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 다 됐네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44. 어른 다 됐네) / 본문 : 마태복음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부족함을 모르고 자란 아이들이 행복에서 멀어지는 이유는 아이들의 세계에서 고립되기 때문입니다(이것은 어른들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이런 아이들은 자기 주장을 강하게 할 뿐 양보할 줄 모릅니다. 대부분 각 가정에서 이렇게 성장한 아이들이 처음에 유치원을 갑니다. 유치원에 가면 미끄럼틀에서 놀고 싶은데 형들이 먼저 타고 놀고 있습니다. 순서를 기다렸다가 타야하는데 자기가 먼저 타겠다고 우깁니다. 똑똑한 아이들은 뒤를 돌아보고 엄마가 없으면 자기가 힘이 없는 것을 알고 포기합니다. 이것은 마음속에서 스스로 양보한 것하고는 다릅니다. 힘만 있으면 언제든지 자기가 빼앗아 타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엄마가 나타나면 엄마의 힘을 믿고 계속 땡깡을 쓰는 것이지요.
이것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은 아이들에게 먼저 선수를 치는 것입니다. 작은 약속을 하고 그것을 지킨 아이에게 “어른 다 됐네.”라고 칭찬하는 것입니다. 전철을 탈 때도 미리 약속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앉지 말고 서 있자.” 슈퍼마켓에 장을 보러 갈 때도 “가게의 물건에 손대면 안 돼.” 대부분의 아이들은 엄마하고 외출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한가지 약속을 지킬 수 있습니다. 이 때 중요한 것은 너무 많은 것을 아이에게 말하면 안됩니다. 한가지만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지키게 하고 칭찬하는 것입니다. “어른 다 됐네.”

예수님이 바로 이렇게 제자들을 교육시키셨습니다.
본문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이 때는 아직 예수님께 많은 가르침을 받기 전입니다. 이제 막 부름을 받아 온 제자들에게 갑자기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교육적 효과를 얻어내시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늘 예수님은 사람들을 진심으로 대하셨으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월요일에 행주산성을 다녀왔습니다. 일산에 살 때 1년 동안을 그 옆으로만 지나다녔지 한번도 그곳에 가본 적이 없기 때문에 들려보았습니다. 그런데 소풍 온 학생들인지, 학습을 나왔는지 초등학교 3, 4학년으로 보이는 학생들과 남자 선생님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 옆을 지나가다가 선생님이 화가 나셔서 하는 소리를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한 남자 학생에게 “야! 너 죽을래”하는 것입니다. 지나가던 제가 다 무안했습니다. 말 잘 안 듣는 아이들 통솔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저도 조금은 압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생님이 자꾸만 학생들을 그런 식으로 대하면 학생이 받은 그 상처는 어디 가서 누구에게서 치유 받겠습니까? 집에 가서도 창피해서 선생님에게 그런 말 들었다는 것을 말하지 못합니다.
“너희들 청소 그렇게 밖에 못하겠어!” 하는 것 보다 “너희들 어른 다 됐네. 청소 잘 할 줄 믿을 깨” 미리 선수를 치는 것입니다.

칭찬 한 마디가 인생을 바꾸어 놓을 수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학창시절 결코 천재가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의 고등학교 생활기록부에 담임 선생님은 “이 학생은 무슨 공부를 해도 성공할 가능성이 없습니다.”라고 적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내용이 적힌 성적표를 받아든 아인슈타인의 어머니는 낙담해하는 아들을 오히려 달래며 “아들아, 너는 다른 아이와 다르단다. 네가 다른 아이와 같다면 너는 결코 천재가 될 수 없어”라고 칭찬하며 격려했습니다. 이러한 칭찬과 격려로 아쉬타인은 변한 것입니다.
서양 속담에 “수만 톤의 가시는 벌 한 마리 불러모으지 못하지만 한 방울의 꿀은 수많은 벌떼를 불러모은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칭찬은 바로 이 꿀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칭찬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처음 만난 나다나엘에게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47)라고 칭찬해 주셨습니다. 나다나엘이 즉시 주님을 향해서 세 개의 호칭을 부르도록 하셨습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49절)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예수님이 메시야 되심을 밝혔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 즉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17 절)라고 화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2명의 이방인을 칭찬하셨습니다.
한 사람은 로마의 백부장입니다. 자신의 부하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예수님께 이 백부장의 말을 듣기 기이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당시 로마의 군대는 백부장이 군졸들을 대할 때는 병들면 한마디로 의가사 제대시키면 그만입니다. 자신의 병사 하나를 위해서 그렇게 신경 써야 할만큼 한가한 군대가 아닌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백부장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을 보고 기이히 여겼다고 한 것은 없는 일입니다.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과 이적을 보고 기이히 여길 수는 있으나 예수님이 사람을 보고 기이히 여긴 것은 없었던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 로마 군대의 백부장에게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마 8:10)고 칭찬하셨습니다.

또 한 사람은 예수님이 두로와 시돈지방으로 가셨을 때 수로보니게 마을에 사는 여인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께 나와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산다고”말함으로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마 15:28)

찰스 필모어는 “칭찬과 감사의 말은 에너지를 확대시키고 해방시킨다. 칭찬은 약한 육체에 건강을 주고 두려운 마음에 평온과 신뢰를 주며 상처난 신경에 휴식과 힘을 준다. 또한 우리는 칭찬을 받으면 기뻐한다. 식물도 사랑을 베풀면 잘 자라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핸리 고더드 박사는 ‘앨고 그래프’라는 피로 측정기를 사용하여 몹시 피곤해 하는 학생들에게 칭찬의 말을 해 주면 그들의 육체적 에너지가 급상승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피그말리온 효과(Pygmalion Effect)’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관심과 기대를 갖고 칭찬해 주면 그 대상자는 용기와 자신감을 갖게 되어 분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칭찬은 자신감을 줍니다.

“어른 다 됐네.”라는 말을 들으면 무슨 생각이 듭니까?
자신감이 들지 않습니까? 무엇인가 책임이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계속 어린아이처럼 땡깡만 부린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어른으로서 책임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어린이들에게 학습의 동기를 부여합니다. 학습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동기 부여입니다. 동기만 부여되면 이미 이룬 것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학습에 동기 부여가 없으면 학습 효과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동기 부여는 사람들로 하여금 무엇인가 배우고 싶은 욕망을 느끼도록 합니다. 예수님은 적어도 네 가지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배우는 자에게 집중하라고 요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시작하실 때 ‘진실로’(마 5:18, 26, 6:2, 5 등), ‘들을 지어다’(마 11:15, 13:9, 43, 막 4:9, 23, 눅 8:18, 14:35), ‘들으라’(마 13:18, 15:10, 21:33, 막 4:3, 7:14, 눅 9:44, 18:6) 그리고 ‘보라’(마 10:16, 11:10, 12:41, 42, 49, 막 3:34, 10:33, 14“41, 눅 7:25, 27, 34, 10:3, 19; 11:31, 32, 44, 13:7, 30, 32, 35, 18:31, 21:29, 22:10, 31, 요 4:35, 5:14, 16:32)고 하시면서 시선을 집중시키셨습니다.

둘째로 소망을 주셨습니다.
산상 수훈을 시작하실 때,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그리고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마 5:3-5)고 말씀하셨는데 사실 이것이 복이 있다는 것을 몰랐었습니다. 소망이 없어 보이던 사람에게 소망을 주셨습니다. 사람들의 가치관에서 밀려나 있던 즉 엄격한 규율에 의해서 지켜지는 신앙적 행위들은 가치가 있어 보이던 시절에 보이지 않던 마음을 읽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복된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셋째로 먼저 손을 내미셨습니다.
한마디로 화가 나서 꽁하고 있는 사람은 손을 내밀지 못합니다. 우리 속담에 “방귀뀐 놈이 성낸다”고 사람은 하나님께 죄를 짓고 멀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먼저 손을 내미십니다.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나에게 물을 좀 달라”(요 4:7)고 하시면서 먼저 청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각자 개인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야(눅 10:41), 삭개오야(눅 19:5), 베드로(눅 22:31, 요 1:42)의 이름을 직접 부르셨습니다. 나다나엘의 경우도 그랬지만 삭개오의 경우도 한번도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신적 능력으로 이들을 바로 알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름을 불러주셨다는 사실에 다 감동한 것입니다. 천주교에서는 교황이 성탄절 메시지 발표할 때 보면 각 나라의 말로 한마디씩 합니다. 그 때 자신들의 말로 한마디하는 것에 사람들은 감격해 하곤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 각 사람의 이름을 부른 것에 비하겠습니까. 마지막 날에 내 이름을 불러주실 주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5:12)는 말씀과 이이어서 “너희는 나의 친구라…”(요 15:14-15)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언제까지나 어린아이로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를 오랫동안만 다닌다고 신앙이 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고 했습니다.
어느 욕심이 많은 왕과 덕망이 있는 학자의 대화입니다.
왕 : 어떻게 사는 것이 참되고 훌륭하게 사는 길이오?
학자 : 욕심 부리지 않고 착한 일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왕 : (피식 웃으며) 아니 그거야 세 살 먹은 아이도 다 아는 사실이 아니오?
학자 : (미소를 지으며) 폐하! 세 살 먹은 아이도 다 아는 사실이지만 여든 살 된 노인도 실천하기는 매우 어려운 문제랍니다.

어느 집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이 집사님은 매일 하는 자녀의 세상 과외수업 시간은 2시간이 짧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일주일에 한번 드리는 예배시간 1간 30분이 길다고 합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세상의 빛이 될 수 있겠습니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어른 다 됐네.”와 같이 믿음을 줍니다. 확신을 줍니다. 자부심을 줍니다. 우리 우리가 행동할 때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도우십니다. 이제 더 이상 연약한 존재가 아닙니다.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이 세상의 빛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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