들 집집마다 난리입니다. 솔직히 서울에 있는 몇 개 대학에 들어간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입니까? 저는 그 학교에 들어가는 학생이 이상한 학생 같습니다. 수능시험을 망치고 실실 웃고 다니는 딸을 보고 엄마가 한마디합니다.
“너는 시험 망쳐놓고 웃음이 나오냐?” 그랬더니 엄마 기분이 좋지 않을 것 같아 자기라고 웃어야 할 것 같아 웃었더니 엄마가 되어 가지고 딸의 기분도 모른다고 또 난리가 났습니다.
현, 산정현교회 김관선 목사님이 서초동에 살고 계시는데 딸을 유학시키겠다고 장로님들에게 말하니까 얼굴색이 달라지시더랍니다. 그래서 광주에 작은 학교가 있는데 그리로 보내겠다고 하니까 장로님들의 얼굴이 펴지시더랍니다. 서울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중간이 안되던 아이가 광주의 시골학교로 가서 공부를 하니까 반에서 1, 2등 한답니다. 서울 강남에서 유일하게 전학 온 학생이랍니다. 처음에는 무슨 사고 치고 온 아이가 아닌가 생각했답니다.
현재 미국 풀러선교대학원 한국학부 부원장으로 계신 이광길 교수님이 있습니다. 이분은 대학에 왜 가야하는지를 몰라서 공부를 안 해서 재수를 5번했답니다. 그렇게 재수를 많이 하니까 공부 못하는 사람이 이해가 잘 된답니다. 어려워 보지 않은 사람은 어려움을 모릅니다.
우리 아이가 지금 건강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를 요구하셨지만 그것은 성령이 함께 하실 때 가능한 것입니다. 성령 없이, 감당할 능력 없이 하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의 최종적인 기도는 악에서 구해 달라는 것입니다.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17절)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시 25:5) 다윗의 주의 진리로 지도 받기를 원했습니다. 우리의 최종적인 목표는 주님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인도하시기를 바라야 합니다. 주의 진리는 주의 말씀가운데서 나옵니다.
“진리의 말씀이 내 입에서 조금도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주의 규례를 바랐음이니이다”(시 119:43)
“그의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의 입술에는 불의함이 없었으며 그가 화평함과 정직함으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말 2:6)라고 예수님에 대해서 예언했습니다.
여러분은 ‘거룩’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여러 가지로 이해할 수 있으나 저는 이 거룩을 “사람이 말할 수 있는 제일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고 하셨습니다.
미얀마에 가면 ‘쉐다곤 불탑(파고다)’이 있습니다. 미얀마를 세운 1453년 페구왕조 때에 세운 것인데 둘레가 426m, 높이가 98m입니다. 이 탑 꼭대기에는 73캐럿의 다이아몬드가 박혀있고 총 5,448개의 다이아몬드 2,317개의 루비, 사파이어, 대형에메랄드가 박혀있다고 합니다. 이번에 미얀마 갔을 때 이곳에 갔는데 저는 안 들어갔습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먼저 입장료가 50불입니다. 저는 돈 들어가는 일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것도 결국 절에 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두 번 째는 그곳에 들어가려면 신발을 벗어야합니다. 신발을 벗는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자신들은 그곳을 거룩한 성지로 여기는 것입니다. 저는 신발 벗고 그곳에 들어가기 싫었습니다. 예전에 인도에 갔을 때도 소 우상 있는 곳을 모르고 신발 벗고 들어갔는데 난리를 떨어 가지고 그냥 나왔습니다. 제가 약간 고 지식 한데가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만이 거룩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분 앞에서만 신을 벗기를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우리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말이 ‘거룩’입니다. 구약에서 이 단어는 하나님께만 해당되는 말입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어 주시다니요. 예수님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거룩한 지경까지 데리고 가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기도가 이루어 진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거룩한 사람들입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 1:15)고 베드로가 권면합니다.
마지막 날 천사들은 이렇게 노래부르면서 예수님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요 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