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창을 들어 아이를 가리키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8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잡은 단창을 들어 아이를 가리키라 내가 이 성읍을 네 손에 넘겨 주리라 여호수아가 그의 손에 잡은 단창을 들어 그 성읍을 가리키니 19 그의 손을 드는 순간에 복병이 그들의 자리에서 급히 일어나 성읍으로 달려 들어가서 점령하고 곧 성읍에 불을 놓았더라” (수8:18-19)

동서양을 막론하고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옛날, 옛날에 토끼와 거북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토끼는 매우 빨랐고, 거북이는 매우 느렸습니다. 어느 날 토끼가 거북이를 느림보라고 놀려대자, 거북이는 토끼에게 달리기 경주를 제안하였습니다. 경주를 시작한 토끼는 거북이가 한참 뒤진 것을 보고 안심을 하고 중간에 낮잠을 잡니다. 그런데 토끼가 잠을 길게 자자 거북이는 토끼 옆을 한참 지나가고 잠에서 문득 깬 토끼는 거북이가 어느새 경주를 마쳤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 우화는 기원전 6세기경 그리스에 살던 노예였다고 합니다. 이솝우화로 구전되어 오던 이야기들을 17세기 라퐁텐이 책으로 출간한 뒤로 우리들은 더 쉽게 이 이야기들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이 우화에서는 인생을 경주에 비유했고, 토끼는 나태한 인간, 거북이는 성실한 인간을 상징한다고 배웠습니다. 하지만 서양에서는 반대로 거북이가 토끼를 보고도 그냥 지나쳤기 때문에 공정하지 않다고 보고, 거북이가 더 나쁘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나태한 토끼에게서 교훈을 얻으려는 데 초점을 맞추지만 서양 사람들은 정직하지 못한 거북에게서 교훈을 얻으려고 합니다.
서양 사람들은 나태한 것보다 정직하지 못한 것을 더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거북이가 토끼를 깨워서 정정당당한 게임을 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느보산에서 가나안땅을 보고 죽었고 이제 이스라엘의 인도자는 여호수아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 목전에 있습니다. 그러나 첫 성인 여리고성은 가나안의 제일 큰 성입니다. 구약성경에 65번이나 언급된 오래된 성입니다. 여리고 성이 창세기 28:19에는 ‘루스’라고 나옵니다. 이 성을 뚫어야 가나안 땅에 들어갑니다.

여호수아 6장에는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군대가 천사가 지시한 방식대로 언약궤를 앞세워 여리고성을 육일 동안 돌고, 제 칠일에 제사장들의 나팔 소리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이 고함을 쳐서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는 여리고성의 정복이야기가 나옵니다.
여리고 성의 고고학적 발굴은 1868년부터 시작되었고 1930-1936년에 John Garstang 에 의해 발굴되었습니다. 가스탕(Garstang)과 올브라이트(Albright)는 B.C. 1400년대로 추정되는 일련의 무너진 성벽들의 잔해를 발굴해냈습니다. 이는 자연적으로 풍화되거나 버려져서 무너진 성벽들이 아니라, 드라마틱하게 무너져 버린 성벽들로 드러났습니다. 이는 여호수아의 여리고성 정복을 B.C. 1400년으로 기록하고 있는 구약성서의 내용과 일치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큰 성을 무너뜨린 이스라엘백성의 다음 목표는 아이성입니다.
아이성은 여리고성에 비해서 보 잘 것 없는 작은 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리고와 달리 해발 800m 산지에 위치해 있습니다. 평지 전투는 정면대결양상이지만 산지는 다릅니다. 군사가 많다고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 작은 성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대패합니다. 여호수아는 첫 패배를 맛보았습니다. 그리고 옷을 찢으며 땅에 엎드려 흑을 뒤집어쓰고 하루종일 통곡합니다(수 7:6). 그러면서 차라리 요단 저쪽(동쪽)에 그냥 있는 것이 더 좋았을 뻔하였다고 합니다(7:7).
어마어마한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별것 아닌 아이성 때문에 이 고생을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가적으로는 6.25를 겪었고, 60-70년대를 이겨내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국가적으로, 가정적으로, 개인적으도 여리고성과 같은 성을 무너뜨리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그 작은 아이성 때문에 우리는 좌절하고 낙담합니다. 그러면서 어떤 때는 여호수아가 요단 저쪽에 그대로 있었을 것 괜히 여기까지 들어왔다고 하는 것처럼, 결혼하지 않고 그냥 사는 것이 나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어떤 분은 괜히 교회 나왔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철저히 분석하고 교훈으로 삼아 다시는 우리에게 이런 실패가 없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습니다.
아이성 전투의 1차 공격의 제일 큰 실패 원인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아간 때문이었습니다.
“너희는 온전히 바치고 그 바친 것 중에서 어떤 것이든지 취하여 너희가 이스라엘 진영으로 바치는 것이 되게 하여 고통을 당하게 되지 아니하도록 오직 너희는 그 바친 물건에 손대지 말라”(수 6:18) 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나의 언약을 어겼으며 또한 그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져가고 도둑질하며 속이고 그것을 그들의 물건들 가운데에 두었느니라”(수 7:11)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수아는 몰랐습니다. 왜 전투에서 졌는지 누구 물건을 빼돌렸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시고 계셨습니다.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그 무게가 오십 세겔 되는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가졌나이다 보소서 이제 그 물건들을 내 장막 가운데 땅 속에 감추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 하더라”(수 7:21)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은 거짓입니다, 남을 속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는 예수님이 오셔서 모든 것이 용서와 축복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즉결심판이 딱 한군데 나옵니다. 그것은 아나니아 삽비라 사건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려고 하다가 마음이 변한 사건입니다. 땅 팔아 절반만 바쳐도 많이 바치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하나님께는 지금 많고 적은 것이 아니라 진실입니다.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아간이 가지고 있던 물건을 빼앗아 “그 위에 돌 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 오늘까지 있더라 여호와께서 그의 맹렬한 진노를 그치시니 그러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아골 골짜기라 부르더라”(수 7:26)

여러분! 하나님 것 내가 못 같습니다. 하나님 것 가지고 있으면 바로 드려야 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 법궤를 가져갔다가 혼 줄이 납니다. 하나님이 주셨을 때만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이지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은 것은 가지고 있으면 화만 불러옵니다.

여리고 성의 것은 가나안땅에 들어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얻은 첫 결실입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그것을 나에게 돌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 아이성의 것은 달랐습니다.
“… 거기서 탈취할 물건과 가축은 스스로 가지라 …”(수 8:2) 첫 번째 여리고 은금 동철은 하나님께 드리고(수 6:19), 성의 소와 양과 나귀는 죽이라고 했습니다(수 6:20). 그런데 아이성의 것은 다 가지라는 것입니다. 아이성 뿐만이 아닙니다. 앞으로 점령하게 될 모든 성은 아이성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다 주시는 것입니다. 다 차지하게 하시기 위해서 이 땅으로 인도하신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을 못 참고 욕심을 내었던 것입니다. 기다리세요. 결국 우리에게 다 주십니다. 미리 하나님의 것을 탈취하지 마세요.

사람의 말을 의지했습니다.
“여호수아에게로 돌아와 그에게 이르되 백성을 다 올라가게 하지 말고 이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이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하지 마소서 하므로”(수 7:3)
여호수아는 아이성을 정탐하게 했습니다. 정탐한 것이 문제는 아닙니다. 정탐꾼들이 돌아와 보고하고 그들은 상대를 우습게 생각했습니다. 아이성이 작으니까 한 3천명만 보내도 넉넉히 이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참패였습니다. 얼마 전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것을 본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리고성을 점령할 때는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궤를 앞세우고 매일 매일(6일 동안) 돌았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했습니다. 그 성이 크고 두려우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이성은 자기들끼리 쳐서 이길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계시지를 않습니다. 언약궤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앞세우지도 않았습니다. 아마 하나님께 먼저 기도했다면 아간의 일도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을 의지했습니다.
우리의 가치관을 사람에게 두면 안됩니다. 부자에게 의지하면 안됩니다. 지식에 학벌에 의지하면 안됩니다. 하나님께 의지해야 합니다. 아루 아파트에 1억이 넘는 차가 왔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거 모릅니다. 1억 짜리인지 예지아빠가 알려줬습니다.
여러분! 큰 것, 비싼 것 만 좋아하지 마세요. 사람에게는 자기에게 맞는 것이 있습니다. 신발이 맞아야 합니다. 옷도 맞아야 합니다. 여러분 맞지 않으면 큰 신발 신고 다닐 수 있습니까? 집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의지하세요. 그것이 성도에게 맞는 것입니다.

전심 전력하지 못했습니다.
여호수아의 정탐꾼들은 3천명만 보내면 된다고 했는데 하나님은 먼저 “이에 여호수아가 일어나서 군사와 함께 아이로 올라가려 하여 용사 삼만 명을 뽑아 밤에 보내며”(수 8:3) 라고 했습니다. 있는 군사가 놀면 뭐합니까? 힘을 보태야 합니다. 하나님이 힘이 없어서 3만 명을 보내라고 합니까? 사람은 3천명만 있으면 된다는데 하나님은 3만 명을 보내라고 합니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하나님은 사람의 힘에 의지한다고 숫자에 의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오늘은 유일하게 오히려 하나님이 사람을 더 많이 보내십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이 적게 보낸 것은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교만이었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아직 부족하다 늘 그렇게 생각해야 됩니다. 이만하면 되었다 그런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계속가야 됩니다. 우리의 가장 큰 적은 나태함입니다. 저만큼 믿음생활하면 되었다 하는 것이 없습니다. 20번 넘게 성경 쓰신 분이 있습니다. 계속 씁니다. 시험은이요 머무는데 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개인으로서는 다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나태하게 정치하고 살면 대통령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가 망합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외국에 많이 나갔는데 외국에 가서 가능하면 밤에 잠을 안자고 한국으로 얼른 돌아온답니다. 수행원들이 많아 하루 밤 더 자면 호텔비용이 많이 나와서 비행기에서 자면 되지 하고 돌아온답니다. 두바이 왕자들은 하룻밤에 몇 천 만원 하는데서 자고 비행기도 천 만 원씩 되는 것 타고 다니지만 우리 대통령은 호텔비가 아까워서 호텔에서 안자고 돌아옵니다. 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도 가도 갈곳이 있습니다. 교만하면 안됩니다. 허리를 동여야 됩니다. 할 일이 많습니다. 도울 곳이 많습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삼상 7:3)고 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약 4:4) 세상과 친구가 되지 마시고, 하나님과 친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3-14)

전략이 없었습니다.
여호수아는 3천명을 아무 전략 없이 그냥 보냈습니다.
하나님의 전략을 보십시오. 10배를 더 보내시고도 전략을 수립합니다. 숫자적으로만 우세하다고 그것만 믿으면 안됩니다.
“너희는 매복한 곳에서 일어나 그 성읍을 점령하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너희 손에 주시리라”(수 8:7)
“여호수아와 온 이스라엘이 그들 앞에서 거짓으로 패한 척하여 광야 길로 도망하매” 유인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19절 “그의 손을 드는 순간에 복병이 그들의 자리에서 급히 일어나 성읍으로 달려 들어가서 점령하고 곧 성읍에 불을 놓았더라” 협공, 철저하게 준비된 전략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여리고 성처럼 단번에 무너뜨리는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왜 이처럼 수고로운 방법을 일러주셨을까 하는 겁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만 만나를 먹었습니다.
가나안땅에 들어와서는 만나가 끊어 졌습니다. 가나안땅에 토산품이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 하라는 것입니다. 전쟁에서이기는 법을 가르쳐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도저히 우리의 힘이 한계가 있을 때 도우십니다. 그러나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는 사람은 돕지 않습니다.

본문 18절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잡은 단창을 들어 아이를 가리키라 내가 이 성읍을 네 손에 넘겨 주리라 여호수아가 그의 손에 잡은 단창을 들어 그 성읍을 가리키니” 단창을 들어 아이를 가르키십시요. 우리의 전략을 통해 가리키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재능을 활용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도 단창이 있습니다. 사용하시기를 바랍니다.
요즘 제일 잘 나가는 인기 여 그룹이 있습니다. 이 그룹은 시집가면 끝납니다. ‘소녀시대’입니다. 요즘 일본에서도 아이튠즈(iTunes) 뮤직비디오 차트 1위를 비롯해 일본 최대 음악 사이트 및 각종 음악 포털에서도 인기 최고입니다. 한국 욘사마만 좋아했는데 이번에는 소녀시대가 휩쓸고 있습니다.
이 그룹이 인기를 끌 수밖에 없는 것은 일단 머리 수(멤버)가 많습니다(9명). 윤아, 수영(170), 효연, 윤아-유리(코수술만 함 167), 태연, 정수연-제시카, 태연-티파니(162), 이순규-써니(158), 서현(자연미인 168) 많다보니까 이중에 한 명만 좋아해도 인기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철저한 준비와 연습입니다. 대충하는 것이 아닙니다. 최고수준으로 철저히 준비합니다.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키가 큰 수영이와 유리를 많이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키가 제일 작은 써니(158)도 인기가 많답니다. 초등학생들이 제일 좋아한답니다.

유대인의 격언에 인정받지 못하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담보 없이 돈 빌려주는 사람, 공처가, 그리고 도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제가 선교하면서 제일 많은 받는 이야기 중에 성령으로 하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입니다. 압니다. 성령에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전략, 노력이 필요합니다. 집중이 필요합니다.
단창(키돈)은 긴 창이나 방패가 아닙니다. 사실 그렇게 훌륭한 무기는 아닙니다. 창도 창이지만 정신력입니다. 승리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그리스 스파르타군사 훈련에서 한 병사가 부러진 짧은 칼을 가지고 연습했습니다. 칼이 작으니 불리합니다. 그래서 대장에게 가서 부러지지 않은 온전한 칼로 바꿔달라고 했습니다. 이때 대장이 말하기를 ‘부러진 칼이기 때문에 남보다 한발 앞서 적을 찌르도록 연습하라’고 하고 그냥 돌려보냅니다. 단창이 문제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정신력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단창입니다. 뭐 그렇게 많은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큰 교회도 아니도, 물질도 부족합니다. 단창입니다. 그러나 단창을 들어 세상을 가리키십시오.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꿈을 꾸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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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11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16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창 28:10-16)

2단지 입구에 보면 자동차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아놓은 말뚝 같은 것이 있습니다. 어떤 곳은 돌 같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곳은 철로(스텐레스) 만들어져 있습니다. 한 두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이곳을 지나가다가 그 통을 손바닥으로 두드려 보는 것입니다. 한참을 두드리다가 또 옆으로 가서 다른 통을 두드립니다. 엄마는 가려고 서 있는데 이 아이는 가지 않고 이통 저통 두들겨 봅니다. 이 아이에게는 호기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호기심은 이 아이에게 꿈을 꾸게 합니다. 이다음에 커서 해 보고 싶은 것이 많이 생기게 합니다. 우리는 아이들을 보면서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기쁨을 얻게 됩니다. 바로 아이들에게는 무한한 꿈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아이들과 같이 꿈만 꿀 수 있다면 어린아이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여러 가지로 이해할 수 있지만 어린아이의 특징중의 하나는 꿈이 있다는 것입니다. 꿈이 없는 사람은 어린아이와 같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꿈을 꾸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베푸신 첫 이적은 혼인 잔치 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이었습니다(요 2:1-10). 어머니 마리아가 난처한 표정으로 예수를 바라보며 포도주가 떨어졌음을 의논했을 때 예수님은 “아직 내 때가 아닙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혼인잔치의 기쁨을 망칠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도 만들어 내셨습니다(요 6:9-13).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면서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고 위로 하셨으며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요 14:2)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마 6:25)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꿈은 헛된 꿈이 아닙니다. 우리의 꿈은 이루어지는 꿈입니다. 그것은 바로 천국의 꿈입니다. 우리는 죽어도 꿈이 있습니다. 그런 우리가 이 땅에 잠시 살면서 무슨 꿈을 못 꾸겠습니까? 꿈을 꾸세요.

페르디난드 데 레세피는 1854년 이집트로부터 수에즈 운하 건설권을 획득하여 1859년 4월 공사를 시작한 뒤 10년만인 1869년 개통시켰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말할 때도 그는 그렇기 때문에 더 성공시킬 가치가 있다고 했습니다. 자신감, 열정,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일했습니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파나마 운하에 도전합니다. 그는 1879년 파나마 운하의 공사권을 파나마 정부로부터 따냅니다, 하지만 10년 뒤인 1889년 이 공사를 성공시키지 못하고, 그와 함께 그가 운영했던 회사도 파산하고 맙니다.
나중에 미국 정부가 사들여 완성하지만 사실 레세피가 시작하지 않았으면 파나마 운하는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파나마 운하도 그의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불가능해 보이고 어려워 보이지만 시작을 하세요. 내가 못하면 다음 사람이 합니다. 다음 세대가 합니다. 그것이 선한 일이라면 포기하지 마세요.
징기스칸은 “한 사람의 꿈은 꿈으로 남지만 만인의 꿈은 현실이 된다”고 했습니다.

“Boys,Be ambitious!”(젊은이들이여 꿈을 가져라) 널리 알려진 이 말은 19세기 세계적으로 유명한 식물학자이며 농학자였던 미국 윌리엄 클라크 박사가 한 말입니다.
매사추세츠 주립농과대학 학장이었던 그는 1876년 7월 일본 삿포로 농림학교 초대 교장에 취임했습니다. 그의 일행이 처음 일본에 도착했을 때 유난히 ‘큰 짐’을 본 장학관이 “무슨 짐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성경이지요.”
“성경은 가르칠 수 없는데요.”
“그러면 돌아가겠습니다.”
돌아가겠다는 말에 크게 당황한 장학관은
“강의 시간 이후에 가르치시지요”라고 허락했습니다. 그는 학생들에게 농업기술을 전수하는 한편 ‘성경에 인생의 꿈이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임기를 마친 후 그는 고별사에서 ‘젊은이들이여 꿈을 가져라’란 이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일본 삿포로농과대학 교정에 세워진 그의 동상에 이 세계적인 명언이 새겨져 있습니다. 성경에는 인생을 살리는 ‘꿈’이 있습니다.

중국에 선교사로 간 허드슨 테일러가 1847년 고국인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다시는 걸을 수 없을지도 모르는 위험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수개월 동안 침대에 누운 채, 머리맡에 달린 줄을 잡고서야 간신히 옆으로 몸을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너무도 허약했기 때문에 편지도 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허드슨 테일러는 편지를 받아쓰게 했습니다. 침대 발치 벽에는 커다란 중국 지도를 걸어 놓고,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계획을 구상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허드슨 테일러는, 아직 들어가지 못한 중국 내륙에 있는 9개의 성에서 개척 선교를 할 18명의 선교사 후보생을 모집하였습니다. 누군가와 시간을 많이 보내면, 그 사람의 꿈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매일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꿈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이 과정은 다음과 같은 중요한 질문을 함으로써 시작됩니다. ‘다음에는 무엇을 할까요? 주님께서 제게 원하시는 꿈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을 향한 주님의 사역 중에서 제사 감당해야 할 부분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이 되고서도 꿈이 없다고요. 저는 단적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그분은 기도하지 않는 분입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꿈을 꾸게 합니다. 하나님이 꿈을 갖게 하십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잘 보이는 벽면에다 이 계획을 붙여 놓았습니다. 어느 것도, 심지어는 병마도, 중국 내지를 복음화 하려는 그의 꿈을 막지 못했습니다.

최근 “순교자의 소리”측은 중국으로 사람을 파견하여 왕 다오(40) 목사를 접견했습니다. 왕 다오 목사는 광조우시의 리앙그렌교회에서 목회 하는데, “공공 질서 교란을 위해 폭도들을 규합”한 혐의로 지난 해 5월에 체포되었다가 몇 주만에 석방된 적이 있습니다. 중국 당국은 계속해서 그를 감시하며 최근에 중국 당국은 수감과 추방 가운데 택일 할 것을 강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왕 목사는 둘 다 원하지 않는 상황이지만, 추방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장기간의 수감생활을 할 각오를 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감옥에 가둔들 우리들의 꿈이 사라지겠습니까? 우리를 죽인들 우리의 꿈이 사라집니까? 우리의 꿈은 영원한 것입니다.

꿈이 무엇입니까? 꿈은 뜻을 정하는 것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가 그랬습니다. 뜻을 정하고 왕의 진미를 먹지 않기로 했습니다.
우상의 재물에 자신의 몸을 더럽히지 않기로 했습니다.
헌신의 결과로 오는 어떤 대가라도 지불하기로 결정하고 그럴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어떤 일이 닥쳐와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겠다는 뜻, 이것이 다니엘과 세 친구의 꿈이었습니다. 헌신된 사람은 사람을 두려워하기보다는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도 왕들과 그 나라 방백들의 모함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그 결과는 승리요 축복이었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 29:25)

야곱은 꿈을 가졌습니다. 운명처럼 여겨지던 당시 장자권의 축복을 차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야곱은 꿈을 꾸어도 아마 장자로 태어나는 꿈을 꾸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기회가 온 것입니다. 형 에서가 사냥을 나간 후 마침 어머니의 집안에서 어머니의 일을 돕고 있던 야곱이 팥죽을 쓰고 있었는데 집안에는 아무도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때 사냥 나갔던 에서가 배가 몹시 고프든 차에 팥죽 냄새를 맡고는 야곱에게 갔습니다.
야곱 형이 지금 배가 몹시 고픈데 팥죽 한 그릇 줘라, 대답을 않습니다. 두, 세 번 말을 합니다
그때 야곱이 심각하게 이야기를 합니다. 형 내가 할 말이 있는데, 이 팥죽을 줄 테니 형의 장자권 나에게 주면 안 돼 하고 말했습니다.
그때 농담인지 진담인지를 몰라도 에서가 말을 합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인데 지금 배가 고픈데 장자권이 무슨 소용이냐! 그래 장자권 네가 가져!” 그럽니다.
결국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형과 동생이 뒤바뀌는, 하나님의 축복의 물줄기가 에서로부터 야곱으로 바뀌어지는 영적 천재지변과 같은 사건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하여 야곱에게는 수많은 고난이 따르고 줄을 이으면서 쫓아오고 있습니다.
먼저는 아버지를 속이게 되는 불효자식이 됩니다. 형의 보복을 피해 집을 떠나게 되는 나그네 신세가 됩니다. 삼촌 라반에게 3번이나 사기를 당하게 됩니다.
그의 생애가 참으로 파란 만장한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후에 야곱은 바로 앞에서 험악한 130년의 생애를 보내었다고 과거를 회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도 야곱처럼 꿈을 꾸어야 합니다. 꿈이 없으면 아무일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12)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본문에 야곱이 긴 꿈을 꿉니다.
물론 구약시대이고 하나님의 특별한 꿈이었다고 판단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특별한 꿈이 아니더라도 꿈은 사실 그 사람이 평소에 생각하던 것이 나타납니다.
저도 가끔 꿈을 꿉니다. 그런데 거의 교회와 관계 있는 꿈을 꿉니다. 늘 교회만 생각하니 당연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16절에서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고 합니다. 꿈의 결론입니다. 하나님이 이곳에 계십니다. 우리교회에 계십니다. 내 옆에 계십니다.

역사상 위대한 선교사가 많이 있지만 제가 관심을 가지는 선교사중의 한 사람은 알베르트 슈바이처(1875-1965)입니다. 슈바이처는 독일의 의사, 음악가, 철학자, 개신교 신학자이자 루터교 목사입니다. 이것도 다 대충한 것이 아니라 박사학위만 4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 박사학위 때문만은 아닙니다.
슈바이처는 1875년 알자스의 카이제르스부르크에서 루터교 목사인 루이 슈바이처 목사의 큰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부모는 슈바이처의 건강 때문에 몸이 약한 아들의 건강을 위해 독일 농촌인 귄스바흐에서 자랐습니다. 귄스바흐에는 가난한 루터교인들이 살았습니다. 거기다 아버지는 또 가난한 아프리카 사람들의 비참한 삶에 대해서 자주 설교했습니다. 거기서 슈바이처는 가난한 자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대학생 시절, 19세 이상의 독일국민은 군복무를 해야 한다는 병역법에 따라 군복무를 하였는데 이때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1899년 스트라스부르의 목사가 되었으며, 1902년 모교의 신학부 강사가 되었습니다.
군대 복무 중 성령강림주일 휴가를 집에서 보냈는데, 이때 “나는 이렇게 가족들과 행복하게 휴가를 보내는데, 이러한 행복을 나만 누려도 되는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려서부터 갖고 있던 가난하고 비참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나만 행복하게 살 수 없다”고 생각하고 아프리카(현재 가봉 공화국) 랑바레네로 떠났습니다. 병원 건물은 선교사가 사용했던 닭장을 수리하여 사용했습니다.
그는 저술과 강연, 연주, 레코드 등에 의한 수입으로 병원을 자력으로 운영하였습니다. 그러나 자금이 달려 운영이 어렵게 되자, 병원의 기금을 모집하기 위하여 유럽으로 돌아왔을 때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가 태어난 알사스 지방은 당시 독일의 영토였으므로 독일 사람이라는 이유로 구금되었으며, 1917년 프랑스 포로 수용소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그에게 준 가장 큰 상처는 어머니가 1916년 프랑스 군인들의 군마(軍馬)에 치여 죽은 돌아가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가두고, 어머니를 죽인 프랑스를 국적으로 선택했습니다. 이 지역이 단순히 프랑스로 넘어갔기 때문이 아닙니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가봉에서 선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1924년 아프리카로 돌아갔으나, 병원은 부서져 뼈대만 남아 있었습니다. 병원운영에 필요한 돈은 3년에 한 번 꼴로 유럽으로 돌아와 연주회를 열어 번 돈과 저서의 인세, 강연으로 받은 돈과 기부금으로 충당했습니다. 슈바이쳐도 부유하지 않았습니다. 화려하지만은 않았습니다. 그 많은 재주를 가지고 보통 선교사와 마찬가지로 살았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한 영혼을 인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생명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나는 나무에서 잎사귀 하나라도 의미 없이는 뜯지 않는다. 한 포기의 들꽃도 꺾지 않는다.
벌레도 밟지 않도록 조심한다. 여름밤 램프 밑에서 일할 때 많은 벌레의 날개가 타서 책상 위에 떨어지는 것을 보는 것보다는 차라리 창문을 닫고 무더운 공기를 호흡한다.” 고 했습니다. 우리도 생명을 소중히 여깁시다. 그러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내부에서 빛이 꺼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일이다. 안에 빛이 있으면 스스로 밖이 빛나는 법이다.”고 했습니다.

우리 주앙교회는 컴퓨터선교와 인터넷를 통해서 복음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꿈이 있습니다. 미래에 비전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교회의 모습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다음세대의 우리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부르짖는 것은 ‘다음 세대에 더 좋은 교회가 되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음세대에게 물려 줄 믿음의 유산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을 물려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는 다음 세대를 위하여 기꺼이 대가를 지불할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조금 더 고생을 해도 다음세대에게는 더 좋은 것을 물려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외적인 것뿐만 아니라 내적인 것까지 더 좋은 것을 물려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나귀를 드린 사람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4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마21:1-5) 

사람의 진실함과 진정성을 알기를 원한다면 그 사람의 마지막 길을 살펴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브라질 살바도르에 있는 여섯살 난 선교사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름은 매튜입니다. 어느 날 아침 그는 열병으로 끙끙 앓더니만 열이 높아가면서 눈의 초점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부모는 아이를 차에 싣고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매튜는 병원으로 가는 동안 엄마 무릎 위에 누워서 허공으로 손을 내밀었습니다. 엄마가 손을 잡자 뿌리치고 또 허공을 향해 손을 내밀었습니다. 무엇인가를 잡으려고 했습니다. 엄마는 어리둥절해서 “매튜야 뭘 잡으려고 하니?” 물었습니다. 매튜는 “예수님 손을 잡으려는 거예요.” 라는 말과 함께 눈을 감았고 혼수 상태에 빠졌습니다. 이틀 후에 매튜는 세균성 뇌막염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매튜는 비록 여섯 살 밖에 못살았지만 죽음의 순간에 예수님을 붙잡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매튜보다는 많이 살았습니다. 많이 산 것이 자랑이 아닙니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입니다. 우리에게도 어느 날 마지막 순간이 홀연히 온다면 예수의 손을 잡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걸으신 마지막 길은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었습니다. 좀더 가깝게는 감람산 가까이 있는 벳바게라는 동네에 이르렀을 때의 일입니다. 사실 여기까지 참 오랜 세월이 걸렸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은 결코 여리고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갈릴리 나사렛에서 시작된 것도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위한 여행은 에덴 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던 그 순간에 예수님을 갈보리를 향해 출발하신 것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나이는 33살입니다. 사실 유대 청년의 나이로는 너무 젊습니다. 예수님은 도 닦다가 죽으신 것도 아닙니다. 공부하시다 죽으신 것도 아닙니다. 병에 걸려 죽으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8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19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마 20:18-19)

죽으실 것과 부활하실 것을 아시고 가신 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도 육신의 삶으로는 이 땅에서 마지막 길입니다. 십자가를 지실 때 예수님의 제자들이 다 도망가기는 했지만 오늘 말씀을 통해서 그래도 제자들이 많이 훈련되어 있는 모습을 보게됩니다.
사실 오늘 명령은 많은 궁금증을 불러일으킵니다. 두 제자에게 명령하시기를 본문 2-3절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 입장에서 본다면 “정말 거기가면 나귀가 있습니까? 어떻게 아셨습니까? 정말 그 주인이 그 나귀를 주겠습니까?”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어찌된 일인지 말을 잘 듣습니다. 아마 이 두 제자는 얼마 전에 변화 산에 함께 올라갔던 제자인지 모릅니다. 하늘에서 빛이 비추이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을 목격한 제자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어쨌든 이 두 제자들은 더 이상 묻지 않습니다. 주님이 다 아시기 때문에 보내는 것이겠지 하고 갑니다.

그런데 정작 언 듯 이해가 안 되는 되는 것은 나귀의 주인입니다.
나귀는 유대민족이 야생 동물 중 처음으로 길을 드려 가축으로 사랑 받는 유용한 동물이라고 합니다. 저는 천국에 가면 만나보고 싶은 사람도 많고 질문할 것도 많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 나귀주인입니다. 그런데 또 문제가 있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도 성도 모릅니다. 그러니 만나기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예수께서 나귀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는가? 환상을 보았는가? 천사가 나타나 알려 주었는가? 편지를 받았는가? 이 메일을 받았는가? 우리는 여러 추측만 할 뿐이지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가 쓰시겠다”고 할 때 선 듯 내어주었다는 것입니다.
나귀는 군마가 아닙니다. 요즘 자동차로 말하면 소형차입니다. 참 예수님도 이상하십니다. 탈것이 없으면 그냥 들어가시면 되지 굳이 뭘 타고 가실 필요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소형차타고 들어가면 이상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님의 방법입니다.

애굽의 바로는 이스라엘사람을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삼으셔야 하겠다고 광야로 끌어내려고 할 때 이스라엘 백성을 내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싸워서 이길 사람이 어디있겠습까? 개인이든 국가든 하나님 대적하다가는 다 망합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을 못 내줍니까? 자기들의 소유물인 것으로 알았습니다. 가지 것 인줄 알았습니다. 우리는 내 것이 없습니다. 다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자식도 내 소유물이 아닙니다.

내가 가지고 있으면 마구간에 매어 있어야할 나귀 새끼에 불과합니다. 잘 생각해보면 주님이 쓰시고 나면 찾아오면 됩니다. 아주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작은 나귀 새끼에 불과하지만 예수님께 드려졌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타고 가시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친절이 이처럼 고귀한 목적에 사용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무엇인가를 하나님께 받치기 원하는 느낌을 받곤 합니다. 그러나 확실치 않기에 드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기회를 놓쳐 버립니다. 여러분! 돈벌기 위해서 얼마나 기회를 봅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드릴 기회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드리고 싶어도 드릴 것이 없는 때가 있습니다. 있을 때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군마는 아니지만 부끄러워하지 말고 주임이 쓰시겠다고 할 때 드려야 합니다.
여러분!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너무 크고 소중하기 때문에도 하나님께 드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이 경우가 더 많겠지요? 그러나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과부가 두 렙돈을 헌금함에 넣을 때 이까짓 것이 무슨 보탬이 되겠나 하면 그 헌금 못합니다. 이까짓 작은 것이 하나님께 드려져서 무슨 유익이 있게나 생각하면 못 드립니다.
우리는 누구나 작은 나귀 새끼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성경타자 프로그램 만들면서 성장아이콘을 표시하는데 처음에는 화분을 하나씩 줍니다. 가입만 하면 누구에게든지 기본으로 제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기본으로 주신 것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심을 수 있는 화분 같은 것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노래하는 재주일수도 있고, 다른 사람을 베려하는 마음일수도 있고, 언어능력일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 모두에게는 나귀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용하신 용어는 고대의 왕이 세금을 징수할 때 사용하는 용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신하의 소유물에 대해 권리를 가지고 있는 왕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어쩌면 성경은 특별한 것을 드린 사람이 아니라 평범한 것을 드린 이들이 가는 곳인지 모릅니다. 라합은 밧줄을 드렸습니다. 다윗 소년은 물맷돌을 드렸습니다. 모세는 잡고 있던 지팡이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드렸을 때 모두가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생명을 구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구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을 때는 그냥 마굿간에 있는 새끼 나귀일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드렸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 타고 갑니다. 귀하게 사용됩니다.

미국에서 19세기 무렵에 구두를 수선하던 한 청년을 그리스도께 인도한 주일학교 선생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킴벌(Kimvall)입니다. 여러분은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일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다릅니다. 킴벌이 전도한 사람은 여러분이 잘 아는 바로 드와이트 무디(Dwight Moody)입니다. 그 후 우리가 아는바와 같이 무디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무디가 전도한 사람은 수를 셀수가 없지만 무디의 설교가 프레드릭 B. 마이어(Frederick B. Meyer)라는 젊은 설교가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마이어는 대학 캠퍼스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월버 채프만(J. Wilbur Chapman)을 회심시켰습니다. 채프만은 YMCA에서 일했는데 이 때 야구 선수 출신의 빌리 선데이(Billy Sunday)를 노스 캐롤라이나의 찰로테에 부흥강사로 청했습니다. 찰로테 지역의 지도자들은 열심히 생겨 또 다른 운동을 전개했으며 모르드개 함(Mordecai Hamm)이라는 사람을 강사로 초청했습니다. 이 집회에서 빌리 그래함(Billy Graham)이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보스턴의 주일학교 교사 한 사람이 일으키게 될 역사를 우리는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가진 작은 나귀 하나가 변화시킬 세상을 우리는 다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께 드려졌을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어제 일산에 있는 십자성 선교회라는 곳에 다녀왔습니다. 자주 강의를 가는 편인데 그곳 선교회를 세우신분을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그분이 다른 곳에 계시고 일을 하시기 때문에 제가 만나지를 못하고 제 강의만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 선교단체를 세우신 분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십일조를 가지고 내가 살게 하소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십의 구조를 드리고 십일조를 자기가 살아가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대단한 믿음입니다. 여러분! 십일조 가지고 살아야 하니까 돈을 많이 벌어야지요. 하나님이 축복해 주셔서 지금 사업을 잘하고 계시고 약속대로 십의 구조를 하나님께 드린답니다.

내가 먼저 우리 주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먼저 선택해 주셨습니다. 그것도 갑자기 성의 없이 아무대서나 부르신 것이 아니라 이미 창세전에 지정하시고, 부르셨다고 합니다. 우리는 물건을 살 때 마음을 드는 것을 고르기 위해서 흠이 없는지 잘못된 것은 없는지 살펴봅니다. 한참을 서서 고릅니다.
신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은 사탄은 사람을 선택할 똑똑하고 약삭빠르고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선택한답니다. 하나님은 사탄이 다 가져가고 나머지를 선택하셨답니다. 똑똑하지도 않고, 가진 것도 없고 쓸모 없이 버려진 나를 선택하셨습니다. 쓰레기 같은 우리를 선택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가진 것을 빼앗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닙니다. 사실은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새끼 나귀는 단지 잠시 빌리자는 것입니다. 구원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3:13)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잘 보세요. 예수님은 너희가 성공한다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지 않습니다. 혹은 너희가 정상에 선다면 구원을 얻으리라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만약 네가 견디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원문을 정확하게 번역하면 “만약 네가 마지막까지 매달려 있다면…”, “만약 네가 끝까지 가기만 한다면”이 됩니다.
제법 오래된 한 오렌지주스 TV광고 중에 ‘따봉(TA BOM)’이라는 포르투갈어(브라질)가 나온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말이 최고라는 뜻으로 이해하는데 TA(지금, 그래) BOM(좋다)로 적당히 좋다라는 정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랜지가 적당히 익어야 좋기 때문에 오렌지 주스에는 그렇게 사용하면 최고로 좋다는 표현이 됩니다. 그러나 식당에서 음식 먹고 서비스하는 사람에게 ‘따봉’하면 그저 그렇다 정도로 이해한답니다. 최고로 좋다는 다른 말은 ‘오찌무(OTIMO)’라고 합니다.
‘견디는 것’은 ‘마지막까지 매달려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왕 포르투갈어로 예를 들었으니까 브라질 사람들이 잘 쓰는 말하나를 더 배우겠습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따봉 보다 더 쉽습니다. 포루투갈어로 결코 포기하지 않고 매달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을 가리켜 “가라(garra)”라고 합니다. ‘가라’의 원래 뜻은 ‘집게발’을 의미합니다. 낭떠러지에 매달려서도 미끄러져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을 수 있는 능력은 집게발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구원을 얻는 것이 마찬가지입니다. 낭떨어지에서도 미끄러지지 않고 버텨야 합니다.

영화 벤허를 촬영하는 동안 철톤 헤스톤은 마차 타는 것을 배우는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합니다. 영화에서도 연습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까. 많은 연습을 한 후에 마침내 마차를 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의심이 되었습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감독인 세실 드밀(Cecil. B. DeMille)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마차는 탈 수 있는데 경주에서 이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때 드밀이 말하기를 “단지 경주에 남아있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당신이 이기도록 해 줄 겁니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이런 확신을 주십니다. “단지 포도나무에 붙어만 있어라 그러면 내가 열매를 맺게 해줄 것이다.”

우리의 ‘가라’ 집게발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마지막에 할 일이 무엇입니까? 순종이 집게발입니다. ‘가라’입니다. 나귀를 드렸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음을 말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끝까지 붙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암미와 루하마의 하나님

“너희 형제에게는 암미라 하고 너희 자매에게는 루하마라 하라” (호 2:1)

요즘 KBS2 드라마 중에 제빵왕 김탁구를 아시지요? 그런데 진짜 제빵 왕이 성경에 나옵니다. BC 782-753년경에 북이스라엘을 통치한 여로보암 2세 때 활동한 호세아입니다. 호세아의 출생지는 정확히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북왕국에서 태어난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의 직업은 제빵업자이거나(7:4), 평범한 농사꾼이었습니다. 호세아의 이름은 신약 식으로 부르면 ‘예수’입니다. 이름의 뜻도 같습니다. ‘구원’이라는 히브리식 이름입니다.
오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조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다윗 때 통일 왕국을 이루어 솔로몬에게 물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의 우상숭배와 타락으로 나라가 남북으로 분단되었습니다. 그때가 B.C. 931년입니다. 북왕국을 이스라엘이라고 부르고 남왕국을 유다라고 불렀습니다. 북왕국의 초대왕이 여로보암(왕상 13:1-14:31)입니다. 남왕국 유다의 초대왕은 르호보암(대하 10:1-12:16)입니다. 북 이스라엘의 초대왕이 여로보암1세이고 오늘 호세아가 선지자 활동을 하던 시기의 여로보암은 2세로 13대 왕으로 왕위에 41년(왕하 14:23)을 있었습니다. 남북이 분단된 후에 여러보암2세까지는 149년(931-782)이 흘렀습니다. 여러보암2세가 등극하고 정확히 61년 있다가 721년에 북왕국 이스라엘은 망합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왕이 19명 있었는데 한 명도 선한 왕이 없었습니다. 그나마 남왕국 유다는 20명의 왕이 있었는데 선하다고 할 수 있는 왕이 7명 정도입니다. 북왕국 210년, 남왕국 345년 동안 유지하다가 망합니다. 하나님은 이 기간에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내 회개할 것을 촉구하였습니다. 사실 북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버리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늘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다시 한번 회개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여로보암2세는 북왕국 19명의 왕 중에 41년이라는 제일 오래 동안 통치한 왕입니다. 이 기간이 북이스라엘이 제일 왕성하고 평화로웠던 시기였습니다. 수리아가 앗수르의 침략으로 쇠약하여지는 틈을 타서 하맛에서부터 아라바까지 땅을 차지했습니다(왕하 14:25). 그런데도 성경은 왕하 14:23-29까지 간단하기 소개하고 마칩니다. 사실 이 기간이 제일 번성했던 기간이니 만큼 제일 많은 기록을 남겨야하지만 성경의 저자는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다만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26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고난이 심하여 매인 자도 없고 놓인 자도 없고 이스라엘을 도울 자도 없음을 보셨고 27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의 이름을 천하에서 없이 하겠다고도 아니하셨으므로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손으로 구원하심이었더라”(왕하 14:26-27) 이 기간동안의 번영은 하나님이 이루어 주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으로 끝입니다. 너무 허망한 것 같은 생각이 안 듭니까? 그래도 북이스라엘에서 제일 잘 나가던 시기인데 어떻게 이렇게 짧게 기록되고 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역사는 그렇게 짧게 기록된 반면에 하나님은 이 시기에 가장 강력한 선지자 두 사람을 보내셔서 회개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당시에 활동을 했던 아모스와 호세아입니다. 사실 성경에서 이 두 사람만큼 인상에 남는 선지자는 흔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제일 잘 나가던 그 시기에 하나님은 가장 강력한 메시지를 주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 없는 번영은 죄와 타락만 키울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없는 국가, 개인 잘되는 것 부러워 할 것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만 키우고, 악만 키우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잘 되어도 하나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잘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아이에게 부모님 없으면 먹을 것, 입을 것 다 주어도 소용없습니다. 따라합시다. “하나님 없이는 아무데도 안 간다”, “예수님 없이는 아무 일도 안 한다”

북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없이 번성하면서 나타난 현상을 아모스가 잘 지적했습니다.
“6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가난한 자를 팔며 7 힘 없는 자의 머리를 티끌 먼지 속에 발로 밟고 연약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아버지와 아들이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암 2:6-7)라고 했습니다.
“4 상아 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 켜며 양 떼에서 어린 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잡아서 먹고 5 비파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 6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요셉의 환난에 대하여는 근심하지 아니하는 자로다”(암 6:4-6)라고 합니다.
저는 침대 사용 안 합니다. 침대가 문제이겠습니까? 자기가 마치 다윗이 된 것처럼 행세한다는 겁니다. 요즘 우리가 왕처럼 살고있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아모스는 이스라엘이 결국 망한다고 예언했습니다. 이런 쓴 소리하고 북왕국에서 살아남을 수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아모스는 북왕국에서 남왕국으로 탈출했습니다. 탈북자인 샘입니다. 그리고 계속 남왕국에서 북왕국을 향해서 너희들 그렇게 살다가는 망한다. 왕과 신하들이 포로로 잡혀갈 것이다(암 1:15).
“내가 아모리 사람을 그들 앞에서 멸하였나니 그 키는 백향목 높이와 같고 강하기는 상수리나무 같으나 내가 그 위의 열매와 그 아래의 뿌리를 진멸하였느니라”(암 2:9)
“2 주 여호와께서 자기의 거룩함을 두고 맹세하시되 때가 너희에게 이를지라 사람이 갈고리로 너희를 끌어 가며 낚시로 너희의 남은 자들도 그리하리라 3 너희가 성 무너진 데를 통하여 각기 앞으로 바로 나가서 하르몬에 던져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암 4:2-3)고 쓴 소리를 합니다.

이런 사치와 방탕에 대해서 호세아도 입장을 같이합니다. “이러므로 그들은 아침 구름 같으며 쉬 사라지는 이슬 같으며 타작 마당에서 광풍에 날리는 쭉정이 같으며 굴뚝에서 나가는 연기 같으리라”(호 13:3)고 예언했습니다. 망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아모스와 달리 북왕국에 남아서 선지자 활동을 했습니다. 아모스와는 방법이 달랐습니다. 누가 옳다는 것이 아닙니다. 두 사람 모두 하나님이 사용하신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은 두 방법을 모두 사용하신 것입니다. 탈북자가 되어서 눈물로 호소한 아모스도 가슴아픈 선지자이지만 호세아는 그 북왕국에 남아서 그 사람들처럼 되어야 하는 연극이 아닌, 인생을 건 포퍼먼스를 해야하는 선지자였습니다.
그래서 아모스가 죄에 대하여 책망만 했다면 호세아는 그래도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고 구원해 주실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호세아게 그들처럼 되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하실 때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하시니”(호 1:2) 우리는 여기서 잘 이해해야 합니다. 호세아가 음란한 여인과 결혼했다고 해서 타락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창가의 여자 고멜과 결혼했습니다. 아이도 셋이나 낳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자식들의 이름을 하나님이 지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지어주시는 이름이 좋아야 하는데 그렇지를 못합니다. 첫째 아들의 이름은 이스르엘입니다. 이즈르엘은 ‘하나님께서 흩으신다’는 뜻입니다. 이 이름은 예후가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아합 집안의 사람 42명을 집단 살인한 장소입니다(왕하 9:27, 10:13). 둘째는 딸인데 로루하마 ‘하나님께 은총을 입지 못하다’는 뜻이며 아들을 또 나았는데 로암미 ‘내 백성이 아니다’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호세아 입장에서 본다면 참으로 가혹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우리가 다 알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다른 교훈하기 위해서 호세아가 희생당하고 자기 자식들까지 그런 이름을 지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호세아는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합니다. 그것이 선지자의 삶입니다.

호세아는 창녀하고 삽니다. 그녀는 호세아에게 만족을 못합니다. 밤마다 나갑니다. 다른 남자의 품속에서 히히락락하며 밤을 지냅니다. 결혼만 했지 집에는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그 생각만 하면 호세아의 마음은 찢어집니다. 하나님이 그런 여인하고 결혼하라고 해서 한 것입니다. 호세아보다 마음고생 더한 선지자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때는 차라리 죽고싶습니다.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제 친구가 이혼을 한 친구가 있는데 여자가 바람나서 했습니다. 물론 이 친구는 제가 보기에 그럴만한 이유를 상당히 제공했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자의 외도가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번은 그 친구하고 지방에서 차를 타고 고속도로로 오면서 밤새도록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속이 뒤집어져서 참을 수가 없더랍니다. 그리고 그 장소를 알았을 때는 자기가 차에다 기름통을 싫고 그 집까지 찾아갔답니다. 그 집으로 그대로 돌진하여 다 불지르고 끝내고 싶었답니다.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고 돌아오는데 그렇게 속이 아프더랍니다.

지금 호세아에게 하나님은 무엇을 가르치는 것입니까?
내 마음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마음이 그렇게 아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그가 귀고리와 패물로 장식하고 그가 사랑하는 자를 따라가서 나를 잊어버리고 향을 살라 바알들을 섬긴 시일대로 내가 그에게 벌을 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호 2:13)

하나님과 이스라엘백성인 성도들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입니다. 영적으로 하나님과 결혼한 사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무시하고 음란하게 우상을 따르는 이스라엘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마음을 호세아를 통해서 느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정으로 다가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마치 처음 연애하는 남녀의 사이 같았습니다.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을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 같이 하였으며 너희 조상들을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 같이 하였거늘 그들이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저희가 사랑하는 우상 같이 가증하여졌도다”(호 9:10)
바람난 창녀 고멜처럼 되었다는 것입니다. 고멜은 세 자식을 낳고 바람나서 집을 나갔습니다. 자식 버리고 나가는 여자 정말 용서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이 어디에 있습니다. 이런 여인을 사랑하고 찾아오라는 것입니다. “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하시기로 2 내가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그를 사고”(호 3:1-2)라고 합니다. 고멜은 노예시장에 팔렸습니다. 값을 지불해야 데려올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냥 받아주기도 힘든데 값까지 지불을 해야하니 얼마나 힘이 듭니까?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사 42:3) 라고 하나님을 말씀하셨습니다. 왜 바람난 여자 같은 우리를 하나님이 버리지 않으시고 예수그리스도의 보혈로 값을 치르시고 우릴 구하셨습니다.

이제 오늘본문을 말씀드려야할 것 같습니다.
“너희 형제에게는 암미라 하고 너희 자매에게는 루하마라 하라”(호 2:1)
‘암미’는 ‘나의 백성’이라는 뜻이고 ‘루하마’는 ‘긍휼히 여김을 받는자’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가 분단되어있습니다. 구원의 때가되면 회복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나의 백성(암미) 긍휼히 여기신다(루하다)’고 하셨습니다. 창녀 같은 우리를, 자식도 버리고 집나간 우리를 하나님은 비싼 값을 치르시고 우리를 구하셨습니다.

호세아는 호소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호 4:1), “네 백성이 제사장과 다투는 다투는 자처럼 되었음이니라”(호 4:4), “이스라엘은 완강한 암소처럼 완강하니”(호 4:16)라고 합니다. 그러나 회개해야합니다. 암소 같은 고집으로 구원받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삽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호 6:1)
“그러나 애굽 땅에 있을 때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 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 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호 13:4)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호 14:1)

하나님의 이 호소 거절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