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복음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32. 77 복음) / 본문 : 마태복음 7:7-11

“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10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저는 어려서 밥을 먹다 밥알을 흘리거나 걷다가 잘 넘어져 어머니로부터 늘 ‘칠칠맞다’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그런 뜻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아실 것입니다. 7하면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기억하는 용서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용서에 대한 질문을 합니다. “형제가 잘못하면 7번 용서하면 되겠습니까?”(마 18:21) 베드로의 생각에는 유대인이 용서하는 횟수는 많이 해야 3번이니까 배로 계산해서 6번이고 여기에 한번 더 인심을 써서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하고 생각해낸 숫자가 7번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마 18:22).
그러나 오늘 본문의 77 복음은 그런 뜻에서 부여한 숫자가 아닙니다. 벌써 눈치 빠른 분은 아셨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7절입니다. 여러분들이 꼭 기억하시라고 ‘77 복음’이라고 제목을 붙였습니다. 처음에는 ‘희망의 문이 있다’라고 정했었습니다. 7의 숫자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숫자요, 7곱 촛대요, 신약의 7곱 집사와 계시록의 7곱 교회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구약에 보면 성전에서 사용할 기구에 일곱 번 뿌림으로 거룩하게 만들었습니다(레 8:11). 고침을 받은 문둥 병자도 제사장이 일곱 번 뿌림으로 깨끗해졌다는 것을 선언했습니다. 7의 숫자의 의미는 하나님의 수이며, 교회의 수이며, 정결케 됨의 수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태복음 7장 7절은 물론 그런 의미로 부여된 수는 아닙니다만 분명한 것은 제가 처음에 정했던 본문의 제목처럼 ‘희망의 문’이 있기 때문입니다. 단테는 그가 쓴 신곡 지옥 편에서 지옥문 입구에 “이 곳에 들어가는 자는 희망을 버릴지어다”라는 말이 쓰여져 있다고 했습니다. 더 이상의 소망이 없는 곳, 영원한 저주와 형벌과 심판이 있는 곳,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있는 곳, 그러나 죽을 수도 없는 곳, 그곳이 지옥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 주앙교회 성도여러분에게는 본문의 말씀이 우리를 살려내는 진정한 ‘77 복음’이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간에게 평등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입니다. 누구도 이 죽음을 피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죽음의 문 앞에서는 인간 세상에서 주어졌던 것들이 모두가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러니 죽음보다 인간에 더 평등하다고 말 할 수 있는 것은 오늘 본문을 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죽음의 평등은 우리 인생의 끝에서 만나는 것이기 때문에 기회가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다릅니다. 왜 우리가 성경을 복음이라고 말합니까? 그것은 아직 우리가 호흡하고 있을 때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누구든지 구하라는 것입니다. 찾으라는 것입니다. 문을 두드리라는 것입니다. 계속되는 예수님의 말씀은 오히려 우리에게 사정하시는 것 같습니다. 꼭 기도하라고요. 사실 우리가 예수님께 간청을 해야하는데 예수님이 우리에게 간절히 부탁하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하지 않은 사람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기 때문에 주실 수 있습니다.

유대인의 이야기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아버지의 직업이 우상을 만드는 일이었답니다. 한번은 그 아버지가 집을 비운사이 하나님을 잘 믿는 아브라함이 망치를 가지고 다 부셔버리고 한 우상의 손에 그 망치를 드려 놓았답니다.
얼마 후 돌아온 아버지는 난리가 났습니다. 정성을 다해 만들어 놓은, 이제 돈 이 될 상품들이 다 부셔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을 불러 반쯤 죽일 양으로 씩씩대며 물었습니다.
“누가 이런 짓을 했니?”
아브라함은 망치를 들고 있는 모형 우상을 가리키며, “저놈이 갑자기 망치를 들더니 다 부수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라. 저건 인형에 불과할 뿐이야.”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러면 아버지는 왜 아무 힘도 없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그런 장난감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팔며 거기에 소원을 빌며 절하라고 하십니까?”라고 반문을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딤전 3:15)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할 권세를 얻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계 7:2)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이 사실은 아주 간단한 것 같지만 아주 중요합니다. 왜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솔직히 잘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능력이 많은 부모님이 살아 계신다면 가만히 있겠습니까? 어려움이 있으면 부모님께 간구 할겁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는 것도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욥은 자신을 저주하는 친구를 향해서 “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26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욥 19:25-26)는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은 전능자이시기 때문에 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전능자로 믿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 147:5절 “우리 주는 광대하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그 지혜가 무궁하시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람의 구십 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 출 6:3, 창 28:3, 35:11, 43:14, 48:3, 49:24, 25).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사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을 부르셨도다”(시 50:1)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계 1:8)
어떻게 전능하신 하나님을 더 표현할 수 있을까요?
욥기서를 보면 ‘전능’이라는 단어가 제일 많이(30회 이상) 나옵니다. 고난 중에 전능자를 제일 많이 찾게된다는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전능자로 믿는다면 기도할 것입니다. 그분을 의지할 것입니다. 욥이 고백한 한 절을 봅니다.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줄 아오니”(욥 42:2)라고 했습니다. 이 고백이 우리들의 고백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느 날 성자 프란체스코에게 한 사람이 찾아와서 이렇게 질문했다. “선생님, 선생님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분입니다. 선생님을 만나기만 하면 사람들이 변하는데 그 놀라운 사역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프란체스코는 조용히 대답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어느 날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바라 보셨습니다. 그리고 많고 많은 사람들 가운데 이 땅에서 가장 연약하고 가장 무지하며 가장 미련한 한 사람을 보기 시작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저 사람이다. 저 사람을 통해서 내 강함과 지혜로움과 능력을 나타내리라’ 그것이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신 이유의 전부입니다”

하나님의 선택 기준은 때때로 인간의 선택 기준과 다릅니다. 세상 적인 조건이 전혀 구비되지 않은 사람이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감당할 때 사람들은 그 사람 속에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능력을 목격하고 놀라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을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린도전서 2:28-29)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위의 두 가지 경우를 다 인정한다해도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과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아버지가 아무리 돈이 많으면 무엇합니까? 나와 상관이 없는 것이지요. 정말 하나님은 우리 주님은 그러실 까요?
여러분! 이 부분에서 희망을 가지셔도 좋습니다. 우리의 이런 염려를 하나님 아버지와 독생하신 예수님은 떨쳐 버리시기 위해서 얼마나 우리를 향해 간청하시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행동하신 것을 보면 아실 수 있잖아요. 예수님이 거절한 사람은 돈 없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권력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이 아닙니다. 병든 사람도 아닙니다. 돌에 맞아 죽을 짓을 한 창녀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거절한 사람은 병들지 않았다고 생각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없어도 살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인간의 교만으로 가득 찬 사람입니다. 행위로서 안식일만 지키면 될 것처럼 생각한 사람들입니다. 율법을 다 지켜도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직 우리구주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안됩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사람, 예수님이 필요한 사람, 예수님을 부르는 사람은 모두 응답하십니다.
구약의 한 인물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목자요, 음악가요, 전쟁의 용사요, 왕이었습니다.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하나님을 이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시편 23: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 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말씀을 통해서 왜 하나님이 다윗을 사랑하셨는지 마태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예수님의 족보를 시작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인도를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 23:2절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23:3절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23:4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당대 제일의 왕이, 용사중의 용사가 그러면서도 찬양하고 악기를 다루며 부드러움을 겸비한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다윗이 줄기차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이 왕이기 때문에, 전쟁의 용사이기 때문에 인도하신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부르짖는 다윗의 기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도 구해 봅시다. 찾아봅시다. 두드려 봅시다. 이제 행동하면 됩니다. 구하면 됩니다. 찾으면 됩니다. 두드리면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못할 일이 아닙니다.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에 대한 약속도 해 주셨습니다. “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10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목사님 제게 걱정 없는 곳을 가르쳐 주십시오. 저도 그런 곳에 가서 살고 싶습니다.”어떤 청년이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대답은 “바로 이 넘어 공동묘지입니다.”문제가 없는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뿐이라는 것입니다. 갈등한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고민이 많은 남자가 정신과를 방문했습니다.
환자 : “선생님, 저는 자꾸 이상한 생각을 하는데요. 제가 꼭 소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의사 : “언제부터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나요?”
환자 : “송아지 때부터요.”

염려는 믿음이 아닙니다. 염려가 찾아오는 많은 이유 가운데 성도들에게 주된 이유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전능자라고, 나의 하나님이라고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미국 대학의 심리학 팀이 사람들이 염려하는 것을 조사하여 보니, 사람들의 염려거리 중 40%가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 것들이었습니다. 공연한 염려를 그 만큼 많이 하는 것입니다. 염려거리 중의 30%는 이미 과거에 있었던 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와서 염려한다고 되는 일들이 아닙니다. 이를테면 쓸데없는 염려거리들입니다. 그리고 10%는 병에 관한 염려거리입니다. 그 중엔 실제는 걸리지 않을 병에 관한 것도 많았습니다. 진짜로 염려할만한 것은 8%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8%중에서도 정말로 머리를 싸매고 염려할만한 것은 별로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염려해야 소용도 없는 일들에 대해 염려들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면 쓸데없는 염려들을 가지고 괴로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무엇을 구해야 합니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이제 우리의 염려 주께 맡기고 다윗처럼 주님의 인도함을 믿으시기고 주님의 나라를 위해 기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