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어디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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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 6:8)

본문에 보면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로 이 시점이 기회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데는 그냥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무언의 용서하시겠다는 싸인이 있는 것입니다. 범죄한 사람에게 이 기회가 마지막 기회입니다. 범죄하기 이전의 아담은 에덴동산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하와와 맛있게 먹고 동산 나무 사이에 숨어있었습니다. 부끄러움을 알게 된 것입니다. 사람에게 죄가 들어오니까 부끄러움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부끄러움은 창피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뵈올 수 없었습니다. 죄인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찾아 오셔서 기회를 주시려고 하는 모습을 우리는 발견합니다.
그러나 이미 죄가 들어간 아담은 변명 일색입니다. 하나님은 “네가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11절)고 하셨습니다. 그 때 아담의 대답이 12절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이고 하나님께 이렇게 변명합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창 4:9). 인류 역사상 제일 한심한 대답입니다. 자기가 다스려야할 책임을 망각한 대답입니다. 가인에게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바로 동생을 죽이기 직전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6-7)고 하셨습니다. 죄는 사탄은 너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범죄한 사람에게 죄는 자꾸만 더 범죄 하여 하나님을 완전히 떠나게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대로 자꾸만 다가오십니다. 가인은 죄를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죄를 어떻게 다스립니까? 자기 힘으로는 안됩니다. 자기 마음으로는 안됩니다. 자기를 포기하고 하나님께 백기들고 나아오기만 하면 됩니다.

아브라함이 부름을 받은 것은 창세기 12장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고 했습니다. 부모님 때부터 살아온 곳입니다. 그렇게 쉽게 떠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든 곳입니다. 생활의 터전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우르땅은 에덴 동산이 있던 곳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것은 다음 구절에서 나옵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창 12:4)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모세를 부르시는 장면은 출애굽기 3장에 나옵니다. 모세가 양을 치다가 호렙산 까지 갑니다. 거기에 떨기나무가 있는데 불이 붙은 겁니다. 불은 불인데 나무는 타지 않는 겁니다. 모세는 신기하여 그 나무 있는 곳으로 다가갑니다. 택민이(2살)가 지난번 텔레비전 뒤로 가 보더라구요. 아마 사람이 나오는데 뒤에 뭐가 있지 않나 확인한 것 같습니다. 모세가 불꽃은 있는데 타지 않는 떨기나무에 다가가자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출 3:4)라고 대답합니다.

아담과 가인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가까이 가지 못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만 돌아가면 되는데 그 때에라도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빌면 되는데 그들은 변명만 하다가 기회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노아, 아브라함, 모세는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사람들을 자세히 보면 사람이 먼저 하나님께 다가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모두 은혜를 입었고 축복을 받았습니다. 한가지 주목해야 할 사실은 그들이 먼저 훌륭한 일을 했다든가 통회하고 회개하는 장면이 없습니다. 회개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났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 순종하고 간 것 밖에 없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내가 하나님께 회개했기 때문에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랬다면 그것도 자기 공로로 남기려고 할 것입니다. 그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오라고 하셨을 때에 오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회개란 눈물을 흘리며 회개한다고 한 것만이 회개가 아니라 하나님이 부르실 때 오기만 하면 이미 회개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따라가면 회개된 것이며 죄가 사해지는 것입니다.

신약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을 보세요. 그들이 회개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부르셨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도 예수님께 잘 보여서 예수님이 왕이 되실 때에 높은 자리에나 앉겠다고 따라다녔습니다. 빛이 와야 어두움이 물러가는 것이지 어둠이 어둠을 물리칠 수는 없습니다. 즉 나의 힘만으로는 죄를 가인에게 주셨던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6-7)는 말씀을 지킬 수 없습니다. 죄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고 했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때에 여러분은 “내 맞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시고 기르셨기 때문에 존재합니다.”라고 고백하십니까? 아니면 말도 안됩니다. 제가 하나님의 것이라니요? 마치 아담과 가인처럼 반문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가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자 이스라엘 곧 너를 위하여 네 이름을 불러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사 45:4)고 하셨습니다.
다시 모세를 부르실 때 장면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출 3:4)라고 했습니다. 모세를 하나님이 알고 계셨습니다 애굽에서 살인하고 도망 와서 양치고 있는 모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 살인자야! 너를 심판하기 위해서 내가 왔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또한 모세가 회개하고 하나님을 영접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모세야 모세야 이름을 부르셨을 뿐입니다.

삭개오가 뽕나무에 올라가 예수를 보고자 할 때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눅 19:5)라고 하셨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의 모습을 보러 뽕나무에 올라갔다는 것은 예수님을 이전에 한번도 본적이 없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삭개오의 이름을 불러 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이름을 알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은 아담을 찾으십니다. 범죄 하여 하나님을 떠난 우리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계십니까? 시간적으로는 2011년 2월 27일에 있습니다. 장소 적으로 대한민국 경기도 산본의 주앙교회에 있습니다. 그렇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질문은 그 대답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네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네 중심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이 이 세상을 좀더 편안하게 살려고 하는 데에 관심이 있는지 생각해야 됩니다. 돈에 관심이 있는지? 아파트에 관심이 있는지? 생각해야 됩니다.

가인의 제사는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자 가인은 그 원인을 몰랐습니다. 그리고는 안색이 변하고 씩씩대기만 합니다. 이 때 하나님이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창 4:7)고 하셨습니다. 가인이 하나님께 선하지 못한 마음으로 제물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아벨이 하니까 그냥 따라할 수도 있습니다. 아벨은 하나님께 자기의 양 중에서 첫 새끼로 제일 살지고 좋은 양으로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아벨의 마음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 선한 마음으로 믿음으로 드리지 못했습니다.
사마리에서 빌립과 베드로가 전도할 때에 시몬이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성령을 돈으로 살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행 8:21)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많은 돈도 아니며 많은 배움도, 머리도 아닙니다.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 고 했습니다.
다윗은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시 27:8),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시 57:7). 아 다윗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시몬드 베이유(Simone Weil)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탕자에게 아버지 집의 추억이 되살아났다. 그 아들이 경제적으로 잘 살았다면 집에 돌아갈 생각은 결코 하지 않았을 것이다.” 현대인들이 새겨야할 말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심령이 가난해 지시기를 바랍니다. 겸손해 지시기를 바랍니다.
아들이 있을 곳은 아버지가 계신 곳입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하시는 것은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있는 곳은 네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바로 이 때가 기회입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셨을 때에 마음을 열고 돌아오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냥 하나님의 한없는 사람을 진심으로 받으시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이 은혜의 초청에 아멘으로 나아오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은혜의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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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2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 133:1-3)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누가복음 15장에는 잃어버린 동전, 잃은 양, 집나간 아들의 비유가 한꺼번에 나옵니다. 누가복음 중간에 집중적으로 나옵니다. 이야기의 핵심은 아버지의 한없는 기다리심과 은혜에 있습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눅 15:20)라고 했습니다.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린 아버지는 막바로 잔치로 들어갑니다.
레바논의 한 선교사가 예수님 당시의 문화와 아주 비슷한 문화 속에 살면서 아직 한 번도 이 비유를 들어본 적이 없는 시골 사람들에게 이 비유를 들려준 뒤 반응을 물었습니다.
두 가지가 그들의 눈에 특이해 보였습니다. 첫째, 서둘러 유산을 요구한다는 것은 곧 아버지가 빨리 죽었으면 하는 것인데 이러한 요구를 참거나 응하는 것은 이들을 상상이 되지도 않았습니다. 둘째, 잃은 지 오랜 아들을 맞으러 아버지가 달려나갔다는 대목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중동에서는 권위 있는 아버지가 품위 있게 천천히 걸어가야지 결코 뛰는 법이 없답니다. 예수님의 비유 속에 아버지가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춘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설렘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이를 먹는다는 것을 슬픔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고 말합니다.
종착지가 가까워 옴에 따라 당신은 만나게 될 사람 때문에 마음속에서 흥분을 일으킨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왜 그런 흥분이 일어납니까? 만나고 싶었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예수님을 만나는 시간이 다가온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점점 더 설렘이 있고 슬프지 않은 것입니다. 종착지가 가까워질수록 설레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설렘이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그 설렘 때문에 모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기쁨을 미리 함께 나누기 위해서 오늘 모인 줄로 믿습니다.

사람도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될 때 설렘이 있는 것처럼 영화도 음악도 그렇습니다. 책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나 문자도 그렇습니다. 그 중에서 하나를 꼽으라면 ‘은혜’입니다. 은혜 없이는 우리는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모인 것도 은혜요, 오늘 우리가 숨쉬고 있다는 것도 은혜입니다. 물 한 방울 속에 해의 모습이 숨어 있듯이 복음의 진수가 은혜라는 단어에 숨어있기 때문입니다.

리처드 니버(N. Richard Niebuhr)는 말하기를 “기독교의 위대한 개혁은 지금까지 몰랐던 것을 새로 찾아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이미 있는 것을 전혀 다르게 볼 때 발생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고 했습니다. 교회는 바로 이 은혜의 복음을 전파하도록 세움을 받은 곳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에 이 은혜가 없다면 어떻게 복음을 전하겠습니다. 니버의 말대로 새로운 것에만 몰두할 것이 아니라 현재의 우리를 다시 보고 다시 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스티븐 브라운(Stephen Brown)은 그의 책에서 “수의사는 개만 보고도 처음 보는 개 주인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의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예수님은 누구신가?』책의 추천서를 받기 위해 전 총신대 총장이셨던 김의원 목사님을 찾아뵌 적이 있습니다. 총장님은 총신대를 그만두기 직전에 박사학위를 주기 위해 몇 분의 학생을 가르치셨습니다. 물론 그분들은 지금 다 목사님이 되신 분들입니다. 저에게 총장님은 교회를 어떻게 하고 있냐고 하셔서 있는 그대로 우리교회 모습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총장님께서 저에게 ‘나보나 났네!’ 그러셨습니다. 물론 총장님이 겸손하게 말씀하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총장님이 말씀하신 뜻의 요지는 있습니다. 학교 교육만으로 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학교보다는 교회가 사람을 만든다는 뜻입니다. 좀더 솔직하게 표현하면 교회는 다른 곳에는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은혜’입니다. ‘은혜’ 때문에 교회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교회만이 줄 수 있는 것이 ‘은혜’입니다.

고든 맥도날드(Gordon MacDonald)는 말하기를 “웬만한 일에는 세상도 교회 못지 않거나 교회보다 낫다. 집을 지어주고 가난한 자를 먹여 주고 아픈 사람을 고쳐 주는 일은 굳이 교인이 아니어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이 못하는 일이 하나 있다. 세상은 은혜를 베풀 수 없다.”고 했습니다. 교회의 절대적인 사명을 말한 것입니다. 교회에 은혜가 없다면 성도에게 은혜가 없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찾을 곳이 없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찾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은혜에 대한 목마름입니다. 세상 것을 다 가져도 해결이 안 되는 인간의 공허함, 영혼의 갈망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채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근본주의 성장기라는 책에 일본의 어느 선교사 훈련생 동창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훈련을 마치고 다 떠났습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들에게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은혜였습니다. 한 때 교회를 떠난 것도 은혜가 없어서였습니다. 다시 돌아온 것도 다른 곳에서 은혜를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모든 문제는 은혜만 받으면 해결됩니다. 교회의 모든 문제도 은혜만 받으면 해결됩니다. 은혜가 떨어지면 믿음도 떨어지는 것입니다. 은혜가 떨어지면 시험이 오고 기쁨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만 찾아오면 모든 것이 풀립니다.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학교는 은혜를 개구리처럼 해부하려고 하는 곳입니다. ‘은혜’를 개구리처럼 해부할 수는 있으나 그렇게 하는 사이 개구리의 생명은 잃게 됩니다. 은혜는 복음입니다. 복음은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에 있는 것입니다. 은혜는 해부하는 것이 아니라, 따지고 논문을 쓰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는 것입니다. 은혜는 설명하기보다는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학교와 교회의 차이입니다. 학교는 설명하려고 하지만 교회는 전달합니다. 사랑은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7)고 했습니다. 모세는 율법을 세웠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은혜를 주신 분입니다. 모세가 은혜를 줄 수는 없습니다. 학교는 마치 율법을 가르치는 모세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은혜를 주는 곳입니다.

영국에서 열린 비교종교학회에서 세계 각 국의 전문가들이 기독교의 독특성을 찾아 토론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니까 타종교에는 없는 기독교에만 유일한 것을 찾는 것입니다. 먼저 여러 가지 답을 써 놓고 하나씩 지워나갔습니다. 성육신, 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현현한 이야기는 타종교에도 있다. 부활? 사자의 환생 기사 역시 타종교에도 있는 것이었다. 기독교의 것과 다르긴 하지만 타종교에도 있었습니다. 토론이 길어지고 있는데 루이스가 방을 잘못 찾아왔습니다. “이 방의 토론의 주제가 뭡니까?” 루이스의 질문에 동료들이 전 세계 종교 중 기독교만이 기여할 수 있는 바를 찾는 중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루이스가 “그거야 쉽죠. 은혜 아닙니까?” 얼마 동안 토론은 계속되었지만 결론은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의 엄청난 구원이 사람에게 아무 조건 없이 찾아온다는 개념은 사람의 본성과는 상반되는 것 같습니다. 불교의 고행, 힌두교의 업보, 유대교의 언약, 이슬람교의 법전 모두가 노력으로 인정받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최고의 축복인 구원을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무조건 적인 하나님의 사랑으로 주어진다는 것은 기독교뿐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하여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사상은 돈이 있기 때문에 사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업을 하기 때문에 돈이 생긴다는 논리입니다. ‘사회 정의 구현’은 기독교가 아니라도 할 수 있습니다. 교회만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만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은혜란 믿어지지 않을 만큼 개인적인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을 잘 모를 때에는 하나님은 적어도 이 정도 일은 해야, 이 정도의 인물은 되어야 기뻐하실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사회에서 정의 구현이 이루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의 고통과 아픔이 끝났기 때문도 아니라 한 영혼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온 것을 기뻐하십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위대한 종교지도자들을 만나시지 않았습니다. 외관상 훌륭한 종교 지도자들을 멀리 하시고 오히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눅 18:13)하고 부르짖는 평범한 죄인들을 만나 주셨습니다. 그들에게 영생을 주셨습니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하나님은 세상에서 위대한 사람이 아니라 진실한 사람들을 좋아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계산법은 세상과 다른 것입니다. 두렙돈 헌금한 과부를 보고 모든 사람이 한 헌금보다 많이 했다고 했습니다. 경제적으로 따지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경제적인 논리의 자대로 우리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일은 양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의 양떼는 잠시 두고 잃은 양 한 마리 때문에 가십니다. 천국의 의인 99명과 이 땅의 죄인 하나가 회개하는 것을 비교하셨습니다. 경제적인 논리로는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진정한 가치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7)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간단합니다. 많은 헌금도 위대한 기도문도 훌륭한 사역을 하지 않아도 가능합니다. 회개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께 돌아오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마지막으로 구원받은 강도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고자 회심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 강도가 앞으로 십자가에서 벗어나 성경 공부를 할 것도 아니고, 회당이나 교회에 나갈 것도 아닙니다. 자기가 피해를 입힌 사람들을 찾아가 용서를 빌 것도 아닙니다. 앞으로 착하게 살 것도 아닙니다. 교회에 헌금할 것도 아닙니다. 이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예수여 … 나를 생각하소서”(눅 23:42-43) 라고 말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천국은 보장받았습니다. 만일 은혜를 뺀다면 다른 무엇으로도 설명이 안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탕자의 아버지처럼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는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교회 교의학』(Church Dogmatics)을 썼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결론적으로 하나님을 간단하게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사랑하시는 분.”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모차르트의 미사곡(Requiem)에서 놀라운 노랫말이 나옵니다. “은혜의 예수여, 주께서 이 땅에 오심이 바로 저 때문임을 기억해 주소서.” 이 기도와 같은 가사가 바로 여러분의 고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하나님만, 십자가만 자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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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시 20: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롬 3:27)

영국의 유명한 웨스트민스터 교회에서 30년 간을 목회하면서 성경 강해로 은혜를 끼친 로이드 존스 목사는 본래 성 바돌로매 병원에서 외과 전문의로 세계적인 명의 로드호더 박사와 함께 일했던 분입니다.
이 분이 목사가 되어 웨스트민스터 교회에서 매 금요일 저녁 성경을 강해했는데 1,000명 내지 1,200명의 많은 청중이 그의 강해를 듣기 위해 모여들었습니다.
존스 목사님은 로마서를 강해하는데 로마서 3장 20절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8장 마지막까지만 강해를 했는데 아주 자세하게 강해를 해서 로마서 3장 20절에서부터 8장 39절까지가 여러 해 걸렸고 그 강해한 것이 무려 여섯 권의 책으로 출간이 되었습니다.
존스 목사님의 말씀에 의하면 로마서 1장에서부터 3장 19절까지는 강해하지 아니하고 3장 20절부터 시작한 이유는 로마서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으로 단숨에 나가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오늘 본문은 우리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우리의 구속은 하나님이 예수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롬 3:25) 바로 그때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방법은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롬 3:26) 이런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졌는데 우리가 이 일 위에 무엇을 자랑한단 말입니까?
오늘 본문 27절을 같이 읽어보십시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1. 세상의 것, 사람의 것은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유난히 힘이 장사인 개미가 있었습니다. 다른 개미들은 쌀 한 톨을 겨우 드는데 이 개미는 두 톨씩도 거뜬히 들었습니다. 많은 개미들이 이 힘이쎈 개미를 우러러 보았습니다. 기고만장해진 개미는 이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었고,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넓은 세상에 나가 자신의 힘을 자랑하고 싶어졌습니다.
개미는 사람들이 많은 시장으로 찾아가서 힘 자랑을 하였습니다.
쌀 두 톨을 들어 올리기도 하고 집어던지기도 하며 괴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러나 누구하나 개미를 봐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커다란 발에 밟혀 죽고 말았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돈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식이 많은 사람은 그 지식의 힘으로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권세가 있는 사람은 그 권세의 힘을 과신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개미에 불과 합니다. 우리가 가진 힘이 대단한 것이라도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겨우 쌀 두 톨 드는 개미의 힘밖에 안됩니다.

본문에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한다고 말합니다. 의지하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지만 자동차 자랑하는 분은 저는 많이 보았습니다. 심지어는 목사님들 중에서도 자동차 자랑을 많이 합니다. 어떤 분은 골프치는 것을 자랑합니다.
자랑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내면에 열등감이 많은 사람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자랑하는 이들은 대개 다른 이들의 칭찬이나 인정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확인 받고 싶어하는 약자들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지혜와 힘과 재산을 구합니다. 사람은 아무것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에 자랑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하며 고통스러워했던 예레미야는 넘어지는 담을 받치려는 절박함으로 백성들에게 주님께로 돌아가자고 권면합니다. 사실 이미 많이 기울었습니다. 그런데도 예레미야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더 진실 되게 말씀드리면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누가 못 박았습니까? 빌라도요? 유대인이요? 좀더 진실 되게 말씀드리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다른 것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사람들의 마음을 온통 지배하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예민한 감성으로 분별해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모든 사람들이 꼭 손에 쥐고 싶어하는 것을 가졌다 해도 그것을 자랑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렘 9:23)고 했습니다. 사람은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나라가 멸망해 가는데도 자기들의 자랑만 일삼습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라고 합니다. 장수하는 것을 자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건강한 것을 자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들의 풀과 같이 시드는 것입니다.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8-29)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돈이 아무리 많아도,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권세가 아무리 높이도 교만한 사람은 사용하지 아니하십니다. 자기를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하는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바울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고전 13:4)라고 했습니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잠 27:1)고 했습니다. 미래는 하나님만이 아시고 하나님에 의해서만 좌우되는 것입니다.
잠언서 기자는 “많은 사람이 각기 자기의 인자함을 자랑하나니 충성된 자를 누가 만날 수 있으랴”(잠 20:6)고 합니다.
성경은 자기 자랑만 일삼는 사람들을 가리켜 단도직입적으로 악인이며 포악한 자라고 말합니다. “악인은 그의 마음의 욕심을 자랑하며 탐욕을 부리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시 10:3)고 합니다.
“포악한 자여 네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시 52:1) 야고보는 이러한 자랑을 허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 쓸데없는 짓이라는 것입니다.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약 4:16)

누가 하나님을 자랑하나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시 64:10)라고 합니다. 마음이 정직한 자입니다.

2. 하나님을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의 성호를 자랑해야 합니다.
본문에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라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은 마음이 즐거울지로다”(시 105:3)
“그의 성호를 자랑하라 여호와를 구하는 자마다 마음이 즐거울지로다”(대상 16:10)
이사야 때에 비록 포로로 잡혀가게 될 이스라엘 백이지만 “네가 그들을 까부른즉 바람이 그들을 날리겠고 회오리바람이 그들을 흩어 버릴 것이로되 너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겠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로 말미암아 자랑하리라”(사 41:16)고 했습니다. 바람에 날려 버릴 사람도 있지만 그 와중에도 여호와로 말미암아 자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다 여호와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고 자랑하리라 하느니라”(사 45:25)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여호와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자랑해야 합니다.
“8 너희는 여호와께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가 행하신 일을 만민 중에 알릴지어다 9 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고 그의 모든 기사를 전할지어다(대상 16:8-9)
내가 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자랑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대만에 오래 전에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 가면 간증거리를 많이 듣습니다. 그런데도 자기 자랑이 없습니다. 모두다 하나님이 이루신 일들에 대한 자랑입니다.

셋째, 주의 십자가를 자랑해야 합니다.
“내가 주의 택하신 자가 형통함을 보고 주의 나라의 기쁨을 나누어 가지게 하사 주의 유산을 자랑하게 하소서”(시 106:5). 우리는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약의 백성이 알지 못하던 유산까지 받았습니다. 너무나 자랑할 것이 많습니다. 모두가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신 것입니다.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9:24)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 사랑이 이 땅에서 이루어진 것이 무엇입니까?
“13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3)

지금은 십자가를 자랑한다고 하는 것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만 사도 바울 당시엔 십자가는 죄수를 매다는 끔찍한 형틀이요, 혐오와 저주의 대상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십자가를 생각하거나 말하기도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십자가의 도가 유대인에게는 꺼리기는 것이요,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십자가를 자랑한다고 말씀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말씀할 수가 있었을까요? 어떻게 그 욕되고 수치스러운 십자가를 자랑한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십자가 속에서 본 위대한 진리가 있었고, 십자가를 통해서 받은 형용할 수 없이 큰 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위대한 발견이요 깨달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앙 생활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것, 십자가의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이 진리, 십자가의 진리를 알면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이고, 이걸 모르면 모든 것을 다 알아도 사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십자가만을 자랑하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를 자랑한다는 것은 자신의 약점도 자랑하는 것입니다. 마치 마태가 자기가 죄인이라고 고백한 것과 같습니다. 자기가 ‘친 로마파’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기 전의 자신의 신분을 속이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잘난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못난 것도 자랑합니다. 이것이 예수 안에서 자랑하는 것입니다.

3. 자랑하는 방법
“우리가 종일 하나님을 자랑하였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셀라”(시 44:8)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롬 2:23) 유대인들은 율법을 자랑하면서 스스로 율법을 범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을 전하면서 복음을 거역하여 살면서 복음을 전하기란 어렵습니다. 성령의 힘은 아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하기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전 1:30-31)

로마서 5장 2절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자랑한다)”고 하였는데 여기 “즐거워한다”는 말이 바로 자랑이란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하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로 구원받으신 것을 자랑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믿고 천국가게 되는 것을 자랑하시기를 바랍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대로를 예비하시는 하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사 40:3)
“성문으로 나아가라 나아가라 백성이 올 길을 닦으라 큰 길을 수축하고 수축하라 돌을 제하라 만민을 위하여 기치를 들라”(사 62:10).

지난 3일 설날에 혼자 사무실에 나왔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서 있는데 왼쪽 엘리베이터 안쪽에서 물소리가 폭포수처럼 들리는 겁니다. 엘리베이터 문을 열고 보았는데 물은 엘리베이터 뒤쪽에서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대로 놔두었다가는 지하실이든 엘리베이터 전기든 문제가 크게 일어날 것 같았습니다. 걱정이 되어서 관리실에 전화를 하니까 아무도 받지 않습니다. 한참을 돌아서 결국 집사람에게 연락을 했는데 겨우 한 분을 찾아서 연락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래도 다행히 금방 달려오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저에게 어디가 물이 세냐고 다짜고짜 따지는 겁니다. 마치 제가 물을 터트려 놓은 사람처럼 취급하는 겁니다. 명절날 잘 쉬고 있는데 왜 짜증나게 불러내었느냐는 식입니다. 누구든 명절날 편안히 쉬고 싶을 것입니다.
어쩌면 요즘 시대에 우리 모두가 이와 같은 태도를 예수님께 가지고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잘 살고 있는데 “너희는 죄인이다. 회개하라” 하시면서 못살게 하시는지 모르겠다고 하실 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때는 “27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28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29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30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눅 17:27-30)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현실에 안주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등한히 하거나 귀찮아하시지 아니하시기를 바랍니다.

가끔 등산을 하다가 사람이 실종되어 사망하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산에서 실종되는 경우는 방향을 잃었을 경우 실종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전문 산악인들은 나침반을 가지고 다닙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방향을 잃기 때문에 실종되는 것입니다. 길을 잃었을 때는 큰길로 나가면 됩니다. 대로를 찾으면 길을 잃어버릴 위험이 없습니다. 제가 서울 건대입구로 처음 이사를 했을 때 자동차로 외출을 했다가 길을 잃었습니다. 영등포 쪽에서만 10년을 살다가 건대입구 쪽으로 이사를 갔는데 이쪽은 길을 모릅니다. 그 때는 네비게이션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이사가고 우리 집을 못 찾아가는 겁니다. 한심도 하고 기가 막히기도 했습니다. 집을 못찾겠는 겁니다. 비는 부슬부슬 내리고 뒤에서 차들은 계속 따라오고 정차도 못합니다. 그래서 계속 가다보니까 망우리까지 갔던 적이 있습니다. 비 오는 밤길에 꼭 뭐에 홀린 사람처럼 밤새도록 헤매다가 자정이 넘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지도를 펴놓고 자세히 보았습니다. 우리집 찾아오는 길을 어떻게 찾을 수 있나 보았습니다. 방법이 보였습니다. 한강 다리 중에 영동대교가 있는데 영동대교는 강북이나 강남이나 어느 쪽에서 와도 다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서울에서 길을 잃으면 무조건 한강 쪽으로 갑니다. 그러면 올림픽대로든 강변도로든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한강변의 대로를 찾으면 집을 찾아갑니다. 대로는 길을 잃어버릴 위험이 없습니다.

대로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 중 ‘데레크’(derek)는 사람에게 밟혀서 고르게 된 자연 길을 말하고 ‘메실라’(mesillah)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길을 말합니다(민 20:19)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시 84:5). 이 시온의 대로가 ‘메실라’입니다. 사람이 다녀서 난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닦으신 길입니다. 시온은 하나님이 계신 예루살렘입니다. 하나님께로 달려가는 대로가 있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교회에 나오고 싶은 사람은, 대로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가기 싫은 사람은, 억지로 나오는 사람은 대로가 아닙니다. 시온의 대로를 닦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가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하지만 그 이후에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대비하여 사막에 대로를 만들 것을 명하셨습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사 40:3)
“성문으로 나아가라 나아가라 백성이 올 길을 닦으라 큰 길을 수축하고 수축하라 돌을 제하라 만민을 위하여 기치를 들라”(사 62:10).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올 대로를 만들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언한 것일 뿐 아니라 반드시 돌아오게 된다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외에도 이사야에서 두 번 더 나옵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사 43:19)와 “내가 나의 모든 산을 길로 삼고 나의 대로를 돋우리니”(사 49:11)입니다. 이 길은 예비된 길이고 반드시 길을 내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반드시 돌아올 길을 하나님은 닦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한없는 긍휼과 사랑을 느끼게 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면 본문에서 주는 말씀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의 길을 예비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포로로 있습니다. 아무 능력이 없고 자주권도 없습니다. 비참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현실만 보면 안됩니다. 미래를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열어주시는 대로를 보시기를 바랍니다.
요셉은 형들에 의해서 애굽으로 팔려갔습니다. 바로의 신하 보디발이 그를 샀습니다(창 39:1). 그런데 요셉이 하는 일마다 잘 되는 것입니다.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창 3:3)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 맡겼습니다. 돈 불려주고 재산 불려주는데 안 맡길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투자만 하면 주식이 올라가면 다 맡기는 겁니다. 그런데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합니다. 요셉은 흔들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이 나갈 때 붙잡은 옷을 가지고 요셉이 강간하려 했다고 뒤집어씌웁니다. 요셉은 또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요셉의 일생은 참 한심합니다. 아마 보통 사람 같으면 죽고싶을 것입니다. 생을 포기하고 자살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요셉은 감옥에서도 최선을 다해서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22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23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창 39:22-23)고 했습니다. 요셉은 현실을 비관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있는 자리에서 늘 최선을 다했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다시 만났을 때 원수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5)라고 했습니다. 한가지 또 기억합시다.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입니다. 본문에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입니다. 나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왜 여기에 모였습니까? 왜 교회를 부흥시키려고 합니까?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기 위함입니다.
오병이어의 사건 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한 말은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볼 때 빈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빈들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었고 특히 예수 그리스도가 계셨습니다. 예수가 계신 곳은 빈들이 아닙니다. 세상만 보았습니다. 환경만 보았습니다. 예수를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를 보시면 길이 나옵니다.

평탄케 해야 합니다(돌을 제하라).
본문에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돌을 제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찾아오는 백성들이 걷게 될 길입니다. 마치 왕이 가는 길에 카페트를 깔 듯이 평탄한 길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지친 영혼을 위하여 길을 평탄케 해야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교회는 사명이 큽니다. 세상에서 지치고 싸우고 경쟁하다가 하나님을 찾아,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 교회에 왔는데 교회에서까지 시끄럽고 또 경쟁하고 싸우면 그들은 어디 가서 쉽니까? 우리교회는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한 교회를 만듭시다. 이 세상에서 지친 사람들의 영혼의 쉼터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돌을 제하라”(lq’s:싸칼)은 돌 팔매질을 뜻하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돌을 던지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을 찾아오는 사람에게 돌팔매질을 하는 것은 성령 훼방 죄 하고 같은 것입니다.
병중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암입니다. 암은 안 걸리는 데가 없답니다. 손톱하고 머리카락 빼고는 다 걸린답니다. 어떤 분은 혀에도 걸립니다. 그런데 발병 원인을 종합해 보면
첫째 유전적인 원인이 있는 것 같습니다. 부모가 암으로 돌아가신 분들은 신경을 써야 합니다.
둘째 식생활 습관에 문제가 있습니다. 지나치게 짜게 먹는다든가 담배를 피운 다는가 하는 것입니다. 한자로 癌(종기암)자를 보면 입구 자 아래 뫼산입니다. 산처럼 먹어대니까 암이 걸린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기쁘게 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만사에 불만이 많은 사람, 지나치게 걱정 근심을 많이 하는 사람, 긍정적이지 못한 사람에게 많이 걸린답니다. 다른 사람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은 못을 박는 사람입니다. 암이 걸리게 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죽이는 것입니다. 칼로 찔러서만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왜 그렇게 용서하라고 하셨습니까? 원한을 가지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한자로 相谈(상담)상담할 때의 담자를 보면 말씀언에 불 화자 두 개입니다. 말씀으로 불을 꺼주는 것입니다. 화난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화를 풀어주십니다. 졸을 제하여 주셨습니다.

성문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구약 시대의 대부분의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 살 때 경고와 경종의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그 경고는 귀에는 듣기 싫었겠지만 자기 백성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절절한 애정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백성에게 포로생활을 하게 하시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완전히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메시지는 “하나님께 돌아와야 한다”입니다. 다시 말하면 치유와 회복, 구원의 주최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성문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와 성으로 올 때에 그 길을 닦고 그들을 환영할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성문으로 나아오는 자에게 박수를 보내시는 하나님의 박수소리를 들리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힘을 북돋아 주십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떠난 이스라엘은 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전을 찾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만민을 위하여 기치를 들라
창세기에 보면 사람이 하나님같이 되려고 하다가 죄를 지었습니다. 사실 사람은 하나님처럼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려고 했던 이유에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치유하심과 회복하심의 본을 받으려고 하나님처럼 되려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만 빼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 힘을 가지고 자신을 위해, 천하만민이 다 내 발 앞에 굴복시키려고 그 힘을 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사탄의 생각과 같습니다. 그 결과 사람은 결국 죄를 지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다르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려고, 예수님께 축복을 받으려고 성령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 자신만을 위하여가 아니라 만민을 위하여 기치를 드시기 바랍니다. 만민을 위하여 예수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9:6에서 오실 메시야에 대하여 소개하고 있는데 우리 한글 성경[개역개정]에서는 “…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할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오실 메시야의 이름이 기묘자 모사라는 것입니다. ‘모사’라는 단어는 썩 긍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가 아닙니다. 도대체 이 두 단어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고어체로 기록된 KJV(1995년)는 “Wonderful Advisor” 조언자 또는 ‘위대한 조언자’라고 번역했습니다. NIV(1978년)는 ”Wonderful Counselor” ‘위대한 상담자’라고 번역했습니다.
신약성경 요한복음 14:16절에서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보혜사保惠师’(지킬보 은혜혜 스승사) 한자로 은혜를 지켜주시는 스승이라는 수준 높은 단어를 만나게 되어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심지어는 ‘쉬운성경’도 ‘보혜사를 보내 주실 것이다.’라고 번역했습니다. 결코 쉽지 않습니다.
원문 헬라어 “파라클레-토스”는 동사 “파라칼레오-(parakaleo, 부른다. 초청한다. 위로한다. 격려한다”에서 온 형용사입니다. 명사로는 ‘변호자, 탄원자, 중보자’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공동번역’에서 “다른 협조자”라고 번역했고, ‘현대인의성경’에서 “다른 보호자” ‘새 성경’에서 “다른 보호자”로 번역했습니다. NIV에서는 “another Counselor” ‘다른 상담자’라고 번역했습니다. 종합하면 예수님은 이 땅에 다시 오신 위대한 새로운 상담자 또는 위로자이신 것입니다.
“그들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그들을 학대하는 자들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전 4:1)고 했습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에게는 위로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나아오는 자는 참된 위로를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더 이상 민족을 나누지 아니하십니다. 친 유대적으로 오신 메시야가 아닙니다. 구약과는 다른 상담자 이십니다. 사마리아에서 여인도 만납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유대 지도자들은 그냥 지나쳤지만 그들이 멸시하던 사마리아 사람은 그의 상처를 싸매고 위로했습니다. 아픔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눅 2:25)고 헸습니다. 시므온은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눅 2:30-32)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대로이십니다. 예수님만이 모든 자의 위로자가 되십니다. 만민을 위한 구원자가 되십니다.
본문의 “기치를 들라”(어근 !Wr 룸)는 일어나라는 말입니다. 복음을 위하여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