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들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3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따라간지라 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마 14:13-14)

“23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24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9:23-24)

이 말씀을 이렇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지혜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힘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부함으로 물질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8:18-20에 보면 “시몬이라는 사람이 사도들이 안수하여 사람들이 성령을 받는 모습을 보고 돈을 드려 이 권능을 내게도 주소서” 라고 합니다. 이 때 베드로가 “네 돈과 함께 망할지어다” 라고 합니다. 돈으로 성령을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천국 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랑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은 오직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말씀입니다.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예수님이 처음 누우셨던 자리는 쓸쓸한 말 구유였습니다. 예수님이 앉으셨던 자리에는 세리와 죄인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서신 자리에는 세상에서 버림받은 인생들이 있었습니다. 간음한 여인이 있었고, 이 땅의 여러 남편이 있었지만 아무 소망도 없이 살던 우물가의 여인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병자와 귀신들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마치 빈들과 같은 인생들이었습니다.
어떤 분이 처음 교회를 나왔습니다. 처음 부르게 된 찬송이 [183장] “빈들에 마른풀 같이” 였습니다. 이 찬송을 부르다 눈물을 참지 못하고 화장실로 뛰어갔습니다. 자신의 마음이 빈들에 마른풀 같은 시들은 영혼이었습니다. 이제 세상에서 지쳤습니다. 처음에 결혼을 할 때는 꿈이 있었습니다. 남편도 자상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자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남편을 이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도 지쳤습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이 “빈들에 마른풀” 이었습니다. 이제 시들어서 지쳤습니다. 하나님의 이슬이나 단비 없이는 회생이 불가능한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찬송을 하다가 눈물을 흘렸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빈들에 마른풀 같은 사람입니다.

광야는 어떤 곳입니까? 광야는 텅 비어 있는 곳입니다. 텅 비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광야는 모든 것을 정화하고 새롭게 형성하는 역사의 빈들, 마음의 빈들입니다. 누가는 평화의 왕 예수가 태어났다는 소식도 빈들에서 밤새워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제일 먼저 전해졌다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소식은 텅 빈 광야의 어둠 속에서 추위에 떨며 밤새워 양떼를 지키던 사람들에게 제일 먼저 전해졌습니다.

예언자 호세아는 부패하고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빈들로 나가자고 호소했습니다. 빈들에서 하나님에 대한 옛 사랑을 되찾고, 정의와 평화의 공동체를 다시 시작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때묻은 삶을 청산하고 광야로 나가서 여호와 하나님과 다시 시작하자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주 앞에 나아가 주님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인 삼은]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내 주 되신 주 앞에 나가~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 내려놓고 주님만 사랑해~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내 주 되신 주 앞에 나가~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 내려놓고 주님만 사랑해~

주 사랑~ 거친 풍랑에도 깊은 바다처럼 나를 잠잠케해~
주 사랑~ 내 영혼의 반석 그 사랑위에 서리~

여러분!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빈들로 나갔습니다. 그래서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왕궁으로 가시고, 대 제사장을 찾아가시고, 부잣집으로 가시고, 랍비의 집으로 가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빈들로 가셨습니다. 빈들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세상의 지식으로, 물질로, 권세로 꽉 차있는 사람은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빈들과 같은 사람은 예수님을 만납니다. 어디서 이 생수를 구할 수 있습니까? 놀랍게도 빈들이었습니다. 오직 예수입니다. 예수님이 생수이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했던 사람들은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병든 사람은 나음을 입었고, 소망이 없이 살던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찾았습니다. 세례 요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예수님은 빈들로 가셨습니다. 세례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고 외치던 그 빈들로 나가셨습니다.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좇아왔습니다. 빈들은 농사를 지을 수 없었던 땅이든지, 가을걷이가 끝난 땅입니다. 이곳에는 먹을 것이 없고, 마을에서도 멀리 떨어진 곳입니다. 빈들은 먹을 것조차 없는 부족한 땅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무리를 마을로 보내자고 했습니다. 이곳은 빈들이라 먹을 것을 구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이유였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빈들에서 일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사람의 능력이 아닙니다. 사람의 지혜가 아닙니다. 제자들이 순종했고 무리들이 순종했습니다. 바로 그 빈들이 기적의 현장이 되었습니다.

강제 부역에 시달리던 히브리 노예들이 극적인 기적을 통해 갈대바다를 가르고 적의 전차 부대를 바다 속에 몰살시키면서 통쾌하게 애굽을 탈출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해방의 감격을 가지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40년 동안 광야를 헤매야 했습니다. 홍해를 건너 갈대바다에서 가나안까지는 아무리 오래 걸려도 40일을 넘을 수 없는 거리라고 합니다. 그들은 꿈에도 그리던 땅, 조상 대대로 갈구해 온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두고 40년이란 긴 세월을 빈들에서 헤매야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잘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축복을 빙빙돌려가지고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려서 주시고자 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곧 바로 주십니다. 하나님은 신속하십니다. 그런데 그 축복을 받지 못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출애굽의 감격적인 체험을 했지만 여전히 노예였습니다. 갈대바다를 건너고서도 노예 근성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불평은 노예가 하는 일입니다. 출애굽기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스라엘의 불평에 대한 이야기들은 그들의 노예 근성을 잘 보여줍니다. 그들은 이집트의 고기가마를 그리워했습니다. 조금만 가면 하나님의 축복이 있다는 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무슨 일만 있으면 불평했습니다.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불평을 토로하며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하나님도 이런 히브리 민족을 더 이상 인도하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모세가 위대하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이런 마음을 미루시게 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면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불평에 대한 대가로 홍해바다의 그 감격적인 체험을 했던 1세대는 모세까지 포함해서 단 한 사람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이런 식으로 믿으면 안됩니다. 교회 나갔더니 무슨 문제가 생겼더라. 그래서 당분간 안나가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예수 믿으면 안됩니다. 그 광야의 길이 그렇게 긴 것이 아닙니다. 조금 참으면 됩니다. 기껏해야 40일이면 도달할 수 있는 곳이 가나안 땅입니다. 순종하지 않은 결과로 40년 간을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도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끝까지 순종하는 자에게 찾아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이 땅의 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 땅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누구에게 불평하는 자가 아니라 이 땅에 책임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임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주인은 자기 집에 대해서 불평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나라의 주인입니다. 주인은 책임을 가지고 책임을 집니다.

빈들에서 순종할 것인지 불평할 것인지는 우리의 몫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선택권은 나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빈들에서도 순종하는 자에게는 축복이 있으며 불평하는 자에게는 고생만 있습니다. 빈들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빈들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빈들에 머물러 있으면 안됩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야 합니다.

세례요한과 예수님은 모두 빈들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헤롯궁으로 갔고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결과는 모두 순교였습니다. 세례요한은 헤롯에게 순교 당하였고 예수님은 대제사장과 그 무리들에게 순교 당했습니다. 세례요한은 헤롯의 세속정치에 도덕 적인 문제를 언급했고, 예수님은 믿음의 회복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예수님에게는 목청 높여 외치는 소리들도 많이 들렸을 것입니다. 난세는 영웅을 많이 배출합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뜻 있는 유대인들이라면 누구나 어떻게 하면 민족적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고민했을 것입니다. 이 길만이 살길이라는 주장들도 많았습니다. 예수님도 이런저런 주장들을 들으면서 성장하셨습니다. 물론 그런 난무하는 주장들의 맨 밑바닥에는 아무 주장도 할 수 없고 신음소리마저도 내기 어려웠던 암 하레츠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율법과 국가와 민족을 내세우는 자칭 의인들로부터는 죄인들로 낙인찍히고, 체제의 수호자들로부터는 흙무지렁이들 이라고 비웃음이나 당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 주장들이 난무했지만 예수님은 광야에서 조용히 자신의 일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난세를 구한다고 목청 높여 외치던 어떠한 집단에도 직접 가담하거나 동조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어떤 정당이나 집단을 만들거나 이미 있는 세력에 들어가야 보호를 받으며 어떤 일이든 성공시키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민족주의 운동이나 바리새파의 경건주의 계몽 운동, 에쎄네파 은둔주의자들의 운동에도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주장들과 거리를 두면서 예수님이 유일하게 동조한 것은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고, 세례 요한이 옥에 갇힌 후 공생애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그의 활동에 대한 동의와 동참의 표시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가 외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노라” 는 말은 예수님의 말씀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또 세례 요한이 잘한 것이 물로 세례를 주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훗날 성령을 받도록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그들이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행 8:12) 라고 했습니다. 이 때에는 성령이 임하기 전입니다. 그러나 세례가 먼저 주어졌습니다. 깨끗해지기를 원할 때 성령을 받는 것입니다. 깨끗함을 받으라는 메시지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동일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례요한에 대해서 하나님이 앞서 보낸 엘리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의 어떤 정파에도 가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그 누구에게도 보호받지 못했습니다.

빈들에서 오병이어의 능력을 일으키신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중앙 예루살렘으로 향하셨습니다. 예루살렘성에 입성할 때 사람들은 ‘호산나’ 하면 시끌 법적 했지만 사실 그들은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으로 오시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영접한 그들은 예루살렘을 책임지고 있는 대제사장의 무리나 산헤드린공의회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아무 자격도 권한도 없는 암 하레츠인들이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동학혁명을 이끈 사람들과 같습니다. 설령 이들에게 나라의 권한이 넘어갔다고 다 잘된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죄인들이 이끄는 이 땅의 일은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조금 지나치면 인민해방군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바보같이 그 도적의 소굴인 예루살렘으로 가셨을까요?
우리는 그것을 한마디로 표현 할 수 있습니다. ‘사명’ 입니다. 예수님의 사명입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헤롯궁에 가서 도덕적인 일이나 지적하는 일이 아닙니다. 도덕도 회복해야 되고, 유대인이라면 이스라엘도 로마에서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사명입니다. ‘사명’은 누구에게 부여받은 것입니까? ‘하나님’입니다. 그분은 메시야입니다.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가신 것은 사명을 이루시고자 함입니다.

[사명]
주님이 홀로가신 그 길 나도 따라 가오 모든 물과 피를 흘리신 그길을 나도 가오
험한산도 나는 괜찮소 바다끝이라도 나는 괜찮소 죽어가는 저들을 위해 나를 버리길 바라오

아버지 나를보내주오 나는 달려가겠소 목숨도 아끼지않겠소 나를보내주오
세상이 나를미워해도 나는 사랑하겠소 세상을 구원할십자가 나도따라가오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나를 사랑한당신 이작은 나를받아주오 나도사랑하오

지난 수요일 택민이 아빠가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주님 지켜주세요.” 하는 마음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가는 국가가 시끄러운 나라 중에 하나이지 않습니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먼저 구하라” 하셨습니다. 정말 모여서 기도해야 합니다. 억지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오세요. 기뻐서 오세요. 기도하러 오세요. 시간만 있으면 다른 곳 가지 마시고 교회 나아 오시기를 바랍니다. 여기가 우리의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을 지켜야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루살렘에 있어야 성령이 임합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려야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사명을 완수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선교사업을 follow up 해줄 교회를 세우고 장로를 세웠습니다. 한 교부는 ‘아무도 교회를 그의 어머니로 모시기 전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없다’ 고 하였습니다. 칼빈도 ‘교회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다’ 고까지 말했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아무도 천국에 혼자 가지 않는다. 그는 친구를 만나든지 아니면 친구를 삼아야 한다’ 고 말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기독교 신앙은 공동체적 신앙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종종 교회생활에서 상처를 입고 이제는 교회를 나가지 않고 혼자서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 하겠다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10이면 10 다 신앙생활을 떠나게 됩니다. 기독교 신앙은 철두철미한 공동체적 신앙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땅에 교회를 세워주셨습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복음전도와 선교처럼 중요하고 최우선적인 과제와 사명이 없다.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노새 세대(generation)를 양육해 놓았다는데 있다”고 한 신학자는 염려스럽게 말했다. 노새는 열심히 땀을 흘리며 일하지만 새끼를 낳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맡겨주신 가장 큰 사명은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빈들에서 예수님을 만났지만 예루살렘에서 사명을 완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예수를 주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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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 3:12)

열중셨 차렷, 그 다음에 뭐라고 합니까 ‘주목’입니다. 열중셨 차렷이 왜 필요한 줄 아십니까 자세를 올바르게 하고 집중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열중셨 차렷 다음에 반드시 ‘주목’ 하는 것입니다. 열중셨 차렷만 해놓고 ‘주목’을 안 하면 열중셨 차렷한 것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열중셨 차렷하고 그 다음에 하는 말이 ’00에게 주목’이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 전체를 예수께 주목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을 비운 공허한 마음이 청결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비우고 아무것도 채워 넣지 않아 보세요 청결하여 기쁨이 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비워져서 공허하고 인생이 허무해집니다. 마음을 비웠다고 기쁨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지나친 욕심에서 해방되었다는 정도입니다. 어떤 사람은이요 세상 욕심이 잘못된 것 같지만 그래도 그 욕심이 있어서 살아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보고 마음만 비우라고 해 보세요 그 다음에는 무슨 기쁨으로 인생을 살아갑니까 마치 열중셨 차렷 해놓고 주목을 안한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이 무엇에 주목하는지 제 나름대로 뽑아 보았습니다. 젊은 인터넷 사용자가 많아 그들의 관심도이지만 그래도 이것으로 세상 사람들이 어디에 관심이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사람이 제일 많이 사용한다는 네이버 인기 검색어입니다(2010년 4월 2주차 주간종합). 광화문괴물녀, 나나, 큐리, 노홍철복근, 고나은, 성균관스캔들, 정형돈삭발, 이파니, 이정현, 신데렐라언니입니다.
그리고 다음(Daum) 실시간 이슈 검색어입니다(2010.4.14). 유인나 전소속사, 이효리 결혼계획, 2nise 뮤직비디, 칭하이성 지진, 안재모 배신, 이응경 딸, 이은우 하차, 똥폰남, 재범 한국, 유진 비키니입니다.
여기 보시면 사람들이 어디 주목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검색어들이 그저 재미로 보다 보니까 검색어가 올라갔다고 해도 우리는 지나치게 연예인, 오락위주의 검색을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연예인의 사생활이나 흥미로 삼아서는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또한 그것이 나의 기쁨이 될 수 없습니다.

루터는 어느 날 키우던 개에게 먹이를 주다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루터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개는 그 손을 따라가면서 시선을 떼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본 루터는 나는 하나님을 이렇게 주목하고 있는지를 생각하고 자신이 개보다 못하다고 회개했다고 합니다. 바울은 만삭되지 못한 자신을 인도한 주님께, 영도 없고 이성도 없는 저 미물인 버러지보다 못하다고 했습니다. 욥은 “사람이 하나님께 변론하기 좋아할 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욥 9:3) 고 했습니다. 하나님 없는 우리 인생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뭐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안됩니다. 이 세상에는 답이 없습니다. 마음을 채워봐도, 마음을 비워봐도 안됩니다. 어떤 사람은 채우려고 노력하고, 어떤 사람은 비우려고 노력합니다. 그 양쪽이 다 안됩니다.

우리 집사람 초등학교 동창이 가끔 와서 밥을 사주고 갑니다. 자꾸만 불러내서 제가 한번 따라가 봤습니다. 그분이 남자입니다. 우리 집사람 아직 인기 좋습니다. 제가 만나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분의 취미는 자전거랍니다. 한번은 집에 세워둔 자전거를 누가 차로 받아서 자전거가 망가졌답니다. 차 운전하시던 분이 기껏해야 몇 만원 하겠지 그러고는 5만원 주고 가려고 했답니다. 그런데 이 자전거가 몇 천 만 원짜리인 겁니다. 어지간한 자동차 값보다 더 비쌉니다. 이 자전거는 비행기 만들 때 쓰는 카본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비쌉니다. 그러면 자동차가 받으면 찌그러지지 말아야지 왜 망가집니까

고급 자전거는 카본으로 만듭니다. 카본은 비행기를 만드는 재질로, 수직의 힘은 엄청나게 잘 견디어 냅니다. 그래서 산악에서 높은 충격을 받아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카본의 약점은 옆의 힘에 약합니다. 그래서 자동차로 살짝 받았는데도 망가진 것입니다. 모든 조건에서 최고의 재질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모든 방법은 이와 같습니다. 어느 길로 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을 비워도 채워도, 도를 닦아도 아니 닦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의가 어디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는 내가 무슨 일을 했다고 해서 의로운데, 그 의로움의 기준이 나라마다 다르고 지경마다 다른 것입니다. 아프리카 사람은 사자를 많이 죽인 사람이 제일 의로운 사람입니다. 나라마다 다 다릅니다. 추장마다 다 다릅니다. 지역마다 다 다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선동하고 남을 비판하고 신고 잘하는 그런 사람을 제일 훌륭한 사람으로, 의로운 사람으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의인으로 뽑으십니까 하나님을 주목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주목하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따라 살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하늘나라에서 하나님과 사탄이 대화를 합니다. 사탄은 땅의 여기저기를 다녀왔다고 합니다. 그 때 하나님은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고 합니다(욥 1:8). 하나님이 욥을 주목하고 계셨다는 증거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않아 구걸하던 못 걷게 된 사람을 걷게 했습니다. 이 못 걷던 사람은 자기를 걷게 해 달라고 한 것은 아닙니다. 그냥 무엇을 좀 얻을까 생각하고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때 그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행 3:4) 그럽니다. 그리고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 고 명령했을 때 걸었습니다. 구걸했으나 걷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좀 주는 것은 잠시입니다. 그때만 필요합니다. 그러나 걷게 되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우리가 주님께 구걸하는 식으로 기도하지만 주님은 우리를 일으켜 세워 주십니다. 우리가 스스로 해결해 갈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걷지 못한 이 사람에게 베드로와 요한은 처음에 자기들을 ‘주목’ 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나옵니다. 오늘 말씀에 집중하세요. 주목해야 합니다. 잘 되는 사람이요, 잘 되는 가정, 교회요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에 ‘주목’하는 사람입니다. 집에서는 부부끼리 싸우고, 직장에서는 선후배와 싸우고, 교회에서는 목회자하고 싸우는 사람은 잘 될 수 없습니다. 집안이 잘 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성장할 수 없습니다. 단순히 사람끼리 싸워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주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주목하는 길이 우리의 살길입니다. 우리를 비우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함입니다. 비워놓고 채우지 않으면 공허해서, 허무해서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시기를 바랍니다.

처음에는, 병을 고치기 전에는 사도들에게 주목했는데 사도들은 다시 말합니다. 본문에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베드로와 요한이 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에게 주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중요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7:5∼16에 보면 고린도교회 안에 서로 의견을 달리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어떤 이는 말하기를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아볼로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고, 그러다 보니 자연히 다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고린도교회의 상황이 매우 악화되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 바울이 잠깐 고린도교회를 방문했지만, 문제의 해결은 고사하고 오히려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바울의 마음은 찢어질 듯이 아팠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전 7:10)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에 바울이 이 문제를 두고 한 말씀을 보세요. “너희가 나는 아볼로파다, 나는 바울파다 하는 말을 하는데 그것은 다 사람이라서 그렇습니다.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입니까 저희는 각각 주께서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일뿐입니다. 내가 심는 일을 했다면 아볼로는 물을 주는 일을 했습니다. 심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 물을 주는 사람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움이 트고,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 맺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뿐이십니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큰 자를 부르지 않습니다. 다윗도 작은 소년이었습니다. 아브라함도 누군 지도 모릅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나오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기록은 하나님이 함께 하면서 이루진 것이지 갈데아우르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세는 레위 족속 아므람과 요베겟 사이에서 낳으며 미리암과 아론의 동생입니다. 그러나 당시 애굽의 박해로 갈대 상자에 넣어 나일 강물에 띄웠는데 마침 애굽의 왕녀가 발견하고 데려다가 양자를 삼고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은 유모로 들어가 바로의 궁전에서 40년 간 양육 받으며 애굽의 학술에 통달하였습니다(행 7:22).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 때문에 모세를 사용하신 것이 아닙니다. 혈기 넘치는 모세를 사용하시기 위해서 처갓집에서 양떼를 지키며 40년을 더 지내게 만들고 80세가 되어서야 부르셨습니다. 인간의 생각을 다 버리게 하셨습니다. 혈기를 부리려고 해도 힘이 없어 못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지팡이 하나가지고 바로에게 갔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영국의 격언에 ‘하나님을 믿은 이 믿음은 모든 것을 가진 것과 같다’ 고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전부입니다.

사사 기드온의 때의 일입니다(사사기 6:23).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미디안의 손에 7년 동안 넘겨주었습니다. 농사를 지을 철이 되었을 때 쳐들어옵니다. 토지 소산을 멸하고 양이나 소나 나귀도 남겨두지 않고 다 빼앗아 갔습니다(삿 6:4). 이스라엘 백성은 이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간구하였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 몰래 밀을 타작하고 있었습니다(삿 6:11). 그런 기드온에게 여호와의 사자(천사)가 나타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삿 6:12) 고 합니다. 기드온은 작은 자입니다. 기드온의 아버지는 가문의 작은아버지입니다. 기드온은 아들 중에서 제일 작은 막내입니다. 그런 기드온에게 천사가 나타나 “큰 용사여” 했으니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작다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작지 않습니다. 누구보다 큰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수님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은 그분이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를 아는 것이 또한 예수를 주목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비운 사람을 좋아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을 주목하는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예수님을 보아야 합니다. 창세기 속에서 예수님을 발견해야 합니다. 세상이 있기 전에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첫 아담은 죄를 세상에 주었지만 둘째 아담은 구원을 주시 것을 주목해야 됩니다. 출애굽기를 보면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예수님을 보아야 합니다. 광야 같은 길을 인도하시는 모세보다 뛰어나신 예수님을 주목해야 합니다. 민수기를 보면서 마지막날에 구원받은 백성의 수를 세실 예수님을 주목해야 합니다. 레위기를 보면서 다시 드릴 필요 없는 영원한 속죄의 어린양이 되신 예수를 주목해야 합니다. 신명기를 보면서 우리 자녀에게 가르칠 영원한 예수님의 말씀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열왕기, 역대기를 보면서 하나님이 세상의 왕을 통치하신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나라가 바로 선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다윗을 보면서 오실 메시야를 주목해야 합니다. 구약은 오실 메시야 예수님을 주목하는 것이고 신약은 이미 오신 예수를 주목하는 책입니다. 이 성경에서 예수가 빠지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엘 그레코(El Greco)라는 화가가 있었습니다. 그가 그린 ‘참회하는 성 베드로’라는 그림에서 베드로는 천국의 열쇠를 쥐고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모두 이미 천국의 열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열쇠를 쥐고 있어도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천국의 열쇠를 쥐었지만 하나님이 우리의 죄악을 사하지 않으시면 안 되는 줄 아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먼저 자신의 죄를 깨닫는 것입니다. 남을 탓하는 것도 아니고, 사회를 탓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제일 먼저 하나님 앞에 나 스스로를 깨끗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억울하다 하지말고 나를 들여다보아 나를 정결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회를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먼저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자신을 먼저 들여다볼 수 있는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를 주목하는 사람은 동시에 자기 자신을 봅니다. 예수님은 나의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누구를, 무엇을 주목하는지를 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언제나 그 주목하는 믿음만큼 움직이시는 것입니다. 믿음이 하나입니다. 두 개가 될 수 없습니다. 믿음이 하나되는 것은 ‘주목’하는 것이 같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예수를 주목하지 않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란 예수께 주목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주목하는 믿음은 우리의 모든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비천한 사람을 존귀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저주아래 있는 어떤 사람일지라도 주님이 저주를 짊어지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사람은 저주대신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예수께 주목하시어 예수께서 내려주시는 모든 축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조경의(1891. 11. 2-1950. 8. 4) 장로는 한국전쟁 당시에 인민군들이 떼어간 교회 종을 다시 찾아다가 걸고 예배시간을 알렸습니다. 마지막으로 잡혀가던 날도 아내와 함께 약방에서 환자를 돌보는데 심한 복통으로 그의 약방을 찾아온 군관에게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였습니다. 인민군 군관에게 “공산주의자도 민주주의자도 모두가 내 형제요 자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 구원받아야 지옥가지 않습니다.” 결국 군관에게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총살되었습니다.

최원초(1905.11.27-1950. 9.23) 목사는 “예수 믿으시오. 예수 믿고 천당가시오.” 라고 군복을 걸친 내무서원에게 정중하게 전도를 했습니다. “저한테 지금 전도하고 계시는 겁니까 ” “물론이지요 공산당원이라고 인간 대열에서 낙오될 수 있나요 사람은 예수 믿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고 전도하다 순교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전도하다 순교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일제시대 때에도 한국전쟁 때에도 공산당에게도 전도했습니다. 전도하다 죽었습니다. 순교했습니다. 주일날 선거하는 것을 반대하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은 주일을 우습게 생각하는 것 아닌지요. 주일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허은(1914. 2.28~1950. 7.25) 목사는 교회 헌당 후 한국전쟁이 터졌으나 교인들만 피난시키고 두 번 양떼를 버릴 수 없다는 이유로 자신은 신축된 해방제단에 엎드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기도하다가 정치보위부원의 손에 수갑이 채워져 가면서 아버지를 부르는 아들을 향하여 “예수 잘 믿어야 한다”는 말을 유언으로 남기고 순교하였습니다. 이 유언이 우리를 향한 부모님들의 유언인줄로 믿습니다. 단순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 잘 믿어야 한다” 는 말씀을 주목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뻐하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이여 다 그 성읍과 함께 기뻐하라 다 그 성읍과 함께 즐거워하라 그 성을 위하여 슬퍼하는 자들이여 다 그 성의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성과 함께 기뻐하라”(사 66:10)

어두움은 사탄이 주는 것이고 빛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악은 사탄에게서 나오는 것이고 선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다툼과 분열은 사탄에게서 오는 것이고 용서와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슬픔과 우울한 것은 사탄에게서 오는 것이고 기쁨과 즐거움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기쁨은 하나님께로 인도하지만 슬픔은 사탄에게로 인도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기뻐해야 합니다. 기쁨이 없으면 그만이지 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기쁨이 없으면 인생이 잘못된 것입니다. 삭개오는 세상의 것을 많이 가지면 기쁨이 올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가지면 가질수록 기쁨이 없습니다. 그런데 뽕나무에서 예수님이 자기 이름을 부르는 순간 기쁨이 넘쳤습니다. 예수 만나서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예루살렘을 왜 사랑합니까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이 그곳에 사람들을 만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사람은 사는 것입니다. 사탄을 만나면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을 고생을 하더라고 하나님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찾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힘이 들어도 교회에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 그 성읍과 함께 기뻐하라” 고 본문 한 절에 무려 네 번이나 나옵니다. 이 세상의 것에는 진정한 기쁨이 없습니다.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것에 불과합니다. 사람이 볼 때도 이 땅에 사는 사람 중에 참 복이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기뻐해야 합니다. 왜요. 기쁨이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은 기쁨으로 나오라고 합니다.

다윗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시 30:5).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시며 베옷(상복)을 벗기시고 기쁨으로 띠 띠우십니다. 세상에는 진정한 기쁨이 없습니다. 세상과 함께 기뻐할 수는 없습니다. [430장] 주와 함께 길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우리주님 걸어가신 발자취를 밟겠네, 한걸음 한걸음 주 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 걸어가리

“11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리시는도다 12 의인이여 너희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그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시 97:11-12) 여기 잘 보세요.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기쁨을 주십니다. 그런데 누구로 말미암아 기뻐합니까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입니다. 본문에 “그 성읍과 함께 기뻐하라”입니다. 이 땅의 기쁨은 잠시뿐입니다. 영원한 기쁨을 주시는 예수님을 인하여 기뻐하시기를 바랍니다.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0-11) 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오셨습니까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눅 2:10) 기쁨의 근원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세상의 것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것은 영원한 것이 못 됩니다. 오직 우리의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요 16:22) 지금 근심하는 것(곡하고 애통하는 것)도 나중에 큰 기쁨이 됩니다. 우리 기쁨은 빼앗을 자가 없습니다. 주님께 구하세요. “그리하면 받으리라” 고 하셨습니다. 기쁨이 충만하게 해 주십니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송은 세계 어느 나라, 어디서 누가 만들었던지 밝고 기쁨이 넘칩니다. 찬송에는 어두움을 걷어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찬송을 부르세요.”
찬송을 부르세요 찬송을 부르세요.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찬송 부르세요.
(2. 기도를 드리세요 3. 말씀을 들으세요. 4. 예수님 믿으세요. 5. 전도를 해보세요)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들고 와서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령이 그에게서 떠나더라”(삼상 16:23) 고 했습니다. 참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상쾌하여 낫고” 했습니다. 상쾌합니다. 사탄은 어둡습니다. 우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은 상쾌합니다. 기쁨이 넘칩니다. 즐거워 할 때, 기뻐할 때 모든 문제가 사라집니다.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입니까 상쾌한 사람입니다. 깨끗한 사람입니다. ‘상쾌하여’의 어근은 토브(좋은, 기쁨)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매일 이 토브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토브)” 입니다. 좋은 사람 만나면 기쁨이 생깁니다. 그런데 어둡고 기쁨이 없는 우울한 사람을 만나면 복잡합니다. 꼬이게 합니다. 무슨 말을 하면 오해를 하고 자꾸만 복잡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산뜻합니까
승미 자매가 옷을 가져와 우리 집사람이 아는 목사님 딸에게 옷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우리 집사람 입으려고 했는데 승미 자매가 날씬하여 입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골 교회 목사님 딸이 대학교에 갔는데 입고 다닐 옷이 시원치 않아 주었더니 그렇게 좋아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승미 자매에게 했더니 승미 자매가 얼마나 기뻐하는지요.
사람은 참 신기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일을 하면 스스로 기쁨이 넘쳐나도록 만드셨습니다. 좋은 일 해보세요. 기쁨이 넘치게 되어있습니다. 여러분이 기쁨이 없다면 그것은 좋은 일을 하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좋아하면 반드시 기뻐하게 되어있습니다.

좋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버지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의도를 아시나니 네가 만일 그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만일 네가 그를 버리면 그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대상 28:9) 고 했습니다.

제가 지난 목요일에 우리나라 대학총장님으로 제일 연세가 많으신(78세) 황희융 서울 벤처정보대학원대학교 총장님을 만나 뵈었습니다. 황 총장님은 우리나라 서울대에서 컴퓨터공학과를 처음 만드신 분입니다. 이분이 청년 때 중학교 못 들어간 아이들을 모아서 가르쳤답니다. 좁은 골방에서 라면을 같이 끌여 먹으면서 공부했는데 그 때 가르침을 받은 학생이 40년 만에 연락이 왔다는 겁니다. 그 제자 분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코테마데라시 시장을 역임한 재미교포 양진석(66세)씨입니다. 지금은 세계태권도연맹 사무총장으로 있습니다. 양진석씨는 야학을 하던 그 시절이 늘 마음속에 고향 같으며 그 때 열심히 가르치는 선생님들을 보고 자신도 그렇게 살아야 되겠구나 하는 꿈을 키웠다고 합니다.

기독교는 사람을 위한 종교입니다. 신만을 위한 종교가 아닙니다. 모든 종교가 신에게 복종 만하고 같다 바쳐야 합니다. 기독교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진정한 부모는 자식에게 맹종을 원하지 않습니다. 마음은 없으면서 복종하는 것을 하나님은 원하지 않으십니다.
기업가들이 제대로 사람을 보기 시작한 것은 불과 50여 년도 안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경영이란 사람을 어떻게 부려먹을까 연구하고 잘하는 것이 기업을 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50년 전에 자기네 공장의 사람을 보니까 머리가 달려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몇 십 년 흘러서 보니까 사람은 사랑하는 가슴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람의 머리를 존중하고 사람의 가슴을 존중하니까 기업에 힘이 생긴다는 겁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어려움이 닥칠 수 있습니다. 때로는 근심도 하게 됩니다. 바울에게도 아픔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 로마에서 붙잡혀 감옥에 가게됩니다. 처음 갇힌 때가 A.D. 61년 가을-63년 봄입니다(행 28:16-31). 바울은 이 때 옥중서신이라고 불리는 에베소서, 빌립보서. 빌레몬서, 골로새서를 기록합니다. 잡아 가두니까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감옥에서도 열심히 기록하고 그것을 전합니다. 더 놀라운 것은 옥중서신의 모든 책에 기쁨이라는 말이 제일 많이 나옵니다. 감옥에 갇혀서 뭐가 그렇게 기쁨니까 그런데도 바울은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빌 1:18) 바울이 왜 기뻐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전파되고 있기 때문에 기뻐합니다.
“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18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빌 2:17-18) “전제로 드릴지라도” 죽게되더라도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예수님을 만나서 이렇게 기쁨이 넘칩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렘 15:16) 라고 예레미야는 고백했습니다. 요한은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일 1:4) 고 말했습니다. 성경은 우리를 겁주기 위한 책이 아닙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하는 책이 아닙니다. 기쁨을 주는 책입니다. 생명을 주는 책입니다. 성경을 보면 생명수가 강같이 흐르는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산성이십니다. 우리의 피할 바위이십니다. 늘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힘과 능력은 위로부터 주님에게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주님을 의지하지 않았더라면 승리할 수 없었습니다. 루터는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음악에 소질이 있었습니다. 루터의 어머니는 피아노를 잘 치셨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작곡도 하고 작사도 했습니다. 그 곡이 찬송가에 있습니다. 그 성에서 보호를 받았거든요. 마치 다윗 같은 찬양을 합니다. 자기를 지켜 준 것은 큰 성이 아니라 그곳에서 역사 하신 주의 능력이었습니다. 그래서 [585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이 찬송을 작곡했습니다.
1.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 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주시리로다 옛 원수 마귀는 이 때도 힘을 써 모략과 권세로 무기를 삼으니 천하에 누가 당하랴
2. 내 힘만 의지 할 때는 패할 수밖에 없도다 힘있는 장수 나와서 날 대신 하여 싸우네 이 장수 누군가 주 예수 그리스도 만군의 주로다 당할자 누구랴 반드시 이기리로다
3. 이 땅에 마귀 들끓어 우리를 삼키려하나 겁내지 말고 섰거라 진리로 이기리로다 친척과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 다 빼앗긴대도 진리는 살아서 그 나라 영원하리라 아멘

루터는 그 성에서 주님을 의지하고 성경을 번역하고 스스로 찬송을 만들어 불렀습니다. 주님이 성이십니다. 네 힘만 의지 할 때는 패할 수밖에 없지만 주님을 의지하면 그분이 싸우십니다.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렘 32:40) 하나님은 복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부모님이 좋아하는 자녀가 누구이겠습니까 세상에 나가서 출세한 자녀요 명절 때마다 비싼 선물을 보내주는 자녀요 아닙니다. 찾아오는 자녀가 제일 반가운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 3:17)고 스바냐 선지자가 말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온 자녀를 통해서 하나님은 기쁨을 이기지 못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눅 15:10) 우리를 얼마나 기뻐하십니까 우리를 이렇게 기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우리 또한 기쁨이 충만한 것입니다.

부활의 증인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고전 15:12-15)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2010년 3월 31일에 서해 상에서 발생한 우리나라 초개함(천안함)의 침몰된 배의 구조를 바라보다, 청와대에서 주재한 국무회의에 앞서 일부 참모들에게 “직접 가봐야겠다”며 준비를 지시했다는 후문입니다.
특히 이 대통령은 “내가 국군통수권자다. 더욱이 실종된 장병 한사람 한사람이 우리 국민일 뿐 아니라 내 자식, 내 부하와 같은 사람들 아니냐” 면서 “더 이상 앉아서만 볼 수 없다”고 말하고 백령도를 방문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사람들에게 선지자를 보내시고 천사를 보내시고 왕과 제사장을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바르게 전달되어 지켜지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직접 이 땅에 가봐야겠다고 결정하시고 오셨습니다. 더 이상 하늘에서만 보고계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무작정 오신 것이 아닙니다. 돌아가실 계획을 함께 마련하시고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천사가 알려주었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고 하셨습니다. 천사는 누구입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심부름을 하는 자입니다. 우리가 죄에서 구원되는 것은 부활을 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우리가 세례식을 하는데 세례를 왜 받습니까 구원의 길로 가기 위해서입니다. 그 구원의 완성은 부활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바울은 ‘그리스도’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히브리말로는 ‘메시야’입니다. 예수가 하나님께 보냄을 받으신 분임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의 증거는 부활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 보면 성경에 못 믿을 사건이 너무 많습니다. 그 중에 제일 못 믿을 사건이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이고 또한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이것이 믿어지면 성경이 다 믿어집니다. 그런데 이것이 안 믿어지면 성경이 다 안 믿어집니다. 제가 몇 가지로 성경에서 나타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압니다. 제가 아무리 이론적으로 바른 증거를 한다고 해도 믿지 못할 분은 믿지 못한다는 것을요. 많이 배웠다고 부활이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부자라고 부활이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권력이나 권세가 있다고 부활이 믿어집니까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믿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자가 아니면 믿어지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택한 자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독교는 신비주의가 아닙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신비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런 신비를 모두 제거해 버린다면 기독교는 설자리를 잃어버립니다. 동정녀 마리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하셨다는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 승천하시고 다시 재림하시겠다는 말씀이 신비 그 자체입니다. 인간의 학문을 통해서 모두 설명이 가능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신비적 경험만을 추구하는 신비주의를 우리는 경계하고 떠나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시는 신비조차 외면하는 이성주의가 우리가 추구해야할 신앙의 모습도 아닙니다. 일본이 우리와 다르게 신앙이 자라지 못한 것이 바로 이 차이입니다. 우리는 지나치게 신비주의에 치우쳐 있었지만 일본은 지나치게 이성주의 였습니다. 신비주의도 문제이지만 이성주의도 문제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신비를 부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지 않는 신비를 추구해서도 안됩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최고의 신비 중의 하나가 무엇입니까 “부활”입니다.

본문 12절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사실 오늘 본문의 사람들만 예수님의 부활을 못 믿은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고 전파한 제자들 역시 처음에 부활을 선뜻 믿지 못했습니다. 대표적인 제자가 도마 아닙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 목격한 사람은 여자들입니다. 이 여자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부활을 알렸을 때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눅 24:11) 그랬습니다. 심지어는 마태복음 맨 마지막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마 28:17) 고 했습니다. 예수님 승천이 임박해 있는 이 때까지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은 것이란 쉽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 정도면 오늘날 우리들이야 얼마나 의심이 가겠습니까

그래서 음모론이 성립되기 어렵습니다. 워터게이터 사건 이후 음모에 가담했던 척 콜슨(Chuck Colson)은 음모가 성립하려면 “가담한 모든 사람이 똑같은 정도로 확신을 보이고 또 재능도 있어야 한다” 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매장하는 일에도 예수님의 제자들은 나타나지를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시체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다 엄마 잃은 아이처럼 멍하니 있었습니다. 무슨 일을 꾸밀 정도로 제자들은 여유가 있지 못했습니다. 일을 꾸미려면 주동자가 있어야 하는데 보통 이런 일을 주도하려면 치밀한 계획이 있어야 하는데 주도면밀한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팔고 죽었고, 베드로는 자기 자신을 챙기기도 바빠 습니다. 완전히 실망에 빠져있는 제자들이 그런 일을 꾸몄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 다음에 여인들이 부활의 첫 증인들이었습니다. 이것을 네 복음서 모두가 전하고 있습니다. 부활이 1세기에 누군가 날조하지 않았다는 강력한 증거 가운데 하나입니다. 당시 유대 법정은 여인들의 증언은 증언으로 가치가 없습니다. 누군가가 머리를 써서 꾸몄다면 최소한 여인을 첫 증인으로 내세우지 말았어야 합니다. 최소한 베드로나 요한 아니면 니고데모라도 증인으로 내세워야 하는데 그렇지를 않았습니다. 나중에 손을 대려면 기회가 있었습니다. 요한은 A.D. 90년 이후에 요한복음을 기록했습니다. 그런 요한마저도 똑 같이 기록합니다. 성경은 오늘날 우리가 노력하는 것만큼 부활 이야기를 도무지 변증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마 28:8),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막 16:8) 고 부활의 충격을 그대로 전할뿐입니다.

저도 과거에 부활을 못 믿었습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도무지 믿어지지 않던 것이 부활입니다. 중학생이 못 믿으면 그만이지… 그렇게 생각하실 지 모르나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나 부활에 인생이 걸렸습니다. 하나님의 강한 성령의 역사로 처음에 저는 부활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목사가 되고 난 뒤 지금은이요 그 때 그 강력한 성령의 경험을 통해서만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저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15장은 바울이 간증식으로 부활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도 처음에는 이요 다메섹으로 가서 예수 믿는 사람들 찾아 고발하려고 했습니다. 스데반의 죽음 이후에 성도들이 흩어졌는데 예루살렘의 박해를 피해 북쪽의 다메섹에 제일 많이 도망갔었습니다. 바울도 지독한 사람입니다. 스데반을 죽인 것으로도 모자라 거기까지 찾아갑니까 자기가 밝힙니다. “멸절”시키려고 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씨를 말리려고 헸던 것입니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행 9:1) 라고 합니다. 그런데요 그 길에서 빛이 바울을 두르고요 하늘에서 소리가 납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그러니까요 바울이 “주여 누구시나이까 ” 그 때 주님이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행 9:5) 이 한마디에 사울은 무너졌습니다. 그때부터요 바울은 오직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합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살아 계시지 않았다면 바울에게 이런 음성을 어찌 들려주시겠습니까 거짓말하나를 지키려면 수 없는 거짓말을 해야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부활은 반대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으면 엄청나게 많은 것을 모두 부정해야 합니다. 성경을 모두 부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부정해야 합니다. 본문 14절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거짓 증인은 용서될 수 없습니다. 만일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완전히 거짓말쟁이가 된다는 것입니다.
“전파하는 것”(to; khvrugma:토 케뤼그마)를 말합니다. 이 말은 전파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파하는 내용(본질)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뜻하는 것입니다.
“믿음도 헛것이며” 는 앞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라고 했는데 앞의 것은 kenh;(케논)입니다. 케논은 ‘실제적인 것을 소유하지 못한 공허한 것’ 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믿음도 헛것이며” 의 헛것은 mataiva(마타이아)입니다. 마타이아는 “실제적인 것을 획득할 수 없는 소용없는 것”을 말합니다. 캐논은 ‘할 수 없어서 공허한 것이고’ 마타이아는 ‘할 수 없는 소용없는 것’ 입니다. 나중 것이 더 강한 의미입니다. 전파하는 것이 헛것 인 것보다는 믿음이 헛것이 되는 것이 더 큰 문제인 것입니다.

바울은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 15:3-4) 라고 했습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부활에 대해서 여러 번 이야기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늘 그랬듯이 부활도 각기 상이한 반응을 이끌어 냅니다. 부활을 믿고 받아들인 사람들은 인생의 변화를 체험했고 희망과 용기로 가득 차 나가서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여러분! 부부가 싸우면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제일 문제가 되는 현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서로 문제가 있어서 그것을 가지고 싸우면 그래도 개선의 여지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제일 무서운 것은 무관심입니다. 너는 너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을 왜 예수님이 부르셨다고 보십니까 그의 열심입니다. 강하게 부정하는 사람은 사실은 그것을 믿을 준비도 되어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하나님이 부르십니다. 그것은 제가 잘 압니다. 제가 그랬잖아요. 그런데 아주 무관심한 사람은 대책이 없습니다. 인생의 죽음에 대해서 고민도 안 합니다. 그저 이 땅에서 먹고사는데 만 정신이 빼앗겨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전 7:2) 라고 하셨습니다. 죽음을 마음에 두어야 합니다. 잔치를 벌이면서도 죽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부활을 부정하려고 하면 하나님을 부정하려고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예언하셨습니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눅 16:31) 의심이 많았던 도마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 20:29) 오늘날 우리가 복된 줄 믿습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오늘은 성도 여러분이 부활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