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들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3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따라간지라 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마 14:13-14)
“23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24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9:23-24)
이 말씀을 이렇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지혜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힘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부함으로 물질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8:18-20에 보면 “시몬이라는 사람이 사도들이 안수하여 사람들이 성령을 받는 모습을 보고 돈을 드려 이 권능을 내게도 주소서” 라고 합니다. 이 때 베드로가 “네 돈과 함께 망할지어다” 라고 합니다. 돈으로 성령을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천국 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랑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은 오직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말씀입니다.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예수님이 처음 누우셨던 자리는 쓸쓸한 말 구유였습니다. 예수님이 앉으셨던 자리에는 세리와 죄인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서신 자리에는 세상에서 버림받은 인생들이 있었습니다. 간음한 여인이 있었고, 이 땅의 여러 남편이 있었지만 아무 소망도 없이 살던 우물가의 여인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병자와 귀신들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마치 빈들과 같은 인생들이었습니다.
어떤 분이 처음 교회를 나왔습니다. 처음 부르게 된 찬송이 [183장] “빈들에 마른풀 같이” 였습니다. 이 찬송을 부르다 눈물을 참지 못하고 화장실로 뛰어갔습니다. 자신의 마음이 빈들에 마른풀 같은 시들은 영혼이었습니다. 이제 세상에서 지쳤습니다. 처음에 결혼을 할 때는 꿈이 있었습니다. 남편도 자상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자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남편을 이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도 지쳤습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이 “빈들에 마른풀” 이었습니다. 이제 시들어서 지쳤습니다. 하나님의 이슬이나 단비 없이는 회생이 불가능한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찬송을 하다가 눈물을 흘렸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빈들에 마른풀 같은 사람입니다.
광야는 어떤 곳입니까? 광야는 텅 비어 있는 곳입니다. 텅 비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광야는 모든 것을 정화하고 새롭게 형성하는 역사의 빈들, 마음의 빈들입니다. 누가는 평화의 왕 예수가 태어났다는 소식도 빈들에서 밤새워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제일 먼저 전해졌다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소식은 텅 빈 광야의 어둠 속에서 추위에 떨며 밤새워 양떼를 지키던 사람들에게 제일 먼저 전해졌습니다.
예언자 호세아는 부패하고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빈들로 나가자고 호소했습니다. 빈들에서 하나님에 대한 옛 사랑을 되찾고, 정의와 평화의 공동체를 다시 시작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때묻은 삶을 청산하고 광야로 나가서 여호와 하나님과 다시 시작하자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주 앞에 나아가 주님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인 삼은]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내 주 되신 주 앞에 나가~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 내려놓고 주님만 사랑해~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내 주 되신 주 앞에 나가~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 내려놓고 주님만 사랑해~
주 사랑~ 거친 풍랑에도 깊은 바다처럼 나를 잠잠케해~
주 사랑~ 내 영혼의 반석 그 사랑위에 서리~
여러분!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빈들로 나갔습니다. 그래서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왕궁으로 가시고, 대 제사장을 찾아가시고, 부잣집으로 가시고, 랍비의 집으로 가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빈들로 가셨습니다. 빈들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세상의 지식으로, 물질로, 권세로 꽉 차있는 사람은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빈들과 같은 사람은 예수님을 만납니다. 어디서 이 생수를 구할 수 있습니까? 놀랍게도 빈들이었습니다. 오직 예수입니다. 예수님이 생수이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했던 사람들은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병든 사람은 나음을 입었고, 소망이 없이 살던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찾았습니다. 세례 요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예수님은 빈들로 가셨습니다. 세례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고 외치던 그 빈들로 나가셨습니다.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좇아왔습니다. 빈들은 농사를 지을 수 없었던 땅이든지, 가을걷이가 끝난 땅입니다. 이곳에는 먹을 것이 없고, 마을에서도 멀리 떨어진 곳입니다. 빈들은 먹을 것조차 없는 부족한 땅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무리를 마을로 보내자고 했습니다. 이곳은 빈들이라 먹을 것을 구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이유였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빈들에서 일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사람의 능력이 아닙니다. 사람의 지혜가 아닙니다. 제자들이 순종했고 무리들이 순종했습니다. 바로 그 빈들이 기적의 현장이 되었습니다.
강제 부역에 시달리던 히브리 노예들이 극적인 기적을 통해 갈대바다를 가르고 적의 전차 부대를 바다 속에 몰살시키면서 통쾌하게 애굽을 탈출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해방의 감격을 가지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40년 동안 광야를 헤매야 했습니다. 홍해를 건너 갈대바다에서 가나안까지는 아무리 오래 걸려도 40일을 넘을 수 없는 거리라고 합니다. 그들은 꿈에도 그리던 땅, 조상 대대로 갈구해 온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두고 40년이란 긴 세월을 빈들에서 헤매야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잘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축복을 빙빙돌려가지고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려서 주시고자 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곧 바로 주십니다. 하나님은 신속하십니다. 그런데 그 축복을 받지 못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출애굽의 감격적인 체험을 했지만 여전히 노예였습니다. 갈대바다를 건너고서도 노예 근성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불평은 노예가 하는 일입니다. 출애굽기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스라엘의 불평에 대한 이야기들은 그들의 노예 근성을 잘 보여줍니다. 그들은 이집트의 고기가마를 그리워했습니다. 조금만 가면 하나님의 축복이 있다는 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무슨 일만 있으면 불평했습니다.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불평을 토로하며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하나님도 이런 히브리 민족을 더 이상 인도하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모세가 위대하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이런 마음을 미루시게 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면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불평에 대한 대가로 홍해바다의 그 감격적인 체험을 했던 1세대는 모세까지 포함해서 단 한 사람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이런 식으로 믿으면 안됩니다. 교회 나갔더니 무슨 문제가 생겼더라. 그래서 당분간 안나가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예수 믿으면 안됩니다. 그 광야의 길이 그렇게 긴 것이 아닙니다. 조금 참으면 됩니다. 기껏해야 40일이면 도달할 수 있는 곳이 가나안 땅입니다. 순종하지 않은 결과로 40년 간을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도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끝까지 순종하는 자에게 찾아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이 땅의 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 땅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누구에게 불평하는 자가 아니라 이 땅에 책임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임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주인은 자기 집에 대해서 불평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나라의 주인입니다. 주인은 책임을 가지고 책임을 집니다.
빈들에서 순종할 것인지 불평할 것인지는 우리의 몫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선택권은 나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빈들에서도 순종하는 자에게는 축복이 있으며 불평하는 자에게는 고생만 있습니다. 빈들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빈들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빈들에 머물러 있으면 안됩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야 합니다.
세례요한과 예수님은 모두 빈들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헤롯궁으로 갔고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결과는 모두 순교였습니다. 세례요한은 헤롯에게 순교 당하였고 예수님은 대제사장과 그 무리들에게 순교 당했습니다. 세례요한은 헤롯의 세속정치에 도덕 적인 문제를 언급했고, 예수님은 믿음의 회복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예수님에게는 목청 높여 외치는 소리들도 많이 들렸을 것입니다. 난세는 영웅을 많이 배출합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뜻 있는 유대인들이라면 누구나 어떻게 하면 민족적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고민했을 것입니다. 이 길만이 살길이라는 주장들도 많았습니다. 예수님도 이런저런 주장들을 들으면서 성장하셨습니다. 물론 그런 난무하는 주장들의 맨 밑바닥에는 아무 주장도 할 수 없고 신음소리마저도 내기 어려웠던 암 하레츠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율법과 국가와 민족을 내세우는 자칭 의인들로부터는 죄인들로 낙인찍히고, 체제의 수호자들로부터는 흙무지렁이들 이라고 비웃음이나 당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 주장들이 난무했지만 예수님은 광야에서 조용히 자신의 일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난세를 구한다고 목청 높여 외치던 어떠한 집단에도 직접 가담하거나 동조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어떤 정당이나 집단을 만들거나 이미 있는 세력에 들어가야 보호를 받으며 어떤 일이든 성공시키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민족주의 운동이나 바리새파의 경건주의 계몽 운동, 에쎄네파 은둔주의자들의 운동에도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주장들과 거리를 두면서 예수님이 유일하게 동조한 것은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고, 세례 요한이 옥에 갇힌 후 공생애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그의 활동에 대한 동의와 동참의 표시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가 외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노라” 는 말은 예수님의 말씀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또 세례 요한이 잘한 것이 물로 세례를 주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훗날 성령을 받도록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그들이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행 8:12) 라고 했습니다. 이 때에는 성령이 임하기 전입니다. 그러나 세례가 먼저 주어졌습니다. 깨끗해지기를 원할 때 성령을 받는 것입니다. 깨끗함을 받으라는 메시지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동일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례요한에 대해서 하나님이 앞서 보낸 엘리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의 어떤 정파에도 가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그 누구에게도 보호받지 못했습니다.
빈들에서 오병이어의 능력을 일으키신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중앙 예루살렘으로 향하셨습니다. 예루살렘성에 입성할 때 사람들은 ‘호산나’ 하면 시끌 법적 했지만 사실 그들은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으로 오시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영접한 그들은 예루살렘을 책임지고 있는 대제사장의 무리나 산헤드린공의회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아무 자격도 권한도 없는 암 하레츠인들이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동학혁명을 이끈 사람들과 같습니다. 설령 이들에게 나라의 권한이 넘어갔다고 다 잘된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죄인들이 이끄는 이 땅의 일은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조금 지나치면 인민해방군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바보같이 그 도적의 소굴인 예루살렘으로 가셨을까요?
우리는 그것을 한마디로 표현 할 수 있습니다. ‘사명’ 입니다. 예수님의 사명입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헤롯궁에 가서 도덕적인 일이나 지적하는 일이 아닙니다. 도덕도 회복해야 되고, 유대인이라면 이스라엘도 로마에서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사명입니다. ‘사명’은 누구에게 부여받은 것입니까? ‘하나님’입니다. 그분은 메시야입니다.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가신 것은 사명을 이루시고자 함입니다.
[사명]
주님이 홀로가신 그 길 나도 따라 가오 모든 물과 피를 흘리신 그길을 나도 가오
험한산도 나는 괜찮소 바다끝이라도 나는 괜찮소 죽어가는 저들을 위해 나를 버리길 바라오
아버지 나를보내주오 나는 달려가겠소 목숨도 아끼지않겠소 나를보내주오
세상이 나를미워해도 나는 사랑하겠소 세상을 구원할십자가 나도따라가오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나를 사랑한당신 이작은 나를받아주오 나도사랑하오
지난 수요일 택민이 아빠가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주님 지켜주세요.” 하는 마음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가는 국가가 시끄러운 나라 중에 하나이지 않습니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먼저 구하라” 하셨습니다. 정말 모여서 기도해야 합니다. 억지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오세요. 기뻐서 오세요. 기도하러 오세요. 시간만 있으면 다른 곳 가지 마시고 교회 나아 오시기를 바랍니다. 여기가 우리의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을 지켜야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루살렘에 있어야 성령이 임합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려야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사명을 완수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선교사업을 follow up 해줄 교회를 세우고 장로를 세웠습니다. 한 교부는 ‘아무도 교회를 그의 어머니로 모시기 전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없다’ 고 하였습니다. 칼빈도 ‘교회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다’ 고까지 말했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아무도 천국에 혼자 가지 않는다. 그는 친구를 만나든지 아니면 친구를 삼아야 한다’ 고 말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기독교 신앙은 공동체적 신앙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종종 교회생활에서 상처를 입고 이제는 교회를 나가지 않고 혼자서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 하겠다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10이면 10 다 신앙생활을 떠나게 됩니다. 기독교 신앙은 철두철미한 공동체적 신앙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땅에 교회를 세워주셨습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복음전도와 선교처럼 중요하고 최우선적인 과제와 사명이 없다.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노새 세대(generation)를 양육해 놓았다는데 있다”고 한 신학자는 염려스럽게 말했다. 노새는 열심히 땀을 흘리며 일하지만 새끼를 낳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맡겨주신 가장 큰 사명은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빈들에서 예수님을 만났지만 예루살렘에서 사명을 완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