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과 우상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15) (행 14:8-15)

지난주 본문입니다.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고 했습니다. 이 직분들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어떻게 될까요? ‘사명’입니다.

여러분! 사명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은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고 했습니다.
사명은 생명보다 더 귀중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사명을 어떻게 구분하고 찾아낼 수 있겠습니까?
내가 어떤 일을 위해서 생명을 버릴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이 사명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명만이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다른 측면에서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우상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상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우상도 사명과 비슷합니다. 만일 내게 있던 어떤 것이 내일 없어진다면 살고싶지 않게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우상일 가능성이 아주 많습니다. 다시 설명 드립니다. 내게 있던 어떤 것이 없어진다면 내 삶에 의미가 더 이상 없어지는 것 그것이 우상일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그러면 사명과 우상은 닮은꼴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큰 착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우상을 사명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엄청난 위험이요 착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명과 우상을 바르게 구분하시기를 바랍니다.

십계명 중에 첫 번째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3)입니다.
두 번째가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출 20:4)입니다. 여기 주의 깊게 보면 “너를 위하여”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상이 무엇이냐 간단합니다. “나를 위한 것”입니다. 나를 위한 것이라면 그것이 우상입니다. 그러나 내가 주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가 되면 우상이 아닙니다. 원문에 보면 ‘형상’으로 번역된 ‘hn:WmT](데무-나)’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 단어는 ‘보이지 않는 것, 분배된 것’을 말합니다. 이 단어는 종류를 말하는 ‘@ymi:민’ 이라는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나의 생각이 있는 곳, 있는 것, 마음이 분배되어 있는 어떤 것이 바로 형상이라는 것입니다.
욥은 자기의 재산, 자식들이 우상이 아니었습니다.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지 않습니까? 지금 욥이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면 그것은 우상이었던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 찬양을 드릴 수 있는 믿음과 신앙 그것은 우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남왕국에서 그나마 선한 왕들이 있었는데 성경을 보면 이상한 기록이 나옵니다. 여러분도 구약성경을 읽을 때 한번쯤 보셨을 것입니다.

아사(남왕국 3대왕 B.C. 911-870, 41년 통치)
“16 아사 왕의 어머니 마아가가 아세라의 가증한 목상을 만들었으므로 아사가 그의 태후의 자리를 폐하고 그의 우상을 찍고 빻아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살랐으니 17 산당은 이스라엘 중에서 제하지 아니하였으나 아사의 마음이 일평생 온전하였더라”(대하 15:16-17)고 했습니다. 이후에 선한 왕이라는 왕들이 다 이 문제에 걸렸습니다.

요아스(남유다 8대왕 B,C. 835-796, 40년 통치 나중에 악해짐) 왕이 소게될 때
“2 요아스는 제사장 여호야다가 그를 교훈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되 3 다만 산당들을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였더라”(왕하 12:3)고 했습니다. 여러분!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되 3 다만 산당들을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가 이해가 됩니까? 정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려면 우상을 제거해야 합니다. 우상을 제거하지 않으니까 자기가 죽고 난 다음 후세가 악해집니다.

아마샤(남왕국 9대 왕 B.C. 796-767, 29년 통치)
“3 아마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그의 조상 다윗과는 같지 아니하였으며 그의 아버지 요아스가 행한 대로 다 행하였어도 4 오직 산당들을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왕하 14:3-4) 그는 나중에 에돔 신을 섬기고 북이스라엘에게 예루살렘 빼앗겼습니다. 신앙이 떨어지면 자기만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나라를 빼앗깁니다.

아사랴(남왕국 10대 왕 B.C. 791-740, 52년 통치)
“3 아사랴가 그의 아버지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4 오직 산당은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그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고”(왕하 15:4) 처음에는 정직했으나 후에 교만해 져서 문둥병자가 됩니다.

요담(남왕국 11대왕 B.C. 750-736, 16년 통치)
“34 요담이 그의 아버지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35 오직 산당을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그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요담이 여호와의 성전의 윗문을 건축하니라”(왕하 15:35) 아버지의 섭정이 있었지만 이사야 선지자가 이 시대에 활동하여 그나마 선한 왕입니다. 그러나 그도 산당은 제하지 못했습니다. 여기까지가 선하다고 한 왕들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더 이상 참으실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마음에서 주변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 산당(우상)을 제하시기를 바랍니다. 적당히 선한 왕은 없습니다. 적당히 선한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서게 될 때 적당한 성도는 없습니다. 적당히 거룩한 사람이 있을 수 없음 같이 적당한 상태에서 천국 갈 수 없습니다.
다시 설명 드립니다. 우상은 나를 위한 것이요, 사명은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사람은 우상을 위해서도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8)고 합니다. 이 환자를 바울이 얼어나라고 하여 그가 일어나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성 사람들이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11) 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12)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상 숭배하는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와서 제사를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광경을 보고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14) 습니다. 성경에 유대인이 옷을 찢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참기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억울한 일을 당하면 또는 자기가 죄 없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옷을 찢었습니다. 입다는 자기 외동딸이 전쟁터에서 승리하고 돌아갈 때 제일 마중 나옴을 보고 옷을 찢었습니다.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이 전쟁에서 죽었을 때에 슬퍼하며 옷을 찢었습니다(삼하 1:11). 요시야 왕은 성전에서 율법 책을 발견하고 이것을 서기관 사반이 읽어줄 때 옷을 찢었습니다(왕하 22:11). 아주 잘못된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재판하던 대제사장이 옷을 찢으면서 신성 모독을 했다고 합니다(마 26:65).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을 신이라고 하고 제사를 자기들에게 드리려고 할 때 극도의 아픔을 느꼈습니다. 가슴이 터지고 갈라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감각이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노래를 불러도 춤을 추지 않고, 슬퍼할 줄도 모르는 목석 같은 사람이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주님을 위하여 가슴이 아파야 합니다. 저려와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사람들은 가슴을 치며 울며 예수님 십자가를 따라갔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고 하셨습니다.

바울이 본문 15절에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 바울에게 바로 얼마 못 가서 19절에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본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식으로, 별것 아니라는 식으로 바로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20절)라고 나옵니다. 유대인들이 죽은 줄로 일 정도면 얼마나 맞았겠습니까? 오죽하면 죽었는지 알고 밖에 같다 버렸겠습니까?

여러분! 보통 사람 같으면 아마 이런 경우에 좌절에 빠져 아예 포기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툭툭 털고 일어서서 다른 지역 더베로 향합니다. 왜 또 갑니까? 다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팔복 마지막에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우리가 왜 살고 있습니까?
나이가 젊어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해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사명이 있기 때문에 사는 것입니다. 이 사명 감당하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연장시켜 주신 것입니다. 사명자는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를 고친 후에 그 동네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착각하고 경배하려 했을 때 모른 체 하고 그대로 두었더라면 아마 사도 바울과 바나바는 큰 대접을 받고, 위대한 스타나 영웅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것을 절대로 방치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동네 사람들 앞에서 옷을 찢으면서 간신히 말렸습니다.

예전에 어떤 사람이 자기가 대통령 아들이라고 속이고 다니다 걸렸습니다. 처음에는 거짓 말 시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대통령 아들하고 너무 닮았습니다. 사람들이 대통령아들인가보다 하고 접근해 왔습니다. 그리고 한두 번 해 보니까 재미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모른 척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나중에 사기죄로 잡혔습니다.

18절 말씀입니다.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통해서 사람이 지나친 영광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죄입니다. 또한 사람을 신격화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도전 행위입니다.

본문 아래에 보면 “21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핍박과 여러 어려움 들을 다 알면서도 계속합니다.
23절에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라고 합니다. 바울이 혼자면 얼마나 외롭겠습니까? 물론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다고 모세에게 아론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닙니다. 아론이 있어야 합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내는 사람이 아니라 쓴 것은 내가 삼키고 단 것은 주님께 드리는 사람, 바로 이 사람이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는 사명이 있기에 하나님이 생명을 연장시켜 주셨습니다.
각자의 사명을 잘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격려하고 세워주는 일에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함께, 주님 앞에서는 날에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 받기를 바랍니다. 아멘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이 복음을 위하여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딤후 1:11)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던 사람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려고 스데반의 순교 이후에 피신해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려고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다메섹은 예루살렘에서 240km 떨어진 당시 상업적 요충지로 예루살렘과 안디옥 오늘날의 터키 내륙으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 가야할 도시입니다. 바울은 이곳에 복음이 들어가면 걷잡을 수 없이 기독교가 퍼져나간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메섹으로 가다가 주님의 음성을 들었고 너무 밝은 빛이 나타나 그가 눈을 뜨지 못했습니다.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행 9:9)고 전합니다. 그 때 하나님은 다메섹에 있던 아나니아에게 가서 사울의 눈을 회복시키라고 하실 때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20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 2:20-21)고 했습니다. 그릇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금 그릇이냐 질그릇이냐 하는 것보다 쓰임을 받느냐 못 받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특히 누구에게 쓰임을 받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쓰실 수 있다면 금 그릇이냐 질그릇이냐는 문제가 안 됩니다.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이라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길은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금 그릇이라 할지라도 더러우면 그 그릇을 쓰시겠습니까? 질그릇이라 할지라도 깨끗하면 쓰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깨끗하게(ejtevqhn:에카다론)’은 ‘철저하게 깨끗하게 하다’는 뜻입니다. 적당히 깨끗한 것은 안 됩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해서는 철저히 깨끗하게 청소해야 합니다. 이 단어는 두 가지 어근에서 나왔습니다. 하나는 에크로 ‘…로부터, …말미암아’의 뜻입니다. 그리고 카다이로 ‘속죄하다, 정결하게 하다’ 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 카다이로는 카다로스 ‘정결한, 순결한’에서 나왔습니다. 자 이제 정리합니다. 깨끗하게 한다는 것은 우리가 도 닦아서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행으로 깨끗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카다이로’ 깨끗하게 해야 하는데 그 방법 또한 ‘카다로스’ 정결한, 순결한 것으로 해야 합니다. 바로 십자가상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필요합니다. 그 피로만 우리가 철저하게 깨끗하게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택한 그릇인데 오늘 본문에 세 가지로 택한 직분을 말합니다.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고 합니다. 그 이전에 ‘세우심’으로 번역된 티데민이 나옵니다. o} 티데민-세우심, 에고-나는 ‘나는 이것을 위하여 세움을 받았다’입니다. 세우심(티데민)은 ‘충고하다, 배치 또는 나열하다’란 뜻입니다. 마치상품 진열하듯이 복음을 아름답게 진열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귀한 것일수록 이쁘게 포장하지요? 잘 나열하지요? 마치 이와 같이 복음은 잘 보여주어야 합니다. 대충 싸구려처럼 취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성껏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진열해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십계명 중에 3번째 계명이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 20:7)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함부로 복음을 말하지 마세요.

그런데 이 단어에는 중요한 한 가지 뜻이 더 있습니다. ‘내려앉다, 죽다’는 뜻이 있습니다. 세우심을 입은 사람은 복음을 위하여 죽을 각오로, 우리의 모습은 낮추어 사라지게 하고, 우리의 모습은 죽이고, 이것이 세우심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롬 1:1)라고 했습니다. ‘종’은 둘로스입니다. 노예라는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 죽고자 했습니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고전 15:9)고 했습니다.

세우심(티데민) 그가 그렇게 잘 나열하고자 했던 것, 그것을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었던 그 거룩한 직분을 세 가지로 우리에게 말합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2011년 3월 14일 버지니아주 알링턴의 캔모어 중학교를 방문한 자리에서 한국의 교사와 교육열을 언급하면서 “한국에선 교사가 국가건설자(nation builder)로 알려졌다”고 말했습니다. 이날 오바마 대통령은 교육에서 교사의 절대적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미국도 한국과 같은 수준으로 교사를 존경하면서 대우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교사는 하나님의 나라 건설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건설자를 존경하는 나라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을 것입니다.

 

마음이 지혜로운 자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무릇 너희 중 마음이 지혜로운 자는 와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것을 다 만들지니”(출 35:10)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시 78:72)

KBS 주말저녁 드라마 근초고왕이 드디어 백제에 들어가 어라하가 되고 모두가 기다리던 내각 개편 조서가 남당에서 발표됩니다. 일등공신에 자기가 되지 않을까 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근초고왕의 시대에 이르러 2개의 좌평제도가 6두 제도로 바뀌게 되며 이는 2개의 좌평에 실어지는 세력에 대한 힘의 균형을 6개로 분산하여 그만큼 왕권강화에 중점을 둔 사항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진승, 두고, 위비랑, 복후검, 파윤, 아즈카이, 해건이 임명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딱 두 명만 무릎을 꿇고 감사하여 어쩔 줄 모릅니다. 자기가 생각할 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직분을 받게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당연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고마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부르심과 구원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은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었다면 아무 육체도 구원을 얻을 육체가 없습니다.

이스라엘민족이 출애굽한 목적이 무엇입니까? 편안한 삶을 살기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함입니다(출 5:1, 5:3, 8). 여러분! 잘살기 위해서만 기도하면 안됩니다. 예배하기 위하여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한 예배 관을 바르게 확립해야 합니다.
“11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4:11-13)
불법이 성한 시대입니다. 사탄이 판을 치는 시대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 7:15) 온갖 더러운 것,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도록 방해하는 죄들이 모두 사탄의 거짓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마 15:19) 사탄이 다 심어놨습니다. 언제 우리의 마음속에 뿌려졌는지 악한 것이 가득합니다.

우리는 내 자신과 우리 자녀들의 영혼을 사탄의 거짓으로부터 지켜야 합니다. 결국 마지막 싸움은 참과 거짓이며 하나님의 자녀들과 사탄이 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참으라고 합니다 사탄은 싸움을 붙입니다. 예수님은 좁은 길로 가라고 합니다. 사탄은 넓은 길을 놔두고 왜 좁은 길로 가냐고 합니다. 사탄은 세상의 축복을 가지고 유혹합니다. 창녀같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마 24:24) 하나님이 택한 사람에게까지 손을 데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가벼이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구원을 싸구려로 취급하여서는 안됩니다. 교회를 우습게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욥에게 고난이 닥쳐오자 욥의 아내가 한탄합니다. 이 한탄에 욥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욥 2:10)고 합니다. 머리 숙여지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모습을 볼 때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지금까지 복만 받고 살았는데 이제 와서 화를 좀 받는다고 해서 하나님을 그렇게 원망하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욥의 신앙은 복만 받겠다는 전제가 없다면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는 식의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전은 이런 마음입니다. 이런 성전입니다.

출애굽 때 광야에 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한 처소를 만듭니다. 장막을 만드는데 참여하게 될 사람들을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첫째, “무릇 너희 중 마음이 지혜로운 자(마음)는 와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것을 다 만들지니”(출 35:10)라고 합니다. 지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떠난 지혜는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지혜가 중요합니다.

둘째, “마음이 감동된 모든 자와 자원하는 모든 자가 와서 회막을 짓기 위하여…”(출 35:21)
“마음에 감동을 받아 슬기로운 모든 여인은 염소 털로 실을 뽑았으며…”(출 35:26)라고 했습니다. 감동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감동으로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다는 것은 가슴일 떨리고 흥분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집의 문지기를 해도 화장실 청소를 해도 감동스러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눅 12:34) 고 하셨습니다. 마음은 인격과 행위의 중심이며 ‘보물’은 궁극적 관심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보물’을 ‘성전’으로 바꾸면 간단해 집니다. 그러면 우리의 궁극적 관심은 성전이 되는 것이며 우리 마음은 오직 성전에 있는 것입니다.

셋째, “마음에 자원하는 남녀는 누구나 여호와께서 모세의 손을 빌어 명령하신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하여 물품을 드렸으니”(출 35:29)입니다. 자원하는 마음입니다. 마음만 있으면 누구나 하나님의 성전 짓는데 참여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남녀 누구나입니다. 중동지방에서 여자를 무시하던 고대 풍습을 생각하면 대단한 일입니다. 마음이 있는 자는 다 하나님의 성전을 지을 수 있습니다. 성전을 지으시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여자 분들 이 성경구절은 외워 두세요.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사람이 사람을 무시하는 사회가 바로 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힘없는 사람을 억압하고 지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나라도 인도 카스트 못지 않은 신분계급이 있었습니다.
조선은 양반이 지배하는 사회였습니다. 양반들은 상놈을 억눌렀고 상놈은 그 지배 아래서 고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백정은 상놈의 대명사였습니다. 백정은 기와집에서 살 수 없었고 비단옷이나 갖신도 신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양반이 지나갈 때에는 길을 비켜서야 했으며 항상 허리를 구부리고 뛰어가듯 껑충거리며 다녀야 했습니다. 만일 허리를 숙이지 않으면 중형에 처해졌습니다.
평양 신학교를 세운 마펫 선교사가 상놈 출신을 받아들여 교육을 시켰는데 그 중에 백정 박씨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박씨는 불행히도 장티푸스에 걸려서 죽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알고 마펫 선교사는 왕의 시의였던 애비슨을 데리고 와서 치료해주었습니다. 백정으로서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박씨의 온 가족이 개종을 하였습니다.
박씨는 1895년에 세례를 받게 되었는데 그가 백정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사람들은 백정과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없다고 하면서 반 이상이 교회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펫 선교사는 “예수의 사랑 앞에는 사람의 차별이 없다”고 양반들을 설득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양반들은 “그러면 교회에서 양반과 백정의 자리를 구분하여 양반들에게 앞자리를 달라”고 타협안을 제시하였습니다. 마펫 선교사는 이런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1895년 4월 마펫은 한학자 최씨로 하여금 박씨를 도와서 정부에 백정에 대한 차별대우를 철폐할 것을 탄원하는 청원서를 제출하였습니다. 정부는 그들의 청원을 받아들여 평민들과 같이 초립과 망건을 착용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 다음해 3월에는 인구조사에 백정이 빠져 있자 이것을 시정하여 백정도 일반인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게 해달라고 청원하여 허락을 받아냈습니다.
백정 박씨의 개종은 그의 삶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아들 박동열은 1907년에 최초로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한 학생이 되었습니다. 박씨 자신도 은행업을 시작하여 사업가와 장로가 되었습니다. 박씨는 백정조합 회장으로 선출되어 백정들에게 해방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런일을 한 마펫 선교사는 현재 총신대와 장신대의 뿌리인 평양신학교를 세운 초대 교장입니다.

마음이 지혜로운 자는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들을 귀가 열립니다.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누가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 13:24)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봉사해야 되는지, 좁은 길이 무엇인지 다윗은 본문을 통해서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본문 한 절에 교육의 원리가 다 들어 있습니다.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시 78:72)

원문에는 사실 6개의 단어만 마옵니다.
첫 번째가 ‘기르고’로 번역된 ‘라아’ 입니다. 이 뜻은 더 크게 보면 ‘방목하다’입니다. 기르고(교육) 주어입니다. 기르는데 방목합니다. 양을 돌보는 데는 방목이 필요합니다. 자유롭게 두는 것입니다. 억압은 안됩니다.
어머니는 딸이 세상의 유혹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규율이 가장 엄한 어느 대학에 진학시킵니다. 착한 딸은 어머니에게 효도하는 심정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가 됩니다. 어머니는 주말이면 200마일이 넘는 거리를 자동차를 몰고 달려가 딸을 집에 데려옵니다. 어머니는 22살인 딸이 아직도 미덥지가 않습니다.
“알코올이나 마약에 빠지진 않을까. 나쁜 친구를 사귀지는 않을까. 교회에는 잘 출석하고 있을까.” 어머니의 사랑의 근심은 하루도 그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딸의 심정은 어떨까요. 딸은 어머니의 간섭과 구속에 거의 정신이 돌 지경이었습니다. 그녀는 결국 어머니를 떠나 알라스카로 도망쳐 완전히 독립합니다. 어머니는 사랑을 주었는데 딸은 왜 그것을 못 견뎌하는 것일까요. 사랑은 간섭과 감독이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은 끊임없이 희망과 소망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제일인 것이 맡지만 믿음과 소망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단어가 ‘완전함’으로 번역된 ‘톰’입니다. 이 단어는 ‘온전함, 번영, 순수함’입니다. 교육을 어떻게 합니까? 순수하게 자유롭게 가르칩니다.

세 번째 ‘레바브’ 용기, 마음, 명철입니다. 본문은 ‘마음’으로 번역된 곳입니다. ‘마음’이 중요합니다.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가르치려는 마음, 하나님을 알게 하려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네 번째 ‘능숙함’으로 번역된 ‘타분’ 명철, 이해입니다. 도량이 넓은 그런 뜻입니다. 마음을 크게 가지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카프’ 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도하도다’로 번역된 ‘나하’ 인도하다 입니다. 카프, 나하 손으로 인도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솔선수범 하는 교육이 필요하고 이런 사람이 명철한 지도자, 인도자라는 것입니다.

넓은 마음을 가진 자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이 지혜가 어디서 나옵니까?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처럼 살면 됩니다.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요 2:25) 우리는 얼마나 사람의 증언을 받고 싶어합니까?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중요시합니다. 그래서 늘 다른 사람 때문에 산다고 할 만큼 사람을 의식합니다. 사람에게 보이고 싶어서,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그래서 일하고, 그래서 치장하고, 그래서 공부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것이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대중의 박수가 없어도 십자가를 지셨고, 십자가 위에서 사람의 증언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박수 소리가 없어도 사람들의 병을 고쳤고, 욕을 먹으면서도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아무에게도 증언을 받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이 하나님이시오, 또한 성부 하나님이 다 아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의 신앙도 좀 자라납시다. 진실한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그 이름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헤롯 궁전과 사탄의 제의를 거절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정의는 백부장이나 타는 그런 전차가 아니라 당나귀를 타는 것이었습니다. 왕궁에서 탄생하신 것이 아니라 이름 없는 집의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분처럼 살기를 원해서입니다. 예수님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이 지혜로운 자는 와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것을 다 만들지니” 마음이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삽니다. 그 사람이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설교 : 이영제 목사
 

성전을 건축할 마음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다윗이 솔로몬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었으나” (대상 22:7)

예전에 시골에서는 “이놈 이 다음에 크면 면서기는 하겠는데…” 그렇게 칭찬하는 소리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만큼 옛날에 공무원이 되어서 면서기 자리에 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안정된 직업 중에서 공무원 만한 직업이 없습니다. 공무원 시험이 지금도 만만치 않습니다. 또한 ‘알아야 면장을 하지’ 그런 말도 있습니다. 면서기하기도 힘든데 면장은 아주 높은 자리입니다. 그런데 “면장도 저 하기 싫으면 그만이지” 하는 말도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암행어사가 있었습니다. 어사(검사)인데 특별한 것은 암행(몰래)하여 일을 수행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비밀검사입니다. 이것도 저하기 싫으면 그만입니다. 무은 일을 하든 마음이 문제입니다.

다윗이 성전을 건축하고 싶은 마음을 나단 선지자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삼하 7:2). 다윗의 마음에 자기보다 하나님이 더 형편없는 집에 거하고 계신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부모님 집은 엉망인데 내 집만 화려하다면 어떻습니까? 여러분! 조금 못한 집에 살면 어떻습니까? 편안한 집이 어르신들이 더 필요한 것 아닙니까?
이런 다윗의 마음을 하나님은 가상히 여기시고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다윗에게 성전 건축을 명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보내서 다윗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8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 9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땅에서 위대한 자들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삼하 7:8-9)고 하셨습니다. 다윗이 어떻게 왕이 되었는지 말해주는 구절입니다. 하나님은 양치던 목동을 데려다가 이스라엘의 왕으로 만들고 그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다윗이 돌을 잘 던져서 왕이 된 것이 아닙니다. 싸움을 잘 해서 왕이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별것 아닙니다. 하나님이 왕으로 세워 주신 것입니다. 어디 모든 일이 다 내 마음대로 됩니까? 여러분 마음대로 되면 큰일납니다. 아무 금방 교만해 질 걸이요. 우리는 기도할 때에 내 마음대로 안된 것을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다윗에게 마음은 있었으나 성전을 건축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은 하나님이 받으시고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축복에 대해서 “그런즉 주 여호와여 이러므로 주는 위대하시니 이는 우리 귀로 들은 대로는 주와 같은 이가 없고 주 외에는 신이 없음이니이다”(삼하 7:22)라고 고백합니다.

지난 화요일 우리 집사람이 집을 나가서 혼자 잤습니다. 그런데 제가 혼자 자다보니까 잠이 안 오는 겁니다. 같이 있을 때도 멀리서 잡니다. 잠이 안 와서 2시 반쯤 사무실에 나왔습니다. 사실 집사람이 없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제가 컴퓨터에서 한참 보던 것이 있었는데 그것을 다시 보고 싶어졌습니다. 누워서 이리생각 저리생각 한참을 생각하다가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 확인한 겁니다. 제가 쳐다본 것은 선교사님들에게 어떻게 서비스할 것이 없을까? 무엇을 컴퓨터로 도와야 선교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이런 고민입니다. 1986년부터 이 고민을 하고 컴퓨터선교회를 시작한 것입니다.
사실 잘만하면 선교사님들을 기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판단되었습니다. 그리고 만들어진 그 프로그램들을 보니까 두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저작권이 한 카피만 준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선교사님들에게 하나씩 나누어줄 생각을 하는데 한 컴퓨터에 하나씩만 저작권을 허락하고 판다는 겁니다. 또 하나는 그대로 사용하기에는 불편한 점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해결해야만 선교사님을 위해 서비스 할 수 있는 것을 밤 2시에 나와 확인한 겁니다. 좋은 구상인데 잘 안 되어서 제가 실망했겠습니까? 아닙니다. 이런 것으로 실망했으면 벌써 그만두었을 것입니다. 다시 도전할 것이 생긴 겁니다. 나 혼자는 못합니다. 내가 못합니다. 그렇다고 안 합니까? 기도제목이 하나 더 생긴 것입니다. 성전을 짓고 싶은 마음에 가슴이 뛰어야 합니다.
함께 찾아봅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의 종의 귀를 여시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우리라 하셨으므로 주의 종이 이 기도로 주께 간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삼하 7:27) 다윗은 기도할 마음이 생겼습니다. “이 기도”가 무엇입니까? 성전 건축할 마음입니다.

스티븐 폴 잡스(Steven Paul Jobs, 1955년)를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좀더 자세히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잡스는 그래픽환경의 OS와 마우스를 처음으로 고안하여 만든 사람입니다. 그리고 아이패드를 만들어 잊혀져 갈 뻔한 애플사를 다시 일으켜 세웠습니다. 여러분은 잡스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시지요? 스티브 잡스의 부모는 대학교(원)에서 만난 사람입니다. 대학교 기숙사에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학생이 아이를 낳았으니 기를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태어난 지 1주일만에 어머니에 의해 캘리포니아 주 산타 클라라에 사는 폴과 클라라 잡스 부부에게 입양되었습니다. 잡스를 입양한 부부는 그에게 ‘스티븐 폴 잡스’라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잡스는 ‘양부모’라는 단어를 싫어했다고 합니다. 폴과 클라라 잡스 부부를 유일한 부모로 여겼다고 합니다.
잡스는 초등학교 시절 학교를 자주 빼 먹는 비행 청소년 이였다고 합니다. 이건 저하고 비슷합니다. 나중에 대학도 1학기만 수강한 후 중퇴하였습니다. 나중에 밝힌 것이지만 부모님께 학비의 부담을 드리지 않기 위해서 그만두었다고 합니다.
그의 일화 가운데 애플 초기, 펩시콜라의 사장인 존 스컬리를 영입하려 했으나, 대기업의 사장자리를 버리고 신생기업으로 가기를 망설이던 스컬리에게 “남은 일생 동안 설탕물이나 팔면서 살 겁니까? 아니면 나와 함께 세상을 바꾸실 겁니까?”(Do you want to sell sugar water for the rest of your life, or do you want to come with me and change the world?)라고 하자 존 스컬리는 망설임 없이 애플로 이적했다고 합니다.
잡스에게도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는 끈질김을 보여 주였습니다. 늘 생각하는 겁니다. 어떻게 만들까? 어떻게 만들어야 사람들이 좋아할까? 늘 생각하는 겁니다.

잡스가 한 2005년 6월 스탠포드 대학 졸업식 축사 내용의 일부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시간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낭비하지 마세요. 도그마(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얽매이지 말기를, 타인의 잡스러운 소리들 여러분들 내면의 진정한 목소리를 방해하지 못하게 하세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과 영감을 따르는 용기입니다. 이미 마음과 영감은 당신이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나머지 것들은 뒤 따라 오는 것뿐입니다.
Your time is limited, so don’t waste it living someone else’s life. Don’t be trapped by dogma – which is living with the results of other people’s thinking. Don’t let the noise of other’s opinions drown out your own inner voice. And most important, have the courage to follow your heart and intuition. They somehow already know what you truly want to become. Everything else is secondary.

사람이 왜 살아 있는 겁니까? 왜 뜨거운 겁니까? 흙으로 만드셨는데, 티끌과 같은 사람인데, 들의 풀 같은 존재이지만 하나님이 거기에 호흡을 하도록 생령을 불어 넣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영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게 되면, 하나님을 찾았으면 집을 짓고 싶어집니다. 내가 살집이 아닙니다. 우리는 너무 내 집을 짓기 위해서 기도하지 않나요? 하나님의 집을 지으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주를 위하여 거하실 성전을 건축하였사오니 주께서 영원히 계실 처소로소이다”(대하 6:2)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완성하고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지어야할 성전은 주께서 “영원히 계실 처소”를 짓는 겁니다. 시티븐 잡스가 코카콜라 사장이었던 스컬리에게 “남은 일생 동안 설탕물이나 팔면서 살 겁니까? 아니면 나와 함께 세상을 바꾸실 겁니까?”한 말을 다시 고쳐봅시다. “컴퓨터나 만들고, 팔다가 죽을 겁니까? 아니면 주와 함께 영원히 남을 성전을 지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을 지으시기를 바랍니다.

다윗에게는 장점이 있습니다. 성전 건축을 못하게 되니까 뭐합니까? 준비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입니다. 건축은 못했지만 사실 다윗이 거의 다 해 놓았습니다.
설계도면을 그려놓고 자재 준비해 놓고, 심지어는 레바논에서 들여올 백향목까지 다 길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외교적으로 다 좋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전 건축을 다윗이 완성하지 못하고 성전을 하나님이 짓도록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윗의 성전건축을 마치 실패처럼 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성전 건축은 다윗이 시작한 겁니다. 솔로몬은 다윗의 유지를 받들어 완성한 것뿐입니다. 비록 완성은 못했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을 이미 지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지금 계획하세요.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았을 때에 다 완성하려고 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다 못해도 됩니다. 이미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은 제일 아름다운 것입니다. 일에 대한 두려움, 부담감을 가지지 마세요. 열심히 하는 겁니다. 그리고 다음세대에 물려주는 겁니다.

마음으로 드리면 이미 다 드린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천천의 수양을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과부의 두랩돈이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이 드린 헌금보다 많을 수가 있겠습니까? 마음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비록 과부이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은 제일이라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다윗을 용맹스럽고 잘 생긴 소년이나 왕으로 그립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다윗의 용모와 키는 보 잘 것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다윗의 외모를 보고 어떻게 이런 사람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겠나 생각하여 기름 붓기를 주저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하셨습니다.

자!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실제로 성전을 건축한 것이 중요합니까?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마음이 중요합니까? 마음입니다. 마음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이사야는 기도하기를 “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사 26:9)라고 했습니다. 마음에서 지어지지 않는 성전은 의미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마음 중심에 성전을 지으시기를 바랍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민족이 출애굽한 목적이 단순히 애굽의 노역이 고통스럽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 이유를 모세에게 설명합니다. “광야에서 내 앞에서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출 5:1)라고 했습니다.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예배하기 위해서 떠나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바로에게가서 처음 한 말이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가도록 허락하소서”(출 5:3, 8)라고 합니다. 출애굽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편안한 삶을 살기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잘살기 위해서만 기도하면 안됩니다. 예배하기 위하여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잘살게 해 달라고만 기도하다가 잘 살게 되니까 주를 떠납니다. 주님을 다 이용한 겁니다. 우리의 목적은 잘 사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함입니다.

출애굽때 광야에 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한 처소를 만듭니다. 장막을 조금 크게 만드는 것입니다. 장막을 만드는데 참여하게 될 사람들을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첫째, “무릇 너희 중 마음이 지혜로운 자(마음)는 와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것을 다 만들지니”(출 35:10)라고 합니다. 지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떠난 지혜는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지혜가 중요합니다.
둘째, “마음이 감동된 모든 자와 자원하는 모든 자가 와서 회막을 짓기 위하여…”(출 35:21)
“마음에 감동을 받아 슬기로운 모든 여인은 염소 털로 실을 뽑았으며…”(출 35:26)라고 했습니다. 감동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감동으로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다는 것은 가슴일 떨리고 흥분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집의 문지기를 해도 화장실 청소를 해도 감동스러운 것입니다.
셋째, “마음에 자원하는 남녀는 누구나 여호와께서 모세의 손을 빌어 명령하신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하여 물품을 드렸으니”(출 35:29)입니다. 자원하는 마음입니다. 마음만 있으면 누구나 하나님의 성전 짓는데 참여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남녀 누구나입니다. 중동지방에서 여자를 무시하던 고대 풍습을 생각하면 대단한 일입니다. 마음이 있는 자는 다 하나님의 성전을 지을 수 있습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