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송구영신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6)

우리의 신앙이 꼭 대나무와 같습니다.
대나무는 4년 동안 죽순하나 밖에 안나옵니다. 그런데요 5년이 되면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그 한해에 25m가 쑥 자랍니다. 그 죽순 밑에 섬유질, 뿌리가 넓게 펴져 있어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가만히 있는 것 같지만 대나무와 같이 쑥 자랄 때가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는다는 것은 그만큼 인생의 깊이를 알아간다는 이야기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쉽게만 되는 것은 또 쉽게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게 됩니다. 그리고 진짜 가치가 있는 것은 인내를 요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돈을 쉽게만 벌려고 하니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길 가다가 손 끔 한 번보고, 사주팔자보고 이름석자 바꾸어서 인생이 달라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나와서 너무 쉽게 모든 것을 얻으려고 하면 그것은 욕심입니다.

우리는 아담 이후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생의 항로에서 이탈했습니다.
우리만 인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보다 더 인내하고 계십니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바른 항로를 잡기 위하여 노력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시면서 하나님은 오늘도 인내하고 계십니다.
실제로 비행기도 우리가 아는 것 보다 훨씬 더 많이 정상궤도에서 이탈한다고 합니다. 때로는 천둥과 비바람이 몰아치는 속에서 이탈하게 됩니다. 저는 비행기 타고 바로 옆에서 벼락이 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만일 그게 비행기에 맞았다면 바로 사라졌을 것입니다.
베트남 비행기 타고 김포공항에 내릴 때였습니다. 얼마나 안개가 짖게 깔렸던지 착륙하려다 다시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엔진도 소리가 꺼진 것 같았습니다. 숨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착륙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까지 하늘에 떠 있을 수 없습니다. 착륙하게 되어있습니다. 그 시간이 우리에게도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인내하는 것은 목적지에 착륙할 것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인내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 입니다.

오늘 아침에 사무실에 나왔는데 전화가 계속오는 겁니다. 지금 중앙아시아 00나라에서 정보부 요원이 한국에 들어와 선교사 색출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KCM에 있는 그 국가에 대한 자료를 다 삭제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선교사들에게 큰 피해가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용들을 하나 하나 확인해 나갔습니다. 무조건 다 지우기는 그렇잖아요. 자료, 정보요 하루아침에 다 삭제해야 될 일이 우리에게 생기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사실 우리가 뭘 아는 것 같지만 한 살 더 먹어봐야 별로 더 아는 것 없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안다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뭘 가진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우스운 것입니다. 별것 아닙니다. 인간이 잘 살겠다고 과학을 발전시켰지만 지구는 오염되었습니다.

미국 천문학자들이 물이 존재하는 행성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지구 2.7배 크기의 물이 있는 행성이 태양계 밖에 존재한답니다. 태양계와 불과 40광년 정도 떨어져 있다고 합니다.
이번에 발견된 행성은 지구의 1∼10배인 ‘슈퍼 지구’ 사이즈입니다. 그런데 너무 뜨거워서 생명체가 살지 어떨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과학자들조차도 우주가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그래서 태양계 밖 40광년도 ‘불과’ 얼마 안 되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는 굉장히 먼 거리입니다. 빛은 1초에 지구를 일곱 바퀴 반을 돌 수 있고 이 거리는 달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입니다. 태양까지는 약 8분 거리입니다. 그러면 40광년이라는 것이 얼마나 먼 거리인지 아시겠지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55:8-9
“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가 알 수가 없어요. 그런데 한가지는 알 수 있어요. 때가 차면 비행기가 착륙하는 것처럼 때가 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주가 만들어지기 전에 계셨습니다. 시간이 존재하기 전에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시고 시간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때와 시간도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때를 정하시고 운행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응답하실 못할 일이나 못하실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벧전 4: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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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43:18-21
“18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19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20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내 인생이 사막과 같아도 하나님을 믿으면 길이 생깁니다. 사막이 변하여 강이 됩니다. 그러나 어떤 분은 믿지 못합니다.
본문을 잘 보세요. 그 일을 누가 합니까?
19절 보세요.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내가”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해 주십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2010년을 하나님께 맡겨드리기 위한 안수기도를 해 드리기를 원합니다. 자주 하는 것이 아니구요 딱 1년에 한번 합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돈만이 축복인줄 알고 있어요. 돈에게 지배당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돈을 지배하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더 주십니다. 돈은 중요한 것이지 첫 번째 축복은 아닙니다. 돈 많으신 분은 교회 안에 보다 교회 밖에 더 많습니다. 돈 버는 것은 상대적인 은사이지 절대적인 축복은 아닙니다. 돈 보다 중요한 것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특별히 2010년 한해동안 우리의 한계를 뛰어 넘는 믿음과 축복을 얻으려면 ‘내가’ 아니라 ‘내가’ 라고 말씀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내게서, 우리가정에서, 주앙교회에 새 일을 행하시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8절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예전에 세워둔 비전과 소망을 다 버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했던 것, 믿음으로 살지 않았던 과거를 기억하지도, 생각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다 버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했던 생각이 무엇입니까? 내 생각입니다. 내 방법입니다.
새해에는 새 마음으로 시작합니다. 지난 일들을 생각하고 있으면, 새해를 향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안수 기도해야 되는데요 아무 생각도 없는 분들에게 기도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무 일도 안 일어납니다. 간절히 원하는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내 마음에 원하는 것이 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먼저 기억해 봅시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합시다. 그러면 내 마음에 원하는 것 또한 이루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교회는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기도할 일이 많이 있습니다. 새해에는 예배도 기도도 성경 읽기도 좀더 열심히 해야지 다짐해 보세요. 그리고 기회가 되면 언제나 전도하기를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속에 정하세요. 꼭 기도하세요. 원하세요. 하나님 2010년에는 꼭 전도하겠습니다. 그리고 기도 받으시면 주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먹어야 삽니다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계 22:17)

2009년도 한해도 몇 일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또 한 살을 더 먹습니다. 우리는 나이도 먹습니다. 사실 살 나이가 한 살 줄어들었으니까 빼야 되는데 우리는 더합니다. 그래서 나이를 먹었으면 나이 값을 해야 합니다.

초등학교선생님이 “사과 세 개가 있는데 하나를 먹으면 몇 개가 남느냐?” 고 문제를 내었습니다. 한 아이가 “세 개입니다.” 그러는 겁니다. “하나를 먹었는데 어떻게 세 개가 남느냐?” 고 선생님이 물으니까 학생이 “우리 엄마가 그러시는데요, 먹는 게 남는 거래요.” 그랬다는 겁니다.
사자성어에는 식이위천(食餌僞天) “백성들은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는다.” 는 말이 있습니다.
회사를 뜻하는 ‘Company’라는 영어단어는 ‘함께’라는 뜻을 가진 ‘com’과 라틴어의 빵을 의미하는 ‘pany’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말입니다. 베트남에 갔더니 길가에 ‘껌(com)’이라고 써있는 가게들이 있었습니다. 인터넷 PC방인가 생각하고 들어가 보니 식당이었습니다. 쌀, 밥을 껌이라고 부릅니다. 회사는 빵을 함께 먹기 위해서 만들어진 곳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나)을 먹기 위해서 모인 곳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베푸신 첫 이적은 혼인 잔치 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이었습니다(요 2:1-10). 어머니 마리아가 난처한 표정으로 예수를 바라보며 포도주가 떨어졌음을 의논했을 때 예수님은 “아직 내 때가 아닙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혼인잔치의 기쁨을 망칠 수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첫 기적을 베푸십니다. 오병이어의 기적도 만들어 내십니다(요 6:9-13). 그리고 우리의 필요를 아시는 주님께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마 6:25)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음식이 필요 없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더 소중한 것은 목숨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먹는 문제도 목숨을 위하여 먹는 것입니다. 주님의 관심이 어디에 있습니다. 영입니다. 살리는 것입니다. 생명입니다. 목숨입니다. 이제 영적 양식을 받아먹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시기를 바랍니다.

생명의 양식을 먹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께 오셔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예수께 오셔야 해결됩니다. 와야 해결이 됩니다.
우리속담에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이 있는데 중국에는 “산을 옮기는 사람은 작은 돌멩이부터 옮긴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그 일이 크던지, 작던지 일단 시작을 해야 합니다.
예수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께 오셔서 예수께 먹을 때만 우리가 살 수 있습니다. 원문의 “!Elqev::아르코마이”는 ‘나타나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께 나타나야 된다는 말입니다. 같은 단어로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다 풍랑 속에서 빠져 들어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가 바다 가운데 서 있는 모습을 보고 너무 무서워 유령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베드로가 “만일 주님이시라면 나를 명하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마 14:18)라고 할 때 29절에 “오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요 1:46 빌립이 나다나엘을 전도할 때 “와 보라”고 했습니다.

본문에 보면 생명수를 먹을 수 있는 사람이 나옵니다.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생명수는 값이 없습니다. 누구나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값이 없다는 것은 계산할 수 없다는 뜻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돈주고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값없이(어근 dwreavn:도레안)’은 ‘값없이’이도 되지만 다른 말로는 ‘선물’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고 했습니다. 선물은 내가 돈주고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명수를 먹을 수 있는 다른 조건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본문에 세 가지 유형의 사람이 나옵니다.
첫째,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듣는 자입니다.
듣는 “ajkouvwn:아쿠온”입니다. 같은 단어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마 7:26)에 사용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란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입니다. 귀로는 아마 많은 사람이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행동하는 사람은 순종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요나에게 임했습니다. 즉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망한다고 외치라는 겁니다. 요나는 가기 싫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긍휼하시기 때문에 재앙을 내리신다고 하시고 그들이 회개하면 내리지 아니 하신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회개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요나의 생각에는 원수의 나라가 망하기를 바랄 뿐 회개하고 구원 얻는 것을 원치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의 뜻을 앞세웠습니다. 이쯤 되면 요나가 하나님께 기도 할 리가 만무합니다. 그는 기도할 필요도 없이 다시스로 도망을 치고 있었습니다. 지중해에서 풍랑을 만난 그는 형통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잘 될 것은 없습니다. 결국 그는 남에게 큰 손해를 입히고 자신은 바다에 던짐을 받는가 하면 큰 물고기에 삼킨바가 되었습니다. 그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고 끝장을 맞게 됩니다. 자기의 힘으로 살길은 전혀 없었습니다. 이제 살길은 하나님의 도우심뿐임을 깨닫고 회개하며 기도하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이때부터 문제가 풀리기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한 요나는 죽을 고생만 하고 원점으로 되돌아왔습니다. 불순종의 결과였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을 때는 예수믿는 사람들을 잡아다 예루살렘에 넘겨주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했습니다. 나중에 로마로 가고 싶어하던 바울에게 죄인의 몸으로 갈 기회가 왔습니다. 죄수의 몸으로 배에 탔습니다. 바울이 탔던 배는 요나가 만난 풍랑보다 더 심한 유라굴라 광풍을 만납니다. 바울이 그 배에 타고 있었기 때문에 276명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멜리데 섬의 사람들은 이 일로 주님을 알고 믿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도망가지 마세요. 요나처럼 돌아올 뿐입니다. 제자리예요. 만일 영영 하나님을 떠나게 된다면 그것은 더 불행한 것이지요. 예수께 오지 않으면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둘째,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목마른 자입니다.
목마른 어근 “딥사(diyavw)”는 “목마르다, 갈망하다, 갈급해 하다”는 뜻입니다. 제일 맛있는 것은 비싼 음식이 아닙니다. 갈급 할 때 먹는 물 한 컵입니다.
2002년 월드컵의 영웅이었던 히딩크 감독은 16강, 8강에 올라가서 한 말이 있습니다. “나는 아직도 배고프다”라고 했습니다. 목마르다는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 5:6)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고 하셨습니다.
“예수의 뒤로 와서 그의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눅 8:44, 마 9:20)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마 9:21)
마가는 이 여인이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막 5:26)라고 말합니다. 이제 더 이상 이 세상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습니다. 해 볼 만큼 해 보았습니다. 예수가 그 여인에게는 마지막 희망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옷을 스쳤겠지만 그것은 다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예수의 옷을 만진 이 여인은 고침을 받았습니다.

셋째, “원하는 자”입니다.
원하는 “델론(qevlwn)”은 “선택하다, 기울어지다, 사랑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내 마음이 예수께 기울어져 예수를 사랑하기로 선택했다는 말입니다. 이 단어는 “하이레오마이(aiJrevomai)” 자력으로 취하다, 택하다라는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자기 자신이 간절히 원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다윗이 아리우나 타작 마당에 딱 서 보니까 자기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 한 감동으로 충만하고, 그리고 주님을 예배하고 싶고, 찬양하고 싶고, 그런 감동으로 꽉 찼습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제물을 드리고 싶다. 그런데 제물이 없었어요. 그걸 알아차린 아리우나가 왕이시여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기에 제물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소와 양들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제물로 제공하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때 다윗이 이렇게 말합니다. 사양하면서 그러실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유명한 대답을 합니다. 삼하 24:24절에 보면. 따라서 하세요.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값 없이는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 하리라 이런 응답을 했어요. 다시 말하면 나는 공짜로 주는 그것으로 바치지 않겠다. 제물에는 내 정성이 있어야 되고, 내 땀흘림이 있어야 되고, 내 희생이 있어야 한다. 내가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겠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신앙입니다. 다윗의 희생 정신입니다. 여러분! 원하세요. 하나님의 일을 하기를 원하세요. 전도하시기를 원하세요.

기도에 대한 응답은 우리가 생각할 때 느린 것인지 하나님은 모든 기도에 적절하게 주실 때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에스더의 기도는 3일 만에 응답되었지만, 벧엘에서의 야곱의 기도는 20년 만에 응답되었습니다. 19세기의 기도의 사람 죠지 뮬러는 친구 5명을 구원하기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첫 번째 친구는 1년 반만에 응답을 받았고 2번째 친구는 6년 반만에 세 번째 친구는 19년 만에, 그리고 네 번째 친구는 24년 만에 구원으로 인도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한 친구는 결실하지 못하고 죠지 뮬러는 죽었습니다. 그러나 다섯 번째 친구는 죠지 뮬러가 죽은 장례식장에 들어와 조지 뮬러의 마지막 유언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위해서 40년 동안 끝임 없이 기도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그는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며 회개했습니다. 간절히 원하는 자는 하게 되어 있습니다. 먹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 드리는 보화(크리스마스)

본문 : 마 2:10-11

동방박사(마기) 메데파사의 제사장, 지도자들. 여러 분야를 연구하여 오직 로마를 무너트릴 방법을 찾고 있었음. 그러나 동방박사들을 인도한 별은 연구해서 찾은 별이 아님. 하나님의 특별한 방법으로 나타난 별이 그들을 인도하셨음.
로마와는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음.

성경에는 세 명의 동방박사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동방박사가 한 명 더 있었답니다. 그런데 그만 늦게 도착하여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목사님 그런 이야기 성경에 없잖아요? 네 성경 밖에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크리스마스를 생각해 보기 위해서 전해드리는 이야기입니다.
네 번째 동방박사도 아주 귀한 세 가지 보석을 준비하고 낙타를 타고 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낙타가 발목에 부상을 입고 얼마가지 못해서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돌아갈까 끝까지 가볼까? 생각하다 하나님이 아들이 오시는데,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시는데 끝까지 가봐야지 하고 마음먹고 길을 떠났습니다. 악착같이 가야지 하고 걸어서 광야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얼마쯤 같을까요. 동네 어귀를 만났는데 한 불쌍한 아주머니가 울면서 나오는 거예요. 왜 그러세요. 사정을 물어 보았더니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이 탄생한 다음 헤롯왕이 남자 어린아이들은 다 죽이라 해서 대 학살이 있었다는 거예요. 그 때 그 아주머니 아들이 죽은 거예요. 이 아주머니를 보고 네 번째 동방박사의 마음에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측은한 마음이 들었어요. 그래서 자기가 어린 새싹처럼 소중히 여기는 보석을 하나 주고 길을 떠났어요.
얼마나 지났을까요. 예수님이 이집트로 피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 만나러 이집트로 가자 죽을 고생을 하고 이집트에 도착을 했는데 들리는 소식은 또 실망이었어요. 예수님이 잠깐 그곳에 계시다가 다시 유대 땅으로 돌아가셨다는 거예요. 지금 이집트 카이로에 가면 예수님이 머물다 가신 기념교회가 있답니다. 여기서 3년 지내셨답니다. 네 번째 동방박사에게 낙심이었어요. 그런데 동네를 다니다 어디에서 잠을 잘까 하고 왔다 갔다 하던 중에 한 사람을 만났는데 문둥병자 한 사람이 너무 불쌍하게 쪼그리고 앉아 있는 거예요. 아무도 도울 사람이 없어요. 그대로 살다가 그대로 죽을 사람이예요. 그래서 두 번째 자기에는 너무너무 소중한 보석을 그 문둥병자에게 주고 말았어요. 이제 하나 남았어요. 소문을 따라 이런 식으로 예수님을 만나려고 다닌 시간이 어언 30년이 지났고 이제는 이 네 번째 동방박사도 늙고 초라해져서 어느 식당에서 식사하고 나오는데 어린 그지 하나가 쪼그리고 앉아서 두 손을 들고 돈을 달라고 하는데 표정이 너무너무 불쌍하고 해서 나도 고향 땅에 자식이 있는데 생각하면서 마지막 남은 것 하나, 예수님께 바쳐야할 딱 하나 남은 보석을 그 어린 거지에게 주었어요. 그런데 조금 있다가 대낮인데 온 천지가 캄캄해지는 거예요. 그러더니 심한 지진이 일어났어요. 몸을 가눌 수 없어요. 뒷둥 뒷둥 대다가 언덕을 바라보았는데 거기에 십자가 세 개가 있었고 그 가운데 30여 년을 찾았던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거예요.
그 때 예수님이 이 네 번째 동방박사를 바라보면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자식을 잃어 너무 너무 슬퍼할 때 나를 위로해 주었고, 내 몹쓸 병에 걸려서 아무도 나에게 오지도 않는데 너는 나에게 보석을 주었고, 내가 목마르고 몸을 둘 곳이 없을 때 그대는 나에게 먹을 것과 거처할 곳을 주었으니 나는 당신의 사랑을 잊지 않을 거야.
네 번째 동방박사 예수님께 말했대요. 저는 지금 예수님을 뵙는 것이 처음이고 저는 예수님께 그렇게 해 드린 것이 없습니다. 할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지금까지 네가 나에게 주려고 했던 그 보석을 네가 불쌍히 여겨 다른 사람들에게 준 것은 곳 나에게 준 것이었다.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거예요.

지금도 우리가 예수님께 무엇을 드릴 수 있는 방법은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제일 확실한 것은 영, 육간에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교회가 잘못하는 것은 비 기독교인을 멸시하는 것 같은 태도입니다. 자꾸만 그분들을 멸시하는 듯한 태도입니다. 거룩한 것을 구분할 수는 있지만 우리에게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따지는 사랑이 아닙니다. 주식 투자하듯 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헨델의 ‘메시아’가 신앙의 생활화의 표준
매년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더욱 자주 듣게 되는 유명한 오라토리오 ‘메시아’도 헨델(George Fredrich Handel)이 이사야서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한 것입니다. 진실한 기독교 신앙인 이었던 헨델은 ‘메시아’를 작곡하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파란만장한 삶을 살게 하셨던 까닭이 바로 그로 하여금 ‘메시아’를 작곡하도록 하시기 위한 연단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가 ‘메시아’를 작곡하면서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는지 그 긴 대곡을 불과 2주만에 작곡을 다 끝내고 난 후 방에서 나오는 그의 모습을 보았던 하인의 증언에 의하면 그의 눈망울에서는 눈물이 가득했고 양 볼에는 눈물 자국으로 범벅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 그는 그를 시중들던 하인에게 “나는 메시아를 작곡하는 동안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를 보았네”라고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래서 ‘메시아’는 음악적으로만 이해하여서는 그 진수를 맛볼 수 없고 음악 속에 살아 있는 헨델의 신앙과 함께 들어야만 참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헨델의 음악세계가 그렇게 뜨거운 신앙을 바탕으로 하였기에 훗날 베토벤과 같은 위대한 음악가로부터도 “나는 헨델에게는 무릎을 꿇어 경의를 표한다. 그분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유능한 작곡가이었기 때문이다”라는 찬사를 듣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예전에 교회는 종이 있었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 그 종을 쳐본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교회 종에 줄이 없어 종을 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전설에 의하면 그 종은 남에게 아주 많은 봉사를 한 사람이 있으면 저절로 울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 저기서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자기 딴에는 봉사한다고 여기저기 금은 보석도 바치는데 종은 울리지 않는 거예요. 그 소문이 왕궁까지 들어갔어요. 그래서 왕도 왔어요. 그래서 왕으로서 많은 헌금을 드렸는데 그래도 종소리가 울리지 않자 자기 왕관을 벗어서 바쳤는데요 종소리는 울리지 않는 거예요. 응답이 없는 거예요. 왕까지 다녀간 후에 좋지 않은 소문이 퍼졌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전설이지 실제로 일어날 일이 아니라는 거야! 왕까지 오셨었는데 안되었는데 말야.
그러던 어느 해 성도들이 크리스마스 찬송을 다 부르고 있었는데 그 때 갑자기 종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땡그랑, 땡그랑 은은하면서도 장엄한 종소리가 들렸어요. 성도님들은 찬양하는 것도 잊어버렸습니다. 누가 어떤 헌금을 했는데 저 종소리가 울리나 관심이 다 그 종소리에 가 있었습니다. 얼마 안 돼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에 다니는 청년이었습니다. 성탄절 예배를 드리려고 오는데 교회근처까지 왔는데 한 사람이 눈 속에서 죽어가는 거예요. 저 사람을 지금 데리고 가서 먹을 것을 주고 살리는 것이 우선인가 지금 성탄절 예배를 드리러 가는 것이 우선인가? 잠시 망설였지만 그 사람을 집에 데리고 가서 살려내려고 애쓰는데 성탄절 예배시간이 다 되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동생에게 빨리 교회에 가서 예배가 끝나기 전에 내가 준비한 성탄헌금을 드리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 동생이 뛰어와서 예배당 뒤에 있는 헌금함에 은전을 넣는 순간에 울렸습니다.
하나님이 어떠한 사람들 때문에 하늘 문을 여시고 감동 하실까? 하나님이 교회의 종소리를 누구에게 울려 주실까? 어떤 교회, 어떤 사람, 이야기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우리 교회가 과연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성도가 있는가? 말구유에 오신 예수를 진정 환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어려운 설교를 하는 저는 하나님의 종으로 제일 상급이 많을 수도 있지만 제일 하나님께 책망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성도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교회는 나름대로 애쓰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해야됩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 마 챙겨놓고 선교할 수 없습니다. 구제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1년 동안 열심히 돈벌어서 헌금한 것 귀한 것입니다. 어떤 분은 매일 매일 그만두고 싶었을 것입니다. 당장 나오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참고 견디면서 그렇게 번 돈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헌금은 예수께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 소식이 목자와 동방의 박사들에게 먼저 전해졌던 것은 다른 측면에서 보면 다행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사실 그 당시 아기 예수의 탄생 소식은 동방박사들을 통해 부자와 지식인, 권력자들에게도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헤롯왕을 비롯해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그 소식을 들었지만 소동만 벌였을 뿐 직접 찾아 나서는 사람은 없었습니다(마2:3-4). 그들은 오늘날 우리들과도 같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지식인, 부자, 권력자들의 성향은 비슷합니다. 그들은 사물을 순수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이론을 전개하고 입으로만 말할 줄 알았지 행동은 할 줄 모릅니다. 성탄의 소식이 오직 그런 사람들에게만 전해졌다면 그 당시 직접 아기 예수께 나아가 경배하고 예물을 드린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목자들은 천사의 말을 듣고 ‘빨리 가서’(눅 2:16) 아기 예수께 경배하였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멀고 먼 예루살렘까지 몇 달 동안이나 걸리는 길을 진지하고 끈기 있게 찾아가 기어코 아기 예수를 만났습니다.

예수를 만나는 일은 쉽고도 어려운 일입니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누구나 할 수 없습니다. 별이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헨델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오늘 여기에 모인 저와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별이 나타난 것입니다. 별은 우리에게 길을 안내합니다. 예수를 만나게 합니다. 예수께 드릴 보화를 드리려고 하는 모든 사람은 예수를 만납니다.
 

하나님의 마지막 당부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0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임하여 네 가운데 거할 것임이니라 11 그 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네 가운데 거하리라 네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네게 보내신 줄 알리라”(슥 2:10-11)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슥 9:9)

유치원에서 선생님이 어린이들에게 커다란 도화지를 한 장 씩 주고 가족의 얼굴을 그리라고 했습니다. 모두 열심히 식구들의 얼굴을 그리는데, 한 어린이가 그 큰 도화지 한 가운데 엄마의 얼굴을 크게 그려놓고 그 밑에는 언니, 오빠의 얼굴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아빠의 얼굴이 없어서 선생님이
“얘 아름아, 너는 아빠가 안 계시는구나?”라고 하자 아름이는
“아빠가 왜 안 계세요? 계세요.”
“그러면 왜 아빠의 얼굴은 안 그렸어?” 라고 하자 아름이는 도화지 뒷면을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뒷면을 보니 큼직한 얼굴이 도화지 뒷면에 그려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아름아, 도화지가 너무 작아서 아빠의 얼굴은 뒤에 드렸니?” 그랬습니다.
“아뇨, 우리 아빠는 볼 수 없는 분 이예요. 아침 새벽에 나가시죠. 밤에는 우리가 잠든 후에 오시거든요. 우리가 못 보는 아빠니깐 안 보이게 뒤에다 그린 거예요.”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이상 당신의 모습을 숨기지 않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아름이처럼 도화지 뒤에다 그려야 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앞면에 그릴 수 있는 하나님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구름 속에서 모세에게 음성으로만 말씀하셨던 하나님이 이 땅에 직접 오시기로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바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최종적인 목적은 우리 죄를 사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참 많은 하나님의 기적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도 부족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가 제일 받아들이기 쉬운 방법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 1:11)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은 얼마 안되고 대부분은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그런데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함입니다.

저는 오늘 크리스마스 설교를 위해 먼저 구약성경의 마지막 성경책, 스가랴서, 말라기서를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설교의 제목도 주제도 먼저 정해 놓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본문도 정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이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 에만 집중하려고 했습니다. 설교의 본문과 제목을 정하는 것은 내가 미리 이것을 전해야지 하는 것이지만 오늘은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기로 했습니다. 그렇다고 직통계시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의 마지막 책 말라기서는 B.C. 516년경 성전재건 이후로 봅니다. 그런데 스가랴서 1-8장까지는 B.C. 520-518년 사이로 봅니다. 그러나 스가랴 9-14장까지는 몇 십 년 이후인 B.C. 480-470년 사이로 봅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마지막 성경은 스가랴 9-14장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스가랴를 통해서 이 마지막 부분을 기록하게 하신 후 하나님은 세례요한 때까지 아무 말씀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에 선지자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스가랴서의 핵심어는 ‘순종’과 ‘메시야’ 입니다. 메시야를 보내시기 전에 이 땅의 백성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말씀이 ‘순종’입니다. 딸 가진 부모님이 딸을 시집보내면서 신랑에게 딸을 당부합니다. 그 때 대부분의 부모님이 하시는 말씀은 “우리 딸 눈에서 눈물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남편들은 잘 기억해야 합니다. 가진 것 없어서 고생은 시키지만 마음고생은 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시면서 이 땅에 사는 백성들에게 당부하십니다.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라고요. 하나님의 이 당부의 말을 들어주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내게로 돌아오라
슥 1:3-4 “3 그러므로 너는 무리에게 고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4 너희 열조를 본받지 말라 옛적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외쳐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한 길, 악한 행실을 떠나서 돌아오라 하셨다 하나 그들이 듣지 않고 내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느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불란서의 사상가 파스칼은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을 만드실 때에 그 마음속에 하나의 커다란 공간을 만들어 놓으셨다 그것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만이 채우실 수 있는 공간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 채워지지 않는 공간을 물질을 쌓고, 향락을 누리고, 명예와 권세를 얻음으로, 채워 보려고 하지만 채워지지 않고 쌓고, 누리고, 얻으면 얻을수록 인생의 갈증은 더 증폭되어 갑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세 가지 비유가 나오는데 먼저 어느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한 마리 잃은 것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낸 것입니다. 두 번째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비유입니다. 죄인을 회개케 하는 성령의 빛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셋째 돌아오는 탕자의 비유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도 종일 그 팔을 벌리고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 시간 그냥 집으로 달아나지 마십시다. 벌리고 계신 주님 팔에 다 안기시는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네 번이나 대통령에 당선이 되었는데 세 번째 취임사에 그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자원과 능력에 합당할 만큼 모든 국민의 안전과 기회와 지식을 보다 크게 세워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이런 목적들만 달성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 나라의 육체를 먹이고 입히는 것으로는, 이 나라의 정신을 교육하고 지도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인간에게는 영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셋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영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육체적으로 아무리 건강하고 자원이 많으며, 정신적으로 아무리 미국이 좋은 정신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영적인 축복이 가장 귀합니다. 이 세 가지 가운데 가장 귀한 것은 영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대통령 취임식에 한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아무리 미국이 잘 살고, 대단하다 할지라도 미국의 영적인 삶이 죽으면 미국은 끝납니다. 사라진다는 겁니다.

겸손한 왕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슥 9:9)

예수님 이전의 어떤 왕도 ‘겸손’이라는 말을 경의어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을 입으신 독생자 메시야가 이 땅에 오시면서 우리는 ‘겸손한 하나님’이라는 모순 어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알아 볼 수 있도록, 또한 겁에 질려 따를 수밖에 없는 형태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불 말과 회오리바람을 대동하신 채 오시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상상하기 힘들만큼 작아지시고 작아지셔서 우리들이 태어나는 방법과 다르지 않게 난세포가 되셔서 믿기 어려운 방법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시인 존 돈(John Donne)이라는 사람은 “그대의 존귀한 태중에 광대한 존재가 은둔해 있나니”라고 탄복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고 산문투의 어법으로 말했습니다.

세계 최대 항공기 A380이 지난 화요일(2009.12.15) 동북아 최초 인천~두바이 노선 투입되었습니다(에미레이트항공). 이 비행기는 ‘하늘을 나는 특급 호텔’로 부르는 2층 구조의 초대형 여객기입니다. 프랑스 에어버스가 제작한 것으로 전체길이 73m로 축구경기장 너비를 능가하고, 높이는 10층 짜리 아파트와 비슷하답니다. 이 비행기는 세계 4개 항공사에서 20대를 운항하고 있습니다. 한번 타는데 값이 얼마나 들겠습니까? 퍼스트 클래스의 항공운임은 약 25,000달러랍니다. 우리 돈 약 3천만원정도 됩니다. 제가 이거 타고 중동한번 갔다오면 우리교회 1년 헌금이 다 들어갑니다.

천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영국의 성공회와 러시아 정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받은 인상은 대단한 위엄과 찬란한 영화의 발자취였습니다. 러시아 크렘린 왕궁에 가면 공주들이 입던 드레스가 있습니다. 금실로 짠 금 드레스가 있습니다. 왕국에서 사용하던 금 그릇들과 마차들도 모두 금으로 되어있습니다. 나중에는 성경책도 겉 표지를 각종 보석으로 장식했습니다. 얼마나 보석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지요. 대단한 나라입니다. 영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는 영국 시장이 타던 마차도 금 마차였습니다. 열왕기서를 보던 유대인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솔로몬의 저 영화로운 시대, “왕이 예루살렘에서 은을 돌같이 흔하게 하고…”(왕상 10:27)라고 말하던 그 시대의 강렬한 향수를 생각한 것은 오히려 이상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었을 것입니다.
“신은 너무나 위대하여 미천한 인간을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이 이슬람이 가르치는 진리입니다. 영국여왕의 행차를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경호원들과 호화스런 치장과 웅장한 팡파르에 맞추어 ‘의전품’들을 일일이 챙겨가면서 나타납니다. 영국 왕가 일행이 해외를 한번 방문하는데 들어가는 돈이 26억이랍니다. 이 정도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메시야의 이 지상의 방문은 어떻습니까?
마땅히 누우실 곳이 없어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잠시 천사들의 방문이 있었고 빛이 있었다고는 하나 그것을 누가 보았습니까? 추운 겨울에 양을 치던 목자였습니다. 예수님 탄생 당시의 목자들은 자기 이름도 쓸 줄 모르던 비천한 부류입니다. 그들만이 이 광경을 목격했을 뿐입니다.

네 가운데 거할 것
슥 2:10-11 “10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임하여 네 가운데 거할 것임이니라 11 그 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네 가운데 거하리라 네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네게 보내신 줄 알리라”

인간이 신에게 접근할 수 방법은 희생제물과 몸을 최대한 낮추어 이슬람교도들처럼 이마가 땅에 닿을 정도로 몸을 최대한 낮추어 기도하는 방법일 것입니다.
불교에서 부처에게 하는 절을 오체투지(五體投地)라고 합니다. 오체투지는 몸의 다섯 부분을 땅에 닿도록 납작하게 엎드려 절하는 방법입니다. 두 팔꿈치와 두 무릎과 이마가 땅에 닿아야 합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자신을 무한히 낮추면서 상대방에게 최대의 존경을 표하는 몸의 동작으로서 가장 경건한 예법이라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사실 대다수의 종교적 전통들 가운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지만 인간이 신에게 접근할 때 가장 먼저 느끼는 감정은 두려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사실적인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직접 보거나 만지는 사람은 불에 타 죽었습니다. 지성소에만 잘못 들어가도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이러한 관계를 끊고 새로운 방법을 찾으셨습니다. 어린 아기 예수를 보고 두려워할 사람은 없었습니다. 말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고 두려워 할 자는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 아기가 자라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소개해 주셨습니다. 아버지는 두렵기 이전에 친근하신 분입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부자지간에 많은 대화를 나눕니다. 어떤 때는 친구같이 지냅니다. 아들과 아버지는 토론도 합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 1:18)
어린이들하고 잘 놀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어린아이들과 같아 져야 합니다.
“3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2-5) 예수님이 어린아이가 되셔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군자표변(君子豹變)이라는 말이 주역의 혁(革)괘에 보면 나옵니다. ‘군자는 표범의 털가죽이 선명하고 아름답게 변해 가는 것처럼 변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소인혁면(小人革面)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군자는 변해야 할 때 표범의 무늬처럼 확실하게 변하지만 소인은 겨우 얼굴빛이 변할 정도로 자기변혁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과감한 변혁이 필요할 때 확실한 자기변혁을 해야 합니다. 군자표변의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어거스틴(354-430)이 9년 동안이나 마니교에 빠져서 방탕한 생활을 합니다. 19세 때 부모님의 동의 없이 여자와 동거하여 아들까지 낳았습니다. 그의 어머니 모니카는 어거스틴의 방탕한 생활 때문에 눈물로 기도하며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거스틴의 이웃집에서 ‘집어 들고 읽어라’(tolle lege) 어린 아이의 노랫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는 그 즉시 성경을 폈습니다. 로마서 13:13-14절이었습니다.
“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이 말씀을 읽는 순간 밝은 빛이 물밀 듯 밀려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말씀을 마음으로 받으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뜨거워집니다. 밤새도록 회개했습니다.
어거스틴이 어느 날 밤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그는 꿈결에 사랑하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께서 어거스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아들아, 너는 나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어거스틴은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다만 주님만을 원합니다. 주님 자신만을 원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무엇을 얻었습니까? 우리의 주홍 같은 죄가 사라졌습니다. 거룩한 성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천국을 보장받았습니다. 이에서 더 무엇이 필요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보세요. 영적인 눈이 열려야 합니다. 영국 사람들은 셰익스피어와 인도를 바꾸지 않는다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온 세상을 다 준다고 해도 예수님과 바꿀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마지막 당부의 말씀을 기억하시고, 겸손하게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셔서 마지막 날에 주님께 칭찬 받으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말씀이 계시니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1-14)

오늘은 2009년 성서 주일입니다. 대강절이 기독교의 절기가 시작되는 절기입니다. 미국의 성서 공회에서는 1943년부터 성서 주간을 매년 추수 감사절로부터 크리스마스까지로 확장하여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1954년 이후 매년 12월 둘째 주일만 성서 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비록 오늘 하루만을 성서주일로 지키지만 우리는 1년의 모든 날을 성경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지난해에 수능 끝나고 137명이나 되는 학생이 자살했습니다. 이 엄청난 학생들이 수능시험에서 인생을 걸고 이제 끝났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여러분!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수능이 전부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사업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인생의 극히 한 부분입니다. 살다보면 다른 길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또 하나님은 잘 되는 사람일수록 늦게 됩니다. 대기만성입니다. 먼저 쭉쭉 올라간다고 앞서가는 것이 아닙니다. 조금 늦추어서 나가면 길이 다 있습니다. 조급하게만 생각하면 안됩니다.
등산을 하다 길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이 때 아래로 내려가는 사람은 영영 길을 못 찾는다고 합니다. 오히려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올라가서 보면 어디서 길을 잃어버렸는지, 멀리 보면 보입니다. 교회는 올라가서 보는 것입니다. 성경은 올라가게 만듭니다. 이 세상의 모든 학문은 아래에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위에 있습니다. 그래서 위엣 것을 사모하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지키는 성서 주일은 대강절 기간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메시야를 기다리면서 그 가운데 성서주일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뜻이 있습니다.

첫째는 메시야를 기다리되 말씀대로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합니다. 성경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대로 갈 수 없습니다. 바다에서 항해하는 배에 나침반이 고장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미 성경을 가지고 있다해도 보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또한 그 말씀의 뜻대로 살지 않는다면, 행함이 없다면 소용이 없습니다.
에스라 10:3 “곧 내 주(에스라)의 교훈을 따르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가르침을 따라 이 모든 아내와 그들의 소생을 다 내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 에스라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떨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에 떨었습니다. 그래서 범죄 한 후에도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교만해 졌습니다. 인간 최고의 교만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에스라 10:11 “이제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그의 뜻대로 행하여 그 지방 사람들과 이방 여인을 끊어 버리라” 언제나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며 따르는 자는 소망이 보이게 됩니다. 소생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버리면 다 소용이 없습니다. 유명한 대학을 나와도, 사업에 성공을 해도, 세상의 영화와 부귀를 누려도 다 부질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말씀을 무시하는 자들의 결과는
마음이 부패됩니다(딤전 6:3,5), 저주를 받습니다(신 27:26), 주께 버림을 받습니다(호 4:6), 역경으로 넘어집니다(마 7:26,27),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눅 8:12).
그러나 말씀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합니다(요 20:31), 교훈을 줍니다(롬 15:4), 성도를 거룩케 하게 합니다(요 17:17), 성도를 자유하게 합니다(요 8:32),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합니다(딤후 3:15-17), 영생을 얻게 합니다(요일 5:13).

욕쟁이 집이라는 소문난 음식점을 하는 할머니가 보니, 점잖은 장로님 얼굴이 항상 굳어있는 겁니다. 집에서 권사님과 부부싸움을 했는지, 사업이 잘 안 되는지, 목사님과 의견충돌이 있었는지… 그래서 저 장로님 나한테 한번 걸리면 가만 안 둔다고 벼르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장로님과 욕쟁이 할머니가 교회 현관에서 딱 마주쳤습니다.
“저 장로님… 잠깐 귀 좀…” 욕쟁이 할머니가 다른 사람들 들으면 곤란한 일이 있어서 그러나? 장로님이 별 생각 없이 궁금해하며 귀를 대주었습니다.
그랬는데 욕쟁이 할머니가 장로님의 귀에 대고 다짜고짜 “야, 이 새끼야. 얼굴 좀 펴라” 장로님이 당황하여 얼굴이 울그락 푸르락 칠면조 얼굴이 되어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 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지금까지 웃음을 몰랐던 장로님에게서 웃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때부터 얼마나 웃고 살았던지 장로님의 간수치가 위험수위에 있었는데 정상이 되었답니다. 복음을 듣고도 웃지 못하고 산다면 욕쟁이 할머니께 욕 좀 먹어야 합니다.

둘째는 메시야가 말씀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즉 성육신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서주일을 대강절 중간에 넣어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4복음서를 읽다보면 그 시작이 모두 의미가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족보로 시작하고, 마가복음은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의 글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누가는 예수님 출생 전에 있었던 세례요한의 탄생부터 예수님의 탄생 때의 천사들의 활동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시작은 매우 특이합니다. 영적 시작과 말씀으로 시작되는 세상의 빛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그 말씀들을 읽어 가다보면 눈을 떼지 못합니다. 조금 읽어볼까요. 본문 요한복음 1장 1-14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태초에 보이는 것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산과 바다 강들 그리고 그 가운데 있는 생명들과 자연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답니다. 그 말씀이 빛이랍니다. 그 말씀이 생명이랍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빛을 잘 몰랐습니다. 그 빛이, 그 말씀이 천지창조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이 놀랍습니다.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이 말씀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난 것은 육신의 사람의 방법으로 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성서주일과 관련하여 한가지 일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영국 웨일즈 지방에서 태어나서 성장한 소녀 메리 존스(Mary Jones, 1784.12.16-1866.12.28)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웨일즈는 영국의 남, 서쪽 지방으로 지형이 험난하고 기후 조건이 좋지 않아 대부분의 서민들은 궁핍한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지도를 보면 우리나라의 호남에 해당하는 지역입니다. 영국의 웨일즈 지방은 믿음의 본고장입니다. 우리나라에 처음 성경을 가지고 들어온 토마스 선교사도 이 지방출신입니다. 영국의 마지막 청교도 후예라고 말하는 로이드 존스 목사도 이곳 출신입니다.
메리 존스는 매주 저녁 교회에 나가 성경을 배우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었습니다. 메리는 10살이 되던 해. 찰스 목사가 세운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집에서 학교가 3km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도 보통 이 정도의 길은 걸어서 학교에 다녔습니다. 이 먼 길을 오가며, 언젠가 글을 배워서 스스로 성경을 읽겠다는 소망을 키워갔습니다.
이 학교에서 성경공부를 하는 주일학교가 시작되었는데, 메리는 첫날 마태복음을 공부하면서 자신이 지금까지 마태복음의 첫 장이라고 알고 있던 말씀이 첫째 장이 아니고 둘째 장인 것을 알고 나서 ‘성경의 필요성’을 더욱 깨닫게 되었습니다.
2년 전 자신의 집에 와서 성경을 읽어도 좋다고 한 이반스 부인의 말을 기억하고 있던 메리는 매주 토요일마다 그 집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성경을 홀로 접하게 된 메리는 감격에 겨웠으나 시간적 제약으로 성경에 집중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를 아쉬워한 메리는 “몇 십 년이 걸려도 꼭 성경 한 권을 사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메리는 성경을 사야겠다는 일념으로 돈을 모으기 시작하였으나 시작 첫 해에는 모은 돈이 너무 적어 실망하였고, 아버지 병세의 악화와 집안 일로 돈을 모으지 못한 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메리는 실망하지 않고 6년 간 각종 허드렛일을 마다 않고 돈을 모은 끝에 결국 겨우 한 권의 성경책 값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성경책 사려고 돈 모으는데 6개월 걸렸습니다. 10살 때 돈 모으기 시작해서 6년이 걸렸으니까 16살이 된 것입니다.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메리는 성경을 구하기 위해 30km나 되는 거리를 쉬지 않고 뛰다시피 걸어갔습니다. 그러나 웨일즈 성경이 더 이상 판매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메리는 엄청난 절망감에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감동한 찰스 목사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성경을 메리에게 주었습니다.
마침내 자신의 성경을 갖게 된 메리는 기뻐 어쩔 줄을 몰라 하며 피곤함과 배고픔도 다 잊은 채 30km를 단숨에 걸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반갑게 맞이하는 부모님과 함께 메리는 성경을 상위에 놓고 성경을 들여다보며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웨일즈 성경이 더 이상 인쇄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절망적인 눈물을 흘린 메리의 이야기를 찰스 목사는 1802년 12월 런던에서 열린 기독교서회 회의에서 이야기했습니다. 이 회의를 계기로 드디어 1804년 3월 7일 영국성서공회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지난번 미얀마에 갔을 때도 호텔 객실에서 책상의 서랍을 열어보니까 기드온에서 배포한 성경이 들어있었습니다. 공산국가에서도 불교국가에도 성경을 준비하여 고객에게 서비스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전 세계 2,479개 언어로 번역되었습니다(2008.12). 그러나 전 세계에서 통용되는 6,500여 개의 언어인 것을 감안하면 아직도 해야할 일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또한 발행한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읽힐 수 있는 성경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받아들이도록 전해야 합니다.

웨일즈에서 메리 존스(Mary Jones)의 성경에 관한 일화가 생길 때 즈음에 한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토마스 목사를 파송한 영국 웨일즈 라드노 주 하노버(Hanover United Reformed Church)교회입니다.
제가 2003년도에 이 교회를 방문했었습니다. 교회의 크기가 딱 우리교회만 합니다. 토마스 목사의 아버지가 시무 했던 교회입니다. 토마스는 이곳에서 1840년 9월 7일에 태어납니다. 메리 존스의 이야기가 있은 지 약 40년이 지나서입니다. 그러니까 메레 존스는 이 지역(웨일즈)에서 토마스 목사가 태어날 즈음에 1802년 16살 정도였으니까 56-7세 정도 되니까 아마 권사님이 되어 계셨을 것입니다. 바로 이분들의 세대가 영국에서 선교사를 제일 많이 보내던 시대입니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성경을 전달해 주었던 토마스 선교사는 1863년 24살의 나이에 런던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꿈에도 그리던 중국 상해에 도착하게 됩니다. 하지만 아내 캐롤라인이 오는 중에 병을 얻어 죽습니다. 그 때 그는 선교사역을 포기하려고 했는데, 하나님의 인도로 세관에서 통역 일을 하던 그에게 조선 선교라는 새로운 길이 열립니다.

그에게는 새로운 희망이 생겼습니다. 아직 그 누구도 가보지 못한 조선 땅을 향해 다시 복음 전달의 열정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리고 1865년 9월 13일 백령도에 도착해 성경책 200여권을 전하며 전도했습니다. 베이징으로 되돌아간 그는 런던으로부터 정식으로 조선 선교를 허락 받았고 다시 조선에 갈 배편을 찾던 중, 그의 앞에 미국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통역관으로 그 배에 동승했습니다.
중국을 떠난 셔먼호는 일 주일 후 평양근처 대동강변에 도착(1866년 9월 2일경)했고 역시 우려하던 대로 조선군과 무력 충돌이 발생했습니다. 시기적으로 너무 좋지 않은 때였습니다. 대원군 집권 3년인 1866년 병인년은 우리나라 교회역사상 가장 다사다난했던 한해였습니다. 새해 벽두부터 나라안의 천주교인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병인박해가 일어난 때입니다. 조선의 쇄국정책이 극으로 치닫고 있을 때입니다. 이 때 나타난 셔먼호는 조선 입장에서는 조선을 쳐들어온 미국 침략선으로 간주한 것입니다. 결국 조선의 공격에 대동강변에 좌초하게됩니다. 불바다가 된 셔먼호 위에서는 백기를 들고 화염 속을 헤치며 사력을 다해 강가로 책을 던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토마스 선교사였습니다.
“단 한 권이라도 더 조선인들에게 당신의 말씀을 전하게 해주십시오.” 그는 마지막 남은 한 권의 성경책을 품안에 넣고 강물로 뛰어들었고 곧 조선군에게 생포되었습니다.
그의 처단은 즉시 집행되었고 그 임무를 맡은 조선 군사가 박춘권 입니다. 박춘권이 칼을 뽑아들자 토마스는 급히 자기 품에 들렸던 성경책을 꺼내어 웃으면서 그에게 내밀었습니다. 그리고 두 손을 모아 마지막 기도를 드렸습니다.
“오. 하나님. 이 사람이 자기의 하는 일을 모르오니 이 사람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조선 땅에 뿌린 복음의 씨앗이 헛되지 않게 하소서. 내 영혼을 받아주소서.” 기도하고 쑥섬에서 박춘권의 칼에 맞아 순교했습니다.
박춘권은 그 일 이후에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계속해서 자기를 향해 웃던 토마스 목사가 생각나는 것입니다. 결국 그는 전도사가 되었고 나중에 평양교회의 장로가 되었습니다. 박춘권과 함께 있던 영문주사 박영식은 성경을 자기 집에 가지고가서 성경을 뜯어 벽지로 발랐습니다. 결국 그의 집은 널다리골교회의 예배처소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널다리골교회가 장제대교회가 되었고 장대제교회는 1907년 평양 대 부흥운동의 시작이 된 장대현교회입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비록 정식으로 조선 땅을 밟아 보지도 못한 채 27살의 꽃다운 나이로 죽음을 당했지만 그가 건네 준 한문으로 된 성경책은 이 땅에 복음의 뿌리를 내렸습니다. 그가 뿌린 복음의 씨앗은 이 땅에 복음의 부흥을 위한 실로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

1931년 대영성서공회가 발행한 성경책이 정..선교사 할아버님이 성결교 목사님이셨는데 가지고 계셨던 성경책입니다. 한문과 한글이 섞인 성경입니다.
국내 번역위원회가 구성되어 1900년 신약전서를, 1911년에 구약전서를 완역하였다. 이를 다시 1936년에 구약을, 1938년에 신약을 개정하였는데, 1938년에 개정한 성경은 1956년에 한글맞춤법통일안에 의거하여 개역성경을 발간하였다.

성경은 예수님의 보혈의 자국이 남아있는 책입니다. 우리를 사랑한단 말씀이 있는 책입니다. 세상의 어떤 책이 나를 위해 준비된 책이겠습니까? 오직 성경입니다. 이 성경을 받으시기를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의 좋은 병사

“1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2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3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4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 2:1-4)
 

제가 지난 목요일에 안국동 근처 교회에서 세미나가 있어서 강의하고 오는 길에 인사동에서 사진 몇 장 찍으려고 들렸습니다. 그러다가 어떻게 걸었는지 종로로 나왔습니다. 다시 나온 김에 광화문 들려서 세종대왕상도 찍고 변화된 광화문 거리를 보려고 갔습니다. 거기서 갑자기 청와대 쪽을 바라보고 경복궁을 가봐야겠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근처는 수없이 지나다녔지만 늘 그 안에는 들어가 본적이 없었습니다. 다른 나라에 가면 들리는 곳 중의 하나가 왕궁인데 제나라 왕궁도 보지 않은 미안한 마음도 있고 해서 3,000원 입장료를 내고 들어갔습니다.
경복궁은 1395년(태조 4년)에 창건하였습니다. ‘경복(景福)’은 시경에 나오는 말로 왕과 그 자손, 온 백성들이 태평성대의 큰복을 누리기를 축원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현재 광화문은 공사 중이기 때문에 옆으로 돌아 들어갔습니다. 광화문 다음에 나오는 곳이 흥례문입니다. 흥례문 앞까지는 입장료를 받지 않습니다. 그냥 구경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바로 나오는 곳이 국보 223호로 지정되어있는 근정전입니다. 그 뒤에 왕과 신하들이 정치를 논하던 사정전이 있고 그 뒤에 침전이 있습니다. 근정전 왼쪽으로는 경희루가 있고 오른쪽으로는 동궁이 있습니다.
동궁쪽으로 나가면 국립민속박물관이 있습니다. 1993년 국립중앙박물관 청사로 사용하던 건물인데 국립중앙박물관이 용산으로 이전하면서 이곳에 민속박물관을 만든 것입니다.
경복궁에서도 제일 많이 눈에 띄는 관광객은 일본 사람이었습니다. 이들을 안내하는 안내인은 열심히 설명하고 일본 사람들은 잘 듣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보다 더 많은 공부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부끄럽지만 근정전을 가까이에서 처음 보았습니다. 근정전이 눈앞에 들어오는 순간 조선의 위엄이 느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지나치게 불필요하게 외모 중심으로 치장하지 않은 실제적이면서도 규모 있는 건축물이 꼭 조선에 맡는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어디에 내 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왕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국립민속박물관에 들려보았습니다. 대한민국이 오늘날 이렇게 발전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역사가 있습니다. 저는 영국 대영 박물관도 들러보았습니다. 그들은 자기들 것이 아니라 이집트에서 로마에서 가져다 놓은 것이 거의 다였습니다.

우리민족을 어디에다 내 놓아도 자랑스러울 만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관광객의 입장에서 본다면 옥의 티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저는 민속박물관을 거의 관람을 마칠 때 즈음에 너무 많이 걸어서 지쳐있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광화문 옆으로 들어와서 처음 대한 흥례문 앞에 근위병들이 생각났습니다. 관광객을 위하여 조선시대 복장을 하고 교대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적지 않이 실망했습니다. 그들은 관광객들하고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사진 찍어주는 것이 잘못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저 만큼이나 지쳐 있었습니다. 힘이 하나도 없이 마치 조선시대 복장이 그래서 그런지 신발을 질질 끌며 힘없이 걷는 모습에서 조선의 위엄과 대한민국의 위엄이 다 사라지는 듯 했습니다. 이왕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합니다. 영국에 갔을 때, 영국 왕궁 앞에서 본 모습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눈빛이 빛나고 차렷 자세로 서 있는 부동 자세는 위엄이 있었습니다. 그저 사진 찍으려면 옆에 살짝 가서 찍는 정도입니다. 제가 생각할 때는 아르바이트 학생을 쓴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래서는 안됩니다. 해병대로 바꿔야 합니다. 해병대가 안되면 최소한 헌병으로 모두 교체해야 합니다. 어설픈 서비스는 오히려 국가에 대한 이미지만 실추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저 자신이 어설픈 그리스도인이 아닌가? 바울은 본문 3절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말합니다.
빌레몬서 1:1-2절 “1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2 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병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라고 말합니다.
빌립보서 2:25절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라고 말합니다.

예수의 좋은 병사는 누구입니까? 어떻게 해야 예수의 좋은 병사가 됩니까?
첫째, 병사는 단순합니다. 복잡한 사람은 좋은 병사가 되기 어렵습니다. 지혜롭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생각에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근심과 걱정을 주님께 맡겨야합니다. 군대에 들어왔으면 뭐만 잘하면 좋은 군인이 됩니까?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됩니다. 군대 생활에 적응을 잘하는 사람은 모두 단순한 사람입니다.
명품을 만드는 곳은 여러 가지 취급 안 합니다. 한가지만 합니다. 음식점도 잘하는 곳은 여러 가지 하지 않습니다. 한 두 가지만 합니다. 신앙생활도 제대로 하는 사람은 단순합니다. 자기가 다 성경보고 연구한 것 아니잖아요. 그럼 누구 말 들으면 됩니까? 오래 동안 연구하고 성경보고 신앙 생활한 목사의 말을 들으면 됩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교회 다니는 성도님들을 보면 저는 복잡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분들 신앙 참 단순합니다. ‘오직 예수’에만 집중하는 것입니다. 루터 때 종교개혁이 성공한 것도 단순함에 있습니다.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라는 단순한 핵심에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예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본문 1절에 바울은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라고 말합니다.
찰스 스탠리의 아들로 미국의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앤디 스탠리가 있습니다. 그가 사역 중에 큰 어려움을 격게 되어 낙심과 좌절 속에 헤맬 때였습니다. 그 때 나이드신 성도님이 심방을 요청하여 그 집에 갔습니다. 그 자리는 앤디 스탠리를 위로하기 위한 심방요청이라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화가 루벤스가 그린 “사자 굴의 다니엘”이라는 그림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그림에 무엇이 보이십니까?” “사자 몇 마리와 굴 안으로 들어오는 빛줄기, 그리고 다니엘이 보입니다.” 그랬습니다. “더 자세히 보십시오.” 나이든 성도가 말했지만 앤디는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그 때 나이든 성도가 말하기를 “다니엘의 눈빛을 보십시오. 그의 눈은 사자가 아닌 하나님을 향해 있습니다.” 앤디는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람들은 무서운 사자를 바라봅니다. 풀리지 않는 세상일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만, 예수 그리스만 바라봅니다.

셋째, 충성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 2절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고 합니다. “명장 밑에 약졸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선생이 되면 좋은 제자가 생깁니다. 내가 먼저 충성스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충성이라는 말 가운데서 자꾸만 어떤 일을 생각합니다. 마치 큰 일을 꾸며야 충성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이 우주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하나님의 일을 하겠습니까? 예수님은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 6:29)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죄 짓지 않고 잘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죄에 대해서 무뎌져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루터는 수도원에서 생활하면서도 죄에 대해서 민감했습니다. 그가 어려서 수도원에 있을 때 너무 자주 죄에 대해서 가져 오니까 교부가 말하기를 “루터야 죄를 한꺼번에 모아 가지고 오너라”고 했다지 않습니까. 수도원에서 뭐 죄 질 일이 있겠습니까? 다 마음으로 지는 것이지요.

구약성경에 보면 바벨론 70년 포로 생활을 하고 70년 만에 돌아온 이야기가 에스라서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리고 80년이 더 지나서 2차 귀환이 에스라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들은 바벨론에서 하나님의 성전에 드릴 금, 은 각종 예물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와서 바칩니다. 여기까지는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동안의 잘못을 회개하기 위한 제사도 드렸습니다. 그런데 에스라서 9장에 보면 에스라가 당시에 이스라엘 땅에 살고있던 이방 민족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혼인하여 섞이게 되자 하나님 앞에 대성통곡을 하며 옷을 두 번씩이나 찢고 회개 기도를 합니다. 자기 민족을 위하여 모세도 하나님께 회개한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나 저는 에스라 만큼 통회하며 회개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데 자신들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 말을 못합니다. 말하기조차 부끄럽다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포도(捕盜) 군사의 은동곳 물어 뽑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도둑으로 잡히고 나서 옥으로 끌려가면서도 포도 군사의 상투에 꼿힌 은동곳을 뽑는다는 것입니다. 도둑의 버릇은 좀처럼 고치기 힘들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말로만 회개했다고 하면 그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원래가 죄인입니다. 그만큼 죄 짓는데 익숙해져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다시는 죄 짓지 않기 위해서 몸부림 쳐야 합니다. 죄를 그저 날름 날름 고기 잡아먹듯이 하면 언젠가는 농약 먹은 새나 물고기 먹다가 죽습니다. 반드시 죽게되어 있습니다. 죄는 처음에는 작은 것이지만 나중에 점점 커집니다. 이 죄 때문에 사람이 망하는 것이 아닙니까? 결국 충성되지 못하는 것도 이 죄로 인함입니다. 죄를 밤 먹듯 짓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부탁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의 명장이란 좋은 선생이란 철저하게 회개하고 다시는 죄 짓지 않기 위하여 노력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로마의 병사들하고 참 오랫동안 지냈습니다. 자신을 포로로 고린도에서 로마까지 압송할 때 로마 병사가 맡았습니다. 사도행전 21장에 보면 바울이 예루살렘에 귀환 했을 때 유대인들에게 잡혀서 몰매를 맞아 죽을 뻔했습니다. 이 소문이 로마 군인 천부장에게 들리고 그가 와서 이 사태를 진정시켰습니다(31-32).
사실 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로마 군사는 예수님을 처형시킨 장본인이며 유대인 입장에서 보면 자기 나라를 쳐들어와 지배하는 군인에 불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병 하나 하나를 볼 때 그 정신을 본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라를 지키면서 집에도 가지 않고 사적인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아마 이러한 로마 군병의 모습을 보면서 저와 같은 생각을 했니 봅니다.
훈련된 군사, 정신이 살아 있는 군사, 명령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군사 바로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 이런 모습을 본 받기를 원한 것입니다.

이탈리아 남부의 나폴리 연안에 있던 고대 도시 폼페이(Pompeii)는 인류 역사상 최고의 상업도시요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폼페이는 베수비우스(Vesuvious)산의 화산 활동으로 그 주변은 온천으로 인해 로마 귀족들의 요양과 휴식을 위한 별장과 신전과 극장들이 지어졌습니다. 환락의 도시였습니다. A.D. 79년에 로마 황제 티투스(Titus Vespasianus Augustus)가 등극했습니다. 그 해 베수비오산은 대 폭발하였습니다. 화산재가 온 도시를 덮어버렸습니다. 삽시간에 매몰되어 그 자취가 완전히 사라져버렸습니다.

이후 1748년 나폴리의 국왕 샤를로(Charlot)에 의해 그 흔적이 드러났으며, 1755년 독일의 고고학자인 요한 빙켈만(Winckelmann)이 로마서를 뒤지던 중 그 곳이 로마의 도시 중 하나인 폼페이임을 확인했습니다. 폼페이의 발굴 중 벽화를 포함한 초기의 발굴 품은 현재 대부분 나폴리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거의 1700년이 지나 화석이 된 채 발견된 사람들의 모습은 너무 처참했습니다. 화산이 폭발하는 엄청난 재앙의 절박한 순간 속에서 사람들의 모습이 그대로 발굴되었습니다. 거대한 화산 폭발에 황급히 도망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부터 시작하여 각양각색 사람들의 모습이 발굴되었습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부둥켜안은 채 숨진 것도 있었고, 어떤 여자아이는 손에 황금노리개를 그대로 움켜 쥔 채 달리다가 넘어진 자세로 숨져있었습니다. 또한 뜨거움에 견디지 못하여 웅크린 채 입을 크게 벌리고 굳어버린 안타까운 모습도 있었고, 죽음이 언제 오고 있는지 전혀 상관없이 목욕탕에서 벌거벗은 채 굳어진 모습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눈여겨볼 부분은 성곽을 지키는 로마병정의 모습입니다. 그는 자신의 초소에서 자리를 지키다 의연히 죽음을 맞이한 모습으로 발굴되었습니다. 그 로마병정은 다른 사람들처럼 도망가지 않았고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꼼짝 않고 창을 들고 서있는 참 군인의 모습으로 발굴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화산이 폭발한다 할지라도 이 로마병정처럼 도망가지 않고 내 자리를 지킬 수 있을 그리스도의 병사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