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과 우상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15) (행 14:8-15)
지난주 본문입니다.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고 했습니다. 이 직분들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어떻게 될까요? ‘사명’입니다.
여러분! 사명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은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고 했습니다.
사명은 생명보다 더 귀중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사명을 어떻게 구분하고 찾아낼 수 있겠습니까?
내가 어떤 일을 위해서 생명을 버릴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이 사명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명만이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다른 측면에서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우상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상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우상도 사명과 비슷합니다. 만일 내게 있던 어떤 것이 내일 없어진다면 살고싶지 않게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우상일 가능성이 아주 많습니다. 다시 설명 드립니다. 내게 있던 어떤 것이 없어진다면 내 삶에 의미가 더 이상 없어지는 것 그것이 우상일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그러면 사명과 우상은 닮은꼴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큰 착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우상을 사명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엄청난 위험이요 착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명과 우상을 바르게 구분하시기를 바랍니다.
십계명 중에 첫 번째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3)입니다.
두 번째가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출 20:4)입니다. 여기 주의 깊게 보면 “너를 위하여”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상이 무엇이냐 간단합니다. “나를 위한 것”입니다. 나를 위한 것이라면 그것이 우상입니다. 그러나 내가 주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가 되면 우상이 아닙니다. 원문에 보면 ‘형상’으로 번역된 ‘hn:WmT](데무-나)’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 단어는 ‘보이지 않는 것, 분배된 것’을 말합니다. 이 단어는 종류를 말하는 ‘@ymi:민’ 이라는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나의 생각이 있는 곳, 있는 것, 마음이 분배되어 있는 어떤 것이 바로 형상이라는 것입니다.
욥은 자기의 재산, 자식들이 우상이 아니었습니다.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지 않습니까? 지금 욥이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면 그것은 우상이었던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 찬양을 드릴 수 있는 믿음과 신앙 그것은 우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남왕국에서 그나마 선한 왕들이 있었는데 성경을 보면 이상한 기록이 나옵니다. 여러분도 구약성경을 읽을 때 한번쯤 보셨을 것입니다.
아사(남왕국 3대왕 B.C. 911-870, 41년 통치)
“16 아사 왕의 어머니 마아가가 아세라의 가증한 목상을 만들었으므로 아사가 그의 태후의 자리를 폐하고 그의 우상을 찍고 빻아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살랐으니 17 산당은 이스라엘 중에서 제하지 아니하였으나 아사의 마음이 일평생 온전하였더라”(대하 15:16-17)고 했습니다. 이후에 선한 왕이라는 왕들이 다 이 문제에 걸렸습니다.
요아스(남유다 8대왕 B,C. 835-796, 40년 통치 나중에 악해짐) 왕이 소게될 때
“2 요아스는 제사장 여호야다가 그를 교훈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되 3 다만 산당들을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였더라”(왕하 12:3)고 했습니다. 여러분!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되 3 다만 산당들을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가 이해가 됩니까? 정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려면 우상을 제거해야 합니다. 우상을 제거하지 않으니까 자기가 죽고 난 다음 후세가 악해집니다.
아마샤(남왕국 9대 왕 B.C. 796-767, 29년 통치)
“3 아마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그의 조상 다윗과는 같지 아니하였으며 그의 아버지 요아스가 행한 대로 다 행하였어도 4 오직 산당들을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왕하 14:3-4) 그는 나중에 에돔 신을 섬기고 북이스라엘에게 예루살렘 빼앗겼습니다. 신앙이 떨어지면 자기만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나라를 빼앗깁니다.
아사랴(남왕국 10대 왕 B.C. 791-740, 52년 통치)
“3 아사랴가 그의 아버지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4 오직 산당은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그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고”(왕하 15:4) 처음에는 정직했으나 후에 교만해 져서 문둥병자가 됩니다.
요담(남왕국 11대왕 B.C. 750-736, 16년 통치)
“34 요담이 그의 아버지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35 오직 산당을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그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요담이 여호와의 성전의 윗문을 건축하니라”(왕하 15:35) 아버지의 섭정이 있었지만 이사야 선지자가 이 시대에 활동하여 그나마 선한 왕입니다. 그러나 그도 산당은 제하지 못했습니다. 여기까지가 선하다고 한 왕들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더 이상 참으실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마음에서 주변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 산당(우상)을 제하시기를 바랍니다. 적당히 선한 왕은 없습니다. 적당히 선한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서게 될 때 적당한 성도는 없습니다. 적당히 거룩한 사람이 있을 수 없음 같이 적당한 상태에서 천국 갈 수 없습니다.
다시 설명 드립니다. 우상은 나를 위한 것이요, 사명은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사람은 우상을 위해서도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8)고 합니다. 이 환자를 바울이 얼어나라고 하여 그가 일어나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성 사람들이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11) 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12)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상 숭배하는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와서 제사를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광경을 보고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14) 습니다. 성경에 유대인이 옷을 찢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참기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억울한 일을 당하면 또는 자기가 죄 없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옷을 찢었습니다. 입다는 자기 외동딸이 전쟁터에서 승리하고 돌아갈 때 제일 마중 나옴을 보고 옷을 찢었습니다.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이 전쟁에서 죽었을 때에 슬퍼하며 옷을 찢었습니다(삼하 1:11). 요시야 왕은 성전에서 율법 책을 발견하고 이것을 서기관 사반이 읽어줄 때 옷을 찢었습니다(왕하 22:11). 아주 잘못된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재판하던 대제사장이 옷을 찢으면서 신성 모독을 했다고 합니다(마 26:65).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을 신이라고 하고 제사를 자기들에게 드리려고 할 때 극도의 아픔을 느꼈습니다. 가슴이 터지고 갈라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감각이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노래를 불러도 춤을 추지 않고, 슬퍼할 줄도 모르는 목석 같은 사람이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주님을 위하여 가슴이 아파야 합니다. 저려와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사람들은 가슴을 치며 울며 예수님 십자가를 따라갔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고 하셨습니다.
바울이 본문 15절에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 바울에게 바로 얼마 못 가서 19절에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본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식으로, 별것 아니라는 식으로 바로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20절)라고 나옵니다. 유대인들이 죽은 줄로 일 정도면 얼마나 맞았겠습니까? 오죽하면 죽었는지 알고 밖에 같다 버렸겠습니까?
여러분! 보통 사람 같으면 아마 이런 경우에 좌절에 빠져 아예 포기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툭툭 털고 일어서서 다른 지역 더베로 향합니다. 왜 또 갑니까? 다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팔복 마지막에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우리가 왜 살고 있습니까?
나이가 젊어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해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사명이 있기 때문에 사는 것입니다. 이 사명 감당하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연장시켜 주신 것입니다. 사명자는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를 고친 후에 그 동네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착각하고 경배하려 했을 때 모른 체 하고 그대로 두었더라면 아마 사도 바울과 바나바는 큰 대접을 받고, 위대한 스타나 영웅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것을 절대로 방치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동네 사람들 앞에서 옷을 찢으면서 간신히 말렸습니다.
예전에 어떤 사람이 자기가 대통령 아들이라고 속이고 다니다 걸렸습니다. 처음에는 거짓 말 시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대통령 아들하고 너무 닮았습니다. 사람들이 대통령아들인가보다 하고 접근해 왔습니다. 그리고 한두 번 해 보니까 재미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모른 척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나중에 사기죄로 잡혔습니다.
18절 말씀입니다.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통해서 사람이 지나친 영광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죄입니다. 또한 사람을 신격화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도전 행위입니다.
본문 아래에 보면 “21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핍박과 여러 어려움 들을 다 알면서도 계속합니다.
23절에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라고 합니다. 바울이 혼자면 얼마나 외롭겠습니까? 물론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다고 모세에게 아론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닙니다. 아론이 있어야 합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내는 사람이 아니라 쓴 것은 내가 삼키고 단 것은 주님께 드리는 사람, 바로 이 사람이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는 사명이 있기에 하나님이 생명을 연장시켜 주셨습니다.
각자의 사명을 잘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격려하고 세워주는 일에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함께, 주님 앞에서는 날에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 받기를 바랍니다. 아멘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