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en KCM 성경타자

샬롬!
여러분들의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에 능력이 있음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보면 볼수록 읽으면 읽을 수록 생명력이 있습니다.

이곳에 읽으며 마음에 새기며 타자할 때도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함께 하심이 있기를 바랍니다.

좋은 시간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영제 목사 드림

KCM 성경타자의 특징

① 타자입력화면

성경구절을 따라 타자 합니다. 타자 즉시 단어 철자의 오타을 체크하여 보여줍니다. 매절마다 타자속도의 정보를 보여줍니다.

② 타자랭킹

개인별 및 최초로 교회별 타자 순위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교회별에서는 각 교회별로 타자한 회원의 정보가 나타납니다.

③ 명예의 전당, 나의 타자

단 한절만 입력하여도 모든 정보를 기록 관리합니다. 여러분들의 성경타자 데이터를 모두 기록하여 보존합니다.

2010년 9월 1일 새로운 성경타자 서비스가 시작됩니다.

OPEN KCM 성경타자

용서(1)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7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사 55:6-8)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현대인들은 굉장히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머리가 대단히 좋습니다. 아마 우리 다음세대가 더 머리 좋을 겁니다. 그런데 이 좋은 머리를 이렇게 활용합니다. 죄의 문제를 가급적이면 최소화시켜 보려고 합니다. 우선 현대인들은 죄에 관한 이야기를 굉장히 듣기 싫어합니다. 아마 오늘 설교 듣다가 굉장히 뒤틀려 가지고 듣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목사님 먼저 번처럼 축복설교 해 주세요? 그렇게 말씀하실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들어야 됩니다. 몸에 좋은 것은 대부분 쓴 약입니다. 우리 죄의 문제를 덥고 얼렁뚱땅 넘어 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 주앙교회는 비교적 죄의 문제를 솔직하게 많이 이야기하는 편인데도 여러분들이 떠나지 않는 것은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현대인들은 먼저 죄의 문제를 표현부터 바꿔 보려고 노력들을 합니다. 한마디로 죄의 문제가 직접적으로 나의 문제이고 내가 회개할 일이라고 가르치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남에게 문제를 돌리고 다른 어떤 이유 때문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식의 변명을 하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약점이라는 말로 바꾼다든지 아니면 정신적인 불안증세 등으로 바꾼다든지 여러분 여러 가지 표현들이 있습니다. 그 표현을 바꾸어 가급적이면 죄라는 말을 듣고 말하지 않고 피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죄를 범하는 어떤 요인이 나타날 때에는 내가 쉽게 그 책임을 벗을 수 있는 제 3자에게 다 떠 맡기려하는 강한 집착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저 사람 저렇게 남을 미워하고 그야말로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뇌에 종양이 있어서 그러는 지도 모르니까 병원에 가서 세밀하게 뇌파 검사를 받아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정말 병원에 가서 뇌파 검사를 받았더니 미국에서 말입니다. 사랑해야하고 남을 관용해야 하는 뇌 세포를 종양이 꽉 누르고 있어서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할 수 없었다는 어떤 의학적인 발표가 난 예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종양을 떼어 냈더니 그 다음부터 너그러워지고 좋아지더라 그러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죄! 죄!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나빠서가 아니라 신체 안에 어떤 결함이 있어서 그러니까 그 결함을 찾아내면 된다 하는 식으로 빠져나갑니다.
또 이 사람이 자란 배경을 조사해보니까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으니까? 고아원에서 자랐으니까? 아니면 아주 어렸을 때에 어떤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나쁜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해서 자꾸 과거를 추적을 합니다.
그래서 무엇하나를 발견하면 “당신이 이와 같이 나쁜 짓을 한 것은 당신이 악해서가 아니고 당신이 자란 과거가 이래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당신 너무 과히 염려하지 말고 모든 책임은 과거에 있으니까 거기에다 책임을 떠맡기고 마음의 평안을 얻으십시오.” 이렇게 말합니다. 이게 오늘 현대인들이 죄를 처리하는 방법입니다.
미국에서 정신과 하시는 분의 이야기입니다. 상담 클리닉을 만들어 놓고, 부부가 너무 싸우니까 “당신들이 이렇게 싸우는 이유는 마음 속에 스트레스가 쌓여 가지고 그것을 풀 길이 없기 때문에 지금까지 싸우는 것이요. 그러니까 내가 풀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줄 테니까 그대로 하시오.” 하고 옆에 빈방으로 데리고 가서는 의자를 하나 가운데 놓고 그 위에 이름 같은 것 하나를 얹어 놓습니다. “자, 지금 이것이 당신 남편이오. 지금부터 내가 야구 방망이 하나 줄 테니 실컷 두들겨 패시오.” 일본 사람도 언제 보니까 폐차장에서 야구방망이 하나주고 마음대로 두들기고 패고, 깨뜨려서 스트레스 받은 마음을 다 풀라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정말 해결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실컷 두들깁니다. 그리고 나와서는 “정말 이제 후련합니다.” 그리고 또 쌓이면 또 가서 그렇게 하고 갑니다. 자꾸만 원인을 제 3의 어떤 책임져야할 대상이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은 거기서부터 벗어나려고 합니다. 이것이 현대인 모습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절대로 그런 방법으로 우리를 죄인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만약에 우리의 죄를 책임져야할 제 3의 어떤 대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계속 죄를 회개하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면 하나님처럼 바보스러운 존재가 없습니다.
제 3의 구실을 하나님이 모르고 계신다는 이야기니까 심리학자만도 못하고, 정신분석학자만도 못하고 카운슬러보다도 못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죄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제 맘대로 산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의 모습은 솔직히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생각이 악한 것뿐입니다. 내가 죄인인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살았기 때문입니다. 무슨 결손가정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고아원에서 자랐기 때문이 아닙니다. 회개하고 지금부터 하나님 앞에서 바로 살면 됩니다. 남에게 제3자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지 맙시다. 솔직하게 하나님께 “내가 죄인입니다” 고백하시기를 바랍니다.
알랭이라는 철학자는
“진정 우리가 미워해야 할 사람이 이 세상에 흔한 것은 아니다.
원수는 맞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작 내 마음속에 있을 더 많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스탈린(1879.12.21-1953. 3. 5)은 정교회 티플리스 신학교 신학생이었습니다. 목사가 되려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성경을 버리고 카를 마르크스, 플레하노프, 블라디미르 레닌 등의 책을 보고 공산주의를 선택했습니다. 소련 공산당 최고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히틀러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인 살인마 일뿐입니다. 그가 그렇게 된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그의 어린 시절 아버지가 강제로 구두공장에 취직시켜 돈을 벌게 하고, 술을 먹고 때렸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렵게 살았다고 다 스탈린처럼 됩니까? 제가 러시아 가보니까 남자들 절반이 위스키에 찌들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스탈린 아버지뿐 아닙니다. 저도 신문돌리면서 자랐습니다. 우리 어머님이 초등학교 5학년 때 도로 닦는 노동을 시켰습니다. 우리 아버님은 다리를 저시면서 술로 세월을 보내셨습니다. 여러분! 그렇다고 사람을 마구 죽입니까? 자기의 욕심을 채우려고, 자기의 야심을 채우고 남을 마구 죽이는 것이 합리화 될 수 있습니까?

본문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 살아야 됩니다. 스탈린에게도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살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용서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또한 용서하면 삽니다. 그러나 스탈린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용서하지를 못했습니다.

대한민국 사람이면 차범근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는 축구 인입니다. 그러나 축구인 이상이었습니다.
독일에서 뛸 때 팬들이 그를 ‘차붐(Cha Bum)’이라 불렀습니다. 차붐은 한 번도 유럽의 정상에 오르지 못한 두 팀, 프랑크푸르트와 레버쿠젠을 유럽의 정상에 올려놓았습니다. 독일에서 선수생활을 하는 동안 그는 세 경기 당 한 골을 넣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그 골들 가운데 단 하나의 패널티킥 골도 없었다는 점이고, 그가 뛴 그 수많은 경기에서 그가 받은 경고는 단 한 장이 전부였습니다. 그는 그라운드의 모범생이었습니다.
1980년 독일생활 2년째를 맞은 차붐은 상대팀 수비수의 고의적인 반칙으로 척추에 금이 가는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실려 갔습니다. 선수생활을 마감해야 할지도 모를 위기가 닥친 것이었습니다. 프랑크푸르트는 이런 여론을 바탕으로 형사고발을 추진하였습니다. 그러나 차붐은 분명한 어조로 말하였습니다. “고소는 없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는 그를 용서한다.”고 했습니다.

작은 것부터 용서해야 합니다. 어떤 분은 이메일 보내는 것도 용서가 잘 안 되는 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원하지 않는 매일 보냈으니 짜증도 나겠지요? 그러나 좀 너그럽게 용서하면 됩니다. 정 받기 싫으면 요즘은 수신거부로 안보면 됩니다.
저도 미션매거진을 보내면서 욕도 많이 먹습니다. 그리고 [수신거부]라는 돌아온 매일 보면서 가슴이 아픕니다. 그러나 저에게 이런 매일을 보낸 분들 때문에 힘을 얻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노르웨이순복음교회 담임 이종욱 목사입니다.
매번 마다 기사를 읽으면서 감탄을 합니다. 이번 호에서도 네팔 과 두샨베 침례소식… 감사합니다.

미션매거진 271호에 실린 내용입니다.
두샨베는 타지키스탄의 수도입니다. 이곳에서 선교하시는 선교사님이 침례를 줘야 하는데 도시근처에서는 핍박이 너무 심해 침례를 줄 수가 없어 인적이 드문 3000m 높이에 있는 호수에서 침례를 베풀게 되었습니다. 산에는 눈이 쌓여 있고, 나무그늘아래 잔디밭에 앉아서 침례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꼭 천국의 한 부분 같았습니다. 그런데 세례를 주려고 물 속에 들어간 순간 물이 너무 차가워서 참고 그래도 침례를 주는데 3명까지는 참으면서 했는데 그 다음부터는 도저히 물 속에 있기 어려웠습니다.
물 밖으로 나온 선교사 다시는 물 속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핍박을 받더라도 밤에 도시근처에 가서 침례를 주자고 지교회 지도자에게 말하니 좋다고 합니다. 이제 밤에 도시근처에서 침례를 주려고 결정을 한 후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 성도들을 바라보니, 성도들은 기대와 흥분으로 자기 차례를 기다리며 선교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제 저들에게 이곳은 물이 너무 차가워서 침례를 줄 수 없다고 말하려고 하는데 선교사의 마음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죽더라도 이곳에서 침례를 주라는 것입니다.
죽더라도 침례를 주다가 죽자 라는 마음의 결정을 하고 다시 물 속에 들어갈 용기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30명을 다 침례를 줄 때까지 물이 따뜻해지는 겁니다. 그래서 30명에게 모두 세례를 베풀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네팔 선교사님은 라면 끓여먹다 울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네팔 사람들을 보면서 울었습니다. 우상에게 절하는 사람보고 울었습니다. 왜 그렇게 장애인이 많은지 그들을 그냥 모내면서 마음 아파 울었습니다.
저도 회개할 때 빼고 한번 더 이렇게 눈물을 흘린 적이 있습니다. 베트남에 같을 때 선교사님과 찬송을 부르는데 지금처럼 한인교회도 없을 때입니다. 골방에 몰래 숨어서 남에게 들리지 않게 작은 소리로 부르는데 왜 그렇게 눈물이 나던지요? 그리고 공항에서 혼자 비행기 타고 나오는데 마치 적진에 동료를 두고 혼자 살겠다고 나오는 사람 같아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번 화요일에 발행될 소식(272호)에는 네팔 썩띠쌀리교회 어누라는 16세 주일학교 여학생이 여름성경학교에 나오다 물에 빠져 떠내려갔습니다. 가슴아픈 일입니다. 그러나 어누의 죽음으로 그 가족이 예수를 영접했다는 소식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리스 마라톤에서 기원전 490년에 페르시아(이란)군과 아테네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아테네 군이 이겼습니다. 이 승리의 소식을 아테네에 전하기 위해서 페이디피데스는 이틀동안 약 200km을 뛰어가 전하고 죽었습니다. 페이디피데스는 이 이야기대로라면 행복한 사람입니다. 기쁨을 전하고 죽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페이디피데스보다 더 행복한 사람입니다. 더 큰 기쁨의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셨다는 소식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셨다고 선포하는 것, 그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용서하면서 살아야 된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 그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본문 2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죄에서 해방 받기 위해서는 예수 안에 있어야 합니다. 예수의 생명이 내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이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여러분! 오늘 잘 오셨습니다. 너무너무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것, 예수 믿기만 하면 됩니다. 이 큰 축복을 거절하지 마세요. 놓치면 정말 어리석은 분입니다. 기회는 또 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바로 이 시간입니다.
본문에 “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7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사 55:6-7)

내가 다른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돌로 쳤기 때문에 죄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나를 보고 죄인이라고 하시기 때문에 내가 죄인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이라고 하셨다면 죄인 맡습니다. 하나님께 대항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분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입니다. 모르는 것이 없는 분입니다. 못하실 것이 없는 분입니다.

내가 죄인인 것은 하나님을 반역한 것입니다. 사탄의 수하에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보다는 사탄의 소리를 들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사탄은 세상을 다 줄 테니 나에게 오라고 손짓합니다. 그러나 세상을 다 주지도 않지만 혹 준다한들 무슨 소용입니까? 하나님은 이 세상을 버려 두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롬 1:24) 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잘되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뿐이며 그 결과는 멸망입니다.

용서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무슨 재주로 하나님께 가서 용서받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기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분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피 한 방울, 한 방울을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흘리신 것입니다. 그 핏방울은 내 죄를 덮어주고, 씻어주고, 가리워주는 피입니다. 그 예수님께 여러분!, 마음의 문을 여시고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나의 죄를 회개합니다. 용서해 주옵소서. 예수님 믿습니다.”하는 뜨거운 마음이 여러분 가슴에 일어나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과거를 묻지 아니하십니다. 여러분을 탓하지 아니하십니다. 그렇게만 하시면 영원토록 의인으로 인정해 주시고 영원한 영생을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 축복을 거절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성경에서 막 튀어나온 사람처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요 17:18)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꿈은 하나님의 거룩한 꿈입니다. 이 꿈을 꾸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돈이 없어도 일을 하고, 돈이 많아도 일을 합니다.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도 하고,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도 합니다. 어떤 방해가 있어도 하고, 어떤 방해가 없어도 합니다. 한국 땅에서도 하고 외국 땅에서도 합니다. 내가 있는 곳, 언제든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이 꿈과 사랑은 많은 물로도 막을 수 없고 불로도 태울 수 없습니다. 아무도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막을 수 없습니다. 부족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방법은 성공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망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요 17:18)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말로하면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내셨는지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너 하나님의 사람아!’ 성경에서 지금 막 튀어나온 사람처럼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역사상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인물들 역시 자기 자신이 먼저 올바르게 산 사람들입니다. 성공하기 전에 큰 장애물에 부딪쳤습니다. 장애물 없는 경기는 어쩌면 너무 시시한지 모릅니다. 진주가 아름다운 것은 고통을 이겨냈기 때문입니다.
존 밀턴은 44세에 시각장애인이 되었고 그로부터 16년 뒤 『실락원』이라는 작품을 남겼습니다. 파스퇴르는 반신불수 상태에서 질병에 대한 면역체를 개발했고, 베토벤은 청력을 상실 후에 5개의 교향곡을 포함하여 가장 위대한 곡들을 탄생시켰습니다. 무엇이든 지금부터 다시 시작하는 겁니다.

중국 사람들은 이런 전설을 듣고 자라납니다.
중국 태행산(太行山)과 왕옥산(王玉山) 사이의 좁은 땅에 살고 있던 90세의 우공(愚公)이라는 노인이 있었습니다. 평생 도를 닦으며 살았습니다. 어느 날 사신이 와서 물었습니다. 노인장 도를 깨우치셨습니까? 도는커녕 집 앞을 보니 사방 700 리에 높이가 만 길이나 되는 두 큰산이 집 앞뒤를 가로막고 있어 왕래가 어렵고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저 산부터 없애야겠다고 생각하고 가족들을 설득합니다. 우공은 힘을 모아 두 산을 깎아 없애고, 예주(豫州)와 한수(漢水) 남쪽까지 곧장 길을 내고 싶으니 함께 하자고 하였습니다. 드디어 가족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늙은 몸으로 그렇게 큰산을 깎아 없앨 수 없으며, 파낸 흙을 버릴 때도 없으니 불가능하다 하여 한사코 반대했습니다.
우공은 파낸 흙이야 아득히 멀리 떨어진 발해 바다에 갖다 버리기로 작정하고, 이튿날 아침부터 세 아들과 손자들을 데리고 돌을 깨고 흙을 파서 삼태기로 발해까지 갖다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한번 다녀오는데 1년이 걸리자 지수라는 사람이 ‘죽을 날이 멀지 않은 노인이 정말 망녕’ 이라며 비웃었습니다. 우공은 태연히 말하기를 “내가 죽으면 아들이 하고, 아들은 또 손자를 낳고 손자는 또 아들을…” 그렇게 자자손손(子子孫孫) 계속하면 언젠가는 저 두 산이 평평해질 날이 올 거라 했습니다. 깜짝 놀란 사신(蛇神)은 산이 없어지면 큰일이므로 옥황 상제(玉皇上帝-하나님)께 호소했습니다, 그러자 우공의 끈기에 감동한 하나님은 태행산은 삭동(朔東) 땅에, 왕옥산은 옹남(雍南) 땅에 옮겨 놓게 했습니다. 그래서 두 산이 있었던 기주(冀州)와 한수(漢水) 남쪽에는 현재 작은 언덕조차 없다고 전해 내려옵니다.

같은 상황을 놓고도 누가 이런 말을 만들었는지 대단합니다. 이것이 중국을 버텨오는 힘입니다. 만만디라는 사상도 여기서 나왔습니다. 단순히 느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일을 시작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종국에는 하나님이 도우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런 일의 증거를 보았습니다. 타이완에 가면 강개석 총통이 중국에서 나올 때 가지고 나온 보물들을 모아둔 타이완국립박물관이 있습니다. 여기서 자랑하는 최고의 국보는 무엇이냐 하면 차돌을 깍아 만든 공 입이다. 그냥 공이 아니라 공 속에 공이 7개 들어있습니다. 이것을 현재 컴퓨터로 계산하여 깍을 수 있나 과학자들이 연구했는데 불가능 하답니다. 대대손손 이어서 깍은 것입니다.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 17:20)
예수님은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산을 옮기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시작하는 겁니다. 무엇이든지 하는 겁니다. 성경에서 막 튀어 나온 사람처럼 사는 겁니다.

무엇을 해야 합니까?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고전 13: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 15:12) 사랑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사랑을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자식 없으니까 상팔자처럼 삽니다. 그런데 이런 분이 있습니다. 저하고 비슷한 나인데 이렇게 사시는 분도 있더군요.

엄마, 사랑합니다. – 출처 사랑밭 새벽편지 –
얼마 전 50을 넘긴 저는 남들이 흔히 말하는 싱글 파더입니다.
아들 녀석이 5살 되는 해 아내는 저희를 버리고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그 이후로 재혼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는데 하늘이 내게 내려준 인연이 더 이상 없었는지 지금까지 쭉 혼자서 아들을 길러 왔습니다.
어린 아들 녀석이 어디 가서 편부 가정이라는 티가 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고 자부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투박한 남자의 손으로 엄마의 빈자리를 대신하기는 힘들었나 봅니다.
아들이 사춘기 이후 왠지 저를 대하는 것이 서먹해졌고 저도 덩달아 이제는 다 컸다고 생각하고 소홀히 하게 되고 그러면서 멀어지고 사소한 일로 다투게 되고…
결국 아들이 군입대하는 날 마중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남자라면 누구나 다 겪는 일에 호들갑 떨 필요 없다고 생각하면서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군대 간 아들로부터 소포가 집으로 발송되었습니다. 입고 간 사복이 편지와 함께 돌아온 것입니다. 일부러 담담한 마음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면서 편지를 펼친 저는 놀랐습니다. 편지는 ‘사랑하는 엄마에게’로 시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담담해지자고 노력했지만 사람마음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니더군요. 아니 내가 이놈을 어떻게 길렀는데 아버지보다 우리를 남겨두고 떠난 엄마를 먼저 찾는 겁니까?
엄마 없이 자란 녀석의 마음이 오죽했을까 싶어 그냥 편지를 끝까지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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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엄마에게.

당신의 손은 거칠고 투박하지만 누구보다 부드럽게 저의 옷을 빨아 깨끗하게 해주시는 엄마의 손이 좋습니다.
깔끔한 솜씨의 정갈한 음식은 아니지만 다른 이들보다 몇 배는 더 저를 배부르게 하신 엄마의 음식이 좋습니다.
제가 아플 때마다 늘 저를 지켜봐 주시며 제 손을 꼭 잡아주시는 엄마의 관심이 좋습니다.
남들에게는 두 명의 사람에게 따로 엄마, 아빠를 부르게 하지만, 나에게는 듬직한 아빠이자 엄마인 나만의 엄마에게 언제나 말하고 싶었습니다.
엄마! 나에게 당신은 아빠지만, 당신은 나에게 따스함과 사랑으로 돌봐주신 소중한 엄마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나의 엄마. 당신을 사랑합니다.

사랑에 한계는 없습니다. 사랑이 산을 옮깁니다. 한 사람을 소중히 길러내는 일이야말로 산을 옮기는 것보다 대단한 겁니다. 성경에 막 튀어나온 사람은 사람을 사랑합니다. 사람을 귀히 여깁니다. 사람에게 빈부귀천이란 별것 아닙니다.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천하보다 귀한 영혼일 뿐입니다.

성경에서 지금 막 튀어나온 사람이라면 무엇을 가지고 나올 것 같습니까?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이 무엇입니까? 지금 막 성경에서 튀어나온 사람입니다. 천국은 이런 사람을 위해 예비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자 이제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본문에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를 부르시고 양육하신 목적은 세상에 보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신 주님은 승천하시면서 우리를 땅 끝까지 복음 전하는 증인으로(행 1:8), 그리고 모든 족속으로 제자 삼는(마 28:19) 사명자로 세상에 보내셨습니다(요 17:18) 그러므로 예수를 구주로 믿고 따르는 모든 성도들은 예수님의 명령을 지상 명령으로 받아서 복음 전하는 것을 우리의 사명으로 여기며 우리가 이를 인생의 목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경에서 지금 막 튀어나온 사람은 전도합니다. 아버지께 보냄을 받은 자로 살아갑니다. 전도가 안됩니까? 기도부터 시작하십시다. 산을 옮겨 봅시다.

복음 전하는 것이 왜 우리의 목적이 되어야 하며 지상 명령이 되어야 합니까?
첫째, 복음전도는 하나님의 자녀에게만 맡겨주신 것입니다. 복음 전하는 것은 하늘의 천군 천사에게 맡긴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따르는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중요한 심부름일수록 누가 합니까?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전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내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예수도 모르고 천국도 모른 채 사람들이 목자 잃은 양처럼 방황하며 죽어 가는 것을 보고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시며 울고 계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들이 전도를 통해 구원받으면 천하의 그 무엇을 얻은 것 보다 기뻐하실 것입니다.

셋째, 전도는 천국에 가면 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살아 있어도 전도 대상자가 죽으면 전도할 수 없고 반대로 내가 죽으면 그를 전도할 수 없기 때문에 전도는 지금 해야 할 지상 명령인 것입니다. 1871년 10월 8일 시카고 대 화재 때 무디 목사가 시무 하던 시카고 교회도 불에 탔습니다. 그 때 무기 목사는 시리즈 설교를 하고 있었는데 다음주에 구원에 대한 것을 하려고 미루어 두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교회에 화재가 난 것입니다. 무디 목사님은 그 때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지 못한 것을 회개하면서 그 이후로는 늘 결단의 신앙을 촉구하는 설교를 하셨습니다. 구원은 미룰 것이 아닙니다. 전도는 미룰 일이 아닙니다.

넷째, 전도는 영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하나님과 영원히 천국에서 복을 누리게 될 것이지만 누구든지 믿지 않으면 영원히 하나님께 버림받아 지옥에서 형벌 받기 때문에 전도는 지상명령인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이 세상에 때어날 때 세 가지 모습을 합니다. “울고, 잡고, 발버둥친다”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사람들이 일생동안 반복하며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살아감에는 슬퍼도, 기뻐도, 눈물이 있고 성취하려고 발버둥치고 소유욕에 붙잡으려고 합니다. 우리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정신 없이 이 땅에 태어난 것 같습니다.
이 모습을 나쁘게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마치 물고기가 방금 물 밖에 나왔을 때의 모습입니다.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 살아가며 나를 알고, 너를 알고, 우리를 알고 나의 삶을 인도해 주시는 주님을 알았을 때 비로소 나의 사명을 알고 정신을 차리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 성이 없는 형식은 죽은 것입니다. 생명이란 형식이 아닙니다. 삶이란 형식이 아닙니다. 방금 태어난 아이에게 무슨 형식이 존재하겠습니까? 그러나 생명이 있습니다. 뜨거움이 있습니다. 진실이 있습니다. 믿음이 있습니다. 사랑이 있습니다. 세상에 때묻지 않은 순수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실을 믿지 않는 것이 불신이라면, 사실 아닌 것을 사실처럼 믿는 것이 미신입니다. 따라서 참 사실을 참 사실대로 믿는 것이 참 신앙입니다. 세상에 살면서 내 입으로 참 말을 한다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 말은 오직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증거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증인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느 중년 성도가 대학 병원의 한 수술실에서 혀의 암 때문에 혀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마취주사를 손에든 의사가 잠시 머뭇거리며 “마지막으로 남길 말씀은 없습니까?”라고 했습니다. 나중에 글로 쓸 수는 있겠지만 혀를 사용하는 언어는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의사, 간호사, 견습 의사들… 둘러선 사람들의 표정과 분위기는 심각했고, 잠시 침묵과 긴장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저마다 만일 나라면, 만일 내게 한마디 언어만 남아 있다면 무엇을 말할 것인가? 누구의 이름을 부를 것인가? 생각해 봅니다.
드디어 입이 움직이고 두 줄기 눈물이 흐르더니 “주 예수여 감사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세요.”라고 되풀이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최후에도 할 말입니다.
예수께서 원하시는 말을 하며 ‘성경에서 지금 막 튀어나온 사람처럼’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딤전 6:11-12)

바울은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너 하나님의 사람아’라고 부릅니다. 디모데는 에베소교회 목회자이며, 바울의 동역자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사역적 호칭이 아닌 존재론적 호칭으로 부릅니다. 기능적 호칭이 아닌 인격적 호칭으로 부릅니다. 오늘날 우리는 사역과 기능만을 강조할 수 있습니다. 또한 사람들은 그런 부름을 은근히 좋아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목사보다 박사라는 말을 더 듣기 좋아하는 사람이 간혹 있습니다. 선교사, 목사라는 말도 사실 다르지 않습니다. 이것도 직분과 직책의 부름입니다. 존재론적 부름이 아닙니다. 디모데도 에베소교회 목회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은 동역자나 목회자나 선교사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는 복음으로 낳았다고 했는데 디모데도 바울이 복음으로 낳은 아들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내 아들아!’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디모데에게 사역자 이상의 존재가 되라는 충고입니다. 유능한 사역의 기술자보다 먼저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사역이 먼저가 아니라 인물이 먼저입니다. 먼저 인물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축복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축복을 받아야 합니까? 하나님의 사람이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 안되면 다 소용없습니다.
조금 잘 사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이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인생은 어느 날 덧없이 가는 것입니다. 지나가는 화살 같은 것입니다. 들의 꽃이 얼마나 빨리 집니까? 들의 꽃과 같은 존재입니다. 뭐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육신의 인간은 별것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사나 죽으나 다 같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인생에서 하나님을 빼면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없다면 그 말이 맡습니다.
제가 병원가서 머리 촬영 한적 있지 않습니까? 저는 무서운 공포영화 잘 못 봅니다. 치과에 갈 때도 우리 집사람 손잡고 가야합니다. 그런데 머리 촬영한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MRI 레이저 광선으로 찍으니까 내가 아닙니다. 그 머리, 얼굴 모양이 아니라 제가 끔찍하게 여기던 그 해골 모습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게 나입니다. 가장 혐오스러운 모습 해골이 나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싸매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해골에 불과합니다.
“14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15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시 103:14-15)

우리가 포장할 것은 세상의 것이 아닙니다. 더 추해질 뿐입니다. 회칠한 무덤이 됩니다. 사람들은 멋지게 보이려고 회칠을 했지만 추하게 보여질 뿐입니다. 자연이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의 것이 아름답습니다. 사람에게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하루평균 자살 시도를 960명이 한답니다. 이중에 35명이 사망한답니다. 2008년 자살사망자는 12,858명으로 전년 대비 5.6%나 늘어났고 이는 하루 평균 35.1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셈입니다. 10년 전인 1998년 자살자 8천622명과 비교하면 49%나 늘어난 수치입니다. 한국자살예방협회의 기준에 따르면 연예인이나 사회 유명인이 자살해 보도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질 경우 후속 자살율이 14.3배 증가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자살 안 합니다. 못합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좀 어려우면 죽지 뭐 하러 사냐고 합니다. 이길 힘과 능력을 상실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할 수 있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두들겨 보라. 또 두들겨 보라, 열릴 것이다. 또 찾아 보라. 그러면 찾게될 것이다. 너희는 나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비전을 주십니다. 고난은 오히려 우리에게 더 나은 사람을 만든다고 하십니다. 고난을 통해서 겸손을 배웁니다. 진리를 깨닫습니다. 남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 만들어집니다. 고난 없이는 진주가 나오지 않습니다.

아무 잘못도 없는 것처럼 보였던 욥에게 고난이 찾아옵니다. 왜 이런 고난이 찾아왔는지 우리는 알지만 욥은 알 수 없었습니다. 사탄은 친구들을 보내 네가 무슨 하나님께 범죄한 것이 있으니까 이런 고난이 찾아 왔겠지 아무 이유도 없이 고난이 오겠느냐고 합니다. 분명히 잘난 채 하며 살았지만 숨어서 죄지은 것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사탄의 참소 와 침탈로 절망의 심연을 배회하며 눈먼 사자처럼 포효하는 슬픈 사람 욥을 향하여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1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3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욥 38:1-3)

욥은 나름대로 교만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폭풍우 가운데 천둥소리가운데 말씀하셨지만 욥은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욥 40:4) 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낮추는 것하고, 하나님 없이 낮추는 것 하고는 다릅니다. 사람들이 혼동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무소유도 가치가 있는 것이며, 많이 가진 것도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없이는 다 소용 없습니다. 가진들, 갖지 못한들 다 마찬가지입니다.

“9 네가 하나님처럼 능력이 있느냐 하나님처럼 천둥 소리를 내겠느냐
10 너는 위엄과 존귀로 단장하며 영광과 영화를 입을지니라
11 너의 넘치는 노를 비우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모두 낮추되”(욥 40:9-11)

하나님은 욥의 피 흘리는 영혼을 어루만지시며 위엄(Majesty)과 존귀(Honor)와 영광(Glory)과 영화(Splendor)를 그의 상처 난 인격을 어루만져 주시고 다시 옷 입혀 주셨습니다. 우리는 욥이 고난 후에 물질 축복과 이생의 축복을 더 받은 것만 이야기하는데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욥이 달라졌습니다. 더 겸손해 진 것입니다. 없는 자를 이해하였고 고통을 당하는 자를 알게 되었습니다. 고통 속에서 사람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매우 큰 고통을 당했지만 그에 못지 않은 소중한 가치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다 귀한 것입니다. 쓸데없는 것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그것이 고통과 고난과 어려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밖에서는 그냥 고통일 뿐입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링컨은 “하나님이 사람과 같은 존재를 하루살이로 만들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 사람은 영원히 존재하도록 지어졌다”고 했습니다.

본문에 “너 하나님의 사람아!” 부를 때 앞에 한 단어가 더 나옵니다. “오직(알라)”입니다. 알라는 유일한 것입니다. 하나를 말합니다. 그래서 이 말이 이슬람에서는 신을 가리킵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기독교와 이슬람이 똑같이 하나님이라는 말로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약간 다르게 부릅니다. 기독교에서는 ‘알라’ 이슬람에서는 ‘아울라’라고 합니다. 그래서 충돌을 피할 수 있었는데 말레이시아에는 발음이 같아 이슬람에서 기독교가 이것을 사용하는 것을 문제삼고 핍박을 합니다.
중국에서 하나님이라는 말로 제일 많이 사용하는 말은 ‘쌍띠’입니다. 이 단어는 사실 제우스와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로스 선교사는 중국에서 활동한 선교사 였는데 그곳에서 한약장수였던 이응찬을 만납니다. 그리고 처음 조선말(한글)로 번역된 성경,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번역합니다. 1885년 『예수성교젼서』에 신약성경을 완성합니다. 이 성경에 처음으로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이 있습니다. 이 때는 한글에 띄어쓰기가 없었습니다. 모든 단어가 다 붙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주, 예수)라는 말이 나오면 앞에 한 칸씩 띄어썼습니다.
이것을 대두법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대두법은 옛날에 최고의 경의를 표해야 하는 왕에게만 적용하던 것입니다. 로스선교사가 한 것이 아니라 조선인 이응찬이 한 것입니다. 로스 선교사에게 이것을 말했을 때 로스는 조선의 이 문화를 수용한 것입니다. 당연히 하나님께는 왕을 능가하는 경의를 표기를 했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유일하다는 뜻도 되지만 하나님만 믿는 사람, 하나님만이 제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만을 경외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제일입니다. 이 존재론적인 것을 알면 다 안 것입니다. 나의 존재가 확인되어야 어떻게 살 것인지를 결정하게 됩니다. 사명은 어디서 나오는 것이냐 하면 바로 존재에서 나옵니다. 이단에게 넘어가고 사탄에게 넘어가는 것은 자기 존재를 모르는 겁니다. 50년 전에 러시아의 한 여인이 69명의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것이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한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 대단한 것입니다.

중국 춘추 시대에 개자추(介子推)라는 사람이 살았습니다. 진(晉)나라 문공(文公)과 함께 19년 동안 함께 숨어살았습니다. 문공이 망명을 갈 때 문공을 살리기 위해 사냥하여 잡은 고기라고 속이고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탕을 끌여 주었습니다. 문공은 나중에 개자추의 허벅지 살임을 알고 눈물을 한없이 흘렸습니다. 19년의 망명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여 문공이 왕이 된 후 개자추는 산 속에 들어가 숨어살았습니다. 벼슬자리를 주려고 별 공을 다 들여도 개자추를 데려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개자추는 오지 않고 산 속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문공은 산에다 불을 지르면 개자추가 나오겠지 하고 온 산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리나 개자추는 나오지 않았고 어머니와 불타 죽었습니다. 이것이 한식의 유래입니다. 산 사람들이 더운밥을 먹기 미안하여 찬밥을 먹는 풍습이 생겼습니다. 인물은 인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알았습니다. 개자추만도 못한 충성과 사랑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의 존재가 하나님의 사람이 확인되는 순간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됩니다. 한 때 서구에서는 모라비안들을 다 죽이려고 했습니다. 모라비안들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들의 존재감이 얼마나 확실히 나타나느냐, 그들의 선교형태에서 잘 나타납니다. 심지어는 선교하고 전도하기 위해서 자청하여 노예 선을 타기도 했습니다. 이 행렬이 줄을 서서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노예 선은 평생 바다에서 노 젖다가 죽는 겁니다. 그런데 왜 노예 선을 타느냐 그곳에 있는 사람들 전도하려고 탑니다. 이런 모라비안의 열심을 보고 [3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찬송시를 쓴 존 뉴톤(J. Newton 1779년)을 회개하게 만듭니다. 뉴톤은 노예상이었습니다. 인신매매 범입니다. 모라비안을 살린 것은 진젠도르프였습니다. 자기의 영지를 다 팔아서 모라비안들을 멸절시키려는 구교의 박해에서 구해냈습니다. 모라비안들은 노예선만 탄 것이 아닙니다. 전 미국을 돌아다녔습니다. 미국 전도여행에서 좌절하고 돌아오는 웨슬리 형제에게 돌아오는 배에서 위로하였습니다. 서구의 기독교 대 각성운동의 주역인 D.L 무디를 전도했습니다. 무디는 대학생 선교운동을 일으켜 1901년-1909년까지 300명의 대학생 선교사를 만들어 냅니다. 이중에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을 목격하고 돌아간 로잔대회장인 존 R. 모트가 있었습니다. 존 모트는 지구를 세 바퀴나 돌 정도로 발로 뛰어다닌 사람입니다. 우리나라에도 YMCA을 세웠습니다. 모트를 도운 사람은 미국의 석유 왕 록펠러입니다. 그는 어머니가 8세 때 죽으면서 한 말을 잊지 않고 살았습니다. 교회에 언제 일찍 와서 맨 앞자리에 앉았습니다. 십일조를 8살 때부터 했습니다.

우리나라 대학생선교단체들도 무디와 록펠러의 이 정신을 받은 겁니다. 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UBF)에서도 61년에 세 명의 간호사를 안수해서 선교사로 보냈습니다. 62년에 국가에서 봉제공을 선발해서 외국에 파견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독일에 간호사로 간 것도 비슷하지만 사람을 보내서 돈을 벌어오게 한 것이지요. 그 당시에 간 분들은 돈 벌어서 자기가 다 갖지 못했습니다. 나라가 절반이상을 가져갑니다. 그 돈으로 경제성장해야 하니까요. 영국이 300년 이상 걸린 경제성장을 우리는 50년 만에 이루어냈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국가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교사로 당시에 가려고 하니까 갈 길이 없어서 봉제연습을 했습니다. 그 중에는 박사학위 소지자도 있었습니다. 집에서는 미쳤다고 했습니다. 지하실에 30대의 미싱을 갖다놓고 밤낮으로 연습을 했습니다. 익숙하지 않으니까 바늘에 손이 박히고 피를 보면서 연습을 했습니다. 그래서 국가 시험에 합격해서 간 사람이 30명이 됩니다.
 

이제 들으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이스라엘아 이제 들으라 2 너를 만들고 너를 모태에서부터 지어 낸 너를 도와 줄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하지 말라 3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 4 그들이 풀 가운데에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 같이 할 것이라” (사 44:1-4)

세상은 나로부터 출발합니다. 헬라(그리스)의 철학이 세계제일이지만 그 철학의 기반은 나로부터 출발합니다. 신약성경에 예수님의 족보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두 군데 나옵니다. 그런데 그 족보의 출발점이 다릅니다. 누가는 현재 예수그리스도로부터 출발합니다. 이것이 핼라의 철학입니다. 누가복음은 이방인들, 헬라인들을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기술된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는 다릅니다. 마태는 유대인입니다. 유대인의 중심은 하나님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래서 하향식 족보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족보는 참 재미있습니다. 앞으로 하나 뒤로하나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를 만난다는 것입니다.
버트란트 러셀(Bertrand Russell)은 무신론자인데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이 있다고 가정하지 않는 한, 삶의 목적에 대한 질문은 무의미하다.” 사람은 자기를 알아야 합니다. 자기를 알 때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할지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국가관만 잘 확립하면 애국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국가관 없이 애국자가 될 수 없습니다.

월드컵이나 올림픽 때 애국가가 나옵니다. 월드컵은 시작할 때 나오고 올림픽에서는 금메달을 따면 나옵니다. 그 중에 제일 가슴을 뛰게 만드는 때는 월드컵 때 나오는 애국가인 것 같습니다. ‘두근두근 대한민국’입니다. 우리가 애국가를 들을 때 가슴이 뛰는 것은 우리는 이 땅에서 태어났고 이 땅을 지키며 살아가야 하는 공동체적인 운명을 띠고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디서 태어났는지 모른다면 국가관이 생기기 쉽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나에 대한 존재가 확인 될 때 어떻게 살아야 되며, 무엇을 위해 살아야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 1:16)말합니다. “모든 생물의 생명과 모든 사람의 육신의 목숨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욥 12:10)고 했습니다. 여기까지만 말씀드리면 세상철학, 그리스철학자와 마찬가지로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렇게 질문하실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세요. 2절 “너를 만들고 너를 모태에서부터 지어 낸 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나으신 분은 부모님이지만 나를 만드신 분, 지어낸 분(디자인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저의 아버님은 강원도로 다니시며 보따리 옷 장사를 하시면서 저를 키우셨습니다. 저의 어머님은 글을 모르신 채 평생을 사셨습니다. 제가 육신의 부모님 밑에서만 자랐다면 하나님의 세계를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원대한 비전과 사명이 있다는 것을 깨닫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를 다니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하나님이 나를 지으셨습니다. 나를 디자인 하셨습니다. 예수를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합니다. 육신이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물질적 육체는 언제든지 회복이 가능합니다. 창조하시고 지으신 분은 다시 지어주십니다. 사람에게는 옷과 같을 뿐입니다. 우리가 옷을 만들잖아요,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나의 육체를 옷과 같이 만드십니다. 그러나 살았으나 예수가 계시지 아니하시면 이미 죽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육체는 들의 꽃과 같이 시들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 육체 의지하고 우리가 얼마나 더 잘살겠습니까 그 육체를 위하여 뭐 그렇게 대단히 이루겠습니까 이룬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바울이 이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때로는 이를 가리켜 비밀이라고 말합니다.

주전 622년 요시왕 때에 도대체 믿을 수 없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어떻게 여호와의 율법책이 그렇게 오랫동안 성전에 있었는데도 그 책을 발견하지 못했고 그 내용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것은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옛날 유다 왕국에서만 그런 일이 발생한 것이 아닙니다. 주후 1517년 성경이 그렇게 오랫동안 교회에 있었는데도 그 내용은 진정으로 알고 따르는 사람이 없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성전건축이 뭡니까 왜 성전을 건축 못해 그 안달을 떱니까 어떻게 돈주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교회가 속입니까 마틴 루터는 개인의 힘으로 그 로마 교황권을 부정했습니다. 교황이 성경보다 우선할 수 없습니다. 그도 사람입니다. 신이 아닙니다. 성경 말씀보다 우선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개신교와 천주교의 차이입니다. 어느 길로 갈 것인가는 우리 스스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는 내가 다 지게 되었습니다. 친구 따라서 강남 갔다는 식의 말은 통하지 않습니다.

나의 출발점은 하나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겁니다. 그리고 빨리 시작하는 겁니다. 아무리 마라톤을 잘해도 2-3시간 전에 출발한 사람을 당할 수는 없습니다. 경기는 똑같은 시간에 출발하지만 인생은 다릅니다. 먼저 출발할 수 있습니다. 마라톤 할 때 보면 뒤에 오는 선수가 보이는데도 여간 해서는 뒤바뀌지 않는 것을 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늦게 된 자도 먼저 될 수 있지만, 먼저 된 자가 더 유리한 겁니다. 그 유리한 것을 가다가 낮 잠자서 헛되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아마 택민이는 영어도 잘할 것입니다. 엄마가 영어를 잘하니까 잘하게 될 겁니다. 저는 글도 늦게 깨달았습니다. 어머님이 글을 모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어머니는 다른 것으로 저를 잘해주셨습니다. 옷 깨끗이 빨아 입히고, 먹을 것 맛있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님으로선 최선을 다하셨지만 저에게는 빨리 터득했더라면 더 기초가 잘 준비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늦은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가 깨닫는 그 순간 우리는 새벽입니다. 이제 우리의 자세가 요구되고, 촉구되고 있습니다. 세상이냐!, 하나님이냐! 분명히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위해 살 것이냐 하나님을 위해 살 것이냐를 결단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민족이 모세의 인도로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홍해를 앞두고 있습니다. 뒤에서는 바로의 군대가 따라옵니다. 바로의 군대에 맞아 죽으나 홍해에 수장되어서 죽으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소용돌이치는 그 홍해에 몸이 다 잠기도록 물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 때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5)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본문 1절 “내가 택한 이스라엘아” 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택하신 것처럼 우리 또한 하나님이 택하셨습니다. 제가 설문조사하면서 “교회에 나오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 라고 하고 “스스로”라는 항목을 넣었습니다. 그러나 그 스스로 역시 내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모르고 있었지만 이미 우리 하나님이 나를 택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나올 사람이 없습니다.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라고 했습니다. 예정하고 선택하셨습니다.

둘째, 하나님이 도와 주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2절 “너를 도와 줄 여호와”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셨으니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책임지지 못할 하나님이 아니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선택하신 것은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도와 주시는 축복은 3-4절에 잘 나타납니다.
“3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 4 그들이 풀 가운데에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 같이 할 것이라”

[찬양] 넘지 못할 산이 있거든
넘지 못할 산이 있거든 주님께 맡기세요
넘지 못할 파도 있거든 주님께 맡기세요

우리가야 할 길은 멀고도 험하여
허덕이며 가야하는 우리 인생인데
이럴 때 우린 누굴 의지하나요
주님 밖에 없어요
나는 그 길 갈 수 없지만 주님이 대신 가요

참지 못할 분노 있거든 주님께 맡기세요
참지 못할 슬픈 있거든 주님께 맡기세요

우리 살아 갈 길은 눈물의 골짜기
내 힘으로 참지 못해 늘 흐느끼네
이럴 때 우린 누굴 의지하나요 주님밖에 없어요
나는 그 길 갈 수 없지만 주님이 대신가요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그의 손을 금하여 모든 악을 행하지 아니하여야 하나니 이와 같이 하는 사람, 이와 같이 굳게 잡는 사람은 복이 있느니라”(사 56:2)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잡으면 복이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모두 두려움을 안고 살아갑니다. 죽음과 자기 숙명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교통사고는 당하지 않을까 암에 걸린 것은 아닐까 노이로제에 걸린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러다가 내가 갑자기 죽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재산을 잃어버릴까봐,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릴까봐, 직장을 잃어버릴까봐,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일에 대한 두려움도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처한 어려움에 대한 두려움도 있습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무서운 것입니다. 실패를 했을 때 실패도 문제이지만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큰 문제가 됩니다.
심리적 두려움도 있습니다. 사람마다 어떤 특별한 현상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밀폐공포’라는 것이 있습니다. 갇히고 밀폐되면 겁이 나는 것입니다. 식은땀이 나고 혈압이 올라갑니다. 밀폐된 공간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광장공포’라는 것도 있습니다. 이것은 거꾸로 갇히면 편안한데 넓어지면 두려운 것입니다. 옛날 서양의 왕들의 침실은 엄청나게 넓습니다. 그런데 침대 위에는 지붕처럼 무엇을 씌워놓아서 잠을 자는 공간을 좁게 만들었습니다. 무슨 심리입니까 너무 넓으면 잠이 안 오고 불안하니까요 잠자는 곳은 좁게 공간을 만드는 것입니다. 광장 공포입니다. ‘고공공포’도 있습니다. 높은 데만 올라가면 겁이 납니다. 이런 사람 아파트 높은 층에 살지를 못합니다. ‘세균공포’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아무데나 앉지 못합니다. 공공장소에서 앉을 때에도 오무려서 앉습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세균이 득실득실 한 것입니다. 그래서 시도 때도 없이 손을 씻어댑니다. 온갖 것에 세균이 우글거린다고 세균 없이 깨끗하게 하느라고 그토록 애를 씁니다. 이것 역시 공포증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잘 지켜져도 이상하게 반대의 현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면역이라는 게 있습니다. 지나치게 보호되면 면역성이 떨어져서 문제입니다. 사람이 지나치게 깨끗하면 오히려 병이 많습니다. 적당히 때도 있어야합니다. 너무 빡빡 밀어서 살 갓이 다 벗어져서 피부과 찾는 사람이 많은데 피부과 의사 분들이 이태리 타월로 때 밀지 말라고 말씀을 안 하신 답니다. 죽는 것은 아니니까 자꾸 빡빡 밀어서 피부에 이상이 생겨야 피부과를 찾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의 문제는 두려움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두려움에 쌓이면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삶을 살지 못합니다. 나중에는 건강마저 해치게 됩니다. 어떤 심리학자가 쥐 1백 마리를 철책 속에 가두어 놓은 후 그 주위에 무서운 고양이 한 마리를 묶어 놓고 쥐들을 위협하게 만들었습니다. 1백일 후에 쥐를 꺼내어 해부해 본 결과 대부분의 쥐가 심장병, 암, 위장병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었습니다. 쥐들에게 아무리 좋은 음식을 주더라도 고양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오장육부가 오그라들어 있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런 두려움과 염려로부터 자유 함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공포의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우리를 자유케 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야곱에게도 이런 약점이 있었습니다. 형들에게 매일 치어서 살다보니까 두려웠을 것입니다. 육체적으로도 허약했던 것 같습니다. 막내에 여성스럽기까지 했습니다. 어머니는 그런 야곱을 늘 걱정했습니다. 그런 인간적인 약점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야곱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나를 헤치려는 고양이가 아니라 나를 지켜주시는 하나님을 보셔야 합니다. 그래야 두려움을 물리치십니다.
야곱은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하나님의 복을 더 많이 차지하고 싶어서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 방법도 인정하신 것은 아닙니다. 야곱은 그의 속임의 대가로 엄청난 고난의 징벌을 받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신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야곱을 사랑하셨습니다.
에서는 세상 적으로 난 사람인지는 몰라도 하나님을 멀리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힘을 의지하였습니다. 자기가 힘이 있으니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고 외면하는 사람은 그의 인생을 내버려두십니다. 잘 나가는 것 같아도 그는 멸망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것은 나의 가진 재능이, 축복이 하나님을 대항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맡겨 주님이 쓰시게 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에서와 달리 연약한 자였습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사냥을 잘해야 합니다.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야곱은 에서에 비해서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늘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간절한 기도와 믿음을 보시고 그에게 ‘이스라엘(승리자)’란 영광스러운 이름을 더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한가지 이름이 더 나옵니다. ‘여수룬’이란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이름을 하나님이 두 번이나 지어준 사람은 야곱뿐이 없습니다. ‘여수룬’이란 이스라엘이란 이름의 시적인 표현으로서 ‘정직한 자, 의로운 자, 사랑 받는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삶 전체를 의롭게 받으셨다는 의미로서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런 이름입니까 우리도 ‘여수룬’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아브라함 링컨은 “하나님이 사람과 같은 존재를 하루살이로 만들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 사람은 영원히 존재하도록 지어졌다”고 했습니다.

“내가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이제 들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