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열쇠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내가 또 다윗의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사 22:22)
“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계 3:7-8)

다윗은 우리가 아는 것 보다 더 많은 잘못을 하나님께 범한 사람입니다. 우리 죄인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다윗을 인정하셨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하나님을 감동시키셨을까요? 그리고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의 이름을 높이셨겠습니까?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오늘은 두 가지 측면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다윗은 최초로 하나님께 사랑한다는 고백을 드린 사람입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 18:1) 하나님이 이 말에 감동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요셉도 모세도 여호수아도 하지 않았던 말이다. 이 사람들은 믿음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까지는 가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고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아들을 주시기까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셨던 하나님은 인간이 자신을 사랑해 주시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행 13:22)고 하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우했습니다. 하나님을 올바로 섬겼습니다. 그가 산중에 목동 생활을 할 때도 그리했고, 골리앗 대장으로 더불어 전투할 때도 그러했고,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사울 왕에게 대해서도 그랬습니다. 또 그가 범죄한 후에, 우리아를 죽인 후에 그가 회개하는 것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우했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믿음과 신앙은 진정 하나님으로 대우하는 신앙을 가졌는지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예배를 대충 드리고, 교회에 서로 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함부로 할 수 있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우롱하면서 복 받기를 원하면 안됩니다.
‘다윗’은 히브리어로 ‘나의 사랑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자였습니다(시1).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시 119:97).

다윗의 이런 믿음이 찬양을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30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위대하시다 하리니 31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시 69:31) 황소를 드림보다 마음으로 드리는 진정한 노래를 기쁘게 받아주시는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목적을 알고 행했던 것입니다. 사탄에게 빼앗겼던 음악을 다시 찾아왔던 것입니다.

둘째, 다윗은 자신의 모든 삶을 하나님께 맡겼던 사람입니다.
단순히 믿는 것하고 삶을 하나님께 맡긴 것하고는 차원이 다릅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많아도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다 맡긴 사람은 드문 것입니다.
전쟁을 할 때에도 먼저 하나님께 항상 묻고 일을 했습니다. 모든 일을 할 때 하나님께 기도하고 시작했습니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3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아침에 주께 기도하고 바란다고 고백합니다. 모든 일을 기도하고 바랐습니다. 기도하고 이루어지기를 바랬습니다.
자신의 삶을 주님께 다 맡긴 다윗은 기도도 다릅니다. 단순히 비는 기도가 아닙니다. 차원이 다른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이 도와 주시고 있기 때문에 언제나 다 하나님의 뜻대로 됩니다. 그런데 안될 때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삼하 21:1-14에 보면 다윗의 시대에 3년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여호와 앞에 기도했습니다. 다윗은 “오, 하나님이시여 3년을 연거퍼 기근을 주십니까? 기도하오니 긍휼을 배푸사 금년에는 풍성한 수확을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이런 형식의 기도는 올리지 아니했습니다. 다윗은 여호와 앞에 기도하는 것은 그 기근의 원인을 알려고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기도의 문제에 열쇠를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의 탐구는 직선적(直線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대답도 직선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의 집으로 말미암음이니 그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삼하 21:1)고 했습니다. 기브온 사람은 이방민족입니다. 그런데도 아무 이유 없이 죽이면 살인입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해서 하는 전쟁이나 적군이 쳐들어와서 싸움하는 것하고는 다릅니다.
이방민족하고 맺은 약속도 하나님은 어기는 것을 용납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맹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과의 약속도 잘 지켜야 합니다.
다윗은 이 죄를 해결해야만 했습니다. 결국 사울왕의 다섯 아들을 잡아 주어 그들은 목매어 죽임을 당했습니다(삼하 21:8). 그렇게 하자 하나님의 말씀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니라”(삼하 21:14)고 했습니다. 참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이방인과의 약속도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데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약속하고 지키지 않은 것이 있는지 먼저 살펴야 합니다. 이 땅의 사람들에게도 원한을 살만한 일을 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마 5:26)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열쇠는 예수님께 주어졌습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저는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여기서 더 이상 읽지를 못하겠더라구요. 얼마나 감사한지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과 같은 자손을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네가 동서남북으로 바라보는 땅을 다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물론 큰 축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을 주신 것에 비하면 별것 아닙니다. 지금도 어떤 사람들은 구약적 축복을 간구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아들을 주신 아버지께 가서 다른 그 무엇이 필요하다고 말한다는 자체가 은혜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분이 이 땅에 오셔서 공자왈 맹자왈 하시다가 가신 분이 아닙니다. 개인의 평안한 삶을 살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받으신 사명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분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이루시기 위한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의 어깨에는 정사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어깨에 인류의 구원의 문제가 달려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정사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정사를, 이 공무를 십자가에서 이루셨습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요 19:30)하셨습니다. 다 이루신 것입니다. 온전히 이루신 것입니다. 다른 것이 필요치 않습니다. 십자가뿐입니다. 바로 이 십자가가 하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가 된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십자가를 통하지 않으면 천국 문을 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열쇠는 베드로(제자)에게 주어졌습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9) 하셨습니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요 6:27)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인치신 자입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늘의 양식이 내립니다. 이것은 영생하는 양식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이 세상을 위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것도 보람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일할 수 있는 것은 축복입니다.

열쇠를 가진 사람은 능력의 소유자입니다.
지하철 문이 닫히지 않아 전동차가 출발을 못했습니다. 문이 닫히지 않은 것입니다. 뭔가 불안합니다. 만일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신다고 하셨는데 가다가 이제 더 이상 못 가시겠다고 하고 다 내려라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만일 천국 가는 길이 그렇게 불완전하고 문제가 있는 일이라면 큰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이분만이 전능자라는 것입니다. 이분만이 하실 수 있는 일 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다윗이란 왕의 힘과 능력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고후 6:18)

열쇠를 가진 사람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인과 열심히 소통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뇌의 굵은 혈관이 막히는 현상을 뇌경색이라고 합니다. 뇌경색 전 단계에는 반드시 가는 혈관이 막히는 현상이 일어나고 막힌 부분의 세포가 점점 죽어갑니다. 이른바 치매 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소통하지 않으면 우리는 이미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자꾸만 하나님과 소통을 해야 혈관이 넓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30대 후반이 되면 하루에 약 10만개의 뇌 세포가 죽어간답니다. 하루야마 시게오라는 사람이 『뇌내 혁명』에서 한 말입니다. 세포는 나이가 들면서 죽어가게 마련이지만 혈관이 막히면 세포가 갑자기 죽습니다. 자연적 사망이 아니라 사건적 사망이라는 것입니다(이건 제 표현임). 세포가 죽으면 신체 기능이 마비되고 판단력과 기억력이 감퇴되고 자아 조절 능력을 잃게 됩니다. 하나님과 소통이 끊어지면 우리는 이미 영적으로 죽은 것입니다. 건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은 하나님과의 영적 소통에 있습니다. 왜 새벽을 깨우려고 합니까? 우리의 영을 위해서입니다.
전능자이신 예수님이시지만 하나님 아버지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계셨습니다. 마치 포도나무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야곱이 환도뼈가 부러지는 아픔을 견디면서도 하나님을 붙잡았던 것처럼 하나님을 붙잡으시기를 바랍니다.
구원은 개인적이지만 축복은 유전적입니다. 내가 주님을 잘 믿으면 축복이 자녀에게 유전됩니다. 그리고 그 축복은 구원을 얻게 합니다.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딤후 4:18)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주앙교회 세 자매이야기

우리교회에 세 자매가 있습니다. 한 재매는 시집을 갖고 두 자매는 아직 안갔습니다.
우리교회(주앙교회)는 경기도 군포시(산본역 옆)에 있습니다.
그런데 두 자매들은 서울 망우리가 집입니다. 이 자매들은 그곳에서부터 우리교회를 나오는데 수요예배까지 옵니다.
제가 어쩌다 서울가면 정말 멉니다. 지하철 타고 한참 가고 또 버스타고 가야합니다.
그래서 저는 지하철만 타면 은혜가 됩니다. 그 두 자매들 때문이지요.

아 그리고 구리에서 부터 주일날 나오는 자매가 한분 더 있습니다.
이런 분들이 저를 만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습 3:17)

KBS ‘가요무대’가 전국 성인남녀 7115명을 상대로 조사한 ‘대중가요 선호도 조사’에서 심수봉씨가 불렀던 ‘그때 그 사람’이 응답자로부터 가장 많은 표를 얻어 ‘최고 인기 가요곡’으로 선정됐습니다. 그래서 가요무대, 열린음악회 등에서 그 때 그 사람만 나옵니다.
광복 전후를 대표하는 곡으로는 김정구씨의 ‘눈물 젖은 두만강’이 1위로 꼽혔고 이어 이난영씨의 ‘목포의 눈물’등 이 뽑혔습니다. 옛날에는 주로 눈물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 민족의 슬픔이 얼마나 컸던지 노래로 슬픔을 달랬습니다. 그런데 70년대 들어서부터 눈물에서 점차 그리움으로 옮겨갑니다. 그 때 그 사람이 한 일은 외로운 병실에서 기타를 쳐 준 것입니다. 바로 그 사람을 잊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사람은 외로울 때 기타한번 쳐준 것도 잊지 못하는 겁니다. 예수님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마 10:42)고 하셨습니다. 근래의 우리 문화는 지나치게 큰 것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한국인의 비교하는 습성은 저는 불치병이라고 봅니다. 북한의 통큰 발언은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았습니다. 통큰 투자, 통큰 원조를 하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것은 하나도 내어놓지 않고 상대방에게만 통큰 것을 요구합니다. 이것은 통이 큰 것이 아니라 통이 작은 것입니다.

백제의 마지막 의자왕 때에 나라 전체가 타락한 와중에도 5천 결사대를 이끈 계백장군은 우리를 눈물겹게 만듭니다. 진짜 통큰 사람이 어떤가를 보여줍니다. 물밀 듯이 밀려오는 신라의 10만 대군을 격퇴시키는 것은 역부족이라고 생각한 계백장군은 마지막 전투지 황산벌로 출전하기에 앞서 자기 아내와 자식들을 다 모아 놓고 눈물의 이별을 한 다음 칼로 그들의 목을 모두 베고 맙니다. 포로가 되어 비참하게 살아가느니 죽는 것이 났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도 5천 결사대와 함께 장렬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오늘 우리는 다짐해야 합니다.
“8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갈 4:8-9) 하나님을 모를 때는 우상에게, 세상에게 종노릇하면서 살았습니다. 강아지 목에 끈을 매어 끌면 이리 끌려가고 저리 끌려가듯이 사탄에게 끌려 다니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을 알고 난 우리가 어찌 사탄의 종 노릇 하면서 살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요 8:47) 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의 행복은 사랑하는 사람이 기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기뻐하지 않으면 자기의 기쁨도 행복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기뻐할 때 비로소 자신도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를 통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도록 사시기를 바랍니다. 따라서 고백합시다. “나로 인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곧 나의 행복입니다.”

예수님께 칭찬 받은 사람들이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그들은 모두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두 렙돈을 헌금함에 넣은 과부가 칭찬을 받았습니다. 믿음으로 중풍병자를 데리고 주님 앞에 나온 이들이 칭찬을 받았습니다. 용기를 내어 주님 앞으로 나아가 자기의 병을 고쳐 달라고 소리친 자들이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결코 엄청난 업적을 이룬 사람들이 아닙니다. 높은 벼슬을 한 사람도 아닙니다. 세상이 무시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음으로 주님께 칭찬을 받았습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스바냐는 “여호와께서 숨기신다, 여호와께서 숨기신 사람”이란 뜻을 가진 이름입니다. 스바냐는 그 이름처럼 “여호와께서 심판 날에 겸손한 자를 숨기시고 보호해 주신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스바냐에 대해서는(습 1:1) 외에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이 예언의 표제에 언급된 족보에는 4대가 언급되어 있는데, 선지자 중에서 이와 같이 족보를 소급해서 올라간 사람은 없습니다. 스바냐는 왕족 출신으로서 히스기야의 4대 후손입니다. 따라서 스바냐는 요시야왕의 조카뻘이 되는 셈입니다. 그는 나훔보다 반 세기 정도 늦은 요시야 왕 때에 조카로서 삼촌(요시야)에게 예언했습니다. 므낫세와 아몬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왕이었지만, 요시야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통치자였습니다. 스바냐 자신이 왕족이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당시 상류층이나 나라의 운명에 관해 직언의 예언을 하는데 적절한 예언자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스바냐를 통해서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는 자가 어떤 사람인가를 말씀해 주십니다. 오늘 말씀을 잘 들으시고 하나님이 잠잠히 사랑하시는 자 되시기를 바랍니다. “잠잠히 사랑하시며” 라고 했는데 ‘잠잠히’라는 말이 재미있습니다.
‘잠잠히’는 원문에 ‘야하리쉬’입니다. 이 뜻은 안식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안식할 것이다”가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참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편안하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 누구에게 맡기면 안심이 되고 믿음이 생기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도 어떤 일이든지 나에게 맡기셨을 때 안심이 되시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욥처럼, 아브라함처럼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여성 포털사이트 이지데이가 2009년 1월 30일부터 2월 1일까지 1073명의 네티즌에게 설문조사를 한 결과 주부들은 남편들로부터 안심시키고 위로해주는 말을 듣고 싶어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주부님들, 내 남편에게 꼭 듣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42%가 “걱정하지 마. 내가 있잖아”라는 말을 꼽았습니다. 이어 27%가 “당신이 최고야”, 26%가 “사랑해”라는 말을 꼽았습니다. 힘든 상황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걱정하지 마. 내가 있잖아”라는 남편의 말 한마디에 감동하고 힘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진정으로 평안케 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뿐이십니다.

사람은 두 가지 경우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로 사느냐 하나님의 버림받은 저주아래에 놓이느냐 입니다. 오늘 스바냐가 말하는 것도 빨리 우리 자신의 죄를 깨닫고 그것을 미워하면서 죄악 된 길에서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회개의 정의입니다.
“그 때에 내가 예루살렘에서 찌꺼기 같이 가라앉아서 마음속에 스스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는 자를 등불로 두루 찾아 벌하리니”(습 1:12)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복도 화도 내리지 않는다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잘 못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마음 상태를 “찌꺼기 같이 가라앉아서”라고 하셨습니다.
금속의 제련 과정을 보면 반드시 침전물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이 침전물을 이른바 완성품을 만드는데 독소와 같은 존재인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거르고 제거하느냐가 정제의 성공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이런 찌꺼기 같은 자라는 것입니다. 소금을 정재하고 버려질 불순물과 같은 존재가 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께 멸망의 대상일 뿐입니다.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습 2:1)
조선 시대 성리학자였던 이이와 이황은 ‘사단 칠정론(四端 七情論)에서 인간에게는 자기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를 수치지심(羞恥之心)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지켜야 할 도리가 있는데 이를 벗어날 때 스스로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수치를 모르는 사람들은 “1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2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범죄한 후에 자기의 수치를 알았습니다.
“5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우매함을 아시오니 나의 죄가 주 앞에서 숨김이 없나이다 6 주 만군의 여호와여 주를 바라는 자들이 나를 인하여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를 찾는 자가 나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 7 내가 주를 위하여 비방을 받았사오니 수치가 나의 얼굴에 덮였나이다”(시 69:5-7) 여기 잘 보세요. 다윗이 자기의 죄 때문에 기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잘못으로 다른 사람이 다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나만 잘 되면 그만이다라는 식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부끄러움을 알아야 합니다. 때로는 많이 배운 것도 부끄럽습니다. 건강한 것도 부끄럽습니다. 하나님께 열심히 살지 못한 것 부끄럽습니다. 한 것도 없이 다른 사람만 비방한 것도 부끄럽습니다. 하나님께 나와야 합니다. 예레미야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 17:9)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사 중에 삼손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나실인으로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관심이 집중되어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성경에 출생에 대해서 이렇게 길게 기록된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 여인이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 그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삿 13:24)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을 이끌어야 할 지도자입니다. 그런데 그만 블레셋 여자, 기생이나 좋아하고 결국 하나님이 금지한 이방여인 들릴라와 결혼하고 쓸데없이 자기 과신으로 수수께끼를 내어 패가망신을 당합니다. 블레셋 적군에게 붙잡혀 두 눈을 잃고 당나귀처럼 연자맷돌이나 돌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은 그렇게 쓰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의 건강 축복을 소중히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2 명령이 시행되어 날이 겨 같이 지나가기 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내리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리할지어다 3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습 2:2-3)고 하셨습니다. 무조건 하나님을 찾아야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찾으면 산 것입니다. 천국이 무엇이냐, 누구의 것이냐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마치 보화가 감추어진 밭을 발견한 사람이 자기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 밭을 사는 자’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교만을 버리고 수치를 깨닫고 천국을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습 3:16)고 하십니다. 요단강을 건너가야 하는 시점에서 모세가 죽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여호수아는 큰 공포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때에 하나님께서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수 1:6, 9)고 하셨습니다. 원문에 ‘강하게’는 손에 힘이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주먹을 쥐라는 것입니다. 손을 늘어뜨리는 것은 패배한 것입니다. 주먹을 쥐고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네 가운데 계시니”(습 3:15), 본문에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스1 3: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시고 함께 계시면 이스라엘도 국가도 교회도 집안도 개인도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떠나가시면 망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가운데서 하나님은 늘 함께 하셨습니다. 구름기둥으로 불 기둥으로 지켜주셨습니다.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겔 48:35)고 했습니다. ‘여호와 삼마’는 ‘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이사야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700년 전의 예언자입니다. 그가 예언하기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 1:23)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15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16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18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19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그 때에 그들이 수소를 주의 제단에 드리리이다”(시 51:15-19)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사람의 본분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3-14)
 

구원은 우리에게서 남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은혜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느냐, 하나님을 믿었느냐 믿지 않았느냐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족한 제가 오늘 설교를 해야 하는 궁극적 목적 또한 성경을 여러분들이 믿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요 8:47) 여러분들은 하나님께 속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사람이 인생을 성공적으로 잘 사느냐 망하느냐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느냐 믿지 않았느냐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공부를 잘했느냐, 사업에 성공했느냐, 가정생활을 얼마나 잘 했느냐 하는 것은 여러분들의 행복의 척도에는 영향을 미칠지 모르지만 영혼을 구원할 수 는 없습니다. 전도서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해 아래서 수고하는(진저리나게 고생하는) 모든 것은 헛되다는 것입니다(전 1:3). 하나님 없는 인생은 보잘것없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성공할 수 없습니다. 비참한 것입니다. 그러나 전도서는 마지막을 보아야 합니다.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인생은 그 모든 것이 헛된 것에 불과하지만 하나님이 들어가면 변화가 생깁니다. 모든 죽어있고 생명력이 없는 일들에 생명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 1:7)고 했습니다.
미국은 어려울 때에 전 국민이 성경을 읽도록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 복을 받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축복을 받을 때는 늘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아서 문제가 된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도 대화가 통해야 합니다.

에스겔 37장에 보면 에스겔이 본 마른 뼈들에 대한 환상이 나옵니다.
주전 587년에 바벨론의 느브갓네살왕이 군데를 거느리고 내려와서 예루살렘 성을 함락시켰습니다. 솔로몬 왕이 세운 하나님의 성전이 완전히 파괴되었고 백성이 사는 예루살렘거리는 무자비하게 불로 태워 버렸습니다. 또 항복하지 않는 백성에게는 학살을 감행하였고, 왕과 제사장, 서기관등 예루살렘의 중심인물들을 결박하여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왕하 24:13). 이에 대한 기록이 예레미야 39장, 열왕기하 25장, 역대기하 1장, 시편137편 등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스겔은 이보다 11년 앞선 598년에 여호와긴 왕과 함께 바벨론으로 끌려온 사람들 중의 제사장 이었습니다. 여호와긴 왕과 신하들, 몇몇 귀족들만이 바벨론도성에 포로로 붙잡혀 있었던데 반해서(왕하 25:27절 이하) 나머지 포로 민들은 바벨론 남쪽지역의 점점이 흩어져 식민 개척자들로서 황폐한 국가농장 마을에 정착시켰습니다. 그들은 강제 노동에 동원되었던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의 산악기후에 길들여져 있었던 이스라엘의 포로 민들은 바벨론 저지대에 위치한 뜨거운 늪지대에서의 중노동은 거의 견뎌낼 재간이 없었습니다. 이때 포로 민들의 심정이 시편 137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애가3:4참조)
“1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2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시 137:1-2)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 까지는 노래도 못 불렀습니다. 모든 것이 있을 때 잘해야 합니다.

저는 태국, 미얀마 산을 떠돌아다니는 카렌족에 대장에게 목사 안수를 할 때 설교를 하고 다녀왔었습니다. 카렌족은 대다수가 기독교인입니다. 미얀마는 북한정권과 비슷하게 군부가 장악하고 독재정치를 합니다. 수도도 랑군에서 네비도로 옮겼습니다. 미얀마는 카렌족을 지속적으로 학살하고 있습니다. 산족의 모든 마을을 완전히 초토화시키고 있습니다. 3,300개의 마을이 불타 집들이 완전히 잿더미가 되었고, 곳곳에 셀 수도 없는 양의 지뢰가 매설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미 50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이 잘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희망이 없어 보였습니다. 고통과 자포자기의 체념이 강하게 포로 민들을 짓누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때의 상황을 잘 표현한 것이 애가 3장에 나옵니다.
“3 종일토록 손을 들어 자주자주 나를 치시는도다 4 나의 살과 가죽을 쇠하게 하시며 나의 뼈들을 꺾으셨고 5 고통과 수고를 쌓아 나를 에우셨으며 6 나를 어둠 속에 살게 하시기를 죽은 지 오랜 자 같게 하셨도다”(애 3:3-6)
고생고생 이런 고생이 없습니다. 죽은목숨과 진배없다는 자포자기의 절망을 가슴에 묻고 살아야 했던 암울한 시기였습니다. 그 암울한 시기에 남의 나라 땅에서 에스겔은 하나님의 예언자로서 활동을 계속합니다.
에스겔의 대표적인 예언은 ‘마른 뼈들의 환상’입니다. 에스겔이 본 것은 골짜기에 마른 뼈들이 널려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성령의 인도를 따라 환상 속에서 본 골짜기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의 해골로 가득하였습니다.
“3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4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겔 37:3-4) 약간 미친 짓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늘 그렇습니다. 사람이 가능한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불가능한 말씀을 하십니다. 순종하고 돌면 여리고 성이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백세에도 이삭을 날수가 있는 것입니다. 풀무 불에서도 살아남는 것입니다. 태양이 뒤로 물러가기도 합니다. 처녀가 잉태를 하는 것입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생명이 들어있습니다.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창세기 25장 27-34절에 보면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팥죽 한 그릇에 파는 장면이 나옵니다.
“32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33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34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창 25:32-34)고 했습니다. 에서는 두 가지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첫째는 32절에서 “내가 죽게 되었으니”라고 합니다. 실제로 바로 죽었습니까? 죽지 않았습니다. 살 생각을 해야 됩니다. 왜 죽을 생각을 합니까? 너무 급하게 생각했습니다. 그 고비만 넘기면 되는데 그 때 그만 일을 망치는 것입니다. 에서만 장자의 명분을 판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도 에서처럼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마음이 급하여 파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특히 구약시대는 장자를 통해서 축복이 내려가는데 이것을 소홀히 한 것입니다.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창 19:14)고 했습니다. 다른 책 다 별것 아닌 것으로 생각해도 좋습니다. 사람의 말 다 우습게 생각해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습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요 10:35) 하셨습니다. 성경은 철저하게 예언된 대로 이루어져 가는 책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시 21:1)라고 예언했는데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렇게 외치셨습니다(마 27:46). 또한 시편 22편에서 고난 받는 주께서 갈증을 느끼실 것이라고 했는데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은 “내가 목마르다”(요 19:28)고 외치셨습니다.
“3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5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마 19:3-5)고 하셨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은 약 1,800개의 구절을 말씀하셨는데 이중에 10%인 180개가 구약에서 인용된 내용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골 3:16)해야 합니다. 시험이 어디서 오기 시작 하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질 때 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평생 소비하는 양식을 추산한 바에 의하면(서양 사람 기준), 소 150마리, 닭 2,400마리, 새끼 양 225마리, 양 26마리, 돼지 310마리, 3만평의 농토에서 소출 되는 곡식, 그리고 6만평에서 소출 되는 과일 채소 등이라고 합니다. 엄청난 양입니다.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이렇게 많이 먹고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은 얼마나 먹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미국 메사추세츠 주 퀸시에 있는 어떤 교회 게시판에 이런 내용이 붙어있었다고 합니다. “낡고 헤어진 성경을 소유한 사람은 낡은 사람이 아니”며 하늘 보화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적어도 사람들의 말은 믿지 못해도 성경에서 하나님 자신이 증거 하는 진실 된 말씀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사야 65장 16절에는 여호와께서 자신을 가리켜 “진리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 10장 10절에도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의 증거는 “하나님은 참되시다”(요 3:33)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유일하신 참 하나님”(요 17:3),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요일 5:20)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관하여 하나님은 또 다시 하나님은 거짓 말 하실 수 없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민 23:19)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딛 1:2)
“17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18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히 6:17-18)이라고 하셨습니다.

아직도 어떤 분은 이렇게 생각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이성적으로 믿지 못할 말씀을 어떻게 믿느냐고? 여러분!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보다 크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내가 다 이해한다면 내가 하나님이거나 오히려 내가 미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는 모르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 2:11)

성경은 놀라운 책입니다. 성경은 살아있는 책입니다. 성경 외에 살아 있는 책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각을 변화시키는 책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본성을 변화시키는 책은 오직 성경뿐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완전히 변화시킬 수 있는 책입니다. 이에 대해서 시편 19편이 잘 증거 합니다.
“7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8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9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10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시 19:7-10)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제외하고서, 우리가 아는 범위 안에서 영원히 살아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우리를 둘러싼 세상에서 살아 있다 불리는 것들은 실제로는 죽어가고 있습니다. 죽음이 이 세상의 통치자인 샘입니다. 죄로 물든 이 세상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이 한줄기 빛처럼 쏟아진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에 대해서 이사야 40:6-8절을 인용하여 잘 표현했습니다.
“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 1:24-25)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나의 주 나의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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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요 20:28)

우간다 선교사님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아프리카는 길에서 반군이나 강도가 많이 나타납니다. 선교사님 한 분이 길을 가다가 총으로 무장한 강도를 만났습니다. 주머니에 있는 것 모두 다 주었습니다. 그런데 자동차까지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깐만 기다려 달라. 내 주인에게 물어보고 줘도 줘야 할 것 같다고 하고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선교하라고 준 차인데 이분들이 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하지요? 하고는 차 키를 주고 차에서 내렸답니다. 그리고 한참을 걸어가는데 무장강도들이 차를 타고 쫓아오더라는 것입니다. 순간 겁도 났습니다. 그러더니 이분들이 도로 가져가라고 하면서 차를 주고 가더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면 모든 일이 잘 됩니다. 인생이 잘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부정하고 살았던 모든 사람들은 불행한 일생을 마쳤습니다.
대표적인 무신론자 중에 볼테르(1694-1778)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성경이 거짓말 이라는 사실만 증명하면 기독교는 50년 안에 사라질 것이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살아 있는 동안은 물론이고 그가 죽은 지 20년 후 제네바 성경 협회는 그의 집을 사들여 전 세계에 성경을 보급하는 센터로 만들었습니다. 볼테르는 “나는 지옥으로 떨어져 가는 구나. 나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데…”하면서 죽었다고 합니다. 볼테르는 죽어도 성경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토마스 페인이란 사람은 1794년 이성의 시대(The Age of Reason)란 책에서 “나는 성경을 이 땅에서 사라지게 하기 위해서 이 책을 썼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도 죽음 직전에 “차라리 이성의 시대가 씌여지지 않았으면 좋았을텐데…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들여서라도 그 책을 회수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랬습니다.

한 때 과학자들은 성경을 비과학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세계적인 천문학자, 물리학자의 90%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천재 과학자 뉴튼과 아인슈타인은 “인체의 신비, 자연의 신비, 우주의 신비를 보고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미친 사람이거나 정직하지 못한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 14:1)

무신론자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독일의 철학자 포이에르바흐(1804-1872)입니다. 이 사람은 기독교의 본질이라는 책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만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들었다. 하나님이 존재하면 좋겠다는 사람들의 생각이 하나님을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이 그럴듯한 이론에 지성인들이 매료되었습니다. 독일은 개신교의 본거지입니다. 지금도 독일은 유럽 국가들 중에 선교를 꾸준히 잘 하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이런 나라에서 제일 악한 영의 세력이 일어난다는 것을 또한 기억해야 합니다. 포이에르바흐의 이 주장으로 칼 마르크스, 니체, 다윈, 잉거솔 등이 인본주의 사상에 기반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칼 마르크스는 하나님을 거부하고 물질이 이 세상을 지배한다고 하는 유물론을 바탕으로 공산주의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 공산주의는 사람의 인권과 영혼을 버리고 인류 역사에 깊은 상처만 남겼습니다.
니체는 하나님이 죽었다고 외치며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고 난 뒤 그의 메모에서 “신은 어딘가에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을 인정하면 내가 미칠 것만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결국 미쳐서 죽었습니다.

하나님을 부정한 사람들은 모두 미치거나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신명기 28장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자에게는 “3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4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5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6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18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소와 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28 여호와께서 또 너를 미치는 것과 눈 머는 것과 정신병으로 치시리니”라고 하셨습니다.

링컨은 비록 9살 때 어머니 낸시가 떠났지만 그에게 성경을 주면서 “내 아들아! 이 성경책은 나의 부모님께 받은 것이다. 많이 낡았지만 내가 너에게 100에이커(12만평)의 땅을 물려주는 것보다 이 한 권의 성경책을 물려주는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링컨은 성경을 사랑했고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링컨은 대통령이 되고서도 어머니를 회상하면서 “나의 오늘, 나의 희망, 나의 모든 것은 천사와 같은 나의 어머니에게서 받은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어머니가 물려준 성경을 귀하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도와 주셔야 잘 됩니다. 비행기가 오는 방향으로 바람이 밀어주면 빨리옵니다. 기름도 별로 안 듭니다. 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밀어 주시면 쉽게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앞만 바라보고 가지만 뒤에서 지켜주시는 분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미지의 모든 것에 대한 열쇠를 갖고 계시니 나는 기쁘다. 만일 다른 사람이 그 열쇠를 쥐고 있다면 혹은 그 열쇠를 내게 쥐어 준다면 나는 슬픔에 잠길 것이다.” J. 패커의 말입니다. 우리 미래를 여는 열쇠는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니 감사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안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그 열쇠를 내가 가지고 이문 저 문을 열고 들어가고 싶어합니다.
또는 지금 내가 있는 곳을 탈출하기 위해 그 열쇠가 필요하다고 하나님께 애원을 하기도 합니다. 가장 두려운 것은 결코 뛰쳐나가서는 안 되는 상황을 하나님은 다 아시지만 우리의 간절한 애원에 그 열쇠를 때로는 허락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아이가 많은 돈을 가지고 있으면 뭐합니까? 부모님에게 맡겨두고 있는 것이 안전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 칼을 나에게 달라고 애원하기도 합니다.

사무엘상 8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이제는 우리에게도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다스리심보다는 눈에 보이는 왕의 다스림이 필요하다고 요구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6)고 사무엘게 요구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8)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으로 도망가고 싶어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속셈을 잘 아시고 계십니다. 그런 백성들을 돌이켜 보고자 왕의 제도가 어떤 것인가를 사무엘을 통해서 알려 주십니다.
“너희의 양 떼의 십분의 일을 거두어 가리니 너희가 그의 종이 될 것이라”(17)고 하십니다.
그러나 “19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이르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20 우리도 다른 나라들 같이 되어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하는지라” 그럽니다.
하나님은 저들의 속셈을 다 아시고 결과를 가져다 주는 미래도 다 아시면서 목이 곧은 백성들이 요구하시는 것을 다 들어주십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들의 말을 들어 왕을 세우라 하시니”(22)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열쇠를 주신 것입니다. 그 후 우리는 이스라엘 역사가 어떻게 되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은 비참했습니다. 나중에 앗수르와 바벨론이 쳐들어와 성전 기둥에 칠한 금까지 다 벗겨갔습니다. 자기들의 왕이 자기들을 지켜줍니까? 비참한 국가의 운명을 맞이했습니다. 여러분! 내가 왕이 되려고 하지 마세요? 사탄은 오늘도 아담에게 한 거짓말을, 예수님께 한 시험을 우리에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다 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성경을 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사탄의 유혹을 이기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을 보지 않으면 시험에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왕이 되려고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 사마귀가 눈앞에 있는 매미 잡는 데만 정신이 팔려있고 뒤에서 노리고 있는 참새를 못 본다는 말입니다.
눈앞에 펼쳐진 이익만을 탐하여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지 않고 돌진하면 그 이익보다 수백 배 큰 재앙이 닥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한시외전(韓詩外傳)》에서는 당랑포선(螳螂捕蟬)이라고도 합니다. 《장자(莊子)》 산목편(山木篇)에 나오는 당랑박선(螳螂搏蟬)이나, 전한(前漢) 때 유향(劉向)이 지은 《설원(說苑)》정간(正諫)에 나오는 당랑규선(螳螂窺蟬)이라는 말이 모두 같은 뜻입니다. 앞만 보지말고 주위를 보시기 바랍니다.

자기가 왕으로 살려고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다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돈 있고 권력 있으면 뭐합니까? 자기에게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전 대통령이 미얀마에 갈 때 김포공항에 아침에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 공항 근처의 중고등학생이 나와서 잘 다녀오시라고 비 맞으면서 태극기 흔들었습니다. 가서 좋은 분들 다 죽이고 자기 혼자 살아왔습니다. 여러분! 그런 왕 되시기 원하십니까?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이 그랬습니다. 사울은 ‘큰 자’(왕)이라는 뜻입니다. 나중에 사울 이었던 바울은 자기 이름을 그래서 빠꿉니다. 사울은 큰 자 이지만 바울은 ‘작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자기는 “모든 사도들보다 작은 자로다”고 고백합니다.
“너는 말 못하는 자와 모든 고독한 자의 송사를 위하여 입을 열지니라”(잠 31:8) 한 나라의 왕이 되려는 아들에게 어머니가 부탁하는 잠언입니다.

“그가 여섯 해 동안에 품꾼의 삯의 배나 받을 만큼 너를 섬겼은즉 너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하기를 어렵게 여기지 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 15:18) 영원히 내 종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안식년 제도를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땅을 한번 사면 영원히 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내 땅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의 땅입니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셨고 하나님의 것입니다.
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우리는 너무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있었습니다. 선한 것을 선하게 못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니 귀가 있어도 귀머거리요 눈이 있지만 소경이었습니다. 눈을 뜨세요. 귀를 여세요. 귀 있는 자 되세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사는 것입니다. 내가 주가 아닙니다. 내가 왕 되려고 하면 안됩니다. 남에게 잘 하는 것이 곧 나에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세요. 하나님께 잘하시기를 바랍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1 + 1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9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10 아론의 집이여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11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여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12 여호와께서 우리를 생각하사 복을 주시되 이스라엘 집에도 복을 주시고 아론의 집에도 복을 주시며 13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을 막론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14 여호와께서 너희를 곧 너희와 너희의 자손을 더욱 번창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15 너희는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 복을 받는 자로다 16 하늘은 여호와의 하늘이라도 땅은 사람에게 주셨도다 17 죽은 자들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 데로 내려가는 자들은 아무도 찬양하지 못하리로다 18 우리는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송축하리로다 할렐루야” (시 115:9-18)

오늘 설교제목은 1 + 1입니다. 이런 설교제목 처음 보셨죠? 크게 한번 외쳐 봅시다. 1 + 1, 올해가 2011년이기 때문에 첫 주일 설교를 기억하시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새해가 되면 제일 많이 인사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일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분은 “복을 주시면서 말씀하셔야죠!”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복은 누군가 주는 주체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가진 것이 제일 많은 분이라야 복을 나눠주실 수 있습니다. 자기가 가진 것이 없이는 줄 수 없습니다. 인격도 수준이 있어야 합니다. 2011년부터 우리는 하나님께 복 받고, 복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나이도 한 살 더 먹었으니까 좀 달라집시다.

성경본문에 손을 대면 안되지만, 본문에 손을 대기보다는 우리에게 적용을 해 봅시다,
본문 9절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를
“대한민국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인도의 타고르는 1929년 일본 방문 중 조선을 위해 《동방의 등불》이라는 시를 지어 한민족의 독립을 염원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남에게 축복을 할 지언정 저주는 하지 맙시다. 축복하며 사는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저주는 절대 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우리가 축복을 하는 사람이 되시길 원하십니다. 복을 주는 사람이 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 12:12)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복덩이입니다. 복 자체입니다. 예전 성경(개역한글)에는 ‘복의 근원’이라고 번역했었습니다. 그런데 ‘근원’ 이라는 말은 시작점을 의미하기 때문에 모든 것의 시작점은 하나님 외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렘 17:13). 하나님이 근원이십니다.
1 + 1은 우리 집사람이 제일 좋아합니다. 하나는 원래 돈주면 당연히 살 수 있는 근원이 되는 물건이고 그 옆에 하나가 더 달려 있습니다. 우유는 큰 것 옆에 작은 것 하나가 더 붙어 있습니다. 라면은 박스 바깥에 하나 더 붙어 있습니다. “여호와를 의지하라”는 말은 바로 그 옆에 붙어 있는 것입니다. 처음 1은 하나님이고 + 두 번째 1은 축복인 나 자신입니다.
예수님은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요 15:4)고 하셨습니다. 성 삼위일체이신 하나님께 붙어만 있으면 됩니다.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 제1차 회의는 당시 임시의장이었던 이승만 박사의 개회사로 시작되었습니다. 이승만 임시 회장은 “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 사상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누구나 오늘을 당해 사람의 힘만으로 된 것이라고 우리는 자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기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동의하십니까?(동의와 재청)
우리가 다 성심으로 일어서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릴 터인데 이윤영 의원(목사) 나오셔서 간단한 말씀으로 기도를 올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윤영 의원이 나올 때 일동 기립했습니다.
[1948년 5월31일 오후 2시 제헌국회 개원식 기도문 전문]
우리에게 독립을 주신 하나님!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에 복을 내리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있게 하심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랜 세월 동안 이 민족의 고통과 호소를 들으시고 정의의 칼을 빼셔서 일제의 폭력을 굽히셨으며 세계인의 양심을 움직이시고 우리 민족의 염원을 들으심으로써 역사적인 환희의 날이 우리에게 오게 하시고 하나님의 섭리가 세계 만방에 드러나게 하셨음을 믿습니다.
하나님, 아직까지 남북이 둘로 갈린 이 민족의 고통과 수치를 씻어주시고 우리 민족, 우리 동포가 손을 같이 잡고 웃으며 노래 부르는 날이 우리 앞에 속히 오게 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 민생의 도탄이 오래 갈수록 이 땅에 악마의 권세만 확대될 것이오니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이 속히 이 땅에 임하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우리에게 독립을 주신 하나님, 이제는 남북의 통일을 주시고 또한 민생의 복락과 아울러 세계 평화를 허락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제헌국회 속기록)

하나님은 대한민국을 부르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동양의 반도인 이 작은 나라가, 주위에 갖은 우상이 가득한 나라들이 득실거리는 그 틈바구니에서 제헌 국회를 기도로 시작하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는 놀랍습니다. 이제 우리는 불안과 염려와 갈등으로 가득 찬 나라가 아니라 “우리 민족, 우리 동포가 손을 같이 잡고 웃으며 노래 부르는 날이 우리 앞에 속히 오게 해주시기를” 기대하면서 2011년을 맞이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대한민국의 도움이시요 우리의 방패이신줄로 믿습니다.

본문 10절 “아론의 집이여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교회여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아론 자손의 남자는 모두 이를 먹을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물 중에서 대대로 그들의 영원한 소득이 됨이라 이를 만지는 자마다 거룩하리라”(레 6:18) 고 했습니다.
아론의 집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아론 지파만 제사장이 되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집입니다. 교회도 하나님만 붙들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터 위에만 세워져야 합니다. 사람의 방법이 많아지면 안됩니다. 교회는 어떤 면에서는 심플해야 합니다. 복잡할 것이 없습니다.

내려놓음보다 더 높은 차원이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나를 버리는 것은 올려드리기 위함입니다. 다 내려놓고 하나님께 드리지 못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막 11:17)라고 하셨습니다.
교회 앞에서 한 흑인 소녀가 울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다가가서 물었습니다. “왜 울고 있니!” 교회에서 흑인이라고 쫓겨났어요. 그 때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나도 지금 쫓겨났단다”하시더라는 이야기입니다.

흔히 4대 성인으로 불리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기원전 469) 소크라테스도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했습니다. 석가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말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알았을 까요?

자기 자신만 보는 사람은 절대 자신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어딘가 비추어 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거울이 됩니다. 도를 아무리 닦아도, 다른 책을 아무리 많이 보아도 안 나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알게 하십니다.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유 1:7) 1이 없이는 나를 알 수 없습니다. 1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다음의 1은 나입니다. 하나님을 알면 나를 알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면 자기도 모릅니다.

본문 11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아(자기 이름)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여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경외(arey::야레)’는 ‘두려워하는, 무서운’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범죄하지 말아야 하지만 두려워만 해 가지고는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선생님을 무서워하면 선생님의 말씀을 어느 정도는 듣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따르면 공부를 잘합니다.
‘의지(af’B:바타흐)’는 ‘신뢰하다, 확신하다’는 뜻입니다. 어린아이들 보면 아플수록 엄마를 안 떨어집니다. 자기가 혼자 살만할 때는 혼자 잘 놉니다. 그러나 아프면 엄마를 더욱 의지합니다.
우리가 아픈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병자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멀쩡한 사람 없습니다. 다 비정상입니다. 정상이면 남을 욕합니까? 미워합니까? 다른 사람 쉽게 뭐라 하지만 그것이 다 우리의 모습입니다.
유럽사람들이 신앙심이 좋았을 때는 영생을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살기 좋아지면서 더 이상 영생에 관한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믿지 않은 겁니다. 의지하지 않은 겁니다. 여러분!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정말 사람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집사는 것이요?, 돈 많이 버는 것이요?, 출세하는 것이요? 아닙니다. 좀더 솔직해 집시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방법을 못 찾아서 그렇지, 믿지 못해서 그렇지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진시황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집트의 파라오들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피라밋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죽음에서 깨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이 부활 하셨습니다.
예수님께 온 많은 병자들이 병만 고치고 간 것이 아닙니다. “내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 9:2)고 하셨습니다.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1 + 1입니다. 병 고치러 왔다가 죄 사함까지 받았습니다. 영생을 믿으세요. 우리가 영생을 추구할 때 이 세상의 축복이 1 + 1로 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솔로몬은 지혜만을 요구했지만 하나님은 부를 더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인색하지 않습니다.

“34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35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출 40:34-35) 충만하게 임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이끄시기에 부족함이 없으신 하나님의 충만함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고 하셨으며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 1:16)고 하셨습니다. “은혜 위에 은혜”가 바로 1 + 1입니다.

본문 15절입니다. “너희는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 복을 받는 자로다” 아멘.

본문 14절 “여호와께서 너희를 곧 너희와 너희의 자손을 더욱 번창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너희와 너희의 자손”이 1 + 1입니다. 나만 복 받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가 복이 됩니다.

16절 “하늘은 여호와의 하늘이라도 땅은 사람에게 주셨도다” 오늘날 우리에게 이 땅을 허락하신 것을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통일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여호와를 의지할 때 놀라운 일이 이 민족에게 또 일어날 것입니다.

본문 마지막 “17 죽은 자들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 데로 내려가는 자들은 아무도 찬양하지 못하리로다 18 우리는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송축하리로다 할렐루야”
오늘 우리가 죽어 있으면 찬양하지 못합니다. 2011년 새해 살아 있어 찬양함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우리의 생명이 영원하여 이제부터 영원까지 찬양을 올려드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