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의 함성-자블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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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또 내가 보니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2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데 내게 들리는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의 그 거문고 타는 것 같더라 3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사천 인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4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5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계 14:1-5)

지난 6월 25일은 한국전쟁이 발발(1950.6.25)한지 60년이 되는 날입니다. 한국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과 태평양전쟁의 연장선에서 일어났습니다. 전쟁 발발의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의 모택동의 사전 모의로 일어난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특히 당시 소련의 전략적인 계획에 의해서 발생했습니다. 소련은 미국의 막강한 힘을 다른 곳에 쏟아 붇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국력이 약화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내심 중국의 부강도 원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전쟁은 소련 입장에서는 더 좋은 기회가 없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미국과 중국이 싸우면 자신들은 앉아서 손도 안대고 코푸는 격입니다. 그래서 한국전쟁에 미국과 중국이 싸우게 만들어서 소련은 강대국의 미국과 중국의 국력을 약화시키고 화약고를 다른 대로 돌려 자신들의 나라를 방어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여기에 김일성이 말려들었고 소련의 좋은 먹이 감이 된 것입니다. 김일성의 야욕이 부른 동족상잔입니다. 소련 스탈린에게 남침을 도와 달라고 무려 48번이나 요청했습니다. 북한은 20만 명의 병사, 대한민국은 절반인 10만 명, 탱크 242대 우리는 한 대도 없었습니다. 전투기는 북한이 211대인데 우리는 연습용 비행기 22대가 다였습니다. 상대가 안 되는 전쟁입니다.
여러분! 힘이 있다고 무력을 사용합니까? 그것도 같은 동족에게 총을 겨눕니까? 만일 소련에서 먼저 부추겨도 절대 안 된다고 방어를 해야 합니다. 언제나 악은 늘 두 가지 조건이 성립이 되어야 가능한 것을 봅니다. 악한 사람이 있어서 그것을 이용하려는 무리들에게 늘 이용당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야욕 때문입니다. 힘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남을 비웃고 넘어뜨릴 수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가진 사람입니다. 돈이든 지식이든 뭐든지 가진 사람이 다른 사람을 넘어뜨리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무엇을 가르치는 종교입니까? 기독교는 무소유를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소유가 남을 죽이는데 사용된다면 무소유가 났습니다. 기독교는 소유하되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웃과 더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소유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축복이란 그 소유를 나눌 때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성도라는 이름이 많이 나옵니다. 그리스도인과 성도라는 이름은 ‘구별된 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다르게 살아야 됩니다. 왜냐하면 구별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이 구별된 존재임을 많이 말씀합니다.
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라고 했습니다.
눅 10: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하늘에 기록된 자가 구별된 자입니다.
고전 7:23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그리스도가 우리를 샀다고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것으로 팔렸습니다. 나의 생명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로 주어진 것입니다.

어제 우리나라가 월드컵에서 골을 넣었습니다. 사람들의 함성이 여기 저기서 터져 나옵니다. 우리 아파트 위에서는 발을 구르고 난리도 아닙니다. 그런 소리를 우리가 언제 들어보겠습니까? 민족이 하나되어 외치는 소리, 정말 감격적입니다. 빼앗아 갈 때는 눈물과 고통과 비참함이 있지만 나눌 때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이 땅에 다시는 고통의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기쁨의 함성이 터져 나오는, 기쁨의 소리가 울려 퍼지는 나라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번 월드컵 공인구가 ‘자블라니’라는 공입니다. 공 이름 참 재미있습니다. 우리말로는 ‘잡을 라나?, 잡을 래면 잡아봐’ 뭐 그런 뜻처럼 들립니다. 자블라니는 아디다스가 제작한 공으로 남아공 공식언어인 줄루어로 ‘축제를 위하여’라는 의미입니다.
어떤 나라 사람들은 그 공에 대해서 말하기를 동네 슈퍼마켓에서 파는 공 같다고 했습니다. 우습게만 여긴 것입니다. 그런 나라들은 16강에도 못 오르고 집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 공을 쉽게 생각하지 않고 받아들였습니다. 갑자기 익숙해지는 것이 쉽지 않으니까 세트피스 중심으로 연습을 한 것입니다. 힘을 너무 넣어서 차면 자꾸 뜨니까 힘을 빼고 차는 연습을 많이 한 것입니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골이 약속된 세트피스에서 절반이 나왔습니다.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계시록에 성도라는 말과 또 유난히 많이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나팔 소리, 큰 음성(우렛소리)입니다(계 4:1, 5, 5:2, 11, 12, 6:1, 7:10, 5 11:12, 15 등) 계 10:3에는 “사자의 부르짖는 것같이 큰 소리로 외치니 외칠 때에 일곱 우뢰가 그 소리를 발하더라”고 했습니다. 천둥치는 소리 들어 보셨지요? 어떤 때는 연속해서 계속 울리는 때가 잇습니다. 그래도 동시에 울리는 것은 아니고 하나씩 울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말씀을 보세요. “일곱 우뢰가 그 소리를 발하더라”고 합니다. 일곱이 동시에 울리는 것입니다. 그 소리가 얼마나 대단하겠습니까? 일곱이라는 숫자는 7도 되지만 완벽한 음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람들에 의해 나는 소리입니다.
“2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데 내게 들리는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의 그 거문고 타는 것 같더라” 십사만사천명이 부르는 새 노래입니다. 아마 최고의 교향곡 베토벤의 운명, 헨델의 메시야가 이 소리를 연상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흉내는 내보고 상상은 해볼 수 있겠지요. 그러나 실제 이 소리를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막 불어대는 ‘부부젤라’ 소리가 아닙니다. 이 노래는 인류 역사상 제일 아름다운 노래, 제일 웅장한 스케일의 노래입니다.
여러분! 이 악단에 아무나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이 노래는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유명한 대학을 나와도 안됩니다. 레슨을 많이 받아도 안됩니다. 이 노래는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본문 3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사천 인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배우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선택된 자들만 부를 수 있습니다. 이 악단의 수는 십사만사천 명입니다. 그러나 이 수는 보이는 수가 아닙니다. 영적인 수입니다. 우리는 정확히 몇 명인지는 모릅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영적 수입니다.
‘뉴욕 필하모니, KBS교향악단’ 이 사람들이라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악단의 지휘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여기 들어가는 겁니다. 대단합니다. 이 악단은 인류 최고의 악단입니다. 다른 데서는 다 떨어져도 됩니다. 그런데 여기는 반드시 들어가야 합니다. 이 악단에 반드시 들어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럼 이 악단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본문 4절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고 했습니다. 남자들이 독신으로 살아야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면 여기에 여자의 기준은 없지 않습니까? 영적인 의미에서 성도의 절개를 의미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 숭배하는 것을 하나님은 남녀의 관계를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간음하는 것 이것이 얼마나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것입니까? 아마 인간 관계에 있어서 이보다 더 배신을 하는 행위는 없을 겁니다. 바로 우상 숭배하는 것이 하나님께는 이와 같은 것입니다(렘 2:20, 호 2:5). 하나님의 가슴에 못을 박는 행위입니다. 잠언서는 5, 6, 7장에 걸쳐 음녀에게 빠지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육적이든 영적이든 음녀는 우리는 망하게 합니다. 잠 5:5 “그의 발은 사지로 내려가며 그의 걸음은 스올로 나아가나니”라고 했습니다. 죽음입니다. 정신 차려야 합니다. 지금도 가정이 왜 망합니까? 이 문제보다 더 심각한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가정이 파탄나는 것은 음란의 문제입니다.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전 11:2)고 했습니다. 정결해야 신부로 소개하지 않겠습니까?

둘째,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 입니다.
“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3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 8:34-35)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려면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때로는 복음을 위하여 죽게 될 수도 있습니다. 어린양이 그리로 인도해도 따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셋째,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입니다. 우리가 월드컵을 보면서 사람들은 나름대로 모두 자기 나라를 사랑하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무조건적인 국가관 때문에 하나님께 가는 길을 막아서는 안됩니다. 독일의 히틀러가 그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유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혈통이 유태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보다 먼저 하나님께, 어린양에게 속해야 합니다. 어느 정당보다, 이데올로기보다 우선해야 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인으로는 일본 사람을 용서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어린양이신 예수님께 속해 있으면 용서해야 됩니다.

넷째, 5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거짓은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탄은 처음부터 거짓의 영입니다. 거짓은 사탄에게서 온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습니다. “흠이 없는(a[mwmoi:아모모이)”는 ‘흠, 얼룩, 명예롭지 못한 사람, 치욕, 불명예, 결점, 오점’을 뜻하는 모모스(mw’mo”)라는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생활의 정결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래 이 단어의 이미는 구약성경에서 왔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이 흠이 없어야 합니다. 이 땅에서 성도가 살아갈 때에는 매 순간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마음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이 시간만이 예배가 아니라 우리의 삶이 예배인 것입니다. 삶으로 예배드리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3-4) 주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받는 진정한 축복은 그리스도 앞에 설 수 있는 흠 없는 축복입니다.

우리의 마지막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새 노래로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 소리는 2절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데 내게 들리는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의 그 거문고 타는 것 같더라” 엄청난 소리입니다. 대단한 소리입니다. 단순히 큰 소리가 아닙니다. 리듬이 있습니다. 부부젤라 소리가 아닙니다. 이 소리는 파도치는 소리나 폭포수의 소리처럼도 들립니다. 그러나 듣기에 따라서는 관현악기의 소리처럼도 들립니다. 크라이막스 어느 정점에 도달 했을 때는 큰 뇌성처럼 들립니다. 어쨌든 상상할 뿐이지만 이 노랫소리는 대단합니다. 성도의 마지막 승리의 함성입니다. ‘자블라니’ 축제의 함성입니다. ‘자블라니’는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십사만사천의 모임입니다. 그래서 단순한 노래가 아닙니다. 이 노래는 승리한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입니다. 기쁨이 충만한 상태에서 부르는 것입니다. 월드컵에서 우승한 정도가 아닙니다. 마지막 승리의 함성 ‘자블라니’ 입니다. 이 노랫소리를 부르는 주인공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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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제사장 힐기야가 서기관 사반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였노라 하고 힐기야가 그 책을 사반에게 주니 사반이 읽으니라”(왕하 22:8)

이스라엘은 지금부터 약 3000년 전(B.C. 931년)에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로 나라가 나뉘어졌습니다. 이것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처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었는데, 나중에 교만과 후궁들 때문에 타락했습니다. 음란하여 타락한 것뿐만 아니라 이 후궁들이 이방 여자들인데 자기나라에서 섬기던 우상들을 가지고 들어와 그 우상들을 이스라엘에서 섬겼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타락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지나친 경제 논리에 빠져서 음란과 우상 숭배의 죄에 빠지면 안됩니다. 경제 성장도 좋고 나라 발전도 좋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는 잘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북왕국 왕들은 20명이 있었는데 한 사람도 선한 왕이 없었습니다. 남왕국 유다에도 19명의 왕이 있었는데 그 중에 선한 왕을 많이 뽑아도 9명 정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된 왕은 5명 정도입니다. 그 중의 한 명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시야 왕입니다. 요시야 왕은 유다 16대 왕입니다.
B.C. 640년(8세 왕이 됨 1절)-608년 동안 31년 동안 왕위에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려서 왕이 되어 젊었을 때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남북왕조로 이스라엘이 분단된 지 289년 지난 때의 일입니다. 요시야 왕은 왕위에 올라 먼저 하나님의 성전을 보수하는 일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성전 짓는데 7년이 걸렸는데, 자기 집 짓는데 무려 14년이 걸렸습니다. 성전을 짓는 것보다 배가 더 걸렸습니다. 자기 집을 더 화려하게 만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사람이 지은 거처를 가지고 뭐라고 하신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자세입니다.
요시야 왕은 부서진 하나님의 집을 볼 때 그 어린 마음에 마음이 아팠나 봅니다. 왕이 된 때가 8살입니다. 조금 컸어도 열뎃살, 스무살 정도입니다. 그 어린 마음에 하나님의 성전 고치는 것을 먼저 했으니 하나님이 얼마나 좋아 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왕하 22:2) 하나님의 성전을 사랑하셔서 요시야 왕 같은 칭찬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존 록펠러(1839-1937)라는 미국의 부호가 있습니다. 록펠러를 가리켜 십일조의 비밀을 아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록펠러는 19세기 후반기에 있어서 강철 왕 카네기, 자동차 왕 포드와 함께 석유사업의 왕으로서 미국자본주의의 대명사로 지칭되는 사람입니다. 처음에 농산물 도매업을 시작하여 1870년 엔 오하이오에 스탠다드 석유회사를 세웠고, 1882년엔 스탠다드 석유 트라스트를 만들어 전 산업을 석권하는 기업합동 운동의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 때 지독한 악덕 자본가라는 비난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거액의 기부금을 출연하여 1892년에 미국 최고의 명문대학 중의 하나인 시카고대학을 세웠고, 1913년엔 저 유명한 록펠러 재단을 세워 병원, 교회, 학교 등 많은 문화사업과 자선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올해가 에딘버러 선교대회가 열린지 100년째 되는 해인데요, 이 대회를 가능하게 했던 사람이 존 롤리 모트(John Raleigh Mott)입니다. 뉴욕 주 출생으로 코넬 대학을 졸업하고, 1881년부터 1915년까지 국제 YMCA의 학생부 책임자로 있었습니다. 존 모트는 1926년 YMCA의 세계 위원회 의장으로 선출되어 1910년 에딘버러 선교사대회를 위하여 성사시키기 위해 280만 km를 여행하였는데 그 거리가 자그마치 지구를 68바퀴나 돌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1946년,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원조 사업에 대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받았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다녀갔습니다. 존 모트는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을 목격하고 “한국은 동양의 기독교가 될 것이다”라고 예언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궁금했던 것은 존 모트가 어떻게 이런 여행을 할 수 있었는지 궁금했습니다. 누가 그 여비를 다 대 주었는지 그것이 궁금했었습니다. 그리고 YMCA가 어떻게 세워졌는지 모두 알고 보니까 그 돈이 다 록펠러 재단에서 나왔습니다. 록펠러는 세계 선교를 위해서 아끼지 않고 지원했습니다.

그러나 록펠러에게도 아무 어려움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농산물 도매업을 하다 큰 위기가 닥쳤을 때 그는 친구의 권유로 광산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사기를 당해 원금을 모두 날렸습니다. 광부들은 폭도로 변해 밀린 임금을 요구했으며, 빚 독촉에 시달리던 록펠러는 너무 괴로워 ‘자살’을 떠올렸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기업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철저한 신앙생활을 해온 록펠러는 황량한 폐광에 엎드려 기도를 했습니다. 그때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위로의 음성이 있었는데 “때가 되면 열매를 거두리라. 더 깊이 파라” 록펠러는 이 말씀을 믿고 폐광을 더 깊이 파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록펠러가 제정신이 아니라며 수군거렸습니다. 그때 갑자기 황금 대신 ‘검은 물’이 분수처럼 공중으로 솟구쳤고, 그것이 바로 석유였다고 합니다.
이런 일화도 전해내려 옵니다.
록펠러가 한번은 허름한 이발관에 가서 이발을 했답니다.
이발사는 당연히 대부호가 이발을 하러왔으니 엄청난 팁을 바라고 정성스럽게 이발을 하였답니다. 그러나 록펠러는 단돈 1달러를 팁으로 주었답니다.
이발사가 말했죠. “회장님, 회장님의 아드님께서도 이것보다는 더 주실거 같은데요…”
그러자 록펠러가 “그는 부자인 아버지가 있지만 난 부자인 아버지가 없소” 그랬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록펠러가 아닌 다른 부호에게도 있을법한 이야기입니다. 진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어머니가 부탁한 신앙생활입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한 말이 집이 너무 가난하니까, 너에게 아무것도 물려줄 것이 없지만 이것만은 반드시 지켜라 하면서 유언했습니다. “교회 잘 나가라. 예배 시간에 늘 앞자리에 앉아라. 십일조를 반드시 해라.” 록펠러는 가난했지만 이 유언을 8살 때부터 죽을 때까지 지켰다고 합니다. 요시야 왕도 8살 때 신앙이 있었습니다. 성전을 보수했습니다. 록펠러도 8살 때부터 스스로 지켰습니다. 부모 따라서 한 것이 아닙니다. 어머님의 유언대로 그것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사업이 잘되고 어른이 되면 그 말씀을 버릴 수 있는데 록펠러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사업이 커졌을 때는 십일조만 계산하는 직원이 250명이었다고 합니다. 죽을 때까지 어머니의 부탁을 지켰습니다. 그것이 축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금도 잘 지켜보세요. 축복이 옵니다. 이스라엘이 언제 잘 살았습니까? 언제 평안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며 살 때였습니다. 다윗 시대였습니다. 솔로몬 초기 시대였습니다. 그 때 구약 성경의 중요한 케투빔이라고 말하는 시편, 잠언, 전도서가 다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축복해 주셔서 이스라엘에게 주의 모든 나라가 배우러 왔습니다. 태평성대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정신 못 차리니까 나라가 금방 기울어집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한순간입니다. 망하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해야 삽니다.

요시야 왕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하게 되었습니까? 성전을 수리하다가 발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을 수리 하다가 된 것입니다. 유다의 왕들이 약 300년 동안 못 찾았습니다. 물론 성전 어디에 감추어져 있으니까 못 찾았겠지요. 그만큼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관심이 없으니 성경이 보이기나 하겠습니까? 본들 무엇하겠습니까? 사실 무엇을 발견한다는 것은 그것을 볼 줄 알기 때문입니다. 개나 돼지는 아무리 보석을 주어도 모릅니다. 성경책이 집집마다 널렸을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지 않는 가정에도 한 두 권은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모릅니다. 가치를 모릅니다. 그 속에 진짜 보물이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책 끼고 교회만 나온다고 성경의 가치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록펠러의 어머니가 정말 잘 가르쳤습니다. 중요한 것을 말했습니다. 그 세 가지면 다 됩니다. 교회 나와서 복 못 받을 사람 없고, 나온다고만 되는 것이 아니라 앞자리에 앉는 열심히 필요합니다.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앞자리에 앉아보세요. 분명히 여러분의 신앙이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십일조를 해 보세요. 물질의 축복이 임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20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내가 말하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21 그것(지혜)을 네 눈에서 떠나게 하지 말며 네 마음 속에 지키라
22 그것(지혜)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의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잠 4:20-22)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 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잠 3:18)
“얻는”의 원문은 동사형으로 ‘마차’라는 단어입니다. ‘마차’는 ‘발견하다, 획득하다’는 뜻입니다. 적극적인 표현으로는 “애써 찾는다”는 의미입니다.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네가 얻은 모든 것을 가지고 명철을 얻을지니라”(잠 4:7)
예수님은 “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 7:7-8) 라고 하셨습니다. 찾는 것은 다름 아닌 발견하는 것입니다. 우리 집에서 발견하는 겁니다. 내 아내가 귀하고 소중하다는 것을 발견하는 겁니다. 내가 주님 안에서 귀하다는 것을 발견하는 겁니다. 어디 먼데서 찾는 것 아닙니다. 도 닦아서 찾는 것 아닙니다. 내 안에서, 내 주위에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소중한 지혜를,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명장 밑에 약졸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진실한 왕 밑에는 진실한 신하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요시야 왕의 정직한 모습에 성전을 감독하는 사람들이나 수리하는 사람들도 정직히 행하였습니다(7절). 예수께서 우리의 대장 되시고, 우리의 주가 되시니 우리 또한 정직해야 됩니다. 비겁한 자들이 되면 안됩니다. 핑계나 일삼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려야 되는 것처럼 선은 어떤 모양이라도 따라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예수를 따라 사는 것입니다. 잘 되는 사람을 따라하는 겁니다. 믿음의 사람들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할 수 있다 하셨습니다.

1. 할 수 있다 하신 이는 나의 능력 주 하나님 의심 말라하시고 물결 위 걸라 하시네
할 수 있다하신 주 할 수 있 다하신 주
믿음만이 믿음만이 능력이라 하시네, 믿음만이 믿음만이 능력이라 하시네

2. 할 수 있다 하신 이는 나의 능력 주 하나님 나를 바라보시고 능력 준다 하시네
할 수 있다 하신 주 할 수 있다하신 주
사랑만이 사랑만이 능력이라 하시네, 사랑만이 사랑만이 능력이라 하시네

“의복치료”(suit thraphy)라는 것이 있습니다. 옷을 입기에 따라서 사람이 변한다는 겁니다. 학교 다닐 때 보이스카웃학생들 옷은 달랐습니다. 그 때 그 옷은 아무나 입는 옷이 아니었습니다. 태권도 할 때 복장이 따로 있습니다. 저는 그 옷을 입고 집에까지 입고 다녔습니다. 나 태권도 하니까 잘 보라는 것입니다. 나한테 덤비지 말라는 것입니다. 일종의 선전포고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정말 아이들이 못살게 굴지 않습니다.
삶을 포기한 사람들일수록 대충 입고 다닌답니다. 없어서가 아닙니다. 자포자기하여 그런 겁니다. 얼룩이 묻어도 닦지 않습니다. 신경 안 씁니다. 그러나 옷을 정장을 입어보세요. 품위를 바르게 하려고 합니다. 가끔 목사도 복장을 통일하여 평상복도 입자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목사 옷 입고 함부로 할 수 있겠습니까? 바르게 입어야 합니다. 바른 옷이 바른 사람을 만들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의복치료”입니다.
미리부터 정해놓지 마세요? 나는 내성적인 사람이다. 나는 잠이 많은 사람이라 새벽기도가 어렵다. 잠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많다고 생각하는 것예요. 새벽잠이요. 다 많습니다. 그러나 습관을 고치면 됩니다. 예수 믿고 안 고칠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한 요시아 왕의 태도가 참 모법 적이었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 지키는 일에 관심이 없다면 말씀이 발견된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성경책이야 어느 집에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제사장 힐기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하자 사반에게 주었고 사반은 왕에게 읽어주었습니다. 라인이 중요합니다. 천안함 사건도 보고라인의 문제 아닙니까? 왕이 이 하나님의 말씀을 좋아하기 때문에 제사장 힐기야가 사반에게 주고 사반은 왕에게 읽어주는 것 아닙니까? 만일 왕이 평소에 하나님 말씀 듣는 것을 싫어했다면 갖다주고 읽어주고 했겠습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좋아하십니까? 요시야 왕은 이 말씀을 듣는 동안 옷을 찢었습니다. 회개했습니다. 옥만 찢은 것아 아니라 쓸어 내리는 아픔을 느꼈을 것입니다. “아! 이대로 하면 되는구나? 이렇게 살았어야 하는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 역사하는 힘이 있습니다(벧전 1:23). 죄를 깨닫게 하고(대하 23:14-33) 거듭나게 합니다(약 1:18). 뿐만이 아닙니다. 그동안의 무지를 깨닫게 합니다. “129 주의 증거들은 놀라우므로 내 영혼이 이를 지키나이다 130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 131 내가 주의 계명들을 사모하므로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시 119:130) 하나님의 말씀만이 내 영혼을 지켜주십니다. 하나님이 말씀이 우리의 우둔한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다윗의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이 말씀을 받기 위해서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고 했습니다. ‘헐떡이다’의 어근은 ‘r[‘P;:파아르’로 하품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나오는 단어가 ‘#a’v;:솨아’ 탐하다, 서두르다입니다. 그러니까 헐떡이다는 참 잘 번역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갈급함 입니다. 요시야 왕이 바로 이런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왕하 22:2)는 말씀을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누가 좋아합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정직한 사람입니다. 사탄은 처음부터 거짓의 영입니다.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좋아 할 수도 없고, 순종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다릅니다. 그 말씀을 사랑합니다. 그 말씀을 좋아합니다. 그 말씀을 따라 살려고 노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한결같은 사람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35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36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눅 12:35-36)

여러분이 사위 감을 구한다면 어떤 사람을 구하겠습니까?, 장인 어린이 좋아하는 사위 감이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딸을 평생 책임질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을 구하려고 할 것입니다. 지금 아무리 좋은 조건이라고 해도 그것은 별것 아닙니다.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평생 책일 질 수 있는 그런 사람 아니겠습니까? 변치 않는 사람입니다. 한결같은 사람입니다.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햇빛이 비치나 언제나 똑같은 그런 사람입니다. 마음이 울적할 때, 그곳에 찾아 같을 때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그런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욥을 왜 그렇게 좋아하셨습니까? 한결같은 마음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변치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하나님께 그 점을 부각시킵니다. 지금이야 잘 먹고 잘 사니까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지 그에게 환난이 일어난다면 달라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욥 만큼은 어떤 일이 있어도 변치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셨습니다. 욥의 믿음을 바로 보셨습니다. 하나님의 기대는 빗나가지 않았습니다. 욥은 자신에게 닥친 환경과 관계없이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우리교회도 몇 분의 성도가 안되지만 저는 참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헌금을 좀 많이 내고 좀 적게 내고 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안됩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이 남을 후히 대접할 정도로 복을 받기 원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결같은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고 교회를 지키는 것입니다. 솔직히 우리 중에 누가 하나님 앞에 먼저 갈지 아무도 모르잖아요. 그런데 만일 제가 먼저 하나님께 먼저 간다면 여러분 부탁이 있습니다. 이 교회를 떠나지 마십시오. 이 교회를 지키십시오. 지금처럼 한결같은 믿음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왔다 같다 하는 것 별로 좋지 않습니다. 이제는 마음을 정합시다. 살아도 이 교회에서, 죽어도 이 교회에서 죽겠노라고.
그리고 또 정하세요. 우리 집은 하나님을 믿는 집니다. 사탄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집이다. 예수님이 지켜주시는 집이다. 예수님이 우리의 자녀들을 돌보신다는 믿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의 본명은 시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부르시고 이름을 다시 지어주셨습니다. 수리아어로 게바라고 하셨습니다. 게바를 번역하면 베드로입니다. 즉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반석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큰 바위 같은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쉽게 요동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언제나 변함 없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상황이 어렵다고 마음이 변하고 생각이 변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언제나 변함 없는 반석이 되라는 것입니다. 처음 제자를 부르시고 지어준 이름이기 때문에 사실 이 이름은 모든 제자,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지어주신 이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베드로가 되어야 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반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한결같은 사람을 좋아하시고 찾으십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바로 부모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부모님은 자식에게 언제나 한결같습니다.
하나님은 한결같은 사람을 찾으시고, 그분 또한 한결같은 마음을 가지신 아버지입니다.

[주의 사랑을 주의 선하심]
주의 사랑을 주의 선하심을 주의 은혜를 생각 해 보라
하늘 보다도 더 높으신 아버지의 사랑 크고 놀랍네
아버지 사랑 크고 놀랍네 내 어찌 그 사랑 잊으리
내 어찌 주의 긍휼 잊으리 내 영혼의 모든 소원 만족시킨 하나님
주의 사랑을 주의 선하심을 주의 은혜를 생각 해 보라
하늘 보다도 더 높으신 아버지의 사랑 크고 놀랍네
아버지 사랑 크고 놀랍네 나 길을 잃고 헤맬때
그 사랑 날 찾아 내셨네 내 영혼의 모든 소원 만족시킨 하나님
주의 사랑을 주의 선하심을 주의 은혜를 생각 해 보라
하늘 보다도 더 높으신 아버지의 사랑 크고 놀랍네
아버지 사랑 크고 놀랍네

아버지 사랑은 크고 놀랍습니다. 변함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한결 같으시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빈손으로 왔어도, 내가 병든 몸으로 왔어도, 내가 실패하고 왔어도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는 내 편입니다.
“8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9 그가 아름다운 관을 네 머리에 두겠고 영화로운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하셨느니라”(잠 4:8-9) 이 구절을 승미 자매가 종이 박스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만든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을 기억하고 그가 어디에 있든지 한결같은 마음과 믿음으로 살면 그가 높아질 것입니다.

한결같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첫째, 본문 35절에 “허리에 띠를 띠고…”라고 했습니다. 허리에 띠를 띠는 사람입니다. ‘띠다’의 헬라어 원문은 perizwvnnumi(페리존뉘미)는 끊을 조여 매는 것을 말합니다. 허리에 매야 합니다.
허리가 어디입니까? 몸의 중심입니다. 가운데입니다.
“대저 여호와는 네가 의지할 이시라”(잠 3:26) “의지”는 ‘케셀’이라는 말인데 문자적으로는 ‘허리’를 뜻합니다(레 3:4, 10:15, 욥 15:20). 우리가 씨름할 때 “허리를 붙들고 늘어지다”는 말을 합니다. 허리를 붙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캄보디아에 조성규 목사님의 큰아들 수아하고 간적이 있습니다. 부모가 어찌하다보니 다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저와 함께 있는데 제 다리를 두 손으로 꼭 껴안는 것입니다. 이제 이사람 까지 잊어버리면 나는 끝이다 그렇게 생각했나 봅니다.
현대 축구에 있어서도 허리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미드필드가 살아나야 공수전환이 잘 됩니다. 상대방의 공격은 허리격인 미드필드부터 막아야 합니다. 골대 앞에서만 수비하려고 하면 아무리 잘해도 골을 먹게 되어 있습니다. 허리에 띠를 띠는 사람은 일하는 사람입니다. 일하는 사람은 허리에 띠를 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실 때에 허리에 띠를 두르셨습니다(요 13:4). 우리는 놀고 먹으려고 예수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라 열심히 일하려고 예수를 믿습니다. 아버지도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셨습니다.
“10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11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창 35:10-11)고 했습니다. 허리는 이스라엘의 힘입니다. 허리가 생명입니다.
유다 족속에게 축복할 때 “여호와여 그의 재산을 풍족하게 하시고 그의 손의 일을 받으소서 그를 대적하여 일어나는 자와 미워하는 자의 허리를 꺾으사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옵소서”(신 33:11)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대항하다가는 허리가 꺽입니다. 여러분! 감히 하나님께 도전하려고 하지 마세요. 100전 100패입니다. 어찌 사탄을 믿고, 의지하고 살려고 합니까? 사탄은 거짓의 영입니다. 하나님을 대항하라고 합니다. 아담이 여기에 속았습니다. 죄가 이로 인하여 들어왔습니다.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그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왕상 18:46) 엘리야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비가 오게 한 후에 허리를 동였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고 가만히 있으면 안됩니다. 허리를 동이는 것입니다. 일을 하는 것입니다. 축복이 임하고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 때부터입니다,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사 11:5)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두 번이나 우리에게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고 했습니다(밷전 1:13, 5:5). 겸손이 우리의 허리띠가 되어야 합니다. 교만이 허리띠가 되면 하나님과 싸웁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하나님께 대항하라고 꼬입니다. 겸손이 없습니다. 사탄에게 종노릇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공의로 허리띠를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등불을 켜고…” 등불을 켜고 있는 사람입니다.
원문의 lucno”(뤼크노스)는 옮길 수 있는 조명기구를 말합니다. 등불은 필요한 것을 비추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20 너는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감람으로 짠 순수한 기름을 등불을 위하여 네게로 가져오게 하고 끊이지 않게 등불을 켜되 21 아론과 그의 아들들로 회막 안 증거궤 앞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그 등불을 보살피게 하라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대대로 지킬 규례이니라”(출 27:20, 민 8:3) 구약의 성소의 제사장의 임무 중의 하나가 불이 꺼지지 않게 하는 일입니다. 오늘날에도 교회에서 등불이 꺼지면 안됩니다. 이 빛은 세상을 위하여 비추는 빛입니다.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 빛입니다. 등불입니다. 우리가 인도해야 합니다. 등불이 켜있지 않으면 인도할 수 없습니다. 등불을 켜시기를 바랍니다. 남을 위해 비추시기를 바랍니다. 다윗은 기도합니다.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시 18:28)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 달라고 다윗처럼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잠 20:27),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잠 24:20)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3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4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빛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등불을 끄지 않았습니다. 내가 주 앞에 나아갈 수 없었지만 예수님 때문에 갈 수 있습니다. 예수 이름을 부르세요. 예수 이름 때문에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예수가 빛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입니다.

셋째, “서 있으라” 서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나라 옛날 사극 드라마를 보면 왕 옆에는 늘 내시가 따라다닙니다. 그리고 왕이 잠자리에 들었을 때도 내시는 늘 왕이 부를 때 언제든지 대답을 합니다. 저는 드라마에서 한번도 왕이 “거기 누구 있느냐?” 그렇게 부를 때 대답을 안 하는 경우는 한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낮이나 밤이나 언제든지 부르면 대답을 합니다. 한결같은 사람입니다. “예 전하! 부르셨습니까?”하고 대답하는 사람입니다. 서 있는 사람은 늘 준비된 사람입니다. 왕이 부를 때 그 부름에 대답할 상태에 있는 사람입니다. 꺼진 불을 들고 서있는 것이 아니라 불을 붙이고 대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36절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밤새도록 혼인잔치를 하는 이스라엘의 풍습 상 주인이 혼인집에 가서 언제 돌이올지 모릅니다. 주인이 언제 돌아오든 문을 열어주어야 합니다. 깨어있어야 합니다. 서 있는 것은 깨어 있는 것입니다. 강아지를 보면 잠도 안자는 것 같습니다. 주인이 조금만 소리를 내도 금방 일어납니다. 대단합니다. 우리는 주인에게 강아지만도 못한 존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 꼭대기에 서리라”(출 17:9)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일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승리의 지팡이를 잡고 섰습니다. “모든 백성이 회막 문에 구름 기둥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 문에 서서 예배하며”(출 33:10) 라고 했습니다. 예배도 서서 드리는 것입니다. 앉으면 눕고 싶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안주하려고 하지 마세요. 일어서시기를 바랍니다.
“24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이 25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아멘”(유 1:24-25)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경건에 이르도록 연단하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8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 4:7-8)

‘아람’이라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학교 다닐 때 ‘아람’이라는 학생이 한 학년에 한 명씩은 있었습니다. 아주 흔한 이름은 아니라고 스스로 위안하며 이름에 큰 애착은 없었습니다. 이름 때문에 불만을 내비치면 엄마는 “첫 딸이라고 얼마나 정성 들여 지은 이름인데 그런 말을 하니? ‘아람’은 ‘밤이나 상수리 따위가 충분히 익어 저절로 떨어질 정도가 된 상태 또는 그런 열매를 뜻하는 말이야’ ”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이런 이름보단 낫지요. ‘성국’ 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이분은 남자입니다. 그런데 성이 ‘여’ 씨입니다. 그래서 ‘여성국’ 이 되어 늘 놀림을 당했습니다. 부모님께 이름에 대한 불만을 말하니까 부모님이 처음에 두 이름을 놓고 고민하셨답니다. 그래서 “성국이 말고 다른 고민한 이름으로 하시지 그랬어요? 그 이름이 무엇이 예요.” 라고 여쭈었습니다. “그 이름은 ‘성용’ 이야!” 그 이름 앞에 성을 붙이면 ‘여성용’이 됩니다. 그 다음부터는 ‘여성국’ 에 만족하며 살았답니다.)
‘아람’이가 자라서 고등학생이 되었습니다. 동사무소에서 주민 등록을 만들러 오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동사무소 직원이 “이름이 ‘서아람’ 맞으세요?”, “네. 뭐가 잘못되었나요?”, “서아람이 아니라 ‘서아름’ 이로 되어있네요. 누군가 이름을 작성할 때 실수했나 봐요.” 충격으로 멍해 있는데 직원 분이 말했습니다. ” ‘서아름’ 으로 등록되어 있어서 주민등록증에 ‘서아람’으로 올릴 수 없어요. ‘서아름’으로 올리겠습니다. 괜찮으시죠?” 20년 가까이 ‘서아람’으로 살아왔는데 난데없이 ‘서아름’으로 바꾸라니… 다시 ‘서아람’으로 올릴 수 없냐고 하니까 법원에 가서 제판 받고, 이름을 변경해야 된다는 겁니다. 부모님께 전화해 보겠다고 하고 전화했는데 엄마가 받았습니다. 항상 듣는 엄마의 음성이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습니다. 엄마는 내 이름을 소중히 생각하셨습니다. 엄마는 내일 법원 가서 당장 이름 바꾼다고 하고 ‘서아람’으로 등록해 달라고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주민등록증에 ‘서아람’이라고 신청하고 눈물까지 나왔습니다. 이름을 지켰다는 기쁨과 부모님이 내 이름을 소중히 여긴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이름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려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이름은 예수입니다. 예수의 이름은 변경할 수 없는 이름입니다. 우리를 구원할 다른 어떤 이름을 말하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이름보다도 예수의 이름을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참 감사한 것 중의 하나가 ‘예수’를 우리나라 사람이 정확히 발음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영어권에서는 JESUS가 되었는데 이게 헬라어에서 라틴어, 독일어, 영어 등으로 바뀌면서 발음이 변질되었습니다. ‘아멘’ 도 마찬가지입니다. ‘에이멘’ 이 아니라 ‘아멘’ 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천사가 알려주었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고 하셨습니다. 천사는 누구입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심부름을 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실 이름입니다. 이 이름을 지키기 위해서 신사참배 안하고 죽었습니다. 공산당에게 총 맞아 죽었습니다. 목숨을 걸고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지키기 위해 죽은 것이 순교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불만이 있고 그 불만은 부족함에서 나옵니다. 자신이 생각할 때 어떤 부족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면 불만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리 완벽한 사람이라고 해도 사람은 늘 2%는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자신은 2%도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두 부류의 사람뿐이 없습니다.
하나는 교만으로 가득 찬 사람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실 2%도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상당한 착각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발전이 없다는 것입니다. 2%도 부족하지 않은데 노력할 것도 바랄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럼 살맛이 나겠습니까? 사람은 부족하기 때문에 그것을 채우려고 평생을 노력하며 사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부족한 것이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열심을 낼 수 있습니다.

사람은 모두 부족함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지식도 부족하고 돈도 부족합니다. 거기에 재능도 부족합니다. 그러면 상당히 부족한 사람입니다. 제가 그렇습니다. 보통은 공부를 못하면 운동을 잘하는데 저는 공부도 잘 안되고, 운동은 아주 안됩니다. 이 둘이 안되면 보통은 음악을 잘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음악도 잘 안됩니다. 이 정도면 2%가 아니라 50%가 넘게 부족한 것입니다. 그래서 채워야 할 것이 많습니다.
2%가 부족하다는 음료수 광고가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자기가 아무리 완벽해도 2%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때문입니다. 운동을 해도 땀을 흘려도 2%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채우라고 할 때 많은 사람이 그 모자람에 공감한 것입니다.

知足者(지족자)는 貧賤(빈천)도 亦樂(역락)이요 不知足者(부지족자)는 富貴(부귀)도 亦憂(역우)니라. “만족을 아는 자는 빈천해도 즐겁고, 만족을 모르는 자는 부귀해도 근심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만족할 줄을 아는 사람은 집이 가난하더라도 즐거워하지만 만족을 모르고 불평을 일삼는 자는 아무리 부귀해도 걱정을 떨쳐 버릴 날이 없다는 이 말은 신라 때 낭산(狼山) 밑에 백결선생(百結先生)이란 분이 살았는데, 너무 가난하여 옷을 누덕누덕 기워 입어 붙여진 이름이다. 제가 지난번 지하철에서 스님을 보았는데 그 옷이 누덕누덕하더라구요. 그런데 오래 입어서 헤어지고 달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새 옷인데 나올 때부터 누덕누덕 기어서 나온 것이 예요. 마치 청바지 찢어서 나온 것하고 같은 것입니다.
가난하지만 백결 선생은 음악을 좋아하였는데 특히 거문고를 잘 탔습니다. 어느 해 섣달 그믐날이었습니다. 이웃집에서 떡방아 찧는 소리가 들려오자 아내가 한숨을 쉬면서 말했습니다. “남들은 모두 여유가 있어 저처럼 방아를 찧는데 우리는 어떻게 하지요?” 이에 백결 선생은 아내를 달랬습니다. “부귀는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인데 불평한들 무엇하겠소. 내가 오늘은 당신을 위해 거문고로 방아 찧는 소리를 낼 터이니,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면 좋겠구려.” 하고 거문을 탔다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루이스 라펨 교수가 쓴 ‘돈과 계급’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보면 미국에서 범죄 하는 90%가 돈과 여자 문제 때문에 발생한 것이랍니다. 이 통계가 비단 미국만 그렇겠습니까? 온 세상이 옛날부터 지금까지 모두가 돈과 여자와 권력의 문제입니다. 잘못된 돈, 잘못된 이성관계, 잘못된 권력도 자신이 이익을 위해서는 허락하기 때문에 사탄은 늘 그것을 노리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딤전 4:7)고 했습니다. 나 자신을 연단해야 합니다. 좀 단단해 져야 합니다. 사탄에게 물러 터지면 안됩니다. 사탄에게는 강하고 담대해야 합니다. 친절은 사탄에게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은 타협의 대상도 아닙니다. 사탄이 틈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은 언제나 우리보고 분명히 하라고 명령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눅 24:32)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 뜨거워 져야 합니다. 마음이 뜨거워 져서 악한 것을 다 내어쫓아야 합니다. 세상의 것을 좀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경건으로 채워집니다. 세상 온갖 쓰레기 갖은 것을 담아있어 가지고는 주님의 경건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버려야 합니다.
“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2-23)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난 사람은 뜨겁습니다. 기쁨이 넘칩니다. 충만함이 있습니다. 썩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된 것입니다.

사람은 2% 부족한 것을 자기가 채울 수도 없지만, 만일 채웠다고 생각하면 교만해 집니다. 그래서 사람이 할 수도 없고, 했다고 생각하면 교만에 빠질 뿐입니다. 가끔 이런 망상에 사로잡혀 자기가 다시 온 메시야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만의 극치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목자로 삼은 사람들은 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라고 고백합니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시 34:9) 내가 잘나서 부족함이 없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가 나의 목자시기 때문에, 내가 그분을 경외하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채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34:10) 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참 좋으신 분입니다. 우리의 부족한 것을 채워주십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늘 부족한 것을 채워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골라서 주시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주십니다. 우리가 왜 지식을 배웁니까? 왜 돈을 법니까? 기도하세요 여러분! 우리 식구 먹고살도록 베풀어주신 은혜도 감사하지만 그 정도가 아닙니다. 이웃을 도울 수 있게 축복해 달라고 하세요.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축복, 많은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지혜와 지식을 달라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도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 6:38) 여기 잘 보세요. “안겨 주리라” 품안에다 안전하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 있으니 가져 가라가 아닙니다. 품안에 안겨주십니다.

저는 처음에 선교한다고 후진국에 많이 다녔습니다. 그냥 불쌍합니다. 그런데 후진국만 여행을 해 가지고는 보이질 않습니다. 여행은 후진국과 동시에 선진국을 가봐야 합니다. 왜 그들이 잘 사는지를 배워야 합니다. 러시아는 국토가 너무 넓습니다. 시베리아에 얼마나 많은 자원이 땅속에 묻혀 있는지조차 확인이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렵게 삽니다. IMF로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아무리 많은 자원을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이 잘 살게 만들어 주시지 않으면 어려워집니다. 방글라데시는 국토의 절반이 물에 잠겨있습니다. 사람의 방법으로 고 땅을 고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잘 믿고 따르면 땅이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의 사람을 축복해 주시는 방법중의 하나가 땅이 복을 받는 것입니다. 제가 다녀본 동남아시아는 그 땅이 절대 유럽에 비해 뒤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유럽 땅을 보 잘 것이 없습니다. 겨울이 길고 춥습니다. 그런데 잘 삽니다. 스위스는 지형적으로 산이 많아 쓸모 없는 땅이지만 세계적인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동양도 그런 데가 있습니다. 네팔 히말리야산 밑은 스위스에 뒤지지 않습니다. 뭐가 다릅니까? 사람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사람만 있습니다. 충분히 복을 받을 수 있는 땅이 있는데도 축복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니까 단점도 장점으로 바뀝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것이 바뀝니다.
“17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딤후 6:17-18)

우리가 경건하게 사는 물질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맡기고 살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축복을 받은 자는 하나님을 위하여 삽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있다면 바로 그 하나님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으면 결국 그것을 사탄이 사용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딛 2:12),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 1:27)

우리는 보통 경건하면 조용히 가만히 있는 것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경건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경건은 하나님 앞에 열심히 사는 사람입니다. 나 잘사는 것뿐만이 아니라 남을 위해 사는 것, 그것이 경건입니다.
여러분은 자녀교육의 모토가 무엇입니까? 잘사는 사람으로 키운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다른 현대 사회가 다른 사람과 지나치게 경쟁하며 살다보니까 잘못하면 다 적이 됩니다. 우리가 잘 살려고 하는 것은, 우리가 공부해야 되는 것은 남을 돕기 위함입니다. 경건하게 살기 위함입니다. 내가 능력이 있어야 남을 도와 주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나의 부족한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배워서만 안 채워집니다. 하나님께서 채워 주셔야 합니다. 지식도, 지혜도 물질도 마찬가지입니다.

지혜 없는 자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마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마음이 없는 사람, 바로 그런 사람이 지혜가 없는 사람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에 마음이 없으면 우리 가정이 황폐해 집니다. 땅이 굳어버립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여세요. 나의 부족함을 하나님께 채워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축복해 주셔야 합니다. 우리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여기서 우리만 예수 잘 믿는 것이 아니라 남을 도울 수 있는 내가 되게 해 달라고 우리 교회가 되게 해 달라고 우리 기도합시다. 그것이 경건한 교회입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