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죽고 사랑에 산다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33. 사랑에 죽고 사랑에 산다) / 본문 : 누가복음 7:36-50

“36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37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와서 38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39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4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저가 가로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41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42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43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가라사대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44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 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45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48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49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 가하더라 50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배가 난파했습니다. 이 배에는 두 청년과 여자하나가 간신히 헤엄쳐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도착한 곳이 무인도였습니다. 인간이 있으면 언제나 역사가 쓰여지게 마련입니다. 이 섬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어느 나라 사람이냐에 따라서 삼각관계 이야기는 여러 갈래로 갈라질 수 있습니다.
만약 스페인 사람이라면 그 이야기는 간단합니다. 투우와 같은 열정적이며 비극적인 방향으로 전개될 것입니다. 두 청년은 여자 하나를 놓고 바로 결투를 시작할 겁니다. 한 사람은 죽고 한 사람은 여인을 얻습니다.
그러나 이탈리아 사람이라면 이야기는 또 달라집니다. 열정적인 이탈리아 여인들은 그렇게 수동적인 사랑은 하지 않습니다. 남자들이 싸우기 전에 야음을 타서 방해자를 해치우고 자기가 좋아하는 청년과 사랑을 맺을 것입니다.
미국인이라면 어떻게 될까요? 아무 문제도 생기지 않을 겁니다. 미국인들은 어디를 가나 돈벌 궁리에 비즈니스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어 평온할 것입니다. 또 영국인이었더라도 삼각관계의 드라마는 없습니다. 영국인들은 예의를 찾는 신사들이라서 자진해서 자기 소개를 하는 법이 없습니다. 낯선 사람끼리 모여 소개해 줄 사람이 없으면 몇 십 년을 가도 서로 말하지도 않고 아는 체도 하지 않습니다. 무인도에서도 그랬을 겁니다.
프랑스 인이라도 유혈극은 생기지 않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이해심이 많고 눈치가 빨라서 두 사람이 한 여인을 놓고 적당히 서로 편리하게 지낼 것입니다.
문제는 한국인의 경우라면 복잡해집니다. 여자 하나를 놓고 싸운다는 것은 대장부의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남아 있는 두 사람의 행복을 빌며 한 사람이 먼저 바다 속으로 몸을 던집니다. 그러자 곧 여인도 그 뒤를 따라 투신 자살합니다. 혼자 남은 남자 역시 이렇게는 못살겠다며 몸을 던집니다. 이제 무인도는 옛날처럼 무인도로 막을 내립니다.

이 이야기는 민족성에 따라서 사랑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민족이 걸어온 길, 역사나 환경에 따라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런 민족성과 관계가 있는 사랑이야기가 아닙니다. 시대에 따라서 차이가 있는 그런 사랑이야기도 아닙니다. 한 여인의 영혼이 몸부림치는 사랑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은 여인의 사건은 이 사건 말고 십자가 죽음 직전에 한번 더 있었습니다. 그 때의 장소는 베다니에 사는 문둥병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 일어났습니다(마 26:6-13, 막 14:3-9, 요 12:1-8). 예수님을 집에 초대한 사람의 이름은 같습니다. 둘 다 시몬입니다.
오늘 예수님을 초대한 사람은 “한 바리새인이”라고 나옵니다. 당시에 바리새인이 제일 많기도 했지만, 예수님을 적대시하던 바리새인이 식사에 초대한다는 것이 이례적이어서 이런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전에 베다니 문둥병자 집에서 나타났던 반대세력은 제자들(가롯유다)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본문에는 바로 식사에 초대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이 잔치의 주인이었고 여인은 불청객이었습니다.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이 동네 가버나움 사람들에게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경건한 사람인가를 뽑으라면 모두가 시몬을 뽑을 것입니다. 시몬은 신학생이자 성직자입니다. 또한 그가 속한 바리세파는 오늘날로 말하면 제일 잘 나가는 큰 교단의 소속인 것입니다. 누가 보아도 이 사람이 더 경건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예수님만 빼고는 말입니다.
두 사람을 잘 아시는 예수님은 이 여자를 더 경건한 사람으로 선택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 이유를 설명하시려고 합니다. 그러나 시몬은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의 마음은 딴 곳에 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창녀가 어떻게 우리 집에 들어온 거야?” 이날 만찬은 초대받은 상류층 사람만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누가 이 쓰레기 같은 여자를 들여보냈단 말인가? 시몬은 이 잔치가 끝나면 하인들을 불러 분명히 나무랄 것입니다. 감히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데 이런 여자가 들어오도록 놔두었냐고 할 것입니다.
‘저 꼬락서니 좀 봐. 예수의 발 밑에 조아리고는 발에다 입을 맞추다니!’ 이러한 행동은 이 지역에서는 왕에게나 할 수 있는 행동입니다. 예수님이 단순히 이러한 행위만을 원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은 다 아실 것입니다. 시몬은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예수가 정말 메시야라면 이런 창녀 같은 여자와는 상대조차 하지 말아야 되지 않는가?’ 이런 생각을 아시는 예수님은 시몬과 대화를 나누기 원하셨습니다. “시몬아 내가 너에게 할 말이 있다.”
“선생님 말씀하십시오.” 시몬이 대답하자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고리대금업자에게 빚을 진 두 사람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2,500만원(500데나리온), 한 사람은 250만원(50데나리온)의 빚을 졌다. 둘 다 빚을 값을 갚을 돈이 없어 둘 사람에게 모두 빚을 면제해 주었다. 시몬아! 네 생각에는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그를 사랑하겠느냐?”
“제 생각에는 더 많이 면제를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네 말이 맞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여자를 보시며 시몬에게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자가 보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으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는 구나, 그리고 머리카락으로 닦아주었다.” 유대인들은 손님이 오면 발 씻을 물을 늘 준비합니다. 그러나 시몬은 예수님을 초청하고 당연한 기본적인 예의도 갖추지 않았습니다. 이 여인이 깨뜨린 향수로 방안 가득 찼습니다. 이 향기를 아무도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들이 받았던 훈련의 영향일까요? 학력의 높고 낮음일까요? 재산의 많고 적음일까요? 가문의 차이일까요? 미래에 대한 보장일까요? 무엇으로 설명해도 시몬은 여인보다 훨씬 앞섰습니다. 그러나 시몬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이 여인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 여인에게 더 없는 보물입니다. 그 보물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이 여인이 언제부터 알게되었는지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산상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를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문둥병자에게 손 내미시는 것을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을 용서하시는 주님을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이 여인은 목마른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죄책감으로 먹이 말랐고, 후회로 목이 말랐고, 육제적 사랑이 아닌 진정한 사랑에 목이 말랐습니다. 이 여인은 영혼에 갈 급합니다.
예수님께서 은혜의 잔을 내밀자 혀끝으로 맛을 보거나 입술만 살짝 적시거나 홀짝거리면서 먹은 것이 아닙니다. 이 잔에 입을 대고 벌컥 벌컥 들이마신 것입니다. 마치 사막을 여행하던 사람이 오아시스를 만나서 물을 들이키듯 먹은 것입니다. 이 여인의 영혼은 시편기자가 노래한 것과 같았습니다. “1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2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니 곧 영생이로다”(시 133:1-3) 이 여인은 자신의 영혼 깊이 흘러내리는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이와 같은 은혜를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반면 예수님을 초대한 시몬은 자신이 목마른 사람이라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습니다. 시몬과 같은 은혜를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은혜를 분석하기 바빴습니다. 그들은 사랑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놓고 토론하고 계산하고 있었습니다. 시몬은 용서받지 못할 자가 아니라 용서를 구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여인이 은혜를 마시는 동안 시몬은 분했습니다. 여인이 나누어주기에 충분한 사랑을 공급받고 있을 때 시몬은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사랑은 알아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없는 사랑을 짜내려고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충만히 공급받은 사람만이 남을 사랑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이 충분하지 못합니다. 남을 사랑할 만큼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주님께 받아야 합니다. 이 사랑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바로 이 사랑을 채워 주시기 위해서 주님이 오셨습니다.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9-10)
더 많은 사랑을 하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더 많은 사랑을 공급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서 이 사랑을 기대한 다는 것은 무리입니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산산이 깨어진 인간이 회복될 수 없습니다. 시기와 질투, 복수심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저는 마이너스 통장을 두 세 개 가지고 있습니다. 인터넷에서 보면 마이너스된 통장은 아래에 뚝 떨어져 있습니다. 이곳에 돈이 채워지지 않으면 쓸 돈이 없습니다. 남에게 나누어주기는커녕 내 자신이 쓸 돈도 없는 것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먼저 주님의 사랑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남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선교하는 사람들이 먼저 채워져야 합니다. 저는 선교를 오랫동안 연구해온 사람입니다. 우리교회도 선교하는 교회로 세워지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기억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내가 먼저 채워지지 않고 나누어주려고만 하면 부도가 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의 근원 되시는 주님께 채워야합니다.

영화에서 종종 보는 마약 거래 장면은 거의 예외 없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마약과 돈의 교환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돕니다. 돈 가방이 비어 있거나 위조지폐로 가득 차 있지나 않은지, 혹은 밀가루가 섞인 마약은 아닌지 의심의 눈초리가 번뜩입니다. 그러다가 빈 가방이나 쓰레기를 가지고 나온 눈치가 보이면 양측의 총구는 불을 뿜으며 피를 튀깁니다. 손해 보는 교환을 하지 않으려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환은 다릅니다. 인간들이 하나님께 가져오는 것은 모두 ‘쓰레기’인데 하나님은 그것을 모두 천국의 복으로 교환하여 주십니다. 그러면서도 조금도 언짢아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즐거워하십니다. 우리의 고통, 절망, 미움, 원망, 분노의 쓰레기를 평안, 행복, 희망, 사랑으로 바꿔주십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나도 기쁘고 하나님도 기쁘신 ‘즐거운 교환의 장터’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그 사랑을 공급받을 수 있을까요? 누구나 인정하는 성경에 사랑 장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정입니다. 그 중에서도 4절부터 7절은 핵심입니다. 한번 다같이 읽어볼까요.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지난주 말씀에서 사람들이 기도하지 않는 이유 중에 3번째로 “하나님이 나와 관계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사랑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본문의 ‘사랑’ 대신에 자신의 이름을 넣어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영제는 오래 참고 영제는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영제는 자랑하지 아니하며 …”그만하지요.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히 거짓말을 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래 참지도 못했고, 온유하지도 못했고, 자랑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의 근원 되십니다. ‘사랑’ 대신 ‘예수님’을 넣어 읽겠습니다.
“4 예수님은 오래 참고 예수님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예수님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이 여인은 주님께 향유를 부은 행동은 보이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다면 이런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사랑해서 교회에 오신 것입니다. 이 여인은 주님께 이런 말씀을 듣습니다.
본문 “48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 50 …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 여인은 영원토록 오늘의 일을 기억할 것이며 전할 것입니다. 사람은 사랑에 죽고 사랑에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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