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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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요일 1:2)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부활이 무엇입니까? 생명이 살아난 것입니다. 사탄은 사망이요 하나님은 부활입니다. 사탄은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하나님은 생명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 약 1:18)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고전 15:23)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 속하여 새 생명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꿈은 내일의 문제요, 현실은 오늘의 문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날 일을 절대 미루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음을 내일의 믿음으로만, 꿈으로만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 지요? 그래서 어떤 분은 죽을 때 다 되어서 믿으면 되지? 라고 말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를 않습니다. 천국은 미래에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지옥 같은 인생을 사시는 분이 있고 천국 같은 인생을 사시는 분이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가시기를 원합니까? 나를 죽이며 사는 인생이 아니라 나를 살리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저주하며 사는 인생은 죽이며 살아가는 인생이요, 축복하며 사는 인생은 살리며 사는 인생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를 축복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함입니다. 제자들을 처음 파송 하시면서 당부한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를 영접하는 집에 들어가거든 그 집을 위해 축복해 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러 가는 것은 축복하기 위함입니다.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시 56:1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요 6:33)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요 6:51)
“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으라 명철의 길을 행하라 하느니라”(잠 9:6)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명은 그에게 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출 20:13, 신 5:17) 십계명 중에 6계명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 계명을 지키고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살인에는 타살과 자살이 있습니다. 모두가 살인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보고 예수님을 믿는 모든 것은 살인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막 7:21)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데 이것이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마음에서, 속에서 나옵니다. 무섭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고 했습니다. 속사람을 못 지키면 살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육체적 장애가 문제가 아닙니다. 속사람을 지키지 못하니까 자살을 하게 되는 겁니다. 자기만 죽입니까 남도 죽입니다.
바울은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롬 7:22)고 하십니다. 그리고 에베소 교회에게는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엡 3:16)라고 말합니다. 고린도 교회에게 자신들이 복음을 전하면서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전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 교육의 문제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문제가 어디에 있습니까? 다 속사람입니다. 속사람이 잘못되니까 다 잘못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겉 사람을 이롭게 하는 곳이 아니라 속사람을 만드는 곳입니다.

요한은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 3:15)고 했습니다. 살인의 동기가 무엇입니까? ‘미움’입니다. 이 미움이 무서운 것입니다.
‘to;n ajdelfo;n aujtou’ ajnqrwpoktovno”’ 원문에 보면 미움(misw’n:미세온)과 살인(ajnqrwpoktovno”:안드로톡토노스) 사이에 두 단어가 들어가 있습니다. 형제(안드로폰:ajdelfo;n)과 다음에 나오는 단어에 유의해야 합니다. ‘자마다’(aujtou:아우톤)입니다. ‘자마다’(아우톤)는 ‘방향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바람(ajhvr:아엘)에서 나왔습니다. 어디로 갈지 모른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요동치는 사람입니다. 제일 무서운 사람이 누구냐 이랬다저랬다 하는 사람입니다.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사람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요동칩니다. 흔들립니다. 믿을 것이 못됩니다. 조금만 돈이 생기면 입이 찢어질 듯 기뻐하지만 주머니가 비면 남편을 쥐잡듯 잡습니다. 답배 한 대 피우면서 한강변 서성거리는 남자는 위험합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흔들리는 삶을 살겠습니까?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약 1:6) 무엇이 사람을 요동치게 합니까? ‘의심’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예전에 한번 말씀드렸던 내용입니다. 제가 공짜신문에서 보았던 내용입니다.
항해하는 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앞에 불빛 하나가 보였습니다. 이 배의 선장은 신호를 보냈습니다.
“비켜라 부딪히겠다” 저쪽 불빛에서 답신이 왔습니다. “네가 비켜라” 선장은 인내심을 가지고 다시 한번 신호를 보냈습니다. “빨리 비켜라.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저쪽에서 다시 답신이 왔습니다. “네가 비키라니깐” 선장이 열 받아서 외쳤습니다. “여긴 군함이다 안 비키면 알지?” 그러자 그쪽에서 답신이 왔습니다. “네 맘대로 하라. 여긴 등대다” 등대가 움직일 수는 없습니다. 배가 움직여야 합니다. 군함도 움직여야 합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훌륭하다해도 다 움직여야 합니다. 그래야 삽니다. 자존심 걸었다가는 큰일납니다. 하나님은 등대이십니다. 그분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시 55:22). 오직 주님이 우리를 붙드십니다. 우리는 어디엔가 누군가가 붙잡아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혼자 자신하십니까? 요동치지 않겠다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흔들립니다.
첫 제자 베드로를 부르시고 예수님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요 1:42)고 하셨습니다. ‘게바’는 수리아어로 바위입니다. 예수님은 흔들리는 베드로에게 흔들리지 말 것을 부탁하신 것입니다.

저희가 어렸을 때는 옆집에서 가끔 새벽에 없어지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날이 밝기 전에 도망을 가는 것입니다. 하도 살기가 힘들 때라 도망가는 며느리들이 많았습니다. 저희 집 뒤에 사는 분도 시집 온지 얼마 안 되는 색시가 아이 하나 낳았는데도 아침에 도망을 같습니다. 그래서 신랑은 마음을 못 잡고 늘 술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때마다 동네 어르신들은 “이 사람아 이제 마음을 잡아야지!” 그러셨습니다. 마음을 잡아야 사는 것입니다.
다윗은 “주의 의로운 규례들을 지키기로 맹세하고 굳게 정하였나이다”(시 119:106)고 하였습니다.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시 62:7)

살인을 왜 하게 됩니까? 마음을 정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바람에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시 정리합니다. 우리는 살인을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으로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살인하는 것입니다. 마음속에서 나오는 악한 것들이 살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하나가 있습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살인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지금 끊어야 합니다. 내가 죽어가고 있는 겁니다. 믿음이 없이는 죽습니다. 예수가 없으면 죽습니다. 부활이 없습니다. 나를 죽이는 것은 현재 내 육체를 죽였기 때문에, 자살했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나를 죽도록, 내 영혼이 죽도록 방치하는 것도 살인입니다. 하나님을 붙드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진리의 나라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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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 35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37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38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요 18:33-38)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입니다. 사람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것 인줄 알고 ‘호산나’ 하면서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이 사람들의 이 소리는 일주일도 못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는 소리로 변한다는 것을이요. ‘호산나’ 소리를 들으시면서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사람의 소리, 군중의 소리, 산헤드린 공의회의 어떤 결정이 사람을 구원시켜 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믿을 것이 못됩니다. 사람을 보고 사람을 믿으면 실망과 좌절뿐입니다. 상처만 받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 안에서 사람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밖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믿을 것도 사랑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고난 주간과 부활 주일을 앞에 놓고 십자가에 관한 성경 말씀이나 설교를 많이 듣게 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하나님은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하나님께서 자기의 독생자를 주셨다는 말이 무슨 의미일까요? 이 한 구절만 가지고는 그 뜻을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읽은 요한복음 18장 28절 이하에서 ‘주셨다’는 말의 의미를 선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자기 외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죽이기로 작정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단호한 뜻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사도행전 2장 23절에 말한 것처럼, 예수님은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다른 죽음도 많은데 왜 하필이면 십자가의 죽음일까요? 하나님은 왜 하필이면 가장 잔혹하다는 그 십자가의 죽음을 택하셨을까요? 갈라디아서 3장 13절만큼 이것에 대해 선명한 답을 주는 곳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사실 십자가는 로마에 의해서 갑자기 생겨난 형틀은 아닙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나무에 잘 매달아 죽였습니다.
“22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 21:22-23)

십자가는 한마디로 저주의 상징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야만 했던 한 가지 이유는 예수님이 저주의 죽음을 죽어야 할 입장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율법의 저주 아래 갇혀 있는 사람들입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이것이 율법의 요구요 명령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 나 자신을 사랑했습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지만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기보다 언제나 나 자신만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시대라고 하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셨다 가시면 뭐가 좀 달라진다면 십자가가 아니라도 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이 이 땅에 다녀가셔도 우리의 마음과 행동에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구약 사람이나 우리나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가끔 신약 이후의 시대에 산다고 아브라함 보다 모세보다 최소한 아론보다는 좀 나은 구석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인입니다. 십자가가 필요합니다.

바울이 말한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사랑은 참 하기가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랑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자기 편한 대로 마음대로 생각하고 마음대로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이 왜 ‘사랑’이십니까? 당신 마음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는 사랑이요?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순종’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순종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오래 참음’입니다.
오래 참지 못하면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을 못합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신 것은 오래 참으시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가 십계명을 받아 가지고 내려올 때에 너무 오래 걸리니까 광야에 있던 백성들은 날뛰기 시작했습니다. 참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 금송아지를 만들어 냅니다. 자기가 필요한 것을 만들어 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이런 조급증에 걸리면 결국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원 얻을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10:22, 막 13:13, 마 24:13)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신 이유를 민 12:3에서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모세는 자신의 분을 참지 못해서 살인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광야에서 60여 년 간 있으면서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으시기를 원하십니까? ‘온유’해 지세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팔 복 가운데도 들어 있습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힘을 의지하여 사는 사람은 결국은 실패와 좌절뿐입니다. “구원하는 데에 군마는 헛되며 군대가 많다 하여도 능히 구하지 못하는도다”(시 33:17)고 했습니다.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삼상 17:47)고 했습니다. 사람의 잘남이 아닙니다. 인생의 결국은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때는 주를 의지해야 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라고 했습니다. 모세도 바울도 처음에는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보니까 자신들이 얼마나 낮은지를 알게되었고 온유해 졌습니다. 바로 그 때 하나님은 이 사람들을 사용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요 18:33-38)에 보면 빌라도가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질문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34절에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고 다시 묻습니다. 다른 사람이 말한 것을 나에게 물어보는 것이냐 아니면 빌라도 네가 그렇게 나에게 질문하는 것이냐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빌라도가 35절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도대체 무슨 일을 어떻게 하였기에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인 내 친족들이 너를 나에게 넘겼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논쟁이 ‘나라’의 개념입니다.
36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고 하니까 빌라도가 다시 37절에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는 진리의 나라라고 하셨습니다. 빌라도 입장에서 보면 갈수록 모를 이야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이미 생각이 다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빌라도는 땅의 나라에 대하여만 생각하기 때문에, 알고 있기 때문에 도무지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진리’라고 말씀하시니까 38절에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라고 묻습니다. 사실 더 이상 대화가 계속된다고 해도 빌라도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가 교회에 왜 나왔습니까? 아름다운 말을 듣기 위함이 아닙니다. 지식을 배우기 위함도 아닙니다. 그런 요소가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목적은 아닙니다.
바울은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고전 2:4)라고 말합니다.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이것이 ‘진리’라는 이야기입니다.
본문의 ‘진리’(ajlhqeiva/:알레데이아)는 ‘참된 것, 진짜’ 라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진짜를 모르는 겁니다. ‘진리’를 모르는 것입니다. 참되신 분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영원한 나라, 불변의 나라, 변하지 않는 나라에 대해서 증거하시려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원문의 이 단어가 제일 처음에 나타나는 것은 마 22:16에서 바리세인들이 예수를 책잡고자 할 때 비아냥거리면서 한 말입니다.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비록 다 깨닫지는 못했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은 참되시고 하나님의 도, 나라를 증거하셨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나타난 것은“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7)입니다.
세 번째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자 그러면 무엇입니까? ‘진리’(ajlhqeiva/:알레데이아)만 알면 끝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리를 아는 것도 진리에 있고, 가는 것도 진리에 있고, 오늘날 교회의 문제도 다 이 진리에 있는 것입니다.
원문의 ‘진리’(ajlhqeiva/:알레데이아)는 ‘ajlhqhv”:알레데스’에서 나왔습니다. 이 뜻은 ‘참된, 진실한’이라는 뜻인데 문법이 재미있습니다. 불변사입니다. 이 알레데스는 어디서 나왔느냐 헬라어 첫 문자인 ‘알파’ 에서 유래했습니다. 즉 예수님은 변하시지 않는, 첫 근원과 같은 존재이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교회가 무엇이냐? 크리스찬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로 시작해서 예수로 마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육신에 속한 사람은 이 진리를 모릅니다.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왜 성령 성령 하느냐?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3)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알 수 없는 것 그것이 ‘진리’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알 수 없습니다. 여러분 지금 내 맘대로 나와 앉아 있는 것 같아도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인도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복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께 나와서 용서받지 못한 죄인이 없고, 병 고침 받지 못한 사람이 없습니다. 다 축복을 받았습니다.

“5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5-6) 아멘.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십자가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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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 16:32-33)

요한복음은 A.D 90년경에 기록된 책입니다. 복음서 중에는 제일 나중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이미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을 참고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빠진 부분들을 면밀히 기록해 나가는 세밀함을 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최초의 이적사건인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나드셨던 사건을 유일하게 기록합니다. 이런 기적 사건을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요한의 관심은 이 땅에서 베푸신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이 기적 사건을 기록하는 것에도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요한 복음의 총 주제라 할 수 있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고 했습니다. 제가 오늘 설교하는 목적도,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목적도 모두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믿어 구원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요한복음은 18장부터 21장까지 예수님이 고난을 받고 부활하시는 기사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고난을 받는 기사가 나오기 전에 13장부터 16장까지 3장에 걸쳐 예수님의 설교가 나옵니다. 사실 예수님이 병 고치고 얼마나 놀라운 기적이 많이 일어났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다 뒤로하고 요한은 예수님이 고난을 받기 전에 하신 설교를 기록합니다. 그리고 기도하신 장면을 17장에 기록하고 18장부터 고난사건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시는 사건이 기록됩니다. 오늘 본문은 사건이 아닌 설교입니다. 그런데도 이 부분이 중요한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은 그 마지막에 위치해 있습니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면 무엇이 달라지냐, 역사의식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의 위치를 알게 되고 역사성을 가지게 됩니다. 그냥 사는 것입니다. 역사적 사명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위치가 왜 중요합니까? 예수님의 설교 마지막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설교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인데 십자가를 보는 사람은 두 가지입니다.
한 가지 종류의 사람은 멸망하는 자들이고, 다른 한 가지는 구원 얻는 자들입니다. 세상에 사람들이 많지만 이 모든 사람을 간단히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멸망하는 사람들과 구원 얻는 사람들입니다. 십자가는 하나이지만 이 두 가지 종류의 사람 중 종류에 따라서 십자가에 대한 반영이 다릅니다. 십자가의 말씀이 다르게 들립니다. 십자가가 다르게 보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고 했습니다.

십자가는 본래 옛날 로마에서 노예나 혹은 식민지 백성을 극형에 처할 때 쓰던 아주 처참한 형구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당시 십자가는 가장 천하고 가장 더럽고 가장 무서운 사형대였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천한 사람들만 못 박히는 처형 대에서 처형을 받은 어떤 사람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된다고 하니 미련하게 들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로마 사람들을 위시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미련하게 들었습니다.
그뿐입니까? 십자가를 통한 복음이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는 너무 단순하게 들렸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해서 독생자를 주셨는데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고 하니 너무 단순하게 보인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구원 얻는 것이 그렇게 단순할 수가 없다고 생각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는 깊이가 없다고 말합니다. 기독교에는 무슨 철학이 없다고 합니다. 옛날 철학을 많이 숭상하던 헬라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복음이 아주 미련하게 들렸습니다. 자기가 무슨 선한 일을 많이 해서 도가 높아지고 덕이 부해져서(道高德副) 내가 구원을 얻는다면 그것은 타당하지만, 어떤 진리를 믿어서, 구체적으로 말해서 십자가를 믿어서 구원 얻는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대한 것을 비웃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미련하게 보입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크리스챤이 누구입니까? 도대체 기독교인이라는 것이 뭡니까? 크리스챤이라는 것은 바로 십자가 이해에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어떤 측면에서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그리스도인의 속성이 결정됩니다. 여러분! 분명히 알 것은 십자가는 죽음입니다. 십자가는 아주 처참한 죄인에 대한 처형 방법입니다. 아주 부끄러운 죽음입니다. 저주스러운 죽음입니다. 인류역사상의 가장 비참하고, 가장 부끄럽고, 가장 저주스러운 죽음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생각합니다. 십자가 안에 무궁무진한 비밀이 숨겨있습니다. 그 속에 미스테리가 있습니다. 엄청난 생명력이 거기에 있습니다. 그것을 믿는 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다는 뜻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원문의 “이기었노라”(nikavw:니카오)는 동사 완료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아직 십자가를 지시기 전인데도 이미 승리한 것으로 나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승리하신 게 아니라 승리하시고 십자가를 졌습니다. 이미 승리하신 것입니다. 승리로 십자가를 졌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로 승리하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 안에 나타난 신비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승리하셨다고 선포하신 확신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예수님이 싸워보지도 않은 싸움에서 왜 이기실 수 있다는 확신이 있으신 것입니까? 자만입니까?
오늘 본문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입니다. 아버지가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함께 하는 싸움입니다. 그래서 승리하는 겁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 4:12)고 했습니다. 사람이 힘을 합하는 것도 이런 힘을 발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힘에는 당해낼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세는 홍해를 건너고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출 15:2)고 노래했습니다.

또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기도하라고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라고 알려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분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기도하신 것입니다. 이 성경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외울 수 있으면 다 외워야 합니다. 여기 아버지라는 단어가 무려 39번나옵니다. 7장이 26절까지 있는데 39번이나 나옵니다. 아버지를 부르신 것입니다. 기도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고 아버지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하나님이 아버지라고 일러주신 것 가운데 제일 우리의 관심이 가는 부분이 무엇입니까? 자 솔직히 말씀해 보세요? ‘후사’입니다. 후사가 무엇입니까? 아버지의 모든 것을 이를 자녀입니다.
바울은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되었느니라”(롬 4:14)고 했습니다. 율법으로 후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후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롬 4:16)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예정된 것이요, 십자가는 계획된 것이요 십자가는 하나님의 큰 경륜 속에 미리 약속된 것입니다. 십자가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성경책 전부입니다. 총 주제입니다. 이걸 모른다면 성경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많은 이적이 무엇을 말합니까? 병든 자를 고치고 귀머거리를 열게 하고 아, 그리고 죽은 자를 살리고……. 죽은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무덤에 가서 “나사로야 나와라”고 소리를 칩니다. 죽은 사람이 걸어 나옵니다. 이건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이러한 능력을 가지신 분이 십자가에 죽었다 이 말입니다. 그걸 설명하자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이게. 그 능력을 가지신 분이 말없이 십자가를 집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그것이 알 수가 없어서 “이 사람을 보라. 도대체 알 수가 없는 사람이다. 그 능력을 가지신 분이 왜 말없이 죽어 가느냐” 고 했습니다. 거기에 십자가의 비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중요한 단어 하나가 발견되는데 ‘기노스코’라는 단어입니다. 이 뜻은 ‘진리나 주인의 뜻을 알다’입니다(요 16:3, 눅 12:47, 48) ‘알아채다’(마 22:18, 눅 8:46)에 나옵니다, 학문적인 지식을 넘어서는 단어입니다. 구약에도 히브리어로 ‘야다’라고 나옵니다. 이 단어도 마찬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단어 모두 남녀간의 ‘동침하다’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그러잖아아요. 부부문제는 부부만 안다고요?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의 관계에서만 아시는 것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십자가에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사랑의 승리입니다. 여러분! 사랑이 뭡니까? 사랑 자체도 설명하기 어렵지만 사랑의 소위 말하는 커뮤니케이션, 사랑을 전달한다는 게 이렇게 어려울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쉽게 사랑한다는 말했다가는 뺨맞아요. 안 그렇습니까? 이 사랑이 전달이 돼야겠는데 이 사랑의 뜨거운 마음을 전달하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랑의 진실한 언어는 희생밖에 없는 거예요.

또 하나는 여러분, 이것은 의의 개시입니다. 의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에요. 죄란 그저 흐지부지 용서할 수가 없는 거입니다. 죄 값은 사망입니다. 누가 당하든지 당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정치처럼 흐지부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분명하게 밝혀서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으로 벌을 받아야 됩니다. 얼렁뚱땅 그냥 슬쩍슬쩍 넘어가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확실합니다. 인간의 죄 값은 사망입니다. 그런고로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어야 했던 것입니다. 죽지 않고는 절대로 살리지 못하니까요. 그걸 아셔야 됩니다.

십자가는 죽음의 승리입니다. 죽음을 넘어섭니다. 죽음을 초월합니다. 십자가는 생의 끝이 아닙니다. 영원한 세계의 시작입니다. 그것을 믿고 죽음의 세계를 훌쩍 넘어서는 것이 십자가의 말씀이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생명의 길입니다. 칼 바르트 라고 하는 유명한 신학자는 그의 교회 교의학 속에서 “사람의 생의 단 한번의 기회”라고 하는 논문을 씁니다. 사람에게 많은 기회가 있는 것 같으나 가장 중요한 기회는 딱 하나 있어요. 단 한번의 기회. 그것은 바로 곧, 죽음이다. 그 기회를 어떻게 맞이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아프리카 케냐 최동훈 선교사님의 글입니다. 제가 미션매거진에 제목을 ‘먹고 마실 물만 있으면 행복한 것입니다.’로 올렸습니다.
저희가 사역하고 있는 문요야야 사람들은 일본에 지진이 난 것도 쓰나미가 덮쳐서 수만은 사람이 죽고 원전이 폭발해서 세상을 뒤흔들 정도로 심각한 일이 벌어지고 있지만 이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으며 듣고 싶어도 들을 수 없는 깊은 광야 벌판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돌아가는 일에 귀를 기울 릴 필요도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안으며 그저 오늘의 양식만을 알라에게 구하고 있습니다.
먹고 마실 물만 있으면 이들은 행복한 것입니다.
옥수수 한 개가 있으면 한끼를 먹는데 그것도 반으로 잘라서 또 한끼를 위해 남겨두면서도 이들은 서로를 위하고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답니다. 이들이 예수만 믿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고 하셨습니다.
십자가 아무리 위대해도 내가 지고 따르지 아니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는 실패와 낙망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승리의 십자가를 당당하게 지고 예수를 따르시기를 바랍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참 빛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너는 우림과 둠밈을 판결 흉패 안에 넣어 아론이 여호와 앞에 들어갈 때에 그의 가슴에 붙이게 하라 아론은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흉패를 항상 그의 가슴에 붙일지니라”(출 28:30)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 1:9-11)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호 6:3)
사람은 자기가 본 것, 생각하는 것 외에는 말할 수 없습니다. 저는 지난주간 두 가지 하고만 지냈습니다. 성경과 컴퓨터입니다. 컴퓨터로 성경타자 치고 예전에 번역한다고 하던 것 다시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러니 오늘 말씀에 무슨 예화 같은 것 기대하지 마세요.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있습니다. 그래도 재미있게 들어주시기를 바랍니다. 힘써 여호와를 아시기 바랍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

출애굽기 26장은 37절까지 있습니다. 성막 만드는 법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시하신 내용입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28장은 43절까지 있습니다. 제사장의 옷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신 내용입니다. 성막 만드는 법보다 제사장의 옷 짓는 방법이 더 많이 기록된 것은 그만큼 비중이 많다는 말입니다. 성막이 있지만 이 가운데에서 하나님께 나아갈 사람, 제사장이 없으면 성막 자체가 필요가 없습니다. 성막은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중보의 장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출 25:22)고 하셨습니다.
모든 만남은 상호 작용입니다. 한쪽의 노력으로만 안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의 만남이 성사되려면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님 쪽에서 오셔야 가능하고 사람 쪽에서 하나님을 만나러 가야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고 우리는 죄인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성막이 필요했고 제사장이 있어야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쪽에서 어디까지 와 계시겠다는 것이냐 하면 성막의 지성소까지는 와 계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지성소만 들어가면 하나님을 만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 대단한 일입니다. 가슴 설레는 일입니다. 이보다 더 중대 사건은 이 땅에 없습니다. 아무리 큰 뉴스라고 해도 인간이 하나님을 만났다는 뉴스보다 더 큰 뉴스는 없습니다. 그게 바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주권도 강조하고 동시에 인간의 책임도 강조합니다. 어느 한쪽 만에게 그 책임을 떠넘기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두 가지가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 문제는 인간의 이성으로 결코 합리화 할 수 없는 논리입니다. 이 두 주장은 지식으로 머리로 풀기가 어렵습니다. 가슴을 다가가야 합니다.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세상에는 논리로만 설명되지 않는 실존이 너무 많습니다. 성경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논리를 주장하고 신뢰하는 과학자들도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만난다는 자체가 이러한 모순처럼 느껴집니다. 일단 거리와 공간적으로 하나님은 우리가 찾아가서 만날 수 없는 분입니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전 5:2)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이 있는 사막 한가운데 장막까지 오신다는 것은 분명 희망의 메시지요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분명 하나님과 인간 쪽의 상호작용이 있어야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99.9%, 아니 그 이상은 하신 것 같습니다. 우리는 나머지 조금만 하면 됩니다.
그것이 제사장의 역할입니다. 과연 인간이 하나님을 장막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성공할 것인가? 그 대답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고 하나님을 만나러 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의 옷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 만나러 지성소에 들어갔다가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제사장의 옷 가장자리에 방울을 달아 그 소리로 제사장이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 알았습니다(출 28:34-35). 이 제사장 옷을 입어야 죽지 않습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나 제단에 가까이 하여 거룩한 곳에서 섬길 때에 그것들을 입어야 죄를 짊어진 채 죽지 아니하리니 그와 그의 후손이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출 28:43)

출애굽기 28장은 1-43절까지 제사장 옷 만드는 법이 나오는데 이중에 제일 많이 할애한 부분이 ‘판결 흉패’입니다. 15-30절까지 나옵니다. 16절을 쓰고 있습니다.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제사장 옷의 정 중앙에 한 뼘의 크기로 정사각형 모양으로 해서 달아야 합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출애굽기 28장 17절-20절까지 한 줄에 세 개의 보석을 붙여야 합니다. 이렇게 네 줄에 걸쳐 보석을 12개를 붙여야 합니다.
제사장 옷 한 가운데 이런 보석이 붙여 있으니 가히 이 옷의 값어치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진짜 이 옷의 값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옷이라는 것입니다. 예전에 제가 만화를 많이 보았습니다. 만화 가운데 투명 인간이 나옵니다. 그런데 투명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특별한 옷을 입으면 투명인간으로 변하는 겁니다. 이런 옷이 실제 존재한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제사장의 옷은 그와 비할 데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옷이기 때문입니다. 이 흉패에는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이름 곧 12지파의 이름이 기록되었습니다(29절).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직접 재판하시고 판결을 내려주시며 제사장을 통해서 신정을 하시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 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억울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공의와 정의가 세워질 것입니다.
솔로몬은 “또 내가 해 아래에서 보건대 재판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고 정의를 행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도다”(전 3:16)고 했습니다. 사람은 의인이 없습니다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곳에도 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나라를 이 땅에 바르게 세워보고자 인간이 통치하는 나라가 아닌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시는 나라를 세우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판결 흉패’에는 16개의 보석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가운데 두 개의 중요한 것이 들어갑니다. “너는 우림과 둠밈을 판결 흉패 안에 넣어 아론이 여호와 앞에 들어갈 때에 그의 가슴에 붙이게 하라 아론은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흉패를 항상 그의 가슴에 붙일지니라”(출 28:30)고 하셨습니다. 우림과 둠밈이 어떤 재료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돌인지 철인지 다듬어진 또 다른 물질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의 용도는 정확하게 나와있습니다.
우림(!yriWa)은 ‘빛’을 뜻하는 ‘우르’에서 나왔습니다. ‘우르’의 복수형으로 ‘빛들’이 됩니다.
둠밈(!yMiTu)은 ‘온전함’을 뜻하는 툼의 복수형으로 ‘완전함’이란 의미입니다.

‘우림’이라는 단어의 첫 글자가 히브리어의 알파벳 첫 자인 알-렢(a)이며 둠딤은 마지막 글자 타-우(T)라는 것입니다. 신약의 헬라어 개념으로 말하면 우림과 둠밈은 알파오 오매가라는 뜻입니다. 처음과 나중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다윗은 기도를 통해서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대상 29:14)라고 하나님께 고백했습니다.

여호수아가 모세의 후계자인지를 묻는 장면에서 “그는 제사장 엘르아살 앞에 설 것이요 엘르아살은 그를 위하여 우림의 판결로써 여호와 앞에 물을 것이며 그와 온 이스라엘 자손 곧 온 회중은 엘르아살의 말을 따라 나가며 들어올 것이니라”(민 27:21)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싸울 때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시므로”(삼상 28:6)라고 했습니다.
스룹바벨과 함께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제사장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방인과 결혼한 사람에 누가 대 제사장 직분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아무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 때에 느헤미야는 “총독이 그들에게 명령하여 우림과 둠밈을 가진 제사장이 일어나기 전에는 지성물을 먹지 말라 하였느니라”고 말합니다.

제사장 옷에 붙여진 우림과 둠밈의 역할은 하나님이 직접 이스라엘을 통치하시는 방법이요 신호였습니다. 우림과 둠밈이 빛을 내어 하나님의 판결의 여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온전한 빛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어떻게 됩니까? 히브리식 표현으로는 우림과 둠밈이지만 헬라식 표현으로 하면 ‘참 빛’입니다.

본문의 원문을 직역하면 “나는 참 빛이다. 이 세상 사람 모두를 비춘다”는 말입니다.
시편 기자는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시 36:9)고 했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이 우리에게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보았습니다. 참 빛을 보았습니다. 우림과 둠밈을 본 것입니다. 알렢과 타우, 알파와 오메가 되신 분을 보았습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모든 것이십니다.
그분은 이사야를 통해서 “나는 시온의 의가 빛 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 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사 62:1) 하신 말씀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대단한 것을 안 것입니다.
지혜의 왕 솔로몬이 알아낸 것은 “마음은 올무와 그물 같고 손은 포승 같은 여인은 사망보다 더 쓰다는 사실을 내가 알아내었도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는 그 여인을 피하려니와 죄인은 그 여인에게 붙잡히리로다”(전 7:26)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여자가 무섭다는 것입니다. 여자 때문에 패가망신한 사람이 아담 이후에 한두 사람이 아닙니다.
중국의 가장 훌륭한 왕을 이야기 할 때 요와 순을 듭니다. 요가 나라를 물려줄 때 다른 사람처럼 자기 아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순에게 자기 딸을 주어 여자 다스리는 솜씨를 보고 그 다음에 왕위를 물려주었다는 고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이 큽니다. 여자 하나를 다스릴 줄 모르면서 천하를 다스리기 어렵다는 뜻도 되고 여자 한 사람 거느리는 것이 천하를 거느리는 것만큼 어렵다는 뜻도 됩니다.

하나님은 이제 더 이상 구약의 장막과 성소가 아닌 우림과 둠이 아닌 스스로 우림과 둠밈이 되셔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요일 2:8)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요일 1:5)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