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축제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49. 진정한 축제) / 본문 : 누가복음 5:27-32

“27 그 후에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 하시니 28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 29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았는지라 30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3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지난 6월 13일 2006 독일 월드컵에서 우리 나라와 토고경기가 있었습니다. 저는 군포시 산본에 사는데 저녁에 사람들이 어디론가 몰려가는 것입니다. 3단지 뒤에 운동장이 있는데 그곳에 대형스크린을 설치해서 함께 응원하는가 봅니다. 한번 가봤더니 사람들은 붉은 악마의 티를 입고 또 요즘은 머리에 불 들어오는 뿔 하나씩 달고 응원 열기가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붉은 악마라는 이름도 문제가 되지만 사람들이 너무나 공허하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물론 전 세계인이 열광하는 것이니 우리도 뒤질세라 함께 응원하며 애국심을 키워 나가는 것이라면 뭐라 할 것은 없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한 축제을 벌여야 하는 것은 축구경기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중풍병자 집에서 지붕을 뚫고 달아 내린 병자를 고치신 후의 일입니다. 중풍병자가 얼마나 사람이 많았는지 지붕을 뚫고 그의 친구들이 지붕을 뚫고 내렸습니다. 본문 27절 “그 후에 나가사”는 바로 이 중풍병자를 고치신 그 집에서 나가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 집에서 나가시기는 했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예수님 주위에 가득했습니다. 그 중에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예수님의 말씀과 축복을 받기 위해서 따라 다니는 사람, 자기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무리를 뚫고 들어오려는 사람들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흠과 티를 잡으려고 예루살렘으로부터 대제사장의 명령을 받고 예수님을 늘 감시하며 책잡으려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있습니다. 이런 무리를 뒤로하고 잡시 밖으로 나간 예수님께 보인 것은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많은 설명을 해주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한마디만 하셨습니다. “나를 좇으라” 이 한마디가 레위의 인생을 결정지었습니다. 거부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그의 마음을 훑고 지나갔습니다. 오늘 말씀을 들으시는 여러분에게도 예수님의 이 음성이 들리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당시 이 지역은 로마가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의 도급제도가 시행 중에 있었습니다. 이 지역의 세금은 로마가 세입을 배당한 ‘헤롯 안디바’에게 바쳐졌습니다. 레위가 걷은 세금은 인두세(人頭稅)라기 보다는 통행세나 일종의 관세였던 것 같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는 헬라와 로마까지 넓게 퍼져있었습니다. 저도 가끔 외국에 가는데 어느 나라를 가든지 입국심사대와 세관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런데 짐이 많으면 늘 세관 통과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이런 세관은 상인들에게는 늘 문제입니다. 이 당시에는 무슨 정확한 법적 근거에 의해서 세금을 받았기보다는 세관의 마음대로 했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유대인 입장에서 보면 로마가 걷어 가는 세금이야말로 착취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래서 세리는 반민족주의자요, 부정직한 집단으로 심한 미움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탈무드(Talmud)는 세리를 강도들로 규정했습니다. 예수님은 세리인 이 레위인을 부름으로 자신에게 쏟아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책잡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은 반대 세력의 눈치를 살피시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죄인으로 취급당하는 이 레위를 향해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버린 레위
예수님의 부름에 28절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 음성을 듣는 순간 이제 더 이상 이 자리에 앉아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그를 감쌌습니다. 기회는 아무 때나 오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기회는 일생 일대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기회입니다. 더 지체할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그는 자리를 차고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부자를 한번 더 부르신 적이 있습니다. 그 때 그 청년은 자신의 재물을 포기하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마 19:22).
여러분은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누가 제일 부자였을 것 같습니까? 당시의 세리가 누렸을 사회적, 직업적 위치를 생각하면 레위만한 제자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레위의 조용한 이 선택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제자들도 물론 자기의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쫓았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어부들은 예수님을 따라가다가도 유사시에는 다시 아무 어려움 없이 본업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났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후 부활하신 것을 알면서도 제자들은 방황했습니다. 이 때 베드로가 먼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요 21:3) 했습니다. 이 때 베드로와 행동을 함께 한 제자들은 6-7명인데 분명히 여기서 마태는 빠졌을 것입니다. 그는 고기 잡는 일을 해 본적이 없고, 고기 잡을 생각도 없었을 것입니다.
레위가 세리직을 버렸다는 것은 완전히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한번 세리직을 버린 사람은 다시 고용될 수 없습니다. 레위가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은 최후의 결단입니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천국의 비유을 하시면서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마 13:46)고 하셨습니다. 레위는 이 진주를 산 것입니다.

예수를 위한 잔치(축제)
29절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았는지라” 같은 본문이 레위(마태) 자신이 쓴 마태복음 9:10절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라고 나옵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상당히 축소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이 잔치가 “큰 잔치”였다고 말합니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지만 레위는 냉혹한 체념의 심정이 아니라 깃발을 휘날리며 자신의 생의 전환에 착수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버린 세관직업, 그리고 그곳에서 얻게되는 수입 등에 미련이 없었습니다. 레위의 잔치는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예수를 위하여” 잔치를 벌였다는 것입니다. 주인공은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주신 예수님이 이 축제의 주인공이십니다.
둘째,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을 열었습니다. 많은 사람 앞에서 자기 선언을 한 것입니다. 결혼식 올리는 것이 불편하지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잔치를 하고 사는 것하고 그냥 사는 것하고는 다릅니다. 비록 이것이 형식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그렇지가 않습니다. 마태는 이제 전혀 예전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는 사람입니다. 베드로처럼 많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마태 역시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을 각오를 다진 것입니다.
셋째,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았는지라” 이 자리에는 예수님의 흠을 잡으려는 세리들도 물론 있었습니다만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있었습니다. 이 사람들 중에는 마태가 초청한 자신의 동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변화시켜주신 예수님을 소개했습니다.

예수님이 세리 레위의 집에 간 이 행동이 얼마나 당황스러운 사건인지 베드로의 경우를 보면 압니다. 어느 날 베드로에게 환상이 보였습니다. 큰 보자기에 쌓인 것이 베드로 앞으로 내려왔습니다. 열어보았더니 그 안에는 짐승, 기는 곤충, 공중의 새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베드로야 잡아 먹으라”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먹을 수는 없나이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이 일이 있은 후 베드로는 이방 군인이었던 고넬료의 초청을 받아 그 집을 방문하게 된 것입니다(사도행전 10장).
베드로가 이런 사고방식을 가졌던 것을 보면 당시에 죄인의 집에 가서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레위가 마련한 이 초청에 기꺼이 응하셨습니다. 오늘도 죄인임을 고백하며 주님을 영접하는 사람들 속에 주님은 오십니다.

병든 자들
“30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마음속에서 분노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남이야 누구와 밥을 먹든 무슨 상관입니까? 사실 예수님이 자신들과 상관이 없는 분이라고 생각하면 그만 아닙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자신들의 주로 받아들인다면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왜 비방해야 되는지요. 그러나 이것은 사람들의 행동이라기 보다는 사단은 이 사람들을 통해서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질문은 예수께 하지 않고 제자들을 비방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생각할 때 레위 같은 세리들과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완전한 수용을 의미했습니다. 질문을 받은 것은 제자들이었으나 대답은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반박할 수 없는 논리로 대답하셨습니다. 31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죄인을 위해서 오심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롬 3:10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하신 것처럼 이 땅의 의인이란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병든 사람들입니다. 죄지은 육체가 병들어 죽게되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 또한 병들었습니다. 이것을 치유해 주시기 위해서 주님이 오신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거스틴은 “이 세상에 의인은 하나도 없고 단지 두 가지 죄인이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는 자기가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과 또 하나는 자기가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입니다. 둘 다 죄인인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유명한 소설 “주홍 글씨”가 생각납니다. 여기 나오는 여인은 죄인의 표시로 가슴과 등에다가 빨간 글씨[A]자를 붙이고 다닙니다. [나는 죄인이오]라는 표시입니다. 이 여인은 오히려 마음이 편하고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에게 죄를 짓게 한 남자는 법복을 입고 높은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이 남자의 고민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이탈리아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가 예수님을 믿은 지 얼마 안되어서의 일입니다. 길을 지나는데 앞쪽에서 나병 환자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복음도 전하면서 기도해주고 싶은데 왠지 더러운 생각에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아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런데 계속 마음이 편치 않아 마음속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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