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를 회복하는 교회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25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27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그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자가 없더라 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30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요 4:20-30)
기드온에게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천사가 하는 말이 네 민족을 구원하라는 것입니다. “기드온이 자기가 집안에서 가장 작은 자이고 힘이 없었는데…” 여러분! 그것은 문제도 아닙니다. 그런 문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일 큰 문제는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이나 천사를 보면 바로 죽었습니다.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을 보면 죽는 것입니다. 기드온이 천사를 보았으니 자신이 죽게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삿 6:23) 고 했습니다.
죄인인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두려운 분이십니다. 죄인에게는 십자가가 무서운 겁니다. 그래서 사탄은 십자가를 보면 도망가게 되어있습니다. 기드온은 특별한 하나님의 은총으로 살았습니다. 그 감사함으로 “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것을 여호와 살롬이라 하였더라”(삿 6:24) 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평안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 있어서 가능한 것입니다.
미국에 한창 금광 경기가 좋을 때 광부들을 위한 텐트와 여러 가지 야외 시설을 위한 천막이 많이 소요되었습니다. 한 천막업자가 금광 붐을 타고 텐트에 재미를 보면서 천막 원단을 엄청나게 많이 쌓아 두었는데 갑자기 금광이 사양길로 접어들면서 천막 수요가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사업이 망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고, 야적장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텐트 원자재를 쳐다 볼 때마다 처분 할 방법이 없어 절망의 한숨만 나왔습니다. 이 업자는 그래도 길이 있으리라 믿으며 천막 원단을 사용할 수 있는 곳을 찾았습니다. 마침 한 광부의 작업복을 쳐다 볼 때 섬광처럼 스치는 아이디어가 있었습니다. 험한 일을 하는 광부에게 튼튼한 천막 원단으로 바지를 만들면 좋을 것 같았습니다. 처음으로 청바지를 만들어 광부에게 입혔을 때 상상외로 반응은 좋았고, 청바지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의복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단순히 위기를 극복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무엇이 위기를 극복하게 만들었는가를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이익만을 쫓아 돈벌이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생각입니다. 광부들에게 좋은 바지를 입혀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습니다. 선한 마음은 위기를 극복하게 만듭니다. 자신을 조금 버리니까 다른 사람이 편안해 집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내 고집만 부리려면 예배가 안됩니다. 나를 버리는 것에서부터 예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은 사람들은 모두가 자기 자신을 버렸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를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자기보다 더 뛰어난 하나님으로 믿을 때 예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예배가 진정으로 살아있을 때에만 우리의 삶이 살아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배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에 예배를 드리면서 한 주를 시작하고, 한 주간을 살아간 후에는 예배를 통해 다시 삶을 마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에 실패하면 삶에 실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예배입니다.
본문 23절 “…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 예배입니다. 예배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으며,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습니다. 이 예배가 왜 이토록 소중합니까?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47절에 “하나님을 찬미하며…”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은 날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그리고 성전에 모여서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도들로부터 말씀을 들었습니다. 자, 무엇을 한 것입니까? 그들에게는 살아있는 예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교회는 감격적인 예배가 있는 교회입니다. 예배를 감격 없이 드리면 하나님의 역사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임재하심을 경험하는 살아있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예배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럼, 어떤 예배가 살아있는 예배입니까?
1.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1절에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고 했습니다.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의 문제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예배하는 것을 막았습니다. 예루살렘에 가서 예배하려고 했지만 그렇게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본문 20절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당신들이 예루살렘에서 예배하는 것이 맡는지, 자기들이 그리심산에서 예배하는 것이 맡는지 예수님께 물어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장소의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예배는 장소가 아니라 아버지께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예배는 드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배 보러 간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는 보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성가대 찬양을 잘 하는가, 연습이 잘 되었나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목사님의 설교는 잘 준비되었는가, 틀리는 것이나 잘못된 말씀은 없는가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난주에 히말리야 산맥을 넘어가는 새의 이름을 제가 다시 들어보니까 독수리라고 해야 하는데 처음에는 비둘기라고 두 번이나 말하고 나중에 독수리라고 했습니다. 처음 두 번 비둘기는 잘못된 것입니다. 정정합니다. 그래도 우리교회 예배에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배를 보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배를 드리는 성도였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예배 순서가 깔끔하게 잘 짜여져서 잘 진행되는가를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배는 우리가 보고 감상하는 것이 아닙니다. 잘 짜여진 프로그램을 관람하거나 평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예배를 무엇인가 받으려고 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설교가 은혜가 안 되었다고 예배가 은혜롭지 않았다고 말하거나 오늘 부른 찬송이 자기의 맘에 들지 않았다고 해서 은혜롭지 못했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설교시간에 목사님이 위로와 격려의 말씀보다는 부담과 도전을 주는 말씀을 했다고 은혜롭지 못했다고 말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은혜 받기 위해 예배를 드립니까? 설교를 듣기 위해 예배를 드립니까? 틀리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하나님께 나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 자신을 드리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자꾸만 받는 것에만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먼저는 나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드릴 때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순종할 때 축복이 오는 것입니다. 욥이 어떤 고통과 환난 속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믿으니까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는 겁니다.
예배라는 말 자체는 “무릎을 꿇다, 경배하다, 헌신하다”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말씀을 들어도 무릎을 꿇고, 헌신된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무엇인가 받기 위해 나오시기보다는, 하나님께 나 자신을 드리기 위해 나오시기 바랍니다.
나를 드리면 은혜는 자연히 뒤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드림이 없으면 은혜는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자기에게 무엇인가 채우려 하면 하나님은 거두어 가십니다. 그러나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포기하고, 자기를 드리면 하나님은 채워주십니다. 왜 은혜를 받지 못합니까? 드리려고 하지 않고, 자기 것을 포기하지 않고 받으려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2. 예배는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됩니다.
본문 23절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라고 했습니다. ‘영(靈)’으로 예배하라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아버지가 영이시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영시라는 것은 영적인 것이 아니면 그분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육체의 생각으로 예배드리는 것은 안됩니다. 사람이 보기에 아름다운 예배, 사람이 듣기에 좋은 설교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이 때 사람에게는 지루할 수도 있습니다. 재미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는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재미있으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드리는 시간입니다. 나를 드릴 때 성령님이 우리를 도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유명한 한 화가가 손님들을 지하실로 데리고 가서 불을 끄고 기다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림이 있는 전시실로 와서 구경하게 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한 이유를 묻자 화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미 당신들의 눈이 세상에서 너무 더러워져 있기 때문에 잠시 어두움에서 눈을 씻긴 후에 그림을 더 잘 보게 하려고 그렇게 했습니다.” 즉 새로운 눈으로 그림을 보라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세상에서 일주일 동안 더렵혀진 몸과 마음을 좀 일찍 나와서 다 내려놓고 정리를 한 후에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의 말씀이 더 선명하게 들리게 됩니다.
‘진리(眞理)’ 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거짓의 반대가 진리입니다. 진리에 합당하게, 참되게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이 거짓입니다. 남을 속이는 것입니다. 예배는 나 자신의 방법과 자신의 의를 가지고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과 뜻을 따라 마음을 다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 시간에 여러분은 무엇을 향하고 있습니까? 멍하게 예배를 드리지 마십시오. 다른 것들을 바라보지 마십시오. 지금 밖에 세워둔 차에 관심을 가지지 마세요. 손으로 핸드폰 만지작거리지 마세요? 우리의 마음과 시선을 다른 곳에 두지 마세요. 우리의 마음과 정성을 하나님께만 주목하십시오. 정성을 다해 드리십시오. 천천의 수양이나 염소를 받기보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사울 왕이 아말렉과 싸울 때에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좋은 짐승들을 진멸하지 않고 전리품으로 남겨두었을 때 사무엘이 사울 왕을 꾸짖었습니다. 이때 사무엘이 했던 말씀은 너무나 유명해서 교회를 조금 오래 다닌 사람은 다 아는 말씀입니다. 사무엘상 15:21-22절 말씀입니다. “21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끌어 왔나이다 하는지라 22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먼저 21절 보세요. 하나님은 멸하려고 하셨는데 자기들은 하나님이 그것을 좋아하실 줄 알고 가장 좋은 것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그래서 22절 말씀이 나온 겁니다. 하나님이 순종을 원하시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자기들 좋은 것으로 드린다고 하나님이 금방 태도를 바꾸시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십니다.
조금 큰 교회에 부교역자로 있을 때, 특별한 날이 되면 종종 선물을 받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선물의 값어치를 떠나서 정성이 담긴 선물은 참으로 반갑고 고맙고 귀하게 여겨집니다. 마음이 기쁩니다. 그런데 어거지로 그저 때가 되었으니까 담임목사님꺼 하나 사고 부교역자 모른 척 할 수 없으니까 하나씩 사서 돌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의례적으로, 심지어 귀찮은 듯한 태도로 주는 선물은 받아도 그렇게 기쁘지 않습니다. 오늘 제가 넥타이를 은영 선생님이 선물한 것으로 하고 나왔습니다. 여기 별표 모양의 종이에 뭐라고 썼냐하면 “목사님! 늘 삶에 힘이 되는 말씀을 공급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참 감사합니다. 마음이 있고, 정성이 있어서 좋은 선물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정성이 깃든 예배, 우리의 마음이 담긴 예배를 하나님은 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최고의 것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영어로 예배는 ‘Worship’ 이라고 쓰이기도 합니다. 이 말은 가치를 의미하는 ‘Worth’라는 단어와 태도, 마음을 의미하는 ‘ship’이라는 단어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즉 최고의 가치를 드리는 것이 곧 예배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예배드릴 때 최고의 태도로 드리십시오. 옷매무새도, 찬송 부르는 태도도, 봉헌을 할 때에도, 내 재능을 드릴 때에도 우리는 최고의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함부로 하면 안됩니다. 되도록 옷도 정장을 입고 오세요.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함부로 대하지 마세요. 집을 나설 때부터 옷을 다듬고 마음을 준비하고 오셔야 됩니다.
3. 예배는 헌신입니다.
예배는 헌신입니다. 설교는 바로 그 헌신을 촉구하기 위한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드릴 때 우리의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구약시대에는 예배를 제사로 드렸습니다. 제사를 드릴 때는 제물이 있었습니다. 비둘기나 양이나 염소 등의 자신의 형편에 닿는 대로 준비하여 드립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자기 자신을 드리는 삶의 표현입니다. 예배를 드리면 우리는 헌신을 해야 합니다. 오늘 드리는 돈을 우리는 헌금이라고 합니다. 헌금에는 반드시 헌신적인 요소가 있어야합니다. 돈만 드리는 것은 헌금이 아닙니다. “주님 나 자신을 드려야 하는데 그 표현으로 헌금을 드립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미 6:6-8 “6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7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고 했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가지고 나아가서 예배를 드리려고 할 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네 삶을 다오. 그것이 내가 원하는 예배이다.”
구약 히브리어 단어에 “레브쉐미즈”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지혜로운 마음’ 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말은 ‘듣는 다’ 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즉 지혜로운 마음이란 잘 듣는 것입니다. 잘 듣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전 5:1) 고 했습니다.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느 8:6) 고 했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 아멘으로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아멘으로 화답할 때 놀라운 능력이 나타납니다.
로마서 12:1절에 보면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을 향하여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지금 살아 있을 때 드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른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입니다. 삶입니다. 내 삶이 예배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기 시작할 때부터 시작됩니다.
참된 예배가 드려진 사람은 삶이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참된 예배를 드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