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언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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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언약은 내가 너희 조상들을 쇠풀무 애굽 땅에서 이끌어내던 날에 그들에게 명령한 것이라 곧 내가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순종하고 나의 모든 명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렘 11:4)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2-25)

지난 26일 미시령 울산바위 전망대 인근 내리막길에서 단풍 관광객들을 태우고 가던 관광 버스가 긴급 제동시설 옆 비탈면을 들이받아 1명이 숨지고 39명이 다치는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오래 전 스위스에서 어떤 분이 관광버스를 몰고 내려가다가 관광버스 브레이크가 파열되었습니다. 내려가는데 어린 아이가 도로 가운데서 놀고 있었습니다. 안에 있는 분들도 놀랍니다. 이 운전사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모두 말도 못하고 정말 우리 모두가 죽느냐? 저 아이는 어떻게 하느냐? 이런 긴박한 순간에 있었습니다. 그 때 운전기사는 방향을 트는 대로 이쪽으로 가면 이쪽 다 죽습니다. 낭떠러지에 다 떨어집니다. 그런데 운전기사는 아이 있는 쪽으로 가서 아이를 치고 그 아래에 내려가서 섰습니다. 버스 승객들은 모두 살았습니다. 그러나 아이가 죽었습니다. 모두 너무 놀랐지만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손님들은 하나도 안 우는데 운전기사가 우는 것입니다. 운전기사가 비통에 빠졌습니다. 그 아이는 바로 자기 아이였기 때문입니다. 자기 집 앞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인류를 살리려고 하나님의 아들을 희생시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치고 우리를 살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아버지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십자가 때문에 살았습니다. 십자가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이나 욥이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성경을 보았을까요? 보지 못했을까요? 예!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예수님의 말씀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욥은 이스라엘 백성처럼 출애굽의 경험도 없었습니다. 그러면 이들은 어떻게 하나님을 알았고 믿었을까요? 생각해보면 놀라운 일입니다. 저는 오늘 이 문제를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오늘날 우리는 아브라함보다 욥보다 그 다음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보다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과 증거들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마 11:23, 눅 10:11)고 하셨습니다.

오늘 중요한 한가지 사실을 배웁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신앙생활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고 노력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미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특별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믿음보다는 자꾸만 어떤 증거를 더 요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 3:1)고 했습니다. 십자가 만한 증거는 없습니다. 더 이상의 증거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입니까? 성경전체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오셨습니까?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우리의 죄를 사하려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많은 것 가운데 이 십자가를 오페라로 말하면 크라이막스로 만들었습니다. 십자가에 모두 맞춥니다. 그래서 우리가 슈퍼스타나 좋은 기독교의 뮤지컬이나 영화를 보면 모두 어디에 맞추느냐? 포인트가 어디냐?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알면 모두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믿으면 우리 모두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모두 담겨 있는 것, 하나님 은혜의 모든 것, 우리를 위해 대답하시는 것은 십자가를 통하여 대답하십니다. 이 한 분이 지신 이 하나의 사건이 온 인류의 문제를 천만가지 억만 가지 많고 많은 인간의 고민과 문제를 풀어주고 짐을 벗겨주며 길을 열어줍니다.

법을 공부하신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미국의 법은 많은 내용이 성경에 바탕을 두고 만들어 졌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미국에는 어떤 법이 있느냐 하면 만일 어떤 사람이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했는데 그것이 설령 지나가는 말이라고 해도 어떤 사람이 그것을 진심으로 믿고 따라했다가 손해를 보았다면 그 말을 한 사람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주신 언약의 책입니다. 약속의 책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받았던 십계명을 담았던 궤의 이름은 언약궤 또는 법궤라고 말합니다. 신학용어 중에는 계약신학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계시 내지는 특별한 은사를 사모하는 경향이 많지만 신앙이 깊어질수록 거기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못 믿을 때 그런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그런 증거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보다 그 증거를 더 많이 받았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놀라운 광경을 목격한 이스라엘 출애굽 백성이 있었습니다. 홍해의 바닷물이 갈라졌습니다. 이것이 어디 아무 때나 볼 수 있는 그러한 광경입니까? 지금이라면 비디오로, 사진으로 찍어놨을 텐데 정말 아쉽습니다. 정말 대단한 광경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목격한 백성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 때도 사람들은 수많은 병자가 고침을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늘에서 나는 음성도 들었습니다. 남자만 오천명이 넘게 먹은 오병이어의 사건도 일어났습니다. 수만 명이 먹었습니다. 다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일을 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는 다 뒷걸음질 쳤습니다. 아무도 예수님을 향해 그분의 죄는 없다고 소리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는 소리만 울렸습니다.

하나님의 증거가 우리에게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증거가 없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나 욥은 아무 증거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다가오시기 전에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고 했을 때 이 한 말씀을 믿고 떠났습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창 12:4)고 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75세면 살만큼 살았습니다. “이 나이에 무슨 이사를 갑니까? 새 땅은 별로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면서 있었다면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떠났습니다. 여기 잘 보세요? 하나님의 증거가 먼저 아브라함에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없습니다. 기드온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해 양털시험을 한 것과 같은 것도 없습니다. 그냥 같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 라고 했습니다.

욥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욥 1:1) 욥에게 하나님이 먼저 나타나 어떤 증거를 보여 주었다는 말이 없습니다. 욥은 정직하게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사람을 당신의 형상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영혼에 선악을 알 수 있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잠 20:27) 사람의 양심은 속일 수 없도록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다른 사람 다 속여도 자기는 속이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속이지 못합니다. 사람의 깊은 곳 ‘양심, 영혼’을 알고 게십니다.

반도체가 요즘 어디까지 발전했는지 아십니까? 나노(nano)시대입니다. 하도 어려워서 쉽게 말하면 머리털 하나로 천 개를 나누는 것이 나노라합니다.
밀리(milli)가 천 분의 일이고, 마이크로(micro)가 백만 분의 일입니다. 그 다음이 나노(nano)입니다. 십억 분의 일을 말합니다. 머리털 하나로 10만개를 만들 수 있습니다. 시간으로 말하면 1초의 1/10억 해당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나노는 세계에서 절대로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영국이나 독일이나 미국이나 일본이나 한국이 비슷하게 가고 있습니다. 이 정도로 우리가 대단히 앞서있습니다. 인터넷이나 컴퓨터는 우리가 한 30년 늦게 시작했지만 나노는 지금 같이 가고 있습니다. 대단합니다.
사람도 나노를 만듭니다. 지금은 머리카락 같은 것 하나에 넣을 수 있는 것을 불과 30년 전 방만한 컴퓨터였습니다. 이것이 나노시대입니다.
구약시대가 아날로그 시대였다면 지금은 나노시대입니다. 구약이 율법시대이면 지금은 십자가 시대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모든 문제를 아무리 깊은 것도, 아무리 어려운 것도 모두 풀어주고, 모두 대답해주며, 모두 해결해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믿으면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모두 승리합니다. 어떤 문제에서도 승리합니다.

동물에게 본능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본능이 있는 것입니다. 거북이가 바닷가 모래언덕에 올라와 알을 낳습니다. 알에서 막 깨어난 새끼는 물이 있는 바다로 가야 산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죽을힘을 다해서 바다로 갑니다. 연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태어났던 곳으로 돌아와 알을 낳고 죽습니다. 이것은 모두가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하신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정직하게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왜 이 정직에서 벗어나 있습니까? 왜 하나님을 찾지 않고 있습니까?

사탄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4)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고 하셨는데 사탄은 죽지 않는다고 합니다. 최초의 거짓말입니다. 이 거짓말은 누구에게서 왔습니까? 사탄입니다. 사탄은 모두 거짓입니다. 예수님께 세 가지 시험을 할 때도 다 거짓입니다. 거짓으로 유혹합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요 13:2)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눅 8:12)

사탄의 거짓 속임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책망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회개치 못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훈계 받기를 싫어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경히 여김이라 견책을 달게 받는 자는 지식을 얻느니라”(잠 15:32)고 했습니다. 영혼을 우습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영혼을 모르는 겁니다. 여러분도 혹시 영혼을 우습게 생각하시는 것 아닙니까? ‘무슨 영혼이 있어?’ 그러면 큰일납니다. 세상축복 거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영혼에 득이 되는지 해를 입히는지 알고 세상의 축복을 말해야 합니다. 사탄은 세상의 것으로 우리를 미혹합니다. 예수님은 범죄한 팔다리 끊고, 세상의 것을 버려서라도 영혼을 구하라고 말하십니다.

“악을 떠나는 것은 정직한 사람의 대로이니 자기의 길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보전하느니라”(잠 16:17) 구약의 사람들은 자신이 그저 거짓말 안 시키고 정직히 사는 길 외에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정직히 사는 것만으로 안 됩니다. 우리가 정직하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정직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그 정직한 것의 기준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 표준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정하셨습니다. 그 표준을 정하셨습니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 10:38, 막8:3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오래 전 미국 펜실베니아주의 산중턱에 비행기가 추락하여 여섯 명의 희생자를 내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사고현장 가까이에는 교회훈련센터가 있음을 알리는 68피트 높이의 철탑 십자가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AP통신이 전한 사고의 원인은 그 철제십자가에는 늘 불이 켜져 있었는데 그날 따라 그 십자가의 전등불이 꺼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지역을 운항하는 항공기들은 십자가 탑이 밝혀주는 불빛을 보고 그곳을 지나곤 했는데 그 날은 불이 꺼져 있었기 때문에 방향감각을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불꺼진 십자가는 생명이 없습니다. 십자가를 믿을 때 불이 들어옵니다.

마귀가 제일 무서워하는 게 십자가입니다. 천하를 모두 넘어뜨려도 십자가 앞에는 맥을 못 춥니다. 십자가를 말해야 합니다. 십자가만 말하고 보여주면 사탄은 벌벌 떱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진실이 어디에 있습니다. 진리가 어디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디에 계십니까? 십자가에 계십니다.

본문 22절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를 전하니” 이것이 참 소망이요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유대인처럼 표적만 구해서는 안됩니다. 헬라인은 지혜만 찾습니다. 다 필요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십자가보다 먼저 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보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떤 것도 십자가와 바꿀 수 없습니다.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골 2:14) 주님과 함께 십자가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설교 : 이영제 목사
 

하나님의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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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9-10)

우리 기독교인이 가장 잘 사용하는 말 중의 하나가 ‘은혜’입니다. 은혜 없는 기독교는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존재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배드리고 ‘은혜 받았습니다.’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말씀으로 보고도 ‘은혜 받았습니다.’ 라고 합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세상사람이 이해하지 못할 일을 경험하면서도 은혜 받았습니다. 그럽니다.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가능한 말입니다. 기독교는 모든 것이 은혜로 시작하고 은혜로 마칩니다. 내가 노력해서 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가 노력해서 다 피해집니까? 몇 개는 피하겠지요. 그러나 다는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이 피할 길을 열어 주셔야 합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 6:8) 세상에 모든 것을 물로 심판하실 때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습니다. 하나님이 뽑았습니다.
하나님 믿으면 왜 감사의 삶을 살아갑니까?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사합니다. 불평의 삶이 아닙니다. 감사의 삶입니다.

눈이 따가워 안과에 가면 인공 눈물을 줍니다. 의사 선생님이 “하루에 네 번씩 넣으세요.” 그럽니다. 어떤 분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하루에 네 번씩 울면 되겠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울려고 하니까 눈물이 잘 안나오더라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 돌아와 하루에 네 번씩 눈물을 흘리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저도 참 잘 웁니다. 남이 볼까봐 화장실에 가서 웁니다. 혼자 있을 때 웁니다. 교회에서 주님과 함께 웁니다. 은혜 받으면 잘 웁니다.
많이 부족하지만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 하면서 웁니다.

성경 적인 이름으로 제일 많은 것이 남자는 ‘다윗’, 여자는 ‘은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지난 21일(목)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중학생 아들 이모군(13)이 집에 불을 질러 아버지, 어머니, 동생과 할머니 일가족 4명이 숨졌습니다. 이군은 “공부하라는 아버지의 잔소리가 싫다”고 범행을 저질렀습니다. 자식을 두고는 언제나 자식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자식의 문제는 부모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은 자식을 다 욕할 수 있어도 부모는 못합니다. 내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공부도 중요하지만 은혜를 아는 아이로 키워야합니다. 은혜를 알면 사람이 됩니다. 은혜를 알면 다 됩니다. 잘못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디 가서 이 은혜를 배웁니까? 어디 가서 이 은혜를 받습니까?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십자가 앞에 나와야 합니다. 교회에 와야 됩니다. 교회는 노력해서, 우리가 도 닦아서 사람을 만드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함으로 사람을 변화시키는 곳입니다. 내가 노력해서 되면 교만만 생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보세요. 겸손해 집니다. 감사가 넘칩니다. 아직도 국가에 대해서, 사람에 대해서 불만이 많습니까? 분명한 것은 내가 아작 덜 변했다는 것입니다. 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국경없는 의사회는 말 그대로 국경을 넘어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있습니다. 아프리카뿐만 아니라 가깝게는 북한 탈북자들을 돕고 있습니다. 목숨을 걸고 북한을 탈출해 나온 사람들을 돕고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정신 없는 의사들도 있습니다. 북한으로 망명하려 한 혐의(국가보안법 위반)로 의사 신모씨 등 3명이 구속되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지난 2월 스웨덴에 거주하는 지인의 도움으로 중국을 거쳐 북한으로 들어가려 한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 대한민국에서 사는 것을 감사하지 못하면 어디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부모에게 감사하지 못하면 아무에게도 감사할 수 없습니다.
미국에 이민가신 분들이 자녀가 두 가지 말 배우는 것 때문에 고생하니까 한국말을 잘 안 가르치고 영어나 제대로 하라고 해서 지금 부모 자식간에 말도 잘 안 통하는 가정이 많다는 겁니다. 자식하고 깊은 대화를 못하니 자식도 아니라는 말까지 나옵니다. 미국 오바마 대령은 어떤 때는 일주일에 공개석상에서 몇 번씩 한국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한미정상회담 때는 이병박 대통령에게 한국의 교육을 배우려고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지금 대한민국이 잘 살게되니까 한국어가 인기가 좋아지고 있습니다. 한류 붐이 아시아를 넘어 아프리카, 남미까지 일고 있습니다. 한국사람은 한국말을 해야 합니다. 한국말을 해야 한국사람입니다. 은혜를 알아야, 은혜를 받아야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에스라는 노예가 되어 타국에서 살았지만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노예가 되었사오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그 종살이하는 중에 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바사 왕들 앞에서 우리가 불쌍히 여김을 입고 소생하여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게 하시며 그 무너진 것을 수리하게 하시며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우리에게 울타리를 주셨나이다”(에 9:9) 노예가 되었던 것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회복해주신 것을 찬양합니다. 미래를 봅니다. 과거에 매여 원망만 하는 사람은 감사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주실 축복을 바라보세요. 열심히 살다가 하나님을 만날 천국을 생각해 보세요.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은혜가 있으면 봉사합니다.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모 교회 김 권사님은 93세의 고령에도 교회 강단 청소를 사명으로 알고 매주일 예배 1시간 전에 오셔서 기쁨으로 찬송하며 닦고 계셨습니다. 한 번은 너무 힘드신 것 같아 그만 하시라고 하니 “하나님의 사명은 은퇴가 없어요.”하시면서 기쁨으로 봉사했습니다.

우리는 조금이라도 남에게 긍휼을 베풀 수 있는 것이 내 몸에 있다면, 우리는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어떤 교인은 병원에서 완전히 움직이지 못하고 암 환자로 누워 있으면서도 편지를 써서 ‘예수를 믿으세요. 구원을 얻습니다.’ 하고 창 밖으로 하나씩 던졌습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그래도 예수 믿어 구원함을 얻도록 사명을 다 한 것입니다.

남강 이승훈 선생은 항상 궂은일에 솔선하기로 유명하였다합니다. 남강 선생께서 오산학교를 세웠을 때이다. 선생은 남들이 꺼리는 화장실청소를 하곤 했습니다. 화장실이 서쪽에 있었기 때문에 남강이 그쪽으로 가면, “서쪽, 서쪽!”하면서 학생들은 웃으며 따라갔습니다. 추운 겨울날 남강은 도끼로 얼어붙은 똥 덩이를 깨고 있었습니다. 또 후에 선생께서 3.1운동으로 옥중에 있을 때에도 변기를 맡아 청소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젊은이들이 “선생님이 그렇게 하셔서 되겠습니까?” 그러나 이승훈 선생은 그것을 자기의 십자가로 알았습니다.

서울에 사무실이 있을 때입니다. 얼마나 사람들이 못되었는지 사무실 앞에 차를 세워두면 늘 망가집니다. 백미러를 펴서 발로 차서 달랑 달랑 매달려있기가 일수입니다. 한번은 누가 계단에다가 큼지막한 똥을 싸고 갔습니다. 주인이 그 위층에 사시는데 그분도 교회 집사님 입니다. 그런데 그 똥을 못 치우고 피해 가시더라 구요. 결국 우리 집사람이 치웠습니다.

속담에 “하루 은혜 백 날에 갚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은혜를 입기는 쉬워도 갚기는 어렵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전 6:1)고 합니다.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봉사의 책임이 더 커짐을 알아야 합니다.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눅 12:48)고 했습니다.

히스기야는 보기 드문 선한 왕으로서 많은 업적을 남긴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유감스럽게도 한 가지 오점을 남겼는데 그것이 대하 32:24-26에 나옵니다.
“24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된고로 여호와께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고 또 이적으로 보이셨으나 25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지 아니하므로 진노가 저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게 되었더니 26 히스기야가 마음의 교만함을 뉘우치고 예루살렘 거민들도 그와 같이 하였으므로 여호와의 노가 히스기야의 생전에는 저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여러 가지 위급한 상황에 처한 히스기야를 하나님께서는 그때그때마다 구해 주셨습니다. 그의 통치와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히스기야의 유다는 강성해졌고 이웃 나라로부터 부러움과 경계를 동시에 받는 강국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바벨론까지도 유다에 사자를 보내어 히스기야에게 선물을 바치고 환심을 사기에 급급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복으로 말미암아 히스기야는 도리어 교만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즉 하나님의 거듭된 은혜를 입고 보니 모든 일들이 순풍에 돛을 단 것처럼 잘 되었고, 그러자 스스로 자신감이 생기고 자부심이 생겨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의무를 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도는 문제가 생겼을 때보다 그 문제가 해결된 후에 더욱 조심을 해야 합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때 우리는 더욱 하나님의 은혜를 기리면서 감사의 고백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들이 스스로의 노력이나 의지의 결과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에 의한 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히스기야는 백성들과 외국의 왕으로부터 많은 보물과 존경을 받았으나 그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섬기는 데는 인색하였습니다. 인색한 마음은 성도의 신앙을 좀먹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색한 봉사나 헌신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도들의 인색한 연보에 대해 말하기를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고후 9:7).

참 사람이 간사합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돈을 잘 버는 사람이 아니라, 인기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은혜를 아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산 자의 땅에 있음이여 여호와의 은혜 볼 것을 믿었도다”(시 27:13)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7 여호와께서 주의 은혜로 내 산을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8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고 여호와께 간구하기를”(시 30:7) 라고 합니다.
여러분! 언제 기도하셔야 합니까? 주의 얼굴이 가리우시면 큰일입니다. 내가 보기 싫어지신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인지 회개해야 합니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빨리 돌이켜야 합니다. 우리는 주의 얼굴을 보아야 합니다. 지금 주님이 피하시는데 마지막 날이라고 피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부르짖어야 합니다.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이희돈 장로님은 3년 정도의 스케줄이 다 짜여있는 분입니다. 얼마나 바쁘겠습니까? 그러나 매일 새벽에 교회에 가서 3시간 이상 기도하고 출근합니다. 한번은 어떤 분이 기도하는데 들어와서 “장로님 정말 기도하면 이루어집니까?” 그래서 그분을 바라보면서 한마디만 하셨답니다. “제가 바보처럼 보이십니까?” 그랬더니 그분도 열심히 기도하더랍니다.

은혜를 받고 봉사하지 아니하면 은혜를 빼앗길 수 있습니다.
“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를 가진 자에게 주어라 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마 25:28-29) 일하지 않는 일꾼의 달란트는 빼앗아 일할 수 있는 사람에 주십니다.

바울은 솔선수범한 사도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합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아무리 보아도 은혜로운 말입니다. 우리도 이와 같은 고백을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설교 : 이영제 목사
 

혼인 잔치에 오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 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5 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마 22:1-5)

“전능하신 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사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을 부르셨도다”(시 50:2) 고 하셨습니다.
광부 구조팀이 622m을 뚫고 캡슐을 준비해서 내려보냈습니다. 구조를 기다리던 광부들은 순서를 짜고 차례대로 캡슐을 타고 올라와 구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622m가 아니라 측량할 수 없는 멀고 먼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구조타입캡슐을 마련하셨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만 믿으면 구조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광부들이 그 수고에도 불구하고 만일 타지 않겠다고 버티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구조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구조 팀의 실망은 말로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 준비해 놓으신 구조의 캡슐을 타지 않겠다고 버티면 주님이 얼마나 실망스럽겠습니까? 그냥 타기만 하면 됩니다. 그냥 믿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이 초대를 거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실 초대받는 것은 기분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현대시대는 너무 상업적인 초대가 많습니다. 지난번에 교회로 극장 영화무료상영권이라고 여러 장이 왔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한 장씩 나눠주려고 기분이 좋아서 있는데 선교회에 목사님이 한 분 오셔서 말씀드렸더니 자기네 교회도 와서 가봤는데 안가는 게 좋다는 겁니다. 영화상영하기 전에 약을 파는 모양입니다. 그것을 한참 듣고 영화구경 해야 되는데 성도들한테 욕먹었다는 겁니다.
요즘은 공짜라면 조금 의심을 해봐야 되는 시대이다 보니 예수님의 초청도 의심이 가는 것 같습니다. 혹시 공짜로 구원해 주겠다고 하고서 헌금만 요구하는 것은 아닌지? 교회에 많은 오해가 있습니다. 겁도 나는 모양입니다. 혹시 힌옷 입고 일도 안하고 산에 올라가 예수님 기다리다가 다 죽이는 것은 아닌지? 거짓 선지자들, 목사들, 전도자들이 용서받기 힘든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역사적으로도 너무 많은 잘못을 사람들이 저질러 왔습니다. 그래서 이제 늑대가 온다해도 믿지 않는 시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다시 성경을 봅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예수님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거짓 증인들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말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제일 좋아하시는 용어가 있다면 ‘오라’는 것입니다.
여러 오해를 가지고, 집나간 자식에게 부모님이 뭐라고 합니까?
“일단 들어와서 이야기하자! 너 어디니, 빨리 들어와!” 그러지 않습니까? 하나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사 1:18) 따져도 하나님께 나와서 따지십시오. 밖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부모님이 보살펴 줄 수가 없습니다.
돌아오기만 하면 하나님은 자신이 있습니다. 완벽하게 구원해 주실 수 있습니다.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그러나 밖에 있으면 도와줄 수 없습니다.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
칠레 광부들에게 구조캡슐 내려보내고 이걸 타려면 돈내야 된다고 하면 이해가 됩니까? 거기서 누가 돈을 가지고 있겠습니까? 또 구조팀이 돈 받으려고 그 일 했습니까? 생명을 구하는 일은 돈 받지 않습니다. 사람도 그런데 하나님이 돈 받고 구원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돈으로 가는 곳이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빚 진자가 갑니다. 죄인들이 갑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7:37) 목마른 사람들이 갑니다. 이 세상에서 배부른 사람들은 못 갑니다. 영적으로 목마른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이 가는 곳입니다.

옆에 아내가 있으면 고백하기 어렵지만 여러분! 혹 청혼을 했는데 거절당하신 분 있습니까?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고백했다가 오늘 큰일납니다. 만일 경험이 있다면 어떤 기분이었을 것 같습니까? 결혼한 분들은 거절 안 당하셨겠네요. 여기 처녀 총각들이 경험이 있을 것 같습니다. 거절당했으니까 아직 혼자이겠지요. 제가 너무 아픈 가슴을 찔렀나요. 그렇습니다. 가슴이 아픕니다. 살맛이 안 날 정도로 기분이 나쁩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끈질기게 설득하고 계십니다.
“… 내가 너희에게 말하되 새벽부터 부지런히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였고 너희를 불러도 대답하지 아니하였느니라”(렘 7:13) 그러나 하나님도 거절 당하셨습니다. 예수님도 거절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주님을 더 이상 문밖에 머물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영접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조상들은 지나가는 사람에게도 따뜻한 밥 한끼는 대접했습니다. 주님은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곳에 오셨습니다. 나를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지신 십자가입니다.
선택은 내가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주님을 영접해야 마지막 날에 주님의 도움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지금 주님을 사귀어 두어야 합니다. 지금 주님과 친구가 되고 친해져야 합니다. 그래야 내 음성을 듣고 구원해 주십니다.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시 95:7)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요 10:3-5)

이 땅에 오신 예수께서 우리를 얼마나 원하셨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은 화려하게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고 마지막 주간을 보내셨습니다. 첫날은 월요일은 화려한 입성 식이 있었지만 저녁때는 성전 이곳 저곳을 다니시다가 비둘기 팔고 돈 바꾸는 이들의 상을 업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설교, 마지막 성만찬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시간은 정점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목요일 밤, 그것도 한밤중입니다. 동산은 풀 벌래 소리와 저쪽 계곡을 지나 예루살렘 성에서 간혹 빛나는 불빛이 비쳐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마지막 밤을 보내고 계셨습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제자들이 별 도움은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예수님도 아셨습니다. 그러나 이날 밤, 마지막 밤만큼은 제자들의 기도소리를 들으며 함께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코를 골며 잡니다. 피곤한 것입니다. 지쳐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날 밤만큼은 혼자 있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날 밤에 예수님의 기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를 위한 기도였습니다. 제자들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나를 위한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잤습니다. 예수님 혼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0) 우리가 믿음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이 기도가 들려야 합니다. 내 가슴속에 들어와야 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 홀로 계신 예수님을 보아야 합니다. 싸움은 해보아야 아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승리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것으로 사탄과의 마지막 싸움이 끝난 것입니다.

어떤 선교사님 편지 제목에 “열방 보다 골방이 크다”고 했습니다. 열방으로 가려면 먼저 골방으로 가시기 바랍니다. 기도의 다락방으로, 골방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예수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겟세마네의 싸느란 밤에 홀로 계신 예수님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 힘도 없습니다. 할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을 영접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러 가는 것입니다, 그곳은 겟세마네에 홀로 계신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주님과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영접하시기를 바랍니다.

영적인 혼인잔치 그것은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본문에 “3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 5 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왜 혼인잔치에 가지 않았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 일에 바쁜 겁니다. 그런데 혼인잔치는 매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석하고 와서 다음에 자기 일하면 됩니다. 혼인잔치는 누구나 잘 준비합니다.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정성을 다해서 준비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는 혼인잔치입니다. 예수님을 신랑으로 맞아들이는 시간입니다.

“혼인 잔치에 오라”함은 케크레메누스인데 이 말은 칼테오 부른다, 초대한다의 현재완료 수동태 분사로서 하나님에 의해서 구원의 자리에 계속적으로 초대되어져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처음 초대한 사람들이 오지 않았지만 혼주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 초대가 마치는 날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입니다. 장만한 음식을 다 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시장에 가서 사람들을 모아옵니다. 이 사람들은 예복이 없습니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도 와서 음식을 먹으라고 합니다. 초대는 되었지만 다 선택함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에 사람들은 계속적으로 초대되고 있습니다. 그 문은 아직 열려져 있습니다. 그 문은 교회의 문입니다. 교회는 초대된 사람들을 계속적으로 오게 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초대된 것으로 만족하시면 안됩니다. 이제 하나님의 의해서 선택이 되어져야 합니다. 영적으로 주님과 혼인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겟세마네에 있는 주님을 만나러 가는 겁니다.
사람이 많고 화려한 곳, 그곳에만 주님이 있다고 생각하시면 큰일납니다. 주님은 어쩌면 그곳에 계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그분을 만나야 합니다.

“44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마 25:44-4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마 18:5) 라고 하셨습니다.

성전이 어디입니까? 주님이 오라고 하신 곳이 어디니까? 그곳에서 혼인잔치가 열립니다. 주님이 계신 예식장을 바로 찾아 가시를 바랍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주님을 화나게 하지 마세요.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2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13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마 21:12-13)

예전에(1989 ?) 한겨레신문에 개신교에서 사용하는 ‘하나님’은 국어를 모르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것이며 ‘하느님’이 문법상 맡는 용어라고 기사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답답해서 왜 개신교에서 하나님으로 사용하는지 다시 써서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감사하게 독자투고란에 제법 크게 싫어주었습니다.
그리고 한겨레신문사에서 전화가 왔다는 겁니다. 혹 원고료라도 주려고 하는 건가? 아니면 벌써 유명해 졌나? 아마 면도하다 받았는지 약간 베었습니다. 피도 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흥분해 뛰어나오다 책상에 발이 걸려 그렇지 않아도 파고 들어가는 발톱 때문에 아픈 엄지발가락이 뼈저리게 아팠습니다. 얼굴엔 피가 묻어 있고 발은 아파 절뚝거리면서 수화기를 잡았습니다. 숨을 벌떡거리며 “전화 받았습니다.” “여기는 한겨레신문사입니다. 선생님의 글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여기까지는 좋았습니다. 그 다음에 “저희 신문사에서 나오는 한겨레21을 1년 간만 구독해 주세요. 5만원이면 됩니다.” 저는 6개월만 구독하겠다고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 실망이 얼마나 컸겠는지 상상해 보십시오.

누군가가 나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사람은 단지 나의 돈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실망이 크겠습니까? 그 사람이 장사꾼이라고 해도 화가 날 것입니다. 하물며 믿음의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면 얼마나 망연자실하겠습니까?

때때로 종교가 이익과 특권을 위해 이용되었는데 그럴 때는 으레 두 가지 결과가 따라다니게 됩니다. 사람들의 착취와 하나님의 분노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도착하셔서 제일먼저 성전을 찾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번 주말이 되면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에 십자가에 죽으심을 알고 계십니다. 지금은 월요일입니다. 예루살렘성에 들어오실 때 나귀새끼를 타셨지만 나름대로 화려한 입성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마치 왕의 행렬처럼 호산나를 외치면서 종려나무 가지를 깔고 예수님을 맞이했습니다. 유월절 기간이기 때문에 사람들로 성내는 붑벼습니다. 이제 그 호산나 찬양 소리가 사라질 무렵 저녁이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 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니라”(막 11:11)고 했습니다.
수많은 순례자들이 성내를 가득 메웠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보신 것은 충격적인 장면이었습니다. 비둘기사고 돈 바꾸느라 사람들은 정신을 못 차렸습니다. 완전히 성전이 시장 바닥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13절)

무엇이 예수님을 이토록 분노하게 만들었습니까?
신앙을 빙자하여 특권을 누리고 있는 성전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때는 유월 기간이기 때문에 전국에 있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찾아왔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제일 큰 명절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절기이기도 합니다. 전국각지와 여러 나라에서 찾아온 사람들은 두 가지 의무를 이행해야만 했습니다.

첫째는 희생양이나 비둘기를 드려합니다.
자신을 대신하여 죽어야 할 희생양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키우던 것이나 1년 동안 준비해서 가져와야 되는 것입니다. 몰론 사람들은 동물을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때는 이미 준비해 간들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상하게 다른 곳에서 가져온 동물은 흠이 있다고 불합격 판정을 받는 겁니다. 따라서 성전 안에서 산 비둘기 만이 흠이 없는 것으로 판정이 나 자기 내들이 파는 비둘기만 희생 제물로 드릴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렇다보니 부르는 게 값이었습니다.

둘째는 성전 세를 내야했습니다.
일년에 한번씩 부과되는데 유월절 기간에 제사장들이 정한 이 지역의 화폐로만 내야 했습니다. 외국 돈 뿐만이 아니라 자기들의 돈도 바꾸어야 했습니다. 수수료 또한 자기들 마음대로 챙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유월절에 참여하는데 왜 이렇게 복잡한 겁니까? 돈이 없으면 하나님을 만나지도 못합니다. 기도하러 성전에 들어가지도 못합니다. 강도들이 지키고 있는 겁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일꾼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참으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충동에 의한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돈이 없어도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기도하러 가야 합니다. 아니 어쩌면 그런 사람일수록 더 하나님을 만나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못 만납니다.

“22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23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
24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의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
25 네가 만일 너와 함께 한 내 백성 중에서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 주면 너는 그에게 채권자 같이 하지 말며 이자를 받지 말 것이며
26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출 22:22-26)

가난한자를 건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노하시게 하는 것입니다.
“이 달 이 날에 유다인들이 대적에게서 벗어나서 평안함을 얻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으니 이 두 날을 지켜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 하매”(에 9:22) 부림절에도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날입니다.
“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그들을 기억하심이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시도다”(시 9:12) 고 하셨습니다. 이런 증거는 성경에 깔렸습니다. 하나님의 집에 가난한 사람은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강매의 경험을 한두 번은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아주 사람이 기분이 나쁩니다. 더욱이 하나님을 이용하여 강매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들의 입을 막을 것이라 이런 자들이 더러운 이득을 취하려고 마땅하지 아니한 것을 가르쳐 가정들을 온통 무너뜨리는도다”(딛 1:11)

의사가 환자를 치료할 생각은 하지 않고 돈벌이되는 환자만을 좋아한다면 큰 문제 아닙니까? 제가 치아가 많이 안 좋아 치과에 자주 가는 편입니다. 제 생각이 잘못되었기를 바라지만 치과에 가면 제 치아를 보면 의사선생님이 좋아하는 것 같아요? 돈벌이되는 환자가 왔다는 거지요. 한번은 지금까지 잘 사용하는 치아를 다른 곳에서 하고 왔는데 잘못 되었다고 빼고 다시 해 넣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고집부리고 안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몇 년 동안 잘 쓰고 있습니다. 환자를 고쳐 통증을 없애주고 치료해줄 생각은 없고 돈벌이만 관심을 가진다면 분명히 문제가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을 빙자한 돈벌이 수단이 얼마나 잘못된 것입니까?

“17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 18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기나니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롬 16:17-18) 고 했습니다. 결국 이런 유대인에게 내린 하나님의 뜻은 이제 더 이상 특권층으로, 선택받은 선민으로 남겨두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마 21:43) 하나님의 성전을 들어가지도 못하게 막는 이스라엘사람에게 더 이상 맡길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천국을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열매를 맺는 다른 백성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든지 이렇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롬 11:21) 무서운 말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적당히 안일하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깨어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육신에 거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영적인 생활을 위하기보다는 육을 먼저 생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 적인 육신 적인 성장과 성공에 지나치게 현혹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마치 큰 교회를 건축하지 못한 목사는 실패한 목사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좋은- 차를 타지 못하고 큰집에서 살지 못하면 실패한 사람으로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진정한 성공의 여부는 천국에 가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겁니다. 예수를 믿는 겁니다. 영적인 삶입니다. 이런 말씀드리면 오해하실 지 모르지만 큰 회사 다니다 나오신 분들 보면 자기가 먼저 나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더 다녀도 되는데 집사람 말리는 대도 더 이상 동료들, 부하직원들 잘리는 것은 볼 수 없다고 자기가 나온 겁니다. 세상 적인 관점에서는 별로 성공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직장 일찍 쫓겨난 무능력한 사람으로 보일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잘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남의 가슴을 아프게 하면서 까지 나만 잘살지는 마십시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월요일 저녁은 이렇게 지나갔습니다.
예수님은 주변 감람산 기슭에서 밤을 새우시고 화요일 아침에 예루살렘 성을 다시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두 가지 긴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어제 저녁에 있었던 일을 기억하면서 저들의 영혼을 찌르는 것이었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포도원 주인의 이야기입니다(마 21:33-45).
소작인들에게 포도원을 세 주고 떠났는데 저들은 주인의 아들이 오자 죽였다는 겁니다. 이 예루살렘의 주인은 하나님이 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성전에도 못 들어갈 형편입니다. 결국 아들을 돌로 쳐서 죽입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혼인 잔치를 배설한 왕의 이야기입니다(마 22:1-14).
여기서도 보냄을 받은 사람이 나옵니다. 그런데 저들은 그 청함에 응하지 않습니다. 놀라운 반응입니다.

백화점에서 놀이공원에서 아이를 잃어버렸던 경험이 있는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더 이상 쇼핑하는 것은 아무런 가치도 흥미도 없는 일입니다. 아이가 없어졌는데 지금 그 아이를 찾는 일보다 더 급하고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모든 에너지는 아이를 찾는데 집중될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구하기 위해 지불해야하는 값은 그것이 얼마 건 결코 비싼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에너지를 쏟아도, 아무리 애를 써도 결코 지나침이 없는 것입니다. 자식을 찾기 위한 길은 아무리 멀어도 갑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하나님의 그 손길 느껴보십시오.
노아는 구름이 걷히고 무지개가 나타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늙은 사라의 태에 손을 대면서 그것을 느꼈습니다.
야곱은 실패를 통해서 그것을 알았습니다.
바로도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나 그는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바로 그 민족이 바로와 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청함에 응하지 않습니다. 그 다음의 결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처절한 고통과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릴 뿐입니다.

오래 전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들렸던 하나님의 음성을 다시 한번 들어보십시오.

“30 이 모든 일이 네게 임하여 환난을 당하다가 끝날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그의 말씀을 청종하리니 31 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이라 그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 32 네가 있기 전 하나님이 사람을 세상에 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지나간 날을 상고하여 보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이런 큰 일이 있었느냐 이런 일을 들은 적이 있었느냐 33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느냐 34 어떤 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낸 일이 있느냐 이는 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의 목전에서 행하신 일이라 35 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4:30-35)

세상을 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상고해 보십시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보다 더 위대하신 일이 있는가? 우리에게는 십자를 지고 가신 예수그리스도가 계십니다. 나를 위해 오신 분이 있습니다. 이 방법 위에 더 좋은 길이 없습니다. 새롭게 놓인 길입니다. 생명의 길입니다. 하나님의 마지막 부탁입니다. 청함입니다. 거절하지 아니하시기를 바랍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새언약의 일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전 3:6)

이모(18)군은 1992년 2월 미국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른바 90년도에 유행했던 원정출산아입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1987년 미국 영주권을 취득했지만 주로 한국에서 살다가 1992년 1월부터 3개월 동안만 미국에 머문 뒤 아들과 함께 귀국해 지금까지 같이 살고 있습니다. 한·미 복수국적자가 된 이군은 지난해 12월 법무부에 “대한민국 국적을 포기하겠다”고 신청했습니다. 하지만 법무부는 “한국 국적을 이탈하고 싶으면 먼저 병역의무부터 이행하라”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출생은 미국에서 했지만 살지 않았고 국적만 취득해 갔고 있다가 군대갈 때가 되니까 대한민국 국적은 포기하고 미국 국적을 택하겠다는 겁니다. 대한민국에 살면서 혜택은 누렸지만 의무는 안 지겠다는 겁니다.

KBS1 일일극 ‘바람불어 좋은 날’에 보면 오복이는 아이가 있는 남편에게 시집을 갔는데 그 친 엄마 미란이가 나타나 결혼생활을 방해합니다. 아이만 나 놓고 미국으로 떠났던 미란이를 아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책임은 지지 않고 엄마 역할만 하려고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의 의무가 있습니다. 성도의 의무는 버리고, 아무 책임은 가지지 않고 천국만 가려고 한다면 양심 없는 이중 국적 자와 다를 바 없습니다. 하나님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의 보내신 것을 약속을 지키시고 책임을 지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로서 아들로서 책임을 지키신 것입니다.

십자가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 무엇입니까?

약속의 복음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합니다.
구약, 신약이라고 부릅니다. 둘 다 무엇을 강조합니까?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 약속을 구약에서 다른 말로 ‘언약’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창 6:18) 라고 하셨습니다. 무지개도 하나님이 다시는 이 땅을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표로 주신 것입니다(창 9:16-17).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창 15:18)라고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언약을 세우나니 곧 내가 아직 온 땅 아무 국민에게도 행치 아니한 이적을 너희 전체 백성 앞에 행할 것이라 너의 머무는 나라 백성이 다 여호와의 소위를 보리니 내가 너를 위하여 행할 일이 두려운 것임이니라”(출 34:10)
하나님은 나타나셨다하면 사람하고 언약을 세우십니다. 노아에게도, 아브라함에게도, 모세에게도 언약을 세우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땅에 있었던 사람하고 약속을 하신 것하고는 다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하나님과 약속을 맺은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서 약속을 가지고 오신 분이십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만들어 가지고 올라갔던 궤를 ‘언약궤’라고 부릅니다. 약속의 박스입니다. 그 약속의 궤가 가면 승리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우습게 생각하는 국가와 민족과 개인은 망합니다. 오늘 우리가 왜 예배를 드립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에 솔로몬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윗 성 곧 시온에서 메어 올리고자 하여 이스라엘 장로와 모든 지파의 두목 곧 이스라엘 자손의 족장들을 예루살렘 자기에게로 소집하니”(왕상 8:1) 다윗이 건축하려고 했던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고 아들인 솔로몬이 건축합니다. 그리고 언약궤를 이 성전으로 가지고 옵니다. 성전이 왜 필요했습니까?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시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또 그곳에 우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에 저희와 세우신 바 여호와의 언약 넣은 궤를 위하여 한 처소를 설치하였노라”(왕상 8:21) 언약궤가 없다면 성전이 아닙니다. 성전의 목적은 언약궤를 모시기 위해서입니다.
마지막 때에 요한계시록에서 천사가 일곱째 나팔을 불 때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계 11:19) 고 했습니다.

다니엘은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여 이르기를 크시고 두려워할 주 하나님,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그에게 인자를 베푸시는 자시여”(단 9:4) 가고 고백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이 명령을 너희에게 내린 것은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이 항상 있게 하려 함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말 2:4)
바로 이 증거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마지막까지 보여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사실 약속은 우리가 여겼는데 하나님은 먼저 책임을 지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키지 못한 약속을 대신해서 책임을 져 주시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 막 14:24)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새 언약의 피입니다. 피로서 새우신 언약입니다. 말로만 하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피로 세우신 것입니다.
누가는 이에 대해서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눅 1:72)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오랜 약속에 의해서 우리에게 오신 분이십니다. 갑자가 오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우리를 위해서 보내주신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성전에 뭐가 있었지요? ‘언약궤’입니다. 그런데 신약 시대에는 무엇이 있어야 교회가 됩니까? ‘예수’ 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언약의 피입니다. 이 약속이 있어야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피를 보혈이라고 말합니다. 그냥 피가 아닙니다. 보혈입니다. 보혈을 가진 교회, 성도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교회의 힘은 세상 적인 힘이 아닙니다. 보혈입니다. 세상 적인 기준으로 교회를 보면 안됩니다. 학교는 병원은 큰 곳이 좋은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다릅니다. 교회는 십자가가 있어야 합니다.
큰 교회, 작은 교회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주의 종도 마찬가지입니다. 간혹 세상의 힘을 가지기 위해서 노력하는 교회, 목사, 성도가 있지만 모두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려고 노력할 것은 보혈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보혈을 가진 교회,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일꾼이 일할 때 약속하지 않고 하는 사람 있나요? 없습니다. 다 약속이 있는 겁니다. 얼마큼 일할 태니 얼마를 주겠다는 약속이 다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새 언약의 일꾼”이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히 7ㅣ22)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이 말하면 못 믿지만 예수가 보증입니다. 천국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천국일꾼입니다.

어거스틴은 인간의 역사는 한가지 큰 원리를 가지고 진행된다고 했습니다. 그 속에는 상이한 두 개의 도시가 존재하는데 인간은 어느 한쪽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의 인간의 도시로서 하나님을 멸시하는 도시와 하나님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도시가 있다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자기 중심으로 사는 사람과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한가지 자기를 위한 복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과 남을 위한 복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구약이 자신만을 위한 복음이었다면 신약을 남을 위한 복음입니다. 구약이 이스라엘민족 복음이었다면 신약은 이방 모든 민족을 위한 복음입니다. 이것이 새 언약입니다.

본문에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고 했습니다.
새 언약의 일꾼은 영을 위해서 일해야 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은 영입니다, 육인 무익합니다. 육이 우리의 영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영의 육을 살리는 것입니다.
요한은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고 합니다. 영혼이 잘되고 다른 것이 잘되어야 합니다. 영혼은 엉망인데, 영혼은 죽었는데 다른 것이 잘되면 뭐합니까? 영혼을 위해 일하시기를 바랍니다.

현대교육학사전에서 교육을 정의하기를 “인간의 능력과 행동을 발달시키는 전체 과정, 그리고 사회적 경쟁과 성장을 이루게 하는 사회적 과정”이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현대 교육의 출발점이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즉 그것은 인간의 정체성(identity)을 상실한 점입니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성품이 어디서 오게되는지는 모르고 인간의 소질만 개발시키고자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중심 축은 소외시키고 주변 기능과 유능성을 함양하는데 교육의 목적을 두게된 것입니다.
갈릴레오는 “하나님이 없는 교육은 지혜 있는 악마를 만들뿐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주일예배 때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합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사,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여기에 성경이 다 들어있습니다. 주일 짧은 시간에 성경을 다 가르칠 수 없지만 성경을 요약해서 다 고백하는 겁니다. 이것이 별것 아닌 것이 아닙니다. 모든 운동경기도 기본자세가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본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고백은 인간의 기본을 가르칩니다.

제가 알고 있는 근육디스로피협회를 만든 분이 계십니다. 일명 근육병입니다. 이분이 마음에 가지고 있는 상처는 초등학교 때 체육시간에 다리에 힘이 없어서 자꾸 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원인을 묻지도 않고 아이를 마구 때렸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근육병 때문에 다리에 힘이 없었던 것입니다.
진정한 인격교육은 하나님 중심의 사고 영역 속에서만 가능합니다.
전 미국 카터 대통령에게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제일 잘한 것이 무엇이냐고 했습니다. 자신이 제일 큰 축복을 받은 것은 첫째, 예수 믿은 것이고, 둘째, 교회에서 집사가 된 것이고, 셋째 하비타드를 세워서 남을 위해 종사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영혼을 위해서 일하시고 할 때 한가지를 철저하게 배워야 합니다.
지금은 구약시대가 아닙니다., 신약 이후에 살고 있습니다. 신약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새로운 약속의 시대라는 것입니다.
엘리사가 벧엘로 올라갈 때 아이들이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고 놀렸습니다. 이 때 “엘리사가 돌이켜 저희를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콤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에 사십이 명을 찢었더라”(왕하 2:24) 우리는 지금 이런 구약시대에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용서해야 합니다. 대머리라고 놀렸다가 다 죽임을 당해야 하는 엘리사 시대가 아닙니다.

“51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52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저희가 가서 예수를 위하여 예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촌에 들어갔더니 53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고로 저희가 받아들이지 아니하는지라 54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55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56 함께 다른 촌으로 가시니라”(눅 9:51-56)
좀 돌아가면 됩니다. 길 가로막았다고 다 죽여버리려고 예수님이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럼 사마리아 사람하고 예수님하고 원수지간이 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누구를 저주하시고 원수를 맺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어 가시면서도 그 원수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이것이 신약입니다. 예수님을 잡으려고 밤에 가룟유다하고 군병들이 찾아왔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방어하고 나섰습니다.
“51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마 26:51)
예수님은 다 하실 수 있습니다. 지금 군병들에게 초라하게 끌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다 두려움에 떨게 하고 죽여버릴 수 있으십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면 육신의 방법을 쓰는 겁니다. 미란이 아버지처럼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돈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인간은 힘이 있으면 힘으로 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인내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그래서 하나님이 능력을 안주십니다. 주시면 그 능력을 다 죽이는데 결국 사용할 것입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다 죽여버릴 것입니다.

“사십까지는 때리려니와 그것을 넘기지는 못할지니 만일 그것을 넘겨 매를 지나치게 때리면 네가 네 형제를 경히 여기는 것이 될까 하노라”(신 25:3)
잘못을 저질러 태형을 때리지만 그러나 40대 이상 때리면 안됩니다. 자꾸 때리다 보면 경히 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격을 무시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잘못이 있어 때려야 하지만 무시하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그도 회개하고 다시 잘 살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와서 살면 잘됩니다. 지금 왜 매를 때립니까? 그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새 언약의 일꾼입니다. 복음의 일꾼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란 예수님처럼 해야 합니다. 남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을 모든 나라 사람을 존중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