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요 17:18)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꿈은 하나님의 거룩한 꿈입니다. 이 꿈을 꾸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돈이 없어도 일을 하고, 돈이 많아도 일을 합니다.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도 하고,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도 합니다. 어떤 방해가 있어도 하고, 어떤 방해가 없어도 합니다. 한국 땅에서도 하고 외국 땅에서도 합니다. 내가 있는 곳, 언제든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이 꿈과 사랑은 많은 물로도 막을 수 없고 불로도 태울 수 없습니다. 아무도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막을 수 없습니다. 부족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방법은 성공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망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요 17:18)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말로하면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내셨는지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너 하나님의 사람아!’ 성경에서 지금 막 튀어나온 사람처럼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역사상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인물들 역시 자기 자신이 먼저 올바르게 산 사람들입니다. 성공하기 전에 큰 장애물에 부딪쳤습니다. 장애물 없는 경기는 어쩌면 너무 시시한지 모릅니다. 진주가 아름다운 것은 고통을 이겨냈기 때문입니다.
존 밀턴은 44세에 시각장애인이 되었고 그로부터 16년 뒤 『실락원』이라는 작품을 남겼습니다. 파스퇴르는 반신불수 상태에서 질병에 대한 면역체를 개발했고, 베토벤은 청력을 상실 후에 5개의 교향곡을 포함하여 가장 위대한 곡들을 탄생시켰습니다. 무엇이든 지금부터 다시 시작하는 겁니다.
중국 사람들은 이런 전설을 듣고 자라납니다.
중국 태행산(太行山)과 왕옥산(王玉山) 사이의 좁은 땅에 살고 있던 90세의 우공(愚公)이라는 노인이 있었습니다. 평생 도를 닦으며 살았습니다. 어느 날 사신이 와서 물었습니다. 노인장 도를 깨우치셨습니까? 도는커녕 집 앞을 보니 사방 700 리에 높이가 만 길이나 되는 두 큰산이 집 앞뒤를 가로막고 있어 왕래가 어렵고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저 산부터 없애야겠다고 생각하고 가족들을 설득합니다. 우공은 힘을 모아 두 산을 깎아 없애고, 예주(豫州)와 한수(漢水) 남쪽까지 곧장 길을 내고 싶으니 함께 하자고 하였습니다. 드디어 가족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늙은 몸으로 그렇게 큰산을 깎아 없앨 수 없으며, 파낸 흙을 버릴 때도 없으니 불가능하다 하여 한사코 반대했습니다.
우공은 파낸 흙이야 아득히 멀리 떨어진 발해 바다에 갖다 버리기로 작정하고, 이튿날 아침부터 세 아들과 손자들을 데리고 돌을 깨고 흙을 파서 삼태기로 발해까지 갖다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한번 다녀오는데 1년이 걸리자 지수라는 사람이 ‘죽을 날이 멀지 않은 노인이 정말 망녕’ 이라며 비웃었습니다. 우공은 태연히 말하기를 “내가 죽으면 아들이 하고, 아들은 또 손자를 낳고 손자는 또 아들을…” 그렇게 자자손손(子子孫孫) 계속하면 언젠가는 저 두 산이 평평해질 날이 올 거라 했습니다. 깜짝 놀란 사신(蛇神)은 산이 없어지면 큰일이므로 옥황 상제(玉皇上帝-하나님)께 호소했습니다, 그러자 우공의 끈기에 감동한 하나님은 태행산은 삭동(朔東) 땅에, 왕옥산은 옹남(雍南) 땅에 옮겨 놓게 했습니다. 그래서 두 산이 있었던 기주(冀州)와 한수(漢水) 남쪽에는 현재 작은 언덕조차 없다고 전해 내려옵니다.
같은 상황을 놓고도 누가 이런 말을 만들었는지 대단합니다. 이것이 중국을 버텨오는 힘입니다. 만만디라는 사상도 여기서 나왔습니다. 단순히 느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일을 시작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종국에는 하나님이 도우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런 일의 증거를 보았습니다. 타이완에 가면 강개석 총통이 중국에서 나올 때 가지고 나온 보물들을 모아둔 타이완국립박물관이 있습니다. 여기서 자랑하는 최고의 국보는 무엇이냐 하면 차돌을 깍아 만든 공 입이다. 그냥 공이 아니라 공 속에 공이 7개 들어있습니다. 이것을 현재 컴퓨터로 계산하여 깍을 수 있나 과학자들이 연구했는데 불가능 하답니다. 대대손손 이어서 깍은 것입니다.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 17:20)
예수님은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산을 옮기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시작하는 겁니다. 무엇이든지 하는 겁니다. 성경에서 막 튀어 나온 사람처럼 사는 겁니다.
무엇을 해야 합니까?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고전 13: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 15:12) 사랑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사랑을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자식 없으니까 상팔자처럼 삽니다. 그런데 이런 분이 있습니다. 저하고 비슷한 나인데 이렇게 사시는 분도 있더군요.
엄마, 사랑합니다. – 출처 사랑밭 새벽편지 –
얼마 전 50을 넘긴 저는 남들이 흔히 말하는 싱글 파더입니다.
아들 녀석이 5살 되는 해 아내는 저희를 버리고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그 이후로 재혼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는데 하늘이 내게 내려준 인연이 더 이상 없었는지 지금까지 쭉 혼자서 아들을 길러 왔습니다.
어린 아들 녀석이 어디 가서 편부 가정이라는 티가 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고 자부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투박한 남자의 손으로 엄마의 빈자리를 대신하기는 힘들었나 봅니다.
아들이 사춘기 이후 왠지 저를 대하는 것이 서먹해졌고 저도 덩달아 이제는 다 컸다고 생각하고 소홀히 하게 되고 그러면서 멀어지고 사소한 일로 다투게 되고…
결국 아들이 군입대하는 날 마중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남자라면 누구나 다 겪는 일에 호들갑 떨 필요 없다고 생각하면서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군대 간 아들로부터 소포가 집으로 발송되었습니다. 입고 간 사복이 편지와 함께 돌아온 것입니다. 일부러 담담한 마음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면서 편지를 펼친 저는 놀랐습니다. 편지는 ‘사랑하는 엄마에게’로 시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담담해지자고 노력했지만 사람마음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니더군요. 아니 내가 이놈을 어떻게 길렀는데 아버지보다 우리를 남겨두고 떠난 엄마를 먼저 찾는 겁니까?
엄마 없이 자란 녀석의 마음이 오죽했을까 싶어 그냥 편지를 끝까지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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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엄마에게.
당신의 손은 거칠고 투박하지만 누구보다 부드럽게 저의 옷을 빨아 깨끗하게 해주시는 엄마의 손이 좋습니다.
깔끔한 솜씨의 정갈한 음식은 아니지만 다른 이들보다 몇 배는 더 저를 배부르게 하신 엄마의 음식이 좋습니다.
제가 아플 때마다 늘 저를 지켜봐 주시며 제 손을 꼭 잡아주시는 엄마의 관심이 좋습니다.
남들에게는 두 명의 사람에게 따로 엄마, 아빠를 부르게 하지만, 나에게는 듬직한 아빠이자 엄마인 나만의 엄마에게 언제나 말하고 싶었습니다.
엄마! 나에게 당신은 아빠지만, 당신은 나에게 따스함과 사랑으로 돌봐주신 소중한 엄마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나의 엄마. 당신을 사랑합니다.
사랑에 한계는 없습니다. 사랑이 산을 옮깁니다. 한 사람을 소중히 길러내는 일이야말로 산을 옮기는 것보다 대단한 겁니다. 성경에 막 튀어나온 사람은 사람을 사랑합니다. 사람을 귀히 여깁니다. 사람에게 빈부귀천이란 별것 아닙니다.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천하보다 귀한 영혼일 뿐입니다.
성경에서 지금 막 튀어나온 사람이라면 무엇을 가지고 나올 것 같습니까?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이 무엇입니까? 지금 막 성경에서 튀어나온 사람입니다. 천국은 이런 사람을 위해 예비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자 이제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본문에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를 부르시고 양육하신 목적은 세상에 보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신 주님은 승천하시면서 우리를 땅 끝까지 복음 전하는 증인으로(행 1:8), 그리고 모든 족속으로 제자 삼는(마 28:19) 사명자로 세상에 보내셨습니다(요 17:18) 그러므로 예수를 구주로 믿고 따르는 모든 성도들은 예수님의 명령을 지상 명령으로 받아서 복음 전하는 것을 우리의 사명으로 여기며 우리가 이를 인생의 목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경에서 지금 막 튀어나온 사람은 전도합니다. 아버지께 보냄을 받은 자로 살아갑니다. 전도가 안됩니까? 기도부터 시작하십시다. 산을 옮겨 봅시다.
복음 전하는 것이 왜 우리의 목적이 되어야 하며 지상 명령이 되어야 합니까?
첫째, 복음전도는 하나님의 자녀에게만 맡겨주신 것입니다. 복음 전하는 것은 하늘의 천군 천사에게 맡긴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따르는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중요한 심부름일수록 누가 합니까?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전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내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예수도 모르고 천국도 모른 채 사람들이 목자 잃은 양처럼 방황하며 죽어 가는 것을 보고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시며 울고 계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들이 전도를 통해 구원받으면 천하의 그 무엇을 얻은 것 보다 기뻐하실 것입니다.
셋째, 전도는 천국에 가면 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살아 있어도 전도 대상자가 죽으면 전도할 수 없고 반대로 내가 죽으면 그를 전도할 수 없기 때문에 전도는 지금 해야 할 지상 명령인 것입니다. 1871년 10월 8일 시카고 대 화재 때 무디 목사가 시무 하던 시카고 교회도 불에 탔습니다. 그 때 무기 목사는 시리즈 설교를 하고 있었는데 다음주에 구원에 대한 것을 하려고 미루어 두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교회에 화재가 난 것입니다. 무디 목사님은 그 때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지 못한 것을 회개하면서 그 이후로는 늘 결단의 신앙을 촉구하는 설교를 하셨습니다. 구원은 미룰 것이 아닙니다. 전도는 미룰 일이 아닙니다.
넷째, 전도는 영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하나님과 영원히 천국에서 복을 누리게 될 것이지만 누구든지 믿지 않으면 영원히 하나님께 버림받아 지옥에서 형벌 받기 때문에 전도는 지상명령인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이 세상에 때어날 때 세 가지 모습을 합니다. “울고, 잡고, 발버둥친다”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사람들이 일생동안 반복하며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살아감에는 슬퍼도, 기뻐도, 눈물이 있고 성취하려고 발버둥치고 소유욕에 붙잡으려고 합니다. 우리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정신 없이 이 땅에 태어난 것 같습니다.
이 모습을 나쁘게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마치 물고기가 방금 물 밖에 나왔을 때의 모습입니다.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 살아가며 나를 알고, 너를 알고, 우리를 알고 나의 삶을 인도해 주시는 주님을 알았을 때 비로소 나의 사명을 알고 정신을 차리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 성이 없는 형식은 죽은 것입니다. 생명이란 형식이 아닙니다. 삶이란 형식이 아닙니다. 방금 태어난 아이에게 무슨 형식이 존재하겠습니까? 그러나 생명이 있습니다. 뜨거움이 있습니다. 진실이 있습니다. 믿음이 있습니다. 사랑이 있습니다. 세상에 때묻지 않은 순수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실을 믿지 않는 것이 불신이라면, 사실 아닌 것을 사실처럼 믿는 것이 미신입니다. 따라서 참 사실을 참 사실대로 믿는 것이 참 신앙입니다. 세상에 살면서 내 입으로 참 말을 한다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 말은 오직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증거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증인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느 중년 성도가 대학 병원의 한 수술실에서 혀의 암 때문에 혀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마취주사를 손에든 의사가 잠시 머뭇거리며 “마지막으로 남길 말씀은 없습니까?”라고 했습니다. 나중에 글로 쓸 수는 있겠지만 혀를 사용하는 언어는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의사, 간호사, 견습 의사들… 둘러선 사람들의 표정과 분위기는 심각했고, 잠시 침묵과 긴장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저마다 만일 나라면, 만일 내게 한마디 언어만 남아 있다면 무엇을 말할 것인가? 누구의 이름을 부를 것인가? 생각해 봅니다.
드디어 입이 움직이고 두 줄기 눈물이 흐르더니 “주 예수여 감사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세요.”라고 되풀이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최후에도 할 말입니다.
예수께서 원하시는 말을 하며 ‘성경에서 지금 막 튀어나온 사람처럼’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