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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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마 14:27)

우리나라는 교육열만 1위가 아닙니다. 1등할 필요 없는 것까지 1등입니다. 2008년도 우리나라 자살 사망률이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에서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24일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우리나라 자살 사망자는 인구 10만 명 당 2006년 21.5명에서 2008년에는 24.3명으로 한 해 동안 1만 2,858명이며, 전년 대비 5.6%가 늘어났습니다. 10년 전인 1998년 8,622명과 비교하면 49%가 늘어난 수치입니다. 하루 평균 35.1명이 목숨을 끊고 있습니다.

한국에 이어 헝가리 21명, 일본 19.4명, 핀란드 16.7명, 벨기에 15.8명, 프랑스 14.2명, 뉴질랜드 12.2명, 미국 10.1명입니다. 자살율이 높다고 알고 있던 일본보다 5명이 더 많습니다. 미국은 심심하면 권총으로 자살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우리나라가 미국보다 무려 배 이상 차이가 납니다.
자살 원인으로는 염세, 비관으로 33.5%가 가장 많았고 병고 17.8%, 정신 이상 9.1%, 낙망 7%, 가정불화 6.4% 입니다. 특히 20-30대의 사망원인 중 자살은 40.7%, 28.7% 입니다. 교통사고에 이어 2위입니다. 자살의 원인이 경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문제입니다. 영적인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세상이 희망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의 소망이 되십니다.

“지금이 진짜 위기다. 글로벌 일류 기업들이 무너지고 있다. 삼성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 앞으로 10년 안에 삼성을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은 대부분 사라질 것이다. 다시 시작해야 된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앞만 보고 가자.” 이건희 삼성 회장이 경영복귀 요청을 받고 한달 동안 고뇌를 한 뒤 내린 결론입니다. 현실에 안주하는 기업은 망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로 지금이 진짜 위기입니다. 청소년들이 교회는 오지 않고 자살을 저렇게 많이 하는데 위기가 아닙니까

본문에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이 말한 것은 소용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요한은 말했습니다. 그 말씀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사람이 가진 목소리는 다 특색이 있어 친한 사람의 목소리는 얼굴을 보지 않고도 누구인지 단박에 알 수 있습니다. 부드러운 목소리, 칼칼한 목소리, 마음이 편안한 목소리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그러므로 목소리만 듣고도 그 사람의 성격이나 살아온 인생을 알 수 있다는 주장도 전혀 근거가 없다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거짓말 탐지기도 음성을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하면 음성이 떨립니다. 진실한 음성은 다릅니다. 힘이 있습니다. 목소리가 곧습니다. 부드럽습니다. 떨리지 않습니다. 자신이 있습니다.
2천 년 전 갈릴리 바닷가에서 힘있고 부드러운 음성을 듣고 있었던 작은 무리가 있었습니다. 배가 육지에서 상당한 거리를 떠났는데, 바람이 반대편에서 불어와 여간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절반은 이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 잡던 어부출신 들입니다. 한마디로 이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도무지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아무리 힘을 쓰고 애를 써도 사나운 물결은 잠잠해 지지를 않습니다. 근심과 걱정이 태산 같습니다.

우리 인생도 갈릴리 바다에서 폭풍을 만난 제자들과 같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요즘 우리가 어렵다고 하지만 한국전쟁(6.25)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저에게 제일 기억에 남는 사진은 노량진 역인가요 부모를 잃은 채 깡통하나 가지고 기차 옆에 서 있는 아이가 기억납니다. 저는 이 사진이 제일 감동스럽습니다. 그 사진을 보면 가슴이 아픕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가슴아픈 일의 무엇인지 아십니까 화물차 지붕 위에 앉아서 피난 가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차 위에 난간이 없지 않습니까. 간신히 매달려서 가는데 그만 안고있던 아들의 손을 순간에 놓친 것입니다. 저만치 떨어져 나간 아이를 바라보는 그 순간 부모의 가슴은 찢어진다고 해야 표현이 됩니까 그 안타까움, 그 절망감, 무슨 말로 표현하겠습니까

2000년 전에 하나님이 그와 같은 아픔을 겪으셨습니다. 얼마나 아프셨던지 하늘을 푸르게 열어놓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얼굴을 가리셨습니다. 땅이 부끄러웠습니다. 인간의 죄악이 얼마나 극심한지 땅이 떨었습니다. 그 십자가는 우리에게 공포심을 가져다 준 것이 아닙니다.
그 십자가 위에서 주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십자가는 불안한 것이 아니라, 무서운 형틀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신 그 사랑의 증거입니다.

614장 [얼마나 아프셨나]
(1)얼마나 아프셨나 못박힌 그 손과발, 죄없이 십자가에 달리신 주 예수님
하늘도 산과들도 초목들도 다울고, 해조차 빛을잃고 캄캄하게 되었네
후렴:오 놀라운사랑 크시고 끝없도다, 오 주님사랑에 구원의 강물넘치네

“안심하라”(Qarsei’te:달세테)는 원문으로 딱 세 번 나옵니다. 일반적으로 안식이나 안심을 뜻하는 평안(샬롬,eijrhvnh:에이레네) 하고는 다릅니다. 한번은 본문에서 나온 것이고 한번은 같은 사건을 설명하는 평행구절 마가복음 6:50절에서 나왔습니다. 또 한번 나오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번역성경으로는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단어를 구분하여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음 한 곳은 그 유명한 요 16:33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 16:33의 어느 부분이 본문의 “안심하라”(Qarsei’te:달세테)와 같은 단어 같습니까 “담대하라”입니다. 본문 마 14:27 과 같이 번역한다면 “안심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가 됩니다.
우리가 안심하는 것은 예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달리신 주님이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성지순례가면 사해바다가 있습니다. 이 바다에 들어가면 염분이 높아 몸이 둥둥 뜬답니다. 어떤 사람이 허우적거리면서 살려달라고 난리를 떠는데 사람들은 가만히 구경만 하더랍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손만 들면 된다고 하더랍니다. 손만 들면 그냥 뜬답니다. 심지어는 책도 볼 수 있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손만 들면 됩니다. 갈릴리바닷가에서 자신들이 자랐고 경험했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손을 들 때, 그 때에 ‘안심하라’ 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아직도 내 힘으로 무엇을 하려고 하시나요. 무엇을 하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자연도 순종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은 타락한 인간뿐입니다.
오늘도 십자가에서 “안심하라” 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기차 위에서 아이의 손을 놓쳐버린 부모가 무슨 힘으로 살 수 있겠습니다. 주님이 없으면 미치는 겁니다. 제 정신으로는 살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돌아와 위로 받지 못할 심령이 없습니다.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죄 사함 받음으로 안심하라.
예수님은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왔을 때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 9:2) 고 하셨습니다.
또한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졌을 때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마 9:22) 고 하셨습니다.
여기 두 군데 잘 보셔야 합니다. 무엇을 안심해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잘 보세요.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죄 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안심하는 겁니다. 병을 고쳤기 때문에 안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을 먼저 받았기 때문에 안심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안심하는 것은 풍랑이 잔잔해 졌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예수가 계시기 때문에 안심하는 겁니다. 아기는 엄마 목소리만 듣고 안심하는 겁니다. 예수가 있으면 안심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사람들을 안심시켜야 합니다.
저는 막 협박하는 사람들을 싫어합니다. 자기가 무슨 권능을 받았다고 하면서 협박하는 사람들. 여러분! 겁먹을 것 없습니다. 다 거짓말입니다. 예수님의 음성은 우리를 협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지만 그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그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안심시키셨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평안을 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하십니다.

사도행전 27장에 보면 바울이 로마로 압송 되어갑니다. 바울은 죄인의 신분으로 배에 탔습니다. 그런데 그 배가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 배가 파산하고 다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호의 경우 백부장은 군인입니다. 그는 무력사용이 가능합니다. 선장은 기술자입니다. 그는 고도의 기능을 가진 자입니다. 선주는 배를 소유한 재벌입니다. 그는 돈으로 힘을 쓸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무력도, 기능도, 돈도 없는 가난한 전도자입니다. 그는 영적 지도자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을 무시했고, 그의 말을 외면했습니다. 바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고집과 소신은 다릅니다. 고집은 강할수록 손해고, 소신은 강할수록 좋습니다. 고집은 버려야 하고, 소신은 지켜야 합니다. 소신은 일을 성취하고 꿈을 이루지만, 고집은 인간관계를 깨트리고 분위기를 망칩니다. 고집이 센 사람은 사랑 받기 어렵습니다. 영적 지도자의 말을 듣지 않으면 파산합니다.
사공들은 짐을 바다에 버리고 배의 기구들까지 버립니다(행 27:19). 배의 기구들이라고 하는 것은 배를 향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것들까지 버릴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제 다음은 목숨입니다. 사람이 죽을 일밖에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몇 일 동안 해가 비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소망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죽지 않습니다. 누구 때문입니까 이 배에 누가 탔기 때문입니까 십자가만 아는 바울이 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가는 바울이 탔기 때문입니다. 요나와는 반대입니다.
바울은 풍랑으로 죽게된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행 27:22)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 27:25)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면 그대로 됩니다. 배에 탄 276명중에 한 사람도 죽지 않고 모두 살았습니다.

천국 길은 좁은 길입니다. 쉬운 길은 넓습니다. 누구든지 갈 수 있습니다. 믿음의 길은 힘이 듭니다. 어려움이 따릅니다. 그러나 열매가 있습니다. 쉬운 길에 무슨 열매가 있습니까 어렵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갈 때 인생에 열매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이요 세상이 악합니다. 말세 때가 가까울수록 세상이 더 악해진다고 했습니다. 사탄이 가만히 있지를 않습니다. 이어령 교수님이 예수 믿는 다니까요 말이 많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도요 옆집강아지만도 못하게 취급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통령에 대해서도요 너무 쉽게 말합니다.
세상에 이런 때가 이 나라가 없습니다. 큰 교회는 이요 기도할 때 핸드백 꽉 잡고 기도해야 됩니다. 언제 채갈지 모릅니다. 화장실에서 가서도요 잘 붙잡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 어렸을 때는 그래도 말만하면 우리나라를 표현하기를 ‘동방 예의지국’ 이라고 했습니다. 지금이요 무슨 예의가 있습니까 심각합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다고 했습니다. 사랑에는 예의가 존재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예의가 생깁니다. 우리가 있으면 얼마나 있습니까 알면 얼마나 압니까 김구선생님은 서대문 감옥에서 15년을 살았습니다. 무슨 공부를 했겠습니까 그러나 어머니가 갖다준 성경을 읽었습니다. 15년 동안 세계보다 더 넓은 하나님의 나라를 보았습니다.

“8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9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시 62:8-9)

우리가 잘나봐야 얼마나 잘났겠습니까 그 차이가 하나님께는 저울에 달면 입김보다 가벼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시지 않으면 파수꾼의 수고가 다 헛된 것입니다. 세상에서 성공은 없습니다. 하나님만을 믿을 때, 우리 인생이 성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그 마지막 순간에도 안심하라는 주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영혼을 구원할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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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6-9) 

예수님은 이 땅에 육체의 몸을 입으시고 성육신 하셔서 오셨지만 그분의 본체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타락한 죄인이지만 예수님은 영적인 분이십니다.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죄인이 된 사람은 세상적입니다. 이 땅의 것에 메여있습니다. 영원한 세상을 위하여 영혼을 위하여 살기보다는 육체를 위하여 삽니다.
사랑하는 제자 요한은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3 1:2) 고 했습니다. 영혼이 잘되어야 범사가 잘 되는 것입니다. 영혼이 잘되지 않은 상태에서 세상 사람 보기에 잘된 것 다 부질없습니다. 먼저 영혼이 잘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영생을 보장받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 다른 것이 잘 되어야 합니다.

영혼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이것을 완전히 이해한다면 당신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목사인 저도 영혼에 대하여 이야기하려고 하면 어려움을 느낍니다. 분명한 것은 영혼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창조 때부터 주신 것입니다. 인생이 이 땅의 70-80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또한 영혼은 육체와 구별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영혼이 없다면 구원도 없는 것입니다. 반대로 구원이 있다면 영혼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떼어서 따로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영혼을 말하려면 기독교 신앙 전체를 이해해야 합니다.
영혼을 이해하려면 영혼을 창조한 분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영혼을 구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알아야 합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성령님도 이해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영혼이라는 것과 연결이 되어있습니다. 아마 사람의 영혼이 없다면 이 모든 것이 헛된 이야기에 불과할 겁니다.
기독교 신앙의 어느 하나만 말할 수 없습니다.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경이 놀라운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우리 몸과 같이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거미줄처럼 이쪽 끝과 저쪽 끝이 단단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손끝과 발끝이 연결되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창조와 종말이 닿아 있고, 하나님의 사랑과 심판이 닿아 있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의 것으로 만족할 수 없는 것은, 탐욕이 끝이 없다고 하잖아요. 그것은 사람이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배부르면 만족할 것 같지만 그 이상을 찾습니다. 돈이 많으면 만족할 것 같지만 그 이상을 찾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영혼에 만족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 당신 안에서 안식을 얻기 전까지는 어디에서도 참된 안식을 얻지 못했나이다.” 하나님만이 참 안식을 주실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2:13-21에 보면 한 사람이 예수님께 찾아와 부탁을 합니다.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그럽니다. 아마 재산을 형이 혼자 꿀꺽했나봅니다. 형에게 이야기 해 주셔서 자기에게 재산을 분배하도록 해 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시라면 그런 일을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에 수 없는 병자들과 별의 별 사람들이 예수님을 다 찾아 온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때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눅 12:14) 고 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땅의 문제를 해결 받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교회는 이 땅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서 세워진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아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으리이까 ” 한 부자 청년에게 “네가 가진 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다 나누어주고 너는 나를 따라오라” 하셨을 때에 부자 청년이 “근심하며 돌아가더라” 고 했는데 우리가 이런 모습으로 돌아가면 안됩니다. 이 청년은 너무 빠른 결단을 내렸습니다. 목숨을 무엇을 주고 살 수 있습니까 영생을 무엇으로 얻을 수 있습니까 이 땅의 그 무엇으로도 살 수 없습니다.

이마트는 고추장을 매운 정도에 따라 ‘무진장 매운맛, 아주 매운맛, 매운맛, 보통 매운맛’ 4단계로 구분해 선보였는데 판매된 고추장의 절반 이상(52.9%)이 ‘무진장 매운맛’ 이었다고 합니다. 그 다음으로 ‘아주 매운맛’(22.3%)이 많이 팔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농림수산부는 0-100까지 매운맛을 나누어 표시한다고 합니다. 고추장을 사려면 매운맛 때문에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교회도 매운 맛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매운맛이 무엇입니까 영혼을 위하는 겁니다. 이 세상의 축복이 아니라 영혼입니다. 이 세상에서야 우리가 좀더 열심히 부지런히 노력하면서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의 힘으로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입니다.

구약에서 영혼을 잘 이해한 사람은 다윗입니다. 다윗은 육체를 위하여만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영혼을 알고 있었습니다. 영혼을 아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께 돌아옵니다. 그분만이 우리를 구원해 주실 분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시 6:4)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3)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시 25:1)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의 구원을 기뻐하리로다”(시 35:9)
다윗은 무슨 말만하면 영혼입니다. 감사도 찬양도 영혼을 위하여 합니다.
예수님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 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어도, 스데반이 돌에 맡아 죽었어도, 왜 두려워하지 않았습니까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행 7:59) 했습니다. 주님의 손에 있는 우리 영혼은 평안합니다. 안전합니다.

어떤 사람이 여행을 가면서 종에게 자기 아들들을 잘 돌보고 옷 관리를 잘 하라고 했습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주인에게 종이 보고했습니다. “주인님, 여기 아이들의 옷들은 깨끗하게 잘 세탁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말합니다. “아이들은 어디 있나 ” 종은 “아이들은 어디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이들을 잃어버린 하인은 주인에게 엄한 질책을 받고 그 주인의 집에서 영원히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만일 육체를 위한 건강, 지식, 건물, 돈을 주님 앞에 자랑하면 이와 같은 종이 될 것입니다. 아이들의 옷이 아닙니다. 아이들의 옷은 그 아이들이 있을 때에만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잘되고 그 다음에 우리의 육체를 위하여 필요한 겁니다.

이 세상을 마칠 때 사람들이 후회할 일이란 단 한가지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영혼관리를 어떻게 했느냐 입니다. 아무리 눈에 보이는 삶을 잘 살아도, 영혼의 관리를 잘못했으면 실패한 사람입니다. 영혼관리를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하나님은 인간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만 먹고 마시도록 만들어진 존재가 아닙니다. 예수님께 속하지 않는 영혼은 이미 영혼을 잃어버린 자입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마 16:26) 고 하셨습니다.

김정일의 비자금이 40억 달러(4조 5,300억원)로 추정된다고 영국의 한 일간지가 보도했습니다. 처음에 스위스 은행에 예치했는데 스위스의 규제 강화로 룩셈부르크의 은행으로 이체하는 과정에서 우리 정보기관이 확인한 것입니다. 김정일의 막대한 비자금은 핵무기와 미사일 기술판매, 마약거래, 보험사기, 외국화폐외조 등을 통해 얻은 수입이랍니다. 김정일이 북한을 다 가진 것 같지만 그의 영혼은 불안한 겁니다. 죽음이 임박해 올수록 더 불안할 겁니다. 어마어마한 비자금이 자기를 지켜주지 못합니다. 이 세상에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만 모든 불안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를 자유 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시편 49:7-8절 말씀입니다.
[개역개정] “7 아무도 결코 그 형제를 구속하지 못하며 저를 위하여 하나님께 속전을 바치지도 못할 것은 8 저희 생명의 구속이 너무 귀하며 영영히 못할 것임이라”번역이 너무 딱딱합니다. 다른 번역으로 보겠습니다.
[쉬운성경] “7 사람은 자신의 목숨을 돈주고 살 수 없으며, 하나님께 목숨을 사겠다고 돈을 낼 수도 없습니다. 8 사람의 생명 값은 너무도 비싸며, 아무리 많이 내어도 살 수 없습니다.”
[공동번역, 북한성경] “7 하느님께 돈을 바친다고 죽을 목숨을 살려 주시랴 8 목숨 값은 엄청난 것, 그 값을 치르기는 감히 생각도 못할 일” 이라고 했습니다. 김정일이 이 북한 성경을 읽어보아야 하는데요.

다윗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예루살렘 성에 옮기고 지은 시입니다.
“26 만국의 모든 신은 헛것이나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도다 27 존귀와 위엄이 그의 앞에 있으며 능력과 즐거움이 그의 처소에 있도다 28 여러 나라의 종족들아 영광과 권능을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돌릴지어다”(대상 16:26-28) 다윗은 모든 영광과 권능을 여호와께 돌리라고 합니다. 예수님과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위대한 겁니다. 다윗은 왕이었습니다. 왕도 보통 왕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처음으로 통합한 왕입니다.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어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영광을 자기가 차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땅의 모든 왕도 어떠한 사람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영혼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겁니다. 영혼을 모르면 하나님께 영광 또한 돌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이스라엘에게 가까이 있을 때는 영광과 권능을 돌려드리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빼앗겼습니다. 언약궤가 어디 있는지도 모릅니다. 영혼이 무감각해지면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립니다. 영광을 돌리지도 못합니다. 불순종한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죄인들의 모습입니다. 오늘날의 언약궤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성경은 소망을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히 6:19) 라고 합니다. 닻은 고정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영혼이 떠내려가지 않도록 꽉 붙들어 주는 것입니다. 닻이 없으면 배는 바람과 물결에 좌우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도 중심을 잡아 주는 닻이 없으면 예측 불가능한 인생의 기후로 인해 왔다 갔다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품으면 그분과 하나로 묶이게 되어,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됩니다.

베드로는 영혼을 잘 모를 때 근심했습니다. 예수님 부활 후에도 제자들을 선동하여 갈릴리 바닷가로 나갔습니다. 육신의 삶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런 그가 이제 무어라고 말합니까
본문 6절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8절 “…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라고 말합니다. 기쁨이 넘칩니다. 구원받은 영혼의 기쁨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직접 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서신을 받는 교우들은 예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본문 8절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베드로는 참 감사했습니다. 예수를 보지도 못했는데 믿는 성도들이 대견했습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말하는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 이 무엇이겠습니까 성도에게는 이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영혼의 기쁨입니다. 육체의 기쁨은 말할 수 없는 기쁨이 될 수 없습니다.
본문 7절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이와 같은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천사가 알려주었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고 하셨습니다. 천사는 누구입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심부름을 하는 것입니다. 본문 9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고 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영혼이 구원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5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6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7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9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5-12)

아브라함이 벧엘에 이르러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 13:4) 고 했습니다. 그 당시에 아브라함만 무슨 제단을 쌓은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입니다. 노아 홍수 전에 사람들은 바벨탑을 세우고도 여호와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창 11:4)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이름을 내는데 열심이었습니다. 하나님 없이 만드는 세상은 바벨탑과 같습니다. 세상에서 별것 다해도 다 소용없습니다. 영생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영(0)만 잔뜩 모아놓으면 뭐합니까 0이 아무리 많아도 0만 모아 놓은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1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제일 잘 사용한 예가 사무엘상 17:45에 나옵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고 했습니다. 다윗과 골리앗은 상대가 안됩니다. 다윗은 아직 너무 어려서 군인이 될 자격도, 전쟁터에 나와서는 안되는 연약한 소년입니다. 그러나 골리앗은 거인으로 최고의 장수입니다. 골리앗의 위세에 이스라엘의 장수들은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다윗이 돌멩이 다섯과 물매만 들고 거인 골리앗에게로 달려갔습니다. 다윗의 용맹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하나님의 이름’ 이었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이 들고 있는 무기보다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의 능력을 신뢰했던 것입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민족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가면 승리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승리하시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에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고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에게 제재를 당하는 장면입니다. 무슨 말을 했기에 베드로와 제자들이 전하는 것을 막고 섰냐하면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행 2:14) 고 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그러셨으니까 지금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소리를 높여서 전합니다. 이 예루살렘 장소가 어디입니까 얼마 전에 예수님이 이곳에서 유대인들에게 붙잡히고 재판을 받고 처형당하신 바로 그 장소입니다. 살기가 아직 가시지도 않은 그 예루살렘 광장입니다. 예수님이 제판을 받으실 때 도망간 제자들의 모습이 아닙니다. 먼저 죽은 가룟유다 위에 열 한 제자가 함께 예루살렘 광장에 모여서 큰 소리로 전합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행 2:36) 이 이야기를 듣고 가슴을 치며 회개한 사람이 하루에 3천명씩(행 2:41) 늘어나는 것입니다. 온 백성이 찬양하고 백성들은 제자들을 칭송하고 구원받는 성도는 날마다 늘어났습니다.
그리고 바로 사도행전 3장으로 넘어가서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성전에 올라가는데 나면서부터 못 걷는 이를 사람들이 메어다가 성전 미문에 두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합니다.” 이 때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 3:6) 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앉은뱅이가 일어났습니다. 태어나서 한번도 걸어보지 못한 사람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나는 일어서리라, 주가 주신 능력으로 나는 일어서리라, 원수가 날향해 와도 쓰러지지 않으리, 주가 주신 능력으로 주가 주신 능력으로, 주가 주신 능력으로 일어서리-

앉아있지 마세요. 주가 주신 능력으로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요즘 의학이 상당히 발전을 했습니다. 예전 같으면 그냥 죽어야 하는 어지간한 병은 요즘은 약만 먹어도 됩니다. 잘못된 것은 잘라내고 꼬매면 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현대 의학으로도 해결 못하는 것이 있는 겁니다. 여러분! 큰 병원 보세요. 장례식장이 있습니다. 아니 왜 병원에 장례식장이 있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죽으라는 이야기 아닙니까 살려서 내보내야 하는 것이 병원 아닙니까 최집사님 나가시는 병원에는 장례식장이 없습니다. 그런 병원이 좋은 겁니다.

본문 “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제자들의 권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요한과 베드로는 자기에게 없는 것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물질이 없으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에게 없는 것을 바라보지 않고 있는 것을 찾았습니다. 그에게 돈은 없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 안에 모든 것이 있었습니다. 베드로에게는 많은 돈도, 가문도, 지식도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실상 그는 가장 부요한 자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0)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행복합니다. 우리는 항상 주님을 바라보기 때문에 부자입니다. 우리는 가난할 때가 한 번도 없습니다.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 어린 나이에도 우리 집이 왜 그렇게 가난한지요. 그래서 제 소망은 돈을 많이 버는 겁니다. 부자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중학교 때부터 돈버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고 붙어는 한번도 저 자신이 가난하고 생각해 본적이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가난하지 않습니다. 부자입니다. 예수의 이름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베드로는 은과 금이 없었습니다. 없어서도 줄 수 없었지만 베드로는 그보다는 더 큰 선물을 그에게 주고자 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돈보다 가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그 어떤 것보다 가치 있는 것이며 소중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면 주님은 우리의 길, 생명, 구원, 선한 목자가 되셔서 항상 인도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가 일어나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소식이 예루살렘 산헤드린공의회에 전달되었습니다. 지금 힘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예수님의 대적 자들과 사탄은 예수 이름에 능력이 있음을 더 잘 압니다.
“17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18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행 4:17-18) 고 했습니다.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행 5:40) 라고 했습니다. 예수 이름을 부르면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예수 이름을 부르는 것을 금지시켰습니다. 그렇다고 안 부릅니까 능력이 일어나는데요.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 4:41) 고 했습니다. 예수 이름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을 기뻐하였습니다. 예수 이름이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흘렀다고 효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예수 이름이 능력입니다. 예전에는 ‘예수쟁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요즘은 별로 들리지 않습니다. ‘쟁이’는 요즘말로 하면 전문가라는 말입니다. ‘예수에 미쳤다’ 라는 말입니다. ‘올인’ 했다는 말입니다. ‘오직 예수뿐인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같은 사건을 놓고 두 가지 반응을 합니다. 참 잘했다. 정말 기뻐할 일이다. 우리가 하지 못한 일을 예수가 해 주었으니 감사하다. 이렇게 반응하는 사람과 누가 시켜서 했느냐 그렇게 반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좋은 일을 하는데 누가 시켜서 합니까 또 누가 시켜서 했으면 무슨 상관입니까 그런데 사람은 이요 갑자기 반응이 나오는 것이 아니랍니다. 평소에 긍정적인 사고방식과 부정적인 사고방식이 있었기 때문에 같은 사건을 놓고도 반응이 다른 겁니다.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고 병자를 고쳐주니까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의 질문이 뭐냐하면 본문 7절에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우리가 많이 들어본 질문 같습니다. 바로 적대자들이 예수님께 했던 질문입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이르되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마 21:23) 고 합니다. 누구의 허락을 받고 예루살렘에서 가르치느냐 그런 이야기입니다. 권세, 권위를 너무 좋아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자기들의 권세만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을 온통 도적의 소굴로 만들어 놓고, 허세와 남에게 보이려는 외식으로 가득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교회가 이런 모습이 되면 안됩니다. 교회의 모든 권세와 권위는 하나님께만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에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 6:13) 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이 사실이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 사회가 왜 자꾸만 문제가 생기느냐 하면 이 문제를 분명히 안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문제가 없습니다. 권세와 영광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저 “우리는 서민입니다, 우리는 작은 교회입니다.” 하고 고개를 숙일 뿐입니다. 아무 힘이 없는 백성들이 무슨 권세가 있겠습니까 언제부터 권세가 서서히 생깁니까 돈이 생기기 시작할 때부터입니다. 사람들이 따르기 시작할 때부터입니다. 자리가 높아지기 시작할 때부터입니다. 만나기가 쉽지 않을 때부터입니다. 이런 분은 권세가 생기기 시작하는 겁니다. 조심해야 됩니다. 권세와 영광은 아버지께만 있습니다. 우리 같은 죄인이 무슨 영광을 받습니까 무슨 권세를 말합니까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그들이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행 8:12) 라고 말합니다. 전도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것입니다. 천국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한 것입니다. 오늘날 목사들이 다른 것을 많이 말하지만 사실 별로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입니다. 예수의 이름만이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7)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이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이름으로 힘입어야 합니다. 예수의 이름은 우리 영의 119입니다. 언제든지 예수의 이름으로 부르면 예수께서 언제든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세상의 모든 것 잃어버려도 예수님의 이름을 기억하시어 구원을 받으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별과 같이 빛나리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큰 군주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 2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3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단 12:1-3)

우리는 내일 일을 알 수 없습니다. 한치 앞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에 관한 모든 일 뿐만 아니라 이 땅의 마지막 일도 알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엄중하고도 신비스러운 말씀을 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도무지 알 수 없는 인류 최후의 일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신분석학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사람은 없는 것을 만들어 내거나 들어보지도 못한 것을 생각해 내지 못한다고 합니다. 참 신기한 것은 사람은 기본적으로 지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천국이 있다는 것은 별로 안 믿습니다. 귀신이 있다는 것은 잘 믿는데 천사가 있다는 것은 잘 안 믿습니다. 귀신을 달래려고는 생각하는데 천사의 도움을 요청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죄인의 모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마지막 날에 별과 같이 빛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날에 대하여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마 24:21) 고 하셨습니다.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마 24:29) 고 하십니다. 노아의 홍수 때는 그냥 땅에만 물을 덮었습니다. 그것도 사람이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때는 하늘이 무너집니다. 해가 빛을 잃습니다.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집니다. 아무도 이 마지막 환난에서 피할 자는 없습니다.

우리가 마지막을 위해 준비할 수 있는 방법은 과거의 유사한 일이 발생했을 때 어떻게 하나님이 구원하셨는지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 때에는 하나님이 노아와 그 식구들만을 선택했습니다. 그것은 순종의 가족이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말을 다른 사람은 듣지 않았습니다. 살려주고 싶어도 도무지 믿지를 않는 겁니다. 그러나 노아는 산 중턱에서 배를 만듭니다. 노아의 식구들도 거듭니다. “아버지 미쳤어, 해가 이렇게 뜨겁고 구름 한 점 없는데 비가 언제와 그리고 이렇게 많은 비가 온 적이 없는데…” 이렇게 말한 노아의 자식이 없습니다. 아버지를 따라서 배를 만드는 겁니다. 지금은 참 걱정입니다. 어머니 아버지를 믿는 아이들이 얼마나 될까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래서 내가 믿음의 아버지, 믿음의 어머니가 되어야 합니다. 노아의 식구들은 하나님에 대한 순종, 아버지에 대한 순종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순종을 가르칠 수 있다면 다 가르치는 겁니다.

그 다음에 소돔성의 멸망입니다. 한 도시를 멸하신 사건입니다,
성경에 롯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롯은 삼촌 아브라함을 따라 갈대아 우르를 떠나 아브라함과 함께 생활합니다. 얼마나 기회가 좋습니까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라 살 수 있는 좋은 환경이 제공되는 겁니다. 롯의 아버지 하란은 세상을 일찍 떠났습니다. 아버지가 일찍 죽어서 고아가 된 롯을 삼촌인 아브라함이 떠맡게 됩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롯을 친아들처럼 사랑하며 키웠습니다. 아들처럼 키웠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에도 아브라함은 롯을 함께 데리고 갑니다. 그러니까 롯은 삼촌인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떠나는 것을 알고있을 것입니다.
한번은 롯이 소돔에서 적들의 공격을 받아 재산을 모두 잃고 노예로 끌려가게 되자 아브라함은 318명의 특공대를 조직하여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롯을 구출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소돔을 멸망시키시려고 하실 때에도 아브라함은 롯을 생각하여 6번이나 같은 부탁을 하나님께 합니다. 하나님은 소돔성에 의인들이 있다면 그 성을 멸하실 생각이 없습니다. 그 성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멸하시지 않습니다. 그 성 때문에 기도하는 사람은 아브라함 혼자입니다. 그래서 의인의 수를 자꾸만 줄입니다. 하나님 의인이 50명만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면 멸하지 않겠다. 그러면 40명 이면이요, 30명 이면이요, 20명이면 안됩니까 10명 이면이요. 이런 식으로 기도합니다. 이 성에 의인이 없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여러분! 가정에 기도하는 분이 한 분이라도 있으면 망하지 않습니다.
창세기 13장 7절에 보면 롯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종들과 다투게 됩니다. 그 이유는 롯의 소유가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이때 롯은 삼촌과 노골적으로 다툽니다. 아브라함이 기가 막히니까 내가 원하는 대로해라 그럽니다. 롯에게 선택권을 다 줍니다.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고 네가 좌하면 네가 우하리라.”(창 13:9)
이때 그는 아브라함의 조언이나 권면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너무나 똑똑하다고 생각합니다. 선택의 우선권을 놓치지 않습니다. 아주 재빠르게 눈에 보이는 기름지고 푸른 초목이 무성한 멋있는 땅 소돔과 고모라를 택했습니다.
롯은 이 인생의 가장 귀중한 선택의 때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당장 좋아 보이는 소돔을 선택했습니다. 하나님 없는 성공은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멸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멸하십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롯의 가족과 생명은 구하시려고 했습니다.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창 19:14) 고 했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신뢰를 잃었으면 사위들이 농담으로 여깁니까. 또한 이들은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아내의 말을 들으면 감정이 상하는 사람, 남편의 말을 들으면 자존심이 상하는 사람, 부모님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 구제불능의 사람입니다. 사회생활 하면서 직장 상사의 말을 듣겠습니까 듣는 척 할 뿐입니다. 뒤에서 꿍얼꿍얼합니다. 욕을 합니다. 이런 사람이 제대로 성장 할 수 없습니다. 누구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큰 문제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말도 안 듣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은 결과는 “19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26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창 19:25-26) 고 했습니다. 사람이 선택한 결과입니다. 육신의 생각으로 선택한 결과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게 민족적인 구원이 있었던 출애굽 사건입니다. 출애굽을 통해서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유월입니다. 넘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장자를 죽이는 심판이 그냥 넘어가는 집은 이스라엘 사람의 집입니다. 애굽의 장자는 모두 죽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있는 집은 넘어갑니다.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발라 표시를 해야 하나님이 이 표시를 보고 넘어갑니다. 여러분! 솔직히 하나님이 양의 피 안 발라 놓는다고 그 집이 이스라엘 사람이 사는 집이라는 것을 모르시겠습니까 아십니다. 그러나 여기에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노아의 때와 같이 순종하나를 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만 인도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어린양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후부터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어린양의 피가 있어야 된다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어린양의 피 없이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반드시 어린양의 피가 있어야 합니다.

144장 “예수 나를 위하여”
(1)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 세상 죄를 지시고 고초 당하셨네, 예수님 예수님 나의 죄 위하여 보배 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본문 “그 때에 네 백성 중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 고 하십니다.
여기 ‘책’은 ‘생명 책’을 의미합니다(출 32:32, 계 3:5, 20:12). 책이 뜻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은 갑자기 “너는 못 생겼으니까, 너는 선하게 생기지 않았으니까 저리가” 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제가 살던 마석에서 조금 더가면 청평에 한얼산 기도원이 있습니다. 이 기도원을 세우신 분이 이천석 목사님이십니다. 이 목사님은 유명한 깡패였습니다. 인천 경기도 일대에서 이름난 깡패였습니다. 생긴 것도 우락부락하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를 믿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설교를 하는데 예수님 사랑에 대해서 설교하는데 그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무서워서 예수님의 사랑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무서웠답니다. 그래서 교회가 성장을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얼굴을 뜯어 고쳐 주시든지 무슨 방법을 가르쳐 주세요.” 그런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답니다. “그냥 너 하던 대로, 생긴 대로 해라”. 그래서 그 때부터 억지로 잘 보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당신에게 주신대로 합니다. 아마 다른 사람이 따라하면 안됩니다. 이것은 이천석 목사님께 해당된 말입니다. 자기를 따라다니던 동생들(깡패들)이 옵니다. “너 이 새끼 그렇게 믿어서 복 받겠냐” 그럽니다. “야 너 십일조 떼어먹으면서 잘되기를 바라냐”, “그따위로 신앙생활해서 복 받겠냐” 그럽니다. 그런데 이 때부터 교회가 1,000명도 안되던 교회가 7,000명이 넘는 성도로 성장합니다. 그래서 기도원도 세웠습니다.

하나님의 생명 책의 기록은 엉터리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름만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한 것, 헌금한 것, 선교한 것, 전도한 것 모두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름 없는 한 사람에게 냉수 한 그릇 떠다준 것도 잊지 않으신다고 하셨으니까 그것도 기록되어 있을 겁니다. 우리의 눈물, 우리의 기도가 그대로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쩌면 내 마음의 생각에 대한 기록도 있을지 모릅니다.
이 책의 기록을 가지고 본문 2절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 고 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단순히 구원만 받는 것이 아니라 본문 3절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고 하셨습니다. 별과 같이 빛나는 구원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별과 같이 빛나게 사는 자는 누구입니까 지혜있는 자입니다. 구원의 진리를 믿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길로 인도할 수는 있습니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가 별과 같이 빛납니다. 대화를 하다보면 어떤 사람은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상대방의 자존심을 상하게 합니다. 기를 죽입니다. 기업을 하든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결국 사람은 두 가지 중에 하나를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용기를 주며 희망을 주며 사는 사람과 기를 죽이며 사람을 없신여기며 사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 기죽이려고 좋은 차 타지는 마세요. 다른 사람 기죽이려고 돈 많이 벌지는 마세요. 다른 사람 기죽이려고 성공하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성공하려는 것은 함께 행복해지기 위해서입니다. 함께 기쁨을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요즘에 자유주의가 난리입니다. 저도 어느 정도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교육을 받아야 하고 자유로운 교육 속에서 창의적인 생각이 나온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막가파는 안됩니다.

여러분! 인간이 본래 악하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대로 놔두면 절대 안됩니다. 교육이 왜 필요합니까 가만히 놔두어서 잘 될 것 같으면 교육할 필요 없잖아요. 다른 것은 못 가르쳐 주어도 하나님의 말씀에는 절대 순종해야 된다는 것은 가르치시기를 바랍니다. 자유주의가 다 좋은데 순종하게 만드는데 약합니다. 우리의 교육은 자유롭되 순종하는 사람을 만들어야 합니다. 고개 숙일 줄 아는 사람을 만들어야 합니다.
제자가 누구입니까 순종하는 자입니다. 순종하지 않으면 제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많이 배웠으면 행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여 별과 같이 빛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