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 14:26)
몇 일 전에 어떤 분이 전화를 하셔서 “목사님 신령한 기도원 아시는데 있으면 소개시켜 주세요?” 그러시는 겁니다. 제가 요즘 기도원을 잘 안 다니니까 신령한 기도원이 어디인지 잘 모릅니다. 여러분은 신령한 기도원 아시는데 있으십니까?
신령한 기도원이 어디 있는지는 잘 몰라도 신령하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신령’은 모든 종교에서 사용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에 우리 식으로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영’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신령’으로 번역된 모든 말도 ‘하나님의 영’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성령’입니다. 그러면 성령을 어떻게 받을 수 있나 하는 문제입니다. 이것만 받으면 끝납니다. 이것만 있으면 됩니다.
귀신의 영을 받으면 귀신이 하라는 대로합니다. 귀신의 종이 되어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을 받으면 하나님처럼 삽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삽니다. ‘영’이 중요합니다. 모든 것이 ‘영’의 문제입니다.
바울은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고전 12:1)라고 말합니다. 신령한 것을 알아야 합니다. 체험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길을 제시하여 왔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사이에서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신비로운 체험이냐 아니면 우리가 노력해서 깨달은 결론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신비로운 체험만 강조하게 되면 직통계시자가 됩니다. 그리고 성경을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꿈꾸고 계시 받고 한 것이 다입니다. 그것만 믿고 따릅니다. 그것이 직통계시자입니다.
또한 부류는 자기들이 노력해서 얻어내려고 하는 일종의 학구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들의 머리로 얻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론을 만들어 냅니다. 머리 나쁜 사람은 구원 얻기도 힘든 것입니다. 지식적 가르침이 마치 다 인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인본주의 자들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어떻게 해야 됩니까?
어떤 분이 또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두 가지 모두가 문제가 있으니 그냥 있으면 되는 겁니까?” 그러실 것입니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성령’을 받는 문제나 구원의 문제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칼빈주의입니다. 흔히 절대 예정론이라고 합니다.
예례미야는 “작은 산들과 큰 산 위에서 떠드는 것은 참으로 헛된 일이라 이스라엘의 구원은 진실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있나이다”(렘 3:23)라고 했습니다.
이사야는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사 45:15)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시 80:3)라고 말합니다.
요한은 계시록에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계 7:10) 라고 했습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까? 성령을 주시는 문제, 구원을 베풀어주시는 문제가 하나님께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사실은 알았습니다. 구원을 받는 문제. 성령을 받는 문제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든, 성경을 보든, 선한 행실을 하든 그것만 가지고 다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움직이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게 해 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방법을 동원해도 하나님이 ‘아니다’ 하시면 그만입니다. 무슨 대학에서 공부하고 세상철학을 다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21세기에도 여전히 믿지 못할 사건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머리로만 이해할 수 있는 일이 발생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계속 일어납니다. 확률로 따지면 0.1%의 정도일거라고 합니다.
2011년 3월 11일 발생한 일본 도호쿠(東北) 대지진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일본에 아무리 지진이 많이 일어 났어도 규모 9.0의 강진이 일본을 덮친 것은 기록이 남아 있는 한 처음이었습니다. 믿기 어려운 일이 우리 눈앞에 펼쳐진 것입니다. 지금까지 확인된 사망자만 1만5,200여명. 행방을 알 수 없는 이도 8,600명이 넘습니다. 더군다나 후쿠시마(福島) 제1원전 폭발 사고로 막대한 양의 방사성 물질이 방출되며 그 피해는 수 백년 후까지 이어질 수도 있다고 합니다.
10년 전 미국 뉴욕 맨해튼의 110층 짜리 세계무역센터(WTC) 쌍둥이 건물을 무너뜨린 9ㆍ11 테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세계 초강대국의 심장부를 공격한 이는 ‘소련’도 아닌, 외계인도 아닌 이슬람 테러 조직 알 카에다였습니다. 허드슨강이 내려다 보이는 세계무역센터 사무실에서 근무하다 비행기가 건물을 들이받는 바람에 비명횡사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당시 희생자는 무려 5,000명이 넘었습니다.
실제로 사람들의 삶과 세상의 모습을 바꿔 놓은 역사적 사건은 대부분 기존 경험으론 예측하기가 불가능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확률로 따지면 발생 가능성 0.1%에 불과하나, 일단 일어나면 세상을 그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 이런 사건ㆍ사고들에 검은 백조, ‘블랙스완’(Black Swan)이란 표현이 붙여졌습니다.
이 이론은 18세기 호주에서 검은 백조가 발견되기 전까지 백조는 모두 흰색이란 믿음이 의심받은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블랙스완의 발견은 이러한 고정 관념을 한 순간에 무너뜨리기에 충분했습니다. 수천 년 동안 수백만 마리의 흰 백조를 보면서 견고히 다져진 이론이 검은 백조 한 마리에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블랙스완 이론을 설명할 때 자주 인용되는 칠면조 우화가 있습니다. 푸줏간 주인이 1,000일 동안 매일 맛있는 먹이를 주면서 정성껏 돌보자 칠면조는 주인이 자신을 끔찍이 사랑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1,001일째 되던 날 칠면조는 먹이가 아닌 식칼을 받습니다. 그 날이 추수감사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예측 가능한 일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모릅니다. 내일 일을 모릅니다. 하나님 앞에서 다 아는 것처럼 행동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 맡기세요. 주님과 함께 일하세요.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고 했습니다.
감사한 것은 요한은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7)고 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고 했습니다. 사탄은 우리가 구원받는데 방해를 하지만 하나님은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자 그럼 방법을 하나 찾은 것 같습니다.
신비로운 체험이든지 아니면 우리가 노력해서 깨달은 것이든지 무엇이든지 구원받기를 원하고 하나님을 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천국은 마치…” 하시면서 비유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마 13:45)라고 하셨습니다. 장사를 안 해본 분들은 잘 모릅니다. 장사꾼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좋은 물건을 확보하는 일입니다. 좋은 물건만 있으면 그냥 팔립니다. 파는 것은 문제가 안됩니다. 좋은 물건 구하기 원하는 것 같이 간절히 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빠져 사는 사람은 영혼을 구원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냥 세상이 저를 구원해 주지 못하는데 아무 준비 없이 살다가 죽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지만 구원을 준비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바로 이 구원을 원하고 하나님을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증거가 무엇입니까?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은 예수님께서 보내주신 영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육체로 오셔서 33년 동안 이 땅에 계셨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는 오순절 날 이후 현재까지 함께 하십니다. 우리를 도와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7)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을 원하는 사람에게 당신을 보여 주셨습니다. 당신을 찾는 사람에게는 나타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서 성령을 찾지 않은 것입니다. 또 한가지는 내 욕심을 채우려고 성령을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나를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욕심을 가지고 나아가는 자는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부활 후 승천하시면서 약속하신 것이 있습니다. “곧 성령이 임하실 것이니 기다리고 있다가 성령을 받으라”(행 1:4-5). 이것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사도행전의 약속입니다. 사도행전은 성령을 받은 후에 시작된 것입니다. ‘성령’ 없는 사도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성령을 받은 후에 다 복음을 전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보실 때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저는 선교사님들을 오랫동안 경험해 왔습니다. 이런 말씀드리기는 죄송스럽습니다만 어떤 분은 좀 성격이 이상합니다. 그래 도요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모두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용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성령께서는 이런 일들을 하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을 알게 합니다.
본문을 보면 “성령이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아니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전 12:3)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은 알게 하시고 고백하게 하고 만나게 하고 믿게 하시는 영이십니다. 베드로가 “주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을 때 주님은 “이것은 네가 안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알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지식은 보잘것없고 한계가 있습니다. 더구나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는 더욱 무지합니다. 내가 안다는 것은 아주 보잘것없는 차원의 앎입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 8:16)라고 합니다.
제가 목사 안수 받기 전에 고민한 것 하나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의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입니다. 한 두 가지만 가르치라고 하면 어떻게 해 보겠는데 ‘모든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해답이 어디서 나옵니까?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입니다. 내가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내가 하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성령이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성경을 보고, 내가 깨달아, 내가 가르쳐야 하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냥 우리는 성령이 하시도록 내어 드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분이 하시도록 하면 됩니다.
성령은 성경 말씀을 깨닫게 합니다.
성경은 영감의 책입니다. 성경을 기록한 사람은 사람이지만 원 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이 말씀을 읽을 때 영감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동시에 이 말씀을 읽을 때 성령이 임하시고 거듭나게 하시고 영적 성장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책이기 때문에 읽을 때 깨닫게 되고 이해하게 됩니다. 때로 성경을 읽어도 이것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또 설교를 들어도 무슨 말인지 도대체 모를 때가 있습니다. 새 신자들에게는 이 두 가지는 모두 어려운 문제들입니다. 성경을 읽으라고 해서 읽으니 도무지 알 수가 없고 잠만 쏟아지는 경험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성경을 수면제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의사 분은 불면증 환자에게 처방전으로 “잠이 안 올 때 성경을 보세요?” 그런 답니다. 좋은 것 같아요? 이해가 어려워서 잠을 자게 되면 불면증이 치료되어서 좋고,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셔서 성경을 깨닫게 되면 그건 더 할렐루야입니다.
성령만 받으면 되었지 왜 성경을 또 봅니까? 이렇게 질문하실 지 모르겠습니다. 성령이 소멸됩니까 안됩니까? 소멸됩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살전 5:19)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충만 이라는 말도 씁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10)
말씀을 읽을 때 주어지는 은혜와 능력을 체험해야 합니다. 말씀 속에서 힘이 나옵니다. 은혜가 넘쳐흐릅니다. 성령을 받으면 내면에서 힘이 솟아납니다.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성령은 교회를 세우십니다.
현재 전 세계에 600백만 개의 교회가 있습니다. 매주 2천여 개 씩 교회가 개척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재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그곳에 성령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교회가 세워져야 사람들이 모입니다. 기도하게 됩니다. 서로 교통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마음을 합하여 기도하고 봉사하고 말씀을 들을 때 그 가운데 성령도 함께 역사 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가 교회를 세우리라”(마 16:18)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 3장에서 “나는 심었고 아불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신다”(고전 3:6-7)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교회에서 교회의 주체는 사람이 아니고 성령이라는 말씀입니다. 아볼라가 아니고 바울이 아닙니다. 성령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단순한 도구일 뿐이고 성령이 나를 통해서 사역하시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때 사람들은 교만의 극치였습니다. 나라가 다 망해 가는데도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 때 예레미야는 이렇게 외칩니다.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3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24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9:23-24)
우리 그리스도인의 힘은 외적 힘이 아니고 성령의 내적 파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라고 외쳤습니다. 우리의 힘이 성령에 있는 줄 믿습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