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탄의 두 가지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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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

사탄은 우리에게 두 가지 전략을 사용하여 우리를 죽이고 하나님께로부터 떠나도록 만듭니다. 사탄은 우리보다 영악합니다. 우리를 하나님 다음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서 우리를 알고 계시지만 사탄은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우리를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시도 기도하지 않으면 이 사탄의 시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사탄이 사용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풍선을 못 쓰게 만드는 방법과 같습니다. 바람을 빼면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람을 자꾸만 집어넣어서 터뜨리는 방법입니다. 하나는 뒤로 바람을 빼는 것입니다. 사탄은 알맞게가 없습니다. 양쪽으로 갈라놓습니다. 중심을 못 잡게 합니다. 치우치게 합니다. 편을 나누게 합니다. 그리고 싸우게 합니다. 이것이 사탄의 전략입니다.

첫 번째 방법은 ‘교만’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나는 교만하지 않아!’ 라고 말한다면 그 자체가 교만입니다. 이는 마치 ‘나는 거짓말을 안 해’라는 말과 같습니다. 이것은 어른들이 ‘나 빨리 죽어야지’하는 말과 처녀들이 ‘나 시집가기 싫어’하는 말과 함께 삼대 거짓말 중의 하나라는 것은 아시죠.
그런데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나는 교만하자 않아’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곧 ‘나는 죄인이 아니야!’ 하는 말과 같다는 것입니다. 즉 아담 이후에 사람에게 죄가 들어왔는데 그것이 ‘교만’입니다. 그러므로 ‘교만’은 사탄이 놓은 덫이요 함정입니다.

야고보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5)고 했습니다.
바울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엡 4:22)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막 4:19)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이 욕심을 버리고 사탄의 시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까? 바울은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고 말합니다. 모세가 자기 생각으로 바로에게 나아간 것이 아닙니다. 자기 능력을 바로에게 보여준 것이 아닙니다.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 세상이 여호와께 속한 줄을 왕이 알리이다”(출 9:29). 세상에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탄의 유혹을 벗어나 세상에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방법은 낙심이나 절망하게 만드는 겁니다. 여기 잘 보세요. 사탄이 얼마나 영악합니까? 결국은 사람의 약점을 딱 잡아 가지고 양쪽으로 몹니다. 교만끼가 있는 사람은 아주 그 쪽으로 몹니다. 그리고 허약해 보이는 사람은 아주 절망하게 만들어 스스로 죽게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사람은 ‘교만’ 있습니다. 이것이 없다고 한다면 죄가 없다고 말한다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낙심은 어떻습니까? 나는 절대 낙심한 적이 없어 말한다면 이 또 한 마찬가지입니다. 가장이 힘든 것은, 목사가 힘든 것은 어떤 때는 정말 힘듭니다. 그래도 목사가 힘든 표시내면서 설교하면 여러분 얼마나 힘이 빠지겠습니까? 목사는 힘이 들어도 힘이 들지 않은 척 하면서 설교해야 합니다. 배가 고파도 배부른 것처럼 자녀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잠시 그럴 수는 있으나 계속 그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빨리 회복해야 됩니다. 우리가 절망과 낙심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절대로 성공할 수가 없습니다.

때를 기다릴 줄 아는 강태공과 때를 기다릴 줄 모르고 현실만 보면서 살았던 그의 아내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불신자도 이런 지혜가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참고 견딜 줄 알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사단의 방법과 공격을 허락하면 안 됩니다. 이제 더 이상 사단의 종노릇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사단은 처음부터 심각한 죄를 짓게 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죄를 지를 수 있는 환경으로 자꾸만 빠져들게 합니다. 밤 문화가 사람을 사단에게로 인도합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일찍 주무세요. 사단이 좋아하는 생활습관부터 뜯어고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야 합니다. 권투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잽입니다. 작은 것을 자꾸만 허락하다보면 나중에 쓰러지는 것입니다. 어쩌다 한번 맞은 것은 홍수환처럼 일어납니다. 그러나 작은 것 같지만 자꾸만 허락하다보면 쓰러집니다. 그래서 잽 맞고 쓰러진 사람은 못 일어납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8) 보이는 것은 이미 다 드러난 것입니다. 주목할 것이 없습니다.
십자가를 보시기 바랍니다. 사탄은 자기의 모습을 보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교만하게 하여 낭떨어지로 몰아넣어 죽입니다. 아니면 너는 죽을 놈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어 죽입니다. 터트려 죽이든 바람을 빼서 죽이든 그것이 사탄의 목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은 주님의 목적은 우리를 살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2)

요즘 영국은 그야말로 박지성(30) 센세이션입니다.
맨유 팬들이 환호하고 있습니다. 박지성이 지난 9일 첼시전에서 보여준 기량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박지성은 주심이 경기 시작 휘슬을 분지 35초만에 신예 하비에르 에르난데스에게 깜짝 킬패스를 연결, 선취골을 만들어냈습니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의 새 역사를 쓸 맨유의 19번 째 리그 우승에 9부 능선을 넘게 한 귀중한 도움이었습니다.
맨유 팬들은 골을 넣은 에르난데스와 네마냐 비디치보다 박지성이 첼시전에서 가장 돋보였다는 평가를 내놓고 있습니다. 팬들은 박지성 놓고 재미난 토론도 펼쳐지고 있습니다. manutd789란 아이디를 쓰는 팬은 구단 홈페이지 게시판을 통해 ‘박지성은 인간인가’(Is Park Ji Sung a Human?)이란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러자 많은 팬들이 댓글로 박지성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한 팬(Michael Stokes)은 ‘박지성은 놀라움 그 자체다. 첼시 선수들에게 지속적인 압박을 가했다’고 했습니다. 다른 팬(IamConnor17)은 ‘박지성은 7개의 폐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며 90분 내내 쉼 없이 뛰는 박지성의 활동량에 박수를 보냈습니다. 맹활약의 원동력을 궁금해하는 팬들도 있었습니다. 한 팬(Dirty Harry)은 ‘박지성의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는 인삼으로부터 나온다’고 했습니다. manutd789 팬은 ‘박지성은 종종 끓인 개구리즙을 마시곤 한다’고 했습니다. 별의 별 말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박지성 선수는 평발입니다. 운동선수로는 큰 약점인 평발을 극복하고 쉴 세 없이 열심히 뛰기 때문에 오늘과 같은 결과를 얻은 것입니다. 열심히 하니까 결과가 따라오는 것입니다.

요즘 한나라당 보니까 지난번 선거의 패배를 딛고 당을 추수리느라 바쁜데 중요한 것은 ‘인물’을 찾고 있습니다. 한나라당만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인물’을 찾고 계십니다. 이사야처럼 ‘내가 여기 있나이다.’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누군가를 위하여, 어떤 일을 위하여 시간과 정열과 물질을 쏟으며 살아갑니다. 아내는 남편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남편이 자기가 믿던 남편이 아니면 사람은 절망합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하늘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믿는 것은 무엇입니까? 철학적인, 원론적인 질문 같지만 왜 살아갑니까? 제일 좋은 길은, 제일 아름다운 길은, 제일 능력 있는 길은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도구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도구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도구’가 무엇입니까? 도구는 쓰는 사람에게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도구가 자기 마음대로 움직인다면 그것은 도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쓰시고자 할 때, 하나님의 어떤 부족함을 채우려고 우리를 쓰시고자 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무슨 능력이 부족하여 지혜가 부족하여 우리를 쓰시고자 함이 아닙니다. 그분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쓰셨을 때, 모세를 쓰셨을 때, 제자들을 쓰셨을 때 무슨 조언을 구하거나 무엇을 요청한 일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능력이 아니라 모세의 능력이 아니라 다윗의 능력이 아니라 다니엘의 능력이 아니라 제자들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를 만들고 너를 모태에서부터 지어 낸 너를 도와 줄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하지 말라”(사 44:2)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모세에게 제자들에게 가라고 명령하실 때는 이 말씀 속에 무엇이 내포되어 있습니까? ‘약속’입니다. 내가 함께 하겠다는 약속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이 약속을 이해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도구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출 3:11). 모세는 자기의 능력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다릅니까? 모세와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처지와 사정과 무능함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능력을 주어서 사용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나를 바라보면 일을 못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무능함이요 하나님은 능력이십니다. 사탄은 항상 나를 보게 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나를 보면 힘이 빠지고 나의 약함과 한계를 보고 절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능력을 보게 만드십니다. 부어주실 능력을 생각하게 하십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 14:10)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고 하셨습니다. 능력은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모든 운동경기의 요령이 있습니다. 그것은 너무 들이지 말고 힘을 빼고 하라는 것입니다. 힘을 빼고 공을 차고, 치고, 넣어야 합니다. 그런데 힘이 너무 들어가 있으면 오히려 잘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리입니다.
붓글씨 잘 쓰는 비결도 알고 보면 같습니다. 명필을 쓰는 사람일수록 손에 힘을 빼고 씁니다. 오히려 너무 잘 쓰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잘 하려고 하지말고 하나님께 내어 맡기기를 바랍니다.
다윗 동산에 놀러가서 택민이가 큰곰을 보고 목사님 안아줘, 무서워하면서 그냥 안깁니다. 또 힘이 드니까 목사님 힘들어 안아줘 하면서 안깁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이와 같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힘들고 지치고 쓰러질 때 내가 다 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냥 그분에게 택민이처럼 무서워요, 힘들어요 하면서 안기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하는 것은 나의 논리로 자꾸만 하나님을 설득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설득 당해야지 내가 하나님을 설득하려고 들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삼상 15:11)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설득하여 왕으로 세운 사람이 이스라엘 초대왕 사울입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설득을 당하여 주십니다. 그러나 언제나 사람의 생각은 실패로 끝납니다.
“5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5-6)

‘도구’는 누가 사용하느냐 따라 달라집니다.
사탄이 사용하면 나는 사탄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용하시면 하나님의 도구가 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당장 무슨 요술 방망이를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방향이 바뀝니다. 사탄에게로 가던 것이 하나님께로 행합니다. 나만 보았고 세상만 보았는데 하나님을 봅니다. 이전까지는 내 기쁨을 위해 노래방에서 노래를 불렀다면 이제는 하나님을 위해 거룩한 찬양을 드리는 입술로 변하는 겁니다. 폭력을 휘두르는 손이 남을 돕는 손으로 변하는 겁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이 비록 작지만 비록 보잘것없지만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때에 오병이어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지속적인 쓰임을 받으려면
우리가 소망하는 것은 단 일회성으로 마치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 날까지 쓰임 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삼손 같은 사람은 처음에는 나실인으로 소개되면서 상당히 비중 있게 소개됩니다. 아마도 예수님 외에는 출생에 대해서 그처럼 많이 소개된 사람은 없습니다. 사무엘보다 더 많이 출생에 대해서 자세히 소개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이 빨리 끝납니다. 그러나 바울 같은 사람은 마지막이 깁니다. 다윗은 소년 때에 부름을 받아서 평생 하나님께 헌신합니다. 목자일 때나 왕일 때에도 변치 않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따랐습니다.

성경 보다보면 언 듯 이해하기 어려운 본문 하나가 나타납니다. “모세가 길을 가다가 숙소에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신지라”(출 4:24)입니다. 지금까지는 “모세야! 모세야!”하시면서 그렇게 다정하시게 모세를 부르시던 하나님이 갑자기 돌변하신 것입니다. ‘만나사’라는 단어가 ‘파가쉬’인데 이 뜻은 거칠게 접촉하다는 뜻입니다. 적대적인 관계에서 만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차라리 새끼 빼앗긴 암곰을 만날지언정 미련한 일을 행하는 미련한 자를 만나지 말 것이니라”(잠 17:12) 여기에 ‘만나지 말 것’에 사용된 단어입니다. 잠언서 기자가 말하는 것은 미련한 자 만나는 것은 이렇게 위험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호적인 만남은 ‘카라’를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이런 행동에 대하여 그 대답은 다음 성경구절에서 나옵니다.
“25 십보라가 돌칼을 가져다가 그의 아들의 포피를 베어 그의 발에 갖다 대며 이르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26 여호와께서 그를 놓아 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 때문이었더라”(출 4:25-26). 할례 때문이었습니다. 모세는 생후 8일이 훨씬 지난 아들들을 할례를 행하지 않고 데리고 다녔습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창 17:10). 모세가 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소홀히 여긴 것은 그의 이방인 부인 십보라의 영향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죽게 생겼으니까 십보라가 자진해서 자녀들에게 할례를 행합니다. 사실 이 사건 후에 십보라는 아들들을 데리고 미디안 자기 집으로 돌아갔고 많은 시간이 지나서 남편과 재회합니다(출 18:2).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유의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에 자기가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적절치 못하다는 핑계를 대었지만 하나님은 그것 때문에는 사실상 모세를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모세를 이끌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무 문제없이 잘 진행되어 가던 하나님과 모세의 사역에 갑자기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시려고 하는 이 엄청난 일을 우리는 대하면서 하나님은 결코 자신의 명령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사용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사역에 아무 문제없이 잘 진행되는 것 같을 때에도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일이 없는지 점검해 나가야 합니다.
본문의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시기를 바랍니다.

또 본문의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라고 말합니다.
한가지 묻겠습니다. 악인이 형통합니까 안 합니까?
“너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지어다”(잠 24:1)
우리는 무조건 세상 사람 보기에 형통하는 삶을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세상 사람이 보기에 미련해 보이나 하나님께 형통하는 삶, 하나님께 쓰임 받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다윗동산에서 곰을 보았습니다. 장로님이 곰을 사육하시는데 돌아오기 전에 곰 새끼를 우리에서 꺼내어 밖에 다니게 했습니다. 그런데 곰 한 마리가 쓰레기 통해서 뭘 찾아 먹으려고 쓰레기통이 구멍이 동그란데 그곳에 머리를 쳐 박고 계속 들어가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아예 쓰레기통을 뒤집어쓰고 있더라구요. 그리고 우리로 들이기 위해서 과자 한 개씩 놓아주니까 그것을 먹으면서 우리에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가더라구요. 곰은 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곰처럼 살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쓰레기통이나 뒤지다가, 저 먹을 것이나 탐내다가 세상을 떠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탄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적당한 타협입니다. 하나님께 나의 부족함은 문제가 안됩니다. 하나님이 쓰시면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믿음을 방해하는 사탄의 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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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 26 모세가 이르되 그리함은 부당하니이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것은 애굽 사람이 싫어하는 바인즉 우리가 만일 애굽 사람의 목전에서 제사를 드리면 그들이 그것을 미워하여 우리를 돌로 치지 아니하리이까 27 우리가 사흘길쯤 광야로 들어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되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대로 하려 하나이다 28 바로가 이르되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제사를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 가지는 말라 그런즉 너희는 나를 위하여 간구하라” (출 8:25-28)

출애굽의 목적은 하나님께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 제사하기 위함입니다(출 5:1, 3, 8, 17). 하나님은 유대인들의 애굽의 삶이 단순히 고생스러워서 그것을 탈출시키고자 함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께 축복 받는 데만 머물러 있다면 축복 받고 예배를 떠난 유럽의 교회들처럼 됩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신앙의 목적이 축복만이 아니라 예배에 있음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려고 할 때 바로는 집요하게 모세를 통해서 설득합니다.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탄은 같은 말을 합니다. 사실 사탄의 말은 믿을 것도 못되고 그렇게 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일시적으로 방해하기 위한 속임수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믿음을 잘 지키려면 이러한 사탄의 속임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첫 번째 제안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출 8:25)입니다. 사탄은 지금도 우리에게 이렇게 제안합니다. 예수를 믿으라! 그러나 세상에서 굳이 떠날 필요가 있겠느냐? “네가 좋아하던 일을 계속 하면서 믿으라!”고 말합니다. “제사도 그냥 지내면서 믿어라!”고 합니다.
이 땅에서 믿으면 안되냐는 것입니다. 뭐라 해야 합니까? “안 된다 나는 가야한다”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아버지 데라의 고행을 떠납니다. 불 신앙의 고향을 떠납니다. 떠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세상을 떠나시기를 바랍니다. 왜 떠나야 합니까?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떠나야 합니다. 교회를 중심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교회 중심은 곧 하나님 중심이요, 예배 중심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고 믿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당신을 중심으로 예배하며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 복 주시지 않겠습니까?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두 번째 제안 “바로가 이르되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제사를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 가지는 말라 그런즉 너희는 나를 위하여 간구하라”(출 8:28) 아주 너그럽고 인심을 써 주는 것처럼 말합니다. “예수 믿는 것은 좋다 그러나 너무 믿지는 말라. 지나치게 새벽기도까지는 가지 말라. 적당히 믿어라” 그런 말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뭐라 하십니까? ‘전심’입니다. 모든 마음입니다.
다윗은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시 119:10)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께는 적당히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온전히 입니다. 적당히 구원이 가능하다면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이실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엄격합니다. 미지근하면 토해 버리십니다.

세 번째 제안 “그렇게 하지 말고 너희 장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 이것이 너희가 구하는 바니라…”(출 10:11) 너만 믿으면 되었지 아내와 자녀는 왜 데리고 가려고 하느냐 이겁니다. 사탄은 가정을 파탄시킵니다. 제 생각에는 정말 위급한 경우가 아니면 가족이 떨어져 지내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기러기 하기 마세요. 얼마나 외롭습니까? 가족이 무엇입니까? 사탄은 지금도 말합니다. “너희 자녀는 좋은 학교 가야한다.” 그 말은 맡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서 좋은 학교 가면 뭐 합니까? 사탄이 보내주고 사탄이 키워 주는 것 아닙니다. 그렇다 해도 사탄에게 주시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함께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사역하시는 것에서 의문점을 갖는 것 중의 하나가 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려는가 하는 것입니다.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이 혼자 다 하시면 되지 왜 굳이 나를 부르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하나님)와 아들(예수) 자녀(우리들-성령)가 함께 일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삼위 일체의 하나님이십니다.

네 번째 제안 “바로가 모세를 불러서 이르되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의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너희 어린 것들은 너희와 함께 갈지니라”(출 10:24)
사탄이 마지막까지 유혹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래 믿어라. 어린아이까지 다 데리고 가라. 그러나 돈까지 다 바칠 필요는 없다” 이것이 사탄의 소리입니다. 결국 마지막 유혹은 자기 헌신 없이, 물질의 헌신 없이 입으로만 헌신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기 제일 쉬운 것이 물질입니다. 물질로 헌신할 수 없는 사람은 몸으로 헌신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아무 일도 안 하시고 이런 요구를 하신다면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여러분이 이 사실을 믿는다면 오늘날 우리가 물질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헌금 없이 예배드리겠다는 것은 마치 제물 없이 제사 드리겠다는 것하고 같은 이치입니다. 제물이 없으면 제사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감사 있으면 반드시 감사의 헌금이 있는 겁니다. 입으로만 예배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다 가지고 가야 합니다. 양과 소도 다 가지고 가야 합니다.

요즘 글로벌 정보기술(IT)업계는 “졸면 죽는다”는 신종균 삼성전자 무선사업부 사장의 표현처럼 그야말로 변화무쌍한 환경에 놓여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마이크로소프트사는 올 초에 스마트폰용으로 윈도우 7을 탑재하여 시장을 공략하려고 했지만 이상하게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아이폰과 구글로 양강구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이크로소프트사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최근 마이크로소프트가 무료인터넷전화업체인 스카이프를 전격 인수했는데 이것은 많은 글로벌 경영자들의 머리 속에는 존재하지 않던 변수였습니다. 또한 구글의 운영체제(OS)통합과 크롬 노트북 출시 또한 전 세계 전자업체들의 판도변화에 중요한 요인들입니다.
세상의 경제적인 여건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과 영적인 문제도 비상체제입니다. 스마트폰이 가져다준 문화가 무엇입니까? 즐기는 문화, 개인 문화를 가속화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이런 사회가 우리의 심성을 망가트리고 있습니다. 지켜 내야 합니다. 영혼을 보호해야 합니다.

OECD국가 중에서 청소년 자살율이 제일 높은 나라가 어디인지 아십니까?
뉴질랜드입니다(10만 명당 19.5) . 그 다음이 아일랜드, 핀란드, 폴란드, 캐나다 순입니다.
상위에 있는 나라들은 대부분 선진국입니다. 세계최고의 복지국가입니다. 청소년들이 자기 정체감을 잃고 있습니다. 목적이 없습니다. 삶이 무의미합니다. 그래서 죽는 것입니다. 우리는 할 일이 있습니다. 해야할 사명이 있습니다.

사탄의 그럴듯한 제안을 끊어버릴 때 온전히 하나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사탄의 제안은 언제나 우리의 귀를 솔깃하게 합니다. 그럴듯한 제언을 합니다.
우리가 유혹에 넘어가는, 시험을 받는 요인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교만입니다. 하나는 욕심입니다. 옛 성인들도 하나같이 무를 강조했습니다. 욕심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가지게 되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이 무엇입니까? 교만입니다. 소유하고 있되 교만하지 않다면 그 사람은 된 사람입니다. 우리나라사람의 병폐가 무엇입니까? 잘못된 유교문화로 생긴 교만 아닙니까? 심지어는 신앙도 그 교만 위에 세워지는 경우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서울 강남에 있는 한 교회에서 장로님이 교회주변에 나무를 갖다 심었습니다. 직접 나무를 심으시니까 작업복 차림으로 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러다 삽 자루가 길가에 조금 내려가 있었습니다. 그 길을 들어서던 그 교회 집사님이 고급 승용차에서 내리시더니 장로님을 째려보면서 막 노동하는 사람 취급을 하면서 뭐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 때 저 쪽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한 성도님이 장로님이신 줄 알고 ‘장로님’ 이라고 큰 소리로 아무 이유 없이 불렀습니다. 그 때서야 이 집사님은 장로님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습니다. 장로님이 이 일대의 5000평이 넘는 땅을 가지고 계시고 대기업회장님이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그런 이유를 떠나서도 삽 한 자루 때문에 교회에 오시다 그렇게 신경질 내고 하시면 안되잖아요. 막노동하시는 분이면 어떻습니까? 돈이 없는 분이면 어떻습니까? 무슨 문제가 됩니까? 내려서 삽 자루 치우고 가면 되잖아요. 겸손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늘의 하나님을 믿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마음의 평안을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야고보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5)고 했습니다.
바울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엡 4:22)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막 4:19)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이 욕심을 버리고 사탄의 시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까? 바울은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고 말합니다. 모세가 자기 생각으로 바로에게 나아간 것이 아닙니다. 자기 능력을 바로에게 보여준 것이 아닙니다.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 세상이 여호와께 속한 줄을 왕이 알리이다”(출 9:29). 세상에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탄의 유혹을 벗어나 세상에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하나님이 쓰는 사람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사람은 누군가를 위하여, 어떤 일을 위하여 시간과 정열과 물질을 쏟으며 살아갑니다. 아내는 남편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남편이 자기가 믿던 남편이 아니면 사람은 절망합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하늘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믿는 것은 무엇입니까? 철학적인, 원론적인 질문 같지만 왜 살아갑니까? 제일 좋은 길은, 제일 아름다운 길은, 제일 능력 있는 길은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도구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도구’가 무엇입니까? 도구는 쓰는 사람에게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도구가 자기 마음대로 움직인다면 그것은 도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쓰시고자 할 때, 하나님의 어떤 부족함을 채우려고 우리를 쓰시고자 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무슨 능력이 부족하여 지혜가 부족하여 우리를 쓰시고자 함이 아닙니다. 그분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쓰셨을 때, 모세를 쓰셨을 때, 제자들을 쓰셨을 때 무슨 조언을 구하거나 무엇을 요청한 일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능력이 아니라 모세의 능력이 아니라 다윗의 능력이 아니라 다니엘의 능력이 아니라 제자들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를 만들고 너를 모태에서부터 지어 낸 너를 도와 줄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하지 말라”(사 44:2)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모세에게 제자들에게 가라고 명령하실 때는 이 말씀 속에 무엇이 내포되어 있습니까? ‘약속’입니다. 내가 함께 하겠다는 약속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이 약속을 이해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도구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출 3:11). 모세는 자기의 능력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다릅니까? 모세와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처지와 사정과 무능함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능력을 주어서 사용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나를 바라보면 일을 못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무능함이요 하나님은 능력이십니다. 사탄은 항상 나를 보게 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나를 보면 힘이 빠지고 나의 약함과 한계를 보고 절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능력을 보게 만드십니다. 부어주실 능력을 생각하게 하십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도구’는 누가 사용하느냐 따라 달라집니다. 사탄이 사용하면 나는 사탄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용하시면 하나님의 도구가 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당장 무슨 요술 방망이를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방향이 바뀝니다. 사탄에게로 가던 것이 하나님께로 행합니다. 나만 보았고 세상만 보았는데 하나님을 봅니다. 이전까지는 내 기쁨을 위해 노래방에서 노래를 불렀다면 이제는 하나님을 위해 거룩한 찬양을 드리는 입술로 변하는 겁니다. 폭력을 휘두르는 손이 남을 돕는 손으로 변하는 겁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이 비록 작지만 비록 보잘것없지만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때에 오병이어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지속적인 쓰임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소망하는 것은 단 일회성으로 마치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 날까지 쓰임 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삼손 같은 사람은 처음에는 나실인으로 소개되면서 상당히 비중 있게 소개됩니다. 아마도 예수님 외에는 출생에 대해서 그처럼 많이 소개된 사람은 없습니다. 사무엘보다 더 많이 출생에 대해서 자세히 소개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이 빨리 끝납니다. 그러나 바울 같은 사람은 마지막이 깁니다. 다윗은 소년 때에 부름을 받아서 평생 하나님께 헌신합니다. 목자일 때나 왕일 때에도 변치 않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따랐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사역에 아무 문제없이 잘 진행되는 것 같을 때에도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일이 없는지 점검해 나가야 합니다.

또 본문의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라고 말합니다. 한가지 묻겠습니다. 악인이 형통합니까 안 합니까? “너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지어다”(잠 24:1) 우리는 무조건 세상 사람 보기에 형통하는 삶을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세상 사람이 보기에 미련해 보이나 하나님께 형통하는 삶, 하나님께 쓰임 받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다윗동산에서 곰을 보았습니다. 장로님이 곰 새끼를 우리에서 꺼내어 밖에 다니게 했습니다. 그런데 곰 한 마리가 쓰레기 통에서 뭘 찾아 먹으려고 쓰레기통에 머리를 쳐 박더니 나중에는 아예 쓰레기통을 뒤집어쓰고 있더라구요. 그리고 우리로 들이기 위해서 과자 한 개씩 놓아주니까 그것을 먹으면서 우리에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가더라구요. 곰은 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곰처럼 살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쓰레기통이나 뒤지다가, 저 먹을 것이나 탐내다가 세상을 떠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나의 부족함은 문제가 안됩니다. 하나님이 쓰시면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부모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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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마 19:19)

저의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셨습니다. 저도 알고 보면 참 외롭고 쓸쓸한 사람입니다. 부모님 다 돌아가신 자녀 치고 효자 아닌 자식 없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치 나라 떠나면 다 애국자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인가 봅니다. 저도 다르지 않습니다. 저 자신이 얼마나 부모님께 좋은 자식이었는지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저 같은 자식도 참 드물겠구나 그런 생각을 합니다.
어렸을 때, 청소년 시기에 너무 많이 부모님 속을 썩였습니다. 남들은 한번만 다쳐도 부모님이 가슴아픈 것인데 저는 팔을 얼마나 많이 다쳤는지 모릅니다. 또 그것을 미끼삼아 서울에 치료하려 올 때면 늘 손에 뭘 하나 가지고 가야했습니다. 그 가난했던 시절에 참 부모님께 못할 짓을 한 것입니다.
중학생 때는 2번 이상 가출을 했고요, 학교에서는 정학을 받아 부모님 학교에 불려 가시게 했고요, 자살 소동을 몇 번 일으켰는지 모릅니다.
처음에 예수 믿고도 부활이 안 믿어진다고 제가 죽으려고 했다니까요? 그 바람에 청량리 정신병원에 갔다가 왔지만요. 제가 다 말로 못합니다. 남들은 한가지 하기도 힘든데 저는 안 해본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불효자식 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오늘 설교를 해야하니 이 또한 얼마나 어렵습니까?
저는 설교에 이런 표현 잘 안 쓰려고 하지만 여러분 저를 용서하시는 마음으로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십계명은 하나님께 대한 명령과 사람에게 대한 명령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람에게 대한 명령 중 그 첫 번째가 4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입니다.
본문의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 그 다음에 나오는 5번째 계명이 “살인하지 말라”(출 20:13)입니다. 순서상 하나님은 부모 공경을 앞에다 두었습니다.
“그의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신 27:16)고 했습니다. 사람이 지켜야할 제일 근본이 무엇이냐 그것이 부모공경입니다.
그 절정의 말씀이 신 21:18-21에 나옵니다.
“18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의 아버지의 말이나 그 어머니의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부모가 징계하여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19 그의 부모가 그를 끌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20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면 21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신 21:18-21) 여기에는 용서와 사랑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엄중한 말씀만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사람 취급 안 하십니다.

예수님도 제일 중요한 계명으로
본문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마 19:19)고 하셨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가 첫 번째입니다. 이웃은 그 다음입니다.
바울도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엡 6:1)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골 3:20)고 했습니다.

네 번째 계명의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 20:12)의 “공경하라”(db’K;:카바드)는 ‘풍부하다, 심하다, 많다 또는 무겁다’ 등의 뜻이 있습니다.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창 13:2)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출 4:10)
“수많은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가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출 12:38) 라고 했는데 여기서 “풍부, 잘, 심히 많은”은 모두 ‘카바드’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히브리어의 공경이라는 말은 ‘충분히, 충족히’ 라는 말로 옮길 수 있습니다. 부모님이 이제 되었다 할 정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뜻을 잘 표현한 구절이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를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잠 23:25)입니다. “즐겁게”(jm’v;:싸마흐)는 “쾌할 하게 하다”로 동사입니다.
이 단어가 처음 사용된 곳은 “그의 성호를 자랑하라 여호와를 구하는 자마다 마음이 즐거울지로다”(대상 16:10) “즐거울지로다”에 사용되었습니다.
“여호와여 왕이 주의 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크게 즐거워하리이다”(시 21:1)에서 “즐거워하리이다”입니다.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과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기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기뻐하는 마음으로 부모님을 대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뒤에서 사용된 “기쁘게 하라”(lyGi:길)은 맴돌다, 기뻐하다, 굽실거리며, 두려워하다, 즐거워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성경에 모두 본문을 포함해서 5번나옵니다(대상 16:31, 시 96:11, 사 35:1, 2). 그런데 본문을 제외하고는 모두 하나님의 통치와 창조를 기뻐하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며 모든 나라 중에서는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통치하신다 할지로다”(대상 16:31)라고 했습니다. “너를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것을 하늘이 기뻐하듯이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다.

양주동씨가 작곡한 ‘어머니 마음’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를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오,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없어라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오”라는 말입니다.
그 만큼 어머님은 마음은 하나님 다음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네 번째 계명의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 20:12)의 “공경하라”(db’K;:카바드)로 뒤 돌아가 봅니다. 공경(카바드:충분히)과 신약의 헬리어와 대비할 수 있는 단어가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헬라어의 ‘알라’는 ‘오직, 유일하다’는 뜻이니까 ‘많다’는 의미의 카바드와는 조금 다릅니다.
그 다음에 생각한 단어인데 ‘판타’(모든)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제일 많이 사용했습니다. 사랑이 있기 전에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2-3)에 사용했습니다. 결국 우리의 모든 것(판타)은 사랑 안에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는 15가지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저는 이것을 다 설명할 마음은 없습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것 하나만 말할께요. 무엇일까요?
5절에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입니다. 왜 이것을 좋아하냐 구요? 사실 다른 것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제일 쉬운 것이 아닌가 생각해서입니다. 어렵고 힘든 것부터 할 생각하지 마시고 작다고 생각되는 것부터 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큰 것은 부담스럽잖아요.
지난 금요일 어느 선교 모임에 다녀왔습니다. 제가 가다가 작은 책하나를 사서 읽으며 갔습니다. 그 책을 회의하는 중에 제가 자리를 옮기면서 다른 곳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잠시 후 다른 목사님이 늦게 들어오셨습니다. 제가 잘 아는 분입니다. 그런데 제가 사온 책을 당신의 파일 속에 넣으신 것입니다. 아마 잘 확인하지 않으시고 나누어주는 것인 줄 아셨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 책이 내 것이라고 말을 못하고 그냥 돌아왔습니다. 그 목사님께 조금이라도 무례하게 생각될까 해서입니다. 사실 그 목사님께 제가 더 좋은 것으로 선물을 해드려도 되는 분이거든요.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은사나 기능보다 인격과 품성을 존중한다는 것입니다. 인격과 품성으로 하는 것은 많은 능력과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과부의 두 렙돈은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많은 능력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능력을 보이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부모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인터넷이다 아이패드다 하면서 점점 더 과학만능주의 경제 제일주의로 흘러갑니다. 육체적으로는 잘 살게될지 모르지만 영혼은 타락해 가고 있습니다. 기본이 지켜지질 않고 있습니다.
미국은 1620년 청교도들이 신앙에 자유를 찾아 대서양을 건너 미 대륙을 발견하여 개척 정신 속에 유일신 하나님을 믿으며 철저한 성경공부와 신앙 훈련 속에서 윤리적 실천 규범을 바탕으로 세워졌습니다. 미국이 세워진 것은 신앙과 성경 속에서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960년 캐네디 대통령은 당시에 학교에서 성경공부와 채플시간을 법으로 금지시켜 버렸습니다. 그 후 미국은 세속주의의 길을 걸었습니다. 수많은 문제와 범죄 마약 등 25년 동안 싸웠습니다. 그리고 지난 1984년 7월 25일 레이건 대통령 당시에 다시 법을 만들어 학교에서 성경과 채플시간을 복원 시켰습니다. 과거에 미국의 교육정책은 젊은이들이 성경적 교훈을 모른다면 우리 후손들에게 아무것도 물려 줄 것이 없다고 하면서 교육기간을 통해 요리문답을 교재로 하여 신앙과 윤리교육을 학교에서 실시해 왔었습니다.

1637년 사망한 미스터 존 하버드는 자기 재산을 다 털어 성경학교를 세워 젊은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그 학교가 오늘의 하버드대학교입니다.
존 하버드의 교육이념과 삶의 주된 목적은, 요한복음 17장 3절이었습니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1941년 미국 의회에서 정식으로 요리문답이 교과서 교재로 채택되어 국민교육의 지침서가 되었습니다. 미국인들은 성경을 기본지식으로 살 때 충효사상과 도덕질서는 물론 가정의 화평을 이루고 살게 됩니다. 막스레퍼트 교수는 “위대한 성경에 무지하면서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장님과 함께 어두운 길을 걸어가는 것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미국 사회가 혼탁하게 된 큰 이유는 청교도적 신앙을 잃어버리고 계몽주의와 합리주의 철학의 소산인 자연신론을 따르면서 자유신학 사상이 신앙의 보류인 하버드와 예일대학을 잠식 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공경’을 버린 사회는 삭막한 사회입니다. 근대 사회는 경쟁만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은 공경하라고 말합니다. 특별히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것은 사람의 근본 중에 근본이라는 것입니다.
부모를 버리면 것은 모든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나라도 버리고, 나도 버리고, 하나님도 버리는 행위입니다.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모든 선의 시작입니다. 부모를 공경하여 하나님께도 은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자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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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 거주할 동안에 이 말씀을 알지 못하는 그들의 자녀에게 듣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게 할지니라” (신 31:13)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무서운 게 없는 사람입니다. 예전에는 아기가 울면 달래냐고 밖에 호랑이가 왔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기가 더 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곶감 줄게 울지마 그랬더니 울음을 그쳤습니다. 밖에서 듣고 있던 호랑이는 나보다 더 무서운 게 있구나 하고 도망을 같다는 이야기입니다.
범죄는 누가 저지르기 쉽습니까? 배고 푼 사람이 저지르는 범죄는 빵 때문입니다. 그러나 배부른 사람이 저지르는 죄는 유형이 다릅니다. 애굽의 바로가 하나님을 대항합니다. 자기들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예수님 때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저지르기 쉬운 제일 큰 죄가 무엇입니까? 우월주의입니다. 특권의식입니다. 배고프고 못 배운 자에게서 심각한 문제가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층에게서 문제가 일어납니다. 가진 자에게서 문제가 일어납니다.

교육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게 할지니라”고 합니다. 구약성경에 제일 많이 나오는 단어중의 하나가 ‘경외’(arey::야레)입니다. ‘야레’는 ‘두렵다, 두려워하다’입니다. 하나님이 무서운 분이시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버릇없는 아이는 무서운 것이 없는 아이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버릇없는 사람은 무서운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시 34:9)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무서워할 줄 알면 교육이 다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무서워하지 않으면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는 사람이 됩니다. 세상에서 자기가 왕입니다. 하나님을 무서워하지 않는데 부모는 무서워하겠습니까?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잠 23:17)
“다만 그들이 항상 이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내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신 5:29).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것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안됩니다.

사람이 영원히 살 것 같지만 사실은 금방 죽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는 하루살이와도 같은 것입니다. “너희는 하늘로 눈을 들며 그 아래의 땅을 살피라 하늘이 연기 같이 사라지고 땅이 옷 같이 해어지며 거기에 사는 자들이 하루살이 같이 죽으려니와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공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사 51:6)고 하셨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두고 제일 많이 표현한 단어가 있습니다. ‘반석’입니다. 쉽게 말하면 ‘바위’입니다. 이사야도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나의 반석을 찬송하며 내 구원의 반석이신 하나님을 높일지로다”(삼하 22:47) 하였습니다. 다윗의 블레셋 사람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부른 노래입니다.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냐”(삼하 22:32, 시 18:31)라고 했습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신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사 26:4). 하나님을 왜 바위라고 가르치십니까? 왜 다윗은 그렇게 찬양했습니까? 하나님만이 흔들리지 않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믿을 수 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다 요동치지만 하나님만이 영원하십니다. 흔들리지 아니하십니다.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시 62:7)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흔들리지 않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반석이신 하나님께 있었습니다. 사람을 의지하면 흔들립니다. 세상을 의지하면 흔들립니다. 자신의 건강을 의지하면 흔들립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흔들리지만 하나님은 반석이십니다.

모세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까 영원할 것 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출 18:18에서 모세의 장인인 이드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너와 또 너와 함께 한 이 백성이 필경 기력이 쇠하리니 이 일이 네게 너무 중함이라 네가 혼자 할 수 없으리라”고 합니다. 모세는 각 부장들을 세워 일을 함께 하기 시작했습니다. 혼자서 못합니다. 지금은 하지요.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 반드시 후계자를 세워야 합니다. 자손을 세워야 합니다. 일의 성공의 여부는 사람을 세우는데 달려 있습니다. “말을 낳으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을 낳으면 서울로 보내라”는 말이 있습니다. 큰물에서 놀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크게 키워줄 수 있는 조직이나 환경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기본을 가르쳐라.
모든 원리가 기본에 있습니다. 기본이 충실하지 못하면 무너집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 7:24)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본이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고 했습니다. 우리는 두 가지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 세상을 미끼로 우리를 유혹하는 사탄과 싸움을 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목사의 삶입니다. 어떤 분이 목사도 스님이나 신부처럼 세상을 떠나서 홀가분하게 살면서 영적 수양을 하는 것이 더 성직자의 모습이 아니겠냐고 합니다. 목사는 이중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살지만 성자처럼 살아야 되는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누가 더 쉽겠습니까? 목사가 더 어려운 것입니다. 여러분과 똑 같이 가정을 책임지면서 그 고통과 어려움을 똑같이 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교회가 점점 전원교회 비슷하게 산 속으로만 들어가는 것은 그렇게 바람직한 현상이 아닙니다. 교회는 세상 가운데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 가운데 있지만 영적인 사람을 키워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도 하나님의 일도 다 영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 2:13)고 했습니다. 영적인 것은 세상이 가르칠 수 없는 것입니다. 도덕과 정의 정도는 세상이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나아가는 영적인 사람을 만들기 위하여 교회가 필요한 것입니다.

원리를 가르쳐라.
“여호와여 주의 율례들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끝까지 지키리이다”(시 119:33)고 했습니다. 왜 하나님이 다윗을 사랑했는지 이 한 구절만 가지고도 충분히 설명됩니다. 하나님께서 가르치시는 길, 그 길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 길에 성공이 있습니다. 그 길에 좋은 것이 다 있습니다. 모든 원리가 어디에 들어있겠습니까?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있지 않겠습니까? 성경에 다 들어있습니다. 잘 살기를 원하십니까? 성경을 읽으세요. 복 받기를 원하십니까? 성경을 읽으세요. 자녀교육을 잘 하시기를 원하십니까? 성경을 읽으세요. 다 들어 있습니다.
욥은 “북쪽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아무것도 없는 곳에 매다시며”(욥 26:7)라고 했습니다. 욥은 성경시대 중에서 족장시대로 제일 오래된 지금부터 3,500년 전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이 때 이미 지구가 허공에 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잡은 고기를 주지말고 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라는 것이 유대인 교육의 핵심입니다. “지혜를 얻는 것이 금을 얻는 것보다 얼마나 나은고 명철을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더욱 나으니라”(잠 16:16)
성경을 살아있는 책이라고 말합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성경이 살아있다고 하는 것은 성경을 기록하신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말씀하신 분이 살아 계셔서 그것을 이루어주시기 때문입니다.
빌 2:16에서 “생명의 말씀”이라고 부르고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라고 말합니다.

마취제를 발견한 심프슨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창 2:22)라는 말씀을 읽고 마취제가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1847년 마취제 클로로포름(Chloroform)을 발견했습니다.

습관을 가르쳐라
자녀에게 미치는 부모의 유전적 요인은 두 가지입니다. 생물학적인 유전자를 물려준 것도 있지만 그 다음이 습관입니다. 자녀는 부모처럼 행동하고 부모처럼 삽니다. 처음에는 잘 모르는데 나중에 보면 그렇습니다. ‘배운게 도둑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습관대로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예를 들자면 사람은 다 화가 날 때가 있습니다. 이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몸에 배운 사람은 자기를 잘 다스립니다. 이것 하나만 잘해도 인생이 성공할 수 있습니다. 택민이처럼 번개맨을 하든 화 푸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남을 용서하는 방법, 일찍 일어나기, 회사에 30분 출근하기, 바른 자세 등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습관입니다. 습관이 성공을 부르는 것입니다. 습관은 절대적으로 부모가 자녀에게 미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눅 22:39)라고 합니다. 기도하시는 것이 예수님의 습관입니다. 아버지를 찾는 것이 예수님의 습관입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5)고 바울은 권면합니다. 유럽교회가 부흥하지 못하는 것은 모이기를 패하여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광야에 성막을 만드시고 그곳에 모이라고 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마 4:4) 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원리가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은 천지창조을 하실 때 운행한 하나님의 호흡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입니다.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엄청나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여기에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엡 2:7)고 했습니다. 우리가 가진 복음을 다음세대에 전수하지 못하면 우리는 복음전달에 실패입니다. 멀리 가서 이방사람 구하는 것 다 중요하지만 먼저는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이 어디입니까? 우리집입니다.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꾸만 이스라엘 예루살렘으로 가야한다고 합니다. 거기 가고 안가는 문제가 뭐 그리 중요합니까?

록펠러는 50대 중반에 죽을병이 걸렸습니다. 당시 록펠러는 미국 석유업의 95%까지 지배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의사는 록펠러에게 1년도 살기 힘들다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맨주먹으로 독립을 하고 30대에 오하이오 스탠더드 석유회사를 설립했습니다. 40대에는 철도회사를 병합시켰으며 미국 정유능력의 90%이상을 지배하는 대기업가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되기까지 철저히 자신을 위해 살았습니다.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고용인과 거래처를 무자비하게 착취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공했으나 존경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는 남은 1년의 시간을 남을 위해 살기로 결정했습니다. 자신의 생애를 원망하지 않고 늦었지만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을 위해 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때부터 가는 곳마다 고아원을 세우고 도서관을 세웠습니다. 자신이 모아온 그 모든 돈을 후손들을 위해 쓰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그는 선교사업에도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미국 YMCA도 그의 지원 하에 뻗어나갔습니다. 우리나라도 그의 지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살다 보니까 하나님의 일에 너무 바빠서 죽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98세에 죽었습니다.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신 34:7)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하나님과 함께 살면서 이런 축복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