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을 깨우세요.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막 1:35)

인간의 잠재적 능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놀랍습니다. 아직도 우리 속에는 9/10의 능력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만 내가 너무 지쳐 있기 때문에 때로는 내가 너무 게으르기 때문에, 너무 기회주의 적이기 때문에, 너무 이기적이기 때문에 평생 동안 손 한번 써보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수없이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의 두뇌는 브리태니커 백과 사전을 몽땅 외우고, 40개 외국어를 유창하게 말하고, 더 나아가 자신의 전문 분야를 놀랍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합니다. 사람의 두뇌는 한계가 없습니다. 사람의 이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두 가지 선물을 주셨습니다. 하나는 무한한 가능성이고 다른 하나는 선택의 자유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눅 17:21)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무한한 능력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자꾸만 나의 능력이 부족하고 안 된다는 사고방식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엄청난 것을 주셨는데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지내는 것입니다. 금광이 눈앞에 있어도 캐내야 쓸모가 있습니다. 단련을 시켜야 합니다. 내 안에 있으면 뭐합니까 깨어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엄청난 능력이 잠을 자고 있는 겁니다. 오늘 내 속에서 잠자는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을 깨우시기를 바랍니다.

잠자는 능력과 영혼만 깨우면 되지 왜 새벽을 깨우라고 하시나 생각하시는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땅에서 육체를 벗어나서 살 수 없습니다. 육체와 영혼을 이 땅에서는 분리시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둘은 늘 함께 갑니다. 공산주의가 잘못 생각한 것 중의 하나가 육체를 우습게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거룩한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몸을 함부로 다루는 것 자체가 죄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대로 방치하는 것도 죄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우리가 영적, 영적 하지만 영이 무엇입니까 영을 어떻게 깨웁니까 바울이 말하기를 몸을 드리는 것이 영적 예배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몸을 드리지 않으면서 마음만 드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을 깨우기 위해서는 우리의 몸이 깨어나야 합니다.

현대그룹을 만든 정주영 회장과 이명박 대통령은 새벽에 일찍 활동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정주영 회장은 일하고 싶어서 밤에 일어나, 왜 이렇게 동이 늦게 트나 늘 말하곤 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명박 대통령은 1978년부터 소망교회 출석했지만 현대건설 사정과 회장을 거치면서 해외 출장이 많아 새벽기도와 교회 봉사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장로 투표에서 떨어졌습니다. 소망교회 장로 되는 것이 국회의원 되는 것 보다 힘들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1992년 14대 국회의원이 된 후 3년 4개월 동안 매주 주일날 새벽부터 주차 봉사를 하면서 1995년에 장로가 되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어머니는 새벽기도를 열심히 하신 권사님입니다. 가난했지만 새벽에 일찍 일어나 새벽기도하고 열심히 사는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 열심과 믿음과 성실함으로 대통령의 자리까지 간 것입니다.

소망교회를 1977년에 개척한 곽선희 목사님의 철학은 ‘새벽기도 일상화’ 였습니다. 성도의 생활에 새벽기도가 체질화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곽선희 목사님은 은퇴하는 그 날 까지, 목사가 되고 43년 간 새벽기도를 개근한 것이 제일 자랑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등상보다 개근상이 더 좋은 것입니다. 곽선희 목사님 설교가 우등한 것이라면 새벽기도는 개근한 것입니다. 이렇게 새벽기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한국전쟁 때 북한에서 내려올 때 어머니가 “너를 위해 날마다 새벽기도 하겠다. 너도 기도하라”고 하신 말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님도 머슴목회론과 새벽기도로 부흥한 교회입니다. 명성교회 새벽기도는 새벽 5시부터 9시까지 5번이나 열립니다. 일년에 두 차례는 일주일씩 두 번 합니다. 김삼환 목사님은 “새벽기도는 제 생명줄입니다.”고 말합니다. 김삼환 목사님이 이렇게 새벽기도를 열심히 드리는 것도 할머니와 어머님의 새벽기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할머님은 85세로 돌아가실 때까지 새벽기도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어머님은 손을 잡고 춘하추동 가리지 않고 새벽기도에 데리고 다녔습니다. 16살 때 담임목사님께 탁상시계하나를 받았는데 새벽기도를 알리라는 종치라고 준 선물이었습니다. 김 목사님은 18세가 되기까지 그 교회 종을 쳤고 이후 20년 동안 새벽종을 치며 자랐습니다. 얼마나 그 종을 사랑했는지요, 현재 그 종을 떼어다가 명성교회 강단 위에 나무로 만든 종 탑을 세워놓았습니다. 소년 시절에 쳤던 종을 옮겨 놓은 것입니다.

1971년 청계천에서 활빈교회를 개척한 두레교회 김진홍목사는 1982년에 펴낸 “새벽을 깨우리로다” 에세이집은 100쇄를 넘게 찍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일반서적도 흔하지 않은 일입니다. 새벽을 깨우니까 새마을 운동도 되는 것입니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하면서 일어나야 합니다.
왕성교회 길자연 목사님은 아버님이 새벽기도에 덮어쓰고 기도하시던 동물로 만든 가죽털옷을 물려주셨습니다. 그거 덮어쓰고 새벽기도 하라 구요. 기도해야 삽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기도하는 집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새벽기도는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대학생이 제일 많이 모이는 교회중의 하나가 삼일교회입니다. 이 교회를 담임하는 전병욱 목사가 가장 강조하는 예배가 바로 새벽예배 기도입니다. 4대 독자로 기독교집안에서 자랐습니다. 할아버지는 서울에서 목회를 하다가 공산당이 쏜 총에 맞아 순교했습니다. 외가는 평북 순천에서 기독교 신앙을 지키기 위해 월남한 12명의 가족입니다. 모두 목사와 장로가 된 집안입니다. 장로님이셨던 전 목사님의 아버님은 어린 아들을 새벽기도에 데리고 다니고, 성경을 안 읽으면 밥도 안줄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교육을 받고 자란 전병욱 목사님은 노골적으로 새벽기도를 강조합니다. “어떻게 새벽기도에 안 나올 수가 있나 새벽기도에 안 나오고도 잘 될 수 있을 것 같은가 “라고 말합니다. 새벽에 부지런하면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삼일교회는 입시 생과 고시 생이 많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새벽기도하고 공부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 교회의 청년 중에서 한 해에 30명이 넘게 사법고시에 합격한 적도 있습니다. 싱가포르는 아침 7시에 수업을 시작해서 낮 12시면 마칩니다. 우리나라도 밤 문화를 새벽문화로 바꾸어야 합니다.

사랑의교회도 옥한흠 목사님이 오정현 목사님께 목회를 맡길 때 등록교인 3만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현재 8만 명이 넘었습니다. 오정현 목사가 부임하자마자 한 것이 40일 특별새벽기도입니다. 6,000명이 새벽 2시부터 줄을 서서 기다렸습니다. 새로 부임했지만 47일 동안 매일 3시간씩 성도들을 보니까 3년을 목회 한 것과 같이 가까워졌습니다. 문제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 지각 변동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교회가 뜨거워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예전에 “평신도를 깨운다”는 책을 썼는데 이 책을 다시 보강해서 “다시 쓰는 평신도를 깨운다”를 썼습니다. 좌우지간 뭘 자꾸 깨워야 합니다. 새벽도 깨우고, 평신도도 깨우고 집사도 깨우고 목사도 깨워야 합니다.
오정현 목사가 대학교 다닐 때 종로구에 있는 내수동 교회에 다녔는데 대학생이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기도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고 박희천 목사님이 신학생도 아닌 그를 대학부 지도 전도사로 임명했습니다. 신학교 다니는 학생보다 새벽기도 열심히 나오는 학생이 더 났다는 말입니다. 1979년 30명에 불과했던 대학생들이 1년 만에 100명이 되었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날 때 1982년 5월에는 300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이미 새벽기도의 재미를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중학교 때 교회 다니기 시작해서 새벽기도를 다녔습니다. 시골에서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중학생이 새벽기도에 나오니까 목사님과 권사님들이 저를 너무 좋아하셨습니다. 김삼환 목사님은 종치라고 자명종 시계를 받았다고 하시는데 저는 시계가 없었습니다. 교회에서 종치는 소리가 들리는데 그 소리가 날 때가 4:30분입니다. 아마 김삼환 목사님이 치신 종일지 모릅니다. 그 소리 듣고 일어나 교회로 달려갑니다. 그런데 그 소리를 들으려면 자면서도 신경을 써야 합니다. 그래야 그 소리를 듣습니다. 요즘은 일어나기가 너무 좋습니다. 핸드폰이 알려주니까요. 어느 날은 추운 겨울 새벽에 교회에 갑니다. 눈이 온 날도 있습니다. 장로님이 저보다 먼저 오셔서 눈을 쓸어놓으셨습니다. 저는 눈온 날 꼭 눈을 한번 교회 나오시는 분들을 위해서 장로님보다 먼저 눈을 치워보고 싶었습니다. 기회가 왔습니다. 초저녁부터 눈이 오는 겁니다. 그래서 잘 되었구나 생각하고 새벽에 나올 생각을 한 것이 아니라 초저녁부터 눈을 쓸기 시작했습니다. 눈이 오면 또 쓸고 또 쓰는 겁니다. 새벽까지요. 그것이 왜 그렇게 기쁘고 즐거웠는지요. 그래서 아마 하나님이 저를 불러 주셨나 봅니다.

평양대부흥운동의 중심은 당시 장대현(장대재 라고도 함)교회였습니다. 부흥운동은 1907년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부흥사경회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나 실제 이 부흥운동을 만든 힘은 1906년 4월 15일 장대현교회에서 길선주 목사가 새벽기도회를 시작한 것에부터 시작합니다. 비가 많이 오면 땅이 젖어서 기반이 약해진다고 합니다. 마치 이와 같이 이미 새벽기도를 통해서 부흥의 운동이 시작된 것입니다. 서양선교사가 새벽기도를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새벽기도회입니다.

성경의 역사가 모두 새벽이 일어났습니다.
출애굽 때 “새벽에 여호와께서 불과 구름 기둥 가운데서 애굽 군대를 보시고 애굽 군대를 어지럽게 하시며”(출 14:24) 멸망시켰습니다.
여리고성이 무너질 때 “제칠일 새벽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서 여전한 방식으로 성을 일곱 번 도니 성을 일곱 번 돌기는 그날 뿐이었더라”(수 6:15). 여리고성이 무너져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돈 것도 새벽입니다.
예수님은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새벽에 부활하셨습니다(눅 24:1).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 때에 “19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가로되 20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21 저희가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행 5:19-21) 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도 새벽에 모여서 기도하고 가르쳤습니다.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 하시더라”(계 22:16)고 했습니다.

새벽기도를 드릴 때 힘이 생깁니다. 예수님이 왜 새벽별이시겠습니까 예수님이 왜 새벽기도를 하셨겠습니까 새벽에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어려움을 당한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에게 힘을 주시는 시간입니다. 새벽은 하루가 시작되는 첫 시간입니다. 세상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생각나면 하나님 앞에 아무 때나 오는 것보다는 하루의 첫 시간을 드리는 사람을 하나님은 좋아하십니다. 하루를 시작하게 하는 힘을 새벽에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그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시 46:5)

“새벽을 깨우세요.”
이왕 예수 믿는 것 뒷걸음치지 마세요. 자꾸만 앞으로 나오세요. 부딪치세요. 교회 가까운 곳으로 이사오세요. 믿음을 중심으로, 예수를 중심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지 않을 수 없도록, 하나님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이 되는 것입니다.
“왕대 밭에 왕대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다른 것 물려줄 생각하지 말고 새벽기도를 물려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요나단의 사랑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다윗에 대한 요나단의 사랑이 그를 다시 맹세하게 하였으니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 같이 그를 사랑함이었더라” (삼상 20:17)

마음 울적할 때 저녁 강물 같은 벗 하나 있었으면
날이 저무는데 마음 산그리메처럼 어두워올 때
내 그림자를 안고 조용히 흐르는 강물 같은 친구 하나 있었으면

울리지 않는 악기처럼 마음이 비어 있을 때
낮은 소리로 내게 오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 노래가 되어 들에 가득 번지는 벗 하나 있었으면

오늘도 어제처럼 고개를 다 못 넘고 지쳐 있는데
달빛으로 다가와 등을 쓰다듬어주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라면 칠흑 속에서도 다시 먼 길 갈 수 있는 벗 하나 있었으면
<벗 하나 있었으면 / 도종환>

성경에 이런 벗이 있습니다.
나폴레옹은 “정치의 세계에는 마음이란 없고 오로지 머리만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요나단과 다윗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머리가 아닌 마음이 있었습니다.
구약성경은 다윗을 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다윗은 요나단을 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 천년동안 성경역사에서 눈길과 주목을 받지 못했던 사람이 요나단입니다. 이 땅에 남긴 것이라곤 ‘절름발이 아들’ 뿐이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오늘날 우리에게 성도의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이 무엇인지를 몸소 실천한 사람입니다. 오늘 ‘요나단의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에 흠뻑 빠지시기를 바랍니다.

“관포지교(管鮑之交)”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이 말은 관중(管仲)과 포숙(鮑叔)의 우정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중국 제(齊)나라에서, 포숙은 자본을 대고 관중은 경영을 담당하기로 하고 동업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관중이 이익금을 혼자 독차지하였습니다. 포숙은 관중의 집안이 가난한 탓이라고 너그럽게 이해하였습니다. 또 함께 전쟁에 나가서는 관중이 3번이나 도망을 하였는데도 포숙은 그를 비겁한 자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에게는 늙으신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이라고 그를 대변하였습니다. 포숙은 관중을 끝까지 믿어 그를 믿어 주었고, 관중도 훗날 포숙을 가리켜 “나를 낳은 것은 부모이지만 나를 아는 것은 오직 포숙뿐이다(生我者父母 知我者鮑子也)”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동양에서는 우정을 이야기할 때 보통 관중과 포숙의 우정을 대표적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성경 속에서 우정하면 다윗과 요나단을 이야기합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사랑은 성도와 그리스도 사이에 있는 사랑을 예표합니다. 그러므로 다윗과 요나단 사이에 있는 사랑을 알면 그리스도와 성도사이에 있어야 될 사랑이 무엇인가 알 수 있습니다.

요나단은 “여호와께서 주셨다”는 뜻입니다. 요나단은 그의 이름답게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요나단이 누구입니까 사울 왕의 장자입니다. 왕자라는 이야기입니다. 사울 왕 다음에 왕이 될 제1순위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 왕자라는 자리를 탐하지 않았습니다. 왕자의 자리보다 소중한 것은 사랑하는 친구 다윗이었습니다. 왕자의 자리도 그 사랑을 빼앗을 수는 없었습니다.

요나단은 사랑의 사람이었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요나단은 사울 왕의 장남이었고 천명의 군사를 거느린 군대장관이었습니다. 그의 주둔지역은 기브아였습니다. 기브아는 당시에 제일 전투가 치열했던 블레셋과 마주 대한 진지입니다.
한번은 병기 든 소년과 함께 적진에 들어갔습니다. 블레셋군의 주둔지역에서 20명을 도륙했습니다. 한 나라의 왕자가 제일 위험한 전투를 한 것입니다. 그는 전방에 있었습니다. 그는 블레셋군의 혼전으로 큰 전과를 올렸습니다. 이때에 남긴 유명한 말이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삼상 14:6)하는 것입니다. 요나단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두려워할 줄 아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12절에도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자에게 이르되 나를 따라 올라오라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기셨느니라 하고” 나아갔습니다. 사랑하는 관계는 무엇이 있습니까 바울이 우리에게 알려주었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이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관계에는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에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기 때문입니다.

둘째, 나라를 사랑했습니다.
요나단은 탈선한 아버지 때문에 전쟁에 나갔습니다. 길보아산에서 아버지 사울과 함께 전사합니다. 요나단은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아버지에 대해서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아버지 사울이 폐역한 왕이었지만 그는 반역을 꿈꾸지 않습니다. 아들로서 최선을 다해 살았습니다. 자기의 역할을 다한 사람입니다.

셋째, 친구를 사랑했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본문에 “자기 생명을 사랑함 같이” 라고 했습니다. 삼상 20:4절에서는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 마음의 소원이 무엇이든지 내가 너를 위하여 그것을 이루리라”고 합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삼상 18:1) 여기 잘 보세요. 다윗이 먼저 요나단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요나단이 먼저 다윗을 사랑했습니다. 또 삼상 18:3에서 “3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4 요나단이 자기가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자기의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고 합니다.
여러분! 지금은 다윗이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 요나단이 대단한 사람입니다. 요나단은 왕자입니다. 다윗은 목동에 불과합니다. 요나단이 입고 있던 군복을 다윗에게 입혀준다는 것은 왕자의 복장을 다윗에 준 것입니다. 이것은 이후 왕권도 요나단은 다윗에 준다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주인은 종에게 비밀을 털어놓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종이 아닌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요 12:15) 예수님은 주인이나 스승의 관계를 뛰어넘어 속마음을 주고받는 친구의 관계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하겠다는 것입니다. 죽을 각오도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무엇이든 하신 분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나 할만한 그런 사랑을 요나단은 다윗을 위하여 한 것입니다. 친구 다윗을 마치 자기의 분신처럼 생각한 것입니다. 요나단의 이런 사랑이 있었기에 다윗도 사울을 두 번씩이나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죽이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한 사람의 사랑은 또 다른 사람에게 이동됩니다. 사랑의 바이러스입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그토록 사랑을 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입니까

첫째, 권력을 뛰어넘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다윗은 사울을 이어 새로운 왕이 되어야 할 촉망받는 차세대 지도자입니다. 사무엘에게 이미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시기하고 죽이려는 현재의 왕 사울의 장자입니다. 요나단의 입장에서 보면, 다윗은 자기 아버지의 권력을 위협하는 위험한 존재입니다. 아니 자신의 안위와 이익을 해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요나단이 욕심이 있다면 지금 왕권을 가지고 다윗과 한판 붙어야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단은 다윗을 끝까지 사랑하고 아꼈습니다. 그는 힘센 아버지보다는 아무런 힘도 없는 다윗의 편을 들었습니다. 사울인 아버지가 볼 때는 한심한 놈으로 보였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요나단은 자신을 완전히 비운 사람입니다.

둘째, 혈연을 뛰어넘었습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단은 끈끈한 혈연 관계를 뛰어넘었습니다. 물론 다윗은 사울의 사위입니다. 그러므로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는 매형과 매제의 관계입니다. 하지만 사울이 다윗을 사위로 삼은 것은 순전히 정략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비록 사울의 딸 미갈이 다윗을 좋아하였기 때문에 다윗을 사위로 삼기는 했지만, 사울이 다윗을 사위로 삼은 것은, 이 사실을 올무로 삼아 블레셋 사람이 다윗을 쳐서 죽이도록 하려는 사울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습니다(삼상 18:20-21). 요나단의 입장에서 보면 다윗은 자신과 피 한 방울이 섞이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끝까지 아버지 편에 설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친구 사이를 이용해서 아버지를 이롭게 하고 자기가 왕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나단의 사랑은 혈연관계를 뛰어넘었습니다. 적어도 요나단의 입장에서 보면, 물이 피보다 진했습니다.

셋째, 연륜을 뛰어넘었습니다.
요나단이 죽었을 때에 다윗이 요나단을 형이라고 불렀습니다.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삼하 1:26)
다윗은 요나단을 형이라고 부른 것을 보면 다윗이 좀 어렸던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가 얼마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설령 한 살의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서열을 매우 중시했던 옛날 유대인에게는 한 살의 나이 차이도 결코 적은 차이가 아닙니다. 아마도 한 살 이상의 차이는 났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단은 다윗을 동생이라고 우습게 생각하여 대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 가지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이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이웃과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가 다 여기에 있습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길 때 비로소 사랑은 시작될 수 있습니다.

요나단이 어떻게 그런 위대한 사랑을 할 수 있었을까요 “요나단”(여호와께서 주심)의 이름대로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칼과 전쟁을 통해서라도 빼앗는 것입니다. 피를 흘리게 합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살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은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게 합니다. 의와 평화를 위하여 자기를 헌신할 수 있게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2:13) 라고 하셨습니다.

미국의 정신적인 스승 중의 한 사람이었던 에머슨은 “친구를 얻는 유일한 방법은 스스로 완전한 친구가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요나단은 자기 왕자의 자리를 버리고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사람입니다.
여러분! 사랑은 내가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내가 다 가지려고 하는 사람만 사는 세상에 사랑은 없습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기를 원하세요. 사랑을 하면 행복해 집니다. 사랑을 하면 세상에 모든 일에 기쁨이 넘칩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도 소망이 있습니다. 사랑을 기다리기보다는 사랑을 찾아 나서보세요. 요나단처럼 먼저 다윗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예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먼저 사랑함같이 복음을 먼저 받은 우리가 먼저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남자들끼리는 잘 안 안습니다. 그렇다고 여자는 자주 껴안는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런데 선교지에 가면 가끔 껴안습니다. 공항에 도착해서 반갑게 껴안습니다. 저는 이 재미 때문에 선교지에 자꾸만 가고 싶습니다. 오늘 우리도 한번 껴안아 보길 원합니다. 축도 하기 전에 시간을 드릴 테니까 남자 분들끼리, 여자 분들끼리 한번 껴안아 보세요. 잘 보고 껴안으세요. 바뀌면 안됩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안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딤후 1:7) 

아이티는 지난 2010년 1월 12일 수도 포르토프랭스를 중심으로 지진이 덮쳐 온 나라가 엉망이 되었습니다. 이번 지진으로 아이티 전체 인구의 3분의 1에 달하는 300만 명이 피해를 입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아이티는 아프리카의 빈민국보다 더 못사는 나라입니다. 먹을 것이 부족하여 ‘진흙쿠키’를 만들어 먹는 나라입니다. 아이티는 18세기 프랑스 식민지였는데 이 때 백인들이 50만 명이 넘는 흑인들을 노예로 아프리카에서 들여와 설탕, 커피 등을 생산하게 하고 막대한 부를 가져갔습니다. 노예들은 1791년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나폴레옹 군대까지 동원되었지만 물리치지 못했습니다. 아이티는 1804년에 독립을 쟁취했습니다. 그래서 아이티 혁명은 흑인이 독립을 쟁취한 최초의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프랑스로부터 독립은 했지만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1838년에는 프랑스에 공식적인 승인을 받기 위해 엄청난 액수의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는데 돈이 없으니까 이 돈을 다시 프랑스로부터 빌리는 것으로 해서 1862년이 되어서야 승인을 얻었습니다. 이로 인해 19세기에 아이티 중앙은행은 프랑스 자본으로 세워졌습니다. 1880년부터는 사실상 미국 자본이 아이티를 장악했습니다. 미국은 자본만이 아니라 1915년부터 34년까지 무력으로 아이티를 장악했습니다. 이 때부터 아이티는 미국의 식민지 나라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1995년 5월에 사할린에 대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사는 아파트는 무너졌고 2,500명이 매장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변란 속에도 건재한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레닌 동상입니다. 사람들이 사는 아파트는 대충 지었지만 레닌 동상은 잘 만들어 세우고 관리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 이런 식이 되면 안됩니다.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쓴 마지막 편지입니다. 바울은 순교의 시간이 임박해 오는 것을 깨닫고 에베소에서 어렵게 목회하고 있는 디모데를 위로하고 힘과 용기를 주고자 이 편지를 기록했습니다. 디모데는 나이가 어린 목회자이며 몸이 쇠약하며 의기소침한 상태였습니다(딤전 5:23). 바울이 디모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3절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디모데를 생각하면서 간절히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바울은 죽음이 임박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의 안위보다는 하나님의 교회를 목회하는 디모데를 생각합니다. 그가 그리고 모든 두려움과 연약함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일꾼으로 거듭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오늘 바울을 통해서 디모데에게 전한 말씀은 예수께서 오늘 우리를 바라보시며 하시는 말씀이라고 확신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가 육체적으로 병이 들었다 할지라도, 성격이 소심한 디모데와 같다 할 지라도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의 사람으로 변화되기를 바라십니다.

오늘 말씀은 두 가지 마음으로 대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마음과 그렇지 않은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마음은 능력과 사랑과 절제입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누가 주었겠습니까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겁쟁이가 됩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은 늘 하나님의 일을 망칩니다. 불신앙을 가져다 줍니다.
농사를 지어보신 분들은 압니다. 농약을 치지 않고는 농사짓기가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요. 그래서 농사짓는 분들은 농약을 치지 않았다는 말을 잘 안 믿습니다. 그만큼 유기농 농사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근래에 이것을 가능하게 만든 기업이 있습니다. 해충의 천적인 곤충을 찾아내어 그것을 보급하는 것입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이 해충이라면 능력과 사랑과 절제는 두려운 마음을 잡아먹는 천적인 곤충입니다.
구약성경의 모든 불신앙이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출애굽 때 가나안 정탐꾼들의 불신앙입니다. 자기들은 정탐한 것을 보고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아낙자손들의 거대함에 기가 죽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어디로 가랴 우리의 형제들이 우리를 낙심하게 하여…”(신 1:28)라고 합니다. 자신들의 두려워 하는 마음은 사람들을 절망으로 몰아넣었습니다. 하나님을 보아야 하는데 사람을 보았습니다. 사람을 보면 낙심하게 됩니다. 모세는 다시 말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신명기 1:29)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으로 가야합니다. 두려우면 어떻게 길을 떠납니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떠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가야합니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 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마음은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입니다.

타조는 100kg이 넘는 무거운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날개가 있지만 모양만 있을 뿐 그것으로 날수는 없습니다. 날카로운 이빨도 없고 딱딱한 갑옷도 없습니다. 뿔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뒷발질을 잘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타조가 야생의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 남을 수 있었을까요
타조는 사람의 시력보다 최소 25배나 뛰어난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머리 뒤쪽으로는 발달된 귀가 달려 있습니다. 눈으로 보든지 귀로 듣든지 사방 어느 쪽에서 적이 다가오든지 쉽게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시속 80km이상 달릴 수 있는 다리가 있습니다. 어떤 동물도 타조처럼 오랫동안 빨리 달릴 수 없습니다. 타조의 쓸모 없는 날개와 무거운 몸만 생각한다면 타조에게 삶은 저주 자체일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동물보다 빨리 달릴 수 있는 발과 발달된 시력이 있어 타조에게 새로운 힘과 삶에 용기를 줍니다. 타조처럼 자기 장점을 발견하면 살맛이 납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능력 있게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세 가지를 하나님이 주십니다.

절제하는 마음입니다.
다윗은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 39:7)라고 했습니다. 절제하는 마음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절제를 생각할 때 인내를 생각합니다. 꾹 참는 마음을 생각합니다. 화가 났을 때 참는 것, 물론 이것도 절제의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절제란 타조처럼 사는 것입니다. 내게 있는 장점을 보는 것입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절제가 안되면 자기 자신의 비참함만 기억합니다. 만사에 있어서 남의 탓만 합니다. 돈을 버는 사람은 전쟁통에도 돈을 법니다.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한 콜롬버스는 공장 직공의 아들이었습니다. 셰익스피어는 양털 장사의 아들이었고 링컨은 목수의 아들이었습니다.
히브리서 7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바쳤던 멜기세덱이 나옵니다. 히 7:3에 보면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라고 말합니다. 한마디로 출신성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비가 누구인지 어머니가 누구인지 어디서 자랐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전쟁에서이기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베풀었습니다. 2절에 보면 그의 이름의 뜻을 설명했습니다.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라고 했습니다. 멜기세덱은 자신의 신분을 극복하고 왕이 되었습니다. 보통 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길을 가는 아브라함이 그에게 십일조를 바칠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드려진 물질은 하나님을 위하여 바르게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의의 왕이여 평강의 왕입니다. 절제가 되니까 의의 왕이 되는 것이고 평강의 왕이 되는 것입니다. 절제의 마음이 무엇입니까 두려움을 절제하는 것입니다. 무서움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편견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안 된다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 4:20) 고 했습니다.
이 뜻이 무엇입니까 능력이 무엇입니까 말로만 하는 것은 능력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지 않고 우리에게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라”고 하셨다면 예수님의 말씀에는 아무 능력도 없습니다. 느헤미야 5장에 보면 성벽건축을 하는 중에 유대민족이 난리가 났습니다. 이유는 가진 자들이 없는 자들의 땅을 차지하고 종으로 파는 것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가 이 문제를 진정시킵니다. 먼저 지도자들을 모아 놓고 8절 “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는 이방인의 손에 팔린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을 우리의 힘을 다하여 도로 찾았거늘 너희는 너희 형제를 팔고자 하느냐 더구나 우리의 손에 팔리게 하겠느냐 하매 그들이 잠잠하여 말이 없기로” 느헤미야는 형제들을 포로에서 구해왔습니다. 이 일을 하기 위하여 그는 일생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형제들은 이제 와서 동족을 파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했습니다. 그들은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느헤미야의 행함이 없다면 말하지 못합니다. 똑같이 자기 이익을 도모했다면 어떻게 이런 말을 합니까 혹 말을 해도 그들은 듣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아닥사스다 왕 때 페르시아 총독으로 13년을 있었지만 마땅히 받아야할 녹을 받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희생할 때 비로소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감옥에 두 번째 갇히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비록 처형당하지만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능력을 보여준 것입니다. 진정한 능력은 병을 고친 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 가신 길을 가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디모데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사랑의 마음입니다.
사랑이라는 말을 아는 것하고 사랑을 하는 것하고는 다른 문제입니다. 사랑을 하지 않았다면 사랑에 대해서 박사논문을 써도 사랑을 모르는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 때 사람들은 잘못된 사랑의 기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노아의 홍수 원인에 대해서 창세기 6장에 나옵니다. 창 6: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고 합니다. 여기에 두 가지 잘못이 나타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했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 안에 있을 때 진정한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이탈한 사랑은 이미 하나님의 사랑이 아닙니다. 두 번째는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아내를 구했습니다. 세상 아내를 구하면 세상 말만 듣습니다. 솔로몬이 그래서 망했습니다. 열왕기상 11장에 보면 본처 외에 모압, 암몬, 에돔, 시돈, 헷 여자들을 후궁으로 끌어 들였습니다. 이방 여인을 아내로 취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습니다. 후비 700에 빈장 300이었습니다. 이 여자들이 하나님만을 섬겨야 하는 예루살렘 궁전에 여기 저기 우상단지를 놓고 섬겼습니다. 이것이 북왕국과 남왕국으로 갈라지는 이유였습니다. “…네가 내 언약과 내가 네게 명령한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반드시 이 나라를 네게서 빼앗아 네 신하에게 주리라”(왕상 11:11)고 하셨습니다.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는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교육은 환경이 중요합니다. 술, 담배를 잘하는 친구를 만나면 끊었던 담배도 다시 피웁니다. 못 먹던 술도 자꾸 마시게 됩니다. 불평하는 사람을 만나면 같이 불평만 늘어놓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을 만나야 됩니다. 자살 사이트에 가면 자살충동을 느낍니다. 그러나 평안을 주시는 주님을 만나면 평안을 얻게됩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

사람이 동물하고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은 동물처럼 육체적인 사랑만 하지 않습니다. 이성적인 사랑, 영적인 사랑, 희생적인 사랑을 할 때 진정한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만이 하늘을 우러러 본다는 것입니다. 동물들이 하늘을 쳐다보는 것을 보셨습니까 사람만이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존재입니다. 저는 택민이를 보기 이전에는 무슨 일이든 의미를 모르고 하면 헛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일 가운데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물론 의미를 알고 하면 더 좋습니다. 그런데 의미를 몰라도 헛것이 아닙니다. 택민이가 먹을 것보고 기도할 때 일단 두 손을 모르고 고개를 숙이고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엄마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유를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택민이가 기도의 의미를 알까요 그러면 우리는 압니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기도하는 택민이의 모습을 하나님이 기뻐하신 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물을 맡기셨습니다. 디모데에게 에베소교회를 맡기셨습니다.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이 세계를 맡기셨습니다. 우리에게는 가정을 맡기셨습니다. 우리 주앙교회를 맡기셨습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을 버리고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을 가지고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나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7-28)

1997년 12월 7일에 인도 뭄바이를 여행한 적이 있습니다. 한 10시쯤 되었나요, 뭄바이 뒷골목을 거리를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오토바이 하나가 넘어져 있었습니다. 식당에서 음식을 배달하는 아이가 넘어졌습니다. 오토바이에서 넘어져 자신의 다리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는데 나뒹구는 그릇을 챙기느라 여념이 없었습니다. 자기 몸의 상태보다 깨진 그릇이 더 큰 문제입니다. 이 일로 주인에게 눈 밖에 나면 식당에서 쫓겨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릇을 부둥켜안고 이지 저리 뛰는 그 아이의 모습이 지금도 선합니다. 인도는 사람이 넘쳐나기 때문에 사람을 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도사회는 엄격한 카스트사회로 카스트는 ‘출생’을 뜻하는 ‘자티’말로 혼인집단을 말하며 이런 집단은 3,000개가 넘습니다. 단순히 신분은 정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다른 집단으로 이동이 불가능합니다. 즉 한 집단에 속한 사람이 다른 직업이나 다른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카스트는 모든 계층과 직업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힌두교에서는 신이 카스트를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기원전 1000년경(다윗과 솔로몬의 시대,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법궤를 옮길 때가 B.C 1003년)에 만들어진 힌두경전《리그베다》에 보면 인간의 계급이 정해진 것이 나옵니다. 태초에 우주의 본질을 상징하는 거대한 신 푸루샤가 자신을 희생하여 인류를 창조했는데 푸루샤의 입은 사제인 브라만이 되었고 팔은 군인계층 크샤트리아가 되었고, 허벅지는 상인 계급 바이샤가, 두 발에서는 노예인 수드라로 탄생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네 계급으로 색깔이라는 의미의 바르나 제도 곧 사성제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여기에 들지 못하는 ‘아웃카스트’가 수드라보다 못한 불가촉천민입니다.
이것을 석가모니(B.C 563년-483년)가 없애려고 시도했습니다. 석가모니(싯다르타 고타마(성씨))라 칭할 때, 석가( 迦)는 북 인도에 살고 있던 샤키아(Sakya)라 불리는 한 부족의 총칭이며, 모니(牟尼)는 성자를 의미하는 무니(muni)의 음사입니다. 따라서 석가모니는 ‘석 가족 출신의 성자’라는 의미입니다. 석 가족의 왕국인 카필라 왕국의 왕자로 태어났으나 왕궁 밖에서 늙고 병들고 죽는 인간의 생애가 고통으로 이뤄져 있으며 이것을 벗어나는 것을 추구하여 왕위와 가족을 버리고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힌두교는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려면 840만 번 환생해야 윤회의 사슬에서 해방된다고 합니다. 사실상 거의 불가능 한 경지이고 결국 힌두교는 윤회한다는 사상입니다. 그런데 석가모니는 이것을 부정하고 바로 열반에 들어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성제라는 것을 신분의 계급이 아닌 도를 닦으면 된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이 불교의 핵심 진리입니다.

불교는 이러한 사상을 가지고 인도에서 번창하기 시작했습니다. B.C 4세기부터 A.D 6세기까지 중국과 한국, 일본, 동남아시아로 세력을 넓혀갔습니다. 하지만 7세기 경에 인도에서는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0세기 경에 이슬람이 출현하여 불교가 사라졌다고 생각하고 그 바람에 카스트 제도 역시 존속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불교는 힌두교의 윤회사상을 부정하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신분을 버리고 깨달음을 얻었다고는 하나 석가모니는 왕자로 최상위 계급에 속했고 힌두교의 그런 사상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힌두교의 악습을 버리려고 시도했으나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부처가 된 그의 우상 앞에서 절하고 빈다고 해서 그 뜻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이슬람의 창건자 모하메드는 A.D. 571년 경 메카(Mecca)에서 시들어 가는 명문가의 유복자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교묘하게 성경을 왜곡하여 꾸란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슬람이 인도에게는 치명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인도의 불교도 입장에서는 카스트를 무너뜨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이슬람이 방해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8세기 이슬람계의 옴미아드 왕조가 인도에 침입했고, 10세기 가즈니 조는 핀자브를 장악하고 갠지스 유역을 침략하여 힌두 문화를 파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가즈니 조를 이은 고르조가 12세기 갠지스 유역을 점령하자, 지도자 아이바크가 독립하여 인도 최초의 이슬람 국가인 노예 왕조를 세웠습니다. 이 왕조는 델리를 중심으로 북 인도를 지배하였으나 몽골의 침입으로 약해졌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영국이 동인도 회사를 앞세우고 인도에 들어갔습니다. 결국 인도는 이슬람에 의해서 기독교를 왜곡되게 받아들이게 되었고 나중에 영국의 동인도 회사를 통한 기독교 전래 또한 서양의 지배 하에 시도되었기 때문에 기독교가 제대로 소개되지 못했습니다.

이후에 간디가 카스제도에 도전했지만 그 역시 뜻을 완전히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인도는 1950년 1월 26일 공화국을 선포하면서 불가촉천민의 폐지를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상대의 이름만으로 그들의 카스트를 금방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미국 사람들도 베이커 성은 조상들이 빵을 만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맥아더와 맥도날드는 스코틀랜드계입니다. 아일랜드 사람의 상당수 성은 오(O)로 시작합니다. 오브라이언(O’Brian)이니 오닐(O’Neil), 오라일리(O’Reilly)라는 성들입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인 스칼렛 오하라(O’hara)도 아일랜드 성입니다. 아일랜드의 위스키(Whiskey)성도 있습니다. 빌 게이츠는 문지기 집안이 아닌가 생각한답니다. 그래서 그래픽 방식의 OS만들어 놓고 윈도우(창문)를 만들어 놓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감사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출생지입니다. 이런 인도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슬람국가나 북한, 중국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런데요 우리나라에도 신분제도가 있었습니다. 어쩌면 지금은 돈이 신분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났나”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사람이 우선이라는 말입니다. 사람입니다. 그 모든 것이 사람을 위하여 존재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5일 동안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다 준비해 놓으시고 6일째 되는 날에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마 16:26) 우리는 천하보다 더 귀한 존재입니다.

사람이 누구를 닮아야 됩니까 하나님입니다. 사람을 보면 하나님이 보여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을 보면 사탄이 보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타락한 인간의 모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돌아와야 됩니다. 그런데 죄 없는 인간의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신 분이 계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요 12:45) 고 하셨습니다.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눅 10:1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 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사람은 인격적이며 지적인 존재로서 자유의지를 가진 영적인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도덕적 진실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과 악을 근본적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거북이는 해변 육지에서 알을 낳지만 새끼들은 알에서 부화하자마자 바다로 기어가야 산다는 것을 압니다. 누가 알려주지 않았는데도 바다가 있는 방향을 정확히 압니다. 그리고 그리로 가야 산다는 것도 압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야 산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영과 도덕적 진실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하나님께 갈 수 있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돌을 던지면 어리석은 개는 그 돌을 쫓아가지만 호랑이는 그 돌을 던진 사람을 쫓아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연을 만드셨습니다. 자연이 아니라 그것을 만드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을 쫓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기 위해서 하나님의 창조의 뜻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본문 28절을 통해서 세 가지로 말씀해 주십니다.
첫째,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하나님의 백성이 땅에 충만해야 합니다.

둘째, “땅을 정복하라” 하나님의 백성이 땅을 차지해야 합니다.
‘정복하라’는 것은 ‘차지하라’는 말입니다. 또한 ‘관장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사탄이 차지하고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차지해야 합니다. 이것은 자연을 파괴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지키라는 말입니다. 이 자연을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셨습니다. 농사를 지어서 만들어낸 음식보다 자연 그대로가 더 좋은 것입니다. 자연에서 자란 삼이 산삼이고 자연에 사람이 파종한 것이 장뇌삼이고 사람이 재배한 것이 인삼입니다. 아시겠지만 산삼이 제일 좋은 것입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텔레비전을 24시간 들여다보는 것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을 24초 동안 바라보는 것이 더 유익한 것입니다. 자연을 보면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자연계시’라고 합니다. 바울은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20)고 했습니다.

셋째,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창조자의 손을 떠날 때는 모든 것이 좋았다. 그러나 인간의 손에 들어와서 모든 것이 나빠졌다.”(Rousseau)고 했습니다. 모든 생물을 잘 다스리라는 것이지 다 잡아 먹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 주신 자연도 잘 가꾸어야 합니다. 호주 시드니에 간 적이 있습니다. 도심 한 가운데 몇 백년 돼 보이는 고목 나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도로를 보니까 꾸불꾸불 한 거예요. 나무를 피해서 길을 내다보니까 그렇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서울시내에서 고목 나무를 볼 수 없습니다. 길 내고 도시 건축하느라 다 비어버린 것입니다. -호주 YWAM 건물 건축의 예-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또한 자연을 귀하게 여깁니다. 나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남을 귀하게 여깁니다.

여러분! 성경만큼 사람의 가치를, 나의 가치를 고귀하게 주장하는 사상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다름 아닌 아버지이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알려주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이시라고요. 나를 그렇게 생각해주실 분은 바로 아버지 외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다른 피조물들에게 자신의 형상(image)을 반영시키지 않았습니다. 오직 사람만이 하나님 아버지와 교재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피조물로서가 아니라 자녀로서 맞이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모습과 참 사람의 형상(image)을 보게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노예로 만드시기 위하여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주시지 않고 우리에게 일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전도할 수 있도록 우리의 입술에 할 말을 가르쳐 주십니다. 성령을 주십니다. 고난과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믿음을 주십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21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25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26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마 5:20-26) 

우리는 앞만 보고 달려가는 수가 많습니다. 또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런데 뒤가 새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 뒤가 무엇이며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사회의 출세의 길이 앞이라면 가정이 뒤 일 것입니다. 뒤를 챙기지 못하면 결국은 망합니다. 앞만 보고 가면 안됩니다. 뒤를 보아야 합니다. 새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내 안에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지 못하면 인생의 성공은 없습니다. 지금 잘 되는데요. 그런 분이 계시면 잠시 성공하는 것 같이 보일 뿐입니다. 착각하면 안됩니다. 예수 믿고 교회 다녀야 잘 삽니다. 우리는 그렇게 설교합니다. 틀리지 않습니다. 저는 100%맡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이론에 걸림돌이 되는 나라가 있습니다. 일본입니다. 일본은 아시아 최고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몇 개 분야에서 세계최고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일본은 거의 모든 부분에서 세계 1-2위를 달립니다. 왜 일본이 그렇게 잘 사는지 힌트를 주는 내용이 있습니다.

교토 상인의 33계명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1. 진짜 상인은 지나간 일이나 앞으로 일어날 일이나 늘 거기서 일어날 일을 생각한다.
2. 한 사람의 고객이 곧 1만 명의 고객이라고 생각하라.
6. 마음이 성실하면 신도 나를 지켜준다.
16. 한번 만족시킨 고객은 최고의 세일즈맨이 된다.
26. 돈이 없으면 지혜를 보여라, 지혜가 없으면 땀을 보여라.
27. 가장 무서운 것은 술에 취하는 것, 그리고 이자에 안주하는 것이다.
33. 사이 좋게 지내는 것처럼 귀한 것도 없다.

일본사람은 성실합니다. 열심히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바른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기본이 된 것입니다. 예수만 믿으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는 믿어도 기본적인 자세가 안 되어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우리는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나는 정직하지 않으면서, 성실하지 않으면서 헛된 망상만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뒤돌아보아야 합니다. ‘대범증’ 부터 고쳐야 합니다. 작은 것을 무시하면 결국 망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첫째, 욕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22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라가(라카)는 우리 식으로 말하면 ‘골빈 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미련 한 놈(모레)’ 골빈 놈보다 미련한 놈이라고 한 것이 더 문제입니다. 골빈 놈이라고 한 것은 공회에 잡혀가지만 미련한 놈이라고 한 것은 지옥 불에 들어갑니다.
‘곰’은 자기가 겨울잠을 자기에 충분히 살이찌었는지를 높은데 올라가서 떨어져 봅니다. 그래서 엉덩이가 안 아프면 충분히 살이찌었다고 생각하고 굴에 들어가 겨울잠을 잡니다. 이런 곰을 보고 ‘미련한 놈’이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곰의 방식입니다. 우리는 너무 자기 기준이 강합니다. 한국 어머니들, 아이들 공부시키는 것은 좋지만 자기 기준에 맞추려고 공부시키는 것은 아이들을 잡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하는 것 다 못마땅한 사람들은 마치 자기가 하면 잘할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한 감사가 있을리 만무합니다. 만사가 불만입니다. 불평합니다. 우리는 불평과 불만보다는 감사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보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둘째, 형제와 화목해야 합니다.
본문 24절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형제와 화목하지 못하고 드리는 예물은 하나님도 받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예물을 드리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이 형제와 화목하는 일입니다.

셋째, 다 갚아야 합니다.
본문 26절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물질만을 이야기 한 것은 아닙니다. ‘진실로’(아멘)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입니다. 그 누구도 이에 대해서 최소하거나 이의를 제기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엄중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바르게 살아야 됩니까

우리나라에도 일본사람 못지 않은 정직한 기업인이 있습니다. 은행에서 돈을 대출 받았던 한 기업인이 1·4후퇴 때 은행에 찾아가 돈을 갚으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창구 직원은 이 난리 통에 어떻게 될지 모르니 갚을 필요가 없다며 피난이나 가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이 기업인은 굳이 돈을 갚고 난 후에야 피난을 떠났습니다.
나중에 이 기업인이 제주도에서 군부대에 생선을 납품하는 원양어업에 뛰어들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돈도 담보도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업자금 융자를 신청하기 위해 은행에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은행장이 1·4후퇴 때 빌린 돈을 갚고 피난을 간 이 기업인을 알아보고 무담보로 2억 원을 융자해주었습니다.

탈무드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외투를 한 벌 샀는데 집에 와서 보니까 그 안에 보석이 하나 들어있습니다. “야, 횡재했구나!” 좋아했지요. 그런데 하룻밤을 자고, 이틀 밤을 자는데 불안합니다. 내가 이것을 가져도 되나 마음이 괴로운 겁니다. 그러다가 랍비를 찾아가 물어봅니다. “외투를 샀는데 보석이 그 안에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 랍비는 “당신이 외투를 샀지 보석을 산 것이 아니니까 반드시 돌려주어야 하지요.” 그러면서 “돌려주러 갈 때 반드시 아들을 데리고 가시오. 그러면 당신은 보석보다 더 큰 보석을 얻게 될 텐데 그 보석의 이름은 바로 정직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링컨은 가난하게 살았지만 정직하게 성장했습니다. 그의 모든 성장기의 생활은 교회생활이 전부였습니다. 그는 구약을 거의 암기했는데 특히 시편은 완전히 암기하였다고 합니다. 시편이 무엇을 가르칩니까 정직입니다. 결국 정직이 승리하는 것입니다.
“무슨 일에나 정직하기로 결심하라. 당신의 판단에 도저히 정직한 변호사가 될 수 없거든 변호사가 되지 말고 정직한 사람이 되기로 결심하라. 악한이 되기로 미리 찬동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직업을 갖지 말고 다른 직업을 택하라.”- 김동길의《링컨의 일생》중에서 -

다윗은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한 절규에 가까운 기도를 합니다. 그 기도가 시편 51편에 나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라고 했습니다. 한 푼이라도 다 갚으려는 다윗의 기도입니다. 사람과의 문제는 사람과 풀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 이 문제로 기도해야 합니다. 사람에게 한 것이 곳 하나님께 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옥에 갇혔을 때, 사마리아에서 강도 만났을 때 우리는 못 본척하고 가지 않았습니까 도대체 우리는 얼마나 잘못한 것인지도 모르고 죄에 너무 둔감해져 있는 것을 풀어야 합니다. 감기 걸려서 기침이 나면 목에서 얼마나 민감하게 작용합니까 우리는 죄에 대해서 이와 같이 민감해야 합니다.
다윗은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시 7:10)고 했습니다.

1950년대만 해도 맥도널드 없는 미국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맥도널드는 소비자 만족지수에서 8년 동안 최하위권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어이없게도 해피밀 메뉴와 함께 어린이들에게 주던 장난감 때문이었습니다. 장난감이 부족해서 수량을 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소비자는 주겠다고 하고 다 주지 못하게 되자 신뢰가 사라진 것입니다. 아마 처음에는 기발한 아이디어였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엄청난 홍보효과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것 때문에 어쩌면 사소한 일 때문에 회사 전체가 어렵게 된 것입니다. 사소한 것 같아 보이는 일이 성공과 실패를 좌우합니다. 치밀해야 합니다. 어디서 새는지 알아야 합니다. 내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큰 것이 아니라 사소하게 보이는 문제점을 발견해야 합니다.

정직한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내 사업이 번창하는 것보다 중요합니다.
UAE(아랍에미리트)에서 원자력발전소 수주하는 것보다 중요합니다.
우리 교회 성도가 숫자적으로 부흥하는 것보다 중요합니다.
내가 새롭게 되기를 간절히 원해야 합니다.
어느 정도 원해야 합니까 범죄한 눈을 빼는 심정으로, 실족케하는 팔은 짤라 버리는 마음으로 해야합니다. 철저해야 합니다. 대충 천국 가는 것 안됩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기도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큰 교회 건축하는 것이요 아닙니다. 우리 주앙교회 모든 성도들이 천국 가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시 11:7)
“악을 떠나는 것은 정직한 사람의 대로이니 자기의 길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보전하느니라”(잠 16:17)

2010년 정직한 한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