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을 돌보느라(삶의 우선 순위)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52. 양을 돌보느라(삶의 우선 순위)) / 본문 : 마태복음 5:22-24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줄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A.D. 78년, 하얀 수염을 흘러내리며 베들레헴이라 불리는 마을 근교에 있는 오두막에 한 할아버지가 앉아 있었습니다. 그 때 한 소년이 달려와 물었습니다.
“이스마엘 할아버지, 나는 오래 전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 할아버지께서 언덕에서 양치는 목동들 중의 한 사람이라고 들었어요. 그 아기가 어떻게 생겼었는지 얘기해 주세요. 할아버지께서는 그분의 부모님을 보셨나요? 정말 그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가 경배했나요?”
잠시 후 그의 뺨에는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그래. 나는 그때 그 목동들과 함께 있었단다. 그러나 나는 양을 돌보느라 너무 바빴기 때문에 굳이 가보려고 하지 않았단다. 결국 나는 그분을 볼 수 없었지.”
‘양을 돌보느라…’

사람이 살아가는데는 목적과 우선 순위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정리되지 않으면 뒤죽박죽이 됩니다. 예수님은 사역 초기에 주신 말씀 중에 ‘먼저’라는 말을 사용하시면서 세 번에 걸쳐 사람의 우선 순위가 무엇인지 설명해 주셨습니다. 오늘 분문 말씀은 그 중에 처음 말씀하신 것입니다.

본문 22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보아 이 당시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기보다는 남의 문제, 죄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런 성품을 갖게 된 것은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유대인들에게 죄를 짓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죄를 범한 자를 돌로 치거나 문둥병 갖은 병이 생기면 진 밖으로 나가도록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죄와 전염병이 그 무리 안에 퍼질까 염려해서 내려진 조치입니다. 이런 배경이 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돌보기보다는 남의 죄에 관심을 기울이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본문에는 형제에 대해서 두 가지 욕을 하고 있습니다. 욕을 하기 전에 따라 다니는 단어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 대상이 “형제”라는 사실입니다. 남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씨족 사회로 하나님께 선택받은 선민입니다. 그리고 모두가 한 형제입니다. 남에게도 그렇게 하면 안 되는데 형제에게 그러면 되겠습니까? 제일 답답한 분들이 자기 가족에게 함부로 대하는 분들입니다. 아마도 너무 편해서 그렇게 된 것인가요? 부모도 자식도 남편도 아내도 너무나 쉽게 생각합니다. 아마 다른 분들이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인데 유독 아내에게는 함부로 대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사실 욕 안 합니다. 형제에게 제일 가까운 분에게 합니다.

두 가지 욕은 “라가”(@Rakav:흐라카)라는 단어인데 이 말은 “텅빈, 무가치한, 우둔한, 멍청이”라는 말입니다. 또 한가지의 욕은 “미련한 놈”(Mwrev:모로스)으로 ‘라카’와 거의 같은 뜻이지만 히브리어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히브리어 ’모레‘라는 말을 연상시킵니다. 이 말은 도덕적인 배신, 반란, 악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라가‘라는 말은 ’어리석은 놈‘으로 지적 수준이 떨어진다는 저급하다는 말이며, ’미련한 놈‘(모레)는 ’추악한 녀석‘이라는 말로 인격적으로 천박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 두 가지 욕은 상대방에게 참혹한 상처를 남깁니다.
이런 욕을 하는 것은 인격적으로 남을 무시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한 자신은 늘 선생의 위치에서 가르치려고 하는 태도에서 오는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의 말하는 것이나 자기의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딤전 1:7)고 했습니다. 야고보서 3:1에는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선생이 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 중에 언제나 나는 가르치는 위에 있는 선생이고 다른 사람들은 나에게 배워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형제지간에도 부부사이에도 자녀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꾸만 자녀에게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그러면 아이들은 속으로 “아빠 머리에 피 마르면 죽어요.”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이가 제일 좋겠습니까? ‘친구’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부도, 자녀간에도 친구처럼 되면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을 때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요 11:11)고 하셨습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요 15:15)

상대방에게 이런 치명적인 상처를 남겨 놓은 체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원치 않으시는 것입니다.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막 7:11)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같은 것입니다. 지금 급한 것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먼저 형제와 화목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해결이 안되면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공회에 잡히게 된다는 것은 사법적으로도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 문제의 심각성을 말해줍니다.
구약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께 드릴 제물을 하나님이 찾으실 때 “너희 어린 양은 흠 없고”(출 12:5, 민 28:11, 19, 겔 45:18) 하나님은 흠 없는 제물을 찾으십니다. 상처가 있는 제물은 받지 않으십니다. 구약에서는 제사장도 육체적으로도 흠이 있으면 제사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레위기 21:17-21 보십니다. “17 아론에게 고하여 이르라 무릇 너의 대대 자손 중 육체에 흠이 있는 자는 그 하나님의 식물을 드리려고 가까이 오지 못할 것이라 18 무릇 흠이 있는 자는 가까이 못할지니 곧 소경이나 절뚝발이나 코가 불완전한 자나 지체가 더한 자나 19 발 부러진 자나 손 부러진 자나 20 곱사등이나 난장이나 눈에 백막이 있는 자나 괴혈병이나 버짐이 있는 자나 불알 상한 자나 21 제사장 아론의 자손 중에 흠이 있는 자는 나아와 여호와의 화제를 드리지 못할지니 그는 흠이 있은즉 나아와 하나님의 식물을 드리지 못하느니라” 하나님이 장애인은 차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흠 없기를 바라는 것인지 우리를 깨우치는 말씀입니다. 저도 팔이 부러졌습니다. 구약시대 같으면 레위지파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얼마나 이기적인 내 자신의 모습을 보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도 내 마음대로 하는 것입니다. 예물이 이러할 진데 예배 또한 그런 모습이지 않겠습니까? 단순히 상대방에게 욕한 것으로 마치는 것이 아니라 지옥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의 예물은 하나님이 받지도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것은 “양을 돌보느라”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이익은 위해 쫓아다니면서도 자신 때문에 상처받은 영혼들에게는 무관심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내가 한 행동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지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도 그 사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선악간에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빠르게는 이 땅에서 선악간에 그 축복과 저주가 임합니다. 그러나 이 생애에서만 다 내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죽음 이후에도 연결됩니다. 우리는 육체와 영혼의 분리가 잘 이해가 안되지만 분명히 성경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광기에 휩싸여 전쟁을 일으키고 수많은 목숨을 전쟁터로 내어 몰았던 나치 히틀러가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또 한사람의 장군이 있습니다. 히틀러의 프랑스에 있는 애틀란틱 전선을 무너트리기 위해 공격 임무가 아이젠하워 장군 견장에 붙은 네 개의 별 위에 떨어졌습니다. 아이젠하워 장군은 101공수 비행단 병사들과 함께 작전 전야를 보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경이의 독수리”라고 불렀습니다. 병사들이 비행 준비를 완료하고 장비 점검을 끝냈을 때 아이젠하워는 일일이 병사들을 찾아다니며 격려해 주었습니다. 비행사 중 상당수는 그의 아들 또래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들을 대하듯이 병사들을 대했습니다.
한 종군 기자는 호주머니에 두 손을 깊이 찔러 넣은 채 C-47기가 이륙하여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는 장군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고 당시 상황을 기록했습니다.
이어 장군은 숙소로 돌아가 책상에 앉았습니다. 그리고는 펜과 종이를 꺼내 메시지를 기록해 나갔습니다. 그것은 패배시 백악관에 전달될 메시지였습니다.
“우리의 상륙 작전은 …… 실패로 끝났습니다. …… 육해공군 모두가 최고의 용기와 헌신을 다해 작전에 임했습니다. 만약 이 작전에 어떤 과오나 실패가 있게 된다면 그 책임은 모두 내게로 돌려져야 할 것입니다.”
아이젠하워는 단순히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이 아니라 사람들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말과 행동에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한번 주님은 마태복음 7장에 가서 책임질 줄 모르는 사람들을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보고 형제의 눈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5) 내게는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 문제는 바로 자신이 스스로 선생이라는 착각입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4)

내 자신의 문제를 먼저 돌보고 나서 또 먼저 할 일이 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앞의 31절에 보면 “무엇을 먹을까 … 입을까 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배고픈 사람들에게 또 당시 상황으로 보아서는 먹고사는 문제도 큰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일상에 지나지 않는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누구든지 하고 심지어는 동물들도 하늘에 나는 새도 그와 같이 살아간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좀더 다른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먼저 주일부터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예배하며 기도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일 입니다.
소련의 레닌 공산정권은 교회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7일 동안 일하고 8일에 쉬게 하여 주일에 교회에 모이는 것을 방해하였습니다. 결과 국가적인 생산지수가 30%나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바꾸어 5일 일하고 6일째 쉬도록 했으나 마찬가지로 생산이 늘지를 않았습니다. 레닌은 할 수 없이 성경의 가르침대로 7일에 쉬게 하였습니다.
독일의 히틀러도 기독교를 박해하기 위해 주일성수를 방해하였으나 레닌과 마찬가지 결과를 보았습니다. 주일성수를 방해하였던 레닌 공산주의나 히틀러 정권은 멸망하였습니다.
분단 다음 해인 1946년, 북한에서는 김일성 정권의 주도하에 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를 11월3일에 실시하게 되었다. 이날은 주일이었습니다. 교회는 주일에 실시하는 선거를 반대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교회 지도자들이 투옥과 강제노동을 당하였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 들은 박해를 당하면서도 주일을 성수 했습니다.
오늘날, 별 큰 이유도 아닌데 주일을 지키지 않는 교인들을 우리는 많이 봅니다. 옛날에 우리 선조들은 주일을 지키려고 목숨을 내놓기까지 했었는데, 오늘날 우리는 별 이유도 아닌데 쉽게 주일을 범합니다.

6.25 전쟁 후 가난한 시절에 강원도 동해의 어느 마을 어느 권사님은 주일에 양식 배급을 준다고 하는데 양식 받으러 가지 않고 교회에 나갔습니다. 양식 보다 주일성수가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이 권사님은 아들 형제를 데리고 서울 약수동에서 교회 개척을 했습니다. 교회 이름은 형제교회입니다. 늘 기도하며 살던 권사님은 교회에서 기도하는 중에 고요히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습니다. 그의 두 아들중 형은 지금 한국 기독교를 대표하는 목사님이 되었고 둘째 아들은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가 되었습니다.

여 집사님 한 분이 어느 날 목사님에게 찾아와서는 “목사님, 제가 하나님을 웃겼더니 하나님이 제 기도에 응답하셨어요”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슨 얘기인지 물어보니까 이러한 내막을 이야기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오랜 시간동안 우리 남편을 위해 금식하고 통곡하며 기도도 해 봤지만 소용없었어요. 오히려 남편은 교회에 나올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요지부동이었지요. 그러다가 어느 날 새벽예배 때 남편 구두를 교회 가지고 나와서 강대 상에 놓고 이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구두가 먼저 나왔사오니 주인도 이 구두 따라 나오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요.
제가 기도하긴 했지만 제가 생각하기에도 너무 우스워서 한참을 웃었지요. 그래서 그날 다른 기도는 하나도 못하고 실컷 웃다가 돌아갔는데 그 다음 주일날 남편이 갑자기 저를 따라 교회 간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더니 요즘 계속 교회에 나오고 있답니다. 제가 하나님 한 번 웃겼더니 제 소원이 이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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