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돔(도시)과 아브라함의 기도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22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23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24 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 (창 18:22-33)

지난주 미션매거진(285호)의 메인 타이틀을 ‘다시 건너와 우리를 도우라(유럽 재복음화의 필요성과 전략)’ KOSTE 발표 – 최종상 선교사님의 글을 올렸습니다. 대략 이런 내용입니다.
‘유럽의 개신교 출석교인은 평균 3퍼센트 정도이고, 복음주의자는 1퍼센트도 안 되는 나라가 22개국이나 됩니다. 프랑스만 보더라도 60년 전에는 전체 인구의 96%가 천주교 미사에 참석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6%만이 미사에 참석하며 개신교는 2% 정도이고 복음주의자는 0.6%에 불과합니다.
1998년 12월 14일 짐바브웨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WCC)에서 당시 조지 캐리 캔터버리 대주교는 “우리(영국)교회가 피 흘리며 죽어가고 있다(The Church is bleeding to death)”며 기도와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지금도 이러한 현상은 더 심각해져 가고 있습니다. 유럽은 이미 복음화 되었다 쇠퇴하는 대륙입니다.’ 이러한 내용으로 잘 정리된 원고를 올렸습니다. 미국과 한국교회가 ‘전방개척선교’만 부르짖다가 뒷문을 열어놓고 있는 꼴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유럽을 재복음화 시켜야 하는 지역으로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이 내용은 받아본 한 회원이 저에게 메일로 답신을 하기를 짜증이 난다는 것입니다. 유럽 교회가 쇠퇴해 가는 것은 이미 다 알려진 내용인데 글이 너무 길어서 계속 보다가 짜증나고 화가 난다는 것입니다. 원고가 길고 복잡하다고 왜 화가 나는지 저는 잘 이해가 안됩니다. 예배시간이 조금만 길어져도 짜증나는 교인이 많아졌습니다.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교회에서 부흥회라도 할 때는 핑계삼아 아주 교회에서 24시간 살았습니다. 교회에 있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구약 사람들은 하루종일 양 잡아서 예배(제사)를 드렸습니다. 어떤 때는 몇 일씩 했습니다. 솔로몬이 대단한 것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대단한 것은 1천 번제를 하나님께 드려서 하나님을 감동시키셨습니다. 1천 마리의 양을 잡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몇 일을 제사를 드렸겠습니까?
이 시대의 사람들의 심리가 참을성이 없어졌습니다. 도시화 될 수록 사람들의 마음은 바빠지고 무언가 늘 쫓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늘 마음이 급하고 빨리 되는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여유가 없다 보니까 기다리지를 못하고 참을성이 없어졌습니다.

여러분! 이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4:13)

유럽 교회의 문제도 도시화입니다. 노아의 홍수 때의 문제도 도시화 속에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음을 쫓아 살았습니다. 향락의 도시입니다. 광란의 도시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망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은 도시에 살고 있습니다. 도시는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사는 주거 공간일 뿐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이 사회를 주도하는 장소입니다.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사람들은 지금도 도시로 몰려오고 있습니다. 도시화의 현상은 사람들이 집중되면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기보다는 하나님 없는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언어가 하나였던 시대처럼 사람들끼리 힘을 모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술 소비 세계 1위의 나라 – 우리는 물 마시듯이 술을 마셔대는 국민입니다. 대학가 앞에 술집과 옷 집으로 뒤덮여 있는 곳은 대한민국 밖에 없다고 합니다.
2006년 기준 알코올로 인해 정신장애를 앓아 본 성인 남녀의 비율(정신장애 유병율)은 5.6%에 이르고, 1년에 4조 4,702억 원이 술을 마셔 없애버립니다. 2008년 성인 1인당 소주 소비량만 74.40병(360ml 기준)입니다. 여기에 막걸리 빼고도 맥주, 포도주까지 합하면 엄청납니다.
연세대 보건대학원 연구에 따르면 음주로 인한 사회경제적 비용은 연간 20조 990억 원(2004년 기준)에 이르고 국내 총생산(GDP) 대비 2.9%의 수준입니다. 나아가 음주는 자동차사고, 가정폭력, 살인, 행동장애, 자해·자살 등의 원인이 됩니다.

OECD국가 중 자살율 1위 나라 – 지난해 15,413명으로 청소년 사망원인 1위가 자살입니다. 하루 평균 42명, 53분에 한 명씩 자살하는 것입니다.
흡연율 1위의 나라 – 길거리에서 태연히 담배를 피우며 다니는 나라는 우리 밖에 없습니다.
우리나라 청소년 흡연율은 남자(20.7%), 여자(5.2%)로 초등학교 4학년부터도 시작합니다. 성인 흡연율에서도 미국(28.7%), 일본(60.1%), 중국(61.8%), 러시아(65.7%), 대한민국 (69.6%)입니다. – 2010년 세계보건 기구

조금 잘살게 되었다고 이렇게 정신적으로 공허해져서 흥청망청하는 나라가 어디에 있습니까? 법을 세우는 국회로부터 시작하여 사회 모든 영역에서 이렇게 빨리 썩어 가는 나라가 또 있습니까? 오늘 이 나라가 눈물의 중보 기도자 없이 하나님의 진노의 손길을 얼마나 피할 수 있겠습니까?

미신과 우상의 상징인 ‘갓바위’가 대구를 대표하는 상징물이 되었습니다. 팔공산의 절들 안에는 산신을 숭배하는 산신각이 함께 있어 대구 지역의 불교가 기존의 산악숭배를 흡수한 혼합적인 우상숭배을 하고 있습니다. 팔공산 지역에 막대한 국비를 동원하여 불교테마공원을 건립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제 동족에게 총을 쏘고 있습니다. 연평도에 포탄을 퍼부었습니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군사력만 믿어서는 안됩니다. 북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들의 핵 폭탄만 믿어서는 안됩니다. 타락한 도성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나라, 하나님이 지켜 주시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 마음에 우리가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보호하시는 축복이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죄악의 도성을 심판하기 위해 가시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자신의 몸을 내던져 한 도시를 구하기 위해 끈질기게 간구 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시간이 아니라 기도가 이루어질 때까지, 예배가 드려질 때까지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정말 배불렀습니다. 우리는 정말 내 생각대로 신앙생활 합니다. 나를 하나님께 맞추고 순종하면서 신앙생활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맞추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나에게 맞추라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안 드는 하나님은 떠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안 드는 교회는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마음에 드는 하나님을 만들고, 내 마음에 드는 교회를 만들면서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내 마음에 드는 교회가 좋은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 마음에 들어야 좋은 교회입니다.

본문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본문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기를 원하십니까?
16절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
22절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
여기 ‘그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두 천사와 함께 사람의 모양으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모습입니다. 이제 ‘그 사람들’(하나님)은 소돔의 죄악상을 직접 알아보기 위하여 소돔으로 향하여 갑니다. 우리가 사는 곳에 오십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은 사해 연안 싯딤 골짜기에 위치한 다섯 도시 중 대표적인 도시들입니다. 이곳은 요단강 저지대에 의하여 물이 풍족했고, 부요와 환락으로 뒤덮여 있어 많은 이들의 선망의 대상이 된 곳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삼촌을 제치고서라도 차지하고픈 그런 도시였습니다. 롯의 육신 적인 눈에는 이 도시가 마치 하나님의 동산 같이 아름다워 보였다고 했습니다(창 13:10).
그러나 이 도시는 부패하고 타락한 곳이었습니다.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창 13:13) 고 했습니다.
20절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이 땅의 억울한 사람들의 원성은 하늘을 찔렀고, 하나님의 귀와 눈에 그들의 죄악상이 생생히 드러났습니다. 문제는 죄악의 도성을 멸하시려는 하나님의 심판 계획이 진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시면 세워지고 허무시면 허물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도성입니다.

그러나 소돔 심판을 막아선 아브라함이 있었습니다.
본문 22절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라고 했습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얍복강 나루에서 하나님과 싸웠습니다.
에스겔에도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30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에서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 31 내가 내 분노를 그들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들 행위대로 그들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겔 22:30-31)고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을 막아줄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누가 하나님의 이런 심판을 막아설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거기엔 누군가 있어야 했습니다. 대서양에서 쾌속 항해를 하고 있던 타이타닉호 위의 2,200명 사람들 중에서 술에 취하고 쾌락에 취하고 부귀에 취해 있던 사람들은 모르더라도, 죽음의 항해를 하고 있던 그 배에는 경고를 알아들을 수 있는 누군가가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배에는 없었습니다.

소돔에는 하나님의 사람 아브라함이 있었습니다.
소돔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막아 선 사람 아브라함은 죄악 도성을 가슴에 안고 하나님의 긍휼을 부르짖은 위대한 ‘중보 기도자’ 아브라함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를 사랑했습니다. 유흥적인 도시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영혼을 사랑했습니다. 그 도시들이 죄악에서 돌이키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비록 죄악으로 찌든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의 영혼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아브라함은 무너져 가는 도성을 온 몸으로 막으려고 했습니다.
본문 27절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아브라함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티끌이나 재에 불과 합니다. 그러니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 15:8)고 했습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10달을 못 채우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들 떨어진자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의인은 천재가 아닙니다. 휼룡한 도덕적인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는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의 목숨을 건 기도가 시작됩니다.
23절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이 말은 의인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50명의 의인으로 시작하여 10명으로 마쳤습니다. 소돔 인근 네 성읍들(고모라, 아드마, 스보임, 소알)지역을 합하면 적어도 한 성읍에 의인 10명 정도는 있을 것이라는 추측에서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안전 권에 들려면 해보는 만큼 해야 합니다. 그래서 10명까지 줄여 놓았습니다.
“거기서 45명을, 40명을, 30명을, 20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28-31절)
줄여 가다가 마지막에 32절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 거기서 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은 이미 멸망으로 끝날 심판의 상황을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로 상황을 바꾸기 위해 간절히 구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 기도의 사람들은 어둠의 세계를 빛의 세계로 바꿉니다. 아브라함은 타락한 도시이지만 그 도시를 가슴에 안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옵니다. 우리도 이 땅은 안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처럼 간절함이 필요합니다. 끈질긴 기도가 필요합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뿐만 아니라 그 성중의 모든 사람을 위하여 불타는 심정을 가졌던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 라고 했습니다. 타락한 이 땅을 심판하실 때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 6:8)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긍휼을 받는 것, 은혜를 입어야 살 수 있습니다. 기도는 결국 어떠한 기도이든지 자기 자신을 이롭게 합니다. 세상을 살려내는 힘이 기도에서 나옵니다. 사탄이 다른 것은 다 막아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려지는 기도는 막지 못합니다.
성도의 향이 기도입니다.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계 5:8) 마지막 때에 천사들에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도 기도입니다.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계 8:4)
기도하심으로 나라와 민족을 살리고 우리 교회를 살리고 여러분들의 가정을 살리고 자신을 살리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감사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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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고후 12:9-10)

사람이 왜 위대합니까? 사람이 왜 귀합니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고 하나님을 알고 감사할 줄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땅의 몇 만 종의 동물이 있지만 서로 만나서 인사하는 동물은 없습니다. 수많은 개를 보았지만 개가 서로 길 가다가 인사하는 것 한번도 못 봤습니다. 서로 노려보고는 갑디다. 사람만 감사할 줄 압니다. 사람만 인사할 줄 압니다. 아무리 원숭이가 똑똑해도 자기가 입을 옷 하나 만들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동차를 만들고 컴퓨터를 만들고 비행기를 만들었습니다. 사람과 동물은 다릅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만 사람이 동물과 다른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영혼이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물과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사람이 만일 감사할 줄 모른다면 동물처럼 되는 것입니다.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한마디로 빈털터리 인생이었습니다. 율법교사도 포기했고, 결혼도 포기했고, 성공도 다 포기했습니다. 건강도 좋지 않았습니다. 생활도 가난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런 그가 입 열 때마다 강조한 것은 감사였습니다. 특별히 감사가 많이 나오는 곳은 옥중서신입니다(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감옥에 갇혀서도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키프슨(Barnett Gipson)박사는 그의 저서 “행복한 하루(Happiness Days Night)”에서 “당신의 손에 얼마나 많은 것을 쥐었느냐 하는 것은 그대로 행복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대의 마음속에 감사한 생각이 없으면 그대는 파멸의 노를 젖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공부보다 먼저 감사할 줄 아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감사의 예술을 배울 때 그대는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고 쓰고 있습니다.
소크라데스의 제자 플라톤도 사람의 행복의 조건은 쓰고 남을 정도의 부가 아니라 쓰기에 약간 부족할 정도로 가진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외모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잘난 사람이 아니라 자기가 보기에도 부족함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행복이 얼마나 많은 것을 소유하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얼마나 감사하느냐에 달여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행 26:29)고 했습니다.
감사란 찾으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원망이나 불평도 찾으면 얼마든지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감사 쪽으로 눈을 돌리면 감사가 보이고 불평 쪽으로 눈을 돌리면 불평이 보입니다.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느냐 그것은 나에게 달렸습니다. 감사를 택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시기를 바랍니다. 축복 쪽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메뚜기처럼 작은 내가 아니라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능력을 믿는 사람들이, 성령이 이 시대에도 여전히 역사 하는 것을 믿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과 같이, 세상 적인 조건에 의해서만 기뻐할 때 기뻐한다면 세상 사람과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이 기뻐하지 않을 때도 기뻐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이 낙담하고 좌절해 있을 때에도 기뻐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현재의 자신의 모습만 보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미래에 주어질 하나님의 나라까지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이 가지고 있지 않은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세상 사람과 다릅니다.
바울사도는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슬픔에 잠겨서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니라 슬픔을 극복하고 일어나 사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같습니다. 누구나 세상에서 슬픔을 겪습니다. 어느 집이나 속 들여다보면 같습니다.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모두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그 속에서 나와야 합니다. 문제 투성이 속에서 빠져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구렁에서 나와야 합니다.
어떤 분이 사랑하던 아내가 먼저 사상을 떠났습니다. 너무나 그립고 못 잊어서 20년 동안 아내가 입던 옷, 사진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겁니다. 처음 5년 동안은 사람들은 참 그 사람 정말 진실한 사람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20년을 그러고 있으니까 이제 질렸습니다. 이것은 아닙니다, 털고 일어나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그 아내의 삶까지 다 살아야 합니다.

제가 지난 금요일(2010.11.19) 96일만에 컴퓨터로 성경을 1독 타자 했습니다. (http://kcm.kr/bible_taja/)
참 많은 말씀가운데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타자할 때에 때로는 내 마음을 두드리듯이 타이핑했습니다. 때로는 아름다운 노래 소리에 맞추어 피아노 건반을 타듯이 타이핑했습니다. 말씀 하나 하나를 깨달은 것도 큰 기쁨이지만 무엇보다도 이 기간 동안에 하나님의 임재 하심을 느꼈습니다. 우리는 자꾸만 말씀을 깨달으려고만 합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느끼는 것입니다.
영성가 토마스 머턴은 “감사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 안에서 그분의 사랑을 인식함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부모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 엄마의 품속을 느끼는 것입니다. 엄마와 함께 하는 평안함 기쁨입니다. 그 마음을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참 행복했습니다.
마지막 요한계시록을 읽으면서 정말 은혜 받았습니다.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2-4)

성경타자 프로그램을 설계할 때에 세 가지에 역점을 두었습니다.
첫 번째 편리하게 타자할 수 있게 만드는 것, 두 번째 다양한 통계가 가능하도록, 세 번째 모든 기록을 잘 남기자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기쁘게 사는 것입니다.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데이터를 가지고 계십니다. 다 알고 계십니다. 머리카락 하나 까지도 다 세고 계십니다. 나에 대해서 모르시는 것이 없습니다.

현재의 나를 감사하세요.
본문 9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현재 상태를 감사하지 못하면 감사할 수 없습니다. 나에게 부족함이 있습니다. 약한 곳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습 이 대로를 감사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을 감사하세요. 얼마 전에 미얀마에서 카렌족이 동산 당에 의해서 또 쫓겨났습니다. 그들은 국적이 없습니다. 산 속을 떠돌아다닙니다. 몇 백만 명이 넘습니다. 나라 없는 서로 움을 우리는 잘 모릅니다. 지금의 나와 주어진 상황을 놓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학자 헉슬리는 말년에 시각을 잃었습니다. 그는 점자로 글을 읽었습니다. 그는 눈이 보이지 않았지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점자를 읽을 수 있게 되니 담요를 뒤집어쓰고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주 추운 밤에도 손이 따뜻한 채로 책을 읽게 된 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손으로 만져보고 감격했습니다. 만지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시각이라는 소유를 상실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아직도 존재가 희망이 있습니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 사람은 강한 것, 있는 것, 가진 것만을 가지고 감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가지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감사합니다. 약한 것을 가지고도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의 강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의 부족함 가운데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내가 강하면 주님을 떠나가십니다. 그러나 내가 약하면 주님이 머물러 계십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본문 10절 “이는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예수님을 인하여 감사하세요.
“6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2:6-7)
우리가 감사할 것이 아주 많지만 그 중에 제일 감사해야 하는 제목입니다. 예수를 주로 받은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감사의 제목은 없습니다. 그분은 이 땅에 오신 것은 섬기러 오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를 억압하고 협박해서 무엇을 었고자 하심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로마서 1:6에는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라고 합니다. 1:7에는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라고 합니다. 부르심에 대한 바울의 고백입니다. 부르심이 얼마나 대단한 은총인가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축복입니다.
우리나라 성도들이 제일 많이 부르는 찬송이 뭐냐? 제일 좋아하는 찬송이 뭐냐? 조사를 했는데 제일 좋아하고 은혜를 받고 많이 부르는 찬송이 첫 번째가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왜 하나님이 나를 택하여 주셨는지 나를 구속해 주시는 그 은혜가 너무 크다 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주님의 감사를 처음 깨닫고 은혜를 받는 그 순간에 우리가 얼마나 감격했습니다. 그 감사가 얼마나 넘쳐흘렀습니까?
주님은 에베소 교회에 대해 말씀하시기를(계 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계 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것 다 잊어버리고 살아도 됩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주님의 사랑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감사가 없으면 축복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찌무라 간조라고 하는 일본의 유명한 신학자가 “감사할 줄 모르는 자식을 두는 것 보다 차라리 독사 이빨에 물리는 것이 났다”고 했습니다.
감사할 줄 아는 자녀로 키우시면 자녀교육은 성공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께 축복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인데 하나님의 뜻에 맡지 않는 사람이 잘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면 감사하지 않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출애굽기 22:29절에서부터 보면 “너는 네가 추수한 것과 네가 짜낸 즙을 바치기를 더디하지 말지며 네 처음 난 아들들을 내게 줄지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명한 헨리는 말하기를 감사는 최고의 항암제, 해독제, 방부제라고 했습니다. 암을 막아내는 게 감사이며 해독제와 방부제가 됩니다. 과학적으로 수 없이 증명되고 있습니다. 사람은 감사하는 것만큼 잘됩니다. 밀러는 말하기를 감사의 크기에 따라 행복의 크기가 결정된다고 했고, 본 회퍼는 감사를 통해 부자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감사가 이렇게 좋은 것입니다.
감사하시며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도전의 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12)

하나님 앞에서 볼 때 사람은 다 불쌍합니다. 제 친구 중에 제법 잘 나가는 친구가 있습니다. 몇 일 전에 한국에 왔습니다. 저는 성경타자 하냐고 바빠서 못 나갔습니다. 그 친구는 에어버스 전용기를 타고 왔습니다. 왜 제가 정말 친구냐고요. 준혁이에게 물어보세요. 나이가 같으면 다 친구지요. 전용기 한 대만 온 것이 아니라 그 옆에 보조로 비행기 두 대가 더 따라 왔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자기가 타고 다닐 자동차도 따로 가지고 왔습니다. 그 자동차는 너무 크고 무거워서 보통사람은 줘도 기름 값 너무 들어서 못 탑니다.
그런데 한국에 오기 전에 미국에서 선거가 있었는데 자기가 속한 민주당이 대패했습니다. 힘이 다 빠져있는 상태에서 한국에 온 겁니다. G20 서울회의와 한미 FTA의 해결을 위해서 시간도 정하고 청와대에서 한미정상회담을 열면서 타결 소식을 기다렸지만 잘 되지 않았습니다. 기자회견 때 얼굴이 굳어졌습니다. 미국민들 입장에서 봐도 실망입니다. 먹이를 구해 가지고 가지 못하는 사자처럼 되었습니다.
거기다 G20 첫날 저녁 만찬을 하는데 각 국 정상들이 늦게 오는 바람에 20분이나 지연되었습니다. 각 국 정상들이 자기가 맨 나중에 들어오려고 일부러 늦게 도착한 겁니다. 미, 중은 특히 기 싸움이 대단합니다. 일부러 10분 늦게 출발을 하고 도착해서도 보이지 않게 서로 나중에 들어오려고 기 싸움을 하다가 20분이 늦어졌습니다. 원래는 대통령이 제임 기간이 제일 긴 브라질 대통령이 제일 나중에 들어오기로 되어 있는데 미국, 중국 정상이 안 오니까 먼저 들어온 겁니다. 그 때부터 다 꼬이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최근(2010.11.8)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이 한국을 “아시아의 기적”으로 표현하며 발전상을 상세히 전했습니다.
“30년 전 한국은 말레이시아와 멕시코보다 가난했다”면서 이후 1인당 국내총생산이 말레이시아나 멕시코의 두 배를 웃도는 1만7000달러로 급증했고 올해 예상 GDP 성장률이 6%에 이를 정도로 “놀라운 성과”를 내고 있다고 소개했습니다.
실례로 삼성과 LG전자의 LCD 텔레비전 시장 지배, 4G 휴대전화 기술 선도, 현대자동차의 약진, 온라인 게임 및 대중음악과 같은 신(新)산업 성장동력 부상 등을 꼽았습니다.
이 잡지는 더불어 “세계화가 한국 경제 기적의 엔진 역할을 했다”며 1997년 금융위기 후 외국인이 한국 기업의 경영진은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장벽과 편견을 없애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체제가 완벽하다는 뜻은 아니라며 “발전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는 여전히 외국의 영향을 경계하고, 직장에서 여성에 차별적이다”라고 꼬집었습니다.
타임지는 나아가 복잡한 기업 규제와 경직된 교육 시스템, 북한의 위협 등 장애 요소가 있지만 “한국은 도전에 맞서온 나라”였다면서 한국의 미래상을 낙관적으로 내다봤습니다.

모든 것이 다 주어지면 완벽해지고 좋아질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완벽한 사람이란 없습니다.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이 완벽한 나라란 없습니다. 미국도 문제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어려 움들을 극복해 가면서 성장하고 발전해 왔습니다. 미국의 가장 큰 문제는 인종차별이었습니다. 흑백갈등입니다. 흑인 대통령이 탄생했지만 아직도 이러한 문제가 다 해결되었다는 볼 수 없습니다. 요즘에는 달러를 너무 많이 풀어 세계 환율에 지각변동을 일으키면서 문제를 낳고 있습니다. 그러나 타임지가 말한 것처럼 문제가 있기 때문에 도전할 것이 있는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는 할 일이 이 땅에서 많은 것입니다.

미션(Mission)이라는 영어 단어는 참 여러 가지로 번역이 가능한 것 같습니다. 저는 오늘 미션이라는 단어를 ‘도전, 힘, 교육’이라고 번역하고 싶습니다.

본문에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고 했습니다. biavzetai, kai; biastai;(비아조(침노를 당함) 카이 비아스테스(침노하는))입니다. 비아는 힘입니다. 지식적 머리가 아닙니다. “힘으로도 못 가요”라고 노래했지만 사실은 무슨 힘을 말한 것이냐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힘으로 천국을 공략해야 천국에 간다고 했습니다. 그 힘은 무엇이며 그 이 힘은 어디서 나옵니까? 그 힘은 외면적 힘이 아니라 내면적 힘입니다. 하드파워가 아니라 소프트 파워입니다. 세상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힙입니다. 무력적 힘이 아니라 사랑의 힘입니다.
오늘 본문은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이 감옥에 갇혔을 때 그의 제자들을 보내 예수께 질문을 하고 말미에 예수님이 오늘 본문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7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8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부드러운 옷 입은 왕궁의 힘이 아닙니다. 이 세상 왕의 힘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힘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힘입니다. 사람들이 볼 때 바보처럼 보였지만 사람을 살리는 영혼의 힘입니다. 십자가의 힘입니다.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고 했습니다.

무엇을 위해, 무엇 때문에, 어떻게 도전할 것인가?
예수님이 제자들을 훈련시키신 것에서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 나라(천국 복음)’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도전해야 합니다.
올해의 최고 뉴스는 칠레 광부들이 살아서 올라온 것일 것입니다. 지하갱도에 622m지점에 갇힌 지 69일 만입니다. 끈질긴 생명력을 보이며 감동을 안겼던 주인공들을 맞이하려 전 세계 1,700여명 취재진이 전 세계에 생중계 했습니다. 사고 발생 17일만에 처음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최초에 사고 발생 17일까지는 광부들이 갖고있던 비상식량 이틀치를 가지고 48시간마다 1인당 참치 두스푼, 과자 반조각, 우유 반컵을 먹으면서 버텼다고 합니다.
살아있는 감동의 드라마였습니다. 오바마가 대통령 취임할 때보다 더 많은 사람이 보았습니다. 더 감격적이었습니다. 무슨 돈을 번 것도 아니고, 무슨 월드컵에서 우승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지구촌은 감동했습니다. 죽을 뻔한 생명이 살았기 때문입니다.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한 생명은 천하보다 귀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가다라 지방에 가셨을 때 쇠사슬로도 묶어둘 수 없었던 아주 강한 귀신이 들어간 사람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그 귀신은 돼지 떼에게 들어가기를 구하여 예수님께서 허락 하셔서 돼지 떼에게 들어갔습니다. 돼지들은 낭떨어지로 떨어져 다 죽었습니다. 이 일로 온 마을이 난리가 났습니다. 예수님은 결국 이 거라사인 지방에서 쫓겨나셨습니다(마 8:30-31, 눅 8:32). 귀신이 나간 한 영혼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지방 사람들은 자신들의 경제적인 입장만 생각했습니다. 세상의 것에 도전하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도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왜 천국을 침노해야 합니까? 우리의 영혼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여러분을 속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속이지 않습니다, 저는 이것을 믿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교육은 인격변화, 인간변화에 치중하셨습니다.
지식전달 위주가 아니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인격의 변화 없이 지식을 담는 것은 청소하지 않은 물통에 물만 넣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좋은 물을 집어넣어도 더럽습니다. 그릇이 더럽기 때문입니다. 인격의 변화는 사람을 새롭게 만드는 일입니다.
“21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22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막 2:21-22)
바울은 선언합니다. ‘새것이 되었도다’ 새것이 되고 뭘 해도 해야 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셋째, 인격적 관계형성을 통한 교육입니다. 부단한 접촉입니다. 예수님은 삼 년 합숙하셨습니다. 도제훈련입니다. 사람을 알려면 오랜 시간 교실에 앉아 있다고 알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행을 한번 같이 가보면 압니다. 다 드러납니다.
아무리 오래 교육해도 머리로 하는 교육은 머리만 키울 뿐입니다. 가정 교육이 왜 중요하냐 하면, 가정에서 인격적 관계형성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가정에 문제가 생기면 인격이 무너지고 관계가 무너집니다.

넷째, 현장 중심으로 교육시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팀을 구성하실 때, 예루살렘의 똑똑한 사람들로 구성하신 것이 아닙니다. 소박한 갈릴리 어부 중심으로 팀을 구성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나라 운동, 복음 사업이란 우리의 머리나, 우리의 지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되었느냐, 회개하고 복음을 믿느냐 하는 조건들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가룟유다가 탈락하게 되는데, 한가지 다른 제자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머리가 지나치게 좋았다는 것입니다. 그 것 때문에 그 대열에서 이탈하게됩니다. 그럼 어떻게 머리가 좋다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마지막 주간에 호산나하고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다른 사람들은 사태를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가룟유다는 달랐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아주 냉정한 사람입니다. 이성적인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은 예수님이 왕이 다 되신 것처럼 흥분해 있었지만 가룟유다는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 틀림없이 권력자들과 대결할 것이고, 우리가 이길 승산은 1%도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때 다른 제자는 뭐했냐하면 누가 우리 중에 크냐, 누가 오른편에 앉을 것인가를 생각하고 들어갔습니다. 마지막 만찬 때까지도 다른 제자들은 몰랐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순진하게 “저는 아니지요, 저는 아니지요?” 그랬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만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가룟유다입니다. 다른 사람은 지금 다 모르는데 가롯유다만 압니다. 그래서, 자기가 살길을 찾아 권력이 있는 쪽에 붙은 것입니다. 자기가 살기 위해서 배반한 것입니다. 그 만큼 가룟유다는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나중에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가룟유다처럼 선생을 미리 팔지는 않았습니다. 그럴 머리도, 재주도 없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지나치게 앞서가면 이렇게 됩니다.
사람이 살려고 하는 것을 나쁘다고 만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살려고 선생을 판 것은 분명 너무 앞서간 것입니다. 사람의 수가 너무 빨랐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는 상황이 우리에게도 온다면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내 생각으로 미리 피해보아야 안됩니다. 피해도 정도를 가야 합니다.
인간적인 장점만 가지고는 사도직을 수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꾼의 핵심은 우리의 지식이나 우리의 자원이 아니라 회개하고 복음을 믿고 헌신한 사람들이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훈련시킬 때 특징을 보면 원리를 가르치시고 방법을 가르치시지 않았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조금 무식한 교육을 시키신 것입니다. 제가 가끔 그런 표현 잘 씁니다, 무식한 게 통한다고요.

“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19-21)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고방식을 가르치시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하나님을 믿는 것을 강조하시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보다는 관념적인 이론보다는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침노라는 단어가 두 번 나오는데 ‘힘’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힘’이지만 사실 ‘싸움’을 말합니다.
이삭이 60세에 쌍둥이를 나았습니다. 야곱은 형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나왔습니다(창 25:26). 그 형 에서는 용맹하고 사냥을 잘하나 야곱은 대조적으로 유순하였습니다. 어머니는 그런 야곱을 편애하였습니다(창 25:27-28). 야곱은 어머니의 도움으로 장자의 축복을 팥죽 한 그릇에 샀습니다(창 25:20-34). 그 후 야곱은 축복을 빼앗긴 형의 분노를 받아 목숨의 위협을 느끼고 부모를 이별하고 1천 8백리 되는 하란에 있는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 간 도망가서 타향살이를 합니다. 많은 축복을 받았지만 야곱의 소원은 고향에 돌아가 형 에서를 만나는 일이었습니다. 이제 20년이란 세월이 흘렀으니 이제 형의 마음도 누그러졌겠지 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려고 합니다. 야곱은 형 에서에게 사람을 보내어 최대의 경칭 어인 ‘주’라 부르고 자신은 ‘종’이라고 낮추면서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창 32:5)라고 합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형이 400명의 사병을 이끌고 온다는 소식을 듣고 야곱은 전략을 바꿉니다. 이번에는 선물공세를 펴는 것입니다. 또 야곱은 에서가 한 떼를 치면 나머지 한 떼는 피하라는 작전도 세웠습니다.
야곱의 이름에 “속이는 자, 간사한 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는 이름처럼 모든 수단을 다 강구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야곱이 이것 때문에, 자신의 계책 때문에 하나님께 선택받은 것이 아닙니다.
형에게 줄 선물은 미리 보내고 “22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23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창 32:22-28) 고 했습니다.

물러서지 않는 악착같음이 야곱에게 있었습니다. 야곱은 얍복 나루에 천사가 나타났을 때 씨름을 하면서 알아보았습니다. 이 사람이 자기에게 축복해 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연애 프로그램인 1박 2일인가에서 강호동이 하고 이만기가 씨름하는 것이 나왔습니다. 서로 장난하면서 이만기는 20년 만에 처음 삿바를 잡아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씨름 선수는 삿바를 잡아보면 안다는 것입니다. 아! 내가 이길 수 있겠구나 하는 감이 온답니다. 야곱도 감이 왔습니다. “이 사람(천사)은 나에게 축복을 줄 수 있는 사람이다” 이것을 알고 물러서지 않습니다. 기회입니다. 잡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얍복강의 기회가 왔습니다. 우리의 얍복강이 어디입니까? 주앙교회입니다. 이 교회에서 천사를 붙잡으시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싸우시기를 바랍니다.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눅 5:5) 베드로의 이 대답으로 베드로는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로 부름을 받습니다. 그가 비록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고 있지만 말씀을 의지했습니다. 예수님은 순종하는 베드로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머리가 좋은 것 보다, 많이 아는 것 보다 소중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셀라의 합창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시 3:8)

오늘 설교제목 멋있지요? 여러분이 화답을 하여야 합니다. ‘아멘’이라고 하셨으면 그것은 말로 화답한 것입니다. 악기로 화답했다면 그것이 ‘셀라’입니다. 아멘과 마찬가지로 셀라는 화답의 표시입니다.
원래는 심벌즈를 통해서 합창의 단조로운 흐름을 막기 위한 지휘자의 신호입니다.
셀라는 시편 39편과 합 3:3, 9, 13에 모두 71번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악인은 자기가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 (힉가욘, 셀라)”(시 9:16) 학기욘 셀라의 뜻은 조용히 묵상하는 속삭임 속에서 심벌즈를 한번 치라는 지시입니다.
실벌즈를 한번 치면 그 다음에 쉬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셀라를 쉬라는 뜻으로 보기도 합니다. 제가 너무 일을 많이 하는 것 같으니까 미국에 갔을 때 목사님이 저보고 ‘이 목사 쉼표도 음악이야!’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바로 그런 쉼, 하나님을 위해 다음을 준비하기 위한 음악의 쉼표 같은 것, 그것이 셀라입니다.

지휘자의 지휘에 따라 셀라를 하려면 전체 음악에 집중해야 합니다. 단 한번 비록 마칠 때 단 한번의 심벌즈를 치지만 그 때를 놓치면 안됩니다. 한번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한번은 전체 음악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합창은 혼자 부르는 노래가 아닙니다. 합창은 자기에게 맡겨진 것 그것을 잘 해야합니다. 아무 때나 큰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닙니다. 혼자 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공동체로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셨지만 그에게 혼자사는 축복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축복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 12:2)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창 22:17)
모세를 부르신 목적도 이스라엘을 구원하고자 함입니다. 바울을 부르신 것도 하나님의 백성을 부르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말할 때 성경에 꼭 따라다니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너만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너와 네 민족이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본문도 잘 보세요.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 시편 기자는 주의 백성에게 구원을 내려 달라고 노래합니다.
이러한 사상은 신약성경도 다르지 않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 같혔을 때 지진이 나서 옥문이 열렸습니다. 그 때 간수가 자결을 하려고 합니다. 바울과 실라는 나가지 않고 간수에게 우리가 여기 있다고 말합니다.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10절),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고 합니다.
바로 앞에 행 16:12-15에 바울이 빌립보에 이르렀을 때에 안식일에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 14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15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고 했습니다. 혼자만 구원받지 않습니다. 네 집이, 네 백성이 모두 구원받기를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집에 형제, 자매가 없는 분들은 교회에 오면 좋습니다. 다 형제고 다 자매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고 백성입니다. 교회는 개인적이지 않습니다. 함께 가는 곳입니다. 더불어 사는 곳입니다.
어떤 분이 서양에는 농기구들을 보면 함께 하는 것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혼자 하는 기구들 ‘지게’ 같은 것이 발전했다고 한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우리나라는 산악지형이 많아 도로가 늦게 닦였습니다. 그러나 보니 지게가 유리한 것입니다. 오히려 서양에 보면 손수레는 혼자 끌고 다니는 것인데 우리나라의 리어커는 함께 당기고 밀게되어 있습니다.
제가 한번 선교에 칼럼에 ‘가레 선교’라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어려서 가레질을 한번 해 보면 참 재미있었습니다. 힘도 덜 들면서 재미있게 고랑을 파고 물길을 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레 질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줄을 잡아당길 때와 놓아줄 때를 잘 알아야 합니다, 아무 때나 당기면 안됩니다. 또 돌맹이 같은 것이 걸렸을 때는 힘을 더 주어야 합니다. 가운데 있는 사람은 삽을 또 잘 대야합니다.

합창은 다른 사람을 배려합니다.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요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니라”(잠 14:21)
하나님은 합창을 원하고 계십니다. 혼자 살아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함께 돌아오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친구들과 함께 달리기를 합니다. 그런데 중간에서 그만 돌에 부딪쳐 다리를 다쳤습니다. 절뚝거리며 더 이상 달릴 수 없습니다. 그러면 혼자 1등으로 들어오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함께 해야 합니다.

“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20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마 19:19-21)
이 때부터 사람들이 온전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답니다.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괜히 온전해 지고자 했다가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말씀을 실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28 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 12:28-31) 고 하셨습니다.

본문의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주의 백성이 누구입니까?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마 12:50)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주의 백성입니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계 1:9) 하나님 말씀을 증거 하다가 밧모섬까지 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선교지에 가보면 여러 선교사가 있습니다. 그 중에 한 분을 보게 되었는데 이 선교사님 사모님은 아이들 교육에 올인 했습니다. 교육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합니다. 아무리 선교사 이지만 자기 자식 교육시키는 것을 가지고 뭐라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선교비를 자녀교육에 다 써버린다면 이해가 되겠습니까? 결국은 나중에 미국으로 가더라구요. 그것도 알고 보면 자녀교육 때문에 간 것이지요. 지금 중심이 누구입니까? 자녀 아닙니까?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게 교회에서 세습을 반대하는데도 무리하게 밀어 부쳐 많은 불신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너무 이기적입니다. 할 사람이 없으면 모르지만 많은 사람이 좋지 안게 보면 그만두어야 합니다. 누가 진정한 형제이냐는 것입니다. 누가 진정한 주의 백성이냐는 것입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냐” 라는 질문에 해답을 얻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러시아의 석학들하고도 많은 토론도 벌였습니다. 답을 얻지 못한 톨스토이는 어느 날 동네에서 농사꾼 친구에게 “사람이 왜 사느냐” 그랬습니다. 그 농부는 당연하다는 듯이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지요” 그랬습니다. 이 간단한 한마디가 톨스토이를 살렸습니다. 그는 훗날 불후의 명작 부활이라는 명작을 저술했습니다.
태평양 건너에 아내 보내놓고 자녀 보내놓고 ‘꺼억 꺼억’ 하면서 기러기가 되어 가지고 살지 마세요. 자녀 따라다니면서 살지 마세요. 자녀 중심으로 살지 마세요.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됩니다.
자녀교육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진정한 자녀교육은 내가 먼저 하나님께 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후손에게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황금이 현재에는 좋아보이고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을 듯이 보이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굳게 믿는다면 훗날에 큰 기쁨을 찾이 할 것이다. 재물에 눈이 멀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게 된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에 눈이 멀어야 하겠다”(1954.11.14 정재학 목사)

정재학 목사님의 사모님(차은숙:합일학교(1901년 신식교육으로 감리교가 세움) 교사 차경창(후 감리교 목사 됨) 여동생)은 김차열 목사님 부부가 방문했을 때 말씀하시기를 “내가 눈이 먼 것도 해산했으나 먹을 것이 없어서 영양실조로 이렇게 되었고, 지금도 우리는 이렇게 살고 있다오.” 하시면서 목사님 사모님 고생하신 이야기를 할 때 함께 울기 시작하였는데 말씀이 떨어지자 마자 나는 목사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하면서 한나절을 울었습니다(김차열 목사 추모사 중에서).
우리는 주님 앞에서 울어야 합니다. 너무 많이 먹었습니다. 너무 많이 모았습니다. 너무 욕심을 부렸습니다. 차사모님은 정재학 목사님이 서산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섬에 홀로 남아 있을 때에 딸을 잃었고 남자아이를 낳았는데 서산으로 이사 나오는 중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정재학 목사님은 인천 앞 바다에 있는 덕적도 서포리에 살았습니다. 1926년 12월 덕적도진리감리교회에 이용도목사가 부흥회가 있었습니다. 아껴주시던 선생님 부탁을 저버릴 수 없어 참석하게 되었는데 이때 이용도 목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롬 8:28-29 “모든 것을 협력하여 선을 이루라” 성도들은 밤새도록 울부짖었습니다. 이후 성결교 신학교를 졸업하고 성결교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 정재학 목사님은 우리교회 정 선교사님의 할아버님이 되십니다. 그리고 택민이 증조할아버님이십니다.

정목사님은 ‘바보 같은 성자’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것은 서산학교 설립 초기에 전교생 교복을 인천에다 주문했는데 오다가 없어졌습니다. 이 일을 수습하기 위해 정 목사님만이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으로 믿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백희씨가 동행했습니다. 이 분의 증언입니다. 서산에서 인천으로 배를 타고 가서 굶주린 상태에서 주막에서 점심을 먹어야 하는데 거지가 와서 도와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드릴 점심을 거지에게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 거지는 저녁때 또 왔다는 겁니다. 또 그렇게 했답니다. 몇 끼를 이 거지에게 다 주고 당신은 몇 끼를 굶고 다녔다는 것입니다. 한 선생님은 처음에는 참 바보 같은 짓이다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이분은 진정 성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돌아와 이 말을 전했던 것입니다.
최정화 권사님은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야, 목사는 정 목사 밖에 없어. 참말이지 그 목사 밖에는 진짜 목사는 없어, 옥녀봉 꼭대기에서 밤새 기도하는데 호랑이가 한참 보다가 그대로 갔대” 그것뿐이 아닙니다. 이런 말도 있습니다. “그 큰 소나무들이 정 목사님 눈물 받아먹고 컸다네”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당시 서산지역으로 가신 목사님들은 교파를 초월해서 정 목사님을 먼저 찾아뵈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1943년 10월 20일 밤 일경들이 방문하여 구둣발로 차고 비밀문서를 찾는다고 목사님의 집을 뒤졌습니다. 이 때 돌을 넘긴 딸과 장남 현웅(정 선교사님 아버님)이 네 살이었습니다. 그때 잡혀가서 홍성경찰서를 거쳐 공주교도소에 옥고를 치루고 있었습니다. 일제에 의한 죄명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패망을 예견한 내용’의 글을 유포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의 집은 흉가처럼 바뀌고 찾아오는 사람도 끊겼습니다. 목사님의 사택은 흉가처럼 되었습니다. 그리고 1944년 1월 2일 현웅(정 선교사님 아버님)이 5살 순자(고모)는 3살 그리고 막내 송자가 태어났습니다. 이 때 산모는 영양실조로 아이를 낳는 바람에 실명을 하게된 것입니다.
그리고 1년 5개월 간의 옥고로 온 몸이 동상과 영양실조로 만신창이가 되어 풀려난 후 5개월만에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목사님은 목회와 함께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원인이 우리 민족의 무지로 인한 국력의 세약함에 있다고 보고 교육의 기초건립을 위해 해방이 된 그 이듬해(1946년) 초부터 뜻 있는 인사들과 함께 서산에 중학교 설립을 추진, 서산경찰서 옆에 있던 양잠소를 개조해 서산중학교를 설립해 1946년 3월 15일 개교했습니다. 이후 은산중학교 설립에도 힘을 쏟았으며, 홍덕유 씨, 홍산웅 의사와 함께 상춘학원을 설립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올해(2010) 국가보훈처는 8·15 광복 65주년을 맞아 338명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에게 독립유공자 정부포상 전수식에서 늦게나마 포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왕 말씀드리는 것 하나 더 소개하지요.
정 선교사님은 아버님이 할아버님이 너무 고생하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아버님처럼 목회자가 되시지 않았다고 했는데 혹시 잘 모르는 것이 있지 않나 해서 알려드립니다.
정재학 목사님은 평소에 늘 선교를 부르짖었습니다. 당시에 사람들이 꿈도 못 꿀 1억원 재단을 만들려고 하셨습니다. 이 뜻을 기리기 위해 지난 2000년 6월 20일 서산교회(박광훈 목사)에서 ‘정재학 목사 선교재단’ 설립예배가 드려졌습니다. 본 선교재단은 고 정재학 목사의 유지에 따라 그 자녀들이 재산을 기부하면서 시작 되다고 합니다. 정 목사의 자제 정현웅 씨가 현금 1억원과 부동산(경기도 평택의 대지와 서울 중랑구의 한 건물)을 선교재단 기금으로 쓰도록 김차열 목사에게 의뢰함으로써 아버님의 뜻이었던 1억으로 재단을 창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정 선교사님 아버님이 제산 다 기증했다 그 이야기입니다. 너무 허무해 하지 마세요? 저는 아버님이 훌륭한 결단을 내리셨다고 생각합니다.

장기려 의사가 부산 영도 피난민 촌 천막병원에서 구슬땀을 흘리면서 젊은 조수에게 “자네도 나처럼 살아” 하였습니다. 젊은 조수는 “선생님처럼 살면 바보소리 듣는데요?” 라고 말하자 대답하기를 “사람이 한 평생 살고, 바보 소리 들으면 잘 산 거야!”라고 말씀하셨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너무 잘난척하고 잘나게만 살려고 하는 것 아닌가요? 사람에게 바보처럼 사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잘 사는 것일 수 있습니다. 조금은 바보처럼 삽시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
셀라는 더 높은 음으로 가기 위한 쉼입니다.
하나님께 충성, 봉사한 것 혹 이 땅에서 받지 못하면 하나님의 나라에서 받습니다. 하나님은 냉수 한 그릇의 대접도 잊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 믿고 행한 것 후회하지 않으십니다. 예전에 처음 국민 연금 시작할 때 몇 만원 붙고 나중에 돈이 많이 나오니까 그 때 좀더 불 것 그러는 분 많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는 그 정도가 아닙니다. 백배나 받게되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막 10:30).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