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을 사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6 예레미야가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였느니라 이르시기를 7 보라 네 숙부 살룸의 아들 하나멜이 네게 와서 말하기를 너는 아나돗에 있는 내 밭을 사라 이 기업을 무를 권리가 네게 있느니라 하리라 하시더니 8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나의 숙부의 아들 하나멜이 시위대 뜰 안 나에게 와서 이르되 청하노니 너는 베냐민 땅 아나돗에 있는 나의 밭을 사라 기업의 상속권이 네게 있고 무를 권리가 네게 있으니 너를 위하여 사라 하는지라 내가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인 줄 알았으므로 9 내 숙부의 아들 하나멜의 아나돗에 있는 밭을 사는데 은 십칠 세겔을 달아 주되 10 증서를 써서 봉인하고 증인을 세우고 은을 저울에 달아 주고 11 법과 규례대로 봉인하고 봉인하지 아니한 매매 증서를 내가 가지고 12 나의 숙부의 아들 하나멜과 매매 증서에 인 친 증인 앞과 시위대 뜰에 앉아 있는 유다 모든 사람 앞에서 그 매매 증서를 마세야의 손자 네리야의 아들 바룩에게 부치며 13 그들의 앞에서 바룩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14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 증서 곧 봉인하고 봉인하지 않은 매매 증서를 가지고 토기에 담아 오랫동안 보존하게 하라 15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사람이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 하셨다 하니라” (렘 32:6-15)

지난 수요일 제가 택배 두 개 5천 원에 보내야 하는데 200원이 모자라 정집사님께 200원 빌려서 보냈습니다. 그리고 낮에 우리 집사람이 왔길래 우체국에 우편물 하나 보낼 것이 있어서 돈 좀 있으면 주고 가라고 했더니 지금 막 은행 들려서 오는 길인데 마지막 2만원 찾아왔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마이너스 통장인 것 아시죠? 하고 돈 만원 주고 가버렸습니다. 우리 집사람에게는 참 미안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혼자 생각해보면 올해도 참 잘 살았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남겨놓는 것 없이 다 쓰고 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할 일 다 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목사가 돈 남겨 놓아서 뭐합니까? 나는 가난하지만 하나님의 일이 되어 가는 것을 보니 감사합니다. 2010년도 한 해에도 너무 감사할 제목이 많습니다.

성도가 어떤 사람이냐 하면 양입니다. 양은 늑대처럼 사납거나 똑똑하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정말 미련하기 짝이 없는 것 같이 보입니다. 다른 동물들은 자기를 방어할 수 있는 기능정도 하나씩은 있답니다. 뿔이 있던지, 빨리 달릴 수 있는 다리가 있던지, 눈이 좋던지, 냄새를 잘 맡든지… 그런데 양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딱 하나 있는 것은 귀로 목자의 음성을 구별하고 목자를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그것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께는 양이었고, 우리도 양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양이라면 목자 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설교는 잘 들어야 합니다. 설교는 안 듣고 졸다가 가시면 우리 목사님이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셨구나 그렇게 생각하시기 쉽습니다. 그럼 그렇지 목사님이 현실을 보시는구나! 역시 투자할 곳은 땅 뿐이 없어! 그렇게 생각하시기 쉽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었습니다.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8)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창 23:5-20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땅을 산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라가 죽자 사라를 장사지내기 위해서 매장 지를 산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헷 족속으로부터 땅을 살 때, 헷 족속은 그냥 묘실을 사용해도 된다고 합니다.
“6 내 주여 들으소서 당신은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이시니 우리 묘실 중에서 좋은 것을 택하여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우리 중에서 자기 묘실에 당신의 죽은 자 장사함을 금할 자가 없으리이다 7 아브라함이 일어나 그 땅 주민 헷 족속을 향하여 몸을 굽히고”(창 23:6-7)라고 했습니다. 12절에도 “아브라함이 이에 그 땅의 백성 앞에서 몸을 굽히고” 아브라함에게 그냥 좋은 땅을 골라 쓰라고 하지만 아브라함은 몸을 두 번씩이나 굽히고 겸손하게 대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인물됨을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겸손하게 그 땅의 사람들을 대했습니다. 그리고 땅 값 사백 세겔을 주고 마므레 앞 막벨라에 있는 에브론의 밭을 사서 사라를 이곳에 장사했습니다.
이 땅에 사라, 아브라함, 이삭과 그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야곱과 레아도 이곳에 장사되었습니다(창 49:30-31). 요셉이 애굽에 가서 총리가 되어 야곱이 거기서 죽었지만 요셉에게 유언하기를 가나안 땅, 바로 아브라함이 묻힌 그곳에 묻어달라고 유언하고 죽고 요셉은 그 유지를 받들어 야곱을 가나안 땅에 장사지냅니다(창 50:11).
땅을 산 목적은 투기가 아닙니다. 장사지내기 위해서입니다. 매장 지를 산 것입니다.

다윗도 땅을 샀습니다. 사무엘하 24장에 보면 다윗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자기의 군사를 의지합니다. 그래서 인구조사를 실시했는데 하나님께서 이에 노하사 “… 전염병을 이스라엘에게 내리시니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백성의 죽은 자가 칠만 명”(삼하 24:15)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갓 선지자를 통해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 가서 여호와께 제사를 지내라고 권합니다. 그리고 다윗은 “24 왕이 아라우나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고 다윗이 은 오십 세겔로 타작 마당과 소를 사고 25 그 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아는바와 같이 바로 이 땅이 예루살렘의 터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제사드리기 위해서 땅을 쌌습니다. 자기를 위해 사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나 다윗이나 모두 그냥 가지라고 했지만 돈을 지불하고 땅을 샀습니다. 값을 치르고 차지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레미야도 땅을 삽니다.
예레미야의 사촌인 하나멜이 예레미야에게 와서 땅을 사라고 합니다. 하나멜은 참 약삭빠른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땅은 다른 족속에게 팔 수 없습니다. 자기 족속만이 땅을 매매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분배해준 땅이 다른 지파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지파 사람에게는 팔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사촌인 하나멜에게 땅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땅은 이미 바벨론 군대가 포위하여 경제적으로 매우 궁핍해졌기 때문에 이미 가치가 없었습니다. 망해 가는 나라의 땅을 사라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은 십 팔 세겔을 주고 당시의 법에 따라 정확하게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0 증서를 써서 봉인하고 증인을 세우고 은을 저울에 달아 주고 11 법과 규례대로 봉인하고 봉인하지 아니한 매매 증서를 내가 가지고” 그리고 14절 “증서를 가지고 토기에 담아 오랫동안 보존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다 망한 땅을 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라고 하시는지 마지막 15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15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사람이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 하셨다 하니라” 이스라엘은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되지만 반드시 돌아와 이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을 상징적으로 예레미야를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남북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면서 국내 은행 고객들 사이에서도 “전쟁나면 은행에 맡긴 내 돈은 어떻게 되나”라는 걱정 섞인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22일 금융권에 따르면 국내 은행들은 전쟁이나 이에 준하는 비상사태, 천재지변 등을 대비해 마련해 놓은 비상대책(컨틴전시 플랜)에 따라 위기대응에 나설 수 있어 큰 문제는 없다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다른 시중은행 IT기획부장은 “해외 백업을 검토했지만 국내와 똑같은 시스템을 해외에 두고 관리하는데 비용부담이 커서 힘들다는 결론을 내렸다”며 “전면전 상황에서는 고객 정보를 완벽히 지켜낼 대책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런 은행에 저금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당시의 선지자들이란 사생활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실천하기 위해서 자신의 삶을 바쳐야 합니다. 호세아는 창녀 고멜과 결혼해야만 했습니다. 요나는 니느웨 성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도망가려고 시도했지만 자기의 뜻대로 안됩니다. 결국 니느웨로 갑니다.
이사야가 활동한 시대는 앗수르의 침략에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가 몹시 곤욕을 당하는 때이었습니다. 이미 주전 840년 예후 왕 때부터 북왕국 이스라엘은 앗수르 에게 조공을 바쳤습니다. 이사야가 아직 젊은 시절인 734년에 앗수르는 북왕국으로 부터 많은 포로를 붙잡아 가고 북왕국은 완전히 멸망해 버렸습니다. 수 년 후에 앗수르는 남왕국 유다에 침입하여 46개의 성을 파괴하였고 20만 명을 포로를 붙잡아 갔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하나님은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 메시야에 관한 예언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제일 암흑 시대에 제일 밝은 빛을 보여 주셨다는 말입니다.

예레미야가 당장 돈주고 산 땅은 이미 바벨론의 소유가 되어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땅으로 반드시 다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바보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바보 같습니다. 다 망한 땅을 사라고 하시니 말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에게는 좌절의 짙은 구름을 뚫고 비취는 소망의 빛을 바라보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다른 가짜 선지자들이 “평안하다, 평안하다”(렘 23:17) 할 때에 비록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가게 될 것을 예언했지만 그 다음에 주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마치 공증하듯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땅을 사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가게 되지만 절대적인 절망이 아닙니다. 민족과 개인의 흥망성쇠는 하나님이 쥐고 계십니다. 아무리 북한이, 중국이 있어도 상관없습니다. 러시아가 일본이 있어도 우리는 절망에 빠지거나 사로잡혀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한 개인과 나라의 운명은 하나님께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주권자에게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으나 사람의 일의 작정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느니라”(잠 29:26) 세상에서 권력을 잡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전 4:8-10) 인간의 절망이 있는 곳, 바로 그곳이 하나님의 권능이 역사 하실 장소가 됩니다. 인간의 힘이 존재하는 곳에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힘이 절망적인 곳에는 하나님의 힘이 역사 하는 곳이 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께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분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만 생각하신 것이 아닙니다. “개의치 않으시더니”라고 했습니다. 무서운 형틀의 십자가만 생각하면 어떻게 됩니까? 신경 쓰지 말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 주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셨습니다. 부활을 바라보셨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요, 사랑의 종교요, 소망의 종교입니다.

바로가 꿈 꾼 것을 요셉이 풀어줄 때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창 41:16)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대답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창 45:8) 자신이 애굽으로 형제들이 팔았지만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형제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 자신을 하나님이 먼저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팔아먹은 형제들을 원망만 하고 살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소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이 버리고 가는 땅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버려진 땅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망을 사는 것입니다. 야곱이 에서에게 팥죽으로 산 것도 이것입니다.

“10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11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13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고전 4:10-13)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바울과 이들 일행보다 오늘날 더 영광스럽게 된 사람들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만물의 찌꺼기”는 마치 공해 같은 것입니다. 세상에서 쓰고 남은 쓰레기라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에서는 쓸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버립니다. 우리가 비록 그러한 자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다 할 수 있으면 하나님은 역사하지 않습니다. 에바다, 우리의 영이 열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최고의 팀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요 14:10)

[먼저 영상을 보시겠습니다.] 이 영상은 유튜브를 통해 전 세계에서 1500만 명이 본 것입니다.
아버지 딕 호이트. 아들 릭 호이트 그리고 이들 부자에게 이름 하나가 더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을 합하여 ‘팀 호이트’(Team Hoyt)라는 이름입니다.
아들 릭 호이트는 1962년 1월 10일에 태어났는데 출산 직전에 엄마 뱃속에서 한바퀴를 돌면서 목에 탯줄을 감고 나와서 몸에 경련을 일으키고 호흡곤란으로 뇌성마비가 되었습니다. 병원에서는 아들을 포기하라고 했지만 20대 초반의 부부는 절대 아들을 포기할 수 없다고 하고 불완전한 아이를 집으로 대려 왔습니다.
아들을 시설에 보내라는 주위의 권고에도 부부는 “절대로 그렇게는 못합니다.”하면서 아이를 키웠습니다. 아들이 15세가 되었을 때 컴퓨터로 의사 소통을 했습니다. 아들은 “전 아빠와 달리고 싶어요”라는 말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이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뭉클해 졌습니다. 아버지는 처음으로 8km 달리기 대회에 나가 꼴지를 면하고 뒤에서 2등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경기 후 지쳐 집에 가서 쉬기만을 생각할 때 아들은 말했습니다.
“오늘 처음으로 내 몸의 장애가 사라진 것 같아요.” 이때부터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미친 듯이 뛰었습니다. 각종 마라톤 64회, 단축 철인3종 경기 206회, 보스톤 마라톤 대회 24회 연속 완주의 대 기록을 세웠습니다. 마라톤 최고 기록은 2시간 40분 47초로 정상인도 내기 힘든 기록입니다(마라톤 세계최고신기록 2시간 5분 42초, 1999.1025 시카고 올림픽에서 하누치(모로코)가 새움).
또한 자전거로 6000km에 이르는 미국 대륙 횡단을 했습니다. 각종 대회 1천여 번 참가했습니다. 대 기록을 작성한 아들이 말했습니다.
“아버지가 없었다면 할 수 없었을 거예요.”
아버지는 아들에게 “네가 없었다면 아버지는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없었다면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지 않습니다. 보내실 이유가 없습니다.

기자들이 릭에게 물었습니다. 너무 기록이 좋으니까 마라톤에서 혼자 뛰어 보시는 것이 어떻겠냐고. 그 때마다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없으면 안 한다는 겁니다. 휠체어를 붙잡고 뛰는 자신의 손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른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처음에 이들 부자의 ‘팀 호이트’를 쉽게 대회에 참가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팀 호이트는 포기하지 않고 완주를 목표로 그냥 참여했습니다. 처음에 받은 등 번호는 ’00′번 이었습니다. 앞 이가 빠진 릭의 모습 같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들 부자를 서로 초청하려고 합니다. 보스톤 마라톤 대회는 ‘팀 호이트’가 보이지 않으면 재미없다는 말까지 나옵니다.
아버지 딕 호이트는 말하기를 “나는 항상 도전하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손으로 일하는 것을 즐겼다. 땀 흘려 무언가를 만들어 냈을 때의 기쁨과 보람만큼 가치 있는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고 고백합니다.
1964년 4월 17일 둘째 아들이 태어났는데 ‘로버트 스탠리 호이트’가 어느 날 아버지에게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삶이 내게 어떤 역경을 주든 형이 날마다 맞닥뜨리는 어려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예요.” 아버지 딕 호이트를 울린 멋진 말이었습니다.
아들은 나중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만일 장애가 없다면 ‘아이언맨 월드챔피언십’에서 최선을 다해 경주할 거예요. 아버지를 태운 보트를 끌고, 아버지 대신 페달을 밟고, 아버지 휠체어를 밀면서요. 보스톤 마라톤 경기에서도 아버지를 밀며 달릴 거예요.”
팀 호이트는 말하기를 ‘어떤 한계를 규정짓는 어떤 말에도 귀 기울이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마지막 영어로 ‘Yes You Can’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휠체어를 밀고 1000번이 넘는 레이스를 펼친 아버지 딕 호이트에게 아들은 컴퓨터 자판을 치기 위해서 머리를 이쪽 저쪽으로 흔들면서 단어 하나씩 처내려가며 말합니다.
“아버지께 감사하다는 건 턱없이 부족한 말이에요. 그래도 제게 헌신적이었던 아버지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군요. 아버지가 그랬듯이 저도 아버지께 헌신적인 아들이었으면 좋겠어요. 아버지 사랑해요.” -아들 릭 호이트

교통사고로 전신의 55%에 3도 화상을 입었던 이지선 자매는 사고 이후 10년 동안 거울을 보며 “하나님 감사합니다”를 외쳤다고 합니다.

1914년 겨울, 미국 뉴저지 주에 있는 에디슨의 연구소에서 갑자기 불길이 치솟아 200만 달러의 실험 장비와 평생 연구한 귀중한 자료들이 한 순간에 잿더미로 변했습니다. 이튿날 아침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한 연구소를 바라보면서 에디슨은 “우리의 모든 잘못된 것은 불타버렸다. 그러나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으니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우리의 잘못된 것을 내려놓읍시다. 우리의 방법과 생각을 내려놓읍시다. 우리가 알면 얼마나 알고, 잘하면 얼마나 잘하겠습니까? 저는 결정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팀에게 모든 것을 걸기로 작정했습니다. 이 팀만은 믿을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이 변해도 변치 않는다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나를 정말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1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2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3.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 139:1-4)

하나님은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아들인 예수님은 완벽하게 아버지 하나님과 호흡하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아버지에게 귀하지 않은 아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난 12월 6일 오전 7살짜리 수컷 말레이곰(꼬마)가 서울대공원 우리를 탈출해 청계산으로 달아났습니다. 다행히 9일만(15일)에 포획되었습니다. ‘꼬마’는 포획된 뒤 서울대공원으로 옮겨져 다시 일반에 공개되었습니다.
그런데 꼬마 곰은 방사장을 탈출하기 전 함께 생활하던 30살짜리 암컷 말레이 곰(말순이)과 자주 다퉜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싸우고 탈출했다는 겁니다. 여러분! 집 나가면 개 고생입니다. 그래서 대공원에서는 말레이 곰 여자 친구를 새로 데려올 계획입니다.
말레이 곰 꼬마가 다행히 아무 탈 없이 돌아왔고 사실 극진히 대접받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찾아 나섰습니다. 제가 집을 나가도 이렇게 많은 사람이 동원되어 찾지는 않을 겁니다.
말레이곰 ‘꼬마’를 찾는데 들어간 비용은 ‘꼬마’ 몸값의 몇 배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됐습니다.
‘꼬마’가 서울대공원을 탈출하면서 300여 명이 수색에 동원되었고, 헬기와 포획틀 등 각종 수색장비가 투입되면서 자신의 몸값으로 지불할 수 없는 돈이 들어갔습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찾으시는데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계산이 안됩니다. 우리가 값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찮게 생각되면 버립니다. 그러나 귀하면 찾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찾으십니다. 귀하게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천하보다 귀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귀하면 잘 돌봅니다.

노아의 홍수 때 방주에 동물들이 들어갔습니다.
“19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게 하되 20 새가 그 종류대로,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창 6:19-20)도 했습니다. 두 번이나 생명을 보존하라고 했습니다. 노아의 방주에서 죽으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이 동물들이 얼마나 귀합니까? 여기서 죽으면 종이 끝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라”고 하십니다. 이 동물들을 자신의 생명처럼 소중히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귀하게 생각하십니다. 딕 호이트와 릭 호이트 처럼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하나의 팀을 이루어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눅 10:22)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7) 이런 아들을 우리를 위해 보내 주셨습니다.
다윗은 고백합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시 8:4)
베드로는 설교에서
“27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28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으니 주 앞에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므로”(행 2:27-28)

크리스마스가 왜 우리에게 축복입니까?
밤거리에서 헤매며 돌아다니는 것이 크리스마스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한 팀을 이루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메시야)의 탄생을 기뻐하는 날입니다. 이 팀은 이생과 내세에 있어서 못할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 팀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 10:9)

저는 제 아내하고 한 팀을 이루었습니다. 제가 팀원으로 최선을 다했는지 생각해 봅니다. 그래도 마음에 안 든다고 말레이 곰 꼬마처럼 뛰어나가지는 않았습니다. 지난번에는 제 팀원이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밥도 안 해줍니다. 밥을 혼자 먹다보니 처량하기 짝이 없습니다. 매일 혼자 드시는 분들에게 정말 죄송합니다. 김치 긴 것 먹을 때 젓가락으로 잡아줄 사람이 없다는 것은 정말 슬픈 일입니다. 빨리 팀을 만드십시오. 함께 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과 한 팀을 이룰 수 있습니다. 성령님을 왜 보내시느냐, 성령님은 무엇이냐, 성령은 혼자가 아닙니다. 성령은 나를 위해 보내주시는 하나님의 영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주님과 한 팀을 이루게 됩니다.

딕 호이트의 말처럼 “손으로 일하는 것을 즐겼다. 땀 흘려 무언가를 만들어 냈을 때의 기쁨과 보람만큼 가치 있는 것은 없다”고 말한 것처럼 칼 바르트는 하나님을 “행동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일제 신사참배 거부로 투옥되었다가 광복으로 나오셨습니다. 그리고 소록도 나환자 촌 애양원에서 목회하다 여수·순천사건으로 안재선에게 동인, 동신 아들 둘이 살해당했습니다. 그리고 그 주에 설교하시기를 10가지 감사제목으로 설교했습니다. 몇 일 전에 두 아들이 죽었는데 하나님께 감사하는 10가지 기도제목으로 설교하는 분이 어디 계십니까? 그리고 자기 아들을 죽인 안재선씨를 기어코 양아들로 삼지 않습니까. 나환자촌에서 문둥병 환자들하고 고름 빨고 목회 했습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동료와 신도들의 피난 권유를 거절하고, 행동이 부자유한 나환자들과 교회를 지키다가 공산군에 의해 총살당해 48세로 순교하셨습니다.
어떤 노벨 평화상 타신 분 이상으로 훌륭하신 분입니다. 하나님과 예수의 팀을 믿으면 이렇게 변합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밤중에 바리새인이며 유대인의 지도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라고 합니다. 이 때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15)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자랑할 마지막 한마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령을 받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나와(성령) 한 팀을 이루어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설교 : 주앙교회 영제 목사
 

하나님의 아들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16)

양치기가 어미를 잃고 길에서 울고 있는 늑대 새끼 한 마리를 발견했습니다. 양치기는 어린 늑대가 가엾어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불쌍한 녀석, 내가 잘 돌봐줄게…” 양치기는 늑대 새끼를 정성껏 보살폈습니다. 그리고 ‘이 녀석을 잘 기르면 나를 주인으로 알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 양들을 흉악한 늑대들로부터 잘 지켜주겠지.’ 라고 생각했습니다.
양치기의 보살핌으로 늑대 새끼는 무럭무럭 자라 어엿한 어른 늑대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외출했던 양치기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보살펴준 그 늑대가 양치기네 양들을 다 잡아먹고 있었습니다. (이 우화는 17세기 프랑스의 시인 겸 작가 라 퐁텐이 쓴 ‘늑대와 새끼양’입니다.) 늑대는 늑대라는 것입니다. 근본이 달라질 수 없다는 겁니다.

<라이온 킹>도 비슷합니다. 왕의 동생 스카가 하이에나들과 결탁하여 음모를 꾸며 왕을 살해하고, 그 죄를 어린 왕자 심바에게 뒤집어 씌웁니다. 죄를 뒤집어쓰고 사막에서 죽을 뻔한 심바는 자신을 구해준 티몬, 품바와 함께 살며, 자신의 과거와 고향을 잊으려 ‘하쿠나 마타타’를 노래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른 사자로 성장한 심바는 옛친구 날라를 만납니다. 심바는 날라에게 사랑을 느끼고 날라는 고향의 사정을 설명합니다. 고향 땅이 스카와 하이에나의 폭정으로 파괴되고, 황무지로 변했다는 겁니다. 그러나 심바는 겁쟁이로 변해 돌아가기를 거절합니다. 그때 라피키라는 원숭이가 나타나 심바를 이끕니다. 너는 여기서 우리와 있을 원숭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는 왕의 아들 사자라는 겁니다. 사막으로 돌아가 하이에나와 싸워 이길 수 있는 사자라는 것입니다. 결국 심바는 자신이 왕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고향으로 돌아가 하이에나를 물리치고 사막의 왕이 됩니다.

이 우화가 가르쳐주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자신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늑대는 늑대라는 것입니다. 심바는 사자요, 왕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정체성입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겁니다.
성도가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세상이 다 변해도 이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돌아오기만 하면 됩니다.

요단강에서 “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하늘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그 음성은 두 가지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 아들은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들입니다. 이 때에도 제자들은 엄청 놀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더 놀랄 말씀은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만 말씀 앞에(마 5:1-12) 산상수훈이 나옵니다. 흔히 팔복이라고 말합니다.
1. 심령이 가난한 자 – 천국
2. 애통하는 자 – 위로
3. 온유한 자 – 땅을 기업으로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 배부를 것
5. 긍휼히 여기는 자 – 긍휼히 여김을 받음
6. 마음이 청결한 자 – 하나님을 볼 것
7. 화평케 하는 자 –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음
8. 의를 위하여 박해받는 자 – 천국이 그들의 것

이 여덟 가지 복중에 여러분은 어떤 것이 제일 마음에 듭니까?
저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에이레네(샬롬) 화평을 만드는 자입니다. 사탄은 분란을 일으킵니다.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화평케 만듭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자녀인지 예수님이 오셔서 증언해 주셨습니다. 날라와 라피카가 나타나 심바에게 너는 사자다(라이온 킹) 가르쳐 준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본문 이후에 이 말씀이 얼마나 많이 나타나는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마 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마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 6:4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 6:6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 6:8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마 6:9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마 6:15 “너희 아버지께서도”
마 6:18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여기 잘 보세요. 예수님께서 ‘내(나의) 아버지’라고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너희 아버지, 네 아버지, 우리 아버지”라고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우리는 확실히 하나님의 자녀가 맡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믿을 수 있냐고요?

사도들의 증거와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육체로 오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그와 함께 3년 반 동안이나 활동했던 제자들이 있습니다. 모든 사도가 예수를 증거 했습니다. 가롯유다는 자기 욕심으로 예수를 팔고, 자기 죄로 죽은 것이지 예수님을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4복음서가 사도들의 증언입니다. 바울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당대의 최고 율법학자가 믿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딤후 3:16)라고 말합니다.
‘감동’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데오프뉴스토스(qeovpneusto”)입니다. 이 말은 데오(하나님)과 숨(호흡)이 하나로 된 단어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숨결”이이라는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 2:7) 생기가 호흡입니다. 하나님의 숨결은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되십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믿어야 합니다.
이슬람이 유대교, 기독교를 카피했지만 카피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율법은 카피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성전처럼 사우디 아라비아의 메카를 더 웅장하고 화려하게 만들 수는 있습니다. 유대인의 회당처럼 예루살렘 향하여 기도 창문을 낸 것 같이 이슬람 사원을 짓고 메카를 향하여 기도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도무지 카피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기적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보여주신 기적입니다. 이슬람은 기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기적의 연속입니다. 기적을 통하여 예수그리스도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또 문제가 있습니다. 기적 그것을 못 믿겠다는 분이 계십니다.
예수께서 기적을 믿지 못하는 자들에게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막 2:9)고 하셨습니다. 보이지 않는 죄 사함까지도 해결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먼저 이 중풍병자를 고쳐야 합니다.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당시 예수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이 중풍병자를 걷게 할 수 없었습니다.

어니스트 르낭(예수의 생애:The Life of Jesus)은 성경에 나오는 기적을 전설로 간주합니다. 나사로는 죽지 않았고 살아난 것은 억측이라고 합니다. 중동 지역에 떠돌아다니는 하나의 전승으로 봅니다. 그러면서 나사로 가족이 경솔하게 행동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게 하려고 나사로를 무덤 속에 감추어 두었다가 나오게 했다는 겁니다.
그는 예수께서 병자들을 치유하신 적도 없다고 합니다. 온유한 마음으로 도와 주었는데 사람들이 나아졌다는 기분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이 이적으로 여겼다는 겁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물 위를 걸으신 것이 아니라 엄청나게 쌓인 백합화 무더기 위로 걸어가셨다고 합니다. 그러면 오천 명을 먹이신 것은 어떻게 설명할까요? 많은 양식을 인근 동굴에 숨겨놓았다가 예수께서 제자들을 시켜서 몰라 꺼내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믿는 것 보다 르낭의 말의 믿기 위해서는 더 큰 믿음이 필요합니다. 손 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것과 같습니다. 증거가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냥 책처럼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그냥 글이 아닙니다. 보통 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마어마한 능력이 있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눅 16:17)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천지보다 귀합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증거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요 8:47)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 천국을 소유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생겨납니다.

감히 하나님의 이 엄중한 말씀을 누가 변경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사도는 말합니다.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19)

이사야는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사 1:2)라고 합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시 19:7)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시 119:81)
“주의 모든 계명들은 진리니이다”(시 119:151) “주의 모든 계명들이 의로우므로 내 혀가 주의 말씀을 노래하리이다”(시 119:172)라고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들은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생명을 말씀을 바랍니다, “너의 나의 아들이라”는 말씀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베드로는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벧전 1:12)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 10:20) 편지를 보내고, 책을 써 놓고 그 사람이 죽었다면 그 약속은 더 이상 지켜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을 쓰게 하신 분은 살아 계십니다.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계 1:8)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예수로 말미암지 않고는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제가 한번은 강원도 길을 운전하고 갔습니다. 그 때는 여기저기서 공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새롭게 터널이 뚫린 것 같은 길이 나왔습니다. 그냥 직진하면서 나온 길이기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그 터널로 들어갔습니다. 터널은 아직 불도 안달아 놓았습니다. 터널을 다 빠져 나왔는데 더 이상 길이 없습니다. ‘길이 아닌 곳에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길이 없으니 더 이상 갈 수도 없더라구요.
그래서 좁은 길에서 유턴 하여 다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제 뒤로 관광버스가 따라오고 다른 차들이 따라왔습니다. 그 관광차는 길어서 그 좁은 길에서 돌아가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한번은 택시기사가 후미진 곳으로 가는데 차들이 계속 따라오더랍니다. 자기는 소변 좀 보려고 산 속으로 들어가는데 자꾸만 차들이 따라오더랍니다.
길을 잘못가면 나만 잘못 가는 것이 아니라 내 뒤로 수많은 사람들이 따라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군대에서 행군할 때 뒤에 오는 사람 잘 보이라고 철모 뒤에 흰색으로 표시합니다. 밤에 행군할 때 앞사람만 보고 가는데 한사람이 다른 곳으로 가면 뒤에 오던 사람이 다 다른 대로 갑니다. 예수님은 “나는 길이다” 그랬습니다. 예수님만 잘 따라가면 천국에 이르게 됩니다. 사람이 누구를 따라가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인간은 빵이 없어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가야 할 길이 없어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진리를 찾지 못한 인간의 정신적 방황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보여 줍니다. 진리는 생명 그 자체입니다.

오늘 본문보다 더 간단 명료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말은 없습니다.
“나는 길이요” 이것은 윤리입니다. 예수님은 윤리를 말씀하시고 가르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가는 방법에 대해 긴 논쟁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조용히 ‘내가 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진리요” 이것은 철학입니다. 예수님은 철학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자신이 철학이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빌라도가 했던 질문을 떠올리며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보여주시며 ‘바로 내가 진리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이다” 이것은 종교입니다. 예수님은 종교를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자신이 생명을 주신 분입니다. 스펜서는 물리적인 세계의 존재에 대해 정의했지만 예수님은 당신을 보여주시면서 “내가 생명이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세상에서 자기가 인류의 길이라고 외친 사람도 많았고 자기가 진리라고 말한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자지가 ‘생명’이라고 외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생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학자 틸리히는 예수 그리스도가 역사의 운명을 극복하신 ‘새로운 존재’(The New Being)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와 전혀 다른 새로운 차원의 존재 방식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하였다.(골 2:2) 그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그는 인간 이성으로만 이해되지 않는 기묘자이며 모사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전능하실 뿐만 아니라 영존하시는 분이기에 우리에게는 놀랍고 신기한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요 11:25-26).

사람들의 생각이란, 주장이란 그것이 구체화되기 전에는 그저 보잘것없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와 논쟁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를 보내시고 400년을 넘게 기다렸습니다. 우리하고(사람들) 논쟁이나 하자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고 했습니다. 말씀이 구체화되어 이 땅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솔직히 저와 여러분들이 이 사실을 인정하든, 안 하든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께 가는 길은, 생명을 얻는 길을 이 길 외에 없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10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를 모든 말을 너는 마음으로 받으며 귀로 듣고 11 사로잡힌 네 민족에게로 가서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겔 3:10-11)

이 기막힌 일을, 이 놀라운 일을 하나님은 강압적이거나 이 세상의 최고의 인재를 뽑아서 전하도록 하지 않으셨습니다. 갈릴리의 어부출신 몇 명과 그나마 똑똑한 제자처럼 보이는 마태는 로마 공무원이었지만 그는 죄인이라는 꼬리표를 붙이고 다녔습니다. 또한 그렇게 많은 수의 제자를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딱 12명입니다. 물론 따로 70명의 제자를 세우셨지만 그들은 12제자처럼 예수님을 따라다니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을 앉혀놓고 천자문을 외우라든지 명심보감을 외우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소크라테스처럼 영혼불멸에 대해 논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직접 보여주었습니다. 사망 권세를 어떻게 이기시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이들의 가치에 대해서 교훈적인 설교를 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아이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그들을 축복하고, 한 어린이를 한 가운데 놓으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기도를 많이 하라고 주장하지 않으셨습니다. 친히 기도하고 떡을 떼시고, 기도하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남녀 평등권에 대해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만나려고 하지 않던 죄인으로 취급당하던 여인들을 만나셨습니다. 무한한 존경심을 가지고 그들을 대했습니다. 그가 죽음에서 부활하셨을 때 처음 예수님의 모습을 본 것도 여자들이었습니다.
세상의 많은 사상가들이 많은 것을 설명하려고 하지만 어느 누구도 세상을 바꾸어 놓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거의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복음은 복음 적인 방법으로 전해야 합니다. 지난 2000년 간 우리가 실수한 것은 바로 복음을 복음으로 전하지 못한 것입니다.

복음이 동양의 인도에게 초대교회 이후 다시 전달되었을 때 인도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제국주의와 인도에 대한 외국의 지배와 동일시했습니다. 인도뿐만이 아닙니다. 전 아프리카와 남미의 대륙이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리 대한민국의 선교사는 다릅니다. 우리는 서양 문명을 가지고 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가서 그들을 힘으로 지배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우리나라가 위험에 빠져있습니다. 북한은 계속 침략하고 있습니다. 선교사들은 우리나라를 위해서도 기도해 달라고 현지 인들에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 나라를 겸손하게 만드셔서 복음을 바르게 전달하는 나라로 쓰시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어설프게 받아들인 사람들은 두 가지를 다 가지려고 했습니다. 세상의 좋은 것, 자기들이 좋아하는 것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또 원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스탈린은 신학생이 이었습니다. 그러나 공산당으로 변했습니다. 히틀러도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김일성도 세례 받았습니다. 이런 표현 사용하고 싶지는 않지만 우리말에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선무당만 사람잡는 것 아닙니다. 잘못된 기독교인은 선무당보다 더 무섭습니다. 이단입니다, 그리스도의 모습과 분명히 다른 모습입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런 상태의 껍데기 그리스도인에게 은혜를 주지 않습니다. 분명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분명한 태도를 보이라고 요구하십니다.
라오디아게아 교회에게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 3:15-16) 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려면 온전히 예수님의 방법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선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선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내 것을 다 버리지 않은 상태에서 예수를 믿는 것은 마치 검정 색을 다 버리지 않고 흰색을 섞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검정 색을 조금만 남겨 놓아도 희게 되지 않습니다. 회색이 됩니다.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고전 10:21)

어두움은 빛으로 물리칠 수 있습니다. 어두움으로 어두움을 물리칠 수는 없습니다.
“14 예수께서 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시니 귀신이 나가매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는지라 무리들이 놀랍게 여겼으나 15 그 중에 더러는 말하기를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눅 11:14-15)고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18 너희 말이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만일 사탄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눅 11:18)고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악한 것은 그것이 능력이 있든, 크고 작든 악한 것을 못 물리칩니다. 어둠이 어둠을 물러가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주님께만 희망이 있습니다. 주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방법이 아닙니다. 주님의 방법입니다.

스탠리 존스(1884년-1938.12.12 타임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선교사로 소개)는 1907년부터 감리교 선교사로 인도에서 평생 선교사로 지냈습니다. 1920년대 초반 타고르, 간디와 함께 아슈람(Ashram) 운동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는 서양 선교사 중에 간디에게 제일 많은 영향을 끼친 선교사입니다. 그런데 한번은 깊은 대화가 오고가는 중에 간디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선 당신네 기독교인들과 선교사들을 포함한 모든 서양인들이 오늘부터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아가도록 하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간디가 한번은 어느 마을에 기차를 타고 도착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기차를 타고 함께 도착했습니다. 간디의 연설을 듣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간디는 연단에 올라 ‘신약성경’을 꺼내 들고 ‘산상수훈’에 대해 읽고 이렇게 그의 연설을 마무리지었습니다. “이것이 여러분에게 드리는 저의 연설입니다. 이렇게만 행동하십시오.”라고 했습니다.

본문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믿지 않기 때문에 정죄를 당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 3:18). 바울은 빌립보 간수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고 했습니다.

클로로포름의 발견과 마취제의 최고 권위자인 영국인 의사 심프슨에게 “당신의 업적 중에서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엇입니까?” 하고 묻자 그는 구세주를 발견한 것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한 사람은 가장 위대한 발견을 한 인생의 성공자입니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온전한 행위가 아닙니다.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의인이라고 보시는 것은 그의 행위 때문이 아닙니다. 물론 아브라함은 100세에 난 독자 이삭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그 또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솔직히 무엇을 온전히 행할 수 있습니까? 다만 성실하게 하루 하루를 살아가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늘날 강력히 요구하시는 것은 온전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그분의 방법을 인정하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라고 했습니다. 행위로 온전해 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온전해 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온전해 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나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