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어떤 책인가?(권별 강해 서론)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말한 페트릭 헨리 아시지요?
영국의 식민지인 아메리카가 본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기 1년 2개월여 전인 1775년 4월 23일 패트릭 헨리가 버지니아 식민지 의회에서 연설한 것입니다(당시 헨리는 39세의 변호사). 영국은 식민지 주민들의 불만을 무력으로 다스리려 하였고, 견디다 못한 식민지는 마침내 혁명을 꿈꾸게 됩니다. 이 혁명의 폭탄에 도화선 역할을 한 것이 바로 패트릭 헨리의 이 연설입니다. 바로 패트릭 헨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경은 지구상에 출판된 모든 책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했습니다. 구글이 전자 책으로 만든 천만권의 책을 보지 않았어도, 아마존의 그 방대한 책을 보지 않았지만, 애플의 아이패드용 e-book을 보지 않았지만 성경은 보시기를 바랍니다. 패트릭 헨리의 말을 바꾸어 말하면 세상의 모든 책을 다 보아도 성경책을 보지 않았다면 책을 보지 않은 것이라는 겁니다. (더 보기…)

메모리얼 데이(Memorial Day)

미국 전쟁 기념일

한국에 현충일이 있듯이 미국에서 매년 5월의 마지막 월요일은 메모리얼 데이라고 해서 전몰자 추도기념일이 있다. 그러나 이날은 미국인들에게는 ‘감사하는 날’이자 ‘은혜를 잊지 않는 날’이며 동시에 보답하는 날 이기도 하다.
메모리얼 데이는 원래 미국 남북전쟁 당시 사망한 군인들을 기리기 위해 제정되었으나 제1차 세계 대전 이후로 전쟁 등의 군사작전에서 사망한 모든 사람을 기리고 있다. 미국은 호국 영령을 국가적 영예와 존경으로 예우하는 나라이다, 이 같은 한목숨 한목숨의 희생이 밑거름 되어 오늘의 미국이 존재하는 것이다.
미국정부가 한국전 실종 미군 유해를 찾기 위해 엄청난 예산을 들여 북한 전역을 뒤지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자유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오션시티 인근 솔즈베리에 ‘솔즈베리 한인 장로교회’(김동영 목사)가 있다. 김동영 목사는 지난 3월에 한국전 참전용사였던 Leo Cherry씨 연락을 받았다. 벌린시에서 매년 개최되는 메모리얼 데이 퍼레이드에 그랜드 마샬로 수고하게 되는데, 솔즈베리 한인장로교회가 한국을 대표해 문화행사로 참석해 줄 수 있는지 연락을 받은 것이다. 김 목사는 미국에 26년째 살면서 퍼레이드는 처음이어서, Cherry와 준비과정을 이야기하면서 무엇을 기대할지도 몰랐고 금년에는 배우는 입장에서 참석하여, 사물놀이 팀이나 다른 분들을 초청하지 못했고 김남열씨의 부채춤과 교회 벤에 성조기와 태극기 등으로 장식하고 퍼레이드에 참석하였는데, 수많은 기관과 단체들에서 아름다운 장식으로 참여하였다.

한국전쟁은 Forgotten War, 잊혀진 전쟁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을 정도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이다. 남북한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민족이면서 분단 국가를 이루고 있으며 전쟁은 휴전 상태다. 한국전쟁이 있었던 1950년에 20세였다면 오늘 날 80세가 된다. 솔즈베리 시 와이코미코 카운티에서 한국전쟁에 파송 되었다가 사망한 군인들이 10명이라고 한다.
파레이드 때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전사자의 이름을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부르는 데 마음속에 찡한 감동이 있었다고 김 목사는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민주가 공짜가 아니구나! 한번도 만나지 못했던 미국에서 25년 살고 있으면서 이런 사실들 몰랐던 이름들이 나의 오늘 자유와 민주 평화에 대해서 그들이 흘린 피가 있었구나! 전혀 알지도 못했던 그들이 나와 우리 조국을 위해서 이렇게 희생을 했다는 사실이 감사하고 고맙고 또한 미안했었다고 김 목사는 말한다.

@ 이영제 목사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 3:1)

전도를 할 때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하게 됩니다. 이 때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분이시니까 사람의 눈에 보이지는 않으시지만 최고의 신의 개념에서 사람마다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신 데 육신으로 오신 분이라고 우리는 설명합니다. 사실 처음 듣는 사람은 뭔 소리야 할 것입니다. 그래도 한국 사람들은 많이 들어서 교회는 다니지 않아도 대부분은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믿지 않을 뿐입니다.
가끔 혼자서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꼭 이런 방법으로 오셔야 했을까? 우리가 예수님을 증거 하는데 얼마나 어려움이 있는지 하나님은 아시는가? 이렇게 오셨다면 어떻겠습니까?
하늘이 열리고 하얀빛의 형태로 이 땅에 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빛 속에서 음성이 들리는 것입니다. 천둥소리 들어보셨나요? 얼마나 우렁찹니까? 그런 소리로 음성이 들리는 겁니다. 사람들이 벌벌 떨고 누가 말하지 않아도 그분의 음성 소리 한마디에 모두가 무릎을 꿇고 가슴을 조이며 살려달라고 말하게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천군 천사가 나타나 나팔을 불며 바람이 전주곡을 넣고 천사들이 노래한다면 온 세상이 주목하지 않겠습니까?
그분이 하나님이신 데 무슨 방법인들 사용하지 못하시겠습니까?

그런데 실제로는 제 생각과는 정 반대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사실 주목하는 이는 거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다는 소식은 너무 대단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사실 사람들은 몰랐습니다. 마태는 동방에서 박사들이 찾아왔다고 적고 있는데 제가 성경을 부정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 이러한 사실도 다른 사람은 알 수 없었습니다. 누가도 너무 찾다 보니까 목동들이 알았다고는 적고 있지만 이것도 사실 너무 초라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아들이 이 땅에 오신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한 나라의 왕이 자기 땅에 방문만 해도 이런 식으로 영접하고 예우하지는 않습니다. 영접은커녕 자신들의 왕위에 권력에 눈이 멀어 죽이려고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 역할을 해야하는 요셉은 어떻습니까? 아니 아이가 태어날 때가 다 되었는데 여관방 얻을 돈이나 권력조차 가지지 못했습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간신히 마굿간 하나 얻어서 거기서 아이를 낳아야 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알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이요? 하나님의 음성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우리들처럼 10달을 채우셨습니다. 그 기간 동안에 출산 준비를 하고 아무리 호적하러 가는 길이라고 해도 예수님 출생 준비를 해야하는 것 아닙니까? 요셉은 너무 주변머리가 없는 사람입니다. 정말 그냥 목수입니다. 창조주의 아버지가 될 자격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꼭 이런 방법을 선택해야 하셨을까요? 돈이 있거나 학벌이 있거나 권세라도 있는 사람이어야 되는 것 아닙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솔직히 이렇게 오신 하나님이 믿어집니까? 저는 어떤 면에서 믿는 우리가 좀 이상한 사람이고 믿지 못하는 사람이 당연하다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돌아가실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슈퍼스타가 되시려고 했다면 굳이 이런 방법이 필요 없습니다. 먼지가 이는 목수 일을 하시면서, 마리아가 시키는 심부름을 하면서, 이웃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을 보면서, 게으른 농부가 흉작을 하나님 탓으로 돌리는 것을 보면서 이 사람들은 구제불능이야 하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실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견뎌 내셨습니다. 무슨 말로 설명이 되겠습니까? 그분은 ‘사랑’ 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사랑했던 “예수의 품에 누었던 자”라고 소개한 요한은 나중에 그의 책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요한이 무슨 뜻으로 이런 말을 기록했을까요? 예수 안에서 하늘이 뻔쩍이는 것을 보았다는 뜻일까요? 예! 가끔은 몇 번 그런 경험을 하기는 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에서 광채가 번쩍이고 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런 빛이 아닙니다. 그런 영광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그런 경험 해 보셨나요?
초등학교 때 어머님이 몸배 바지를 입고 학교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도시락을 챙겨가지 않았다고 하시면서 가져오신 것입니다. 그것도 수업시간에 문을 두드리며 밖에 서 계신 어머님의 모습을? 학생들은 교실 창문 넘어로 호기심에 다들 쳐다봅니다. 창피해서 어디로 숨고 싶을 지경입니다. 정말 밥 안 먹어도 산다고 소리치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리고 집에 가서 따지고 듭니다. “엄마 학교에 왜와. 다시는 오지마!” 그러면서 소리를 지릅니다. 어머니는 조용히 “너 배 고플까봐” 그런 어머니의 마음을 아십니까? 나중에 이 아이는 커서 어머니의 심정을 알고 어머니를 그리워합니다. 자 한가지 묻겠습니다? 어머니의 얼굴에서 광채가 났나요? 그런 건 없습니다. 굳이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그 사랑은 서낭당 벽에 그려진 산신령보다 좌불상을 하고 앉아있는 그 형상보다 더 위대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어머니이시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나중에 생각해 보니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그 시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은 그 영광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그 영광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오히려 그를 비웃었습니다(마 9:24). 예수님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5)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그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요 10:20)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마 27:39) 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어야 할 유대인 중 바리새파 약 70%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청지기 비유를 듣고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눅 16:14) 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반응에 대해서 이미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였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3)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받으신 멸시를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 1:10-11)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박수를 쳐주어도 그 모욕과 고통은 참기가 힘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그 길을 가셨을까요?
리 아이엘피는 그 대답을 알지도 모릅니다. 그는 뉴욕시의 은퇴한 소방관입니다. 뉴욕시를 위해 26년 간 소방관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의 아들 조나단 아이엘피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뉴욕시 소방관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2001년 9월 11일에 세계무역센터가 테러로 무너질 때 그의 아들 조나단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죽은 아들의 시체를 찾기 위해 석달를 찾아 헤맸습니다. 12월 11일 화요일에 조나단의 시신이 공동묘지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리 아이엘피는 아들의 시신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아버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아니면 그 시신을 왜 찾겠습니까? 세계무역센타가 무너질 때 조나단 아이엘피는 죽었습니다. 나도 죽었습니다. 죄로 무너진 건물더미에 깔려 죽어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오신 것입니다. 나를 너무도 사랑하시기에…

사랑은 모든 견딥니다. 번개의 빛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렛소리 같은 하나님의 음성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이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고 말합니다.
사랑은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영원의 세계로부터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사랑이 먼 길이 막지 못했습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3:5)고 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창조물의 모든 짐을 지고 방주에 올랐습니다. 우리가 그 무게를 짐작이나 하겠습니까? 우리나라에서도 멸종되는 보호 동물, 식물을 발표하였습니다. 환경부는 열목어 등 59종을 새롭게 멸종위기종으로 지정했습니다. 새롭게 지정된 안에 따르면 개체수가 급격히 줄고 있는 열목어, 따오기, 수원청개구리, 노란산잠자리, 염주알 다슬기, 각시수련, 화경버섯 등 59종의 동식물을 신규 멸종위기종 지정 대상으로 정했습니다. 수원 청개구리 보시면 잘 돌봐 주세요.

이제 그것이 죽으면 이 땅에 그런 동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노아가 소를 죽였다면 우리는 오늘날 우리는 소고기를 못 먹었을 것입니다. 방주의 문을 닫고 들어가 40일을 비가 쏟아지는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방주의 문도 열어보지 못하고 있던 어느 날 방주는 턱 하고 어딘가 걸려 머물러 섰습니다. 그리고 꼭대기 창을 열고 하늘을 보았습니다. 다행히 하늘을 맑게 개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디가 어딘지 도무지 알 수 없었습니다. 온통 사방이 물입니다. 물에 고립되었습니다. 내려갈 수가 없습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막막합니다. 까마귀를 내어보냈는데 돌아오지 않습니다. 어디로 날아갔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비둘기를 내어보냈습니다. 비둘기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이제 방주의 문을 닫고 그만 포기하려고 하는데 저 쪽에 비둘기 모습이 보입니다.
이 장면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나무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줄어든 줄을 알았으며”(창 8:11) 라고 했습니다. 홍수로 섬에 고립된 사람들에게 헬리콥터 소리만 들려도 소망이 생깁니다. 암 환자에게 ‘종양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라는 말에서 소망이 들립니다. 파릇 파릇 올라오는 연한 올리브나무 잎을 물고 온 비둘기는 노아에게 소망의 징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소식은 우리에게 사방에 물로 갇혀있는 노아의 심정보다 더한 것입니다. 어느 곳을 보아도 인간에게 소망은 보이지 않습니다. 생각이 있었던 몇 사람들은 사람은 선하게 살아야 된다. 도덕적으로 살아야 한다 등의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밑바닥에 죄가 깔려있는 사람들에게 아무리 도덕을 강조하고 선을 말해도 선해지지 않으며 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비둘기가 저녁때 물고 온 올리브나무의 새 잎입니다. 소망입니다. 이제는 살 수 있습니다. 이제는 희망이 생겼습니다. 치료의 방법이 보이지 않았지만 이제 그 해결책을 찾은 것입니다. 이 기쁨을 말라기 선지자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 4:2)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구절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입니다. 말씀도 한 절 한 절 깊이 생각하면 은혜가 됩니다. 여러분! 아무리 보아도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깊은 은혜를 맞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설렁탕, 곰탕 같습니다.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농부들이 밭을 간 경험이 없는 소를 훈련시킬 때 이렇게 했습니다. 경험이 많은 소에다 나무로 만든 마구를 달아 멍에를 함께 지도록 한 것입니다. 경험이 많은 늙은 소에게는 마구를 단 끈을 단단히 맵니다. 그 소에게 짐이 더 실리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나 젊은 소에게는 끈을 느슨하게 묶습니다. 함께 걸어가지만 지고 가는 짐이 가벼운 것입니다.
훈련소에서 통나무 들었다 놓았다 하는 것이 있습니다. 키가 큰 사람이 제일 힘듭니다. 그런데 가운데 키 작은 사람이 끼어 있으면 그냥 앉았다 일어서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면 그분이 무거운 짐은 다 지시는 것입니다. 나는 그냥 그분 옆에서 걸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다윗의 시로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지혜 있는 자들은 이러한 일들을 지켜 보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시 107:43)
다시 번역하여 보겠습니다. “슬기로운 이 그 어디 있어 이 일 찬찬히 바라보며 한결 같이 따스하게 아껴 주시는 여호와 주님의 사랑 깨달을 수 있으랴”
최고의 사랑이 어디에 있습니까? 최고의 아름다움이 어디에 있습니까? 주님의 사랑에 있습니다. 십자가에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성경을 사랑합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시며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거기에 믿음, 소망, 사랑이 있습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성령이 계시네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 14:26)

몇 일 전에 어떤 분이 전화를 하셔서 “목사님 신령한 기도원 아시는데 있으면 소개시켜 주세요?” 그러시는 겁니다. 제가 요즘 기도원을 잘 안 다니니까 신령한 기도원이 어디인지 잘 모릅니다. 여러분은 신령한 기도원 아시는데 있으십니까?
신령한 기도원이 어디 있는지는 잘 몰라도 신령하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신령’은 모든 종교에서 사용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에 우리 식으로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영’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신령’으로 번역된 모든 말도 ‘하나님의 영’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성령’입니다. 그러면 성령을 어떻게 받을 수 있나 하는 문제입니다. 이것만 받으면 끝납니다. 이것만 있으면 됩니다.
귀신의 영을 받으면 귀신이 하라는 대로합니다. 귀신의 종이 되어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을 받으면 하나님처럼 삽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삽니다. ‘영’이 중요합니다. 모든 것이 ‘영’의 문제입니다.
바울은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고전 12:1)라고 말합니다. 신령한 것을 알아야 합니다. 체험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길을 제시하여 왔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사이에서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신비로운 체험이냐 아니면 우리가 노력해서 깨달은 결론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신비로운 체험만 강조하게 되면 직통계시자가 됩니다. 그리고 성경을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꿈꾸고 계시 받고 한 것이 다입니다. 그것만 믿고 따릅니다. 그것이 직통계시자입니다.
또한 부류는 자기들이 노력해서 얻어내려고 하는 일종의 학구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들의 머리로 얻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론을 만들어 냅니다. 머리 나쁜 사람은 구원 얻기도 힘든 것입니다. 지식적 가르침이 마치 다 인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인본주의 자들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어떻게 해야 됩니까?
어떤 분이 또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두 가지 모두가 문제가 있으니 그냥 있으면 되는 겁니까?” 그러실 것입니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성령’을 받는 문제나 구원의 문제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칼빈주의입니다. 흔히 절대 예정론이라고 합니다.
예례미야는 “작은 산들과 큰 산 위에서 떠드는 것은 참으로 헛된 일이라 이스라엘의 구원은 진실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있나이다”(렘 3:23)라고 했습니다.
이사야는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사 45:15)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시 80:3)라고 말합니다.
요한은 계시록에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계 7:10) 라고 했습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까? 성령을 주시는 문제, 구원을 베풀어주시는 문제가 하나님께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사실은 알았습니다. 구원을 받는 문제. 성령을 받는 문제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든, 성경을 보든, 선한 행실을 하든 그것만 가지고 다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움직이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게 해 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방법을 동원해도 하나님이 ‘아니다’ 하시면 그만입니다. 무슨 대학에서 공부하고 세상철학을 다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21세기에도 여전히 믿지 못할 사건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머리로만 이해할 수 있는 일이 발생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계속 일어납니다. 확률로 따지면 0.1%의 정도일거라고 합니다.

2011년 3월 11일 발생한 일본 도호쿠(東北) 대지진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일본에 아무리 지진이 많이 일어 났어도 규모 9.0의 강진이 일본을 덮친 것은 기록이 남아 있는 한 처음이었습니다. 믿기 어려운 일이 우리 눈앞에 펼쳐진 것입니다. 지금까지 확인된 사망자만 1만5,200여명. 행방을 알 수 없는 이도 8,600명이 넘습니다. 더군다나 후쿠시마(福島) 제1원전 폭발 사고로 막대한 양의 방사성 물질이 방출되며 그 피해는 수 백년 후까지 이어질 수도 있다고 합니다.

10년 전 미국 뉴욕 맨해튼의 110층 짜리 세계무역센터(WTC) 쌍둥이 건물을 무너뜨린 9ㆍ11 테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세계 초강대국의 심장부를 공격한 이는 ‘소련’도 아닌, 외계인도 아닌 이슬람 테러 조직 알 카에다였습니다. 허드슨강이 내려다 보이는 세계무역센터 사무실에서 근무하다 비행기가 건물을 들이받는 바람에 비명횡사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당시 희생자는 무려 5,000명이 넘었습니다.

실제로 사람들의 삶과 세상의 모습을 바꿔 놓은 역사적 사건은 대부분 기존 경험으론 예측하기가 불가능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확률로 따지면 발생 가능성 0.1%에 불과하나, 일단 일어나면 세상을 그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 이런 사건ㆍ사고들에 검은 백조, ‘블랙스완’(Black Swan)이란 표현이 붙여졌습니다.
이 이론은 18세기 호주에서 검은 백조가 발견되기 전까지 백조는 모두 흰색이란 믿음이 의심받은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블랙스완의 발견은 이러한 고정 관념을 한 순간에 무너뜨리기에 충분했습니다. 수천 년 동안 수백만 마리의 흰 백조를 보면서 견고히 다져진 이론이 검은 백조 한 마리에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블랙스완 이론을 설명할 때 자주 인용되는 칠면조 우화가 있습니다. 푸줏간 주인이 1,000일 동안 매일 맛있는 먹이를 주면서 정성껏 돌보자 칠면조는 주인이 자신을 끔찍이 사랑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1,001일째 되던 날 칠면조는 먹이가 아닌 식칼을 받습니다. 그 날이 추수감사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예측 가능한 일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모릅니다. 내일 일을 모릅니다. 하나님 앞에서 다 아는 것처럼 행동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 맡기세요. 주님과 함께 일하세요.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고 했습니다.

감사한 것은 요한은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7)고 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고 했습니다. 사탄은 우리가 구원받는데 방해를 하지만 하나님은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자 그럼 방법을 하나 찾은 것 같습니다.

신비로운 체험이든지 아니면 우리가 노력해서 깨달은 것이든지 무엇이든지 구원받기를 원하고 하나님을 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천국은 마치…” 하시면서 비유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마 13:45)라고 하셨습니다. 장사를 안 해본 분들은 잘 모릅니다. 장사꾼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좋은 물건을 확보하는 일입니다. 좋은 물건만 있으면 그냥 팔립니다. 파는 것은 문제가 안됩니다. 좋은 물건 구하기 원하는 것 같이 간절히 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빠져 사는 사람은 영혼을 구원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냥 세상이 저를 구원해 주지 못하는데 아무 준비 없이 살다가 죽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지만 구원을 준비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바로 이 구원을 원하고 하나님을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증거가 무엇입니까?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은 예수님께서 보내주신 영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육체로 오셔서 33년 동안 이 땅에 계셨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는 오순절 날 이후 현재까지 함께 하십니다. 우리를 도와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7)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을 원하는 사람에게 당신을 보여 주셨습니다. 당신을 찾는 사람에게는 나타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서 성령을 찾지 않은 것입니다. 또 한가지는 내 욕심을 채우려고 성령을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나를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욕심을 가지고 나아가는 자는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부활 후 승천하시면서 약속하신 것이 있습니다. “곧 성령이 임하실 것이니 기다리고 있다가 성령을 받으라”(행 1:4-5). 이것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사도행전의 약속입니다. 사도행전은 성령을 받은 후에 시작된 것입니다. ‘성령’ 없는 사도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성령을 받은 후에 다 복음을 전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보실 때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저는 선교사님들을 오랫동안 경험해 왔습니다. 이런 말씀드리기는 죄송스럽습니다만 어떤 분은 좀 성격이 이상합니다. 그래 도요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모두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용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성령께서는 이런 일들을 하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을 알게 합니다.
본문을 보면 “성령이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아니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전 12:3)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은 알게 하시고 고백하게 하고 만나게 하고 믿게 하시는 영이십니다. 베드로가 “주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을 때 주님은 “이것은 네가 안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알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지식은 보잘것없고 한계가 있습니다. 더구나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는 더욱 무지합니다. 내가 안다는 것은 아주 보잘것없는 차원의 앎입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 8:16)라고 합니다.

제가 목사 안수 받기 전에 고민한 것 하나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의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입니다. 한 두 가지만 가르치라고 하면 어떻게 해 보겠는데 ‘모든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해답이 어디서 나옵니까?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입니다. 내가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내가 하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성령이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성경을 보고, 내가 깨달아, 내가 가르쳐야 하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냥 우리는 성령이 하시도록 내어 드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분이 하시도록 하면 됩니다.

성령은 성경 말씀을 깨닫게 합니다.
성경은 영감의 책입니다. 성경을 기록한 사람은 사람이지만 원 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이 말씀을 읽을 때 영감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동시에 이 말씀을 읽을 때 성령이 임하시고 거듭나게 하시고 영적 성장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책이기 때문에 읽을 때 깨닫게 되고 이해하게 됩니다. 때로 성경을 읽어도 이것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또 설교를 들어도 무슨 말인지 도대체 모를 때가 있습니다. 새 신자들에게는 이 두 가지는 모두 어려운 문제들입니다. 성경을 읽으라고 해서 읽으니 도무지 알 수가 없고 잠만 쏟아지는 경험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성경을 수면제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의사 분은 불면증 환자에게 처방전으로 “잠이 안 올 때 성경을 보세요?” 그런 답니다. 좋은 것 같아요? 이해가 어려워서 잠을 자게 되면 불면증이 치료되어서 좋고,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셔서 성경을 깨닫게 되면 그건 더 할렐루야입니다.
성령만 받으면 되었지 왜 성경을 또 봅니까? 이렇게 질문하실 지 모르겠습니다. 성령이 소멸됩니까 안됩니까? 소멸됩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살전 5:19)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충만 이라는 말도 씁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10)
말씀을 읽을 때 주어지는 은혜와 능력을 체험해야 합니다. 말씀 속에서 힘이 나옵니다. 은혜가 넘쳐흐릅니다. 성령을 받으면 내면에서 힘이 솟아납니다.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성령은 교회를 세우십니다.
현재 전 세계에 600백만 개의 교회가 있습니다. 매주 2천여 개 씩 교회가 개척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재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그곳에 성령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교회가 세워져야 사람들이 모입니다. 기도하게 됩니다. 서로 교통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마음을 합하여 기도하고 봉사하고 말씀을 들을 때 그 가운데 성령도 함께 역사 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가 교회를 세우리라”(마 16:18)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 3장에서 “나는 심었고 아불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신다”(고전 3:6-7)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교회에서 교회의 주체는 사람이 아니고 성령이라는 말씀입니다. 아볼라가 아니고 바울이 아닙니다. 성령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단순한 도구일 뿐이고 성령이 나를 통해서 사역하시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때 사람들은 교만의 극치였습니다. 나라가 다 망해 가는데도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 때 예레미야는 이렇게 외칩니다.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3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24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9:23-24)

우리 그리스도인의 힘은 외적 힘이 아니고 성령의 내적 파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라고 외쳤습니다. 우리의 힘이 성령에 있는 줄 믿습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영생의 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 (요일 5:8)

어떤 분들은 사람은 죽으면 끝이다. 그 다음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럽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9)고 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이 땅에 여행 나온 사람처럼 말합니다. 돌아갈 곳이 있다고 말합니다. 여행은 기쁘고 즐거워야 합니다. 그리고 여행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어디를 가면 그곳에 갔다 오기 위해서 여러 가지 준비도 하고 계획도 세웁니다. 그리고 그 시간을 알차게 보내려고 노력합니다.
무엇보다 여행은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 초등학교 때 소풍한번 안 가본 사람 없을 겁니다. 소풍가기 전날 그렇게 잠이 안 옵니다. 그리고 소풍가는 날, 내일 비가 안 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 땅에 소풍 나온 사람입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돌아갈 것입니다. 아버지 집으로 말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 3:11)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추한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입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을 흉가라고 합니다. 보기 싫게 됩니다. 집에는 사람이 살아야 됩니다. 그리고 이보다 더 추한 것이 있습니다. 더 흉한 것이 있습니다. 영혼이 없는 육체입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이 없는, 주님이 없는 육체입니다. 빈집보다 더 흉합니다. 사탄들이 우글거립니다.

“발은 땅에, 머리는 하늘에”라는 서양 속담이 있습니다. 현재는 이 땅에 몸담고 살아가고 있지만 영혼이 돌아갈 본향을 위해 언제나 주님의 나라를 사모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행이 아무리 좋아도 언젠가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이 우리의 인생이 아무리 재미있어도 언젠가는 돌아갑니다.
그러므로 영원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이 땅에 현세적 이익과 재미만에 묻혀 살아가는 것은 건강한 영혼을 소유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동시에 여행을 하는데 거기에 충실해야지 어떤 사람은 여행을 왔는데 집 걱정만 하다가 갑니다. 그러면 여행이 재미없습니다. 제가 강조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균형감각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영혼을 사모하지만 이 땅의 삶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나의 영혼의 미래를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지금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계속해서 던져야 합니다. 여행 나온 사람이 돌아갈 집만 걱정하고 있으면 여행이 재미가 없고 망가집니다. 그렇다고 여행이 영원한 것처럼 살아서도 안됩니다. 치우치지 않는 균형 잡힌 신앙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북한에서 먼저 말했잖아요. 남한이 ‘통큰 지원’ 해 달라고요. 그러고는 정작 자기들은 통큰 것 하나 안 하는 겁니다. 남보고는 통큰 것을 강조화면서 정작 자기 자신은 열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먼저 통 큰일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손을 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사랑합니다. 왜요? 여기에 다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저는 노자도 공자도 좋아합니다. 후대에 사람들이 그들을 우상화해서 믿는 도교(노자), 유교(공자)를 좋아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들이 말한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에 비하면 아주 작은 것을 말한 것에 불과합니다. 전도서 정도에 해당한다고 보면 됩니다. 그러나 성경이 전도서만 있습니까? 성경은 창세기가 나옵니다. 세상 어디에 창세기가 있단 말입니까? 요한은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요일 2:13)라고 했습니다.
또한 성경은 마지막 때에 이루어질 계시록이 나옵니다. 세상 어디에 계시록이 있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최고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선물을 아직 풀러보지도 않은 사람이 많은 겁니다. 무엇이 있는지도 몰라요.

현대인의 최대 관심사는 건강입니다. 미국 잡지사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예수 믿는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보다 수명이 길었고 기독교인이 천주교인보다 오래 살았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 믿는 사람이 찬송을 많이 부르기 때문이고 기독교인이 천주교인보다 찬송을 많이 부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샘물이 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사마리아 여자를 만나서 예수께서 긴 대화를 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주제가 영생입니다. 충만입니다. 건강을 넘어서 영생입니다. 영생할 수 있다면 솔직히 인간은 더 바랄 것이 없는 것입니다. 진시황이 꿈꿨던 것입니다. 저 피라미드들이 꿈꿨던 것입니다. 우리는 압니다. 불로초가 무엇인지, 피라밋이 무엇인지? 예수님의 십자가가 불로초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피라밋이었습니다.

중국의 노자는 인간에게 최고의 선은 물이다라고 했습니다. 노자가 예수를 알고 이야기했겠습니까? 노자는 춘추시대(기원전 770년 주(周)왕조의 천도 후부터 기원전 221년 진 시황제(秦始皇帝)의 통일까지를 말한다.) 초(楚)나라 때 인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살다간 그의 출생일과 사망일 등은 알 수 없습니다. 예수 탄생이전의 인물입니다. 만일 그가 예수를 만났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가 말한 물은 최고의 도에 경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물의 특징은 누가 막으면 막힌다는 것입니다. 자연의 이치에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은 영원히 가두어 둘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은 차면 넘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은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단 한번도 위로 흐르는 적이 없습니다. 또한 물은 스며들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다 들어갑니다.
강태공은 그를 버린 아내를 만났을 때 항아리의 물을 쏟으라 하고 다시 담으라고 했습니다. 물을 다시 담지 못하듯 당신과 합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물은 이렇게 진리와 연관되어 사용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영생을 물에 비교하셨습니다. 왜 그랬을 까요? 앞에서 말씀드린 노자와 같은 맥락에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차원이 다릅니다. 심지어는 구약과 신약이 차원이 다릅니다. 구약이 어렵습니까? 신약이 어렵습니까? 신약이 어려운 겁니다. 구약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입니다. 구약이 어렵다는 분은 책이 두꺼우니까 어렵게 보이는 것입니다. 옛날 이야기니까 어렵게 보입니다. 언어가 히브리어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어렵게 보이는 겁니다. 그러나 사실은 신약이 어려운 겁니다. 차원이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어려운 겁니다.

먼저 본문을 다시 보겠습니다.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요일 5:8)고 했습니다. 마치 삼위 일체처럼 세 가지가 함께 나타납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령과 피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물을 관과하고 있습니다. 별로 중요하게 다루지 않고 있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본문 위에 있는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요일 5:6)고 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고 말합니다. ‘물’이 먼저 나옵니다,

세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물이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피만 흘리신 것이 아닙니다. 물도 흘리셨습니다. 물은 눈으로 나옵니다. 사람이 감동할 때 슬플 때 눈물이 나옵니다. 피는 상처가 나야만 나오지만 물은 감정에 의해서 나옵니다. 회개의 상징이 무엇입니까? 눈물입니다. 콧물입니다. 어떤 사람은 침도 질질 흘립니다. 너무 좋으면 다 나옵니다.

둘째는 보편성입니다.
물은 누구에게나 필요합니다. 물이 필요하지 않은 분계십니까? 물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서양에는 거북이 신자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새는 먹지 않고 9일을 살 수 있습니다. 개는 먹지 않고 20일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거북이는 먹지 않고도 무려 500일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크리스찬이라고 하면서도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 않고 신앙 생활하는 사람을 거북이 신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밥은 안 먹어도 물은 마셔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샘물, 영원, 근원입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고 하셨습니다.

물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바다 속의 물고기만 물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도 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필요가 절대적인 것입니다.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 없이는 죽습니다. 물 없으면 죽습니다. 물은 사치품이 아닙니다. 꼭 필요합니다. 영생은 그런 것입니다. 영생은 누구에게나 필요합니다. 바로 그것이 물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진정한 갈증을 풀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솟아나는 샘물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가 생명의 근원이셨던 것입니다. 예수만이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 보다 더 큰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최고의 영광, 축복, 기쁨, 행복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것,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셔서 그 안에 살아가는 것 보다 더 영광스러움은 없습니다.
그 이상은 없습니다. 모두 다 그 아래 입니다. 예수 믿는 거 이상의 성공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성공을 해서 축복을 받았다고 할 찌라도 하나님을 믿는 축복 같은 이 복을 이 세상에서는 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 안에서 보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시시합니다. 사도 바울은 배설물 같다고 했습니다. 대단한 거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돈을 벌어도 좋고, 안 벌어도 좋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그 하나 때문에 죽고 살고 일이 벌어지는데, 그러나 우리는 그런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성경구절 하나 말씀드립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3:5) 자 잘 보세요? 앞에만 말하면 이해가 안됩니다. 뒤에을 보아야 합니다. 왜? 돈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지를 말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떠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욕망은 만족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물질은 결코 우리의 목마름을 해결 할 수 없습니다. 쾌락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금 더 재미있는 것, 조금 더 자극적인 것.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만족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께는 만족함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충만한 것입니다. 충만이 무엇입니까? 만족이 극에 달한 것입니다. 그것이 충만입니다. 성령이 우리를 충만케 하십니다. 충만하다고 해 놓고는 또 돈 이야기를 합니다.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충만하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예수께서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 그리고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물은 무엇입니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 그것은 곧 영생인 것입니다.

우리 속에는 두 개의 내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고 그 뜻을 따르며 살고자하는 내가 있고 유혹을 따르고 악을 따르며 살고 싶어하는 내가 있습니다. 바울 사도 역시 두 개의 자아가 서로 싸우고 있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이길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야합니다.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7)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고 했습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고 했습니다. “지나간다”는 말을 주목하십시다. 이 세상의 것은 열차 차창 밖으로 풍경이 지나가듯 모든 것들은 지나갑니다. 권력도, 성공도, 부귀도, 영광도 아름다움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유행을 타선 안 되는 것, 유행에 휩쓸리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진리이입니다. 성령과 물과 피입니다. 예수께서 생수의 근원이십니다.
본문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 하나가 어디에 있습니까? 성령과 물과 피가 모두 예수께 있습니다. 이 예수를 믿어 영생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