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가시는 하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25 그 땅의 열매를 손에 가지고 우리에게로 돌아와서 우리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땅이 좋더라 하였느니라 26 그러나 너희가 올라가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27 장막 중에서 원망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미워하시므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 넘겨 멸하시려고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도다 28 우리가 어디로 가랴 우리의 형제들이 우리를 낙심하게 하여 말하기를 그 백성은 우리보다 장대하며 그 성읍들은 크고 성곽은 하늘에 닿았으며 우리가 또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노라 하는도다 하기로 29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30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31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 32 이 일에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 33 그는 너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가 갈 길을 지시하신 자이시니라” (신 1:25-33)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옴즈씨를 구하려고 북한에 들어갔습니다. 언제나 악역은 북한이고 선한 역할은 미국이 하고 있습니다. 참 멋있는 나라다 그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지난번에도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인질로 잡혀있는 두 기자를 데리고 미국으로 갔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그런 나라에서 살고싶다 그런 생각을 하게됩니다. 한사람의 미국 국민을 위해서 기꺼이 전직 대통령까지 나서서 힘을 보태는 나라, 한 사람의 국민을 포기하지 않는 나라, 바로 그런 국가를 우리 모두는 꿈꾸고 있습니다. 이런 나라 다른 사람들이 이 땅에 와서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 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 자신이 만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제 자식, 제나라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다른 민족, 다른 사람 사랑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땅에 오셨습니다. 먼저 선택했던 유대인에게 먼저 복음을 전했습니다. 오래 전에 아브라함 때부터 선택했던 유대인을 하나님은 기억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상숭배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결과 비참한 결과를 체험했지만 하나님은 그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유대인에게 보냄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미국이 하나님의 이런 정신을 받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왜, 모세와 바울을 선택했는지 아십니까? 그들은 알고 보면 살인자입니다. 모세는 자기 동족이 학대받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참지 못하고 애굽 인을 쳐죽였습니다. 그리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가서 왕자의 신분을 버리고 목동으로 살았습니다.
바울은 유대교에 빠져서 지나친 열심 때문에 예수님을 모를 때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예루살렘에 보내고 죽였습니다. 바로 스데반이 죽을 때 그 자리에 있던 장본인이 바울입니다. 바울은 그것이 자기 민족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신구약에서 제일 많은 성경을 쓴 저자들이 바로 살인자들입니다. 그것이 정당화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두 살인자를 불러 사용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그들에게는 동족을 사랑하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지나쳐서 살인 할 만큼 동족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동족의 죄를 위해서 모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 32:32)
바울은 예수님께 돌아와 모든 성도들을 사랑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빌 1:8)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빌 2:17)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전제는 불로 태워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산에 바칠 때 전제로 드리려고 했던 것이잖아요. 바로 그와 같이 자신은 성도를 위해서라면 불태워서 죽는다 해도 기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미국 사회를 보면서 때로는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미국은 개인을 보호하고 열심히 사는 모든 사람을 존중하려고 노력하는 국가입니다. 오히려 진짜 개인주의가 우리나라 아닌지 우리 자신이 돌아보아야 합니다. 자기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과 국가는 하나님도 기뻐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왜 들어가지 못했는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광야의 길을 인생에 자주 비교합니다. 또한 가나안땅은 천국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사람들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를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래 전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이스라엘 민족의 이야기이지만 오늘날에도 똑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을 잘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스스로의 함정에 빠지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답이 나오질 않습니다. 사람의 생각은 답이 없습니다. 문제는 많이 지적하지만 길은 찾지 못합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 14:12)고 합니다. 언제나 우리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합니다.
지난번 MBC에서 4대강 문제점을 담은 PD수첩을 방송하려고 했다가 사장단의 검열로 방송을 취소하였습니다. 참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일로 MBC노조는 크게 반발했습니다. 그러나 자성의 목소리도 함께 나왔습니다. 그 중에 한 분은 말하기를 ‘MBC가 나라를 망하게 할 수 있다’는 강한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이번에 제작을 맡았던 팀은 지난번 광우병을 보도한 팀입니다. 여러분! 바른 것만 가지고 안됩니다. 바른 것이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국가를 생각하고 어떤 것이 우리에게 유익한 것인지를 생각할 때입니다. 국론을 분열시키고 특정한 정치세력에 서 있으면 안됩니다. KBS만 공영방송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공영방송과 같은 책임을 느껴야 합니다. 나라를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이 어느 때입니까? 북한을 보세요? 한치 앞도 보이지 않지 않습니까? 지금 정권이양 한다고 홍수로 온 나라가 엉망이 되었는데도 평양에 모여서 저 열광하는 것을 보세요. 우리가 지금 싸울 때가 아닙니다. 말이면 다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도와야 합니다. 미국도 평온할 때는 대통령 개인생활도 다 문제삼습니다. 그리고 뒤도 캡니다. 그러나 그것은 국가가 여유 있을 때 하는 것입니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위기 상황에서는 대통령에게 힘을 모아 주는 것입니다. 현 정부가 다 잘하는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라를 위해 때를 알고 할말만 해야 합니다.

우리나라가 지금 얼마나 축복을 받았습니까? 5천년 역사이래 지금처럼 세계 속에 함께 한 적이 있습니까? 세계주요 선진국 20개국 정상이 다 모여듭니다. 세계가 한반도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 기간 동안에 연일 아마 전 세계가 한국을 소개하고 알릴 것입니다. 대단한 일입니다.
그래도 참 우리나라 좋아졌습니다. 대통령도 총리, 장관 아무나 못시킵니다. 지난번 청문회에서 총리후보자가 어렵게 살았다고 보리밥만 먹었다고 하니까 야당 의원이 그 당시 그럼 우리나라 사람이 다 그렇게 살았지 총리 후보자 아버님만 그렇게 사신 것이냐고 하면서 우리 집은 보리밥이 없어서 밀가루만 먹고살았다고 했습니다. 그럼 저희 집은 밀가루도 부족해서 감자만 먹고살았습니다.
마다가스카르에서 선교사님이 10명의 학생들을 데리고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마다가스카르는 아프리카인데 대륙이 아니라 오른쪽 인도양에 있는 큰 섬입니다. 세계에서 4번째로 큰 섬입니다. 케냐와 면적이 거의 비슷한 나라입니다. 그리고 자주 자연다큐에서 소개될 때 카말레온이 자주 나옵니다. 자연 습지가 잘 보존되어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사는 곳은 다릅니다. 한국에 온 학생들은 한국의 모든 것이 신기하고 부럽기도 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특히 가는 곳마다 산에 나무가 많은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마다는 산에 거의 나무가 없다고 합니다. 나무를 베어서 숯을 만드느라 산이 민둥산이라고 합니다.
예전에는 가뭄이나 태풍 같은 수해로 한해 농사가 흉년이 들까 봐 농민들이 애를 태웠습니다. 그런데 남한은 오히려 풍년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쌀 재고가 자꾸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올해도 대풍이 예상됩니다. 쌀이 남아도는 걱정을 해야하다니 이 얼마나 축복입니까.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잘 보존하고 나누는 민족이 되기를 바랍니다.

본문 25절 “그 땅의 열매를 손에 가지고 우리에게로 돌아와서 우리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땅이 좋더라 하였느니라”고 인정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지시하신 땅은 확실히 좋은 땅이라는 것은 인정했습니다. 이제 그곳에 들어가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다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왜 들어가지 못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시 이런 실수를 반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원해야 됩니다.
본문 26절 “그러나 너희가 올라가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라고 말합니다. 원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원해야 됩니다. 기도가 다 무엇입니까? 원하는 것입니다. 땅속으로 굴을 파고 다니는 쥐도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곳에 가두면 3분이면 죽는답니다. 그러나 빛줄기 하나를 비춰주면 36시간을 산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빛입니다.

원망했습니다.
본문 27절 “장막 중에서 원망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미워하시므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 넘겨 멸하시려고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도다”고 했습니다. 여기 잘 보면 원망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나타납니다.
첫 번째가 “장막 중에서 원망하여”라고 했습니다. 장막은 그들의 집입니다. 집에서 나오지는 않고 집안에서 원망만 하는 것입니다. 일하지는 않고 않아서 말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잠 13:23 “모든 수고에는 이익이 있어도 입술의 말은 궁핍을 이룰 뿐이니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가 “여호와께서 우리를 미워하시므로”라고 합니다. 여러분! 언제 하나님이 자기들을 미워했습니까? 그런데 왜 자기들을 미워하신다고 말합니까? 자기들이 볼 때 조금 힘들어 보이는 일이 생겼다고 해서 하나님을 원망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부정적인 사람은 소설을 잘 씁니다. 자꾸 꾸며내는 것입니다. 자기 멋대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왜 성경을 봅니까? 우리 멋대로 생각하는 버릇을 고치기 위해서입니다.
잠 14:2 “정직하게 행하는 자는 여호와를 경외하여도 패역하게 행하는 자는 여호와를 경멸히 여기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목숨처럼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 생각에 빠져 있으면 안됩니다. 비행기 조종하시는 분들은 자주 하늘과 바다를 착각하기 때문에 자기 눈을 믿지 말고 계기 판을 믿는 훈련을 꾸준히 한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비행기 계기 판과 같은 것입니다.

인간의 결론입니다.
본문 28절 “우리가 어디로 가랴” 그럽니다. 갈곳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백성은 갈곳이 없습니다. “우리의 형제들이 우리를 낙심하게 하여 말하기를” 그러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떠난 말은 낙심케 할 뿐입니다.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그 백성은 우리보다 장대하며 그 성읍들은 크고 성곽은 하늘에 닿았으며 우리가 또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노라 하는도다” 고 했습니다. 여기 보면 자신들만 생각합니다. 자기들이 싸우면 패하지요. 실제로 본문 다음에 신 1:40-44에 보면 아모리 족속과 싸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돌이켜서 올라가서 싸우리이다. 하고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42절에서 “올라가지 말라 싸우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힘만을 믿고 싸우러 갔습니다. 그 결과 대패입니다. 45절에서 통곡하고 울었지만 하나님은 그 소리를 듣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전쟁은 패망입니다. 왜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하지 못합니까?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을 왜 믿지 못합니까? 인간의 교만함과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모세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이 가까이 함을 얻은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신 4:4)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의 생각과 다릅니다.
29절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고 하십니다.
30절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에서 크라이막스가 어디입니까? 하나님이 준비해 두신 어린양이 아닙니까? 아무 대책 없이 하나님이 지시하시고 가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지금 얼마나 어떤 일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지 다 알고 계십니다.

본문 31-33절에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잘 표현합니다.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32절 “너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보다 먼저 가시는 하나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돕는 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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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 2:18)

오늘 설교제목은 “돕는 배필”입니다. 제 집사람이 없으면 좀더 설교를 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오늘은 교회에 나오지 말고 집에 있으라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런 이유로 오늘 제가 설교를 조금 못해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남편으로 얼마나 잘 살았나 생각해 보면, 아마 점수로 메긴다면 최하위권을 맴돌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결혼해서 지금까지 거의 돈을 벌어다 주지 못했습니다. 암 병으로 고생하는 시어머니 10년을 넘게 돌보아 드렸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곰살맞은 구석이 있어서 따뜻하게 대해주거나 밥하고 설거지 하나 제대로 해 주지 못했습니다. 또한 뭐 그렇게 성격이 남보다 좋은 것도 아닙니다. 고집은 있어서 우기기도 잘합니다. 그래도 감사하고 다행인 것은 이런 남편을 두고도 저만큼 잘 견디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 기적입니다. 제가 오늘 서론을 이 정도는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오늘 설교하고 집에 가서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릅니다. 기도해 주세요?
제가 잘할 수 있는 것만을 가지고 설교한다고 생각해 보니까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잘 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저 죄인이 회개하고 예수 믿었다는 것 위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다윗도 바울도 하나님을 알고 난 후에 티끌만도 못하다고 했습니다. 죄인인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도와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한낮 잠시 지나가는 안개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천사보다 나은 하나님의 자녀요 영광을 돌리며 받는 거룩한 존재가 됩니다. 이 모두가 예수님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중국 전한(前漢)시대의 철학서 회남자에는 ‘경계하라’는 구절이 많이 나옵니다. 그 중 하나가 ‘수영 실력을 자신하는 사람이 오히려 물에 빠지기 쉽다’는 말입니다. 수영에 자신이 없는 사람이라면 물가에서 조심하는 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증권시장에서 실패하는 이유도 자신의 경험과 노하우를 지나치게 믿어 의심치 않는 자만심에 빠져, 결과적으로 낭패를 보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입니다. 미국에 전설적인 주식시장의 드림팀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소속된 사람들은 과거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로 구성되었습니다. 미국은 이 팀을 ‘꿈의 운용팀’이라고 자랑했습니다. 이 회사는 바로 미국의 초대형 헤지펀드 회사인 롱텀캐피탈 매니저먼트입니다. 그러나 이 회사는 자기 자신을 과신한 나머지 망했습니다.
그래서 투자자의 가장 큰 적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말이 증권시장에서 회자되는 것입니다. 주식시장에서 스스로의 능력을 과시한 나머지 고집을 피우는 것은 금물이라는 것입니다.

부부사이에 어떤 부류의 부부가 제일 문제가 있느냐, 그것은 자신이 지나치게 남편 또는 아내의 역할을 잘하고 있다는 과신입니다. 그래서 금술이 좋은 부부는 완벽한 부부가 아니라 뭐가 좀 모자라는 그런 부부랍니다. 우리 부부처럼이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나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면서 가슴을 치며 “하나님 가까이에 가기도 송구합니다.” 하는 사람은 큰 문제가 없습니다. 율법도 지키고 다 했다는 사람이 문제가 될 가능성이 더 큽니다. 오늘 우리는 “돕는 배필”의 말씀을 통해서 나에게 맡겨주신 소명은 다하되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해답을 찾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고전 11:3)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머리의 책임 아담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를 하려다보면 선악과 이야기를 안 할 수 없습니다. 선악과를 하와도 먹고 아담도 먹었는데 하나님은 먼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고 찾으십니다. 먹기는 여자가 먼저 먹었고, 꾀임에 빠진 것도 여자가 먼저 빠졌는데 하나님은 그 책임을 남자인 아담에게 먼저 묻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남자가 여자의 머리이기 때문입니다. 머리는 그냥 머리가 아닙니다. 군림하라는 머리가 아닙니다. 잘 인도하라는 머리입니다.
성경을 잘 보세요. 창 2:16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고 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아담입니다. 그런데 하와는 다음 18절에 지음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17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는 명령을 하와가 들었습니까? 못 들었습니까? 예! 하와는 지음을 받지도 않았습니다. 당연히 듣지 못했습니다. 아담만 들었습니다. 그럼 아담의 책임이 무엇입니까? 17절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씀을 하와에게 잘 전해야 하는 사명이 아담에게 있는 겁니다. 하와가 나를 잘 도와주게 하려면 내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하와에게 잘 전해야 합니다. 머리가 역할을 바로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하고 머리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리더가 되어야 합니다. 군림하는 머리, 리더가 아닌 섬기는 리더, 바르게 인도하는 리더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리더가, 머리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명심하고 가르치지 않으면 머리의 역할을 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 9:16)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인간이 왜 길을 왜 모릅니까?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내가 길이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예수가 길입니다. 예수가 우리의 꿈을 이루게 하실 분입니다. ‘어디로 걸어가는 걸까?’ 모르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생명의 길로, 예수께서 가르쳐준 길로 걸어가면 됩니다. 전해 주어야 합니다. 길이 어디 있는지 알려 주어야 됩니다.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여러분! 아내는 하나님이 보내주신 천사보다 더 귀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존재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무시하는 것도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이지만 남편이 아내를 함부로 대하는 것 또한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고전 11:11) 고 했습니다. 사실 이 차원은 바닥을 쳤을 때 이야기입니다. 중요한 것은 배필이 왜 존재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돕는”입니다. 부부의 임무는 도와주는 것입니다. 왜 도와 주어야 합니까? 부족하니까 돕는 것입니다.

아담의 첫 배필 하와는 실패했습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배필이 필요합니다. 하와는 안됩니다. 죄를 몰고 왔습니다. 다시 진정으로 우리를 도울 수 있는 그런 분이 필요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그러나 나는 3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고후 11:2-3) 바울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배우자로 중매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도 처음 하와가 뱀(사탄)의 간계에 미혹 당한 것처럼 미혹 당하지 말 것을 부탁합니다. 우리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은 보내 주셨습니다.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엡 5:23)고 했습니다. 아담의 죄가 무엇입니까? 자기가 머리가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죄도 모두가 알고 보면 내가 머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나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면 됩니다.
본문의 ‘도움(rz<[e:에제르)’은 ‘rz”[:아자르’는 “방어하다, 둘러싸다”의 동사에서 나왔습니다. 하와가 무엇으로 아담을 돕습니까? 밥 해 먹이는 것이요? 물론 그것도 한가지 일이겠지요. 그러나 정말 중요한 사실은 사탄에게서 아담을 방어해야 합니다. 둘러싸서 지켜야 합니다. 하와의 역할이 무엇이었습니까? 아담을 지키는 일이었습니다. 방어하는 일이었습니다. 남편을 보호해 주세요. 방어해 주세요. 사탄에게서 승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방어해야 합니다. 지켜야 합니다. 사탄의 공격에서 방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시 54:4) 하나님이 나를 돕습니다. 예수님도 돕습니다. 성령님도 돕습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 27:1)

우리 대한민국 사람은 이런 일을 기억해야 합니다.
작년 2009년 9월에 중국인 기독교인 리 밍쓘이 탈북자들의 남한 행을 도왔다는 이유로 10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며, 그를 도와서 함께 활동한 여성 기독교인인 장 용후는 7년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이 두 사람은 북중 국경지대를 탈출한 북한 인들을 비교적 안전지대인 몽골로 옮겨주는 활동을 벌이면서 이들에게 음식물과 숙박, 운송 수단 등을 제공한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몽골은 탈북자 문제에 관한한 중립적 입장을 표방하고 있고, 탈북자들 상당수를 난민으로 인정해 주고 있는 나라입니다.
이들 두 사람은 지난 4월 29일, 탈북자들을 몽골 국경으로 넘기는 작업을 하던 도중 국경지대에서 체포되었습니다. 이들은 항소 재판을 통해 탈북 난민들이 중국에서 난민지위 부여를 거부당할 뿐 아니라 북한으로 강제 송환되고 있으며, 이는 중국이 지난 1982년에 서명 비준한 UN협약을 위반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탈북자들이 강제 송환되면 그 대가는 혹독합니다. 일단 이들에게는 국가를 배신했다는 어마어마한 혐의가 적용되기 때문에 강제노동수용소 등에서 종신형을 살거나 사형에 처해지게 됩니다.
중국당국은 체포한 탈북자들을 송환하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는 탈북자 명단에서 삭제한 후 인신매매 조직으로 넘기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특히 어린 아이들이나 여성들의 경우는 이런 식으로 빼돌려져 조직에 넘겨져 성 노예로 팔려 가는 경우가 흔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6:8-10 “8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복음으로 도와야 합니다.

하나님이 왜 여러분을 교회로 모으셨습니까? 헌금 거두려고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도와주시기 위해서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잘 되게 하기 위해서 모으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을 두 번 사는 것 아닙니다. 한번뿐인 인생 돕는 배필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잘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라 하시는 길을 가야합니다. 도우면서 살다보면 복이 임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도우십니다. 내가 혼자 성공 못합니다. 하나님이 도와 주셔야 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여러분! 내가 헤엄처서 어떻게 미국을 갑니까? 그렇다고 날아갑니까? 그러나 비행기타고 가면 금방 갑니다. 나의 노력으로 못 갑니다. 천국이 미국보다 가깝답디까? 그보다 편히 갈 수 있는 그런 곳에 있답니까? 나의 힘으로 못 갑니다. 그러나 주님 보내주시는 구원의 방주를 타고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예수 그리스를 믿음으로 가는 것입니다. 다른 것 도와 주는 것 다 좋지만 천국 가는 길을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2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3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7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8 그 권면은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 9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10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11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12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갈 5:1-15)

오늘은 광복절입니다. 일본은 어설픈 말로 사과하고 있습니다.
간 나오토 일본총리가 10일 한일강제병합 100년 사과담화 발표문에 보면 “1910년 강제병합이 한국민의 뜻에 반하여 이뤄졌다. 일본 궁내청이 보관 중인 조선왕실의궤 등 도서를 인도하겠다” 고 했습니다. 그러나 ‘강제병합조약의 불법성’과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 동원’ 문제 등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었습니다. 이런 사과로는 우리 국민의 아픔을 치유하기는 부족합니다. 아직도 일본은 솔직히 교만합니다.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우기는 것도 포기 안 했습니다. 그래도 이만큼 사과문을 이끌어 낸 것은 한국이 이제 예전과는 사뭇 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 많은 부분에서 일본에 뒤 처지지만 그래도 한 두 분야에서는 일본을 앞서기 시작한 분야도 있습니다. 우리나라 반도체는 세계시장의 50%이상을 점유하고 있습니다. 모니터, TV분야도 세계 최고입니다. 조선산업은 이미 오래 전에 일본을 제쳤습니다. 태평양에 떠다니는 절반이 한국에서 만든 배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축구는 다른 나라에는 다 져도 일본에 지는 것은 용납 못합니다. FIFA순위에서는 일본에 밀리지만 우리는 그런 것 상관없습니다. 일본과 경기에서이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국이 앞으로도 얼마든지 발전할 수 있다는 가능성과 잠재력입니다. 이제는 우리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습니다. 어려움을 극복해내고 소중한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이런 질문이 인터넷 한 포털 사이트 지식사전에 올라왔습니다.
김일성이 어떻게 북에서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거죠?
그리고 일제로부터 해방되고 언제부터 남북사이에 마찰이 빚어진 거죠?
광복해서 다 신나 좋았을 텐데요…

우리가 기뻐하는 그 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바로 알아야 합니다.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이민족의 아픔을 알아야 합니다. 아마 앞에서 질문한 한 학생도 질문의 내용에 보면 많은 아쉬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 우리민족이 하나되어 처음부터 광복의 기쁨을 간직하고 살지 못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답변을 조금만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광복에 대한 기쁨에 들떠 있을 때, 세계 최강국이었던 소련과 미국이 이미 38선 긋고 군정 통치하는 것까지 합의합니다.
일본은 여운형에게 과도정부를 세워서 정권이양 받으라고 하지만, 차일피일 미루면서 소련과 미국에 어필할만한 정치세력으로 키우지 못합니다. 오히려 미군은 기존에 있던 조직마저 무색케 만들고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2차 대전 말, 1945년 8월 9일에 소련은 만주를 공격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소련과 미국이 잠정적으로 한반도를 반으로 나누기로 결정합니다.
당시 미군은 겨우 오키나와 점령한 상태였고 한반도까지 병력 보낼 여유가 안 됐습니다. 여기에 한반도 전부 점령하기엔 소련과 중국이라는 공산권과 국경선 맞대고 있어야 하니 부담이 컸습니다. 그래서 Colonel Dean Rusk and Colonel Charles H. Bonesteel III 이 두 미군 장교는 한반도 남부에 항구 두개 정도만 가져가면 족하다고 보고 38선을 경계로 긋고 이것도 단 30분만에 결정했답니다. 소련 역시 동유럽에서의 소련 점령지역에 대한 합의를 위한 카드로 미국의 한반도 남부 점령을 용인하게 됩니다.
이후로 소련은 소련 점령지역을 공산화하는 데 적극적입니다. 이에 반해 미국은 별 관심 없다가 소련이 급속히 공산권을 확대하자 부랴부랴 막으려고 뛰어듭니다.
김일성은 1937년경에 중국 공산당 계열의 게릴라부대를 지휘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당시 이런 부대에는 조선족 출신들만을 모아서 부대를 구성하기도 했습니다. 1940년에 일본군에 추격을 받다가 소련으로 넘어가게 되고 이때부터 소련군 장교가 되는 것으로 나옵니다.
한편 1945년 일본 항복 이후, 소련의 지도자 스탈린은 북한을 대리 통치할 후보를 찾게 되는데 Lavrenty Beria가 김일성을 추천하게 됩니다. 이유는 원조 공산주의자하고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라서 통제하기 쉬울 거라는 이유였습니다. 그가 처음 북한에 도착했을 때는 소련군의 꼭두각시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저 소련군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고 또 소련군은 그를 지도자를 내세우기 위해서 그를 제외한 다른 지도자 후보군들을 모두 제거합니다.

이 모두가 우리나라가 전적으로 힘이 약해서 강대국들의 편의에 따라 놀아난 것입니다. 그 이전에도 이 나라에는 많은 기회가 있었습니다. 조선왕조는 쇄국정책을 사용해 외국과의 문호를 막았습니다. 그 결과 세계의 흐름을 놓쳤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도약해야 할 그 시기에 싸움만 일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무너진 것입니다. 끝까지 싸우면 어떻게 됩니까? 다 망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망합니다.
본문 마지막 15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고 하셨습니다.

이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않기 위해서 힘쓸 때입니다. 길을 찾아야 됩니다. 화합할 길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되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누군가 욕을 먹어도 이런 역할을 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정당이라는 곳에서 무슨 일만 있으면 서로 대변인을 내 새워 발표를 합니다. 어떤 때는 유치해서 듣기도 민망합니다. 책임은 다 다른 당에게 있습니다. 자신들은 거룩합니다. 아무 문제도 잘못도 없습니다. 이런 태도로는 화합이 안됩니다.

사람이 사람을 무시하는 사회가 바로 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힘없는 사람을 억압하고 지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나라도 인도 카스트 못지 않은 신분계급이 있었습니다.
조선은 양반이 지배하는 사회였습니다. 양반들은 상놈을 억눌렀고 상놈은 그 지배 아래서 고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백정은 상놈의 대명사였습니다. 백정은 기와집에서 살 수 없었고 비단옷이나 갖신도 신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양반이 지나갈 때에는 길을 비켜서야 했으며 항상 허리를 구부리고 뛰어가듯 껑충거리며 다녀야 했습니다. 만일 허리를 숙이지 않으면 중형에 처해졌습니다.
평양에 신학교를 세운 마펫 선교사가 상놈 출신을 받아들여 교육을 시켰는데 그 중에 백정 박씨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박씨는 불행히도 장티푸스에 걸려서 죽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알고 마펫 선교사는 왕의 시의였던 애비슨을 데리고 와서 치료해주었습니다. 백정으로서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박씨의 온 가족이 개종을 하였습니다.
박씨는 1895년에 세례를 받게 되었는데 그가 백정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사람들은 백정과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없다고 하면서 반 이상이 교회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펫 선교사는 “예수의 사랑 앞에는 사람의 차별이 없다”고 양반들을 설득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양반들은 “그러면 교회에서 양반과 백정의 자리를 구분하여 양반들에게 앞자리를 달라”고 타협안을 제시하였습니다. 마펫 선교사는 이런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1895년 4월 마펫은 한학자 최씨로 하여금 박씨를 도와서 정부에 백정에 대한 차별대우를 철폐할 것을 탄원하는 청원서를 제출하였습니다. 정부는 그들의 청원을 받아들여 평민들과 같이 초립과 망건을 착용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 다음해 3월에는 인구조사에 백정이 빠져 있자 이것을 시정하여 백정도 일반인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게 해달라고 청원하여 허락을 받아냈습니다.
백정 박씨의 개종은 그의 삶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아들 박동열은 1907년에 최초로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한 학생이 되었습니다. 박씨 자신도 은행업을 시작하여 사업가와 장로가 되었습니다. 박씨는 백정조합 회장으로 선출되어 백정들에게 해방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런일을 한 마펫 선교사는 현재 총신대와 장신대의 뿌리인 평양신학교를 세운 초대 교장이었습니다.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않기 위해서는
첫째, 4절입니다. 율법을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율법이 무엇입니까? 행위입니다. 자기가 다 지켰다는 자만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빠집니다. 주님이 없습니다. 은혜가 아닙니다. 자기 자신입니다. 이것이 공산주의가 율법주의 인 것입니다. 자신들이 하고 당이 하고 수령님이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습니다. 농부가 자기 잘나서 풍년이 옵니까? 자신도 최선을 다했지만 하나님이 도우셔서 풍년이 왔다고 해야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삷니다.

둘째, 5절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라고 했습니다.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하는 사람들은 늘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입니다. 내가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주님 안에서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주실 소망을 기다립니다.

셋째, 6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여러분! 여기서 잘 알아야 합니다. 할례는 역사 안 합니다. 죽은 것입니다. 사람의 행위가 무슨 역사를 합니까? 그것으로 끝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기다린 소망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사람에게는 역사합니다. 이 역사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적인 은혜입니다.

넷째, 9-10절입니다. 죄를 버려야 합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10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다른 마음입니다. 죄의 마음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아닙니다. 누룩은 퍼뜨리는 특성이 있습니다. 죄도 삽시간에 퍼져나갑니다. 요즘 인터넷에서는 이러한 일이 간혹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전보다 더 잘 퍼집니다. 잘못된 이단 사상을 버려야 합니다. 이 사람들이 잘하는 말이 11절에 나옵니다.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십자가를 전하니까 백해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예 맡습니다. 지금도 율법이나 전하고, 사탄이 좋아하는 제사도 지내고. 아무하고나 손잡으면 박해받을 일이 없지요. 그러나 십자가를 전하니까 박해합니다. 사탄이 하는 겁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전하는 게 뭐가 잘못된 것입니까? 사탄이 방해하는 겁니다.

해방 후가 중요합니다.
처음에 억압되어있던 개인이나 민족은 해방만 되면 좋겠다는 생각밖에 못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해방 이후입니다. 해방 전에는 그 사람들 원망만 하면 됩니다. 모든 문제를 일본군 탓만 하면 끝납니다. 그러나 해방 후에는 다릅니다. 남의 종으로만 있던 사람들의 특징은 자신이 알아서 결정하는 것이 미숙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정에 따른 책임 또한 함께 져야 한다는 것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주인 노릇도 해본 사람이 한다’는 말이 생겼습니다. 그래도 우리나라는 아직 미숙한 것이 많지만 영국과 미국이 300년 만에 이룬 민주주의를 단 50년 만에 이룩했습니다. 하나님이 이 나라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라고 확신합니다.
13절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는 말씀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해방에 대해서 “19 여호와께서 그의 높은 성소에서 굽어보시며 하늘에서 땅을 살펴 보셨으니 20 이는 갇힌 자의 탄식을 들으시며 죽이기로 정한 자를 해방하사 21 여호와의 이름을 시온에서, 그 영예를 예루살렘에서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시 102:19-21) 고 말했습니다. 우리 민족도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해방되었습니다.
당시 외국 선교사들의 보고에 의하면 일제의 핍박 때문에 당시 5,000여 곳의 교회 중에서 1,200여 교회가 문을 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수많은 성도들이 투옥이 되었고, 많은 목사와 성도들이 피를 흘렸습니다. 그리고 약 70만을 헤아리던 개신교인의 수는 절반으로 줄어들고 말았습니다. 일제는 오늘 바로 우리가 해방하던 날을 1945년 8월 18일을 기하여 한국 전역에 산재하는 기독 신자들을 진멸 할 계획을 세워 놓고 은밀히 진행 중이었음이 해방 이후 저들의 비밀문건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 민족에게 여호와의 이름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게 하신 줄 믿습니다. 이를 위해 이 민족에게 해방을 주셨습니다.

십자가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칩니까?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 은혜를 받습니다. 그런데 은혜만 받아서는 안됩니다. 은혜 다음에 책임을 배워야 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책임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사탄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자기만 빠져나가면 그만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 남을 왜 우리가 욕하게 됩니까? 우습게 알기 때문입니다. 남을 왜 지배하려고 합니까? 우습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욕하는 것이요 사탄이 하는 겁니다. 남을 지배하는 것 사탄이 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은 섬깁니다. 섬김의 종이 먼저 됩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8)
우리가 자유하면서도, 해방의 기쁨을 유지하면서도 함께 번영하는 길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사랑에 죄가 있을 수 없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나를 내어 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책임을 지는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서로 잘못을 떠넘기기만 해 가지고는 안됩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않는 이 민족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 12:2-3) 하신 아브라함에게 내렸던 축복이 오늘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려고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이 민족에게 내릴 줄로 믿습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용서(3)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5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에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실새 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7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8 모세가 급히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9 이르되 주여 내가 주께 은총을 입었거든 원하건대 주는 우리와 동행하옵소서 이는 목이 뻣뻣한 백성이니이다 우리의 악과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주의 기업으로 삼으소서” (출 34:5-9)

오늘 본문이 나오는 출 34장은 모세가 하나님께 십계명을 두 번째 받으러 갔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첫 번째 십계명은 모세가 화가 나서 던져버려 깨졌습니다(출 32:19). 모세가 십계명을 받아 가지고 내려올 때 백성들은 그 기간을 참지 못하고 자신들의 신을 만들었습니다. 그 주동자는 다름 아닌 아론입니다. 그는 모세의 형입니다. 누구보다도 모세를 도와야 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없는 아론에게는 백성의 원망의 소리만 들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금 고리들을 빼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게 너희들의 신이다 그랬습니다. 모세는 십계명을 가지고 내려오다 마중 나온 여호수아를 만났습니다. 산을 내려오는데 진중에서 요란한 소리가 납니다. 저게 무슨 소리냐고 할 때 바로 아론이 만든 금송아지에게 제사하고 떠들고 기뻐하는 소리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그 때 하나님께 주신 십계명을 던져버렸습니다. 이것은 모세의 잘못입니다. 아무리 화가 나도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을 던져버리지는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십계명을 받으러 하나님께 올라가야 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처음 돌 판처럼 돌을 만들어 가지고 오라고 했습니다(출 34:1). 2절에 보면 아침까지 준비하라고 한 것을 보면 그 전날 명령이 떨어진 것입니다. 여러분! 돌을 깨서 다듬는다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그것도 아침까지 준비해야 합니다. 아마 모세는 밤 세도록 돌을 깨고 다듬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시내산 까지 가지고 가야합니다. 집 나가면 개 고생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면 죽음입니다. 모세는 40주야를 물도 마시지 못하고 십계명을 다시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나 그에 따른 책임은 모세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고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버리고 다음에 또 받으려면 주시기는 하십니다. 그러나 그 만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모세의 사명부여
출애굽기 4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실 때 사실 모세는 자기 백성을 구해 가지고 나오라고 하는데 별로 마음 내키지 않았나 봅니다. 자기는 지금 어쩌면 편안한 삶을 삽니다. 애굽에서 사람 죽이고 도망 나와 가지고 시나이반도 광야에서 편안하게 지냅니다. 아내도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나이 80이 다되어 하나님이 애굽으로 가라고 하시니까 깜짝 놀랐습니다. 속으로 아마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보내시려면 좀더 젊어서 보내시지 이제 와서 뭘 어떻게 하라고 가라고 하시나 그런 생각을 했을 겁니다.
그래서 그렇게 능력이 없다고 말합니다. 힘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 때 하나님이
“너 뭐 들고있니?” “지팡이입니다.” “그래 그것을 던져 보아라” 하고 던졌을 때 지팡이가 뱀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말을 못한다고 하나님께 말합니다. 참 바보 같은 모세입니다. 진짜 말을 못하는 건지 가기가 싫어서 그러는 것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정말 이 말을 믿습니다. 그러나 저는 좀 다른 생각을 해 봅니다. 여러분! 모세는 파라오의 궁전에서 왕자 교육을 받은 사람입니다. 애굽의 고관들에게 왕이 될 교육을 받고 자랐습니다. 그가 벙어리가 아닌 다음에는 왜 말을 못합니까? 하나님은 “누가 사람의 입을 만들었느냐” 고 하시면서 까지 말씀하시지만 모세는 그런 하나님의 소리도 무시한 채 자기 이야기만 합니다.
여러분! 하기 싫은 사람은 핑계가 많습니다. 지금 솔직히 모세가 그런 것입니다. 나이 80이 되어서 다시 애굽에 가서 파라오와 싸울 생각을 하니 겁도 나겠지만 귀찮은 겁니다. 하기 싫은 겁니다.
모세는 젊은 날에 자기 동족이 노예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애굽사람을 죽일 만큼 민족을 사랑했습니다. 그들의 고통을 마음 아파했습니다. 그리고 그 지나친 열정 때문에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열정이 떨어졌습니다. 우리도 20대의 열정이 더 뜨거웠을 것입니다. 저도 한 때 뜨거운 마음에 장가도 안가고 하나님 따르겠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결혼해서 하나님 자식만 주시면… 그러면서 아마 기도 많이 하셨을 겁니다. 그런데 자식 주셨는데 지금 어떠합니까?
자기 동족이 얼마나 애굽에서 죽도록 고생을 하는지, 그것을 위해서 평생 광야에서 준비하고 있었다면 하나님이 가라고 했을 때 바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했을 겁니다. 하나님 왜 지금에서야 말씀하십니까? 이렇게 말하고 가야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참 간사합니다. 눈앞에서 안 보이니까 자 먼 곳 애굽 땅에서 같은 동족이 노예생활을 하든, 죽어가든 자기는 별로 관심이 없어졌습니다.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하나님이 이제 이 민족에게 통일 시켜 주시려고 하시는데 우리는 별 핑계를 다 대면서 “하나님 통일은 빠릅니다. 경제가 어떻습니다.”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고통 당하는 동족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싸워서 이길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도지지 않으십니다. 그러냐! 하시면서 하나님은 그럼 네 형 아론이 있지 않느냐고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하여 이르시되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출 4:14) 고 하시면서 보냅니다. 이때 모세의 나이 80이요 아론의 나이 83세입니다(출 7:7)
여러분! 하나님과 대항하려고 하지 마세요? 결국은 집니다. 순종하세요. [베트남에 선교사 예]

아론은 어떠했습니까?
아론의 등장은 출 4:14에서 처음 나옵니다. 바로 모세에게 “내 형 아론이 있지 않느냐”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론에게 “광야에 가서 모세를 맞으라”(출 4:27)고 하시고 바로 모세는 아론에게 다 말합니다. 바로와 모세는 이스라엘 장로들을 모아놓고 이적을 행했다고 했습니다(출 4:30). 어떤 이적인지 모르지만 아마 지팡이가 뱀이 된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출 4:31절 “백성이 믿으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찾으시고 그들의 고난을 살피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애굽에서 바로와 맞설 때에 늘 아론이 함께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그들의 군대대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라 하신 여호와의 명령을 받은 자는 이 아론과 모세요”(출 6:26) 라고 했습니다.
아론도 늘 모세와 함께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여호와의 음성을 직접 들은 사람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기적을 직접 펼치기도 했습니다. “아론이 애굽 물들 위에 그의 손을 내밀매 개구리가 올라와서 애굽 땅에 덮이니”(출 8:6) 제가 왜 이 아론이야기를 길게 드립니까? 이 아론이 오늘 본문 출 34장에서 금송아지를 만든 주동자라는 것입니다. 아론 역시 모세의 못지 않게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한 사람입니다. 그런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들다니 있을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일부 역사학자들은 그런 아론의 모습을 선뜻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는 아론의 이런 행위 뒤에 성경은 아론이 철저히 회개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이런 우상숭배의 죄는 죽음입니다.
심지어는 신약성경 중에도 “4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히 6:4-6)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아론이라면 하늘의 신령한 은사를 맛본 자 아니겠습니까? 성경에서도 누가 하나님의 음성을 그렇게 수시로 듣고 명령을 행했단 말입니까?
그런데 아론은 그런 엄청난 범죄 이후에 성경을 제가 자세히 들여다보았습니다. 그 범죄 이후에 아론이 다시 등장하는 곳이 출 34:30절입니다. 모세가 증거판을 가지고 내려왔을 때입니다.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이것으로 끝입니다. 하나님은 아론에 대해서 아무 말씀도, 책임도 이후에 묻지 않으셨습니다. 아무리 성경을 뒤져봐도 이후에 이 문제에 대한 책임과 회개, 보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마치 부부 싸움한 부부가 슬그머니 화해하고 아무 일 없었다는 것처럼 지나갑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들은 아론의 가문이 그 이후에 대제사장 집안이 되지 않습니까?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런 죄를 저지른 사람이 대제사장의 가문이 되어 내려올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참 재미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이 뒤에 안나옵니다. 성경이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에 대해서 먼저 알고 계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출 32:7) 고 하셨습니다. 아론 자신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았지만 그 날에 백성 중 3천명 가량이 죽고(출 32:28), 모세는 이 죄로 자기 백성을 용서해 주시고 자신의 이름을 생명 책에서 지워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은 용서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본문 6-7절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7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하셨습니다.

성경에서 “여호와라, 여호와라” 이렇게 두 번씩 강조한 곳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지금 구약 성경 중에 이 부분을 제일 강조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리고 이 부분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부분입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모세도 용서하셨고 아론도 용서하셨습니다. 용서하지 않으시고 어떻게 이 말씀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첫 번째 하나님은 당신에 대해서 “!Wjr]:라흠”(인정 많은, 자비)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의 어근은 ‘!j’r;:라함’(사랑하다, 측은히 여기다, 불쌍히 여기다)에서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불쌍히 여기지 않고는 용서가 없습니다. 북한 축구선수들 불쌍하지 않습니까? 공산당이 내려와 사람을 막 죽일 때 우리는 말했습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남을 측은히,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모세도 아론도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같은 단어가 신 4:31에 나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이라 그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 하셨습니다. 같은 뜻으로 다윗이 “그러나 주여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니”(시 86:15, 103:8) 라고 말했습니다.

두 번째 하나님은 당신에 대해서 형용사인 “@WNj’:하눈”(은혜로운)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단어는 ‘@n”‘j::하난’(구부리다, 은혜를 베풀다) 동사에서 나왔습니다. 은혜를 베풀 때 구부립니다. 권세가 있지만 구부립니다. 눈 높이를 맞춥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시 14:2) 이라고 다윗이 말합니다.
“내가 주께 부르짖으나 주께서 대답하지 아니하시오며 내가 섰사오나 주께서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다”(욥 30:20) -개역개정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나 주께서 대답지 아니하시오며 내가 섰사오나 주께서 굽어보시기만 하시나이다” -개역한글 하나님께서 돌아보지 아니하시는 것과, 굽어보시기만 하시는 것은 다릅니다. 사실 굽어보시면 다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굽어보시려고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은혜는 형용사이지만 이 근원은 동사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라훔과 하눈은 구약성경에서 오직 하나님에게만 적용되는 단어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께만 적용된 아멘과 같은 단어입니다.

세 번째 하나님은 당신에 대해서 “&rea;:아레크”(인내하는)분이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요엘 2:13) 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시기에 급급하시면 우리는 벌써 다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축복하시는 것은 급하시고 심판하시는 것은 더딘 분이십니다. ’10년 안에 10억 벌기’ 그런 책이 있습니다. 서점에서 들여다 보았는데 그런 식으로 보자 되는 사람들의 특징을 적어놓았습니다. 부자 십계명중에 남에게 줄 돈은 최대한 늦게 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받을 돈은 최대한 빨리 받아내라는 것입니다. 뭐 그렇게 하면 부자는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축복은 빨리 주시고, 벌은 미루십니다. 본문의 ‘인내’는 ‘&r’a:아라크’(연기하다, 미루다)는 어근에서 나왔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러한 성품 때문에 지금까지 살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 같은 사람도, 아론 같은 사람도 대 제사장으로 삼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 같은 죄인도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어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은혜입니다.

용서가 은혜가 무엇입니까? 사람은 누구나 감춰지기를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대통령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와 아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론은 금송아지를 만든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묻지도 말하지도 않으십니다. 그리고 대제사장 집안을 만들어 주십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기독교는 화목케 하는 종교입니다. 잘못을 용서해 주는 종교입니다. 다 같이 사는 종교입니다. 모두가 다 살 수 있는 길을 주님은 열어 주셨습니다. 주 안에서 모두에게 길이 있습니다. 세상을 보면 길이 없지만 주님을 바라보면 길이 있습니다. 축복이 있습니다. 용서의 주님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이 은혜를 받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용서(2)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4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

2010 남아공월드컵에 출전했던 북한 축구대표팀이 귀국 후 ‘대논쟁’ 이라는 형식의 사상비판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북한은 이번 월드컵에서 포르투갈에 0대 7로 지는 등 3전 전패를 기록해 16강 진출에 실패했습니다. 지난 7월2일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월드컵에 참가한 축구선수들을 놓고 사상투쟁 회의가 있었습니다. 선수들과 평양체육대학, 김일성종합대학, 김형직사범대학 체육학부 학생 400여명이 참석해 비공개로 열렸다합니다. 감독과 일부 선수는 무사치 못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공산주의가 성경과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공산주의는 용서가 없습니다. 절대 용서 안 합니다. 자기들이 다 판단하고 심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릅니다.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롬 12:17)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용서의 부탁만 받았습니다. 우리는 값지 못할 것을 탕감 받았습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공산주의는 용서가 없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모르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다 심판합니다.

우리가 왜 남을 용서해야 됩니까?

1) 내가 하나님께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 바울서신 중에 빌레몬서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레몬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빌레몬의 가정에 오네시모라는 종이 있었는데 도망을 쳤습니다. 도망치면서 돈도 많이 훔쳐 가지고 갔습니다. 그런데 이 오네시모가 바울의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게 되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네시모는 바울과 함께 있으면서 수종들고 있었는데, 바울은 빌레몬의 종을 자기가 데리고 있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려는 마음에서 빌레몬서를 쓰게 된 것입니다.
당시 로마의 노예 법은 아주 가혹해서 주인이 노예에 대해서 무제한의 권력을 가졌고 노예의 생사권 까지도 주인이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잘못 때문에 십자가형으로 죽임을 당한 노예의 수를 세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네시모는 도망친 죄가 있었고, 게다가 주인의 돈을 훔쳐 가지고 도망쳤으니 용서받을 길이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편지를 통해서 절대 절명의 가련한 노예를 용서해 줄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빌레몬서는 용서의 복음입니다. 죽게 된 종 오네시모를 살리고자 한 서신서입니다.

2) 나도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은 주기도문 다음에 나오는 두 절입니다. 주님이 기도를 가르친 후에 제일 중요하게 말씀하신 것은 용서입니다.
본문의 14절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이고 15절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입니다. 선택은 내가 하는 것입니다. 공은 우리에게 넘어와 있습니다. 어떻게 할 것인가는 내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14절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용서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용서에는 용서할 것 즉 본문에는 “과실”이라는 말로 번역된 단어가 나옵니다. 이 과실을 용서해야 됩니다. ‘과실(paravptwma:피랍토마)’로 ‘범죄, 과오, 실책’을 말합니다. 같은 단어를 막 11:25에서는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 혐의, 허물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말은 문자적으로는 ‘한 편에 치우침’ 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신 28:14, 수 1:7, 왕하 22:2)
“그러므로 너희는 크게 힘써 모세의 율법 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 그것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수 23:6) 한편으로 치우치는 것 자체가 죄입니다. 재판이 공정하지 못한 것은 한편으로 치우쳤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교통사고로 10년을 넘게 싸우시는 분이 있습니다. 경찰관이 한편으로 치우쳐 처음부터 말을 안 듣는 것입니다. 무조건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접근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불리해 집니다. 이렇게 치우친 사람을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죄는 다 치우쳤기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지나친 여당도 야당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롬 4:25에는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고후 5:19, 골 2:13에서는 모두 우리의 죄에 대해서 사용되었습니다. 우리의 죄는 하나님께 용서 받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대속으로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용서받았습니다.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3) 내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눅 17:5절을 보면 제자들은 “우리에게 믿음을 더 하소서.” 하면서 한숨을 쉽니다. 제자들은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어렵게 느껴졌습니다. 랍비들도 죄 지은 사람을 세 번 용서하라고 가르쳤고, 또 사실 한 번도 용서하기도 힘든데 하루에 일곱 번이나 용서하라니,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현재 갖고 있는 적은 믿음으로는 도저히 목자의 직분을 감당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실족할까 봐 조심하려면 신경이 다 끊어져 버릴 것 같고, 또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할 만큼 넓은 마음을 가지려면 엄청난 양의 믿음이 필요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눅 17:6) 다른 복음서에는 그냥 나무라고만 되어 있는데 누가는 이 나무가 뽕나무라고 밝혀줍니다. 뽕나무는 뿌리가 몹시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뿌리 뽑히기가 힘든 나무입니다. 저도 어려서 뽕나무하고 인연이 많습니다. 이 팔도 뽕나무에 올라갔다가 떨어져 부러진 것입니다. 뽕나무 뽑아보면 정말 쉽지 않습니다. 남을 용서한다는 것은 뽕나무 뿌리가 뽑히는 것처럼 힘든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4:32 에서도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복음이 무엇입니까? 용서입니다. 용서의 복음입니다. 빌레몬서가 오네시모를 살리기 위한 복음이었다면 성경은 오늘날 우리를 살리기 위한 복음서입니다(마 5:44, 마 18:35, 엡 4:32 , 골 3:13, 벧전 3:8-9)

여름밤의 극장가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전설의 고향입니다. 전설의 고향은 다 백발백중 귀신이 나타납니다. 부부사이가 별로 안 좋은 분은 좀 보세요? 밤이 깊으면 더 무섭습니다. 거기다 비가 부슬부슬 오면 더 섬뜻합니다. 우리나라 전설의 고향에는 다 여자가 나타납니다. 서양 드랴큐라는 남자인데 우리는 여자입니다. 그 여자들은 다 누구입니까? 간단합니다. 한 이 맺힌 겁니다. 한이 맺혀 보복하려고 나타나는 겁니다. 원수 갚으러 오는 겁니다. 달려들어 보복하는 겁니다. 귀신이 나타나는 집을 폐가라 그러지 않습니다. 그 집을 흉가라고 그럽니다. 흉가면 망하는 겁니다. 남을 해롭게 하면 반드시 돌아온다라는 것이 진리입니다. 성경의 법칙입니다. 예수님은 운명하실 때도 축복하고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세요.” 강도도 용서해 주고,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르리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산에 가서 나무를 베어 땔나무로 삼았습니다. 겨울이 되면 집에 장작을 많이 쌓아놓은 집은 겨울 준비를 잘한 집입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산에 나무를 베어다 쌓아놓은 것이니 상당히 살림을 훼손한 겁니다. 이 나라에 무슨 자원이 있습니까?
1956년 미국인 시슬러 박사가 이승만 대통령을 만납니다. 시슬러 박사의 내한은 역사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자원이 하나도 없는 나라에 자원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습니다. 시슬러 박사는 같은 크기의 두 상자를 내밀었습니다. 한 상자 속에는 석탄이 들어 있었는데 4.5킬로와트의 전력을 다른 상자 속에는 우랴늄이 있었습니다. 이것으로 1천 200만킬로와트의 전력을 만들 수 있다고 했습니다. 2백 60만 배의 차이입니다. 이승만 대통은 놀라서 “우리도 이것을 가질 수 있겠소?” 시슬러 박사는 “원자력은 사람의 머리로 캐내는 자원입니다. 20년간 인재를 양성하면 가능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127명의 인재를 뽑아서 미국으로 보냈습니다. 국민소득 400만 달러의 나라에서 수만 달러를 들여 유학시킨다는건 당시로서는 모험이었습니다. 그 후 딱 20년이 지난 1977년 고리 원자력 1호기를 세웠고 50년 후인 지금은 원자력의 대국이 되었습니다. 땅이 부족하고 자원이 부족하지만 시슬러 박사가 우리에게 원자력을 알려준 것처럼 우리는 길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길을 제시해 주어야 합니다.
“의인의 입술은 기쁘게 할 것을 알거늘 악인의 입은 패역을 말하느니라”(잠 10:32) 의인의 입술은 남에게 기쁨을 줍니다. 생명을 줍니다. 살게 합니다. 그러나 악인인 입은 남을 죽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원했던 것은 원자력의 힘만이 아닙니다. 늦은 밤 촛불을 켜고 공부하던 우리 어린이들에게 밝은 세상을 주고 싶어서입니다. 한겨울이 와도 추위에 떨며 나무 한 짐 마련 못해 추위에 떨고 헐벗은 사람들이게 따뜻함을 주고 싶어서였을 것입니다.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일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조금만 도와주어도 어쩔 줄 모르며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아무리 도와주어도 불평만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영혼이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는 육신의 병이 있을 뿐 아니라 영적인 병이 있습니다. 영적인 병이 들면 여러 가지 증세가 나타나지만 그 중 가장 뚜렷한 증상은 감사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감사할 줄 모르는 것을 도덕적인 결함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 적으로 볼 때는 감사할 줄 모르는 것은 영적인 병이요, 죄악의 결과입니다. 로마서 1:21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사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아니하고 감사치 아니할 때 마음이 어두워져서 불만이 가득 차게 됩니다. 또 마음이 미련해져서 자기 분수를 잊어버리고 교만해집니다. 그래서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크신 은혜를 입고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줄도, 예수님께 감사할 줄도 모른 아홉 명의 문둥이를 한탄하고 슬퍼하신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은 사람을 살리는 책입니다. 사람을 위한 책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저의 설교도 사람을 살려야 합니다. 우리 교회도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 우주에서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가치 있고 고귀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당신의 피를 쏟으시고 생명을 버리심으로 의의 옷이 되셨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값으로 측량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선행이나 그 밖의 행위는 모두 누더기 같은 옷입니다. 인간은 값을 주고 이 고귀한 옷을 살수가 없습니다.
태양의 빛을 값 주고 살 수 있습니까? 태양의 빛도 값 주고 못 사거늘 하물며 하나님의 영생과 의를 어떻게 값으로 살 수 있겠습니까?
그분이 우리를 용서하셨고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와 모든 죄를 다 고하면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값없이 용서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2천년 전에 우리의 죄, 불의, 추악을 짊어지고 고난 당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대신해서 창에 찔리셨습니다. 상처를 입으셨으며 고난 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자신을 위해 고난 당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바로 여러분과 나를 대신해서 고난을 당하심으로 구원을 마련하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용서도 중요하고 내가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는 일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따로 따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번에 다 됩니다.
본문 14절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다른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는 것이 곧 내 죄를 용서받는 일입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영혼을 성결케 합니다. 아무리 교회에 열심히 다닌다 해도 말씀을 사모하지 않고 말씀을 가까이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출석교인’은 될지언정 참된 신앙 인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성경을 묵상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